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역사와 문화2013. 9. 14. 18:20

 

광개토대왕과 인연을 맺은 사람들

 

고국양왕 광개토대왕의 아버지. 광개토대왕이 능력을 발휘할 수있도록 터전을 닦아 주었다.
장수왕 광개토대왕의 아들. 아버지를 이어 고구려를 동아시아의 최강국으로 발전시켰다.
내물마립간 신라의 왕. 광개토대왕의 도움을 받아 신라 땅에 쳐들어온 가야와 왜의 연합 세력을 물리쳤다.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

고구려의 두 번째 수도인 국내성이 있는 중국의 집안시에 가면, 하늘높이 우뚝 솟은 비석이 하나 있어요. 높이가 6.39미터, 무게가 37톤이니 엄청나게 큰 비석이지요. 이 비석의 주인공은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이에요. 무슨 이름이 이리도 기냐고요? 고구려 사람들이 이 분을 존경하여 붙여 준 이름이니, 길다고 너무 불평하지는 마세요. 좀 짧은 이름은 없냐고요? 물론 있지요. 광개토대왕이에요.

처음부터 광개토대왕이라고 하지, 왜 읽기도 힘든 긴 이름을 말해 줬냐고요? 광개토대왕이 죽은 이후에 고구려 사람들이 붙여 준 정식 이름이니, 알고는 있어야죠. 이 이름을 우리말로 풀이해 보면, ‘나라 언덕 위의 무덤 안에 계신 넓은 영토를 개척하시고 나라를 평안하게 만드셨던 우리가 좋아했던 위대한 임금님’이라고 할 수 있어요. 그러고 보니, 이름 속에 광개토대왕의 업적이 다 들어 있네요.

서로 북으로 영토를 넓히는 광개토대왕

광개토대왕의 어릴 적 이름은 담덕이었어요. 그는 어릴 때부터 체격이 크고 위엄이 있었대요. 그래서 아버지인 고국양왕은 아들을 무척 총애하였으며

, 담덕이 열세 살이 되었을 때 태자로 삼아 일찍부터 제왕의 길을 걷게 했어요. 그런 그가 왕위에 오른 것은 18세 때로, 아버지의 뒤를 이어 고구려의 19대 임금으로 등극하였어요.

광개토대왕이 임금으로 재위할 때, 고구려는 요동 지역 전체를 장악하며 동아시아 최강국이 되었어요. 그는 왕위에 오른 다음해인 392년에 4만의 군사를 이끌고 백제의 북쪽 지역을 공격하여 한강 유역까지 영토를 확장했어요. 이때 백제의 왕은 진사왕이었는데, 그는 광개토대왕이 병법에 능하다는 소문을 듣고 오금이 저려 미처 싸울 생각도 못 하고 멍하니 앉아 있다가 10여개 성을 고스란히 빼앗기고 말았대요.

광개토대왕은 395년에는 북방에 있는 거란을, 398년에는 숙신을 복속시켰으며,

402년에는 후연을, 410년에는 동부여를 공격하여 요동 지역 전체를 고구려 땅으로 만들었어요.

이처럼 광개토대왕은 남북 어디든 가는 곳마다 승리를 거두어, 일생 동안 64개 성, 1,400여 마을을 차지하여 막강 고구려 제국을 건설했어요.

한편, 400년에는 신라의 도움 요청으로 신라 땅에 쳐들어온 가야와 왜의 연합군을 물리쳐 줬어요.

신라 왕인 내물마립간은 가야와 왜의 연합군이 쳐들어오자 광개토대왕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이를 받아들인 광개토대왕은 보병과 기병 5만을 보내 왜와 가야 군사들을 물리쳐 줬어요. 경주에 있는 신라의 왕릉급 무덤인 호우총에서 제사에 사용된 그릇이 하나 출토되었는데, 그릇 밑면에 광개토대왕의 이름이 새겨져 있어서 고구려와 신라가 광개토대왕 집권 시절에 친밀했다는 것을 증명해 주고 있어요.

백성들을 편히 살게 해 준 광개토대왕

광개토대왕이 싸움만 잘한 임금은 아니에요. 광개토대왕릉비에 다음과 같은 글이 적혀 있어요.

“대왕의 은혜와 혜택이 하늘에까지 이르고, 위력은 바다에까지 미쳤다. 또한 적들을 쓸어 없애셨으니 백성들은 평안히 자기 직업에 종사했고, 나라가 부강하니 백성이 편안했으며 오곡마저도 풍성하게 익었다.”

대왕을 흠모했던 고구려 사람들의 인물평이고, 본인의 무덤 앞에 세워진 비석 글이니, 어느 정도 과장은 되었을 거예요. 하지만 자신들의 삶이 아주 편했다고 쓸 정도로 광개토대왕은 나라 안 살림살이도 상당히 잘했어요. 한편, 광개토대왕 시절에는 고구려 사람들이 자기 나라를 천하의 중심으로 여길 정도로 자부심이 강했어요. 광개토대왕의 강력한 리더십과 용병술 덕분에 고구려인 전체가 강한 주체 의식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지요.

그러나 안타깝게도 광개토대왕은 412년에 39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뜨고 말았어요. 역사에 ‘만약’이라는 단어를 붙일 수는 없지만, 만약 그가 60세까지만 살았더라도, 당시 동아시아 전체는 고구려 땅이 되었을지도 몰라요. 한번 상상해 보세요. 말까지 철갑으로 무장한 개마무사들이 보부도 당당하게 산천을 헤집고 다니며, 고구려의 영광을 외치는 모습을. 그리고 그들을 인솔하여 영토를 확장해 가는 광개토대왕의 늠름한 모습을. 어때요? 상상만으로도 스릴이 넘치지요?

 

교과서 속의 광개토대왕 시대

삼국 간의 세력다툼은 광개토대왕이 즉위한 4세기 말부터 시작되었는데, 이것은 삼국의 발전을 촉진하는 자극제가 되었다. 삼국 간의 세력다툼에서 주도권을 잡은 것은 중국 세력과 싸움을 통해 성장한 고구려였다. 광개토대왕은 강화된 국력으로 신라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영토를 크게 넓혀 고구려의 전성시대를 열었다. 그의 업적은 만주 집안에 남아 있는 광개토대왕릉비에 기록되어 있다. 그가 죽은 뒤, 고구려 사람들은 그를 영토를 크게 넓혔다는 뜻으로 ‘광개토왕’이라 하여 그의 위업을 그렸다. 

알쏭이와 장콩샘의 미주알 고주알

광개토대왕 이야기는 어디에 전해지고 있나요?
광개토대왕의 업적을 기록해 놓은 역사책은 거의 없어요. 『삼국사기』에 간략하게 소개되어 있을 뿐, 광개토대왕의 부인이 누구인지, 자식은 몇 명인지, 왜 죽었는지에 대한 세세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아요. 그래도 다행인 것은 아들인 장수왕 때에 세워 놓은 광개토대왕릉비에 그의 업적이 자세히 나와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그가 어떤 일을 언제 했는지 면밀하게 파악할 수 있어요.

광개토대왕 시절에 고구려 사람들은 ‘천하의 중심은 고구려’라고 했다던데, 그게 사실인가요?
광개토대왕 시절에 지방 관리를 지냈던 모두루라는 사람의 무덤에 이런 글이 쓰여 있어요. “하백의 손자이며 해와 달의 아들인 추모성왕이 북부여에서 태어나셨으니, 천하 사방은 이 나라 이 고을이 가장 성스러움을 알지니.” 고구려가 천하에서 가장 성스러운 곳이란 이야기지요. 또한 광개토대왕릉비에는 고구려 사람들을 가리켜 ‘천손(天孫)의 후예’라 하고, 주변 국가나 부족들은 전부 오랑캐라 해 놨어요. 이러한 사실로 보았을 때에 광개토대왕 시절의 고구려 사람들은 고구려를 천하의 중심으로 생각했던 것이 분명해요.

 

광개토대왕! 대단한 영웅인 것은 분명해. 하지만 말이야,현대 사회가 추구하는 평화의 관점에서 보아도, 그는 과연 영웅일까? 알렉산더, 나폴레옹, 칭기즈칸, 광개토대왕. 이들은 땅따먹기 전쟁에서 승리한 정복군주들이야. 그렇다면 그로 인해서고통을 받거나 죽어 간 사람들 또한 무척 많았을 거 아니야? 고통받은사람들에게도 이들은 과연 영웅일까? 우리 한번쯤 곰곰이 생각해 볼 문제인 것 같아.


세기의 전쟁 을지문덕의 살수대첩

수나라군은 쫓기고 있었다. 고구려군이 마지막 일격을 가한다. 북경을 떠날 때만 해도 수양제는 고구려 원정이 이렇게 비참한 패배로 끝날 줄은 몰랐을 것이다. 수나라군은 살수에서 전멸했다.

 

612년 수나라가 고구려을 침략할 때 동원한 병사는 113만명에 달했습니다. 비슷한 시기에 서양 전쟁에서 십만명 이상의 병력이 동원된 경우가 많지 않다는 것을 볼 때 가히 고대사 최대의 전쟁이라 하겠습니다. 고구려의 을지문덕은 바로 이 수나라 군대의 별동대 30만을 살수 오늘의 청천강에서 몰살시킵니다. 살아 돌아간 자는 불과 2700명 이것은 세계 전쟁사에 기록될 승전보입니다. 수나라는 삼백 여년 만에 중원을 통일한 나라입니다. 인구, 국토, 병력의 규모에 있어서 고구려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초강대국이었습니다. 헌데 그런 수나라가 고구려 땅에서 치욕스러운 패배를 당했다는 것입니다.

중국 강소성 양주에 있는 한 무덤. 수양제의 무덤이다. 300년 만에 중국을 통일한 제국 수나라 황제 무덤 치곤 너무 작고 초라하다. 묘지석에 벼락이 쳐서 한 부분이 깨졌지만1) 수리하지 않은 상태다. 수양제는 618년 양주에서 신하의 손에 죽었다. 그는 스스로 약을 먹고 자결하게다고 했지만 신하 우문화급은 스스로 죽을 권리조차 주지 않았다. 무덤 앞엔 그의 업적과 과오가 새겨져 있다. 요동에서 일을 버리다 천하를 잃었다. 고구려을 정벌하려다 모든 것을 잃고 말았다는 것이다. 612년 중원을 통일한 수양제는 백만대군을 동원해 고구려를 공격한다.

고구려로 가는 첫관문 요동성. 견고한 성에 의지한 고구려의 저항은 완강했다. 수나라 백만대군은 몇 달이 지나도 요동성 하나를 깨뜨리지 못했다. 중원을 통일한 초강대국이 요동의 작은 성에 막혀 진군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요동성에서 기록에 따르면 한 두달 정도의 공성전과 수성전이 진행이 됐는데 벌써부터 많은 병참의 어려움에 처했을 것입니다."

마음이 급해진 수양제는 별동대 30만을 평양으로 보낸다. 대동강으로 진입하는 수군과 합류해 평양을 공격할 의도였다. 산둥반도 봉래를 출발한 수나라 수군은 대동강에 상륙했다. 평양성 60리 앞까지 진출한 수군을 저지하기 위해 고구려군이 전투를 벌였지만 패배한다. 고구려군은 평양성 안으로 도주하고 만다. 수군사령관 내호아는 여세를 몰아 4만 병력을 이끌고 평양성을 향해 진군한다. 마침내 수나라 수군은 평양성 안으로 들이닥쳤다. 수도에 적군이 진입한 것이다. 국가의 존망이 걸린 순간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함정이었다. 평양성 안에 매복해 있던 고구려 군이 급습하자 수군은 대패한다. 살아돌아 간자는 불과 수천명. 수나라 수군은 전투력을 상실한다.

임용한 박사 (사)한국미래문제연구원, 전쟁과 역사 저자.

"수군이 군량을 보급하고 육군이 압록강을 건너와서 신속하게 평양을 함락시키는 작전이라는 것입니다. 수군대장 내호아는 고구려 군의 유인작전에 걸려서 단독으로 평양성을 공격하다가 패배해 버립니다. 그 결과 수군이 철수하게 돼버리니까 압록강을 건너서 평양까지 왔던 수나라 육군은 식량이 떨어져 버리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한편 수나라 육군 30만은 평양성 30리 앞까지 진출했다. 이 누란의 위기를 역전시킨 사람이 고구려군의 지휘관 을지문덕이었다. 조선상고사에 따르면 을지문덕은 성밖 들과 집을 비워 수나라 군이 현지에서 식량을 조달하는 것을 막았다. 보급이 끊긴 수나라군이 성급하게 공격해오자 고구려군은 사방에서 화살과 돌멩이를 비오듯 쏟아부었다. 이미 식량이 바닥난 수나라 별동대는 평양성을 칠 수 있는 전력이 아니었다.

 

"42년간 쌓았던 평양성은 당시 고구려 최대의 성이였고 높이도 굉장한 철옹성에 가깝죠. 수나라 군대가 평양성 근처 북쪽 30리까지 왔음에도 불구하고 물론 그들이 지치기도 했지만 평양성을 함락 시킬 수 있는 어떤 장비라든가 능력이 부족했던 겁니다."

수나라군은 평양성 30리 앞에서 철수한다. 그 뒤를 고구려군이 쫓으며 공격했다. 쫓는 고구려군과 쫓기는 수나라 군사. 전세는 완전히 역전된다. 후퇴하던 수나라 군은 살수 지금의 청천강에 도착한다. 청천강은 평안남북도 사이를 흘러 서해로 흐르는 200km의 강이다. 수나라 군대는 강을 건너기 시작했다. 을지문덕이 지휘하는 고구려 군대는 원하는 시간, 원하는 장소에서 수나라 군을 쳤다. 고구려 군은 도하하는 수나라 군의 후방을 공격했다. 강과 강변으로 병력이 나눠진 수나라 군사는 속수무책으로 당한다. 지휘관 신세웅도 전사하고 만다.

 

"살수대첩이 이루어졌을 때 수나라 군의 어떤 진이나 대영이 제대로 갖춰져 다기 보다는 강을 도하하거나 혹은 이동 중에 고구려 군의 기습작전이나 유격전과 같은 어떤 정상적이지 않은 시간과 장소 정상적이지 않는 방법을 통해서 고구려 군이 공격을 했다."

다급한 수나라 군은 하루에 450리를 달아났다. 살수에서 압록강까지 고구려 군은 패주하는 수나라 군대를 추격하며 생멸했다. 화살이 비오듯 쏟아졌다. 수나라 별동대의 99%가 사망했다. 30만 5천명 가운데 살아 돌아간 사람은 2700명이라고 중국측 사서는 기록하고 있다.2)

 

"유명한 삼국지의 적벽대전에서 조조가 백만을 동원했다고 하지만 실제 조조가 끌고 내려온 군대는 오만 밖에 안됩니다. 현지에서 조달을 해서 나중에 15만명을 만들었다고 돼 있습니다. 그런데 수양제 군대는 사실 백만이 아니라 2백만입니다. 중간에 보급부대나 노역으로 해서 동원했던 총동원 인력은 2백만명이었다고 중국 측 기록에 정확하게 나와 있습니다. 이것으로 보면 중국 역사상 최대의 규모의 전쟁이었다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동시에 최대 규모의 참혹한 패배였습니다. 삼국시대가 지난 후에 나중에 명나라 청나라 때 까지도 중국 황제들이 조선에 대해서 기억하고 있는 중요한 것이 저나라는 수나라의 백만대군을 물리친 나라다라고 이것을 중국황제들이 다 알고 있습니다. 그 정도로 중국 역사에 기록될 만한 참혹한 패배였고 우리측에서 보면 위대한 승리였죠."

살수대첩은 우리나라 역사를 통털어서 그 유래를 찾을 수 없는 대승이었습니다. 전쟁에 패배한 수나라는 결국 멸망의 길로 접어들고 말았습니다. 고대세계 최강의 슈퍼파워였던 수나라를 완파한 고구려 군. 그들은 과연 어떤 무기와 전략으로 싸웠던 걸까요. 고구려의 유적에서는 많은 화살촉들이 발견되고 있는데요. 활과 화살은 고구려 군의 주력 무기였습니다. 이것은 아차산에서 발견된 고구려 군의 화살을 복원한 것인데 화살촉의 평균 탄소량은 0.51%로 오늘날의 특수강의 맘 먹는 순도 높은 강철입니다. 이 철갑옷은 고구려 중장비병이 입었던 찰갑옷을 복원한 것인데 이 상위 하나를 만들기 위해서는 철을 단조해서 만든 천여 개가 넘는 작은 조각들을 일일이 이렇게 가죽 끈으로 연결해서 만들게 됩니다. 제철기술을 가진 전문가 집단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작업이었을 텐데요. 그렇다면 이렇게 철갑으로 중무장한 고구려 군들은 어떻게 전투를 했었을까요.

한강이 한 눈에 내려다 보이는 아차산. 고구려의 군사 요새 보루가 발견된 지역이다. 아차산에서만 20여 개가 넘는 보루가 나왔다. 1600여 년 전 이곳은 고구려 군이 집단으로 거주하던 중요한 군사 거점이었다.

 

"각 봉우리마다 이러한 성들이 크기는 약간씩 달리하면서 위치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각 성들이 한 눈에 다 보이기 때문에 서로 필요한 경우에 군사를 좀 더 동원해 줄 수 있는 것이고요. 또 한강에서 북쪽으로 올라오는 군사들을 다 볼 수 있는 곳에 위치한 곳이기 때문에 각각의 소규모지만 유기적으로 연결돼서 큰성처럼 그렇게 역할을 했던 것으로 생각합니다."

아차산에서는 고구려의 주력 무기가 대량으로 나왔다. 철재 칼, 도끼, 창 그리고 수천 개의 화살촉이 나왔다. 이런 무기들이 안악 3호분 벽화에 상세히 그려져 있다. 철갑옷을 입고 장창을 든 중장기병, 갑옷을 입지 않은 경기병, 철갑옷과 방패로 무장한 중장보병, 경보병, 도끼를 든 부월수, 그리고 화를 든 궁수가 보인다.

최종택 교수 고구려 고고미술학과

"현재 저희가 발굴된 고구려 철기를 분석해 보면 현재 우리가 쓰고 있는 조광이라는 기술도 알고 있었고 고대의 중국계의 기술과 유럽계의 철기제작 기술을 이미 고구려는 다 알고 있었다고 분석하고 있기 때문에 이미 제철수준이 상당히 높았고 높은 제철 수준을 통해서 무기와 농번구, 각종 생활용기를 제작하므로 국가적인 부를 창출할 수 있었습니다."

 

아차산에서 나온 자료를 가지고 고구려 화살을 제작하기로 했다. 고구려는 철을 단조해 살촉을 만들었을 것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화살촉은 특수강 수준의 강철이다. 만들어진 화살촉에 화살대와 깃을 붙여 화살을 복원했다. 고구려 군은 어떤 활로 화살을 쐈을까. 고구려의 활은 몰소의 뿔을 넣어 만든 각궁이었다. 각궁은 평소에 둥글게 휘어서 보관한다. 활을 쏠때 거꾸로 펴서 활 모양을 만든다. 완성된 각궁은 고구려 벽화 속 모습과 같다. 각궁과 고구려 화살의 파괴력을 어떨까. 초고속 카메라를 동원해 화살이 철판을 뚫는 순간을 정밀하게 촬영해 보기로 했다. 세계민족궁대회 입상자가 활을 쐈다. 화살은 함석판 5장을 그대로 관통했다.

김용만 우리역사문화연구소장

"고구려 벽화에 보면 말을 타고 활을 쏘는 그런 경기병들이 많이 보이는데 고구려 최대의 강점은 역시 활이었습니다. 기록상으로 볼 수 있는 것은 백석산 전투가 있습니다. 수나라 군대를 사면에서 완전히 포위해서 활을 비오듯이 쏴서 수나라 군대를 거의 전멸시킵니다."

 

지금도 발굴이 한창인 경주 쪽샘지구. 신라 귀족의 무덤 수십기가 발굴된 지역이다. 지난 6월 이곳에서는 중장기병이 입었던 철갑옷과 각종 무기류가 공개됐다. 발굴된 철갑옷은 작고 얇은 수많은 철편들을 엮어 만든 찰갑옷이었다. 말들 덮었던 철갑 위의 사람이 입는 찰갑옷이 최초로 원형 그대로 발굴됐다. 전문가들은 이 갑옷이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남진 때 영향을 받아 제작된 찰갑이라고 주장한다.

지병목 소장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고구려 고분 벽화의 4C~5C경에 나타나는 그 인물풍속도라든지 여러가지 풍속도에 나타나는 고분들에서 이러한 말을 탄 개마무사라고 얘기하는 갑옷을 착용한 장수와 말들이 많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여기 보시는 이 그림(삼실총벽화)에서 볼 수 있는 모든 형태의 갑옷과 부속구들이 한세트가 발견된 것에 가장 큰 의의가 있을 것 같습니다."

 

직접 철판을 잘라 찰갑옷을 만들어 보기로 했다. 철편에 부식을 막기 위해 옻 칠을 두 번하고 옻에 철분을 섞은 흑칠을 세 번 했다. 흑칠을 한 철편은 검은색이 된다. 작은 철편 조각을 일일이 가죽 끈으로 엮어야 한다. 찰갑옷 제작엔 오랜 시간이 걸린다. 상위 하나에만 1300여개의 철편이 필요하다. 이렇게 만든 찰갑옷을 사람이 입고 편하게 전투할 수 있을까. 찰갑옷은 기대 이상의 활동성을 지니고 있었다.

 

찰갑이 철편을 엮어서 만들었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 구부러져서 몸쓰기가 훨씬 자유롭고 유연합니다. 이런 식으로 접혀가지고 훨씬 더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기 때문에 훨씬 더 과학적이라고 볼 수 있죠.

철갑옷의 강도를 실험해 보기로 했다. 먼저 철판을 통째로 이어 부친 판갑옷. 큰 철판 조각들을 리벳으로 이었다. 화살은 그대로 판갑옷을 뚫었다. 발사한 모든 화살이 판갑옷을 관통했다. 화살은 갑옷을 뚫고 깊이 박히어 빼내기가 어렵다. 사람이 입었으면 치명상을 입었을 것이다. 이번엔 고구려의 찰갑옷을 실험해 보기로 했다. 찰갑옷에도 그대로 화살이 박혔다. 그런데 반복해 발사하자 화살이 튕겨 나오는 경우가 생겼다. 박힌 줄 알았던 화살을 찰갑이 튕겨내는 것이다. 철편은 뚫리지 않고 휘어져 있었다. 가죽 끈으로 연결된 작은 철조각들은 유연하게 안으로 밀리면서 화살의 힘을 흡수한 뒤 튕겨냈다.

찰갑옷으로 말과 자신을 감싼 고구려 중장기병은 어떻게 싸웠을까. 고대 전투는 진과 진의 싸움이었다. 럭비경기처럼 두 개의 진이 서로 충돌한다. 진이 유지되는 한 전투는 팽팽하게 진행된다. 진을 깨뜨리는 자가 승리한다. 팽팽하게 진행되는 싸움. 진이 붕괴되는 순간 승자와 패자가 결정되고 대량 사상자가 발생한다. 전투에서 고구려 중장기병은 진의 앞에 위치했을 것이다. 궁수가 원거리 사격을 가하고 기병이 돌진한다. 철갑과 장창으로 무장한 중장기병은 적의 진을 돌파해 후방에서 공격한다. 이때 보병이 돌진해서 앞을 공격한다. 진이 깨쳐 찰갑기병과 보병에 둘러싸인 적은 전멸한다.

고대 가야지역에서 발굴된 철갑옷을 복원한 것입니다. 큰 철판조각을 그대로 이어 붙인 것입니다. 이는 창, 칼, 화살과 같은 공격용 무기에 대한 방어력을 높이기 위해서 입니다. 그러나 철갑옷은 화살을 정통으로 맞을 경우 이렇게 탄력이 없기 때문에 그냥 뚫리고 맙니다. 반면 고구려군의 찰갑옷은 화살을 막아 냈습니다. 화살을 맞을 경우 이 가죽 끈으로 연결된 철편들이 안으로 밀려 들어가면서 화살의 힘을 충격을 흡수하고 다시 튕겨내게 됩니다. 화살을 정통으로 맞을 경우에도 이렇게 철편들이 부러지지 않고 그냥 이렇게 휘어질 뿐입니다. 그리고 찰갑옷의 장점은 한 가지가 더 있습니다. 전투 중에 갑옷이 손상되더라도 이렇게 다른 철편으로 손쉽게 수선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고구려와의 전쟁을 지휘했던 수양제는 무모한 전쟁을 해서 나라를 망친 군주로 역사에 기록됩니다. 헌데 여기서 한 가지 의문점이 생깁니다. 혼란기의 중국을 300여 년 만에 통일한 고대 세계의 슈퍼파워 수나라. 이 나라의 황제가 수양제입니다. 헌데 그런 그를 고구려 침략의 모든 것을 건 무모한 폭군으로만 기억한다는 것은 뭔가 이상하지 않습니까? 수양제 그는 과연 어떤 인물이었을까요. 또 그는 왜 고구려를 침략해야만 했던 걸까요.

고질적인 중국대륙의 물 부족을 해결하기 위해 많은 중국왕조가 장강의 물줄기를 북으로 이었다. 경향대운하는 북경과 항주를 이어주는 운하를 말한다. 수양제는 통제거, 산양독, 강남하 세 개의 운하를 건설해 황하, 장강, 휘수를 연결했다. 풍부한 강남지방의 물산을 북쪽으로 빠르게 운송해 교역을 활성화하기 위해 운하를 건설한 것이다.

가장 큰 트럭으로는 30톤, 열차로는 60톤이지만, 이 배는 500톤이나 실을 수 있지요.

운하 건설엔 또 다른 목적이 있다. 양주 고운하에는 동관고도가 있다. 동문 밖의 선착장이라는 뜻이다. 동관고도 문 아래엔 수양제가 운하를 건설한 후의 모습들이 새겨져 있다. 수양제는 미인들을 거느리고 자신이 건설한 운하를 자주 유람했다. 사치스런 연회도 자주 열었다. 벽화엔 다른 한쪽엔 수의 깃발아래 모인 병사들이 보인다. 이들은 왜 여기 있을까.

 

군사적인 목적입니다. 주로 고구려에 대처하기 위해서 입니다. 수양제는 고구려를 세 번이나 공격했는데 모두 운하를 이용해 군사들을 수송했습니다.

중국을 통일한 수양제는 남으로 방향을 돌려 베트남의 임읍국, 오키나와의 유구국 그리고 말레이 반도의 마자가국까지 정벌했다. 서기 610년 정월. 지금의 낙양인 동도에서 각국이 수나라에 조배를 올리는데 채색기를 든 자만 18000명이었다고 한다. 수나라는 주변국가를 복속시키고 대제국의 위용을 자랑한 당대 초강대국이었다. 그러나 고구려는 수나라를 중심으로 한 국제질서를 정면으로 거부했다. 영양왕은 수의 입조요구를 거절했다. 수나라는 고구려를 용납할 수 없었다.

 

그가 고구려 출정을 준비하는 데는 5년이 걸렸다. 아주 철저하게 준비를 했던 것이다. 그가 가장 먼저 한 일은 대운하의 확장명령이었다. 이 대운하는 양자강에서 북경지역으로 연결되어 있었고 곡물과 다른 군수품을 운송하는데 사용되었다. 612년에야 그 일을 마칠 수 있었고 대운하의 완공을 위해 수백만 명이 강제 노역에 동원되었다.

산동성 래주 해변에서 대규모 전함건조가 시작됐다. 배 건조의 책임자는 유주총관 원홍사(元弘嗣). 그는 가혹하게 일군들을 다루었다. 물속에서 주야로 일을 하게 해서 사람들이 일을 피하기 위해 손발을 자르고 복스러운 손, 복스러운 발로 불렀다고 전한다.3) 그리고 300척의 배가 완성됐다. 고구려를 놔두면 다른 민족들의 이반이 이어질 것을 두려워 한 수양제는 전쟁을 선포한다. 우문술이 지휘하는 좌군 12군, 우중문이 지휘하는 우군 12군, 수양제의 친위군 6군. 모두 합쳐 113만 3800명이 국경에서 고구려로 출발했다. 행렬의 길이만 960리에 달했다. 수군도 산동반도를 출발 대동강으로 향했다. 사상 유례가 없는 대출정이었다.

 

수나라가 동원한 약 110만 명에 달하는 병력은 20세기에 이르기까지 1차세계대전과 2차세계대전를 제외한다면 거의 없었던 것으로 판단됩니다. 고대 당시 고대 서양의 전투규모가 고작해야 5만에서 10만 명 그리고 한국전쟁 때 중공군이 약 40만 명에서 60만 명 정도 참전했다는 것으로 판단한다면 수나라가 고구려에 약110만 명 정도를 동원해서 공격한 것은 거의 어마어마한 규모였다고 판단됩니다.

당시 수나라는 890만 가구 인구는 4600만명 정도였습니다. 고구려의 당시 가구수는 69만호 정도였는데 한 가구당 가족을 5명으로 계산한다면 인구는 400만명 정도였을 겁니다. 수나라의 10분의 1도 안 되는 숫자입니다. 참전한 수나라의 군인은 113만명 지원병까지 합친다면 200만 명이 넘는 대군이 고구려를 공격합니다. 당시 수나라의 군사 수는 고구려 남성 전체의 절반이 넘는 숫자였습니다. 전투에 동원 가능한 성인남자의 수를 계산한다면 수나라의 병력규모는 고구려를 압도합니다.4)

수나라 100만 대군은 요하로 몰려들었다. 요하는 요동을 차지한 고구려로 가는 첫 관문. 요하 건너편에 고구려 군이 있었다. 수나라군은 요하를 건너기 시작했다. 선봉대는 강을 건너기 위해 부교를 설치했다. 그러나 부교가 짧아 강 건너 편에 닿지 못했다. 수나라 군은 강으로 뛰어들어 건너편 언덕으로 오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고구려의 공격으로 수나라 1군 사령관인 맥철장(麥鐵杖)이 전사하고 말았다. 수나라군은 첫전투에서 예상치 못한 엄청난 피해를 입고 말았다.5)

 

선봉군 대장 맥철장이 요하에 제일 먼저 도착을 했는데 고구려 군이 약 한달 동안 선봉부대가 넘어오지 못하게 합니다. 그리고 맥철장을 비롯해서 많은 지휘관을 살해합니다. 고구려가 요하 전투에서 한달 정도의 시간을 수의 진격을 막았던 것은 뒤의 수나라 작전들을 잘 수행하지 못하도록 만듭니다. 수나라는 속전속결로 해서 진격을 해야 되고 맥철장의 부대가 처음에 거점을 만들어야 하는데 수나라 본진이 올 때까지 붙잡아 둡니다. 그 후의 전쟁을 유리하게 이끄는 첫번째 승전보라 할 수 있습니다.

본진이 합류하자 수나라는 한달 만에 겨우 요하를 건널 수 있게 됐다. 수나라가 강을 건너 공격하자 고구려는 만 명의 희생자를 내고 요동성으로 후퇴했다. 그러자 수나라 대군이 요동성으로 몰려 들었다. 수양제가 단번에 고구려를 제압하기 위해 데려온 백만 대군이 요동성을 포위했다. 그리고 본격적인 전쟁이 시작됐다. 전투는 치열했다. 하지만 성과는 없었다. 고구려의 성벽은 너무 높고 튼튼했고 고구려의 저항도 완강했다. 2월에 수양제가 요동성에 도착했지만 넉 달이 되고 6월이 돼도 요동성은 함락되지 않았다. 수나라 군은 300년 만에 중국을 통일한 강한 군대였다. 지휘관과 병사들은 전쟁터에서 단련된 사람들이었다. 강남에서 북쪽의 돌궐까지 온갖 종류의 군대와 싸운 경험이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백만 대군이 요동성 하나를 깨지 못한다.

진노한 수양제는 장수들을 질책했다. 그대들은 스스로 지휘가 높고 좋은 가문임을 믿고 나를 어리석은 자로 대우하려 하느냐! 그대들이 내가 오는 것을 좋아하지 아니한 것은 아마 이 낭패를 볼까 염려한 까닭이었을 것이다. 내가 지금 여기 온 것은 바로 그대들의 수행을 보아 목을 베려 함이다. 그대들이 지금 죽음을 두려워하여 전력치 아니하니 내가 그대들을 능히 죽이지 못할 줄로 여기느냐!

 

요동성 구조는 이 그림에 따르면은 크게 외곽이 하나 있고 그 안에 내곽이 하나 있는 이중구조의 성곽입니다. 그리고 외곽에 보면 성문이 표현되어 있는데 성문 주변으로는 옹성으로는 보기 어렵지만 치가 나와서 성문을 보호할 수 있는 그런 시설로 되어 있습니다. 문의 주변에 치가 있고 성벽주변에 치가 5개 정도가 배치돼 있습니다.

치는 앞으로 튀어나온 방어용 성벽이다. 적이 공격하면 성벽 위에서 포위해 집중공격하기 위한 것이다. 옹성 역시 적을 포위해 공격하기 위한 것이다. 어긋문은 엇갈린 두 개의 성벽 사이에 만든 문이다. 문으로 들어오는 적은 고립된다. 당시 고구려의 축성술은 매우 뛰어났다. 흔적은 남아 있지 않지만 요동성도 치와 같은 방어시설을 갖춘 난공불락의 성이었을 것이다.

 

요동성은 기록에 따르면 대략 높이가 30m를 넘는 굉장히 큰 성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를 수나라 본진이 수백겹을 에워쌓다는 표현이 나오는데 수나라 군대는 이 요동성에서 약 4월 중순부터 철수하게 되는 7월 말까지 3개월 동안 이 성 하나를 점령하지 못합니다.

병서 무경총요엔 고대 중국에서 사용된 공성용 무기가 상세히 적혀 있다. 성을 공격하는 기본 장비인 사다리차 운제(雲梯), 성의 높이만큼 올라가서 성을 내려다보며 공격하는 소차(巢車, 상하이동식 공성무기)가 보인다. 성벽에 돌을 던지던 투석기를 복원해 보기로 했다. 당시 투석기는 사람의 힘을 이용해 돌을 던질 수 있게 한 구조다. 밧줄이 많이 연결될수록 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투석기를 당길 수가 있다. 작은 투석기는 40명, 큰 것은 120명의 병사가 밧줄을 동시에 잡아 당겨 돌을 날려 보낸다. 그러나 요동성은 요지부동이었다. 고구려 군은 수나라와의 전면전을 피해 요동성 안에서 수성전을 완강하게 펼쳤다. 이때부터 수나라 백만 대군의 보급에 문제가 생기기 시작한다.

데이비드 그래프(David Graff)교수, 캔자스 주립대 중국전쟁사

고구려는 수나라에게 큰 전투를 치를 기회를 주지 않았다. 고구려 군은 요새 안으로 들어가고 수나라 군은 요새 밖에서 식량이 바닥난 상태로 지내게 되었다. 왜냐하면 요새밖에 있는 모든 곡물을 안으로 거두어 들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수나라 군은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당시 고구려 군의 전술은 육군사관학교 수업에서도 인용된다. 청야입보(淸野入保). 청야는 들을 비운다는 말. 입보는 성안으로 철수해 수성전을 벌이며 적을 고갈시킨다는 말이다. 고구려 군이 사용한 청야입보 전술은 19세기 초까지 서양에서도 유효한 전술이었다.

 

청야는 들을 비운다는 말인데 한마디로 말하면 평상시에는 농업이나 목축업 같은 일반적인 생활을 하다가 적이 공격해 왔을 때 들을 완전히 깨끗하게 비우고 성으로 다 들어가서 군, 관민이 다 적에게 대항하는 그런 개념입니다. 당시의 동아시아에서 일반적으로 보급을 현지조달을 많이 했었습니다. 그래서 적에게 현지 조달을 허용하지 않기 위해서 고구려는 자기들의 생활터전을 전부 다 불태우고 완전히 비우고 나서 성으로 들어가서 결연하기 방어준비에 임했던 것입니다.

프랑스의 나폴레옹이 러시아를 침략했을 때 러시아 군도 청야전술을 구사합니다. 들판을 불태우고 러시아 내륙 깊숙이 프랑스 군을 끌어드리는데 추운 겨울 보급선이 끊어진 나폴레옹 군은 배가 주리자 도망치듯 철군하다 러시아군의 기습에 밀려 엄청난 수에 사상자를 내고 맙니다. 이렇게 전쟁에서 진 나폴레옹은 황제자리에서도 쫓겨나게 됩니다. 을지문덕도 수나라 군을 고구려 땅 깊숙이 유인해 살수에서 마지막 일격을 가합니다.

끝내 요동성을 함락시키지 못한 수나라 군은 요동성을 우회한다. 수양제는 30만 별동대를 고구려의 수도 평양으로 직접 내려 보낸다. 병력 수에서 열쇠였던 고구려 군은 이동로를 장악하고 게릴라 전을 벌었다. 평양성으로 가는 수나라 군의 보급부대가 주요 목표였다. 남하하던 수나라 군은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고구려 군과 대치하게 된다. 이때 고구려 수나라 전쟁을 통틀어 가장 극적인 상황이 벌어진다. 한 고구려 장수가 홀연히 수나라 진영을 찾아 온 것이다.

놀랍게도 그는 고구려 군의 지휘관 을지문덕이었다. 그는 고구려와 수나라의 항복 협상을 시작하기 위해 온 것이다. 을지문덕은 수나라 군의 지휘관 우중문, 우문술과 거짓으로 항복 협상을 벌이면서 수나라 진영을 염탐했다. 왜 고구려 군의 최고 지휘관이 이런 위험한 임무를 직접 수행했을까.

 

을지문덕 같이 중요한 인물이 수나라 군에 가서 포로가 된다면 고구려 군 자체가 위험에 빠지게 됩니다. 그래서 을지문덕이 수나라 군대진영까지 찾아 간 것은 적정을 관찰하는 것보다는 수나라 군대의 진격을 지연시키는 것에 목적이 있지 않았나 생각을 합니다.

협상을 마치고 돌아가는 을지문덕을 우중문은 사람을 보내 돌려 세웠다. 할 말이 있으니 다시 수군 진영으로 돌아가자는 것이었다. 고구려 군 지휘관 을지문덕을 잡으려는 수나라의 술책이었다. 하지만 을지문덕은 돌아보지도 않고 압록강을 건너 돌아갔다. 수나라 군은 적의 사령관을 눈 앞에 두고 놓친 것이다. 이후 고구려 군은 일곱 번 싸워 일곱 번 패하면서 수나라 군을 고구려 평양성 가까이 끌어 들었다. 시간을 지연시키면서 수나라 군의 식량을 고갈시키려는 을지문덕의 작전이었다. 수나라 병사들은 100일치 식량을 가지고 요동성을 출발했다. 하지만 많은 지친 병사들이 무거운 식량을 이미 모두 몰래 버린 상태였다.

꿔샤오린 교수(낙양사법대 역사학부)

군사물자 운송, 특히 양식운송이 매우 어려웠다. 보병들이 많은 식량과 무기를 메고 전쟁을 하기가 너무 힘들었다. 어떤 병사는 식량을 땅에 몰래 묻고 가지도 했다. 그래야 자신이 지고 갈 물건의 무게가 줄기 때문이었는데 그러다보니 나중에 먹을 식량이 부족했다.

을지문덕의 전략은 적중했다. 을지문덕의 청야전술은 수나라 군이 고구려 현지에서 식량을 구할 수 없게 만들었다. 들엔 곡식 한 톨 남아 있지 않았을 것이다. 수나라 군이 평양성 30리 앞에 오자 을지문덕은 역사에 남을 시 한 수를 우중문에게 보내 조롱한다.

神策究天文 신기한 책략은 하늘의 이치에 달했고, 妙算窮地理 묘한 전술은 지리를 통달했구나.
戰勝功旣高 싸움마다 이겨 공이 이미 높았으니 족한 줄 알고 그만 둠이 어떠하리.

 

마지막 구절에공은 이미 하늘에 다했으니 돌아가시게라는 말은 사실은 너희들의 식량은 이미 떨어진 사정을 다 알고 있다. 너희들이 돌아가지 않으면 어떡하겠느냐는 이미 알고 있는 상황에서 너가 이미 다 공을 이루었으니 돌아가라. 다시 말하면 너희들이 더 이상 할 것이 없지 않느냐! 점잔이 말했지만 우리가 너희들이 철수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철수를 종용하는 시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미 먹을 것이 바닥나 전투를 할 수 없었던 수나라 군사는 평양성 30리 앞에서 철수할 수 밖에 없었다. 이때 고구려의 반격이 시작됐다. 후퇴하는 수나라 군의 배후를 치기 시작했다. 쫓기던 30만 별동대는 살수 지금의 청천강을 건너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역사적인 살수 대첩이 벌어진다. 단재 신채호는 고구려 군이 미리 막아둔 상류의 둑을 터놓아 수군을 공격했다고 기록했다.6)

그런데 과연 그 당시 청천강에 둑을 쌓는 것이 가능한 일 일까. 매번 봄 청천강에서는 나무로 간단히 쌓은 둑을 터놓는다. 상류지역에서 벌목한 나무를 물살의 힘을 이용해 하류로 수송하기 위해서다. 목재는 물길을 따라 서해까지 내려가 중국으로 수출된다. 을지문덕도 이런 방법으로 둑을 쌓아 수공을 했을지는 의문이다. 과연 전쟁 기간에 엄청난 량의 물이 채워질 둑을 건설할 수 있었을까.

 

청천강 같이 큰 강을 옛날 기술로 막았다가 터뜨린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강을 막는데만 해도 오늘날에도 몇 년의 공사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군대라는 것은 보통 주변의 40km 이상의 정찰대를 운영하면서 행군하게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상류의 둑을 그 이전 시기에 막았다고 한다면 수나라 군대가 그날 그 시점에 도하하는 것을 알고 한 2, 3년 전부터 공사를 했어야 가능하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3만 여명이 참가한 국제 마라톤 대회(인천대교개통기념). 살수를 건너던 30만 수나라 별동대 병력의 10분의 1정도의 인원이 참가했다. 인천대교 주탑 간의 거리는 약 1km. 육안으로 보기에도 대열은 삽시간에 수킬로미터로 늘어졌다. 만약 30만이 달리기 시작하면 그 길이는 더욱 늘어날 것이다. 이것으로 볼 때 살수를 수나라 군 30만이 동시에 건너는 건 불가능해 보인다. 사서엔 수공에 관한 기록이 없다. 강을 건너는 수군의 후방을 공격했다는 기록만이 있다. 고구려 군의 공격에 수나라 군의 진영이 깨졌다.

 

어떤 군대가 후퇴하면서 진영을 유지하기란 굉장히 힘들다고 판단이 됩니다. 그 이유는 철수 작전 중에 후미에 남겨진 부대의 경우에는 심리적으로 굉장히 압박을 받게 되고 자신들의 생명에 위협도 받게 되는 것이고 후방에서 직접 적과 교전해야 하는 상황입니다. 모든 것이 어려운 상황에서 특히 후미부대라도 남아서 적과 교전을 하는 상황에서는 전투력을 제대로 발휘하기는 힘들다고 판단이 됩니다.

별동대 일부는 강 건너에 일부는 강 가운데 후진은 강을 건너지 못한 상황. 병력이 분리된 수나라 군은 속수무책이었다. 고구려 군의 기습은 수나라 군을 공황상태에 빠뜨려 붕괴시켰을 것이다. 을지문덕의 고구려 군은 진이 깨진 상태로 패주하는 수나라 군을 추격하며 전멸시켰다. 백만 대군으로 북경을 출발할 때 수양제는 이런 비참한 결과를 꿈에도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게 전쟁이 끝났다. 7세기 세계 최대의 전쟁의 결과는 아무도 믿을 수 없는 것이었다. 그 한가운데 을지문덕의 살수대첩이 있었다.

 

을지문덕은 사실 수세에 방어전략을 구사했지만 모든 상황을 고려해서 그 주도권을 가지고 있었고 자기가 원하는 시간과 장소에서 적을 끌어 들었고 그리고 적이 약했을 때 공격을 하므로 적의 전투력을 제압하는 아주 뛰어난 전략가였다고 생각합니다.

고구려는 요동성, 평양성, 살수 이렇게 전쟁의 운명을 가른 세 곳의 전투에서 모두 승리했습니다. 수나라는 고구려의 전략에 말려서 제대로 전투 한 번 해보지 못하고 치욕적인 패배를 당합니다. 과연 무엇이 고구려를 승리를 이끌었던 걸까요. 고구려 군의 청야전술과 수성전이 승리의 한 요인으로 꼽힐 수 있을 것입니다. 또 삼국사기를 쓴 김부식은 을지문덕의 공을 이야기 합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힘과 전략을 믿은 고구려 군의 필사 항전의 의지가 아니었을까요.

 

 

Posted by 원주유
고구려 역사와 문화2013. 9. 14. 18:08

 

살수대첩의 영웅 을지문덕

이름만 들어도 우와 소리가 나올만큼 우리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이름

그 중 오늘은 살수대첩의 영웅 을지문덕에 대해 살펴볼까 합니다

을지문덕하면 떠오르는 단어 살수대첩 입니다.

살수대첩은 을지문덕이 고구려의 영웅으로 만든 엄청난 전투였죠

수나라 군대가 우리 고구려 영토를 침략합니다

우문술은 부여도로 우중문은 낙랑도로 나와 제9군과 합류해 압록강에 이를때쯤

살수대첩의 영웅 을지문덕은 왕명을 받고 수나라에게 가서 항복을 하였습니다

이는 고구려의 작전 수나라 진영을 살펴보려고 한 살수대첩의 영웅 을지문덕의 작전이었다

살수대첩의 영웅 을지문덕은 억류 당하였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상서우승 유사룡이 굳이 풀어주라는 것이었다

결국 을지문덕은 풀려났고 작전은 성공했다

원정군의 큰 부담은 항상 보급이다 그것도 수나라대군을 지휘하려면 그 부담은 수배에 달한다

우문술과 우중문은 을지문덕을 데려오려 사람을 보냈지만 살수대첩의 영웅 을지문덕은 그들을 등뒤로 한 채

본국으로 돌아왔다

우문술은 보급이란 현실적인 고민을 하고있었다

우문술은 을지문덕의 작전에 완벽하게 놀아났다 수나라 병영에서 자중지란이 일어난 것 살수대첩의 영웅 을지문덕이 노린거짓 항복의 효과는 훨씬 컷다

마침내 화를 참지 못한 우중문은 10만의 병력을 가지고 이기지 못한다면 황제를 무슨 낯으로 보겠냐고 병사들을 꾸짖었다

우문술은 마지못해 압록강을 건너 쫒아갔다 여기서 살수대첩의 영웅 을지문덕의 두 번째 작전이 펼쳐졌다

수나라 군대가 굶주린 기색이 있음을눈치채고 더욱 피곤함에 지치게 하기위해 싸우는 척 패하는 척하며 후퇴를 반복하며 달아났다.

작전인지 상상도 못한 수나라 군대는 평양성 30리 밖까지 달려온 것 여름에 시작된 전쟁은 어느덧 가을을 지나고 수나라군의 힘은 다 빠져있었다

살수대첩의 영웅 을지문덕은 군사를 출병시켜 사면으로 공격을 개시하였다

수나라 군사들은 살수에 이르고 그곳은 수나라 군사들의 무덤이 되었다

 

 

 

 

 

7세기 동아시아 최대의 전쟁을 고구려의 승리로 이끈 위대한 군사전략가
우리 민족의 역사에서 외침(外侵)을 막아내고 국난(國難)을 극복한 대표적인 전쟁영웅(戰爭英雄) 세 명을 거론한다면 고구려(高句麗) 왕국의 을지문덕(乙支文德), 고려(高麗)의 강감찬(姜邯贊), 조선왕조(朝鮮王朝)의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을 이야기할 것이다. 이들 가운데서도 가장 위대한 전공(戰功)을 세운 최고의 영웅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한국인들은 대부분 이순신이라고 대답한다.

하지만 이순신이 활약했던 16세기 임진왜란(壬辰倭亂)보다 6세기 후반에 중원대륙을 통일한 수(隨) 제국이 모든 국력을 걸고 고구려를 침략했던 7세기 초반의 여수전쟁(麗隨戰爭)이 가장 규모가 크고 사상자가 매우 많았던 전란이라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612년 살수대첩(薩水大捷)으로 수조(隨朝)의 침략군을 격퇴한 을지문덕의 전공이야말로 우리 대외항쟁사(對外抗爭史)에서 가장 중요하고 의미가 컸다는 점을 깨달을 수 있다.

그러나 을지문덕은 우리에게 너무 암흑 같은 존재다. 역사 인물이 분명하지만 우리는 그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다. 그가 언제 태어나 어느 시기에 출장입상(出將入相)을 했으며 무슨 벼슬을 지냈는지, 심지어 언제 죽었는지도 모른다. 그의 아버지는 누구이며 그의 가문은 어떤 집안이었는지조차 알려져 있지 않다. 삼국사기(三國史記) 열전(列傳)에서도 을지문덕의 업적인 살수대첩에 대해서만 기술(記述)했을 뿐, 그의 개인 사료는 현재 남아있지 않는다. 야사(野史)로 분류되는 조대기(朝代記)·규원사화(揆園史話)·태백일사(太白逸史) 등과 해동명장전(海東名將傳)·고려을지공막리지제축문(高麗乙支公莫離支祭祝文) 등 조선왕조 시대의 문헌,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 선생이 1908년에 출간한 을지문덕전(乙支文德傳) 등만이 그와 관련된 설화(說話)를 전해주고 있을 뿐이다.

중국 정부는 2002년부터 2007년까지 동북공정(東北工程)을 진행하여 고조선·부여·옥저·고구려·발해를 우리 민족의 역사에서 분리시키고 심지어 신라나 고려마저 중국 변방의 소수민족이 세운 위성국가였다는 주장을 펼치며, 만주 지역에 대한 통치력을 강화하고 북한에 대한 영향력을 공고히 하기 위한 정치적 목적의 역사왜곡(歷史歪曲)을 추진하여 왔다. 동북공정은 공식적으로 완료되었지만 중국의 집권 공산당이 아직도 남한 측에 의해 주도되는 한반도 평화통일을 반대하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는 한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런데도 한국의 교육정책 책임자들은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더욱 우리 민족의 역사를 교육하는 일에 전력을 쏟아붓기는커녕, 대학입시에 별 도움이 안 되고 경제실용적인 학문이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역사 교육을 축소하여 선택과목으로 전락시켰다.

나관중(羅貫中)의 삼국지(三國志:三國志演義)는 중국 후한(後漢) 말기부터 위(魏)·촉(蜀)·오(吳) 삼국시대까지 중원대륙에서 일어났던 다양한 정치적·군사적 분쟁을 표현한 명대(明代) 초기의 장편소설로 오늘날까지 동양 사람들에게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고 있는 문학작품이다. 나관중의 삼국지에 가장 크게 열광하는 나라는 바로 대한민국이다. 한국인들이 중국인들보다 삼국지를 더 많이 사랑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서기 184년에서부터 280년까지 이르는 이 시기에 중원대륙에서 무수히 많은 영웅호걸들이 각자 독특한 캐릭터를 뽐내며 등장했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삼국지연의에는 사내들의 호승심(好昇心)을 자극하는 마력이 숨어 있다. 그래서일까? 이문열(李文烈)·정비석(鄭飛石)·김홍신(金洪信)·황석영(黃晳映) 등 국내 문학의 거두들은 마치 연례행사를 치르듯이 삼국지연의를 옮겨서 각색하는 글쓰기를 반복하였다.

이렇게 되니 나관중의 삼국지는 국내 대학 입시 논술고사의 단골 메뉴로 등장하게 되었고 “삼국지를 세 번 이상 읽지 않은 사람과는 친구로 사귀지 말라”는 괴상한 소리까지 나오게 되었다. 삼국지연의의 배경, 즉 1백여년간의 시기에 활동했던 제갈량(諸葛亮)·관우(關羽)·장비(張飛)·조운(曺雲)·곽가(郭嘉)·허저(許楮)·하후돈(夏侯惇)·서황(徐晃)·여포(呂布)·주유(周瑜)·감택(鑒澤)·황개(黃蓋)·주태(周泰)·여몽(呂蒙) 등은 잘 알지만 고구려사(高句麗史)에 불꽃을 피운 온달(溫達)·강이식(姜以式)·을지문덕(乙支文德)·연개소문(淵蓋蘇文)·양만춘(楊萬春) 등은 모른다. 적벽(赤壁)·허창(許昌)·건업(建業)은 줄줄 외우지만 비류수(沸流水)·건안성(建安城)·오골성(烏骨城) 등은 어느 나라 영토인지도 모른다. 삼국지연의는 모두 60년도 못 간 보잘것없는 나라였던 위·촉·오 중국 삼국시대의 역사는 알아도 7백년에서 1천년까지 사직(社稷)을 유지했었던 고구려·백제·신라 우리 민족의 삼국시대를 모르고, 심지어 우리 역사에서 가장 강력한 국력을 자랑했던 고구려의 역사마저 망각해가는 정신없는 백성만을 양산했던 것이다.

중국 정부는 고구려가 한국인들의 조상에 의해 건국된 나라였다는 사실을 부정하면서 만주는 물론이거니와 북한의 영토마저 한국인들의 문화적 종속권에서 제외시키기 위한 교활하고 치밀한 계획을 성공적으로 추진하고 있는데, 정작 한국에서는 자국 역사의 교육을 소흘히 하면서 중국의 삼국지연의를 소중하게 여기고 있으니 장래 우리 민족의 생존권을 과연 누가 무슨 방법으로 보장받을 수 있단 말인가?

중국은 세계에서 두번째로 광활한 영토를 가진 나라이며 지구촌에서 가장 많은 인구를 지닌 강대국이다. 지금의 티베트 지역과 신강유오이자치구(新疆維吾爾自治區)에서 벌어지고 있는 독립운동을 무력(武力)으로 탄압하며 조심스럽게 한반도 북부 지역에 대한 야욕을 드러내고 있는 중국은 연변조선족자치주(延邊朝鮮族自治州)를 완전히 중국의 세력권에 귀속시키기 위해 한반도에서 평화통일이 이루어지는 일을 방해하려고 갖은 공작을 꾸몄으며, 동북공정(東北工程)은 그러한 공작 가운데 하나였을 뿐이다. 일본 정부는 독도(獨刀)를 다케시마[竹島]라는 명칭으로 부르며, 1945년 태평양전쟁(太平洋戰爭)의 종전(終戰) 당시 미국에 의해 자국의 영토로 인정받았으나 한국에서 70년 동안 불법적으로 점거중이라면서 국제사법재판(國際司法裁判)을 통해 시비(是非)를 가리자고 주장하고 있다. 이에 대해 중국인들이 이 같은 일본 측의 입장을 적극적으로 지지함과 동시에 백두산(白頭山)이나 이어도(離於島)에 대한 영유권을 내세우는 이유는 무엇인가? 국제적으로 명분과 지지를 얻고 장차 정세가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전개된다면 한반도를 점령하겠다는 의도임에 틀림없다. 즉, 침략이다.

일본의 역사 교과서 왜곡 파문에 이어 중국의 동북공정까지 한국인들의 대외적 이미지가 크게 손상되고 우리 민족의 자주권 유지에 대한 명분이 심각하게 훼손당하고 있는 오늘날, 외침(外侵)으로부터 나라를 지키고 민족의 생존권에 대한 위협을 막아낸 구국간성(救國干城)의 영웅을 우리 민족의 역사에서 찾아내어 탐구하고 부각시키는 작업을 경기회복(景氣回復)에 직접적인 연관이 없다고 하여 하찮은 일로 치부해도 되는 것인가?

한반도를 강점하고 36년간 식민지 지배를 했던 일본 제국주의 세력은 1910년 8월에 경술병탄늑약(庚戌倂呑勒約)을 체결하기 전부터 한국침략의 정당성을 완성하기 위해 한사군 한반도 북부 위치설(漢四郡韓半島北部位置說)·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附設) 등을 만들어 역사를 날조하였다. 이 시기에 우리 민족의 고대사를 복원하여 일본인들의 역사왜곡(歷史歪曲)에 대응하고, 중원 세력과 대등하게 경쟁했던 자랑스러운 역사를 민중에게 가르쳐서 민족해방운동(民族解放運動)의 정신적 토대를 구축한 천재사학자(天才史學者)가 등장했으니 그가 바로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 선생이었다.

선생이 가장 중요시하게 여기고 연구했던 것은 우리 민족의 역사에서 가장 무력(武力)과 재력(財力)이 막강했던 시기인 고구려사(高句麗史)였으며, 그 가운데서도 선생이 매우 자랑스러운 영웅으로 숭상했던 역사인물이 바로 을지문덕(乙支文德)이었다. 그러나 선생께서 ‘우리 역사상 최고의 위인’이라며 극찬과 존경을 바친 을지문덕에 관련된 사료가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에 아무리 연구와 문장에 천부적인 자질을 갖추었던 선생이라고 해도 그의 전기를 쓰는 데 애를 먹을 수 밖에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선생은 을지문덕전(乙支文德傳)의 서론에서 “다행이구나, 을지문덕이여! 오히려 이 몇 줄의 역사가 전해 오고 있도다. 불행하구나, 을지문덕이여! 겨우 이 몇 줄의 역사만 전해 오고 있도다”라고 한탄했던 것이다.

우리는 학교에서 서양사(西洋史) 과목을 수업받을 때에 약소민족이 강대국의 침략을 물리쳐 승리한 대표적인 전쟁을 기원전 5세기의 그리스·페르시아 전쟁[Greco·Persian Wars]이라고 배웠다. 페르시아의 국왕 크세르크세스 1세[Khshayarsha]가 기원전 480년 50만 대군을 이끌고 그리스를 침공했을 때, 그리스 해군의 총사령관으로서 살라미스 해전[Battle of Salamis]에서 승리를 거두었던 테미스토클래스(Themistocles)는 고대의 역사인물 가운데 세계 최고의 영웅으로 평가받고 있다. 하지만 서기 7세기의 여수전쟁(麗隨戰爭)을 고구려의 승리로 이끌었던 을지문덕이야말로 아테네의 테미스토클래스보다 더 위대한 전공(戰功)을 세운 탁월한 군사전략가였음을 누구에게도 내세울 수 있고 또 자부할 수 있다.

우리 민족의 역사에서 자랑스러운 승리를 들추어내는 것은 조상들의 위대한 업적을 기림으로써 국민들에게 영웅을 숭배하는 마음을 고취시키고, 열성적이며 모험적이었던 고구려인들의 옛 발자취를 묘사하여 다시 영웅을 불러 일으켜 나라의 어지러움과 어려움을 극복하고자 함이니 을지문덕에 대한 이 현대판 전기가 비열한 자들의 마음을 경계·각성시키고 민족의 자존감을 되살릴 수 있기를 기대한다.

 

Posted by 원주유
고구려 역사와 문화2013. 9. 14. 17:55

 

우리 역사의 인물들중 고구려를 빛낸 담징

부두는 떠나는 사람, 보내는 사람으로 붐비고 있었습니다. 담징은 여러 승려들에게 옹위되어 묵묵히 부두에 들어섰습니다. 옆에서 들썩하는 소란에도 아랑곳없이 바다 먼 곳을 바라보며 발을 옮기는 그의 걸음은 어쩐지 가볍지를 않았습니다. 그들의 일행이란 몇이 안 되며 봇짐도 단출했습니다.

 

“대사님, 부디 옥체 보존하시옵소서. 예서는 날마다 기다리겠소이다. 아무쪼록 무사하시옵기만 바라나이다.” 따라 나온 중들이 짐을 넘겨주며 서운함을 표시하나 그는 별로 기색을 달리하지 않았습니다. 담징은 드디어 배전에 올랐습니다.

 

순풍에 돛을 달고 물 위로 미끄러져 가는 배의 갑판에 서서 바람에 펄럭이는 가사(중의 겉옷)자락을 부여안은 채 멀어져가는 고구려 땅을 바라보며 기약 없는 길을 떠나는 담징의 마음은 심란했습니다.

 

‘아, 나는 과연 언제면 다시 이 길을 돌아올 것인가! 외적의 준동이 심하고 나라안팎은 소란하기 그지없는데…’

 

오래전부터 호시탐탐 침략의 기회를 노리던 당나라의 준동이 근간에 와서는 더욱 잦은데 이 땅, 이 집을 뒤에다 두고 원수의 목에 칼 한번 대여보지 못한 채 장삼을 입고 기약 못할 길을 떠나려니 더욱 발등이 밟혔습니다. 그러나 아니 갈 수 없는 길이었습니다.

 

일본의 초청은 이미 수락되고 자신은 왕의 어명을 받은 신하의 몸이니 달리 할 수 없는 일이 아닌가!

담징은 579년 평원왕이 집권하고 있던 시기에 태어났습니다.

어려서부터 남달리 그림에 호기심을 가지고 있었던 담징은 무엇을 하나 보아도 그저 스치지 않았으며 반드시 다시 한 번 재현해보고야 말았습니다. 그가 일찍이 중이 된 것도 그림에 뜻을 두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른 나이에 승려가 된 담징은 벌써 젊은 시절에 불교만이 아니라 유교교리까지 꿰뚫었고 기술 분야에도 조예가 깊은 인물로 명성이 났습니다.

 

이런 담징이 국왕의 어명을 받고 일본의 문화건설을 도와주기 위해 사랑하는 고구려 땅을 떠난 것은 610년 3월이었습니다. 그때 그는 30대의 장정이었습니다.

 

유구한 역사와 문화를 자랑하는 우리 민족은 오랜 옛날부터 인류문화의 공동적 보고에 크게 기여한 창조와 발명의 전통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이전시기에도 그러했지만 삼국시기에만 해도 동방에서 가장 앞섰던 우리 민족은 이웃나라들의 기술과 예술발전에 커다란 영향을 주면서 성심성의로 도와준 사실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중국과 일본의 역사기록에도 수다히 남아있습니다.

 

백제의 학자 왕인은 일본에 건너가 글 모르던 그곳 사람들에게 처음으로 천자문을 가르쳤고 고구려의 중이며 의사인 혜자는 야마토 왕권의 집권자 성덕태자의 스승으로 활동했다고 합니다.

 

담징 역시 일본의 거듭되는 초청으로 그곳에 건너가 대고구려를 빛낸 화공이었습니다.

 

당시 일본으로 말하면 그들이 자랑하는 이른바 아스카문화가 고조기에 이른 때였습니다. 이 아스카문화 역시 백제로부터 불교가 처음으로 들어가고 삼국과의 문물이 교환되면서 우리의 학자, 기술자, 예술가들에 의해 시작되고 이룩되었습니다.

 

특히 고구려회화문화는 일본의 고대, 중세미술발전의 밑천으로 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다카마즈무덤벽화, 법륭사 금당벽화, 친수국 바탕그림들만 놓고 보아도 잘 알 수 있습니다. 무덤벽화들에 그려진 인물형상은 아래바지, 허리에 띠를 맨 겉옷, 머리에 쓴 두건 같은 것은 고구려 사람들과 꼭 같습니다.

 

더욱이 힘이 넘쳐 나고 그런가 하면 매우 섬세하면서도 우아한 필치의 형상수법들은 고구려의 회화예술이 일본에 건너간 것임을 설명 없이 그대로 보여 주는 산 실물입니다.

 

담징이 일본으로 건너 갈 당시는 추고천왕(여천왕) 스미코의 사위인 성덕태자가 나라를 다스리고 있던 시기였습니다. 나라의 문화건설에 큰 관심을 돌리고 고구려의 발전된 문화를 받아들이기에 힘쓰던 성덕태자는 백제의 사원건축가들을 초빙하여 근 8년간에 걸쳐 가장 큰 법당인 법륭사를 지어놓았습니다. 담징은 바로 이 법륭사의 벽면 벽화장식을 위해 일본으로 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법륭사는 금당(황금으로 장식됨) 중심 불전과 5층탑, 중문, 회랑으로 꾸려지고 그 옆에는 동. 서, 북으로 실들과 강당이 배치되었으며 또 고루와 종루를 비롯하여 훌륭히 건설된 절간입니다. 그래서 이 건물벽화를 아무에게나 맡길 수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불교경전에 능통하고 그림과 채색에 뛰어났으며 또한 종이와 색감제작에서 기술자로 이름이 났던 담징이 바로 사원벽화를 담당하게 되었습니다.

 

담징이 일본에 도착하자 성덕태자는 자기의 거처인 왕궁으로 이들 일행을 반갑게 맞아들였고 저들의 스승으로 높이 모셨으며 법륭사에 자리를 잡도록 했습니다.

 

“고구려스님에게 불편이 없도록 하라!”

성덕태자는 고행과 수도에 그들이 마음대로 드나들도록 허가했고 일본의 이름난 중이었던 호오죠오와 기거를 같이 하도록 했습니다.

 

장대한 체구에 꾹 다문 입, 시원스런 걸음걸이, 늘어진 가사 자락을 한손으로 올려붙인 채 법륭사를 한 바퀴 돌아 본 담징은 머리를 끄덕이며 깊은 사색에 잠겼습니다.

담징은 먼저 벽화창작을 위한 준비부터 했습니다.

그는 종이, 먹, 물감제조기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물론 일본에도 일부 문방구들과 기재들이 준비되어 있었지만 그 모든 것이 그의 눈에 들지 않았습니다.

 

담징은 모든 것을 처음부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을 시켜 먼저 질 높은 먹을 갖추도록 기술적인 지도를 주었고 손수 색감들을 하나하나씩 제조했습니다. 그리고 또한 일본에서는 그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희한한 종이도 만들어 냈습니다.

 

그뿐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연애’라고 이름 지은 훌륭한 물차를 만들었습니다. 이 물차가 만들어짐으로써 사람의 힘이 아니라 흐르는 물의 힘을 이용하여 불상조각과 금속공예품을 만들어내는 데서 하나의 개변이 일어났습니다. 특히는 농민들이 곡식을 제분하고 수공업자들이 광석을 분쇄하는데서 혁신이 일어났습니다. 이 희귀한 사실에 일본원주민들은 담징을 ‘고구려스님’이라고 존대했습니다.

 

“정말 신묘하지요.”

“글세, 말이외다. 우린 생각도 못했는데 고구려스님이 이런 것을 다…”

이 고구려스님이 바로 힘겨웠던 저들의 노동을 수월하게 만들어준 것이었습니다. 하기에 다시없는 은인으로, 위인으로 우러렀습니다.

 

담징이 일본 땅에 건너 간지도 근 2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습니다. 이제는 어지간히 준비도 갖추어졌습니다. 법륭사의 주지를 비롯한 그곳 승녀들은 이제나저제나 하면서 그가 빨리 붓을 들기만을 초조하게 기다렸습니다.

 

하지만 담징은 선뜻 일에 달라붙지 않았습니다. 어쩐지 생각은 두고 온 대동강기슭의 금잔디 밭으로만 달려갔고 고국에 있을 때의 아름다운 추억들이 꼬리를 이어 떠올랐습니다.

 

‘아, 벌써 이태가 되었구나. 모든 것이 무고한지. 그 무슨 변고라도 없는지.’

 

이즈음 일본의 중들 속에서는 담징이 저희들의 땅에 온지도 퍽이나 지났는데 그림은 그리지 않는다고, 아무래도 수상하다는 말들이 나는가하면 승적에도 없는 건달 승이어서 다른 재간은 있어도 그림만은 그릴 줄 모른다고까지 수군 수군댔습니다. 이 흉흉한 분위기에 어느 날 고구려에서 함께 떠난 법정이 이젠 붓을 들어야 하지 않겠는가고 조용히 권고했습니다.

 

담징은 근엄한 표정으로 천천히 대답하는 것이었습니다.

 

“건달 승이란 말은 열백 번 듣겠소만 나라를 모르는 중이라는 말은 죽어도 듣지 못하겠소. 내 나라 대고구려를 위해서라면 어떤 일도 주저하지 않을 담징임을 대사도 부디 알아주오.”

 

그는 시름겨운 눈으로 먼 서쪽하늘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순간 법정대사의 머리에는 언제인가 담징과 함께 길을 걸을 때 하던 그의 말이 불시에 떠올랐습니다.

 

“우리는 고구려 사람이다. 그러니 부처를 믿어도 고구려를 위해 믿어야 한다. 부처만 알고 제 나라를 모른다면 부처의 종일뿐 고구려 사람은 아니다.”

 

과연 옳은 말입니다. 담징은 이런 사람이었습니다.

 

나서 자란 고향과 그 땅에 대한 그리움으로 하여 잠을 이루지 못하던 어느 날 밤 담징은 이미 정제해놓은 채색감들을 하나하나 검열해 보고 벽면에 마주 섰으나 어쩐지 마음만은 개이지 않았습니다. 몸은 비록 타국에 있어도 언제나 마음만은 바다건너 고구려에 가 있었습니다.

 

요즈음 들리는 소문이 외적들이 쳐들어와 고구려는 시련을 겪고 있다고 했습니다. 물론 대고구려는 적을 지경 밖으로 반드시 내몰고 승리의 큰 북을 울릴 것이지만 아무튼 힘겨운 싸움을 하리라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습니다.

 

마침 법륭사 주지가 숨 가쁘게 달려오더니 그를 얼싸 안으며 염치없이 고구려에 쳐들어갔던 외적들이 가랑잎 같이 흩어지고 몰살되었다는 기적 같은 소식을 전해 주었습니다.

 

주지는 두 손을 모으고 손목의 염주를 매만지며 아뢰는 것이었습니다.

 

“대사님, 군사들이 전장에서 대고구려의 명예를 떨쳤으니 담징대사님은 화필로써 명성을 떨쳐야 하나이다. 법륭사에 영광을 베풀어 주소이다.”

주지는 진심으로 기뻐하며 인사를 드렸습니다.

승전의 소식은 쓸쓸하던 담징의 마음을 높뛰게 했습니다.

‘아, 대고구려는 이겼구나. 끝끝내 동방강대국의 이름을 떨치고야 말았구나. 이제 내 무엇을 아끼고 주저하랴. 대고구려의 빛발로 해외만방을 밝히는 이 성업에 한 몸을 바치리라.’

 

드디어 담징은 큰 붓을 들었습니다. 법정대사가 숭엄한 자세로 금당 출입문을 지키고 서 있을 뿐 주변은 쥐 죽은 듯 고요했다. 이렇듯 온몸이 그대로 고구려의 넋이 되어 낮과 밤이 따로 없이 담징은 벽화를 그려나갔다.

 

힘 있게 긋고 또 찍고 채색을 먹이고… 마지막 붓을 놓았을 때 담징은 금당바닥에 뿌리를 내린 듯 그 장대한 체구가 움직일 줄 몰랐습니다.

벽화의 완성을 보려고 발 벗고 달려온 주지와 승려들도, 함께 동행 했던 고구려의 중들도

‘아!’ 하는 탄성을 지를 뿐 다른 말을 잇지 못했습니다. 과연 명화에 또 명화였습니다.

 

금당 벽의 열두 폭 불교관계의 크고 작은 그림들과 천정 밑의 20여개 작은 벽면에 두 개씩 그려놓은 비천(하늘을 나는 선녀) 그림들은 그야말로 대황홀경이었습니다.

 

반듯한 흙벽 위에 모래와 수사(풀)를 바르고 또다시 아마와 둘을 섞어 매질한 후 그 위에 백토를 칠하여 티 없이 매끈한 면을 마련하고 그려나간 불교교리를 내용으로 하는 6편의 ‘아미타여래상’은 구도가 대칭적이면서 성격이 특색 있게 살아난 것으로 하여 더욱 이채로웠습니다. 특히 장방 안 연꽃방석 위에 위엄 있게 틀고 앉은 주인공의 모습은 예술적 처리에서 매우 정확한 것으로서 승려들과 화공들의 경탄을 자아내도록 했습니다.

 

또한 가는 선으로 연두색, 연한 붉은색, 곤청색, 재빛색을 조화롭게 먹여나감으로써 그 화려함이란 이를 데가 없었습니다.

 

단숨에 그어 내린 굵고 진한 선, 가늘고도 연한 선으로 성격을 살리고 운동감을 드러낸 인물들의 각이한 형상, 형태를 사실적으로 똑똑히 하면서도 미묘한 움직임마저도 하나같이 놓치지 않은 선묘운필의 묘미, 어디까지나 격조 높은 벽화예술의 높은 경지를 이룬 이 조화는 그 앞에 선 사람들의 마음을 금시 숭엄하게 만들었습니다.

 

완전히 넋을 잃은 주지는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바닥에 합장한 채 엎드려 ‘관세음보살’을 속으로 외우고 또 외우며 손을 비벼댈 뿐이었습니다.

 

담징 역시 외적을 보기 좋게 물리친 조국 고구려에 대한 생각으로 벽면을 향해 ‘남무관세음보살’하고 조용히 되뇌며 마음에 손을 얹습니다.

 

고구려의 이긴 싸움이 그에게 힘을 주고 붓을 들게 했던 것입니다. 만약 그 폭풍 같은 희소식이 전해지지 않았던들 담징은 아직도 시작을 못한 채 망설이고만 있었을 것이 아닌가!

 

“이 벽화는 세상에서 더는 찾아 볼 수 없는 그림이요. 담징대사의 그림솜씨는 참으로 신비롭소이다.”

주지를 비롯하여 모든 승려들이 입을 모아 연해연방 추어 올렸습니다. 하지만 담징은 조용히 뇌이었습니다.

 

“이 벽화가 잘되었다면 그것은 나의 화법이 신비로워서가 아니라 바로 고구려의 얼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요. 그 어떤 대적도 감히 굽힐 수 없는 슬기롭고 지혜로우며 용감하고 강의한 고구려 사람들의 얼이 있어 이 벽화가 완성되었음을 알아야 할 것이요.”

과연 이 벽화야말로 담징의 숭고한 애국의 산물이었습니다.

벌써 가사를 걸친 주지가 목탁을 두드리고 수많은 승려들이 합장배례를 하고 또 한다. 은은한 향불의 유연한 연기 속에 담징은 대고구려의 아들임을 온몸으로 느꼈습니다.

이와 같이 법륭사의 벽화는 담징에 의하여 훌륭히 마련되었습니다.

법륭사의 금당벽화는 신라의 경주 석굴암, 중국의 운강석굴과 함께 동양3대걸작중의 하나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법륭사의 벽화는 동방미술사는 말할 것도 없고 세계미술사에서도 특이한 자리를 차지하며, 더구나 이는 일본의 회화미술의 첫 장을 이루는 명화로 꼽히고 있습니다.

 

이 벽화는 창작된 때로부터 천 수백여 년이 지났으나 색 하나, 선 하나 변함없이 그대로 보존되어 세계적인 보물로 미술가들의 찬탄의 대상으로 되어왔습니다.

 

그러던 중 1949년 1월 법륭사가 불타면서 금당의 벽화를 잃게 되었습니다.

그 후 1968년 수많은 일류급 화가들이 최상의 자재로 다시 복원해놓았다고 하지만 원화를 살리지 못했다고 그들 자신이 말하고 있습니다. 고구려의 담징이 그린 벽화는 그만큼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Posted by 원주유
고구려 역사와 문화2013. 9. 14. 17:50

 

지안(集安: 서기 3~427년 고구려 首都)

'고구려 박물관'의 역사 왜곡… 고구려史 뭉개고 발해史는 지워

동북공정 강화
"漢 무제가 현토군에 고구려현 설치, 中原에 융합" 옌볜 지역은 말갈족 영역으로

모순
지도에 남쪽 경계는 한강 유역, 옌볜은 고구려땅 아니라면서 고구려城 그려 넣기도

集安 고구려碑
8각 유리상자 안에 넣어놓고 1m 떨어져서만 볼 수 있게… 확대경 써도 碑文 판독 어려워 지린성

"고구려가 조선족(한민족)의 조상인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중국의 나라였네요."
1일 중국 지린(吉林)성 지안(集安)의 '지안 박물관'. 이날 고구려 전문 박물관으로 신축 재개관한 박물관 6개 전시실을 관람한 한 중국인은 이렇게 말했다.
개관 당일 박물관 전시실을 둘러본 결과 '고구려는 중국의 속국' 같은 노골적 표현은 없었다. 그러나 동행한 국내 전문가는 "'동북공정'이 무서운 건 고구려사(史)를 자연스럽게 중국사의 일부로 받아들이게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중국이 지안 박물관을 통해 더 교묘하고 세밀하게 '동북공정'을 펼치고 있다는 분석이다. 지안은 서기 3년부터 427년까지 425년간 고구려 수도였던 곳이다.
"고구려족은 中 소수민족"
지안시 인민정부 청사 앞에는 고구려 상징인 '삼족오(三足烏·태양에 산다는 세 발 까마귀)' 동상이 서 있다. 안내판엔 "태양조(太陽鳥·삼족오)는 중국 고대 전설에 등장한다. 고구려 벽화의 삼족오는 고구려 민족과 중원(中原·중국을 지칭) 민족이 동일하게 태양조를 숭배했다는 의미"라고 적혀 있다. 한 시민은 "2년 전까지는 '고구려족(族)은 중국의 소수민족'이라는 문구가 있었다"며 "한국과 북한의 반대가 심해 이를 삭제한 것"이라고 말했다. 중·일, 한·일 간 역사 갈등이 첨예한 상황에서 중국이 한국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신경 쓴 것으로 관측된다.
그러나 박물관 안에 있는 안내판과 지도에는 고구려가 한(漢)·당(唐)의 영향을 받아 중원에 '융합'됐다는 내용만 가득했다. 한 관람객이 "고구려와 조선(한반도)의 관계는 뭐냐"고 물었다. 전시관 안내원은 "고구려와 한반도는 아무 관계가 없다. 고구려족은 중국의 소수민족"이라고 답했다.
고구려와 발해 연결 고리 제거
고구려 영역도에는 지금의 옌볜(延邊) 일대를 고구려 영토에서 제외하고 해당 지역을 말갈족 영역으로 구분했다. 국내 전문가는 "고구려에서 말갈을 뺀 것은 고구려와 발해가 이어지는 연결 고리를 없애려는 의도"라고 말했다. 발해는 고구려 지배층과 말갈 피지배층으로 이뤄진 국가였다. 고구려에서 말갈이 없어지면 고구려와 발해의 연관성도 그만큼 약해진다는 설명이다.
실제로 지린성 창바이(長白)에 있는 발해 벽돌탑인 '영광탑'의 안내판에는 "당나라 발해 시기에 쌓았다. 모양과 구조가 시안(西安)의 당나라 때 현장탑과 비슷하다"고 써놨다. 그러나 박물관의 고구려 산성(山城) 지도에선 옌볜 지역에 고구려 산성이 두 곳 있는 것으로 표시했다. 옌볜 일대가 고구려 땅이 아니라고 하면서도 고구려성을 그려 넣은 오류를 저지른 셈이다. 고구려 영토의 남쪽 경계는 한강 유역이라고 했지만 지도상 압록강 이남에는 어떤 유적도 표시하지 않았다.
내부 사진촬영도 기록도 금지한 지안박물관 - 중국 지린(吉林)성 지안(集安)시의 인민정부청사 앞에 세워진 지안박물관 입구. 1일 고구려 전문 박물관으로 신축 재개관했으며, 고구려를 중국 역사에 편입하려는 시도가 엿보인다.

 

박물관 측은 내부 사진 촬영을 금지하고 전시물 내용을 기록하는 것까지 엄격하게 통제했다. /지안시 청사 앞에 고구려 상징 '三足烏' 동상 - 중국 지린(吉林)성 지안(集安)시인민정부청사 앞에 1일 고구려를 상징하는‘삼족오(三足烏·세발까마귀)’동상이 서 있다. 중국은 고구려를 중국사에 편입하려고 하고 있다. /발해 벽돌탑인 '영광탑' 안내판엔 "당나라 風格을 갖고 있다" - 탑 안내판에“모양과 구조는 당나라 때의 현장탑과 비슷하며 당나라의 풍격을 갖고 있다”고 적혀 있다. 중국 지린성 창바이(長白)에 있는 발해 시기 벽돌탑인 영광탑(靈光塔).

 

박물관 전시는 일관되게 중원과 고구려의 '결합'을 강조했다. 입구에서부터 "한 무제가 현토군에 고구려현을 설치했다"고 적었다. 관련 지도는 현토군이 고구려로 성장한 것처럼 묘사했다. 그러나 고구려는 현토군을 밀어내면서 성장한 국가라는 게 전공 학자 대부분의 일치된 견해다. 안내판처럼 '고구려족과 중원 각 민족의 융합'을 통해 성장하지 않았다. 수(隋)·당과 대전(大戰)을 벌여 이들을 물리친 사실은 박물관에 어떤 설명도 없었다.

 

박물관은 또 "고구려 왕과 귀족은 당나라 관리 복장을 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국내 전문가는 "고구려는 망할 때까지 독자적 관등 체계를 유지했다"면서 "이곳 박물관에도 소형(小兄)·대형(大兄) 등 고구려의 독특한 관직이 적힌 기와 조각이 전시돼 있다"고 말했다.


현존 최고(最古) 고구려 비석으로 추정되는 '지안 고구려비'는 박물관 1층 로비 가운데 있었다. 8각 유리 상자에 넣어 성인 허리 높이의 전시대에 올려놓았다. 1m 밖에서 관람하게 돼 있어 비문(碑文)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비석 실물을 처음 접한 국내 학자들이 확대경까지 동원해 글자를 판독하려고 했지만 어려움을 겪었다.

지안(集安) 박물관
425년간 고구려 수도였던 중국 지린(吉林)성 지안에 지어진 고구려 박물관. 중국은 2003년 이른바 ‘동북공정’이 진행되던 시기에 박물관 건립을 추진했다. 3년 전 완공됐으나 내부 보완을 거쳐 1일 재개관했다.

동북공정(東北工程)
중국이 고조선·고구려·발해의 역사를 중국사로 편입하기 위해 추진한 동북 지역 연구 프로젝트. 중국 사회과학원 산하 변강사지연구중심(邊疆史地硏究中心)이 2002년부터 5년간 진행했다. 지금은 ‘역사 왜곡’ 영역을 벗어나 일반 중국인의 상식을 바꾸는 단계까지 이르고 있다. 한반도 통일 등 동북아 정세 변화에 대비한 중국의 역사적 명분 쌓기라는 분석도 있다

 

 


중국 光明日報의 ‘고구려 역사 연구의 몇 가지 문제에 대한 試論’

“한민족은 고구려와 기자조선을 도용해 갔다”

 

중국의 역사자료만 ‘일방적’으로 인용해 “고구려는 중국의 일부”라고 주장했다. 전문을 읽어보면 이 시론이 얼마나 억지를 부리는가를 명확히 알 수 있다. 이 시론의 결론이 ‘고구려는 중국의 일부니 정치적으로 이의를 제기하지 말라’라고 돼 있는 것은 이 시론이 정치적 의도를 갖고 작성되었음을 보여주는 ‘명백한’ 방증이다. 일반인이 알기 힘든 용어는 그 뜻을 찾아 괄호 안에 주석을 달았다. “광개토대왕이 웃는다.” 중국 길림성 집안현 통구에 있는 5.34m 높이의 광개토대왕비. 최근 중국은 총력을 다해 고구려를 중국역사에 편입시키려는 일련의 작업에 착수했다.

‘고려’라고도 약칭하는 고구려는 서한(西漢)에서 수(隋)·당(唐) 시대까지 중국 동북(東北)지역에 출현했던 중요하고 영향력 있는 변방 민족 중의 하나였다(중국에서 동북지역은 대개 만주 일대를 일컫는데 길림성과 요녕성, 흑룡강성을 가리켜 ‘동북3성’이라고 한다).

中原 왕조와 종속 관계

고구려의 선조는 주나라와 진나라 시기 줄곧 중국의 동북지역에서 생활했다. 기원전 108년 한나라 무제는 요동과 한반도 북부에 4군을 설치했는데 그 중에서 현도군에 있던 고구려현이 바로 고구려인이 살았던 곳이다.

기원전 37년 부여 사람인 주몽은 현도군 고구려현 관할구역에 정권을 세우고 흘승골성(紇升骨城 : 지금의 요녕성 환인현성 부근. 그러나 한국 역사학계는 광개토대왕비문을 근거로 주몽이 졸본에 도읍을 정했다고 보고 있다)을 수도로 정하였다.

서기 3년(한나라 평제 원시 3년) 고구려는 국내성(지금의 길림성 집안시)으로 수도를 옮겼다가 서기 427년 평양성(지금의 평양시)으로 천도하였다. 전성기 때의 고구려는 길림성 동남부와 요하(遼河 : 중국 동북지방 남부를 가로질러 서해로 흐르는 1400㎞의 강) 동쪽, 그리고 한반도 북부까지 세력을 뻗쳤다. 이로부터 서기 668년 한반도 동남부에 위치한 신라와 연합한 당나라 왕조의 공격에 의해 멸망하기까지 고구려는 705년의 역사를 유지했다.

고구려가 존재한 700여 년의 시간을 살펴보면 고구려는 중국의 중원 왕조가 관할하는 지역에서 주로 활동하였으며 중원 왕조와 종속관계를 유지하였다. 고구려 정권은 중원 왕조의 제약을 받았고 중국 지방정권의 관할하에 있었으므로 고대 중국에 있었던 변방의 민족정권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고구려와 중원 왕조의 관계는 중원 왕조의 제압력이 강해지거나 약해짐에 따라 밀접해지기도 했고 소원해지기도 했을 것이다. 이 글에서는 최근에 이뤄진 고구려 역사연구에 대해 약술한다. 학계연구자들의 지도편달을 바란다.

[1.고구려는 중국 동북지역 역사에 출현했던 소수민족 정권이다]

주(周 : 殷나라 다음에 건국해 秦나라에 멸망당할 때까지 수백년간 이어온 중국 고대 왕조) 나라와 진(秦: 기원전 221~207년)나라 시절 고구려인의 선조는 주로 혼강(渾江: 중국 요녕성을 흐르는 강)과 압록강 유역에서 생활하였다. 이들이 살았던 중심구역은 지금 요녕성의 환인현과 신빈현, 길림성의 집안시와 통화시 일대였다.

우리는 고구려 민족이 중국 동북지역 역사에 등장한 한 민족이었고, 고구려 정권은 중국 동북지역 역사에 등장한 변경민족 정권이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고구려 민족의 기원을 살펴보자. 현재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대다수 중국학자들은 고구려 민족의 기원에 대하여 예맥(濊貊: 중국 漢나라 시절 압록강과 혼강 유역에 살았다는 한민족의 근간이 되는 부족)설과 부여(夫餘: 고조선이 무너진 후 북만주 일대에 웅거한 부족국가)설, 고이(高夷 : 만주에 있던 고대 종족)설, 상인(商人 : 商은 殷나라를 뜻한다. 은나라가 주나라에 패해 동쪽으로 가 고구려의 선조가 되었다는 것이 商人설이다)설, 염제(炎帝)설 등을 제기하고 있다(중국 ‘史記’에는 중국의 黃帝가 염제·치우 등과 싸워 천자가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후 중국에서는 치우를 ‘군신’으로, 염제는 ‘불의 신’ 혹은 ‘태양신’으로 받들었다).

이런 여러 학설에 공통점이 있다면 고구려 민족은 주나라와 진나라 때에 중국의 동북지역에서 활동했다는 점이다.

좌전(左傳: ‘춘추좌씨전’ 혹은 ‘좌씨춘추’의 다른 이름. 춘추 시대 노나라의 좌구명이 편찬했다. 기원전 722~481년의 춘추시대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의 소공(昭公) 9년 조를 보면 주나라 사람들은 내내 “숙신(肅愼: 고조선 시대에 있었던 고대 종족)과 연(燕 : 周나라 昭公 奭의 후예로 전국 시기에 왕으로 칭한 칠웅 중의 하나. 지금의 중국 하북성 지역에 있었다. 고구려 장수왕의 공격에 의해 멸망했다), 그리고 박(?: 은나라 탕왕이 도읍한 곳. 지금의 하남성 귀덕부 상구현)은 우리의 북방 영토였다”고 말하는 부분이 있다.

고구려는 漢나라 안에 있던 지방정권

여기서 우리는 주나라의 무왕이 상(商: 殷나라)을 점령한 후 주나라 사람들이 동북지역을 경영했음을 명확히 알 수 있다. 주나라 때의 세력 범위는 지금의 동북지역보다 훨씬 넓었다.

환인현의 태서구 유적과 요산 유적·봉명 유적, 집안시의 대주선구 유적과 이도외자 유적·동촌 유적, 통화시의 왕만 발발자 유적 등에 대해 오랫동안 고고학적 조사와 발굴이 이뤄졌는데 이 조사에서 이 유적들은 모두 고구려 정권이 출현하기 전의 문화 유물이라는 것이 분명히 밝혀졌다. 이 지역 유물의 지층을 조사해보면 하층은 신석기시대 말기부터 청동기시대의 문화이고, 그 위층은 한대 문화이며, 그보다 더 위층은 고구려 정권이 출현한 후의 문화임이 명확히 드러난다.

두 번째는 고구려 정권 건립 상황에 관한 것인데 중국 학자들과 외국 학자들은 대부분 고구려가 기원전 37년(서한 원제 건조 2년)에 흘승골을 수도로 해 세워졌다는 점에 일치된 견해를 보이고 있다.

요녕성 환인현성 부근(환인현성 서쪽으로 4㎞ 떨어진 혼강 맞은편 쪽)에는 평원성(平原城: 평야에 세워진 성. 산성의 반대 개념)인 ‘하고성자(下古城子)’가 있으며, (환인현성 동북으로 8.5㎞ 떨어진 혼강 맞은편의 오녀산 정상에는) ‘오녀산성(五女山城)’이 있다. 고고학적 조사와 발굴에 의하면 이곳은 한나라 현도군의 관할 범위 안에 있던 고구려의 초기 수도였다고 한다.

고구려 정권이 출현하기 전 중국의 서한(西漢) 왕조는 광대한 중국 동북지역을 상대로 행정을 펼치고 있었다. 한나라 무제 원봉 2년인 기원전 108년 이곳에는 잇따라 현도군·낙랑군·임둔군·진번군의 네 군이 세워졌는데, 네 군(세칭 漢四郡)이 관할한 범위는 동북 지역과 한반도 북부에 이르렀다. 그 후 한사군의 관할 지역에 변화가 있어, 현도군의 행정수도가 고구려현으로 이전하였다.

고구려현 부근에서 건립한 고구려 정권은 처음에는 현도군, 이어서는 요동군에 속하게 되었는데 고구려 정권은 끊임없이 표(表: 신하가 자기 생각을 서술해 황제에게 올리는 글)를 올려 신하를 칭하고 조공을 받쳤다. 그리고 현도군에 이어 요동군을 거치며 한나라 왕조가 하사한 관복 등을 받아갔다. 이 시기 많은 한(漢)나라 사람이 고구려 정권에 흘러들었다.

1975년부터 1976년까지 중국 집안시 국내성 지역에서는 고고학적 조사와 발굴이 있었는데, 이때 고구려의 석축(石築) 안에서 한나라 때 만들어진 흙으로 쌓은 벽(土築城垣)이 발견되었다. 여기서 한나라 시대의 철기와 도기 등 여러 유물이 출토된 바 있다.

705년간의 역사를 이어오며 고구려는 현도·요동·낙랑 등지로 영토를 확장시켰으며 여러 차례 수도를 옮겼다. 그러나 흘승골이든 국내성이든 평양성이든 고구려의 수도는 모두 한사군 지역 안에 있었다. 그러니 고구려는 중국 역사에 출현한 변방의 민족 정권인 것이다.

周대에 기자 봉하고, 漢대에 4군 설치

세 번째, 한나라에서부터 당나라 때까지 중국은 분열해 있었지만 중국의 역대 왕조들은 모두 고구려를 변방의 민족 정권으로 생각했다는 점이다.

상(商: 은나라) 말기에서 한나라 초까지 고구려인의 거주지는 기자조선(箕子朝鮮: 은나라 말기 기자가 조선에 와 단군조선에 이어 세웠다고 하는 나라)의 관할 구역 안에 있었는데, 기자는 주나라 시대 지방 제후 중 하나였다.

한나라 시대에는 위씨조선(衛氏朝鮮: 한국에서는 ‘위만조선’이라고 한다. 한나라 고조는 중국을 통일한 후 노관에게 연나라를 다스리게 했는데, 노관이 반란을 일으켜 나라가 혼란에 빠졌다. 이때 노관의 부관으로 있던 衛滿이 1000여 명을 이끌고 패수를 건너 고조선의 準王을 찾아가 몸을 의탁했다. 그 후 위만은 준왕을 쳐 왕위를 빼앗고 도읍을 왕검성으로 옮겼는데 이를 위만조선이라고 한다. 위만조선은 한나라로부터 지원을 받아 지역 안정을 도모하고 이웃한 진번군과 임둔군 등을 복속시켜 고조선 역사상 가장 융성했던 나라가 되었다)이 기자조선을 대신했는데, 위씨조선은 여전히 한(漢) 왕조의 종속국이었다.

기원전 108년(원봉 3년) 한나라는 위씨조선을 멸망시키고 낙랑 등 4군을 설치해 한반도 중부 이북을 포함한 동북지역을 중국의 중원(中原) 지역과 같은 방식으로 통치하였다(한나라의 무제는 기원전 108년 위만조선을 멸망시킨 후 바로 낙랑·임둔·진번 3군을 설치하였고 그 다음해 현도군을 추가해 4군을 만들었다). 한나라로부터 당나라 때까지 고구려에 대한 중국 각 왕조의 관리 방식은 각기 달랐지만 중국의 통치자들은 고구려의 활동지역을 중국의 전통적인 영토로 생각하였다.

수나라 때 만들어진 ‘배구전(裴矩傳)’이라는 책을 보면 “수나라의 통치자는 ‘고구려의 영토는 원래 고죽국(孤竹國 : 중원에서 멀리 떨어진 땅)이다. 주나라 때 이 땅을 기자에게 봉했다가 한나라 때는 3군으로 나눴다. 진(晉)나라 시절에도 여전히 요동(요하 동쪽으로 동북과 같은 말이다) 지역은 진나라의 관리를 받았다. 그런데 지금은 더 이상 신하로 칭하지 않고 별개의 외지가 되었다. 그래서 선제(先帝)께서는 이를 못마땅히 여겨 고구려를 계속 정복하고 싶어했다’고 말했다”는 대목이 있다.

또 ‘책부원귀(冊府元龜)’ 제왕부(帝王部) 친정이(親征二)에는 “당 태종 또한 ‘요동은 원래 중국의 토지인데 주나라 때부터 위나라 때까지 그다지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 수나라의 왕은 일찍이 네 번이나 군대를 파견해 공격한 적이 있으나 모두 패하고 돌아왔고 고구려인은 많은 중국 평민을 죽였다. 지금 고구려인은 국왕을 살해하고 굉장한 자만에 빠져 있다. 나는 밤새 이 일을 생각하느라 잠을 이루지 못했다. 나는 죽은 중국 사람들의 자녀를 위해 복수할 것이다. 고구려인들을 도와 왕을 죽인 자들을 토벌할 것이다. 지금 비록 중국 대부분의 토지는 평정되었지만 단 하나 이곳만 평정되지 않았다. 우리는 또 한번 남은 병사의 힘으로 그 땅을 소탕하여 평정할 것이다. 후대의 우리 자손 중에는 강한 군대가 나올 것이고 반드시 재능 있는 인재가 나올 것이다. 나는 그들을 설득하여 반드시 요동을 토벌하러 가게 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아직 늙지 않았으니 내가 직접 토벌하러 가고 싶다. 이렇게 하면 우리 후손들에게 그 일을 시키지 않아도 될 것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는 내용이 있다(‘책부원귀’는 서기 1005년 송나라 정종 때의 왕흠약과 양억 등이 왕명을 받들어 편찬한 유서이다).

“원래는 중국 것이다” “비록 중국 대부분의 토지가 평정되었지만 단지 이 한곳만 평정되지 않았다”는 말은 당 태종이 고구려 지역을 전통적인 중국의 영토로 간주하고 있었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고구려와의 통일을 실현하는 것은 곧 “중국의 영토를 평정한다”는 최후의 사명을 완성하는 것이었다. 수나라와 당나라의 왕조가 전력을 기울여 고구려와의 통일을 이룩하려고 한 이유도 바로 이것 때문이었다.

책봉받고 조공 바친 고구려

네 번째, 고구려 또한 중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원하지 않았다.

700여년 동안 고구려는 동북 변방지역에서 독립하려고 하지 않았다. 고구려가 자신에게 스스로 부여한 위치는 중국 중앙왕조의 변방정권이었으며, 고구려는 중국이 3국시대(蜀漢·魏·吳나라로 나뉘어 소설 ‘삼국지’의 배경이 된 시기)와 양진시대(兩晉: 魏나라의 신하로 있던 사마염이 조조의 후손인 조한으로부터 황제의 자리를 빼앗아 265년 지금의 낙양에 晉나라를 세웠다. 그러나 晉나라는 4대 만에 흉노 등 북방민족의 공격을 받아 326년 멸망하였다. 그 이듬해 사마예는 동쪽으로 옮겨가 지금의 남경에 다시 晉나라를 세웠는데, 이 진나라는 419년까지 존속하였다. 사마염이 세운 진은 西晉, 사마예가 건국한 진은 東晉이라고 하고 이를 합하여 ‘兩晉’이라고 한다), 그리고 남북조 시대(東晉 이후 지금의 남경에는 차례로 宋·南齊·梁·陳나라가 건국되었다. 반면 북쪽에서는 北魏-東魏·西魏-北齊·北周가 들어서 대립하게 된다. 이렇게 남북으로 갈린 상태에서 여러 나라가 멸망하고 대립한 때를 남북조 분열시대라고 한다. 남북조 분열시대를 통일한 것이 隋나라다)로 크게 분열돼 있을 때도 스스로 중국의 중앙왕조에 대해 종속관계를 유지하였다. 그뿐 아니라 고구려는 책봉을 받았고 조공을 바쳤으며 질자(質子: 인질)를 보냈다.

‘통전(通典)’ 변방(邊方) 고구려를 보면 고구려의 왕은 동진(東晉)과 송(宋)·제(齊)·양(梁)·후위(後魏)·후주(後周) 시대까지 중국 남북의 두 왕조로부터 작위를 책봉받았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 또한 같은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통전’은 당나라 때 두우가 黃帝부터 당나라 현종까지의 문물제도 전반에 대하여 기술한 책).

‘亡國의 恨’ 품지 않은 고구려인

당나라가 세워진 후 고구려는 당으로부터 책봉을 받았으니 이는 고구려의 왕조가 당의 승인을 분명히 받았다는 증거이고 중국으로부터 자주 독립을 하지 않으려 했다는 뜻이다. 이러한 인식이 있었기 때문에 당나라가 고구려를 통일하자, 많은 고구려인들은 당나라에 대해 ‘망국(亡國)’의 한을 품지 않았던 것이다.

오히려 고구려인들은 당나라에 통합된 후 당나라의 통일 대업을 지키기 위한 전쟁에서 공로를 세워 역사에 이름을 남기기까지 하였다. 신·구 ‘당서(唐書)’에 이름을 남긴 천남생(泉男生)·고선지(高仙芝)·왕모중(王毛仲)·왕사례(王思禮)·이정기(李正己) 등이 그들인데, 신·구 ‘당서’에는 이들의 전기가 기록돼 있다.

다섯 번째로 멸망 후 고구려인의 이동 방향을 살펴보자. 고구려는 당 고종 총장 원년인 서기 668년 멸망했는데 ‘신당서’고려전에는 고구려를 멸망시킨 당나라가 고구려 난민 ‘69만호’를 받아들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 숫자는 당시 고구려의 총 가구수였겠지만, 여기에는 비고구려인 가구도 적잖이 포함돼 있었다. 당시의 고구려족 가구는 15만호 정도였기 때문이다.

학자들은 고구려가 패망한 후 고구려인들은 네 방면으로 이동했다고 보고 있다. 중원 각지로 유입된 고구려인이 있었고, 신라로 간 고구려족이 있었으며, 말갈(발해)에 의탁한 고구려인이 있었고, 돌궐로 거주지를 옮긴 고구려인도 있었다.

중국 학자들의 최근 연구 성과에 의하면 멸망시 고구려인 숫자는 대략 70만명 정도였는데 이 가운데 30만명이 중원 각지로 유입되었다고 한다. 신라에 귀의한 사람은 10만 정도였고, 말갈(발해)에 의탁한 사람은 10만 이상, 돌궐로 옮겨간 고구려인은 1만여 명이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이렇게 하면 대략 50만명 정도가 네 방면으로 이주한 셈이 되는데, 나머지 20만명은 요동 각지로 흩어져 유민(遺民)이 되고, 전쟁 와중에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숫자를 더하면 대략 70만이라는 숫자가 나온다.

신라로 유입된 고구려인은 용흥강(함경남도를 흘러 동한만 쪽 동해로 흘러드는 강) 이남의 한반도로 유입돼 살던 10만여 명이었는데 이들은 신라로 유입돼 반도 민족에 융화되었다.

그러나 나머지 대다수의 고구려인은 한족(漢族)에 융화되었다. 이러한 점으로 볼 때 고구려 민족을 중국 동북지방에 등장했던 변방민족으로 보는 것이 역사적인 사실에 가장 부합된다고 할 수 있다.

[2. 왕씨(王氏) 고려는 결코 고구려의 계승자가 아니다]

서기 918년 한반도에서 ‘고려’라는 이름의 정권이 출현하였다. 그 통치자의 성(姓)이 왕씨였기 때문에 학계에서는 이를 ‘왕씨 고려’라고 부른다. 비록 왕씨 고려는 고구려의 칭호를 계승했지만, 고구려의 승계와는 직접적인 관련이없다.

고구려가 패망하고 고려가 세워지기까지는 큰 시간 차이(250년)가 있을 뿐 아니라 역사 발전과 연원도 크게 다르다. 기원전 37년에 세워진 ‘고씨 고려(고구려)’는 서한(西漢)의 현도군 고구려현 관할하에 있었다. 그후 점차 강성해졌지만 중국 중앙왕조와의 종속관계를 끊지 않았다. 수·당 시기로 접어들어 고구려는 영토 확장정책을 실시해 한반도에 있는 기타 정권(삼한과 신라·백제 등)이 중원의 왕조에 조공하는 통로를 가로막아, 수·당 두 왕조로부터의 토벌을 불러들였다.

서기 668년 당나라는 마침내 ‘고씨 고려’를 통일함으로써, 고씨 고려의 영토는 당나라 안동도호부(최초의 행정중심은 지금의 평양)에 의해 관할되었다. 그리고 몇십 년 후 고씨 고려가 관할하던 구역에 중국 역사에 등장하는 또 하나의 지방정권인 ‘발해’가 들어섰고, 고씨 고려가 관할한 다른 일부분 지역은 한반도 남부에서 일어난 신라 정권에 귀속되었다. 하지만 이를 제외한 부분은 여전히 안동도호부에 의해 관할되었다.

고려는 三韓을 이었다

대부분의 고구려족은 당나라에 의해 내지(內地: 중국)로 옮겨져 한족과 융합되었으며 나머지 고구려인은 주위의 각 민족에 융합되었다. 이로써 고구려 왕족은 후계자가 끊겼으니 고구려는 나라를 세운 지 700여 년 만에 드디어 중국 역사발전의 긴 강 속으로 사라지게 된 것이다.

왕씨 고려가 건국한 것은 고씨 고려가 멸망한 때로부터 250년 후인 서기 918년이었다. 왕씨 고려는 서기 935년 한반도에 있던 신라 정권을 대치하였고 그 이듬해에 후백제를 멸망시켜 반도 중남부의 대부분을 통일하였다.

그러다 서기 1392년에 왕씨 고려의 신하인 이성계(李成桂)가 왕을 폐위하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1393년 이성계가 ‘조선과 화녕(和寧) 중에서 어느 것을 국호로 해야 하는가’라는 주청을 올리자, 명나라 왕은 이성계에게 조선 왕을 하사하였다.

그리하여 왕씨 고려는 국호를 조선으로 바꾸게 되었는데 중국 학계에서는 이를 ‘이씨 조선’, 줄여서 ‘이조(李朝)’라고 부른다. 이것이 바로 명(明)·청(淸) 시기의 조선국이었다.

그 다음으로 살펴볼 것은 왕씨 고려와 고씨 고려는 관할 구역 내의 주민 구성이 다르다는 점이다. 고씨 고려 관할지역 내의 주민은 고구려족이 주력이었다.

고구려족의 연원은 중국 상고시대부터 있었던 민족인 예맥족이 동쪽으로 이동해 부여·고이·옥저·소수맥(小水貊: 압록강의 북쪽에 있는 혼강에 고구려를 세운 종족. 주몽을 따라 나라를 세운 종족을 맥족이라고 하는데 그중에서 大水인 압록강 유역의 맥족을 대수맥, 小水인 혼강 쪽의 맥족을 소수맥이라고 한다)·동예(東濊: 동해안 지역에 거주한 고구려족의 일파) 등이 되었는데 그후 위씨조선의 후예와 한족(漢族)·선비(鮮卑: 고대 남만주 몽골 등지에 살았던 유목 민족)족 등이 들어가 융합하였다.

많은 민족으로 구성됐지만 이들은 장기간 공동생활을 하면서 점차 융화돼 하나가 되었다. 역사서(史書)와 학계에서는 이들을 일반적으로 고구려족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왕씨 고려 관할지역 내의 주민은 신라인 위주였다. 왕씨 고려는 신라와 후백제를 병합하였으므로, 신라인과 백제인이 왕씨 고려의 주요 주민이 되었다.

대부분의 신라인은 한반도 남부지역에 있었던 진한과 변한인에 뿌리를 두고 있다. 고씨 고려 멸망 후 비록 일부 고구려인이 신라로 유입되기는 했으나 이들은 신라의 주력을 이루지는 못했다.

백제인은 대다수가 한반도 남부에 있었던 마한인에 뿌리를 두고 있다. 따라서 왕씨 고려는 한반도 남부에 있었던 ‘삼한인(三韓人)’이 중심이 된 나라라고 할 수 있다.

수많은 역사서들은 왕씨 고려인과 중국의 옛 사람들이, ‘왕씨 고려는 삼한의 후예다’라고 기록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수백년간 계속된 왕씨 고려 왕조의 역사 발전 속에서 구성원들은 점차 하나의 민족으로 융합되어가는데, 역사서와 학계에서는 이들을 ‘고려족’으로 부르고 있다. 왕씨 고려가 이씨 조선으로 이어졌으므로 조선은 민족 명칭이 되어 오늘날까지 사용되기에 이르렀다.

왕건은 낙랑군에 있던 漢族의 후예

마지막으로 왕씨 고려는 고씨 고려의 후예가 아니다. 왕씨 고려의 왕족은 고씨 고려의 후예가 아니었다. ‘고려사’를 쓴 사람은 왕건(王建)의 족속에 관해서 “고려의 선조는 역사에서 상세히 설명돼 있지 않다”라고 적었다. 그러나 중국학자가 고증한 바에 의하면 왕건은 서한(西漢) 시절 낙랑군에 있었던 한인(漢人)의 후예일 가능성이 아주 높다고 한다.

그 근거로 왕씨는 낙랑군의 명문 귀족이었고 가호가 많았던 점을 들 수 있다. 왕건은 임종시에 남긴 가르침인 ‘십훈요(서기 943년 고려 태조 왕건이 자손들에게 귀감으로 남긴 열 가지 유훈. ‘훈요십조’라고도 한다)’에서 자신은 고씨 고려의 후예라고 언급하지 않았다. 오히려 왕건은 자신은 평민 출신이며 ‘삼한 산천의 보호에 의지한다’라고 말했다. 그는 마한·진한·변한을 통일한 것이니 후계자들 또한 삼한을 소유하길 바랐던 것이다.

왕건이 고씨 고려의 후예였다면 그는 통치를 위해서라도 그 사실을 대대적으로 선전하였을 것이다. 이것은 아주 상식적인 이치인데 왕건은 그렇게 하지 않았으니 이는 왕씨 고려가 고씨 고려의 후예가 아니라는 좋은 반증이다.

왕씨 고려는 결코 고구려의 계승자가 아니었다. 한대(漢代) 한반도에서 일어난 마한·진한·변한은 신라와 백제로 발전해갔고, 백제는 당나라에 의해 멸망하였으며, 신라는 왕씨 고려가 대신하게 되었다.

그후 이조가 왕씨 고려를 대신해 최종적으로는 이씨 조선으로 발전하였다. 이러한 정권들의 강역(疆域: 영토) 범위는 한 번도 한반도를 벗어난 적이 없었다.

[3 . 고구려와 왕씨 고려의 역사가 혼돈된 원인]

사람들이 왕씨 고려를 고구려의 계승자로 잘못 보게 된 이유는 중국의 역사기록과 깊은 관계가 있다. 반고(班古: 후한 초기의 역사가. 서기 32~92년)가 쓴 ‘한서(漢書)’는 중국 정사(正史) 중의 하나로 고구려의 사적에 대해 제일 처음 기술했다. 진수(陣壽: 중국 西晉의 역사가. 서기 233~297년)가 편찬한 ‘삼국지’는 처음으로 고구려를 ‘전기(傳記)’에 넣은 역사서다. ‘구당서’와 ‘신당서’에 이르기까지 많은 역사서는 ‘동이전’ 혹은 ‘만이전(蠻夷傳)’ 속에 고구려의 전기를 기술하였다.

이 역사서들은 비록 구체적인 사건을 기록하는 데 있어 약간의 실수를 범하고 있지만, 고구려의 역사 위치를 명확히 정해놓고 있다. 그런데 후대에 이르러 사서의 기록이 혼란스러워지면서 명백한 실수가 나오기 시작했다.

왕씨 고려는 서기 918년에 나라를 세우고 1392년 이씨 조선으로 교체되었는데, 이 시기는 중국의 오대(五代) 중기에서 명나라 초기에 해당한다(五代는 五代十國의 약어로 당나라가 멸망한 907년부터 송나라가 통일한 960년 사이의 약 70년간 중국이 여러 나라로 분열되었던 시기다).

따라서 ‘구오대사(舊五代史)’와 ‘신오대사’ ‘송사(宋史)’ ‘요사(遼史)’ ‘금사(金史)’ ‘원사(元史)’ ‘명사(明史)’ 등의 역사서에는 모두 ‘고려전’이나 ‘조선전’이 등장한 반면 고씨 고려에 대한 기록은 그 이전의 역사서에 비해 약술하게 되었다.

‘舊五代史’로부터 시작된 오류

이러한 역사서의 기록을 종합해보면 ‘구오대사’와 ‘신오대사’는 가장 먼저 고씨 고려를 왕씨 고려전에 기록한 책이었다. 그리고 ‘송사’는 “왕건이 고씨의 자리를 계승하였다(王建承高氏之位)”라는 표현을 최초로 사용한 책이다. ‘구오대사’와 ‘신오대사’ 그리고 ‘송사’에 등장하는 이 기록은 그 후에 나온 여러 역사서의 기록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게 되었다.

‘구오대사’의 고려전은 약 240자로 되어 있는데, 여기에는 “당나라 말년 중국에서는 내란이 많았다. 그래서 고려인은 스스로 군장(君長: 왕이나 우두머리)을 세웠는데 이들의 이전 왕(前王)의 성은 고씨였다”라고 적었다. ‘구오대사’는 고려인이 군장을 세웠는데 전왕은 고씨였다고 묘사한 후 바로 왕씨 고려에 대한 기록을 이어갔으니, 왕씨 고려가 고씨 고려를 잇는 것으로 오해될 수 있는 소지를 만들어준 것이다.

‘신오대사’의 고려전은 약 280자로 돼 있는데 그 첫머리에는 “고려는 본래 부여인의 별종(別種)이다. 그 나라와 군주 등에 관한 기록은 ‘당서(唐書)’에 기재되어 있는데, 이들은 다른 이적(夷狄: 오랑캐)과 달리 성씨가 있었고 관직의 호칭을 대략적이나마 알 수 있었다. 당 나라 말년에 (이들은) 왕씨 고려가 되었다”라고 서술한 후 모두 왕씨 고려에 대한 기록을 남겼다(이러니 왕씨 고려는 고씨 고려를 잇는 것으로 오해될 소지가 있다는 의미임).

‘구오대사’는 북송(北宋) 사람인 설거정(薛居正)이 감수하여 북송 초기인 서기 973~974년에 걸쳐 편찬되었다. 이 시기 중국은 반세기 동안이나 분열 국면(5대10국)이 계속되고 있었으며 통일전쟁도 진행되고 있었다. 이런 이유 때문에 ‘구오대사’ 고려전의 기록은 간략해졌을 뿐만 아니라, 잘못 기재된 곳이 많았다. “당나라 말년 중국에서는 내란이 많았다. 그래서 고려인은 스스로 군장을 세웠는데 전왕의 성은 고씨였다”는 기록이 바로 그런 예에 해당한다.

‘구오대사’ 고려전에 나오는 이 기록을 오류로 단정하는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는 조선에서 나온 한문 역사서를 포함한 어떠한 역사서를 찾아봐도 고씨가 당나라 말년에 고려 정권을 세웠다는 기록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둘째로는 송나라 사람인 사마광(司馬光: 중국 북송 때의 정치가이자 사학자. 서기 1019∼1086년)이 ‘자치통감(資治通鑑)을’ 편찬할 때 위에 언급한 글들을 전혀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점이다.

사마광이 이러한 태도를 취했다는 것은 이 기록들이 잘못된 것임을 명백히 보여주는 것이다. ‘구오대사’를 감수한 설거정은 고씨 고려와 왕씨 고려 사이의 관계를 분명히 밝히지 못했는데 이러한 오류는 ‘신오대사’의 저자인 구양수(歐陽脩: 송나라의 정치가이자 문인. 서기 1007∼1072)에 의해 해결되었다.

구양수는 ‘신오대사’를 편찬할 때 많은 소설(小說)과 필기자료를 참고하여 사람과 사건에 대한 묘사를 생동감 있게 집어넣었다. ‘구오대사’ 고려전은 고씨 고려에 관해 간략히 기술하였으며 왕씨 고려의 건국 근원을 밝히고 있다. ‘구오대사’ 고려전에서 ‘당 나라 말년에 중국에서는 내란이 많았다. 그래서 고려인은 스스로 군장을 세웠다”는 단락이 ‘신오대사’ 고려전에서는 “조금 후에 스스로 나라를 세웠다”로 간소화되었다.

그후(‘신오대사’가 나온 이후) 편찬된 ‘신당서’ 고려전과 ‘구당서’ 고려전에는 이러한 기록이 없어지고 오히려 ‘고씨 왕족이 사라졌다’는 말이 들어갔는데, 이는 고려 왕족의 후계가 끊어졌음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宋史’가 잘못 기록

원나라 사람 탈탈(脫脫) 등이 편찬한 ‘송사’는 고려전을 따로 한 권의 책으로 기록해놓고 있다. 여기에는 “고려는 본래 고구려이고 땅은 구주(九州: 중국 전토. 夏의 시조인 禹가 중국을 아홉 개 주로 나누었다는 데서 유래)와 달라 기주(冀州: 중국의 동북지방)의 땅에 속한다. 주나라 때는 기자(箕子)의 국토였고, 한나라 때는 현도군이었다. 고구려인은 요동에서 생활하였는데 대개 부여인의 한 별종이었으며 평양성을 수도로 삼았다. 한나라 이래로 늘 중국에 공물을 바쳤다. 그러나 자주 변경에서 난을 일으켜 수 양제는 두 번 군사를 일으켰고 당 태종도 직접 토벌하러 갔으나 모두 실패하였다. 당 고종은 이적에게 고구려를 정복하도록 명령하니 이적이 드디어 성을 함락시키고 그 땅을 군현(郡縣)으로 나누었다. 당나라 말년 중국에 내란이 많아지자 고려인은 스스로 군장(君長)을 세웠다. 후당(後唐) 동광(同光) 천성(天成) 때 고려 국왕 고씨는 자주 후당 왕에게 공물을 바쳤다. 후당 장흥왕 때 권지국사(權知國事: 아직 왕호를 인정받지 못하는 동안 우선 임시로 국사를 맡아 다스린다는 뜻의 칭호) 왕건이 고려의 왕위를 계승하였고 사신을 중국으로 파견하여 조공을 바쳤다…”는 기록이 있다.

이 내용 다음에는 왕씨 고려가 송 왕조와 교류한 것에 대한 사실이 기록돼 있다.

이러한 내용으로 볼 때 ‘송사’ 고려전은 앞부분에서 ‘신·구오대사’의 기술을 종합하고 이러한 기초 위에 두 역사서의 작자가 명확히 밝히지 않았던 왕씨 고려와 고씨 고려 간의 관계를 “왕건이 고씨 고려왕의 자리를 계승하였다”고 함으로써, 고씨 고려와 왕씨 고려가 계승 관계에 있는 것처럼 기술했다.

‘요사’ ‘금사’도 원나라 사람 탈탈 등이 편찬한 것이기 때문에 이와 유사한 잘못이 발견된다.

그후에 나온 역사서들은 이렇게 잘못된 기술을 답습하였다. ‘명사(明史)’는 이전에 나온 잘못된 역사서보다 한 발 더 나갔다. ‘명사’는 명 왕조가 이성계를 조선의 국왕으로 책봉한 것에 대해 합리적인 해석을 하려다 보니 앞의 몇몇 역사서가 저지른 오류를 답습했을 뿐만 아니라, 이씨 조선 정권의 연혁에 대해서도 아주 잘못된 계통을 세워주었다(‘명사’는 청나라 때 장정옥 등이 칙령을 받아 1679년부터 1735년에 걸쳐 기전체로 편찬한 336권의 역사서).

기자조선~고구려 넘겨준 ‘明史’

즉 ‘명사’는 “기자조선-위씨조선(위만조선)-한사군-고구려-동사복국(東徙復國: 패망한 고구려의 후예들이 동쪽으로 옮겨가 세웠다는 나라. 대체로 발해로 이해되고 있다)-왕씨 고려-이성계가 국호를 바꾸기 전의 고려-이씨 조선”으로의 계통을 세워줌으로써, 중국 역사에 속하는 기자조선과 위씨조선·한사군·고구려를 모두 조선의 역사 속으로 들어가게 하였다.

이렇게 중국 역사서에서 기술에 오류가 발생한 이유는 다방면으로 생각해 볼 수 있는데, 전란으로 문헌이 유실된 데다 왕씨 고려에 대한 오도(誤導)가 가장 중요한 원인으로 볼 수 있겠다. ‘속자치통감장편(續資治通鑑長編)’의 권 323, 송 원풍 5년(서기 1082) 2월 기사(己巳)일에는 이런 내용이 실려 있다.

사관수찬인 증공은 “내가 사서를 고찰해 보니 주몽은 흘승골을 수도로 한 후 국호를 고구려로 정하였다. 고구려의 왕은 고씨를 성으로 삼았다. 당나라 고종 때 고구려 왕인 고장(高藏: 고구려의 마지막 왕으로 보장왕으로 불림. 재위 기간은 642∼668년)은 국가를 잃고 서쪽으로 천도했다. 당나라 성력(서기 698∼699년) 시기에 고장(보장왕)의 아들인 고덕무(高德武)가 스스로 국가를 세웠다(고덕무는 699년 당나라가 만든 안동도호부의 안동도독에 임명되었는데, 그가 小고구려를 세운 시조라는 주장도 있다). 고구려는 원화(元和) 말년까지 악사를 중국에 보내왔으나 그 이후로는 그러한 기록이 중국 역사서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 오대 동광(同光)·천성(天成) 시절 고씨 성을 가진 고려 왕이 와서 다시 조공을 하였으나 그 이름은 알지 못한다. 장흥 3년 권지국사(權知國事)인 왕건이 사신을 파견하여 조공을 하였고 이로 인해 왕건을 왕으로 삼았다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왕위를 왕건의 아들인 왕무(王武: 혜종)를 거쳐 왕무의 아들 왕소(王昭: 광종), 왕소의 아들 왕유(王由: 경종), 왕유의 동생 왕치(王治: 성종), 왕치의 동생 왕송(王誦: 목종), 왕송의 동생 왕순(王詢: 현종) 등으로 이어갔다. (이렇게 왕씨들이 왕위를 이어갔기 때문에) 고구려는 주몽에서 고장까지의 21대에 걸쳐 700년간 고씨 성을 이어간 후 멸망한 나라였음을 고증할 수 있다. 고구려는 국가를 잃은 후 또 하나의 국가(小고구려 등을 말하는 듯)를 세웠다. 하지만 왕의 이름과 순서, 흥망의 본말(本末)과 왕건이 나라를 세웠을 때의 일들은 알 방법이 없다”고 말했다.

그 후 왕씨 고려는 송 왕조에게 왕씨 고려와 고씨 고려를 연결해달라는 하나의 ‘고려세차(高麗世次: 고려 왕의 차례)’를 바친다. 여기서 송나라 사람들은 왕씨 고려와 고씨 고려에 대한 인식이 모호해졌음을 알 수 있게 된다. 왕씨 고려가 바친 고려세차는 한 걸음 나아가 사실을 오도하는 작용을 했다.

‘고려’와 ‘조선’이라는 명칭을 도용

중국 사서들이 명백한 오류를 범함으로써 중국의 고대 변방민족이 사용하던 ‘고려’라는 명칭을 삼한(三韓) 신라의 계승자인 왕씨 정권이 도용하게 되었고, 한 발 더 나아가 왕씨 정권의 계승자인 이조(李朝)는 기자조선이 쓰던 ‘조선(朝鮮)’이라는 이름을 또 도용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현대인들은 중국 고대 동북지역에 있었던 변방정권의 연혁을 이해하는 데 있어 많은 혼란과 잘못된 견해를 갖게 되었다.

연구를 진행하는 데 있어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은 자료이다. 양보륭(楊保隆)은 1987년 제1기 ‘민족연구(民族硏究)’에 게재한 ‘고구려전을 싣고 있는 여러 역사서에 대한 몇 가지 문제 판별 방법(원제 各史高句麗傳的幾個問題辨析)’이라는 제목의 논문에서 매우 유익한 연구를 시도했다. 그러나 앞으로 해나가야 할 연구과제는 많기만 하다.

고구려사에 대한 연구를 정상적인 학술연구 범주에 넣어야 한다는 것이 우리의 일관된 주장이다. 우리는 고구려사 연구에서 발견되는 역사 문제를 ‘현실화하는 것’과, 학술문제를 ‘정치화하려는’ 경향과 작태에 대해 반대한다(고구려를 중국 역사로 분류하려는 중국측의 고구려사 연구에 한국측이 반대한다는 뜻인 듯). 고구려사는 중국 역사는 물론이고 한반도 역사를 연구하는 데 있어 계속해서 깊은 연구를 요구하는 과제이다.

심도 있는 연구를 하는 것은 과학적인 연구결과를 학계에 제공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고구려사를 연구하고 이를 심화하는 것은 학자의 책임이다. 연구한 결과에 대한 차이로 인해 일시적으로는 통일된 결론을 도출할 수 없을지라도, 학술 규범에 부합하는 규칙으로 학술 성과를 교류하고, 상호 존중하는 가운데 학술상의 논쟁을 벌여 서로 다른 의견을 개진할 수 있어야 한다. 이렇게 할 수만 있다면 여러 나라의 학자가 고구려 역사에 대한 연구에 공동의 노력을 기울일 수 있게 될 것이고, 그에 따라 큰 진전이 있으리라 생각한다.

 

 

 

 

 

Posted by 원주유
고구려 역사와 문화2013. 9. 14. 17:38
 
고구려 역사에 대해 쭉 나열해 보려 합니다.
577년 후주의 무제가 고구려를 침략, 평원왕이 배산의 들에서 격전을 펼치는데 온달의 활약으로 대승을 거둔다.
수나라가 막 일어나는 때 온달이 아차산성을 탈환하기 위해 신라군과 전투를 벌이다 전사.
589년, 중원에서 수나라가 진나라를 멸망시키고 통일했다는 소식을 듣고 군대를 양성하며 국력을 강화하다 590년에 승하, 영양왕이 즉위한다. 영양왕은 평원왕 때부터 다져진 기반을 바탕으로 수나라의 4번에 걸친 침입을 막는 대업을 이룬다.

먼저 수나라와 고구려의 씨를 말리는 전쟁은 598년, 고구려의 침입에서부터 시작된다. 먼저 영양왕이 말갈기병 1만을 거느리고 몸소 출정한다. 여기서 고구려 순수 주력군이 나타나지 않는데 아마 직접 전투에 참여한 숫자만 기록한 걸로 보인다. 명색이 한 나라의 군주인데 속국의 병사들만 이끌고 나가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아무튼 고구려의 선제 공격은 수나라 장수 위충의 저항으로 실패한다.

그 해 7월, 수나라 문제는 30만 대군을 보낸다. 그러나 고구려의 1차 방어선인 요하와 대릉하에서 무지하게 개박살난다. 특히 의무려성의 고구려 군의 활약이 컸다. 7월은 장마철이라 강은 범람해 늪지대가 되어 수나라 군대는 꼼짝 못했으나 고구려 군대는 그것을 알았기에 수나라 군대를 마음먹은대로 요리한 것이다. 수나라 수군 역시 몰살 당하기는 마찬가지, 여름에 부는 태풍을 생각지 않고 무작정 나아가다 대동강 근처도 못가고 모조리 몰살당하고 해안가의 고구려 수군이 요격을 하여 무참하게 패한다. 원정군 30만 중에 80~90%가 고구려 본토에 들어가보지도 못하고 국경 지역에서 몰살당한 것이다. 어떤 사가에는 30만이 아니라 100만이라고 적었으며 창피해서 30만으로 줄였다는 기록도 있다.

수나라 문제는 태자 양광의 칼에 맞아 죽고 양광이 즉위하여 양제가 된다. 이 양제 때문에 고구려나 중국이나 엄청난 피를 흘리게 된다.

611년 2월, 수나라 양제는 총동원령을 내렸다. 배 기술자들은 10개월간 300척의 전선을 만드느라 40%가 죽었으며 전국의 군수품 수송 인부만 60만이었다. 정규군대만 113만 3800명이며 30군으로 편성했다. 1군 당 4만명의 보병과 4천의 기병으로 이루어져있으며 6군은 양제가, 12군 씩 우중문과 우문술이 지휘했다. 그뒤로 말 10만필과 공성 무기, 200일치 식량을 나르는 치중부대(보급 부대)와 그 밖의 예비군과 잡병 등 300만이 따랐다. 수군은 누선을 중심으로 10만을 편성하고 한달 분 식량을 실었다. 30군의 대열 960리와 양제의 친위대가 80리의 대열을 이루어 총 1040리나 되는 길에 수나라 군대들이 가득했다. 출정은 611년 12월부터 1월 사이에 이루어졌다.

612년 2월 고구려 1차 방어선인 요하에 도착했다. 그 30만 대군이 몰살했던 곳이었다. 여기에도 고구려군 수만명이 활과 쇠뇌를 들고 자리잡고 있었다. 양제는 공부상서 우문개에게 부교(임시 다리) 3개를 만들게 했다. 그러나 부교가 길이가 짧아 선봉장 3명과 수많은 수군만 죽어나갔다. 부교의 방향을 틀어 수나라 군대가 쪽수로 밀어붙이자 고구려군은 1만명의 전사자를 내고 후퇴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수나라의 피해가 기록되있지 않다는 것이다. 보통 중국의 기록가들은 수만 명의 전사자가 난 패배는 패했다고 기록할 뿐 규모를 기록하지 않고 단지 그 와중에 올린 전과만을 기록한다. 고구려 전사자 1만 명도 그 예일 것이다. 보통 상륙하는 쪽이 불리한 법이며 통상 3배 이상의 피해를 입는다. 선봉장이 3명이나 죽었다는 사실을 보아 최소 3만 명은 전사한 것 같다.

요하에 상륙한 수군은(水가 아니라) 중간의 방어성인 신성, 개모성 등을 무시하고 최대 방어성인 요동성을 둘러싼다. 그러나 요동성은 제일 높은 곳이 40m, 제일 낮은 곳이 20m인 엄청난 성이다. 성에만 양곡이 50만 석이 있었다. 당나라 침입시엔 2만의 기병이 있었다. 아무리 수군이 공격해도 끄덕이 없었다. 오히려 되레 성문을 열고 나와 내쫓길 정도였다. 이리하여 출정 이후로 무려 6개월이란 시간이 흘렀다.

한편 수나라 수군 10만 명중 4만 명이 상륙하여 평양성을 공격한다. 그러나 고건무의 복병계로 4만명 중 고작 10%만이 살아 돌아간다. 나머지 수군들마저 고구려 수군의 일제 공격으로 쫓겨난다. 이 전투로 수나라 수군은 전투 능력을 상실한 부대가 되었다.

6월, 양제는 30군 중에 24군을 9군으로 개편하였다. 우중문과 우문술의 약 80만 군대가 30만 5천 명으로 줄어있었기 떄문이다. 자신은 나머지 6군을 이끌고 소성인 육합성 점령하여 머물고 30만 5천 명의 군대로 우중문과 우문술에게 평양성을 치게 한다. 그리고 이 부대는 압록강 방어선 총 지휘자 을지문덕의 7번 져주기 전략에 말려들어 평양성 앞까지 갔다가 고구려군의 반격으로 싸우면서 청천강까지 밀려난다. 그리고 수군이 도하하는 것을 지켜보던 고구려군은 그들이 반 정도 건너자 일제히 공격한다. 이것이 그 유명한 살수 대첩이다.(7월) 그러나 전투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이들이 압록강에 다다르자 압록강 일대 방어성인 봉황성을 중심으로 한 수십개 성의 고구려군이 몰려나와 이들을 덮쳤다. 수나라 군대는 하루에 450리를 도망쳤다고 한다. 그리고 보병들은 따라가지 못해 죽거나 사로 잡혔다. 양제가 머무는 육합성에 도착한 수군은 2700며이었다. 30만 2300명의 병사가 모두 죽거나 잡힌 것이다. 양제는 지휘관인 우중문을 매를 매우 친 뒤 평민으로 만들고 자신의 장인이자 우문술은 돌아가는 길에 쇠사슬에 묶고 갔으며 그 밑에 부관들은 거의 다 참수했다고 한다. 당시 맞서 싸운 고구려군의 정규군은 22만 명이며 예비군을 포함하면 60만에 이른다는 최치원의 글이 있다. 고구려 전성기 때엔 100만까지 동원할 수 있었다고 한다.

8개월 간의 2차 침임으로 수나라 군이 거둔 전과는 요하 상륙 때 얻은 의무려 성 하나 뿐이다.(1차 침임 때 활약한 성)

양제는 분함을 거두지 못하고 4개월 후인 613년 1월 3차 원정을 준비한다. 그리고 3월 출정을 한다. 규모는 약 30만 명으로 추정된다. 그들은 요동성을 둘러싸고 20일간 쉬지 않고 공격한다. 그러나 군량 담당의 양현감이란 자가 아비를 죽인 양제에게 앙심을 품어 군량을 안 보내주고 자신의 반란군의 식량으로 돌려 반란을 일으킨다. 양제는 급히 군사를 돌렸다. 병기와 식량도 남겨둔채 그대로 도망쳤고 고구려군은 하루 상황을 지켜본 후 항복한 병부시랑 곡사정을 통해 내부사정을 알자 추격하여 수군 수천 명을 몰살한다. 3차 침임의 수군의 피해는 약 2만 명의 전사자였다.

양제는 614년 2월, 동원령을 내려 4차 침입을 준비한다. 그리고 7월 또 침입을 한다. 이번엔 그 규모조차 기록하지 않을 만큼 초라했다고 한다. 그러나 고구려도 3년 간 청야 전술로 인해 곡창지대인 만주지방에서 농사를 제대로 못해서 국력이 많이 피폐했다. 그래서 영양왕은 거짓 항복의 서를 보낸다. 물론 양제 또한 지쳐있었기에 받아들인다. 그런데 양제가 항복의 서를 읽고 있을 때 사신 일행 중 고구려 외부인 하나가 쇠뇌를 쏘아 양제를 맞추고 도망친다. 양제는 비감한 어조로 자책을 하며 뻔히 보이는 거짓항복을 받아들인다. 이미 나라 꼴이 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618년 수양제는 피살당하고 수나라는 망하자 양제의 이종사촌 이연이 즉위하여 당나라를 세웠다. 더불어 그 해 영양왕 역시 승하한다. 4번에 걸친 침략을 막아낸 위대한 왕이었다.


30만 대군을 몰아 고구려를 치게 될 당태종은 원래 태조 이연의 둘째 아들 이세민이며 형제 둘과 조카 열명을 죽이는 이방원 같은 행동을 하여 2대 황제에 오른다. 당나라가 일어나자 고구려에겐 국력을 회복할 시간이 필요했다. 고구려는 먼저 당나라에게 제후국임을 자처하며 당나라의 침략을 막아보고자 했고 당나라 또한 수나라 때 망가진 나라를 돌보느라 정신이 없어 사이좋게 24년간 지내게 된다. 물론 제후국 임을 자처한 것이나 당태종에게 벼슬을 받은 것은 어디까지나 껍데기 같은 연극에 불과했다. 고구려는 629년 신라에게 낭비성을 빼앗겨 어느새 수나라와 전쟁을 하는 사이 빼앗긴 땅이 500리나 되었다. 631년 북방 방어선들을 잇는 천리장성을 쌓기 시작했고 638년 칠중성을 공격하기도 했다.

642년 고구려에 쿠데타가 일어난다. 영류왕이 지나치게 당나라에게 굴욕적인 외교관계를 맺고 강건파인 연개소문을 처치하려하자 연개소문이 쿠데타를 일으킨 것이다. 연씨 집안은 대대로 철을 잘 다루는 명문 귀족이며 그 가문 자체가 궁술, 기마술 등에 뛰어난 집안이었다. 영류왕과 온건파 대신들을 모두 베고 난 연개소문은 보장왕을 즉위시키고 자신은 대막리지가 되어 실권을 쥔다.

643년, 신라에서는 무지하게 백제와 고구려에게 터지고 있었다. 백제가 40여 개 성을 빼앗고 고구려도 연합하여 백제의 뒤를 밀어주고 있었으며 신란의 변경 지역을 쳐서 영토를 되찾고 있었다. 그래서 신라는 당나라에게 구원을 요청해 당태종이 백제와 고구려에게 경고의 글을 보냈다. 백제는 받아들였으나 고구려는 이를 무시했다. 태종이 장엄이란 자를 사신으로 보내자 연개소문은 그를 굴에 가두었다. 그리고 백제와 연합하여 한강의 신라 영토인 당항성을 공격한다. 신라는 당에 구원을 요청하고 태종은 고구려 정벌을 하게된다.

645년 2월 당군은 북경에서 출정을 한다. 당군은 총 병력을 10만이라고 하나 실제론 30만 이상 이었다고 한다. 삼국사기에는 10만이라 적혀있으나 제대로 된 사가에는 30만이라 기록되있다. 우리나라 역사를 엉망으로 기록한 사대주의자 김부식이 중국놈들이 죄다 왜곡한 기록들을 그대로 베껴왔기 떄문이다. 수군은 4만 3천이며 육군은 최소 20만은 넘을 것이다. 왜냐하면 당태종이 원정 전에 말하기를 수나라 떄와는 비교 안되는 규모로 쳐들어간다고 얘기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번에도 패하기에 그렇게 줄여 기록한 것이다. 실제로 당나라와 수나라의 전투를 기록한 자치통감이나 당서는 당나라 군대가 패배한 것은 대충 적거나 치열한 전투였다고 하고 고구려군의 작은 패전은 세세히 기록하면서 자신들의 군대는 축소하고 고구려군 전사자는 몇 배를 불려 적어 마치 적은 수로 다수를 이긴 듯이 기록했다. 그 예로 다음 전투를 보면 알 수 있다.

645년 4월, 당군은 신성에 이르렀다. 이도종이 이끄는 당군은 신성의 고구려군에게 싸움을 걸었으나 무시 당한다. 그러나 시기를 알 수 없지만 엄청난 전투가 이루어진다. 자치통감에는 3대전 중 안시성 전투와 함께 신성전투를 기록하고 있는데 시기조차 안 적고 피해규모는 고구려 군만 자세히 적어 놓고 양 쪽의 사상자가 많이 있었으나 신성을 점령하지 못했다고 한다. 이것을 보면 엄청난 패배를 당한 것으로 보인다. 신성은 고구려 초기부터 북방 민족의 침략을 지켜온 성이기 때문이다.

또 하나 당군이 건안성에 이르러 고구려군과 싸워 고구려군 수천이 전사했고 장검군도 커다란 손실을 입었다고 했는데 여기서 봐도 당군의 피해는 어물어물 넘긴 것이 빤히 보인다.

아무튼 당군은 건안성과 신성 점령에 실패하자 개모성을 공격하여 인구 2만명과 양곡 10만 석을 얻는다. 한편 당나라 수군은 천혜의 요새 비사성을 한 달간 공격해 간신히 점령한다. 이 병력 중 일부는 건안성으로 공격해 건안성은 장검군에 이어 또 한 번의 전투를 치르나 막아낸다.

한편 당태종의 선봉대는 요동성에서 무참한 패배를 당한다. 장군예가 이끄는 당군은 국내성과 신성의 구원병인 4만의 기병에게 무참히 깨져 장군예는 목숨만 건져 돌아간다. 여기서도 양 쪽에서 많은 희생자를 냈다고 하나 우습게도 자치통감엔 승리한 전투는 자세히 적고 패배한 전투는 양쪽 모두 많은 손실을 입었다고만 기록했기 때문에 당군은 참패였을 것이다. 당태종의 본대가 도착하자 장군예는 패배를 이유로 참수당하고 당태종은 포차와 충차를 동원하고 화계로 성안에 불을 질러 19일만에 난공불락 요동성이 함락당한다. 요동성을 지키던 병사 1만명이 전사하고 군사 1만과 주민 4만이 포로로 잡히고 양곡 50만 섬이 포획된다. 백암성 성주 손대음은 고구려 장수 중 처음으로 싸우지 않고 항복한다. 연개소문은 구원군으로 북부욕살 (고구려는 5부를 나뉘어 통치했는데 욕살이 부의 책임자다) 고연수와 남부 욕살 고혜진이 15만을 안시성에 보낸다. 전국의 2/5의 병력이 온 것이다.

그러나 전투 경험이 없는 왕족 고연수는 태종의 계략으로 패배한다. 이 전투를 신성 전투와 더불어 3대전 중 하나로 꼽힌다. 물론 나머지 하나는 안시성 전투이다. 그러나 15만은 과장된 숫자이다. 그당시 건안성과 안시성 사이에만도 10만 대군이 온전하게 보존되어있기 때문이다.

645년 8월, 안시성을 둘러싼 전투가 벌어진다. 안시성 군민은 양만춘 장군의 지휘 하에 잘 지켜냈다. 성벽이 포차에 의해 무너지면 목책을 쌓고 당군이 흙산을 쌓았는데 그것이 무너져 안시성을 덮치자 혼란에 빠진 군대를 통솔해 흙산을 점령하였다. 게다가 태종은 고구려 군 화살에 눈을 맞았다. 물론 당나라 역사책엔 이 사실을 거의 다 은폐한다. 9월, 당나라 군대는 패주한다. 패주 원인은 식량이 다 되고 추위가 닥쳐서라지만 실제론 핑계거리가 안된다. 왜냐하면 9월은 늦가을이기 떄문이며 겨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추위가 어디 당군에게만 닥쳤을까? 실제론 연개소문이 보낸 승병 3만에게 패했다고 한다. 이 승병은 불교의 중이 아니라 조의선인이란 고구려 무인 집단을 말한다. 단순히 선덕여왕이 미소년들을 모아 만든 화랑하곤 차원이 다르다. 화랑에선 동성애가 있을 정도였으며 김유신의 경우 출세를 위해 여동생을 임신시켜 시집보내는 비도덕적 행위까지 벌인다. 이것이 후대에 좋게 꾸며졌을 뿐이지 김유신은 출세를 위해 여동생을 팔아먹은 비열한 자이다. (조의선인은 검색하면 자세히 나옵니다. 이것을 따로 덧붙이면 될겁니다.) 게다가 당태종이 양만춘에게 비단 백필과 활과 옷을 보냈다는 것 또한 모두 역사의 왜곡이자 당나라 역사가들의 헛소리이며 당태종은 패하여 군막도 제대로 못 거두고 추격을 피하기 위해 늪지대로 도망쳐갔다. 그 와중에 선물을 한다면 그 자는 미친 자일 것이다. 그리고 양만춘은 성문을 열고 추격을 했다. 이리하여 고구려는 당의 침임을 막게되고 태종은 4년 후 화살의 상처가 도져 죽는다. 물론 당나라 각 역사서엔 이를 은폐하기 위해 신당서에선 감기, 자치통감은 이질, 구당서엔 등창으로 죽었다고
되있다. 한 황제의 죽음에 이렇게 기록이 다를 리가 없다. 그래서 신채호 선생님이 직접 현지에 가서 조사한 결과 아직도 독화살로 죽은 당태종의 이야기가 남아있으며 중국인에게 4대 황제 중 하나로 칭송받는 당태종의 업적에 금이 갈까봐 그렇게 은폐한 것이라고 한다.

번외 이것은 정식 역사서로 인정 받지 못하는 한단고기의 기록이지만 연개소문은 당태종이 패한 후 기병을 동원하여 북경까지 땅을 빼앗았고 고려성을 세웠다고 한다. 놀랍게도 역사 스페셜에서 그 증거를 찾아내었다. 북경 주변에 고려성곽의 일부, 고구려 식 지명과 그 유래 등등,, 그러나,.. 이 사실을 인정하게 되면 우리나라 사학자들 모두가 논문 폐기하고 사퇴서 쓰고 학자 때려쳐야 하기 떄문에 필사적으로 한다고기를 인정하지 않는다


멸망 당시 시대 상황..

백제는 신라 진흥왕 때의 배신으로 사이가 엄청 안 좋았습니다. 게다가 신라는 진흥왕 때의 넓은 영토를 한강 유역 제외하고 다 빼앗겼습니다. 비록 신라가 진흥왕 때 강성했지만 아무래도 백제가 곡창지대인 호남지방을 차지하고 있었기에 신라가 절대적으로 불리했고 흔히 말하는 의자왕의 '40여개의 성을 빼앗는 업적'도 이루어지지요. 대야성을 비롯한 40여성을 빼앗겼다는 것은 신라 영토의 절반 정도를 빼앗긴 겁니다. 고구려조차 그 광활한 영토을 지키는 성이 170여개였습니다. 백제는 100여개였구요. 김유신이 다시 수복하긴 합니다만 다시 백제와 고구려와 연합해 33개의 성을 빼았습니다.

게다가 백제 무왕 때부터 의자왕까지 막강한 국력으로 신라를 끊임없이 공격했기에 신라는 지칠대로 지쳐있었습니다. 고구려가 수나라랑 싸울 때 야금야금 차지한 죽령 이북의 땅도 전쟁이 끝나자 연개소문이 남부 병력을 총동원해 수복하고 있었지요. 김유신 위인전을 보면 신라가 막아낸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론 쥐어터지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백제와 함께 한강유역을 공격해 제일 약한 신라를 짓밟고 있었지요. 오죽하면 당나라에 김춘추를 보내 구원을 요청합니까? 적어도 자력으로 지킬 수 있었다면 비굴하게 다른 민족에게 구원을 청하겠습니까?


고구려 멸망,,

고구려는 아시다시피 연개소문의 죽음과 함께 약 70여년 간의 전쟁(그중 27년은 전쟁이 아닌 긴장 상태) 끝에 피폐해진 국력으로 인해 멸망합니다. 당태종이 30만 대군 이끌고 갔다가 왕창 깨진 이후로 그의 아들 고종은 총력전이 아닌 유격전으로 끊임없이 고구려를 공격합니다. 무려 20년간이나 되었죠. 고구려의 입장에선 농사를 제대로 못짓게 되어 식량 감소와 함께 인구 감소, 결국 군대와 보급까지 줄게됩니다. 661년 4월에 당 고종이 30만 대군으로 압록강 유역을 공격합니다. 요동지방은 워낙 방비가 두터워서 무시하고 들어가죠. 연개소문은 남생에게 막게합니다. 압록강에서 고구려군 3만이 전사합니다. 그러나 당군은 그 배로 전사합니다. 물론 당나라 역사가들은 적군보다 피해를 더 입은 전투는 패했다고만 기록했기 때문에 자세한 수치를 적지 않습니다.

연개소문이 죽자 맏이 연남생과 나머지 두 아우 연남건, 연남산은 연씨 가문을 견제하는 세력들의 이간으로 분열됩니다. 연남생은 국내성으로 도망칩니다. 국내성은 평양계 귀족들에게 좌천된 귀족들이 모여 있어서 연남생을 뒤엎어 권력을 탈취하려는 속셈으로 받아들이죠. 연남생은 어리석은 아들 연헌성의 조언으로 당에 협조하겠다는 문서를 보냅니다.

667년 당 고종은 그 말을 믿고 설필하력이 이끄는 당군이 신성을 공격합니다. 신성은 요동지방 최전선에 있는 성이지만 수나라나 당나라가 한번도 점령해보지 못한 난공불락 성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번엔 고구려 장수 사부구란 자가 성주를 묶어놓고 항복을 합니다. 결국 뒤늦게 도착한 고구려 구원군도 격파당하고 목저성, 남소성, 창암성 등도 줄줄이 격파당합니다. 이 전투들로 인해 고구려군 5만이 전사합니다. 한편 당나라 수군은 패하고 육군의 진격은 안시성 고구려군 3만이 요격을 하여 막아냅니다. 이로 인해 요동 일대 방어성은 거의 함락되었습니다. 게다가 국내성의 연남생이 그 주변 성과 함께 당에 항복합니다. 고구려 영토는 압록강과 만주 일대로 줄어듭니.

그 다음해 668년 당나라의 4차 원정이 시작되어 30만의 당군이 만주 동북부의 부여성을 공격합니다. 연남건이 군사 5만을 보냈지만 5천 명이 전사하고 패합니다. 또 대행성이 함락당해 주민 3만이 사로잡힙니다.
한편 신라군은 항복한 백제부흥군을 포함해 전국의 병사들을 긁어모아 20만 대군을 이끌고 평양성 남쪽으로 진격합니다. 당군 역시 30만 대군을 이끌고 평양 북쪽으로 진격합니다. 고구려는 이미 저항의 구심점을 잃었고 총 책임자였던 연남생의 회유로 항복하던가 중립을 지킵니다. 3차 정벌 때만 해도 고구려군은 20만에 가까웠지만 4차 정벌 후론 고구려 군의 저항이 거의 사라집니다.

평양성은 고구려의 도성이어서 워낙 견고해 한달이 넘도록 공격당해도 꿈쩍하지 않습니다. 연남생은 자신과 친분이 있는 수비대장 신성에게 출세를 보장하고 호응하게 하여 평양성은 함락되고 고구려는 멸망합니다.

고구려 멸망 원인은 위해서 말했듯이 50년 간의 전쟁과 27년 간의 긴장상태로 인한 국력 피폐, 너무나 오래된 침략 끝에 고구려 군과 민중들의 방어 의지 상실, 지도층과 귀족들의 내부 분열 등입니다. 사실 고구려를 멸망시키기 위해 당나라 국력의 반 이상을 소비해 양쯔강, 하북, 산둥반도 일대가 피폐화 되었습니다. 고구려의 연개소문이 10년만 더 살았다면 당이 먼저 자멸했겠죠.


고구려 최대 영토

고구려의 영토는 우리가 교과서에서 보는 영토보다 훨씬 넓습니다.

먼저 세계지도를 펼치시구요.

먼저 몽골 남쪽에 표시해두세요. 그리고 고비 사막 서쪽에 알타이 산맥 보이십니까? 여기서 밑으로 내려가면 신강성이 위구르족의 거주지인데요. 여기까지가 고구려 영토이었습니다. 비정식 역사서인 한단고기에는 광개토대제가 티벳까지 정벌했다지만 이건 좀 오버인 것 같구,, 하지만 위구르 지방까지 간 것은 맞는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카스피해와 인더스 강 사이에 있는 사마르칸트의 벽화에 고구려 사신이 무슨 수로 등장하겠습니까? 사마르칸트는 우리나라에서 비행기로 꼬박 10시간 이상가야 합니다.

그리고 중국 땅을 보시면,, 북경이 보이시죠? 여기도 역시 고구려 땅이었습니다.

북경은 유주 지방인데 역사 스페셜에서 유주 지방의 고분 벽화에서 지사가 고구려 인이었으며 고분 역시 고구려 식입니다.
또 연개소문이 당태종을 격퇴하고 나서 북경까지 침입했는데 당시 고려성이라는 성곽터가 있고 고구려식 지명이 남아 있습니다. 게다가 5대 왕인 모본왕 때 한의 수도인 낙양 위의 하북 지방을 점령했었습니다.

우리나라 사대주의 사학자들이 고구려 영토를 그렇게 작게 한 이유는 고구려에 복속된 이민족들의 땅을 더하지 않고 순수 고구려만 넣었기 때문입니다. 선비, 흉노, 거란, 돌궐, 몽골, 말갈 등 중원에서 한 때 호령했던 이민족들이 사실 고구려 속국이거나 조공을 바치는 이민족이었습니다. 전쟁이 터지면 항상 고구려는 이들 기병을 동원해 고구려 개마기병을 지원하게 했습니다. 게다가 연주 지방도 고구려 땅이었습니다. 연주 지방은 하북 지역을 뜻하고 황하 이북이 기준입니다. 고구려 최대 영토를 보면 엄청 작게 보입니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부여 땅도 빠져있습니다. 부여는 고구려가 초기부터 점령한 땅입니다. 선비족은 바로 하북 지역 북쪽에 있는 민족이며 이들 또한 고구려와 피터지게 싸우다 결국 복속됩니다. 즉 만리장성 북쪽 땅도 모두 고구려 땅입니다. 거란의 경우 말갈과 오랜 세월에 걸쳐 함께 복속되었으며 광개토 대제가 이들을 동원해 연주 지방을 점령합니다. 즉 하북 지역도 고구려 땅에 들어갑니다. 돌궐의 경우 고구려에게 조공을 바쳤습니다. 이 역시 고구려의 세력권이었다고 보는게 옳습니다. 그래야 고구려가 서역 지방에 사신을 보냈다는 것이 맞으니까요. 수나라가 통일하고 나서 돌궐이 빠져나가고 당이 일어나자 거란도 당에 속하게 됩니다.

정리하자면 고구려의 대륙에서의 영토는 만리장성 이북 전부와 이남 일부, 황하 위의 지역 전체, 산둥 지방 영토 등입니다.

Posted by 원주유
고구려 역사와 문화2013. 9. 14. 16:22

 

 

삼국통일의 기반을 다진 북한산성 전투 

역사는 가정이 없다. 역사적 사실만이 있을 뿐이다. 그런데도 대다수 국민들이 원하는 역사의 가정이 있다. 그것은 바로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지 않고 고구려가 삼국을 통일했으면 하는 것이다. 고구려가 삼국을 통일했으면 저 드넓은 만주가 우리의 영토일뿐만 아니라 강력한 국력을 갖춘 고구려로 인해 우리의 역사는 강대한 역사로 자리매김했을 것이란 것이다. 하지만 역사는 정말 가정이 없다. 그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661년 고구려의 뇌음신(惱音信) 장군이 신라의 영토였던 북한산성을 함락시켰다면 우리 역사는 어떻게 바뀌었을까? 한번 역사의 현장으로 들어가 보자.

 

660년 황산벌에서 계백과 5천결사대의 거룩한 투쟁은 흔적 없이 사라지고 백제는 나당연합군에 항복하고 말았다. 하지만 만주를 누비던 부여족의 후예인 백제는 자신의 나라를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일본에 가있던 부여풍이 백제로 돌아와 부흥운동을 주도하면서 신라는 한강 위쪽의 고구려군을 대비하면서 백제의 부흥세력들과 새로운 전쟁을 치뤄야 했다.
이 시기 고구려는 새로운 구상을 하고 있었다. 고구려의 집권자인 연개소문은 신라와 당나라를 두려워하는 존재가 아니었다. 그는 이미 세계 최강의 제국인 당나라와 수많은 전투에서 패배를 알지 못했던 인물이었다. 645년 당 태종이 친히 대군을 이끌고 침입했을 때 직접 고구려군을 지휘해 개모성·요동성·백암성에서 적에게 큰 타격을 가하고 마침내 안시성 혈전에서 88일 동안의 공방전 끝에 당군을 격퇴했기 때문이다. 그는 이후에도 4차례나 당나라 침입을 받았으나 이를 모두 막아내며 당나라로 하여금 고구려의 두려움을 알게 해줬다.

 

하지만 고구려는 당나라와 15년 동안의 전투로 엄청난 국력의 손실이 있었고 더구나 나당연합군에 의해 백제가 멸망당하기에 이르렀으니 긴장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따라서 연개소문은 고구려를 삼키고자 다가오는 신라를 아예 선공하는 게 효과적이라고 판단했다. 더구나 백제 지역에서 왕자 부여풍과 흑지상지가 이끄는 백제부흥군이 신라를 괴롭히고 있어 한강 유역을 공격하기에는 최적의 기회였다. 연개소문은 당나라와의 처절한 투쟁을 승리로 이끈 주역의 한사람이자 말갈족으로부터 신임이 두터웠던 뇌음신을 사령관으로 임명하고 고구려군과 말갈군과의 연합군을 편성했다. 뇌음신은 연개소문이 정변을 일으킬 때 군사 500여명을 거느리고 그를 도왔으며 훗날 고구려와 당나라와의 전쟁이 시작됐을 때 현토성주로 당군을 패배시켰던 고구려의 영웅이었다. 한편 말갈족은 이미 연개소문 위용에 눌려 그 용맹스러움을 고구려군과 함께 하고 있었다. 훗날 말갈족이 고구려 후예 대조영과 함께 당나라와 투쟁, 진국(辰國:훗날 발해)을 건설한 건 이때부터 형제의 맹약이 있었기 때문이다.
661년 연개소문의 명을 받은 뇌음신은 말갈의 장군 생해(生偕)와 연합, 신라 술천성을 공격했다. 술천성은 지금의 경기도 여주땅으로 한강 일대에서 가장 중요한 거점이었다. 여주를 장악하면 한강을 타고 두물머리(양수리)로 올라가 북한강와 남한강을 모두 이용해 신라 영토 모두를 공격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남한강을 굽이 바라보고 있는 파사산성은 함락당할 곳이 아니었다. 지형상의 불리함을 극복하지 못한 뇌음신은 전략적 후퇴를 단행하고 신라군의 주력 부대가 있는 북한산성으로 말발굽을 돌렸다. 이것이 차라리 고구려다운 방식이었다. 아예 최강의 군사들끼리 맞붙어 멋지게 자웅을 가려보자는 것이었다.
당시 북한산성 성주는 동타천으로 대사(大舍) 지위에 있는 장군이었다. 동타천에 대한 상세한 기록이 ‘삼국사기’에 나타나진 않지만 신라 국경 최대 전략적 요충지인 북한산성을 지휘하고 있던 것으로 미뤄 뛰어난 무공과 지략을 지닌 인물이었을 것이다.

 

동타천은 성곽 바깥으로 철질려(마름쇠)를 깔아 사람과 말 등이 다니지 못하게 했다. 고구려군이 성곽 근처로 다가오는 것을 차단하기 위해서였다. 이 작전은 성공해 고구려군의 접근을 차단했다. 하지만 뇌음신은 새로운 공격기법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바로 포차(抛車)를 이용하는 것이었다. 영화에서 나오는 것처럼 성곽 바깥에 포차를 설치, 거대한 돌을 산성 안으로 쏘아 보냈다. 고구려군의 20여일 동안의 거친 공세로 드디어 신라군은 더 이상 버틸 힘이 없었다. 고구려군은 고구려군대로, 신라군은 신라군대로 자신의 조국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 우리 역사상 가장 멋진 전투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전쟁의 승패는 전혀 뜻하지 않은 곳에서 발생했다. 고구려군이 승리로 끝날듯한 전투였지만 승리의 여신은 끝내 고구려군을 외면했다. 전투 막바지 별안간 큰 별이 고구려군 진영에 떨어지고 번개와 벼락 등이 치며 큰 비를 퍼붓는 돌발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이 한순간 고구려군과 신라군의 사기는 뒤바뀌고 하늘의 뜻이 고구려에 있지 않고 신라에 있음을 깨달은 뇌음신은 철군을 결정했다. 만약 마지막 순간 벼락과 천둥 등이 치지 않았다면 어찌 됐을까? 만약 그렇게 됐다면 아마도 북한산성 전투는 고구려군의 승리로 끝나고 한강 유역을 다시 차지한 고구려군은 오히려 신라를 제압하고 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하늘은 신라를 택했고 실제 역사 역시 신라군의 승리로 끝나고 말았다. 661년 북한산성 전투는 바로 신라의 삼국통일을 하늘이 선택한 역사의 사변이었고 그것이 바로 가정이 아닌 역사의 현실이다.

 

고구려 명장 강이식장군

고구려 명장.세계 전쟁사에 유례없는 전승기록이 있다. 6세기 세계 최강대국 중국이 16년에 걸쳐 4차례나 침략전쟁을 일으켰으나 고구려는 이를 모두 물리치고 대승을 거두었다. 고구려 병마원수 강이식(姜以式) 장군. 그는 일명 임유관 대첩으로 불리는 수나라의 1차 침략전쟁에서 30만 대군을 5만 정예부대로서 궤멸, 서전을 장식하며 고구려인의 기개와 용맹을 만천하에 떨쳤다.

그동안 강이식 장군은 잘 알려지지 않았었다. 중국의 왜곡된 역사관과 고구려사를 다룬 삼국사기의 저자 김부식의 사대주의로 인해 역사에서 누락되었기 때문이다. 근세에 들어와 일부 문헌을 비롯하여 그를 시조로 모신 진주 강씨 문중 족보 기록과 중국 현지 유적 등을 토대로 강이식 장군에 대한 실증 작업이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다.

진주강씨(晉州姜氏)의 족보에 그 시조로 알려진 인물이지만『삼국사기』와『구당서』등 국내외 정사(正史)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 597년(영양왕 8) 수(隋)나라가 중국 대륙을 통일하고 고구려를 신속시키고자 무례한 국서(國書)를 보내오자 강이식은 “이러한 오만무례한 국서는 붓으로 답할 것이 아니라 칼로 대답해야 한다”면서 주전론을 제창하였다. 이후 고구려 조정 여론이 주전론 쪽으로 가닥을 잡자 수 문제가 고구려를 본격적으로 침공함에 따라 여·수전쟁(麗隋戰爭)이 발발하였다. 이때 강이식은 고구려의 최고 사령관인 병마원수(兵馬元帥)를 맡아 정병 5만을 이끌고 이 전투에 참가하였다.

 

이듬해(598) 대병력을 이끌고 요서(遼西)로 나아가 요서총관(遼西總管) 위충(韋沖)과 접전하다가 임유관(臨硝關: 현 산해관의 남서 지역)으로 거짓 후퇴하였다. 이에 수나라의 문제(文帝)는 30만 대군을 들어 한왕(漢王) 양량(楊諒)을 행군대총관(行軍大總管)으로 삼아 임유관으로 보내고, 주나후(周羅?)를 수군총관(水軍總管)으로 삼아 바다로 출행시키면서 평양으로 출전한다고 선언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계략은 양선(糧船)을 이끌고 요해(遼海)로 들어와 양량의 수나라 대군에게 군량을 공급해주려는 속임수 전략이었다. 병마원수인 강이식은 이를 간파하고 수군으로 바다에 나아가 주나후의 군량선을 격파하였다. 이어 군중(軍中)에 벽루(壁壘)를 지키라고 명하여 출행하지 않으니 수나라 군사들은 양식이 점차 떨어지고, 그때가 마침 6월 장마철이라 기아·질병으로 인하여 수군의 사기는 극도로 저하되었다. 이 때를 기회로 강이식은 총공격을 가하여 수나라 군사들을 거의 섬멸하고, 군자(軍資)·기기(器機) 등을 노획하는 큰 전과를 올렸다.

강이식이 진두지휘한 임유관전투의 대승리로 인하여 수나라 문제 정권은 몰락하였으며, 고구려가 요동 지방을 안전하게 확보한 채 대수전쟁을 준비할 수 있게 되었다.

강이식의 묘는 심양현(潘陽縣) 원수림(元帥林: 현 만주 봉길현 원림역 앞)에 있다. 경상남도 진주시 상봉서동 봉산사(鳳山祠)에서는 해마다 음력 3월 10일에 그를 제향하고 있다. 신채호(申采浩)의『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에 강이식 장군의 활동 모습이 실려 있는데, 지금은 전하지 않는『서곽잡록(西郭雜錄)』과『대동운해(大東韻海)』에 실린 것을 인용하였다.

 

세계 최강 당나라를 패배시킨 고구려 장군 양만춘(楊萬春.?∼?)

생몰년 미상. 고구려시대의 명장. 보장왕 때의 안시성(安市城) 성주이다. 그의 이름은 역사서에는 보이지 않고 ‘안시성 성주’로만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송준길(宋浚吉)의 동춘당선생별집(同春堂先生別集)과 박지원(朴趾源)의 열하일기(熱河日記)에 의하면 양만춘(梁萬春) 또는 양만춘(楊萬春)으로 밝혀졌다.

그는 지금의 만주 요령성(遼寧省) 해성(海城)의 동남쪽에 위치한 영성자산성(英城子山城)으로 추정되는 안시성의 성주였다. 안시성은 지리적으로 험한 곳에 자리 잡은 전략적 요충지일 뿐 아니라 군사들 또한 정예한 것으로 정평이 나 있었다. 그는 연개소문(淵蓋蘇文)이 정변으로 정권을 장악했을 때, 집권자인 연개소문에게 복종하지 않았다. 이에 연개소문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안시성을 공격했으나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이에 따라 연개소문은 결국 안시성 성주의 직책을 그대로 맡겼다. 이는 그가 용기와 소신 있는 인물이었음을 시사해 준다.

645년(보장왕 4) 당나라 태종은 대군을 동원해 고구려를 침공하였다. 당나라 군대의 주력부대의 침공으로 요동지역에 있던 개모성(蓋牟城: 撫順 부근)과 비사성(卑沙城: 大連灣 北岸)이 함락되었다. 이어 당나라 태종의 지휘로 요동성(遼東城: 遼陽)과 백암성(白巖城: 遼陽 동남)도 당나라 군대에 함락되었다. 당나라 군대는 다음 공격목표를 놓고 수뇌부 사이에 이견이 있었으나, 이세적(李世勣)의 건의로 안시성 공격을 시도하였다. 이 때 고구려는 당나라 군대에 포위된 안시성을 지키기 위해 15만 병력을 출동시켰으나 안시성 근처 8리 지점에서 대패하고 말았다.

 

고립무원의 상황에 처한 안시성에서 그를 비롯한 병사와 주민들은 하나로 뭉쳐 완강히 저항하였다. 안시성 공격이 여의치 않자 당나라 군대는 공격목표를 그보다 훨씬 동남쪽에 있는 오골성(烏骨城: 만주 鳳凰 남쪽의 高麗山城)으로 변경하고자 논의하였다. 그러나 안시성을 계속 공격하기로 의견이 모아져 치열한 공방전이 전개되었다. 당나라 군대는 연인원 50만 명이 동원되어 60여 일 동안 높은 흙산을 쌓아, 이를 발판으로 성을 공격하였다. 당시 당나라군대는 하루에 6, 7회의 공격을 가하고 마지막 3일 동안은 전력을 다해 총 공세를 펼쳤으나 끝내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마침 9월에 접어들어 요동의 날씨가 추워지기 시작했고, 군량 또한 다하자 당나라 태종은 포위를 풀고 철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때 그는 성루에 올라 송별의 예(禮)를 표하고, 당나라 태종은 그의 용전을 높이 평가해 비단 100필을 주면서 왕에 대한 충성을 격려하였다.세계 최강이라고 알려진 당태종의 군사를 결정적으로 패배시킨 안시성 전투는 고구려인의 기상과 자존심을 보여준 생생한 사건이었다.

고려 후기의 학자인 이색(李穡)의 정관음(貞觀吟)이라는 시와 이곡(李穀)의 가정집(稼亭集)에 의하면 당나라 태종이 눈에 화살을 맞아 부상을 입고 회군했다고 한다. 고구려 멸망 뒤 당나라에 반대해 끝까지 저항한 11성(城) 가운데 안시성이 포함된 것으로 보아, 그의 생존여부는 알 수 없지만, 그의 기백과 용기가 고구려 부흥운동으로 계승되었음을 알 수 있다.

 

 

 

 

 

 

 

 

 

 

 

 

 

 

 

 

 

 

 

 

 

 

 

Posted by 원주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