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역사와 문화2013. 9. 14. 15:23

 

 

전세계 왕들 중에서 가장 현면한 왕은 신라왕들이다?..과연 그러진 보실까요..

제41대 헌덕왕
혜충태자(제38대 원성왕의 장남)
성목태후 김씨 ․ 김씨, 언승, 생년미상 ~ 826년 
재위기간 : 809년 7월 ~ 826년 10월. 총 17년 3개월 
부인 : 1명 
자녀 : 2남
황아왕후 - 헌상, 장렴

헌덕왕은 원성왕의 태자 인겸의 아들이며, 성목태후 김씨 소생으로 소성왕의 동복아우이다. 이름은 언승이며, 소성왕이 죽은 뒤에 어린 애장왕이 왕위에 오르자 섭정이 되었다가, 애장왕 10년(809년)에 조카인 애장왕을 죽이고 왕위에 올랐다. 790년에 대아찬으로 임명되어 중국 당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으며, 다음해에는 제공의 난을 진압하는 데 가담하여 공을 세움으로써 잡찬이 되었다. 원성왕 10년(794년)에 시중에 임명되고, 그 다음해에 이찬으로서 재상이 되었으며, 796년에는 병부령의 자리를 맡게 되어 원성왕 말년부터 정치적인 기반을 갖추게 된다. 이러한 세력기반을 바탕으로 애장왕의 즉위와 함께 각간에 올라 섭정도 맡게 된다. 801년에 어룡성의 장관인 사신이 되었고 이어 상대등에 올랐다. 아우 수종이 시중의 위치에 있었던 809년에는 제옹과 더불어 난을 일으켰으며, 난중에 애장왕이 살해되고 언승이 왕위에 올라 헌덕왕이 되었다.

헌덕왕대의 정치는 함께 반정에 가담한 그의 아우 수종(흥덕왕)을 비롯하여 조카 제륭, 양종, 균정, 영공, 헌정 등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헌덕왕은 그들을 차례로 시중에 기용하며 조정을 장악하였다. 그 덕분에 헌덕왕 재위 10년까지는 조정이 비교적 안정된 편이었으나, 인사의 편중이 심한 탓에 불만 세력이 늘어났다. 특히 지방으로 방출당한 관리들의 불만이 팽배해져 지방 행정이 급격히 악화되었다. 그 때문에 재위 11년부터 지방 곳곳에 초적들이 일어났다. 헌덕왕은 모든 주와 군의 도독 및 태수에게 명하여 초적들과 전면전을 벌여 그들을 토벌하도록 했다. 이러한 어려운 상황 속에서 마침 당나라에서는 절도사이사도의 반란을 당하여 신라에 출병을 요청하였다. 헌덕왕은 816년에 김웅원으로 갑병 3만을 이끌고 반란의 진압을 돕도록 하였다.

국내외적 혼란이 계속되던 822년에는 집사시랑인 녹진이 충공을 찾아가 인재의 쓰임을 목재의 쓰임에 비유하여 인사 처리에 적절한 대책을 제언하였는데, 이때 녹진이 제시한 인사원칙은 왕당파에게 유리한 것으로 왕권에 반대하는 귀족에게는 불리한 것으로 이해된다. 이렇게 헌덕왕이 주도한 개혁정치에 반대하여 오던 귀족의 불만이 누적되어 822년 3월에 김헌창의 난이 일어난다. 선덕왕을 이어 아버지 김주원이 왕위에 올랐다면 헌창은 아마 왕좌에 앉아 있거나 왕위 계승자가 되어 있어야 했으나, 수년 동안 외직을 전전하게 되었고 그는 그런 현실을 비통해하며 일으켰다. 그동안 외직에서의 기반을 바탕으로 반군의 깃발을 들자 순식간에 무진, 완산, 청주, 사벌 등 네 주가 그의 수중에 떨어졌다. 그는 국호를 장안이라 하고 연호를 경운 원년이라 하여 스스로 왕을 청하며 반군을 이끌었다. 정부군의 진압 작전이 조직적으로 이뤄지면서 헌창의 부대는 곳곳에서 무너졌으며 헌창은 패배를 만회할 수 없음을 알고 자결하였다. 헌창이 죽자, 그의 부하가 그의 머리와 몸을 베어 각각 따로 묻어 두었다.

한편, 웅진성을 무너뜨린 정부군은 헌창의 무덤을 찾아내 그의 시신을 다시 칼로 베고, 그의 친족과 도당 239명을 죽였다. 하지만 헌창의 아들 범문이 겨우 목숨을 건져 825년 정월에 다시 부하들을 이끌고 북한산주를 공격했다. 그는 그곳에 도읍을 세우고 나라를 개국할 생각이었지만, 패배하여 처형되고 말았다. 헌덕왕도 그 이듬해 10월에 생을 마감했는데, 장지는 천림사 북쪽이다.

제42대 흥덕왕
혜충태자(제38대 원성왕의 장남)
성목태후 김씨 ․ 김씨, 초명은 수종, 개명은 경휘, 생년미상 ~ 836년 
재위기간 : 826년 10월 ~ 836년 12월. 총 10년 2개월 
부인 : 2명 
자녀 : 1남
정목왕후 김씨 - 능유

후비박씨

흥덕왕은 원성왕의 태자 인겸의 셋째 아들이며, 성목태후 김씨 소생으로 소성왕과 헌덕왕의 동복아우이다. 초명은 수종이었다가 왕위에 오른 뒤에 경휘로 고쳤다. 그는 형 헌덕왕과 함께 조카인 애장왕을 죽이는 데 가담하여 이찬이 되었고, 헌덕왕 11년(819년)에 상대등이 되었다. 그리고 822년에는 부군에 책봉되어 왕위 계승권을 확보한 뒤, 826년 10월에 헌덕왕이 죽자 왕위에 올랐다. 당시 헌덕왕은 왕자가 여럿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조정을 장악하고 있던 동생인 그를 부군으로 책봉하여 왕위를 계승토록 했다. 즉위하면서 흥덕왕은 정치개혁을 시도했는데, 827년에 명활전을 설치하였다(914년에 설치되었다는 설도 있다). 829년에는 원곡양전을 설치하였으며, 집사부를 집사성으로 고쳤다. 이때의 개혁은 김헌창의 난으로 어지러워진 왕실을 정리하고, 신라 왕실의 귀족세력을 억제시켜 왕권강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834년에 모든 관등에 따른 복색, 거기, 기용, 옥사 등의 규정을 반포하였다. 이 규정은 왕이 당시 사치풍조를 금지시키기 위하여 발표한 것이라 하지만, 그 내면에는 골품간의 계층구별을 더 엄격히 하고자 하는 귀족들의 요구가 바탕이 된 것이었다. 이 규정에서는 진골과 육두품을 비롯한 여하의 귀족이나 평민과의 차별을 더 뚜렷이 하고 있다는 점에서, 진골세력에 대한 배려를 깊이 깔고 있음을 짐작해 볼 수 있다. 그 밖의 치적으로 변방에 진을 설치한 것과 불교에 대한 관심을 들 수 있다. 우선 828년에 궁복(장보고)이 중국 당나라의 서주에서 소장으로 활약하다가 귀국하였으므로 1만 명의 병졸로써 지금의 완도에 청해진을 설치하게 하였다. 다음해에는 당은군에 당성진을 설치하였다. 그리고 827년에는 중 구덕이 당나라로부터 경전을 가지고 들어왔으며, 830년에는 도승 150명을 허가해주었다. 한편, 828년에는 사신으로 당나라에 갔다 돌아온 김대렴이 차 종자를 가지고 돌아오니 흥덕왕이 지리산에 심게 하여 성하게 되었다. 재위기간 중 사랑하는 아내와 자식을 잃고 병마에 시달리던 흥덕왕은 끝내 병마를 이겨내지 못하고, 재위 11년(836년) 12월에 죽었다. 능은 안강 북쪽 비화양에 마련되었으니, 그의 유언에 따라 정목왕후의 능에 합장된 것이다.

제43대 희강왕
포도부인 박씨 ․ 김씨, 제륭 또는 제옹, 생년미상 ~ 838년 
재위기간 : 836년 12월 ~ 838년 정월. 총 1년 1개월 
부인 : 1명 
자녀 : 2남
문목왕후 김씨 - 의종, 계명(제48대 경문왕의 아버지)

희강왕은 원성왕의 손자인 이찬 김헌정의 아들이고, 어머니는 포도부인 박씨이다. 이름은 제륭또는 제옹이라고 하며, 헌덕왕과 함께 애장을 제거하는 데 가담하여 권좌에 올랐다.
836년 12월에 흥덕왕이 후계자를 정하지 못하고 죽자, 신라 조정은 왕위 계승권 다툼에 휘말렸다. 흥덕왕의 종제 균정과 조카 제륭이 서로 파벌을 형성하여 왕위를 차지하려고 했던 것이다. 이에 시중인 김명과 아찬 이홍, 배훤백 등은 제륭을 받들고, 아찬 김우징과 조카인 예징 및 김양은 균정을 받들었다. 그들은 흥덕왕의 죽음이 임박하자, 각기 군대를 이끌고 대궐로 들어가 전쟁을 벌였는데, 그 와중에 김양이 화살에 맞아 부상을 입었다. 그 바람에 제륭파가 승세를 굳혔고, 균정은 살해되었으며 김양과 우징은 달아났다.

제륭은 왕위에 올라 우선 사형수 이외의 죄수를 모두 사면하여 자기의 왕위 계승을 전국에 알렸다. 또 아버지 김헌정을 익성대왕에, 어머니 박씨를 순성태후에 추봉했다. 또 자기가 즉위하는 데 큰 도움을 준 김명을 상대등에 임명하고, 아찬 이홍을 시주에 임명하여 조정을 장악했다. 그와 싸우다 패배하여 달아나 장보고에게 의탁하고 있던 우징이 아버지 균정이 살해된 사실을 백성들에게 알련 반역을 선동하고 있어, 왕정은 쉽게 안정되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 김명과 이홍은 서로 짜고 군대를 일으켜 희강왕의 측근들을 대거 죽여 버렸다. 이에 겁을 먹은 희강왕은 자기도 살해당할 것을 염려하여 궁중에서 목매어 자살하니, 이때가 재위 3년째인 838년 정월이었다. 능은 소산에 마련되었다.

제44대 민애왕
김충공(제38대 원성왕의 손자)
귀보부인 박씨 ․ 김씨, 명, 생년미상 ~ 839년 
재위기간 : 838년 정월 ~ 839년 윤 정월. 총 1년 1개월 
부인 : 1명 
자녀 : 기록 없음
윤영왕후

민애왕은 원성왕의 손자 대아찬 충공의 아들이며, 귀보부인 박씨 소생이다. 이름은 명이며 헌덕왕 대로부터 여러 벼슬을 거쳐 희강왕을 보좌한 덕으로 상대등에 임명되었다가, 838년 정월에 시중 이흥과 함께 반란을 일으켜 왕위를 찬탈했다. 왕위에 오른 그는 아버지 충공을 선강대왕, 어머니 귀보부인을 선의태후로 추존하고 김귀를 상대등, 헌중을 시중으로 삼았다.

흥덕왕이 죽고 그 사촌동생인 균정과 5촌 조카인 제륭이 서로 왕위를 다투게 되었을 때, 시중인 김명과 아찬 이홍, 배훤백 등은 제륭을 받들고 아찬 우징과 조카 예징 및 김양은 균정을 받듦으로써, 한때 궁궐에서 서로 싸우게 되었다. 이 싸움에서 균정은 전사하고 김양이 화살을 맞아 우징 등과 더불어 청해진의 장보고에게 도망하여 의탁하였다. 싸움에 이긴 제륭이 즉위하였으나, 불만을 가진 김명이 이홍과 같이 다시 난을 일으키자, 희강왕은 자진하고 김명이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왕위에 오른 김명(민애왕)은 다시 균정계 세력의 도전을 받게 되었다. 838년 청해진에 의탁하고 있던 우징 등이 장보고의 군사 5,000을 이끌고 민애왕을 토벌하기 위하여 진격해왔다. 김양, 염장, 장변, 정년, 낙금, 장건영, 이순행 등이 우징을 받들고 있었다.

이해 12월 민애왕은 김민주 등을 파견하여 무주 철야현(지금의 나주 부근)에서 토벌군을 맞아 싸우게 하였으나 패배하고, 그 다음해 정월 달구벌(지금의 대구)에서의 싸움에서도 대패하였다. 민애왕은 청해진 군대가 밀려오자, 궁궐 서쪽 교외에 몸을 숨기고 있다가 병사들에게 살해되었다. 이때가 839년 정월 22일이니, 왕위에 오른 지 불과 13개월 만이었다. 장지는 알 수 없다.

제45대 신무왕
김균정(제38대 원성왕의 손자)
진교부인 박씨 ․ 김씨, 우징, 생년미상 ~ 839년 
재위기간 : 839년 윤 정월 ~7월. 총 6개월 
부인 : 1명 
자녀 : 1남
정종왕후 - 경웅(제46대 문성왕)

신무왕은 원성왕의 손자 균정의 아들이며 진교부인 박씨 소생으로 이름은 우징이다. 헌덕왕 14년인 822년에 김헌창의 난이 일어나자 대아찬의 벼슬을 받고 아버지 균정과 함께 토벌대를 이끌었으며, 흥덕왕 3년인 828년에 시중에 올랐다. 그리고 831년에 시중에서 물러났다가 3년 뒤인 834년에 다시 시중에 기용되었다. 835년에 아버지 균정이 상대등에 오르자, 부자가 함께 재상과 시중에 있을 수 없다는 이유로 물러났다. 836년에 헌덕왕이 죽자, 아버지 균정을 왕위에 앉히려 했으나, 재종 제륭(희강왕)에게 패배하여 청해진 장보고에게 의탁하였다. 838년에 희강왕의 김명(민애왕)에게 살해되고, 김명이 왕위에 오르자, 장보고 군대의 도움을 받아 김명을 제거하고 왕위에 올랐으나, 이때가 839년 윤 정월이었다.

신무왕의 즉위는 원성왕의 큰 아들인 인겸계와 균정계 세력의 대립에서 균정계가 승리하였음을 의미한다. 균정계가 승리한 데에는 청해진 세력과 이미 거세된 김주원계의 후손인 김양의 도움이 컸다. 즉위와 동시에 할아버지 예영을 혜강대왕, 아버지 김균정을 성덕대왕, 어머니 진교부인 박씨를 헌목태후에 추존하고, 아들 경웅을 태자로 삼았다.

신무왕은 즉위한 지 반년도 못 되어 죽었기 때문에 별다른 경륜을 펴지 못하였으나, 다만 그는 장보고나 김양에 대하여 배려하고 있었던 듯하다. 839년에 장보고를 감의군사로 삼아 식읍 2,000호에 봉하였다. 반면, 장보고도 이에 그치지 않고 딸을 왕비로 세우려 하였는데 이것은 청해진 세력이 강대해졌음을 알려준다. 신무왕은 장보고 등 왕권에 압력을 가하는 세력을 제압하여야 하는 과업을 앞두고 죽었다. 이때 죽위년 7월이었다. 능은 제형산 서북에 있다.

 

 

Posted by 원주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