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역사와 문화2013. 9. 14. 15:28

 

 

신라 제46대 문성왕과 후예들은 어떠한 방법으로  나라를 다스렸는지.

 

제46대 문성왕
정종왕후 ․ 김씨, 경응, 생년미상 ~ 857년 
재위기간 : 839년 7월 ~ 857년 9월. 총 18년 2개월 
부인 : 2명 
자녀 : 1남
제1왕비 박씨
제2왕비 김씨 - 태자

문성왕은 신무왕의 장남이며, 정종왕후소생으로 이름은 경응이다. 839년 윤 정월에 신무왕이 왕위에 오르면서 태자에 책봉되었다가, 7월에 신무왕이 죽자 왕위에 올랐다. 신무왕은 흥덕왕이 죽은 뒤 계속되어온 왕위쟁탈전에서 승리하여 즉위하였지만 6개월도 못 되어 죽어, 왕위쟁탈과정에서 쌓여온 많은 모순을 해경하지 못하였고, 아들 문성왕대로 고스란히 넘어오게 되었다. 흥덕왕이 죽자 왕위를 둘러싼 균정계와 원성왕의 장자 인겸의 아들인 충공계와의 대립이 노골화되었다. 이 싸움에서 일단 패한 균정계의 우징은 청해진대사 장보고와 김주원의 후손 김양의 도움을 받아 민애왕을 살해하고, 왕위에 올라 신무왕이 되었다. 그 결과 장보고와 김양 등 신무왕을 도운 귀족세력은 그에 상응한 정치권력을 가지게 되었다.

문성왕이 즉위하자 장보고를 진해장군으로 봉하고, 예징을 상대등에 임명하였고 김양에게 소판의 관등을 주면서 병부령으로 임명하였다. 반면, 이와 같은 귀족세력은 왕권을 제약하는 요소로 작용하였다.

이러한 모순의 양상은 841년 홍필의 모반과 846년에는 장보고의 반란으로 드러난다. 장보고는 딸을 왕의 차비로 세우려 하였는데, 조신들이 해도사람의 딸을 왕비로 맞을 수 없다고 반대하여 일이 성사되지 않았다. 사실, 문성왕이 장보고의 딸을 왕비로 맞이하려 한 것은 신무왕의 약속을 이행하기 위한 조치였다. 신무왕은 장보고의 군대를 빌리면서 자신이 왕이 되면, 그의 딸을 왕비로 맞아들이겠다고 약속했는데, 신무왕이 재위 7개월 만에 죽는 바람에 그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이에 장보고는 문성왕에게 약속 이행을 요구하였고, 문성왕 또한 장보고의 딸을 왕비로 받아들이는 것이 국정 안정에 도움이 될 것으로 판단했다. 하지만, 신라는 전통적으로 왕비를 왕족 내부에서 간택해 왔고, 서라벌 귀족출신으로 구성된 조정 대신들을 그런 전통을 앞세워 장보고의 딸을 왕비로 삼아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이에 장보고는 청해진을 중심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이 난은 문성왕 재위 8년(846년)에 염장에 의하여 장보고가 살해당하면서 진압되었다. 일설에는 장보고의 딸을 왕비로 맞아들이는 데 반대한 인물이 김양이라고 하는데, 842년 김양이 그의 딸을 왕비로 세우는 기사가 이러한 추측을 낳게 한다. 장보고의 난이 진압되자 851년 청해진을 혁파하였으며, 그곳 민호를 벽골군으로 이주시켰다. 이는 곧 해상무역의 혼란을 의미했다. 말하자면, 신라, 일본, 당을 오가는 해상 무역상들은 청해진이라는 귀중한 안전판을 상실했던 것이다. 이는 세 나라의 경제에 엄청난 피해를 초래했다. 또한 장보고의 힘으로 등장한 문성왕의 지지기반도 약해질 수밖에 없었다. 장보고의 난 이후에도 정치적인 불안은 계속되었다.

847년, 장보고의 인맥인 이찬 양순과 파진찬 흥종의 반란이 있었다. 문성왕은 그런 와중인 재위 9년(847년)에 아들을 태자로 책봉하여 왕실의 위엄을 다졌다. 그러나 849년 역시 청해진의 후광을 입어 등용된 인물이었던 이찬 김식, 대흔의 반란이 또 한 차례 반란을 일으켰다. 양순이나 대흔은 모두 신무왕을 도와 민애왕을 몰아내는 데 공을 세웟던 인물이다.

전래로부터 계속된 왕위 다툼은 그대로 계속되다가, 857년 문성왕은 숙부 의정에게 왕위를 계승 시킨다는 유조를 내리고 죽었다. 이때가 857년 9월이다. 능은 공작지에 마련되었다. 이것은 그 한 달 전에 문성왕을 도와오던 김양이 죽자, 상대등인 의정과 시중인 계명이 결합하고 왕을 핍박하여 왕위에서 물러나게 하였다는 추측이기도 하다.

제47대 헌안왕
김균정(제38대 원성왕의 손자)
조명부인 김씨 ․ 김씨, 의정, 생년미상 ~861년 
재위기간 : 857년 9월 ~ 861년 정월. 총 3년 4개월 
부인 : 2명 
자녀 : 1남 2녀
왕비 - 영화(경문왕의 왕비), 공주(경문왕의 후비)
후비 - 궁예(태봉의 건국자)

헌안왕은 신무왕의 아버지 균정의 아들이며, 조명부인 김씨 소생으로 이름은 의정이다. 왕위에 오르기 전의 행적은 잘 알 수 없으나, 아마 아버지인 상대등 균정과 처남인 시중 김명 사이에 왕위계승문제로 암투가 격심하던 흥덕왕 말년(836년)에 중국 당나라에 사행하였고 문성왕이 즉위한 직후에는 시중을, 그 뒤에는 병부령을 거쳤다가 다시 문성왕 11년(849년)에는 상대등에 임명되었다.

헌안왕의 어머니 조명부인은 왕위계승다툼에서 남매지간인 민애왕이 시아버지인 신무왕을 죽였고, 남편인 신무왕은 민애왕을 죽여 친정과 시가가 모두 원수였던 애매한 관계에 놓여있는 인물이었다. 이런 복잡한 관계속에서 태어난 헌안왕은 조카인 문성왕이 857년 죽자, 연로한 나이에 왕위를 계승받게 된다. 여기에는 당시 실세를 잡고 있던 경응파가 정파싸움에서 이뤄낸 결과로 보고 있다.

즉위 초에 비가 오지 않고 흉년이 들어 굶주리는 사람이 많아지자, 제방을 수리하게 하고 농사를 권장하였다. 재위 2년(858년)에 무주장사(지금의 광주와 장흥)의 부관이었던 김수종이 시주하여 비로자나불상을 만들게 하고 완성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재위 3년(859년)에는 도선국사에 의해 수도암을 지었다. 이듬해(860년)에는 체징이 터를 잡아 보림사를 창건하였다.

재위 5년째인 861년 1월, 병이 들어 자리에 누운 지 오래되었으므로 왕위를 사위인 응렴(경문왕)에게 선위하고 그달 29일에 죽었다. 공작지에 장사하였다.

제48대 경문왕
김계명(제43대 희강왕의 아들)
광화부인 ․ 김씨, 응렴, 846 ~ 875년
재위기간 : 861년 정월 ~ 875년 7월. 총 14년 6개월
부인 : 2명
자녀 : 3남 1녀
문의왕후 김씨 - 정(제49대 헌강왕), 황(제50대 정강왕),
윤, 만(제51대 진성여왕)
후비 김씨

경문왕은 희강왕의 아들인 이찬 계명의 아들이며, 광화부인 소생으로 이름은 응렴이다. 846년에 태어났으며, 헌안왕 4년인 860년에 15세의 나이로 헌안왕의 큰딸 영화와 결혼하여 부마가 되었다. 그리고 861년 정월에 헌안왕이 죽자 왕위를 계승하였다.

왕위에 오르기 전에 일찍이 국선이 되었는데, 헌안왕이 불러 나라 안을 돌아다니면서 본 일을 묻자 선행을 행한 세 사람을 말하였는데, 첫째는 남의 윗자리에 있을 만하나 겸손하여 남의 밑에 있는 사람이요, 둘째는 부호이면서 검소하게 옷을 입은 사람이요, 셋째는 고귀한 세력가이면서 그 위엄을 보이지 아니한 사람이라 하였다. 이 말을 들은 헌안왕이 어짐을 알고 사위로 삼고자 하여 왕의 두 딸 가운데 한 사람을 택하게 하였다. 이에 낭도인 범교사(삼국사기에는 흥륜사의 승려라고 함)의 조언을 받아들여 왕의 큰 딸과 결혼하여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경문왕은 불교에 비교적 관심이 많아 낭도 중에도 승려가 많았으며 864년에 감은사에 행차하였고, 866년에는 황룡사에 행차하여 연등을 구경하기도 했으며, 871년에는 황룡사구층탑을 개조하였다. 이는 그 규모가 엄청나서 이 공사를 명령하던 시점에 지진과 홍수로 시달리던 백성들의 삶을 더 어렵게 하여 민심을 극도로 악화시켰다. 황룡사 대탑 공사는 3년간 지속되어 873년 9월에 오나성해 낙성식을 거행하였다.

경문왕은 불교 뿐 아니라 국학에도 관심이 있어 864년에는 국학에 행차하여 박사로 하여금 경전의 뜻을 강론하게 하였다. 즉위한 직후 나라를 잘 다스려보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이때 왕의 정치를 도운 사람들 중에는 국선출신이 많았는데, 곧 요원랑, 예흔랑 등이다. 이들은 국토를 유람하면서 왕을 위하여 치국의 뜻을 노래로 짓고, 이를 다시 사지인 심필을 시켜 대구화상에게 보내어 「현금포곡」, 「대도곡」, 「문상곡」등 3수의 노래를 짓게 하였는데, 경문왕이 이를 보고 크게 기뻐하여 칭찬하였다고 하는데 가사는 현재 전하지 않는다.

즉위 초 861년에 대대적으로 죄수들을 사면하고, 862년 이찬 김정을 상대등으로, 아찬 위진을 시중에 임명하였으며 866년에는 아버지 계명을 의공대왕, 어머니 광화부인을 광의왕태후, 왕비를 문의왕비로 봉하고 왕자 정을 태자로 삼는 등, 열의를 가지고 정치를 했지만, 진골귀족간의 오랜 분쟁은 일시에 바로잡을 수 없었다. 그 결과 중기 이후에는 반란사건이 계속 일어났다.

866년 이찬 윤흥과 그 동생 숙흥, 계흥의 모역과, 868년 이찬 김예, 김현 등의 모반, 874년 근종 등의 모역이 있었다. 근종의 난으로 민심을 크게 악화되고, 정치 불안이 가속화되고 있었다.

경문왕은 사회의 혼란을 수습하지 못하고 875년 7월 8일 서른 살의 젊은 나이로 죽었다. 한편, 경문왕은 산 뱀을 마음에 덮고 자는 나쁜 습성이 있다고 알려져 있을 뿐 아니라, 당나귀 귀와 같은 큰 귀를 가졌다는 소문도 퍼져 있었다. 이러한 이야기는 역시 당시의 혼란한 사회상 속에서 만들어졌을 것으로 보인다.

제49대 헌강왕
문의왕후 김씨 ․ 김씨, 정, 생년미상 ~ 886년 
재위기간 : 875년 9월 ~ 886년 7월. 총 10년 10개월 
부인 : 2명 
자녀 : 1남 1녀
의명왕후 - 의성(선덕왕의 왕비)
후비 김씨 - 요(제52대 효공왕)

헌강왕은 경문왕의 맏아들이며, 문의왕후 소생으로 이름은 정이다. 경문왕 재위 6년인 866년 태자에 책봉되었고, 875년 9월에 경문왕이 죽자 왕위에 올랐다. 그는 명민하고 글 읽기를 좋아하여 눈으로 한 번 보면 입으로 모두 외웠다고 한다.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른 헌강왕은 이찬 위흥을 상대등으로, 대아찬 예겸을 시중으로 임명하여 조정의 기반을 잡았다. 헌강왕은 불교와 국학에 대한 관심을 아울러 가졌는데, 876년과 886년에 황룡사에서 백고좌강경을 설치하고 친히 가서 들었다. 이러한 왕의 사찰행은 불력에 의한 국가의 재건과 왕실의 안녕을 위한 출행이었다. 확실한 연대는 알 수 없으나 망해사가 세워진 것도 헌강왕 대이다.

879년에는 국학에 행차하여 박사로 하여금 강론하게 하였으며, 883년에는 삼랑사에 행차하여 문신들로 하여금 시 1수씩을 지어 바치게 하였다. 879년에 신홍 등이 반란을 일으켰으나 곧 진압하였다. 그 뒤 헌강왕대에는 신라가 태평성대를 누린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880년에 왕이 좌우를 거느리고 월상루에 올라 서울의 사방을 바라보면서, 백성들의 집이 볏짚이 아닌 기와로써 이어졌고 밥할 때 장작이 아니라 숯을 땐다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부유함은 신라 전체가 아닌 이른바 금입택과 같은 진골귀족의 부강함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지만 오히려 신홍 등의 반란은 하대사회의 모순을 드러내는 것으로 생각된다.

반면 헌강왕대에 신라 하대사회의 위기의식을 나타낸 기록이 보이고 있다. 879년에 왕이 나라 동쪽의 주군을 순행하였을 때 어디서 온지를 모르는 네 사람이 어가를 따르며 춤을 추었는데, 당시 사람들이 그들을 산과 바다의 정령이라 하였다. 이와 비슷한 이야기는 『삼국유사』에도 실려 있다.
헌강왕이 포석정에 갔을 때 남산신이 나타나서 춤을 추니, 이 춤을 전하여 「어무상심」이라 한다.

또 헌강왕이 동해안의 개운포에 놀러갔다가 동해 용왕의 아들이라고 하는 처용을 만나 데리고 왔다. 그리하여 <처용가>가 만들어졌는데, 처용을 지방 세력가의 자제로 보아 헌강왕대에 기인제도가 나타난 것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또한 886년 봄에는 적국인 보로국(지금의 안변군 서곡면)과 흑수국(여진족의 하나) 사람들이 신라와 통교를 청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헌강왕은 중국 당나라와 일본과의 교섭을 꾀하기도 하였다.

886년 6월에 갑작스럽게 병에 걸려, 끝내 그해 7월 5일에 사망하고 말았다. 이때 그의 나이는 20대 중반으로 추정되며, 능은 보리사 동남쪽에 마련되었다.

제50대 정강왕
문의왕후 김씨 ․ 김씨, 황, 생년미상 ~ 887년 
재위기간 : 886년 7월 ~ 887년 7월. 총 1년 
부인 : 기록 없음 
자녀 : 없음
왕비 - 기록 없음

정강왕은 경문왕의 차남이며, 문의왕후 소생으로 이름은 황이다. 할아버지는 희강왕의 아들로 의공대왕으로 추봉된 계명이고, 할머니는 광의왕태후로 추봉된 광화부인이다.

아버지는 경문왕이고, 어머니는 헌안왕의 맏딸로 문의왕후에 봉하여진 영화부인이다. 정(헌강왕), 만(진성여왕), 윤과 형제간이다. 그는 886년 7월에 형 헌강왕이 죽자, 왕위에 올랐다. 최치원의 글 <사추증표>에는 헌강왕의 죽음과 정강왕의 즉위가 887년으로 되어 있어 1년의 차이가 있다. 정강왕은 이찬 준흥을 시중으로 임명하고 조정을 꾸렸지만, 그의 치세는 오래 가지 못했다. 즉위년에 서쪽 지방에 심한 가뭄이 들어 흉년이 닥쳤고, 이듬해 정월에 한찬 김요가 한산주에서 병력을 일으켜 모반을 도모했다. 다행히 반란은 진압되었고, 김요는 붙잡혀 처형되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정강왕이 병상에 눕고 말았다.

5월에 병상에 누운 정강왕은 건강이 급격히 악화되자, 시중 준흥에게 유언을 남겼는데, 다음과 같다. “나의 병이 위급하니, 다시 회복되지 못할 것이다. 불행히 뒤를 이을 자식은 없으나, 누이동생 만은 천성이 명민하고 체격이 남자와 같으니, 그대들이 선덕왕과 진덕왕의 옛 일을 본받아 그녀를 왕위에 세우는 것이 좋을 것이다.” 유언을 남긴 정강왕은 그해 7월 5일에 죽었다.

재위기간 동안에 887년에 정월 황룡사에 백좌강경을 설치하였으며, 같은 해 고승 진감선사 혜소의 높은 도덕과 법력을 양모하여 대사가 도를 닦은 옥천사를 쌍계사로 개칭하고, 고운 최치원으로 하여금 진감선사 대공탑비의 비문을 짓게 하고, 승, 빈영이 이를 새겼다. 보라사 동남쪽에 묻혔다.

 

Posted by 원주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