백제 14대 근구수왕 = 수, 귀수, 근귀수, 귀류, 구소 (재위 375년 ~ 384년)
근초고왕의 맏아들이다.
태자 때부터 부왕을 도와 정복사업에 적극적인 활동을 하여 369년의 치양성(황해도 배천) 전투에서는 고구려군을 격파하여 5천여명을 포로로 하였으며, 특히 371년의 평양성 전투에서는 죄를 짓고 고구려로 도망갔다가 다시 귀순해온 사기의 군사기밀 제보로 고구려군을 대파하였다.
즉, 사기의 제보에 따라 고구려군의 허실을 파악한 뒤 고구려군 제일의 정예부대인 적기부대를 공격하여 크게 격파하였다.
승세를 잡아, 패주하는 고구려군을 추격하여 수곡성(황해도 신계)까지 진군한 뒤, 돌을 쌓아 경계를 표시하고서 회군하였다.
이때 더 북진하려 하자 장군 막고해가 “만족할 줄 알면 욕되지 않고, 그칠 줄 알면 위태롭지 않다.”는 노자의 도덕경의 구절을 인용하면서 만류하였다.
즉위 후에는 왕명에서 보듯이 근초고왕대에 확립된 초고왕계의 왕위계승권을 확고히 하였으며,장인인 진고도를 내신좌평으로 삼아 정사를 위임하였다.
그리고 남하하여 내려오는 고구려에 대해서는 공격과 수비 양면에서 적극적으로 대처하여, 한반도에서의 힘의 균형을 유지하였다.
369년(근초고왕 24)에 고구려 고국원왕이 보기 2만을 이끌고 백제를 침략해오자, 근초고왕은 태자로 하여금 이를 막게 하여 반걸양에 이르러 싸우려 하였다.
사기는 본시 백제 사람으로서 잘못하여 나라에서 사용하는 말의 발굽을 상하게 하고 벌을 받을까 두려워서 고구려로 도망하였는데, 이때 다시 백제로 돌아와 태자에게 이르기를 “고구려 군사가 비록 많기는 하나, 모두 숫자만 채운 허수아비입니다.
날쌔고 용감한 자들은 적기뿐이니, 만일 먼저 이를 깨뜨리면 나머지는 치지 않더라도 저절로 무너질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백제태자는 이 말을 좇아 진격해서 크게 적군을 깨뜨리고, 도망치는 것을 뒤따라 북으로 수곡성 서북에까지 이르렀다.
이때 장군 막고해가 간하기를 “일찍이 도가의 말을 들으니 ‘만족할 줄 알면 욕되지 않고, 그칠 줄 알면 위태롭지 않다. ’고 하였습니다.
지금 얻은 바가 많으니 어찌 더 구할 것이 있겠습니까.”라고 권하였던바 태자가 이를 옳다고 여겨 추격하기를 중지하고 돌을 쌓아 표지를 삼았다.
이로 미루어보아 그는 용감한 장군이었을 뿐만 아니라 도학에도 통달하였던 장수로 판단된다.
진고도
376년(근구수왕 2) 수상격인 내신좌평에 임명되면서, 왕으로부터 정사를 위임받았다.
이것은 당시 진씨가 왕비족으로서, 백제 지배 세력내에서 최고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백제 15대 침류왕 = (재위 384년~385년)
근구수왕의 맏아들이며, 어머니는 진씨로 추정되는 아이부인이다. 아신왕은 맏아들이다.
백제에서 처음으로 불교를 공인한 왕으로, 384년(침류왕 1) 9월 호승 마라난타가 동진에서 오자,
그를 맞아 궁중에 두고 예로써 받드니 백제에서 불법이 이로부터 시작되었다.
왕은 그의 말에 따라 불사를 일으켜서 봉행하였고, 이듬해에 한산에 백제 최초의 절을 짓고 10인의 백제인을 출가시켜 득도하게 하였다.
이러한 불교공인과 신봉은 그 무렵 뿌리 깊은 토속신앙에 젖어 있던 백제사회에 적지 않은 파문을 일으켰을 것이다.
이를테면 법흥왕대의 신라의 경우처럼 전통적인 토속신앙의 처지에서 불교를 이단으로 비난하는 여론이 일어나거나,
그에 따른 지배층 내부의 반발도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한 추정은 침류왕의 신변의 변화와도 연결될지 모른다. 한산에 불교사원을 세운 지 9개월 후에 재위 2년으로 갑자기 사망한 것으로 되어 있고, 그 다음 왕위는 아들이 아니라 동생 진사왕에게로 넘어갔기 때문이다.
백제 16대 진사왕 = 휘 (재위 385년~392년)
근구수왕의 둘째 아들이며 침류왕의 동생이다.
용맹하고 총명하고 지략이 많았다고 한다. 형 침류왕이 죽자 태자가 어리기 때문에 숙부인 진사가 즉위하게 되었다.
즉위 후 남진하여 내려오는 고구려와 치열한 전쟁을 벌였다.
386년(진사왕 2) 15세 이상의 백성을 동원하여 청목령(개성)에서 북으로는 팔곤성에, 서쪽으로는 바다에 이르는 관방을 쌓았다.
390년 달솔 진가모로 하여금 고구려의 도곤성을 공격하게 하여 200여명을 포로로 하는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고구려 광개토왕의 뛰어난 용병술에는 당하지 못하여, 392년 석현성(개풍군 청석동?) 등 10여성과 한수(한강) 이북의 여러 부락이 고구려군에 의하여 함락되었다.
또 천연의 요새지인 관미성(경기도 교동도)도 함락되었다.
이렇듯 고구려의 남진에 따른 군사적 압박으로 시종 고전을 면하지 못하였고 많은 영토를 상실하였다.
구원의 행궁에서 사냥하다가 죽은 것으로 되어 있으나, ‘일본서기’에 따르면 침류왕의 태자 아신의 세력에 의하여 제거된 것으로 보인다.
백제 17대 아신왕 = 아방왕, 아화왕 (재위 392년~405년)
성씨는 부여, 침류왕의 맏아들이다.
‘일본서기’에서는 아신이 태어난 날 밤에 기이한 광채한 빛이 사방을 뒤덮었다고 한다.
침류왕이 죽었을 때, 나이가 어리므로 숙부인 진사왕이 대신 즉위하였으나 392년 진사왕이 죽자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즉위한 직후인 393년 아신왕은 고구려에게 빼앗긴 영토를 회복하기 위해 장군 진무를 좌장으로 삼고 군사를 맏겼다.
진무는 1만의 병력으로 고구려가 점령한 관미성을 공격하였으나 고구려군이 굳게 지키고 보급이 여의치 않아 퇴각하였다.
394년, 395년에도 수곡성과 패수 등의 국경지대에서 고구려군과 싸웠으나 번번히 패배하였으며 이후에도 군사를 정비하고 쌍현성을 쌓는 등 전시 체제를 계속 유지하였다.
398년에 고구려 정벌을 시도하였으나 천문이 불길하다는 이유로 중지하였고 이듬해에도 정벌을 위해 군사를 징발하였고
계속되는 군역에 백성들이 고단하여 신라로 도망하는 경우가 많아 인구가 감소하였다고 한다.
한편 397년에는 왜에 태자 전지를 볼모로 보내 우호관계를 맺었으며 402년에도 사신을 보내고 이듬해 답사를 받는 등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403년에는 신라를 공격하였다. 405년에 사망하였다.
백제 18대 전지왕 = 여영, 영, 직지, 진지, 부여전 (재위 405∼420년)
아신왕의 맏아들이며 왕비는 팔수부인으로서 해씨집안 출신이다.
태자로 있을 때 부왕인 아신왕에 의하여 397년(아신왕 6)에 왜에 인질로 보내졌다.
이는 아신왕이 고구려의 남진압력에 대항하기 위하여 왜와의 화호를 도모하고 그 화호관계를 보다 돈독히 하고자 하는 목적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가 인질로 있을 때인 405년에 아신왕이 죽었다.
이때 아신왕의 동생 훈해가 섭정을 하면서 그의 환국을 기다렸는데, 막내동생 설례가 훈해을 죽이고 스스로 왕이 되었다.
부왕의 부음을 듣고 왜에서 귀국하던 중 한성인 해충으로부터 국내정세 변화와 경솔한 입국을 하지 말라는 간청을 받아들여
해도에 머물렀다.
그뒤 백성들이 설례를 죽이고 왕으로 추대하였다.
전지왕의 즉위는 해씨세력의 지지에 힘입은 바가 컸다.
그리하여 즉위 후 해충을 달솔로 삼고 한성의 조 1,000석을 하사하였고, 해수를 내법좌평, 해구를 병관좌평에 각각 임명하였다.
그리고 부인을 해씨집안에서 맞아들이게 되었다. 이로써, 이전의 진씨 왕비족시대는 퇴조를 걷게 되었다.
이와 더불어 서제인 여신을 내신좌평으로 삼았다가 408년(전지왕 4)에 상좌평으로 임명하면서 군국정사를 위임하였다.
이는 백제에 있어서 상좌평제의 시초가 되었다.
417년(전지왕 13) 7월에는 동부와 북부 2부의 15세 이상 되는 사람들을 징발하여 사구성을 쌓게 하고
병관좌평인 해구를 시켜 이 일을 감독하게 하였다.
해충
405년(아신왕 14) 9월 아신왕이 죽자, 당시 일본에 가 있던 태자 전지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면서 아신왕의 동생 훈해가 임시로 섭정을 하였는데, 막내동생 설례가 훈해를 죽이고 스스로 왕이 된 일이 발생하였다.
이때 이를 모르고 귀국하여 국경에 이르던 태자를 찾아가서 “대왕이 죽자 왕의 동생 설례가 훈해을 죽이고 스스로 왕이 되었으니 바라건대 태자는 경솔히 들어가지 말라.”고 충고하였다.
뒤에 국인이 설례를 죽이고 전지가 즉위하게 되자, 406년(전지왕 2) 9월에 달솔에 임명되고 한성의 조 1,000석을 하사받았다.
해수
407년(전지왕 3) 내법좌평에 임명되었다. 그의 발탁은 왜에서 환국한 전지왕의 즉위에 해씨가문이 결정적인 구실을 수행한 데 따른 응분의 배려라고 볼 수 있다.
429년(비유왕 3) 10월 상좌평 여신이 죽자 상좌평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정변을 통하여 왕족중심의 친위체제를 구축한 개로왕의 집권력 강화작업의 결과, 다른 해씨출신 귀족들과 함께 권력의 핵심에서 제거되었으리라고 보인다.
여신왕
아버지는 아신왕이며, 전지왕의 이복동생이다.
407년(전지왕 3) 백제의 최고관등인 좌평 중에서도 수석좌평인 내신좌평에 임명되었고, 408년 수상으로서 좌평들을 통솔하는 상좌평이 신설되면서 이에 취임하여,죽을 때까지 상좌평으로 재직하면서 백제의 군사와 국정을 통괄하였다.
따라서 전지왕, 구이신왕대를 통하여 백제정계의 실력자였다고 할 수 있으며,이것은 전지왕의 즉위에 공이 많았던 때문으로 추측되고 있다.
비류왕의 일본 재건(재위306~343)
비류왕(比流王)은 구수왕의 둘째 아들이다.
구수왕은 166년부터 일본에서 활약하고 214년부터 백제왕으로 재위하여 234년에 죽었다. 따라서 상식적으로 비류왕이 그 둘째 아들이라고 할 수 없다. 비류왕이 166년에 태어났으면180년을산것이된다.따라서구이왕의아들이거나, 구수왕의 손자로본다.일본에진출한것으로보아서구수왕의손자로고려된다.
성품이 너그럽고 인자하여 남을 사랑하였고 또 힘이 세어 활을 잘 쏘았다.
오랫동안 백성들 사이民間에 있었지만 명성은 널리 퍼졌다.
분서왕이 죽자 비록 아들이 있었으나 모두 어려서 왕위에 오를 수 없었다.
이로써 비류가 신하와 백성들의 추대를 받아 왕위에 올랐다.
5년(308) 봄 정월 초하루 병자에 일식이 있었다.
나사(NASA) 추산에 의하면 양력으로 1월 31일인데 남반구 일식이라서 관측이 불가능하다.추산으로기록한일식으로보인다. 0306 Jan 31 02:46 T 84 -0.374 1.041 39.1S 147.9E 68 147 03m23s
9년(312) 봄 2월에 사신을 보내 순행하면서 백성의 질병과 고통을 위문하고, 홀아비, 홀어미, 부모없는 어린 아이, 자식없는 늙은 이鰥寡孤獨로서 스스로 생활할 수 없는 자에게 곡식을 한 사람당 세 섬을 주었다.
여름 4월에 동명묘(東明廟)에 배알하였다. 해구(解仇)를 병관좌평(兵官佐平)으로 삼았다.
10년(313) 봄 정월에 남쪽 교외南郊에서 천지에 제사지냈는 데 왕이 제물로 쓸 짐승을 친히 베었다.
13년(316) 봄에 가물었다. 큰 별이 서쪽으로 흘러갔다. 여름 4월에 서울王都의 우물물이 넘치더니 검은 용이 그 속에서 나타났다.
17년(320) 가을 8월에 궁궐 서쪽에 활쏘는 돈대射臺를 쌓고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활쏘기를 익혔다.
18년(321) 봄 정월에 왕의 서제(庶弟) 우복(優福)을 내신좌평(內臣佐平)으로 삼았다.
가을 7월에 금성太白이 낮에 나타났다. 나라 남쪽에 누리가 곡식을 해쳤다.
22년(325) 겨울 10월에 하늘에서 소리가 들렸는데 풍랑(風浪)이 서로 부딪치는 것과 같았다. 11월에 왕이 구원(狗原) 북쪽에서 사냥하여 손수 사슴을 쏘아 맞혔다.
24년(327) 가을 7월에 붉은 까마귀와 같은 구름이 해를 끼고 있었다. 9월에 내신좌평 우복이 북한성(北漢城)을 근거로 하여 반란을 일으키자 왕이 군사를 발동하여 토벌하였다.
내신좌평 우복이 근거한 북한성이 대동강 평양성이니 비류왕의 수도가 요양시 비사성이었을 것이다. 550년에 대동강 평양이 백제군에게 함락되어서 고구려 양강왕이 쫓겨간 곳이 비진류도(比津留都)라고 하였다. 바로 요양시 태자하 비사성을 의미한다.
28년(331) 봄과 여름에 크게 가물어서 풀과 나무가 마르고 강물이 말랐다. 7월에 이르러서야 비가 왔다. 이 해에 기근이 들어 사람들이 서로 잡아먹었다.
30년(333) 여름 5월에 별이 떨어졌다. 왕궁에 불이 나서 민가까지 연달아 태웠다. 가을 7월에 궁실을 수리하였다. 진의(眞義)를 내신좌평으로 삼았다. 겨울 12월에 우뢰가 쳤다.
32년(335) 겨울 10월 초하루 을미에 일식이 있었다. 나사(NASA) 추산에 의하면 양력으로 12월 31일인데 한반도는 밤중이라서 관측이 불가능하다.추산으로기록한일식으로보인다. 0335 Dec 31 21:28 P 95 1.143 0.715 64.7N 164.9W 0
33년(336) 봄 정월 신사에 살별彗星이 규(奎) 별자리에 나타났다.
34년(337) 봄 2월에 신라가 사신을 보내 와서 예방하였다.
41년(344) 겨울 10월에 왕이 죽었다.
비류대왕의 태자와 쌍동이 왕자 중의 형(근초고왕의 형)이 일본에서 전사하였다. 걸대왕과 함께 일본에 온 비류대왕의 아들들이 많았던 것이다.
따라써 《신찬성씨록》에는 비류대왕의 후손이 특히 많다.춘야련春野連 면씨面氏 문사씨汶斯氏 강옥공岡屋公 등이 비류왕의 후손이다. 비류왕 즉위초에 일본 재건을 위한 진출이 활발하였다.
선비족 전연국의 강성
313년 고구려가 백제 서쪽의 낙랑을 뺏어갔다. 314년에 대방, 315년에 현도를 뺏어갔다. 백제 분서왕을 죽인 백제 낙랑태수 장통이 빼앗긴 것이다.
그러나 318년고구려의전연수도 대극성공격은실패로돌아가고,대릉하의 양평과요하하구 서안의평곽성 등 요동군은 전연국이다시 가졌는데 그 선봉이 백제인 장통이었다.
333년 전연의 모용외가 죽고 모용황이 승계하였다. 이때작은아들모용인이반란을일으켜평곽성에서모용황과대치하였다.
336년모용황은창려로부터얼어있는 바다를도보로건너서평곽성으로진군하여모용인을토벌하였다.
336년 6월에 단료段遼의 동생 단란段蘭이 곡수정에 주둔하여 전연의 유성을 공격하다가 실패한다. 모용황이 출병하니 단란은 후퇴한 후에 다시 유성으로 돌아오는데 전연군은 이에 대비하여 유성 부근에 매복柳城左右設伏以待했다가치기로하는데매복한곳이마도산馬兜山이었다. 그리하여 전연군이 승리하였다.
전한시대 유성柳城에는 마수산이 서남쪽에 있었다.馬首山在西南.
이는 요동국의 요서군 유성이었던 조양시가 아니다. 전한시대 유성은 북쪽에서 삼류수가 흘러서 바다로 들어가기 때문에 해안이 가까운 곳이니參柳水北入海 이는 조양시가 될 수 없다.
마수산과 마도산이 같은 것으로 보인다. 마도산馬都山 전투는 734년 발해가 당나라와 전쟁을 한 곳이며이는신당서오승체전烏承?에나온다.
거란전에서 732년 거란이 당나라를 칠 때는 유관도산?關-都山전투라고하였으니바로 임유관앞이다. 한편 [대진국본기]에는 요서의 대산(帶山)이라고 하였다. 이는 수나라가유성(산해관)에설치한 요서군의 대방산과 같은 것이다.
遼西郡。有帶方山、禿黎山、?鳴山、松山。有?水、白狼水。
따라서 모용황과 단란이 싸운 유성은 요동국 요서군 유성이 아니라 한나라 요서군 유성이었고 뒤에 당나라 유성, 평로성이었다.
338년 4월 조왕(趙王) 석호(石虎)가 수십만 대군으로 전연국 대극성을 치러왔는데모용황은이를막아냈고석호에게항복했던연나라장수들은죽거나고구려로도망하였다. 이때 조군을 물리친 모용각이 341년에 평곽에 부임하여서 고구려, 백제를 막았다.
339년 모용황은 동진의 책명을 받아서 결호하였다.
342년 10월 모용황은 조양시 화룡성으로 천도하였다. 조나라가 바다로 침입해오기 때문이고333년에는모용인도바다로극성을 치려고했었다.
342년 11월에 모용황은 고구려 환도성을 함락시키고 5만명을 끌어왔다. 화룡성의 배후를 안정시킨 것이다.
345년 1월 연국왕 모용황은 용성에 끌어모은 타부족인 구려, 백제,우문부,단부인 들로 고민하여 이들을 서부로 옮긴다.
句麗、百濟及宇文、段部之人,皆兵勢所徙,非如中國慕義而至,咸有思歸之心.今戶垂十萬,狹湊都城,恐方將?國家深害,宜分其兄弟宗屬,徙于西境諸城,撫之以恩,檢之以法,
백제인들이 전연국 모용황에게 잡혀간 기록은 따로 없다. 그러나 313년에 고구려에 쫓겨서 모용외에게 투신한 낙랑태수 장통이 바로 백제인들이었던 것이다.
345년 10월 모용각은 고구려 남소성을 빼앗았다. 慕容恪攻高句麗南蘇,克之,置戍而還。
346년 1월에는 모용준과 모용각이 부여를 쳐서 그 왕 여현(餘玄)을 사로잡고 5만여명을 끌어갔다.
본래부여는녹산에있었는데백제에게침략을받아서연나라근처에왔다고하였다.夫餘居於鹿山,爲百
濟所侵,部落衰散,西徙近燕,而不設備。
부여를 遂拔夫餘,虜其王玄及部落五萬餘口而還。
녹산은 발해 녹군현이었던 요나라 건주로서 보면 의무려산 남단이다. 의라왕이 이곳에 있다가 일본에 가서 숭신천황이 되었고, 백제 분서왕의 낙랑서현 공략 때에 이 곳의 부여는 백제에 흡수되었다.
따라서모용황이친부여는곧백제다.
이때 끌려간 부여왕의이름도 백제 왕자 이름으로 고려되는 여현(餘玄)이다.여현은모용황의사위가되었고여현의아들은여울(餘蔚)인데부여왕자라고칭했으며,370년 부견이 전연국을멸망시킬 때에전연국 수도 업성 문을 열어 부견을 들어오게 하였고,384년모용수가 후연국을 세우니 후연국의재상까지 되었다.
후연은 요하 하구 평곽으로부터 요동반도 남단의 복주 부여성을 친 것으로 고려된다.
전연국으로 끌려간 여현은 비류왕의 아들이었을 것이다.
걸왕의 일본 진출(재위343-346)
걸왕(契王)은 분서왕의 맏아들이다. 타고난 자질이 강직하고 용감하였으며 말타고 활쏘기를 잘하였다. 처음 분서왕이 죽었을 때 계왕은 어려서 왕위에 오르지 못했다. 비류왕이 재위 41년에 죽자 즉위하였다.
3년(346) 가을 9월에 왕이 죽었다.
283년 왜여왕 일여(개화천황;244~283)의 사후에 사비왕의 아들이자 일여의 숙부인 효안천황(222~298)이 즉위하였다.
그러나 중국 요녕성遼寧省 요서遼西에 있던 부여夫餘에서 285년 선비족의 침략을 받아 일본으로 새로 도래한 부여 의려왕依慮王이 백제일본을빼앗았다.의려왕은 효령천황孝靈天皇(261~316)이 되었다. 효안천황은 오오사카의 대화를 빼앗기고 미와산으로 피신하였다.
미와산三輪山의 전설에 의하면 오호모노누시大物主神이라고 하였고, 이때 미와산의 이쿠타마요리히메活玉依媛(235~318)와 대물주신이 만나서 오호타타네코意富多多泥古가 태어났다.
일본에 제 12세 천황으로 기록된 경행천황景行天皇(273~358)은 백제 분서대왕汾西大王(재위300~304)의 아들 걸대왕契大王(재위343~346년)이다.
걸대왕은 분서대왕의 암살 당시에 32세나 되었으니, [삼국사기]기록과 같이 어려서 즉위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일본에 있어서 백제대왕으로 즉위하지 못했고, 대신에 요양시에 위치했던 비류대왕이 즉위하였다.
오호야마토타라시히코日本足彦國押人天皇인 효안천황(222~298; 백제 사비왕의 아들)이 298년에 서거하였고,
그의 뒤를 이어서 백제 걸대왕이 일본에 가서 오호타라시히코大帶日子가 되었다. 타라시帶는대방에서온것을의미한다.
부여 의라왕의 침략에 의해 책계왕責稽王이 300년에 전사하고, 뒤이어 백제의 일본 땅을 부여 의라왕이 숭신천황이 되어서 침탈하였으니,
책계대왕의 손자인 걸대왕, 즉 경행천황은 복수하기 위하여 대규모 병력으로 도일하였다.따라서 경행천황의 자손이 80이나 된다고 하였다.
그 80명중에서 태자太子라고 불린 사람은 셋이었는데, 성무천황成務天皇이 된 와카타라시히코若帶日子命(326~370)와 야마토타케루 즉 일본무존日本武尊으로 일컬어지는 야마토오구나倭男具那(295~333) 그리고 이호키노이리히코五百木入日子命(273~318) 등이다.
이 중에서 성무천황이 된 와카타라시히코若帶日子命(326~370)만이 경행천황의 아들이다.
두번째인 일본무존日本武尊(295~333)은 백제 비류대왕의 쌍둥이 아들중 동생인 근초고대왕近肖古大王이다.
세번째인 이호키노이리히코五百木入日子命(273~318)는 비류대왕의 태자였다. 그는 호무다노미와카 品陀眞若(305~361)을 낳았고 그의 세 딸이 응신천황(320~394)과 결혼하였다. 그의 세 딸은 타카기노이리히메高木入日賣命(318~366)와 나카쯔히메中日賣命, 오토히메弟日賣命(324~368)인데, 응신천황(320~394)과 결혼한 오토히메가 384년생일 가능성은 없으므로 324년출생이 확실하고, 그의 조부인 이호키노이리히코五百木入日子命(273~318)는 273년생이 되며 경행천황과 동갑이니 경행천황의 아들이 될 수 없다.
따라서 이호키노이리히코五百木入日子命(273~318)는 비류대왕의 장왕자로서 백제 태자이며, 백제에서 숭신천황을 치기 위해 건너온 정벌군의 대장이었고, 그는 318년 6월에 숭신천황과 전투하다가 전사한 것으로 고려된다.
비류대왕의 태자와 쌍동이 왕자 중의 형이 일본에서 전사하였다. 걸대왕과 함께 일본에 온 비류대왕의 아들들이 많았던 것이다.
따라써 《신찬성씨록》에는 비류대왕의 후손이 특히 많다.춘야련春野連 면씨面氏 문사씨汶斯氏 강옥공岡屋公 등이 비류왕의 후손이다.
걸대왕이 이나비노오호이라쯔메伊那毘能若?女命(278~318)을 통하여 얻은 야마토네코倭根子命(302~348)와 카무쿠시神櫛王命(308~350)가 경행천황이 도일하여 초기에 얻은 아들들이다. 그보다 큰 아들로 기록된 쌍둥이 두 아들인 오호우스大?命(295~318)와 일본무존日本武尊(295~333)은 비류대왕比流大王(재위 306~343)의 아들들이다.
일본에서 전사한 근초고왕의 형인 오호우스大?命(295~318)묘와 그를 모시는 원투신사. 아이지현 도요다(豊田市)시에 있다.
구이대왕仇台大王(재위 234~238)의 아들 비류대왕이 343년에 죽고, 분서대왕의 아들 걸대왕契王이 343년에 백제로 돌아와 백제대왕이 되었다.
그러나 346년 초에 선비족 전연국의 모용황이 백제 부여부를 쳐서 부여왕 여현餘玄과 5만명의 포로를 끌어갔다.
342년 고구려 고국원왕의 환도성을 함락하고 5만명을 끌어간 모용황에 의해서 백제도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백제 걸대왕은 선비족에 대한 패전의 책임을 져서, 재위 3년만에 강제 퇴위 당하고 일본으로 다시 떠나가서 경행천황景行天皇이 되었는데, 전쟁에서 패전하면 왕이 죽거나 물러나는 것이 본래 부여인의 국법이다.
백제 걸왕인 경행천황은 일본 정벌에서 거울을 앞세운 것으로 고려되는데, 경행천황의 지시를 받고 정벌에 나선 일본무존은 배를 타고 갈 때에 배 위에 큰 거울을 걸었던 사실이 있고, 계契, 걸契과 경景의 일본 발음이 “게이”로서 같고 “걸”은 우리말 거울 옛 발음일 수도 있다.
[일본서기]에서 경행천황의 이름은 오시로(於-斯呂, 忍-代)이며 그의 궁성 이름은 히시로日代 궁이었다. 시로는 흰색白의 발음과도 같다.
시로斯呂는 대代로도 썼지만, 백제 걸왕의 걸, 계契를 일본에서는 《게이》로도 읽지만 《시루시》라고도 발음했다.
[일본서기/인덕천황기]의 원년 기록에서 후엽지계後葉之契의 契는 “시루시(=증표證票)”로 읽었다.
따라서 위덕왕이 된 백제 창왕昌王과 같이 걸대왕의 본래 이름은 여설餘契, 혹은 여걸餘契이 되고일본에서는 시로왕, 후에는 게이고우천황景行天皇으로 부르게 되었다.
경행천황은 효안천황처럼 이름 앞에 타라시帶를 경칭으로 썼는데, 경행천황은 키가 크고 특히 다리가 길었다고 《고사기》에 기록되었다. 그러나대는백제 대방 출신을의미하는것이다.
경행천황이 죽은 일본내 궁성 이름이 근기近畿의 시가국滋賀國성이다. 칠지도에 기록된 백자국百慈國의 위치로 고려된다.
경행천황의 높은 이름은 그의 일본 정벌에 의한 것인데, 규슈를 탈환한 것이다. 또한 비류대왕의 쌍둥이 둘째 아들, 일본무존日本武尊, 즉 근구수대왕近仇首大王(295~384)이 일본 본토를 정벌하였다.
또한 걸대왕의 마지막 영지는 오사카大阪의 대화大和가 아니라 시가국滋賀國 다카치호궁高穴穗宮이므로, 343년 백제 걸대왕이 되었다가 346년 근초고대왕에게 양위하고 백제에서 되돌아왔을 때에는 왜국의 대표자에서도 밀려난 것이다.
경행천황은 근초고왕자 형제들과 일본 정벌에 동참했다가 아이지현 풍전시에서 살았고, 근초고왕자가 333년에 백제로 돌아온 후에 일본 천황이 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343년에 백제대왕으로 왔었고 3년만에 실각하여 다시 일본으로 돌아간 후에는교토에살았던것이다.
이때 일본은 근초고왕의 직할로서 길비(吉備) 주재 대신인 주길대신이 오오사카를 다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