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역사와 문화2013. 9. 14. 18:04

 

 

고구려 수나라 전쟁의 영웅 연개소문에 의해 쓰러지다.

고구려 27대 영류왕(營留王, 재위: 618?642)은 큰 전쟁 없이 25년간 나라를 다스렸지만, 연개소문에 의해 시해당한 임금이다. 그의 죽음 이후 고구려는 큰 전쟁을 치렀기 때문에, 그는 자신을 시해한 연개소문과 관련되어 지금도 역사적 평가가 엇갈리는 인물이다.

 

평원왕의 아들이자 영양왕의 이복동생

영류왕은 고구려 25대 평원왕(平原王, 재위: 559?590)의 아들로, 26대 영양왕의 이복동생이다. 그의 이름은 건무였다. 영양왕(?陽王, 재위: 590?618)이 559년 무렵에 태어난 것에 비해, 그는 평원왕이 뒤늦게 얻은 아들임을 고려했을 때 580년대 초반에 태어난 것으로 볼 수 있겠다. 그의 동생으로 대양왕(大陽王, 28대 보장왕의 아버지)이 있었으므로, 평원왕이 죽기 직전인 590년에 가까운 시기에 태어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는 618년 영양왕이 죽자, 왕위에 올라 642년까지 고구려를 다스리다가 60세 무렵에 죽었다.

수나라와의 전쟁에서 공을 세우다

그가 30세 무렵인 612년, 고구려와 수나라 사이에 전쟁이 발발했다. 이때 그는 고구려 수도를 방어하는 사령관으로, 바다 건너 직접 고구려 평양 부근에 도착한 수나라 좌익위대장군 래호아(來護兒)가 지휘하는 수만의 군대를 막아내는 임무를 맡았다. 래호아의 군대는 요동을 통과해 육로로 평양을 향해 공격하는 수나라 30만 별동대에게 군수품을 보급해주며, 함께 평양을 공격할 임무를 맡고 있었다. 따라서 고구려로서는 이들을 빨리 격파하여, 수나라 별동대와 만나지 못하게 해야 했다. 건무는 유인작전을 펼쳐 이들을 섬멸하고자 했다.

[북사(北史)] <래호아 열전에 따르면, 영양왕의 동생 건무가 날래고 용감(驍勇)하기가 매우 뛰어나(絶倫), 죽을 각오를 한 결사대 100명을 직접 이끌고 래호아의 진영으로 돌진했다고 한다. 그의 형인 영양왕처럼 그도 용감하게 적진을 향해 돌격해 군사들에게 모범을 보였던 것이다. 고건무의 작전은 적에게 일부러 패해 작은 승리를 안겨주어 교만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전쟁에서 공을 세우고자 하는 욕심이 컸던 래호아는 자주 승리를 거두어 고구려의 수도 평양 장안성 앞에 이르자, 자신의 군대만으로 고구려 수도를 함락시킬 야심을 갖게 되었다. 이때 부총관 주법상이 래호아에게 수나라 육군을 기다려야 한다고 말렸지만, 래호아는 직접 4만 대군을 이끌고 장안성으로 진군했다. 장안성은 외성, 내성, 중성, 북성으로 이루어진 도성(都城)이다. 고건무는 외성을 비워놓고 적을 유인했다. 외성 안에 들어온 수나라 군대는 기강을 잃고 마구 약탈에 나섰다. 이때 숨겨두었던 고구려 군대가 나타나 대오가 흩어진 수나라 군대를 섬멸시켰다. 간신히 도망간 수나라 군대는 해안가에 마련한 진지만을 겨우 지킨 채 수나라 육군과 만나 합동작전을 펼칠 능력을 완전히 상실하고 말았다.

고건무의 활약 덕택에 을지문덕은 보급품을 받지 못해 지쳐버린 30만 수나라 별동대를 살수에서 대파할 수 있었다. 이처럼 고건무는 뛰어난 지략과 용감함을 갖춘 612년 고-수 전쟁의 영웅이었다. 군대 내에서 위상이 높아지고 사람들의 지지를 얻음에 따라 그는 왕위 계승자로 부상하게 되었다. 영양왕에게 자손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만약 자손이 있었음에도 그가 왕위에 오르게 된 것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그가 전쟁에서 거둔 공적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다.

영류왕의 초기 대당(對唐) 정책

그가 왕위에 오른 618년은 마침 고구려의 숙적인 수나라가 멸망하고 당나라가 등장한 시기였다. 영류왕은 619년, 621년, 622년에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두 나라의 우호를 다졌다. 특히 622년에는 당나라의 제안을 받아들여 포로 교환을 하기도 했다. 고구려는 수나라와의 전쟁에서 획득한 포로 1만명을 돌려보냈다. 당나라에서 고구려로 돌려보낸 고구려인의 숫자는 확인할 수 없지만, 1만 보다는 적었을 것이다. 물론 고구려에는 여전히 수나라 출신 포로들이 많이 살고 있었다.

624년 영류왕은 당나라에서 보내온 도사(道士)와 도교서(道敎書)를 받아들였다. 또한 당나라의 책봉(冊封)도 표면적으로는 거부하지 않았다. 이때 당 고조(高祖, 재위: 618?626)가 신하들에게 고구려와의 관계는 명분과 실제가 다르다며, 굳이 신하의 예를 강요해 고구려와 갈등을 일으킬 필요가 없지 않느냐는 이야기를 한 것으로 볼 때, 책봉의 실질적인 의미는 거의 없었다고 볼 수 있다. 당나라는 수나라를 거듭 격파한 고구려의 실력을 잘 알고 있었기에, 겉으로는 우호적인 태도를 보였다. 하지만 안으로는 622년 고구려에서 이탈해 당나라에 귀부한 말갈의 추장 돌지계(突地稽)를 고구려와 가까운 연주(燕州) 총관에 임명하는 등, 고구려를 견제하고 있었다.

626년 신라와 백제는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고구려가 자신들이 당나라와 교류하는 것을 막을 뿐 아니라 국경을 자주 침략하니 이를 견제해 달라고 요청한 적이 있었다. 고구려도 당나라가 백제, 신라와 연합하는 것을 막는 등, 당을 견제했던 것이다. 하지만 당나라가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 삼국이 화해하라고 압력을 가하자, 고구려는 외교 갈등을 우려해 당의 요구를 들어주었다.

영류왕의 대외정책과 돌궐(突厥)

이처럼 영류왕이 당나라의 요구를 대체로 들어주고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하고자 했던 것은 그가 당나라와의 전쟁을 두려워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영류왕이 당나라와 화친을 원했던 것은, 유목제국인 동돌궐이 강성해졌기 때문이었다. 607년 고구려는 동돌궐에 사신을 보내기도 했지만, 551년과 580년대 초에 동서로 분리되기 전 강성했던 돌궐과 전쟁을 치른 경험을 갖고 있었다.

동아시아의 강자인 고구려와 수나라의 전쟁을 지켜보며 힘을 축적했던 동돌궐은 수-당 교체기 중원의 여러 군웅(群雄)들로부터 조공을 받을 정도로 국력이 강해져 있었다. 고-수 전쟁의 최대 수혜자가 된 동돌궐은 고구려의 핵심 이익이 걸린 요해(遼海 - 요서 북부 지역)의 거란족을 향해 세력을 확대해왔다. 전쟁 피해를 극복하는 일이 우선이던 고구려로서는 적극 대응하기가 어려웠다. 따라서 고구려로서는 거란족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는 동돌궐이 부담스러운 존재였다. 그러므로 당나라와 갈등을 야기하기보단 우호 정책을 시행한 것이었다.

그런데 630년 당나라가 동돌궐을 멸망시켰다. [삼국사기]는 628년의 사건으로 기록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630년이 옳다. 이때 영류왕이 즉시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승전을 축하한 것은 동돌궐을 견제하고 있던 고구려의 속내가 반영된 것이라고 하겠다.

 

변화하는 고구려-당의 관계

고구려는 당나라의 승전을 축하하면서 겸하여 봉역도(封域圖)를 주었다. 봉역도를 글자 그대로 풀이하자면 ‘제후가 책봉받은 영토에 관한 지도’ 라는 뜻인데, 이는 당나라의 입장이 반영된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봉역도가 만약 실제로 고구려의 지리 정보가 상세한 지도라면, 641년 지도에 관한 일을 담당하는 당의 직방낭중(職方郎中) 진대덕이 고구려 곳곳을 돌아다니며 지리정보를 획득하고자 노력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고구려가 보낸 것은 양국의 국경선을 확정한 국경지도로, 영토 분쟁을 하지 말고 사이좋게 지내자는 뜻을 밝힌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당나라의 생각은 달랐다. 626년 아버지 고조(이연)를 핍박하고, 형과 동생을 죽이고 왕위에 오른 태종(唐太宗 李世民, 재위: 626~649)은 언젠가는 고구려를 굴복시키려는 야심을 품고 있었다. 당 태종의 야심과 오만함은 631년 8월, 고구려에 보낸 사신 장손사가 고구려가 수나라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적의 시신을 모아 만든 기념물인 경관(京觀)을 헐어버린 것으로 표출되었다. 경관 파괴는 곧 고구려의 자부심을 건드리는 일이었다.

 

천리장성의 축조와 외교 정책

영류왕은 당나라가 여세를 몰아 고구려를 공격해 올 수도 있음을 감지하고, 백성을 동원해 부여성에서 서남쪽 바다에 이르는 천리에 달하는 지역에 장성을 쌓을 것을 명령했다. 천리장성 축조를 연개소문이 제안했다는 주장도 있지만, 이때는 아직 연개소문의 나이가 국내 정치에 간여할 정도가 아니었다. 천리장성 축조는 영류왕의 지시로 632년 2월부터 646년까지 15년간 지속된 거대한 사업이었다. 천리장성은 중국의 만리장성처럼 하나로 연결된 장벽이 아니라, 천리에 걸쳐 여러 곳에 성을 쌓고 보수하여 일종의 네트워크 방어망을 만든 것이라고 여겨진다. 이때 축성되고 보수된 성들은 고-당 전쟁에서 적을 막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삼국사기]와 중국의 사서(史書)들에는 631년부터 639년까지 고구려와 당나라 사이에 사신 왕래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고구려가 천리장성을 건설하며 당장 당나라와 적대적인 관계로 돌아선 것은 아니다. 634년 고구려 승려가 당나라에 입국하는 등 양국의 외교 관계는 지속되었다.

한편 당나라는 638년 토번과 싸워 승리하고, 서돌궐을 무력으로 압도하고, 서역의 여러 소국들을 제압하였으며, 640년에는 고창국까지 멸망시키는 등 서쪽 변경에서 그 세력을 크게 넓혔다. 당나라의 팽창을 예의주시하던 영류왕은 639년 태자 환권을 당에 사신으로 보내고, 당나라 국학(國學)에 청년들을 보내 입학시키는 등 당나라에게 우호적인 행동을 보였다. 그러자 640년 당나라에서 태자의 방문을 대한 답례로 사신 진대덕을 보내왔다. 고창국의 멸망 소식을 알고 있던 영류왕은 당나라의 강성함을 크게 경계하고 당과의 충돌을 피하기 위해 먼저 사신을 보냈을 뿐만 아니라, 당의 사신도 크게 우대해 주었다.

 

영류왕의 남방정책

영류왕은 고-수 전쟁 때 수나라를 지지했던 신라를 견제했다. 신라와는 한수 이북의 땅에 대한 소유권 문제로 6세기 말 이후로 갈등이 계속되고 있었다. 신라와의 작은 전투가 계속되는 가운데, 629년 8월 신라에게 낭비성을 빼앗기는 사태가 발생했다. 그러자 영류왕은 630년 왜국에 사신을 보냈다. 621년 사신을 보낸 이후 오랜만에 왜국에 사신을 보낸 것은 왜국을 이용해 신라를 견제하려는 목적 때문이었다.

영류왕은 군대를 보내 임진강 주변의 칠중성을 공격하게 하는 등 신라와 작은 전쟁을 하기도 했지만, 대군을 보내 정벌하기보다는 국경의 현상 유지와 외교를 통한 신라 견제에 치중하고 있었다. 백제와도 큰 갈등을 만들지는 않았다.

 

연개소문에 의해 시해되다

영류왕이 가장 공을 들인 것은 당나라와의 관계였다. 영류왕은 한편으로는 전쟁에 대비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전쟁을 피하고자 했다. 하지만 당나라는 고구려와의 전쟁을 각오하고 있었다. 641년 8월 당태종은 고구려를 방문하고 돌아온 진대덕의 보고를 받는 자리에서 “고구려를 육로와 해로로 나누어 공격하면 쉽게 멸망시킬 수 있으나, 지금은 산동지역이 아직 전쟁의 피해에서 벗어나지 못한 탓에 전쟁을 할 수 없다”고 말한 바 있다. 영류왕이 막고자 했던 당나라와의 전쟁은 그의 의지와 상관없이, 당태종의 야심과 당나라의 필요에 의해 발발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60세에 이른 영류왕은 자신의 재위기간 동안 당나라와 전쟁을 막으려고 노력했지만, 그 과정에서 소외된 연개소문(淵蓋蘇文, ?~665?)에 의해 642년 10월 시해되고 말았다. 연개소문은 자신을 죽이려고 했던 여러 대신들을 먼저 제거한 후, 곧장 궁중으로 달려가 영류왕을 시해하고 시신을 몇 토막으로 잘라서 구덩이에 버렸다고 기록되어 있다. 연개소문이 영류왕에 대해 상당한 적개심을 가졌던 것은 분명하지만, 왜 그가 영류왕을 시해했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한 이유를 알 수 없다. 단지 당나라와의 대외 정책을 놓고 젊은 연개소문과 노회한 정치가 영류왕 사이에 갈등이 빚어진 것으로 추정될 뿐이다.

영류왕에 대한 평가는 다양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다만 분명한 것은 그가 612년 고-수 전쟁의 영웅이었으며, 국제 정세의 변화에 따라 대외 정책을 변화시키며 큰 전쟁 없이 나라를 안정적으로 다스리고자 했던 임금이라는 점이다.


Posted by 원주유
고구려 역사와 문화2013. 9. 14. 17:35

 

안시성 전투 승리로 이끌다.

수 양제는 살수 대첩 이후에도 몇 번 더 고구려를 공격했지만 모두 실패했다.

이 때문에 전쟁에 시달린 백성들의 원성만 높아졌다. 결국 수나라는 망하고,당나라가 둘어섰다.

살수 대첩이 있은 지 32년 뒤인 644년, 이번에는 당나라 태종이 10만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를 공격해 왔다.

당나라 군대는 요동 반도에 자리잡고 있던 안시성을 포위했다.

안시성은 작은 성이지만 매우 중요한 곳이었다.

이곳을 빼앗기면 요동은 완전히 당나라의 수중에 들어가게 된다.

그러나 안시성은 호락호락 넘어가지 않았다. 성주 양만춘의 지휘 아래 성 안의 백성들과 군사들은 한마음 한뜻이 되어 싸웠다. 당 태종은 별별 수단을 다 써 보았지만 번번히 실패했다.

당나라 태종은 할 수 없이 퇴각 명령을 내렸다.

마침내 88일 만에 안시성을 지키던 고구려군은 승리를 거두었다.

 

고구려 고연수[高延壽]

생몰년 : 미상
고구려 말기의 장군.
645년(보장왕 4) 당나라 태종이 직접 지휘하는 대군이 안시성을 공격할 때 북부욕살로 있으면서 출전하였다.

이 해 당태종은 안시성을 공략하기 위하여 6월 11일 요동성을 출발하여 20일에 안시성 교외에 이동하여 전투를

벌이기 위하여 준비를 하고 있었다. 안시성의 고구려 민·군들은 당 태종의 군사와 공방전을 벌일 태세를 갖추었다.
고연수는 남부욕살 고혜진(高惠眞)과 함께 6월 21일에 안시성을 지원하기 위하여 고구려군과 말갈병을 포함한

15만의 증원병력을 이끌고 안시성 동남쪽 근교에서 전열을 가다듬었다. 이때 고구려 증원군 대열에 참가한 대로

고정의는 군중의 연장자로서 자신의 오랜 경험을 바탕으로 총사령관 고연수에게 지구전을 펼 것을 건의하였다.
그러나 고연수는 고정의의 전략을 귀담아 듣지 않고, 곧바로 군사를 이끌고 안시성에서 불과 60여리 떨어진

지역으로 진출하여 당군의 움직임을 주시하였다. 당군과 정면 대결을 하기 위한 것이었다.
당태종은 고구려군을 유인하기 위하여 소규모의 돌궐 기병 1천기를 고구려군 진영으로 출격시켰다. 이는 고구려군

진영 전면으로 진출하여 교전이 시작되자 접전과 퇴각을 반복하는 유인작전을 폈다. 고연수는 당군측이 고구려군을

유인하기 위하여 내보낸 돌궐 기병이 약세를 보이면서 퇴각하자, “당군은 상대하기 쉬운 것들이다.”라고 속단하고

총력을 기울여 추격하도록 전군에 명령을 내렸다. 고구려군은 안시성 동남방 10여 리 지점까지 진출한 후 전열을

가다듬고 당군과의 결전태세를 갖추기 시작하였다. 당태종은 고구려군 증원부대의 진영이 내려다보이는 고지로

올라가 군세를 관측하였다. 고구려병과 말갈병으로 혼성된 고구려군의 진영은 무려 60여리에 뻗쳐 있는 것을

확인하였다. 이에 당태종은 위장전술로 승부를 걸기로 하고 고연수에게 서신을 전달하였다. 그는 당이 고구려에

온 것이 연개소문이 임금을 시해한 것을 문책하기 위하여 온 것이기 때문에 교전을 바라는 것이 아니며,

또 몇 성을 점령한 것은 군량과 말먹이를 주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고구려군 총사령관인 북부욕살 고연수는 당태종의 이같은 서신 내용을 믿고 경계태세를 소홀히 하였다. 그러자

당 태종은 6월 21일 밤에 문무백관들과 고구려군을 격파할 대책을 토의한 후 작전명령을 내렸다. 고구려와 당은

안시성에서 공방전을 벌였다. 고연수의 고구려군은 3면에서 공격하는 당군의 공격에 혼란에 빠졌다. 고구려군은

2만여명의 사상자를 내고 안시성 동쪽으로 패주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군은 안시성 동쪽 강에 설치된 교량을

모두 철거하여 고구려 증원군의 퇴로를 차단하자, 고연수와 고혜진은 6월 23일 결국 3만 6천 8백여명의 군사를

수습하여 당군 진영에 투항하였다. 뒤에 당나라로부터 홍여경이라는 벼슬을 받았으나, 항복한 것을

탄식하다가 죽었다


 

동북 공정 : 중국의 고구려 역사 빼앗기

고구려는 중국 내에 존재했던 지방정권이다.” 지난해 7월 중국 광명일보에 실린 한 시론에서 제기한 주장이다. 이 시론의 결론은 고구려사는 중국사의 일부이며, ()민족과는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고구려가 우리의 역사라는 걸 너무 당연하게 생각해온 우리에게는 얼토당토 않는 이야기이지만, 중국은 이런 주장을 역사적 사실로 자리매김하기 위해 정부 차원에서 무려 3조원의 예산을 투입해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고 한다. 이른바 동북공정(東北工程)이라는 연구 프로젝트가 바로 그것이다.

이러한 주장이 몇몇 학자가 학문적 연구를 통해 제기한 학설 수준이 아니라, 중국 정부 차원에서 진행하는 대규모 연구 프로젝트와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국내 언론과 역사학계, 시민단체 등에서는 이를 중국의 역사 빼앗기 공작, 한중간의 역사전쟁, 2의 나당전쟁 등으로 규정하고 있다.

또한 북한 고구려 고분군의 유네스코 세계 문화 유산 등록이 연기되었다는 점, 최근 중국이 환인과 집안지역에 있는 고구려 유적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하기 위해 대대적인 보수작업을 벌이고 있는 점, 고구려 유적지에 한국인의 출입을 통제하고 있다는 점 등 최근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이 중국의 고구려사 편입 시도와 결코 무관하지 않을 것으로 보고 있다.

국내 학계는 중국측의 이러한 움직임을 두고 고구려 역사 빼앗기에 본격적으로 착수했다고 전망하는 것이다.

중국은 무엇 때문에 고구려 역사를 자국사로 편입하려 할까? 그리고 이런 주장을 하기 위해 중국 학자들이 내세우는 근거는 무엇인가? 이러한 움직임이 갖는 의미는 무엇일까?

동북공정이란

중국의 고구려사 편입 시도에 대해 학자들은 중화 민족주의, 신패권주의 등으로 설명한다. 즉 중국은 진한 이후 줄곧 통일된 중앙집권적 국가이며, 계속 한족을 주체로 해서 소수민족을 끌어들인 다민족 국가였다는 일관된 입장을 가져왔다라고 지적한다. 이러한 입장으로 발해사를 일찌감치 중국사의 일부로 편입시켰으며, 고구려사에 대해서는 한국(북한 포함)의 역사에서 지워버리려고 노력했다. 그러다가 1980년대 후반부터는 고구려사까지 중국사로 보려는 움직임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1980년대 이후에는 현재 중국영토 안에서 이루어진 역사는 모두 중국 역사라는 다민족 통일국가론이 강조되면서, 고구려는 중국사의 일부라는 주장이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고 한다. 이런 배경에서 탄생한 게 바로 동북공정(동북변강의 역사와 현상계열 연구공정)이다. 중앙(정부)의 허가를 받아 사회과학원과 길림성, 요녕성, 흑룡강성 등 동북 3성이 2002년부터 5년 기한으로 동북공정을 발족했다.

한반도 정세변화에 대비

이 프로젝트의 주요 연구내용은 고대 중국 강역이론 연구, 동북 지방사 연구, 동북 민족사 연구, 고조선 고구려 발해사 연구, 중조 관계사 연구, 중국 동북 변강사회 안정전략 연구, 한반도 정세변화 및 그에 따른 중국동북 변강 안정에 대한 영향 연구 등이다.

이들 과제명에서 알 수 있듯 거의 남북한과 관련된 내용들로, 한반도와 남북한의 학문적 정치적 움직임을 겨냥한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분석한다. 즉 남북 통일이나 북한 붕괴와 같은 사태가 동북지구의 조선족 사회에 초래할 혼란을 막기 위해서이고, 더 나아가 고조선, 고구려, 발해사가 중국 역사라는 논리를 개발함으로써, 남북통일 이후 불거져 나올지 모르는 국경 영토분쟁에 효율적으로 대비하는 데 있다는 점 등이다.

넓게는 중국의 소수민족 정책에서 그 원인을 찾는다. “현대 중국을 구성하는 56개의 다민족의 단결을 도모하고, 전체 인구의 8.1%에 지나지 않는 55개 소수민족이 차지하는 전국토의 60%가 넘는 지역을 중국의 정통이 되는 역사적 근거가 있는 영토로 자리매김하려는 현실적 과제와 관련이 있다라는 지적이다.

결국 중국의 동북공정, 고구려사 연구는 소수 민족의 단결과 다민족 거주지의 정통성 부여 등을 통해 국가 사회의 통합과 체제 안정을 꾀하고, 한반도의 정세변화시 일어날 수 있는 조선족 사회의 동요를 막고, 북한 체제 붕괴시 개입 명분을 확보하고 국경 분쟁을 예비한다는 중국의 현실적 정치 요구를 뒷받침하기 위한 것이라는 분석이다. 이러한 현재의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진행되는 연구는 역사 왜곡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중국의 이러한 현실적 요구에 부응한 고구려 역사는 어떤 모습일까? 광명일보에 실린 시론을 통해 고구려사 연구 방향을 살펴보자.

고구려는 중국의 지방 정권

?동북공정?에서 주장하는 것들은 크게 두가지로 나눠볼 수 있다. 첫째 역사적 사실로서, 고구려는 고대 중국 변강의 지방정권으로 중국사의 일부이며, ()민족의 역사와는 관련이 없다는 주장이다. 둘째,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려가 고구려를 계승했다든가, 현재의 한국이 고구려를 자신들의 역사라고 주장하는 것은 잘못된 사실에서 비롯된 역사인식이라는 것이다.

먼저 고구려는 고대 중국의 1개 지방정권이라고 주장하는 근거를 살펴보자.

고구려 정권은 남하한 일부 부여족과 서한(전한)의 현도군 고구려현 경내의 여러 민족이 수립한 것이다. 고구려 민족의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지만, 모두 고대 중국의 경내 민족이기 때문에 현재 한반도의 한민족과는 무관하다.

고구려의 건국 지역과 활동 무대는 모두 고대 중국의 경내이다. 처음에는 현도군, 이어서는 요동군에 속하게 되었는데, 이 지역은 고구려가 건국하기 전에 한족(漢族)의 땅이었고, 한인(韓人)의 거주지가 된 것은 12세기 이후이다. 기씨조선과 위씨조선은 중국의 역사이다.

고구려 역대왕들은 모두 중국 중앙 정권의 책봉을 받았다. 한나라에서부터 당나라 때까지 중국의 역대 왕조들은 모두 고구려를 변방의 민족 정권으로 생각했다. 고구려 또한 중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원하지 않았다. 당나라가 고구려를 통일하자, 많은 고구려인들은 당나라에 대해 망국(亡國)’의 한을 품지 않았던 것이다.

고구려 멸망 후 다수가 한족(漢族)에 융화되었다.

따라서 고구려 민족을 중국 동북지방에 등장했던 변방민족으로 보는 것이 역사적인 사실에 가장 부합된다고 할 수 있다.

고려는 고구려와 무관

다음은 앞에서 봤듯이 고구려가 중국의 지방정권이라는 게 역사적 사실인데도, 그동안 고구려사를 한()민족의 역사라고 생각한 것은 후대인들의 잘못된 역사인식에서 비롯됐다는 것이다. 이 시론은 이런 논리를 펴기 위해 고려는 결코 고구려의 계승자가 아니다라고 주장한다.

왕씨 고려가 건국한 것은 고씨 고려(고구려)가 멸망한 때로부터 250년 후인 서기 918년이었다. 그러나 왕씨 고려는 한반도에 있던 신라 정권을 대치하였고 그 이듬해에 후백제를 멸망시켜 반도 중남부의 대부분을 통일하였다. 주민 구성에서도 신라 백제인이 주축이 되었다. 왕건은 고구려의 후예가 아니라 한족(漢族)일 가능성이 높다. 그후 이조가 왕씨 고려를 대신해 최종적으로는 이씨 조선으로 발전하였다. 이러한 정권들의 강역(疆域: 영토) 범위는 한 번도 한반도를 벗어난 적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거에 왕씨 고려를 고구려의 계승자로 본 것은, 중국 사서들이 명백한 오류를 범했기 때문이다. 결국 중국의 고대 변방민족이 사용하던 고려라는 명칭을 왕씨 정권이 도용하게 되었고, 이조(李朝)는 기자조선이 쓰던 조선(朝鮮)’이라는 이름을 또 도용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현대인들은 중국 고대 동북지역에 있었던 변방정권의 연혁을 이해하는 데 있어 많은 혼란과 잘못된 견해를 갖게 되었다.

고구려 다음은 고조선

아전인수격 해석으로 과거 역사를 왜곡하는 것에 대해 우리 학계의 반박논리는 고구려 건국세력은 압록강 일원에서 농경하던 예맥족으로, 만주계와 구별되는 우리 민족의 조상 고구려는 한() 군현인 현토군을 압록강 중류 일대에서 요동 방면으로 몰아내면서 건국 조공?책봉 관계는 전근대적 외교형식이며 실질적 내용은 시기별로 다양 주변국을 생각하지 않는 중화주의적 세계관 고구려의 문화?역사는 통일신라와 발해를 거쳐 우리 민족문화로 이어졌으며, 중국 등지로 이주한 유민은 고유한 정체성 상실 사료의 자의적 해석과 왜곡 등이다한겨레신문.

역사적 사실에 대해 객관적 학문적 접근을 통해 이끌어낸 것이 아니라, 현실의 정치적 필요에 따라 짜 맞추기 식으로 역사를 해석하고 왜곡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게다가 중국은 고구려사 편입 추진은 이러한 고대사 빼앗기의 신호탄에 불과하다는 우려의 목소리도 높다. 발해사에 이어, 이제 고구려사를 한민족의 역사에서 분리시키고 다음에는 고조선사까지 노릴 것이라는 전망이다. 이렇게 되면 한민족의 역사는 만주지방에서 활동한 고조선, 부여, 고구려, 발해의 역사가 빠진 채로 삼한, 백제와 신라, 고려 등으로 축소될 것이라는 우려이다.

중화주의에 대한 대응은

만약 로마 교황청이 1천년의 유구한 역사를 무기로, 21세기 국제정치 무대에서 카놋사의 굴욕과 같은 영광을 꿈꾸며 역사를 서술한다면...

하지만 동북아시아에서는 일본의 우경화에 이어 이제는 중화 패권주의에서도 이런 움직임을 볼 수 있다. 특히 이들의 경우 현재의 국력과 국경을 중심으로 역사에 대해 배타적 권리를 주장하려 하고, 이렇게 해서 재구성된 역사를 통해 다시 현실을 지배하려고 한다는 점에서 백안시할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일본 우익들의 과거사 왜곡이나, 중국이 고구려사를 편입하기 위해 벌이는 연구는 정치의 시녀로서 역사에 불과한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대응은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하는가. 같은 차원의 대응을 한다면 그건 정치의 영역인지, 학문의 영역인지 모호해질 수 있다. 뒤늦게 나서 순수한 객관적, 학문적 자세로만 접근하고 있기도 쉽지 않을 것이다.

또한 패권주의나 중화주의 등 청산되어야 할 과거의 유산을 현재의 역사 연구의 지침으로 삼고 있다면, 제국주의의 세계 침략사 역시 중국 사가들의 관점대로라면 영토 확장을 위해 벌인 노력으로 평가될 것이다.

주변국가들이 패권주의, 국가주의 등 과거의 낡은 유산을 오히려 강화하고 계승하려 하는데, 우리는 이들의 움직임에 어떻게 대응하고 어떤 가치를 지향해야 할 것인가라는 문제이다. 마치 핵 강국인 러시아와 중국, 잠재적 핵 강국인 일본의 틈바구니에서 우리가 취할 방도는 무엇인가라는 문제만큼이나 복합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Posted by 원주유
고구려 역사와 문화2013. 9. 14. 17:09

 

고구려 15대 미천왕 = 호양왕, 을불, 을불리, 우불 (재위 300년~331년)

293년 아버지 돌고가 백부인 봉상왕에게 반역으로 몰려 죽임을 당하자 미천왕은 살아남기 위해 신분을 속이고

수실촌이라는 곳으로 가서 머슴살이를 했었다.

당시의 부호였던 주인 음모는 미천왕이 왕족인 것도 모르고 머슴들처럼 심하게 노동을 시켰다.

예를 들어 낮에는 나무를 베어오게 하고 밤에는 연못의 개구리 때문에 잠을 잘 수 없다 하여 개구리 소리가 들리지 않도록

밤새도록 돌과 기와 조각을 던지게 하여 편히 잠을 잘 수 없었다고 한다.

참다못한 미천왕은 음모의 집을 나와서 동촌으로 갔다.

그곳에서 재모란 사람을 만났는데 그는 소금장수였다.

재모는 미천왕이 착하고 신의가 있어 보였으므로 함께 소금장사를 하자고 하여 압록강에서 소금을 떼어와

여러 마을을 돌아다니며 팔았다.

어느 날 미천왕이 배를 타고 압록강 동쪽의 사수촌이란 마을로 가 어떤 노파의 집에 머물렀다.

노파가 숙식비로 소금을 달라고 하자 미천왕은 노파에게 소금 한말을 지불했다.

노파가 더 달라고 했지만 그는 한 말이 적당한 값이라며 더 주지 않았다.

주인 노파는 이것에 앙심을 품고 자신의 신발을 미천왕의 소금짐 속에 감춰 두었다.

다음날 미천왕이 소금짐을 지고 떠나는 데 노파가 쫓아와 신발을 찾아내고는 압록 태수에게 미천왕을 고발하였다.

압록 태수는 미천왕에게 절도죄를 적용해 태형을 가한 다음 소금을 압수하어 노파에게 주었다.

미천왕은 억울하기 짝이 없었지만 신분이 탄로날까봐 두려워 아무 말도 못하고 관가를 떠났다.

이렇게 고난의 나날을 보내던 미천왕은 얼굴이 여위고 옷이 다 헤져 그 누구도 그가 왕손임을 알아보지 못했다.

봉상왕이 폭정을 거듭하자 당시 국상이었던 창조리는 왕을 폐위시켜야겠다고 생각했다.

폐위시키고 난 다음의 왕을 옹립해야 하는 데 그것이 문제였다.

왜냐하면 봉상왕은 왕권을 도전할 만한 왕족은 모조리 죽였기 때문이다.

창조리는 미천왕이 어딘가에 살아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북부의 조불과 동부의 소우를 비밀리에 보내 미천왕을 찾도록 했다.

국상의 밀명을 받은 두 사람은 각 부락을 은밀히 돌아다니며 미천왕을 수소문했다.

그러던 어느 날 비류강가에서 미천왕을 만났다.

두 사람은 미천왕에게 "지금 국왕께서는 무도하여 국상이 여러 신하들과 몰래 왕을 폐하기로 모의하였습니다.

을불 왕손께서는 행실이 검소하고 성격이 인자하여 백성을 사랑하시므로 선왕의 유업을 이을 만 하옵기에 신 등을 보내어

받들어 모시게 하였습니다." 처음에는 자신의 신분을 부인하던 미천왕은 그 두 사람이 숙부가 보낸 암살자가 아니라

창조리가 보낸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다.

창조리는 미천왕을 만났고 300년 9월 봉상왕이 사냥을 나갈 때 동지를 규합하여 봉상왕을 사로잡아 별실에 감금하고

군사로 하여금 지키게 했다.

그리고 곧 을불을 불러 옥새를 올리고 왕위에 즉위하게 하였다.

이렇게 하여 소금장수 을불은 고구려 제15대 왕이 되었다.

미천왕은 즉위 3년(302년)부터 정복전쟁을 개시했다.

그해 9월 왕은 몸소 3만의군사를 이끌고 만주 지방의 현도군을 공격했다. 이 싸움에서 미천왕은 8,000명의 적을 사로잡았다.

이후로 내정에 치중하고 중국 정세를 살피다가 311년 8월 요동의 관문인 서안평을 공격해 빼앗았다.

서안평은 과거 동천왕이 공격하려다가 관구검의 역공을 받아 오히려 나라가 멸망할 지경에까지 빠지게 했던 중요한 지역이었다.

미천왕은 서안평을 점령함으로써 중국 대륙과 낙랑군, 대방군과의 연결고리를 끊었다.

미천왕은 그 여세를 몰아 313년 낙랑군을 공격하여 2,000여명을 포로로 잡았다. 그리고 다음 해에는 대방군을 공격해

중국 군현을 한반도에서 완전해 내몰았다. 이렇게 하여 고구려는 마침내 압록강에서 서해까지 진출하게 되었다.

이로써 400년동안 한반도를 지배했던 낙랑군과 대방군이라는 중국 식민지는 사라졌다.

미천왕은 그들이 지배했던 대동강 유역과 압록강 하류를 차지한 다음 다시 서북진해서 요동군과 현도군을 공격해 영토를 확장했다.

이 과정에서 당시 요동 지방에 세력을 떨치고 있던 선비족 모용씨의 연나라와 충돌했다.

미천왕은 연나라의 모용씨와 요동 지방을 놓고 일진일퇴를 거듭했다.

319년 진나라의 평주자사 최비의 권유에 따라 선비족의 일파인 단씨, 우문씨와 함께 모용외를 공격했다.

하지만 이 연합공격은 실패했고 모용외는 일단 요동을 수중에 넣어 유리한 고지에 섰다.

미천왕은 국경을 마주한 연나라를 견제하기 위해 그 배후에 있는 후조와 손을 잡았다.

미천왕은 결국 요동에서 연나라를 축출하지 못하고 즉위 32년만에 331년 2월에 갑자기 서거했다.

342년에 고구려로 쳐들어온 전연의 군대가 미천왕릉을 도굴하여 시신을 가져갔으며 고국원왕은 343년에 많은 공물을 바치고

시신을 돌려받았다.

* 큰아버지=봉상왕 * 아버지=고추가 돌고 * 어머니=?

* 왕후=왕후 주씨 * 아들=고사유(16.고국원왕) / 고무

창조리

창조리는 남부 출신으로, 봉상왕 3년인 294년 국상 상루가 죽었을 때 대사자의 직위에 있었다.

이때 상루의 뒤를 이어 국상이 되었고, 작위는 대주부가 되었다.

당시 고구려는 선비족 모용부의 수장 모용외의 침략에 시달리고 있었다.

봉상왕 5년인 296년에는 고국원까지 침입하여 서천왕의 무덤을 파내려고 시도하기까지 했다.

이에 봉상왕은 창조리를 불러 대책을 논의하였다. 이에 창조리는 "북부의 대형(大兄) 고노자가 어질고 용감하다"고 답했다.

이에 왕이 고노자를 동북부 변경의 신성의 태수로 삼자 모용외는 침략을 멈추었다.

모용외로부터 안전해진 다음부터 고구려에는 이상한 일들이 벌어졌다.

봉상왕 7년인 298년 가을에는 우박이 내려 농사를 망쳤으며, 이듬해 가을에는 귀신이 출몰하고 객성이 달을 가렸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봉상왕은 궁궐을 개축하고 자신의 조카 을불을 죽이려 하는 등의 행위로 신하들의 불만을 샀다.

봉상왕 9년인 300년에도 괴이한 일은 계속되었다. 정월부터 지진이 나고, 6개월 동안 비가 내리지 않았다.

8월이 되자 왕은 15세 이상의 남녀를 뽑아 궁실을 수리하였는데, 이로 인해 백성들의 생활이 더욱 더 궁핍해졌다.

이에 창조리는 백성이 도탄에 빠진 상황에서 토목 공사를 진행하는 것은 군왕의 도리에 어긋나는 행위라고 간하였다.

이에 왕은 "임금은 백성을 우러러 보는 자리인데, 궁궐이 화려하지 않으면 무엇으로 위엄을 보이겠는가?"라고 답했다.

그러고는 오히려 자신을 비판하여 백성들의 신망을 얻고자 함이냐고 되물었다.

이에 창조리는 다시금 "임금이 백성을 불쌍히 여기지 않으면 어진 임금이 아니요, 신하가 임금에게 간하지 않으면

충신이 아닙니다."라고 답했다.

이에 왕은 웃으며 "그대는 백성을 위해 죽고자 하는가?"라며 창조리의 말을 무시했다.

왕의 마음을 돌릴 수 없음을 안 창조리는 다른 대소신료들과 폐위를 논의하였다. 논의 끝에 을불을 새 왕으로 세우기로 하고

창조리는 북부의 조불과 동부의 소우를 파견하여 을불을 찾게 하였다.

을불은 처음에 거절하였으나 이들의 설득에 결국 창조리를 찾아 왔다.

창조리는 일단 그를 숨겨 두고 지지파를 모으기 시작하였다.

9월이 되자 봉상왕은 신하들과 함께 사냥을 떠났다.

이때 창조리가 "나와 뜻을 같이 하는 자는 나를 따라 하여라."라고 선언하며 갈대잎을 관에 꽂았다.

그러자 모두들 이를 따랐다.

자신의 지지 세력을 확인한 창조리는 봉상왕을 별실에 가두고 을불을 맞아 옥새를 바치고 왕위에 오르게 하였다.

고구려 16대 고국원왕 = 사유, 쇠, 국강상왕 (재위 331년~371년)

314년 왕태자에 책봉되었고, 331년 음력 2월에 미천왕의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334년에는 평양성을 증축했고, 335년에는 신성 축성, 342년에는 환도성과 국내성을 증축하는 등 변경의 방비를 갖추었다.

또한 전연을 견제하기 위해 336년, 343년에 걸쳐 동진에 사신을 파견하기도 하였다.

336년에는 전연에서 일어난 모용인의 반란에서 실패하고 망명해온 곽충과 동수를 맞아들었으며,

338년에는 후조와 전연의 전쟁 시 후조와 내통하였던 봉추, 송황 등의 망명도 받아들였다.

339년 전연이 쳐들어와 신성에 이르니 고국원왕이 동맹을 청하여 물러갔다.

이때 맺은 동맹 관계에 따라 340년에 전연에 조회하기도 하였다.

342년 겨울, 전연의 모용황은 용성으로 천도한 후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로 쳐들어왔다.

전연군은 평탄한 북쪽 길로 왕우가 이끄는 1만 5000명은 소수의 군대를 보내고 모용황과 한수는 험난한 남쪽 길로 5만 대군을

보내는 기만전술을 펼쳤으며, 이에 속은 고구려군은 북쪽으로 왕제 무가 이끄는 정병 5만을 파견하고 남쪽은 왕이

직접 소수의 군대로 지켰다.

이에 고구려군은 남쪽 길에서 크게 패해 장군 아불화도가가 전사하고 환도성은 함락되었으며 왕은 단신으로 단웅곡으로 피신하였다.

왕을 추격한 전연군은 모후 주씨와 왕비를 포로로 잡았으나 북쪽 길에서 무의 군대가 크게 승리하였기 때문에 전연군은 퇴각하였다.

전연군은 퇴각하는 길에 미천왕릉을 파헤쳐 미천왕의 시신을 가져갔고 5만 명의 백성을 잡아갔다.

343년, 고국원왕은 동생 무를 보내 전연에 신하의 예를 갖추고 미천왕의 시신을 돌려받았으며 평양의 동황성으로 거처를 옮겼다.

345년에는 전연이 모용각을 보내 남소를 함락시켰으며, 349년에는 전연의 망명자였던 송황을 전연으로 송환하였다.

355년에 이르러서 전연에 간청하여 모후 주씨를 돌려받는 데 성공하였으며 전연으로부터 책봉을 받아

‘정동대장군 영주자사 낙랑공 고구려왕’이 되었다.

이후 전연은 전진의 공격을 받아 쇠퇴하였으며, 370년에 전진에 의해 멸망하였다.

이때 고국원왕은 고구려로 도망쳐온 태부 모용평을 체포하여 전진에 송환함으로써 전진과의 우호관계를 수립했다.

고국원왕은 369년에 백제를 공격하였으나 치양에서 백제의 왕자 근구수에게 패하였다.

371년에 다시 백제를 공격한 고국원왕은 패하에서 복병을 만나 패하였다.

이해 겨울 10월에 백제 근초고왕이 평양으로 공격해오니 고국원왕이 이를 막다가 활에 맞아 전사하였고 고국의 들에 장사지냈다.

* 부왕=미천왕 * 모후=왕후 주씨

* 제1왕후=? * 아들=고구부(17대 소수림왕) / 고이련(18대 고국양왕)

고구려 17대 소수림왕 = 구부, 소해주류왕, 해미류왕 (재위 371~384)

355년에 태자가 되었고 371년에 고국원왕의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371년 고국원왕이 백제 군과 평양에서 싸우다가 전사하자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소수림왕이 즉위한 시대에는, 국왕이 전사한 상황에서 국가의 체제 정비의 필요성이 대두되고

넓은 영토와 주민들을 체계적으로 통치할 제도의 정비가 요구되던 시기였으므로, 고구려 사회의 체제 정비를 위한 정책을 취하였다.

372년 전진의 3대 황제 부견으로부터 승려 순도가 와서 불상과 경문을 전함으로써 최초로 고구려에 불교가 전래되었다.

374년에는 아도가 전진에서 건너와 불도를 고구려에 전하였다.

소수림왕은 375년에 초문사, 이불란사를 창건하여 불교의 수용 및 보급 정책을 취하여, 전진과 평화적 관계를 수립하고,

호국사상으로 삼았다.

태학을 설립하여 유교적 정치이념에 충실한 인재를 양성하여 중앙집권적 정치제도에 적합한 관리를 양성하였다.

373년에는 율령을 반포하여 국가통치와 사회질서 유지를 위한 규범들을 갖추었다.

율은 형법법전, 령은 비형벌적 민정법전으로 중국에서 성립된 성문법이다.

이와 같은 소수림왕의 체제 정비 시책들을 기반으로 고구려는 광개토대왕조 제위 시대 전성기를 누렸다.

대외 관계에 있어서는 백제와 충돌이 계속되었는데, 375년에는 백제의 수곡성을 빼앗았으며

377년에는 3만 대군의 백제군 침공을 물리치고 백제의 북변을 역습하였다.

378년에는 극심한 가뭄이 든 상태에서 거란의 침략을 받아 8개의 부락을 빼앗기기도 했다.

384년에 서거하여 소수림에 장사지냈다. 이어 동생 이련이 제위에 올랐다.

* 부왕=고국원왕 * 모후=?

* 동생=이련(18대 고국양왕)

순도

순도는 4세기 인물로 고구려 소수림왕 2년인 372년에 전진의 왕 부견의 사자를 따라 불교를 전했는데,

이것은 한국으로의 불교 전래에 대한 최초의 공식적인 기록이다.

고구려 소수림왕 2년을 전후하여 삼국은 모두 불교를 받아들이게 된다.

순도는 불상과 불경을 가지고 고구려로 왔는데 고구려의 왕과 신하들은 그를 귀인으로 맞이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순도는 고구려의 최초의 사찰인 초문사 혹은 성문사에 머물면서 불교를 포교하였다고 한다.

고구려에는 처음 순도가 들어오고 그 2년 후에 아도가 들어왔는데 이들은 모두 인도 또는 서역 승려일 가능성이 짙다.

그 이유는 순도의 경우 중국천하를 돌아다니면서 전도하다가 고구려로 온 것으로 표현하고 있고

아도는 일반적으로 인도 승려로 추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설에 따르면 순도는 동진에서 왔다고도 한다.

아도

아도는 아두라고도 한다. 아도에 대해서는 세 가지 다른 기록이 있다.

첫 번째는 순도가 고구려에 불교를 전한 때인 고구려 소수림왕 2년(372년)의 2년 후인 소수림왕 4년에 고구려에 입국하여

불교를 전한 승려로서의 기록이다. 이 아도는 일반적으로 인도 승려로 추정하고 있다.

두 번째는 국적 불명의 승려로, 삼국사기에 따르면 이 승려는 눌지왕(재위 417~458) 때 고구려에서 신라로 건너와 불법을 전했다.

소지 마립간(재위 479~500) 때 시자 3명을 데리고 일선군 모례의 집에 머무르다가 죽었다.

이 두 번째 인물과 첫 번째 인물이 동일인인지 아니면 동명이인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이 두 번째의 아도가 신라에 전한 불교는 이후 법흥왕(재위: 514-540) 때 이차돈이 순교하여 이적을 보임으로써 널리 퍼지게 된다.

세 번째 기록은 삼국유사에 나오는데, 이에 따르면 아도는 고구려의 승려로, 5세에 출가하여 16세 때 위에 가서 아버지

굴마를 찾아뵙고, 19세 때 다시 고구려에 돌아와 어머니 고도령의 명을 받들어 미추왕 2년(263년)에 신라 왕가에 불교를

전파하려다 실패했다.

그 후 3년 동안 일선현 모례의 집에 숨어 있었으나 미추왕의 딸 성국공주의 병을 고쳐준 공으로 그때부터 불교의 전도를 허가받고

흥륜사를 지었다. 미추왕이 죽은 후 사람들의 미움을 사 다시 모례의 집에서 땅굴을 파고 들어앉아 죽었다.

이 인물이 행적이 유사한 묵호자와 동일인물인지는 불명하다.

 

Posted by 원주유
고구려 역사와 문화2013. 9. 14. 16:07

 

 

고구려왕 계보

 

해모수       유화부인

소서노      동명성왕    예씨부인

 

               유리명왕

비류 온조

1.동명성왕(재위BC37년~BC19년) : 고구려의 개국 시조이자 초대 군주이다.

휘는 주몽, 추모, 상해, 추몽, 중모, 도모 등이 있으며 동명왕, 동명제, 동명성제라고도 한다.

BC 37년, 나라를 세워 국호를 고구려라 하고, 성을 고라 하였다. (원래 성은 해이다.)

BC 36년, 비류국의 왕 송양의 항복을 받았고, BC 34년에는 성곽과 궁실을 건립하였으며, BC 33년 행인국을 정복하고, BC 28년 북옥저를 멸망시켰다.

2.유리왕(재위BC19~AD18) : 휘는 유리, 유류, 주류이고 유리명왕이라고도 하며 동명왕의 맏아들이다.

BC 19년, 부여로부터 아버지 동명왕을 찾아 고구려에 입국, 태자로 책립되고 동명왕에 이어 즉위하였다.

(동명성왕이 남긴 징표 부러진 칼 조각을 주춧돌에서 찾아냈다는 설화가 있다.)

BC 17년, 계비인 치희를 그리는 황조가를 지었다.

BC 9년, 고구려를 위협하던 선비족을 토벌하였다.

BC 6년, 부여의 대소왕이 고구려에 볼모를 요청하였고 유리왕은 부여의 강력한 국력 때문에 태자 도절을 인질로 보내려 하였으나, 도절이 두려워 가지 않았다. 이에 대소는 군사 5만여 명을 이끌고 고구려를 침공하였으나 폭설로 많은 군사를 잃고 퇴각하였다.

3년, 도읍을 홀본(졸본)에서 국내성으로 옮기고 위나암성을 쌓았다.

9년, 부여왕 대소가 고구려를 침략하겠다고 위협하자 왕자 무휼은 부여의 사신에게 부여의 내부 사정부터 잘 다스리라 충고하여 돌려보냈다.

13년, 부여가 침공해 오자 무휼은 매복작전을 펼쳐 부여군을 크게 격파하였고 그 후 군사 2만으로 서쪽의 양맥을 쳤으며 한나라 고구려현을 빼앗았다.

유리명왕은 6명의 아들이 있었으나, 첫째인 도절은 요절하였고, 둘째 해명은 황룡국왕이 선물한 활을 부러뜨린 일로 자살하였다. 그리하여 셋째인 무휼이 왕위를 이어받게 된다.

유리명왕 ??? 송양왕의 딸

도절 해명 갈사국왕녀?대무신왕?원비 여진 민중왕 재사?부여태후

호동 모본왕 태조왕 차대왕 신대왕

3.대무신왕(재위18년~44년) : 유리왕의 셋째 아들로 휘는 무휼이고 대해주류왕이라고도 불린다.

14년, 태자로 책봉되어 군국정사를 맡아보다가 유리왕이 죽은 뒤 즉위한다.

20년, 부여의 대소왕은 대무신왕에게 몸은 둘인데 머리는 하나인 붉은 까마귀를 보내어 "까마귀는 검은 법인데 이제 빛이 변하여 붉게 되었고, 또한 머리는 하나인데 몸이 둘이니, 이는 두 나라가 병합될 징조이다."라고 선전포고를 하였다. 이에 대무신왕은 "검은색은 북방의 색인데, 이제 변하여 남방의 색이 되었다. 또한 붉은 까마귀는 상서로운 것으로 그대가 이것을 얻었으나 가지지 못하고 내게 보냈으니 양국의 존망은 알 길이 없도다."라며 까마귀에 대한 해석을 달리하여 대소왕에게 전하였다.

22년, 부여 정벌을 감행, 동부여를 공격하여 대소왕을 죽이고, 고구려에 병합하였다.

26년, 개마국을 쳐서 복속시켰고 그 후 구다국의 항복을 받아내어 국토를 살수 이북까지 확대하였다.

한편 을두지, 송옥구 등의 인재를 등용하여 국사를 맡겨 내치를 다졌다.

28년, 한나라 요동 태수가 군사를 이끌고 침략하였는데 고구려군은 을두지의 진언을 따라 위나암성에서 수십 일 동안 농성하였다. 한군이 포위를 풀지 않자 을두지가 계책을 내기를 저들이 물이 고갈되기를 기다리고 있는 모양이니 연못에서 잉어를 잡아 적장에게 보내도록 하였다. 그러자 적장은 성 안에 물이 있으니 단시일에 점령하는 것이 어렵다고 판단하여 퇴각하였다

32년, 왕자 호동을 시켜 낙랑군을 정벌하게 하였으며, 37년 재차 공략하였다.

(삼국사기-호동왕자설화 : 어느 날 옥저로 사냥을 나갔다가 낙랑 태수 최리의 딸인 낙랑공주와 사랑하게 되었다. 이때 낙랑에는 적병의 침입을 저절로 알리는 자명고가 있어서 정벌하기가 어려웠는데 호동이 낙랑공주를 꾀어 자명고를 찢게 하고 군사를 이끌어 정벌하였다. 태수는 이 사실을 알고 딸을 죽인 후 항복하였으나, 낙랑을 정벌한 호동은 원비의 참소와 공주에 대한 사랑의 번민으로 자살한다.

일설에는 대무신왕이 낙랑을 멸하기 위해 호동을 최리의 딸과 정략혼인시키고, 그녀를 본국으로 돌려보내 북과 뿔피리를 파괴하게 하였다고도 한다.)

4.민중왕(재위44~48) : 이름은 해색주, 대무신왕의 동생으로 대무신왕이 죽자 태자 해우(모본왕)가 어리므로 대신 즉위하였다.

44년, 대사면령을 내렸으며, 45년에는 신하들에게 큰 연회를 베풀었다.

47년, 사냥을 나갔다가 민중원에 이르러 석굴을 발견하고 그곳에 자신을 장사지낼 것을 명하였다.

48년, 왕이 죽자 유언에 따라 석굴에 장사지내고 지명을 따서 왕명을 민중왕이라 하였다.

5.모본왕(재위48~53) : 대무신왕의 차남으로 이름은 해우, 해애루이다.

49년, 한나라의 북평, 어양, 상곡, 태원등을 공격하였으나, 요동태수의 제의로 화친을 맺었다.

이 해에는 폭풍이 불고 서리와 우박이 내리는 등 악천후가 있어 사신을 보내 굶주린 백성들을 진휼하였다.

모본왕은 원래 성품이 포악하고 정사를 돌보지 않아, 백성들의 원성을 들었다.

51년, 기록하기를 "왕이 날로 포악해져 앉을 때는 사람을 깔고 앉고 누울 때는 사람을 베개로 베어 사람이 혹시 움직이면 용서없이 죽였으며, 신하 중에서 간하는 자가 있으면 활을 쏘았다."고 하였다.

53년, 결국 신하에게 피살되었다.

6.태조왕(재위53년~146년) : 유리왕의 손자, 고추가 재사의 아들로 휘는 궁이고 국조왕이라고도 불린다.

모본왕이 죽은 후 추대를 받은 재사가 연로함을 이유로 왕위를 거절하여 아들인 궁이 7살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였고 태후가 수렴청정 하였다.

기록에 따르면 태조왕은 태어나면서부터 눈을 떠서 볼 수 있었고 어려서도 총명하였다고 한다.

55년, 후한의 침공에 대비하여 요서 지역에 10개 성을 쌓았다.

56년, 동옥저를 병합하여 동으로는 창해, 남으로는 살수에 이르게 하였으며, 68년에는 갈사국을 병합하였다.

70년, 관나부 패자 달가를 파견하여 조나를 병합하였고, 72년에는 환나부 패자 설유를 보내 주나를 병합한다.

이러한 주변 소국 정벌 활동은 중앙집권화의 흔적으로 보고 있다.

태조왕은 정치체제 확립에 힘써 고구려를 종래의 부족 국가적 형태에서 강력한 중앙집권국가로 끌어 올렸다.

또한 태조왕 때부터 계루부가 왕위를 계승하였으며, 이후 고구려 왕 세차의 확실한 연대가 시작됨으로 실질적인 국가로서의 면목을 갖추게 된다.

98년에는 책성을 순수, 102년에는 책성을 안무, 114년에는 남해를 순수하는 등 확장된 영역에 대한 중앙의 통제력을 강화하는 작업을 진행하였다.

105년, 요동군을 공격하여 약탈했으나, 109년과 111년에는 평화적인 외교를 펼쳤다.

118년, 예맥과 더불어 현도와 화려성을 공격하였다.

121년, 후한이 예맥을 공격하자 태조왕은 동생인 수성을 보내 막도록 하였는데 수성은 항복을 가장하여 적군을 속인 후 요지를 장악하였으며 몰래 요동과 현도를 공격하여 큰 전과를 올렸다.

또한 요동의 선비족과 더불어 요수현을 공격하여 요동태수를 살해하였다.

그 후 마한, 예맥과 함께 현도성을 공격하여 포위하였으나 부여와 한나라가 협공을 펼쳐 크게 패하였고, 122년에도 마한, 예맥과 함께 현도성을 쳤으나 부여의 방해로 패배하였다.

121년부터 태조왕은 수성에게 국정을 돌보도록 하였다.

122년, 후한과 화친하였으나 146년에 다시 전쟁이 벌어져 요동의 신안과 거향을 약탈하고 서안평을 공격하여 대방현령을 죽이고 낙랑태수의 처자를 생포하였다.

146년, 동생인 수성(차대왕)이 왕위를 탐내자 그에게 양위하고 별궁으로 은퇴하여 남은 여생을 보냈다.

태조왕은 119세 나이로 서거하여 한국 군주 중 가장 장수하였고, 또한 가장 오래 군림한(93년) 왕이다.

7.차대왕(재위146∼165) : 태조왕의 동생으로 휘는 수성이다.

태조왕 치세 후반부터 장군으로 활약하였고 태조왕을 대신하여 국정과 군사를 통괄하였다.

146년, 측근들의 부추김을 받아 쿠데타를 모의하였으나 태조왕이 먼저 선위하고 물러남으로 차대왕은 그해 76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차대왕은 사람됨이 용장하여 위엄이 있었으나 인자하지 못하였고 횡포와 학정을 일삼아 백성들의 원성을 들었다.

147년, 왕위 계승을 반대하던 우보 고복장을 죽이고, 국가의 주요 요직에 자신의 측근을 임명하였다.

148년, 태조왕의 태자 고막근을 죽인 후 왕권을 확립하였으나, 결국 폭정으로 인해 명림답부에게 살해되었다

8.신대왕(재위165년~179년) : 재사의 아들, 태조왕과 차대왕의 동생으로 휘는 백고, 백구이다.

둘째 형인 차대왕의 폭정을 피해 산골에 숨어 살다가 차대왕이 시해된 뒤 왕으로 추대받아 77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166년, 좌, 우보를 폐지하고 국상제를 도입하여 명림답부를 이에 임명, 패자의 벼슬을 더하여 내외병마를 맡기고 나라를 다스렸으며, 차대왕의 태자 추안을 양국군에 봉하는 등 정치적 안정을 꾀하였다.

168년, 한나라 현도군태수가 대군을 이끌고 침입해오자 스스로 항복하였으며, 이듬해에는 현도태수를 도와 부산의 도적을 토벌하였다.

172년, 한나라가 쳐들어오자 청야전술로 대응하여 한군이 굶주림에 지쳐 퇴각하자 신대왕은 명림답부를 보내 좌원에서 한군을 크게 격파하였다.

신대왕

?? 고국천왕?우씨왕후 발기 산상왕 계수

 

9.고국천왕(재위179~197) : 신대왕의 차남으로 이름은 남무, 국양왕이라고도 한다.

176년에 태자로 책봉되었고, 179년 신대왕이 죽은 뒤 대신들의 추대를 받아 즉위하였다.

고국천왕은 키가 9척이고 겉모습이 크고 위엄 있었다고 한다.

184년, 한나라 요동태수가 쳐들어와 동생 계수를 보내 막았으나 패배하자 왕이 직접 출병하여 대승하였다.

191년, 을파소를 국상으로 등용하여 현정을 베풀고 을파소를 천거한 안류를 대사자로 삼았다.

194년, 빈농이 늘어나고 귀족의 노예가 되는 자유민이 증가하자 진대법(3~7월에 곡식을 대여하여 10월에 환납하는 것)을 실시하였는데 이로써 빈농을 구제하고 귀족세력의 확대를 막아 왕권을 강화시켰다.

왕권이 강화되면서 왕위계승 방법이 형제상속에서 부자상속으로 바뀌게 된다.

10.산상왕(재위197년~227년) : 신대왕의 아들이자 고국천왕의 동생으로 휘는 연우, 이이모이다.

고국천왕이 아들이 없이 죽자 왕후 우씨의 지지를 받아 즉위하였는데 이후 우왕후는 산상왕의 아내가 되었다.

이것은 고구려의 형사취수 풍습이 남아있는 것으로 우씨의 권력 유지를 위한 것이기도 했다.

산상왕의 형이었던 발기는 자신이 왕위에 오르지 못한 것에 불만을 품고 군사를 동원하여 왕궁을 포위하였으나 3일 동안 산상왕이 농성하는 가운데 고구려 국내에서도 발기를 따르는 자가 없자 요동으로 망명하였다. 그 후 발기가 요동 태수에게 군사 3만명을 얻어 고구려에 쳐들어왔고 왕은 동생 계수로 하여금 이를 막게 했는데 이 싸움에서 발기는 패하자 자살하였다.

198년, 환도성을 쌓았고 207년 서울을 환도로 옮겼다.

208년, 제사에 쓸 돼지가 달아나자 제사 담당자는 돼지의 뒤를 쫓아 주통촌에 이르렀는데, 거기서 후녀라는 여인의 도움으로 돼지를 잡았다. 이 소식을 들은 산상왕은 후녀를 몰래 찾아가 하룻밤을 보냈고 왕후는 이를 알고 분노하여 그 후녀를 죽이려 하였으나 후녀가 산상왕의 아들을 잉태하여 죽이지 못하였다.

이후 후녀는 아들 교체를 낳아 소후로 봉해졌고 213년에는 후녀의 아들 교체가 태자에 책봉되었다.

217년, 한나라 평주의 하요가 백성 1000여 호를 거느리고 와서 항복하였는데 왕은 그들을 받아들여 지금의 중국 훈춘 지방인 책성에서 살도록 하였다.

우씨왕후 ?? 산상왕 ??? 후녀(소후)

동천왕

관나부인 ? 중천왕 ? 연씨왕후 예물 사구

서천왕 달가 일우 소발 공주

11.동천왕(재위227∼248) : 아명은 교체(교제에 쓸 돼지와 관련된 사건으로 태어났다는 의미), 휘는 우위거, 위궁(태어나면서부터 사물을 본 것이 태조왕 궁과 닮아서 붙여짐)이며 동양왕이라고도 한다.

성품이 너그럽고 어질어서 화를 내지 않았다고 한다.

213년, 태자로 책봉되어 227년에 왕위에 올랐는데 때는 중국의 위, 오, 촉 3국의 대립시기로 동천왕은 위와 우호관계를 유지하였다.

236년, 오나라 손권이 사신을 파견하여 화친을 청해왔으나 사신을 죽여 그 목을 보냈다.

238년, 위나라가 오나라 공손 연을 토벌할 때 동천왕은 군사 1000여명을 보내어 위를 도왔다.

그러나 공손연 세력이 멸망하고 위나라와 국경을 접하게 되자 고구려는 위나라로부터 압력을 받기 시작했다.

242년, 서안평, 구련성 지방을 선제 공격하였으나 유주자사 관구검의 반격으로 환도성이 함락되고, 북옥저로 피란하는 등 정복활동이 일시적으로 위축되었다.

247년, 환도성이 복구할 수 없을 만큼 파괴되어 평양성으로 일시 천도했다.

248년, 신라에 사신을 파견하여 화친을 맺었다.

(245년 신라와의 전쟁, 248년 신라와의 화친의 사실 여부는 의심받고 있다)

248년, 동천왕이 서거하였는데 나라 사람들이 슬퍼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는 자가 많았다고 한다.

12.중천왕(재위248년~270년) : 동천왕의 맏아들로 휘는 연불, 중양왕이라고도 한다.

243년, 태자가 되었고, 248년에 왕위에 올랐는데 동생 예물과 사구 등이 모반하였다가 처형되었다.

250년, 국상의 권한을 확대하여 수도와 지방의 군권까지 겸하게 하였다.

251년, 측실 관나부인이 왕후 연씨를 시기하여 모함을 하자 왕이 분노하여 관나부인을 가죽 주머니에 넣어 바다에 수장하는 처벌을 하였다.

254년, 음우를 국상으로 삼았으며, 255년에 왕자 약로를 태자로 삼았다.

259년, 위나라가 쳐들어 오자 왕이 기병 5천 명을 이끌고 양맥에서 싸워서 이들을 무찌르고 8천여 명을 목베었다.

13.서천왕(재위270년~292년) : 중천왕의 차남으로 이름은 약로, 약우이고 서양왕이라고도 한다

255년, 태자가 되었고 270년에 즉위하였다.

280년, 숙신이 쳐들어오자 동생 달가를 보내 이를 격퇴하게 했는데 달가는 단로성을 빼앗아 추장을 죽이고, 6백여 가구를 부여 남쪽으로 이주시켰으며 부락 예닐곱 곳을 복속시켰다. 서천왕은 달가를 안국군으로 삼아 군대를 지휘하게 하였고, 양맥과 숙신의 여러 부락을 통솔하게 하였다.

286년, 동생 일우와 소발이 반란을 획책하여 거짓으로 병을 칭하고 입조하지 않자 서천왕은 이들을 재상으로 삼는다고 속여 입조한 두 사람을 처형하였다.

서천왕은 276년, 288년 두 차례에 걸쳐 신성으로 순행하였는데 이는 신성이 서쪽 변경의 중요한 거점이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특히 288년의 순행은 3월에서 11월에 걸친 장기간의 순행이었다.

서천왕 ??? 우씨왕후(우수의 딸)

봉상왕 돌고

 

미천왕

14.봉상왕(재위292년~300년) : 이름은 상부, 삽시루이고 치갈왕이라고도 한다.

어려서부터 교만하고 방탕하며 의심과 시기심이 많았다.

292년, 왕위에 올랐는데 숙부인 달가가 백성들의 추앙을 받음을 미워하여 음모하여 살해하였다.

293년, 동생 돌고에게 역모죄를 씌워 자살하게 하였다.

명신 창조리를 국상에 등용하여 연나라 모용외의 침입을 격퇴하기도 하였으나, 차츰 사치와 방탕을 일삼게 되었다.

298년, 흉년이 들었으나 궁궐을 증축하는 공사를 강행하여 백성들의 원성이 높았다.

이때 봉상왕은 신하들의 간언을 듣지도 않고, 백성들을 살피지 않았다.

300년, 또 흉년이 들었으나 다시 궁궐을 증축하여 백성들이 흩어졌고 이에 국상 창조리가 왕에게 백성을 돌볼 것을 간언하였으나 봉상왕은 오히려 왕권의 지엄함을 역설하며 창조리를 위협하였다. 이에 창조리는 여러 신하들과 모의하여 봉상왕을 폐위하고 을불을 맞이하여 왕으로 삼았다.

봉상왕은 화를 면하지 못할 것을 알고 두 아들과 함께 목을 매 자결하였다.

15.미천왕(재위300년~331년) : 서천왕의 손자, 고추가 돌고의 아들이고 이름은 을불, 을불리, 우불로 호양왕이라고도 한다.

293년, 아버지 돌고가 큰아버지 봉상왕에게 반역으로 몰려 죽음을 당하자 도망쳐 신분을 숨기고 고용살이와 소금장수 등을 전전하였다.

300년, 국상 창조리가 을불을 찾아 모셨으며 봉상왕을 폐위한 뒤 왕으로 옹립되었다.

미천왕은 즉위초부터 중국 군현세력과 치열하게 대립하며 국토확장에 전력하였다.

302년, 군사 3만으로 현도군을 공격하여 적군 8000명을 사로잡았다.

311년, 요동 서안평을 점령하였으며 낙랑군, 대방군의 보급로를 끊는데 성공하였다.

313년, 낙랑군을 공략하여 적군 1000명을 사로잡았고 이로써 낙랑군은 멸망하였다.

위와같이 미천왕때에는 서안평을 확보, 낙랑군과 대방군 등을 정복하여 고조선의 옛 땅을 회복하였으며 대동강 유역을 차지하여 경제적인 자원도 풍부히 얻게 되었다. 또한 백제 등과 국경을 맞대게 되어 남쪽으로 진출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였다.

314년, 대방군을 정벌하여 영토로 삼고 중국 군현 세력을 축출하였으며 317년 다시 현도성을 공격하였다.

당시 요동지역을 지배해 오던 진의 통제력이 약해지면서 선비족의 일파인 모용부가 세력을 확대함에 따라 고구려는 영토 확장을 도모하는 과정에서 이들과 자주 충돌했다.

318년, 진의 평주 자사 최비등과 연합하여 모용부를 공격하고자 하였으나 실패하였으며 이후 모용부가 요동을 장악하면서 본격적인 대립이 시작되었다.

319년, 최비가 요동을 잃고 고구려로 도망쳐 왔으며 이에 미천왕은 군사를 일으켜 요동을 공격하였는데 모용외 역시 두 아들을 보내 침략해 왔다. 이에 미천왕이 휴전을 청하여 잠시 휴전이 성립되었다.

320년, 다시 요동을 침략하였으며 이후 일진일퇴를 거듭하였다.

미천왕

고국원왕 무

 

소수림왕 고국양왕

광개토대왕

장수왕

16.고국원양(재위 331년~371년) : 이름은 사유, 쇠이고 국강상왕이라고도 한다.

314년, 태자로 책봉되어 331년에 즉위한 뒤 평양성을 증축하였으며 국내성을 수리, 신성을 축성하는 등 변경의 방비를 갖추었다. 또한 전연을 견제하기 위해 336년, 343년에 걸쳐 동진에 사신을 파견하기도 하였다.

342년, 4만 대군을 이끈 모용 황이 고구려로 쳐들어왔는데 고구려군은 남쪽길에서 크게 패하여 환도성이 함락되고 왕은 피신하였으며 모후 주씨와 왕비는 포로로 납치되었다.

(전연군은 평탄한 북쪽길로 소수의 군대를 보내고 험난한 남쪽길로 대군을 보내는 기만전술을 폈는데 이에 속은 고구려군은 북쪽으로 무가 이끄는 정병 5만을 파견하고 남쪽은 왕이 직접 소수의 군대로 지켰었다. )

전연군은 퇴각하는 길에 미천왕릉을 파헤쳐 미천왕의 시신과 함께 5만명의 백성을 잡아갔다.

343년, 고국원왕은 동생 무를 연나라에 파견하여 많은 조공을 바쳐 미천왕의 시체와 왕비를 찾아왔으며 평양의 동황성으로 거처를 옮겼다.

355년, 다시 조공하여 왕모 주씨를 돌려받는데 성공하였다.

이후 전연은 전진의 공격을 받아 쇠퇴하였으며, 370년에 전진에 의해 멸망하였다.

이때 고국원왕은 고구려로 도망쳐온 태부 모용평을 체포하여 전진에 송환함으로써 전진과의 우호관계를 수립했다.

369년, 고국원왕은 2만 군대로 백제를 공격하였으나 패하였다,

371년, 다시 백제를 공격하였으나 패하였고 그후 백제 근초고왕이 평양으로 공격해왔는데 고국원양은 이를 막다가 유시에 맞아 사망하였다.

17.소수림왕(재위371년~384년) : 이름은 구부이고 소해주류왕, 해미류왕이라고도 한다.

355년에 태자가 되었고 371년 고국원양이 전사하자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당시 국왕이 전사한 상황에서 국가의 체제 정비의 필요성이 대두되고 넓은 영토와 주민들을 체계적으로 통치할 제도의 정비가 요구되던 시기였으므로 소수림왕은 새로운 체제로 국가를 정비해 나갔다.

372년, 전진 왕이 보낸 승려 순도가 와서 불상과 경문을 전함으로써 최초로 고구려에 불교가 전래되었으며 곧 불교는 호국불교, 현세구복적인 불교로 신앙되고 발전되었다.

(불교를 도입한 이유는 전진과 평화적 관계를 수립하고자 한 것과 호국사상의 필요성 때문이다)

또한 유교교육기관인 태학을 세워 유교적 정치이념에 충실하고 중앙집권적 정치제도에 적합한 관리를 양성하였으며 민간에서는 각처에 경당을 세워 미혼의 자제들에게 독서와 궁술을 익히게 하였다. 그리하여 유교의 경전이나, 사기, 한서 등의 사서가 읽혀졌고 옥편, 자통과 같은 사전류가 유포되었으며, 특히 지식인 사이에는 중국의 문선 같은 문학서가 많이 읽혔다.

373년, 처음으로 율령을 반포하여 유학적 통치 이념 아래 고대 율령국가 체제를 구축하여 중앙집권적 고대국가로 발돋음 할수 있었고 이러한 소수림왕의 체제정비 시책들을 기반으로 고구려는 5세기에 전성기를 누렸다.

374년, 아도가 전진에서 건너와 불도를 전하였다. 이에 소수림왕은 초문사와 이불란사를 창건하여 순도와 아도를 기거하게 하는 등 불교의 수용 및 보급에 노력하였다.

375~377년에 걸쳐서는 백제의 수곡성을 빼앗고 3만대군의 백제군 침공을 물리치고 백제의 북변을 역습하는 등 백제와의 충돌이 계속되었다.

378년, 극심한 가뭄이 든 상태에서 거란의 침략을 받아 8개의 부락을 빼앗겼다.

18.고국양왕(재위384년~392년) : 고국원왕의 차남으로 이름은 이련, 어지지이고 국양왕이라고도 불린다.

385년, 군사 4만 명으로 후연의 요동을 공격하여 요동 및 현도를 점령하였다가 다시 빼앗겼다.

백제와도 치열하게 전쟁을 벌였는데 고국양왕은 백제를 정벌하여 국토를 넓히는데 힘썼다.

386년, 백제를 공격하였으며, 389년과 390년에는 백제의 침입을 받기도 하였다.

392년, 백제를 견제하기 위해 신라와 우호관계를 맺었다.

또한 불교를 장려하여 문화를 발전시켰으며 나라의 사직을 세우고 종묘를 수리하여 국가체제 확립에도 이바지하였다.

19.광개토대왕(재위392년~413년) : 이름은 담덕, 안이고 시호는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 국강상광개토지호태왕, 국강상광개토지호태성왕 등이 전해지며, 이를 줄여서 광개토대왕, 광개토태왕이라 부르기도 한다.

생존시 칭호는 영락대왕이였는데 영락이란 연호는 한국에서 사용된 최초의 연호였으며, 중국과 일본 등지에는 호태왕으로 알려져 있다.

386년, 태자로 책봉되었고 392년 즉위한 직후부터 백제와의 전쟁에 주력하였다.

그 해에 백제를 공격하여 석현성 등 10개 성을 함락하였고, 백제 북방의 중요한 요충지였던 관미성을 점령하였다.

또한 거란을 공격하여 500여 명을 노획하고 거란에 노획되었던 고구려인 1만여 명을 되찾아왔다.

백제는 빼앗긴 성을 회복하기 위해 계속해서 고구려를 공격하였다.

광개토왕은 백제의 공격을 393년에는 관미성, 394년에는 수곡성, 395년에는 패수에서 격퇴하였으며, 394년에 백제를 방비하기 위해 남쪽 변경에 7개 성을 쌓았다.

또한 평양을 크게 중시하여 393년에 9개의 절을 평양에 창건하고 399년에는 왕이 직접 평양에 행차하기도 하였다.

395년, 비려(거란일파)를 공격하여 염수 일대의 3개 부락과 600~700개 영을 격파하고 많은 가축을 노획하였다.

396년, 친히 수군을 거느리고 백제를 정벌하여 아리수 이북의 58개 성, 700여 개 촌락을 공략하고 위례성을 포위하자 이에 백제 아신왕이 항복하여 아신왕의 동생과 백제의 대신 10명을 인질로 받아 개선하였다.

이리하여 고구려는 한강 이북과 예성강 이동의 땅을 차지하게 된다.

398년, 숙신을 정벌하여 복속시켰다.

400년, 백제, 왜의 연합군이 신라에 침입하자 고구려와 동맹관계에 있던 신라 내물왕은 평양으로 사신을 보내 구원을 청하였다. 이에 광개토왕은 5만의 원군을 보내어 왜군을 물리치고 신라를 속국으로 삼았다.

같은해, 고구려와 우호관계를 유지하던 후연이 신성과 남소성을 함락시키고 700여 리의 땅을 탈취하였다.

402년, 광개토왕은 숙군성을 공격하였고 404년에도 후연을 공격하여 보복전을 펼쳤다. 이 과정에서 고구려는 요동성을 비롯한 요동 지역을 장악하였으며 이를 회복하기 위해 쳐들어온 후연군을 405년 요동성, 406년 목저성에서 격파하여 요동 장악을 확고히 하였다. 또한 후연을 견제하기 위하여 남연과 우호관계를 맺기도 하였다.

407년, 백제를 대대적으로 공격하여 6개 성을 점령하고 막대한 전리품을 노획하였다.

408년, 후연이 멸망하고 고구려계인 고운이 북연을 건국하자 우호관계를 맺어 서쪽 국경을 안정시켰다.

409년, 나라 동쪽에 독산성 등 6개 성을 쌓고 평양의 민호를 옮겨 살게 하였다.

410년, 동부여를 정벌하여 64성을 공파함으로써 동부여가 고구려의 판도 안에 들게 되었다.

위의 광개토왕의 정복활동을 다시 요약하자면, 서쪽으로 후연을 공격하여 요동을 모두 차지하고 요서의 일부 또한 확보하였으며, 북연과 친선관계를 수립하였고 북쪽으로는 부여와 숙신, 비려를 복속시켰으며, 남쪽으로는 백제를 쳐서 한강 이북을 빼앗아 위축시키고, 왜와 가야의 침공을 계기로 신라를 보호국화하는 한편 바다를 건너 침공해 온 왜를 섬멸하였다. 또한 가야를 공격하여 전기 가야 연맹을 해체시키기에 이르렀으며 동으로는 읍루를 정벌하였고, 동예를 완전히 병합하는 등 소수림왕의 정치적 안정을 기반으로 최대의 영토를 확장한 정복 군주이다.

광개토왕은 역대 왕릉의 정비에 힘써 수묘인 제도를 정비하고 실시할 것을 장수왕에게 유언하였다.

이러한 내치로 광개토왕릉비에는 "나라가 부강하고 백성이 편안하였으며 오곡이 풍성하게 익었다"라 칭송하는 기록이 남겨졌다.

20.장수왕(재위413년~491년) : 휘는 거련이고 100년 가까이 살았었다고 해서 장수왕이라는 시호가 바쳐졌다.

모습이 괴걸하고 지기가 호매한 대장부로 79년 동안 재위하였고 99세의 나이로 서거하였다.

409년, 왕태자에 책봉, 413년에 광개토대왕이 죽자 20살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으며 그해 동진과 국교를 맺었다.

427년, 내부적으로 왕권을 위상을 높여 귀족세력을 약화시키고 외부적으로 남진정책을 효율적으로 운영하기 위하여 수도를 평양으로 옮겼다.

고구려가 내부를 안정시키며 국제 정세를 관망하고 있는 동안 중국 대륙은 세력 다툼을 벌이며 새로운 형국으로 치달았다. 이들 나라의 패권 다툼 중에서 북위와 북연의 싸움이 고구려에 직접 영향을 끼쳤다. 장수왕은 외교관계를 안정시키기 위해 중국의 진, 송, 위 등과 사신을 교환하여 국교를 맺었으며 북연을 견제하였다.

430년, 북연왕 풍발이 병사하자 왕위다툼이 일어났고 결국 풍발의 아우 풍홍이 조카들을 제거하고 왕으로 등극하였다. 그러나 왕위 다툼은 조정을 동요케 해 국가 전체의 위기로 이어졌고, 북위의 침략을 용이하게 하였다.

435년, 북위의 기세로 북연은 몰락을 눈앞에 두고 있었고 이에 풍홍은 고구려에 밀사를 보내 후에 자신이 의탁할 수 있도록 요청했다.

436년, 북위는 대군을 동원하여 북연을 공격하였고, 풍홍은 급히 고구려에 밀사를 보내 도움을 청했다.

이에 장수왕은 갈로와 맹광에게 수만의 군사를 내주어 풍홍을 맞이해오도록 하였으며 후에 북위는 풍홍을 자신들에게 압송할 것을 요청했으나 장수왕은 이를 거절하였다. 하지만 환영연에서 풍홍이 고구려를 업신여기는 행동을 보여 장수왕은 분노하였고 풍홍도 장수왕에게 신하 대우를 받자 이에 분노하였다.

438년, 장수왕은 풍홍을 평곽으로 가게 했다가 다시 북풍에 머물도록 하였다. 또한 풍홍의 시종을 빼앗고, 태자를 볼모로 잡았는데 이에 풍홍은 분개하여 송나라에 사신을 보내 자신을 받아달라고 요청했다. 송의 유유는 고구려에 풍홍을 넘겨줄 것을 요청했으나 장수왕은 손수와 고구로 하여금 풍홍과 그의 가족들을 죽이라고 명했다. 결국 북풍에서 풍홍과 그의 가족 10여 명은 참살당하였으나 송의 사신 왕백구가 풍홍의 군사 7천여 명을 이끌고 손수와 고구가 이끄는 고구려군을 습격하는 바람에 고구는 죽고 손수는 생포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장수왕은 즉시 대군을 동원하여 왕백구를 사로잡아 송으로 압송시켰다. 이에 송은 고구려의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왕백구를 감옥에 가뒀다가 고구려의 눈을 피해 석방하였다.

440년, 신라가 고구려의 변경을 공격하여 변방 장수를 죽이는 사건이 발생했는데 이에 고구려가 군사적 대응을 검토하자 다급해진 신라는 사신을 보내 고구려에 사죄하였다. 이후 고구려와 신라는 한동안 평화를 유지하였다.

한편 백제와 신라는 고구려의 침공에 대비하여 이미 나제동맹을 맺고 있었는데 시간이 갈수록 이들 동맹관계가 더욱 강화되었다.

454년, 장수왕은 군사를 동원하여 신라의 북쪽 변경을 공격하고, 이듬해는 백제를 공격했다. 이에 신라와 백제가 동맹약조에 따라 연합군을 형성했고, 고구려는 나제연합군에 밀려 한동안 양국에 대한 공격을 중지하였다.

468년, 장수왕은 말갈 군사 1만을 동원하여 신라의 실직주 성을 빼앗았는데 이때부터 고구려와 나제연합군의 치열한 전쟁이 이어졌다.

469년, 백제가 군사를 동원하여 고구려의 남쪽 변경을 공격했고, 또한 북위에 사신을 보내 고구려 공격에 대한 군사 원조를 요청하였으나 북위는 이 사실을 고구려에 알려주었다.

장수왕은 승려 도림을 백제에 잠입시켰다. 도림은 백제의 국고와 민력을 소모시키기 위해 개로왕을 충돌질하여 대대적인 토목공사를 벌이도록 했고 백제의 경제적 혼란을 일으켰다.

475년, 장수왕은 대군을 거느리고 백제를 침입하여 수도 한성을 무너뜨리고 개로왕을 죽여 소수림왕 이래 국가의 숙원 사업이던 고국원왕에 대한 원수를 갚았다.

480년, 말갈과 함께 신라의 북변을 쳐 고명성 등 7성을 점령하였고 미질부까지 진군하였다.

이로써 고구려의 영토는 점점 확장되어 남쪽은 아산만에서 죽령에 이르고, 서북쪽은 요하에서 만주의 대부분을 포함한 큰 나라를 건설하여 전성기를 이루었다.

또한 종전의 부족연맹제도를 지방행정제도로 고쳐 5부를 신설하는 등 민정에도 개혁을 단행하였다.

장수왕

조다 승천

문자왕

안장왕 안원왕

양원왕

평원왕

21.문자왕(재위492년~519년) : 장수왕의 손자, 고추대가 조다의 아들이며 휘는 나운이고 문자명왕, 명치호왕이라고도 한다. 문자명왕 때 고구려 역사상 가장 큰 영토를 보유하였다고 한다

492년, 아버지가 일찍 죽었으므로 그가 장수왕의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당시 고구려는 백제와 신라의 연합작전으로 일진일퇴를 거듭 하였다.

494년, 부여가 항복하여 고구려에 완전 복속되었고, 신라군과 살수에서 전투가 벌어졌는데 신라가 패하여 견아성으로 들어가 농성하자 이를 포위하였으나, 백제가 3천 명의 구원군을 보내 공격해서 후퇴하였다.

495년, 백제의 치양성을 포위하였으나, 신라가 장군 덕지를 보내서 백제를 구원하므로 물러났다.

496년, 신라의 우산성을 공격하여 패하였으나 이듬해 다시 우산성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507년, 장수 고노를 시켜서 말갈군과 함께 백제의 한성을 공격하려 하였으나, 횡악과 싸우다가 물러났다.

512년, 백제를 침략하여 가불, 원산 두 성을 함락시키고, 포로 1천여 명을 사로잡았다.

전체적으로 보면, 광개토왕 이래 세력이 강해지기 시작하여 장수왕을 거쳐 문자왕에 이르는 동안 판도가 넓어지고, 세력은 더욱 강성해져 대국으로 발전하였다

22.안장왕(재위519년~531년) : 휘는 흥안이고, 문자왕의 맏아들이다.

498년, 태자가 되었고 519년에 문자명왕이 죽자 즉위하였다.

523년, 군사를 보내 백제를 침공하였다.

529년, 오곡에서 백제와 싸워서 이기고 2천여 명을 포로로 잡았다.

23.안원왕(재위531년~545년) : 휘는 보연이고 곡향강상왕, 향강상왕, 안강상왕이라고도 부른다.

안장왕의 동생으로 형의 사랑을 받았는데 후사 없이 죽은 형의 뒤를 이어 왕이 되었다.

그는 키가 7척 5촌이며 도량이 넓었다고 한다.

534년, 북위가 동위와 서위로 분열되자 동위와 양과의 양면외교를 적극 전개하여 안정을 유지하였다.

536년, 봄과 여름에 크게 가물었으므로 사신들을 보내 굶주린 백성들을 위무하고 구제하였다.

540년, 백제가 우산성을 포위하였으나 기병 5천 명을 보내 물리쳤다.

당시 홍수와 지진, 전염병, 가뭄, 황충, 기근, 태풍 등의 재난이 계속되어 어려웠다

542년, 음력 3월에는 바람이 크게 불어 나무가 뽑히고 기왓장이 날아갔고 음력 4월에는 우박이 내렸다고 한다.

왕의 후사를 둘러싼 세력다툼으로 사회가 동요되는 가운데 추군과 세군의 무력충돌 속에서 죽음을 맞았다.

24.양원왕(재위545년~559년) : 휘는 평성으로 안원왕의 태자이지만 안원왕 사후에 바로 즉위하지 못했다.

안원왕에게는 두 명의 아내가 있었는데, 서로 자신의 자식을 왕위에 올리고자 다툼이 있었고 무력 충돌로 번져서 평성 태자 쪽이 승리하여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당시 국상이였던 왕산악은 진의 칠현금을 개량하여 거문고를 만들었으며 100여 곡의 악곡을 지었다.

547년, 백암성을 고쳐 쌓고, 신성을 수리하여 전쟁을 대비하였다.

548년, 군사 6천 명으로 백제의 독산성을 공격하였으나, 신라의 장군 주진이 구원군을 이끌고 와서 실패하였다.

550년, 백제가 쳐들와 도살성이 함락되었다. 이에 백제 금현성을 공격하였으나, 이 틈을 노린 신라군에게 고구려 두 성을 함락되었다.

551년, 돌궐군이 쳐들어와서 신성을 포위하였으나 승리하지 못하자 백암성으로 옮겨 공격하였다. 이에 양원왕은 장군 고흘에게 군사 1만 명을 주어 싸우게 하여 1천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또한 신라가 다시 쳐들어와서 10개의 성이 함락되었다.

552년, 장안성을 쌓았다.

554년, 백제 웅천성을 공격하였으나 실패했다.

25.평원왕(재위559년~590년) : 휘는 양성이고 평강상호왕이라고도 한다.

557년, 태자로 책봉되었고 559년에 즉위하였다.

당시 수나라가 점차 고구려를 압박해왔고, 백제와 신라의 나제동맹이 깨져서 삼국이 서로 대립하던 시기였다.

평원왕은 중국의 진, 수, 북제, 후주 등 여러 나라와 친교를 맺었으며 장안성으로 천도하였다.

589년, 평원왕은 수나라가 쳐들어올 것에 대비하여 군사력을 강화시켰다.

평원왕

영양왕 영류왕 태양 평강공주

보장왕

26.영양왕(재위590년~618년) : 휘는 원, 대원이고 평양왕이라고도 한다.

565년, 태자로 책봉되었고, 590년 왕위에 올랐다.

당시 수나라가 중국 대륙을 통일하여 돌궐과 고구려에 압력을 가하고 있었다.

수나라는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 고구려의 영토를 염탐하였고, 그 후에도 몇 차례에 걸쳐 사신을 보내 지형을 알아보게 하였다. 마찬가지로 영양왕 역시 수나라에 사신을 보내 동태를 살폈다.

590년, 수나라는 고구려에게 조공을 바치라고 으름장을 놓았으나 수나라에 대해 경계를 게을리하지 않았던 고구려는 중국인 무기 기술자를 매수하여 병기들을 만들고 군량미를 저축하는 등 돌궐과도 동맹을 맺어 수나라와의 전쟁에 대비하였다.

598년, 수나라가 고구려를 공격하기 위해 비밀리에 군대를 양성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자 고구려는 말갈병 1만 명을 동원하여 요서 지역의 임유관을 선제 공격하였으나 점령하지는 못했다.

이에 자극을 받은 수나라 문제가 30만 대군을 동원하여 요동성을 공격하게 하였으나 고구려군은 미리 알아낸 보급선을 격파하여 군량 보급을 끊었고 때마침 장마가 닥쳐 수의 30만 대군은 결국 대패하여 병력을 대부분 잃고 퇴각하고 만다.

600년, 영양왕은 태학박사 이문진에게 명하여 유기 100권을 재편수, 신집 5권을 만들게 하였다.

또한 수나라에 사신을 보내 화친을 제의했고 수는 그 제의를 받아 들였다.

그 무렵 백제가 자신들이 길잡이 노릇을 하겠다며 다시금 수나라에게 고구려를 공격할 것을 요청했으나 수나라는 이를 거부하였고 이 소식을 접한 영양왕은 진노하여 곧바로 백제를 침공했다.

603년, 고구려는 신라의 북한산성을 공격하였고 이때 신라에서는 진평왕이 몸소 군사를 이끌고 대항하였는데 고구려군은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퇴각하였다.

607년, 백제의 송산성을 공격하였으나 함락시키지 못했고, 석두성을 공격하여 포로 3천 명을 사로잡아 끌고갔다.

608년, 신라의 변경을 습격하여 군사 8천명을 포로로 잡았고 우명산성을 함락시켜 신라의 북진을 차단하였다. 그리고 다시 여러 차례에 걸쳐 신라와 백제를 공격하여 양원왕 때 잃었던 아리수 이북의 영토를 거의 회복하였다.

610년, 일본에 승려 담징, 법정을 보내 종이, 먹의 기술을 전하였고 담징은 일본 호류사 금당내부의 벽화를 그렸다.

그 무렵 수나라의 황제로 등극한 양제는 돌궐에 압박을 가하여 돌궐 왕이 장안으로 입조토록 하였다.

이렇게 되자 수나라에 조공하지 않는 나라는 오로지 고구려밖에 남지 않았다. 수 양제는 여러 차례에 걸쳐 고구려에 조공을 바치라고 요구하였으나, 고구려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612년, 살수대첩 : 수나라 양제가 직접 113만 3800명 군사를 이끌고 고구려를 침공하였다.

군사는 하루 1군씩 보내 40일이 걸려 겨우 출발이 끝났으며 깃발은 960여리에 뻗쳤는데 수나라의 육군은 요동성으로, 수군은 대동강을 거슬러 평양성으로 향하였으나 두달이 지나도 함락시키지 못했다.

이에 양제는 30만 5천명의 별동부대를 조직하여 요동성을 포위 공격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자 압록강 서쪽에 집결시켜 단숨에 평양성을 공격하려 하였다. 이때 고구려 장수 을지문덕은 적의 허실을 보기 위해 거짓항복을 하여 적진에 들어갔고 그런 을지문덕을 적장 우중문은 사로잡고자 하였으나 유사룡의 말을 듣고 돌려보냈다.

돌아온 을지문덕은 청야 작전으로 대응하였고 적장 우중문은 그의 유도 작전에 속아 살수를 건너 평양성 북쪽 30여리 지점에까지 밀려왔다. 이에 을지문덕은 적장에게 5언시를 지어 보내 그의 어리석음을 비꼬았다.

神策究天文(신책구천문) 그대의 귀신같은 계략은 하늘의 이치를 다했고,

妙算窮地理(묘산궁지리) 그대의 기묘한 계락은 땅의 이치를 다하였네.

戰勝功旣高(전승공지고) 전쟁에 이겨서 그 공이 높으니,

知足願云止(지족원운지) 이제 만족할 줄 알고 그만 두기를 바라노라.

수나라군은 비로소 고구려에게 속은 줄 알고 황급히 퇴각하기 시작하였는데 을지문덕이 미리 살수에 둑을 쌓아 물을 얕게 하였고 이를 눈치채지 못한 수군이 살수를 반쯤 건넜을때 둑을 무너뜨렸다. 이에 수나라군은 물에 휩쓸리고 뒤이어 공격해 온 고구려 기병에 당해 수많은 사상자를 냈으며 생존자는 2700명에 불과했다고 전한다.

613년, 수 양제는 고구려를 재차 침공하였으나 요동성과 신성이 좀처럼 함락되지 않았고, 설상가상으로 본국에서 반란을 벌어져서 급히 퇴각하였다.

614년, 수 양제는 전국의 군사를 소집하여 다시 고구려 침공을 하려했으나 수나라 군대는 이미 전의를 상실한 상태였다. 이 사실을 간파한 영양왕은 화친을 제의했고, 수 양제는 화친 제의를 받아들였다.

이후로도 수 양제는 고구려 침략을 몇 번이나 계획했으나 중신들의 반대로 모두 실행되지 못했으며 무리한 잦은 대외 원정으로 경제가 피폐해지고 곳곳에서 반란이 끊이지 않는 등 수나라는 점차 몰락의 길을 걷고 있었다.

27.영류왕(재위618년~642년) : 평원왕의 차남, 영양왕의 이복동생이고, 휘는 건무, 성이다.

618년, 영양왕이 후사 없이 서거하자 왕위에 올랐다.

당시 중국 대륙에서는 수나라가 몰락하고 당나라가 건국되었다. 당나라는 각지에서 할거하는 군벌을 제거하는 등 통일 작업에 몰두하면서 외적으로는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 화친을 제의했다. 영류왕의 온건주의적 성향은 자연스럽게 친당 정책으로 이어졌고 두 나라는 우호적인 외교관계를 가졌는데 전쟁 당시 잡혀갔던 양국의 포로들을 교환하고 도교를 수입하는 등 여러 방면에서 교류하였다.

626년, 당 태종은 제위에 오르자마자 영토 확장 작업을 가속하였는데 고구려를 비롯한 백제, 신라 등 주변 나라들이 모두 당나라에 대한 경계를 강화하는 한편 당나라와 화친하였다.

631년, 영류왕은 당나라의 침략에 대비하기위해 부여성에서 발해에 이르는 천리장성을 축조하였다. 이 작업을 지휘하던 연태조가 축성 과정에서 지병으로 사망하자 아들 연개소문이 아버지 뒤를 이어 감독하면서 세력을 키웠다.

638년, 영류왕은 군사를 동원하여 신라의 북쪽 변경의 요지인 칠중성을 공격하였으나 패배하였다.

고구려가 신라와의 싸움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을 때 당나라는 동돌궐을 멸망시키고,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 왕태자를 장안에 입조시킬 것을 요구했다. 이 때문에 조정은 강경파와 온건파로 갈라져 치열한 논쟁을 벌였다.

(강경파는 왕태자를 장안에 보내지 말 것을 주장, 온건파는 왕태자를 보내 당과 관계를 더욱 돈독히 할것을 주장)

640년, 영류왕은 결국 온건파의 주장을 따라 왕태자를 장안에 보냈고 당 태종에게 서신을 보내 왕태자를 당나라의 국학에 입학시켜 줄 것을 청원하였다.

641년, 당 태종은 왕태자의 예방에 답하기 위해 직방낭중 진대덕을 고구려에 보내겠다는 서신을 보냈다. 진대덕은 고구려에 들어와 고구려의 지리를 자세히 관찰하는 것은 물론, 각 성에 배치된 군사력까지 면밀하게 조사하였다. 그후 당나라에 귀국한 진대덕은 태종에게 고구려를 칠 것을 간언하였다.

한편, 영류왕의 친당 정책으로 강경파의 불만은 점점 커져가고 있었는데 영류왕을 비롯한 온건파에서는 그러한 강경파의 불만을 무시했다. 급기야는 천리장성 축성 작업을 중단하자는 주장이 나왔고 천리장성을 쌓는 일을 감독하던 연개소문이 이에 강하게 반발하였다. 이에 영류왕과 온건파 대신들은 연개소문을 제거하려고 하였으나 영류왕이 자신을 죽이려고 한다는 것을 눈치챈 연개소문은 영류왕을 비롯한 온건파를 척결하려는 계획을 세운다.

642년, 연개소문은 천리장성으로 떠나는 열병식에 조정 신하들을 대거 초청한 뒤 모두 참살하였고 군사를 이끌고 왕궁으로 들이닥쳐 영류왕을 시해하였다. 태종은 영류왕이 죽었다는 전갈을 받고 곧바로 애도 의식을 거행하고 지절사를 고구려에 보내 조문하였다

28.보장왕(재위642년~668년) : 평원왕의 셋째 아들이자 영류왕의 동생인 태양의 맏아들로 휘는 장, 보장이다.

642년,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연개소문이 그를 새 왕으로 추대함에 따라 고구려의 마지막 왕이 되었다.

연개소문은 스스로 대막리지에 오른 후에 정권을 장악하였고, 보장왕은 그저 허수아비에 불과했다.

이에 따라 고구려에는 연개소문의 일인독재 체제가 성립되고, 이는 고구려의 멸망의 원인 가운데 하나가 된다.

643년,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도교를 구하여, 숙달 등 도사 8명과 함께 노자도덕경을 받아들였다.

한편, 신라에서는 백제의 공격으로 요지인 대야성(합천)을 빼앗기는 등 백제와의 공방전에서 점차 불리해져갔다.

신라의 선덕여왕은 고구려에 구원병을 요청하였으나 연개소문은 그 요청을 거절하였고 이에 신라는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백제와 고구려의 침략으로부터 도와 달라며 원군을 보내줄 것을 요청하였다.

당시 고구려 침략을 계획하고 있었던 당 태종은 흔쾌히 신라와 손을 잡게 된다.

고구려는 그들의 침략에 대비하기 위해 전국에서 군사를 모집하고, 변방의 성곽을 수리하며 군사 훈련을 하는 한편 당나라의 군대가 바다를 건너 평양성을 공격할 것을 염려하여 요동과 서해안 일대의 수군 경비를 강화하였다.

또한 백제와 손을 잡고 신라를 협공하였는데 당나라는 신라에 대한 공격을 멈추지 않으면 군사를 일으키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하지만 고구려는 과거에 신라에 빼앗긴 지역을 되찾기 전에는 전쟁을 멈추지 않겠다며 당나라의 요구를 거절하였다.

645년, 당 태종의 30만 군대가 고구려의 성 10여 개를 함락시키고 안시성으로 진격하였는데 연개소문은 고연수와 고혜진에게 15만의 군사를 주어 안시성을 지원하도록 하였다. 당 태종은 고연수에게 사람을 보내 신하의 예만 갖춘다면 빼앗은 영토를 모두 돌려주고 돌아가겠다고 회유했고 이에 고연수는 당 태종이 공격할 의사가 없다고 판단하고 싸움에 적극적이지 않았다. 태종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2만6천명의 기습병을 조직하여 고구려군을 급습하였고 그 과정에서 3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고연수와 고혜진은 직할부대 3만 6천 명과 함께 당나라에 투항하였고, 나머지 병력은 신성과 건안성으로 퇴각하였기때문에 안시성은 완전히 고립되었다.

그래서 당나라군이 안시성을 일제히 공격하였지만 성주 양만춘의 뛰어난 용병술에 힘입어 시간이 지날수록 안시성의 사기는 점차 올라가는 반면 당나라군은 사기가 저하되기 시작했다. 당 태종은 안시성보다 더 높은 토산을 쌓아 공격도 해보았으나 이 역시 실패로 돌아갔고 오히려 이 작전으로 많은 물량과 병력을 잃고 말았다.

당의 패배가 거듭되는 가운데 겨울이 다가와 당나라군은 추위와 배고픔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퇴각하였는데 퇴로에서 많은 동사자가 발생했으며, 이에 따라 군사들이 대거 몰살하는 상황에 처하기도 하였다.

당 태종은 패배를 설욕하기 위해 이후 몇 차례에 걸쳐 공방전을 벌였으나 싸우는 족족 퇴각하였다.

649년, 당태종은 고구려 정벌을 중지하라는 유시를 남기고 죽었고 이에 따라 두나라는 휴전 상태에 들어갔다.

그러나 고구려와 신라의 전쟁은 지속되었으며, 무열왕이 당나라에 사신을 급파하여 원군을 요청하자, 당나라는 군사를 내주어 고구려를 다시 공격하게 하였으나 패배하였다.

658년, 당 고종은 정명진과 중랑장 설인귀에게 군사를 내주어 다시 고구려를 침략하였으나 패하고 퇴각하였다.

661년, 백제를 멸망시킨 나당연합군은 그 여세를 몰아 고구려로 진격하였고 당 고종은 4만4천명의 병력을 징발하여 고구려의 변방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백제부흥군이 나당연합군의 후미를 치는 바람에 신라군이 다시 남진하여 백제 부흥군과 싸워야 했으며, 그 상황을 이용하여 고구려는 변방에 병력을 집결시켜 당나라군을 격퇴하였다.

이에 당나라군은 다시금 대군을 거느리고 평양성을 향해 진군하였으나 패하였고 당나라 조정에서는 고구려와 휴전해야 한다는 여론이 일어났으며, 당 고종은 일시적으로 고구려 공략을 중지하였다.

그해 당나라는 다시 고구려 정벌에 나섰는데 10만 대군의 당나라 함대가 대동강을 타고 평양성을 포위하여 치열한 공방전을 펼쳤고 서쪽에서는 당나라 육군이 압록강 일대를 향해 밀려왔다. 이에 연개소문은 맏아들 연남생에게 군사를 내주고 압록강 일대를 지키도록 하였으나 패퇴했다.

662년, 당나라군은 연개소문이 이끈 고구려군과의 사수 전투에서 패배하여 몰살되었으며 평양성을 공략하고 있던 당군대는 폭설이 내리는 바람에 황급히 퇴각하였다.

고구려는 당나라와 전투에서 많은 승리를 거두었지만 당이 신흥 대제국으로서 융성한 것과는 반대로 60여년에 걸친 수, 당과의 전쟁으로 국력은 쇠퇴해 가고 있었다. 백성의 생활은 파탄에 직면했고, 국가 재정은 탕진되었으며 동맹국 백제의 멸망과 고구려 지배층의 내분은 더욱 그 국력을 약화시키고 있었다.

666년, 연개소문이 죽자 그의 아들 연남생, 연남건, 연남산 사이에 막리지의 자리를 둘러싼 권력투쟁이 벌어졌다.

맏아들 연남생이 대막리지 직위를 이어받았지만, 연남건과 연남산은 형의 권력 독식에 불만을 품었다. 그래서 연남생이 변방을 순행하는 사이 왕명을 빙자하여 연남생의 측근을 없애고 연남생을 소환하려 하였고 이에 연남생은 아우들에게 쫓겨 국내성에 가서 당 고종에게 항복하였다.

그 후 보장왕은 연남건을 대막리지로 삼고 조정을 재편으나 이미 많은 신하가 제거되어 어수선하였고, 민심도 연남건 형제에게서 등을 돌렸다. 당 고종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연남생을 앞장세워 고구려를 재침략하도록 하였다.이렇게 되자 연개소문의 동생 연정토는 한반도 쪽의 12개 성을 가지고 신라에 투항해 버렸다.

668년, 당나라군의 대대적인 공격을 받아 여러 성과 마을이 함락되었고, 보장왕이 머무르던 평양성까지 함락되고 말았다. 보장왕은 항복을 선언하며 당나라로 끌려갔고 결국 고구려는 멸망하고 말았다.

고구려 멸망 이후 검모잠, 안승등의 고구려 부흥 운동이 지속되었으며, 안시성과 요동성 및 일부 요동의 성들은 671년까지 당나라에 항전하였다.

보장왕은 당 고종으로부터 벼슬을 하사받고, 그들이 평양에 설치한 안동도호부에 머물렀는데 고구려 유민의 부흥운동이 지속되자 당은 677년에 보장왕을 요동도독 조선군왕에 봉하고 요동에 머무르게 하여 고구려 유민을 무마하고자 하였다. 이때 그는 고구려의 재건을 노려 말갈족과 함께 군사를 일으키려다가 발각되어 681년에 양주에 유배되어 그곳에서 사망하였다.

 

 

 

 

Posted by 원주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