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역사와 문화2013. 9. 14. 18:20

 

광개토대왕과 인연을 맺은 사람들

 

고국양왕 광개토대왕의 아버지. 광개토대왕이 능력을 발휘할 수있도록 터전을 닦아 주었다.
장수왕 광개토대왕의 아들. 아버지를 이어 고구려를 동아시아의 최강국으로 발전시켰다.
내물마립간 신라의 왕. 광개토대왕의 도움을 받아 신라 땅에 쳐들어온 가야와 왜의 연합 세력을 물리쳤다.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

고구려의 두 번째 수도인 국내성이 있는 중국의 집안시에 가면, 하늘높이 우뚝 솟은 비석이 하나 있어요. 높이가 6.39미터, 무게가 37톤이니 엄청나게 큰 비석이지요. 이 비석의 주인공은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이에요. 무슨 이름이 이리도 기냐고요? 고구려 사람들이 이 분을 존경하여 붙여 준 이름이니, 길다고 너무 불평하지는 마세요. 좀 짧은 이름은 없냐고요? 물론 있지요. 광개토대왕이에요.

처음부터 광개토대왕이라고 하지, 왜 읽기도 힘든 긴 이름을 말해 줬냐고요? 광개토대왕이 죽은 이후에 고구려 사람들이 붙여 준 정식 이름이니, 알고는 있어야죠. 이 이름을 우리말로 풀이해 보면, ‘나라 언덕 위의 무덤 안에 계신 넓은 영토를 개척하시고 나라를 평안하게 만드셨던 우리가 좋아했던 위대한 임금님’이라고 할 수 있어요. 그러고 보니, 이름 속에 광개토대왕의 업적이 다 들어 있네요.

서로 북으로 영토를 넓히는 광개토대왕

광개토대왕의 어릴 적 이름은 담덕이었어요. 그는 어릴 때부터 체격이 크고 위엄이 있었대요. 그래서 아버지인 고국양왕은 아들을 무척 총애하였으며

, 담덕이 열세 살이 되었을 때 태자로 삼아 일찍부터 제왕의 길을 걷게 했어요. 그런 그가 왕위에 오른 것은 18세 때로, 아버지의 뒤를 이어 고구려의 19대 임금으로 등극하였어요.

광개토대왕이 임금으로 재위할 때, 고구려는 요동 지역 전체를 장악하며 동아시아 최강국이 되었어요. 그는 왕위에 오른 다음해인 392년에 4만의 군사를 이끌고 백제의 북쪽 지역을 공격하여 한강 유역까지 영토를 확장했어요. 이때 백제의 왕은 진사왕이었는데, 그는 광개토대왕이 병법에 능하다는 소문을 듣고 오금이 저려 미처 싸울 생각도 못 하고 멍하니 앉아 있다가 10여개 성을 고스란히 빼앗기고 말았대요.

광개토대왕은 395년에는 북방에 있는 거란을, 398년에는 숙신을 복속시켰으며,

402년에는 후연을, 410년에는 동부여를 공격하여 요동 지역 전체를 고구려 땅으로 만들었어요.

이처럼 광개토대왕은 남북 어디든 가는 곳마다 승리를 거두어, 일생 동안 64개 성, 1,400여 마을을 차지하여 막강 고구려 제국을 건설했어요.

한편, 400년에는 신라의 도움 요청으로 신라 땅에 쳐들어온 가야와 왜의 연합군을 물리쳐 줬어요.

신라 왕인 내물마립간은 가야와 왜의 연합군이 쳐들어오자 광개토대왕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이를 받아들인 광개토대왕은 보병과 기병 5만을 보내 왜와 가야 군사들을 물리쳐 줬어요. 경주에 있는 신라의 왕릉급 무덤인 호우총에서 제사에 사용된 그릇이 하나 출토되었는데, 그릇 밑면에 광개토대왕의 이름이 새겨져 있어서 고구려와 신라가 광개토대왕 집권 시절에 친밀했다는 것을 증명해 주고 있어요.

백성들을 편히 살게 해 준 광개토대왕

광개토대왕이 싸움만 잘한 임금은 아니에요. 광개토대왕릉비에 다음과 같은 글이 적혀 있어요.

“대왕의 은혜와 혜택이 하늘에까지 이르고, 위력은 바다에까지 미쳤다. 또한 적들을 쓸어 없애셨으니 백성들은 평안히 자기 직업에 종사했고, 나라가 부강하니 백성이 편안했으며 오곡마저도 풍성하게 익었다.”

대왕을 흠모했던 고구려 사람들의 인물평이고, 본인의 무덤 앞에 세워진 비석 글이니, 어느 정도 과장은 되었을 거예요. 하지만 자신들의 삶이 아주 편했다고 쓸 정도로 광개토대왕은 나라 안 살림살이도 상당히 잘했어요. 한편, 광개토대왕 시절에는 고구려 사람들이 자기 나라를 천하의 중심으로 여길 정도로 자부심이 강했어요. 광개토대왕의 강력한 리더십과 용병술 덕분에 고구려인 전체가 강한 주체 의식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지요.

그러나 안타깝게도 광개토대왕은 412년에 39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뜨고 말았어요. 역사에 ‘만약’이라는 단어를 붙일 수는 없지만, 만약 그가 60세까지만 살았더라도, 당시 동아시아 전체는 고구려 땅이 되었을지도 몰라요. 한번 상상해 보세요. 말까지 철갑으로 무장한 개마무사들이 보부도 당당하게 산천을 헤집고 다니며, 고구려의 영광을 외치는 모습을. 그리고 그들을 인솔하여 영토를 확장해 가는 광개토대왕의 늠름한 모습을. 어때요? 상상만으로도 스릴이 넘치지요?

 

교과서 속의 광개토대왕 시대

삼국 간의 세력다툼은 광개토대왕이 즉위한 4세기 말부터 시작되었는데, 이것은 삼국의 발전을 촉진하는 자극제가 되었다. 삼국 간의 세력다툼에서 주도권을 잡은 것은 중국 세력과 싸움을 통해 성장한 고구려였다. 광개토대왕은 강화된 국력으로 신라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영토를 크게 넓혀 고구려의 전성시대를 열었다. 그의 업적은 만주 집안에 남아 있는 광개토대왕릉비에 기록되어 있다. 그가 죽은 뒤, 고구려 사람들은 그를 영토를 크게 넓혔다는 뜻으로 ‘광개토왕’이라 하여 그의 위업을 그렸다. 

알쏭이와 장콩샘의 미주알 고주알

광개토대왕 이야기는 어디에 전해지고 있나요?
광개토대왕의 업적을 기록해 놓은 역사책은 거의 없어요. 『삼국사기』에 간략하게 소개되어 있을 뿐, 광개토대왕의 부인이 누구인지, 자식은 몇 명인지, 왜 죽었는지에 대한 세세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아요. 그래도 다행인 것은 아들인 장수왕 때에 세워 놓은 광개토대왕릉비에 그의 업적이 자세히 나와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그가 어떤 일을 언제 했는지 면밀하게 파악할 수 있어요.

광개토대왕 시절에 고구려 사람들은 ‘천하의 중심은 고구려’라고 했다던데, 그게 사실인가요?
광개토대왕 시절에 지방 관리를 지냈던 모두루라는 사람의 무덤에 이런 글이 쓰여 있어요. “하백의 손자이며 해와 달의 아들인 추모성왕이 북부여에서 태어나셨으니, 천하 사방은 이 나라 이 고을이 가장 성스러움을 알지니.” 고구려가 천하에서 가장 성스러운 곳이란 이야기지요. 또한 광개토대왕릉비에는 고구려 사람들을 가리켜 ‘천손(天孫)의 후예’라 하고, 주변 국가나 부족들은 전부 오랑캐라 해 놨어요. 이러한 사실로 보았을 때에 광개토대왕 시절의 고구려 사람들은 고구려를 천하의 중심으로 생각했던 것이 분명해요.

 

광개토대왕! 대단한 영웅인 것은 분명해. 하지만 말이야,현대 사회가 추구하는 평화의 관점에서 보아도, 그는 과연 영웅일까? 알렉산더, 나폴레옹, 칭기즈칸, 광개토대왕. 이들은 땅따먹기 전쟁에서 승리한 정복군주들이야. 그렇다면 그로 인해서고통을 받거나 죽어 간 사람들 또한 무척 많았을 거 아니야? 고통받은사람들에게도 이들은 과연 영웅일까? 우리 한번쯤 곰곰이 생각해 볼 문제인 것 같아.


세기의 전쟁 을지문덕의 살수대첩

수나라군은 쫓기고 있었다. 고구려군이 마지막 일격을 가한다. 북경을 떠날 때만 해도 수양제는 고구려 원정이 이렇게 비참한 패배로 끝날 줄은 몰랐을 것이다. 수나라군은 살수에서 전멸했다.

 

612년 수나라가 고구려을 침략할 때 동원한 병사는 113만명에 달했습니다. 비슷한 시기에 서양 전쟁에서 십만명 이상의 병력이 동원된 경우가 많지 않다는 것을 볼 때 가히 고대사 최대의 전쟁이라 하겠습니다. 고구려의 을지문덕은 바로 이 수나라 군대의 별동대 30만을 살수 오늘의 청천강에서 몰살시킵니다. 살아 돌아간 자는 불과 2700명 이것은 세계 전쟁사에 기록될 승전보입니다. 수나라는 삼백 여년 만에 중원을 통일한 나라입니다. 인구, 국토, 병력의 규모에 있어서 고구려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초강대국이었습니다. 헌데 그런 수나라가 고구려 땅에서 치욕스러운 패배를 당했다는 것입니다.

중국 강소성 양주에 있는 한 무덤. 수양제의 무덤이다. 300년 만에 중국을 통일한 제국 수나라 황제 무덤 치곤 너무 작고 초라하다. 묘지석에 벼락이 쳐서 한 부분이 깨졌지만1) 수리하지 않은 상태다. 수양제는 618년 양주에서 신하의 손에 죽었다. 그는 스스로 약을 먹고 자결하게다고 했지만 신하 우문화급은 스스로 죽을 권리조차 주지 않았다. 무덤 앞엔 그의 업적과 과오가 새겨져 있다. 요동에서 일을 버리다 천하를 잃었다. 고구려을 정벌하려다 모든 것을 잃고 말았다는 것이다. 612년 중원을 통일한 수양제는 백만대군을 동원해 고구려를 공격한다.

고구려로 가는 첫관문 요동성. 견고한 성에 의지한 고구려의 저항은 완강했다. 수나라 백만대군은 몇 달이 지나도 요동성 하나를 깨뜨리지 못했다. 중원을 통일한 초강대국이 요동의 작은 성에 막혀 진군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요동성에서 기록에 따르면 한 두달 정도의 공성전과 수성전이 진행이 됐는데 벌써부터 많은 병참의 어려움에 처했을 것입니다."

마음이 급해진 수양제는 별동대 30만을 평양으로 보낸다. 대동강으로 진입하는 수군과 합류해 평양을 공격할 의도였다. 산둥반도 봉래를 출발한 수나라 수군은 대동강에 상륙했다. 평양성 60리 앞까지 진출한 수군을 저지하기 위해 고구려군이 전투를 벌였지만 패배한다. 고구려군은 평양성 안으로 도주하고 만다. 수군사령관 내호아는 여세를 몰아 4만 병력을 이끌고 평양성을 향해 진군한다. 마침내 수나라 수군은 평양성 안으로 들이닥쳤다. 수도에 적군이 진입한 것이다. 국가의 존망이 걸린 순간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함정이었다. 평양성 안에 매복해 있던 고구려 군이 급습하자 수군은 대패한다. 살아돌아 간자는 불과 수천명. 수나라 수군은 전투력을 상실한다.

임용한 박사 (사)한국미래문제연구원, 전쟁과 역사 저자.

"수군이 군량을 보급하고 육군이 압록강을 건너와서 신속하게 평양을 함락시키는 작전이라는 것입니다. 수군대장 내호아는 고구려 군의 유인작전에 걸려서 단독으로 평양성을 공격하다가 패배해 버립니다. 그 결과 수군이 철수하게 돼버리니까 압록강을 건너서 평양까지 왔던 수나라 육군은 식량이 떨어져 버리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한편 수나라 육군 30만은 평양성 30리 앞까지 진출했다. 이 누란의 위기를 역전시킨 사람이 고구려군의 지휘관 을지문덕이었다. 조선상고사에 따르면 을지문덕은 성밖 들과 집을 비워 수나라 군이 현지에서 식량을 조달하는 것을 막았다. 보급이 끊긴 수나라군이 성급하게 공격해오자 고구려군은 사방에서 화살과 돌멩이를 비오듯 쏟아부었다. 이미 식량이 바닥난 수나라 별동대는 평양성을 칠 수 있는 전력이 아니었다.

 

"42년간 쌓았던 평양성은 당시 고구려 최대의 성이였고 높이도 굉장한 철옹성에 가깝죠. 수나라 군대가 평양성 근처 북쪽 30리까지 왔음에도 불구하고 물론 그들이 지치기도 했지만 평양성을 함락 시킬 수 있는 어떤 장비라든가 능력이 부족했던 겁니다."

수나라군은 평양성 30리 앞에서 철수한다. 그 뒤를 고구려군이 쫓으며 공격했다. 쫓는 고구려군과 쫓기는 수나라 군사. 전세는 완전히 역전된다. 후퇴하던 수나라 군은 살수 지금의 청천강에 도착한다. 청천강은 평안남북도 사이를 흘러 서해로 흐르는 200km의 강이다. 수나라 군대는 강을 건너기 시작했다. 을지문덕이 지휘하는 고구려 군대는 원하는 시간, 원하는 장소에서 수나라 군을 쳤다. 고구려 군은 도하하는 수나라 군의 후방을 공격했다. 강과 강변으로 병력이 나눠진 수나라 군사는 속수무책으로 당한다. 지휘관 신세웅도 전사하고 만다.

 

"살수대첩이 이루어졌을 때 수나라 군의 어떤 진이나 대영이 제대로 갖춰져 다기 보다는 강을 도하하거나 혹은 이동 중에 고구려 군의 기습작전이나 유격전과 같은 어떤 정상적이지 않은 시간과 장소 정상적이지 않는 방법을 통해서 고구려 군이 공격을 했다."

다급한 수나라 군은 하루에 450리를 달아났다. 살수에서 압록강까지 고구려 군은 패주하는 수나라 군대를 추격하며 생멸했다. 화살이 비오듯 쏟아졌다. 수나라 별동대의 99%가 사망했다. 30만 5천명 가운데 살아 돌아간 사람은 2700명이라고 중국측 사서는 기록하고 있다.2)

 

"유명한 삼국지의 적벽대전에서 조조가 백만을 동원했다고 하지만 실제 조조가 끌고 내려온 군대는 오만 밖에 안됩니다. 현지에서 조달을 해서 나중에 15만명을 만들었다고 돼 있습니다. 그런데 수양제 군대는 사실 백만이 아니라 2백만입니다. 중간에 보급부대나 노역으로 해서 동원했던 총동원 인력은 2백만명이었다고 중국 측 기록에 정확하게 나와 있습니다. 이것으로 보면 중국 역사상 최대의 규모의 전쟁이었다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동시에 최대 규모의 참혹한 패배였습니다. 삼국시대가 지난 후에 나중에 명나라 청나라 때 까지도 중국 황제들이 조선에 대해서 기억하고 있는 중요한 것이 저나라는 수나라의 백만대군을 물리친 나라다라고 이것을 중국황제들이 다 알고 있습니다. 그 정도로 중국 역사에 기록될 만한 참혹한 패배였고 우리측에서 보면 위대한 승리였죠."

살수대첩은 우리나라 역사를 통털어서 그 유래를 찾을 수 없는 대승이었습니다. 전쟁에 패배한 수나라는 결국 멸망의 길로 접어들고 말았습니다. 고대세계 최강의 슈퍼파워였던 수나라를 완파한 고구려 군. 그들은 과연 어떤 무기와 전략으로 싸웠던 걸까요. 고구려의 유적에서는 많은 화살촉들이 발견되고 있는데요. 활과 화살은 고구려 군의 주력 무기였습니다. 이것은 아차산에서 발견된 고구려 군의 화살을 복원한 것인데 화살촉의 평균 탄소량은 0.51%로 오늘날의 특수강의 맘 먹는 순도 높은 강철입니다. 이 철갑옷은 고구려 중장비병이 입었던 찰갑옷을 복원한 것인데 이 상위 하나를 만들기 위해서는 철을 단조해서 만든 천여 개가 넘는 작은 조각들을 일일이 이렇게 가죽 끈으로 연결해서 만들게 됩니다. 제철기술을 가진 전문가 집단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작업이었을 텐데요. 그렇다면 이렇게 철갑으로 중무장한 고구려 군들은 어떻게 전투를 했었을까요.

한강이 한 눈에 내려다 보이는 아차산. 고구려의 군사 요새 보루가 발견된 지역이다. 아차산에서만 20여 개가 넘는 보루가 나왔다. 1600여 년 전 이곳은 고구려 군이 집단으로 거주하던 중요한 군사 거점이었다.

 

"각 봉우리마다 이러한 성들이 크기는 약간씩 달리하면서 위치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각 성들이 한 눈에 다 보이기 때문에 서로 필요한 경우에 군사를 좀 더 동원해 줄 수 있는 것이고요. 또 한강에서 북쪽으로 올라오는 군사들을 다 볼 수 있는 곳에 위치한 곳이기 때문에 각각의 소규모지만 유기적으로 연결돼서 큰성처럼 그렇게 역할을 했던 것으로 생각합니다."

아차산에서는 고구려의 주력 무기가 대량으로 나왔다. 철재 칼, 도끼, 창 그리고 수천 개의 화살촉이 나왔다. 이런 무기들이 안악 3호분 벽화에 상세히 그려져 있다. 철갑옷을 입고 장창을 든 중장기병, 갑옷을 입지 않은 경기병, 철갑옷과 방패로 무장한 중장보병, 경보병, 도끼를 든 부월수, 그리고 화를 든 궁수가 보인다.

최종택 교수 고구려 고고미술학과

"현재 저희가 발굴된 고구려 철기를 분석해 보면 현재 우리가 쓰고 있는 조광이라는 기술도 알고 있었고 고대의 중국계의 기술과 유럽계의 철기제작 기술을 이미 고구려는 다 알고 있었다고 분석하고 있기 때문에 이미 제철수준이 상당히 높았고 높은 제철 수준을 통해서 무기와 농번구, 각종 생활용기를 제작하므로 국가적인 부를 창출할 수 있었습니다."

 

아차산에서 나온 자료를 가지고 고구려 화살을 제작하기로 했다. 고구려는 철을 단조해 살촉을 만들었을 것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화살촉은 특수강 수준의 강철이다. 만들어진 화살촉에 화살대와 깃을 붙여 화살을 복원했다. 고구려 군은 어떤 활로 화살을 쐈을까. 고구려의 활은 몰소의 뿔을 넣어 만든 각궁이었다. 각궁은 평소에 둥글게 휘어서 보관한다. 활을 쏠때 거꾸로 펴서 활 모양을 만든다. 완성된 각궁은 고구려 벽화 속 모습과 같다. 각궁과 고구려 화살의 파괴력을 어떨까. 초고속 카메라를 동원해 화살이 철판을 뚫는 순간을 정밀하게 촬영해 보기로 했다. 세계민족궁대회 입상자가 활을 쐈다. 화살은 함석판 5장을 그대로 관통했다.

김용만 우리역사문화연구소장

"고구려 벽화에 보면 말을 타고 활을 쏘는 그런 경기병들이 많이 보이는데 고구려 최대의 강점은 역시 활이었습니다. 기록상으로 볼 수 있는 것은 백석산 전투가 있습니다. 수나라 군대를 사면에서 완전히 포위해서 활을 비오듯이 쏴서 수나라 군대를 거의 전멸시킵니다."

 

지금도 발굴이 한창인 경주 쪽샘지구. 신라 귀족의 무덤 수십기가 발굴된 지역이다. 지난 6월 이곳에서는 중장기병이 입었던 철갑옷과 각종 무기류가 공개됐다. 발굴된 철갑옷은 작고 얇은 수많은 철편들을 엮어 만든 찰갑옷이었다. 말들 덮었던 철갑 위의 사람이 입는 찰갑옷이 최초로 원형 그대로 발굴됐다. 전문가들은 이 갑옷이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남진 때 영향을 받아 제작된 찰갑이라고 주장한다.

지병목 소장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고구려 고분 벽화의 4C~5C경에 나타나는 그 인물풍속도라든지 여러가지 풍속도에 나타나는 고분들에서 이러한 말을 탄 개마무사라고 얘기하는 갑옷을 착용한 장수와 말들이 많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여기 보시는 이 그림(삼실총벽화)에서 볼 수 있는 모든 형태의 갑옷과 부속구들이 한세트가 발견된 것에 가장 큰 의의가 있을 것 같습니다."

 

직접 철판을 잘라 찰갑옷을 만들어 보기로 했다. 철편에 부식을 막기 위해 옻 칠을 두 번하고 옻에 철분을 섞은 흑칠을 세 번 했다. 흑칠을 한 철편은 검은색이 된다. 작은 철편 조각을 일일이 가죽 끈으로 엮어야 한다. 찰갑옷 제작엔 오랜 시간이 걸린다. 상위 하나에만 1300여개의 철편이 필요하다. 이렇게 만든 찰갑옷을 사람이 입고 편하게 전투할 수 있을까. 찰갑옷은 기대 이상의 활동성을 지니고 있었다.

 

찰갑이 철편을 엮어서 만들었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 구부러져서 몸쓰기가 훨씬 자유롭고 유연합니다. 이런 식으로 접혀가지고 훨씬 더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기 때문에 훨씬 더 과학적이라고 볼 수 있죠.

철갑옷의 강도를 실험해 보기로 했다. 먼저 철판을 통째로 이어 부친 판갑옷. 큰 철판 조각들을 리벳으로 이었다. 화살은 그대로 판갑옷을 뚫었다. 발사한 모든 화살이 판갑옷을 관통했다. 화살은 갑옷을 뚫고 깊이 박히어 빼내기가 어렵다. 사람이 입었으면 치명상을 입었을 것이다. 이번엔 고구려의 찰갑옷을 실험해 보기로 했다. 찰갑옷에도 그대로 화살이 박혔다. 그런데 반복해 발사하자 화살이 튕겨 나오는 경우가 생겼다. 박힌 줄 알았던 화살을 찰갑이 튕겨내는 것이다. 철편은 뚫리지 않고 휘어져 있었다. 가죽 끈으로 연결된 작은 철조각들은 유연하게 안으로 밀리면서 화살의 힘을 흡수한 뒤 튕겨냈다.

찰갑옷으로 말과 자신을 감싼 고구려 중장기병은 어떻게 싸웠을까. 고대 전투는 진과 진의 싸움이었다. 럭비경기처럼 두 개의 진이 서로 충돌한다. 진이 유지되는 한 전투는 팽팽하게 진행된다. 진을 깨뜨리는 자가 승리한다. 팽팽하게 진행되는 싸움. 진이 붕괴되는 순간 승자와 패자가 결정되고 대량 사상자가 발생한다. 전투에서 고구려 중장기병은 진의 앞에 위치했을 것이다. 궁수가 원거리 사격을 가하고 기병이 돌진한다. 철갑과 장창으로 무장한 중장기병은 적의 진을 돌파해 후방에서 공격한다. 이때 보병이 돌진해서 앞을 공격한다. 진이 깨쳐 찰갑기병과 보병에 둘러싸인 적은 전멸한다.

고대 가야지역에서 발굴된 철갑옷을 복원한 것입니다. 큰 철판조각을 그대로 이어 붙인 것입니다. 이는 창, 칼, 화살과 같은 공격용 무기에 대한 방어력을 높이기 위해서 입니다. 그러나 철갑옷은 화살을 정통으로 맞을 경우 이렇게 탄력이 없기 때문에 그냥 뚫리고 맙니다. 반면 고구려군의 찰갑옷은 화살을 막아 냈습니다. 화살을 맞을 경우 이 가죽 끈으로 연결된 철편들이 안으로 밀려 들어가면서 화살의 힘을 충격을 흡수하고 다시 튕겨내게 됩니다. 화살을 정통으로 맞을 경우에도 이렇게 철편들이 부러지지 않고 그냥 이렇게 휘어질 뿐입니다. 그리고 찰갑옷의 장점은 한 가지가 더 있습니다. 전투 중에 갑옷이 손상되더라도 이렇게 다른 철편으로 손쉽게 수선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고구려와의 전쟁을 지휘했던 수양제는 무모한 전쟁을 해서 나라를 망친 군주로 역사에 기록됩니다. 헌데 여기서 한 가지 의문점이 생깁니다. 혼란기의 중국을 300여 년 만에 통일한 고대 세계의 슈퍼파워 수나라. 이 나라의 황제가 수양제입니다. 헌데 그런 그를 고구려 침략의 모든 것을 건 무모한 폭군으로만 기억한다는 것은 뭔가 이상하지 않습니까? 수양제 그는 과연 어떤 인물이었을까요. 또 그는 왜 고구려를 침략해야만 했던 걸까요.

고질적인 중국대륙의 물 부족을 해결하기 위해 많은 중국왕조가 장강의 물줄기를 북으로 이었다. 경향대운하는 북경과 항주를 이어주는 운하를 말한다. 수양제는 통제거, 산양독, 강남하 세 개의 운하를 건설해 황하, 장강, 휘수를 연결했다. 풍부한 강남지방의 물산을 북쪽으로 빠르게 운송해 교역을 활성화하기 위해 운하를 건설한 것이다.

가장 큰 트럭으로는 30톤, 열차로는 60톤이지만, 이 배는 500톤이나 실을 수 있지요.

운하 건설엔 또 다른 목적이 있다. 양주 고운하에는 동관고도가 있다. 동문 밖의 선착장이라는 뜻이다. 동관고도 문 아래엔 수양제가 운하를 건설한 후의 모습들이 새겨져 있다. 수양제는 미인들을 거느리고 자신이 건설한 운하를 자주 유람했다. 사치스런 연회도 자주 열었다. 벽화엔 다른 한쪽엔 수의 깃발아래 모인 병사들이 보인다. 이들은 왜 여기 있을까.

 

군사적인 목적입니다. 주로 고구려에 대처하기 위해서 입니다. 수양제는 고구려를 세 번이나 공격했는데 모두 운하를 이용해 군사들을 수송했습니다.

중국을 통일한 수양제는 남으로 방향을 돌려 베트남의 임읍국, 오키나와의 유구국 그리고 말레이 반도의 마자가국까지 정벌했다. 서기 610년 정월. 지금의 낙양인 동도에서 각국이 수나라에 조배를 올리는데 채색기를 든 자만 18000명이었다고 한다. 수나라는 주변국가를 복속시키고 대제국의 위용을 자랑한 당대 초강대국이었다. 그러나 고구려는 수나라를 중심으로 한 국제질서를 정면으로 거부했다. 영양왕은 수의 입조요구를 거절했다. 수나라는 고구려를 용납할 수 없었다.

 

그가 고구려 출정을 준비하는 데는 5년이 걸렸다. 아주 철저하게 준비를 했던 것이다. 그가 가장 먼저 한 일은 대운하의 확장명령이었다. 이 대운하는 양자강에서 북경지역으로 연결되어 있었고 곡물과 다른 군수품을 운송하는데 사용되었다. 612년에야 그 일을 마칠 수 있었고 대운하의 완공을 위해 수백만 명이 강제 노역에 동원되었다.

산동성 래주 해변에서 대규모 전함건조가 시작됐다. 배 건조의 책임자는 유주총관 원홍사(元弘嗣). 그는 가혹하게 일군들을 다루었다. 물속에서 주야로 일을 하게 해서 사람들이 일을 피하기 위해 손발을 자르고 복스러운 손, 복스러운 발로 불렀다고 전한다.3) 그리고 300척의 배가 완성됐다. 고구려를 놔두면 다른 민족들의 이반이 이어질 것을 두려워 한 수양제는 전쟁을 선포한다. 우문술이 지휘하는 좌군 12군, 우중문이 지휘하는 우군 12군, 수양제의 친위군 6군. 모두 합쳐 113만 3800명이 국경에서 고구려로 출발했다. 행렬의 길이만 960리에 달했다. 수군도 산동반도를 출발 대동강으로 향했다. 사상 유례가 없는 대출정이었다.

 

수나라가 동원한 약 110만 명에 달하는 병력은 20세기에 이르기까지 1차세계대전과 2차세계대전를 제외한다면 거의 없었던 것으로 판단됩니다. 고대 당시 고대 서양의 전투규모가 고작해야 5만에서 10만 명 그리고 한국전쟁 때 중공군이 약 40만 명에서 60만 명 정도 참전했다는 것으로 판단한다면 수나라가 고구려에 약110만 명 정도를 동원해서 공격한 것은 거의 어마어마한 규모였다고 판단됩니다.

당시 수나라는 890만 가구 인구는 4600만명 정도였습니다. 고구려의 당시 가구수는 69만호 정도였는데 한 가구당 가족을 5명으로 계산한다면 인구는 400만명 정도였을 겁니다. 수나라의 10분의 1도 안 되는 숫자입니다. 참전한 수나라의 군인은 113만명 지원병까지 합친다면 200만 명이 넘는 대군이 고구려를 공격합니다. 당시 수나라의 군사 수는 고구려 남성 전체의 절반이 넘는 숫자였습니다. 전투에 동원 가능한 성인남자의 수를 계산한다면 수나라의 병력규모는 고구려를 압도합니다.4)

수나라 100만 대군은 요하로 몰려들었다. 요하는 요동을 차지한 고구려로 가는 첫 관문. 요하 건너편에 고구려 군이 있었다. 수나라군은 요하를 건너기 시작했다. 선봉대는 강을 건너기 위해 부교를 설치했다. 그러나 부교가 짧아 강 건너 편에 닿지 못했다. 수나라 군은 강으로 뛰어들어 건너편 언덕으로 오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고구려의 공격으로 수나라 1군 사령관인 맥철장(麥鐵杖)이 전사하고 말았다. 수나라군은 첫전투에서 예상치 못한 엄청난 피해를 입고 말았다.5)

 

선봉군 대장 맥철장이 요하에 제일 먼저 도착을 했는데 고구려 군이 약 한달 동안 선봉부대가 넘어오지 못하게 합니다. 그리고 맥철장을 비롯해서 많은 지휘관을 살해합니다. 고구려가 요하 전투에서 한달 정도의 시간을 수의 진격을 막았던 것은 뒤의 수나라 작전들을 잘 수행하지 못하도록 만듭니다. 수나라는 속전속결로 해서 진격을 해야 되고 맥철장의 부대가 처음에 거점을 만들어야 하는데 수나라 본진이 올 때까지 붙잡아 둡니다. 그 후의 전쟁을 유리하게 이끄는 첫번째 승전보라 할 수 있습니다.

본진이 합류하자 수나라는 한달 만에 겨우 요하를 건널 수 있게 됐다. 수나라가 강을 건너 공격하자 고구려는 만 명의 희생자를 내고 요동성으로 후퇴했다. 그러자 수나라 대군이 요동성으로 몰려 들었다. 수양제가 단번에 고구려를 제압하기 위해 데려온 백만 대군이 요동성을 포위했다. 그리고 본격적인 전쟁이 시작됐다. 전투는 치열했다. 하지만 성과는 없었다. 고구려의 성벽은 너무 높고 튼튼했고 고구려의 저항도 완강했다. 2월에 수양제가 요동성에 도착했지만 넉 달이 되고 6월이 돼도 요동성은 함락되지 않았다. 수나라 군은 300년 만에 중국을 통일한 강한 군대였다. 지휘관과 병사들은 전쟁터에서 단련된 사람들이었다. 강남에서 북쪽의 돌궐까지 온갖 종류의 군대와 싸운 경험이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백만 대군이 요동성 하나를 깨지 못한다.

진노한 수양제는 장수들을 질책했다. 그대들은 스스로 지휘가 높고 좋은 가문임을 믿고 나를 어리석은 자로 대우하려 하느냐! 그대들이 내가 오는 것을 좋아하지 아니한 것은 아마 이 낭패를 볼까 염려한 까닭이었을 것이다. 내가 지금 여기 온 것은 바로 그대들의 수행을 보아 목을 베려 함이다. 그대들이 지금 죽음을 두려워하여 전력치 아니하니 내가 그대들을 능히 죽이지 못할 줄로 여기느냐!

 

요동성 구조는 이 그림에 따르면은 크게 외곽이 하나 있고 그 안에 내곽이 하나 있는 이중구조의 성곽입니다. 그리고 외곽에 보면 성문이 표현되어 있는데 성문 주변으로는 옹성으로는 보기 어렵지만 치가 나와서 성문을 보호할 수 있는 그런 시설로 되어 있습니다. 문의 주변에 치가 있고 성벽주변에 치가 5개 정도가 배치돼 있습니다.

치는 앞으로 튀어나온 방어용 성벽이다. 적이 공격하면 성벽 위에서 포위해 집중공격하기 위한 것이다. 옹성 역시 적을 포위해 공격하기 위한 것이다. 어긋문은 엇갈린 두 개의 성벽 사이에 만든 문이다. 문으로 들어오는 적은 고립된다. 당시 고구려의 축성술은 매우 뛰어났다. 흔적은 남아 있지 않지만 요동성도 치와 같은 방어시설을 갖춘 난공불락의 성이었을 것이다.

 

요동성은 기록에 따르면 대략 높이가 30m를 넘는 굉장히 큰 성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를 수나라 본진이 수백겹을 에워쌓다는 표현이 나오는데 수나라 군대는 이 요동성에서 약 4월 중순부터 철수하게 되는 7월 말까지 3개월 동안 이 성 하나를 점령하지 못합니다.

병서 무경총요엔 고대 중국에서 사용된 공성용 무기가 상세히 적혀 있다. 성을 공격하는 기본 장비인 사다리차 운제(雲梯), 성의 높이만큼 올라가서 성을 내려다보며 공격하는 소차(巢車, 상하이동식 공성무기)가 보인다. 성벽에 돌을 던지던 투석기를 복원해 보기로 했다. 당시 투석기는 사람의 힘을 이용해 돌을 던질 수 있게 한 구조다. 밧줄이 많이 연결될수록 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투석기를 당길 수가 있다. 작은 투석기는 40명, 큰 것은 120명의 병사가 밧줄을 동시에 잡아 당겨 돌을 날려 보낸다. 그러나 요동성은 요지부동이었다. 고구려 군은 수나라와의 전면전을 피해 요동성 안에서 수성전을 완강하게 펼쳤다. 이때부터 수나라 백만 대군의 보급에 문제가 생기기 시작한다.

데이비드 그래프(David Graff)교수, 캔자스 주립대 중국전쟁사

고구려는 수나라에게 큰 전투를 치를 기회를 주지 않았다. 고구려 군은 요새 안으로 들어가고 수나라 군은 요새 밖에서 식량이 바닥난 상태로 지내게 되었다. 왜냐하면 요새밖에 있는 모든 곡물을 안으로 거두어 들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수나라 군은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당시 고구려 군의 전술은 육군사관학교 수업에서도 인용된다. 청야입보(淸野入保). 청야는 들을 비운다는 말. 입보는 성안으로 철수해 수성전을 벌이며 적을 고갈시킨다는 말이다. 고구려 군이 사용한 청야입보 전술은 19세기 초까지 서양에서도 유효한 전술이었다.

 

청야는 들을 비운다는 말인데 한마디로 말하면 평상시에는 농업이나 목축업 같은 일반적인 생활을 하다가 적이 공격해 왔을 때 들을 완전히 깨끗하게 비우고 성으로 다 들어가서 군, 관민이 다 적에게 대항하는 그런 개념입니다. 당시의 동아시아에서 일반적으로 보급을 현지조달을 많이 했었습니다. 그래서 적에게 현지 조달을 허용하지 않기 위해서 고구려는 자기들의 생활터전을 전부 다 불태우고 완전히 비우고 나서 성으로 들어가서 결연하기 방어준비에 임했던 것입니다.

프랑스의 나폴레옹이 러시아를 침략했을 때 러시아 군도 청야전술을 구사합니다. 들판을 불태우고 러시아 내륙 깊숙이 프랑스 군을 끌어드리는데 추운 겨울 보급선이 끊어진 나폴레옹 군은 배가 주리자 도망치듯 철군하다 러시아군의 기습에 밀려 엄청난 수에 사상자를 내고 맙니다. 이렇게 전쟁에서 진 나폴레옹은 황제자리에서도 쫓겨나게 됩니다. 을지문덕도 수나라 군을 고구려 땅 깊숙이 유인해 살수에서 마지막 일격을 가합니다.

끝내 요동성을 함락시키지 못한 수나라 군은 요동성을 우회한다. 수양제는 30만 별동대를 고구려의 수도 평양으로 직접 내려 보낸다. 병력 수에서 열쇠였던 고구려 군은 이동로를 장악하고 게릴라 전을 벌었다. 평양성으로 가는 수나라 군의 보급부대가 주요 목표였다. 남하하던 수나라 군은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고구려 군과 대치하게 된다. 이때 고구려 수나라 전쟁을 통틀어 가장 극적인 상황이 벌어진다. 한 고구려 장수가 홀연히 수나라 진영을 찾아 온 것이다.

놀랍게도 그는 고구려 군의 지휘관 을지문덕이었다. 그는 고구려와 수나라의 항복 협상을 시작하기 위해 온 것이다. 을지문덕은 수나라 군의 지휘관 우중문, 우문술과 거짓으로 항복 협상을 벌이면서 수나라 진영을 염탐했다. 왜 고구려 군의 최고 지휘관이 이런 위험한 임무를 직접 수행했을까.

 

을지문덕 같이 중요한 인물이 수나라 군에 가서 포로가 된다면 고구려 군 자체가 위험에 빠지게 됩니다. 그래서 을지문덕이 수나라 군대진영까지 찾아 간 것은 적정을 관찰하는 것보다는 수나라 군대의 진격을 지연시키는 것에 목적이 있지 않았나 생각을 합니다.

협상을 마치고 돌아가는 을지문덕을 우중문은 사람을 보내 돌려 세웠다. 할 말이 있으니 다시 수군 진영으로 돌아가자는 것이었다. 고구려 군 지휘관 을지문덕을 잡으려는 수나라의 술책이었다. 하지만 을지문덕은 돌아보지도 않고 압록강을 건너 돌아갔다. 수나라 군은 적의 사령관을 눈 앞에 두고 놓친 것이다. 이후 고구려 군은 일곱 번 싸워 일곱 번 패하면서 수나라 군을 고구려 평양성 가까이 끌어 들었다. 시간을 지연시키면서 수나라 군의 식량을 고갈시키려는 을지문덕의 작전이었다. 수나라 병사들은 100일치 식량을 가지고 요동성을 출발했다. 하지만 많은 지친 병사들이 무거운 식량을 이미 모두 몰래 버린 상태였다.

꿔샤오린 교수(낙양사법대 역사학부)

군사물자 운송, 특히 양식운송이 매우 어려웠다. 보병들이 많은 식량과 무기를 메고 전쟁을 하기가 너무 힘들었다. 어떤 병사는 식량을 땅에 몰래 묻고 가지도 했다. 그래야 자신이 지고 갈 물건의 무게가 줄기 때문이었는데 그러다보니 나중에 먹을 식량이 부족했다.

을지문덕의 전략은 적중했다. 을지문덕의 청야전술은 수나라 군이 고구려 현지에서 식량을 구할 수 없게 만들었다. 들엔 곡식 한 톨 남아 있지 않았을 것이다. 수나라 군이 평양성 30리 앞에 오자 을지문덕은 역사에 남을 시 한 수를 우중문에게 보내 조롱한다.

神策究天文 신기한 책략은 하늘의 이치에 달했고, 妙算窮地理 묘한 전술은 지리를 통달했구나.
戰勝功旣高 싸움마다 이겨 공이 이미 높았으니 족한 줄 알고 그만 둠이 어떠하리.

 

마지막 구절에공은 이미 하늘에 다했으니 돌아가시게라는 말은 사실은 너희들의 식량은 이미 떨어진 사정을 다 알고 있다. 너희들이 돌아가지 않으면 어떡하겠느냐는 이미 알고 있는 상황에서 너가 이미 다 공을 이루었으니 돌아가라. 다시 말하면 너희들이 더 이상 할 것이 없지 않느냐! 점잔이 말했지만 우리가 너희들이 철수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철수를 종용하는 시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미 먹을 것이 바닥나 전투를 할 수 없었던 수나라 군사는 평양성 30리 앞에서 철수할 수 밖에 없었다. 이때 고구려의 반격이 시작됐다. 후퇴하는 수나라 군의 배후를 치기 시작했다. 쫓기던 30만 별동대는 살수 지금의 청천강을 건너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역사적인 살수 대첩이 벌어진다. 단재 신채호는 고구려 군이 미리 막아둔 상류의 둑을 터놓아 수군을 공격했다고 기록했다.6)

그런데 과연 그 당시 청천강에 둑을 쌓는 것이 가능한 일 일까. 매번 봄 청천강에서는 나무로 간단히 쌓은 둑을 터놓는다. 상류지역에서 벌목한 나무를 물살의 힘을 이용해 하류로 수송하기 위해서다. 목재는 물길을 따라 서해까지 내려가 중국으로 수출된다. 을지문덕도 이런 방법으로 둑을 쌓아 수공을 했을지는 의문이다. 과연 전쟁 기간에 엄청난 량의 물이 채워질 둑을 건설할 수 있었을까.

 

청천강 같이 큰 강을 옛날 기술로 막았다가 터뜨린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강을 막는데만 해도 오늘날에도 몇 년의 공사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군대라는 것은 보통 주변의 40km 이상의 정찰대를 운영하면서 행군하게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상류의 둑을 그 이전 시기에 막았다고 한다면 수나라 군대가 그날 그 시점에 도하하는 것을 알고 한 2, 3년 전부터 공사를 했어야 가능하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3만 여명이 참가한 국제 마라톤 대회(인천대교개통기념). 살수를 건너던 30만 수나라 별동대 병력의 10분의 1정도의 인원이 참가했다. 인천대교 주탑 간의 거리는 약 1km. 육안으로 보기에도 대열은 삽시간에 수킬로미터로 늘어졌다. 만약 30만이 달리기 시작하면 그 길이는 더욱 늘어날 것이다. 이것으로 볼 때 살수를 수나라 군 30만이 동시에 건너는 건 불가능해 보인다. 사서엔 수공에 관한 기록이 없다. 강을 건너는 수군의 후방을 공격했다는 기록만이 있다. 고구려 군의 공격에 수나라 군의 진영이 깨졌다.

 

어떤 군대가 후퇴하면서 진영을 유지하기란 굉장히 힘들다고 판단이 됩니다. 그 이유는 철수 작전 중에 후미에 남겨진 부대의 경우에는 심리적으로 굉장히 압박을 받게 되고 자신들의 생명에 위협도 받게 되는 것이고 후방에서 직접 적과 교전해야 하는 상황입니다. 모든 것이 어려운 상황에서 특히 후미부대라도 남아서 적과 교전을 하는 상황에서는 전투력을 제대로 발휘하기는 힘들다고 판단이 됩니다.

별동대 일부는 강 건너에 일부는 강 가운데 후진은 강을 건너지 못한 상황. 병력이 분리된 수나라 군은 속수무책이었다. 고구려 군의 기습은 수나라 군을 공황상태에 빠뜨려 붕괴시켰을 것이다. 을지문덕의 고구려 군은 진이 깨진 상태로 패주하는 수나라 군을 추격하며 전멸시켰다. 백만 대군으로 북경을 출발할 때 수양제는 이런 비참한 결과를 꿈에도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게 전쟁이 끝났다. 7세기 세계 최대의 전쟁의 결과는 아무도 믿을 수 없는 것이었다. 그 한가운데 을지문덕의 살수대첩이 있었다.

 

을지문덕은 사실 수세에 방어전략을 구사했지만 모든 상황을 고려해서 그 주도권을 가지고 있었고 자기가 원하는 시간과 장소에서 적을 끌어 들었고 그리고 적이 약했을 때 공격을 하므로 적의 전투력을 제압하는 아주 뛰어난 전략가였다고 생각합니다.

고구려는 요동성, 평양성, 살수 이렇게 전쟁의 운명을 가른 세 곳의 전투에서 모두 승리했습니다. 수나라는 고구려의 전략에 말려서 제대로 전투 한 번 해보지 못하고 치욕적인 패배를 당합니다. 과연 무엇이 고구려를 승리를 이끌었던 걸까요. 고구려 군의 청야전술과 수성전이 승리의 한 요인으로 꼽힐 수 있을 것입니다. 또 삼국사기를 쓴 김부식은 을지문덕의 공을 이야기 합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힘과 전략을 믿은 고구려 군의 필사 항전의 의지가 아니었을까요.

 

 

Posted by 원주유
고구려 역사와 문화2013. 9. 14. 17:50

 

지안(集安: 서기 3~427년 고구려 首都)

'고구려 박물관'의 역사 왜곡… 고구려史 뭉개고 발해史는 지워

동북공정 강화
"漢 무제가 현토군에 고구려현 설치, 中原에 융합" 옌볜 지역은 말갈족 영역으로

모순
지도에 남쪽 경계는 한강 유역, 옌볜은 고구려땅 아니라면서 고구려城 그려 넣기도

集安 고구려碑
8각 유리상자 안에 넣어놓고 1m 떨어져서만 볼 수 있게… 확대경 써도 碑文 판독 어려워 지린성

"고구려가 조선족(한민족)의 조상인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중국의 나라였네요."
1일 중국 지린(吉林)성 지안(集安)의 '지안 박물관'. 이날 고구려 전문 박물관으로 신축 재개관한 박물관 6개 전시실을 관람한 한 중국인은 이렇게 말했다.
개관 당일 박물관 전시실을 둘러본 결과 '고구려는 중국의 속국' 같은 노골적 표현은 없었다. 그러나 동행한 국내 전문가는 "'동북공정'이 무서운 건 고구려사(史)를 자연스럽게 중국사의 일부로 받아들이게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중국이 지안 박물관을 통해 더 교묘하고 세밀하게 '동북공정'을 펼치고 있다는 분석이다. 지안은 서기 3년부터 427년까지 425년간 고구려 수도였던 곳이다.
"고구려족은 中 소수민족"
지안시 인민정부 청사 앞에는 고구려 상징인 '삼족오(三足烏·태양에 산다는 세 발 까마귀)' 동상이 서 있다. 안내판엔 "태양조(太陽鳥·삼족오)는 중국 고대 전설에 등장한다. 고구려 벽화의 삼족오는 고구려 민족과 중원(中原·중국을 지칭) 민족이 동일하게 태양조를 숭배했다는 의미"라고 적혀 있다. 한 시민은 "2년 전까지는 '고구려족(族)은 중국의 소수민족'이라는 문구가 있었다"며 "한국과 북한의 반대가 심해 이를 삭제한 것"이라고 말했다. 중·일, 한·일 간 역사 갈등이 첨예한 상황에서 중국이 한국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신경 쓴 것으로 관측된다.
그러나 박물관 안에 있는 안내판과 지도에는 고구려가 한(漢)·당(唐)의 영향을 받아 중원에 '융합'됐다는 내용만 가득했다. 한 관람객이 "고구려와 조선(한반도)의 관계는 뭐냐"고 물었다. 전시관 안내원은 "고구려와 한반도는 아무 관계가 없다. 고구려족은 중국의 소수민족"이라고 답했다.
고구려와 발해 연결 고리 제거
고구려 영역도에는 지금의 옌볜(延邊) 일대를 고구려 영토에서 제외하고 해당 지역을 말갈족 영역으로 구분했다. 국내 전문가는 "고구려에서 말갈을 뺀 것은 고구려와 발해가 이어지는 연결 고리를 없애려는 의도"라고 말했다. 발해는 고구려 지배층과 말갈 피지배층으로 이뤄진 국가였다. 고구려에서 말갈이 없어지면 고구려와 발해의 연관성도 그만큼 약해진다는 설명이다.
실제로 지린성 창바이(長白)에 있는 발해 벽돌탑인 '영광탑'의 안내판에는 "당나라 발해 시기에 쌓았다. 모양과 구조가 시안(西安)의 당나라 때 현장탑과 비슷하다"고 써놨다. 그러나 박물관의 고구려 산성(山城) 지도에선 옌볜 지역에 고구려 산성이 두 곳 있는 것으로 표시했다. 옌볜 일대가 고구려 땅이 아니라고 하면서도 고구려성을 그려 넣은 오류를 저지른 셈이다. 고구려 영토의 남쪽 경계는 한강 유역이라고 했지만 지도상 압록강 이남에는 어떤 유적도 표시하지 않았다.
내부 사진촬영도 기록도 금지한 지안박물관 - 중국 지린(吉林)성 지안(集安)시의 인민정부청사 앞에 세워진 지안박물관 입구. 1일 고구려 전문 박물관으로 신축 재개관했으며, 고구려를 중국 역사에 편입하려는 시도가 엿보인다.

 

박물관 측은 내부 사진 촬영을 금지하고 전시물 내용을 기록하는 것까지 엄격하게 통제했다. /지안시 청사 앞에 고구려 상징 '三足烏' 동상 - 중국 지린(吉林)성 지안(集安)시인민정부청사 앞에 1일 고구려를 상징하는‘삼족오(三足烏·세발까마귀)’동상이 서 있다. 중국은 고구려를 중국사에 편입하려고 하고 있다. /발해 벽돌탑인 '영광탑' 안내판엔 "당나라 風格을 갖고 있다" - 탑 안내판에“모양과 구조는 당나라 때의 현장탑과 비슷하며 당나라의 풍격을 갖고 있다”고 적혀 있다. 중국 지린성 창바이(長白)에 있는 발해 시기 벽돌탑인 영광탑(靈光塔).

 

박물관 전시는 일관되게 중원과 고구려의 '결합'을 강조했다. 입구에서부터 "한 무제가 현토군에 고구려현을 설치했다"고 적었다. 관련 지도는 현토군이 고구려로 성장한 것처럼 묘사했다. 그러나 고구려는 현토군을 밀어내면서 성장한 국가라는 게 전공 학자 대부분의 일치된 견해다. 안내판처럼 '고구려족과 중원 각 민족의 융합'을 통해 성장하지 않았다. 수(隋)·당과 대전(大戰)을 벌여 이들을 물리친 사실은 박물관에 어떤 설명도 없었다.

 

박물관은 또 "고구려 왕과 귀족은 당나라 관리 복장을 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국내 전문가는 "고구려는 망할 때까지 독자적 관등 체계를 유지했다"면서 "이곳 박물관에도 소형(小兄)·대형(大兄) 등 고구려의 독특한 관직이 적힌 기와 조각이 전시돼 있다"고 말했다.


현존 최고(最古) 고구려 비석으로 추정되는 '지안 고구려비'는 박물관 1층 로비 가운데 있었다. 8각 유리 상자에 넣어 성인 허리 높이의 전시대에 올려놓았다. 1m 밖에서 관람하게 돼 있어 비문(碑文)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비석 실물을 처음 접한 국내 학자들이 확대경까지 동원해 글자를 판독하려고 했지만 어려움을 겪었다.

지안(集安) 박물관
425년간 고구려 수도였던 중국 지린(吉林)성 지안에 지어진 고구려 박물관. 중국은 2003년 이른바 ‘동북공정’이 진행되던 시기에 박물관 건립을 추진했다. 3년 전 완공됐으나 내부 보완을 거쳐 1일 재개관했다.

동북공정(東北工程)
중국이 고조선·고구려·발해의 역사를 중국사로 편입하기 위해 추진한 동북 지역 연구 프로젝트. 중국 사회과학원 산하 변강사지연구중심(邊疆史地硏究中心)이 2002년부터 5년간 진행했다. 지금은 ‘역사 왜곡’ 영역을 벗어나 일반 중국인의 상식을 바꾸는 단계까지 이르고 있다. 한반도 통일 등 동북아 정세 변화에 대비한 중국의 역사적 명분 쌓기라는 분석도 있다

 

 


중국 光明日報의 ‘고구려 역사 연구의 몇 가지 문제에 대한 試論’

“한민족은 고구려와 기자조선을 도용해 갔다”

 

중국의 역사자료만 ‘일방적’으로 인용해 “고구려는 중국의 일부”라고 주장했다. 전문을 읽어보면 이 시론이 얼마나 억지를 부리는가를 명확히 알 수 있다. 이 시론의 결론이 ‘고구려는 중국의 일부니 정치적으로 이의를 제기하지 말라’라고 돼 있는 것은 이 시론이 정치적 의도를 갖고 작성되었음을 보여주는 ‘명백한’ 방증이다. 일반인이 알기 힘든 용어는 그 뜻을 찾아 괄호 안에 주석을 달았다. “광개토대왕이 웃는다.” 중국 길림성 집안현 통구에 있는 5.34m 높이의 광개토대왕비. 최근 중국은 총력을 다해 고구려를 중국역사에 편입시키려는 일련의 작업에 착수했다.

‘고려’라고도 약칭하는 고구려는 서한(西漢)에서 수(隋)·당(唐) 시대까지 중국 동북(東北)지역에 출현했던 중요하고 영향력 있는 변방 민족 중의 하나였다(중국에서 동북지역은 대개 만주 일대를 일컫는데 길림성과 요녕성, 흑룡강성을 가리켜 ‘동북3성’이라고 한다).

中原 왕조와 종속 관계

고구려의 선조는 주나라와 진나라 시기 줄곧 중국의 동북지역에서 생활했다. 기원전 108년 한나라 무제는 요동과 한반도 북부에 4군을 설치했는데 그 중에서 현도군에 있던 고구려현이 바로 고구려인이 살았던 곳이다.

기원전 37년 부여 사람인 주몽은 현도군 고구려현 관할구역에 정권을 세우고 흘승골성(紇升骨城 : 지금의 요녕성 환인현성 부근. 그러나 한국 역사학계는 광개토대왕비문을 근거로 주몽이 졸본에 도읍을 정했다고 보고 있다)을 수도로 정하였다.

서기 3년(한나라 평제 원시 3년) 고구려는 국내성(지금의 길림성 집안시)으로 수도를 옮겼다가 서기 427년 평양성(지금의 평양시)으로 천도하였다. 전성기 때의 고구려는 길림성 동남부와 요하(遼河 : 중국 동북지방 남부를 가로질러 서해로 흐르는 1400㎞의 강) 동쪽, 그리고 한반도 북부까지 세력을 뻗쳤다. 이로부터 서기 668년 한반도 동남부에 위치한 신라와 연합한 당나라 왕조의 공격에 의해 멸망하기까지 고구려는 705년의 역사를 유지했다.

고구려가 존재한 700여 년의 시간을 살펴보면 고구려는 중국의 중원 왕조가 관할하는 지역에서 주로 활동하였으며 중원 왕조와 종속관계를 유지하였다. 고구려 정권은 중원 왕조의 제약을 받았고 중국 지방정권의 관할하에 있었으므로 고대 중국에 있었던 변방의 민족정권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고구려와 중원 왕조의 관계는 중원 왕조의 제압력이 강해지거나 약해짐에 따라 밀접해지기도 했고 소원해지기도 했을 것이다. 이 글에서는 최근에 이뤄진 고구려 역사연구에 대해 약술한다. 학계연구자들의 지도편달을 바란다.

[1.고구려는 중국 동북지역 역사에 출현했던 소수민족 정권이다]

주(周 : 殷나라 다음에 건국해 秦나라에 멸망당할 때까지 수백년간 이어온 중국 고대 왕조) 나라와 진(秦: 기원전 221~207년)나라 시절 고구려인의 선조는 주로 혼강(渾江: 중국 요녕성을 흐르는 강)과 압록강 유역에서 생활하였다. 이들이 살았던 중심구역은 지금 요녕성의 환인현과 신빈현, 길림성의 집안시와 통화시 일대였다.

우리는 고구려 민족이 중국 동북지역 역사에 등장한 한 민족이었고, 고구려 정권은 중국 동북지역 역사에 등장한 변경민족 정권이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고구려 민족의 기원을 살펴보자. 현재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대다수 중국학자들은 고구려 민족의 기원에 대하여 예맥(濊貊: 중국 漢나라 시절 압록강과 혼강 유역에 살았다는 한민족의 근간이 되는 부족)설과 부여(夫餘: 고조선이 무너진 후 북만주 일대에 웅거한 부족국가)설, 고이(高夷 : 만주에 있던 고대 종족)설, 상인(商人 : 商은 殷나라를 뜻한다. 은나라가 주나라에 패해 동쪽으로 가 고구려의 선조가 되었다는 것이 商人설이다)설, 염제(炎帝)설 등을 제기하고 있다(중국 ‘史記’에는 중국의 黃帝가 염제·치우 등과 싸워 천자가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후 중국에서는 치우를 ‘군신’으로, 염제는 ‘불의 신’ 혹은 ‘태양신’으로 받들었다).

이런 여러 학설에 공통점이 있다면 고구려 민족은 주나라와 진나라 때에 중국의 동북지역에서 활동했다는 점이다.

좌전(左傳: ‘춘추좌씨전’ 혹은 ‘좌씨춘추’의 다른 이름. 춘추 시대 노나라의 좌구명이 편찬했다. 기원전 722~481년의 춘추시대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의 소공(昭公) 9년 조를 보면 주나라 사람들은 내내 “숙신(肅愼: 고조선 시대에 있었던 고대 종족)과 연(燕 : 周나라 昭公 奭의 후예로 전국 시기에 왕으로 칭한 칠웅 중의 하나. 지금의 중국 하북성 지역에 있었다. 고구려 장수왕의 공격에 의해 멸망했다), 그리고 박(?: 은나라 탕왕이 도읍한 곳. 지금의 하남성 귀덕부 상구현)은 우리의 북방 영토였다”고 말하는 부분이 있다.

고구려는 漢나라 안에 있던 지방정권

여기서 우리는 주나라의 무왕이 상(商: 殷나라)을 점령한 후 주나라 사람들이 동북지역을 경영했음을 명확히 알 수 있다. 주나라 때의 세력 범위는 지금의 동북지역보다 훨씬 넓었다.

환인현의 태서구 유적과 요산 유적·봉명 유적, 집안시의 대주선구 유적과 이도외자 유적·동촌 유적, 통화시의 왕만 발발자 유적 등에 대해 오랫동안 고고학적 조사와 발굴이 이뤄졌는데 이 조사에서 이 유적들은 모두 고구려 정권이 출현하기 전의 문화 유물이라는 것이 분명히 밝혀졌다. 이 지역 유물의 지층을 조사해보면 하층은 신석기시대 말기부터 청동기시대의 문화이고, 그 위층은 한대 문화이며, 그보다 더 위층은 고구려 정권이 출현한 후의 문화임이 명확히 드러난다.

두 번째는 고구려 정권 건립 상황에 관한 것인데 중국 학자들과 외국 학자들은 대부분 고구려가 기원전 37년(서한 원제 건조 2년)에 흘승골을 수도로 해 세워졌다는 점에 일치된 견해를 보이고 있다.

요녕성 환인현성 부근(환인현성 서쪽으로 4㎞ 떨어진 혼강 맞은편 쪽)에는 평원성(平原城: 평야에 세워진 성. 산성의 반대 개념)인 ‘하고성자(下古城子)’가 있으며, (환인현성 동북으로 8.5㎞ 떨어진 혼강 맞은편의 오녀산 정상에는) ‘오녀산성(五女山城)’이 있다. 고고학적 조사와 발굴에 의하면 이곳은 한나라 현도군의 관할 범위 안에 있던 고구려의 초기 수도였다고 한다.

고구려 정권이 출현하기 전 중국의 서한(西漢) 왕조는 광대한 중국 동북지역을 상대로 행정을 펼치고 있었다. 한나라 무제 원봉 2년인 기원전 108년 이곳에는 잇따라 현도군·낙랑군·임둔군·진번군의 네 군이 세워졌는데, 네 군(세칭 漢四郡)이 관할한 범위는 동북 지역과 한반도 북부에 이르렀다. 그 후 한사군의 관할 지역에 변화가 있어, 현도군의 행정수도가 고구려현으로 이전하였다.

고구려현 부근에서 건립한 고구려 정권은 처음에는 현도군, 이어서는 요동군에 속하게 되었는데 고구려 정권은 끊임없이 표(表: 신하가 자기 생각을 서술해 황제에게 올리는 글)를 올려 신하를 칭하고 조공을 받쳤다. 그리고 현도군에 이어 요동군을 거치며 한나라 왕조가 하사한 관복 등을 받아갔다. 이 시기 많은 한(漢)나라 사람이 고구려 정권에 흘러들었다.

1975년부터 1976년까지 중국 집안시 국내성 지역에서는 고고학적 조사와 발굴이 있었는데, 이때 고구려의 석축(石築) 안에서 한나라 때 만들어진 흙으로 쌓은 벽(土築城垣)이 발견되었다. 여기서 한나라 시대의 철기와 도기 등 여러 유물이 출토된 바 있다.

705년간의 역사를 이어오며 고구려는 현도·요동·낙랑 등지로 영토를 확장시켰으며 여러 차례 수도를 옮겼다. 그러나 흘승골이든 국내성이든 평양성이든 고구려의 수도는 모두 한사군 지역 안에 있었다. 그러니 고구려는 중국 역사에 출현한 변방의 민족 정권인 것이다.

周대에 기자 봉하고, 漢대에 4군 설치

세 번째, 한나라에서부터 당나라 때까지 중국은 분열해 있었지만 중국의 역대 왕조들은 모두 고구려를 변방의 민족 정권으로 생각했다는 점이다.

상(商: 은나라) 말기에서 한나라 초까지 고구려인의 거주지는 기자조선(箕子朝鮮: 은나라 말기 기자가 조선에 와 단군조선에 이어 세웠다고 하는 나라)의 관할 구역 안에 있었는데, 기자는 주나라 시대 지방 제후 중 하나였다.

한나라 시대에는 위씨조선(衛氏朝鮮: 한국에서는 ‘위만조선’이라고 한다. 한나라 고조는 중국을 통일한 후 노관에게 연나라를 다스리게 했는데, 노관이 반란을 일으켜 나라가 혼란에 빠졌다. 이때 노관의 부관으로 있던 衛滿이 1000여 명을 이끌고 패수를 건너 고조선의 準王을 찾아가 몸을 의탁했다. 그 후 위만은 준왕을 쳐 왕위를 빼앗고 도읍을 왕검성으로 옮겼는데 이를 위만조선이라고 한다. 위만조선은 한나라로부터 지원을 받아 지역 안정을 도모하고 이웃한 진번군과 임둔군 등을 복속시켜 고조선 역사상 가장 융성했던 나라가 되었다)이 기자조선을 대신했는데, 위씨조선은 여전히 한(漢) 왕조의 종속국이었다.

기원전 108년(원봉 3년) 한나라는 위씨조선을 멸망시키고 낙랑 등 4군을 설치해 한반도 중부 이북을 포함한 동북지역을 중국의 중원(中原) 지역과 같은 방식으로 통치하였다(한나라의 무제는 기원전 108년 위만조선을 멸망시킨 후 바로 낙랑·임둔·진번 3군을 설치하였고 그 다음해 현도군을 추가해 4군을 만들었다). 한나라로부터 당나라 때까지 고구려에 대한 중국 각 왕조의 관리 방식은 각기 달랐지만 중국의 통치자들은 고구려의 활동지역을 중국의 전통적인 영토로 생각하였다.

수나라 때 만들어진 ‘배구전(裴矩傳)’이라는 책을 보면 “수나라의 통치자는 ‘고구려의 영토는 원래 고죽국(孤竹國 : 중원에서 멀리 떨어진 땅)이다. 주나라 때 이 땅을 기자에게 봉했다가 한나라 때는 3군으로 나눴다. 진(晉)나라 시절에도 여전히 요동(요하 동쪽으로 동북과 같은 말이다) 지역은 진나라의 관리를 받았다. 그런데 지금은 더 이상 신하로 칭하지 않고 별개의 외지가 되었다. 그래서 선제(先帝)께서는 이를 못마땅히 여겨 고구려를 계속 정복하고 싶어했다’고 말했다”는 대목이 있다.

또 ‘책부원귀(冊府元龜)’ 제왕부(帝王部) 친정이(親征二)에는 “당 태종 또한 ‘요동은 원래 중국의 토지인데 주나라 때부터 위나라 때까지 그다지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 수나라의 왕은 일찍이 네 번이나 군대를 파견해 공격한 적이 있으나 모두 패하고 돌아왔고 고구려인은 많은 중국 평민을 죽였다. 지금 고구려인은 국왕을 살해하고 굉장한 자만에 빠져 있다. 나는 밤새 이 일을 생각하느라 잠을 이루지 못했다. 나는 죽은 중국 사람들의 자녀를 위해 복수할 것이다. 고구려인들을 도와 왕을 죽인 자들을 토벌할 것이다. 지금 비록 중국 대부분의 토지는 평정되었지만 단 하나 이곳만 평정되지 않았다. 우리는 또 한번 남은 병사의 힘으로 그 땅을 소탕하여 평정할 것이다. 후대의 우리 자손 중에는 강한 군대가 나올 것이고 반드시 재능 있는 인재가 나올 것이다. 나는 그들을 설득하여 반드시 요동을 토벌하러 가게 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아직 늙지 않았으니 내가 직접 토벌하러 가고 싶다. 이렇게 하면 우리 후손들에게 그 일을 시키지 않아도 될 것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는 내용이 있다(‘책부원귀’는 서기 1005년 송나라 정종 때의 왕흠약과 양억 등이 왕명을 받들어 편찬한 유서이다).

“원래는 중국 것이다” “비록 중국 대부분의 토지가 평정되었지만 단지 이 한곳만 평정되지 않았다”는 말은 당 태종이 고구려 지역을 전통적인 중국의 영토로 간주하고 있었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고구려와의 통일을 실현하는 것은 곧 “중국의 영토를 평정한다”는 최후의 사명을 완성하는 것이었다. 수나라와 당나라의 왕조가 전력을 기울여 고구려와의 통일을 이룩하려고 한 이유도 바로 이것 때문이었다.

책봉받고 조공 바친 고구려

네 번째, 고구려 또한 중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원하지 않았다.

700여년 동안 고구려는 동북 변방지역에서 독립하려고 하지 않았다. 고구려가 자신에게 스스로 부여한 위치는 중국 중앙왕조의 변방정권이었으며, 고구려는 중국이 3국시대(蜀漢·魏·吳나라로 나뉘어 소설 ‘삼국지’의 배경이 된 시기)와 양진시대(兩晉: 魏나라의 신하로 있던 사마염이 조조의 후손인 조한으로부터 황제의 자리를 빼앗아 265년 지금의 낙양에 晉나라를 세웠다. 그러나 晉나라는 4대 만에 흉노 등 북방민족의 공격을 받아 326년 멸망하였다. 그 이듬해 사마예는 동쪽으로 옮겨가 지금의 남경에 다시 晉나라를 세웠는데, 이 진나라는 419년까지 존속하였다. 사마염이 세운 진은 西晉, 사마예가 건국한 진은 東晉이라고 하고 이를 합하여 ‘兩晉’이라고 한다), 그리고 남북조 시대(東晉 이후 지금의 남경에는 차례로 宋·南齊·梁·陳나라가 건국되었다. 반면 북쪽에서는 北魏-東魏·西魏-北齊·北周가 들어서 대립하게 된다. 이렇게 남북으로 갈린 상태에서 여러 나라가 멸망하고 대립한 때를 남북조 분열시대라고 한다. 남북조 분열시대를 통일한 것이 隋나라다)로 크게 분열돼 있을 때도 스스로 중국의 중앙왕조에 대해 종속관계를 유지하였다. 그뿐 아니라 고구려는 책봉을 받았고 조공을 바쳤으며 질자(質子: 인질)를 보냈다.

‘통전(通典)’ 변방(邊方) 고구려를 보면 고구려의 왕은 동진(東晉)과 송(宋)·제(齊)·양(梁)·후위(後魏)·후주(後周) 시대까지 중국 남북의 두 왕조로부터 작위를 책봉받았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 또한 같은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통전’은 당나라 때 두우가 黃帝부터 당나라 현종까지의 문물제도 전반에 대하여 기술한 책).

‘亡國의 恨’ 품지 않은 고구려인

당나라가 세워진 후 고구려는 당으로부터 책봉을 받았으니 이는 고구려의 왕조가 당의 승인을 분명히 받았다는 증거이고 중국으로부터 자주 독립을 하지 않으려 했다는 뜻이다. 이러한 인식이 있었기 때문에 당나라가 고구려를 통일하자, 많은 고구려인들은 당나라에 대해 ‘망국(亡國)’의 한을 품지 않았던 것이다.

오히려 고구려인들은 당나라에 통합된 후 당나라의 통일 대업을 지키기 위한 전쟁에서 공로를 세워 역사에 이름을 남기기까지 하였다. 신·구 ‘당서(唐書)’에 이름을 남긴 천남생(泉男生)·고선지(高仙芝)·왕모중(王毛仲)·왕사례(王思禮)·이정기(李正己) 등이 그들인데, 신·구 ‘당서’에는 이들의 전기가 기록돼 있다.

다섯 번째로 멸망 후 고구려인의 이동 방향을 살펴보자. 고구려는 당 고종 총장 원년인 서기 668년 멸망했는데 ‘신당서’고려전에는 고구려를 멸망시킨 당나라가 고구려 난민 ‘69만호’를 받아들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 숫자는 당시 고구려의 총 가구수였겠지만, 여기에는 비고구려인 가구도 적잖이 포함돼 있었다. 당시의 고구려족 가구는 15만호 정도였기 때문이다.

학자들은 고구려가 패망한 후 고구려인들은 네 방면으로 이동했다고 보고 있다. 중원 각지로 유입된 고구려인이 있었고, 신라로 간 고구려족이 있었으며, 말갈(발해)에 의탁한 고구려인이 있었고, 돌궐로 거주지를 옮긴 고구려인도 있었다.

중국 학자들의 최근 연구 성과에 의하면 멸망시 고구려인 숫자는 대략 70만명 정도였는데 이 가운데 30만명이 중원 각지로 유입되었다고 한다. 신라에 귀의한 사람은 10만 정도였고, 말갈(발해)에 의탁한 사람은 10만 이상, 돌궐로 옮겨간 고구려인은 1만여 명이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이렇게 하면 대략 50만명 정도가 네 방면으로 이주한 셈이 되는데, 나머지 20만명은 요동 각지로 흩어져 유민(遺民)이 되고, 전쟁 와중에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숫자를 더하면 대략 70만이라는 숫자가 나온다.

신라로 유입된 고구려인은 용흥강(함경남도를 흘러 동한만 쪽 동해로 흘러드는 강) 이남의 한반도로 유입돼 살던 10만여 명이었는데 이들은 신라로 유입돼 반도 민족에 융화되었다.

그러나 나머지 대다수의 고구려인은 한족(漢族)에 융화되었다. 이러한 점으로 볼 때 고구려 민족을 중국 동북지방에 등장했던 변방민족으로 보는 것이 역사적인 사실에 가장 부합된다고 할 수 있다.

[2. 왕씨(王氏) 고려는 결코 고구려의 계승자가 아니다]

서기 918년 한반도에서 ‘고려’라는 이름의 정권이 출현하였다. 그 통치자의 성(姓)이 왕씨였기 때문에 학계에서는 이를 ‘왕씨 고려’라고 부른다. 비록 왕씨 고려는 고구려의 칭호를 계승했지만, 고구려의 승계와는 직접적인 관련이없다.

고구려가 패망하고 고려가 세워지기까지는 큰 시간 차이(250년)가 있을 뿐 아니라 역사 발전과 연원도 크게 다르다. 기원전 37년에 세워진 ‘고씨 고려(고구려)’는 서한(西漢)의 현도군 고구려현 관할하에 있었다. 그후 점차 강성해졌지만 중국 중앙왕조와의 종속관계를 끊지 않았다. 수·당 시기로 접어들어 고구려는 영토 확장정책을 실시해 한반도에 있는 기타 정권(삼한과 신라·백제 등)이 중원의 왕조에 조공하는 통로를 가로막아, 수·당 두 왕조로부터의 토벌을 불러들였다.

서기 668년 당나라는 마침내 ‘고씨 고려’를 통일함으로써, 고씨 고려의 영토는 당나라 안동도호부(최초의 행정중심은 지금의 평양)에 의해 관할되었다. 그리고 몇십 년 후 고씨 고려가 관할하던 구역에 중국 역사에 등장하는 또 하나의 지방정권인 ‘발해’가 들어섰고, 고씨 고려가 관할한 다른 일부분 지역은 한반도 남부에서 일어난 신라 정권에 귀속되었다. 하지만 이를 제외한 부분은 여전히 안동도호부에 의해 관할되었다.

고려는 三韓을 이었다

대부분의 고구려족은 당나라에 의해 내지(內地: 중국)로 옮겨져 한족과 융합되었으며 나머지 고구려인은 주위의 각 민족에 융합되었다. 이로써 고구려 왕족은 후계자가 끊겼으니 고구려는 나라를 세운 지 700여 년 만에 드디어 중국 역사발전의 긴 강 속으로 사라지게 된 것이다.

왕씨 고려가 건국한 것은 고씨 고려가 멸망한 때로부터 250년 후인 서기 918년이었다. 왕씨 고려는 서기 935년 한반도에 있던 신라 정권을 대치하였고 그 이듬해에 후백제를 멸망시켜 반도 중남부의 대부분을 통일하였다.

그러다 서기 1392년에 왕씨 고려의 신하인 이성계(李成桂)가 왕을 폐위하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1393년 이성계가 ‘조선과 화녕(和寧) 중에서 어느 것을 국호로 해야 하는가’라는 주청을 올리자, 명나라 왕은 이성계에게 조선 왕을 하사하였다.

그리하여 왕씨 고려는 국호를 조선으로 바꾸게 되었는데 중국 학계에서는 이를 ‘이씨 조선’, 줄여서 ‘이조(李朝)’라고 부른다. 이것이 바로 명(明)·청(淸) 시기의 조선국이었다.

그 다음으로 살펴볼 것은 왕씨 고려와 고씨 고려는 관할 구역 내의 주민 구성이 다르다는 점이다. 고씨 고려 관할지역 내의 주민은 고구려족이 주력이었다.

고구려족의 연원은 중국 상고시대부터 있었던 민족인 예맥족이 동쪽으로 이동해 부여·고이·옥저·소수맥(小水貊: 압록강의 북쪽에 있는 혼강에 고구려를 세운 종족. 주몽을 따라 나라를 세운 종족을 맥족이라고 하는데 그중에서 大水인 압록강 유역의 맥족을 대수맥, 小水인 혼강 쪽의 맥족을 소수맥이라고 한다)·동예(東濊: 동해안 지역에 거주한 고구려족의 일파) 등이 되었는데 그후 위씨조선의 후예와 한족(漢族)·선비(鮮卑: 고대 남만주 몽골 등지에 살았던 유목 민족)족 등이 들어가 융합하였다.

많은 민족으로 구성됐지만 이들은 장기간 공동생활을 하면서 점차 융화돼 하나가 되었다. 역사서(史書)와 학계에서는 이들을 일반적으로 고구려족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왕씨 고려 관할지역 내의 주민은 신라인 위주였다. 왕씨 고려는 신라와 후백제를 병합하였으므로, 신라인과 백제인이 왕씨 고려의 주요 주민이 되었다.

대부분의 신라인은 한반도 남부지역에 있었던 진한과 변한인에 뿌리를 두고 있다. 고씨 고려 멸망 후 비록 일부 고구려인이 신라로 유입되기는 했으나 이들은 신라의 주력을 이루지는 못했다.

백제인은 대다수가 한반도 남부에 있었던 마한인에 뿌리를 두고 있다. 따라서 왕씨 고려는 한반도 남부에 있었던 ‘삼한인(三韓人)’이 중심이 된 나라라고 할 수 있다.

수많은 역사서들은 왕씨 고려인과 중국의 옛 사람들이, ‘왕씨 고려는 삼한의 후예다’라고 기록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수백년간 계속된 왕씨 고려 왕조의 역사 발전 속에서 구성원들은 점차 하나의 민족으로 융합되어가는데, 역사서와 학계에서는 이들을 ‘고려족’으로 부르고 있다. 왕씨 고려가 이씨 조선으로 이어졌으므로 조선은 민족 명칭이 되어 오늘날까지 사용되기에 이르렀다.

왕건은 낙랑군에 있던 漢族의 후예

마지막으로 왕씨 고려는 고씨 고려의 후예가 아니다. 왕씨 고려의 왕족은 고씨 고려의 후예가 아니었다. ‘고려사’를 쓴 사람은 왕건(王建)의 족속에 관해서 “고려의 선조는 역사에서 상세히 설명돼 있지 않다”라고 적었다. 그러나 중국학자가 고증한 바에 의하면 왕건은 서한(西漢) 시절 낙랑군에 있었던 한인(漢人)의 후예일 가능성이 아주 높다고 한다.

그 근거로 왕씨는 낙랑군의 명문 귀족이었고 가호가 많았던 점을 들 수 있다. 왕건은 임종시에 남긴 가르침인 ‘십훈요(서기 943년 고려 태조 왕건이 자손들에게 귀감으로 남긴 열 가지 유훈. ‘훈요십조’라고도 한다)’에서 자신은 고씨 고려의 후예라고 언급하지 않았다. 오히려 왕건은 자신은 평민 출신이며 ‘삼한 산천의 보호에 의지한다’라고 말했다. 그는 마한·진한·변한을 통일한 것이니 후계자들 또한 삼한을 소유하길 바랐던 것이다.

왕건이 고씨 고려의 후예였다면 그는 통치를 위해서라도 그 사실을 대대적으로 선전하였을 것이다. 이것은 아주 상식적인 이치인데 왕건은 그렇게 하지 않았으니 이는 왕씨 고려가 고씨 고려의 후예가 아니라는 좋은 반증이다.

왕씨 고려는 결코 고구려의 계승자가 아니었다. 한대(漢代) 한반도에서 일어난 마한·진한·변한은 신라와 백제로 발전해갔고, 백제는 당나라에 의해 멸망하였으며, 신라는 왕씨 고려가 대신하게 되었다.

그후 이조가 왕씨 고려를 대신해 최종적으로는 이씨 조선으로 발전하였다. 이러한 정권들의 강역(疆域: 영토) 범위는 한 번도 한반도를 벗어난 적이 없었다.

[3 . 고구려와 왕씨 고려의 역사가 혼돈된 원인]

사람들이 왕씨 고려를 고구려의 계승자로 잘못 보게 된 이유는 중국의 역사기록과 깊은 관계가 있다. 반고(班古: 후한 초기의 역사가. 서기 32~92년)가 쓴 ‘한서(漢書)’는 중국 정사(正史) 중의 하나로 고구려의 사적에 대해 제일 처음 기술했다. 진수(陣壽: 중국 西晉의 역사가. 서기 233~297년)가 편찬한 ‘삼국지’는 처음으로 고구려를 ‘전기(傳記)’에 넣은 역사서다. ‘구당서’와 ‘신당서’에 이르기까지 많은 역사서는 ‘동이전’ 혹은 ‘만이전(蠻夷傳)’ 속에 고구려의 전기를 기술하였다.

이 역사서들은 비록 구체적인 사건을 기록하는 데 있어 약간의 실수를 범하고 있지만, 고구려의 역사 위치를 명확히 정해놓고 있다. 그런데 후대에 이르러 사서의 기록이 혼란스러워지면서 명백한 실수가 나오기 시작했다.

왕씨 고려는 서기 918년에 나라를 세우고 1392년 이씨 조선으로 교체되었는데, 이 시기는 중국의 오대(五代) 중기에서 명나라 초기에 해당한다(五代는 五代十國의 약어로 당나라가 멸망한 907년부터 송나라가 통일한 960년 사이의 약 70년간 중국이 여러 나라로 분열되었던 시기다).

따라서 ‘구오대사(舊五代史)’와 ‘신오대사’ ‘송사(宋史)’ ‘요사(遼史)’ ‘금사(金史)’ ‘원사(元史)’ ‘명사(明史)’ 등의 역사서에는 모두 ‘고려전’이나 ‘조선전’이 등장한 반면 고씨 고려에 대한 기록은 그 이전의 역사서에 비해 약술하게 되었다.

‘舊五代史’로부터 시작된 오류

이러한 역사서의 기록을 종합해보면 ‘구오대사’와 ‘신오대사’는 가장 먼저 고씨 고려를 왕씨 고려전에 기록한 책이었다. 그리고 ‘송사’는 “왕건이 고씨의 자리를 계승하였다(王建承高氏之位)”라는 표현을 최초로 사용한 책이다. ‘구오대사’와 ‘신오대사’ 그리고 ‘송사’에 등장하는 이 기록은 그 후에 나온 여러 역사서의 기록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게 되었다.

‘구오대사’의 고려전은 약 240자로 되어 있는데, 여기에는 “당나라 말년 중국에서는 내란이 많았다. 그래서 고려인은 스스로 군장(君長: 왕이나 우두머리)을 세웠는데 이들의 이전 왕(前王)의 성은 고씨였다”라고 적었다. ‘구오대사’는 고려인이 군장을 세웠는데 전왕은 고씨였다고 묘사한 후 바로 왕씨 고려에 대한 기록을 이어갔으니, 왕씨 고려가 고씨 고려를 잇는 것으로 오해될 수 있는 소지를 만들어준 것이다.

‘신오대사’의 고려전은 약 280자로 돼 있는데 그 첫머리에는 “고려는 본래 부여인의 별종(別種)이다. 그 나라와 군주 등에 관한 기록은 ‘당서(唐書)’에 기재되어 있는데, 이들은 다른 이적(夷狄: 오랑캐)과 달리 성씨가 있었고 관직의 호칭을 대략적이나마 알 수 있었다. 당 나라 말년에 (이들은) 왕씨 고려가 되었다”라고 서술한 후 모두 왕씨 고려에 대한 기록을 남겼다(이러니 왕씨 고려는 고씨 고려를 잇는 것으로 오해될 소지가 있다는 의미임).

‘구오대사’는 북송(北宋) 사람인 설거정(薛居正)이 감수하여 북송 초기인 서기 973~974년에 걸쳐 편찬되었다. 이 시기 중국은 반세기 동안이나 분열 국면(5대10국)이 계속되고 있었으며 통일전쟁도 진행되고 있었다. 이런 이유 때문에 ‘구오대사’ 고려전의 기록은 간략해졌을 뿐만 아니라, 잘못 기재된 곳이 많았다. “당나라 말년 중국에서는 내란이 많았다. 그래서 고려인은 스스로 군장을 세웠는데 전왕의 성은 고씨였다”는 기록이 바로 그런 예에 해당한다.

‘구오대사’ 고려전에 나오는 이 기록을 오류로 단정하는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는 조선에서 나온 한문 역사서를 포함한 어떠한 역사서를 찾아봐도 고씨가 당나라 말년에 고려 정권을 세웠다는 기록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둘째로는 송나라 사람인 사마광(司馬光: 중국 북송 때의 정치가이자 사학자. 서기 1019∼1086년)이 ‘자치통감(資治通鑑)을’ 편찬할 때 위에 언급한 글들을 전혀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점이다.

사마광이 이러한 태도를 취했다는 것은 이 기록들이 잘못된 것임을 명백히 보여주는 것이다. ‘구오대사’를 감수한 설거정은 고씨 고려와 왕씨 고려 사이의 관계를 분명히 밝히지 못했는데 이러한 오류는 ‘신오대사’의 저자인 구양수(歐陽脩: 송나라의 정치가이자 문인. 서기 1007∼1072)에 의해 해결되었다.

구양수는 ‘신오대사’를 편찬할 때 많은 소설(小說)과 필기자료를 참고하여 사람과 사건에 대한 묘사를 생동감 있게 집어넣었다. ‘구오대사’ 고려전은 고씨 고려에 관해 간략히 기술하였으며 왕씨 고려의 건국 근원을 밝히고 있다. ‘구오대사’ 고려전에서 ‘당 나라 말년에 중국에서는 내란이 많았다. 그래서 고려인은 스스로 군장을 세웠다”는 단락이 ‘신오대사’ 고려전에서는 “조금 후에 스스로 나라를 세웠다”로 간소화되었다.

그후(‘신오대사’가 나온 이후) 편찬된 ‘신당서’ 고려전과 ‘구당서’ 고려전에는 이러한 기록이 없어지고 오히려 ‘고씨 왕족이 사라졌다’는 말이 들어갔는데, 이는 고려 왕족의 후계가 끊어졌음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宋史’가 잘못 기록

원나라 사람 탈탈(脫脫) 등이 편찬한 ‘송사’는 고려전을 따로 한 권의 책으로 기록해놓고 있다. 여기에는 “고려는 본래 고구려이고 땅은 구주(九州: 중국 전토. 夏의 시조인 禹가 중국을 아홉 개 주로 나누었다는 데서 유래)와 달라 기주(冀州: 중국의 동북지방)의 땅에 속한다. 주나라 때는 기자(箕子)의 국토였고, 한나라 때는 현도군이었다. 고구려인은 요동에서 생활하였는데 대개 부여인의 한 별종이었으며 평양성을 수도로 삼았다. 한나라 이래로 늘 중국에 공물을 바쳤다. 그러나 자주 변경에서 난을 일으켜 수 양제는 두 번 군사를 일으켰고 당 태종도 직접 토벌하러 갔으나 모두 실패하였다. 당 고종은 이적에게 고구려를 정복하도록 명령하니 이적이 드디어 성을 함락시키고 그 땅을 군현(郡縣)으로 나누었다. 당나라 말년 중국에 내란이 많아지자 고려인은 스스로 군장(君長)을 세웠다. 후당(後唐) 동광(同光) 천성(天成) 때 고려 국왕 고씨는 자주 후당 왕에게 공물을 바쳤다. 후당 장흥왕 때 권지국사(權知國事: 아직 왕호를 인정받지 못하는 동안 우선 임시로 국사를 맡아 다스린다는 뜻의 칭호) 왕건이 고려의 왕위를 계승하였고 사신을 중국으로 파견하여 조공을 바쳤다…”는 기록이 있다.

이 내용 다음에는 왕씨 고려가 송 왕조와 교류한 것에 대한 사실이 기록돼 있다.

이러한 내용으로 볼 때 ‘송사’ 고려전은 앞부분에서 ‘신·구오대사’의 기술을 종합하고 이러한 기초 위에 두 역사서의 작자가 명확히 밝히지 않았던 왕씨 고려와 고씨 고려 간의 관계를 “왕건이 고씨 고려왕의 자리를 계승하였다”고 함으로써, 고씨 고려와 왕씨 고려가 계승 관계에 있는 것처럼 기술했다.

‘요사’ ‘금사’도 원나라 사람 탈탈 등이 편찬한 것이기 때문에 이와 유사한 잘못이 발견된다.

그후에 나온 역사서들은 이렇게 잘못된 기술을 답습하였다. ‘명사(明史)’는 이전에 나온 잘못된 역사서보다 한 발 더 나갔다. ‘명사’는 명 왕조가 이성계를 조선의 국왕으로 책봉한 것에 대해 합리적인 해석을 하려다 보니 앞의 몇몇 역사서가 저지른 오류를 답습했을 뿐만 아니라, 이씨 조선 정권의 연혁에 대해서도 아주 잘못된 계통을 세워주었다(‘명사’는 청나라 때 장정옥 등이 칙령을 받아 1679년부터 1735년에 걸쳐 기전체로 편찬한 336권의 역사서).

기자조선~고구려 넘겨준 ‘明史’

즉 ‘명사’는 “기자조선-위씨조선(위만조선)-한사군-고구려-동사복국(東徙復國: 패망한 고구려의 후예들이 동쪽으로 옮겨가 세웠다는 나라. 대체로 발해로 이해되고 있다)-왕씨 고려-이성계가 국호를 바꾸기 전의 고려-이씨 조선”으로의 계통을 세워줌으로써, 중국 역사에 속하는 기자조선과 위씨조선·한사군·고구려를 모두 조선의 역사 속으로 들어가게 하였다.

이렇게 중국 역사서에서 기술에 오류가 발생한 이유는 다방면으로 생각해 볼 수 있는데, 전란으로 문헌이 유실된 데다 왕씨 고려에 대한 오도(誤導)가 가장 중요한 원인으로 볼 수 있겠다. ‘속자치통감장편(續資治通鑑長編)’의 권 323, 송 원풍 5년(서기 1082) 2월 기사(己巳)일에는 이런 내용이 실려 있다.

사관수찬인 증공은 “내가 사서를 고찰해 보니 주몽은 흘승골을 수도로 한 후 국호를 고구려로 정하였다. 고구려의 왕은 고씨를 성으로 삼았다. 당나라 고종 때 고구려 왕인 고장(高藏: 고구려의 마지막 왕으로 보장왕으로 불림. 재위 기간은 642∼668년)은 국가를 잃고 서쪽으로 천도했다. 당나라 성력(서기 698∼699년) 시기에 고장(보장왕)의 아들인 고덕무(高德武)가 스스로 국가를 세웠다(고덕무는 699년 당나라가 만든 안동도호부의 안동도독에 임명되었는데, 그가 小고구려를 세운 시조라는 주장도 있다). 고구려는 원화(元和) 말년까지 악사를 중국에 보내왔으나 그 이후로는 그러한 기록이 중국 역사서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 오대 동광(同光)·천성(天成) 시절 고씨 성을 가진 고려 왕이 와서 다시 조공을 하였으나 그 이름은 알지 못한다. 장흥 3년 권지국사(權知國事)인 왕건이 사신을 파견하여 조공을 하였고 이로 인해 왕건을 왕으로 삼았다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왕위를 왕건의 아들인 왕무(王武: 혜종)를 거쳐 왕무의 아들 왕소(王昭: 광종), 왕소의 아들 왕유(王由: 경종), 왕유의 동생 왕치(王治: 성종), 왕치의 동생 왕송(王誦: 목종), 왕송의 동생 왕순(王詢: 현종) 등으로 이어갔다. (이렇게 왕씨들이 왕위를 이어갔기 때문에) 고구려는 주몽에서 고장까지의 21대에 걸쳐 700년간 고씨 성을 이어간 후 멸망한 나라였음을 고증할 수 있다. 고구려는 국가를 잃은 후 또 하나의 국가(小고구려 등을 말하는 듯)를 세웠다. 하지만 왕의 이름과 순서, 흥망의 본말(本末)과 왕건이 나라를 세웠을 때의 일들은 알 방법이 없다”고 말했다.

그 후 왕씨 고려는 송 왕조에게 왕씨 고려와 고씨 고려를 연결해달라는 하나의 ‘고려세차(高麗世次: 고려 왕의 차례)’를 바친다. 여기서 송나라 사람들은 왕씨 고려와 고씨 고려에 대한 인식이 모호해졌음을 알 수 있게 된다. 왕씨 고려가 바친 고려세차는 한 걸음 나아가 사실을 오도하는 작용을 했다.

‘고려’와 ‘조선’이라는 명칭을 도용

중국 사서들이 명백한 오류를 범함으로써 중국의 고대 변방민족이 사용하던 ‘고려’라는 명칭을 삼한(三韓) 신라의 계승자인 왕씨 정권이 도용하게 되었고, 한 발 더 나아가 왕씨 정권의 계승자인 이조(李朝)는 기자조선이 쓰던 ‘조선(朝鮮)’이라는 이름을 또 도용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현대인들은 중국 고대 동북지역에 있었던 변방정권의 연혁을 이해하는 데 있어 많은 혼란과 잘못된 견해를 갖게 되었다.

연구를 진행하는 데 있어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은 자료이다. 양보륭(楊保隆)은 1987년 제1기 ‘민족연구(民族硏究)’에 게재한 ‘고구려전을 싣고 있는 여러 역사서에 대한 몇 가지 문제 판별 방법(원제 各史高句麗傳的幾個問題辨析)’이라는 제목의 논문에서 매우 유익한 연구를 시도했다. 그러나 앞으로 해나가야 할 연구과제는 많기만 하다.

고구려사에 대한 연구를 정상적인 학술연구 범주에 넣어야 한다는 것이 우리의 일관된 주장이다. 우리는 고구려사 연구에서 발견되는 역사 문제를 ‘현실화하는 것’과, 학술문제를 ‘정치화하려는’ 경향과 작태에 대해 반대한다(고구려를 중국 역사로 분류하려는 중국측의 고구려사 연구에 한국측이 반대한다는 뜻인 듯). 고구려사는 중국 역사는 물론이고 한반도 역사를 연구하는 데 있어 계속해서 깊은 연구를 요구하는 과제이다.

심도 있는 연구를 하는 것은 과학적인 연구결과를 학계에 제공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고구려사를 연구하고 이를 심화하는 것은 학자의 책임이다. 연구한 결과에 대한 차이로 인해 일시적으로는 통일된 결론을 도출할 수 없을지라도, 학술 규범에 부합하는 규칙으로 학술 성과를 교류하고, 상호 존중하는 가운데 학술상의 논쟁을 벌여 서로 다른 의견을 개진할 수 있어야 한다. 이렇게 할 수만 있다면 여러 나라의 학자가 고구려 역사에 대한 연구에 공동의 노력을 기울일 수 있게 될 것이고, 그에 따라 큰 진전이 있으리라 생각한다.

 

 

 

 

 

Posted by 원주유
고구려 역사와 문화2013. 9. 14. 17:35

 

안시성 전투 승리로 이끌다.

수 양제는 살수 대첩 이후에도 몇 번 더 고구려를 공격했지만 모두 실패했다.

이 때문에 전쟁에 시달린 백성들의 원성만 높아졌다. 결국 수나라는 망하고,당나라가 둘어섰다.

살수 대첩이 있은 지 32년 뒤인 644년, 이번에는 당나라 태종이 10만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를 공격해 왔다.

당나라 군대는 요동 반도에 자리잡고 있던 안시성을 포위했다.

안시성은 작은 성이지만 매우 중요한 곳이었다.

이곳을 빼앗기면 요동은 완전히 당나라의 수중에 들어가게 된다.

그러나 안시성은 호락호락 넘어가지 않았다. 성주 양만춘의 지휘 아래 성 안의 백성들과 군사들은 한마음 한뜻이 되어 싸웠다. 당 태종은 별별 수단을 다 써 보았지만 번번히 실패했다.

당나라 태종은 할 수 없이 퇴각 명령을 내렸다.

마침내 88일 만에 안시성을 지키던 고구려군은 승리를 거두었다.

 

고구려 고연수[高延壽]

생몰년 : 미상
고구려 말기의 장군.
645년(보장왕 4) 당나라 태종이 직접 지휘하는 대군이 안시성을 공격할 때 북부욕살로 있으면서 출전하였다.

이 해 당태종은 안시성을 공략하기 위하여 6월 11일 요동성을 출발하여 20일에 안시성 교외에 이동하여 전투를

벌이기 위하여 준비를 하고 있었다. 안시성의 고구려 민·군들은 당 태종의 군사와 공방전을 벌일 태세를 갖추었다.
고연수는 남부욕살 고혜진(高惠眞)과 함께 6월 21일에 안시성을 지원하기 위하여 고구려군과 말갈병을 포함한

15만의 증원병력을 이끌고 안시성 동남쪽 근교에서 전열을 가다듬었다. 이때 고구려 증원군 대열에 참가한 대로

고정의는 군중의 연장자로서 자신의 오랜 경험을 바탕으로 총사령관 고연수에게 지구전을 펼 것을 건의하였다.
그러나 고연수는 고정의의 전략을 귀담아 듣지 않고, 곧바로 군사를 이끌고 안시성에서 불과 60여리 떨어진

지역으로 진출하여 당군의 움직임을 주시하였다. 당군과 정면 대결을 하기 위한 것이었다.
당태종은 고구려군을 유인하기 위하여 소규모의 돌궐 기병 1천기를 고구려군 진영으로 출격시켰다. 이는 고구려군

진영 전면으로 진출하여 교전이 시작되자 접전과 퇴각을 반복하는 유인작전을 폈다. 고연수는 당군측이 고구려군을

유인하기 위하여 내보낸 돌궐 기병이 약세를 보이면서 퇴각하자, “당군은 상대하기 쉬운 것들이다.”라고 속단하고

총력을 기울여 추격하도록 전군에 명령을 내렸다. 고구려군은 안시성 동남방 10여 리 지점까지 진출한 후 전열을

가다듬고 당군과의 결전태세를 갖추기 시작하였다. 당태종은 고구려군 증원부대의 진영이 내려다보이는 고지로

올라가 군세를 관측하였다. 고구려병과 말갈병으로 혼성된 고구려군의 진영은 무려 60여리에 뻗쳐 있는 것을

확인하였다. 이에 당태종은 위장전술로 승부를 걸기로 하고 고연수에게 서신을 전달하였다. 그는 당이 고구려에

온 것이 연개소문이 임금을 시해한 것을 문책하기 위하여 온 것이기 때문에 교전을 바라는 것이 아니며,

또 몇 성을 점령한 것은 군량과 말먹이를 주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고구려군 총사령관인 북부욕살 고연수는 당태종의 이같은 서신 내용을 믿고 경계태세를 소홀히 하였다. 그러자

당 태종은 6월 21일 밤에 문무백관들과 고구려군을 격파할 대책을 토의한 후 작전명령을 내렸다. 고구려와 당은

안시성에서 공방전을 벌였다. 고연수의 고구려군은 3면에서 공격하는 당군의 공격에 혼란에 빠졌다. 고구려군은

2만여명의 사상자를 내고 안시성 동쪽으로 패주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군은 안시성 동쪽 강에 설치된 교량을

모두 철거하여 고구려 증원군의 퇴로를 차단하자, 고연수와 고혜진은 6월 23일 결국 3만 6천 8백여명의 군사를

수습하여 당군 진영에 투항하였다. 뒤에 당나라로부터 홍여경이라는 벼슬을 받았으나, 항복한 것을

탄식하다가 죽었다


 

동북 공정 : 중국의 고구려 역사 빼앗기

고구려는 중국 내에 존재했던 지방정권이다.” 지난해 7월 중국 광명일보에 실린 한 시론에서 제기한 주장이다. 이 시론의 결론은 고구려사는 중국사의 일부이며, ()민족과는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고구려가 우리의 역사라는 걸 너무 당연하게 생각해온 우리에게는 얼토당토 않는 이야기이지만, 중국은 이런 주장을 역사적 사실로 자리매김하기 위해 정부 차원에서 무려 3조원의 예산을 투입해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고 한다. 이른바 동북공정(東北工程)이라는 연구 프로젝트가 바로 그것이다.

이러한 주장이 몇몇 학자가 학문적 연구를 통해 제기한 학설 수준이 아니라, 중국 정부 차원에서 진행하는 대규모 연구 프로젝트와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국내 언론과 역사학계, 시민단체 등에서는 이를 중국의 역사 빼앗기 공작, 한중간의 역사전쟁, 2의 나당전쟁 등으로 규정하고 있다.

또한 북한 고구려 고분군의 유네스코 세계 문화 유산 등록이 연기되었다는 점, 최근 중국이 환인과 집안지역에 있는 고구려 유적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하기 위해 대대적인 보수작업을 벌이고 있는 점, 고구려 유적지에 한국인의 출입을 통제하고 있다는 점 등 최근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이 중국의 고구려사 편입 시도와 결코 무관하지 않을 것으로 보고 있다.

국내 학계는 중국측의 이러한 움직임을 두고 고구려 역사 빼앗기에 본격적으로 착수했다고 전망하는 것이다.

중국은 무엇 때문에 고구려 역사를 자국사로 편입하려 할까? 그리고 이런 주장을 하기 위해 중국 학자들이 내세우는 근거는 무엇인가? 이러한 움직임이 갖는 의미는 무엇일까?

동북공정이란

중국의 고구려사 편입 시도에 대해 학자들은 중화 민족주의, 신패권주의 등으로 설명한다. 즉 중국은 진한 이후 줄곧 통일된 중앙집권적 국가이며, 계속 한족을 주체로 해서 소수민족을 끌어들인 다민족 국가였다는 일관된 입장을 가져왔다라고 지적한다. 이러한 입장으로 발해사를 일찌감치 중국사의 일부로 편입시켰으며, 고구려사에 대해서는 한국(북한 포함)의 역사에서 지워버리려고 노력했다. 그러다가 1980년대 후반부터는 고구려사까지 중국사로 보려는 움직임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1980년대 이후에는 현재 중국영토 안에서 이루어진 역사는 모두 중국 역사라는 다민족 통일국가론이 강조되면서, 고구려는 중국사의 일부라는 주장이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고 한다. 이런 배경에서 탄생한 게 바로 동북공정(동북변강의 역사와 현상계열 연구공정)이다. 중앙(정부)의 허가를 받아 사회과학원과 길림성, 요녕성, 흑룡강성 등 동북 3성이 2002년부터 5년 기한으로 동북공정을 발족했다.

한반도 정세변화에 대비

이 프로젝트의 주요 연구내용은 고대 중국 강역이론 연구, 동북 지방사 연구, 동북 민족사 연구, 고조선 고구려 발해사 연구, 중조 관계사 연구, 중국 동북 변강사회 안정전략 연구, 한반도 정세변화 및 그에 따른 중국동북 변강 안정에 대한 영향 연구 등이다.

이들 과제명에서 알 수 있듯 거의 남북한과 관련된 내용들로, 한반도와 남북한의 학문적 정치적 움직임을 겨냥한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분석한다. 즉 남북 통일이나 북한 붕괴와 같은 사태가 동북지구의 조선족 사회에 초래할 혼란을 막기 위해서이고, 더 나아가 고조선, 고구려, 발해사가 중국 역사라는 논리를 개발함으로써, 남북통일 이후 불거져 나올지 모르는 국경 영토분쟁에 효율적으로 대비하는 데 있다는 점 등이다.

넓게는 중국의 소수민족 정책에서 그 원인을 찾는다. “현대 중국을 구성하는 56개의 다민족의 단결을 도모하고, 전체 인구의 8.1%에 지나지 않는 55개 소수민족이 차지하는 전국토의 60%가 넘는 지역을 중국의 정통이 되는 역사적 근거가 있는 영토로 자리매김하려는 현실적 과제와 관련이 있다라는 지적이다.

결국 중국의 동북공정, 고구려사 연구는 소수 민족의 단결과 다민족 거주지의 정통성 부여 등을 통해 국가 사회의 통합과 체제 안정을 꾀하고, 한반도의 정세변화시 일어날 수 있는 조선족 사회의 동요를 막고, 북한 체제 붕괴시 개입 명분을 확보하고 국경 분쟁을 예비한다는 중국의 현실적 정치 요구를 뒷받침하기 위한 것이라는 분석이다. 이러한 현재의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진행되는 연구는 역사 왜곡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중국의 이러한 현실적 요구에 부응한 고구려 역사는 어떤 모습일까? 광명일보에 실린 시론을 통해 고구려사 연구 방향을 살펴보자.

고구려는 중국의 지방 정권

?동북공정?에서 주장하는 것들은 크게 두가지로 나눠볼 수 있다. 첫째 역사적 사실로서, 고구려는 고대 중국 변강의 지방정권으로 중국사의 일부이며, ()민족의 역사와는 관련이 없다는 주장이다. 둘째,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려가 고구려를 계승했다든가, 현재의 한국이 고구려를 자신들의 역사라고 주장하는 것은 잘못된 사실에서 비롯된 역사인식이라는 것이다.

먼저 고구려는 고대 중국의 1개 지방정권이라고 주장하는 근거를 살펴보자.

고구려 정권은 남하한 일부 부여족과 서한(전한)의 현도군 고구려현 경내의 여러 민족이 수립한 것이다. 고구려 민족의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지만, 모두 고대 중국의 경내 민족이기 때문에 현재 한반도의 한민족과는 무관하다.

고구려의 건국 지역과 활동 무대는 모두 고대 중국의 경내이다. 처음에는 현도군, 이어서는 요동군에 속하게 되었는데, 이 지역은 고구려가 건국하기 전에 한족(漢族)의 땅이었고, 한인(韓人)의 거주지가 된 것은 12세기 이후이다. 기씨조선과 위씨조선은 중국의 역사이다.

고구려 역대왕들은 모두 중국 중앙 정권의 책봉을 받았다. 한나라에서부터 당나라 때까지 중국의 역대 왕조들은 모두 고구려를 변방의 민족 정권으로 생각했다. 고구려 또한 중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원하지 않았다. 당나라가 고구려를 통일하자, 많은 고구려인들은 당나라에 대해 망국(亡國)’의 한을 품지 않았던 것이다.

고구려 멸망 후 다수가 한족(漢族)에 융화되었다.

따라서 고구려 민족을 중국 동북지방에 등장했던 변방민족으로 보는 것이 역사적인 사실에 가장 부합된다고 할 수 있다.

고려는 고구려와 무관

다음은 앞에서 봤듯이 고구려가 중국의 지방정권이라는 게 역사적 사실인데도, 그동안 고구려사를 한()민족의 역사라고 생각한 것은 후대인들의 잘못된 역사인식에서 비롯됐다는 것이다. 이 시론은 이런 논리를 펴기 위해 고려는 결코 고구려의 계승자가 아니다라고 주장한다.

왕씨 고려가 건국한 것은 고씨 고려(고구려)가 멸망한 때로부터 250년 후인 서기 918년이었다. 그러나 왕씨 고려는 한반도에 있던 신라 정권을 대치하였고 그 이듬해에 후백제를 멸망시켜 반도 중남부의 대부분을 통일하였다. 주민 구성에서도 신라 백제인이 주축이 되었다. 왕건은 고구려의 후예가 아니라 한족(漢族)일 가능성이 높다. 그후 이조가 왕씨 고려를 대신해 최종적으로는 이씨 조선으로 발전하였다. 이러한 정권들의 강역(疆域: 영토) 범위는 한 번도 한반도를 벗어난 적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거에 왕씨 고려를 고구려의 계승자로 본 것은, 중국 사서들이 명백한 오류를 범했기 때문이다. 결국 중국의 고대 변방민족이 사용하던 고려라는 명칭을 왕씨 정권이 도용하게 되었고, 이조(李朝)는 기자조선이 쓰던 조선(朝鮮)’이라는 이름을 또 도용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현대인들은 중국 고대 동북지역에 있었던 변방정권의 연혁을 이해하는 데 있어 많은 혼란과 잘못된 견해를 갖게 되었다.

고구려 다음은 고조선

아전인수격 해석으로 과거 역사를 왜곡하는 것에 대해 우리 학계의 반박논리는 고구려 건국세력은 압록강 일원에서 농경하던 예맥족으로, 만주계와 구별되는 우리 민족의 조상 고구려는 한() 군현인 현토군을 압록강 중류 일대에서 요동 방면으로 몰아내면서 건국 조공?책봉 관계는 전근대적 외교형식이며 실질적 내용은 시기별로 다양 주변국을 생각하지 않는 중화주의적 세계관 고구려의 문화?역사는 통일신라와 발해를 거쳐 우리 민족문화로 이어졌으며, 중국 등지로 이주한 유민은 고유한 정체성 상실 사료의 자의적 해석과 왜곡 등이다한겨레신문.

역사적 사실에 대해 객관적 학문적 접근을 통해 이끌어낸 것이 아니라, 현실의 정치적 필요에 따라 짜 맞추기 식으로 역사를 해석하고 왜곡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게다가 중국은 고구려사 편입 추진은 이러한 고대사 빼앗기의 신호탄에 불과하다는 우려의 목소리도 높다. 발해사에 이어, 이제 고구려사를 한민족의 역사에서 분리시키고 다음에는 고조선사까지 노릴 것이라는 전망이다. 이렇게 되면 한민족의 역사는 만주지방에서 활동한 고조선, 부여, 고구려, 발해의 역사가 빠진 채로 삼한, 백제와 신라, 고려 등으로 축소될 것이라는 우려이다.

중화주의에 대한 대응은

만약 로마 교황청이 1천년의 유구한 역사를 무기로, 21세기 국제정치 무대에서 카놋사의 굴욕과 같은 영광을 꿈꾸며 역사를 서술한다면...

하지만 동북아시아에서는 일본의 우경화에 이어 이제는 중화 패권주의에서도 이런 움직임을 볼 수 있다. 특히 이들의 경우 현재의 국력과 국경을 중심으로 역사에 대해 배타적 권리를 주장하려 하고, 이렇게 해서 재구성된 역사를 통해 다시 현실을 지배하려고 한다는 점에서 백안시할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일본 우익들의 과거사 왜곡이나, 중국이 고구려사를 편입하기 위해 벌이는 연구는 정치의 시녀로서 역사에 불과한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대응은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하는가. 같은 차원의 대응을 한다면 그건 정치의 영역인지, 학문의 영역인지 모호해질 수 있다. 뒤늦게 나서 순수한 객관적, 학문적 자세로만 접근하고 있기도 쉽지 않을 것이다.

또한 패권주의나 중화주의 등 청산되어야 할 과거의 유산을 현재의 역사 연구의 지침으로 삼고 있다면, 제국주의의 세계 침략사 역시 중국 사가들의 관점대로라면 영토 확장을 위해 벌인 노력으로 평가될 것이다.

주변국가들이 패권주의, 국가주의 등 과거의 낡은 유산을 오히려 강화하고 계승하려 하는데, 우리는 이들의 움직임에 어떻게 대응하고 어떤 가치를 지향해야 할 것인가라는 문제이다. 마치 핵 강국인 러시아와 중국, 잠재적 핵 강국인 일본의 틈바구니에서 우리가 취할 방도는 무엇인가라는 문제만큼이나 복합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Posted by 원주유
신라 역사와 문화2013. 9. 14. 15:23

 

 

전세계 왕들 중에서 가장 현면한 왕은 신라왕들이다?..과연 그러진 보실까요..

제41대 헌덕왕
혜충태자(제38대 원성왕의 장남)
성목태후 김씨 ․ 김씨, 언승, 생년미상 ~ 826년 
재위기간 : 809년 7월 ~ 826년 10월. 총 17년 3개월 
부인 : 1명 
자녀 : 2남
황아왕후 - 헌상, 장렴

헌덕왕은 원성왕의 태자 인겸의 아들이며, 성목태후 김씨 소생으로 소성왕의 동복아우이다. 이름은 언승이며, 소성왕이 죽은 뒤에 어린 애장왕이 왕위에 오르자 섭정이 되었다가, 애장왕 10년(809년)에 조카인 애장왕을 죽이고 왕위에 올랐다. 790년에 대아찬으로 임명되어 중국 당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으며, 다음해에는 제공의 난을 진압하는 데 가담하여 공을 세움으로써 잡찬이 되었다. 원성왕 10년(794년)에 시중에 임명되고, 그 다음해에 이찬으로서 재상이 되었으며, 796년에는 병부령의 자리를 맡게 되어 원성왕 말년부터 정치적인 기반을 갖추게 된다. 이러한 세력기반을 바탕으로 애장왕의 즉위와 함께 각간에 올라 섭정도 맡게 된다. 801년에 어룡성의 장관인 사신이 되었고 이어 상대등에 올랐다. 아우 수종이 시중의 위치에 있었던 809년에는 제옹과 더불어 난을 일으켰으며, 난중에 애장왕이 살해되고 언승이 왕위에 올라 헌덕왕이 되었다.

헌덕왕대의 정치는 함께 반정에 가담한 그의 아우 수종(흥덕왕)을 비롯하여 조카 제륭, 양종, 균정, 영공, 헌정 등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헌덕왕은 그들을 차례로 시중에 기용하며 조정을 장악하였다. 그 덕분에 헌덕왕 재위 10년까지는 조정이 비교적 안정된 편이었으나, 인사의 편중이 심한 탓에 불만 세력이 늘어났다. 특히 지방으로 방출당한 관리들의 불만이 팽배해져 지방 행정이 급격히 악화되었다. 그 때문에 재위 11년부터 지방 곳곳에 초적들이 일어났다. 헌덕왕은 모든 주와 군의 도독 및 태수에게 명하여 초적들과 전면전을 벌여 그들을 토벌하도록 했다. 이러한 어려운 상황 속에서 마침 당나라에서는 절도사이사도의 반란을 당하여 신라에 출병을 요청하였다. 헌덕왕은 816년에 김웅원으로 갑병 3만을 이끌고 반란의 진압을 돕도록 하였다.

국내외적 혼란이 계속되던 822년에는 집사시랑인 녹진이 충공을 찾아가 인재의 쓰임을 목재의 쓰임에 비유하여 인사 처리에 적절한 대책을 제언하였는데, 이때 녹진이 제시한 인사원칙은 왕당파에게 유리한 것으로 왕권에 반대하는 귀족에게는 불리한 것으로 이해된다. 이렇게 헌덕왕이 주도한 개혁정치에 반대하여 오던 귀족의 불만이 누적되어 822년 3월에 김헌창의 난이 일어난다. 선덕왕을 이어 아버지 김주원이 왕위에 올랐다면 헌창은 아마 왕좌에 앉아 있거나 왕위 계승자가 되어 있어야 했으나, 수년 동안 외직을 전전하게 되었고 그는 그런 현실을 비통해하며 일으켰다. 그동안 외직에서의 기반을 바탕으로 반군의 깃발을 들자 순식간에 무진, 완산, 청주, 사벌 등 네 주가 그의 수중에 떨어졌다. 그는 국호를 장안이라 하고 연호를 경운 원년이라 하여 스스로 왕을 청하며 반군을 이끌었다. 정부군의 진압 작전이 조직적으로 이뤄지면서 헌창의 부대는 곳곳에서 무너졌으며 헌창은 패배를 만회할 수 없음을 알고 자결하였다. 헌창이 죽자, 그의 부하가 그의 머리와 몸을 베어 각각 따로 묻어 두었다.

한편, 웅진성을 무너뜨린 정부군은 헌창의 무덤을 찾아내 그의 시신을 다시 칼로 베고, 그의 친족과 도당 239명을 죽였다. 하지만 헌창의 아들 범문이 겨우 목숨을 건져 825년 정월에 다시 부하들을 이끌고 북한산주를 공격했다. 그는 그곳에 도읍을 세우고 나라를 개국할 생각이었지만, 패배하여 처형되고 말았다. 헌덕왕도 그 이듬해 10월에 생을 마감했는데, 장지는 천림사 북쪽이다.

제42대 흥덕왕
혜충태자(제38대 원성왕의 장남)
성목태후 김씨 ․ 김씨, 초명은 수종, 개명은 경휘, 생년미상 ~ 836년 
재위기간 : 826년 10월 ~ 836년 12월. 총 10년 2개월 
부인 : 2명 
자녀 : 1남
정목왕후 김씨 - 능유

후비박씨

흥덕왕은 원성왕의 태자 인겸의 셋째 아들이며, 성목태후 김씨 소생으로 소성왕과 헌덕왕의 동복아우이다. 초명은 수종이었다가 왕위에 오른 뒤에 경휘로 고쳤다. 그는 형 헌덕왕과 함께 조카인 애장왕을 죽이는 데 가담하여 이찬이 되었고, 헌덕왕 11년(819년)에 상대등이 되었다. 그리고 822년에는 부군에 책봉되어 왕위 계승권을 확보한 뒤, 826년 10월에 헌덕왕이 죽자 왕위에 올랐다. 당시 헌덕왕은 왕자가 여럿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조정을 장악하고 있던 동생인 그를 부군으로 책봉하여 왕위를 계승토록 했다. 즉위하면서 흥덕왕은 정치개혁을 시도했는데, 827년에 명활전을 설치하였다(914년에 설치되었다는 설도 있다). 829년에는 원곡양전을 설치하였으며, 집사부를 집사성으로 고쳤다. 이때의 개혁은 김헌창의 난으로 어지러워진 왕실을 정리하고, 신라 왕실의 귀족세력을 억제시켜 왕권강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834년에 모든 관등에 따른 복색, 거기, 기용, 옥사 등의 규정을 반포하였다. 이 규정은 왕이 당시 사치풍조를 금지시키기 위하여 발표한 것이라 하지만, 그 내면에는 골품간의 계층구별을 더 엄격히 하고자 하는 귀족들의 요구가 바탕이 된 것이었다. 이 규정에서는 진골과 육두품을 비롯한 여하의 귀족이나 평민과의 차별을 더 뚜렷이 하고 있다는 점에서, 진골세력에 대한 배려를 깊이 깔고 있음을 짐작해 볼 수 있다. 그 밖의 치적으로 변방에 진을 설치한 것과 불교에 대한 관심을 들 수 있다. 우선 828년에 궁복(장보고)이 중국 당나라의 서주에서 소장으로 활약하다가 귀국하였으므로 1만 명의 병졸로써 지금의 완도에 청해진을 설치하게 하였다. 다음해에는 당은군에 당성진을 설치하였다. 그리고 827년에는 중 구덕이 당나라로부터 경전을 가지고 들어왔으며, 830년에는 도승 150명을 허가해주었다. 한편, 828년에는 사신으로 당나라에 갔다 돌아온 김대렴이 차 종자를 가지고 돌아오니 흥덕왕이 지리산에 심게 하여 성하게 되었다. 재위기간 중 사랑하는 아내와 자식을 잃고 병마에 시달리던 흥덕왕은 끝내 병마를 이겨내지 못하고, 재위 11년(836년) 12월에 죽었다. 능은 안강 북쪽 비화양에 마련되었으니, 그의 유언에 따라 정목왕후의 능에 합장된 것이다.

제43대 희강왕
포도부인 박씨 ․ 김씨, 제륭 또는 제옹, 생년미상 ~ 838년 
재위기간 : 836년 12월 ~ 838년 정월. 총 1년 1개월 
부인 : 1명 
자녀 : 2남
문목왕후 김씨 - 의종, 계명(제48대 경문왕의 아버지)

희강왕은 원성왕의 손자인 이찬 김헌정의 아들이고, 어머니는 포도부인 박씨이다. 이름은 제륭또는 제옹이라고 하며, 헌덕왕과 함께 애장을 제거하는 데 가담하여 권좌에 올랐다.
836년 12월에 흥덕왕이 후계자를 정하지 못하고 죽자, 신라 조정은 왕위 계승권 다툼에 휘말렸다. 흥덕왕의 종제 균정과 조카 제륭이 서로 파벌을 형성하여 왕위를 차지하려고 했던 것이다. 이에 시중인 김명과 아찬 이홍, 배훤백 등은 제륭을 받들고, 아찬 김우징과 조카인 예징 및 김양은 균정을 받들었다. 그들은 흥덕왕의 죽음이 임박하자, 각기 군대를 이끌고 대궐로 들어가 전쟁을 벌였는데, 그 와중에 김양이 화살에 맞아 부상을 입었다. 그 바람에 제륭파가 승세를 굳혔고, 균정은 살해되었으며 김양과 우징은 달아났다.

제륭은 왕위에 올라 우선 사형수 이외의 죄수를 모두 사면하여 자기의 왕위 계승을 전국에 알렸다. 또 아버지 김헌정을 익성대왕에, 어머니 박씨를 순성태후에 추봉했다. 또 자기가 즉위하는 데 큰 도움을 준 김명을 상대등에 임명하고, 아찬 이홍을 시주에 임명하여 조정을 장악했다. 그와 싸우다 패배하여 달아나 장보고에게 의탁하고 있던 우징이 아버지 균정이 살해된 사실을 백성들에게 알련 반역을 선동하고 있어, 왕정은 쉽게 안정되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 김명과 이홍은 서로 짜고 군대를 일으켜 희강왕의 측근들을 대거 죽여 버렸다. 이에 겁을 먹은 희강왕은 자기도 살해당할 것을 염려하여 궁중에서 목매어 자살하니, 이때가 재위 3년째인 838년 정월이었다. 능은 소산에 마련되었다.

제44대 민애왕
김충공(제38대 원성왕의 손자)
귀보부인 박씨 ․ 김씨, 명, 생년미상 ~ 839년 
재위기간 : 838년 정월 ~ 839년 윤 정월. 총 1년 1개월 
부인 : 1명 
자녀 : 기록 없음
윤영왕후

민애왕은 원성왕의 손자 대아찬 충공의 아들이며, 귀보부인 박씨 소생이다. 이름은 명이며 헌덕왕 대로부터 여러 벼슬을 거쳐 희강왕을 보좌한 덕으로 상대등에 임명되었다가, 838년 정월에 시중 이흥과 함께 반란을 일으켜 왕위를 찬탈했다. 왕위에 오른 그는 아버지 충공을 선강대왕, 어머니 귀보부인을 선의태후로 추존하고 김귀를 상대등, 헌중을 시중으로 삼았다.

흥덕왕이 죽고 그 사촌동생인 균정과 5촌 조카인 제륭이 서로 왕위를 다투게 되었을 때, 시중인 김명과 아찬 이홍, 배훤백 등은 제륭을 받들고 아찬 우징과 조카 예징 및 김양은 균정을 받듦으로써, 한때 궁궐에서 서로 싸우게 되었다. 이 싸움에서 균정은 전사하고 김양이 화살을 맞아 우징 등과 더불어 청해진의 장보고에게 도망하여 의탁하였다. 싸움에 이긴 제륭이 즉위하였으나, 불만을 가진 김명이 이홍과 같이 다시 난을 일으키자, 희강왕은 자진하고 김명이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왕위에 오른 김명(민애왕)은 다시 균정계 세력의 도전을 받게 되었다. 838년 청해진에 의탁하고 있던 우징 등이 장보고의 군사 5,000을 이끌고 민애왕을 토벌하기 위하여 진격해왔다. 김양, 염장, 장변, 정년, 낙금, 장건영, 이순행 등이 우징을 받들고 있었다.

이해 12월 민애왕은 김민주 등을 파견하여 무주 철야현(지금의 나주 부근)에서 토벌군을 맞아 싸우게 하였으나 패배하고, 그 다음해 정월 달구벌(지금의 대구)에서의 싸움에서도 대패하였다. 민애왕은 청해진 군대가 밀려오자, 궁궐 서쪽 교외에 몸을 숨기고 있다가 병사들에게 살해되었다. 이때가 839년 정월 22일이니, 왕위에 오른 지 불과 13개월 만이었다. 장지는 알 수 없다.

제45대 신무왕
김균정(제38대 원성왕의 손자)
진교부인 박씨 ․ 김씨, 우징, 생년미상 ~ 839년 
재위기간 : 839년 윤 정월 ~7월. 총 6개월 
부인 : 1명 
자녀 : 1남
정종왕후 - 경웅(제46대 문성왕)

신무왕은 원성왕의 손자 균정의 아들이며 진교부인 박씨 소생으로 이름은 우징이다. 헌덕왕 14년인 822년에 김헌창의 난이 일어나자 대아찬의 벼슬을 받고 아버지 균정과 함께 토벌대를 이끌었으며, 흥덕왕 3년인 828년에 시중에 올랐다. 그리고 831년에 시중에서 물러났다가 3년 뒤인 834년에 다시 시중에 기용되었다. 835년에 아버지 균정이 상대등에 오르자, 부자가 함께 재상과 시중에 있을 수 없다는 이유로 물러났다. 836년에 헌덕왕이 죽자, 아버지 균정을 왕위에 앉히려 했으나, 재종 제륭(희강왕)에게 패배하여 청해진 장보고에게 의탁하였다. 838년에 희강왕의 김명(민애왕)에게 살해되고, 김명이 왕위에 오르자, 장보고 군대의 도움을 받아 김명을 제거하고 왕위에 올랐으나, 이때가 839년 윤 정월이었다.

신무왕의 즉위는 원성왕의 큰 아들인 인겸계와 균정계 세력의 대립에서 균정계가 승리하였음을 의미한다. 균정계가 승리한 데에는 청해진 세력과 이미 거세된 김주원계의 후손인 김양의 도움이 컸다. 즉위와 동시에 할아버지 예영을 혜강대왕, 아버지 김균정을 성덕대왕, 어머니 진교부인 박씨를 헌목태후에 추존하고, 아들 경웅을 태자로 삼았다.

신무왕은 즉위한 지 반년도 못 되어 죽었기 때문에 별다른 경륜을 펴지 못하였으나, 다만 그는 장보고나 김양에 대하여 배려하고 있었던 듯하다. 839년에 장보고를 감의군사로 삼아 식읍 2,000호에 봉하였다. 반면, 장보고도 이에 그치지 않고 딸을 왕비로 세우려 하였는데 이것은 청해진 세력이 강대해졌음을 알려준다. 신무왕은 장보고 등 왕권에 압력을 가하는 세력을 제압하여야 하는 과업을 앞두고 죽었다. 이때 죽위년 7월이었다. 능은 제형산 서북에 있다.

 

 

Posted by 원주유
신라 역사와 문화2013. 9. 14. 15:19

 

 

신라왕들은 어떻게 살았으며, 어떤 업적을 남겼는지 보실까요.

 

제36대 혜공왕
경순왕후 ․ 김씨, 건운, 758~780년 
재위기간 : 765년 6월 ~ 780년 4월. 총 14년 10개월
부인 : 2명
자녀 : 기록 없음
신보왕후
창장부인

혜공왕은 경덕왕의 장남이며, 경수왕후 소생으로 이름은 건운이다. 758년에 태어났으며, 세 살 때인 760년에 태자 책봉되었고, 765년 경덕왕이 죽자 여덟 살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혜공왕은 태종무열왕의 직계손으로 계승된 신라 중대왕실의 마지막 왕이다. 즉위 했던 때의 나이가 8세였으므로 무후 경수태후의 섭정을 받아야 했다.

혜공왕 대에는 집사부 중시를 중심으로 강력한 전제왕권 체제를 구축했던 신라 중대 사회의 모순이 본격적으로 노정되었다. 즉 전제왕권의 견제 하에 있던 귀족세력들이 정치일선에 등장하여 정권쟁탈전을 전개함으로써 정치적으로 불안정하였다. 따라서, 혜공왕의 재위 16년 동안에는 많은 정치적 반란사건이 있었다. 먼저 일길찬 대공과 그의 동생 아찬 대렴이 768년에 반란을 일으켰으나 왕의 측근인물인 이찬 김은거를 비롯한 왕군에 의해서 토멸되었다. 이 반란은 경덕왕에 이어서 중대의 전제왕권 체제를 유지하려는 혜공왕 초년의 정치적 성격을 부인하려는 최초의 정치적 움직임이었다. 김은거는 이 반란의 진압에 대한 공로로 그해에 시중에 임명되었으며, 이찬 신유는 상대등에 임명되었다.

그리고 769년에 왕은 임해전에서 조신들에게 연회를 베풀고, 인재를 천건하게 하여 새로운 인재들을 모아 전제왕권 체제를 강화하려 하였다. 그러나 770년에는 대아찬 김융이 반란을 일으켰다. 이 반란도 대공의 반란과 마찬가지로 반 혜공왕적 성격의 것이었다. 김융의 난으로 김은거가 시중에서 물러나고 이찬 정문이 시중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혜공왕대의 정치적 사건 중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774년 감양상이 상대등에 임명된 사실이다. 즉, 김양상은 경덕왕 대에 시중을 역임하였으나 778년에 있었던 대공의 난에 연루되어 시중직에서 물러나고 왕의 측근인 김은거에게 시중직을 물려주었다. 이로써 보면 김양상은 적어도 친 혜공왕적인 인물은 아니었다. 그런데 김양상이 다시 귀족세력을 대표하는 상대등에 임명되었다는 사실은 반 혜공왕적인 귀족세력이 정권을 장악하였음을 의미하며, 이것은 전제왕권 중심의 중대 사회에서 귀족중심의 사회로의 전환이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 775년에는 김은거 및 이찬 염상과 정문의 모반이 두 차례에 걸쳐 있었다. 이들은 모두 전제왕권 유지를 지지하는 세력으로서 귀족세력인 김양상의 대두에 반대하여 반란을 일으켰으나 모두 진압됨으로써 김양상 중심의 정치세력은 더욱 공고해질 수 있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혜공왕일파는 실질적인 정치권력은 상실하고 명목상의 왕위만을 보전하고 있는 상태가 되었다.

이런 어지러운 내정을 타개해보고자, 혜공왕은 재위 16년 동안 11회의 조공, 하정 그리고 사은의 사절을 중국 당나라에 파견하여 외교정책을 펼쳤으나 혜공왕일파의 외교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777년 상대등 감양상의 상소에 의하여 신랄한 비판을 받게 되었다. 상소를 통한 김양상의 혜공왕일파에 대한 정치적 경고는 친 혜공왕파를 자극하게 되어 780년에 김양상일파를 제거하려는 이찬 김지정의 반란이 있었으나 오히려 김양상과 이찬 경신에 의하여 진압되고 말았다. 이 반란의 와중에서 혜공왕과 왕비는 살해되었다. 그리고 경신의 추대에 의하여 김양상 자신이 제37대 선덕왕으로 즉위하였다. 이때 혜공왕의 나이는 스물셋이었다.

제37대 선덕왕
개성대왕 김효방(내물왕의 9대손)
사소부인 김씨 ․ 김씨, 양상, 생년미상 ~ 785년
(성덕왕의 딸) .․ 재위기간 : 780년 4월 ~ 785년 정월. 총 4년 9개월 
부인 : 1명 
자녀 : 없음
구족왕후

선덕왕은 내물왕의 10대손으로 성은 김씨이며, 이름은 양상이다. 아버지는 개성대왕 효방이고, 어머니는 성덕왕의 딸 사소부인 정의태후이다. 선덕왕은 왕족으로 태어났으나, 왕위를 승계할 신분은 아니었다. 764년 정월에 이찬인 만종이 상대등에, 아찬인 양상이 시중에 임명되었다. 그의 시중 임명은 전제왕권을 재강화하려던 경덕왕의 한화정책이 귀족의 반발로 실패하고 왕당파인 상대등 신충이 물러난 4개월 뒤에 이루어진 점으로 보아, 그의 정치적 성격은 경덕왕의 왕권전제화와는 반대되는 것으로 이해된다.

김양상의 활동은 혜공왕 대에 접어들어 두드러졌다. 771년에 완성된 성덕대왕신종의 명문에 의하면 그는 대각간 김옹과 함께 검교사숙정대령겸 수성부령검교 감은사사각간으로서 종 제작의 책임을 맡고 있었다. 여기에서 주목되는 것은 감찰기관인 숙정대의 장관이었다는 점에서 그의 정치적 위치를 엿볼 수 있다. 그는 혜공왕 10년에 이찬으로서 상대등에 임명되었고, 혜공왕 재위 12년에는 한화된 관제의 복고작업을 주관하였다. 그리고 동왕 13년에는 당시의 정치를 비판하는 상소를 올려 전제주의적인 왕권의 복구를 꾀하는 일련의 움직임을 견제하였다.

혜공왕 16년 2월에 왕당파이었던 이찬 김지정이 반란을 일으켜 궁궐을 침범하자, 상대등이었던 양상은 4월에 김경신과 함께 병사를 일으켜 지정을 죽이고 혜공왕과 왕비를 죽인 뒤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그의 즉위는 무열왕계인 김주원을 경계하고 그들의 반발을 억제하려던 김경신의 강력한 뒷받침에 의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는 784년에 왕위를 물려주려는 결심을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으므로, 병석에서 내린 조서에서도 항상 선양하기를 바랐다고 한 것은 이를 뒷받침하고 있는 것이다.

즉위년(780년)에는 750년에 어룡성에 둔 봉어를 경으로 고치고 다시 감으로 바꾸어 어룡성을 개편했으며, 781년에는 패강의 남쪽 주현을 안무하였고, 782년 한주(지금의 서울지역)에 순행하여 민호를 패강진으로 이주시켰다. 이듬해 1월에는 김체신을 대곡진 군주, 즉 패강진 장관에 임명함으로써 개척 사업을 일단 완료하였다. 이러한 패강진의 개척은 왕실에 반발하는 귀족세력의 배제와 왕권을 옹호해 줄 배후세력의 양성하려는 성격을 띠는 것으로 보인다. 재위 6년만에 죽으니, 불교의식에 따라 화장하고 그 뼈를 동해에 뿌렸다.

제38대 원성왕
김효양(내물왕 11대손)
계오부인 박씨 ․ 김씨, 경신, 생년미상 ~ 798년 

재위기간 : 785년 정월 ~ 798년 12월. 총 12년 11개월
부인 : 1명
자녀 : 3남 2녀
숙정왕후 김씨 - 인겸(혜충 태자), 헌평태자, 예영, 대룡, 소룡

원성왕은 내물왕의 12대손으로 김효양과 계오부인 박씨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이름은 경신이다. 혜공왕 말기에 이찬 지정이 친위혁명을 일으키자, 상대등 김양상이 반혁명을 일으켜 지정과 싸웠다. 경신은 이때 양상을 도와 지정을 무너뜨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고, 그 덕분에 그는 김양상(선덕왕)이 왕위에 오른 뒤에 혜공왕 말기의 혼란을 평정한 공으로 상대등에 임명되고, 선덕왕이 죽자 태종무열왕의 6대손인 김주원과의 왕위다툼에서 승리하여 왕위에 올랐다.

『삼국사기』와『삼국유사』는 김주원과의 왕위계승다툼에 대한 설화를 기록하고 있다. 당시 김경신보다 서열이 높았던 김주원이 왕위에 추대되었는데, 김경신이 복두를 벗고 소립을 쓰고 12현금을 들고 천관사 우물로 들어가는 꿈을 꾸자, 여삼의 해몽을 듣고 비밀히 북천의 신에게 제사를 지냈더니 비가 와서 알천이 불어 김주원이 건너오지 못하였으므로 신하들이 경신을 추대하였다는 것이다. 이에 훗날 김주원의 아들 김헌창이 아버지가 왕위에 오르지 못한 것을 이유로 반란을 일으킨 것을 보아, 단순한 설화가 아님을 짐작케 한다.

원성왕대는 하대권력구조의 특징을 이루는 왕실친족집단원에 의한 권력 장악의 전형이 확립되기 시작하였다. 즉, 원성왕은 즉위와 동시에 자신의 적자를 태자로 책봉하고 다른 왕자들, 준옹(뒤의 소성왕)뿐 아니라 그의 동생인 언승(뒤의 헌덕왕)도 정치의 중심부에서 활약하였는데, 이처럼 왕과 태자를 중심으로 근친왕족들이 상대등, 병부령, 재상 등의 요직을 독점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근친왕족들로 이루어진 왕위계승은 왕족들이 신라하대 왕들의 주류를 이루는 특징을 보여준다. 또, 786년에는 대사 무오가 병법 15권과 화령도 2권을 바쳤는가 하면, 왕 자신도 「신공사뇌가」를 지었는데, 그것은 인생 궁원의 변화에 대한 이치를 담은 것이라 한다. 이 책들은 모두 전하지 않는다. 791년에 제공이 반란을 일으켰으나 진압하였다. 제공은 785년에 시중이 된 인물로 그가 일으킨 반란의 성격은 명확하게 밝혀져 있지 않다. 같은 해에 인겸 태자가 죽으니 시호를 혜충이라 하였다. 그리고 제공의 반란이 진압되자 다시 혜충 태자의 아들 준옹이 시중에 임명되었다.

785년에 원성왕은 총관을 도독으로 바꾸었으며, 재위 4년(788년)에는 독서삼품과를 설치하였다. 이 정책이 실시되기 전에는 궁술과 인물만 가지고 관리를 뽑았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독서삼품과에서 관리를 뽑은 것은 과거제의 시초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개혁은 국학을 설치한 지 이미 1세기가 지난 당시 신라사회에 있어서 무예를 중심으로 한 종래의 관리등용법의 개혁이 요청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원성왕은 불교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 785년에 승관을 두어 정법전이라 하고, 795년에는 봉은사(혹은 보은사)를 창건하였으며 망덕루를 세웠다.

왕의 치적으로 790년 벽골제의 증축과 발해와의 통교를 들 수 있다. 이와 더불어 795년에 당나라의 사신이 하서국 사람 둘을 데리고 와 신라의 호국룡을 물고기로 변하게 하여 잡아가려는 것을 막았다는 설화는 그가 상당한 독자외교를 펴고 있었음을 알려준다. 재위 14년인 798년 12월 29일에 죽으니, 유명으로 봉덕사 남쪽 토함악 서쪽동굴에 화장하였고, 능을 추복하기 위한 승복사가 세워졌다.

제39대 소성왕
혜충태자
숙정왕후 김씨
성목태후 김씨 ․ 김씨, 준옹, 생년미상 ~ 800년 
재위기간 : 799년 정월 ~ 800년 6월. 총 1년 5개월
부인 : 1명
자녀 : 2남 1녀
계화왕후 김씨 - 청명(제40대 애장왕)
체명, 장화(제42대 흥덕왕의 왕비)

소성왕은 원성왕의 태자 인겸의 아들이며, 성목태후 김씨 소생으로 이름은 준옹이다. 원성왕이 아들 인겸을 태자에 책봉했으나 791년에 사망하였고, 다시 아들 헌평을 태자에 책봉했으나 그 역시 794년에 사망했다. 두 아들이 죽고 셋째와 넷째 아들이 남아 있었으나, 원성왕은 장손인 준옹을 태자로 책봉했다. 준옹은 원래 태자의 아들로서 궁중에서 자랐고, 789년에는 당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대아찬 직위를 받았으며, 790년에는 파진찬에 제수되었다. 그리고 791년에 전 시중 이찬 제공이 반란을 일으키자, 이를 제압하여 공을 세우고 시중에 임명되었다. 하지만 병으로 1년 6개월 만에 시중에서 물러났다가 792년에 병부령이 되고, 795년에 태자에 책봉되었다. 그리고 798년 12월 말에 원성왕이 죽자, 이듬해인 799년 정월에 왕위에 올랐다.

소성왕의 치적으로 즉위년 3월에 청주(지금의 진주)의 노거현을 국학생의 녹읍으로 설정한 것을 들 수 있다. 이는 당시 국학에 입학한 학생들에게 장학금 형태로 녹읍을 지급했다는 뜻이다. 799년(소성왕 1) 7월에는 “길이가 9척이나 되는 인삼을 발견하여 하도 신기하여서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진상을 하였더니 덕종이 보고 인삼이 아니라며 받지 않았다.”라는 기록이 있다.

왕위에 오르던 당시, 이미 지병을 앓고 있던 소성왕은 왕위에 오른 지 불과 재위 2년 만인 800년 6월에 생을 마감했다.

제40대 애장왕
계화왕후 김씨 ․ 김씨, 초명은 청명, 개명은 중희. 788년 ~ 809년 
재위기간 : 800년 6월 ~ 809년 7월. 총 9년 1개월 
부인 : 2명 
자녀 : 기록 없음
왕비박씨
후궁김씨

애장왕은 소성왕의 장남이며, 계화부인 김씨 소생으로 초명은 청명이고, 왕위에 오른 뒤에 중희로 고쳤다. 788년에 태어났으며, 800년 6월에 소성왕이 죽음을 앞두고 태자로 책봉했다. 소성왕이 죽자, 열세 살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여 즉위 초부터 작은아버지인 병부령 김언승(뒤의 헌덕왕)의 섭정을 받았다. 애장왕이 친정을 요구한 때는 재위 6년인 805년인데, 이때 애장왕의 나이는 18세였다. 친정을 시작한 애장왕은 우선 자신의 모후 김씨를 태왕후로, 부인 박씨를 왕후로 봉하여 자신의 위엄을 세웠다.

애장왕은 중앙과 지방제도에 대한 개혁조치의 일환으로 805년 공식 20여조를 반포하였으며, 808년 12도에 사신을 파견하여 모든 군, 읍의 경계를 정하였다. 공식 20여조를 반포하기 1년 전 동궁의 만수방을 새로 만들었으니, 이는 곧 태자의 위치를 굳건히 하여 왕권을 신속하게 회복하기 위한 조치였다.

이와 같은 정책의 일환으로 805년 위화부의 금하신을 고쳐 영이라 하고, 예작부에 성 두 사람을 두는 등의 관제개혁 조치를 취한다. 애장왕은 다른 역대왕들과는 달리 불교에 대해서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 불교의 사치스런 행사를 막기 위해 교지를 내려 불교사원의 새로운 창건을 금하고, 금수로써 불사하는 것과 금은으로 기물 만드는 것을 금하였는데, 이는 귀족들은 막대한 토지와 재력을 지니고 지방의 연고지를 가지면서 원당과 같은 절을 세워 자신들의 막대한 토지와 재력을 유지하는 것을 막고, 왕권에 그들을 복속시키려는 의도로 보인다. 그러나 이미 중대에 세워졌던 전제왕권주의가 무너지고 귀족세력이 난립하는 신라하대의 상황 때문에 이러한 일련의 정책들은 성공할 수 없었고, 결국 그는 왕위에서 쫓겨났다.

애장왕은 국내정치의 개혁과 병행하여 대당외교 외에 일본과의 국교를 트고 있다. 802년 12월 균정에게 대아찬을 제수하고 가 왕자로 삼아 왜국에 사신으로 보내고자 하였으며, 애장왕 4년(803년)에는 일본국과 사신을 교환하고 우호 관계를 맺었다. 이로써 성덕왕 30년(731년)에 일본의 침입 사건으로 단절되었던 두 나라의 외교 관계는 72년 만에 회복하였다.

이와는 별도로 802년 순웅, 이정에 의하여 가야산에 해인사가 세워졌는데, 해인사는 당시 왕실에서 경영하는 절이었다. 이렇듯 애장왕이 내외의 정사를 직접 챙기기 시작하자 왕권은 빠르게 회복되었고, 상대적으로 언승 일파의 힘은 약화되었다. 이에 위기감을 느껴, 809년 7월 언승이 조카 제륭과 함께 군사를 이끌고 궁궐에 들어와 왕을 죽였다. 이때가 애장왕 10년인 809년 7월이었다.

 

Posted by 원주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