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역사와 문화2013. 9. 14. 18:58

 

 

백제 8대 고이왕 = 구이, 고모 (재위 234년 ~ 286년) 성은 부여.

구수왕이 죽은 뒤 아들 사반왕이 왕위를 계승했으나 어려서 정치를 할 수 없기 때문에, 초고왕의 아우인 고이왕이 즉위했다고 전한다.

여기서 고이왕이 초고왕의 아우라 함은 연대상으로 모순된다.

고이왕은 온조왕계와는 계보를 달리하는 우태 - 비류계 출신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구수왕의 사망 뒤 고이왕의 즉위와 사반왕의 폐위는 곧 초고왕에서 구수왕으로 계승된 지파의 몰락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내정면에서는 여러 가지 정치 제도와 복식 제도를 제정했으며, 그것은 고이왕이 죽은 뒤에도 지속되어

그 뒤 백제가 멸망할 때까지 4백 년간이나 이어져 백제의 기본 제도로 유지되었다.

재위 27년(260년) 봄 정월, 기존의 좌우보 체제를 개혁하여 여섯 개의 좌평을 두고, 그들에게 왕명 출납과 창고 관리, 의례 제정, 형벌 제도, 군사 업무를 각각 분담시켜 맡아보게 했다.

또한 16품의 관등 체계를 정비했으며, 관직의 위계에 따라 자주색, 다홍색, 푸른색 옷을 입게 하는 등 품계에 따른 왕과 귀족의 공복에 관한 제도도 정했다.

재위 기간 중 괴곡(충북 괴산군), 봉산(경북 영주시)을 중심으로 자주 신라와 충돌했다.

고이왕은 낙랑과 신라 그리고 말갈과 군사적으로 충돌하며 세력을 키워 갔다.

또한 남옥저의 일부를 점령하고, 중국 대륙의 서진과 외교관계를 맺었다.

강원도 북부에 자리 잡은 말갈(동예)족이 자주 침범해 왔는데, 고이왕대에는 말갈과도 우호관계가 조성되었다.

한사군의 후신인 낙랑, 대방과도 혼인을 통한 동맹관계를 형성했다.

재위 13년(246년) 위나라가 낙랑군과 삭방과 합공해 고구려와 전쟁을 벌이는 틈을 타서 낙랑군의 변방을 공격하기도 했다.

또한, 한나라와 낙랑군, 대방군 사이에 분쟁이 일어났을 때 대방군을 선제공격하여 대방태수 궁준을 전사하게 한 사건의 배후에도 고이왕이 이끄는 백제의 힘이 작용하였을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

관리로서 재물을 받은 자와 남의 것을 도둑질한 자에게는 3배를 징출케 하는 동시에 종신 금고에 처한다는 법령을 내려 기강을 바로잡았고, 신라의 국경을 침범하여 영토를 확장하였다.

그는 한강 유역의 여러 부족 사회를 보다 큰 연맹체로 결속하는 데 중심 역할을 담당하여 백제를 고대 왕국으로 성장케 하였다.

 

백제 9대 책계왕 = 청계왕, 책찬왕 (재위 286년 ~ 298년)

고이왕의 맏아들이며, 왕비는 대방왕의 딸 보과이다. 체구가 장대하고 의지가 굳세었다고 한다.

286년(책계왕 1)에 고구려가 대방을 공격하였을 때, 대방왕이 사위인 그에게 구원을 요청하자 군사를 보내어 고구려군을 물리쳤다.

이 때문에 고구려와의 사이가 나빠져, 고구려의 침입에 대비하여 아차성(서울 광장동 아차산성)과 사성(서울 풍납동토성)을 수축하였다.

그러나 298년 한군(낙랑의 군대)과 맥인(동예로 추정)의 침입에 맞서 싸우다가 적병에게 살해되었다.

* 부왕=8.고이왕 * 모후=?

* 왕후=보과부인(대방군 태수의 딸) * 아들=10.분서왕 * 손자=12.계왕

백제 10대 분서왕 (재위 298년 ~ 304년)

책계왕의 장자로 어려서부터 외모가 준수하고 총명하여 부왕의 총애를 받았다.

한군현 세력의 침입을 막다가 부왕이 전사하자 왕위를 계승하였다.

분서왕도 부왕과 마찬가지로 낙랑 등 한군현 세력에 대하여 강경책을 폈던 것으로 보인다.

304년(분서왕 7)에는 낙랑군의 서쪽 현을 공격하여 차지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해에 분서왕은 낙랑이 보낸 자객에게 피살되었다.

고이왕의 손자인 분서왕이 피살된 뒤 고이왕계가 몰락하고 초고왕계가 다시 왕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제11대 비류왕 다음에 분서왕의 아들 제12대 계왕이 잠시 왕위에 있었던 것으로 전하나, 고이왕계의 몰락을 막지는 못하였다.

* 부왕=9.책계왕 * 모후=보과부인(대방군 태수의 딸)

* 왕후=? * 아들=12.계왕

백제 11대 비류왕 (재위 304년 ~ 344년)

구수왕의 둘째 아들이고, 사반왕의 동생이다. 분서왕이 죽자 그의 아들이 아직 어려서 비류가 신하들의 추대를 받아서 즉위하였다.

힘이 세고 활을 잘 쏘았으며 성품은 인자하고 너그러웠다고 한다

그러나 이 혈족관계는 비류왕의 재위시기와 모순되는 면이 있어 의문점이 있다. 구수왕은 234년까지 재위하였으며,

비류왕은 그보다 70년 뒤에 즉위하여 40년간 재위한 것으로 되어 있어 연대에 무리가 나타난다.

당시 백제 왕실은 개루왕에서 갈라진 고이왕계와 초고왕계의 두 지파가 세력을 다투고 있었다.

초고왕의 아들인 구수왕을 계승한 사반왕은 즉위하자 곧 폐위되었으며, 방계인 고이왕이 왕위를 차지하였다.

그뒤 왕위는 고이왕의 아들 책계왕과 손자 분서왕에게 계승되었다.

그러나 책계왕과 분서왕 모두가 한군현 세력과의 분쟁에서 연달아 피살되는 사태를 당하여,

고이왕계의 세력은 큰 타격을 입게 되었다. 초고왕계인 비류왕의 즉위는 바로 이때 이루어졌다.

비류왕의 즉위는 초고왕계의 재집권을 뜻한다.

312년 음력 2월 신하를 보내어 백성들의 질병과 고통을 살펴보고,

홀아비, 과부, 고아, 그리고 늙어서 자식 없이 외롭게 지내는 사람들을 도와주었다.

그 중에서도 스스로 생활할 수 없는 자에게는 곡식을 한 사람당 3섬씩 주었다. 또, 해구를 병관좌평으로 삼았다.

321년 봄 정월에 왕의 서제 우복을 내신좌평으로 삼았으나 우복은 327년 북한산성을 근거지로 반란을 일으켰고 왕은 이를 토벌하였다. 337년 봄 음력 2월에 신라에서 사신을 보내왔다.

비류왕 대에는 자연재해와 천문현상 기록이 다수 남아 있기도 하다.

344년 겨울 음력 10월에 왕이 죽었고 계왕이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비류왕 다음에 고이왕계인 분서왕의 아들 계왕이 즉위하였지만 그 재위는 2년 만에 끝나고, 다시 비류왕의 아들 근초고왕이 즉위하여 그뒤 초고왕계 내에서 왕위계승이 계속되었다.

‘근초고왕’이라는 왕명은 ‘초고왕’과의 연관성을 나타내는 왕명이라 할 것이다.

초고왕계인 비류왕은 고이왕계의 3대가 집권한 뒤에 즉위하였으므로 그는 구수왕의 아들이 아닌 손자, 또는 보다 먼 후손이 될 것이다.

 

백제 12대 계왕 (재위 344년 ~ 346년)

성은 부여, 분서왕의 장남이다. 분서왕이 죽었을 때 나이가 어렸으므로 비류왕이 왕위에 올랐으며, 초고왕의 후손인 비류왕과는 왕실 내에서 서로 다른 지파였다.

그리고 비류왕의 즉위는 분서왕이 낙랑의 자객에게 피살된 상태에서 이루어졌으며, 그 뒤에는 고이왕계가 몰락하고, 초고왕계가 집권하는 왕실지파간의 세력교체가 있었다. 그 사이에 재위한 계왕의 통치기간은 2년 정도에 불과하였다.

이러한 사실들은 경쟁세력들과의 관계에서 계왕의 즉위나 집권이 순탄하지 않았음을 암시해준다.

 

백제 13대 근초고왕 = 여구, 조고왕, 초고왕, 속고왕 (재위 346년 ~ 375년)

근초고왕은 백제가 차츰 국가로서의 면모를 갖출 무렵 비류왕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체격도 아주 크고 용감했기 때문에 둘째 아들이었지만, 차기 왕으로 지목되어 346년 계왕의 뒤를 이어 왕이 되었다.

고구려의 광개토왕에 비길 만한 정복군주로 평가받고 있으며, 남쪽으로는 마한을 정복하여 백제의 영토를 전라도 지역까지 확장하고 북쪽으로는 평양 근처까지 진격하여 고구려의 고국원왕을 전사시켰다.

즉위한 뒤 왕권의 강화와 확립에 주력하여 왕위계승에 있어서 초고왕계의 계승권을 확고히 하였다.

또, 진씨 가문에서 왕비를 맞아들여 왕실을 지지하는 배경세력으로 삼았다.

그리고 지방에 대한 통제를 보다 효율적으로 하기 위해 영역을 분정하여 지방통치조직을 만들고 지방관을 파견하였다.

이로써 왕은 중앙집권화를 보다 확고히 할 수 있었다.

한편, 근초고왕은 왕권확립을 바탕으로 하여 사방으로 정복활동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정복활동을 살펴보면, 남으로는 영산강유역을 중심으로 백제의 세력권에서 이탈해 있던 마한의 잔여세력을 경략, 복속시킴으로써 전라도지역 모두를 지배영역으로 확보하였다.

그리고 낙동강 서쪽에 위치한 가야세력에도 손을 뻗쳐 이들을 부용하게 함으로써 영향권내에 넣었다.

이렇게 남방지역의 평정이 일단락된 후 북방으로의 진출을 도모하였다.

이러한 북진은 당시 남진정책을 추구하고 있던 고구려와의 대립을 불가피하게 하였다.

양국의 군사적 충돌은 369년 치양성(황해도 배천)싸움에서부터 비롯되었으며, 그 절정은 371년에 벌어진 평양성싸움이었다.

이 싸움에서 태자와 더불어 정기 3만을 거느리고 평양성을 공격하여 마침내 고구려의 고국원왕을 전사시키고 대방고지까지 차지하는 개가를 올렸다.

이리하여 백제는 사상최대의 영역을 차지하게 되었다.

또 근초고왕은 정복활동과 더불어 대외활동도 활발히 전개하였다.

우선 고구려에 대항하기 위해 신라와 동맹관계를 강화함으로써 한반도에서의 힘의 균형을 이룩하였으며, 중국의 동진과도 외교관계를 수립하여 동진으로부터 ‘영동장군영낙랑태수’에 책봉되기도 하였다.

한편, 중국이 호족의 침입으로 분열된 시기를 이용, 요서지방으로 진출하여 백제군을 설치하였다.

백제의 요서지역 진출은 요동지역으로 진출하여오는 고구려세력을 견제함과 동시에 상업적인 측면에서의 무역기지의 확보라는 의미도 있었다.

이와 더불어 일본열도방면으로도 활발히 진출하여 백제계통의 세력들과 긴밀한 관계를 가졌다.

백제와 일본열도의 세력과의 관계에 대한 물적 증거로는 일본의 이소노가미신궁에 간직되어온 ‘칠지도’가 있다.

이 칠지도는 당대의 금석문자료로서 칼에 새겨진 명문)의 내용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설이 분분하지만

그 내용의 핵심은 이 칠지도가 근초고왕 때에 만들어졌고 백제의 후왕인 왜왕에게 하사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또, 한편으로는 백제가 위치한 지정학적인 유리한 조건을 이용하여 고대 상업 활동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한대 이래 중국 황해연안에서 한반도의 서남해안으로, 다시 일본열도로 이어지는 해상교통로는 한족의 동방침입과 동시에

고대 상업로로서도 중요한 길이었다. 그런데 낙랑군, 대방군이 멸망되고 북중국에는 수로에 익숙하지 못한 호족이 들어서게 되자 이 전통적인 해상교통로와 상업로는 백제가 계승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백제는 요서지역에 설치한 무역기지와 한반도와 일본지역에 자리한 백제계 세력들을 연결하여 고대 상업망을

형성함으로써 무역의 중심구실을 하게 되었다.

대방지역을 점령하면서 중국계 사람들을 포섭하여 백제문화의 질을 높였고 나아가 일본열도에 새로운 문물을 전수하여주었다.

그 좋은 예로서는 왕인아직기 등을 일본에 보내어 《천자문》과 《논어》를 전해줌으로써 일본에 유학사상을 일으킨 것을 들 수 있다. 이처럼 지배영역의 확대와 통치조직의 정비를 통하여 왕권이 확립되고

문화가 발전하게 되자, 이와 같은 신기운을 배경으로 박사 고흥으로 하여금 ‘서기’라는 국사책을 편찬하게 하였다.

‘서기’의 편찬은 왕실중심의 계보정리와 더불어 왕실전통의 유구성과 신성성을 과시하고 왕권의 위엄을 돋보이게 하려는 데서

취해진 조처였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하여 근초고왕대는 백제의 최대 전성기를 이룰 수 있었다.

 

아직기와 왕인

근초고왕 때는 백제가 융성하던 시대로 문화도 대단히 발달하였다.

이때 아직기가 근초고왕의 지시로 말 두필을 끌고 일본에 건너가서 왕에게 바친 뒤 말을 기르는 일을 맡아보다가,

그가 경서에 능통함을 안 일본 오진왕이 태자 토도치랑자의 스승으로 삼았다.

임기를 마치고 돌아올 때 왜왕이 그에게 “너의 나라에 너보다 나은 박사가 있느냐?”고 묻자,

그는 “왕인이라는 학자가 있는데 나보다 훌륭하다.”라고 왕인을 추천하니, 왕인은 ‘논어’ 10권, ‘천자문’ 1권을 가지고 일본에 건너가 일본왕의 태자 토도치랑자의 스승이 되었다.

그는 경서에 통달하였으므로 왕의 요청에 의해 군신들에게 경사(經史)를 가르쳤다.

그의 자손들은 대대로 가와치에 살면서 기록을 맡은 사가 되었으며, 일본조정에 봉사하여 일본고대문화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이후 백제로부터 일본으로 오경박사를 비롯하여 재봉녀, 직공, 야공, 양주자, 도공, 안공, 화원, 금공, 의사 등이 건너가서 백제문화를 일본에 전수해주어 일본의 고대문화 발달에 공헌하였다.

지금의 전라남도 영암군에는 왕인석상을 비롯하여 왕인이 독서하였다는 왕인책굴 등이 있으며, 무덤은 일본 대판과 경도의 중간지점인 히라카타에 있다.

고흥

백제의 박사로서 ‘서기’를 편찬하였는데, 고흥이 편찬한 ‘서기는 백제 최초의 역사서였다고 할 수 있다.

고흥이 ‘서기’를 편찬한 시기는 근초고왕 때였다. 이때 백제로서는 왕위계승이 초고왕계 중심으로 안정되고, 또 남북으로의 정복적인 팽창활동으로 영역의 확대와 왕권의 확립을 보아 중앙집권적 통치체제가 완비된 시기였다.

따라서, 이와 같은 시대적 상황과 분위기 속에서 고흥이 편찬한 ‘서기’는 왕권을 합리화하고 왕실의 계보를 문자로 기록하고

이를 신성화하며, 또 백제에 복속된 여러 부족의 신화와 전설을 왕실중심으로 통합, 정리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충청남도 논산에 가면 옛날에 '황산벌'이라고 불리던 곳이 있다.

지금은 벼가 무르익는 평화로운 들판이지만, 1340년 전 이곳 황산벌에는 신라와 백제가 최후의 결전을 벌였다. 신라군의 지휘관은 김유신, 백제군의 지휘관은 계백이었다. 둘 다 내로라하는 쟁쟁한 장수들이었다.

660년, 신라는 당나라와 손잡고 백제를 공격해 왔다.

당나라와 신라의 목표는 백제의 수도 사비성이었다. 사비성이 있던 곳이 지금의 부여이다. 당나라 군대는 바다를 건너 금강 기슭에 상륙했고, 신라군은 탄 헌을 지나 황산벌에 도착했다.

백제의 계백장군은 결사대 5천 명을 이끌고 신라군을 막으러 나갔다.

신라군은 백제군의 10배나 되는 5만 명이었다. 계백은 싸움터로 떠나기 전, 아내 와 자식을 불러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포로로 잡히면 적의 노비가 될 테니, 살아서 욕을 보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다."

계백은 칼을 들어 사랑하는 아내와 자식을 베었다. 자신이 살아 돌아올 수 없음은 물론이오, 백제가 승리할 수 없다는 것을 계백은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Posted by 원주유
백제 역사와 문화2013. 9. 14. 18:37

 

 

 

서울시 문화재를 찾아서 - 백제와 고구려의 싸움터, 몽

백제와 고구려의 싸움터, 몽촌토성

현재 송파구 방이동 지역에 위치한 몽촌토성은 전일에는 강동구 이동(二洞)으로 불리던 곳으로 1970년대까지만 해도 국립 경기장 지역으로 지정된 곳이었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라는 말이 있지만 이 곳은 올림픽경기장 시설이 들어서게 됨에 따라 크게 변모되었다. 이 지역은 1980년 초까지도 국립 경기장 지역으로 지정되었기 때문에 주택을 신축하거나 증축을 하지 못해 초가집이 남아있는 등 농촌모습을 그대로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이곳 주민들은 이동이란 동명보다 ‘몽촌(夢村)’으로 부르기를 좋아하였다. 따라서 이 곳의 토성을 몽촌토성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 마을의 이름을 붙인 것이다.

몽촌토성은 사적(史蹟)으로 뒤늦게 지정되기도 했으나 1983년과 1984년에 4개 대학에서 발굴조사를 하면서부터 널리 알려졌다. 이 토성은 타원형으로 연결된 야산을 이용하여 그 위에 진흙을 쌓아 성벽을 만든 것으로 남북의 길이가 750m, 동서의 길이가 500m가 되고, 본성(本城)과 이보다 작은 외성(外城)으로 되어 있다. 이 당시 발굴조사 결과를 보면 몽촌토성이 2,000년 전 백제의 서울 위례성(慰禮城)으로 추정하였으므로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촌토성

실제로 백제가 건국 초부터 500년간 위례성을 서울로 삼았던 것은 잘 알려진 일로서 이 곳을 지키기 위해 풍납토성, 아차산성, 이성산성을 쌓았을 것이다.

 

지금부터 1,600년 전, 고구려의 16대 고국원왕이 전사한 후 고구려와 백제는 서로 적대 관계에 있었다. 그러던 차에 고구려의 영주(英主)로 알려진 19대 광개토왕이 왕위에 오르자 백제의 진사왕과 국민들은 전쟁이 일어나지 않을까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진사왕 8년(392) 7월.

광개토왕은 친히 4만 명의 대군을 이끌고 공격해 옴으로써 전쟁의 막은 올랐다. 이때 백제는 10여 성을 빼앗기고 다시 4년 후 아신왕(阿莘王) 때도 수륙 양면으로 공격해 오는 고구려 군을 맞아 백제군은 용감히 싸웠으나 한강 이북의 땅은 모두 잃고 말았다.

광개토왕에 이어 왕위에 오른 장수왕은 남쪽의 기름진 땅과 따뜻한 기후를 차지해야겠다고 생각하였다. 장수왕은 이 계획에 따라 서울을 평양으로 옮기고 백제와 신라를 여러 번 공격하였으나 수비가 워낙 튼튼해 쉽사리 성공하지 못하였다. 이에 장수왕은 백제 내부의 허실을 살펴 공격을 해야겠다는 전략으로 바꿔, 중 도림(道琳)을 백제에 파견하였다.

이 당시 백제 개로왕(蓋鹵王)은 장기, 바둑을 즐겼다. 바둑의 고수(高手)인 도림은 개로왕에게 접근하기 위해서 어느 날 궁궐 앞에 나아가,

“소승이 일찍부터 바둑을 배워서 자못 묘수(妙手)가 있사온데 왕께 뵈옵기를 원합니다.”

하였다. 이에 왕이 그를 불러들여 대국해 보니 과연 국수(國手)가 아닌가. 개로왕은 크게 기뻐하여 도림을 귀한 손님으로 대하고, 날마다 밤이 깊도록 바둑을 두었다.

“내 일찍이 그대와 같은 사람을 만나지 못한 것이 한이 되오. 그대는 재주가 뛰어난데 비해 너무 겸손한 것 같소.”

“아니옵니다. 소승이 여태껏 한 가지 재주로만 은총에 보답해 왔을 뿐 털끝만큼의 이익을 끼치지 못했습니다. 이제 전하께 한 말씀 드리려고 하는데 전하의 뜻이 어떠하신 지 모르겠습니다.”

하니, 개로왕이,

“어서 말해 보시오. 국가에 이익이 되는 일이 있다면 이것은 내가 그대에게 바라는 바이오.”

하였다.

고구려의 중 도림(道琳)은 개로왕(蓋鹵王)의 신임을 어느 정도 얻은 것으로 판단하였다.

그는 이제 백제의 국력을 약화시키는 목적을 이룰 수 있는 기회가 왔다고 생각하고,

“백제는 높은 산과 큰 강으로 둘러싸여 있기 때문에 이웃나라들이 감히 엿보지 못하고 받들어 섬기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전하께서는 밖으로는 위세를 뽐내시고 부유함을 보여서 남의 눈과 귀를 놀라게 해야 할 것인데, 그렇지 못하고 있습니다.”

라고 아뢰었다. 이에 개로왕이,

“그렇다면 어떤 일을 해야 이웃나라들이 이 백제를 넘보지 않겠소.”

“우선 왕실의 위엄을 보이기 위해서 궁궐을 크게 짓고 왕릉을 다시 만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홍수 때 백성들의 가옥이 물에 잠기고 떠내려가니 한강변의 제방을 단단히 쌓아야 합니다.”

도림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던 개로왕은,

“대사의 말이 옳소. 이제라도 백성을 동원해 면모를 일신해야겠소.”

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백제의 온 백성들은 흙을 구워 성을 높이 쌓고, 궁궐을 아름답게 꾸미는 일과 한강에 제방을 쌓는 일 등에 동원되었다.

그러나 이 토목공사로 국고는 바닥나고 백성들은 지칠 대로 지쳐 버렸다. 한편, 도림은 개로왕으로 하여금 대 토목사업을 일으키게 한 뒤 도망쳐 고구려로 돌아왔다. 그리고 장수왕에게 백제의 형편을 세세히 보고하였다. 이를 들은 장수왕은,

“그 동안 수고가 많았소. 이번에야말로 100년 전 고국원왕께서 전사한 원수를 꼭 갚고 말겠소.”

하고 도림에게 치하한 뒤 군사 3만을 일으켰다.

개로왕 21년(475) 9월.

장수왕은 기습 공격으로 7일 만에 한성(漢城)을 함락시키고 지체없이 한강을 건너 서울 위례성을 포위하였다.

 

백제 문화의 특징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뛰어난 건축 기술을 갖고 있다.

온화함과 섬세함이 잘 나타나 있다.

일본 고대 문화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미륵사지5층석탑

전북 익산시 금마면. 국보 제11호. 백제시대.

한국 석탑의 시원양식으로서 목탑이 석탑으로 이행하는 과정의 구조를 보여주는 중요한 탑이다.

탑의 규모로 보더라도 한국 석탑 중 최대의 걸작이다.

 

정림사지5층석탑

충남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 379. 국보 제9호. 백제시대.

부여 정림사터에 세워져 있는 석탑으로, 좁고 낮은 1층 기단(基壇)위에 5층의 탑신(塔身)을 세운 모습이다. 기단은 각 면의 가운데와 모서리에 기둥돌을 끼워 놓았고, 탑신부의 각 층 몸돌에는 모서리마다 기둥을 세워놓았는데, 위아래가 좁고 가운데를 볼록하게 표현하는 목조건물의 배흘림기법을 이용하였다.
얇고 넓은 지붕돌은 처마의 네 귀퉁이에서 부드럽게 들려져 단아한 자태를 보여준다.

낙화암

충남 공주시 산성동. 공주기념물 제42호. 백제시대. 1982∼1983년까지 공주사범대학에서 발굴하여 유적지가 확인되었으며 이 연지는 백제시대부터 계속하여 이용되어 왔음을 시사하고 있다. 백제시대 축성된 산성으로 백제 때에는 웅진성으로 불렸다가 고려시대 이후공산성으로 불리게 되었다.

 

부여성흥산성

충남 부여군 임천면 군사리. 사적 제4호. 백제시대 수도였던 부여를 수호하기 위해 금강 하류 대안에 축조된 가장 중요한 산성의 하나이다.이 산성은 백제시대 수도였던 부여를 수호하기 위해 금강 하류 대안에 축조된 가장 중요한 산성의 하나이다. 이 성홍산성은 501년에 축조되었다고 하며, 성주는 약 600m, 성벽 높이는 3∼4m이고, 우물터가 3군데에 있고 건물터도 현존하고 있다.

 

익산연동리석불좌상

전북 익산시 삼기면 연동리 산220-2. 보물 제45호.

불상은 머리만 없어졌을 뿐 불신, 대좌, 광배까지 고스란히 남아 있는 백제의 작품이다.
지금의 머리는 요즘 새로 만든 것이며, 불상의 현 신체 높이는 156㎝이다.

 

백제 문화의 특징

백제 문화재는 공주와 부여에 많이 분포되어 있다. 공주에는 무령왕릉이 그 당시 그대로의 모습으로 발굴되었다.

부여의 중심부에는 절터가 있고, 그 중앙에 정림사지 5층석탑이 잘 보존되어 있다. 석탑의 지붕동의 끈이 살짝 들린 모습이 가지런하면서도 날렵하게 보인다. 백제의 뛰어난 건축 기술과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

백제 문화의 특징인 온화함과 섬세함이 이 석탑에 잘 나타나 있으며, 이 문화를 일본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백제 문화는 탑, 불상, 절과 같이 불교 중심의 문화재가 많고 무령왕릉, 공산성, 송산리 고분 등에서 나오 벽화나 정림사지5층석탑, 금동대향로 등을 볼때 섬세하고 우아한 멋을 발견할 수 있다. 

 

 

 

 

 
Posted by 원주유
조선 역사와 문화2013. 9. 14. 18:30
 

 

수나라와의 전쟁을 승리로 이끈 고구려의 26대 왕 '영양왕'

고구려 26대 영양왕(?陽王, 재위: 590?618)은 재위 기간 동안 수나라의 침략을 네 차례나 받았지만, 모두 물리친 임금이었다. 하지만 수나라 대군을 물리친 공은 모두 을지문덕(乙支文德, ?~?)에게로 돌아가, 정작 당시 임금이었던 영양왕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영양왕은 어떤 인물이었을까?

 

25년간의 태자 시절

 

영양왕은 고구려 25대 평원왕(平原王, 재위: 559?590)의 장남으로 이름은 원(元), 또는 대원(大元)이다. 훤칠한 외모를 가진 그는 세상을 구하고 백성을 편안히 할 임무가 자신에게 있다고 생각한 왕이었다. 그는 566년 태자로 책봉되어 25년 동안을 태자로 생활하다가, 590년 왕위에 올라 618년까지 29년간 재위하였다. 고구려인의 평균 수명을 고려해 보았을 때, 영양왕은 매우 어린 나이에 태자가 된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그는 평원왕이 즉위한 559년 무렵에 태어났을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평원왕 재위 기간 동안 고구려는 유목 제국인 돌궐(突厥), 북중국의 강자인 북주(北周) 등과 전쟁을 하였고, 안으로는 강력한 귀족 세력의 틈바구니에서 을지문덕, 온달, 연태조 등 신흥 무장 세력이 새롭게 부상하는 정치적 격변기를 치렀다. 또 586년 수도를 평양 장안성으로 옮기는 등 고구려에는 많은 변동이 있었다. 영양왕은 어린 시절부터 당시 고구려가 겪었던 다양한 사건들을 지켜보며 왕이 될 자질을 키워갔다.

 

요동치는 국제 정세와 그의 선택

 

590년 영양왕이 즉위하였을 때, 그에게 주어진 가장 큰 과제는 요동치는 국제 정세에 어떻게 대응하느냐는 문제였다. 5?6세기 동아시아의 국제 정세는 고구려를 포함하여 중원의 남조(南朝, 송, 제, 양, 진)와 북조(北朝, 북위, 동위와 서위, 북주와 북제), 그리고 북방의 유목 제국(유연, 돌궐) 등이 4강 내지는 5강을 이루며 서로를 견제하던 시대였다. 고구려는 이같이 다원화된 국제 질서 속에서 상대적인 평화를 누리며 경제, 문화 등에서 큰 발전을 이룰 수가 있었다. 하지만 589년 양자강 유역의 진나라를 멸망시키고 중원을 통일한 수나라의 등장은 고구려를 긴장시키기에 충분했다. 특히 수나라는 583년 이간정책을 펼쳐 북방의 강자인 돌궐을 동돌궐과 서돌궐로 분열시킨 뒤 585년에는 동돌궐을 굴복시키고, 서돌궐마저 약화시켰다. 수나라의 초대 황제 문제(文帝, 재위: 581?604)는 이른바 ‘개황의 치’라 불리는 뛰어난 정치를 펼쳐 수나라를 초강대국의 지위로 격상시켰다.

수나라가 동아시아의 패권질서를 재편하면서 고구려는 수나라와 대결하느냐, 아니면 굴복하느냐는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되었다. 영양왕은 이때 수나라와의 대결을 선택했다. 고구려는 당시 말갈, 거란 등 주변의 여러 세력들 위에 군림하던 강대국이었다. 신흥 강대국이 등장할 때 기존의 약소국은 신흥 강대국에게 붙어 기존 강대국을 견제해 줄 것을 요구하지만, 기존의 강대국은 신흥 강대국과 대결을 통해 힘의 우위를 확인해야만 한다. 싸우지도 않고 굴복할 경우에는 강대국의 지위를 순식간에 상실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영양왕은 진나라가 멸망한 직후부터 수나라와의 대결을 준비하며, 군사를 훈련시키고 군량미를 비축하는 등 국방을 강화하는 대비책을 세웠다.

 

영양왕, 선제공격에 나서다

 

수나라 문제는 고구려에게 성의와 예절을 다해 복종할 것을 요구하는 조서를 보내왔다. 영양왕은 수나라와 전쟁이 불가피하다고 판단했다. 이에 영양왕은 선제공격에 나서 적의 보급기지를 파괴하는 전략을 택했다. 성과 무기를 보수하는 방어 전략이 아니라, 선제공격으로 적과의 전쟁에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려는 공세 전략이었다. 당시 수나라는 4,600만의 인구를 가진 세계 최고의 대국이었으며, 군사력 또한 최강이었다. 하지만 영양왕은 이를 개의치 않았다.

598년 2월, 그는 궁성을 나와 요동으로 말을 달렸다. 그리고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던 말갈인으로 구성된 1만 기병과 만났다. 그들은 요하를 건너 요서 지역을 기습 공격했다. 수나라의 전진기지와 보급기지들을 파괴하기 위함이었다. 수나라 영주총관 위충이 나와서 막았지만, 영양왕은 기습에 성공한 후 서둘러 퇴각했다.

 

수 문제의 공격을 막아내다

 

영양왕의 선제공격은 수나라의 자존심을 크게 건드렸다. 수 문제는 즉시 자신의 4남 양량과 고경, 왕세적, 주라후 등을 앞세워 고구려를 공격할 것을 명했다. 양량의 군대는 북경을 출발해 요서 지방으로 진군했지만, 군량 수송이 원활하지 못해 군사들은 굶주렸고 역병에 걸려 요하에 이르지 못하였으며, 심지어 장마까지 만나 퇴각하고 말았다. 왕세적의 군대는 영주에서 퇴각했고, 주라후가 이끄는 해군은 폭풍을 만나 병선 대부분이 파괴되어 열의 여덟이나 아홉이 죽었다.

수나라의 패배는 질병과 홍수, 폭풍 등 자연재해가 주된 원인이었던 것처럼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수나라 측의 기록에 원정군 참모인 고경이 최선을 다하지 않았고 지략이 부족한 것을 전쟁 패배의 원인으로 돌렸다는 사실이 있는 것을 보면, 단순히 자연재해 때문에 수나라 원정군이 실패한 것은 아니었다. 영양왕의 선제공격으로 인해 군량 수송에 문제가 생겼고, 기록되지 않은 고구려군의 활약으로 패배한 것이 분명하다. 수 문제는 전쟁에서 패하자, 고구려를 굴복시키겠다는 전략을 완전히 포기한다. 영양왕의 과감한 선택이 고구려에 평화를 가져온 것이다.

 

신집 5권의 편찬

 

서기 600년 태학(太學) 박사 이문진(李文眞, ?~?)은 고구려 초기에 만들어진 역사서 [유기(遺記)] 100권을 다듬어 [신집(新集)] 5권을 완성했다. 고대국가에서 역사서는 개인이 함부로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국가가 자료를 독점하고 있어, 왕의 허락이 있지 않으면 함부로 만들 수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신집 5권 편찬은 이문진이 실무를 담당했지만, 이 책을 만들도록 명령한 영양왕의 업적으로 보는 것이 옳다. 완성된 연대로 볼 때 고-수(고구려-수나라) 전쟁의 승리로 인한 고구려인의 자부심을 드높이기 위해 이 작업이 진행된 것이라고 볼 수 있겠다.

 

신라에게 빼앗긴 영토를 회복하라

 

[삼국사기] 온달 열전에 따르면 온달(溫達, ?~590) 장군은 영양왕이 즉위한 후, 고구려가 지배했었던 한강 유역을 회복하기 위해 출전(出戰)했다가 아차성 아래에서 죽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온달이 신라의 영토를 공격한 것은 대체로 590년대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비록 온달은 실패하였지만, 영양왕은 한강 유역을 회복하겠다는 의지를 버리지 않았다. 603년 영양왕은 장군 고승(高勝)을 보내어 북한산성을 공격했다. 하지만 신라 진평왕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방어에 나섬에 따라 북한산성을 차지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영왕왕은 포기하지 않고 608년 다시금 신라의 북쪽을 공격해 우명산성을 빼앗고 8천 명을 포로로 사로잡는 전과를 올린다. 다급해진 신라는 608년과 611년 두 차례에 걸쳐 수나라에 사신을 보내 신라를 도와줄 것을 요청하기도 했다.

 

왜국과의 관계 개선

 

400년, 신라 내물왕의 요청으로 고구려군이 신라 영토를 공격해온 왜군을 격퇴한 이래로, 고구려와 왜국의 관계는 소원한 상태였다. 그런데 영양왕은 왜국과의 관계를 크게 개선했다. 595년 영양왕은 혜자(慧慈, ? ~ 622) 스님을 왜국에 파견했고, 혜자는 615년까지 20년간 왜국에 머물면서 왜국 쇼토쿠 태자의 스승이 되었다. 영양왕은 605년, 왜국에서 호류사(法隆寺)에 장육불상(丈六佛像)을 만든다고 하자 황금 300량을 보내고, 담징(曇徵, 579~ 631) 등의 승려와 기술자, 화가 등을 파견하기도 했다.

영양왕이 왜국에 대한 원조를 아끼지 않은 것은 한강 유역을 되찾기 위해 왜국으로 하여금 신라를 견제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고구려가 수나라와 대립하는 상황에서 신라가 고구려의 후방을 공격하지 않아야 수나라와의 전쟁에 모든 것을 쏟아 부을 수 있기 때문에, 왜국과 우호적 관계를 유지하는 일은 고구려에게 큰 실익이 될 수 있었다.

신라 또한 이러한 상황에서 591년 남산성 축성, 593년 명활산성 증축, 서형산성 축성 등 왕경 주변에 요새를 건설하기에 나섰다. 고구려와 왜국, 백제의 신라 견제가 심각한 위협으로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602년 왜국은 래목황자를 신라 정벌 장군으로 임명하고, 2만 5천의 군사를 준비시켰다. 602년 8월 백제군은 남원에 집결하여, 신라의 아막성을 공격했다. 왜국도 이에 맞춰 신라를 공격하고자 했으나, 왜국의 총사령관 래목황자가 병이 드는 바람에 출전하지 못했다. 왜국이 참전하지 못함에 따라 고구려군도 출격을 미루고 있었다. 이에 백제군이 홀로 왜군과 싸우다 아막성 전투에서 신라군에게 대패하고 말았다. 비록 고구려-왜-백제의 신라 공격은 성공하지 못했지만 왜를 끌어들임으로써, 고구려로서는 신라를 견제하는 것에 성공하고 있었다.

 

돌궐에 보낸 사신

 

604년 수나라에서는 정변이 일어났다. 고구려와 전쟁을 포기한 수 문제 대신, 그의 욕심 많은 둘째 아들 양광이 아버지 문제와 형인 양용을 죽이고 수 양제(隋煬帝, 재위: 604?618)가 된 것이었다. 수 양제는 토욕혼, 고창국, 돌궐 등을 정복한 후, 고구려마저 굴복시키려고 준비했다. 다시금 전쟁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영양왕은 수 양제의 위협에 대비하고자 사신을 돌궐에 보냈다. 당시 돌궐에는 수 양제가 직접 군사들을 거느리고 동돌궐의 왕 계민가한(啓民可汗, ??609)을 만나러 왔었다. 돌궐에서 고구려 사신을 만난 수양제는 고구려에 선전포고를 했다. 고구려가 돌궐과 연합하는 것은 수나라가 몹시 두려워하는 상황이기 때문이었다.

 

수 양제, 세 번에 걸쳐 고구려를 공격하다

 

영양왕은 왜국, 돌궐 등과의 외교 교섭, 말갈족에 대한 지배권 강화, 신라에 대한 견제 등 수나라와의 전쟁에 대비했다. 612년 수나라는 무려 113만 대군을 동원해 고구려를 공격해왔다. 이 전쟁은 요동성 방어 전투, 영양왕의 이복동생인 건무 장군의 평양성 전투, 그리고 을지문덕 장군의 살수대첩 등으로 인해 고구려군의 완승으로 끝났다. 전쟁 영웅은 을지문덕, 건무 등이지만, 여기에는 영양왕의 역할도 매우 중요했다. 그가 집중한 것은 외교와 내치였다. 을지문덕 장군이 살수대첩을 거두기 위해 청야전술(淸野戰術: 적이 이용할 식량과 물자를 없애 적을 지치게 만드는 전술)을 실시할 수 있었던 것은, 고구려인들이 한마음이 되어 식량을 적에게 주지 않기 위해 모두 들판을 비우고 성에 피신하는 단결력을 보여주었던 덕분이었다.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영양왕의 내치가 성공을 거두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613년 수나라가 30만 대군으로 다시 쳐들어오자, 고구려는 요동성에서 다시금 적을 물리쳤다. 하지만 영양왕은 수나라군을 상대로 승리하는 것만을 목적으로 삼지는 않았다. 614년 수나라가 또 다시 군사를 내어 쳐들어오자 이미 항복해온 수나라 병부시랑 곡사정(斛斯政)을 되돌려 보냄으로써 싸우지 않고 적을 퇴각시켰다. 수나라는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엄청난 국력을 쏟았음에도 별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결국 나라가 흔들려 618년 멸망하고 말았다.

반면 영양왕은 수나라의 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고구려의 국제적 위상을 한껏 드높였다. 하지만 요동 지역이 주요 전쟁터가 된 탓에 고구려의 패해도 컸다. 영양왕은 전쟁에서 잡은 수나라 포로들을 적극 수용해 이들을 고구려에서 정착하게 살도록 하여, 이들과 함께 전후 복구 사업을 전개했다.

 

후손들이 길이 기억한 영양왕

 

1456년 집현전 직제학 양성지(梁誠之, 1415~1482)는 세조에게 전대의 임금과 재상에게 제사를 지낼 것을 상소하였다. 이로 인해 단군을 비롯해 삼국과 고려의 시조 등 12명의 역대 임금과 을지문덕 등 16명의 역대 신하들이 사당에 배향(配享) 되었는데, 여기에는 영양왕도 포함되었다. 그가 수나라 대군을 대파하고 고구려를 지킨 공을 후손들도 인정한 것이었다.

당나라의 역사가 두우(杜佑)가 766년부터 30년에 걸쳐 편찬한 중국의 제도사 [통전(通典)]의 <고구려전에는 “고구려의 땅이 후한 시기(1~2세기)에는 사방 2천리였고, 위나라 시기(3세기)에는 남북이 점점 좁혀져 겨우 1천여 리였으나, 수나라 시기(581~618)에 이르러서는 점점 커져 동서 6천리에 이르렀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기록에 따르면 영양왕이 재위하던 시기에 고구려의 영토가 가장 커졌던 것이다. 즉, 영양왕은 고-수 전쟁을 승리로 이끌며 고구려의 전성기를 이룩한 임금이었다.

 

 

Posted by 원주유
신라 역사와 문화2013. 9. 14. 15:12

 

 

고구려와 백제의 왕들이 두려워 했다고?..누굴? 신라왕...


제31대 신문왕
자의왕후 ․ 김씨, 정명, 생년미상 ~ 692년
재위기간 : 681년 7월 ~ 692년 7월. 총 11년
부인 : 2명

자녀 : 4남
폐비 김씨
신목왕후 김씨 - 이흥(32대 효소왕)
흥광(33대 성덕왕)
근질, 사종 (4남)

신문왕은 문무와의 둘째 아들이며, 자의부인 소생이다. 이름은 정명이며 문무왕 5년에 태자로 책봉되어, 681년 7월에 문무왕이 죽자 왕위에 올랐다. 왕비는 김씨인데 소판 흠돌의 딸이다. 왕이 태자로 있을 때 비로 맞아들였으나 오래되어도 아들이 없었으며, 나중에 그 아버지의 반란에 연좌되어 왕궁에서 쫓겨났다. 683녀에 다시 일길찬 김흠운의 딸을 왕비로 삼았다.

신문왕대는 태종무열왕 대부터 시작된 신라의 중대왕실의 전제왕권이 확고하게 자리 잡힌 시기이다. 왕이 즉위하던 해에 왕의 장인인 김흠돌을 비롯한 파진찬 흥원, 대아찬 진공 등의 모반사건이 있었으나 모두 평정하였다. 김흠돌의 반란은 왕권전제화의 계기를 만들어주었던 이 사건에는 많은 귀족이 참여하고 있었는데 여기에 대해서는 신문왕은 주동자뿐만 아니라 말단 가담자까지도 철저한 숙청을 가하였다(이때 화랑도의 낭도들이 대거 가담한 죄를 물어 화랑도를 폐지하고, 그 낭도들의 명단을 작성하여 모두 병부에 예속시켰다. 당시 화랑도의 풍월주 자리를 흠돌의 조카 신공이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흠돌의 반란에 화랑도의 남동들이 대거 가담했던 것이다). 신문왕은 귀족세력을 철저하게 탄압하려는 의도에서 과감한 정치적 숙청을 단행함으로써 전제왕권의 확립을 꾀하였다.

같은 해에 유교적 정치이념에 입각한 인재의 교육과 양성을 목적으로 하는 국학을 설립하고 여기에 경 1인을 두었다. 이것은 진덕여왕 대에 이미 국학에 소속된 대사라는 관직을 설치했던 것을 신문왕대에 와서 완성한 것이다. 한편 불교에도 관심을 두어 685년에는 봉성사와 망덕사를 준공하기도 하였다.

신문왕대에는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뒤에 증대한 중앙관서의 업무와 확대된 영역의 지방통치를 위한 제도정비도 이루어졌다. 우선 중앙관부에서는 682년에 위화부령 2인을 두어 인재등용에 관한 업무를 관장하게 하고, 공장부감과 채전감 각각 1인을 두었으며 686년에는 예작부경 2인을 두었다. 그리고 687년에는 음성서장을 경으로 올리고 688년에는 선부경 1인을 더 두어 늘어난 중앙관부의 업무를 처리하게 하였다. 특히 685년에는 각 관부에 행정실무를 담당하는 사지가 설치됨으로써 문무왕대에 설치된 말단행정 담당자인 사와 아울러 영, 경, 대사, 사지 사의 5단계 관직제도가 완성되었다.

지방의 통치제도에 있어서는 689년에 왕경의 지리적 한계를 문제 삼아 지금의 대구인 달구벌로 옮기려 하였으나 서라벌에 터전을 둔 귀족들의 반발에 부딪혀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러한 왕경의 편재에서 오는 불편함을 극복하기 위하여 이미 685년에 서원소경(지금의 청주)과 남원소경(지금의 남원)을 설치하고 진흥왕대에 설치된 국원소경을 중원소경(지금의 충주)으로 고침으로써 5소경제를 정비하였다. 또한 신라가 영역을 확장하는 과정에서 수시로 설치하여온 군정적 성격이 강한 주도 685년에 완산주(지금의 전주)와 청주(지금의 진주)를 설치함으로써 삼국통일 후의 확대된 영역의 효과적 지배를 위한 9주제를 비로소 완성하였는데(9주 5소경제 완성). 686년과 687년에는 여기에 따른 주 ․ 군 ․ 현의 정비가 있었다.

마지막으로 중앙의 군사조직에 있어서는 신라인을 중심으로 고구려 ․ 백제 ․ 보덕국 및 말갈인을 편입시켜 9서당을 완성하였다. 내외의 관제정비와 짝하여 689년에는 관리의 늑봉으로 지급하던 녹읍을 폐지하고 해마다 세조를 차등 있게 지급하여 관리의 기존의 경제적 기반을 무너뜨리고 전제왕권의 강화를 더욱 확고히 하였다.

이와 같은 중앙과 지방에 걸친 제도의 체계적 정비를 통하여 전제왕권을 중심으로 한 통치 질서를 완비한 신문왕은 중국제후의 5묘제를 본 떠, 687년에 중대왕실의 정통성을 수립하는 5묘제를 확립하였다. 이 밖에도 일본과 당나라에 사신이 빈번하게 내왕하였고 문화가 발전되고, 설총과 강수와 같은 대학자가 배출되는 등 전성시대를 이루었다. 능은 경상북도 경주시 배반동 낭산의 동남에 있다.

제32대 효소왕

신목왕후 김씨 ․ 김씨, 이홍 또는 이공, 생년미상 702년
재위기간 : 692년 7월 ~ 702년 7월. 총 10년
부인 : 기록 없음
자녀 : 없음
왕비 (기록 없음)

효소왕은 신문왕의 장남이며, 신목왕후 김씨 소생으로 이름은 이홍 또는 이공이다. 신문왕11년(691년)에 태자에 책봉되어, 이듬해인 692년 7월 신문왕이 죽자 왕위에 올랐다. 그의 태자 책봉 시기가 691년인 것을 고려할 때, 효소왕은 10대의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른 것으로 판단된다. 신문왕 대에 잡아놓은 기반으로 효소왕 시대의 정치와 사회는 안정된 편이었다. 하지만 왕이 어린 탓에 정사는 신문왕 대의 공신들에 의해 좌우되었다.

692년에 즉위하여서는 좌우이방부의 ‘이(理)’자가 왕의 이름과 같으므로 피휘하여 좌우의방부로 관부의 명칭을 고치기도 하였다. 즉위하던 해 8월에 대아찬 원선을 집사부 중시에 임명하여 국정을 위임하였다(중시는 진덕여왕 대인 651년에 처음 실시되어 무열왕과 문무왕을 거치면서 입지가 강화되었고, 신문왕 대엔 정치권력의 핵심으로 대두되었다. 따라서 효소왕 대에 이르면 상대등은 그저 상징적인 존재로 전략하고, 중시가 조정을 장악하게 된다. 행정부를 대표하는 집사부의 장관인 중시는 이후로 경덕왕 대에 시중으로 호칭이 바뀌는데, 신라 후반기에 이르면 왕권을 제약하거나 때론 능가하는 존재로 변신하게 된다).

같은 해에는 고승 도중이 당나라에서 귀국하여 천문도를 왕에게 바쳤다. 천문도는 고구려에 전래된 진탁의 성도와 같은 것으로서 왕실권위의 상징으로 이용되었다. 또한, 이 무렵에 의학 교육기관인 의학을 설립하여 의학박사를 두고 『본초경』『침경』『맥경』등의 중국 의학서를 교수하게 되었다.

재위 4년(695년)에 서시전과 남시전을 두었는데 이것은 지증왕 대에 설치된 동시전과 더불어 왕경의 3대 시전으로서, 서라벌 도성 안의 내시까지 합쳐 큰 시장이 넷이나 형성되어 물화의 유통을 쉽게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 해에 자월(음력 11월)을 정월로 정하였다가 700여년에 다시 인월(음력 1월)을 정월로 바꾸었다. 698년 3월 기사에는 “일본국 사신이 왓으므로 왕이 숭례전에서 그를 만났다.”는 기록이 보인다. 이로써 이즈음에는 신라에서도 왜의 공식 국호를 ‘일본’으로 사용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왜는 문무왕 10년인 670년에 자국의 공식 명칭을 ‘일본’으로 개칭했다고 통보해왔는데, 신라에서도 그 점을 인정하여 그들을 왜라고 부르지 않고 일본으로 부르게 된다. 699년에는 당나라에 사신을 파견하여 조공함으로써 양국과의 우호적인 외교관계도 유지하였다.

당시 권력을 장악하고 잇던 신문왕 대의 공신들의 힘이 왕권을 능가하는 지경에 이르자, 효소왕은 왕권을 되찾기 위해 공신들과 대결을 벌인다. 700년에 이찬 경영의 반란이 있었으며 이 사건에 연좌되어 698년에 중시로 임명되었던 순원이 파면되었다. 이듬해엔 영암군 태수로 있던 일길찬 제일을 사익을 탐한 죄를 물어 장형에 처하고 귀양 보내 버렸다. 그러나 이는 오히려 공신 세력을 단결시키는 결과를 낳았고, 그것은 효소왕의 몰락으로 귀결되었다. 효소왕은 경영의 모반 사건이 발생한지 2년 만인 702년 7월에 죽었는데, 이때 그의 나이는 불과 20대 초반이었다. 그가 젊은 나이에 뚜렷한 이유도 없이 죽었다는 것은 권신들에 의해 제거되었을 가능성이 있음을 뜻한다.

702년 7월에 죽어 망덕사 동쪽에 장사지냈다. 자식은 한 명도 두지 못한 것으로 전한다. 또한 부인에 대한 언급도 없다. 이는 그가 권신들에 의해 제거될 때, 부인과 자식 또한 함께 살해되었기 때문에 그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고 있다. 능은 경주 낭산 동남쪽에 있다.

제33대 성덕왕
신목왕후 김씨 ․ 김씨, 초명은 융기, 개명은 흥광, 생년미상 ~ 737년
재위기간 : 702년 7월 ~ 737년 2월. 총 34년 7개월
부인 : 2명
자녀 : 4남 1녀
성정왕후 김씨 - 중경, 수충 (2남)
소덕왕후 김씨 - 승경 (제34대 효성왕)
헌영 (제35대 경덕왕), 사소부인 (2남 1녀)

성덕왕은 신문왕의 차남이며, 신목왕후 소생으로 효소왕의 동복아우이다. 본명은 융기였으나, 당나라 현종의 이름과 같았던 탓에 재위 11년 3월에 당의 칙명에 의해 흥광으로 고쳤다. 효소왕이 후계자 없이 죽자, 702년 7월에 왕위에 올랐다.

성덕왕대는 통일신라시대에 있어서의 정치적인 안정을 바탕으로 사회전반에 걸쳐서 전성기를 구가한 시기였다. 우선 정치적으로 국가의 행정을 담당하는 집사부의 중시가 일체의 정치적 책임을 지게 됨에 따라 전제왕권은 보다 강화될 수 있었다.

이찬 원훈이 성덕왕이 즉위하던 702년에 중시에 임명된 이래로 원문, 신정, 김문량, 김위문, 효정, 김사공, 문림, 선종, 윤충 등 10명의 인물이 성덕왕대에 중시로서 활동하였다. 재위 3년인 704년에 승부령 소판 김원태의 딸을 왕비로 받아들여 왕실의 기강을 다잡았고, 711년에는 왕이 백관잠을 지어 군신에게 제시하였다. 백관잠의 구체적인 내용은 전하지 않고 있으나, 아마도 전제왕권 하에서 신하가 지켜야 할 계명을 적은 것으로서 유교적인 충군사상이 주요내용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성덕왕대에는 이찬 개원을 비롯하여 인품, 배부, 사공 등 4명이 상대등으로 재직하였으나 정치적으로 힘이 없었던 것으로 보아, 귀족회의의 대표자였던 상대등의 활동이 위축된 것을 살펴 볼 수 있다.

국방시책으로는 721년에 하슬라도(지금의 강릉)의 정부 2,000명을 징발하여 북경지방에 장성을 축조하는가 하면, 재위 21년(722년)에는 모벌군성(지금의 경주시 외동면)을 축조하여 일본의 침입로를 차단하기도 하였다. 731년에 일본의 병선 300척이 동해변을 습격하자 이를 공격하여 대파시켰다.

733년에 발해가 바다를 건너 당나라 등주를 공격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그러자 당 현종은 신라에서 발해의 남부 지역을 공격해 줄 것을 요청했고, 성덕왕은 그 요청을 받아들여 출전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도중에 폭설을 만나 길이 막히고, 많은 동사자가 발생하는 바람에 돌아와야만 했다. 그러나 이런 노력 덕분에 당과의 관계는 더욱 돈독해졌고, 그 결과 734년에는 당나라와의 외교적 현안이었던 국경문제를 패강(지금의 대동강)으로 확정지었다. 이로써, 신라의 영토는 대동강에서 원산만에 이르는 이남지역으로 결정되었다. 성덕왕은 이 지역의 민심수습과 북방경영을 위하여 이찬 윤충, 사인, 영술 등을 파견하여 평양주와 우두주(지금의 춘천)의 지세를 조사하게 되었다.

성덕왕은 국내의 정치안정을 기반으로 활발한 외교활동을 추진하였다. 703년에 일본국의 사신을 접견하는 둥 일본과의 관계를 계속적으로 유지해 나갔으며, 당과의 관계도 더욱 밀착되어 갔다. 하지만, 새로 일어난 발해와는 당과의 관계 때문에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게 된다. 703년에 아찬 감사양이 당나라에 조공한 이래 36년 동안 당에 파견된 신라의 사절횟수는 43회로서 신라 중대왕실의 다른 어느 왕 때보다도 많았으며 사절의 내용은 주로 조공과 숙위, 그리고 하정이었다. 이러한 당과의 빈번한 외교적 교섭은 신라의 국제적 지위를 확고하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중국문물의 수입에도 적극적으로 기여하게 되었다. 704년에 입당사 김사양이 귀국하여 최승왕경을 바쳤고, 717년에는 숙위 김수충이 귀국하여 문선왕과 10철 및 72제자의 화상을 바치므로 국학에 봉안하였다. 이는 전제왕권 안정에 필요한 정치이념으로서의 유교의 적극적 수용의지를 반영한 것이며, 728년 에는 왕제인 김사종을 당나라에 파견하면서 신라 귀족자제들의 당나라 국학의 입학을 요청하였다. 717년에 의학박사와 산박사를 각각 1인씩 두었고, 718년에는 누각을 처음으로 제작하였다.

이러한 기술관계의 관직설치와 시설은 모두 유교적 이상정치인 위민 및 농본정책의 시행을 위한 바탕이 되었다. 705년과 706년에 기근이 들어 백성들이 고통 받자, 관리를 파견하고, 창고의 곡식을 나눠주어 구제하였으며, 백성들에게 오곡의 종자를 나누어 주었다.
그리고 722년에는 모든 백성들에게 비로소 정전을 지급하였는데, 정전은 정을 기준으로 하여 백성들에게 지급한 토지라는 뜻일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국가가 실제적으로 백성에게 토지를 지급하였다는 것이 아니라 자영농민이 본래 소유하고 있던 토지에 대한 국가적 인정을 뜻하는 것으로서 농업생산력의 증대를 가져왔으며, 그 결과 국가는 농민으로부터 많은 세를 거두어들일 수 있었고 재정적 기반을 견고히 할 수 있게 되었다.

성덕왕은 재위 36년째인 737년에 죽었다. 시호는 성덕이며, 이거사의 남쪽에 장사지냈다. 왕릉은 현재 경주시 조양동에 있다.

제34대 효성왕
소덕왕후 김씨 ․ 김씨, 승경, 생년미상 ~ 742년
재위기간 : 737년 2월 ~ 742년 5월. 총 5년 3개월 
부인 : 3명 
자녀 : 없음
왕비 박씨
혜명왕후 김씨
후비(영종의 딸)

효성왕은 성덕왕의 셋째 아들이고, 소덕왕후 소생이며 이름은 승경이다. 성덕왕 23년 724년에 태자에 책봉되었으며, 737년 2월에 성덕왕이 죽자 왕위에 올랐다.
효성왕은 즉위하면서 사정부의 승과 좌우의방부의 승을 모두 좌로 바꾸었는데 이것은 ‘승’자가 왕의 이름에 저촉되기 때문이다. 즉위하던 해(737년) 3월에 아찬 정종을 상대등에 임명하여 귀족회의를 관장하게 하고 아찬 의충을 집사부의 중시에 임명하여 행정을 담당하게 하였다. 739년 의충이 죽자 이찬 신충을 중시에 임명하고, 왕제인 헌영(뒤의 경덕왕)의 관등을 파진찬으로 하여 태자로 삼았다. 또, 전 왕인 성덕왕 때에 정상화된 당나라와의 외교적 관계를 한층 강화하는 한편, 외교적 통로를 이용하여 중국의 선진문물을 수입하였다. 특히 738년에 당나라 사신 형숙이 신라에 올 때 당나라 현종이 그에게 ‘신라는 군자의 나라’라고 일러준 것을 보아도 당시 신라의 문화수준을 가늠할 수 있다. 이때 형숙은 노자의 『도덕경』을 비롯한 서책을 왕에게 바쳤는데, 여기서 신라의 선진문물에 대한 수용 자세를 엿볼 수 있다.

740년에는 파진찬 영종의 모반사건이 있었으나 모두 평정되었다. 반란의 원인은 영종의 딸이 효성왕의 후궁이 되어 왕의 총애를 받았는데 왕비가 이를 시기하여 그의 족당과 더불어 후궁을 모살하였다. 이에 영종이 왕비의 족당을 원망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이를 보면 단순한 여인들의 투기가 정치적 반란을 유발한 것 같으나 실제는 성덕왕대에 전성을 구가하던 중대 왕실의 전제왕권이 점차 약화되면서부터 그간에 축적되었던 정치적 모순이 드러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즉, 귀족세력이 왕권의 약화를 틈타 다시 세력을 뻗치기 시작하였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특히, 이러한 현상은 741년에 귀족세력의 대표인 상대등 정종과 경덕왕 대에 상대등으로 활동하는 사인이 왕을 대신하여 열병한 사실에서도 확인된다. 재위 6년째 되던 742년 5월에 죽으매 시호를 효성이라 하였는데, 유명에 따라 법류사 남쪽에서 화장하여 유골을 동해에 뿌려진 까닭에 능은 조성되지 않았다.

제35대 경덕왕
소덕왕후 김씨 ․ 김씨, 헌영, 생년미상 ~ 765년
재위기간 : 742년 5월 ~ 765년 6월. 총 23년 1개월

부인 : 3명
자녀 : 1남
삼모부인
경수왕후 - 건운(제36대 혜공왕)
제3비(이찬 순정의 딸)

경덕왕은 성덕왕의 넷째 아들이며, 소덕왕후 소생으로 이름은 헌영이다. 효성왕의 동복아우인 그는 파진찬 벼슬에 있다가 효성왕 재위 3년인 739년에 태자로 책봉되었다. 그리고 742년 5월에 효성왕이 죽자 왕위에 올랐다. 경덕왕 때에 이르러 새로운 귀족들이 세력을 확장하여 왕권이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이에 경덕왕과 행정 책임자였던 중시는 왕권강화를 위해 관제정비와 개혁조치를 실시했다.

744년에 이찬 유정이 중시에 임명된 이후, 대정, 조량, 김기, 염상, 김옹, 김양상 등 7인이 경덕왕 때에 중시를 지냈다. 경덕왕은 즉위 초부터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관제를 정비하고, 과감한 제도 개혁을 실시했다. 747년에 중시의 명칭을 시중으로 바꾸었으며, 748년에는 정찰 한 명을 임명하고 백관을 규찰하도록 했다. 이는 성덕왕 대부터 지속적으로 추진되던 전제왕권 체제를 가속화하기 위한 조치였다.

747년에 국학에 제업박사와 조교들을 두었고, 749년에는 천문박사 한 명과 누각박사 여섯 명을 두었다. 이런 전문 식견을 갖춘 학자 관료들을 육성하여 성덕왕 이래 추진되던 유교정치 구현의 토대를 형성한 것이다. 경덕왕은 근본적으로 유학 사상에 입각한 전제왕권 정치를 꿈꾸고 있었고, 중국의 한, 당의 정치를 그 모델로 삼고 있었다(중국의 것을 모방하는 정책). 따라서 이러한 일련의 제도적 장치는 당나라 태종이 그랬듯이 왕권을 강화하면서 동시에 귀족들의 세력을 약화시키는 데 목적이 있었다. 이에 한화정책은 귀족세력으로부터 비판을 받았다. 그는 756년 상대등 김사인은 상소에서, 최근의 빈번한 천재지변을 들어 현실정치의 모순에 대하여 신랄하게 비판하고, 시중에 대해서 정치적 책임을 물었다. 이때의 비판내용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아마도 경덕왕이 추진한 한화적 개혁정치가 비판의 대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비판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757년부터 김기가 적극적으로 한화정책을 추진하였다. 전국 주의 이름을 대대적으로 바꾸고, 그 휘하의 현과 군을 대폭 정비하였다. 사벌주를 상주로 고치고 1주 10군 10현을 예속시켰고, 상량주를 양주로 고치고 1주 1소경 12군 34현을 예속시켰으며, 청주를 강주로 고치고 1주 11군 27현을 예속시켰다. 또 한산주를 한주로 고치고 1주 1소경 27군 46현을, 수약주를 삭주로 고치고 1주 1소경 11군 27현을, 웅천주를 웅주로 고치고 1주 1소경 13현 29현을 예속시켰다. 하서주는 명주로 고치고 1주 9군 26현을 예속시켰으며, 완산주를 전주로 고치고 1주 1소경 10군 31현을, 무진주를 무주로 고치고 1주 1소경 14군 44현을 예속시켰다. 전국 9주의 이름을 모두 바꾸거나 간소화하고, 소속된 소경과 군현을 명시했다. 이로써 통일 이래 제대로 정비되지 못한 행정 구역을 확실하게 규정하였다.

758년 2월에는 내외의 관원을 막론하고 만 60일 이상 휴가를 얻은 자는 해직으로 간주하라는 교시를 내려 관료들의 기강을 다잡았다. 4월에는 의술을 깊이 연구한 사람들을 관료로 등용해 내공봉에 근무하게 하는 조치를 내렸다. 또 율령박사 두 명을 임명했는데, 이는 유학적 가치관에 바탕을 둔 법치주의를 강화하려는 의도에서였다. 759년에는 지방 행정 조직 정비에 이어 중앙 관명을 중국식으로 개정함으로써 제도 개혁에 박차를 가했다. 병부와 창부의 경과 감을 시랑으로, 대사를 낭중으로, 집사부의 사지를 집사원외랑으로, 집사사를 집사랑으로 개칭하였다. 각 부서의 대사는 모두 주부나 주서로 개칭하고, 예부의 사지를 사례로, 조부의 사지를 사고로, 영객부의 사지를 개칭하고, 승부의 사지를 사목으로, 선부의 사지를 사주로, 예작부의 사지를 사례로, 병부의 노사지를 사병으로, 창부의 조사지를 사창으로 개칭했다. 이러한 경덕왕과 집사부가 추진한 한화적 개혁정치는 혜공왕 대에 가서 귀족세력이 다시 왕권을 압박해 오면서 모두 옛 명칭으로 환원되고 만다.
경덕왕은 당나라왕의 외교관계에 있어서는, 전통적 방법인 조공과 하정의 사신을 11회나 당나라에 파견함으로써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였다. 한편, 일본과의 관계는 그리 원만하지 못하여 일본과는 거의 국교 단절 상태가 되고 말았다.

757년에 내외관리의 월봉을 혁파하고 다시 녹읍을 부활시켰다. 이것은 새로이 성장하는 귀족세력의 경제적인 욕구가 지금까지 세조만 받던 월봉을 혁파하게 하고, 녹읍의 부활을 제도화시킨 것이라 하겠다. 그해 8월에 조부에 사를 두 명 더 두어서 세수 업무를 한층 강화시켰다. 경덕왕 말기에 정치적으로 성장한 귀족세력은 763년에 경덕왕의 측근세력이었던 상대등 신충과 시중 김옹을 면직시켰다. 왕당파인 이들의 면직에 관한 구체적인 내용은 기록상에 나타나지 않으나, 왕권에 대한 귀족세력의 반발의 결과로 보인다. 이러한 추측은 김옹이 물러난 뒤 약 4개월의 공백기를 거쳐, 764년 만종과 양상이 각각 상대등과 시중에 임명되었기 때문에 가능하다. 여기서, 양상은 나중에 상대등으로서 혜공왕을 사해하고 신라 하대의 첫 왕인 선덕왕으로 즉위하는 인물로서, 경덕왕 때에 이미 귀족세력을 대표하고 전제왕권에 도전하는 존재였다. 따라서, 경덕왕 말년의 정치는 왕권과 귀족세력의 정치적 타협 위에서 존립할 수 있었던 것이다. 경덕왕은 재위 24년 만인 765 6월에 생을 마감했다. 능은 처음에 경지사 서쪽 언덕에 장사지냈으나, 후에 성덕왕의 능이 있는 양장곡으로 옮겨졌다.

 

Posted by 원주유
신라 역사와 문화2013. 9. 14. 15:07

 

 

삼국시대 신라왕중에 백제,고구려와 대등한 왕들은 없는것인가.. 

제26대 진평왕

제24대 진흥왕 - 사도부인 박씨 - 동륜태자 - 만호부인 김씨
김씨, 백정, 567~632년
재위기간: 579년 7월~632년 정월. 총 52년 6개월
부인: 4명
자녀: 1남 2녀 이상
마야왕후 김씨 - 천명공주, 덕만공주(제27대 선덕왕)
승만왕후 - 왕자
화명부인
옥명부인

진평왕은 진흥왕과 사도부인 사이에서 태어난 동륜태자의 아들이며, 입종의 딸 만호부인 소생으로 이름은 백정이다. 572년에 아버지 동륜태자가 죽자 할머니 사도태후의 보살핌 아래 성장했고, 579년 7월에 사도태후가 진지왕을 폐하자 열세 살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왕은 태어나면서부터 얼굴이 기이하고 몸이 장대하였으며, 의지가 깊고 식견이 명철하였다고 한다.

진평은 진흥왕대를 이어서 왕권을 지속적으로 성장시켰다. 즉위하던 해(579년) 8월에 이찬 노리부를 상대등에 임명하여 일체의 국정을 맡기고, 진평왕 2년(580년)에는 지증왕의 증손인 이찬 후직을 병부령에 임명하여 군사권을 장악하게 하였다. 진평왕은 이 두 사람의 도움을 받으면서 관제의 정비와 적극적인 외교정책을 실시함으로써 독자적인 왕권을 수립할 수 있었다. 581년에 관리 인사를 담당하는 위화부를 설치하였으며, 583년에는 국가의 공부를 관장하는 조부를 설치하고 조부령 1인을 두었으며, 같은 해에 또 거승을 관장하는 승부를 설치하고 승부령 1인을 두었다. 그리고 586년에는 문교와 의례를 담당하는 예부를 설치하고 예부령 2인을 두었으며, 591년에는 외국사신을 접대하는 영객부령 2인을 두었다. 이로써 신라 조정은 병부를 시작으로 위화부, 선부서, 조부, 승부, 예부 등을 설치함으로써 조정 6부조직의 기반을 형성하였다. 580년대에는 위화부-조부, 그리고 예부와 같이 중앙관부 중에서도 핵심적인 구실을 담당하는 관부가 설치되어 각 관청간의 분업체제가 확립되었다. 또한, 소속 관원수를 규정하여 조직화경향이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어서 진흥왕대의 정복국가체제에서 관부정치체제로의 질적인 전환이 이루어졌다. 진평왕 대 말기인 622년 2월 궁정관부를 총괄하는 내성사신을 설치하였고, 진지왕의 아들 김용춘을 초대로 임명하였다. 이밖에도 623년 정월 병부에 대감 2인을 두었으며, 624년 정월 시위부에 대감 6인, 상사서와 대도서에 대정 1인을 각각 설치하였다. 다음으로 584년에 건복이라고 개원하여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함으로써 대외적으로 자주성을 천명하였다.

581년에 건국하여 위진 남북조의 분열기를 극복하고 589년에 통일왕조로 등장한 중국 수나라가 등장하자, 이에 진평왕은 594년에 수에 사신을 보내 국교를 맺고, '상개부 낙랑군공 신라왕'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또 596년에는 승려 담육을 수나라에 보내 불교를 연구토록 하였으며, 사신을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신라가 수나라와의 관계를 유지한 것은 영토를 넓히는 과정에서 고구려와 백제 양국과 관계가 크게 악화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고구려 침략의 기회를 노리고 있던 양견은 수륙군 30만을 양성하여 고구려를 치고자 하였는데, 이에 고구려는 말갈병 1만을 앞세워 598년에 요서 지역을 선제공격하였다. 급습을 당한 양견은 그에 대한 보복으로 그해 6월에 병력 30만을 동원하여 고구려를 공격하였으나, 장마 중에 고구려 맹장 강이식의 전술에 말려 대패하고 말았다. 일단 고구려의 영양왕과 양견은 화친을 맺었으나, 양견은 고구려 정벌에 대한 의지를 버리지 않았고, 백제까지 수나라의 고구려 공격을 돕겠다는 의지를 표하자, 영양왕은 분을 이기지 못하고 백제를 공격하게 되고, 이로써 한동안 전쟁을 자제하던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 사이에 전쟁 분위기가 고조되었다. 백제의 무왕은 602년에 아막성(아모산성, 충북 음성 일대) 공략해 왔는데, 진평왕은 기병 수천을 내세워 대응했다. 또한 소타, 외석, 천산, 옹잠 등에 각각 성을 쌓고 백제 땅을 역습했고, 병력 4만으로 신라가 새롭게 쌓은 네 개의 성을 공격했다. 603년에는 고구려의 영양왕은 장군 고승을 선두로 내세워 북한산성을 공격해왔다. 진평왕은 직접 군대 1만을 이끌고 출전하여 고구려 군을 물리쳤다. 이때, 수나라에서는 양견(문제)이 아들 양광(양제)에게 살해되고 양광이 왕위를 찬탈했는데, 그는 낙양에서 북경에 이르는 대운하 공사를 하는 등 일단 내치에 힘을 쏟으며 외교적으로 고구려를 압박하는 전술을 구사하고 있었다. 고구려와 백제의 압박에 시달리던 진평왕은 608년에 수나라의 군사와 고구려를 정벌하고자 하여 원광에게 「걸사표」를 짓게 하고, 611년에 이를 수나라에 보냈고, 다음해에 수나라 양제의 고구려 정벌이 있게 되었다. 612년 113만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를 공격했지만, 얼마 뒤 많은 피해를 입은 채 퇴각해야 했다. 수나라와 고구려의 전쟁이 전개되면서 고구려가 한반도 쪽을 돌아볼 여력을 잃게 되자, 즉시 신라를 공격해 왔다. 백제는 611년에 신라의 가잠성(충북 괴산)을 함락시키고, 616년에는 모산성(전북 남원)을 공격하였다.

그 무렵, 중국에서는 618년에 양광이 농민군에게 살해되고, 태원의 귀족 이연이 당나라를 건국했다. 당의 건국으로 중국은 다시 안정을 되찾았고, 그것은 곧 신라에게 큰 위안이 되었다. 진평왕은 당 고조 이연에게 사신을 보내 조공을 하고 국교를 맺었다. 당의 등장으로 국제정세가 급격하게 변하고 백제와 고구려는 당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신라를 공격할 수 없었다. 그러나 623년 백제가 신라의 늑노현을 침입함으로써 5년간의 침묵이 깨졌고, 624년 백제의 속함성(지금의 함양)을 비롯한 5성 공격에 대한 신라의 방어는 실패하고 말았다.

이와 같이 신라는 여러 차례 백제의 공격을 받아 곤경에 처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618년 중국의 통일왕조로 등장한 당나라와 621년부터 조공을 통한 외교관계를 수립하고, 거의 매년 당나라에 외교사절을 파견하였다. 신라가 당나라와 수립한 외교관계는 고구려에 대한 당나라의 외교적 견제에 이용될 수 있었다. 즉, 고구려와 백제의 침입으로 곤경에 처한 신라는 625년 당나라에 사신을 파견하여 고구려의 빈번한 침입으로 말미암아 당나라에 대한 조공로가 막히게 됨을 호소하니, 이에 당나라 고조는 우선 626년에 사신 주자사를 신라와 고구려에 보내 양국이 화합하라는 외교적 중재에 나서기도 하였다. 이 결과 고구려는 신라에 대한 공격을 일시적으로 중지하기도 하였다. 진평왕은 당나라에 의한 고구려 견제라는 외교적 노력을 진행시키는 한편, 628년에 가잠성을 포위한 백제군을 격파하기도 하였으며, 629년에는 대장군 김용춘과 김서현-김유신 부자로 하여금 고구려의 낭비성(지금의 청주)을 공격하여 항복받기도 하였다. 하지만 오랜 전쟁으로 신라 사회는 크게 피폐해져 있었고, 자연히 정치적 불안도 조성되었다. 급기야 조정은 반란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되었다. 631년 5월에 이찬 칠숙와 아찬 석품이 반역을 도모하였는데, 계획이 누설되어 진압할 수 있었다.

진평왕 대에는 중국에서 발달한 고도의 불교문화를 수용하기 위한 고승들의 구법행과 귀국행이 빈번하게 있었는데, 고승들의 귀국은 대체로 외교사절의 귀국행차와 같이 이루어지고 있어서 불교수용에 대한 국가의 적극적 지원을 짐작하게 한다. 진평왕 7년(585)에 남조의 진으로 구법을 위하여 떠났던 고승 지명은 602년에 수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되었던 상군과 함께 귀국하여 왕의 존경을 받아 대덕이 되었으며, 589년에 진나라로 구법행을 떠났던 원광은 600년에 조빙사인 나마 제문과 대사 횡천과 함께 귀국하였다. 또한, 596년에 수나라로 구법행을 떠났던 고승 담육은 605년 수나라에 파견되었던 입조사 혜문과 함께 귀국하였다. 국가의 지원을 받았던 고승들은 세속적인 국가사에도 참여하고 있어 호국불교의 성격이 강한 신라불교의 모습을 잘 드러내준다.

진평왕은 재위 54년 만에 66세의 나이로 죽었다. 그의 재위기간은 초대 박혁거세 거서간 다음으로 길다. 한지에 장사지냈으며, 당나라 태종은 조서를 보내어 진평왕에게 좌광록대부를 추증하였다.
를 추증하였다.
의 나이로 죽었다. 그의 재위기간은 초대 박혁거세 거서간 다음으로 길다. 한지에 장사지냈으며, 당나라 태종은 조서를 보내어 진평왕에게 좌광록대부를 추증하였다.
를 추증하였다.

제27대 선덕여왕

제26대 진평왕 - 마야부인 김씨
김씨, 덕만, 생년 미상~647년
재위기간: 632년 정월~647년 정월. 총 15년
남편: 3명
자녀: 없음
김용춘
흠반
을제

선덕여왕은 진평왕의 둘째 딸이고 이름은 덕만이며, 마야부인 김씨 소생이다. 진평왕의 장녀로 어머니는 마야부인이다. 진평왕이 아들이 없이 죽자 화백회의에서 그를 왕위에 추대하고, 성조황고란 호를 올렸다고 한다. 즉, 선덕여왕이 즉위할 수 있었던 것은 '성골'이라고 하는 특수한 왕족의식이 배경이 되었던 것이다.

즉위하던 해인 632년에 대신 을제로 하여금 국정을 총괄하게 하고, 전국에 관원을 파견하여 백성들을 진휼하였으며, 633년에는 주군의 조세를 일 년 동안 면제해주어 민심을 수습하였다. 여왕은 민생의 안정에 주력하여 가난한 이들을 보살피도록 하는 구휼정책을 활발히 추진하였으며, 첨성대를 건립하여 농사에 도움이 되게 하였다. 그녀가 백성들을 얼마나 인자하게 아끼고 사랑했는지는 지귀의 설화에서도 알 수 있다. 당시 선덕여왕을 흠모하는 백성들이 많았는데 지귀는 그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는 선덕여왕이 영묘사를 행차할 때 그녀를 만나기 위해 기다리고 있다가 깜빡 잠이 들었는데, 선덕여왕이 이를 보고 그의 마음 위에 자신의 팔찌를 놓고 떠났다. 지귀가 잠이 깨어 이를 알고는 마음에서 불이나 영묘사를 건립하였다고 한다(635년). 634년에는 분황사를 창건했다.

한편, 대외적으로는 634년에 인평이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함으로써 중고왕실의 자주성을 지키려 노력했지만, 즉위 이래 거의 매년 당나라에 대해 조공사신을 파견했는데, 이는 고구려, 백제의 공격이 빈번해짐에 따라 당나라와 연합함으로써 국가를 보존하려는 자구책으로 볼 수 있다. 선덕여왕은 즉위하던 해부터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봉작을 요구했지만, 여자가 왕이 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던 이세민은 선덕여왕의 즉위 이후에도 3년 동안이나 봉작을 내리지 않았다. 봉작을 내리지 않았다는 것은 선덕여왕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의미였다. 그 때문에 신라에선 줄기차게 사신을 보내 신임표를 내려줄 것을 요청하였고, 결국 당나라는 이세민의 신임표를 보내 선덕여왕을 '주국 낙랑군공 신라왕'으로 책봉하였다. 백제는 선덕여왕 재위 2년(633년) 8월에 신라의 서쪽 변경을 침입했고, 636년 5월 독산성을 습격, 638년 10월에 고구려가 북쪽 변경을 침입, 11월에는 칠중성(임진강변)을 공격했는데 모두 알천에게 피해 물러갔다. 이렇듯 고구려의 침입이 잦아지자, 선덕왕은 하슬라(강릉)을 북소경으로 삼아 사찬 진주로 하여금 지키게 하였다. 이즈음 백제에는 의자왕이 왕위를 이었는데, 그는 고구려와 여제동맹을 맺고, 642년 7월에 신라에 총공세를 퍼부어 신라 서쪽의 40여 성이 함락되고 말았다. 8월에는 고구려가 당항성을 공격하여 함락시켜 버렸다. 또 백제 장군 윤충이 같은 달에 대야성(경남 합천)을 공격하여 점령하고, 그곳 도독 이찬 품석(김춘추와 사위)와 사지 죽죽, 용석 등을 죽였다.

대야성 함락 소식에 놀란 선덕왕은 김춘추를 고구려에 보내 군대 파견을 요청했다. 그러나 고구려의 연개소문은 신라가 죽령 이북의 땅을 내주면 군대를 파견하겠다는 말로 김춘추를 농락했다. 이에 김춘추가 화를 내며 거절하자, 연개소문은 그를 옥에 가둬 버렸다. 난감해진 김춘추는 일단 땅을 내주겠다고 약속하고, 가까스로 목숨을 건져 신라로 돌아왔다. 이렇게 되자, 선덕여왕은 김유신을 압량주(지금의 경산) 군주에 임명하여 백제의 공격을 방어하는 한편 643년에는 당나라에 사신을 파견하여 구원을 요청하였다. 신라의 구원요청을 접한 당태종은 신라 사신에게 여왕이 통치하기 때문에 양국의 침범을 받게 되었다는 문제점을 지적하였다. 644년 신라의 김유신은 백제를 공격하여 일곱 성을 회복하였다. 그에 대한 보복으로 645년 3월에 백제군이 쳐들어오자, 김유신은 다시 출전하여 2천명을 죽이는 대승을 거뒀다. 그해 5월 이세민이 고구려를 공격하자, 선덕여왕은 군대 3만을 동원하여 협공을 하였다. 그 틈을 노려 백제가 신라 변경을 급습해 와 일곱 성을 점령했다. 이렇게 전쟁은 계속 이어져 백성은 불안에 떨었고, 이 무렵 당나라로부터 귀국한 승려 자장의 건의에 따라 호국불교의 상징인 황룡사 9층탑을 축조하기도 하였다. 황룡사 9층 석탑은 높이 80m의 거대한 탑으로 이를 모두 9층으로 한 뜻은 이웃의 9층을 물리쳐서 복속시키기 위해 나라의 이름을 새겨 넣은 것이라 전해진다. 그러나 이 대탑 건설에 엄청난 인력과 자원이 투입되자 이전에 당태종에 의해서 지적되었던 여왕통치를 문제로 삼아 647년 정월 상대등 비담과 염종 등 진골 귀족들이 반란을 일으켰으나, 이는 김춘추와 김유신에 의해 진압되었다.

여왕은 내란중인 1월 8일에 생을 마감했다. 재위 16년 만에 죽으니 시호를 선덕이라 하고 낭산에 장사지냈다(선덕여왕은 생전에 자신이 죽을 시기를 예언하고 무덤의 위치를 정해뒀다고 하는데, 현재 선덕왕릉이 있는 경주시 보문동이 바로 그곳이다).

제28대 진덕여왕

갈문왕 김국반
(제26대 진평왕의 동복 아우) 
제28대 진덕여왕
월명부인 ․ 김씨, 승만, 생년미상 ~ 654년
재위기간 : 647년 정월 ~ 654년 3월. 총 7년 2개월
남편 : 기록 없음
자녀 : 없음

진덕여왕은 진평왕의 동복아우인 갈문왕 국반의 딸이고, 월명부인 박씨 소생으로 이름은 승만이다. 그녀는 자태가 곱고 키가 7척이었으며, 팔을 뻗으며 무릎까지 닿았다고 전해진다. 즉위하던 해(674년) 김춘추와 김유신의 보좌에 힘입어 선덕여왕 말년에 반란을 일으켰던 비담을 비롯한 30인을 붙잡아 처형하고, 알천을 상대등에 임명하고 대아찬 수승을 우두주의 영주로 임명하는 등 왕권강화를 통한 정치적 개혁을 실시함과 동시에 국내 안정을 꾀하여 비교적 안정된 위치에서 정무를 집행할 수 있었다. 그리고 사신의 파견을 통하여 자신의 즉위 사실을 알리고 당나라와의 외교관계를 지속시켰는데, 이것은 당나라의 힘을 빌려 고구려와 백제를 견제하기 위함이었다. 당 태종은 지절사를 보내 선덕여왕을 광록대부에 추증하고, 진덕여왕을 주국으로 삼아 낙랑군 왕에 책봉하였다. 이로써 진덕은 즉위 한 달 만에 내정을 안정시키고, 국제적으로 공인도 받았다. 그러나 백제가 신라가 내분으로 내정이 불안한 틈을 타 그해 10월 백제가 쳐들어왔다. 이에 진덕여왕은 김유신을 출천시켜 백제군을 막아내도록 했는데, 이후 백제의 공격은 계속되었다. 백제의 지속적인 공략에 밀려 고전을 면치 못하던 신라는 설상가상으로 고구려까지 공격해오게 된다. 곤란한 상황에 빠진 신라는 648년 고구려와 백제의 견제를 위해 필요한 군사를 지원받기 위해서 당나라에 사신을 파견했는데, 그 사신은 바로 김춘추였다.

진덕여왕과 당 태종은 서로 간에 친교를 돈독히 한 다음, 나당 연합을 체결하게 된다. 이러한 당나라와의 친교는 결과적으로 신라 내정에도 많은 변화를 가져오게 된다. 649년 신라의 백관이 모두 중국의 의관을 착용하는 중조의관제를 , 650년에는 즉위 직후부터 사용하던 독자적 연호인 태화를 버리고 당나라 고종의 연호였던 영휘를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이와 같이 중국의 관제와 연호의 사용 등은 김춘추의 건의에 따라 이루어진 것으로서 당나라의 선진문물의 수용이라는 긍정적인 측면도 있지만, 당나라에 대한 신라의 정치적 예속도가 강화되었다는 부정적인 면도 무시할 수는 없다. 또한 651년에 백관의 왕에 대한 정조하례제의 실시와 품주를 개편한 집사부의 설치는 왕권강화의 의미를 가지는 정치적 개혁으로 김춘추 ․ 김유신 세력에 의하여 추진되었다. 또, 진덕여왕은 김유신으로 하여금 국방력을 증강시켜서 훗날 삼국 통일의 기틀을 마련하기도 하였다. 재위한 지 8년만인 654년에 죽었고, 사량부에 능이 마련되었다. 진덕여왕의 남편과 자식에 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제29대 태종무열왕

제25대 진지왕
김용수 (장남)
지도부인 박씨 제29대 태종무열왕
천명공주 ․ 김씨. 춘추, 603~661년
(제26대 진평왕의 장녀) ․ 재위기간 : 654년 3월 ~ 661년 6월. 총 7년 3개월
부인 : 3명
자녀 : 9남 4녀
보량궁주 - 고타소 (1녀)
문명부인 - 법민(제30대 문무왕), 인문, 문왕, 노차,
지경, 개원, 지소 (6남 1녀)
보희부인 김씨 - 개지문, 차득령, 마득,
공주, 공주 (3남 2녀)

태종무열왕의 이름은 춘추이고, 진지왕의 장남 김용수의 아들이며, 진평왕의 장녀 천명공주 소생이다. 603년에 태어났으며, 어려서부터 제세의 뜻을 가지고 있었다 전해진다. 24세 되던 626년에 화랑도의 풍월주에 올랐으며, 이후 이찬의 벼슬에 올라 진평, 선덕, 진덕여왕 대의 정치 및 외교 문제에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다. 진덕여왕이 죽었을 때 여러 신하들이 처음에는 왕위계승자로서 상대등 알천을 천거하였으나, 알천이 자신의 늙음과 덕행의 부족함을 들어 사양하고 그 대신 제세의 영걸로서 김춘추를 천거하였다. 이에 김춘추가 추대를 받아 즉위하여 왕위에 올랐는데, 당시 나이가 52세였다. 그의 즉위에는 오래전부터 상당히 복잡한 정치적 문제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김춘추는 김유신의 누이인 문희와 정략적인 측면에서 혼인함으로써 왕위에서 폐위된 진지왕계와 신라에 항복하여 새로이 진골귀족에 편입된 금관가야계의 정치적 ․ 군사적 결합을 이루게 된다.

즉 진지왕계인 김용춘 ․ 김춘추는 김유신계의 군사적 능력이 그들의 배후세력으로 필요하였으며, 금관 군주 김구해계인 김서현 ,김유신은 김춘추계의 정치적 위치가 그들의 출세에 절대적으로 필요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상호이익에 입각한 두 세력의 정치적 결탁으로 이어지게 된다.

김춘추가 활동하던 당시는 삼국 간에 치열한 싸움이 벌어지던 때였다. 신라는 642년 백제의 장군 윤총이 이끄는 백제군에게 대야성(경상남도 합천)을 빼앗겼고, 이때, 김춘추의 사위 품석과 딸을 잃었다. 이에 김춘추는 고구려와 함께 힘을 합쳐 백제를 공격하고자 고구려에 가서 연개소문을 만났다. 그러나 오히려 국경 문제로 붙잡혀 갇혀 있다가 고구려의 대신 선도혜의 도움을 받아 겨우 탈출하였다. 647년에 귀족회의와 최고의장인 비담이 여왕이 나라를 통치하는 것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키자 김유신과 함께 이를 진입하여 큰 공을 세웠다. 비담의 난을 진압하던 중 선덕여왕이 승하하자 진덕여왕을 추천하여 여왕으로 내세웠다. 김춘추는 외교적 수완이 뛰어났는데, 649년 당나라에 건너가 백제 정벌을 위한 군대를 요청하여 당태종으로부터 군사 지원을 약속받았다. 또 당나라의 문물과 제도를 신라에 도입하게 하여 발전시켰다. 친당외교와 내정개혁을 통하여 신장된 김춘추 ․ 김유신으로 구성된 신귀족 세력의 힘을 기반으로 하여 김춘추는 진덕여왕이 죽은 뒤에 화백회의에서 섭정으로 추대되었다.

무열왕은 즉위하던 해에 우선 아버지 용춘을 문흥대왕으로, 어머니 천명부인을 문정태후로 추증하여 왕권의 전통성을 확립하고, 이방부격 60여조를 개정하는 등의 율령정치를 강화하였다. 그리고 655년에 원자인 법민을 태자에 책봉함으로써 왕권의 안정을 꾀하는 한편 아들 문왕을 이찬으로, 노차를 해찬으로, 인태를 각찬으로, 그리고 지경과 개원을 각각 이찬으로 관등을 올려줌으로써 자기의 권력기반을 강화시켰다. 656년에는 당나라로부터 귀국한 김인문을 군주에, 658년에는 당나라로부터 귀국한 문왕을 집사부 중시에 새로이 임명하여 직계친족에 의한 지배체제를 구축하였다. 그리고 그의 즉위에 절대적인 기여를 하였던 김유신에 대해서는 660년에 상대등으로 임명하여 왕권을 보다 전제화 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었다. 그것은 태종무열왕이 즉위하기 이전인 중고시대의 상대등은 귀족회의의 대표자로서 왕권을 견제하는 존재이거나 왕위계승 경쟁자로서의 자격이 있었던 것에 대하여, 태종무열왕이 즉위한 이후에 왕의 측근세력인 김유신이 상대등에 임명되었다는 사실은 상대등이 귀족세력의 대표라는 본래의 기능을 상실하고 전제왕권과 밀착되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상대등 중심의 귀족세력은 약화될 수밖에 없으며 신라 중대 사회에서는 전제왕권의 방파제 구실을 하는 행정책임자인 집사부 중시의 권한이 상대적으로 강화될 수 있는 기틀이 마련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친당외교를 통하여 당나라를 후원세력으로 삼고 내정에서는 측근세력의 정치적 포석을 통하여 왕권을 안정시킨 다음 고구려 ․ 백제에 대한 전쟁을 수행하였다. 655년에 고구려가 백제 ․ 말갈과 연합하여 신라 북경지방의 33성을 공취하자 신라는 당나라에 구원병을 청하였고, 이에 당나라의 정명진과 소정방의 군사가 고구려를 공격하자, 고구려와 백제는 물러났다. 당은 658년에 설인귀와 정명진을 보내 고구려를 재차 공격했으며, 659년에도 다시 공격에 나섰다. 659년에는 백제가 자주 신라의 변경지방을 침범하므로 당나라의 군사를 청하여 당 고종의 본격적인 백제정벌을 추진에 합류하였다. 3월에 소정방을 비롯한 수륙 13만명이 백제를 공격하여 5월에 왕은 태자 범민과 유신, 진주, 천촌 등과 더불어 친히 정병 5만명을 이끌고 당 군의 백제공격을 지원하였다. 7월에는 김유신의 황산벌 전투에서 계백이 이끄는 5,000명의 백제군이 크게 패하고 계백도 전사했다. 계백이 무너지자, 백제군은 더 이상 버티지 못했다. 7월 12일에 당 군과 연합하여 백제의 수도인 사비성을 함락시켰고, 이어서 웅진성으로 피난하였던 의자왕과 왕자 부여융의 항복을 받음으로써 마침내 백제를 멸망시킬 수 있었다.

이는 신라의 숙원이던 백제를 병합함으로써 반도통일의 계기를 만들었다는 점에서 의미를 가지는 것이었다. 사비성 함락 이후 9월에 당나라는 유인원의 1만명과 김인태의 7,000명의 군대로 하여금 머물러 지키게 하였다. 10월에 태종무열왕은 친히 백제지역에서 아직 정복되지 않은 이례성(지금의 논산) 등 20여성의 항복을 받고 11월에는 백제로부터 귀환하여 백제정벌에서 전사한 자들과 전공을 세운 자들에게 상을 차등 있게 내려 주었다. 그리고 항복해 온 백제의 관료들에게도 능력에 따라 신라의 관등을 주어 관직에 보임하는 회유책을 쓰기도 하였다.

신라가 백제를 정벌하는 동안 고구려는 660년에 신라의 칠중성(지금의 적성)을 공격해왔고, 661년에는 고구려 장군 뇌음신이 말갈군과 연합하여 술천성(지금의 여주)을 공격하고 다시 북한산성을 공격하였으나 성주인 대사 동타천이 효과적으로 방어하였으므로 대나마로 관등을 높여 주었다. 이 해에 압독주를 대야(지금의 합천)로 다시 옮기고 아찬종정을 도독에 임명함으로써 정복된 백제지역의 관리에 적극성을 보였다.

태종무열왕은 재위기간 동안 신라의 왕권을 강화했다. 또 당나라의 율령제도를 본떠 신라의 법제를 바로잡고, 군대를 정비하는 등 국가의 기반을 다졌다. 무열왕의 닦아 놓은 기반을 바탕으로 문무왕 때 신라는 결국 삼국을 통일하고, 이후 120년 동안 황금기를 맞이할 수 있었다. 무열왕은 백제 병합에 성공했으나, 백제의 잔병을 완전히 궤멸시키지 못한 때인 661년, 재위한지 8년 만에 59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시호는 무열이며, 묘호는 태종이다. 영경사 북쪽에 장사를 지냈다.

제30대 문무왕
문명왕후 김씨 ․ 김씨, 법민, 생년미상 ~ 681년
재위기간 : 661년 6월 ~ 681년 7월. 총 20년 1개월
부인 : 3명
자녀 : 3남
자의왕후 - 소명태자, 정명(31대 신문왕), (2남)
신광부인
야명부인 - 인명 (1남)

문무왕은 무열왕의 장남이며, 김유신의 여동생 문명부인 소생으로 이름은 법민이다. 태종무열왕 원년인 654년에 파진찬으로서 병부령에 임명되었다가 곧 태자에 책봉되었다. 그는 태자 시절에 통일 전쟁에 참전하여 많은 공을 세웠다. 650년 진덕여왕 때 왕명으로 아버지 김춘추와 함께 당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되어 군사 지원을 요청하는 외교 활동을 벌여 당 고종에게 대부경이라는 벼슬을 받았다. 특히 660년의 백제 정벌 전쟁에 종군하여 큰 공을 세웠다. 660년에 태종무열와과 당나라의 소정방이 연합하여 백제를 정벌할 때 법민도 이 전쟁에 종군하여 큰 공을 세웠다. 661년에 태종무열왕이 미처 삼국을 통일하지 못하고 죽자 법민이 왕위를 계승하여 삼국통일의 과업을 완수하였다.

즉위하던 해, 옹산성(지금의 대덕군 회덕면)과 우술성에 응거하던 백제잔적을 공파하여 항복을 받고 그곳에 웅현성을 축조하였다. 그리고 663년에 백제의 거열성(지금의 거창), 거물성, 사평성, 덕안성의 백제잔적을 정벌하였다.
이 때 각지에서 일어난 백제부흥군은 백제의 옛 장군의 복신과 승려인 도침이 이끌었는데, 이들은 일본에 가 있던 왕자 부여풍을 왕으로 추대하고 주류성(지금의 한산, 또는 부안)에 근거를 두고 웅진성을 공격하여 신라와 당나라의 주둔군을 괴롭혔다. 이에 문무왕은 김유신 등 28명의 장군과 함께 당나라에서 파견되어 온 손인사의 증원병과 연합하여 부흥군의 본거지인 주류성을 비롯한 여러 성을 함락하였다. 이어서 지수신이 끝까지 항거하던 임존성(지금의 대흥)을 정복하여 백제부흥운동을 종식시켰다. 664년에는 백제 왕자였으며 당나라의 지원을 받던 웅진도독 부여융과 화맹을 맺었다.

문무왕은 당나라와 연합하여 계속 고구려 정벌에 나섰는데 즉위하던 해 당의 소정방과 김유신을 비롯한 김인문, 진주 등의 장군을 이끌고 고구려 공격에 임했다. 대동강을 통하여 고구려의 평양성을 공격하던 소정방이 이끌던 당군이 연개소문의 굳센 항전으로 고전하자 결국 당군은 본국으로 물러가고 말았다. 문무왕은 666년 다시 고구려를 정벌하고자 하여 한림과 삼광을 당나라에 보내어 군사를 청하고 667년 이세적이 이끈 당군과 연합하여 평양성을 공격하려 하였으나 미수에 그치고, 668년부터 본격적으로 고구려를 공격하였다. 당군이 신성(지금의 봉천), 부여성 등 만주의 여러 성을 차례로 무너뜨리고, 압록강을 건너 평양성을 포위 공격하자 문무왕도 6월 김유신, 김인문, 김흠순 등이 이끄는 신라군을 당영에 파견하여 평양성을 공격하여 9월 보장왕으로부터 항복을 받았다.

문무왕은 고구려 멸망에 공을 세운 여러 장사에게 논공행상을 하고 11월 백제와 고구려의 평정을 선조묘에 고하였다. 당나라는 고구려를 멸망시킨 뒤, 점령지의 지배를 위하여 평양의 안동도호부를 중심으로 9도독부, 42주, 100현을 두고 통치하였다. 이에 대형인 검모잠을 중심으로 고구려 부흥운동이 일어나게 되는데, 그는 보장왕의 서자인 안승을 왕으로 맞이하여 부흥운동을 전개하였으나, 70년 안승이 검모잠을 죽인 다음 4천호를 이끌고 신라로 망명하였다. 문무왕은 그를 금마저(지금의 익산)에 머무르게 하고 고구려왕(뒤의 보덕왕)에 봉하였다.

당나라는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뒤 삼국 전체를 자기의 영토로 삼으려는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내었다. 이에 신라는 강력하게 반발하였으며, 백제와 고구려의 옛 땅에 대한 지배권을 차지하기 위하여 당나라와 전쟁을 치러야 했다. 이로써 나 ․ 당전쟁이 시작된다. 옛 백제 땅은 당의 웅진도독부가 지배하고 있었는데, 이곳을 지배하던 웅진 도독 부여융에게 화친을 청했으며, 문무왕은 670년 품일, 문충 등이 이끄는 신라군으로 하여금 63성을 공취하여 그곳의 인민을 신라의 내지로 옮기고, 천존 등은 7성을, 군관 등은 12성을 함락시켰다. 또한, 671년 죽지 등이 가림성(지금의 임천)을 거쳐 석성(지금의 임천 동쪽)전투에서 당군 3천 5백 명을 죽이는 큰 전과를 올렸다. 이때 당나라의 행군총관 설인귀가 신라를 나무라는 글을 보내오자 문무왕은 이에 대하여 신라의 행동이 정당함을 주장하는 글을 보냈다. 그리고 사비성(지금의 부여)을 함락시키고 여기에 소부리주를 설치하여 아찬 진왕을 도독에 임명함으로써 백제 고지에 대한 지배권을 장악하였다.

한편, 같은 해 바다에서는 당나라의 운송선 70여척을 공격하여 큰 전과를 올리기도 하였다. 고구려의 옛 땅에서도 신라와 당나라의 치열한 전투가 있었다. 특히, 신라가 백제의 고지를 완전히 점령한 뒤에 침략해온 당군과 전투가 가장 치열하였다. 문무왕 672년 당이 대군을 이끌고 오자, 한강으로부터 대동강에 이르는 각지에서 당과 여러 차례 전쟁을 벌였다. 신라의 당나라에 대한 항쟁은 675년 절정에 이르렀는데, 이 해에 설인귀는 당나라에 숙위하고 있던 풍훈을 안내자로 삼아 쳐들어왔으나 신라장군 문훈은 이를 격파하여 1천 4백명을 죽이고 병선 40척, 전마 1천 필을 얻는 전과를 올렸다.

이어서 이근행이 20만의 대군을 이끌고 침략해오므로 신라군은 매초성(지금의 양주)에서 크게 격파하여 이들을 물리쳤다. 이 매초성의 승리는 북쪽 육로를 통한 당군의 침략을 저지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한편. 676년 해로로 계속 남하하던 설인귀의 군대를 사찬 시득이 지벌포에서 격파함으로써 신라는 서해의 제해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당나라는 결국 676년 안동도호부를 평양으로부터 요동성(지금의 요양)으로 옮기게 되었다. 그 결과 신라는 대동강에서 원산만에 이르는 이남의 영토를 지배권만을 장악하면서 한반도를 통일하게 되는데, 과거 고구려의 광활한 영토까지 통일시키지 못하고 이 북방 경계선에 머물게 되면서, 영토상의 한계점을 드러내게 된다.

문무왕은 이와 같이 삼국통일을 완수하는 과정에서도 국가체제의 정비를 위한 노력을 기울인다. 증가한 중안관부의 업무와 확장된 영역의 통치를 위한 노력의 일부였는데 우선, 문무왕이 재위한 21년 동안 잡찬 문왕을 비롯한 문훈, 진복, 지경, 예원, 천광, 춘장, 천존 등 8명의 인물이 행정책임자로서 집사부 중시를 역임하였다. 문무왕은 이 중에서 특히 문왕, 지경, 예원과 같은 자신의 형제들을 중시에 임명함으로써 왕권의 안정을 꾀하였다. 이러한 정치적 안정을 바탕으로 적극적인 통일전쟁을 수행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문무왕은 671년과 672년에 걸쳐 병부, 창부, 예부, 사정부와 같은 중앙관부의 말단행정 담당자인 사의 인원수를 증가시켜 업무처리를 원활하게 하였다.

지방통치를 위해서 673년 진흥왕대에 이미 소경을 설치한 중원에 성을 축조하였으며, 통일한 후인 678년 북원소경을, 680년 금관소경을 두어 왕경의 편재에서 오는 불편함을 극복하고 신문왕대에 완성되는 5소경제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또한, 삼국통일 후의 신라 군사조직인 신라민과 피정복민으로 구성된 중앙의 9서당과 지방의 9주에 설치된 10정이었다. 여기에서 9서당은 대체로 신문왕대에 완성되는 것이지만 9서당 중에서 백금서당은 문무왕이 백제지역을 온전히 점령한 다음해인 672년에 백제민을 중심으로 조직한 것이다.
또, 같은 해 장창당을 두었는데, 이것이 693년에 비금서당이 되는 것으로 보아, 신문왕대에 이뤄지는 9서당 편제의 전초작업으로 볼 수 있다. 이밖에 문무왕 672년 기병을 위주로 하는 지방군제의 하나인 5주서가 설치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문무왕의 체제정비작업은 675년 백사와 주군의 동인을 제작, 반포한 데서 잘 나타나고 있다. 시호는 문무이며, 장지는 경상북도 경주군 감포 앞바다에 있는 해중왕릉인 대왕암(문무대왕릉)이다. 그의 능이 바다에 조성된 것은 그의 뜻이었다고 하는데, 이는 왜군의 침입을 막기 위해 스스로 용이 되고자 함이었다고 한다.

 

Posted by 원주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