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역사와 문화2013. 9. 14. 18:08

 

살수대첩의 영웅 을지문덕

이름만 들어도 우와 소리가 나올만큼 우리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이름

그 중 오늘은 살수대첩의 영웅 을지문덕에 대해 살펴볼까 합니다

을지문덕하면 떠오르는 단어 살수대첩 입니다.

살수대첩은 을지문덕이 고구려의 영웅으로 만든 엄청난 전투였죠

수나라 군대가 우리 고구려 영토를 침략합니다

우문술은 부여도로 우중문은 낙랑도로 나와 제9군과 합류해 압록강에 이를때쯤

살수대첩의 영웅 을지문덕은 왕명을 받고 수나라에게 가서 항복을 하였습니다

이는 고구려의 작전 수나라 진영을 살펴보려고 한 살수대첩의 영웅 을지문덕의 작전이었다

살수대첩의 영웅 을지문덕은 억류 당하였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상서우승 유사룡이 굳이 풀어주라는 것이었다

결국 을지문덕은 풀려났고 작전은 성공했다

원정군의 큰 부담은 항상 보급이다 그것도 수나라대군을 지휘하려면 그 부담은 수배에 달한다

우문술과 우중문은 을지문덕을 데려오려 사람을 보냈지만 살수대첩의 영웅 을지문덕은 그들을 등뒤로 한 채

본국으로 돌아왔다

우문술은 보급이란 현실적인 고민을 하고있었다

우문술은 을지문덕의 작전에 완벽하게 놀아났다 수나라 병영에서 자중지란이 일어난 것 살수대첩의 영웅 을지문덕이 노린거짓 항복의 효과는 훨씬 컷다

마침내 화를 참지 못한 우중문은 10만의 병력을 가지고 이기지 못한다면 황제를 무슨 낯으로 보겠냐고 병사들을 꾸짖었다

우문술은 마지못해 압록강을 건너 쫒아갔다 여기서 살수대첩의 영웅 을지문덕의 두 번째 작전이 펼쳐졌다

수나라 군대가 굶주린 기색이 있음을눈치채고 더욱 피곤함에 지치게 하기위해 싸우는 척 패하는 척하며 후퇴를 반복하며 달아났다.

작전인지 상상도 못한 수나라 군대는 평양성 30리 밖까지 달려온 것 여름에 시작된 전쟁은 어느덧 가을을 지나고 수나라군의 힘은 다 빠져있었다

살수대첩의 영웅 을지문덕은 군사를 출병시켜 사면으로 공격을 개시하였다

수나라 군사들은 살수에 이르고 그곳은 수나라 군사들의 무덤이 되었다

 

 

 

 

 

7세기 동아시아 최대의 전쟁을 고구려의 승리로 이끈 위대한 군사전략가
우리 민족의 역사에서 외침(外侵)을 막아내고 국난(國難)을 극복한 대표적인 전쟁영웅(戰爭英雄) 세 명을 거론한다면 고구려(高句麗) 왕국의 을지문덕(乙支文德), 고려(高麗)의 강감찬(姜邯贊), 조선왕조(朝鮮王朝)의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을 이야기할 것이다. 이들 가운데서도 가장 위대한 전공(戰功)을 세운 최고의 영웅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한국인들은 대부분 이순신이라고 대답한다.

하지만 이순신이 활약했던 16세기 임진왜란(壬辰倭亂)보다 6세기 후반에 중원대륙을 통일한 수(隨) 제국이 모든 국력을 걸고 고구려를 침략했던 7세기 초반의 여수전쟁(麗隨戰爭)이 가장 규모가 크고 사상자가 매우 많았던 전란이라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612년 살수대첩(薩水大捷)으로 수조(隨朝)의 침략군을 격퇴한 을지문덕의 전공이야말로 우리 대외항쟁사(對外抗爭史)에서 가장 중요하고 의미가 컸다는 점을 깨달을 수 있다.

그러나 을지문덕은 우리에게 너무 암흑 같은 존재다. 역사 인물이 분명하지만 우리는 그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다. 그가 언제 태어나 어느 시기에 출장입상(出將入相)을 했으며 무슨 벼슬을 지냈는지, 심지어 언제 죽었는지도 모른다. 그의 아버지는 누구이며 그의 가문은 어떤 집안이었는지조차 알려져 있지 않다. 삼국사기(三國史記) 열전(列傳)에서도 을지문덕의 업적인 살수대첩에 대해서만 기술(記述)했을 뿐, 그의 개인 사료는 현재 남아있지 않는다. 야사(野史)로 분류되는 조대기(朝代記)·규원사화(揆園史話)·태백일사(太白逸史) 등과 해동명장전(海東名將傳)·고려을지공막리지제축문(高麗乙支公莫離支祭祝文) 등 조선왕조 시대의 문헌,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 선생이 1908년에 출간한 을지문덕전(乙支文德傳) 등만이 그와 관련된 설화(說話)를 전해주고 있을 뿐이다.

중국 정부는 2002년부터 2007년까지 동북공정(東北工程)을 진행하여 고조선·부여·옥저·고구려·발해를 우리 민족의 역사에서 분리시키고 심지어 신라나 고려마저 중국 변방의 소수민족이 세운 위성국가였다는 주장을 펼치며, 만주 지역에 대한 통치력을 강화하고 북한에 대한 영향력을 공고히 하기 위한 정치적 목적의 역사왜곡(歷史歪曲)을 추진하여 왔다. 동북공정은 공식적으로 완료되었지만 중국의 집권 공산당이 아직도 남한 측에 의해 주도되는 한반도 평화통일을 반대하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는 한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런데도 한국의 교육정책 책임자들은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더욱 우리 민족의 역사를 교육하는 일에 전력을 쏟아붓기는커녕, 대학입시에 별 도움이 안 되고 경제실용적인 학문이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역사 교육을 축소하여 선택과목으로 전락시켰다.

나관중(羅貫中)의 삼국지(三國志:三國志演義)는 중국 후한(後漢) 말기부터 위(魏)·촉(蜀)·오(吳) 삼국시대까지 중원대륙에서 일어났던 다양한 정치적·군사적 분쟁을 표현한 명대(明代) 초기의 장편소설로 오늘날까지 동양 사람들에게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고 있는 문학작품이다. 나관중의 삼국지에 가장 크게 열광하는 나라는 바로 대한민국이다. 한국인들이 중국인들보다 삼국지를 더 많이 사랑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서기 184년에서부터 280년까지 이르는 이 시기에 중원대륙에서 무수히 많은 영웅호걸들이 각자 독특한 캐릭터를 뽐내며 등장했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삼국지연의에는 사내들의 호승심(好昇心)을 자극하는 마력이 숨어 있다. 그래서일까? 이문열(李文烈)·정비석(鄭飛石)·김홍신(金洪信)·황석영(黃晳映) 등 국내 문학의 거두들은 마치 연례행사를 치르듯이 삼국지연의를 옮겨서 각색하는 글쓰기를 반복하였다.

이렇게 되니 나관중의 삼국지는 국내 대학 입시 논술고사의 단골 메뉴로 등장하게 되었고 “삼국지를 세 번 이상 읽지 않은 사람과는 친구로 사귀지 말라”는 괴상한 소리까지 나오게 되었다. 삼국지연의의 배경, 즉 1백여년간의 시기에 활동했던 제갈량(諸葛亮)·관우(關羽)·장비(張飛)·조운(曺雲)·곽가(郭嘉)·허저(許楮)·하후돈(夏侯惇)·서황(徐晃)·여포(呂布)·주유(周瑜)·감택(鑒澤)·황개(黃蓋)·주태(周泰)·여몽(呂蒙) 등은 잘 알지만 고구려사(高句麗史)에 불꽃을 피운 온달(溫達)·강이식(姜以式)·을지문덕(乙支文德)·연개소문(淵蓋蘇文)·양만춘(楊萬春) 등은 모른다. 적벽(赤壁)·허창(許昌)·건업(建業)은 줄줄 외우지만 비류수(沸流水)·건안성(建安城)·오골성(烏骨城) 등은 어느 나라 영토인지도 모른다. 삼국지연의는 모두 60년도 못 간 보잘것없는 나라였던 위·촉·오 중국 삼국시대의 역사는 알아도 7백년에서 1천년까지 사직(社稷)을 유지했었던 고구려·백제·신라 우리 민족의 삼국시대를 모르고, 심지어 우리 역사에서 가장 강력한 국력을 자랑했던 고구려의 역사마저 망각해가는 정신없는 백성만을 양산했던 것이다.

중국 정부는 고구려가 한국인들의 조상에 의해 건국된 나라였다는 사실을 부정하면서 만주는 물론이거니와 북한의 영토마저 한국인들의 문화적 종속권에서 제외시키기 위한 교활하고 치밀한 계획을 성공적으로 추진하고 있는데, 정작 한국에서는 자국 역사의 교육을 소흘히 하면서 중국의 삼국지연의를 소중하게 여기고 있으니 장래 우리 민족의 생존권을 과연 누가 무슨 방법으로 보장받을 수 있단 말인가?

중국은 세계에서 두번째로 광활한 영토를 가진 나라이며 지구촌에서 가장 많은 인구를 지닌 강대국이다. 지금의 티베트 지역과 신강유오이자치구(新疆維吾爾自治區)에서 벌어지고 있는 독립운동을 무력(武力)으로 탄압하며 조심스럽게 한반도 북부 지역에 대한 야욕을 드러내고 있는 중국은 연변조선족자치주(延邊朝鮮族自治州)를 완전히 중국의 세력권에 귀속시키기 위해 한반도에서 평화통일이 이루어지는 일을 방해하려고 갖은 공작을 꾸몄으며, 동북공정(東北工程)은 그러한 공작 가운데 하나였을 뿐이다. 일본 정부는 독도(獨刀)를 다케시마[竹島]라는 명칭으로 부르며, 1945년 태평양전쟁(太平洋戰爭)의 종전(終戰) 당시 미국에 의해 자국의 영토로 인정받았으나 한국에서 70년 동안 불법적으로 점거중이라면서 국제사법재판(國際司法裁判)을 통해 시비(是非)를 가리자고 주장하고 있다. 이에 대해 중국인들이 이 같은 일본 측의 입장을 적극적으로 지지함과 동시에 백두산(白頭山)이나 이어도(離於島)에 대한 영유권을 내세우는 이유는 무엇인가? 국제적으로 명분과 지지를 얻고 장차 정세가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전개된다면 한반도를 점령하겠다는 의도임에 틀림없다. 즉, 침략이다.

일본의 역사 교과서 왜곡 파문에 이어 중국의 동북공정까지 한국인들의 대외적 이미지가 크게 손상되고 우리 민족의 자주권 유지에 대한 명분이 심각하게 훼손당하고 있는 오늘날, 외침(外侵)으로부터 나라를 지키고 민족의 생존권에 대한 위협을 막아낸 구국간성(救國干城)의 영웅을 우리 민족의 역사에서 찾아내어 탐구하고 부각시키는 작업을 경기회복(景氣回復)에 직접적인 연관이 없다고 하여 하찮은 일로 치부해도 되는 것인가?

한반도를 강점하고 36년간 식민지 지배를 했던 일본 제국주의 세력은 1910년 8월에 경술병탄늑약(庚戌倂呑勒約)을 체결하기 전부터 한국침략의 정당성을 완성하기 위해 한사군 한반도 북부 위치설(漢四郡韓半島北部位置說)·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附設) 등을 만들어 역사를 날조하였다. 이 시기에 우리 민족의 고대사를 복원하여 일본인들의 역사왜곡(歷史歪曲)에 대응하고, 중원 세력과 대등하게 경쟁했던 자랑스러운 역사를 민중에게 가르쳐서 민족해방운동(民族解放運動)의 정신적 토대를 구축한 천재사학자(天才史學者)가 등장했으니 그가 바로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 선생이었다.

선생이 가장 중요시하게 여기고 연구했던 것은 우리 민족의 역사에서 가장 무력(武力)과 재력(財力)이 막강했던 시기인 고구려사(高句麗史)였으며, 그 가운데서도 선생이 매우 자랑스러운 영웅으로 숭상했던 역사인물이 바로 을지문덕(乙支文德)이었다. 그러나 선생께서 ‘우리 역사상 최고의 위인’이라며 극찬과 존경을 바친 을지문덕에 관련된 사료가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에 아무리 연구와 문장에 천부적인 자질을 갖추었던 선생이라고 해도 그의 전기를 쓰는 데 애를 먹을 수 밖에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선생은 을지문덕전(乙支文德傳)의 서론에서 “다행이구나, 을지문덕이여! 오히려 이 몇 줄의 역사가 전해 오고 있도다. 불행하구나, 을지문덕이여! 겨우 이 몇 줄의 역사만 전해 오고 있도다”라고 한탄했던 것이다.

우리는 학교에서 서양사(西洋史) 과목을 수업받을 때에 약소민족이 강대국의 침략을 물리쳐 승리한 대표적인 전쟁을 기원전 5세기의 그리스·페르시아 전쟁[Greco·Persian Wars]이라고 배웠다. 페르시아의 국왕 크세르크세스 1세[Khshayarsha]가 기원전 480년 50만 대군을 이끌고 그리스를 침공했을 때, 그리스 해군의 총사령관으로서 살라미스 해전[Battle of Salamis]에서 승리를 거두었던 테미스토클래스(Themistocles)는 고대의 역사인물 가운데 세계 최고의 영웅으로 평가받고 있다. 하지만 서기 7세기의 여수전쟁(麗隨戰爭)을 고구려의 승리로 이끌었던 을지문덕이야말로 아테네의 테미스토클래스보다 더 위대한 전공(戰功)을 세운 탁월한 군사전략가였음을 누구에게도 내세울 수 있고 또 자부할 수 있다.

우리 민족의 역사에서 자랑스러운 승리를 들추어내는 것은 조상들의 위대한 업적을 기림으로써 국민들에게 영웅을 숭배하는 마음을 고취시키고, 열성적이며 모험적이었던 고구려인들의 옛 발자취를 묘사하여 다시 영웅을 불러 일으켜 나라의 어지러움과 어려움을 극복하고자 함이니 을지문덕에 대한 이 현대판 전기가 비열한 자들의 마음을 경계·각성시키고 민족의 자존감을 되살릴 수 있기를 기대한다.

 

Posted by 원주유
고구려 역사와 문화2013. 9. 14. 17:50

 

지안(集安: 서기 3~427년 고구려 首都)

'고구려 박물관'의 역사 왜곡… 고구려史 뭉개고 발해史는 지워

동북공정 강화
"漢 무제가 현토군에 고구려현 설치, 中原에 융합" 옌볜 지역은 말갈족 영역으로

모순
지도에 남쪽 경계는 한강 유역, 옌볜은 고구려땅 아니라면서 고구려城 그려 넣기도

集安 고구려碑
8각 유리상자 안에 넣어놓고 1m 떨어져서만 볼 수 있게… 확대경 써도 碑文 판독 어려워 지린성

"고구려가 조선족(한민족)의 조상인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중국의 나라였네요."
1일 중국 지린(吉林)성 지안(集安)의 '지안 박물관'. 이날 고구려 전문 박물관으로 신축 재개관한 박물관 6개 전시실을 관람한 한 중국인은 이렇게 말했다.
개관 당일 박물관 전시실을 둘러본 결과 '고구려는 중국의 속국' 같은 노골적 표현은 없었다. 그러나 동행한 국내 전문가는 "'동북공정'이 무서운 건 고구려사(史)를 자연스럽게 중국사의 일부로 받아들이게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중국이 지안 박물관을 통해 더 교묘하고 세밀하게 '동북공정'을 펼치고 있다는 분석이다. 지안은 서기 3년부터 427년까지 425년간 고구려 수도였던 곳이다.
"고구려족은 中 소수민족"
지안시 인민정부 청사 앞에는 고구려 상징인 '삼족오(三足烏·태양에 산다는 세 발 까마귀)' 동상이 서 있다. 안내판엔 "태양조(太陽鳥·삼족오)는 중국 고대 전설에 등장한다. 고구려 벽화의 삼족오는 고구려 민족과 중원(中原·중국을 지칭) 민족이 동일하게 태양조를 숭배했다는 의미"라고 적혀 있다. 한 시민은 "2년 전까지는 '고구려족(族)은 중국의 소수민족'이라는 문구가 있었다"며 "한국과 북한의 반대가 심해 이를 삭제한 것"이라고 말했다. 중·일, 한·일 간 역사 갈등이 첨예한 상황에서 중국이 한국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신경 쓴 것으로 관측된다.
그러나 박물관 안에 있는 안내판과 지도에는 고구려가 한(漢)·당(唐)의 영향을 받아 중원에 '융합'됐다는 내용만 가득했다. 한 관람객이 "고구려와 조선(한반도)의 관계는 뭐냐"고 물었다. 전시관 안내원은 "고구려와 한반도는 아무 관계가 없다. 고구려족은 중국의 소수민족"이라고 답했다.
고구려와 발해 연결 고리 제거
고구려 영역도에는 지금의 옌볜(延邊) 일대를 고구려 영토에서 제외하고 해당 지역을 말갈족 영역으로 구분했다. 국내 전문가는 "고구려에서 말갈을 뺀 것은 고구려와 발해가 이어지는 연결 고리를 없애려는 의도"라고 말했다. 발해는 고구려 지배층과 말갈 피지배층으로 이뤄진 국가였다. 고구려에서 말갈이 없어지면 고구려와 발해의 연관성도 그만큼 약해진다는 설명이다.
실제로 지린성 창바이(長白)에 있는 발해 벽돌탑인 '영광탑'의 안내판에는 "당나라 발해 시기에 쌓았다. 모양과 구조가 시안(西安)의 당나라 때 현장탑과 비슷하다"고 써놨다. 그러나 박물관의 고구려 산성(山城) 지도에선 옌볜 지역에 고구려 산성이 두 곳 있는 것으로 표시했다. 옌볜 일대가 고구려 땅이 아니라고 하면서도 고구려성을 그려 넣은 오류를 저지른 셈이다. 고구려 영토의 남쪽 경계는 한강 유역이라고 했지만 지도상 압록강 이남에는 어떤 유적도 표시하지 않았다.
내부 사진촬영도 기록도 금지한 지안박물관 - 중국 지린(吉林)성 지안(集安)시의 인민정부청사 앞에 세워진 지안박물관 입구. 1일 고구려 전문 박물관으로 신축 재개관했으며, 고구려를 중국 역사에 편입하려는 시도가 엿보인다.

 

박물관 측은 내부 사진 촬영을 금지하고 전시물 내용을 기록하는 것까지 엄격하게 통제했다. /지안시 청사 앞에 고구려 상징 '三足烏' 동상 - 중국 지린(吉林)성 지안(集安)시인민정부청사 앞에 1일 고구려를 상징하는‘삼족오(三足烏·세발까마귀)’동상이 서 있다. 중국은 고구려를 중국사에 편입하려고 하고 있다. /발해 벽돌탑인 '영광탑' 안내판엔 "당나라 風格을 갖고 있다" - 탑 안내판에“모양과 구조는 당나라 때의 현장탑과 비슷하며 당나라의 풍격을 갖고 있다”고 적혀 있다. 중국 지린성 창바이(長白)에 있는 발해 시기 벽돌탑인 영광탑(靈光塔).

 

박물관 전시는 일관되게 중원과 고구려의 '결합'을 강조했다. 입구에서부터 "한 무제가 현토군에 고구려현을 설치했다"고 적었다. 관련 지도는 현토군이 고구려로 성장한 것처럼 묘사했다. 그러나 고구려는 현토군을 밀어내면서 성장한 국가라는 게 전공 학자 대부분의 일치된 견해다. 안내판처럼 '고구려족과 중원 각 민족의 융합'을 통해 성장하지 않았다. 수(隋)·당과 대전(大戰)을 벌여 이들을 물리친 사실은 박물관에 어떤 설명도 없었다.

 

박물관은 또 "고구려 왕과 귀족은 당나라 관리 복장을 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국내 전문가는 "고구려는 망할 때까지 독자적 관등 체계를 유지했다"면서 "이곳 박물관에도 소형(小兄)·대형(大兄) 등 고구려의 독특한 관직이 적힌 기와 조각이 전시돼 있다"고 말했다.


현존 최고(最古) 고구려 비석으로 추정되는 '지안 고구려비'는 박물관 1층 로비 가운데 있었다. 8각 유리 상자에 넣어 성인 허리 높이의 전시대에 올려놓았다. 1m 밖에서 관람하게 돼 있어 비문(碑文)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비석 실물을 처음 접한 국내 학자들이 확대경까지 동원해 글자를 판독하려고 했지만 어려움을 겪었다.

지안(集安) 박물관
425년간 고구려 수도였던 중국 지린(吉林)성 지안에 지어진 고구려 박물관. 중국은 2003년 이른바 ‘동북공정’이 진행되던 시기에 박물관 건립을 추진했다. 3년 전 완공됐으나 내부 보완을 거쳐 1일 재개관했다.

동북공정(東北工程)
중국이 고조선·고구려·발해의 역사를 중국사로 편입하기 위해 추진한 동북 지역 연구 프로젝트. 중국 사회과학원 산하 변강사지연구중심(邊疆史地硏究中心)이 2002년부터 5년간 진행했다. 지금은 ‘역사 왜곡’ 영역을 벗어나 일반 중국인의 상식을 바꾸는 단계까지 이르고 있다. 한반도 통일 등 동북아 정세 변화에 대비한 중국의 역사적 명분 쌓기라는 분석도 있다

 

 


중국 光明日報의 ‘고구려 역사 연구의 몇 가지 문제에 대한 試論’

“한민족은 고구려와 기자조선을 도용해 갔다”

 

중국의 역사자료만 ‘일방적’으로 인용해 “고구려는 중국의 일부”라고 주장했다. 전문을 읽어보면 이 시론이 얼마나 억지를 부리는가를 명확히 알 수 있다. 이 시론의 결론이 ‘고구려는 중국의 일부니 정치적으로 이의를 제기하지 말라’라고 돼 있는 것은 이 시론이 정치적 의도를 갖고 작성되었음을 보여주는 ‘명백한’ 방증이다. 일반인이 알기 힘든 용어는 그 뜻을 찾아 괄호 안에 주석을 달았다. “광개토대왕이 웃는다.” 중국 길림성 집안현 통구에 있는 5.34m 높이의 광개토대왕비. 최근 중국은 총력을 다해 고구려를 중국역사에 편입시키려는 일련의 작업에 착수했다.

‘고려’라고도 약칭하는 고구려는 서한(西漢)에서 수(隋)·당(唐) 시대까지 중국 동북(東北)지역에 출현했던 중요하고 영향력 있는 변방 민족 중의 하나였다(중국에서 동북지역은 대개 만주 일대를 일컫는데 길림성과 요녕성, 흑룡강성을 가리켜 ‘동북3성’이라고 한다).

中原 왕조와 종속 관계

고구려의 선조는 주나라와 진나라 시기 줄곧 중국의 동북지역에서 생활했다. 기원전 108년 한나라 무제는 요동과 한반도 북부에 4군을 설치했는데 그 중에서 현도군에 있던 고구려현이 바로 고구려인이 살았던 곳이다.

기원전 37년 부여 사람인 주몽은 현도군 고구려현 관할구역에 정권을 세우고 흘승골성(紇升骨城 : 지금의 요녕성 환인현성 부근. 그러나 한국 역사학계는 광개토대왕비문을 근거로 주몽이 졸본에 도읍을 정했다고 보고 있다)을 수도로 정하였다.

서기 3년(한나라 평제 원시 3년) 고구려는 국내성(지금의 길림성 집안시)으로 수도를 옮겼다가 서기 427년 평양성(지금의 평양시)으로 천도하였다. 전성기 때의 고구려는 길림성 동남부와 요하(遼河 : 중국 동북지방 남부를 가로질러 서해로 흐르는 1400㎞의 강) 동쪽, 그리고 한반도 북부까지 세력을 뻗쳤다. 이로부터 서기 668년 한반도 동남부에 위치한 신라와 연합한 당나라 왕조의 공격에 의해 멸망하기까지 고구려는 705년의 역사를 유지했다.

고구려가 존재한 700여 년의 시간을 살펴보면 고구려는 중국의 중원 왕조가 관할하는 지역에서 주로 활동하였으며 중원 왕조와 종속관계를 유지하였다. 고구려 정권은 중원 왕조의 제약을 받았고 중국 지방정권의 관할하에 있었으므로 고대 중국에 있었던 변방의 민족정권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고구려와 중원 왕조의 관계는 중원 왕조의 제압력이 강해지거나 약해짐에 따라 밀접해지기도 했고 소원해지기도 했을 것이다. 이 글에서는 최근에 이뤄진 고구려 역사연구에 대해 약술한다. 학계연구자들의 지도편달을 바란다.

[1.고구려는 중국 동북지역 역사에 출현했던 소수민족 정권이다]

주(周 : 殷나라 다음에 건국해 秦나라에 멸망당할 때까지 수백년간 이어온 중국 고대 왕조) 나라와 진(秦: 기원전 221~207년)나라 시절 고구려인의 선조는 주로 혼강(渾江: 중국 요녕성을 흐르는 강)과 압록강 유역에서 생활하였다. 이들이 살았던 중심구역은 지금 요녕성의 환인현과 신빈현, 길림성의 집안시와 통화시 일대였다.

우리는 고구려 민족이 중국 동북지역 역사에 등장한 한 민족이었고, 고구려 정권은 중국 동북지역 역사에 등장한 변경민족 정권이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고구려 민족의 기원을 살펴보자. 현재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대다수 중국학자들은 고구려 민족의 기원에 대하여 예맥(濊貊: 중국 漢나라 시절 압록강과 혼강 유역에 살았다는 한민족의 근간이 되는 부족)설과 부여(夫餘: 고조선이 무너진 후 북만주 일대에 웅거한 부족국가)설, 고이(高夷 : 만주에 있던 고대 종족)설, 상인(商人 : 商은 殷나라를 뜻한다. 은나라가 주나라에 패해 동쪽으로 가 고구려의 선조가 되었다는 것이 商人설이다)설, 염제(炎帝)설 등을 제기하고 있다(중국 ‘史記’에는 중국의 黃帝가 염제·치우 등과 싸워 천자가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후 중국에서는 치우를 ‘군신’으로, 염제는 ‘불의 신’ 혹은 ‘태양신’으로 받들었다).

이런 여러 학설에 공통점이 있다면 고구려 민족은 주나라와 진나라 때에 중국의 동북지역에서 활동했다는 점이다.

좌전(左傳: ‘춘추좌씨전’ 혹은 ‘좌씨춘추’의 다른 이름. 춘추 시대 노나라의 좌구명이 편찬했다. 기원전 722~481년의 춘추시대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의 소공(昭公) 9년 조를 보면 주나라 사람들은 내내 “숙신(肅愼: 고조선 시대에 있었던 고대 종족)과 연(燕 : 周나라 昭公 奭의 후예로 전국 시기에 왕으로 칭한 칠웅 중의 하나. 지금의 중국 하북성 지역에 있었다. 고구려 장수왕의 공격에 의해 멸망했다), 그리고 박(?: 은나라 탕왕이 도읍한 곳. 지금의 하남성 귀덕부 상구현)은 우리의 북방 영토였다”고 말하는 부분이 있다.

고구려는 漢나라 안에 있던 지방정권

여기서 우리는 주나라의 무왕이 상(商: 殷나라)을 점령한 후 주나라 사람들이 동북지역을 경영했음을 명확히 알 수 있다. 주나라 때의 세력 범위는 지금의 동북지역보다 훨씬 넓었다.

환인현의 태서구 유적과 요산 유적·봉명 유적, 집안시의 대주선구 유적과 이도외자 유적·동촌 유적, 통화시의 왕만 발발자 유적 등에 대해 오랫동안 고고학적 조사와 발굴이 이뤄졌는데 이 조사에서 이 유적들은 모두 고구려 정권이 출현하기 전의 문화 유물이라는 것이 분명히 밝혀졌다. 이 지역 유물의 지층을 조사해보면 하층은 신석기시대 말기부터 청동기시대의 문화이고, 그 위층은 한대 문화이며, 그보다 더 위층은 고구려 정권이 출현한 후의 문화임이 명확히 드러난다.

두 번째는 고구려 정권 건립 상황에 관한 것인데 중국 학자들과 외국 학자들은 대부분 고구려가 기원전 37년(서한 원제 건조 2년)에 흘승골을 수도로 해 세워졌다는 점에 일치된 견해를 보이고 있다.

요녕성 환인현성 부근(환인현성 서쪽으로 4㎞ 떨어진 혼강 맞은편 쪽)에는 평원성(平原城: 평야에 세워진 성. 산성의 반대 개념)인 ‘하고성자(下古城子)’가 있으며, (환인현성 동북으로 8.5㎞ 떨어진 혼강 맞은편의 오녀산 정상에는) ‘오녀산성(五女山城)’이 있다. 고고학적 조사와 발굴에 의하면 이곳은 한나라 현도군의 관할 범위 안에 있던 고구려의 초기 수도였다고 한다.

고구려 정권이 출현하기 전 중국의 서한(西漢) 왕조는 광대한 중국 동북지역을 상대로 행정을 펼치고 있었다. 한나라 무제 원봉 2년인 기원전 108년 이곳에는 잇따라 현도군·낙랑군·임둔군·진번군의 네 군이 세워졌는데, 네 군(세칭 漢四郡)이 관할한 범위는 동북 지역과 한반도 북부에 이르렀다. 그 후 한사군의 관할 지역에 변화가 있어, 현도군의 행정수도가 고구려현으로 이전하였다.

고구려현 부근에서 건립한 고구려 정권은 처음에는 현도군, 이어서는 요동군에 속하게 되었는데 고구려 정권은 끊임없이 표(表: 신하가 자기 생각을 서술해 황제에게 올리는 글)를 올려 신하를 칭하고 조공을 받쳤다. 그리고 현도군에 이어 요동군을 거치며 한나라 왕조가 하사한 관복 등을 받아갔다. 이 시기 많은 한(漢)나라 사람이 고구려 정권에 흘러들었다.

1975년부터 1976년까지 중국 집안시 국내성 지역에서는 고고학적 조사와 발굴이 있었는데, 이때 고구려의 석축(石築) 안에서 한나라 때 만들어진 흙으로 쌓은 벽(土築城垣)이 발견되었다. 여기서 한나라 시대의 철기와 도기 등 여러 유물이 출토된 바 있다.

705년간의 역사를 이어오며 고구려는 현도·요동·낙랑 등지로 영토를 확장시켰으며 여러 차례 수도를 옮겼다. 그러나 흘승골이든 국내성이든 평양성이든 고구려의 수도는 모두 한사군 지역 안에 있었다. 그러니 고구려는 중국 역사에 출현한 변방의 민족 정권인 것이다.

周대에 기자 봉하고, 漢대에 4군 설치

세 번째, 한나라에서부터 당나라 때까지 중국은 분열해 있었지만 중국의 역대 왕조들은 모두 고구려를 변방의 민족 정권으로 생각했다는 점이다.

상(商: 은나라) 말기에서 한나라 초까지 고구려인의 거주지는 기자조선(箕子朝鮮: 은나라 말기 기자가 조선에 와 단군조선에 이어 세웠다고 하는 나라)의 관할 구역 안에 있었는데, 기자는 주나라 시대 지방 제후 중 하나였다.

한나라 시대에는 위씨조선(衛氏朝鮮: 한국에서는 ‘위만조선’이라고 한다. 한나라 고조는 중국을 통일한 후 노관에게 연나라를 다스리게 했는데, 노관이 반란을 일으켜 나라가 혼란에 빠졌다. 이때 노관의 부관으로 있던 衛滿이 1000여 명을 이끌고 패수를 건너 고조선의 準王을 찾아가 몸을 의탁했다. 그 후 위만은 준왕을 쳐 왕위를 빼앗고 도읍을 왕검성으로 옮겼는데 이를 위만조선이라고 한다. 위만조선은 한나라로부터 지원을 받아 지역 안정을 도모하고 이웃한 진번군과 임둔군 등을 복속시켜 고조선 역사상 가장 융성했던 나라가 되었다)이 기자조선을 대신했는데, 위씨조선은 여전히 한(漢) 왕조의 종속국이었다.

기원전 108년(원봉 3년) 한나라는 위씨조선을 멸망시키고 낙랑 등 4군을 설치해 한반도 중부 이북을 포함한 동북지역을 중국의 중원(中原) 지역과 같은 방식으로 통치하였다(한나라의 무제는 기원전 108년 위만조선을 멸망시킨 후 바로 낙랑·임둔·진번 3군을 설치하였고 그 다음해 현도군을 추가해 4군을 만들었다). 한나라로부터 당나라 때까지 고구려에 대한 중국 각 왕조의 관리 방식은 각기 달랐지만 중국의 통치자들은 고구려의 활동지역을 중국의 전통적인 영토로 생각하였다.

수나라 때 만들어진 ‘배구전(裴矩傳)’이라는 책을 보면 “수나라의 통치자는 ‘고구려의 영토는 원래 고죽국(孤竹國 : 중원에서 멀리 떨어진 땅)이다. 주나라 때 이 땅을 기자에게 봉했다가 한나라 때는 3군으로 나눴다. 진(晉)나라 시절에도 여전히 요동(요하 동쪽으로 동북과 같은 말이다) 지역은 진나라의 관리를 받았다. 그런데 지금은 더 이상 신하로 칭하지 않고 별개의 외지가 되었다. 그래서 선제(先帝)께서는 이를 못마땅히 여겨 고구려를 계속 정복하고 싶어했다’고 말했다”는 대목이 있다.

또 ‘책부원귀(冊府元龜)’ 제왕부(帝王部) 친정이(親征二)에는 “당 태종 또한 ‘요동은 원래 중국의 토지인데 주나라 때부터 위나라 때까지 그다지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 수나라의 왕은 일찍이 네 번이나 군대를 파견해 공격한 적이 있으나 모두 패하고 돌아왔고 고구려인은 많은 중국 평민을 죽였다. 지금 고구려인은 국왕을 살해하고 굉장한 자만에 빠져 있다. 나는 밤새 이 일을 생각하느라 잠을 이루지 못했다. 나는 죽은 중국 사람들의 자녀를 위해 복수할 것이다. 고구려인들을 도와 왕을 죽인 자들을 토벌할 것이다. 지금 비록 중국 대부분의 토지는 평정되었지만 단 하나 이곳만 평정되지 않았다. 우리는 또 한번 남은 병사의 힘으로 그 땅을 소탕하여 평정할 것이다. 후대의 우리 자손 중에는 강한 군대가 나올 것이고 반드시 재능 있는 인재가 나올 것이다. 나는 그들을 설득하여 반드시 요동을 토벌하러 가게 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아직 늙지 않았으니 내가 직접 토벌하러 가고 싶다. 이렇게 하면 우리 후손들에게 그 일을 시키지 않아도 될 것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는 내용이 있다(‘책부원귀’는 서기 1005년 송나라 정종 때의 왕흠약과 양억 등이 왕명을 받들어 편찬한 유서이다).

“원래는 중국 것이다” “비록 중국 대부분의 토지가 평정되었지만 단지 이 한곳만 평정되지 않았다”는 말은 당 태종이 고구려 지역을 전통적인 중국의 영토로 간주하고 있었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고구려와의 통일을 실현하는 것은 곧 “중국의 영토를 평정한다”는 최후의 사명을 완성하는 것이었다. 수나라와 당나라의 왕조가 전력을 기울여 고구려와의 통일을 이룩하려고 한 이유도 바로 이것 때문이었다.

책봉받고 조공 바친 고구려

네 번째, 고구려 또한 중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원하지 않았다.

700여년 동안 고구려는 동북 변방지역에서 독립하려고 하지 않았다. 고구려가 자신에게 스스로 부여한 위치는 중국 중앙왕조의 변방정권이었으며, 고구려는 중국이 3국시대(蜀漢·魏·吳나라로 나뉘어 소설 ‘삼국지’의 배경이 된 시기)와 양진시대(兩晉: 魏나라의 신하로 있던 사마염이 조조의 후손인 조한으로부터 황제의 자리를 빼앗아 265년 지금의 낙양에 晉나라를 세웠다. 그러나 晉나라는 4대 만에 흉노 등 북방민족의 공격을 받아 326년 멸망하였다. 그 이듬해 사마예는 동쪽으로 옮겨가 지금의 남경에 다시 晉나라를 세웠는데, 이 진나라는 419년까지 존속하였다. 사마염이 세운 진은 西晉, 사마예가 건국한 진은 東晉이라고 하고 이를 합하여 ‘兩晉’이라고 한다), 그리고 남북조 시대(東晉 이후 지금의 남경에는 차례로 宋·南齊·梁·陳나라가 건국되었다. 반면 북쪽에서는 北魏-東魏·西魏-北齊·北周가 들어서 대립하게 된다. 이렇게 남북으로 갈린 상태에서 여러 나라가 멸망하고 대립한 때를 남북조 분열시대라고 한다. 남북조 분열시대를 통일한 것이 隋나라다)로 크게 분열돼 있을 때도 스스로 중국의 중앙왕조에 대해 종속관계를 유지하였다. 그뿐 아니라 고구려는 책봉을 받았고 조공을 바쳤으며 질자(質子: 인질)를 보냈다.

‘통전(通典)’ 변방(邊方) 고구려를 보면 고구려의 왕은 동진(東晉)과 송(宋)·제(齊)·양(梁)·후위(後魏)·후주(後周) 시대까지 중국 남북의 두 왕조로부터 작위를 책봉받았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 또한 같은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통전’은 당나라 때 두우가 黃帝부터 당나라 현종까지의 문물제도 전반에 대하여 기술한 책).

‘亡國의 恨’ 품지 않은 고구려인

당나라가 세워진 후 고구려는 당으로부터 책봉을 받았으니 이는 고구려의 왕조가 당의 승인을 분명히 받았다는 증거이고 중국으로부터 자주 독립을 하지 않으려 했다는 뜻이다. 이러한 인식이 있었기 때문에 당나라가 고구려를 통일하자, 많은 고구려인들은 당나라에 대해 ‘망국(亡國)’의 한을 품지 않았던 것이다.

오히려 고구려인들은 당나라에 통합된 후 당나라의 통일 대업을 지키기 위한 전쟁에서 공로를 세워 역사에 이름을 남기기까지 하였다. 신·구 ‘당서(唐書)’에 이름을 남긴 천남생(泉男生)·고선지(高仙芝)·왕모중(王毛仲)·왕사례(王思禮)·이정기(李正己) 등이 그들인데, 신·구 ‘당서’에는 이들의 전기가 기록돼 있다.

다섯 번째로 멸망 후 고구려인의 이동 방향을 살펴보자. 고구려는 당 고종 총장 원년인 서기 668년 멸망했는데 ‘신당서’고려전에는 고구려를 멸망시킨 당나라가 고구려 난민 ‘69만호’를 받아들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 숫자는 당시 고구려의 총 가구수였겠지만, 여기에는 비고구려인 가구도 적잖이 포함돼 있었다. 당시의 고구려족 가구는 15만호 정도였기 때문이다.

학자들은 고구려가 패망한 후 고구려인들은 네 방면으로 이동했다고 보고 있다. 중원 각지로 유입된 고구려인이 있었고, 신라로 간 고구려족이 있었으며, 말갈(발해)에 의탁한 고구려인이 있었고, 돌궐로 거주지를 옮긴 고구려인도 있었다.

중국 학자들의 최근 연구 성과에 의하면 멸망시 고구려인 숫자는 대략 70만명 정도였는데 이 가운데 30만명이 중원 각지로 유입되었다고 한다. 신라에 귀의한 사람은 10만 정도였고, 말갈(발해)에 의탁한 사람은 10만 이상, 돌궐로 옮겨간 고구려인은 1만여 명이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이렇게 하면 대략 50만명 정도가 네 방면으로 이주한 셈이 되는데, 나머지 20만명은 요동 각지로 흩어져 유민(遺民)이 되고, 전쟁 와중에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숫자를 더하면 대략 70만이라는 숫자가 나온다.

신라로 유입된 고구려인은 용흥강(함경남도를 흘러 동한만 쪽 동해로 흘러드는 강) 이남의 한반도로 유입돼 살던 10만여 명이었는데 이들은 신라로 유입돼 반도 민족에 융화되었다.

그러나 나머지 대다수의 고구려인은 한족(漢族)에 융화되었다. 이러한 점으로 볼 때 고구려 민족을 중국 동북지방에 등장했던 변방민족으로 보는 것이 역사적인 사실에 가장 부합된다고 할 수 있다.

[2. 왕씨(王氏) 고려는 결코 고구려의 계승자가 아니다]

서기 918년 한반도에서 ‘고려’라는 이름의 정권이 출현하였다. 그 통치자의 성(姓)이 왕씨였기 때문에 학계에서는 이를 ‘왕씨 고려’라고 부른다. 비록 왕씨 고려는 고구려의 칭호를 계승했지만, 고구려의 승계와는 직접적인 관련이없다.

고구려가 패망하고 고려가 세워지기까지는 큰 시간 차이(250년)가 있을 뿐 아니라 역사 발전과 연원도 크게 다르다. 기원전 37년에 세워진 ‘고씨 고려(고구려)’는 서한(西漢)의 현도군 고구려현 관할하에 있었다. 그후 점차 강성해졌지만 중국 중앙왕조와의 종속관계를 끊지 않았다. 수·당 시기로 접어들어 고구려는 영토 확장정책을 실시해 한반도에 있는 기타 정권(삼한과 신라·백제 등)이 중원의 왕조에 조공하는 통로를 가로막아, 수·당 두 왕조로부터의 토벌을 불러들였다.

서기 668년 당나라는 마침내 ‘고씨 고려’를 통일함으로써, 고씨 고려의 영토는 당나라 안동도호부(최초의 행정중심은 지금의 평양)에 의해 관할되었다. 그리고 몇십 년 후 고씨 고려가 관할하던 구역에 중국 역사에 등장하는 또 하나의 지방정권인 ‘발해’가 들어섰고, 고씨 고려가 관할한 다른 일부분 지역은 한반도 남부에서 일어난 신라 정권에 귀속되었다. 하지만 이를 제외한 부분은 여전히 안동도호부에 의해 관할되었다.

고려는 三韓을 이었다

대부분의 고구려족은 당나라에 의해 내지(內地: 중국)로 옮겨져 한족과 융합되었으며 나머지 고구려인은 주위의 각 민족에 융합되었다. 이로써 고구려 왕족은 후계자가 끊겼으니 고구려는 나라를 세운 지 700여 년 만에 드디어 중국 역사발전의 긴 강 속으로 사라지게 된 것이다.

왕씨 고려가 건국한 것은 고씨 고려가 멸망한 때로부터 250년 후인 서기 918년이었다. 왕씨 고려는 서기 935년 한반도에 있던 신라 정권을 대치하였고 그 이듬해에 후백제를 멸망시켜 반도 중남부의 대부분을 통일하였다.

그러다 서기 1392년에 왕씨 고려의 신하인 이성계(李成桂)가 왕을 폐위하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1393년 이성계가 ‘조선과 화녕(和寧) 중에서 어느 것을 국호로 해야 하는가’라는 주청을 올리자, 명나라 왕은 이성계에게 조선 왕을 하사하였다.

그리하여 왕씨 고려는 국호를 조선으로 바꾸게 되었는데 중국 학계에서는 이를 ‘이씨 조선’, 줄여서 ‘이조(李朝)’라고 부른다. 이것이 바로 명(明)·청(淸) 시기의 조선국이었다.

그 다음으로 살펴볼 것은 왕씨 고려와 고씨 고려는 관할 구역 내의 주민 구성이 다르다는 점이다. 고씨 고려 관할지역 내의 주민은 고구려족이 주력이었다.

고구려족의 연원은 중국 상고시대부터 있었던 민족인 예맥족이 동쪽으로 이동해 부여·고이·옥저·소수맥(小水貊: 압록강의 북쪽에 있는 혼강에 고구려를 세운 종족. 주몽을 따라 나라를 세운 종족을 맥족이라고 하는데 그중에서 大水인 압록강 유역의 맥족을 대수맥, 小水인 혼강 쪽의 맥족을 소수맥이라고 한다)·동예(東濊: 동해안 지역에 거주한 고구려족의 일파) 등이 되었는데 그후 위씨조선의 후예와 한족(漢族)·선비(鮮卑: 고대 남만주 몽골 등지에 살았던 유목 민족)족 등이 들어가 융합하였다.

많은 민족으로 구성됐지만 이들은 장기간 공동생활을 하면서 점차 융화돼 하나가 되었다. 역사서(史書)와 학계에서는 이들을 일반적으로 고구려족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왕씨 고려 관할지역 내의 주민은 신라인 위주였다. 왕씨 고려는 신라와 후백제를 병합하였으므로, 신라인과 백제인이 왕씨 고려의 주요 주민이 되었다.

대부분의 신라인은 한반도 남부지역에 있었던 진한과 변한인에 뿌리를 두고 있다. 고씨 고려 멸망 후 비록 일부 고구려인이 신라로 유입되기는 했으나 이들은 신라의 주력을 이루지는 못했다.

백제인은 대다수가 한반도 남부에 있었던 마한인에 뿌리를 두고 있다. 따라서 왕씨 고려는 한반도 남부에 있었던 ‘삼한인(三韓人)’이 중심이 된 나라라고 할 수 있다.

수많은 역사서들은 왕씨 고려인과 중국의 옛 사람들이, ‘왕씨 고려는 삼한의 후예다’라고 기록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수백년간 계속된 왕씨 고려 왕조의 역사 발전 속에서 구성원들은 점차 하나의 민족으로 융합되어가는데, 역사서와 학계에서는 이들을 ‘고려족’으로 부르고 있다. 왕씨 고려가 이씨 조선으로 이어졌으므로 조선은 민족 명칭이 되어 오늘날까지 사용되기에 이르렀다.

왕건은 낙랑군에 있던 漢族의 후예

마지막으로 왕씨 고려는 고씨 고려의 후예가 아니다. 왕씨 고려의 왕족은 고씨 고려의 후예가 아니었다. ‘고려사’를 쓴 사람은 왕건(王建)의 족속에 관해서 “고려의 선조는 역사에서 상세히 설명돼 있지 않다”라고 적었다. 그러나 중국학자가 고증한 바에 의하면 왕건은 서한(西漢) 시절 낙랑군에 있었던 한인(漢人)의 후예일 가능성이 아주 높다고 한다.

그 근거로 왕씨는 낙랑군의 명문 귀족이었고 가호가 많았던 점을 들 수 있다. 왕건은 임종시에 남긴 가르침인 ‘십훈요(서기 943년 고려 태조 왕건이 자손들에게 귀감으로 남긴 열 가지 유훈. ‘훈요십조’라고도 한다)’에서 자신은 고씨 고려의 후예라고 언급하지 않았다. 오히려 왕건은 자신은 평민 출신이며 ‘삼한 산천의 보호에 의지한다’라고 말했다. 그는 마한·진한·변한을 통일한 것이니 후계자들 또한 삼한을 소유하길 바랐던 것이다.

왕건이 고씨 고려의 후예였다면 그는 통치를 위해서라도 그 사실을 대대적으로 선전하였을 것이다. 이것은 아주 상식적인 이치인데 왕건은 그렇게 하지 않았으니 이는 왕씨 고려가 고씨 고려의 후예가 아니라는 좋은 반증이다.

왕씨 고려는 결코 고구려의 계승자가 아니었다. 한대(漢代) 한반도에서 일어난 마한·진한·변한은 신라와 백제로 발전해갔고, 백제는 당나라에 의해 멸망하였으며, 신라는 왕씨 고려가 대신하게 되었다.

그후 이조가 왕씨 고려를 대신해 최종적으로는 이씨 조선으로 발전하였다. 이러한 정권들의 강역(疆域: 영토) 범위는 한 번도 한반도를 벗어난 적이 없었다.

[3 . 고구려와 왕씨 고려의 역사가 혼돈된 원인]

사람들이 왕씨 고려를 고구려의 계승자로 잘못 보게 된 이유는 중국의 역사기록과 깊은 관계가 있다. 반고(班古: 후한 초기의 역사가. 서기 32~92년)가 쓴 ‘한서(漢書)’는 중국 정사(正史) 중의 하나로 고구려의 사적에 대해 제일 처음 기술했다. 진수(陣壽: 중국 西晉의 역사가. 서기 233~297년)가 편찬한 ‘삼국지’는 처음으로 고구려를 ‘전기(傳記)’에 넣은 역사서다. ‘구당서’와 ‘신당서’에 이르기까지 많은 역사서는 ‘동이전’ 혹은 ‘만이전(蠻夷傳)’ 속에 고구려의 전기를 기술하였다.

이 역사서들은 비록 구체적인 사건을 기록하는 데 있어 약간의 실수를 범하고 있지만, 고구려의 역사 위치를 명확히 정해놓고 있다. 그런데 후대에 이르러 사서의 기록이 혼란스러워지면서 명백한 실수가 나오기 시작했다.

왕씨 고려는 서기 918년에 나라를 세우고 1392년 이씨 조선으로 교체되었는데, 이 시기는 중국의 오대(五代) 중기에서 명나라 초기에 해당한다(五代는 五代十國의 약어로 당나라가 멸망한 907년부터 송나라가 통일한 960년 사이의 약 70년간 중국이 여러 나라로 분열되었던 시기다).

따라서 ‘구오대사(舊五代史)’와 ‘신오대사’ ‘송사(宋史)’ ‘요사(遼史)’ ‘금사(金史)’ ‘원사(元史)’ ‘명사(明史)’ 등의 역사서에는 모두 ‘고려전’이나 ‘조선전’이 등장한 반면 고씨 고려에 대한 기록은 그 이전의 역사서에 비해 약술하게 되었다.

‘舊五代史’로부터 시작된 오류

이러한 역사서의 기록을 종합해보면 ‘구오대사’와 ‘신오대사’는 가장 먼저 고씨 고려를 왕씨 고려전에 기록한 책이었다. 그리고 ‘송사’는 “왕건이 고씨의 자리를 계승하였다(王建承高氏之位)”라는 표현을 최초로 사용한 책이다. ‘구오대사’와 ‘신오대사’ 그리고 ‘송사’에 등장하는 이 기록은 그 후에 나온 여러 역사서의 기록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게 되었다.

‘구오대사’의 고려전은 약 240자로 되어 있는데, 여기에는 “당나라 말년 중국에서는 내란이 많았다. 그래서 고려인은 스스로 군장(君長: 왕이나 우두머리)을 세웠는데 이들의 이전 왕(前王)의 성은 고씨였다”라고 적었다. ‘구오대사’는 고려인이 군장을 세웠는데 전왕은 고씨였다고 묘사한 후 바로 왕씨 고려에 대한 기록을 이어갔으니, 왕씨 고려가 고씨 고려를 잇는 것으로 오해될 수 있는 소지를 만들어준 것이다.

‘신오대사’의 고려전은 약 280자로 돼 있는데 그 첫머리에는 “고려는 본래 부여인의 별종(別種)이다. 그 나라와 군주 등에 관한 기록은 ‘당서(唐書)’에 기재되어 있는데, 이들은 다른 이적(夷狄: 오랑캐)과 달리 성씨가 있었고 관직의 호칭을 대략적이나마 알 수 있었다. 당 나라 말년에 (이들은) 왕씨 고려가 되었다”라고 서술한 후 모두 왕씨 고려에 대한 기록을 남겼다(이러니 왕씨 고려는 고씨 고려를 잇는 것으로 오해될 소지가 있다는 의미임).

‘구오대사’는 북송(北宋) 사람인 설거정(薛居正)이 감수하여 북송 초기인 서기 973~974년에 걸쳐 편찬되었다. 이 시기 중국은 반세기 동안이나 분열 국면(5대10국)이 계속되고 있었으며 통일전쟁도 진행되고 있었다. 이런 이유 때문에 ‘구오대사’ 고려전의 기록은 간략해졌을 뿐만 아니라, 잘못 기재된 곳이 많았다. “당나라 말년 중국에서는 내란이 많았다. 그래서 고려인은 스스로 군장을 세웠는데 전왕의 성은 고씨였다”는 기록이 바로 그런 예에 해당한다.

‘구오대사’ 고려전에 나오는 이 기록을 오류로 단정하는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는 조선에서 나온 한문 역사서를 포함한 어떠한 역사서를 찾아봐도 고씨가 당나라 말년에 고려 정권을 세웠다는 기록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둘째로는 송나라 사람인 사마광(司馬光: 중국 북송 때의 정치가이자 사학자. 서기 1019∼1086년)이 ‘자치통감(資治通鑑)을’ 편찬할 때 위에 언급한 글들을 전혀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점이다.

사마광이 이러한 태도를 취했다는 것은 이 기록들이 잘못된 것임을 명백히 보여주는 것이다. ‘구오대사’를 감수한 설거정은 고씨 고려와 왕씨 고려 사이의 관계를 분명히 밝히지 못했는데 이러한 오류는 ‘신오대사’의 저자인 구양수(歐陽脩: 송나라의 정치가이자 문인. 서기 1007∼1072)에 의해 해결되었다.

구양수는 ‘신오대사’를 편찬할 때 많은 소설(小說)과 필기자료를 참고하여 사람과 사건에 대한 묘사를 생동감 있게 집어넣었다. ‘구오대사’ 고려전은 고씨 고려에 관해 간략히 기술하였으며 왕씨 고려의 건국 근원을 밝히고 있다. ‘구오대사’ 고려전에서 ‘당 나라 말년에 중국에서는 내란이 많았다. 그래서 고려인은 스스로 군장을 세웠다”는 단락이 ‘신오대사’ 고려전에서는 “조금 후에 스스로 나라를 세웠다”로 간소화되었다.

그후(‘신오대사’가 나온 이후) 편찬된 ‘신당서’ 고려전과 ‘구당서’ 고려전에는 이러한 기록이 없어지고 오히려 ‘고씨 왕족이 사라졌다’는 말이 들어갔는데, 이는 고려 왕족의 후계가 끊어졌음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宋史’가 잘못 기록

원나라 사람 탈탈(脫脫) 등이 편찬한 ‘송사’는 고려전을 따로 한 권의 책으로 기록해놓고 있다. 여기에는 “고려는 본래 고구려이고 땅은 구주(九州: 중국 전토. 夏의 시조인 禹가 중국을 아홉 개 주로 나누었다는 데서 유래)와 달라 기주(冀州: 중국의 동북지방)의 땅에 속한다. 주나라 때는 기자(箕子)의 국토였고, 한나라 때는 현도군이었다. 고구려인은 요동에서 생활하였는데 대개 부여인의 한 별종이었으며 평양성을 수도로 삼았다. 한나라 이래로 늘 중국에 공물을 바쳤다. 그러나 자주 변경에서 난을 일으켜 수 양제는 두 번 군사를 일으켰고 당 태종도 직접 토벌하러 갔으나 모두 실패하였다. 당 고종은 이적에게 고구려를 정복하도록 명령하니 이적이 드디어 성을 함락시키고 그 땅을 군현(郡縣)으로 나누었다. 당나라 말년 중국에 내란이 많아지자 고려인은 스스로 군장(君長)을 세웠다. 후당(後唐) 동광(同光) 천성(天成) 때 고려 국왕 고씨는 자주 후당 왕에게 공물을 바쳤다. 후당 장흥왕 때 권지국사(權知國事: 아직 왕호를 인정받지 못하는 동안 우선 임시로 국사를 맡아 다스린다는 뜻의 칭호) 왕건이 고려의 왕위를 계승하였고 사신을 중국으로 파견하여 조공을 바쳤다…”는 기록이 있다.

이 내용 다음에는 왕씨 고려가 송 왕조와 교류한 것에 대한 사실이 기록돼 있다.

이러한 내용으로 볼 때 ‘송사’ 고려전은 앞부분에서 ‘신·구오대사’의 기술을 종합하고 이러한 기초 위에 두 역사서의 작자가 명확히 밝히지 않았던 왕씨 고려와 고씨 고려 간의 관계를 “왕건이 고씨 고려왕의 자리를 계승하였다”고 함으로써, 고씨 고려와 왕씨 고려가 계승 관계에 있는 것처럼 기술했다.

‘요사’ ‘금사’도 원나라 사람 탈탈 등이 편찬한 것이기 때문에 이와 유사한 잘못이 발견된다.

그후에 나온 역사서들은 이렇게 잘못된 기술을 답습하였다. ‘명사(明史)’는 이전에 나온 잘못된 역사서보다 한 발 더 나갔다. ‘명사’는 명 왕조가 이성계를 조선의 국왕으로 책봉한 것에 대해 합리적인 해석을 하려다 보니 앞의 몇몇 역사서가 저지른 오류를 답습했을 뿐만 아니라, 이씨 조선 정권의 연혁에 대해서도 아주 잘못된 계통을 세워주었다(‘명사’는 청나라 때 장정옥 등이 칙령을 받아 1679년부터 1735년에 걸쳐 기전체로 편찬한 336권의 역사서).

기자조선~고구려 넘겨준 ‘明史’

즉 ‘명사’는 “기자조선-위씨조선(위만조선)-한사군-고구려-동사복국(東徙復國: 패망한 고구려의 후예들이 동쪽으로 옮겨가 세웠다는 나라. 대체로 발해로 이해되고 있다)-왕씨 고려-이성계가 국호를 바꾸기 전의 고려-이씨 조선”으로의 계통을 세워줌으로써, 중국 역사에 속하는 기자조선과 위씨조선·한사군·고구려를 모두 조선의 역사 속으로 들어가게 하였다.

이렇게 중국 역사서에서 기술에 오류가 발생한 이유는 다방면으로 생각해 볼 수 있는데, 전란으로 문헌이 유실된 데다 왕씨 고려에 대한 오도(誤導)가 가장 중요한 원인으로 볼 수 있겠다. ‘속자치통감장편(續資治通鑑長編)’의 권 323, 송 원풍 5년(서기 1082) 2월 기사(己巳)일에는 이런 내용이 실려 있다.

사관수찬인 증공은 “내가 사서를 고찰해 보니 주몽은 흘승골을 수도로 한 후 국호를 고구려로 정하였다. 고구려의 왕은 고씨를 성으로 삼았다. 당나라 고종 때 고구려 왕인 고장(高藏: 고구려의 마지막 왕으로 보장왕으로 불림. 재위 기간은 642∼668년)은 국가를 잃고 서쪽으로 천도했다. 당나라 성력(서기 698∼699년) 시기에 고장(보장왕)의 아들인 고덕무(高德武)가 스스로 국가를 세웠다(고덕무는 699년 당나라가 만든 안동도호부의 안동도독에 임명되었는데, 그가 小고구려를 세운 시조라는 주장도 있다). 고구려는 원화(元和) 말년까지 악사를 중국에 보내왔으나 그 이후로는 그러한 기록이 중국 역사서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 오대 동광(同光)·천성(天成) 시절 고씨 성을 가진 고려 왕이 와서 다시 조공을 하였으나 그 이름은 알지 못한다. 장흥 3년 권지국사(權知國事)인 왕건이 사신을 파견하여 조공을 하였고 이로 인해 왕건을 왕으로 삼았다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왕위를 왕건의 아들인 왕무(王武: 혜종)를 거쳐 왕무의 아들 왕소(王昭: 광종), 왕소의 아들 왕유(王由: 경종), 왕유의 동생 왕치(王治: 성종), 왕치의 동생 왕송(王誦: 목종), 왕송의 동생 왕순(王詢: 현종) 등으로 이어갔다. (이렇게 왕씨들이 왕위를 이어갔기 때문에) 고구려는 주몽에서 고장까지의 21대에 걸쳐 700년간 고씨 성을 이어간 후 멸망한 나라였음을 고증할 수 있다. 고구려는 국가를 잃은 후 또 하나의 국가(小고구려 등을 말하는 듯)를 세웠다. 하지만 왕의 이름과 순서, 흥망의 본말(本末)과 왕건이 나라를 세웠을 때의 일들은 알 방법이 없다”고 말했다.

그 후 왕씨 고려는 송 왕조에게 왕씨 고려와 고씨 고려를 연결해달라는 하나의 ‘고려세차(高麗世次: 고려 왕의 차례)’를 바친다. 여기서 송나라 사람들은 왕씨 고려와 고씨 고려에 대한 인식이 모호해졌음을 알 수 있게 된다. 왕씨 고려가 바친 고려세차는 한 걸음 나아가 사실을 오도하는 작용을 했다.

‘고려’와 ‘조선’이라는 명칭을 도용

중국 사서들이 명백한 오류를 범함으로써 중국의 고대 변방민족이 사용하던 ‘고려’라는 명칭을 삼한(三韓) 신라의 계승자인 왕씨 정권이 도용하게 되었고, 한 발 더 나아가 왕씨 정권의 계승자인 이조(李朝)는 기자조선이 쓰던 ‘조선(朝鮮)’이라는 이름을 또 도용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현대인들은 중국 고대 동북지역에 있었던 변방정권의 연혁을 이해하는 데 있어 많은 혼란과 잘못된 견해를 갖게 되었다.

연구를 진행하는 데 있어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은 자료이다. 양보륭(楊保隆)은 1987년 제1기 ‘민족연구(民族硏究)’에 게재한 ‘고구려전을 싣고 있는 여러 역사서에 대한 몇 가지 문제 판별 방법(원제 各史高句麗傳的幾個問題辨析)’이라는 제목의 논문에서 매우 유익한 연구를 시도했다. 그러나 앞으로 해나가야 할 연구과제는 많기만 하다.

고구려사에 대한 연구를 정상적인 학술연구 범주에 넣어야 한다는 것이 우리의 일관된 주장이다. 우리는 고구려사 연구에서 발견되는 역사 문제를 ‘현실화하는 것’과, 학술문제를 ‘정치화하려는’ 경향과 작태에 대해 반대한다(고구려를 중국 역사로 분류하려는 중국측의 고구려사 연구에 한국측이 반대한다는 뜻인 듯). 고구려사는 중국 역사는 물론이고 한반도 역사를 연구하는 데 있어 계속해서 깊은 연구를 요구하는 과제이다.

심도 있는 연구를 하는 것은 과학적인 연구결과를 학계에 제공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고구려사를 연구하고 이를 심화하는 것은 학자의 책임이다. 연구한 결과에 대한 차이로 인해 일시적으로는 통일된 결론을 도출할 수 없을지라도, 학술 규범에 부합하는 규칙으로 학술 성과를 교류하고, 상호 존중하는 가운데 학술상의 논쟁을 벌여 서로 다른 의견을 개진할 수 있어야 한다. 이렇게 할 수만 있다면 여러 나라의 학자가 고구려 역사에 대한 연구에 공동의 노력을 기울일 수 있게 될 것이고, 그에 따라 큰 진전이 있으리라 생각한다.

 

 

 

 

 

Posted by 원주유
고구려 역사와 문화2013. 9. 14. 17:35

 

안시성 전투 승리로 이끌다.

수 양제는 살수 대첩 이후에도 몇 번 더 고구려를 공격했지만 모두 실패했다.

이 때문에 전쟁에 시달린 백성들의 원성만 높아졌다. 결국 수나라는 망하고,당나라가 둘어섰다.

살수 대첩이 있은 지 32년 뒤인 644년, 이번에는 당나라 태종이 10만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를 공격해 왔다.

당나라 군대는 요동 반도에 자리잡고 있던 안시성을 포위했다.

안시성은 작은 성이지만 매우 중요한 곳이었다.

이곳을 빼앗기면 요동은 완전히 당나라의 수중에 들어가게 된다.

그러나 안시성은 호락호락 넘어가지 않았다. 성주 양만춘의 지휘 아래 성 안의 백성들과 군사들은 한마음 한뜻이 되어 싸웠다. 당 태종은 별별 수단을 다 써 보았지만 번번히 실패했다.

당나라 태종은 할 수 없이 퇴각 명령을 내렸다.

마침내 88일 만에 안시성을 지키던 고구려군은 승리를 거두었다.

 

고구려 고연수[高延壽]

생몰년 : 미상
고구려 말기의 장군.
645년(보장왕 4) 당나라 태종이 직접 지휘하는 대군이 안시성을 공격할 때 북부욕살로 있으면서 출전하였다.

이 해 당태종은 안시성을 공략하기 위하여 6월 11일 요동성을 출발하여 20일에 안시성 교외에 이동하여 전투를

벌이기 위하여 준비를 하고 있었다. 안시성의 고구려 민·군들은 당 태종의 군사와 공방전을 벌일 태세를 갖추었다.
고연수는 남부욕살 고혜진(高惠眞)과 함께 6월 21일에 안시성을 지원하기 위하여 고구려군과 말갈병을 포함한

15만의 증원병력을 이끌고 안시성 동남쪽 근교에서 전열을 가다듬었다. 이때 고구려 증원군 대열에 참가한 대로

고정의는 군중의 연장자로서 자신의 오랜 경험을 바탕으로 총사령관 고연수에게 지구전을 펼 것을 건의하였다.
그러나 고연수는 고정의의 전략을 귀담아 듣지 않고, 곧바로 군사를 이끌고 안시성에서 불과 60여리 떨어진

지역으로 진출하여 당군의 움직임을 주시하였다. 당군과 정면 대결을 하기 위한 것이었다.
당태종은 고구려군을 유인하기 위하여 소규모의 돌궐 기병 1천기를 고구려군 진영으로 출격시켰다. 이는 고구려군

진영 전면으로 진출하여 교전이 시작되자 접전과 퇴각을 반복하는 유인작전을 폈다. 고연수는 당군측이 고구려군을

유인하기 위하여 내보낸 돌궐 기병이 약세를 보이면서 퇴각하자, “당군은 상대하기 쉬운 것들이다.”라고 속단하고

총력을 기울여 추격하도록 전군에 명령을 내렸다. 고구려군은 안시성 동남방 10여 리 지점까지 진출한 후 전열을

가다듬고 당군과의 결전태세를 갖추기 시작하였다. 당태종은 고구려군 증원부대의 진영이 내려다보이는 고지로

올라가 군세를 관측하였다. 고구려병과 말갈병으로 혼성된 고구려군의 진영은 무려 60여리에 뻗쳐 있는 것을

확인하였다. 이에 당태종은 위장전술로 승부를 걸기로 하고 고연수에게 서신을 전달하였다. 그는 당이 고구려에

온 것이 연개소문이 임금을 시해한 것을 문책하기 위하여 온 것이기 때문에 교전을 바라는 것이 아니며,

또 몇 성을 점령한 것은 군량과 말먹이를 주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고구려군 총사령관인 북부욕살 고연수는 당태종의 이같은 서신 내용을 믿고 경계태세를 소홀히 하였다. 그러자

당 태종은 6월 21일 밤에 문무백관들과 고구려군을 격파할 대책을 토의한 후 작전명령을 내렸다. 고구려와 당은

안시성에서 공방전을 벌였다. 고연수의 고구려군은 3면에서 공격하는 당군의 공격에 혼란에 빠졌다. 고구려군은

2만여명의 사상자를 내고 안시성 동쪽으로 패주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군은 안시성 동쪽 강에 설치된 교량을

모두 철거하여 고구려 증원군의 퇴로를 차단하자, 고연수와 고혜진은 6월 23일 결국 3만 6천 8백여명의 군사를

수습하여 당군 진영에 투항하였다. 뒤에 당나라로부터 홍여경이라는 벼슬을 받았으나, 항복한 것을

탄식하다가 죽었다


 

동북 공정 : 중국의 고구려 역사 빼앗기

고구려는 중국 내에 존재했던 지방정권이다.” 지난해 7월 중국 광명일보에 실린 한 시론에서 제기한 주장이다. 이 시론의 결론은 고구려사는 중국사의 일부이며, ()민족과는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고구려가 우리의 역사라는 걸 너무 당연하게 생각해온 우리에게는 얼토당토 않는 이야기이지만, 중국은 이런 주장을 역사적 사실로 자리매김하기 위해 정부 차원에서 무려 3조원의 예산을 투입해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고 한다. 이른바 동북공정(東北工程)이라는 연구 프로젝트가 바로 그것이다.

이러한 주장이 몇몇 학자가 학문적 연구를 통해 제기한 학설 수준이 아니라, 중국 정부 차원에서 진행하는 대규모 연구 프로젝트와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국내 언론과 역사학계, 시민단체 등에서는 이를 중국의 역사 빼앗기 공작, 한중간의 역사전쟁, 2의 나당전쟁 등으로 규정하고 있다.

또한 북한 고구려 고분군의 유네스코 세계 문화 유산 등록이 연기되었다는 점, 최근 중국이 환인과 집안지역에 있는 고구려 유적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하기 위해 대대적인 보수작업을 벌이고 있는 점, 고구려 유적지에 한국인의 출입을 통제하고 있다는 점 등 최근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이 중국의 고구려사 편입 시도와 결코 무관하지 않을 것으로 보고 있다.

국내 학계는 중국측의 이러한 움직임을 두고 고구려 역사 빼앗기에 본격적으로 착수했다고 전망하는 것이다.

중국은 무엇 때문에 고구려 역사를 자국사로 편입하려 할까? 그리고 이런 주장을 하기 위해 중국 학자들이 내세우는 근거는 무엇인가? 이러한 움직임이 갖는 의미는 무엇일까?

동북공정이란

중국의 고구려사 편입 시도에 대해 학자들은 중화 민족주의, 신패권주의 등으로 설명한다. 즉 중국은 진한 이후 줄곧 통일된 중앙집권적 국가이며, 계속 한족을 주체로 해서 소수민족을 끌어들인 다민족 국가였다는 일관된 입장을 가져왔다라고 지적한다. 이러한 입장으로 발해사를 일찌감치 중국사의 일부로 편입시켰으며, 고구려사에 대해서는 한국(북한 포함)의 역사에서 지워버리려고 노력했다. 그러다가 1980년대 후반부터는 고구려사까지 중국사로 보려는 움직임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1980년대 이후에는 현재 중국영토 안에서 이루어진 역사는 모두 중국 역사라는 다민족 통일국가론이 강조되면서, 고구려는 중국사의 일부라는 주장이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고 한다. 이런 배경에서 탄생한 게 바로 동북공정(동북변강의 역사와 현상계열 연구공정)이다. 중앙(정부)의 허가를 받아 사회과학원과 길림성, 요녕성, 흑룡강성 등 동북 3성이 2002년부터 5년 기한으로 동북공정을 발족했다.

한반도 정세변화에 대비

이 프로젝트의 주요 연구내용은 고대 중국 강역이론 연구, 동북 지방사 연구, 동북 민족사 연구, 고조선 고구려 발해사 연구, 중조 관계사 연구, 중국 동북 변강사회 안정전략 연구, 한반도 정세변화 및 그에 따른 중국동북 변강 안정에 대한 영향 연구 등이다.

이들 과제명에서 알 수 있듯 거의 남북한과 관련된 내용들로, 한반도와 남북한의 학문적 정치적 움직임을 겨냥한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분석한다. 즉 남북 통일이나 북한 붕괴와 같은 사태가 동북지구의 조선족 사회에 초래할 혼란을 막기 위해서이고, 더 나아가 고조선, 고구려, 발해사가 중국 역사라는 논리를 개발함으로써, 남북통일 이후 불거져 나올지 모르는 국경 영토분쟁에 효율적으로 대비하는 데 있다는 점 등이다.

넓게는 중국의 소수민족 정책에서 그 원인을 찾는다. “현대 중국을 구성하는 56개의 다민족의 단결을 도모하고, 전체 인구의 8.1%에 지나지 않는 55개 소수민족이 차지하는 전국토의 60%가 넘는 지역을 중국의 정통이 되는 역사적 근거가 있는 영토로 자리매김하려는 현실적 과제와 관련이 있다라는 지적이다.

결국 중국의 동북공정, 고구려사 연구는 소수 민족의 단결과 다민족 거주지의 정통성 부여 등을 통해 국가 사회의 통합과 체제 안정을 꾀하고, 한반도의 정세변화시 일어날 수 있는 조선족 사회의 동요를 막고, 북한 체제 붕괴시 개입 명분을 확보하고 국경 분쟁을 예비한다는 중국의 현실적 정치 요구를 뒷받침하기 위한 것이라는 분석이다. 이러한 현재의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진행되는 연구는 역사 왜곡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중국의 이러한 현실적 요구에 부응한 고구려 역사는 어떤 모습일까? 광명일보에 실린 시론을 통해 고구려사 연구 방향을 살펴보자.

고구려는 중국의 지방 정권

?동북공정?에서 주장하는 것들은 크게 두가지로 나눠볼 수 있다. 첫째 역사적 사실로서, 고구려는 고대 중국 변강의 지방정권으로 중국사의 일부이며, ()민족의 역사와는 관련이 없다는 주장이다. 둘째,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려가 고구려를 계승했다든가, 현재의 한국이 고구려를 자신들의 역사라고 주장하는 것은 잘못된 사실에서 비롯된 역사인식이라는 것이다.

먼저 고구려는 고대 중국의 1개 지방정권이라고 주장하는 근거를 살펴보자.

고구려 정권은 남하한 일부 부여족과 서한(전한)의 현도군 고구려현 경내의 여러 민족이 수립한 것이다. 고구려 민족의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지만, 모두 고대 중국의 경내 민족이기 때문에 현재 한반도의 한민족과는 무관하다.

고구려의 건국 지역과 활동 무대는 모두 고대 중국의 경내이다. 처음에는 현도군, 이어서는 요동군에 속하게 되었는데, 이 지역은 고구려가 건국하기 전에 한족(漢族)의 땅이었고, 한인(韓人)의 거주지가 된 것은 12세기 이후이다. 기씨조선과 위씨조선은 중국의 역사이다.

고구려 역대왕들은 모두 중국 중앙 정권의 책봉을 받았다. 한나라에서부터 당나라 때까지 중국의 역대 왕조들은 모두 고구려를 변방의 민족 정권으로 생각했다. 고구려 또한 중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원하지 않았다. 당나라가 고구려를 통일하자, 많은 고구려인들은 당나라에 대해 망국(亡國)’의 한을 품지 않았던 것이다.

고구려 멸망 후 다수가 한족(漢族)에 융화되었다.

따라서 고구려 민족을 중국 동북지방에 등장했던 변방민족으로 보는 것이 역사적인 사실에 가장 부합된다고 할 수 있다.

고려는 고구려와 무관

다음은 앞에서 봤듯이 고구려가 중국의 지방정권이라는 게 역사적 사실인데도, 그동안 고구려사를 한()민족의 역사라고 생각한 것은 후대인들의 잘못된 역사인식에서 비롯됐다는 것이다. 이 시론은 이런 논리를 펴기 위해 고려는 결코 고구려의 계승자가 아니다라고 주장한다.

왕씨 고려가 건국한 것은 고씨 고려(고구려)가 멸망한 때로부터 250년 후인 서기 918년이었다. 그러나 왕씨 고려는 한반도에 있던 신라 정권을 대치하였고 그 이듬해에 후백제를 멸망시켜 반도 중남부의 대부분을 통일하였다. 주민 구성에서도 신라 백제인이 주축이 되었다. 왕건은 고구려의 후예가 아니라 한족(漢族)일 가능성이 높다. 그후 이조가 왕씨 고려를 대신해 최종적으로는 이씨 조선으로 발전하였다. 이러한 정권들의 강역(疆域: 영토) 범위는 한 번도 한반도를 벗어난 적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거에 왕씨 고려를 고구려의 계승자로 본 것은, 중국 사서들이 명백한 오류를 범했기 때문이다. 결국 중국의 고대 변방민족이 사용하던 고려라는 명칭을 왕씨 정권이 도용하게 되었고, 이조(李朝)는 기자조선이 쓰던 조선(朝鮮)’이라는 이름을 또 도용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현대인들은 중국 고대 동북지역에 있었던 변방정권의 연혁을 이해하는 데 있어 많은 혼란과 잘못된 견해를 갖게 되었다.

고구려 다음은 고조선

아전인수격 해석으로 과거 역사를 왜곡하는 것에 대해 우리 학계의 반박논리는 고구려 건국세력은 압록강 일원에서 농경하던 예맥족으로, 만주계와 구별되는 우리 민족의 조상 고구려는 한() 군현인 현토군을 압록강 중류 일대에서 요동 방면으로 몰아내면서 건국 조공?책봉 관계는 전근대적 외교형식이며 실질적 내용은 시기별로 다양 주변국을 생각하지 않는 중화주의적 세계관 고구려의 문화?역사는 통일신라와 발해를 거쳐 우리 민족문화로 이어졌으며, 중국 등지로 이주한 유민은 고유한 정체성 상실 사료의 자의적 해석과 왜곡 등이다한겨레신문.

역사적 사실에 대해 객관적 학문적 접근을 통해 이끌어낸 것이 아니라, 현실의 정치적 필요에 따라 짜 맞추기 식으로 역사를 해석하고 왜곡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게다가 중국은 고구려사 편입 추진은 이러한 고대사 빼앗기의 신호탄에 불과하다는 우려의 목소리도 높다. 발해사에 이어, 이제 고구려사를 한민족의 역사에서 분리시키고 다음에는 고조선사까지 노릴 것이라는 전망이다. 이렇게 되면 한민족의 역사는 만주지방에서 활동한 고조선, 부여, 고구려, 발해의 역사가 빠진 채로 삼한, 백제와 신라, 고려 등으로 축소될 것이라는 우려이다.

중화주의에 대한 대응은

만약 로마 교황청이 1천년의 유구한 역사를 무기로, 21세기 국제정치 무대에서 카놋사의 굴욕과 같은 영광을 꿈꾸며 역사를 서술한다면...

하지만 동북아시아에서는 일본의 우경화에 이어 이제는 중화 패권주의에서도 이런 움직임을 볼 수 있다. 특히 이들의 경우 현재의 국력과 국경을 중심으로 역사에 대해 배타적 권리를 주장하려 하고, 이렇게 해서 재구성된 역사를 통해 다시 현실을 지배하려고 한다는 점에서 백안시할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일본 우익들의 과거사 왜곡이나, 중국이 고구려사를 편입하기 위해 벌이는 연구는 정치의 시녀로서 역사에 불과한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대응은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하는가. 같은 차원의 대응을 한다면 그건 정치의 영역인지, 학문의 영역인지 모호해질 수 있다. 뒤늦게 나서 순수한 객관적, 학문적 자세로만 접근하고 있기도 쉽지 않을 것이다.

또한 패권주의나 중화주의 등 청산되어야 할 과거의 유산을 현재의 역사 연구의 지침으로 삼고 있다면, 제국주의의 세계 침략사 역시 중국 사가들의 관점대로라면 영토 확장을 위해 벌인 노력으로 평가될 것이다.

주변국가들이 패권주의, 국가주의 등 과거의 낡은 유산을 오히려 강화하고 계승하려 하는데, 우리는 이들의 움직임에 어떻게 대응하고 어떤 가치를 지향해야 할 것인가라는 문제이다. 마치 핵 강국인 러시아와 중국, 잠재적 핵 강국인 일본의 틈바구니에서 우리가 취할 방도는 무엇인가라는 문제만큼이나 복합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Posted by 원주유
신라 역사와 문화2013. 9. 14. 15:33

 

 

 

신라 진성여왕은 어떻게 나라를 다스렸는지, 그리고 그 후대 왕들은 진성여왕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아시나요..

제51대 진성여왕
문의왕후 김씨 ․ 김씨, 만, 생년미상 ~ 897년
재위기간 : 887년 7월 ~ 897년 6월. 총 9년 11개월
남편 : 1명 이상
자녀 : 1명 이상
혜성대왕 김위홍 - 막내아들 양패

진성여왕은 경문왕의 딸이며, 문의왕후 소생으로 이름은 만이다. 헌강왕이 후계자 없이 죽자 정강왕이 왕위를 이었으나, 그 또한 재위 1년 만에 죽었다. 정강왕의 유언에 따라 887년 7월에 그녀가 왕위에 올랐으니, 선덕과 진덕에 이어 세 번째 여왕이다.
진성여왕이 즉위할 무렵, 신라 사회는 국가 기강이 무너지고, 체제가 와해되고 있는 형국이었다. 이미 지방 호족 세력이 너무 성장하여 조정의 힘은 미약해지고, 왕실의 권위는 땅에 떨어진 상황이었다. 822년 김헌창의 난 이후, 신라 왕실은 계속해서 왕위 다툼이 일어나 왕실의 권위가 무너졌다. 조정의 통제력은 급격하게 약화되었으며, 헌강왕이 후계자를 제대로 정하지도 못한 상태에서 죽고, 이어 즉위한 정강왕마저 병상에 누워 정사를 챙기지 못하는 바람에 지방에 대한 신라 조정의 통제력은 점차 마비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진성여왕이 등극하였다. 여왕의 즉위는 백성들의 불안을 가중시키고, 지방 세력의 힘을 강화시키는 원인으로 작용하였다.

진성여왕은 즉위 직후 주 ․ 군에 1년간 조세를 면제하는 등 민심수습에 노력하였으나 재위 2년인(887년) 2월 숙부이자 남편이었던 상대등 위홍이 죽자 정치기강이 갑자기 문란해지기 시작하였다. 이와 함께 대야주에 은거하던 왕거인의 국왕 비판 등이 있었으며, 888년부터는 주 ․ 군으로부터 세금이 들어오지 않게 되어 국고가 비게 되었다. 이에 관리를 각지에 보내어 세금을 독촉하였고, 이를 계기로 민심이 흉흉해져 사방에서 도적이 봉기하게 되었다.
급기야 889년에 사벌에서 민란이 일어났다. 사벌주(지금의 상주)의 농민 봉기를 주도한 인물은 원종과 애노, 아자개 등이었다. 그들은 사벌의 군주 우연을 죽이고, 사벌성을 장악하였다. 진성여왕은 나마 영기에게 군대를 안겨 농민군을 진압하게 했으나, 영기는 농민군의 기세에 눌려 진군하지 못했다. 그 소식을 접한 진성여왕은 영기를 참수하고, 사벌 군주의 아들을 군주로 삼아 농민군을 진압하도록 했으나 농민군을 무너뜨리지 못했다. 신라 조정이 사벌의 반란군 진압에 실패하자, 그것이 도화선이 되어 전국 각처에서 크고 작은 반란 사건이 잇따랐다.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지방 호족들이 힘을 형성하여 연이어 군대를 일으켰다.
사벌의 아자개, 죽주(안성)의 기훤, 청주의 청길, 북원(원주)의 양길, 중원(충주)의 원회 등이 그 대표적인 세력이었다. 이들은 대개 지방의 호족들로 농민들을 선동하여 난을 일으키고, 그 지역의 관아를 장악하는 과정을 통해 군벌로 성장했다.

지방 군벌들은 한층 세력을 확충하며 서로 간에 힘겨루기 양상을 보였는데, 자기들끼리의 힘 싸움 끝에 가장 큰 세력으로 남은 것은 죽주의 기훤과 북원의 양길, 사벌의 아자개 등이었다. 청길, 원회, 신훤 같은 중부 세력은 거의 기훤에게 흡수되었고, 서라벌 주변 세력은 아자개에게 흡수되었다. 또 양길은 서라벌 북동부(지금의 강원도 일대)를 장악하였다. 이들 중 서라벌의 토벌군과 군사적 요충지였던 사벌의 아자개 군대가 가장 많은 전쟁을 치렀다.
아자개의 장남 견훤은 서라벌 서쪽과 남쪽을 휩쓸고 다니며 몇 달 만에 5천 군대를 형성하였고, 백성들에게도 열렬한 호응을 받았다. 이에 힘입어 견훤은 아버지 아자개를 떠나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였다. 견훤은 마침내 혁명 의지를 굳히고 군대를 남쪽으로 몰아 무진주(광주)를 장악한 뒤, 스스로 왕을 칭하기에 이르렀다. 900년 견훤은 완산주(전주)를 도읍으로 삼아 나라를 세우고, 국호를 백제(후백제)라고 칭함으로써 후삼국 시대의 서막을 올렸다.

한편, 기훤의 휘하 장수 궁예가 청길, 원회, 신훤과 결탁하여 양길에게 투항함으로써 기훤은 유명무실한 존재로 전략했다. 반면에 양길은 궁예를 앞세워 경북 북부 일대와 충청도, 강원도 동부 지역으로 세력을 확대하여 견훤 못지않은 무시 못 할 세력으로 성장했다. 견훤의 창업에 자극받은 궁예는 894년에 명주(강릉)를 장악, 병력 3천 5백을 형성하고 양길로부터 독립했다. 이후, 궁예는 강원도 북부 일대를 장악하고 서쪽으로 진출하여 경기도 및 황해도 지역을 손안에 넣었다. 896년에는 송악의 호족 왕융을 받아들여 철원의 태수로 봉하고, 주면 세력을 흡수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신라 국가의 실질적인 통치영역은 경주를 중심한 그 주변지역에 그치고, 전 국토는 대부분 적당이나 지방호족세력의 휘하에 들어갔다. 또, 896년에는 이른바 적고적이 경주의 서부 모량리까지 진출하여 민가를 약탈하는 등 수도의 안위조차 불안해졌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중국 당나라에 유학하고 돌아온 최치원은 894년에 사무 10조를 제시하였다. 이 제의는 받아들여진 것으로 기록 되어 있으나 실제로는 진골귀족의 반대로 시행되지 않았다. 최치원의 개혁안은 육두품 중심의 유교적 정치이념을 강조함으로써 왕권을 강화하는 것이어서 진골귀족의 이익과는 배치될 수 있었다. 이 개혁은 결국 시대적 한계성 때문에 시행되는 못하였다. 897년 6월 조카 헌강왕의 아들 요(뒤의 효공왕)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그해 12월에 죽었다. 능은 황산에 마련되었다.

제52대 효공왕
후비 김씨 ․ 김씨, 요, 886 ~ 912년
재위기간 : 897년 6월 ~ 912년 4월. 총 14년 10개월
부인 : 2명 이상
자녀 : 기록 없음
왕비 박씨

효공왕은 헌강왕의 서자이며, 후비 김씨 소생으로 이름은 요이다. 헌강왕이 죽을 당시 그는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강보에 싸인 상태였다. 그의 나이 열 살 되던 해인 895년에 진성여왕이 그를 궁중으로 데려와 태자로 삼았다. 그리고 897년 6월에 진성여왕이 중병에 걸려 왕위를 넘기자, 열두 살의 어린 나이로 즉위했다. 효공왕은 헌강왕이 사냥을 나갔다가 길에서 자색이 뛰어난 한 여자를 만났는데, 뒤에 헌강왕이 궁궐을 빠져나가 그 여자와 야합하여 태어난 아들이다. 뒤에 이 사실을 안 진성여왕에 의하여 헌강왕의 혈육이라 하여 895년에 태자로 봉하여지고, 뒤이어 왕위를 물려받았다.

왕위에 오른 효공왕은 헌강왕의 왕후이자 자기 양어머니인 김씨를 의명왕태후로 추존하고, 서불한 중흥을 상대등, 아찬 계강을 시중으로 삼아 조정을 개편했다. 그리고 재위 2년인 899년 3월에 이찬 예겸의 딸을 왕비로 맞아들였다.

효공왕 재위 시 신라는 왕실의 권위가 떨어져서 지방에서 일어난 궁예와 견훤이 신라영토의 패권을 놓고 서로 다투고 있었는데, 지금의 청주나 충주 이북지역은 완전히 궁예의 세력권에 속하게 되었다. 898년에 북쪽 지역에서 패권을 형성하고 있던 궁예는 패서도와 한산주 관내의 30여 성을 빼앗고, 마침내 송악에 도읍함으로써 후고구려의 기치를 내걸었고, 899년 7월에는 북원의 양길을 무너뜨리고 패권을 장악했다. 그러자 900년에 충주, 청주, 괴산의 세력가인 원회, 청길, 신훤 등이 궁예에게 성을 바치고 항복함으로써 궁예의 세력은 충청도와 경상 북부 일원까지 확대되었고, 마침내 901년에 궁예가 스스로 왕이라 칭하며, 후고구려가 건국되었다.

북쪽에서 궁예가 패권을 형성하고 있는 사이 남쪽의 견훤도 세력을 팽창해오고 있었다. 견훤은 901년 8월에 낙동강 서쪽 지대 장악을 위해 대야성(합천)을 공격해 왔는데, 다행히 신라 장수들의 활약으로 대야성을 무너뜨리지 못했다. 견훤은 이내 병력을 금성(나주)로 옮겨 그곳을 공격하였다. 나주는 독특한 지형 덕택에 견훤의 다각적인 공격을 막아 내며 어렵게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는데, 견훤은 나주를 손안에 넣기 위해 여러 차례 군대를 동원했지만, 쉽게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에 궁예는 해군대장군 왕건에게 나주를 장악할 것을 명하여 왕건은 그곳 호족들을 포섭, 나주로 군대를 잠입시켰고, 마침내 나주를 손안에 넣었다.

그리고 궁예는 904년에 국호를 마진, 연호를 무태라 하고, 백관의 제도를 확립함으로써 국가의 면모를 일신하였다. 그러자 신라 왕실을 섬기며 버티고 있던 패서도의 10여 주현이 궁예에게 투항해 버렸다. 궁예는 905년에 철원으로 도읍을 옮기고, 죽령까지 세력을 확대하여 빠르게 신라 땅을 잠식하였다.

907년에는 견훤이 일선(경북 선산)까지 진출하여 주변의 10여성을 장악하였고, 궁예는 남진을 계속하여 상주와 안동 일대를 장악하였다. 이렇게 되자, 신라 도성이 있는 서라벌 주변이 온통 견훤군과 궁예군의 전장이 되고 말았다.

나주 점령에 실패한 뒤, 계속해서 나주를 공격해오던 견훤은 909년에 해군장수 왕건과의 해전에서 크게 패해 진도와 고이도를 뺏기는 바람에 해상권을 잃고 나주에서 후퇴해야만 했다. 910년에 견훤은 다시 총력전을 펼쳐 나주를 공격하였고, 열흘 동안 포위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왕건이 이끄는 수군의 습격을 받아 퇴각하고 말았다.

이런 상황에서 신라의 효공왕이 이미 쇠할 대로 쇠한 국력을 회복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런 절망감에 사로잡힌 그는 정사는 제쳐 두고 총애하는 첩과 음사를 즐기며 방탕한 생활을 일삼았다. 대신 은영이 그런 모습을 보다 못해 효공왕에게 정사를 돌볼 것을 충언으로 간했지만 그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고, 효공왕의 첩을 죽여 왕정을 경계하게 한다.

이 사건 이후 효공왕은 왕권을 빼앗기고 허수아비 왕으로 전략하였고, 급기야 912년 4월에 죽음을 맞이했다. 효공은 왕비를 비롯한 박씨 일파에 의해 살해된 것으로 추측되는데 그를 이어 왕위에 오르는 박경휘(신덕왕)가 왕비 박씨의 오빠이고, 은영의 백부라는 사실이 그런 추축을 가능케 한다. 그의 죽음으로 내물왕 이후 지속되던 김씨 왕실은 몰락하게 된다. 죽은 뒤 사자사 북쪽에 장사지냈다고도 하고, 혹은 사자사 북쪽에서 화장하여 뼈는 구지제 동산 기슭에 묻었다고도 한다.

제53대 신덕왕
박예겸(제8대 아달라왕의 후손)
정화부인 ․ 박씨, 경휘, 생년미상 ~ 917년 
재위기간 : 912년 4월 ~ 917년 7월. 총 5년 3개월 
부인 : 1명
자녀 : 2남
의성왕후 김씨 - 승영(재54대 경명왕), 위응(제55대 경애왕

신덕왕은 제8대 아달라왕의 먼 후손이고, 박예겸의 아들이며 정화부인 소생이다. 이름은 경휘이며, 일찍이 헌강왕의 사위가 되었다. 타락한 효공왕이 박씨 세력에 의해 제거되자, 912년 4월에 왕위에 올랐다. 신덕왕의 아버지 예겸은 헌강왕 원년인 875년에 시중에 임명된 사람으로 신라 조정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신덕왕의 즉위는 제8대 아달라왕을 끝으로 제왕의 자리에서 물러났던 박씨 왕조의 부활을 의미한다.

왕위에 오른 신덕왕은 즉위년 5월에 선친 예겸을 신성대왕으로 추존하고, 어머니를 정화태후로, 왕비를 의성왕후로 하고, 아들 승영을 태자로 책봉하였다. 그리고 이찬 계강을 상대등으로 삼아 조정을 수습하였다.

신덕왕대의 신라는 국토의 대부분을 궁예와 견훤의 세력권에 빼앗겨 실제로 경주지역을 다스리는 데 그쳤다. 궁예의 부하인 왕건이 나주를 정벌한 이후 그들의 패권다툼이 더욱 치열해가는 동안 신라의 명맥은 겨우 유지되는 형편이었다. 이때의 신라 왕실은 스스로 후백제나 태봉의 공격을 막아낼 만한 힘이 없었다.

그의 치세 중에 중요한 사건이 있다면, 914년에 궁예가 연호를 ‘수덕만세’에서 ‘정개’로 고친 것과 916년 8월에 견훤이 또다시 대야성을 공격해 온 일이었다. 916년에 이르러서는 견훤이 대야성(지금의 경상남도 합천)을 공격하여 비록 이를 함락시키지 못하였으나, 그것은 곧 신라의 심장부에 비수를 겨누는 격이 되었다. 신덕왕은 917년 7월에 죽었으며, 육신은 화장되었고, 능은 죽성에 마련되었다. 혹은, 화장하여 잠현에 묻었다고 한다

제54대 경명왕
의성왕후 김씨 ․ 박씨, 승영, 생년미상 ~ 924년 
재위기간 : 917년 7월 ~ 924년 8월. 총 7년 1개월 
부인 : 1명 
자녀 : 없음
장사왕후

경명왕은 신덕왕의 장남이며, 의성왕후 김씨 소생으로 이름은 승영이다. 912년 아버지 신덕왕이 즉위하자, 그해 5월에 태자에 책봉되었다. 917년 7월에 신덕왕이 죽자 왕위에 올랐다.

경명왕은 아우인 이찬 위응을 상대등에 임명하고, 대아찬 유렴을 시중으로 삼아 정사를 꾸렸다. 하지만, 경명왕 때에는 이미 신라의 국운이 기울어가고 있었다. 실제 신라 왕실은 왕경인 경주를 중심으로 한 그 주변지역을 다스리는데 불과하였고, 나머지는 궁예와 견훤 등 지방 세력들에게 빼앗겼다. 특히, 918년(경명왕 2)에 일어난 현승의 반란으로 신라는 그 운명을 더욱 재촉하게 되었다. 또, 경명왕 때에는 여러 가지 변괴가 있었다고 하는데, 919년 사천왕사 벽화의 개가 울었고, 927년에 황룡사탑의 그림자가 사지 금모의 집 뜰에 열흘이나 머물렀으며, 사천왕사 오방신의 활줄이 모두 끊어지고 벽화의 개가 뜰로 쫓아 나왔다는 기록들이 그것이다. 당시 신라의 국운이 기울어져가는 불안한 사회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기사들이다.

928년 6월에 궁예가 911년 세웠던 태봉 왕조는 민심이 불안해지면서 왕건을 추대하는 신하들로 인해 무너지고 만다. 왕건은 왕위에 올라 국호를 고려라 하고, 연호를 천수라 하였다. 얼마 뒤, 후백제가 아자개가 지배하던 상주 일대를 장악하는 과정에서 그의 심사를 불편하게 하자 아자개가 아들인 견훤을 버리고 왕건에게 투항하게 된다. 이 사건으로 견훤의 명예는 크게 훼손되었다.

고려 개국 이후 신라의 지방 세력들은 왕건에게 호의를 가지기 시작했고, 경명왕도 고려와 타협하여 후백제를 함께 견제하려는 경향을 보였다. 왕건이 919년에 도읍을 철원에서 송악으로 옮겨 정치적 기반을 강화하자, 920년 정월 상대등 김성과 시중 언옹 등은 왕건과 사신을 교환하고 고려와 수호 관계를 맺었다. 그러자 견훤에게 위협을 받고 있던 지방 세력들이 전략적 제휴의 형태로 대거 고려에 귀순했다.

920년 2월에 강주(진주) 장군 융웅이 견훤의 대야성을 공격해 위협을 느끼고 고려에 귀순했는데, 예상대로 견훤은 그해 10월에 기병 1만을 거느리고 대야성을 공격해 왔고, 결국 대야성은 함락되고 말았다. 다급해진 경명왕은 급히 아찬 김율을 왕건에게 보내 도움을 요청했지만, 견훤의 군대는 다시 진례로 진군했고, 이를 왕건의 도움으로 막아낼 수 있었다. 912년 2월에는 말갈의 일족인 달고 무리가 신라의 북쪽 변경을 침략해 왔다. 그러나 그들은 고려 장수 견권에게 대파되어 전멸하였다. 경명왕은 왕건에게 사신을 파견하고, 감사하는 편지를 함께 보냈다.

이렇게 고려의 도움으로 계속되는 수난들을 극복하게 되자, 경명왕의 외교정책도 친고려의 성향으로 바뀌고 만다. 이렇게 상황이 돌아가, 922년 정월에 하지성 장군 원봉이, 923년 7월에는 지성장군 성단, 경산부 장군 양문 등이 왕건에게 귀순하게 된다.

왕건에게 등을 돌렸던 태봉의 신하들도 고려에 투항하기 시작했다. 922년 정월에 명주의 호족 김순식이 항복하여 왕씨 성을 하사받고 충성을 맹세하였고, 또 진보성 장군 홍술도 같은 달에 항복하였다. 명주의 호족으로 지금의 강운도 동해안 일대를 장악하고 있던 순식과 경북 의성 일대의 호족인 홍술의 귀순으로 왕건의 세력은 더 확고해지게 된다.

고려에 의존하던 덕분에 정치적 안정을 되찾은 경명왕은 923년에 창부시랑 김낙과 녹사 참군 김유경과 924년 조산대부 창부시랑 김악을 후당에 입조시키고 토산물을 바치는 조공 외교도 펼치게 된다. 후당의 장종은 그에게 의대부시위위경의 관직을 내렸다. 경명왕은 고려와 후당에 생존을 위한 외교전을 펼치며 신라의 명맥을 겨우 유지해나가고 있었다. 그러던 중 924년 8월에 지병으로 생을 마감하니, 황복사 북쪽에서 화장되어 뼈는 성등 잉산 서쪽에 뿌렸다. 고려 태조 왕건은 사신을 보내 조문하고, 제사에 참여토록 하여 양국의 화친 관계를 확인하는 조치를 내렸다.

제55대 경애왕
의성왕후 김씨 ․ 박씨, 위응, 생년미상 ~ 927년
재위기간 : 924년 8월 ~ 927년 11월. 총 3년 3개월
부인 : 1명
자녀 : 여러 명(자세한 기록 없음)
왕비

경애왕은 신덕왕의 아들이며, 경명왕의 동복아우이고 의성왕후 김씨 소생으로 이름은 위응이다. 경명왕 원년인 917년에 상대등에 임명되어 조정을 이끌다가 919년에 물러났다. 924년 8월에 경명왕이 후사 없이 죽자, 왕위에 올랐다.

경애왕 때 후삼국의 패권다툼은 이미 왕건 쪽에 유리하게 전개되었다. 925년 고울부장군 능문이 항복하였고, 927년 강주(지금의 진주)의 왕봉규가 관할하는 돌산 등이 왕건에게 항복하였다. 이렇듯 신라 장수들이 계속 고려 조정에 투항하고 있을 무렵, 고려 도성으로 발해의 귀족과 백성들도 대거 귀순하고 있었다. 당시 발해는 거란의 거센 공격에 밀려 도성이 함락될 지경에 놓여 있었다. 그 여파로 925년 9월엔 장군 신덕 등 5백 명이 귀순했고, 또 같은 달에 발해의 예부경 대화균을 비롯해 대씨 왕족들이 대거 귀순해 왔다. 고려는 신라 호족들과 발해의 유민을 받아들여 국력을 키웠고, 이러한 상황 속에서 왕건과 견훤은 잠시 싸움을 그치고 강화하였는데, 견훤이 보낸 질자인 진호가 고려에서 죽자 견훤은 926년 다시 출병하여 고려를 공격하였다.

신라는 경명왕 4년에 고려와 수교하여 친 고려정책을 펼쳤다. 이 시기에 견훤은 1만 명이라는 대규모 군대를 동원하여 그의 오랜 숙원인 대야성을 함락시켰으며, 다음 진례에 대한 공격을 감행하게 되는데, 이때 고려군의 파병으로 위기를 모면하게 된다. 이후 후백제와 고려의 관계는 4,5년간 소강상태를 유지하였으나 경애왕이 등장하면서 대규모의 전쟁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고려는 용주성을 공격한 것을 계기로 후백제에 대한 적극적인 공세를 취하였으며, 드디어 왕건이 친히 강주를 순행하며 민심을 돌보자, 불안을 느낀 견훤은 지금의 상주를 공격하고, 이어 경주 근처의 고울부를 습격한다. 견훤이 침입했다는 소식을 듣고, 경애왕은 고려의 왕건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왕건에게 구원군을 요청한 경애왕은 다급한 심정으로 왕비와 궁녀, 종실들과 함께 포석사에 나가 제를 올리고, 국가의 안녕을 기원했다. 신라의 요청을 받은 왕건이 곧 군사 1만 명을 파견하여 구원하게 하였으나 고려군이 도착했을 때, 이미 서라벌은 백제군에게 유린당한 뒤였다. 이 사건을 『고려사』, 『삼국사기』에는 경애왕이 포석정에 나가 연회를 베풀며 놀고 있었다고 하나, 이는 고려의 역사가들이 신라 멸망의 당위성을 역설하고 고려건국의 정당성을 높이기 위해 그렇게 기록한 것이라 보아진다.

경애왕은 견훤이 포석정까지 들이닥치자, 당황하여 왕비와 함께 달아나 도성 남쪽 별궁에 몸을 숨겼으나 백제군의 수색망에 자살로 생을 마감했으니, 이때가 927년 11월이었다. 견훤은 경애왕의 외종제 김부(경순왕)를 왕으로 세우고, 왕족 효렴을 비롯해 재상 영경과 그 외에 종실의 자녀들과 각종 기술자들, 병기, 보배 등을 빼앗고 돌아갔다. 이 소식을 들은 왕건은 신라를 돕는다는 명분으로 급히 군사를 일으켰고 바로 이것이 공산성전투가 된다.

한편, 경애왕 때 황룡사에 백좌경설을 설치하고 선승 300여명에게 음식을 대접하였는데, 이것을 백좌통설선교라 부르며, 대규모 선승 모임의 시초가 되었다. 세 왕 김부는 경애왕의 시체를 수습하여 서쪽 대청에 안치하고, 장례를 치른 뒤, 남산 해목령에 능을 마련했다.

 

제56대 경순왕
김효종
계아태후 ․ 김씨, 부, 생년미상 ~ 978년
재위기간 : 927년 11월 ~ 935년 11월. 총 7년
부인 : 3명
자녀 : 1남 이상
죽방부인 - 마의태자
낙랑공주 왕씨
후실왕씨

경순왕은 제46대 문성왕의 후예로 성은 김씨이고, 이름은 부이며, 경애왕의 외종제이다. 아버지는 이찬 효종이며, 어머니는 계아태후이다. 경순왕의 아버지 효종은 효공왕 6년(902년)에 대아찬으로 시중에 임명되었다. 그 이후 이찬으로 품계가 올랐고, 오랫동안 신라 조정을 이끌었던 인물이다.

효종의 아들 부가 왕위에 오른 것은 견훤의 천거에 의해서였다. 927년 경애왕이 견훤의 습격을 받아 살해된 후 견훤에 의해 옹립되었다. 경명왕 즉위 이후 신라가 노골적으로 고려와 화친하며 백제를 적대시하던 박씨 왕조를 폐하고 김씨 왕조의 후예인 부를 왕으로 세웠던 것이다. 견훤은 김부를 왕으로 세우고 돌아가면서 신라의 도성을 지키던 병사들을 대거 포로로 잡아가, 경순왕은 군사권도 행사할 수 없는 이름뿐인 왕이었다. 왕위에 오른 경순왕은 우선 경애왕의 시체를 대청에 모시고, 여러 신하와 함께 장례를 준비했다. 고려 태조 왕건은 사신을 보내 조문한 뒤, 이내 자신이 직접 병력 5천을 이끌고 견훤의 퇴로를 차단하기 위해 달려왔다.

왕건은 공산(팔공산)에서 견훤을 급습하려했으나, 오히려 백제군이 숨겨놓은 복병에 당하고 만다. 백제군에 둘러쌓여 진퇴양난의 상황에 놓이자 신숭겸의 희생으로 겨우 목숨을 건져 탈출할 수 있었다. 공산의 패전 이후, 왕건은 백제와의 계속되는 전쟁에서 어려움을 겪게 된다. 928년 고려와 신라의 교통로였던 죽령과 강주를 백제군이 장악했으며, 11월에는 경상 북부 지역의 요충지인 부곡성이 함락당해 장군 양지와 명식이 백제에 항복하였다. 929년 7월에는 고려의 주요 거점인 의성부를 공격하여, 의성 성주 홍술이 전서하게 된다. 그러던 중 그해 10월에 견훤은 자신의 고향인 사벌의 가은현을 차지하려 노력했으나, 결국 실패하고 경상도 지역에 주둔한 고려군의 마지막 보루인 고창(경북 안동)을 공격했다. 그 소식을 듣고 군대를 이끌고 내려온 왕건은 고전 끝에 유금필을 앞세우고 죽령을 뚫는다. 이때, 재암성을 지키고 있던 신라 장수 선필 군대를 이끌고 귀순해 오게 되고, 유금필을 선봉에 두고 백제군을 잇따라 궤멸시켰다. 이에 고려군은 고창에, 견훤의 군대는 불고 5백 보 남짓 떨어진 석산에 주둔하며 대치했다. 이때, 김선평, 권행, 장길 등이 이끌던 주변의 신라 민병대가 고려군에 가세하게 되고 힘을 얻은 왕건은 신라 민병대와 함께 협공을 감행하여, 견훤의 군대를 낙동강 넘어 남쪽까지 퇴각시키게 된다. 상황이 이렇게 흘러가자, 신라 신하로 남아있던 동해 주변의 주와 군의 110여 성이 고려에 귀순했다.

931년에는 왕건이 경순왕을 알현하여 수십 일을 머물렀는데, 왕건은 부하들에게 질서와 규율을 지키도록 하니, 수도 아녀자들은 ‘전번 견훤이 왔을 때에는 늑대와 범을 만난 것 같았으나, 이번 왕건이 왔을 때에는 부모를 만난 것 같다’고 하였다고 한다.

왕건이 기세를 세우며 백제 성곽에 대한 공격을 가속화하고 있던 시기에 견훤은 수군을 움직여 그해 9월 백제의 해군장수 상귀로 하여금 고려의 예성강을 공격하게 했다. 그리고 염주, 백주, 정주 세 개의 포구를 장악하고, 전함 1백 척을 불살랐다. 도성주변을 공격당한 왕건은, 934년 9월에 직접 군대를 이끌고 운주 정벌을 감행했다. 유금필을 필두로 선제공격에 나선 고려군은 백제군 3천 명을 죽이는 승리를 거두게 되고, 이에 공주 이북의 30여 성이 스스로 항복해 왔으며, 929년부터 백제의 지배 아래 들어간 나주까지 탈환하게 된다. 운주에서 대패하고, 다시 나주까지 뺏긴 백제 조정은 935년부터 심한 내분을 겪게 된다. 견훤은 여러 명의 아내에게 십여 명의 아들을 뒀는데, 그들 중에 넷째 아들 금강을 가장 총애했다. 운주 전투에서 물러난 후, 금강에게 왕위를 양위하자 이에 당시 가장 유력한 왕위 계승자였던 신검과 반대파 세력은 935년 3월에 반란을 일으켜 금강을 죽이고, 견훤을 금산사에 유폐시켜 버렸다. 금산사에 갇혀 있던 견훤은 유폐된 지 3개월 만인 그해 6월에 나주로 탈출하여 고려에 귀순했다.

935년 그는 고려에 신라를 넘겨 줄 것을 신하들과 논의하고 김봉휴로 하여금 왕건에게 항복하는 국선을 전하게 하였다. 이때 마의태자는 고려에 항복하는 것을 반대하였으나 경순왕이 끝내 투항을 천명하자, 부왕에게 하직 인사를 하고 속세를 등졌다.

그해 11월 고려 태조가 신라의 항복을 받아들이고, 이로써 신라 천년사직은 무너졌다. 경순왕이 신하를 거느리고 고려에 귀의할 때 향거와 보마가 30여리에 뻗쳤다. 왕건은 그를 정승공으로 봉하고 태자보다 높은 지위에 두었다. 또, 왕건은 그에게 녹 1000석을 주고 그의 시종과 원장을 모두 등용하였으며, 신라를 고쳐 경주라 하고 그의 식읍으로 주었으며, 그를 경주의 사심관으로 삼았다. 936년 2월에는 견훤의 사위이자, 신검의 매형인 박영규가 고려에 귀순했다. 이렇게 한반도의 패권과 민심은 왕건에게 옮겨가고 있었다. 왕건은 그해 9월에 8만 7천 명의 군사를 이끌고 견훤과 함께 신검을 응징하기 위해 나섰고, 일선(선산), 완산주 등지에서 전쟁을 벌여, 완산주에서 신검의 항복을 받아냈다. 후백제가 멸망하게 되면서, 이로써 약50년에 걸친 후삼국 시대는 막을 내리게 된다.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한 뒤에도 경순왕의 삶은 이어졌다. 그는 녹읍으로 받은 경주 지역을 다스리며 살다가 978년(고려 경종 3년)에 생을 마감했다. 무덤은 경기도 연천군 백학면 고량포리에 있다. 그의 능이 어떤 이유로 이곳에 조성됐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Posted by 원주유
신라 역사와 문화2013. 9. 14. 15:28

 

 

신라 제46대 문성왕과 후예들은 어떠한 방법으로  나라를 다스렸는지.

 

제46대 문성왕
정종왕후 ․ 김씨, 경응, 생년미상 ~ 857년 
재위기간 : 839년 7월 ~ 857년 9월. 총 18년 2개월 
부인 : 2명 
자녀 : 1남
제1왕비 박씨
제2왕비 김씨 - 태자

문성왕은 신무왕의 장남이며, 정종왕후소생으로 이름은 경응이다. 839년 윤 정월에 신무왕이 왕위에 오르면서 태자에 책봉되었다가, 7월에 신무왕이 죽자 왕위에 올랐다. 신무왕은 흥덕왕이 죽은 뒤 계속되어온 왕위쟁탈전에서 승리하여 즉위하였지만 6개월도 못 되어 죽어, 왕위쟁탈과정에서 쌓여온 많은 모순을 해경하지 못하였고, 아들 문성왕대로 고스란히 넘어오게 되었다. 흥덕왕이 죽자 왕위를 둘러싼 균정계와 원성왕의 장자 인겸의 아들인 충공계와의 대립이 노골화되었다. 이 싸움에서 일단 패한 균정계의 우징은 청해진대사 장보고와 김주원의 후손 김양의 도움을 받아 민애왕을 살해하고, 왕위에 올라 신무왕이 되었다. 그 결과 장보고와 김양 등 신무왕을 도운 귀족세력은 그에 상응한 정치권력을 가지게 되었다.

문성왕이 즉위하자 장보고를 진해장군으로 봉하고, 예징을 상대등에 임명하였고 김양에게 소판의 관등을 주면서 병부령으로 임명하였다. 반면, 이와 같은 귀족세력은 왕권을 제약하는 요소로 작용하였다.

이러한 모순의 양상은 841년 홍필의 모반과 846년에는 장보고의 반란으로 드러난다. 장보고는 딸을 왕의 차비로 세우려 하였는데, 조신들이 해도사람의 딸을 왕비로 맞을 수 없다고 반대하여 일이 성사되지 않았다. 사실, 문성왕이 장보고의 딸을 왕비로 맞이하려 한 것은 신무왕의 약속을 이행하기 위한 조치였다. 신무왕은 장보고의 군대를 빌리면서 자신이 왕이 되면, 그의 딸을 왕비로 맞아들이겠다고 약속했는데, 신무왕이 재위 7개월 만에 죽는 바람에 그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이에 장보고는 문성왕에게 약속 이행을 요구하였고, 문성왕 또한 장보고의 딸을 왕비로 받아들이는 것이 국정 안정에 도움이 될 것으로 판단했다. 하지만, 신라는 전통적으로 왕비를 왕족 내부에서 간택해 왔고, 서라벌 귀족출신으로 구성된 조정 대신들을 그런 전통을 앞세워 장보고의 딸을 왕비로 삼아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이에 장보고는 청해진을 중심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이 난은 문성왕 재위 8년(846년)에 염장에 의하여 장보고가 살해당하면서 진압되었다. 일설에는 장보고의 딸을 왕비로 맞아들이는 데 반대한 인물이 김양이라고 하는데, 842년 김양이 그의 딸을 왕비로 세우는 기사가 이러한 추측을 낳게 한다. 장보고의 난이 진압되자 851년 청해진을 혁파하였으며, 그곳 민호를 벽골군으로 이주시켰다. 이는 곧 해상무역의 혼란을 의미했다. 말하자면, 신라, 일본, 당을 오가는 해상 무역상들은 청해진이라는 귀중한 안전판을 상실했던 것이다. 이는 세 나라의 경제에 엄청난 피해를 초래했다. 또한 장보고의 힘으로 등장한 문성왕의 지지기반도 약해질 수밖에 없었다. 장보고의 난 이후에도 정치적인 불안은 계속되었다.

847년, 장보고의 인맥인 이찬 양순과 파진찬 흥종의 반란이 있었다. 문성왕은 그런 와중인 재위 9년(847년)에 아들을 태자로 책봉하여 왕실의 위엄을 다졌다. 그러나 849년 역시 청해진의 후광을 입어 등용된 인물이었던 이찬 김식, 대흔의 반란이 또 한 차례 반란을 일으켰다. 양순이나 대흔은 모두 신무왕을 도와 민애왕을 몰아내는 데 공을 세웟던 인물이다.

전래로부터 계속된 왕위 다툼은 그대로 계속되다가, 857년 문성왕은 숙부 의정에게 왕위를 계승 시킨다는 유조를 내리고 죽었다. 이때가 857년 9월이다. 능은 공작지에 마련되었다. 이것은 그 한 달 전에 문성왕을 도와오던 김양이 죽자, 상대등인 의정과 시중인 계명이 결합하고 왕을 핍박하여 왕위에서 물러나게 하였다는 추측이기도 하다.

제47대 헌안왕
김균정(제38대 원성왕의 손자)
조명부인 김씨 ․ 김씨, 의정, 생년미상 ~861년 
재위기간 : 857년 9월 ~ 861년 정월. 총 3년 4개월 
부인 : 2명 
자녀 : 1남 2녀
왕비 - 영화(경문왕의 왕비), 공주(경문왕의 후비)
후비 - 궁예(태봉의 건국자)

헌안왕은 신무왕의 아버지 균정의 아들이며, 조명부인 김씨 소생으로 이름은 의정이다. 왕위에 오르기 전의 행적은 잘 알 수 없으나, 아마 아버지인 상대등 균정과 처남인 시중 김명 사이에 왕위계승문제로 암투가 격심하던 흥덕왕 말년(836년)에 중국 당나라에 사행하였고 문성왕이 즉위한 직후에는 시중을, 그 뒤에는 병부령을 거쳤다가 다시 문성왕 11년(849년)에는 상대등에 임명되었다.

헌안왕의 어머니 조명부인은 왕위계승다툼에서 남매지간인 민애왕이 시아버지인 신무왕을 죽였고, 남편인 신무왕은 민애왕을 죽여 친정과 시가가 모두 원수였던 애매한 관계에 놓여있는 인물이었다. 이런 복잡한 관계속에서 태어난 헌안왕은 조카인 문성왕이 857년 죽자, 연로한 나이에 왕위를 계승받게 된다. 여기에는 당시 실세를 잡고 있던 경응파가 정파싸움에서 이뤄낸 결과로 보고 있다.

즉위 초에 비가 오지 않고 흉년이 들어 굶주리는 사람이 많아지자, 제방을 수리하게 하고 농사를 권장하였다. 재위 2년(858년)에 무주장사(지금의 광주와 장흥)의 부관이었던 김수종이 시주하여 비로자나불상을 만들게 하고 완성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재위 3년(859년)에는 도선국사에 의해 수도암을 지었다. 이듬해(860년)에는 체징이 터를 잡아 보림사를 창건하였다.

재위 5년째인 861년 1월, 병이 들어 자리에 누운 지 오래되었으므로 왕위를 사위인 응렴(경문왕)에게 선위하고 그달 29일에 죽었다. 공작지에 장사하였다.

제48대 경문왕
김계명(제43대 희강왕의 아들)
광화부인 ․ 김씨, 응렴, 846 ~ 875년
재위기간 : 861년 정월 ~ 875년 7월. 총 14년 6개월
부인 : 2명
자녀 : 3남 1녀
문의왕후 김씨 - 정(제49대 헌강왕), 황(제50대 정강왕),
윤, 만(제51대 진성여왕)
후비 김씨

경문왕은 희강왕의 아들인 이찬 계명의 아들이며, 광화부인 소생으로 이름은 응렴이다. 846년에 태어났으며, 헌안왕 4년인 860년에 15세의 나이로 헌안왕의 큰딸 영화와 결혼하여 부마가 되었다. 그리고 861년 정월에 헌안왕이 죽자 왕위를 계승하였다.

왕위에 오르기 전에 일찍이 국선이 되었는데, 헌안왕이 불러 나라 안을 돌아다니면서 본 일을 묻자 선행을 행한 세 사람을 말하였는데, 첫째는 남의 윗자리에 있을 만하나 겸손하여 남의 밑에 있는 사람이요, 둘째는 부호이면서 검소하게 옷을 입은 사람이요, 셋째는 고귀한 세력가이면서 그 위엄을 보이지 아니한 사람이라 하였다. 이 말을 들은 헌안왕이 어짐을 알고 사위로 삼고자 하여 왕의 두 딸 가운데 한 사람을 택하게 하였다. 이에 낭도인 범교사(삼국사기에는 흥륜사의 승려라고 함)의 조언을 받아들여 왕의 큰 딸과 결혼하여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경문왕은 불교에 비교적 관심이 많아 낭도 중에도 승려가 많았으며 864년에 감은사에 행차하였고, 866년에는 황룡사에 행차하여 연등을 구경하기도 했으며, 871년에는 황룡사구층탑을 개조하였다. 이는 그 규모가 엄청나서 이 공사를 명령하던 시점에 지진과 홍수로 시달리던 백성들의 삶을 더 어렵게 하여 민심을 극도로 악화시켰다. 황룡사 대탑 공사는 3년간 지속되어 873년 9월에 오나성해 낙성식을 거행하였다.

경문왕은 불교 뿐 아니라 국학에도 관심이 있어 864년에는 국학에 행차하여 박사로 하여금 경전의 뜻을 강론하게 하였다. 즉위한 직후 나라를 잘 다스려보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이때 왕의 정치를 도운 사람들 중에는 국선출신이 많았는데, 곧 요원랑, 예흔랑 등이다. 이들은 국토를 유람하면서 왕을 위하여 치국의 뜻을 노래로 짓고, 이를 다시 사지인 심필을 시켜 대구화상에게 보내어 「현금포곡」, 「대도곡」, 「문상곡」등 3수의 노래를 짓게 하였는데, 경문왕이 이를 보고 크게 기뻐하여 칭찬하였다고 하는데 가사는 현재 전하지 않는다.

즉위 초 861년에 대대적으로 죄수들을 사면하고, 862년 이찬 김정을 상대등으로, 아찬 위진을 시중에 임명하였으며 866년에는 아버지 계명을 의공대왕, 어머니 광화부인을 광의왕태후, 왕비를 문의왕비로 봉하고 왕자 정을 태자로 삼는 등, 열의를 가지고 정치를 했지만, 진골귀족간의 오랜 분쟁은 일시에 바로잡을 수 없었다. 그 결과 중기 이후에는 반란사건이 계속 일어났다.

866년 이찬 윤흥과 그 동생 숙흥, 계흥의 모역과, 868년 이찬 김예, 김현 등의 모반, 874년 근종 등의 모역이 있었다. 근종의 난으로 민심을 크게 악화되고, 정치 불안이 가속화되고 있었다.

경문왕은 사회의 혼란을 수습하지 못하고 875년 7월 8일 서른 살의 젊은 나이로 죽었다. 한편, 경문왕은 산 뱀을 마음에 덮고 자는 나쁜 습성이 있다고 알려져 있을 뿐 아니라, 당나귀 귀와 같은 큰 귀를 가졌다는 소문도 퍼져 있었다. 이러한 이야기는 역시 당시의 혼란한 사회상 속에서 만들어졌을 것으로 보인다.

제49대 헌강왕
문의왕후 김씨 ․ 김씨, 정, 생년미상 ~ 886년 
재위기간 : 875년 9월 ~ 886년 7월. 총 10년 10개월 
부인 : 2명 
자녀 : 1남 1녀
의명왕후 - 의성(선덕왕의 왕비)
후비 김씨 - 요(제52대 효공왕)

헌강왕은 경문왕의 맏아들이며, 문의왕후 소생으로 이름은 정이다. 경문왕 재위 6년인 866년 태자에 책봉되었고, 875년 9월에 경문왕이 죽자 왕위에 올랐다. 그는 명민하고 글 읽기를 좋아하여 눈으로 한 번 보면 입으로 모두 외웠다고 한다.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른 헌강왕은 이찬 위흥을 상대등으로, 대아찬 예겸을 시중으로 임명하여 조정의 기반을 잡았다. 헌강왕은 불교와 국학에 대한 관심을 아울러 가졌는데, 876년과 886년에 황룡사에서 백고좌강경을 설치하고 친히 가서 들었다. 이러한 왕의 사찰행은 불력에 의한 국가의 재건과 왕실의 안녕을 위한 출행이었다. 확실한 연대는 알 수 없으나 망해사가 세워진 것도 헌강왕 대이다.

879년에는 국학에 행차하여 박사로 하여금 강론하게 하였으며, 883년에는 삼랑사에 행차하여 문신들로 하여금 시 1수씩을 지어 바치게 하였다. 879년에 신홍 등이 반란을 일으켰으나 곧 진압하였다. 그 뒤 헌강왕대에는 신라가 태평성대를 누린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880년에 왕이 좌우를 거느리고 월상루에 올라 서울의 사방을 바라보면서, 백성들의 집이 볏짚이 아닌 기와로써 이어졌고 밥할 때 장작이 아니라 숯을 땐다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부유함은 신라 전체가 아닌 이른바 금입택과 같은 진골귀족의 부강함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지만 오히려 신홍 등의 반란은 하대사회의 모순을 드러내는 것으로 생각된다.

반면 헌강왕대에 신라 하대사회의 위기의식을 나타낸 기록이 보이고 있다. 879년에 왕이 나라 동쪽의 주군을 순행하였을 때 어디서 온지를 모르는 네 사람이 어가를 따르며 춤을 추었는데, 당시 사람들이 그들을 산과 바다의 정령이라 하였다. 이와 비슷한 이야기는 『삼국유사』에도 실려 있다.
헌강왕이 포석정에 갔을 때 남산신이 나타나서 춤을 추니, 이 춤을 전하여 「어무상심」이라 한다.

또 헌강왕이 동해안의 개운포에 놀러갔다가 동해 용왕의 아들이라고 하는 처용을 만나 데리고 왔다. 그리하여 <처용가>가 만들어졌는데, 처용을 지방 세력가의 자제로 보아 헌강왕대에 기인제도가 나타난 것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또한 886년 봄에는 적국인 보로국(지금의 안변군 서곡면)과 흑수국(여진족의 하나) 사람들이 신라와 통교를 청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헌강왕은 중국 당나라와 일본과의 교섭을 꾀하기도 하였다.

886년 6월에 갑작스럽게 병에 걸려, 끝내 그해 7월 5일에 사망하고 말았다. 이때 그의 나이는 20대 중반으로 추정되며, 능은 보리사 동남쪽에 마련되었다.

제50대 정강왕
문의왕후 김씨 ․ 김씨, 황, 생년미상 ~ 887년 
재위기간 : 886년 7월 ~ 887년 7월. 총 1년 
부인 : 기록 없음 
자녀 : 없음
왕비 - 기록 없음

정강왕은 경문왕의 차남이며, 문의왕후 소생으로 이름은 황이다. 할아버지는 희강왕의 아들로 의공대왕으로 추봉된 계명이고, 할머니는 광의왕태후로 추봉된 광화부인이다.

아버지는 경문왕이고, 어머니는 헌안왕의 맏딸로 문의왕후에 봉하여진 영화부인이다. 정(헌강왕), 만(진성여왕), 윤과 형제간이다. 그는 886년 7월에 형 헌강왕이 죽자, 왕위에 올랐다. 최치원의 글 <사추증표>에는 헌강왕의 죽음과 정강왕의 즉위가 887년으로 되어 있어 1년의 차이가 있다. 정강왕은 이찬 준흥을 시중으로 임명하고 조정을 꾸렸지만, 그의 치세는 오래 가지 못했다. 즉위년에 서쪽 지방에 심한 가뭄이 들어 흉년이 닥쳤고, 이듬해 정월에 한찬 김요가 한산주에서 병력을 일으켜 모반을 도모했다. 다행히 반란은 진압되었고, 김요는 붙잡혀 처형되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정강왕이 병상에 눕고 말았다.

5월에 병상에 누운 정강왕은 건강이 급격히 악화되자, 시중 준흥에게 유언을 남겼는데, 다음과 같다. “나의 병이 위급하니, 다시 회복되지 못할 것이다. 불행히 뒤를 이을 자식은 없으나, 누이동생 만은 천성이 명민하고 체격이 남자와 같으니, 그대들이 선덕왕과 진덕왕의 옛 일을 본받아 그녀를 왕위에 세우는 것이 좋을 것이다.” 유언을 남긴 정강왕은 그해 7월 5일에 죽었다.

재위기간 동안에 887년에 정월 황룡사에 백좌강경을 설치하였으며, 같은 해 고승 진감선사 혜소의 높은 도덕과 법력을 양모하여 대사가 도를 닦은 옥천사를 쌍계사로 개칭하고, 고운 최치원으로 하여금 진감선사 대공탑비의 비문을 짓게 하고, 승, 빈영이 이를 새겼다. 보라사 동남쪽에 묻혔다.

 

Posted by 원주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