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역사와 문화2013. 9. 14. 19:06

 

 

 

백제 14대 근구수왕 = 수, 귀수, 근귀수, 귀류, 구소 (재위 375년 ~ 384년)

근초고왕의 맏아들이다.

태자 때부터 부왕을 도와 정복사업에 적극적인 활동을 하여 369년의 치양성(황해도 배천) 전투에서는 고구려군을 격파하여 5천여명을 포로로 하였으며, 특히 371년의 평양성 전투에서는 죄를 짓고 고구려로 도망갔다가 다시 귀순해온 사기의 군사기밀 제보로 고구려군을 대파하였다.

즉, 사기의 제보에 따라 고구려군의 허실을 파악한 뒤 고구려군 제일의 정예부대인 적기부대를 공격하여 크게 격파하였다.

승세를 잡아, 패주하는 고구려군을 추격하여 수곡성(황해도 신계)까지 진군한 뒤, 돌을 쌓아 경계를 표시하고서 회군하였다.

이때 더 북진하려 하자 장군 막고해가 “만족할 줄 알면 욕되지 않고, 그칠 줄 알면 위태롭지 않다.”는 노자의 도덕경의 구절을 인용하면서 만류하였다.

즉위 후에는 왕명에서 보듯이 근초고왕대에 확립된 초고왕계의 왕위계승권을 확고히 하였으며,장인인 진고도를 내신좌평으로 삼아 정사를 위임하였다.

그리고 남하하여 내려오는 고구려에 대해서는 공격과 수비 양면에서 적극적으로 대처하여, 한반도에서의 힘의 균형을 유지하였다.

 

369년(근초고왕 24)에 고구려 고국원왕이 보기 2만을 이끌고 백제를 침략해오자, 근초고왕은 태자로 하여금 이를 막게 하여 반걸양에 이르러 싸우려 하였다.

사기는 본시 백제 사람으로서 잘못하여 나라에서 사용하는 말의 발굽을 상하게 하고 벌을 받을까 두려워서 고구려로 도망하였는데, 이때 다시 백제로 돌아와 태자에게 이르기를 “고구려 군사가 비록 많기는 하나, 모두 숫자만 채운 허수아비입니다.

날쌔고 용감한 자들은 적기뿐이니, 만일 먼저 이를 깨뜨리면 나머지는 치지 않더라도 저절로 무너질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백제태자는 이 말을 좇아 진격해서 크게 적군을 깨뜨리고, 도망치는 것을 뒤따라 북으로 수곡성 서북에까지 이르렀다.

이때 장군 막고해가 간하기를 “일찍이 도가의 말을 들으니 ‘만족할 줄 알면 욕되지 않고, 그칠 줄 알면 위태롭지 않다. ’고 하였습니다.

지금 얻은 바가 많으니 어찌 더 구할 것이 있겠습니까.”라고 권하였던바 태자가 이를 옳다고 여겨 추격하기를 중지하고 돌을 쌓아 표지를 삼았다.

이로 미루어보아 그는 용감한 장군이었을 뿐만 아니라 도학에도 통달하였던 장수로 판단된다.

 

진고도

376년(근구수왕 2) 수상격인 내신좌평에 임명되면서, 왕으로부터 정사를 위임받았다.

이것은 당시 진씨가 왕비족으로서, 백제 지배 세력내에서 최고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백제 15대 침류왕 = (재위 384년~385년)

근구수왕의 맏아들이며, 어머니는 진씨로 추정되는 아이부인이다. 아신왕은 맏아들이다.

백제에서 처음으로 불교를 공인한 왕으로, 384년(침류왕 1) 9월 호승 마라난타가 동진에서 오자,

그를 맞아 궁중에 두고 예로써 받드니 백제에서 불법이 이로부터 시작되었다.

왕은 그의 말에 따라 불사를 일으켜서 봉행하였고, 이듬해에 한산에 백제 최초의 절을 짓고 10인의 백제인을 출가시켜 득도하게 하였다.

이러한 불교공인과 신봉은 그 무렵 뿌리 깊은 토속신앙에 젖어 있던 백제사회에 적지 않은 파문을 일으켰을 것이다.

이를테면 법흥왕대의 신라의 경우처럼 전통적인 토속신앙의 처지에서 불교를 이단으로 비난하는 여론이 일어나거나,

그에 따른 지배층 내부의 반발도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한 추정은 침류왕의 신변의 변화와도 연결될지 모른다. 한산에 불교사원을 세운 지 9개월 후에 재위 2년으로 갑자기 사망한 것으로 되어 있고, 그 다음 왕위는 아들이 아니라 동생 진사왕에게로 넘어갔기 때문이다.

 

백제 16대 진사왕 = (재위 385년~392년)

근구수왕의 둘째 아들이며 침류왕의 동생이다.

용맹하고 총명하고 지략이 많았다고 한다. 형 침류왕이 죽자 태자가 어리기 때문에 숙부인 진사가 즉위하게 되었다.

즉위 후 남진하여 내려오는 고구려와 치열한 전쟁을 벌였다.

386년(진사왕 2) 15세 이상의 백성을 동원하여 청목령(개성)에서 북으로는 팔곤성에, 서쪽으로는 바다에 이르는 관방을 쌓았다.

390년 달솔 진가모로 하여금 고구려의 도곤성을 공격하게 하여 200여명을 포로로 하는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고구려 광개토왕의 뛰어난 용병술에는 당하지 못하여, 392년 석현성(개풍군 청석동?) 등 10여성과 한수(한강) 이북의 여러 부락이 고구려군에 의하여 함락되었다.

또 천연의 요새지인 관미성(경기도 교동도)도 함락되었다.

이렇듯 고구려의 남진에 따른 군사적 압박으로 시종 고전을 면하지 못하였고 많은 영토를 상실하였다.

구원의 행궁에서 사냥하다가 죽은 것으로 되어 있으나, ‘일본서기’에 따르면 침류왕의 태자 아신의 세력에 의하여 제거된 것으로 보인다.

 

백제 17대 아신왕 = 아방왕, 아화왕 (재위 392년~405년)

성씨는 부여, 침류왕의 맏아들이다.

‘일본서기’에서는 아신이 태어난 날 밤에 기이한 광채한 빛이 사방을 뒤덮었다고 한다.

침류왕이 죽었을 때, 나이가 어리므로 숙부인 진사왕이 대신 즉위하였으나 392년 진사왕이 죽자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즉위한 직후인 393년 아신왕은 고구려에게 빼앗긴 영토를 회복하기 위해 장군 진무를 좌장으로 삼고 군사를 맏겼다.

진무는 1만의 병력으로 고구려가 점령한 관미성을 공격하였으나 고구려군이 굳게 지키고 보급이 여의치 않아 퇴각하였다.

394년, 395년에도 수곡성과 패수 등의 국경지대에서 고구려군과 싸웠으나 번번히 패배하였으며 이후에도 군사를 정비하고 쌍현성을 쌓는 등 전시 체제를 계속 유지하였다.

398년에 고구려 정벌을 시도하였으나 천문이 불길하다는 이유로 중지하였고 이듬해에도 정벌을 위해 군사를 징발하였고

계속되는 군역에 백성들이 고단하여 신라로 도망하는 경우가 많아 인구가 감소하였다고 한다.

한편 397년에는 왜에 태자 전지를 볼모로 보내 우호관계를 맺었으며 402년에도 사신을 보내고 이듬해 답사를 받는 등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403년에는 신라를 공격하였다. 405년에 사망하였다.

 

백제 18대 전지왕 = 여영, 영, 직지, 진지, 부여전 (재위 405∼420년)

아신왕의 맏아들이며 왕비는 팔수부인으로서 해씨집안 출신이다.

태자로 있을 때 부왕인 아신왕에 의하여 397년(아신왕 6)에 왜에 인질로 보내졌다.

이는 아신왕이 고구려의 남진압력에 대항하기 위하여 왜와의 화호를 도모하고 그 화호관계를 보다 돈독히 하고자 하는 목적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가 인질로 있을 때인 405년에 아신왕이 죽었다.

이때 아신왕의 동생 훈해가 섭정을 하면서 그의 환국을 기다렸는데, 막내동생 설례가 훈해을 죽이고 스스로 왕이 되었다.

부왕의 부음을 듣고 왜에서 귀국하던 중 한성인 해충으로부터 국내정세 변화와 경솔한 입국을 하지 말라는 간청을 받아들여

해도에 머물렀다.

그뒤 백성들이 설례를 죽이고 왕으로 추대하였다.

전지왕의 즉위는 해씨세력의 지지에 힘입은 바가 컸다.

그리하여 즉위 후 해충을 달솔로 삼고 한성의 조 1,000석을 하사하였고, 해수를 내법좌평, 해구를 병관좌평에 각각 임명하였다.

그리고 부인을 해씨집안에서 맞아들이게 되었다. 이로써, 이전의 진씨 왕비족시대는 퇴조를 걷게 되었다.

이와 더불어 서제인 여신을 내신좌평으로 삼았다가 408년(전지왕 4)에 상좌평으로 임명하면서 군국정사를 위임하였다.

이는 백제에 있어서 상좌평제의 시초가 되었다.

417년(전지왕 13) 7월에는 동부와 북부 2부의 15세 이상 되는 사람들을 징발하여 사구성을 쌓게 하고

병관좌평인 해구를 시켜 이 일을 감독하게 하였다.

 

해충

405년(아신왕 14) 9월 아신왕이 죽자, 당시 일본에 가 있던 태자 전지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면서 아신왕의 동생 훈해가 임시로 섭정을 하였는데, 막내동생 설례가 훈해를 죽이고 스스로 왕이 된 일이 발생하였다.

이때 이를 모르고 귀국하여 국경에 이르던 태자를 찾아가서 “대왕이 죽자 왕의 동생 설례가 훈해을 죽이고 스스로 왕이 되었으니 바라건대 태자는 경솔히 들어가지 말라.”고 충고하였다.

뒤에 국인이 설례를 죽이고 전지가 즉위하게 되자, 406년(전지왕 2) 9월에 달솔에 임명되고 한성의 조 1,000석을 하사받았다.

 

해수

407년(전지왕 3) 내법좌평에 임명되었다. 그의 발탁은 왜에서 환국한 전지왕의 즉위에 해씨가문이 결정적인 구실을 수행한 데 따른 응분의 배려라고 볼 수 있다.

429년(비유왕 3) 10월 상좌평 여신이 죽자 상좌평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정변을 통하여 왕족중심의 친위체제를 구축한 개로왕의 집권력 강화작업의 결과, 다른 해씨출신 귀족들과 함께 권력의 핵심에서 제거되었으리라고 보인다.

 

여신왕

아버지는 아신왕이며, 전지왕의 이복동생이다.

407년(전지왕 3) 백제의 최고관등인 좌평 중에서도 수석좌평인 내신좌평에 임명되었고, 408년 수상으로서 좌평들을 통솔하는 상좌평이 신설되면서 이에 취임하여,죽을 때까지 상좌평으로 재직하면서 백제의 군사와 국정을 통괄하였다.

따라서 전지왕, 구이신왕대를 통하여 백제정계의 실력자였다고 할 수 있으며,이것은 전지왕의 즉위에 공이 많았던 때문으로 추측되고 있다.

 

 

비류왕의 일본 재건(재위306~343)

비류왕(比流王)은 구수왕의 둘째 아들이다.
구수왕은 166년부터 일본에서 활약하고 214년부터 백제왕으로 재위하여 234년에 죽었다. 따라서 상식적으로 비류왕이 그 둘째 아들이라고 할 수 없다. 비류왕이 166년에 태어났으면180년을산것이된다.따라서구이왕의아들이거나, 구수왕의 손자로본다.일본에진출한것으로보아서구수왕의손자로고려된다.

성품이 너그럽고 인자하여 남을 사랑하였고 또 힘이 세어 활을 잘 쏘았다.
오랫동안 백성들 사이民間에 있었지만 명성은 널리 퍼졌다.
분서왕이 죽자 비록 아들이 있었으나 모두 어려서 왕위에 오를 수 없었다.
이로써 비류가 신하와 백성들의 추대를 받아 왕위에 올랐다.

5년(308) 봄 정월 초하루 병자에 일식이 있었다.
나사(NASA) 추산에 의하면 양력으로 1월 31일인데 남반구 일식이라서 관측이 불가능하다.추산으로기록한일식으로보인다. 0306 Jan 31 02:46 T 84 -0.374 1.041 39.1S 147.9E 68 147 03m23s

9년(312) 봄 2월에 사신을 보내 순행하면서 백성의 질병과 고통을 위문하고, 홀아비, 홀어미, 부모없는 어린 아이, 자식없는 늙은 이鰥寡孤獨로서 스스로 생활할 수 없는 자에게 곡식을 한 사람당 세 섬을 주었다.
여름 4월에 동명묘(東明廟)에 배알하였다. 해구(解仇)를 병관좌평(兵官佐平)으로 삼았다.

10년(313) 봄 정월에 남쪽 교외南郊에서 천지에 제사지냈는 데 왕이 제물로 쓸 짐승을 친히 베었다.

13년(316) 봄에 가물었다. 큰 별이 서쪽으로 흘러갔다. 여름 4월에 서울王都의 우물물이 넘치더니 검은 용이 그 속에서 나타났다.
17년(320) 가을 8월에 궁궐 서쪽에 활쏘는 돈대射臺를 쌓고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활쏘기를 익혔다.

18년(321) 봄 정월에 왕의 서제(庶弟) 우복(優福)을 내신좌평(內臣佐平)으로 삼았다.
가을 7월에 금성太白이 낮에 나타났다. 나라 남쪽에 누리가 곡식을 해쳤다.

22년(325) 겨울 10월에 하늘에서 소리가 들렸는데 풍랑(風浪)이 서로 부딪치는 것과 같았다. 11월에 왕이 구원(狗原) 북쪽에서 사냥하여 손수 사슴을 쏘아 맞혔다.

24년(327) 가을 7월에 붉은 까마귀와 같은 구름이 해를 끼고 있었다. 9월에 내신좌평 우복이 북한성(北漢城)을 근거로 하여 반란을 일으키자 왕이 군사를 발동하여 토벌하였다.

내신좌평 우복이 근거한 북한성이 대동강 평양성이니 비류왕의 수도가 요양시 비사성이었을 것이다. 550년에 대동강 평양이 백제군에게 함락되어서 고구려 양강왕이 쫓겨간 곳이 비진류도(比津留都)라고 하였다. 바로 요양시 태자하 비사성을 의미한다.

28년(331) 봄과 여름에 크게 가물어서 풀과 나무가 마르고 강물이 말랐다. 7월에 이르러서야 비가 왔다. 이 해에 기근이 들어 사람들이 서로 잡아먹었다.

30년(333) 여름 5월에 별이 떨어졌다. 왕궁에 불이 나서 민가까지 연달아 태웠다. 가을 7월에 궁실을 수리하였다. 진의(眞義)를 내신좌평으로 삼았다. 겨울 12월에 우뢰가 쳤다.

32년(335) 겨울 10월 초하루 을미에 일식이 있었다. 나사(NASA) 추산에 의하면 양력으로 12월 31일인데 한반도는 밤중이라서 관측이 불가능하다.추산으로기록한일식으로보인다. 0335 Dec 31 21:28 P 95 1.143 0.715 64.7N 164.9W 0

33년(336) 봄 정월 신사에 살별彗星이 규(奎) 별자리에 나타났다.
34년(337) 봄 2월에 신라가 사신을 보내 와서 예방하였다.
41년(344) 겨울 10월에 왕이 죽었다.

비류대왕의 태자와 쌍동이 왕자 중의 형(근초고왕의 형)이 일본에서 전사하였다. 걸대왕과 함께 일본에 온 비류대왕의 아들들이 많았던 것이다.
따라써 《신찬성씨록》에는 비류대왕의 후손이 특히 많다.춘야련春野連 면씨面氏 문사씨汶斯氏 강옥공岡屋公 등이 비류왕의 후손이다. 비류왕 즉위초에 일본 재건을 위한 진출이 활발하였다.

 

선비족 전연국의 강성

313년 고구려가 백제 서쪽의 낙랑을 뺏어갔다. 314년에 대방, 315년에 현도를 뺏어갔다. 백제 분서왕을 죽인 백제 낙랑태수 장통이 빼앗긴 것이다.

그러나 318년고구려의전연수도 대극성공격은실패로돌아가고,대릉하의 양평과요하하구 서안의평곽성 등 요동군은 전연국이다시 가졌는데 그 선봉이 백제인 장통이었다.
333년 전연의 모용외가 죽고 모용황이 승계하였다. 이때작은아들모용인이반란을일으켜평곽성에서모용황과대치하였다.

336년모용황은창려로부터얼어있는 바다를도보로건너서평곽성으로진군하여모용인을토벌하였다.
336년
6월에 단료段遼의 동생 단란段蘭이 곡수정에 주둔하여 전연의 유성을 공격하다가 실패한다. 모용황이 출병하니 단란은 후퇴한 후에 다시 유성으로 돌아오는데 전연군은 이에 대비하여 유성 부근에 매복柳城左右設伏以待했다가치기로하는데매복한곳이마도산馬兜山이었다. 그리하여 전연군이 승리하였다.
전한시대 유성柳城에는 마수산이 서남쪽에 있었다.馬首山在西南.

이는 요동국의 요서군 유성이었던 조양시가 아니다. 전한시대 유성은 북쪽에서 삼류수가 흘러서 바다로 들어가기 때문에 해안이 가까운 곳이니參柳水北入海 이는 조양시가 될 수 없다.
마수산과 마도산이 같은 것으로 보인다. 마도산馬都山 전투는 734년 발해가 당나라와 전쟁을 한 곳이며이는신당서오승체전烏承?에나온다.

거란전에서 732년 거란이 당나라를 칠 때는 유관도산?關-都山전투라고하였으니바로 임유관앞이다. 한편 [대진국본기]에는 요서의 대산(帶山)이라고 하였다. 이는 수나라가유성(산해관)에설치한 요서군의 대방산과 같은 것이다.
遼西郡。有帶方山、禿黎山、?鳴山、松山。有?水、白狼水。

따라서 모용황과 단란이 싸운 유성은 요동국 요서군 유성이 아니라 한나라 요서군 유성이었고 뒤에 당나라 유성, 평로성이었다.
338년 4월 조왕(趙王) 석호(石虎)가 수십만 대군으로 전연국 대극성을 치러왔는데모용황은이를막아냈고석호에게항복했던연나라장수들은죽거나고구려로도망하였다. 이때 조군을 물리친 모용각이 341년에 평곽에 부임하여서 고구려, 백제를 막았다.
339년 모용황은 동진의 책명을 받아서 결호하였다.
342년 10월 모용황은 조양시 화룡성으로 천도하였다. 조나라가 바다로 침입해오기 때문이고333년에는모용인도바다로극성을 치려고했었다.
342년 11월에 모용황은 고구려 환도성을 함락시키고 5만명을 끌어왔다. 화룡성의 배후를 안정시킨 것이다.
345년 1월 연국왕 모용황은 용성에 끌어모은 타부족인 구려,
백제,우문부,단부인 들로 고민하여 이들을 서부로 옮긴다.

句麗、百濟及宇文、段部之人,皆兵勢所徙,非如中國慕義而至,咸有思歸之心.今戶垂十萬,狹湊都城,恐方將?國家深害,宜分其兄弟宗屬,徙于西境諸城,撫之以恩,檢之以法,
백제인들이 전연국 모용황에게 잡혀간 기록은 따로 없다. 그러나 313년에 고구려에 쫓겨서 모용외에게 투신한 낙랑태수 장통이 바로 백제인들이었던 것이다.

345년 10월 모용각은 고구려 남소성을 빼앗았다. 慕容恪攻高句麗南蘇,克之,置戍而還
346년 1월에는 모용준과 모용각이 부여를 쳐서 그 왕 여현(餘玄)을 사로잡고 5만여명을 끌어갔다.
본래부여는녹산에있었는데백제에게침략을받아서연나라근처에왔다고하였다.
夫餘居於鹿山,爲百

濟所侵,部落衰散,西徙近燕,而不設備。
부여를 遂拔夫餘,虜其王玄及部落五萬餘口而還。
녹산은 발해 녹군현이었던 요나라 건주로서 보면 의무려산 남단이다. 의라왕이 이곳에 있다가 일본에 가서 숭신천황이 되었고, 백제 분서왕의 낙랑서현 공략 때에 이 곳의 부여는 백제에 흡수되었다.
따라서모용황이친부여는곧백제다.

이때 끌려간 부여왕의이름도 백제 왕자 이름으로 고려되는 여현(餘玄)이다.여현은모용황의사위가되었고여현의아들은여울(餘蔚)인데부여왕자라고칭했으며,370년 부견이 전연국을멸망시킬 때에전연국 수도 업성 문을 열어 부견을 들어오게 하였고,384년모용수가 후연국을 세우니 후연국의재상까지 되었다.
후연은 요하 하구 평곽으로부터 요동반도 남단의 복주 부여성을 친 것으로 고려된다.
전연국으로 끌려간 여현은 비류왕의 아들이었을 것이다.

 

걸왕의 일본 진출(재위343-346)

걸왕(契王)은 분서왕의 맏아들이다. 타고난 자질이 강직하고 용감하였으며 말타고 활쏘기를 잘하였다. 처음 분서왕이 죽었을 때 계왕은 어려서 왕위에 오르지 못했다. 비류왕이 재위 41년에 죽자 즉위하였다.
3년(346) 가을 9월에 왕이 죽었다.

283년 왜여왕 일여(개화천황;244~283)의 사후에 사비왕의 아들이자 일여의 숙부인 효안천황(222~298)이 즉위하였다.
그러나 중국 요녕성
遼寧省
요서遼西에 있던 부여夫餘에서 285년 선비족의 침략을 받아 일본으로 새로 도래한 부여 의려왕依慮王이 백제일본을빼앗았다.의려왕은 효령천황孝靈天皇(261~316)이 되었다. 효안천황은 오오사카의 대화를 빼앗기고 미와산으로 피신하였다.
미와산
三輪山의 전설에 의하면 오호모노누시大物主神이라고 하였고, 이때 미와산의 이쿠타마요리히메活玉依媛(235~318)와 대물주신이 만나서 오호타타네코意富多多泥古가 태어났다.

일본에 제 12세 천황으로 기록된 경행천황景行天皇(273~358)은 백제 분서대왕汾西大王(재위300~304)의 아들 걸대왕契大王(재위343~346년)이다.
걸대왕은 분서대왕의 암살 당시에 32세나 되었으니, [삼국사기]기록과 같이 어려서 즉위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일본에 있어서 백제대왕으로 즉위하지 못했고, 대신에 요양시에 위치했던 비류대왕이 즉위하였다.

오호야마토타라시히코日本足彦國押人天皇인 효안천황(222~298; 백제 사비왕의 아들)이 298년에 서거하였고,
그의 뒤를 이어서 백제 걸대왕이 일본에 가서 오호타라시히코
大帶日子가 되었다. 타라시帶는대방에서온것을의미한다.

부여 의라왕의 침략에 의해 책계왕責稽王이 300년에 전사하고, 뒤이어 백제의 일본 땅을 부여 의라왕이 숭신천황이 되어서 침탈하였으니,
책계대왕의 손자인 걸대왕, 즉 경행천황은 복수하기 위하여 대규모 병력으로 도일하였다.따라서 경행천황의 자손이 80이나 된다고 하였다.

그 80명중에서 태자太子라고 불린 사람은 셋이었는데, 성무천황成務天皇이 된 와카타라시히코若帶日子命(326~370)와 야마토타케루 즉 일본무존日本武尊으로 일컬어지는 야마토오구나倭男具那(295~333) 그리고 이호키노이리히코五百木入日子命(273~318) 등이다.
이 중에서 성무천황이 된 와카타라시히코
若帶日子命(326~370)만이 경행천황의 아들이다.
두번째인 일본무존日本武尊(295~333)은 백제 비류대왕의 쌍둥이 아들중 동생인 근초고대왕近肖古大王이다.

세번째인 이호키노이리히코五百木入日子命(273~318)는 비류대왕의 태자였다. 그는 호무다노미와카 品陀眞若(305~361)을 낳았고 그의 세 딸이 응신천황(320~394)과 결혼하였다. 그의 세 딸은 타카기노이리히메高木入日賣命(318~366)와 나카쯔히메中日賣命, 오토히메弟日賣命(324~368)인데, 응신천황(320~394)과 결혼한 오토히메가 384년생일 가능성은 없으므로 324년출생이 확실하고, 그의 조부인 이호키노이리히코五百木入日子命(273~318)는 273년생이 되며 경행천황과 동갑이니 경행천황의 아들이 될 수 없다.
따라서 이호키노이리히코
五百木入日子命(273~318)는 비류대왕의 장왕자로서 백제 태자이며, 백제에서 숭신천황을 치기 위해 건너온 정벌군의 대장이었고, 그는 318년 6월에 숭신천황과 전투하다가 전사한 것으로 고려된다.

비류대왕의 태자와 쌍동이 왕자 중의 형이 일본에서 전사하였다. 걸대왕과 함께 일본에 온 비류대왕의 아들들이 많았던 것이다.
따라써 《신찬성씨록》에는 비류대왕의 후손이 특히 많다.춘야련春野連 면씨面氏 문사씨汶斯氏 강옥공岡屋公 등이 비류왕의 후손이다.

걸대왕이 이나비노오호이라쯔메伊那毘能若?女命(278~318)을 통하여 얻은 야마토네코倭根子命(302~348)와 카무쿠시神櫛王命(308~350)가 경행천황이 도일하여 초기에 얻은 아들들이다. 그보다 큰 아들로 기록된 쌍둥이 두 아들인 오호우스大?命(295~318)와 일본무존日本武尊(295~333)은 비류대왕比流大王(재위 306~343)의 아들들이다.

일본에서 전사한 근초고왕의 형인 오호우스大?命(295~318)묘와 그를 모시는 원투신사. 아이지현 도요다(豊田市)시에 있다.

구이대왕仇台大王(재위 234~238)의 아들 비류대왕이 343년에 죽고, 분서대왕의 아들 걸대왕契王이 343년에 백제로 돌아와 백제대왕이 되었다.
그러나 346년 초에 선비족 전연국의 모용황이 백제 부여부를 쳐서 부여왕 여현
餘玄과 5만명의 포로를 끌어갔다.
342년 고구려 고국원왕의 환도성을 함락하고 5만명을 끌어간 모용황에 의해서 백제도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백제 걸대왕은 선비족에 대한 패전의 책임을 져서, 재위 3년만에 강제 퇴위 당하고 일본으로 다시 떠나가서 경행천황
景行天皇이 되었는데, 전쟁에서 패전하면 왕이 죽거나 물러나는 것이 본래 부여인의 국법이다.

백제 걸왕인 경행천황은 일본 정벌에서 거울을 앞세운 것으로 고려되는데, 경행천황의 지시를 받고 정벌에 나선 일본무존은 배를 타고 갈 때에 배 위에 큰 거울을 걸었던 사실이 있고, 계, 걸과 경의 일본 발음이 “게이”로서 같고 “걸”은 우리말 거울 옛 발음일 수도 있다.

[일본서기]에서 경행천황의 이름은 오시로(於-斯呂, 忍-代)이며 그의 궁성 이름은 히시로日代 궁이었다. 시로는 흰색의 발음과도 같다.
시로
斯呂는 대로도 썼지만, 백제 걸왕의 걸, 를 일본에서는 《게이》로도 읽지만 《시루시》라고도 발음했다.

[일본서기/인덕천황기]의 원년 기록에서 후엽지계後葉之契는 “시루시(=증표證票)”로 읽었다.

따라서 위덕왕이 된 백제 창왕昌王과 같이 걸대왕의 본래 이름은 여설餘契, 혹은 여걸餘契이 되고일본에서는 시로왕, 후에는 게이고우천황景行天皇으로 부르게 되었다.
경행천황은 효안천황처럼 이름 앞에 타라시
를 경칭으로 썼는데, 경행천황은 키가 크고 특히 다리가 길었다고 《고사기》에 기록되었다. 그러나대는백제 대방 출신을의미하는것이다.
경행천황이 죽은 일본내 궁성 이름이 근기近畿의 시가국滋賀國성이다. 칠지도에 기록된 백자국百慈國의 위치로 고려된다.

경행천황의 높은 이름은 그의 일본 정벌에 의한 것인데, 규슈를 탈환한 것이다. 또한 비류대왕의 쌍둥이 둘째 아들, 일본무존日本武尊, 즉 근구수대왕近仇首大王(295~384)이 일본 본토를 정벌하였다.
또한 걸대왕의 마지막 영지는 오사카大阪의 대화大和가 아니라 시가국滋賀國
다카치호궁高穴穗宮이므로, 343년 백제 걸대왕이 되었다가 346년 근초고대왕에게 양위하고 백제에서 되돌아왔을 때에는 왜국의 대표자에서도 밀려난 것이다.

경행천황은 근초고왕자 형제들과 일본 정벌에 동참했다가 아이지현 풍전시에서 살았고, 근초고왕자가 333년에 백제로 돌아온 후에 일본 천황이 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343년에 백제대왕으로 왔었고 3년만에 실각하여 다시 일본으로 돌아간 후에는교토에살았던것이다.
이때 일본은 근초고왕의 직할로서 길비(吉備) 주재 대신인 주길대신이 오오사카를 다스렸다.




Posted by 원주유
백제 역사와 문화2013. 9. 14. 18:58

 

 

백제 8대 고이왕 = 구이, 고모 (재위 234년 ~ 286년) 성은 부여.

구수왕이 죽은 뒤 아들 사반왕이 왕위를 계승했으나 어려서 정치를 할 수 없기 때문에, 초고왕의 아우인 고이왕이 즉위했다고 전한다.

여기서 고이왕이 초고왕의 아우라 함은 연대상으로 모순된다.

고이왕은 온조왕계와는 계보를 달리하는 우태 - 비류계 출신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구수왕의 사망 뒤 고이왕의 즉위와 사반왕의 폐위는 곧 초고왕에서 구수왕으로 계승된 지파의 몰락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내정면에서는 여러 가지 정치 제도와 복식 제도를 제정했으며, 그것은 고이왕이 죽은 뒤에도 지속되어

그 뒤 백제가 멸망할 때까지 4백 년간이나 이어져 백제의 기본 제도로 유지되었다.

재위 27년(260년) 봄 정월, 기존의 좌우보 체제를 개혁하여 여섯 개의 좌평을 두고, 그들에게 왕명 출납과 창고 관리, 의례 제정, 형벌 제도, 군사 업무를 각각 분담시켜 맡아보게 했다.

또한 16품의 관등 체계를 정비했으며, 관직의 위계에 따라 자주색, 다홍색, 푸른색 옷을 입게 하는 등 품계에 따른 왕과 귀족의 공복에 관한 제도도 정했다.

재위 기간 중 괴곡(충북 괴산군), 봉산(경북 영주시)을 중심으로 자주 신라와 충돌했다.

고이왕은 낙랑과 신라 그리고 말갈과 군사적으로 충돌하며 세력을 키워 갔다.

또한 남옥저의 일부를 점령하고, 중국 대륙의 서진과 외교관계를 맺었다.

강원도 북부에 자리 잡은 말갈(동예)족이 자주 침범해 왔는데, 고이왕대에는 말갈과도 우호관계가 조성되었다.

한사군의 후신인 낙랑, 대방과도 혼인을 통한 동맹관계를 형성했다.

재위 13년(246년) 위나라가 낙랑군과 삭방과 합공해 고구려와 전쟁을 벌이는 틈을 타서 낙랑군의 변방을 공격하기도 했다.

또한, 한나라와 낙랑군, 대방군 사이에 분쟁이 일어났을 때 대방군을 선제공격하여 대방태수 궁준을 전사하게 한 사건의 배후에도 고이왕이 이끄는 백제의 힘이 작용하였을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

관리로서 재물을 받은 자와 남의 것을 도둑질한 자에게는 3배를 징출케 하는 동시에 종신 금고에 처한다는 법령을 내려 기강을 바로잡았고, 신라의 국경을 침범하여 영토를 확장하였다.

그는 한강 유역의 여러 부족 사회를 보다 큰 연맹체로 결속하는 데 중심 역할을 담당하여 백제를 고대 왕국으로 성장케 하였다.

 

백제 9대 책계왕 = 청계왕, 책찬왕 (재위 286년 ~ 298년)

고이왕의 맏아들이며, 왕비는 대방왕의 딸 보과이다. 체구가 장대하고 의지가 굳세었다고 한다.

286년(책계왕 1)에 고구려가 대방을 공격하였을 때, 대방왕이 사위인 그에게 구원을 요청하자 군사를 보내어 고구려군을 물리쳤다.

이 때문에 고구려와의 사이가 나빠져, 고구려의 침입에 대비하여 아차성(서울 광장동 아차산성)과 사성(서울 풍납동토성)을 수축하였다.

그러나 298년 한군(낙랑의 군대)과 맥인(동예로 추정)의 침입에 맞서 싸우다가 적병에게 살해되었다.

* 부왕=8.고이왕 * 모후=?

* 왕후=보과부인(대방군 태수의 딸) * 아들=10.분서왕 * 손자=12.계왕

백제 10대 분서왕 (재위 298년 ~ 304년)

책계왕의 장자로 어려서부터 외모가 준수하고 총명하여 부왕의 총애를 받았다.

한군현 세력의 침입을 막다가 부왕이 전사하자 왕위를 계승하였다.

분서왕도 부왕과 마찬가지로 낙랑 등 한군현 세력에 대하여 강경책을 폈던 것으로 보인다.

304년(분서왕 7)에는 낙랑군의 서쪽 현을 공격하여 차지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해에 분서왕은 낙랑이 보낸 자객에게 피살되었다.

고이왕의 손자인 분서왕이 피살된 뒤 고이왕계가 몰락하고 초고왕계가 다시 왕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제11대 비류왕 다음에 분서왕의 아들 제12대 계왕이 잠시 왕위에 있었던 것으로 전하나, 고이왕계의 몰락을 막지는 못하였다.

* 부왕=9.책계왕 * 모후=보과부인(대방군 태수의 딸)

* 왕후=? * 아들=12.계왕

백제 11대 비류왕 (재위 304년 ~ 344년)

구수왕의 둘째 아들이고, 사반왕의 동생이다. 분서왕이 죽자 그의 아들이 아직 어려서 비류가 신하들의 추대를 받아서 즉위하였다.

힘이 세고 활을 잘 쏘았으며 성품은 인자하고 너그러웠다고 한다

그러나 이 혈족관계는 비류왕의 재위시기와 모순되는 면이 있어 의문점이 있다. 구수왕은 234년까지 재위하였으며,

비류왕은 그보다 70년 뒤에 즉위하여 40년간 재위한 것으로 되어 있어 연대에 무리가 나타난다.

당시 백제 왕실은 개루왕에서 갈라진 고이왕계와 초고왕계의 두 지파가 세력을 다투고 있었다.

초고왕의 아들인 구수왕을 계승한 사반왕은 즉위하자 곧 폐위되었으며, 방계인 고이왕이 왕위를 차지하였다.

그뒤 왕위는 고이왕의 아들 책계왕과 손자 분서왕에게 계승되었다.

그러나 책계왕과 분서왕 모두가 한군현 세력과의 분쟁에서 연달아 피살되는 사태를 당하여,

고이왕계의 세력은 큰 타격을 입게 되었다. 초고왕계인 비류왕의 즉위는 바로 이때 이루어졌다.

비류왕의 즉위는 초고왕계의 재집권을 뜻한다.

312년 음력 2월 신하를 보내어 백성들의 질병과 고통을 살펴보고,

홀아비, 과부, 고아, 그리고 늙어서 자식 없이 외롭게 지내는 사람들을 도와주었다.

그 중에서도 스스로 생활할 수 없는 자에게는 곡식을 한 사람당 3섬씩 주었다. 또, 해구를 병관좌평으로 삼았다.

321년 봄 정월에 왕의 서제 우복을 내신좌평으로 삼았으나 우복은 327년 북한산성을 근거지로 반란을 일으켰고 왕은 이를 토벌하였다. 337년 봄 음력 2월에 신라에서 사신을 보내왔다.

비류왕 대에는 자연재해와 천문현상 기록이 다수 남아 있기도 하다.

344년 겨울 음력 10월에 왕이 죽었고 계왕이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비류왕 다음에 고이왕계인 분서왕의 아들 계왕이 즉위하였지만 그 재위는 2년 만에 끝나고, 다시 비류왕의 아들 근초고왕이 즉위하여 그뒤 초고왕계 내에서 왕위계승이 계속되었다.

‘근초고왕’이라는 왕명은 ‘초고왕’과의 연관성을 나타내는 왕명이라 할 것이다.

초고왕계인 비류왕은 고이왕계의 3대가 집권한 뒤에 즉위하였으므로 그는 구수왕의 아들이 아닌 손자, 또는 보다 먼 후손이 될 것이다.

 

백제 12대 계왕 (재위 344년 ~ 346년)

성은 부여, 분서왕의 장남이다. 분서왕이 죽었을 때 나이가 어렸으므로 비류왕이 왕위에 올랐으며, 초고왕의 후손인 비류왕과는 왕실 내에서 서로 다른 지파였다.

그리고 비류왕의 즉위는 분서왕이 낙랑의 자객에게 피살된 상태에서 이루어졌으며, 그 뒤에는 고이왕계가 몰락하고, 초고왕계가 집권하는 왕실지파간의 세력교체가 있었다. 그 사이에 재위한 계왕의 통치기간은 2년 정도에 불과하였다.

이러한 사실들은 경쟁세력들과의 관계에서 계왕의 즉위나 집권이 순탄하지 않았음을 암시해준다.

 

백제 13대 근초고왕 = 여구, 조고왕, 초고왕, 속고왕 (재위 346년 ~ 375년)

근초고왕은 백제가 차츰 국가로서의 면모를 갖출 무렵 비류왕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체격도 아주 크고 용감했기 때문에 둘째 아들이었지만, 차기 왕으로 지목되어 346년 계왕의 뒤를 이어 왕이 되었다.

고구려의 광개토왕에 비길 만한 정복군주로 평가받고 있으며, 남쪽으로는 마한을 정복하여 백제의 영토를 전라도 지역까지 확장하고 북쪽으로는 평양 근처까지 진격하여 고구려의 고국원왕을 전사시켰다.

즉위한 뒤 왕권의 강화와 확립에 주력하여 왕위계승에 있어서 초고왕계의 계승권을 확고히 하였다.

또, 진씨 가문에서 왕비를 맞아들여 왕실을 지지하는 배경세력으로 삼았다.

그리고 지방에 대한 통제를 보다 효율적으로 하기 위해 영역을 분정하여 지방통치조직을 만들고 지방관을 파견하였다.

이로써 왕은 중앙집권화를 보다 확고히 할 수 있었다.

한편, 근초고왕은 왕권확립을 바탕으로 하여 사방으로 정복활동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정복활동을 살펴보면, 남으로는 영산강유역을 중심으로 백제의 세력권에서 이탈해 있던 마한의 잔여세력을 경략, 복속시킴으로써 전라도지역 모두를 지배영역으로 확보하였다.

그리고 낙동강 서쪽에 위치한 가야세력에도 손을 뻗쳐 이들을 부용하게 함으로써 영향권내에 넣었다.

이렇게 남방지역의 평정이 일단락된 후 북방으로의 진출을 도모하였다.

이러한 북진은 당시 남진정책을 추구하고 있던 고구려와의 대립을 불가피하게 하였다.

양국의 군사적 충돌은 369년 치양성(황해도 배천)싸움에서부터 비롯되었으며, 그 절정은 371년에 벌어진 평양성싸움이었다.

이 싸움에서 태자와 더불어 정기 3만을 거느리고 평양성을 공격하여 마침내 고구려의 고국원왕을 전사시키고 대방고지까지 차지하는 개가를 올렸다.

이리하여 백제는 사상최대의 영역을 차지하게 되었다.

또 근초고왕은 정복활동과 더불어 대외활동도 활발히 전개하였다.

우선 고구려에 대항하기 위해 신라와 동맹관계를 강화함으로써 한반도에서의 힘의 균형을 이룩하였으며, 중국의 동진과도 외교관계를 수립하여 동진으로부터 ‘영동장군영낙랑태수’에 책봉되기도 하였다.

한편, 중국이 호족의 침입으로 분열된 시기를 이용, 요서지방으로 진출하여 백제군을 설치하였다.

백제의 요서지역 진출은 요동지역으로 진출하여오는 고구려세력을 견제함과 동시에 상업적인 측면에서의 무역기지의 확보라는 의미도 있었다.

이와 더불어 일본열도방면으로도 활발히 진출하여 백제계통의 세력들과 긴밀한 관계를 가졌다.

백제와 일본열도의 세력과의 관계에 대한 물적 증거로는 일본의 이소노가미신궁에 간직되어온 ‘칠지도’가 있다.

이 칠지도는 당대의 금석문자료로서 칼에 새겨진 명문)의 내용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설이 분분하지만

그 내용의 핵심은 이 칠지도가 근초고왕 때에 만들어졌고 백제의 후왕인 왜왕에게 하사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또, 한편으로는 백제가 위치한 지정학적인 유리한 조건을 이용하여 고대 상업 활동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한대 이래 중국 황해연안에서 한반도의 서남해안으로, 다시 일본열도로 이어지는 해상교통로는 한족의 동방침입과 동시에

고대 상업로로서도 중요한 길이었다. 그런데 낙랑군, 대방군이 멸망되고 북중국에는 수로에 익숙하지 못한 호족이 들어서게 되자 이 전통적인 해상교통로와 상업로는 백제가 계승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백제는 요서지역에 설치한 무역기지와 한반도와 일본지역에 자리한 백제계 세력들을 연결하여 고대 상업망을

형성함으로써 무역의 중심구실을 하게 되었다.

대방지역을 점령하면서 중국계 사람들을 포섭하여 백제문화의 질을 높였고 나아가 일본열도에 새로운 문물을 전수하여주었다.

그 좋은 예로서는 왕인아직기 등을 일본에 보내어 《천자문》과 《논어》를 전해줌으로써 일본에 유학사상을 일으킨 것을 들 수 있다. 이처럼 지배영역의 확대와 통치조직의 정비를 통하여 왕권이 확립되고

문화가 발전하게 되자, 이와 같은 신기운을 배경으로 박사 고흥으로 하여금 ‘서기’라는 국사책을 편찬하게 하였다.

‘서기’의 편찬은 왕실중심의 계보정리와 더불어 왕실전통의 유구성과 신성성을 과시하고 왕권의 위엄을 돋보이게 하려는 데서

취해진 조처였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하여 근초고왕대는 백제의 최대 전성기를 이룰 수 있었다.

 

아직기와 왕인

근초고왕 때는 백제가 융성하던 시대로 문화도 대단히 발달하였다.

이때 아직기가 근초고왕의 지시로 말 두필을 끌고 일본에 건너가서 왕에게 바친 뒤 말을 기르는 일을 맡아보다가,

그가 경서에 능통함을 안 일본 오진왕이 태자 토도치랑자의 스승으로 삼았다.

임기를 마치고 돌아올 때 왜왕이 그에게 “너의 나라에 너보다 나은 박사가 있느냐?”고 묻자,

그는 “왕인이라는 학자가 있는데 나보다 훌륭하다.”라고 왕인을 추천하니, 왕인은 ‘논어’ 10권, ‘천자문’ 1권을 가지고 일본에 건너가 일본왕의 태자 토도치랑자의 스승이 되었다.

그는 경서에 통달하였으므로 왕의 요청에 의해 군신들에게 경사(經史)를 가르쳤다.

그의 자손들은 대대로 가와치에 살면서 기록을 맡은 사가 되었으며, 일본조정에 봉사하여 일본고대문화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이후 백제로부터 일본으로 오경박사를 비롯하여 재봉녀, 직공, 야공, 양주자, 도공, 안공, 화원, 금공, 의사 등이 건너가서 백제문화를 일본에 전수해주어 일본의 고대문화 발달에 공헌하였다.

지금의 전라남도 영암군에는 왕인석상을 비롯하여 왕인이 독서하였다는 왕인책굴 등이 있으며, 무덤은 일본 대판과 경도의 중간지점인 히라카타에 있다.

고흥

백제의 박사로서 ‘서기’를 편찬하였는데, 고흥이 편찬한 ‘서기는 백제 최초의 역사서였다고 할 수 있다.

고흥이 ‘서기’를 편찬한 시기는 근초고왕 때였다. 이때 백제로서는 왕위계승이 초고왕계 중심으로 안정되고, 또 남북으로의 정복적인 팽창활동으로 영역의 확대와 왕권의 확립을 보아 중앙집권적 통치체제가 완비된 시기였다.

따라서, 이와 같은 시대적 상황과 분위기 속에서 고흥이 편찬한 ‘서기’는 왕권을 합리화하고 왕실의 계보를 문자로 기록하고

이를 신성화하며, 또 백제에 복속된 여러 부족의 신화와 전설을 왕실중심으로 통합, 정리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충청남도 논산에 가면 옛날에 '황산벌'이라고 불리던 곳이 있다.

지금은 벼가 무르익는 평화로운 들판이지만, 1340년 전 이곳 황산벌에는 신라와 백제가 최후의 결전을 벌였다. 신라군의 지휘관은 김유신, 백제군의 지휘관은 계백이었다. 둘 다 내로라하는 쟁쟁한 장수들이었다.

660년, 신라는 당나라와 손잡고 백제를 공격해 왔다.

당나라와 신라의 목표는 백제의 수도 사비성이었다. 사비성이 있던 곳이 지금의 부여이다. 당나라 군대는 바다를 건너 금강 기슭에 상륙했고, 신라군은 탄 헌을 지나 황산벌에 도착했다.

백제의 계백장군은 결사대 5천 명을 이끌고 신라군을 막으러 나갔다.

신라군은 백제군의 10배나 되는 5만 명이었다. 계백은 싸움터로 떠나기 전, 아내 와 자식을 불러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포로로 잡히면 적의 노비가 될 테니, 살아서 욕을 보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다."

계백은 칼을 들어 사랑하는 아내와 자식을 베었다. 자신이 살아 돌아올 수 없음은 물론이오, 백제가 승리할 수 없다는 것을 계백은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Posted by 원주유
백제 역사와 문화2013. 9. 14. 18:37

 

 

 

서울시 문화재를 찾아서 - 백제와 고구려의 싸움터, 몽

백제와 고구려의 싸움터, 몽촌토성

현재 송파구 방이동 지역에 위치한 몽촌토성은 전일에는 강동구 이동(二洞)으로 불리던 곳으로 1970년대까지만 해도 국립 경기장 지역으로 지정된 곳이었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라는 말이 있지만 이 곳은 올림픽경기장 시설이 들어서게 됨에 따라 크게 변모되었다. 이 지역은 1980년 초까지도 국립 경기장 지역으로 지정되었기 때문에 주택을 신축하거나 증축을 하지 못해 초가집이 남아있는 등 농촌모습을 그대로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이곳 주민들은 이동이란 동명보다 ‘몽촌(夢村)’으로 부르기를 좋아하였다. 따라서 이 곳의 토성을 몽촌토성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 마을의 이름을 붙인 것이다.

몽촌토성은 사적(史蹟)으로 뒤늦게 지정되기도 했으나 1983년과 1984년에 4개 대학에서 발굴조사를 하면서부터 널리 알려졌다. 이 토성은 타원형으로 연결된 야산을 이용하여 그 위에 진흙을 쌓아 성벽을 만든 것으로 남북의 길이가 750m, 동서의 길이가 500m가 되고, 본성(本城)과 이보다 작은 외성(外城)으로 되어 있다. 이 당시 발굴조사 결과를 보면 몽촌토성이 2,000년 전 백제의 서울 위례성(慰禮城)으로 추정하였으므로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촌토성

실제로 백제가 건국 초부터 500년간 위례성을 서울로 삼았던 것은 잘 알려진 일로서 이 곳을 지키기 위해 풍납토성, 아차산성, 이성산성을 쌓았을 것이다.

 

지금부터 1,600년 전, 고구려의 16대 고국원왕이 전사한 후 고구려와 백제는 서로 적대 관계에 있었다. 그러던 차에 고구려의 영주(英主)로 알려진 19대 광개토왕이 왕위에 오르자 백제의 진사왕과 국민들은 전쟁이 일어나지 않을까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진사왕 8년(392) 7월.

광개토왕은 친히 4만 명의 대군을 이끌고 공격해 옴으로써 전쟁의 막은 올랐다. 이때 백제는 10여 성을 빼앗기고 다시 4년 후 아신왕(阿莘王) 때도 수륙 양면으로 공격해 오는 고구려 군을 맞아 백제군은 용감히 싸웠으나 한강 이북의 땅은 모두 잃고 말았다.

광개토왕에 이어 왕위에 오른 장수왕은 남쪽의 기름진 땅과 따뜻한 기후를 차지해야겠다고 생각하였다. 장수왕은 이 계획에 따라 서울을 평양으로 옮기고 백제와 신라를 여러 번 공격하였으나 수비가 워낙 튼튼해 쉽사리 성공하지 못하였다. 이에 장수왕은 백제 내부의 허실을 살펴 공격을 해야겠다는 전략으로 바꿔, 중 도림(道琳)을 백제에 파견하였다.

이 당시 백제 개로왕(蓋鹵王)은 장기, 바둑을 즐겼다. 바둑의 고수(高手)인 도림은 개로왕에게 접근하기 위해서 어느 날 궁궐 앞에 나아가,

“소승이 일찍부터 바둑을 배워서 자못 묘수(妙手)가 있사온데 왕께 뵈옵기를 원합니다.”

하였다. 이에 왕이 그를 불러들여 대국해 보니 과연 국수(國手)가 아닌가. 개로왕은 크게 기뻐하여 도림을 귀한 손님으로 대하고, 날마다 밤이 깊도록 바둑을 두었다.

“내 일찍이 그대와 같은 사람을 만나지 못한 것이 한이 되오. 그대는 재주가 뛰어난데 비해 너무 겸손한 것 같소.”

“아니옵니다. 소승이 여태껏 한 가지 재주로만 은총에 보답해 왔을 뿐 털끝만큼의 이익을 끼치지 못했습니다. 이제 전하께 한 말씀 드리려고 하는데 전하의 뜻이 어떠하신 지 모르겠습니다.”

하니, 개로왕이,

“어서 말해 보시오. 국가에 이익이 되는 일이 있다면 이것은 내가 그대에게 바라는 바이오.”

하였다.

고구려의 중 도림(道琳)은 개로왕(蓋鹵王)의 신임을 어느 정도 얻은 것으로 판단하였다.

그는 이제 백제의 국력을 약화시키는 목적을 이룰 수 있는 기회가 왔다고 생각하고,

“백제는 높은 산과 큰 강으로 둘러싸여 있기 때문에 이웃나라들이 감히 엿보지 못하고 받들어 섬기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전하께서는 밖으로는 위세를 뽐내시고 부유함을 보여서 남의 눈과 귀를 놀라게 해야 할 것인데, 그렇지 못하고 있습니다.”

라고 아뢰었다. 이에 개로왕이,

“그렇다면 어떤 일을 해야 이웃나라들이 이 백제를 넘보지 않겠소.”

“우선 왕실의 위엄을 보이기 위해서 궁궐을 크게 짓고 왕릉을 다시 만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홍수 때 백성들의 가옥이 물에 잠기고 떠내려가니 한강변의 제방을 단단히 쌓아야 합니다.”

도림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던 개로왕은,

“대사의 말이 옳소. 이제라도 백성을 동원해 면모를 일신해야겠소.”

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백제의 온 백성들은 흙을 구워 성을 높이 쌓고, 궁궐을 아름답게 꾸미는 일과 한강에 제방을 쌓는 일 등에 동원되었다.

그러나 이 토목공사로 국고는 바닥나고 백성들은 지칠 대로 지쳐 버렸다. 한편, 도림은 개로왕으로 하여금 대 토목사업을 일으키게 한 뒤 도망쳐 고구려로 돌아왔다. 그리고 장수왕에게 백제의 형편을 세세히 보고하였다. 이를 들은 장수왕은,

“그 동안 수고가 많았소. 이번에야말로 100년 전 고국원왕께서 전사한 원수를 꼭 갚고 말겠소.”

하고 도림에게 치하한 뒤 군사 3만을 일으켰다.

개로왕 21년(475) 9월.

장수왕은 기습 공격으로 7일 만에 한성(漢城)을 함락시키고 지체없이 한강을 건너 서울 위례성을 포위하였다.

 

백제 문화의 특징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뛰어난 건축 기술을 갖고 있다.

온화함과 섬세함이 잘 나타나 있다.

일본 고대 문화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미륵사지5층석탑

전북 익산시 금마면. 국보 제11호. 백제시대.

한국 석탑의 시원양식으로서 목탑이 석탑으로 이행하는 과정의 구조를 보여주는 중요한 탑이다.

탑의 규모로 보더라도 한국 석탑 중 최대의 걸작이다.

 

정림사지5층석탑

충남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 379. 국보 제9호. 백제시대.

부여 정림사터에 세워져 있는 석탑으로, 좁고 낮은 1층 기단(基壇)위에 5층의 탑신(塔身)을 세운 모습이다. 기단은 각 면의 가운데와 모서리에 기둥돌을 끼워 놓았고, 탑신부의 각 층 몸돌에는 모서리마다 기둥을 세워놓았는데, 위아래가 좁고 가운데를 볼록하게 표현하는 목조건물의 배흘림기법을 이용하였다.
얇고 넓은 지붕돌은 처마의 네 귀퉁이에서 부드럽게 들려져 단아한 자태를 보여준다.

낙화암

충남 공주시 산성동. 공주기념물 제42호. 백제시대. 1982∼1983년까지 공주사범대학에서 발굴하여 유적지가 확인되었으며 이 연지는 백제시대부터 계속하여 이용되어 왔음을 시사하고 있다. 백제시대 축성된 산성으로 백제 때에는 웅진성으로 불렸다가 고려시대 이후공산성으로 불리게 되었다.

 

부여성흥산성

충남 부여군 임천면 군사리. 사적 제4호. 백제시대 수도였던 부여를 수호하기 위해 금강 하류 대안에 축조된 가장 중요한 산성의 하나이다.이 산성은 백제시대 수도였던 부여를 수호하기 위해 금강 하류 대안에 축조된 가장 중요한 산성의 하나이다. 이 성홍산성은 501년에 축조되었다고 하며, 성주는 약 600m, 성벽 높이는 3∼4m이고, 우물터가 3군데에 있고 건물터도 현존하고 있다.

 

익산연동리석불좌상

전북 익산시 삼기면 연동리 산220-2. 보물 제45호.

불상은 머리만 없어졌을 뿐 불신, 대좌, 광배까지 고스란히 남아 있는 백제의 작품이다.
지금의 머리는 요즘 새로 만든 것이며, 불상의 현 신체 높이는 156㎝이다.

 

백제 문화의 특징

백제 문화재는 공주와 부여에 많이 분포되어 있다. 공주에는 무령왕릉이 그 당시 그대로의 모습으로 발굴되었다.

부여의 중심부에는 절터가 있고, 그 중앙에 정림사지 5층석탑이 잘 보존되어 있다. 석탑의 지붕동의 끈이 살짝 들린 모습이 가지런하면서도 날렵하게 보인다. 백제의 뛰어난 건축 기술과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

백제 문화의 특징인 온화함과 섬세함이 이 석탑에 잘 나타나 있으며, 이 문화를 일본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백제 문화는 탑, 불상, 절과 같이 불교 중심의 문화재가 많고 무령왕릉, 공산성, 송산리 고분 등에서 나오 벽화나 정림사지5층석탑, 금동대향로 등을 볼때 섬세하고 우아한 멋을 발견할 수 있다. 

 

 

 

 

 
Posted by 원주유
백제 역사와 문화2013. 9. 14. 18:20

 

광개토대왕과 인연을 맺은 사람들

 

고국양왕 광개토대왕의 아버지. 광개토대왕이 능력을 발휘할 수있도록 터전을 닦아 주었다.
장수왕 광개토대왕의 아들. 아버지를 이어 고구려를 동아시아의 최강국으로 발전시켰다.
내물마립간 신라의 왕. 광개토대왕의 도움을 받아 신라 땅에 쳐들어온 가야와 왜의 연합 세력을 물리쳤다.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

고구려의 두 번째 수도인 국내성이 있는 중국의 집안시에 가면, 하늘높이 우뚝 솟은 비석이 하나 있어요. 높이가 6.39미터, 무게가 37톤이니 엄청나게 큰 비석이지요. 이 비석의 주인공은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이에요. 무슨 이름이 이리도 기냐고요? 고구려 사람들이 이 분을 존경하여 붙여 준 이름이니, 길다고 너무 불평하지는 마세요. 좀 짧은 이름은 없냐고요? 물론 있지요. 광개토대왕이에요.

처음부터 광개토대왕이라고 하지, 왜 읽기도 힘든 긴 이름을 말해 줬냐고요? 광개토대왕이 죽은 이후에 고구려 사람들이 붙여 준 정식 이름이니, 알고는 있어야죠. 이 이름을 우리말로 풀이해 보면, ‘나라 언덕 위의 무덤 안에 계신 넓은 영토를 개척하시고 나라를 평안하게 만드셨던 우리가 좋아했던 위대한 임금님’이라고 할 수 있어요. 그러고 보니, 이름 속에 광개토대왕의 업적이 다 들어 있네요.

서로 북으로 영토를 넓히는 광개토대왕

광개토대왕의 어릴 적 이름은 담덕이었어요. 그는 어릴 때부터 체격이 크고 위엄이 있었대요. 그래서 아버지인 고국양왕은 아들을 무척 총애하였으며

, 담덕이 열세 살이 되었을 때 태자로 삼아 일찍부터 제왕의 길을 걷게 했어요. 그런 그가 왕위에 오른 것은 18세 때로, 아버지의 뒤를 이어 고구려의 19대 임금으로 등극하였어요.

광개토대왕이 임금으로 재위할 때, 고구려는 요동 지역 전체를 장악하며 동아시아 최강국이 되었어요. 그는 왕위에 오른 다음해인 392년에 4만의 군사를 이끌고 백제의 북쪽 지역을 공격하여 한강 유역까지 영토를 확장했어요. 이때 백제의 왕은 진사왕이었는데, 그는 광개토대왕이 병법에 능하다는 소문을 듣고 오금이 저려 미처 싸울 생각도 못 하고 멍하니 앉아 있다가 10여개 성을 고스란히 빼앗기고 말았대요.

광개토대왕은 395년에는 북방에 있는 거란을, 398년에는 숙신을 복속시켰으며,

402년에는 후연을, 410년에는 동부여를 공격하여 요동 지역 전체를 고구려 땅으로 만들었어요.

이처럼 광개토대왕은 남북 어디든 가는 곳마다 승리를 거두어, 일생 동안 64개 성, 1,400여 마을을 차지하여 막강 고구려 제국을 건설했어요.

한편, 400년에는 신라의 도움 요청으로 신라 땅에 쳐들어온 가야와 왜의 연합군을 물리쳐 줬어요.

신라 왕인 내물마립간은 가야와 왜의 연합군이 쳐들어오자 광개토대왕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이를 받아들인 광개토대왕은 보병과 기병 5만을 보내 왜와 가야 군사들을 물리쳐 줬어요. 경주에 있는 신라의 왕릉급 무덤인 호우총에서 제사에 사용된 그릇이 하나 출토되었는데, 그릇 밑면에 광개토대왕의 이름이 새겨져 있어서 고구려와 신라가 광개토대왕 집권 시절에 친밀했다는 것을 증명해 주고 있어요.

백성들을 편히 살게 해 준 광개토대왕

광개토대왕이 싸움만 잘한 임금은 아니에요. 광개토대왕릉비에 다음과 같은 글이 적혀 있어요.

“대왕의 은혜와 혜택이 하늘에까지 이르고, 위력은 바다에까지 미쳤다. 또한 적들을 쓸어 없애셨으니 백성들은 평안히 자기 직업에 종사했고, 나라가 부강하니 백성이 편안했으며 오곡마저도 풍성하게 익었다.”

대왕을 흠모했던 고구려 사람들의 인물평이고, 본인의 무덤 앞에 세워진 비석 글이니, 어느 정도 과장은 되었을 거예요. 하지만 자신들의 삶이 아주 편했다고 쓸 정도로 광개토대왕은 나라 안 살림살이도 상당히 잘했어요. 한편, 광개토대왕 시절에는 고구려 사람들이 자기 나라를 천하의 중심으로 여길 정도로 자부심이 강했어요. 광개토대왕의 강력한 리더십과 용병술 덕분에 고구려인 전체가 강한 주체 의식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지요.

그러나 안타깝게도 광개토대왕은 412년에 39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뜨고 말았어요. 역사에 ‘만약’이라는 단어를 붙일 수는 없지만, 만약 그가 60세까지만 살았더라도, 당시 동아시아 전체는 고구려 땅이 되었을지도 몰라요. 한번 상상해 보세요. 말까지 철갑으로 무장한 개마무사들이 보부도 당당하게 산천을 헤집고 다니며, 고구려의 영광을 외치는 모습을. 그리고 그들을 인솔하여 영토를 확장해 가는 광개토대왕의 늠름한 모습을. 어때요? 상상만으로도 스릴이 넘치지요?

 

교과서 속의 광개토대왕 시대

삼국 간의 세력다툼은 광개토대왕이 즉위한 4세기 말부터 시작되었는데, 이것은 삼국의 발전을 촉진하는 자극제가 되었다. 삼국 간의 세력다툼에서 주도권을 잡은 것은 중국 세력과 싸움을 통해 성장한 고구려였다. 광개토대왕은 강화된 국력으로 신라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영토를 크게 넓혀 고구려의 전성시대를 열었다. 그의 업적은 만주 집안에 남아 있는 광개토대왕릉비에 기록되어 있다. 그가 죽은 뒤, 고구려 사람들은 그를 영토를 크게 넓혔다는 뜻으로 ‘광개토왕’이라 하여 그의 위업을 그렸다. 

알쏭이와 장콩샘의 미주알 고주알

광개토대왕 이야기는 어디에 전해지고 있나요?
광개토대왕의 업적을 기록해 놓은 역사책은 거의 없어요. 『삼국사기』에 간략하게 소개되어 있을 뿐, 광개토대왕의 부인이 누구인지, 자식은 몇 명인지, 왜 죽었는지에 대한 세세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아요. 그래도 다행인 것은 아들인 장수왕 때에 세워 놓은 광개토대왕릉비에 그의 업적이 자세히 나와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그가 어떤 일을 언제 했는지 면밀하게 파악할 수 있어요.

광개토대왕 시절에 고구려 사람들은 ‘천하의 중심은 고구려’라고 했다던데, 그게 사실인가요?
광개토대왕 시절에 지방 관리를 지냈던 모두루라는 사람의 무덤에 이런 글이 쓰여 있어요. “하백의 손자이며 해와 달의 아들인 추모성왕이 북부여에서 태어나셨으니, 천하 사방은 이 나라 이 고을이 가장 성스러움을 알지니.” 고구려가 천하에서 가장 성스러운 곳이란 이야기지요. 또한 광개토대왕릉비에는 고구려 사람들을 가리켜 ‘천손(天孫)의 후예’라 하고, 주변 국가나 부족들은 전부 오랑캐라 해 놨어요. 이러한 사실로 보았을 때에 광개토대왕 시절의 고구려 사람들은 고구려를 천하의 중심으로 생각했던 것이 분명해요.

 

광개토대왕! 대단한 영웅인 것은 분명해. 하지만 말이야,현대 사회가 추구하는 평화의 관점에서 보아도, 그는 과연 영웅일까? 알렉산더, 나폴레옹, 칭기즈칸, 광개토대왕. 이들은 땅따먹기 전쟁에서 승리한 정복군주들이야. 그렇다면 그로 인해서고통을 받거나 죽어 간 사람들 또한 무척 많았을 거 아니야? 고통받은사람들에게도 이들은 과연 영웅일까? 우리 한번쯤 곰곰이 생각해 볼 문제인 것 같아.


세기의 전쟁 을지문덕의 살수대첩

수나라군은 쫓기고 있었다. 고구려군이 마지막 일격을 가한다. 북경을 떠날 때만 해도 수양제는 고구려 원정이 이렇게 비참한 패배로 끝날 줄은 몰랐을 것이다. 수나라군은 살수에서 전멸했다.

 

612년 수나라가 고구려을 침략할 때 동원한 병사는 113만명에 달했습니다. 비슷한 시기에 서양 전쟁에서 십만명 이상의 병력이 동원된 경우가 많지 않다는 것을 볼 때 가히 고대사 최대의 전쟁이라 하겠습니다. 고구려의 을지문덕은 바로 이 수나라 군대의 별동대 30만을 살수 오늘의 청천강에서 몰살시킵니다. 살아 돌아간 자는 불과 2700명 이것은 세계 전쟁사에 기록될 승전보입니다. 수나라는 삼백 여년 만에 중원을 통일한 나라입니다. 인구, 국토, 병력의 규모에 있어서 고구려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초강대국이었습니다. 헌데 그런 수나라가 고구려 땅에서 치욕스러운 패배를 당했다는 것입니다.

중국 강소성 양주에 있는 한 무덤. 수양제의 무덤이다. 300년 만에 중국을 통일한 제국 수나라 황제 무덤 치곤 너무 작고 초라하다. 묘지석에 벼락이 쳐서 한 부분이 깨졌지만1) 수리하지 않은 상태다. 수양제는 618년 양주에서 신하의 손에 죽었다. 그는 스스로 약을 먹고 자결하게다고 했지만 신하 우문화급은 스스로 죽을 권리조차 주지 않았다. 무덤 앞엔 그의 업적과 과오가 새겨져 있다. 요동에서 일을 버리다 천하를 잃었다. 고구려을 정벌하려다 모든 것을 잃고 말았다는 것이다. 612년 중원을 통일한 수양제는 백만대군을 동원해 고구려를 공격한다.

고구려로 가는 첫관문 요동성. 견고한 성에 의지한 고구려의 저항은 완강했다. 수나라 백만대군은 몇 달이 지나도 요동성 하나를 깨뜨리지 못했다. 중원을 통일한 초강대국이 요동의 작은 성에 막혀 진군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요동성에서 기록에 따르면 한 두달 정도의 공성전과 수성전이 진행이 됐는데 벌써부터 많은 병참의 어려움에 처했을 것입니다."

마음이 급해진 수양제는 별동대 30만을 평양으로 보낸다. 대동강으로 진입하는 수군과 합류해 평양을 공격할 의도였다. 산둥반도 봉래를 출발한 수나라 수군은 대동강에 상륙했다. 평양성 60리 앞까지 진출한 수군을 저지하기 위해 고구려군이 전투를 벌였지만 패배한다. 고구려군은 평양성 안으로 도주하고 만다. 수군사령관 내호아는 여세를 몰아 4만 병력을 이끌고 평양성을 향해 진군한다. 마침내 수나라 수군은 평양성 안으로 들이닥쳤다. 수도에 적군이 진입한 것이다. 국가의 존망이 걸린 순간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함정이었다. 평양성 안에 매복해 있던 고구려 군이 급습하자 수군은 대패한다. 살아돌아 간자는 불과 수천명. 수나라 수군은 전투력을 상실한다.

임용한 박사 (사)한국미래문제연구원, 전쟁과 역사 저자.

"수군이 군량을 보급하고 육군이 압록강을 건너와서 신속하게 평양을 함락시키는 작전이라는 것입니다. 수군대장 내호아는 고구려 군의 유인작전에 걸려서 단독으로 평양성을 공격하다가 패배해 버립니다. 그 결과 수군이 철수하게 돼버리니까 압록강을 건너서 평양까지 왔던 수나라 육군은 식량이 떨어져 버리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한편 수나라 육군 30만은 평양성 30리 앞까지 진출했다. 이 누란의 위기를 역전시킨 사람이 고구려군의 지휘관 을지문덕이었다. 조선상고사에 따르면 을지문덕은 성밖 들과 집을 비워 수나라 군이 현지에서 식량을 조달하는 것을 막았다. 보급이 끊긴 수나라군이 성급하게 공격해오자 고구려군은 사방에서 화살과 돌멩이를 비오듯 쏟아부었다. 이미 식량이 바닥난 수나라 별동대는 평양성을 칠 수 있는 전력이 아니었다.

 

"42년간 쌓았던 평양성은 당시 고구려 최대의 성이였고 높이도 굉장한 철옹성에 가깝죠. 수나라 군대가 평양성 근처 북쪽 30리까지 왔음에도 불구하고 물론 그들이 지치기도 했지만 평양성을 함락 시킬 수 있는 어떤 장비라든가 능력이 부족했던 겁니다."

수나라군은 평양성 30리 앞에서 철수한다. 그 뒤를 고구려군이 쫓으며 공격했다. 쫓는 고구려군과 쫓기는 수나라 군사. 전세는 완전히 역전된다. 후퇴하던 수나라 군은 살수 지금의 청천강에 도착한다. 청천강은 평안남북도 사이를 흘러 서해로 흐르는 200km의 강이다. 수나라 군대는 강을 건너기 시작했다. 을지문덕이 지휘하는 고구려 군대는 원하는 시간, 원하는 장소에서 수나라 군을 쳤다. 고구려 군은 도하하는 수나라 군의 후방을 공격했다. 강과 강변으로 병력이 나눠진 수나라 군사는 속수무책으로 당한다. 지휘관 신세웅도 전사하고 만다.

 

"살수대첩이 이루어졌을 때 수나라 군의 어떤 진이나 대영이 제대로 갖춰져 다기 보다는 강을 도하하거나 혹은 이동 중에 고구려 군의 기습작전이나 유격전과 같은 어떤 정상적이지 않은 시간과 장소 정상적이지 않는 방법을 통해서 고구려 군이 공격을 했다."

다급한 수나라 군은 하루에 450리를 달아났다. 살수에서 압록강까지 고구려 군은 패주하는 수나라 군대를 추격하며 생멸했다. 화살이 비오듯 쏟아졌다. 수나라 별동대의 99%가 사망했다. 30만 5천명 가운데 살아 돌아간 사람은 2700명이라고 중국측 사서는 기록하고 있다.2)

 

"유명한 삼국지의 적벽대전에서 조조가 백만을 동원했다고 하지만 실제 조조가 끌고 내려온 군대는 오만 밖에 안됩니다. 현지에서 조달을 해서 나중에 15만명을 만들었다고 돼 있습니다. 그런데 수양제 군대는 사실 백만이 아니라 2백만입니다. 중간에 보급부대나 노역으로 해서 동원했던 총동원 인력은 2백만명이었다고 중국 측 기록에 정확하게 나와 있습니다. 이것으로 보면 중국 역사상 최대의 규모의 전쟁이었다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동시에 최대 규모의 참혹한 패배였습니다. 삼국시대가 지난 후에 나중에 명나라 청나라 때 까지도 중국 황제들이 조선에 대해서 기억하고 있는 중요한 것이 저나라는 수나라의 백만대군을 물리친 나라다라고 이것을 중국황제들이 다 알고 있습니다. 그 정도로 중국 역사에 기록될 만한 참혹한 패배였고 우리측에서 보면 위대한 승리였죠."

살수대첩은 우리나라 역사를 통털어서 그 유래를 찾을 수 없는 대승이었습니다. 전쟁에 패배한 수나라는 결국 멸망의 길로 접어들고 말았습니다. 고대세계 최강의 슈퍼파워였던 수나라를 완파한 고구려 군. 그들은 과연 어떤 무기와 전략으로 싸웠던 걸까요. 고구려의 유적에서는 많은 화살촉들이 발견되고 있는데요. 활과 화살은 고구려 군의 주력 무기였습니다. 이것은 아차산에서 발견된 고구려 군의 화살을 복원한 것인데 화살촉의 평균 탄소량은 0.51%로 오늘날의 특수강의 맘 먹는 순도 높은 강철입니다. 이 철갑옷은 고구려 중장비병이 입었던 찰갑옷을 복원한 것인데 이 상위 하나를 만들기 위해서는 철을 단조해서 만든 천여 개가 넘는 작은 조각들을 일일이 이렇게 가죽 끈으로 연결해서 만들게 됩니다. 제철기술을 가진 전문가 집단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작업이었을 텐데요. 그렇다면 이렇게 철갑으로 중무장한 고구려 군들은 어떻게 전투를 했었을까요.

한강이 한 눈에 내려다 보이는 아차산. 고구려의 군사 요새 보루가 발견된 지역이다. 아차산에서만 20여 개가 넘는 보루가 나왔다. 1600여 년 전 이곳은 고구려 군이 집단으로 거주하던 중요한 군사 거점이었다.

 

"각 봉우리마다 이러한 성들이 크기는 약간씩 달리하면서 위치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각 성들이 한 눈에 다 보이기 때문에 서로 필요한 경우에 군사를 좀 더 동원해 줄 수 있는 것이고요. 또 한강에서 북쪽으로 올라오는 군사들을 다 볼 수 있는 곳에 위치한 곳이기 때문에 각각의 소규모지만 유기적으로 연결돼서 큰성처럼 그렇게 역할을 했던 것으로 생각합니다."

아차산에서는 고구려의 주력 무기가 대량으로 나왔다. 철재 칼, 도끼, 창 그리고 수천 개의 화살촉이 나왔다. 이런 무기들이 안악 3호분 벽화에 상세히 그려져 있다. 철갑옷을 입고 장창을 든 중장기병, 갑옷을 입지 않은 경기병, 철갑옷과 방패로 무장한 중장보병, 경보병, 도끼를 든 부월수, 그리고 화를 든 궁수가 보인다.

최종택 교수 고구려 고고미술학과

"현재 저희가 발굴된 고구려 철기를 분석해 보면 현재 우리가 쓰고 있는 조광이라는 기술도 알고 있었고 고대의 중국계의 기술과 유럽계의 철기제작 기술을 이미 고구려는 다 알고 있었다고 분석하고 있기 때문에 이미 제철수준이 상당히 높았고 높은 제철 수준을 통해서 무기와 농번구, 각종 생활용기를 제작하므로 국가적인 부를 창출할 수 있었습니다."

 

아차산에서 나온 자료를 가지고 고구려 화살을 제작하기로 했다. 고구려는 철을 단조해 살촉을 만들었을 것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화살촉은 특수강 수준의 강철이다. 만들어진 화살촉에 화살대와 깃을 붙여 화살을 복원했다. 고구려 군은 어떤 활로 화살을 쐈을까. 고구려의 활은 몰소의 뿔을 넣어 만든 각궁이었다. 각궁은 평소에 둥글게 휘어서 보관한다. 활을 쏠때 거꾸로 펴서 활 모양을 만든다. 완성된 각궁은 고구려 벽화 속 모습과 같다. 각궁과 고구려 화살의 파괴력을 어떨까. 초고속 카메라를 동원해 화살이 철판을 뚫는 순간을 정밀하게 촬영해 보기로 했다. 세계민족궁대회 입상자가 활을 쐈다. 화살은 함석판 5장을 그대로 관통했다.

김용만 우리역사문화연구소장

"고구려 벽화에 보면 말을 타고 활을 쏘는 그런 경기병들이 많이 보이는데 고구려 최대의 강점은 역시 활이었습니다. 기록상으로 볼 수 있는 것은 백석산 전투가 있습니다. 수나라 군대를 사면에서 완전히 포위해서 활을 비오듯이 쏴서 수나라 군대를 거의 전멸시킵니다."

 

지금도 발굴이 한창인 경주 쪽샘지구. 신라 귀족의 무덤 수십기가 발굴된 지역이다. 지난 6월 이곳에서는 중장기병이 입었던 철갑옷과 각종 무기류가 공개됐다. 발굴된 철갑옷은 작고 얇은 수많은 철편들을 엮어 만든 찰갑옷이었다. 말들 덮었던 철갑 위의 사람이 입는 찰갑옷이 최초로 원형 그대로 발굴됐다. 전문가들은 이 갑옷이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남진 때 영향을 받아 제작된 찰갑이라고 주장한다.

지병목 소장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고구려 고분 벽화의 4C~5C경에 나타나는 그 인물풍속도라든지 여러가지 풍속도에 나타나는 고분들에서 이러한 말을 탄 개마무사라고 얘기하는 갑옷을 착용한 장수와 말들이 많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여기 보시는 이 그림(삼실총벽화)에서 볼 수 있는 모든 형태의 갑옷과 부속구들이 한세트가 발견된 것에 가장 큰 의의가 있을 것 같습니다."

 

직접 철판을 잘라 찰갑옷을 만들어 보기로 했다. 철편에 부식을 막기 위해 옻 칠을 두 번하고 옻에 철분을 섞은 흑칠을 세 번 했다. 흑칠을 한 철편은 검은색이 된다. 작은 철편 조각을 일일이 가죽 끈으로 엮어야 한다. 찰갑옷 제작엔 오랜 시간이 걸린다. 상위 하나에만 1300여개의 철편이 필요하다. 이렇게 만든 찰갑옷을 사람이 입고 편하게 전투할 수 있을까. 찰갑옷은 기대 이상의 활동성을 지니고 있었다.

 

찰갑이 철편을 엮어서 만들었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 구부러져서 몸쓰기가 훨씬 자유롭고 유연합니다. 이런 식으로 접혀가지고 훨씬 더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기 때문에 훨씬 더 과학적이라고 볼 수 있죠.

철갑옷의 강도를 실험해 보기로 했다. 먼저 철판을 통째로 이어 부친 판갑옷. 큰 철판 조각들을 리벳으로 이었다. 화살은 그대로 판갑옷을 뚫었다. 발사한 모든 화살이 판갑옷을 관통했다. 화살은 갑옷을 뚫고 깊이 박히어 빼내기가 어렵다. 사람이 입었으면 치명상을 입었을 것이다. 이번엔 고구려의 찰갑옷을 실험해 보기로 했다. 찰갑옷에도 그대로 화살이 박혔다. 그런데 반복해 발사하자 화살이 튕겨 나오는 경우가 생겼다. 박힌 줄 알았던 화살을 찰갑이 튕겨내는 것이다. 철편은 뚫리지 않고 휘어져 있었다. 가죽 끈으로 연결된 작은 철조각들은 유연하게 안으로 밀리면서 화살의 힘을 흡수한 뒤 튕겨냈다.

찰갑옷으로 말과 자신을 감싼 고구려 중장기병은 어떻게 싸웠을까. 고대 전투는 진과 진의 싸움이었다. 럭비경기처럼 두 개의 진이 서로 충돌한다. 진이 유지되는 한 전투는 팽팽하게 진행된다. 진을 깨뜨리는 자가 승리한다. 팽팽하게 진행되는 싸움. 진이 붕괴되는 순간 승자와 패자가 결정되고 대량 사상자가 발생한다. 전투에서 고구려 중장기병은 진의 앞에 위치했을 것이다. 궁수가 원거리 사격을 가하고 기병이 돌진한다. 철갑과 장창으로 무장한 중장기병은 적의 진을 돌파해 후방에서 공격한다. 이때 보병이 돌진해서 앞을 공격한다. 진이 깨쳐 찰갑기병과 보병에 둘러싸인 적은 전멸한다.

고대 가야지역에서 발굴된 철갑옷을 복원한 것입니다. 큰 철판조각을 그대로 이어 붙인 것입니다. 이는 창, 칼, 화살과 같은 공격용 무기에 대한 방어력을 높이기 위해서 입니다. 그러나 철갑옷은 화살을 정통으로 맞을 경우 이렇게 탄력이 없기 때문에 그냥 뚫리고 맙니다. 반면 고구려군의 찰갑옷은 화살을 막아 냈습니다. 화살을 맞을 경우 이 가죽 끈으로 연결된 철편들이 안으로 밀려 들어가면서 화살의 힘을 충격을 흡수하고 다시 튕겨내게 됩니다. 화살을 정통으로 맞을 경우에도 이렇게 철편들이 부러지지 않고 그냥 이렇게 휘어질 뿐입니다. 그리고 찰갑옷의 장점은 한 가지가 더 있습니다. 전투 중에 갑옷이 손상되더라도 이렇게 다른 철편으로 손쉽게 수선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고구려와의 전쟁을 지휘했던 수양제는 무모한 전쟁을 해서 나라를 망친 군주로 역사에 기록됩니다. 헌데 여기서 한 가지 의문점이 생깁니다. 혼란기의 중국을 300여 년 만에 통일한 고대 세계의 슈퍼파워 수나라. 이 나라의 황제가 수양제입니다. 헌데 그런 그를 고구려 침략의 모든 것을 건 무모한 폭군으로만 기억한다는 것은 뭔가 이상하지 않습니까? 수양제 그는 과연 어떤 인물이었을까요. 또 그는 왜 고구려를 침략해야만 했던 걸까요.

고질적인 중국대륙의 물 부족을 해결하기 위해 많은 중국왕조가 장강의 물줄기를 북으로 이었다. 경향대운하는 북경과 항주를 이어주는 운하를 말한다. 수양제는 통제거, 산양독, 강남하 세 개의 운하를 건설해 황하, 장강, 휘수를 연결했다. 풍부한 강남지방의 물산을 북쪽으로 빠르게 운송해 교역을 활성화하기 위해 운하를 건설한 것이다.

가장 큰 트럭으로는 30톤, 열차로는 60톤이지만, 이 배는 500톤이나 실을 수 있지요.

운하 건설엔 또 다른 목적이 있다. 양주 고운하에는 동관고도가 있다. 동문 밖의 선착장이라는 뜻이다. 동관고도 문 아래엔 수양제가 운하를 건설한 후의 모습들이 새겨져 있다. 수양제는 미인들을 거느리고 자신이 건설한 운하를 자주 유람했다. 사치스런 연회도 자주 열었다. 벽화엔 다른 한쪽엔 수의 깃발아래 모인 병사들이 보인다. 이들은 왜 여기 있을까.

 

군사적인 목적입니다. 주로 고구려에 대처하기 위해서 입니다. 수양제는 고구려를 세 번이나 공격했는데 모두 운하를 이용해 군사들을 수송했습니다.

중국을 통일한 수양제는 남으로 방향을 돌려 베트남의 임읍국, 오키나와의 유구국 그리고 말레이 반도의 마자가국까지 정벌했다. 서기 610년 정월. 지금의 낙양인 동도에서 각국이 수나라에 조배를 올리는데 채색기를 든 자만 18000명이었다고 한다. 수나라는 주변국가를 복속시키고 대제국의 위용을 자랑한 당대 초강대국이었다. 그러나 고구려는 수나라를 중심으로 한 국제질서를 정면으로 거부했다. 영양왕은 수의 입조요구를 거절했다. 수나라는 고구려를 용납할 수 없었다.

 

그가 고구려 출정을 준비하는 데는 5년이 걸렸다. 아주 철저하게 준비를 했던 것이다. 그가 가장 먼저 한 일은 대운하의 확장명령이었다. 이 대운하는 양자강에서 북경지역으로 연결되어 있었고 곡물과 다른 군수품을 운송하는데 사용되었다. 612년에야 그 일을 마칠 수 있었고 대운하의 완공을 위해 수백만 명이 강제 노역에 동원되었다.

산동성 래주 해변에서 대규모 전함건조가 시작됐다. 배 건조의 책임자는 유주총관 원홍사(元弘嗣). 그는 가혹하게 일군들을 다루었다. 물속에서 주야로 일을 하게 해서 사람들이 일을 피하기 위해 손발을 자르고 복스러운 손, 복스러운 발로 불렀다고 전한다.3) 그리고 300척의 배가 완성됐다. 고구려를 놔두면 다른 민족들의 이반이 이어질 것을 두려워 한 수양제는 전쟁을 선포한다. 우문술이 지휘하는 좌군 12군, 우중문이 지휘하는 우군 12군, 수양제의 친위군 6군. 모두 합쳐 113만 3800명이 국경에서 고구려로 출발했다. 행렬의 길이만 960리에 달했다. 수군도 산동반도를 출발 대동강으로 향했다. 사상 유례가 없는 대출정이었다.

 

수나라가 동원한 약 110만 명에 달하는 병력은 20세기에 이르기까지 1차세계대전과 2차세계대전를 제외한다면 거의 없었던 것으로 판단됩니다. 고대 당시 고대 서양의 전투규모가 고작해야 5만에서 10만 명 그리고 한국전쟁 때 중공군이 약 40만 명에서 60만 명 정도 참전했다는 것으로 판단한다면 수나라가 고구려에 약110만 명 정도를 동원해서 공격한 것은 거의 어마어마한 규모였다고 판단됩니다.

당시 수나라는 890만 가구 인구는 4600만명 정도였습니다. 고구려의 당시 가구수는 69만호 정도였는데 한 가구당 가족을 5명으로 계산한다면 인구는 400만명 정도였을 겁니다. 수나라의 10분의 1도 안 되는 숫자입니다. 참전한 수나라의 군인은 113만명 지원병까지 합친다면 200만 명이 넘는 대군이 고구려를 공격합니다. 당시 수나라의 군사 수는 고구려 남성 전체의 절반이 넘는 숫자였습니다. 전투에 동원 가능한 성인남자의 수를 계산한다면 수나라의 병력규모는 고구려를 압도합니다.4)

수나라 100만 대군은 요하로 몰려들었다. 요하는 요동을 차지한 고구려로 가는 첫 관문. 요하 건너편에 고구려 군이 있었다. 수나라군은 요하를 건너기 시작했다. 선봉대는 강을 건너기 위해 부교를 설치했다. 그러나 부교가 짧아 강 건너 편에 닿지 못했다. 수나라 군은 강으로 뛰어들어 건너편 언덕으로 오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고구려의 공격으로 수나라 1군 사령관인 맥철장(麥鐵杖)이 전사하고 말았다. 수나라군은 첫전투에서 예상치 못한 엄청난 피해를 입고 말았다.5)

 

선봉군 대장 맥철장이 요하에 제일 먼저 도착을 했는데 고구려 군이 약 한달 동안 선봉부대가 넘어오지 못하게 합니다. 그리고 맥철장을 비롯해서 많은 지휘관을 살해합니다. 고구려가 요하 전투에서 한달 정도의 시간을 수의 진격을 막았던 것은 뒤의 수나라 작전들을 잘 수행하지 못하도록 만듭니다. 수나라는 속전속결로 해서 진격을 해야 되고 맥철장의 부대가 처음에 거점을 만들어야 하는데 수나라 본진이 올 때까지 붙잡아 둡니다. 그 후의 전쟁을 유리하게 이끄는 첫번째 승전보라 할 수 있습니다.

본진이 합류하자 수나라는 한달 만에 겨우 요하를 건널 수 있게 됐다. 수나라가 강을 건너 공격하자 고구려는 만 명의 희생자를 내고 요동성으로 후퇴했다. 그러자 수나라 대군이 요동성으로 몰려 들었다. 수양제가 단번에 고구려를 제압하기 위해 데려온 백만 대군이 요동성을 포위했다. 그리고 본격적인 전쟁이 시작됐다. 전투는 치열했다. 하지만 성과는 없었다. 고구려의 성벽은 너무 높고 튼튼했고 고구려의 저항도 완강했다. 2월에 수양제가 요동성에 도착했지만 넉 달이 되고 6월이 돼도 요동성은 함락되지 않았다. 수나라 군은 300년 만에 중국을 통일한 강한 군대였다. 지휘관과 병사들은 전쟁터에서 단련된 사람들이었다. 강남에서 북쪽의 돌궐까지 온갖 종류의 군대와 싸운 경험이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백만 대군이 요동성 하나를 깨지 못한다.

진노한 수양제는 장수들을 질책했다. 그대들은 스스로 지휘가 높고 좋은 가문임을 믿고 나를 어리석은 자로 대우하려 하느냐! 그대들이 내가 오는 것을 좋아하지 아니한 것은 아마 이 낭패를 볼까 염려한 까닭이었을 것이다. 내가 지금 여기 온 것은 바로 그대들의 수행을 보아 목을 베려 함이다. 그대들이 지금 죽음을 두려워하여 전력치 아니하니 내가 그대들을 능히 죽이지 못할 줄로 여기느냐!

 

요동성 구조는 이 그림에 따르면은 크게 외곽이 하나 있고 그 안에 내곽이 하나 있는 이중구조의 성곽입니다. 그리고 외곽에 보면 성문이 표현되어 있는데 성문 주변으로는 옹성으로는 보기 어렵지만 치가 나와서 성문을 보호할 수 있는 그런 시설로 되어 있습니다. 문의 주변에 치가 있고 성벽주변에 치가 5개 정도가 배치돼 있습니다.

치는 앞으로 튀어나온 방어용 성벽이다. 적이 공격하면 성벽 위에서 포위해 집중공격하기 위한 것이다. 옹성 역시 적을 포위해 공격하기 위한 것이다. 어긋문은 엇갈린 두 개의 성벽 사이에 만든 문이다. 문으로 들어오는 적은 고립된다. 당시 고구려의 축성술은 매우 뛰어났다. 흔적은 남아 있지 않지만 요동성도 치와 같은 방어시설을 갖춘 난공불락의 성이었을 것이다.

 

요동성은 기록에 따르면 대략 높이가 30m를 넘는 굉장히 큰 성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를 수나라 본진이 수백겹을 에워쌓다는 표현이 나오는데 수나라 군대는 이 요동성에서 약 4월 중순부터 철수하게 되는 7월 말까지 3개월 동안 이 성 하나를 점령하지 못합니다.

병서 무경총요엔 고대 중국에서 사용된 공성용 무기가 상세히 적혀 있다. 성을 공격하는 기본 장비인 사다리차 운제(雲梯), 성의 높이만큼 올라가서 성을 내려다보며 공격하는 소차(巢車, 상하이동식 공성무기)가 보인다. 성벽에 돌을 던지던 투석기를 복원해 보기로 했다. 당시 투석기는 사람의 힘을 이용해 돌을 던질 수 있게 한 구조다. 밧줄이 많이 연결될수록 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투석기를 당길 수가 있다. 작은 투석기는 40명, 큰 것은 120명의 병사가 밧줄을 동시에 잡아 당겨 돌을 날려 보낸다. 그러나 요동성은 요지부동이었다. 고구려 군은 수나라와의 전면전을 피해 요동성 안에서 수성전을 완강하게 펼쳤다. 이때부터 수나라 백만 대군의 보급에 문제가 생기기 시작한다.

데이비드 그래프(David Graff)교수, 캔자스 주립대 중국전쟁사

고구려는 수나라에게 큰 전투를 치를 기회를 주지 않았다. 고구려 군은 요새 안으로 들어가고 수나라 군은 요새 밖에서 식량이 바닥난 상태로 지내게 되었다. 왜냐하면 요새밖에 있는 모든 곡물을 안으로 거두어 들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수나라 군은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당시 고구려 군의 전술은 육군사관학교 수업에서도 인용된다. 청야입보(淸野入保). 청야는 들을 비운다는 말. 입보는 성안으로 철수해 수성전을 벌이며 적을 고갈시킨다는 말이다. 고구려 군이 사용한 청야입보 전술은 19세기 초까지 서양에서도 유효한 전술이었다.

 

청야는 들을 비운다는 말인데 한마디로 말하면 평상시에는 농업이나 목축업 같은 일반적인 생활을 하다가 적이 공격해 왔을 때 들을 완전히 깨끗하게 비우고 성으로 다 들어가서 군, 관민이 다 적에게 대항하는 그런 개념입니다. 당시의 동아시아에서 일반적으로 보급을 현지조달을 많이 했었습니다. 그래서 적에게 현지 조달을 허용하지 않기 위해서 고구려는 자기들의 생활터전을 전부 다 불태우고 완전히 비우고 나서 성으로 들어가서 결연하기 방어준비에 임했던 것입니다.

프랑스의 나폴레옹이 러시아를 침략했을 때 러시아 군도 청야전술을 구사합니다. 들판을 불태우고 러시아 내륙 깊숙이 프랑스 군을 끌어드리는데 추운 겨울 보급선이 끊어진 나폴레옹 군은 배가 주리자 도망치듯 철군하다 러시아군의 기습에 밀려 엄청난 수에 사상자를 내고 맙니다. 이렇게 전쟁에서 진 나폴레옹은 황제자리에서도 쫓겨나게 됩니다. 을지문덕도 수나라 군을 고구려 땅 깊숙이 유인해 살수에서 마지막 일격을 가합니다.

끝내 요동성을 함락시키지 못한 수나라 군은 요동성을 우회한다. 수양제는 30만 별동대를 고구려의 수도 평양으로 직접 내려 보낸다. 병력 수에서 열쇠였던 고구려 군은 이동로를 장악하고 게릴라 전을 벌었다. 평양성으로 가는 수나라 군의 보급부대가 주요 목표였다. 남하하던 수나라 군은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고구려 군과 대치하게 된다. 이때 고구려 수나라 전쟁을 통틀어 가장 극적인 상황이 벌어진다. 한 고구려 장수가 홀연히 수나라 진영을 찾아 온 것이다.

놀랍게도 그는 고구려 군의 지휘관 을지문덕이었다. 그는 고구려와 수나라의 항복 협상을 시작하기 위해 온 것이다. 을지문덕은 수나라 군의 지휘관 우중문, 우문술과 거짓으로 항복 협상을 벌이면서 수나라 진영을 염탐했다. 왜 고구려 군의 최고 지휘관이 이런 위험한 임무를 직접 수행했을까.

 

을지문덕 같이 중요한 인물이 수나라 군에 가서 포로가 된다면 고구려 군 자체가 위험에 빠지게 됩니다. 그래서 을지문덕이 수나라 군대진영까지 찾아 간 것은 적정을 관찰하는 것보다는 수나라 군대의 진격을 지연시키는 것에 목적이 있지 않았나 생각을 합니다.

협상을 마치고 돌아가는 을지문덕을 우중문은 사람을 보내 돌려 세웠다. 할 말이 있으니 다시 수군 진영으로 돌아가자는 것이었다. 고구려 군 지휘관 을지문덕을 잡으려는 수나라의 술책이었다. 하지만 을지문덕은 돌아보지도 않고 압록강을 건너 돌아갔다. 수나라 군은 적의 사령관을 눈 앞에 두고 놓친 것이다. 이후 고구려 군은 일곱 번 싸워 일곱 번 패하면서 수나라 군을 고구려 평양성 가까이 끌어 들었다. 시간을 지연시키면서 수나라 군의 식량을 고갈시키려는 을지문덕의 작전이었다. 수나라 병사들은 100일치 식량을 가지고 요동성을 출발했다. 하지만 많은 지친 병사들이 무거운 식량을 이미 모두 몰래 버린 상태였다.

꿔샤오린 교수(낙양사법대 역사학부)

군사물자 운송, 특히 양식운송이 매우 어려웠다. 보병들이 많은 식량과 무기를 메고 전쟁을 하기가 너무 힘들었다. 어떤 병사는 식량을 땅에 몰래 묻고 가지도 했다. 그래야 자신이 지고 갈 물건의 무게가 줄기 때문이었는데 그러다보니 나중에 먹을 식량이 부족했다.

을지문덕의 전략은 적중했다. 을지문덕의 청야전술은 수나라 군이 고구려 현지에서 식량을 구할 수 없게 만들었다. 들엔 곡식 한 톨 남아 있지 않았을 것이다. 수나라 군이 평양성 30리 앞에 오자 을지문덕은 역사에 남을 시 한 수를 우중문에게 보내 조롱한다.

神策究天文 신기한 책략은 하늘의 이치에 달했고, 妙算窮地理 묘한 전술은 지리를 통달했구나.
戰勝功旣高 싸움마다 이겨 공이 이미 높았으니 족한 줄 알고 그만 둠이 어떠하리.

 

마지막 구절에공은 이미 하늘에 다했으니 돌아가시게라는 말은 사실은 너희들의 식량은 이미 떨어진 사정을 다 알고 있다. 너희들이 돌아가지 않으면 어떡하겠느냐는 이미 알고 있는 상황에서 너가 이미 다 공을 이루었으니 돌아가라. 다시 말하면 너희들이 더 이상 할 것이 없지 않느냐! 점잔이 말했지만 우리가 너희들이 철수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철수를 종용하는 시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미 먹을 것이 바닥나 전투를 할 수 없었던 수나라 군사는 평양성 30리 앞에서 철수할 수 밖에 없었다. 이때 고구려의 반격이 시작됐다. 후퇴하는 수나라 군의 배후를 치기 시작했다. 쫓기던 30만 별동대는 살수 지금의 청천강을 건너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역사적인 살수 대첩이 벌어진다. 단재 신채호는 고구려 군이 미리 막아둔 상류의 둑을 터놓아 수군을 공격했다고 기록했다.6)

그런데 과연 그 당시 청천강에 둑을 쌓는 것이 가능한 일 일까. 매번 봄 청천강에서는 나무로 간단히 쌓은 둑을 터놓는다. 상류지역에서 벌목한 나무를 물살의 힘을 이용해 하류로 수송하기 위해서다. 목재는 물길을 따라 서해까지 내려가 중국으로 수출된다. 을지문덕도 이런 방법으로 둑을 쌓아 수공을 했을지는 의문이다. 과연 전쟁 기간에 엄청난 량의 물이 채워질 둑을 건설할 수 있었을까.

 

청천강 같이 큰 강을 옛날 기술로 막았다가 터뜨린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강을 막는데만 해도 오늘날에도 몇 년의 공사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군대라는 것은 보통 주변의 40km 이상의 정찰대를 운영하면서 행군하게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상류의 둑을 그 이전 시기에 막았다고 한다면 수나라 군대가 그날 그 시점에 도하하는 것을 알고 한 2, 3년 전부터 공사를 했어야 가능하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3만 여명이 참가한 국제 마라톤 대회(인천대교개통기념). 살수를 건너던 30만 수나라 별동대 병력의 10분의 1정도의 인원이 참가했다. 인천대교 주탑 간의 거리는 약 1km. 육안으로 보기에도 대열은 삽시간에 수킬로미터로 늘어졌다. 만약 30만이 달리기 시작하면 그 길이는 더욱 늘어날 것이다. 이것으로 볼 때 살수를 수나라 군 30만이 동시에 건너는 건 불가능해 보인다. 사서엔 수공에 관한 기록이 없다. 강을 건너는 수군의 후방을 공격했다는 기록만이 있다. 고구려 군의 공격에 수나라 군의 진영이 깨졌다.

 

어떤 군대가 후퇴하면서 진영을 유지하기란 굉장히 힘들다고 판단이 됩니다. 그 이유는 철수 작전 중에 후미에 남겨진 부대의 경우에는 심리적으로 굉장히 압박을 받게 되고 자신들의 생명에 위협도 받게 되는 것이고 후방에서 직접 적과 교전해야 하는 상황입니다. 모든 것이 어려운 상황에서 특히 후미부대라도 남아서 적과 교전을 하는 상황에서는 전투력을 제대로 발휘하기는 힘들다고 판단이 됩니다.

별동대 일부는 강 건너에 일부는 강 가운데 후진은 강을 건너지 못한 상황. 병력이 분리된 수나라 군은 속수무책이었다. 고구려 군의 기습은 수나라 군을 공황상태에 빠뜨려 붕괴시켰을 것이다. 을지문덕의 고구려 군은 진이 깨진 상태로 패주하는 수나라 군을 추격하며 전멸시켰다. 백만 대군으로 북경을 출발할 때 수양제는 이런 비참한 결과를 꿈에도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게 전쟁이 끝났다. 7세기 세계 최대의 전쟁의 결과는 아무도 믿을 수 없는 것이었다. 그 한가운데 을지문덕의 살수대첩이 있었다.

 

을지문덕은 사실 수세에 방어전략을 구사했지만 모든 상황을 고려해서 그 주도권을 가지고 있었고 자기가 원하는 시간과 장소에서 적을 끌어 들었고 그리고 적이 약했을 때 공격을 하므로 적의 전투력을 제압하는 아주 뛰어난 전략가였다고 생각합니다.

고구려는 요동성, 평양성, 살수 이렇게 전쟁의 운명을 가른 세 곳의 전투에서 모두 승리했습니다. 수나라는 고구려의 전략에 말려서 제대로 전투 한 번 해보지 못하고 치욕적인 패배를 당합니다. 과연 무엇이 고구려를 승리를 이끌었던 걸까요. 고구려 군의 청야전술과 수성전이 승리의 한 요인으로 꼽힐 수 있을 것입니다. 또 삼국사기를 쓴 김부식은 을지문덕의 공을 이야기 합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힘과 전략을 믿은 고구려 군의 필사 항전의 의지가 아니었을까요.

 

 

Posted by 원주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