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역사와 문화2013. 9. 14. 18:20

 

광개토대왕과 인연을 맺은 사람들

 

고국양왕 광개토대왕의 아버지. 광개토대왕이 능력을 발휘할 수있도록 터전을 닦아 주었다.
장수왕 광개토대왕의 아들. 아버지를 이어 고구려를 동아시아의 최강국으로 발전시켰다.
내물마립간 신라의 왕. 광개토대왕의 도움을 받아 신라 땅에 쳐들어온 가야와 왜의 연합 세력을 물리쳤다.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

고구려의 두 번째 수도인 국내성이 있는 중국의 집안시에 가면, 하늘높이 우뚝 솟은 비석이 하나 있어요. 높이가 6.39미터, 무게가 37톤이니 엄청나게 큰 비석이지요. 이 비석의 주인공은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이에요. 무슨 이름이 이리도 기냐고요? 고구려 사람들이 이 분을 존경하여 붙여 준 이름이니, 길다고 너무 불평하지는 마세요. 좀 짧은 이름은 없냐고요? 물론 있지요. 광개토대왕이에요.

처음부터 광개토대왕이라고 하지, 왜 읽기도 힘든 긴 이름을 말해 줬냐고요? 광개토대왕이 죽은 이후에 고구려 사람들이 붙여 준 정식 이름이니, 알고는 있어야죠. 이 이름을 우리말로 풀이해 보면, ‘나라 언덕 위의 무덤 안에 계신 넓은 영토를 개척하시고 나라를 평안하게 만드셨던 우리가 좋아했던 위대한 임금님’이라고 할 수 있어요. 그러고 보니, 이름 속에 광개토대왕의 업적이 다 들어 있네요.

서로 북으로 영토를 넓히는 광개토대왕

광개토대왕의 어릴 적 이름은 담덕이었어요. 그는 어릴 때부터 체격이 크고 위엄이 있었대요. 그래서 아버지인 고국양왕은 아들을 무척 총애하였으며

, 담덕이 열세 살이 되었을 때 태자로 삼아 일찍부터 제왕의 길을 걷게 했어요. 그런 그가 왕위에 오른 것은 18세 때로, 아버지의 뒤를 이어 고구려의 19대 임금으로 등극하였어요.

광개토대왕이 임금으로 재위할 때, 고구려는 요동 지역 전체를 장악하며 동아시아 최강국이 되었어요. 그는 왕위에 오른 다음해인 392년에 4만의 군사를 이끌고 백제의 북쪽 지역을 공격하여 한강 유역까지 영토를 확장했어요. 이때 백제의 왕은 진사왕이었는데, 그는 광개토대왕이 병법에 능하다는 소문을 듣고 오금이 저려 미처 싸울 생각도 못 하고 멍하니 앉아 있다가 10여개 성을 고스란히 빼앗기고 말았대요.

광개토대왕은 395년에는 북방에 있는 거란을, 398년에는 숙신을 복속시켰으며,

402년에는 후연을, 410년에는 동부여를 공격하여 요동 지역 전체를 고구려 땅으로 만들었어요.

이처럼 광개토대왕은 남북 어디든 가는 곳마다 승리를 거두어, 일생 동안 64개 성, 1,400여 마을을 차지하여 막강 고구려 제국을 건설했어요.

한편, 400년에는 신라의 도움 요청으로 신라 땅에 쳐들어온 가야와 왜의 연합군을 물리쳐 줬어요.

신라 왕인 내물마립간은 가야와 왜의 연합군이 쳐들어오자 광개토대왕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이를 받아들인 광개토대왕은 보병과 기병 5만을 보내 왜와 가야 군사들을 물리쳐 줬어요. 경주에 있는 신라의 왕릉급 무덤인 호우총에서 제사에 사용된 그릇이 하나 출토되었는데, 그릇 밑면에 광개토대왕의 이름이 새겨져 있어서 고구려와 신라가 광개토대왕 집권 시절에 친밀했다는 것을 증명해 주고 있어요.

백성들을 편히 살게 해 준 광개토대왕

광개토대왕이 싸움만 잘한 임금은 아니에요. 광개토대왕릉비에 다음과 같은 글이 적혀 있어요.

“대왕의 은혜와 혜택이 하늘에까지 이르고, 위력은 바다에까지 미쳤다. 또한 적들을 쓸어 없애셨으니 백성들은 평안히 자기 직업에 종사했고, 나라가 부강하니 백성이 편안했으며 오곡마저도 풍성하게 익었다.”

대왕을 흠모했던 고구려 사람들의 인물평이고, 본인의 무덤 앞에 세워진 비석 글이니, 어느 정도 과장은 되었을 거예요. 하지만 자신들의 삶이 아주 편했다고 쓸 정도로 광개토대왕은 나라 안 살림살이도 상당히 잘했어요. 한편, 광개토대왕 시절에는 고구려 사람들이 자기 나라를 천하의 중심으로 여길 정도로 자부심이 강했어요. 광개토대왕의 강력한 리더십과 용병술 덕분에 고구려인 전체가 강한 주체 의식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지요.

그러나 안타깝게도 광개토대왕은 412년에 39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뜨고 말았어요. 역사에 ‘만약’이라는 단어를 붙일 수는 없지만, 만약 그가 60세까지만 살았더라도, 당시 동아시아 전체는 고구려 땅이 되었을지도 몰라요. 한번 상상해 보세요. 말까지 철갑으로 무장한 개마무사들이 보부도 당당하게 산천을 헤집고 다니며, 고구려의 영광을 외치는 모습을. 그리고 그들을 인솔하여 영토를 확장해 가는 광개토대왕의 늠름한 모습을. 어때요? 상상만으로도 스릴이 넘치지요?

 

교과서 속의 광개토대왕 시대

삼국 간의 세력다툼은 광개토대왕이 즉위한 4세기 말부터 시작되었는데, 이것은 삼국의 발전을 촉진하는 자극제가 되었다. 삼국 간의 세력다툼에서 주도권을 잡은 것은 중국 세력과 싸움을 통해 성장한 고구려였다. 광개토대왕은 강화된 국력으로 신라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영토를 크게 넓혀 고구려의 전성시대를 열었다. 그의 업적은 만주 집안에 남아 있는 광개토대왕릉비에 기록되어 있다. 그가 죽은 뒤, 고구려 사람들은 그를 영토를 크게 넓혔다는 뜻으로 ‘광개토왕’이라 하여 그의 위업을 그렸다. 

알쏭이와 장콩샘의 미주알 고주알

광개토대왕 이야기는 어디에 전해지고 있나요?
광개토대왕의 업적을 기록해 놓은 역사책은 거의 없어요. 『삼국사기』에 간략하게 소개되어 있을 뿐, 광개토대왕의 부인이 누구인지, 자식은 몇 명인지, 왜 죽었는지에 대한 세세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아요. 그래도 다행인 것은 아들인 장수왕 때에 세워 놓은 광개토대왕릉비에 그의 업적이 자세히 나와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그가 어떤 일을 언제 했는지 면밀하게 파악할 수 있어요.

광개토대왕 시절에 고구려 사람들은 ‘천하의 중심은 고구려’라고 했다던데, 그게 사실인가요?
광개토대왕 시절에 지방 관리를 지냈던 모두루라는 사람의 무덤에 이런 글이 쓰여 있어요. “하백의 손자이며 해와 달의 아들인 추모성왕이 북부여에서 태어나셨으니, 천하 사방은 이 나라 이 고을이 가장 성스러움을 알지니.” 고구려가 천하에서 가장 성스러운 곳이란 이야기지요. 또한 광개토대왕릉비에는 고구려 사람들을 가리켜 ‘천손(天孫)의 후예’라 하고, 주변 국가나 부족들은 전부 오랑캐라 해 놨어요. 이러한 사실로 보았을 때에 광개토대왕 시절의 고구려 사람들은 고구려를 천하의 중심으로 생각했던 것이 분명해요.

 

광개토대왕! 대단한 영웅인 것은 분명해. 하지만 말이야,현대 사회가 추구하는 평화의 관점에서 보아도, 그는 과연 영웅일까? 알렉산더, 나폴레옹, 칭기즈칸, 광개토대왕. 이들은 땅따먹기 전쟁에서 승리한 정복군주들이야. 그렇다면 그로 인해서고통을 받거나 죽어 간 사람들 또한 무척 많았을 거 아니야? 고통받은사람들에게도 이들은 과연 영웅일까? 우리 한번쯤 곰곰이 생각해 볼 문제인 것 같아.


세기의 전쟁 을지문덕의 살수대첩

수나라군은 쫓기고 있었다. 고구려군이 마지막 일격을 가한다. 북경을 떠날 때만 해도 수양제는 고구려 원정이 이렇게 비참한 패배로 끝날 줄은 몰랐을 것이다. 수나라군은 살수에서 전멸했다.

 

612년 수나라가 고구려을 침략할 때 동원한 병사는 113만명에 달했습니다. 비슷한 시기에 서양 전쟁에서 십만명 이상의 병력이 동원된 경우가 많지 않다는 것을 볼 때 가히 고대사 최대의 전쟁이라 하겠습니다. 고구려의 을지문덕은 바로 이 수나라 군대의 별동대 30만을 살수 오늘의 청천강에서 몰살시킵니다. 살아 돌아간 자는 불과 2700명 이것은 세계 전쟁사에 기록될 승전보입니다. 수나라는 삼백 여년 만에 중원을 통일한 나라입니다. 인구, 국토, 병력의 규모에 있어서 고구려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초강대국이었습니다. 헌데 그런 수나라가 고구려 땅에서 치욕스러운 패배를 당했다는 것입니다.

중국 강소성 양주에 있는 한 무덤. 수양제의 무덤이다. 300년 만에 중국을 통일한 제국 수나라 황제 무덤 치곤 너무 작고 초라하다. 묘지석에 벼락이 쳐서 한 부분이 깨졌지만1) 수리하지 않은 상태다. 수양제는 618년 양주에서 신하의 손에 죽었다. 그는 스스로 약을 먹고 자결하게다고 했지만 신하 우문화급은 스스로 죽을 권리조차 주지 않았다. 무덤 앞엔 그의 업적과 과오가 새겨져 있다. 요동에서 일을 버리다 천하를 잃었다. 고구려을 정벌하려다 모든 것을 잃고 말았다는 것이다. 612년 중원을 통일한 수양제는 백만대군을 동원해 고구려를 공격한다.

고구려로 가는 첫관문 요동성. 견고한 성에 의지한 고구려의 저항은 완강했다. 수나라 백만대군은 몇 달이 지나도 요동성 하나를 깨뜨리지 못했다. 중원을 통일한 초강대국이 요동의 작은 성에 막혀 진군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요동성에서 기록에 따르면 한 두달 정도의 공성전과 수성전이 진행이 됐는데 벌써부터 많은 병참의 어려움에 처했을 것입니다."

마음이 급해진 수양제는 별동대 30만을 평양으로 보낸다. 대동강으로 진입하는 수군과 합류해 평양을 공격할 의도였다. 산둥반도 봉래를 출발한 수나라 수군은 대동강에 상륙했다. 평양성 60리 앞까지 진출한 수군을 저지하기 위해 고구려군이 전투를 벌였지만 패배한다. 고구려군은 평양성 안으로 도주하고 만다. 수군사령관 내호아는 여세를 몰아 4만 병력을 이끌고 평양성을 향해 진군한다. 마침내 수나라 수군은 평양성 안으로 들이닥쳤다. 수도에 적군이 진입한 것이다. 국가의 존망이 걸린 순간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함정이었다. 평양성 안에 매복해 있던 고구려 군이 급습하자 수군은 대패한다. 살아돌아 간자는 불과 수천명. 수나라 수군은 전투력을 상실한다.

임용한 박사 (사)한국미래문제연구원, 전쟁과 역사 저자.

"수군이 군량을 보급하고 육군이 압록강을 건너와서 신속하게 평양을 함락시키는 작전이라는 것입니다. 수군대장 내호아는 고구려 군의 유인작전에 걸려서 단독으로 평양성을 공격하다가 패배해 버립니다. 그 결과 수군이 철수하게 돼버리니까 압록강을 건너서 평양까지 왔던 수나라 육군은 식량이 떨어져 버리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한편 수나라 육군 30만은 평양성 30리 앞까지 진출했다. 이 누란의 위기를 역전시킨 사람이 고구려군의 지휘관 을지문덕이었다. 조선상고사에 따르면 을지문덕은 성밖 들과 집을 비워 수나라 군이 현지에서 식량을 조달하는 것을 막았다. 보급이 끊긴 수나라군이 성급하게 공격해오자 고구려군은 사방에서 화살과 돌멩이를 비오듯 쏟아부었다. 이미 식량이 바닥난 수나라 별동대는 평양성을 칠 수 있는 전력이 아니었다.

 

"42년간 쌓았던 평양성은 당시 고구려 최대의 성이였고 높이도 굉장한 철옹성에 가깝죠. 수나라 군대가 평양성 근처 북쪽 30리까지 왔음에도 불구하고 물론 그들이 지치기도 했지만 평양성을 함락 시킬 수 있는 어떤 장비라든가 능력이 부족했던 겁니다."

수나라군은 평양성 30리 앞에서 철수한다. 그 뒤를 고구려군이 쫓으며 공격했다. 쫓는 고구려군과 쫓기는 수나라 군사. 전세는 완전히 역전된다. 후퇴하던 수나라 군은 살수 지금의 청천강에 도착한다. 청천강은 평안남북도 사이를 흘러 서해로 흐르는 200km의 강이다. 수나라 군대는 강을 건너기 시작했다. 을지문덕이 지휘하는 고구려 군대는 원하는 시간, 원하는 장소에서 수나라 군을 쳤다. 고구려 군은 도하하는 수나라 군의 후방을 공격했다. 강과 강변으로 병력이 나눠진 수나라 군사는 속수무책으로 당한다. 지휘관 신세웅도 전사하고 만다.

 

"살수대첩이 이루어졌을 때 수나라 군의 어떤 진이나 대영이 제대로 갖춰져 다기 보다는 강을 도하하거나 혹은 이동 중에 고구려 군의 기습작전이나 유격전과 같은 어떤 정상적이지 않은 시간과 장소 정상적이지 않는 방법을 통해서 고구려 군이 공격을 했다."

다급한 수나라 군은 하루에 450리를 달아났다. 살수에서 압록강까지 고구려 군은 패주하는 수나라 군대를 추격하며 생멸했다. 화살이 비오듯 쏟아졌다. 수나라 별동대의 99%가 사망했다. 30만 5천명 가운데 살아 돌아간 사람은 2700명이라고 중국측 사서는 기록하고 있다.2)

 

"유명한 삼국지의 적벽대전에서 조조가 백만을 동원했다고 하지만 실제 조조가 끌고 내려온 군대는 오만 밖에 안됩니다. 현지에서 조달을 해서 나중에 15만명을 만들었다고 돼 있습니다. 그런데 수양제 군대는 사실 백만이 아니라 2백만입니다. 중간에 보급부대나 노역으로 해서 동원했던 총동원 인력은 2백만명이었다고 중국 측 기록에 정확하게 나와 있습니다. 이것으로 보면 중국 역사상 최대의 규모의 전쟁이었다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동시에 최대 규모의 참혹한 패배였습니다. 삼국시대가 지난 후에 나중에 명나라 청나라 때 까지도 중국 황제들이 조선에 대해서 기억하고 있는 중요한 것이 저나라는 수나라의 백만대군을 물리친 나라다라고 이것을 중국황제들이 다 알고 있습니다. 그 정도로 중국 역사에 기록될 만한 참혹한 패배였고 우리측에서 보면 위대한 승리였죠."

살수대첩은 우리나라 역사를 통털어서 그 유래를 찾을 수 없는 대승이었습니다. 전쟁에 패배한 수나라는 결국 멸망의 길로 접어들고 말았습니다. 고대세계 최강의 슈퍼파워였던 수나라를 완파한 고구려 군. 그들은 과연 어떤 무기와 전략으로 싸웠던 걸까요. 고구려의 유적에서는 많은 화살촉들이 발견되고 있는데요. 활과 화살은 고구려 군의 주력 무기였습니다. 이것은 아차산에서 발견된 고구려 군의 화살을 복원한 것인데 화살촉의 평균 탄소량은 0.51%로 오늘날의 특수강의 맘 먹는 순도 높은 강철입니다. 이 철갑옷은 고구려 중장비병이 입었던 찰갑옷을 복원한 것인데 이 상위 하나를 만들기 위해서는 철을 단조해서 만든 천여 개가 넘는 작은 조각들을 일일이 이렇게 가죽 끈으로 연결해서 만들게 됩니다. 제철기술을 가진 전문가 집단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작업이었을 텐데요. 그렇다면 이렇게 철갑으로 중무장한 고구려 군들은 어떻게 전투를 했었을까요.

한강이 한 눈에 내려다 보이는 아차산. 고구려의 군사 요새 보루가 발견된 지역이다. 아차산에서만 20여 개가 넘는 보루가 나왔다. 1600여 년 전 이곳은 고구려 군이 집단으로 거주하던 중요한 군사 거점이었다.

 

"각 봉우리마다 이러한 성들이 크기는 약간씩 달리하면서 위치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각 성들이 한 눈에 다 보이기 때문에 서로 필요한 경우에 군사를 좀 더 동원해 줄 수 있는 것이고요. 또 한강에서 북쪽으로 올라오는 군사들을 다 볼 수 있는 곳에 위치한 곳이기 때문에 각각의 소규모지만 유기적으로 연결돼서 큰성처럼 그렇게 역할을 했던 것으로 생각합니다."

아차산에서는 고구려의 주력 무기가 대량으로 나왔다. 철재 칼, 도끼, 창 그리고 수천 개의 화살촉이 나왔다. 이런 무기들이 안악 3호분 벽화에 상세히 그려져 있다. 철갑옷을 입고 장창을 든 중장기병, 갑옷을 입지 않은 경기병, 철갑옷과 방패로 무장한 중장보병, 경보병, 도끼를 든 부월수, 그리고 화를 든 궁수가 보인다.

최종택 교수 고구려 고고미술학과

"현재 저희가 발굴된 고구려 철기를 분석해 보면 현재 우리가 쓰고 있는 조광이라는 기술도 알고 있었고 고대의 중국계의 기술과 유럽계의 철기제작 기술을 이미 고구려는 다 알고 있었다고 분석하고 있기 때문에 이미 제철수준이 상당히 높았고 높은 제철 수준을 통해서 무기와 농번구, 각종 생활용기를 제작하므로 국가적인 부를 창출할 수 있었습니다."

 

아차산에서 나온 자료를 가지고 고구려 화살을 제작하기로 했다. 고구려는 철을 단조해 살촉을 만들었을 것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화살촉은 특수강 수준의 강철이다. 만들어진 화살촉에 화살대와 깃을 붙여 화살을 복원했다. 고구려 군은 어떤 활로 화살을 쐈을까. 고구려의 활은 몰소의 뿔을 넣어 만든 각궁이었다. 각궁은 평소에 둥글게 휘어서 보관한다. 활을 쏠때 거꾸로 펴서 활 모양을 만든다. 완성된 각궁은 고구려 벽화 속 모습과 같다. 각궁과 고구려 화살의 파괴력을 어떨까. 초고속 카메라를 동원해 화살이 철판을 뚫는 순간을 정밀하게 촬영해 보기로 했다. 세계민족궁대회 입상자가 활을 쐈다. 화살은 함석판 5장을 그대로 관통했다.

김용만 우리역사문화연구소장

"고구려 벽화에 보면 말을 타고 활을 쏘는 그런 경기병들이 많이 보이는데 고구려 최대의 강점은 역시 활이었습니다. 기록상으로 볼 수 있는 것은 백석산 전투가 있습니다. 수나라 군대를 사면에서 완전히 포위해서 활을 비오듯이 쏴서 수나라 군대를 거의 전멸시킵니다."

 

지금도 발굴이 한창인 경주 쪽샘지구. 신라 귀족의 무덤 수십기가 발굴된 지역이다. 지난 6월 이곳에서는 중장기병이 입었던 철갑옷과 각종 무기류가 공개됐다. 발굴된 철갑옷은 작고 얇은 수많은 철편들을 엮어 만든 찰갑옷이었다. 말들 덮었던 철갑 위의 사람이 입는 찰갑옷이 최초로 원형 그대로 발굴됐다. 전문가들은 이 갑옷이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남진 때 영향을 받아 제작된 찰갑이라고 주장한다.

지병목 소장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고구려 고분 벽화의 4C~5C경에 나타나는 그 인물풍속도라든지 여러가지 풍속도에 나타나는 고분들에서 이러한 말을 탄 개마무사라고 얘기하는 갑옷을 착용한 장수와 말들이 많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여기 보시는 이 그림(삼실총벽화)에서 볼 수 있는 모든 형태의 갑옷과 부속구들이 한세트가 발견된 것에 가장 큰 의의가 있을 것 같습니다."

 

직접 철판을 잘라 찰갑옷을 만들어 보기로 했다. 철편에 부식을 막기 위해 옻 칠을 두 번하고 옻에 철분을 섞은 흑칠을 세 번 했다. 흑칠을 한 철편은 검은색이 된다. 작은 철편 조각을 일일이 가죽 끈으로 엮어야 한다. 찰갑옷 제작엔 오랜 시간이 걸린다. 상위 하나에만 1300여개의 철편이 필요하다. 이렇게 만든 찰갑옷을 사람이 입고 편하게 전투할 수 있을까. 찰갑옷은 기대 이상의 활동성을 지니고 있었다.

 

찰갑이 철편을 엮어서 만들었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 구부러져서 몸쓰기가 훨씬 자유롭고 유연합니다. 이런 식으로 접혀가지고 훨씬 더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기 때문에 훨씬 더 과학적이라고 볼 수 있죠.

철갑옷의 강도를 실험해 보기로 했다. 먼저 철판을 통째로 이어 부친 판갑옷. 큰 철판 조각들을 리벳으로 이었다. 화살은 그대로 판갑옷을 뚫었다. 발사한 모든 화살이 판갑옷을 관통했다. 화살은 갑옷을 뚫고 깊이 박히어 빼내기가 어렵다. 사람이 입었으면 치명상을 입었을 것이다. 이번엔 고구려의 찰갑옷을 실험해 보기로 했다. 찰갑옷에도 그대로 화살이 박혔다. 그런데 반복해 발사하자 화살이 튕겨 나오는 경우가 생겼다. 박힌 줄 알았던 화살을 찰갑이 튕겨내는 것이다. 철편은 뚫리지 않고 휘어져 있었다. 가죽 끈으로 연결된 작은 철조각들은 유연하게 안으로 밀리면서 화살의 힘을 흡수한 뒤 튕겨냈다.

찰갑옷으로 말과 자신을 감싼 고구려 중장기병은 어떻게 싸웠을까. 고대 전투는 진과 진의 싸움이었다. 럭비경기처럼 두 개의 진이 서로 충돌한다. 진이 유지되는 한 전투는 팽팽하게 진행된다. 진을 깨뜨리는 자가 승리한다. 팽팽하게 진행되는 싸움. 진이 붕괴되는 순간 승자와 패자가 결정되고 대량 사상자가 발생한다. 전투에서 고구려 중장기병은 진의 앞에 위치했을 것이다. 궁수가 원거리 사격을 가하고 기병이 돌진한다. 철갑과 장창으로 무장한 중장기병은 적의 진을 돌파해 후방에서 공격한다. 이때 보병이 돌진해서 앞을 공격한다. 진이 깨쳐 찰갑기병과 보병에 둘러싸인 적은 전멸한다.

고대 가야지역에서 발굴된 철갑옷을 복원한 것입니다. 큰 철판조각을 그대로 이어 붙인 것입니다. 이는 창, 칼, 화살과 같은 공격용 무기에 대한 방어력을 높이기 위해서 입니다. 그러나 철갑옷은 화살을 정통으로 맞을 경우 이렇게 탄력이 없기 때문에 그냥 뚫리고 맙니다. 반면 고구려군의 찰갑옷은 화살을 막아 냈습니다. 화살을 맞을 경우 이 가죽 끈으로 연결된 철편들이 안으로 밀려 들어가면서 화살의 힘을 충격을 흡수하고 다시 튕겨내게 됩니다. 화살을 정통으로 맞을 경우에도 이렇게 철편들이 부러지지 않고 그냥 이렇게 휘어질 뿐입니다. 그리고 찰갑옷의 장점은 한 가지가 더 있습니다. 전투 중에 갑옷이 손상되더라도 이렇게 다른 철편으로 손쉽게 수선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고구려와의 전쟁을 지휘했던 수양제는 무모한 전쟁을 해서 나라를 망친 군주로 역사에 기록됩니다. 헌데 여기서 한 가지 의문점이 생깁니다. 혼란기의 중국을 300여 년 만에 통일한 고대 세계의 슈퍼파워 수나라. 이 나라의 황제가 수양제입니다. 헌데 그런 그를 고구려 침략의 모든 것을 건 무모한 폭군으로만 기억한다는 것은 뭔가 이상하지 않습니까? 수양제 그는 과연 어떤 인물이었을까요. 또 그는 왜 고구려를 침략해야만 했던 걸까요.

고질적인 중국대륙의 물 부족을 해결하기 위해 많은 중국왕조가 장강의 물줄기를 북으로 이었다. 경향대운하는 북경과 항주를 이어주는 운하를 말한다. 수양제는 통제거, 산양독, 강남하 세 개의 운하를 건설해 황하, 장강, 휘수를 연결했다. 풍부한 강남지방의 물산을 북쪽으로 빠르게 운송해 교역을 활성화하기 위해 운하를 건설한 것이다.

가장 큰 트럭으로는 30톤, 열차로는 60톤이지만, 이 배는 500톤이나 실을 수 있지요.

운하 건설엔 또 다른 목적이 있다. 양주 고운하에는 동관고도가 있다. 동문 밖의 선착장이라는 뜻이다. 동관고도 문 아래엔 수양제가 운하를 건설한 후의 모습들이 새겨져 있다. 수양제는 미인들을 거느리고 자신이 건설한 운하를 자주 유람했다. 사치스런 연회도 자주 열었다. 벽화엔 다른 한쪽엔 수의 깃발아래 모인 병사들이 보인다. 이들은 왜 여기 있을까.

 

군사적인 목적입니다. 주로 고구려에 대처하기 위해서 입니다. 수양제는 고구려를 세 번이나 공격했는데 모두 운하를 이용해 군사들을 수송했습니다.

중국을 통일한 수양제는 남으로 방향을 돌려 베트남의 임읍국, 오키나와의 유구국 그리고 말레이 반도의 마자가국까지 정벌했다. 서기 610년 정월. 지금의 낙양인 동도에서 각국이 수나라에 조배를 올리는데 채색기를 든 자만 18000명이었다고 한다. 수나라는 주변국가를 복속시키고 대제국의 위용을 자랑한 당대 초강대국이었다. 그러나 고구려는 수나라를 중심으로 한 국제질서를 정면으로 거부했다. 영양왕은 수의 입조요구를 거절했다. 수나라는 고구려를 용납할 수 없었다.

 

그가 고구려 출정을 준비하는 데는 5년이 걸렸다. 아주 철저하게 준비를 했던 것이다. 그가 가장 먼저 한 일은 대운하의 확장명령이었다. 이 대운하는 양자강에서 북경지역으로 연결되어 있었고 곡물과 다른 군수품을 운송하는데 사용되었다. 612년에야 그 일을 마칠 수 있었고 대운하의 완공을 위해 수백만 명이 강제 노역에 동원되었다.

산동성 래주 해변에서 대규모 전함건조가 시작됐다. 배 건조의 책임자는 유주총관 원홍사(元弘嗣). 그는 가혹하게 일군들을 다루었다. 물속에서 주야로 일을 하게 해서 사람들이 일을 피하기 위해 손발을 자르고 복스러운 손, 복스러운 발로 불렀다고 전한다.3) 그리고 300척의 배가 완성됐다. 고구려를 놔두면 다른 민족들의 이반이 이어질 것을 두려워 한 수양제는 전쟁을 선포한다. 우문술이 지휘하는 좌군 12군, 우중문이 지휘하는 우군 12군, 수양제의 친위군 6군. 모두 합쳐 113만 3800명이 국경에서 고구려로 출발했다. 행렬의 길이만 960리에 달했다. 수군도 산동반도를 출발 대동강으로 향했다. 사상 유례가 없는 대출정이었다.

 

수나라가 동원한 약 110만 명에 달하는 병력은 20세기에 이르기까지 1차세계대전과 2차세계대전를 제외한다면 거의 없었던 것으로 판단됩니다. 고대 당시 고대 서양의 전투규모가 고작해야 5만에서 10만 명 그리고 한국전쟁 때 중공군이 약 40만 명에서 60만 명 정도 참전했다는 것으로 판단한다면 수나라가 고구려에 약110만 명 정도를 동원해서 공격한 것은 거의 어마어마한 규모였다고 판단됩니다.

당시 수나라는 890만 가구 인구는 4600만명 정도였습니다. 고구려의 당시 가구수는 69만호 정도였는데 한 가구당 가족을 5명으로 계산한다면 인구는 400만명 정도였을 겁니다. 수나라의 10분의 1도 안 되는 숫자입니다. 참전한 수나라의 군인은 113만명 지원병까지 합친다면 200만 명이 넘는 대군이 고구려를 공격합니다. 당시 수나라의 군사 수는 고구려 남성 전체의 절반이 넘는 숫자였습니다. 전투에 동원 가능한 성인남자의 수를 계산한다면 수나라의 병력규모는 고구려를 압도합니다.4)

수나라 100만 대군은 요하로 몰려들었다. 요하는 요동을 차지한 고구려로 가는 첫 관문. 요하 건너편에 고구려 군이 있었다. 수나라군은 요하를 건너기 시작했다. 선봉대는 강을 건너기 위해 부교를 설치했다. 그러나 부교가 짧아 강 건너 편에 닿지 못했다. 수나라 군은 강으로 뛰어들어 건너편 언덕으로 오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고구려의 공격으로 수나라 1군 사령관인 맥철장(麥鐵杖)이 전사하고 말았다. 수나라군은 첫전투에서 예상치 못한 엄청난 피해를 입고 말았다.5)

 

선봉군 대장 맥철장이 요하에 제일 먼저 도착을 했는데 고구려 군이 약 한달 동안 선봉부대가 넘어오지 못하게 합니다. 그리고 맥철장을 비롯해서 많은 지휘관을 살해합니다. 고구려가 요하 전투에서 한달 정도의 시간을 수의 진격을 막았던 것은 뒤의 수나라 작전들을 잘 수행하지 못하도록 만듭니다. 수나라는 속전속결로 해서 진격을 해야 되고 맥철장의 부대가 처음에 거점을 만들어야 하는데 수나라 본진이 올 때까지 붙잡아 둡니다. 그 후의 전쟁을 유리하게 이끄는 첫번째 승전보라 할 수 있습니다.

본진이 합류하자 수나라는 한달 만에 겨우 요하를 건널 수 있게 됐다. 수나라가 강을 건너 공격하자 고구려는 만 명의 희생자를 내고 요동성으로 후퇴했다. 그러자 수나라 대군이 요동성으로 몰려 들었다. 수양제가 단번에 고구려를 제압하기 위해 데려온 백만 대군이 요동성을 포위했다. 그리고 본격적인 전쟁이 시작됐다. 전투는 치열했다. 하지만 성과는 없었다. 고구려의 성벽은 너무 높고 튼튼했고 고구려의 저항도 완강했다. 2월에 수양제가 요동성에 도착했지만 넉 달이 되고 6월이 돼도 요동성은 함락되지 않았다. 수나라 군은 300년 만에 중국을 통일한 강한 군대였다. 지휘관과 병사들은 전쟁터에서 단련된 사람들이었다. 강남에서 북쪽의 돌궐까지 온갖 종류의 군대와 싸운 경험이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백만 대군이 요동성 하나를 깨지 못한다.

진노한 수양제는 장수들을 질책했다. 그대들은 스스로 지휘가 높고 좋은 가문임을 믿고 나를 어리석은 자로 대우하려 하느냐! 그대들이 내가 오는 것을 좋아하지 아니한 것은 아마 이 낭패를 볼까 염려한 까닭이었을 것이다. 내가 지금 여기 온 것은 바로 그대들의 수행을 보아 목을 베려 함이다. 그대들이 지금 죽음을 두려워하여 전력치 아니하니 내가 그대들을 능히 죽이지 못할 줄로 여기느냐!

 

요동성 구조는 이 그림에 따르면은 크게 외곽이 하나 있고 그 안에 내곽이 하나 있는 이중구조의 성곽입니다. 그리고 외곽에 보면 성문이 표현되어 있는데 성문 주변으로는 옹성으로는 보기 어렵지만 치가 나와서 성문을 보호할 수 있는 그런 시설로 되어 있습니다. 문의 주변에 치가 있고 성벽주변에 치가 5개 정도가 배치돼 있습니다.

치는 앞으로 튀어나온 방어용 성벽이다. 적이 공격하면 성벽 위에서 포위해 집중공격하기 위한 것이다. 옹성 역시 적을 포위해 공격하기 위한 것이다. 어긋문은 엇갈린 두 개의 성벽 사이에 만든 문이다. 문으로 들어오는 적은 고립된다. 당시 고구려의 축성술은 매우 뛰어났다. 흔적은 남아 있지 않지만 요동성도 치와 같은 방어시설을 갖춘 난공불락의 성이었을 것이다.

 

요동성은 기록에 따르면 대략 높이가 30m를 넘는 굉장히 큰 성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를 수나라 본진이 수백겹을 에워쌓다는 표현이 나오는데 수나라 군대는 이 요동성에서 약 4월 중순부터 철수하게 되는 7월 말까지 3개월 동안 이 성 하나를 점령하지 못합니다.

병서 무경총요엔 고대 중국에서 사용된 공성용 무기가 상세히 적혀 있다. 성을 공격하는 기본 장비인 사다리차 운제(雲梯), 성의 높이만큼 올라가서 성을 내려다보며 공격하는 소차(巢車, 상하이동식 공성무기)가 보인다. 성벽에 돌을 던지던 투석기를 복원해 보기로 했다. 당시 투석기는 사람의 힘을 이용해 돌을 던질 수 있게 한 구조다. 밧줄이 많이 연결될수록 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투석기를 당길 수가 있다. 작은 투석기는 40명, 큰 것은 120명의 병사가 밧줄을 동시에 잡아 당겨 돌을 날려 보낸다. 그러나 요동성은 요지부동이었다. 고구려 군은 수나라와의 전면전을 피해 요동성 안에서 수성전을 완강하게 펼쳤다. 이때부터 수나라 백만 대군의 보급에 문제가 생기기 시작한다.

데이비드 그래프(David Graff)교수, 캔자스 주립대 중국전쟁사

고구려는 수나라에게 큰 전투를 치를 기회를 주지 않았다. 고구려 군은 요새 안으로 들어가고 수나라 군은 요새 밖에서 식량이 바닥난 상태로 지내게 되었다. 왜냐하면 요새밖에 있는 모든 곡물을 안으로 거두어 들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수나라 군은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당시 고구려 군의 전술은 육군사관학교 수업에서도 인용된다. 청야입보(淸野入保). 청야는 들을 비운다는 말. 입보는 성안으로 철수해 수성전을 벌이며 적을 고갈시킨다는 말이다. 고구려 군이 사용한 청야입보 전술은 19세기 초까지 서양에서도 유효한 전술이었다.

 

청야는 들을 비운다는 말인데 한마디로 말하면 평상시에는 농업이나 목축업 같은 일반적인 생활을 하다가 적이 공격해 왔을 때 들을 완전히 깨끗하게 비우고 성으로 다 들어가서 군, 관민이 다 적에게 대항하는 그런 개념입니다. 당시의 동아시아에서 일반적으로 보급을 현지조달을 많이 했었습니다. 그래서 적에게 현지 조달을 허용하지 않기 위해서 고구려는 자기들의 생활터전을 전부 다 불태우고 완전히 비우고 나서 성으로 들어가서 결연하기 방어준비에 임했던 것입니다.

프랑스의 나폴레옹이 러시아를 침략했을 때 러시아 군도 청야전술을 구사합니다. 들판을 불태우고 러시아 내륙 깊숙이 프랑스 군을 끌어드리는데 추운 겨울 보급선이 끊어진 나폴레옹 군은 배가 주리자 도망치듯 철군하다 러시아군의 기습에 밀려 엄청난 수에 사상자를 내고 맙니다. 이렇게 전쟁에서 진 나폴레옹은 황제자리에서도 쫓겨나게 됩니다. 을지문덕도 수나라 군을 고구려 땅 깊숙이 유인해 살수에서 마지막 일격을 가합니다.

끝내 요동성을 함락시키지 못한 수나라 군은 요동성을 우회한다. 수양제는 30만 별동대를 고구려의 수도 평양으로 직접 내려 보낸다. 병력 수에서 열쇠였던 고구려 군은 이동로를 장악하고 게릴라 전을 벌었다. 평양성으로 가는 수나라 군의 보급부대가 주요 목표였다. 남하하던 수나라 군은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고구려 군과 대치하게 된다. 이때 고구려 수나라 전쟁을 통틀어 가장 극적인 상황이 벌어진다. 한 고구려 장수가 홀연히 수나라 진영을 찾아 온 것이다.

놀랍게도 그는 고구려 군의 지휘관 을지문덕이었다. 그는 고구려와 수나라의 항복 협상을 시작하기 위해 온 것이다. 을지문덕은 수나라 군의 지휘관 우중문, 우문술과 거짓으로 항복 협상을 벌이면서 수나라 진영을 염탐했다. 왜 고구려 군의 최고 지휘관이 이런 위험한 임무를 직접 수행했을까.

 

을지문덕 같이 중요한 인물이 수나라 군에 가서 포로가 된다면 고구려 군 자체가 위험에 빠지게 됩니다. 그래서 을지문덕이 수나라 군대진영까지 찾아 간 것은 적정을 관찰하는 것보다는 수나라 군대의 진격을 지연시키는 것에 목적이 있지 않았나 생각을 합니다.

협상을 마치고 돌아가는 을지문덕을 우중문은 사람을 보내 돌려 세웠다. 할 말이 있으니 다시 수군 진영으로 돌아가자는 것이었다. 고구려 군 지휘관 을지문덕을 잡으려는 수나라의 술책이었다. 하지만 을지문덕은 돌아보지도 않고 압록강을 건너 돌아갔다. 수나라 군은 적의 사령관을 눈 앞에 두고 놓친 것이다. 이후 고구려 군은 일곱 번 싸워 일곱 번 패하면서 수나라 군을 고구려 평양성 가까이 끌어 들었다. 시간을 지연시키면서 수나라 군의 식량을 고갈시키려는 을지문덕의 작전이었다. 수나라 병사들은 100일치 식량을 가지고 요동성을 출발했다. 하지만 많은 지친 병사들이 무거운 식량을 이미 모두 몰래 버린 상태였다.

꿔샤오린 교수(낙양사법대 역사학부)

군사물자 운송, 특히 양식운송이 매우 어려웠다. 보병들이 많은 식량과 무기를 메고 전쟁을 하기가 너무 힘들었다. 어떤 병사는 식량을 땅에 몰래 묻고 가지도 했다. 그래야 자신이 지고 갈 물건의 무게가 줄기 때문이었는데 그러다보니 나중에 먹을 식량이 부족했다.

을지문덕의 전략은 적중했다. 을지문덕의 청야전술은 수나라 군이 고구려 현지에서 식량을 구할 수 없게 만들었다. 들엔 곡식 한 톨 남아 있지 않았을 것이다. 수나라 군이 평양성 30리 앞에 오자 을지문덕은 역사에 남을 시 한 수를 우중문에게 보내 조롱한다.

神策究天文 신기한 책략은 하늘의 이치에 달했고, 妙算窮地理 묘한 전술은 지리를 통달했구나.
戰勝功旣高 싸움마다 이겨 공이 이미 높았으니 족한 줄 알고 그만 둠이 어떠하리.

 

마지막 구절에공은 이미 하늘에 다했으니 돌아가시게라는 말은 사실은 너희들의 식량은 이미 떨어진 사정을 다 알고 있다. 너희들이 돌아가지 않으면 어떡하겠느냐는 이미 알고 있는 상황에서 너가 이미 다 공을 이루었으니 돌아가라. 다시 말하면 너희들이 더 이상 할 것이 없지 않느냐! 점잔이 말했지만 우리가 너희들이 철수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철수를 종용하는 시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미 먹을 것이 바닥나 전투를 할 수 없었던 수나라 군사는 평양성 30리 앞에서 철수할 수 밖에 없었다. 이때 고구려의 반격이 시작됐다. 후퇴하는 수나라 군의 배후를 치기 시작했다. 쫓기던 30만 별동대는 살수 지금의 청천강을 건너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역사적인 살수 대첩이 벌어진다. 단재 신채호는 고구려 군이 미리 막아둔 상류의 둑을 터놓아 수군을 공격했다고 기록했다.6)

그런데 과연 그 당시 청천강에 둑을 쌓는 것이 가능한 일 일까. 매번 봄 청천강에서는 나무로 간단히 쌓은 둑을 터놓는다. 상류지역에서 벌목한 나무를 물살의 힘을 이용해 하류로 수송하기 위해서다. 목재는 물길을 따라 서해까지 내려가 중국으로 수출된다. 을지문덕도 이런 방법으로 둑을 쌓아 수공을 했을지는 의문이다. 과연 전쟁 기간에 엄청난 량의 물이 채워질 둑을 건설할 수 있었을까.

 

청천강 같이 큰 강을 옛날 기술로 막았다가 터뜨린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강을 막는데만 해도 오늘날에도 몇 년의 공사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군대라는 것은 보통 주변의 40km 이상의 정찰대를 운영하면서 행군하게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상류의 둑을 그 이전 시기에 막았다고 한다면 수나라 군대가 그날 그 시점에 도하하는 것을 알고 한 2, 3년 전부터 공사를 했어야 가능하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3만 여명이 참가한 국제 마라톤 대회(인천대교개통기념). 살수를 건너던 30만 수나라 별동대 병력의 10분의 1정도의 인원이 참가했다. 인천대교 주탑 간의 거리는 약 1km. 육안으로 보기에도 대열은 삽시간에 수킬로미터로 늘어졌다. 만약 30만이 달리기 시작하면 그 길이는 더욱 늘어날 것이다. 이것으로 볼 때 살수를 수나라 군 30만이 동시에 건너는 건 불가능해 보인다. 사서엔 수공에 관한 기록이 없다. 강을 건너는 수군의 후방을 공격했다는 기록만이 있다. 고구려 군의 공격에 수나라 군의 진영이 깨졌다.

 

어떤 군대가 후퇴하면서 진영을 유지하기란 굉장히 힘들다고 판단이 됩니다. 그 이유는 철수 작전 중에 후미에 남겨진 부대의 경우에는 심리적으로 굉장히 압박을 받게 되고 자신들의 생명에 위협도 받게 되는 것이고 후방에서 직접 적과 교전해야 하는 상황입니다. 모든 것이 어려운 상황에서 특히 후미부대라도 남아서 적과 교전을 하는 상황에서는 전투력을 제대로 발휘하기는 힘들다고 판단이 됩니다.

별동대 일부는 강 건너에 일부는 강 가운데 후진은 강을 건너지 못한 상황. 병력이 분리된 수나라 군은 속수무책이었다. 고구려 군의 기습은 수나라 군을 공황상태에 빠뜨려 붕괴시켰을 것이다. 을지문덕의 고구려 군은 진이 깨진 상태로 패주하는 수나라 군을 추격하며 전멸시켰다. 백만 대군으로 북경을 출발할 때 수양제는 이런 비참한 결과를 꿈에도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게 전쟁이 끝났다. 7세기 세계 최대의 전쟁의 결과는 아무도 믿을 수 없는 것이었다. 그 한가운데 을지문덕의 살수대첩이 있었다.

 

을지문덕은 사실 수세에 방어전략을 구사했지만 모든 상황을 고려해서 그 주도권을 가지고 있었고 자기가 원하는 시간과 장소에서 적을 끌어 들었고 그리고 적이 약했을 때 공격을 하므로 적의 전투력을 제압하는 아주 뛰어난 전략가였다고 생각합니다.

고구려는 요동성, 평양성, 살수 이렇게 전쟁의 운명을 가른 세 곳의 전투에서 모두 승리했습니다. 수나라는 고구려의 전략에 말려서 제대로 전투 한 번 해보지 못하고 치욕적인 패배를 당합니다. 과연 무엇이 고구려를 승리를 이끌었던 걸까요. 고구려 군의 청야전술과 수성전이 승리의 한 요인으로 꼽힐 수 있을 것입니다. 또 삼국사기를 쓴 김부식은 을지문덕의 공을 이야기 합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힘과 전략을 믿은 고구려 군의 필사 항전의 의지가 아니었을까요.

 

 

Posted by 원주유
고구려 역사와 문화2013. 9. 14. 17:50

 

지안(集安: 서기 3~427년 고구려 首都)

'고구려 박물관'의 역사 왜곡… 고구려史 뭉개고 발해史는 지워

동북공정 강화
"漢 무제가 현토군에 고구려현 설치, 中原에 융합" 옌볜 지역은 말갈족 영역으로

모순
지도에 남쪽 경계는 한강 유역, 옌볜은 고구려땅 아니라면서 고구려城 그려 넣기도

集安 고구려碑
8각 유리상자 안에 넣어놓고 1m 떨어져서만 볼 수 있게… 확대경 써도 碑文 판독 어려워 지린성

"고구려가 조선족(한민족)의 조상인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중국의 나라였네요."
1일 중국 지린(吉林)성 지안(集安)의 '지안 박물관'. 이날 고구려 전문 박물관으로 신축 재개관한 박물관 6개 전시실을 관람한 한 중국인은 이렇게 말했다.
개관 당일 박물관 전시실을 둘러본 결과 '고구려는 중국의 속국' 같은 노골적 표현은 없었다. 그러나 동행한 국내 전문가는 "'동북공정'이 무서운 건 고구려사(史)를 자연스럽게 중국사의 일부로 받아들이게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중국이 지안 박물관을 통해 더 교묘하고 세밀하게 '동북공정'을 펼치고 있다는 분석이다. 지안은 서기 3년부터 427년까지 425년간 고구려 수도였던 곳이다.
"고구려족은 中 소수민족"
지안시 인민정부 청사 앞에는 고구려 상징인 '삼족오(三足烏·태양에 산다는 세 발 까마귀)' 동상이 서 있다. 안내판엔 "태양조(太陽鳥·삼족오)는 중국 고대 전설에 등장한다. 고구려 벽화의 삼족오는 고구려 민족과 중원(中原·중국을 지칭) 민족이 동일하게 태양조를 숭배했다는 의미"라고 적혀 있다. 한 시민은 "2년 전까지는 '고구려족(族)은 중국의 소수민족'이라는 문구가 있었다"며 "한국과 북한의 반대가 심해 이를 삭제한 것"이라고 말했다. 중·일, 한·일 간 역사 갈등이 첨예한 상황에서 중국이 한국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신경 쓴 것으로 관측된다.
그러나 박물관 안에 있는 안내판과 지도에는 고구려가 한(漢)·당(唐)의 영향을 받아 중원에 '융합'됐다는 내용만 가득했다. 한 관람객이 "고구려와 조선(한반도)의 관계는 뭐냐"고 물었다. 전시관 안내원은 "고구려와 한반도는 아무 관계가 없다. 고구려족은 중국의 소수민족"이라고 답했다.
고구려와 발해 연결 고리 제거
고구려 영역도에는 지금의 옌볜(延邊) 일대를 고구려 영토에서 제외하고 해당 지역을 말갈족 영역으로 구분했다. 국내 전문가는 "고구려에서 말갈을 뺀 것은 고구려와 발해가 이어지는 연결 고리를 없애려는 의도"라고 말했다. 발해는 고구려 지배층과 말갈 피지배층으로 이뤄진 국가였다. 고구려에서 말갈이 없어지면 고구려와 발해의 연관성도 그만큼 약해진다는 설명이다.
실제로 지린성 창바이(長白)에 있는 발해 벽돌탑인 '영광탑'의 안내판에는 "당나라 발해 시기에 쌓았다. 모양과 구조가 시안(西安)의 당나라 때 현장탑과 비슷하다"고 써놨다. 그러나 박물관의 고구려 산성(山城) 지도에선 옌볜 지역에 고구려 산성이 두 곳 있는 것으로 표시했다. 옌볜 일대가 고구려 땅이 아니라고 하면서도 고구려성을 그려 넣은 오류를 저지른 셈이다. 고구려 영토의 남쪽 경계는 한강 유역이라고 했지만 지도상 압록강 이남에는 어떤 유적도 표시하지 않았다.
내부 사진촬영도 기록도 금지한 지안박물관 - 중국 지린(吉林)성 지안(集安)시의 인민정부청사 앞에 세워진 지안박물관 입구. 1일 고구려 전문 박물관으로 신축 재개관했으며, 고구려를 중국 역사에 편입하려는 시도가 엿보인다.

 

박물관 측은 내부 사진 촬영을 금지하고 전시물 내용을 기록하는 것까지 엄격하게 통제했다. /지안시 청사 앞에 고구려 상징 '三足烏' 동상 - 중국 지린(吉林)성 지안(集安)시인민정부청사 앞에 1일 고구려를 상징하는‘삼족오(三足烏·세발까마귀)’동상이 서 있다. 중국은 고구려를 중국사에 편입하려고 하고 있다. /발해 벽돌탑인 '영광탑' 안내판엔 "당나라 風格을 갖고 있다" - 탑 안내판에“모양과 구조는 당나라 때의 현장탑과 비슷하며 당나라의 풍격을 갖고 있다”고 적혀 있다. 중국 지린성 창바이(長白)에 있는 발해 시기 벽돌탑인 영광탑(靈光塔).

 

박물관 전시는 일관되게 중원과 고구려의 '결합'을 강조했다. 입구에서부터 "한 무제가 현토군에 고구려현을 설치했다"고 적었다. 관련 지도는 현토군이 고구려로 성장한 것처럼 묘사했다. 그러나 고구려는 현토군을 밀어내면서 성장한 국가라는 게 전공 학자 대부분의 일치된 견해다. 안내판처럼 '고구려족과 중원 각 민족의 융합'을 통해 성장하지 않았다. 수(隋)·당과 대전(大戰)을 벌여 이들을 물리친 사실은 박물관에 어떤 설명도 없었다.

 

박물관은 또 "고구려 왕과 귀족은 당나라 관리 복장을 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국내 전문가는 "고구려는 망할 때까지 독자적 관등 체계를 유지했다"면서 "이곳 박물관에도 소형(小兄)·대형(大兄) 등 고구려의 독특한 관직이 적힌 기와 조각이 전시돼 있다"고 말했다.


현존 최고(最古) 고구려 비석으로 추정되는 '지안 고구려비'는 박물관 1층 로비 가운데 있었다. 8각 유리 상자에 넣어 성인 허리 높이의 전시대에 올려놓았다. 1m 밖에서 관람하게 돼 있어 비문(碑文)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비석 실물을 처음 접한 국내 학자들이 확대경까지 동원해 글자를 판독하려고 했지만 어려움을 겪었다.

지안(集安) 박물관
425년간 고구려 수도였던 중국 지린(吉林)성 지안에 지어진 고구려 박물관. 중국은 2003년 이른바 ‘동북공정’이 진행되던 시기에 박물관 건립을 추진했다. 3년 전 완공됐으나 내부 보완을 거쳐 1일 재개관했다.

동북공정(東北工程)
중국이 고조선·고구려·발해의 역사를 중국사로 편입하기 위해 추진한 동북 지역 연구 프로젝트. 중국 사회과학원 산하 변강사지연구중심(邊疆史地硏究中心)이 2002년부터 5년간 진행했다. 지금은 ‘역사 왜곡’ 영역을 벗어나 일반 중국인의 상식을 바꾸는 단계까지 이르고 있다. 한반도 통일 등 동북아 정세 변화에 대비한 중국의 역사적 명분 쌓기라는 분석도 있다

 

 


중국 光明日報의 ‘고구려 역사 연구의 몇 가지 문제에 대한 試論’

“한민족은 고구려와 기자조선을 도용해 갔다”

 

중국의 역사자료만 ‘일방적’으로 인용해 “고구려는 중국의 일부”라고 주장했다. 전문을 읽어보면 이 시론이 얼마나 억지를 부리는가를 명확히 알 수 있다. 이 시론의 결론이 ‘고구려는 중국의 일부니 정치적으로 이의를 제기하지 말라’라고 돼 있는 것은 이 시론이 정치적 의도를 갖고 작성되었음을 보여주는 ‘명백한’ 방증이다. 일반인이 알기 힘든 용어는 그 뜻을 찾아 괄호 안에 주석을 달았다. “광개토대왕이 웃는다.” 중국 길림성 집안현 통구에 있는 5.34m 높이의 광개토대왕비. 최근 중국은 총력을 다해 고구려를 중국역사에 편입시키려는 일련의 작업에 착수했다.

‘고려’라고도 약칭하는 고구려는 서한(西漢)에서 수(隋)·당(唐) 시대까지 중국 동북(東北)지역에 출현했던 중요하고 영향력 있는 변방 민족 중의 하나였다(중국에서 동북지역은 대개 만주 일대를 일컫는데 길림성과 요녕성, 흑룡강성을 가리켜 ‘동북3성’이라고 한다).

中原 왕조와 종속 관계

고구려의 선조는 주나라와 진나라 시기 줄곧 중국의 동북지역에서 생활했다. 기원전 108년 한나라 무제는 요동과 한반도 북부에 4군을 설치했는데 그 중에서 현도군에 있던 고구려현이 바로 고구려인이 살았던 곳이다.

기원전 37년 부여 사람인 주몽은 현도군 고구려현 관할구역에 정권을 세우고 흘승골성(紇升骨城 : 지금의 요녕성 환인현성 부근. 그러나 한국 역사학계는 광개토대왕비문을 근거로 주몽이 졸본에 도읍을 정했다고 보고 있다)을 수도로 정하였다.

서기 3년(한나라 평제 원시 3년) 고구려는 국내성(지금의 길림성 집안시)으로 수도를 옮겼다가 서기 427년 평양성(지금의 평양시)으로 천도하였다. 전성기 때의 고구려는 길림성 동남부와 요하(遼河 : 중국 동북지방 남부를 가로질러 서해로 흐르는 1400㎞의 강) 동쪽, 그리고 한반도 북부까지 세력을 뻗쳤다. 이로부터 서기 668년 한반도 동남부에 위치한 신라와 연합한 당나라 왕조의 공격에 의해 멸망하기까지 고구려는 705년의 역사를 유지했다.

고구려가 존재한 700여 년의 시간을 살펴보면 고구려는 중국의 중원 왕조가 관할하는 지역에서 주로 활동하였으며 중원 왕조와 종속관계를 유지하였다. 고구려 정권은 중원 왕조의 제약을 받았고 중국 지방정권의 관할하에 있었으므로 고대 중국에 있었던 변방의 민족정권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고구려와 중원 왕조의 관계는 중원 왕조의 제압력이 강해지거나 약해짐에 따라 밀접해지기도 했고 소원해지기도 했을 것이다. 이 글에서는 최근에 이뤄진 고구려 역사연구에 대해 약술한다. 학계연구자들의 지도편달을 바란다.

[1.고구려는 중국 동북지역 역사에 출현했던 소수민족 정권이다]

주(周 : 殷나라 다음에 건국해 秦나라에 멸망당할 때까지 수백년간 이어온 중국 고대 왕조) 나라와 진(秦: 기원전 221~207년)나라 시절 고구려인의 선조는 주로 혼강(渾江: 중국 요녕성을 흐르는 강)과 압록강 유역에서 생활하였다. 이들이 살았던 중심구역은 지금 요녕성의 환인현과 신빈현, 길림성의 집안시와 통화시 일대였다.

우리는 고구려 민족이 중국 동북지역 역사에 등장한 한 민족이었고, 고구려 정권은 중국 동북지역 역사에 등장한 변경민족 정권이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고구려 민족의 기원을 살펴보자. 현재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대다수 중국학자들은 고구려 민족의 기원에 대하여 예맥(濊貊: 중국 漢나라 시절 압록강과 혼강 유역에 살았다는 한민족의 근간이 되는 부족)설과 부여(夫餘: 고조선이 무너진 후 북만주 일대에 웅거한 부족국가)설, 고이(高夷 : 만주에 있던 고대 종족)설, 상인(商人 : 商은 殷나라를 뜻한다. 은나라가 주나라에 패해 동쪽으로 가 고구려의 선조가 되었다는 것이 商人설이다)설, 염제(炎帝)설 등을 제기하고 있다(중국 ‘史記’에는 중국의 黃帝가 염제·치우 등과 싸워 천자가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후 중국에서는 치우를 ‘군신’으로, 염제는 ‘불의 신’ 혹은 ‘태양신’으로 받들었다).

이런 여러 학설에 공통점이 있다면 고구려 민족은 주나라와 진나라 때에 중국의 동북지역에서 활동했다는 점이다.

좌전(左傳: ‘춘추좌씨전’ 혹은 ‘좌씨춘추’의 다른 이름. 춘추 시대 노나라의 좌구명이 편찬했다. 기원전 722~481년의 춘추시대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의 소공(昭公) 9년 조를 보면 주나라 사람들은 내내 “숙신(肅愼: 고조선 시대에 있었던 고대 종족)과 연(燕 : 周나라 昭公 奭의 후예로 전국 시기에 왕으로 칭한 칠웅 중의 하나. 지금의 중국 하북성 지역에 있었다. 고구려 장수왕의 공격에 의해 멸망했다), 그리고 박(?: 은나라 탕왕이 도읍한 곳. 지금의 하남성 귀덕부 상구현)은 우리의 북방 영토였다”고 말하는 부분이 있다.

고구려는 漢나라 안에 있던 지방정권

여기서 우리는 주나라의 무왕이 상(商: 殷나라)을 점령한 후 주나라 사람들이 동북지역을 경영했음을 명확히 알 수 있다. 주나라 때의 세력 범위는 지금의 동북지역보다 훨씬 넓었다.

환인현의 태서구 유적과 요산 유적·봉명 유적, 집안시의 대주선구 유적과 이도외자 유적·동촌 유적, 통화시의 왕만 발발자 유적 등에 대해 오랫동안 고고학적 조사와 발굴이 이뤄졌는데 이 조사에서 이 유적들은 모두 고구려 정권이 출현하기 전의 문화 유물이라는 것이 분명히 밝혀졌다. 이 지역 유물의 지층을 조사해보면 하층은 신석기시대 말기부터 청동기시대의 문화이고, 그 위층은 한대 문화이며, 그보다 더 위층은 고구려 정권이 출현한 후의 문화임이 명확히 드러난다.

두 번째는 고구려 정권 건립 상황에 관한 것인데 중국 학자들과 외국 학자들은 대부분 고구려가 기원전 37년(서한 원제 건조 2년)에 흘승골을 수도로 해 세워졌다는 점에 일치된 견해를 보이고 있다.

요녕성 환인현성 부근(환인현성 서쪽으로 4㎞ 떨어진 혼강 맞은편 쪽)에는 평원성(平原城: 평야에 세워진 성. 산성의 반대 개념)인 ‘하고성자(下古城子)’가 있으며, (환인현성 동북으로 8.5㎞ 떨어진 혼강 맞은편의 오녀산 정상에는) ‘오녀산성(五女山城)’이 있다. 고고학적 조사와 발굴에 의하면 이곳은 한나라 현도군의 관할 범위 안에 있던 고구려의 초기 수도였다고 한다.

고구려 정권이 출현하기 전 중국의 서한(西漢) 왕조는 광대한 중국 동북지역을 상대로 행정을 펼치고 있었다. 한나라 무제 원봉 2년인 기원전 108년 이곳에는 잇따라 현도군·낙랑군·임둔군·진번군의 네 군이 세워졌는데, 네 군(세칭 漢四郡)이 관할한 범위는 동북 지역과 한반도 북부에 이르렀다. 그 후 한사군의 관할 지역에 변화가 있어, 현도군의 행정수도가 고구려현으로 이전하였다.

고구려현 부근에서 건립한 고구려 정권은 처음에는 현도군, 이어서는 요동군에 속하게 되었는데 고구려 정권은 끊임없이 표(表: 신하가 자기 생각을 서술해 황제에게 올리는 글)를 올려 신하를 칭하고 조공을 받쳤다. 그리고 현도군에 이어 요동군을 거치며 한나라 왕조가 하사한 관복 등을 받아갔다. 이 시기 많은 한(漢)나라 사람이 고구려 정권에 흘러들었다.

1975년부터 1976년까지 중국 집안시 국내성 지역에서는 고고학적 조사와 발굴이 있었는데, 이때 고구려의 석축(石築) 안에서 한나라 때 만들어진 흙으로 쌓은 벽(土築城垣)이 발견되었다. 여기서 한나라 시대의 철기와 도기 등 여러 유물이 출토된 바 있다.

705년간의 역사를 이어오며 고구려는 현도·요동·낙랑 등지로 영토를 확장시켰으며 여러 차례 수도를 옮겼다. 그러나 흘승골이든 국내성이든 평양성이든 고구려의 수도는 모두 한사군 지역 안에 있었다. 그러니 고구려는 중국 역사에 출현한 변방의 민족 정권인 것이다.

周대에 기자 봉하고, 漢대에 4군 설치

세 번째, 한나라에서부터 당나라 때까지 중국은 분열해 있었지만 중국의 역대 왕조들은 모두 고구려를 변방의 민족 정권으로 생각했다는 점이다.

상(商: 은나라) 말기에서 한나라 초까지 고구려인의 거주지는 기자조선(箕子朝鮮: 은나라 말기 기자가 조선에 와 단군조선에 이어 세웠다고 하는 나라)의 관할 구역 안에 있었는데, 기자는 주나라 시대 지방 제후 중 하나였다.

한나라 시대에는 위씨조선(衛氏朝鮮: 한국에서는 ‘위만조선’이라고 한다. 한나라 고조는 중국을 통일한 후 노관에게 연나라를 다스리게 했는데, 노관이 반란을 일으켜 나라가 혼란에 빠졌다. 이때 노관의 부관으로 있던 衛滿이 1000여 명을 이끌고 패수를 건너 고조선의 準王을 찾아가 몸을 의탁했다. 그 후 위만은 준왕을 쳐 왕위를 빼앗고 도읍을 왕검성으로 옮겼는데 이를 위만조선이라고 한다. 위만조선은 한나라로부터 지원을 받아 지역 안정을 도모하고 이웃한 진번군과 임둔군 등을 복속시켜 고조선 역사상 가장 융성했던 나라가 되었다)이 기자조선을 대신했는데, 위씨조선은 여전히 한(漢) 왕조의 종속국이었다.

기원전 108년(원봉 3년) 한나라는 위씨조선을 멸망시키고 낙랑 등 4군을 설치해 한반도 중부 이북을 포함한 동북지역을 중국의 중원(中原) 지역과 같은 방식으로 통치하였다(한나라의 무제는 기원전 108년 위만조선을 멸망시킨 후 바로 낙랑·임둔·진번 3군을 설치하였고 그 다음해 현도군을 추가해 4군을 만들었다). 한나라로부터 당나라 때까지 고구려에 대한 중국 각 왕조의 관리 방식은 각기 달랐지만 중국의 통치자들은 고구려의 활동지역을 중국의 전통적인 영토로 생각하였다.

수나라 때 만들어진 ‘배구전(裴矩傳)’이라는 책을 보면 “수나라의 통치자는 ‘고구려의 영토는 원래 고죽국(孤竹國 : 중원에서 멀리 떨어진 땅)이다. 주나라 때 이 땅을 기자에게 봉했다가 한나라 때는 3군으로 나눴다. 진(晉)나라 시절에도 여전히 요동(요하 동쪽으로 동북과 같은 말이다) 지역은 진나라의 관리를 받았다. 그런데 지금은 더 이상 신하로 칭하지 않고 별개의 외지가 되었다. 그래서 선제(先帝)께서는 이를 못마땅히 여겨 고구려를 계속 정복하고 싶어했다’고 말했다”는 대목이 있다.

또 ‘책부원귀(冊府元龜)’ 제왕부(帝王部) 친정이(親征二)에는 “당 태종 또한 ‘요동은 원래 중국의 토지인데 주나라 때부터 위나라 때까지 그다지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 수나라의 왕은 일찍이 네 번이나 군대를 파견해 공격한 적이 있으나 모두 패하고 돌아왔고 고구려인은 많은 중국 평민을 죽였다. 지금 고구려인은 국왕을 살해하고 굉장한 자만에 빠져 있다. 나는 밤새 이 일을 생각하느라 잠을 이루지 못했다. 나는 죽은 중국 사람들의 자녀를 위해 복수할 것이다. 고구려인들을 도와 왕을 죽인 자들을 토벌할 것이다. 지금 비록 중국 대부분의 토지는 평정되었지만 단 하나 이곳만 평정되지 않았다. 우리는 또 한번 남은 병사의 힘으로 그 땅을 소탕하여 평정할 것이다. 후대의 우리 자손 중에는 강한 군대가 나올 것이고 반드시 재능 있는 인재가 나올 것이다. 나는 그들을 설득하여 반드시 요동을 토벌하러 가게 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아직 늙지 않았으니 내가 직접 토벌하러 가고 싶다. 이렇게 하면 우리 후손들에게 그 일을 시키지 않아도 될 것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는 내용이 있다(‘책부원귀’는 서기 1005년 송나라 정종 때의 왕흠약과 양억 등이 왕명을 받들어 편찬한 유서이다).

“원래는 중국 것이다” “비록 중국 대부분의 토지가 평정되었지만 단지 이 한곳만 평정되지 않았다”는 말은 당 태종이 고구려 지역을 전통적인 중국의 영토로 간주하고 있었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고구려와의 통일을 실현하는 것은 곧 “중국의 영토를 평정한다”는 최후의 사명을 완성하는 것이었다. 수나라와 당나라의 왕조가 전력을 기울여 고구려와의 통일을 이룩하려고 한 이유도 바로 이것 때문이었다.

책봉받고 조공 바친 고구려

네 번째, 고구려 또한 중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원하지 않았다.

700여년 동안 고구려는 동북 변방지역에서 독립하려고 하지 않았다. 고구려가 자신에게 스스로 부여한 위치는 중국 중앙왕조의 변방정권이었으며, 고구려는 중국이 3국시대(蜀漢·魏·吳나라로 나뉘어 소설 ‘삼국지’의 배경이 된 시기)와 양진시대(兩晉: 魏나라의 신하로 있던 사마염이 조조의 후손인 조한으로부터 황제의 자리를 빼앗아 265년 지금의 낙양에 晉나라를 세웠다. 그러나 晉나라는 4대 만에 흉노 등 북방민족의 공격을 받아 326년 멸망하였다. 그 이듬해 사마예는 동쪽으로 옮겨가 지금의 남경에 다시 晉나라를 세웠는데, 이 진나라는 419년까지 존속하였다. 사마염이 세운 진은 西晉, 사마예가 건국한 진은 東晉이라고 하고 이를 합하여 ‘兩晉’이라고 한다), 그리고 남북조 시대(東晉 이후 지금의 남경에는 차례로 宋·南齊·梁·陳나라가 건국되었다. 반면 북쪽에서는 北魏-東魏·西魏-北齊·北周가 들어서 대립하게 된다. 이렇게 남북으로 갈린 상태에서 여러 나라가 멸망하고 대립한 때를 남북조 분열시대라고 한다. 남북조 분열시대를 통일한 것이 隋나라다)로 크게 분열돼 있을 때도 스스로 중국의 중앙왕조에 대해 종속관계를 유지하였다. 그뿐 아니라 고구려는 책봉을 받았고 조공을 바쳤으며 질자(質子: 인질)를 보냈다.

‘통전(通典)’ 변방(邊方) 고구려를 보면 고구려의 왕은 동진(東晉)과 송(宋)·제(齊)·양(梁)·후위(後魏)·후주(後周) 시대까지 중국 남북의 두 왕조로부터 작위를 책봉받았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 또한 같은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통전’은 당나라 때 두우가 黃帝부터 당나라 현종까지의 문물제도 전반에 대하여 기술한 책).

‘亡國의 恨’ 품지 않은 고구려인

당나라가 세워진 후 고구려는 당으로부터 책봉을 받았으니 이는 고구려의 왕조가 당의 승인을 분명히 받았다는 증거이고 중국으로부터 자주 독립을 하지 않으려 했다는 뜻이다. 이러한 인식이 있었기 때문에 당나라가 고구려를 통일하자, 많은 고구려인들은 당나라에 대해 ‘망국(亡國)’의 한을 품지 않았던 것이다.

오히려 고구려인들은 당나라에 통합된 후 당나라의 통일 대업을 지키기 위한 전쟁에서 공로를 세워 역사에 이름을 남기기까지 하였다. 신·구 ‘당서(唐書)’에 이름을 남긴 천남생(泉男生)·고선지(高仙芝)·왕모중(王毛仲)·왕사례(王思禮)·이정기(李正己) 등이 그들인데, 신·구 ‘당서’에는 이들의 전기가 기록돼 있다.

다섯 번째로 멸망 후 고구려인의 이동 방향을 살펴보자. 고구려는 당 고종 총장 원년인 서기 668년 멸망했는데 ‘신당서’고려전에는 고구려를 멸망시킨 당나라가 고구려 난민 ‘69만호’를 받아들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 숫자는 당시 고구려의 총 가구수였겠지만, 여기에는 비고구려인 가구도 적잖이 포함돼 있었다. 당시의 고구려족 가구는 15만호 정도였기 때문이다.

학자들은 고구려가 패망한 후 고구려인들은 네 방면으로 이동했다고 보고 있다. 중원 각지로 유입된 고구려인이 있었고, 신라로 간 고구려족이 있었으며, 말갈(발해)에 의탁한 고구려인이 있었고, 돌궐로 거주지를 옮긴 고구려인도 있었다.

중국 학자들의 최근 연구 성과에 의하면 멸망시 고구려인 숫자는 대략 70만명 정도였는데 이 가운데 30만명이 중원 각지로 유입되었다고 한다. 신라에 귀의한 사람은 10만 정도였고, 말갈(발해)에 의탁한 사람은 10만 이상, 돌궐로 옮겨간 고구려인은 1만여 명이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이렇게 하면 대략 50만명 정도가 네 방면으로 이주한 셈이 되는데, 나머지 20만명은 요동 각지로 흩어져 유민(遺民)이 되고, 전쟁 와중에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숫자를 더하면 대략 70만이라는 숫자가 나온다.

신라로 유입된 고구려인은 용흥강(함경남도를 흘러 동한만 쪽 동해로 흘러드는 강) 이남의 한반도로 유입돼 살던 10만여 명이었는데 이들은 신라로 유입돼 반도 민족에 융화되었다.

그러나 나머지 대다수의 고구려인은 한족(漢族)에 융화되었다. 이러한 점으로 볼 때 고구려 민족을 중국 동북지방에 등장했던 변방민족으로 보는 것이 역사적인 사실에 가장 부합된다고 할 수 있다.

[2. 왕씨(王氏) 고려는 결코 고구려의 계승자가 아니다]

서기 918년 한반도에서 ‘고려’라는 이름의 정권이 출현하였다. 그 통치자의 성(姓)이 왕씨였기 때문에 학계에서는 이를 ‘왕씨 고려’라고 부른다. 비록 왕씨 고려는 고구려의 칭호를 계승했지만, 고구려의 승계와는 직접적인 관련이없다.

고구려가 패망하고 고려가 세워지기까지는 큰 시간 차이(250년)가 있을 뿐 아니라 역사 발전과 연원도 크게 다르다. 기원전 37년에 세워진 ‘고씨 고려(고구려)’는 서한(西漢)의 현도군 고구려현 관할하에 있었다. 그후 점차 강성해졌지만 중국 중앙왕조와의 종속관계를 끊지 않았다. 수·당 시기로 접어들어 고구려는 영토 확장정책을 실시해 한반도에 있는 기타 정권(삼한과 신라·백제 등)이 중원의 왕조에 조공하는 통로를 가로막아, 수·당 두 왕조로부터의 토벌을 불러들였다.

서기 668년 당나라는 마침내 ‘고씨 고려’를 통일함으로써, 고씨 고려의 영토는 당나라 안동도호부(최초의 행정중심은 지금의 평양)에 의해 관할되었다. 그리고 몇십 년 후 고씨 고려가 관할하던 구역에 중국 역사에 등장하는 또 하나의 지방정권인 ‘발해’가 들어섰고, 고씨 고려가 관할한 다른 일부분 지역은 한반도 남부에서 일어난 신라 정권에 귀속되었다. 하지만 이를 제외한 부분은 여전히 안동도호부에 의해 관할되었다.

고려는 三韓을 이었다

대부분의 고구려족은 당나라에 의해 내지(內地: 중국)로 옮겨져 한족과 융합되었으며 나머지 고구려인은 주위의 각 민족에 융합되었다. 이로써 고구려 왕족은 후계자가 끊겼으니 고구려는 나라를 세운 지 700여 년 만에 드디어 중국 역사발전의 긴 강 속으로 사라지게 된 것이다.

왕씨 고려가 건국한 것은 고씨 고려가 멸망한 때로부터 250년 후인 서기 918년이었다. 왕씨 고려는 서기 935년 한반도에 있던 신라 정권을 대치하였고 그 이듬해에 후백제를 멸망시켜 반도 중남부의 대부분을 통일하였다.

그러다 서기 1392년에 왕씨 고려의 신하인 이성계(李成桂)가 왕을 폐위하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1393년 이성계가 ‘조선과 화녕(和寧) 중에서 어느 것을 국호로 해야 하는가’라는 주청을 올리자, 명나라 왕은 이성계에게 조선 왕을 하사하였다.

그리하여 왕씨 고려는 국호를 조선으로 바꾸게 되었는데 중국 학계에서는 이를 ‘이씨 조선’, 줄여서 ‘이조(李朝)’라고 부른다. 이것이 바로 명(明)·청(淸) 시기의 조선국이었다.

그 다음으로 살펴볼 것은 왕씨 고려와 고씨 고려는 관할 구역 내의 주민 구성이 다르다는 점이다. 고씨 고려 관할지역 내의 주민은 고구려족이 주력이었다.

고구려족의 연원은 중국 상고시대부터 있었던 민족인 예맥족이 동쪽으로 이동해 부여·고이·옥저·소수맥(小水貊: 압록강의 북쪽에 있는 혼강에 고구려를 세운 종족. 주몽을 따라 나라를 세운 종족을 맥족이라고 하는데 그중에서 大水인 압록강 유역의 맥족을 대수맥, 小水인 혼강 쪽의 맥족을 소수맥이라고 한다)·동예(東濊: 동해안 지역에 거주한 고구려족의 일파) 등이 되었는데 그후 위씨조선의 후예와 한족(漢族)·선비(鮮卑: 고대 남만주 몽골 등지에 살았던 유목 민족)족 등이 들어가 융합하였다.

많은 민족으로 구성됐지만 이들은 장기간 공동생활을 하면서 점차 융화돼 하나가 되었다. 역사서(史書)와 학계에서는 이들을 일반적으로 고구려족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왕씨 고려 관할지역 내의 주민은 신라인 위주였다. 왕씨 고려는 신라와 후백제를 병합하였으므로, 신라인과 백제인이 왕씨 고려의 주요 주민이 되었다.

대부분의 신라인은 한반도 남부지역에 있었던 진한과 변한인에 뿌리를 두고 있다. 고씨 고려 멸망 후 비록 일부 고구려인이 신라로 유입되기는 했으나 이들은 신라의 주력을 이루지는 못했다.

백제인은 대다수가 한반도 남부에 있었던 마한인에 뿌리를 두고 있다. 따라서 왕씨 고려는 한반도 남부에 있었던 ‘삼한인(三韓人)’이 중심이 된 나라라고 할 수 있다.

수많은 역사서들은 왕씨 고려인과 중국의 옛 사람들이, ‘왕씨 고려는 삼한의 후예다’라고 기록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수백년간 계속된 왕씨 고려 왕조의 역사 발전 속에서 구성원들은 점차 하나의 민족으로 융합되어가는데, 역사서와 학계에서는 이들을 ‘고려족’으로 부르고 있다. 왕씨 고려가 이씨 조선으로 이어졌으므로 조선은 민족 명칭이 되어 오늘날까지 사용되기에 이르렀다.

왕건은 낙랑군에 있던 漢族의 후예

마지막으로 왕씨 고려는 고씨 고려의 후예가 아니다. 왕씨 고려의 왕족은 고씨 고려의 후예가 아니었다. ‘고려사’를 쓴 사람은 왕건(王建)의 족속에 관해서 “고려의 선조는 역사에서 상세히 설명돼 있지 않다”라고 적었다. 그러나 중국학자가 고증한 바에 의하면 왕건은 서한(西漢) 시절 낙랑군에 있었던 한인(漢人)의 후예일 가능성이 아주 높다고 한다.

그 근거로 왕씨는 낙랑군의 명문 귀족이었고 가호가 많았던 점을 들 수 있다. 왕건은 임종시에 남긴 가르침인 ‘십훈요(서기 943년 고려 태조 왕건이 자손들에게 귀감으로 남긴 열 가지 유훈. ‘훈요십조’라고도 한다)’에서 자신은 고씨 고려의 후예라고 언급하지 않았다. 오히려 왕건은 자신은 평민 출신이며 ‘삼한 산천의 보호에 의지한다’라고 말했다. 그는 마한·진한·변한을 통일한 것이니 후계자들 또한 삼한을 소유하길 바랐던 것이다.

왕건이 고씨 고려의 후예였다면 그는 통치를 위해서라도 그 사실을 대대적으로 선전하였을 것이다. 이것은 아주 상식적인 이치인데 왕건은 그렇게 하지 않았으니 이는 왕씨 고려가 고씨 고려의 후예가 아니라는 좋은 반증이다.

왕씨 고려는 결코 고구려의 계승자가 아니었다. 한대(漢代) 한반도에서 일어난 마한·진한·변한은 신라와 백제로 발전해갔고, 백제는 당나라에 의해 멸망하였으며, 신라는 왕씨 고려가 대신하게 되었다.

그후 이조가 왕씨 고려를 대신해 최종적으로는 이씨 조선으로 발전하였다. 이러한 정권들의 강역(疆域: 영토) 범위는 한 번도 한반도를 벗어난 적이 없었다.

[3 . 고구려와 왕씨 고려의 역사가 혼돈된 원인]

사람들이 왕씨 고려를 고구려의 계승자로 잘못 보게 된 이유는 중국의 역사기록과 깊은 관계가 있다. 반고(班古: 후한 초기의 역사가. 서기 32~92년)가 쓴 ‘한서(漢書)’는 중국 정사(正史) 중의 하나로 고구려의 사적에 대해 제일 처음 기술했다. 진수(陣壽: 중국 西晉의 역사가. 서기 233~297년)가 편찬한 ‘삼국지’는 처음으로 고구려를 ‘전기(傳記)’에 넣은 역사서다. ‘구당서’와 ‘신당서’에 이르기까지 많은 역사서는 ‘동이전’ 혹은 ‘만이전(蠻夷傳)’ 속에 고구려의 전기를 기술하였다.

이 역사서들은 비록 구체적인 사건을 기록하는 데 있어 약간의 실수를 범하고 있지만, 고구려의 역사 위치를 명확히 정해놓고 있다. 그런데 후대에 이르러 사서의 기록이 혼란스러워지면서 명백한 실수가 나오기 시작했다.

왕씨 고려는 서기 918년에 나라를 세우고 1392년 이씨 조선으로 교체되었는데, 이 시기는 중국의 오대(五代) 중기에서 명나라 초기에 해당한다(五代는 五代十國의 약어로 당나라가 멸망한 907년부터 송나라가 통일한 960년 사이의 약 70년간 중국이 여러 나라로 분열되었던 시기다).

따라서 ‘구오대사(舊五代史)’와 ‘신오대사’ ‘송사(宋史)’ ‘요사(遼史)’ ‘금사(金史)’ ‘원사(元史)’ ‘명사(明史)’ 등의 역사서에는 모두 ‘고려전’이나 ‘조선전’이 등장한 반면 고씨 고려에 대한 기록은 그 이전의 역사서에 비해 약술하게 되었다.

‘舊五代史’로부터 시작된 오류

이러한 역사서의 기록을 종합해보면 ‘구오대사’와 ‘신오대사’는 가장 먼저 고씨 고려를 왕씨 고려전에 기록한 책이었다. 그리고 ‘송사’는 “왕건이 고씨의 자리를 계승하였다(王建承高氏之位)”라는 표현을 최초로 사용한 책이다. ‘구오대사’와 ‘신오대사’ 그리고 ‘송사’에 등장하는 이 기록은 그 후에 나온 여러 역사서의 기록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게 되었다.

‘구오대사’의 고려전은 약 240자로 되어 있는데, 여기에는 “당나라 말년 중국에서는 내란이 많았다. 그래서 고려인은 스스로 군장(君長: 왕이나 우두머리)을 세웠는데 이들의 이전 왕(前王)의 성은 고씨였다”라고 적었다. ‘구오대사’는 고려인이 군장을 세웠는데 전왕은 고씨였다고 묘사한 후 바로 왕씨 고려에 대한 기록을 이어갔으니, 왕씨 고려가 고씨 고려를 잇는 것으로 오해될 수 있는 소지를 만들어준 것이다.

‘신오대사’의 고려전은 약 280자로 돼 있는데 그 첫머리에는 “고려는 본래 부여인의 별종(別種)이다. 그 나라와 군주 등에 관한 기록은 ‘당서(唐書)’에 기재되어 있는데, 이들은 다른 이적(夷狄: 오랑캐)과 달리 성씨가 있었고 관직의 호칭을 대략적이나마 알 수 있었다. 당 나라 말년에 (이들은) 왕씨 고려가 되었다”라고 서술한 후 모두 왕씨 고려에 대한 기록을 남겼다(이러니 왕씨 고려는 고씨 고려를 잇는 것으로 오해될 소지가 있다는 의미임).

‘구오대사’는 북송(北宋) 사람인 설거정(薛居正)이 감수하여 북송 초기인 서기 973~974년에 걸쳐 편찬되었다. 이 시기 중국은 반세기 동안이나 분열 국면(5대10국)이 계속되고 있었으며 통일전쟁도 진행되고 있었다. 이런 이유 때문에 ‘구오대사’ 고려전의 기록은 간략해졌을 뿐만 아니라, 잘못 기재된 곳이 많았다. “당나라 말년 중국에서는 내란이 많았다. 그래서 고려인은 스스로 군장을 세웠는데 전왕의 성은 고씨였다”는 기록이 바로 그런 예에 해당한다.

‘구오대사’ 고려전에 나오는 이 기록을 오류로 단정하는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는 조선에서 나온 한문 역사서를 포함한 어떠한 역사서를 찾아봐도 고씨가 당나라 말년에 고려 정권을 세웠다는 기록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둘째로는 송나라 사람인 사마광(司馬光: 중국 북송 때의 정치가이자 사학자. 서기 1019∼1086년)이 ‘자치통감(資治通鑑)을’ 편찬할 때 위에 언급한 글들을 전혀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점이다.

사마광이 이러한 태도를 취했다는 것은 이 기록들이 잘못된 것임을 명백히 보여주는 것이다. ‘구오대사’를 감수한 설거정은 고씨 고려와 왕씨 고려 사이의 관계를 분명히 밝히지 못했는데 이러한 오류는 ‘신오대사’의 저자인 구양수(歐陽脩: 송나라의 정치가이자 문인. 서기 1007∼1072)에 의해 해결되었다.

구양수는 ‘신오대사’를 편찬할 때 많은 소설(小說)과 필기자료를 참고하여 사람과 사건에 대한 묘사를 생동감 있게 집어넣었다. ‘구오대사’ 고려전은 고씨 고려에 관해 간략히 기술하였으며 왕씨 고려의 건국 근원을 밝히고 있다. ‘구오대사’ 고려전에서 ‘당 나라 말년에 중국에서는 내란이 많았다. 그래서 고려인은 스스로 군장을 세웠다”는 단락이 ‘신오대사’ 고려전에서는 “조금 후에 스스로 나라를 세웠다”로 간소화되었다.

그후(‘신오대사’가 나온 이후) 편찬된 ‘신당서’ 고려전과 ‘구당서’ 고려전에는 이러한 기록이 없어지고 오히려 ‘고씨 왕족이 사라졌다’는 말이 들어갔는데, 이는 고려 왕족의 후계가 끊어졌음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宋史’가 잘못 기록

원나라 사람 탈탈(脫脫) 등이 편찬한 ‘송사’는 고려전을 따로 한 권의 책으로 기록해놓고 있다. 여기에는 “고려는 본래 고구려이고 땅은 구주(九州: 중국 전토. 夏의 시조인 禹가 중국을 아홉 개 주로 나누었다는 데서 유래)와 달라 기주(冀州: 중국의 동북지방)의 땅에 속한다. 주나라 때는 기자(箕子)의 국토였고, 한나라 때는 현도군이었다. 고구려인은 요동에서 생활하였는데 대개 부여인의 한 별종이었으며 평양성을 수도로 삼았다. 한나라 이래로 늘 중국에 공물을 바쳤다. 그러나 자주 변경에서 난을 일으켜 수 양제는 두 번 군사를 일으켰고 당 태종도 직접 토벌하러 갔으나 모두 실패하였다. 당 고종은 이적에게 고구려를 정복하도록 명령하니 이적이 드디어 성을 함락시키고 그 땅을 군현(郡縣)으로 나누었다. 당나라 말년 중국에 내란이 많아지자 고려인은 스스로 군장(君長)을 세웠다. 후당(後唐) 동광(同光) 천성(天成) 때 고려 국왕 고씨는 자주 후당 왕에게 공물을 바쳤다. 후당 장흥왕 때 권지국사(權知國事: 아직 왕호를 인정받지 못하는 동안 우선 임시로 국사를 맡아 다스린다는 뜻의 칭호) 왕건이 고려의 왕위를 계승하였고 사신을 중국으로 파견하여 조공을 바쳤다…”는 기록이 있다.

이 내용 다음에는 왕씨 고려가 송 왕조와 교류한 것에 대한 사실이 기록돼 있다.

이러한 내용으로 볼 때 ‘송사’ 고려전은 앞부분에서 ‘신·구오대사’의 기술을 종합하고 이러한 기초 위에 두 역사서의 작자가 명확히 밝히지 않았던 왕씨 고려와 고씨 고려 간의 관계를 “왕건이 고씨 고려왕의 자리를 계승하였다”고 함으로써, 고씨 고려와 왕씨 고려가 계승 관계에 있는 것처럼 기술했다.

‘요사’ ‘금사’도 원나라 사람 탈탈 등이 편찬한 것이기 때문에 이와 유사한 잘못이 발견된다.

그후에 나온 역사서들은 이렇게 잘못된 기술을 답습하였다. ‘명사(明史)’는 이전에 나온 잘못된 역사서보다 한 발 더 나갔다. ‘명사’는 명 왕조가 이성계를 조선의 국왕으로 책봉한 것에 대해 합리적인 해석을 하려다 보니 앞의 몇몇 역사서가 저지른 오류를 답습했을 뿐만 아니라, 이씨 조선 정권의 연혁에 대해서도 아주 잘못된 계통을 세워주었다(‘명사’는 청나라 때 장정옥 등이 칙령을 받아 1679년부터 1735년에 걸쳐 기전체로 편찬한 336권의 역사서).

기자조선~고구려 넘겨준 ‘明史’

즉 ‘명사’는 “기자조선-위씨조선(위만조선)-한사군-고구려-동사복국(東徙復國: 패망한 고구려의 후예들이 동쪽으로 옮겨가 세웠다는 나라. 대체로 발해로 이해되고 있다)-왕씨 고려-이성계가 국호를 바꾸기 전의 고려-이씨 조선”으로의 계통을 세워줌으로써, 중국 역사에 속하는 기자조선과 위씨조선·한사군·고구려를 모두 조선의 역사 속으로 들어가게 하였다.

이렇게 중국 역사서에서 기술에 오류가 발생한 이유는 다방면으로 생각해 볼 수 있는데, 전란으로 문헌이 유실된 데다 왕씨 고려에 대한 오도(誤導)가 가장 중요한 원인으로 볼 수 있겠다. ‘속자치통감장편(續資治通鑑長編)’의 권 323, 송 원풍 5년(서기 1082) 2월 기사(己巳)일에는 이런 내용이 실려 있다.

사관수찬인 증공은 “내가 사서를 고찰해 보니 주몽은 흘승골을 수도로 한 후 국호를 고구려로 정하였다. 고구려의 왕은 고씨를 성으로 삼았다. 당나라 고종 때 고구려 왕인 고장(高藏: 고구려의 마지막 왕으로 보장왕으로 불림. 재위 기간은 642∼668년)은 국가를 잃고 서쪽으로 천도했다. 당나라 성력(서기 698∼699년) 시기에 고장(보장왕)의 아들인 고덕무(高德武)가 스스로 국가를 세웠다(고덕무는 699년 당나라가 만든 안동도호부의 안동도독에 임명되었는데, 그가 小고구려를 세운 시조라는 주장도 있다). 고구려는 원화(元和) 말년까지 악사를 중국에 보내왔으나 그 이후로는 그러한 기록이 중국 역사서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 오대 동광(同光)·천성(天成) 시절 고씨 성을 가진 고려 왕이 와서 다시 조공을 하였으나 그 이름은 알지 못한다. 장흥 3년 권지국사(權知國事)인 왕건이 사신을 파견하여 조공을 하였고 이로 인해 왕건을 왕으로 삼았다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왕위를 왕건의 아들인 왕무(王武: 혜종)를 거쳐 왕무의 아들 왕소(王昭: 광종), 왕소의 아들 왕유(王由: 경종), 왕유의 동생 왕치(王治: 성종), 왕치의 동생 왕송(王誦: 목종), 왕송의 동생 왕순(王詢: 현종) 등으로 이어갔다. (이렇게 왕씨들이 왕위를 이어갔기 때문에) 고구려는 주몽에서 고장까지의 21대에 걸쳐 700년간 고씨 성을 이어간 후 멸망한 나라였음을 고증할 수 있다. 고구려는 국가를 잃은 후 또 하나의 국가(小고구려 등을 말하는 듯)를 세웠다. 하지만 왕의 이름과 순서, 흥망의 본말(本末)과 왕건이 나라를 세웠을 때의 일들은 알 방법이 없다”고 말했다.

그 후 왕씨 고려는 송 왕조에게 왕씨 고려와 고씨 고려를 연결해달라는 하나의 ‘고려세차(高麗世次: 고려 왕의 차례)’를 바친다. 여기서 송나라 사람들은 왕씨 고려와 고씨 고려에 대한 인식이 모호해졌음을 알 수 있게 된다. 왕씨 고려가 바친 고려세차는 한 걸음 나아가 사실을 오도하는 작용을 했다.

‘고려’와 ‘조선’이라는 명칭을 도용

중국 사서들이 명백한 오류를 범함으로써 중국의 고대 변방민족이 사용하던 ‘고려’라는 명칭을 삼한(三韓) 신라의 계승자인 왕씨 정권이 도용하게 되었고, 한 발 더 나아가 왕씨 정권의 계승자인 이조(李朝)는 기자조선이 쓰던 ‘조선(朝鮮)’이라는 이름을 또 도용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현대인들은 중국 고대 동북지역에 있었던 변방정권의 연혁을 이해하는 데 있어 많은 혼란과 잘못된 견해를 갖게 되었다.

연구를 진행하는 데 있어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은 자료이다. 양보륭(楊保隆)은 1987년 제1기 ‘민족연구(民族硏究)’에 게재한 ‘고구려전을 싣고 있는 여러 역사서에 대한 몇 가지 문제 판별 방법(원제 各史高句麗傳的幾個問題辨析)’이라는 제목의 논문에서 매우 유익한 연구를 시도했다. 그러나 앞으로 해나가야 할 연구과제는 많기만 하다.

고구려사에 대한 연구를 정상적인 학술연구 범주에 넣어야 한다는 것이 우리의 일관된 주장이다. 우리는 고구려사 연구에서 발견되는 역사 문제를 ‘현실화하는 것’과, 학술문제를 ‘정치화하려는’ 경향과 작태에 대해 반대한다(고구려를 중국 역사로 분류하려는 중국측의 고구려사 연구에 한국측이 반대한다는 뜻인 듯). 고구려사는 중국 역사는 물론이고 한반도 역사를 연구하는 데 있어 계속해서 깊은 연구를 요구하는 과제이다.

심도 있는 연구를 하는 것은 과학적인 연구결과를 학계에 제공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고구려사를 연구하고 이를 심화하는 것은 학자의 책임이다. 연구한 결과에 대한 차이로 인해 일시적으로는 통일된 결론을 도출할 수 없을지라도, 학술 규범에 부합하는 규칙으로 학술 성과를 교류하고, 상호 존중하는 가운데 학술상의 논쟁을 벌여 서로 다른 의견을 개진할 수 있어야 한다. 이렇게 할 수만 있다면 여러 나라의 학자가 고구려 역사에 대한 연구에 공동의 노력을 기울일 수 있게 될 것이고, 그에 따라 큰 진전이 있으리라 생각한다.

 

 

 

 

 

Posted by 원주유
고구려 역사와 문화2013. 9. 14. 17:38
 
고구려 역사에 대해 쭉 나열해 보려 합니다.
577년 후주의 무제가 고구려를 침략, 평원왕이 배산의 들에서 격전을 펼치는데 온달의 활약으로 대승을 거둔다.
수나라가 막 일어나는 때 온달이 아차산성을 탈환하기 위해 신라군과 전투를 벌이다 전사.
589년, 중원에서 수나라가 진나라를 멸망시키고 통일했다는 소식을 듣고 군대를 양성하며 국력을 강화하다 590년에 승하, 영양왕이 즉위한다. 영양왕은 평원왕 때부터 다져진 기반을 바탕으로 수나라의 4번에 걸친 침입을 막는 대업을 이룬다.

먼저 수나라와 고구려의 씨를 말리는 전쟁은 598년, 고구려의 침입에서부터 시작된다. 먼저 영양왕이 말갈기병 1만을 거느리고 몸소 출정한다. 여기서 고구려 순수 주력군이 나타나지 않는데 아마 직접 전투에 참여한 숫자만 기록한 걸로 보인다. 명색이 한 나라의 군주인데 속국의 병사들만 이끌고 나가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아무튼 고구려의 선제 공격은 수나라 장수 위충의 저항으로 실패한다.

그 해 7월, 수나라 문제는 30만 대군을 보낸다. 그러나 고구려의 1차 방어선인 요하와 대릉하에서 무지하게 개박살난다. 특히 의무려성의 고구려 군의 활약이 컸다. 7월은 장마철이라 강은 범람해 늪지대가 되어 수나라 군대는 꼼짝 못했으나 고구려 군대는 그것을 알았기에 수나라 군대를 마음먹은대로 요리한 것이다. 수나라 수군 역시 몰살 당하기는 마찬가지, 여름에 부는 태풍을 생각지 않고 무작정 나아가다 대동강 근처도 못가고 모조리 몰살당하고 해안가의 고구려 수군이 요격을 하여 무참하게 패한다. 원정군 30만 중에 80~90%가 고구려 본토에 들어가보지도 못하고 국경 지역에서 몰살당한 것이다. 어떤 사가에는 30만이 아니라 100만이라고 적었으며 창피해서 30만으로 줄였다는 기록도 있다.

수나라 문제는 태자 양광의 칼에 맞아 죽고 양광이 즉위하여 양제가 된다. 이 양제 때문에 고구려나 중국이나 엄청난 피를 흘리게 된다.

611년 2월, 수나라 양제는 총동원령을 내렸다. 배 기술자들은 10개월간 300척의 전선을 만드느라 40%가 죽었으며 전국의 군수품 수송 인부만 60만이었다. 정규군대만 113만 3800명이며 30군으로 편성했다. 1군 당 4만명의 보병과 4천의 기병으로 이루어져있으며 6군은 양제가, 12군 씩 우중문과 우문술이 지휘했다. 그뒤로 말 10만필과 공성 무기, 200일치 식량을 나르는 치중부대(보급 부대)와 그 밖의 예비군과 잡병 등 300만이 따랐다. 수군은 누선을 중심으로 10만을 편성하고 한달 분 식량을 실었다. 30군의 대열 960리와 양제의 친위대가 80리의 대열을 이루어 총 1040리나 되는 길에 수나라 군대들이 가득했다. 출정은 611년 12월부터 1월 사이에 이루어졌다.

612년 2월 고구려 1차 방어선인 요하에 도착했다. 그 30만 대군이 몰살했던 곳이었다. 여기에도 고구려군 수만명이 활과 쇠뇌를 들고 자리잡고 있었다. 양제는 공부상서 우문개에게 부교(임시 다리) 3개를 만들게 했다. 그러나 부교가 길이가 짧아 선봉장 3명과 수많은 수군만 죽어나갔다. 부교의 방향을 틀어 수나라 군대가 쪽수로 밀어붙이자 고구려군은 1만명의 전사자를 내고 후퇴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수나라의 피해가 기록되있지 않다는 것이다. 보통 중국의 기록가들은 수만 명의 전사자가 난 패배는 패했다고 기록할 뿐 규모를 기록하지 않고 단지 그 와중에 올린 전과만을 기록한다. 고구려 전사자 1만 명도 그 예일 것이다. 보통 상륙하는 쪽이 불리한 법이며 통상 3배 이상의 피해를 입는다. 선봉장이 3명이나 죽었다는 사실을 보아 최소 3만 명은 전사한 것 같다.

요하에 상륙한 수군은(水가 아니라) 중간의 방어성인 신성, 개모성 등을 무시하고 최대 방어성인 요동성을 둘러싼다. 그러나 요동성은 제일 높은 곳이 40m, 제일 낮은 곳이 20m인 엄청난 성이다. 성에만 양곡이 50만 석이 있었다. 당나라 침입시엔 2만의 기병이 있었다. 아무리 수군이 공격해도 끄덕이 없었다. 오히려 되레 성문을 열고 나와 내쫓길 정도였다. 이리하여 출정 이후로 무려 6개월이란 시간이 흘렀다.

한편 수나라 수군 10만 명중 4만 명이 상륙하여 평양성을 공격한다. 그러나 고건무의 복병계로 4만명 중 고작 10%만이 살아 돌아간다. 나머지 수군들마저 고구려 수군의 일제 공격으로 쫓겨난다. 이 전투로 수나라 수군은 전투 능력을 상실한 부대가 되었다.

6월, 양제는 30군 중에 24군을 9군으로 개편하였다. 우중문과 우문술의 약 80만 군대가 30만 5천 명으로 줄어있었기 떄문이다. 자신은 나머지 6군을 이끌고 소성인 육합성 점령하여 머물고 30만 5천 명의 군대로 우중문과 우문술에게 평양성을 치게 한다. 그리고 이 부대는 압록강 방어선 총 지휘자 을지문덕의 7번 져주기 전략에 말려들어 평양성 앞까지 갔다가 고구려군의 반격으로 싸우면서 청천강까지 밀려난다. 그리고 수군이 도하하는 것을 지켜보던 고구려군은 그들이 반 정도 건너자 일제히 공격한다. 이것이 그 유명한 살수 대첩이다.(7월) 그러나 전투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이들이 압록강에 다다르자 압록강 일대 방어성인 봉황성을 중심으로 한 수십개 성의 고구려군이 몰려나와 이들을 덮쳤다. 수나라 군대는 하루에 450리를 도망쳤다고 한다. 그리고 보병들은 따라가지 못해 죽거나 사로 잡혔다. 양제가 머무는 육합성에 도착한 수군은 2700며이었다. 30만 2300명의 병사가 모두 죽거나 잡힌 것이다. 양제는 지휘관인 우중문을 매를 매우 친 뒤 평민으로 만들고 자신의 장인이자 우문술은 돌아가는 길에 쇠사슬에 묶고 갔으며 그 밑에 부관들은 거의 다 참수했다고 한다. 당시 맞서 싸운 고구려군의 정규군은 22만 명이며 예비군을 포함하면 60만에 이른다는 최치원의 글이 있다. 고구려 전성기 때엔 100만까지 동원할 수 있었다고 한다.

8개월 간의 2차 침임으로 수나라 군이 거둔 전과는 요하 상륙 때 얻은 의무려 성 하나 뿐이다.(1차 침임 때 활약한 성)

양제는 분함을 거두지 못하고 4개월 후인 613년 1월 3차 원정을 준비한다. 그리고 3월 출정을 한다. 규모는 약 30만 명으로 추정된다. 그들은 요동성을 둘러싸고 20일간 쉬지 않고 공격한다. 그러나 군량 담당의 양현감이란 자가 아비를 죽인 양제에게 앙심을 품어 군량을 안 보내주고 자신의 반란군의 식량으로 돌려 반란을 일으킨다. 양제는 급히 군사를 돌렸다. 병기와 식량도 남겨둔채 그대로 도망쳤고 고구려군은 하루 상황을 지켜본 후 항복한 병부시랑 곡사정을 통해 내부사정을 알자 추격하여 수군 수천 명을 몰살한다. 3차 침임의 수군의 피해는 약 2만 명의 전사자였다.

양제는 614년 2월, 동원령을 내려 4차 침입을 준비한다. 그리고 7월 또 침입을 한다. 이번엔 그 규모조차 기록하지 않을 만큼 초라했다고 한다. 그러나 고구려도 3년 간 청야 전술로 인해 곡창지대인 만주지방에서 농사를 제대로 못해서 국력이 많이 피폐했다. 그래서 영양왕은 거짓 항복의 서를 보낸다. 물론 양제 또한 지쳐있었기에 받아들인다. 그런데 양제가 항복의 서를 읽고 있을 때 사신 일행 중 고구려 외부인 하나가 쇠뇌를 쏘아 양제를 맞추고 도망친다. 양제는 비감한 어조로 자책을 하며 뻔히 보이는 거짓항복을 받아들인다. 이미 나라 꼴이 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618년 수양제는 피살당하고 수나라는 망하자 양제의 이종사촌 이연이 즉위하여 당나라를 세웠다. 더불어 그 해 영양왕 역시 승하한다. 4번에 걸친 침략을 막아낸 위대한 왕이었다.


30만 대군을 몰아 고구려를 치게 될 당태종은 원래 태조 이연의 둘째 아들 이세민이며 형제 둘과 조카 열명을 죽이는 이방원 같은 행동을 하여 2대 황제에 오른다. 당나라가 일어나자 고구려에겐 국력을 회복할 시간이 필요했다. 고구려는 먼저 당나라에게 제후국임을 자처하며 당나라의 침략을 막아보고자 했고 당나라 또한 수나라 때 망가진 나라를 돌보느라 정신이 없어 사이좋게 24년간 지내게 된다. 물론 제후국 임을 자처한 것이나 당태종에게 벼슬을 받은 것은 어디까지나 껍데기 같은 연극에 불과했다. 고구려는 629년 신라에게 낭비성을 빼앗겨 어느새 수나라와 전쟁을 하는 사이 빼앗긴 땅이 500리나 되었다. 631년 북방 방어선들을 잇는 천리장성을 쌓기 시작했고 638년 칠중성을 공격하기도 했다.

642년 고구려에 쿠데타가 일어난다. 영류왕이 지나치게 당나라에게 굴욕적인 외교관계를 맺고 강건파인 연개소문을 처치하려하자 연개소문이 쿠데타를 일으킨 것이다. 연씨 집안은 대대로 철을 잘 다루는 명문 귀족이며 그 가문 자체가 궁술, 기마술 등에 뛰어난 집안이었다. 영류왕과 온건파 대신들을 모두 베고 난 연개소문은 보장왕을 즉위시키고 자신은 대막리지가 되어 실권을 쥔다.

643년, 신라에서는 무지하게 백제와 고구려에게 터지고 있었다. 백제가 40여 개 성을 빼앗고 고구려도 연합하여 백제의 뒤를 밀어주고 있었으며 신란의 변경 지역을 쳐서 영토를 되찾고 있었다. 그래서 신라는 당나라에게 구원을 요청해 당태종이 백제와 고구려에게 경고의 글을 보냈다. 백제는 받아들였으나 고구려는 이를 무시했다. 태종이 장엄이란 자를 사신으로 보내자 연개소문은 그를 굴에 가두었다. 그리고 백제와 연합하여 한강의 신라 영토인 당항성을 공격한다. 신라는 당에 구원을 요청하고 태종은 고구려 정벌을 하게된다.

645년 2월 당군은 북경에서 출정을 한다. 당군은 총 병력을 10만이라고 하나 실제론 30만 이상 이었다고 한다. 삼국사기에는 10만이라 적혀있으나 제대로 된 사가에는 30만이라 기록되있다. 우리나라 역사를 엉망으로 기록한 사대주의자 김부식이 중국놈들이 죄다 왜곡한 기록들을 그대로 베껴왔기 떄문이다. 수군은 4만 3천이며 육군은 최소 20만은 넘을 것이다. 왜냐하면 당태종이 원정 전에 말하기를 수나라 떄와는 비교 안되는 규모로 쳐들어간다고 얘기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번에도 패하기에 그렇게 줄여 기록한 것이다. 실제로 당나라와 수나라의 전투를 기록한 자치통감이나 당서는 당나라 군대가 패배한 것은 대충 적거나 치열한 전투였다고 하고 고구려군의 작은 패전은 세세히 기록하면서 자신들의 군대는 축소하고 고구려군 전사자는 몇 배를 불려 적어 마치 적은 수로 다수를 이긴 듯이 기록했다. 그 예로 다음 전투를 보면 알 수 있다.

645년 4월, 당군은 신성에 이르렀다. 이도종이 이끄는 당군은 신성의 고구려군에게 싸움을 걸었으나 무시 당한다. 그러나 시기를 알 수 없지만 엄청난 전투가 이루어진다. 자치통감에는 3대전 중 안시성 전투와 함께 신성전투를 기록하고 있는데 시기조차 안 적고 피해규모는 고구려 군만 자세히 적어 놓고 양 쪽의 사상자가 많이 있었으나 신성을 점령하지 못했다고 한다. 이것을 보면 엄청난 패배를 당한 것으로 보인다. 신성은 고구려 초기부터 북방 민족의 침략을 지켜온 성이기 때문이다.

또 하나 당군이 건안성에 이르러 고구려군과 싸워 고구려군 수천이 전사했고 장검군도 커다란 손실을 입었다고 했는데 여기서 봐도 당군의 피해는 어물어물 넘긴 것이 빤히 보인다.

아무튼 당군은 건안성과 신성 점령에 실패하자 개모성을 공격하여 인구 2만명과 양곡 10만 석을 얻는다. 한편 당나라 수군은 천혜의 요새 비사성을 한 달간 공격해 간신히 점령한다. 이 병력 중 일부는 건안성으로 공격해 건안성은 장검군에 이어 또 한 번의 전투를 치르나 막아낸다.

한편 당태종의 선봉대는 요동성에서 무참한 패배를 당한다. 장군예가 이끄는 당군은 국내성과 신성의 구원병인 4만의 기병에게 무참히 깨져 장군예는 목숨만 건져 돌아간다. 여기서도 양 쪽에서 많은 희생자를 냈다고 하나 우습게도 자치통감엔 승리한 전투는 자세히 적고 패배한 전투는 양쪽 모두 많은 손실을 입었다고만 기록했기 때문에 당군은 참패였을 것이다. 당태종의 본대가 도착하자 장군예는 패배를 이유로 참수당하고 당태종은 포차와 충차를 동원하고 화계로 성안에 불을 질러 19일만에 난공불락 요동성이 함락당한다. 요동성을 지키던 병사 1만명이 전사하고 군사 1만과 주민 4만이 포로로 잡히고 양곡 50만 섬이 포획된다. 백암성 성주 손대음은 고구려 장수 중 처음으로 싸우지 않고 항복한다. 연개소문은 구원군으로 북부욕살 (고구려는 5부를 나뉘어 통치했는데 욕살이 부의 책임자다) 고연수와 남부 욕살 고혜진이 15만을 안시성에 보낸다. 전국의 2/5의 병력이 온 것이다.

그러나 전투 경험이 없는 왕족 고연수는 태종의 계략으로 패배한다. 이 전투를 신성 전투와 더불어 3대전 중 하나로 꼽힌다. 물론 나머지 하나는 안시성 전투이다. 그러나 15만은 과장된 숫자이다. 그당시 건안성과 안시성 사이에만도 10만 대군이 온전하게 보존되어있기 때문이다.

645년 8월, 안시성을 둘러싼 전투가 벌어진다. 안시성 군민은 양만춘 장군의 지휘 하에 잘 지켜냈다. 성벽이 포차에 의해 무너지면 목책을 쌓고 당군이 흙산을 쌓았는데 그것이 무너져 안시성을 덮치자 혼란에 빠진 군대를 통솔해 흙산을 점령하였다. 게다가 태종은 고구려 군 화살에 눈을 맞았다. 물론 당나라 역사책엔 이 사실을 거의 다 은폐한다. 9월, 당나라 군대는 패주한다. 패주 원인은 식량이 다 되고 추위가 닥쳐서라지만 실제론 핑계거리가 안된다. 왜냐하면 9월은 늦가을이기 떄문이며 겨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추위가 어디 당군에게만 닥쳤을까? 실제론 연개소문이 보낸 승병 3만에게 패했다고 한다. 이 승병은 불교의 중이 아니라 조의선인이란 고구려 무인 집단을 말한다. 단순히 선덕여왕이 미소년들을 모아 만든 화랑하곤 차원이 다르다. 화랑에선 동성애가 있을 정도였으며 김유신의 경우 출세를 위해 여동생을 임신시켜 시집보내는 비도덕적 행위까지 벌인다. 이것이 후대에 좋게 꾸며졌을 뿐이지 김유신은 출세를 위해 여동생을 팔아먹은 비열한 자이다. (조의선인은 검색하면 자세히 나옵니다. 이것을 따로 덧붙이면 될겁니다.) 게다가 당태종이 양만춘에게 비단 백필과 활과 옷을 보냈다는 것 또한 모두 역사의 왜곡이자 당나라 역사가들의 헛소리이며 당태종은 패하여 군막도 제대로 못 거두고 추격을 피하기 위해 늪지대로 도망쳐갔다. 그 와중에 선물을 한다면 그 자는 미친 자일 것이다. 그리고 양만춘은 성문을 열고 추격을 했다. 이리하여 고구려는 당의 침임을 막게되고 태종은 4년 후 화살의 상처가 도져 죽는다. 물론 당나라 각 역사서엔 이를 은폐하기 위해 신당서에선 감기, 자치통감은 이질, 구당서엔 등창으로 죽었다고
되있다. 한 황제의 죽음에 이렇게 기록이 다를 리가 없다. 그래서 신채호 선생님이 직접 현지에 가서 조사한 결과 아직도 독화살로 죽은 당태종의 이야기가 남아있으며 중국인에게 4대 황제 중 하나로 칭송받는 당태종의 업적에 금이 갈까봐 그렇게 은폐한 것이라고 한다.

번외 이것은 정식 역사서로 인정 받지 못하는 한단고기의 기록이지만 연개소문은 당태종이 패한 후 기병을 동원하여 북경까지 땅을 빼앗았고 고려성을 세웠다고 한다. 놀랍게도 역사 스페셜에서 그 증거를 찾아내었다. 북경 주변에 고려성곽의 일부, 고구려 식 지명과 그 유래 등등,, 그러나,.. 이 사실을 인정하게 되면 우리나라 사학자들 모두가 논문 폐기하고 사퇴서 쓰고 학자 때려쳐야 하기 떄문에 필사적으로 한다고기를 인정하지 않는다


멸망 당시 시대 상황..

백제는 신라 진흥왕 때의 배신으로 사이가 엄청 안 좋았습니다. 게다가 신라는 진흥왕 때의 넓은 영토를 한강 유역 제외하고 다 빼앗겼습니다. 비록 신라가 진흥왕 때 강성했지만 아무래도 백제가 곡창지대인 호남지방을 차지하고 있었기에 신라가 절대적으로 불리했고 흔히 말하는 의자왕의 '40여개의 성을 빼앗는 업적'도 이루어지지요. 대야성을 비롯한 40여성을 빼앗겼다는 것은 신라 영토의 절반 정도를 빼앗긴 겁니다. 고구려조차 그 광활한 영토을 지키는 성이 170여개였습니다. 백제는 100여개였구요. 김유신이 다시 수복하긴 합니다만 다시 백제와 고구려와 연합해 33개의 성을 빼았습니다.

게다가 백제 무왕 때부터 의자왕까지 막강한 국력으로 신라를 끊임없이 공격했기에 신라는 지칠대로 지쳐있었습니다. 고구려가 수나라랑 싸울 때 야금야금 차지한 죽령 이북의 땅도 전쟁이 끝나자 연개소문이 남부 병력을 총동원해 수복하고 있었지요. 김유신 위인전을 보면 신라가 막아낸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론 쥐어터지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백제와 함께 한강유역을 공격해 제일 약한 신라를 짓밟고 있었지요. 오죽하면 당나라에 김춘추를 보내 구원을 요청합니까? 적어도 자력으로 지킬 수 있었다면 비굴하게 다른 민족에게 구원을 청하겠습니까?


고구려 멸망,,

고구려는 아시다시피 연개소문의 죽음과 함께 약 70여년 간의 전쟁(그중 27년은 전쟁이 아닌 긴장 상태) 끝에 피폐해진 국력으로 인해 멸망합니다. 당태종이 30만 대군 이끌고 갔다가 왕창 깨진 이후로 그의 아들 고종은 총력전이 아닌 유격전으로 끊임없이 고구려를 공격합니다. 무려 20년간이나 되었죠. 고구려의 입장에선 농사를 제대로 못짓게 되어 식량 감소와 함께 인구 감소, 결국 군대와 보급까지 줄게됩니다. 661년 4월에 당 고종이 30만 대군으로 압록강 유역을 공격합니다. 요동지방은 워낙 방비가 두터워서 무시하고 들어가죠. 연개소문은 남생에게 막게합니다. 압록강에서 고구려군 3만이 전사합니다. 그러나 당군은 그 배로 전사합니다. 물론 당나라 역사가들은 적군보다 피해를 더 입은 전투는 패했다고만 기록했기 때문에 자세한 수치를 적지 않습니다.

연개소문이 죽자 맏이 연남생과 나머지 두 아우 연남건, 연남산은 연씨 가문을 견제하는 세력들의 이간으로 분열됩니다. 연남생은 국내성으로 도망칩니다. 국내성은 평양계 귀족들에게 좌천된 귀족들이 모여 있어서 연남생을 뒤엎어 권력을 탈취하려는 속셈으로 받아들이죠. 연남생은 어리석은 아들 연헌성의 조언으로 당에 협조하겠다는 문서를 보냅니다.

667년 당 고종은 그 말을 믿고 설필하력이 이끄는 당군이 신성을 공격합니다. 신성은 요동지방 최전선에 있는 성이지만 수나라나 당나라가 한번도 점령해보지 못한 난공불락 성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번엔 고구려 장수 사부구란 자가 성주를 묶어놓고 항복을 합니다. 결국 뒤늦게 도착한 고구려 구원군도 격파당하고 목저성, 남소성, 창암성 등도 줄줄이 격파당합니다. 이 전투들로 인해 고구려군 5만이 전사합니다. 한편 당나라 수군은 패하고 육군의 진격은 안시성 고구려군 3만이 요격을 하여 막아냅니다. 이로 인해 요동 일대 방어성은 거의 함락되었습니다. 게다가 국내성의 연남생이 그 주변 성과 함께 당에 항복합니다. 고구려 영토는 압록강과 만주 일대로 줄어듭니.

그 다음해 668년 당나라의 4차 원정이 시작되어 30만의 당군이 만주 동북부의 부여성을 공격합니다. 연남건이 군사 5만을 보냈지만 5천 명이 전사하고 패합니다. 또 대행성이 함락당해 주민 3만이 사로잡힙니다.
한편 신라군은 항복한 백제부흥군을 포함해 전국의 병사들을 긁어모아 20만 대군을 이끌고 평양성 남쪽으로 진격합니다. 당군 역시 30만 대군을 이끌고 평양 북쪽으로 진격합니다. 고구려는 이미 저항의 구심점을 잃었고 총 책임자였던 연남생의 회유로 항복하던가 중립을 지킵니다. 3차 정벌 때만 해도 고구려군은 20만에 가까웠지만 4차 정벌 후론 고구려 군의 저항이 거의 사라집니다.

평양성은 고구려의 도성이어서 워낙 견고해 한달이 넘도록 공격당해도 꿈쩍하지 않습니다. 연남생은 자신과 친분이 있는 수비대장 신성에게 출세를 보장하고 호응하게 하여 평양성은 함락되고 고구려는 멸망합니다.

고구려 멸망 원인은 위해서 말했듯이 50년 간의 전쟁과 27년 간의 긴장상태로 인한 국력 피폐, 너무나 오래된 침략 끝에 고구려 군과 민중들의 방어 의지 상실, 지도층과 귀족들의 내부 분열 등입니다. 사실 고구려를 멸망시키기 위해 당나라 국력의 반 이상을 소비해 양쯔강, 하북, 산둥반도 일대가 피폐화 되었습니다. 고구려의 연개소문이 10년만 더 살았다면 당이 먼저 자멸했겠죠.


고구려 최대 영토

고구려의 영토는 우리가 교과서에서 보는 영토보다 훨씬 넓습니다.

먼저 세계지도를 펼치시구요.

먼저 몽골 남쪽에 표시해두세요. 그리고 고비 사막 서쪽에 알타이 산맥 보이십니까? 여기서 밑으로 내려가면 신강성이 위구르족의 거주지인데요. 여기까지가 고구려 영토이었습니다. 비정식 역사서인 한단고기에는 광개토대제가 티벳까지 정벌했다지만 이건 좀 오버인 것 같구,, 하지만 위구르 지방까지 간 것은 맞는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카스피해와 인더스 강 사이에 있는 사마르칸트의 벽화에 고구려 사신이 무슨 수로 등장하겠습니까? 사마르칸트는 우리나라에서 비행기로 꼬박 10시간 이상가야 합니다.

그리고 중국 땅을 보시면,, 북경이 보이시죠? 여기도 역시 고구려 땅이었습니다.

북경은 유주 지방인데 역사 스페셜에서 유주 지방의 고분 벽화에서 지사가 고구려 인이었으며 고분 역시 고구려 식입니다.
또 연개소문이 당태종을 격퇴하고 나서 북경까지 침입했는데 당시 고려성이라는 성곽터가 있고 고구려식 지명이 남아 있습니다. 게다가 5대 왕인 모본왕 때 한의 수도인 낙양 위의 하북 지방을 점령했었습니다.

우리나라 사대주의 사학자들이 고구려 영토를 그렇게 작게 한 이유는 고구려에 복속된 이민족들의 땅을 더하지 않고 순수 고구려만 넣었기 때문입니다. 선비, 흉노, 거란, 돌궐, 몽골, 말갈 등 중원에서 한 때 호령했던 이민족들이 사실 고구려 속국이거나 조공을 바치는 이민족이었습니다. 전쟁이 터지면 항상 고구려는 이들 기병을 동원해 고구려 개마기병을 지원하게 했습니다. 게다가 연주 지방도 고구려 땅이었습니다. 연주 지방은 하북 지역을 뜻하고 황하 이북이 기준입니다. 고구려 최대 영토를 보면 엄청 작게 보입니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부여 땅도 빠져있습니다. 부여는 고구려가 초기부터 점령한 땅입니다. 선비족은 바로 하북 지역 북쪽에 있는 민족이며 이들 또한 고구려와 피터지게 싸우다 결국 복속됩니다. 즉 만리장성 북쪽 땅도 모두 고구려 땅입니다. 거란의 경우 말갈과 오랜 세월에 걸쳐 함께 복속되었으며 광개토 대제가 이들을 동원해 연주 지방을 점령합니다. 즉 하북 지역도 고구려 땅에 들어갑니다. 돌궐의 경우 고구려에게 조공을 바쳤습니다. 이 역시 고구려의 세력권이었다고 보는게 옳습니다. 그래야 고구려가 서역 지방에 사신을 보냈다는 것이 맞으니까요. 수나라가 통일하고 나서 돌궐이 빠져나가고 당이 일어나자 거란도 당에 속하게 됩니다.

정리하자면 고구려의 대륙에서의 영토는 만리장성 이북 전부와 이남 일부, 황하 위의 지역 전체, 산둥 지방 영토 등입니다.

Posted by 원주유
고구려 역사와 문화2013. 9. 14. 17:26

 

 

아차산 고구려 마을,고구려 대장간이 고구려의 핵심적인 곳이였다.

우리 나라에는 고구려 유적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고구려가 북한과 만주 벌판을 기반으로 했던 탓에 백제와 신라에 비해서 고구려 유적이 적고,

고구려의 흔적을 만나기도 쉽지 않지요.

그런데 우리나라에 거의 유일하게 있는 고구려 유적이 있으니 바로 아차산입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광개토대왕이 중국 대륙에 생겨나는 나라들을 상대로 북진을 했던 것과 달리

광개토대왕의 아들인 장수왕은 한반도 내에 있는 나라들을 정복하고자 하는 남진 정책을 펼쳤습니다.

장수왕은 고구려의 수도를 국내성에서 평양으로 천도했는데,

어떤 시각에서는 이를 중국과의 대결에서 고구려가 밀려 평양 천도를 했다는 시각도 있지만

한편에서는 광개토대왕 때 북쪽의 넓은 영토를 차지했고, 장수왕은 남진 정책을 폈기에,

남진에 유리한 평양으로 천도를 했다는 의견도 있더라구요.

아무래도 남진 정책에 물적 인적 자원이 풍부하고, 연락 체계가 원활히 진행 될 수 있는 수도가 가까이있다는 것은

남진 정책에 이어서 유리한 점일 테지요.

아이와 함께 둘러 본 고구려 대장간 마을은 고구려 유적이 아니라

고구려의 대장간 마을을 재현한 곳이며, 드라마 촬영장으로도 쓰였던 곳이었지만,

실제로 고구려의 유물과 보루 등이 발굴되고 있는 아차산에, 고구려의 벽화를 근거로 하여 재현한 마을이이었습니다.

 

비록 재현한 마을이지만, 이 기회에 고구려에 대해서 좀 더 알 수 있는 기회로 만든다면 더 좋겠지요?

그런 의미에서 두 권의 책을 소개합니다.

왼쪽의 웅진 주니어에서 출판 된 어린이 박물관 고구려는 유물 중심으로 고구려에 대해서 소개하고 있습니다.

여러 유물을 통해서 고구려 사람들의 생활 모습을 살펴 볼 수있으며.

유치원에서 초등 저학년의 아이들이 보기에도 참 좋은 책 같습니다.

오른쪽의 주니어 김영사에서 출판한 고구려사 이야기는 역사적 사실을 중심으로 고구려에 접근한 책입니다.

동명성왕에서 출발해 왕을 중심으로 하는 역사적 사실을 살펴 볼수 있는데,

초등 고학년 아이들까지 쉽게 읽을수 있을 것 같아요.

우리나라의삼국 시대의 유물을 전시하는 곳에서는 고구려 유물이 복제품의 형태로라도 전시 되어있습니다.

민혁이와 저는 지난 겨울 국립 중앙 박물관 꼼꼼 나들이란 주제로

국립 중앙 박물관의 유물을 세세히 둘러 본 적이 있었습니다.

이곳 대장간 마을에 고구려의 유물이 조금 전시 되어있기는 한데, 상당히 빈약합니다.

대장간 마을을 둘러보면서 고구려 유물이 함께 전시되어있는 박물관 나들이를 하셔도 참 좋을 것 같네요.

 

고구려가 남진 정책을 진행하면서 당시 한강의 주인이던 백제와 대치했던 곳이 바로 아차산이었습니다.

한강을 건너 아차산의 맞은편이 바로 백제가 한강 유역을 고구려에게 내어 주기 이전에 끝까지 저항했던

한성 백제의 성... 풍납토성과 몽촌 토성이 있던 곳입니다.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은 비교적 평평한 지형에 위치한 성으로,

아차산에 주둔했던 고구려 병사들은 높은지형을 이용해 백제의 도읍을 한눈에 내려다 보며 정세를 살폈다고도 해요.

큰 세력을 떨치던 고구려가 코 앞에서 먹잇감을 노리 듯 백제를 들여다 보았을테니,

백제는 또 얼마나 두려웠을지 짐작됩니다.

 

이곳 아차산과 마주한 곳에 백제의 수도 위례성이 있었으니,

고구려와 대치했던 백제에 대해서도 아차산을 둘러보며함께 살피면 좋지 않을까요?

위의 사진은 지난 해 여름 석촌동 고분군에서 찍은 사진입니다.

몽촌 토성과 풍납 토성을 둘러보는 것도 백제에 대해 알아 보기 위한 좋은 방법이지만

저는 지난해 새롭게 개관한 '한성 백제 박물관'과 가까이 위치한 '석촌동 고분군'을 꼭 둘러보시라고 추천하고 싶습니다.

한강 유역의 발전과정과 더불어, 한성에 수도를 정했던 백제의 문화 및 생활 모습을 잘 소개하고 있는 박물관으로,

국립 중앙 박물관이야 워낙 방대한 자료를 가진 곳이니 제외하고, 개인적으로는 가장 좋았던 박물관이었습니다.

특히 백제는 두 번에 걸쳐 수도를 천도했는데, 우리는 공주와 부여를 백제의 수도로 큰 의미를 두지만,

백제 700여년의 역사 중 이곳 한강 유역을 수도로 삼고 번영 했던 기간이 500년 가까이 된다고 하니

공주나 부여보다 오히려 더백제의 역사에서 중요하게 살펴 보아야 할 부분이 이곳 한성 백제 시기인 듯합 니다.

또한 가까이 위치한 석촌동 고분군 역시 백제의 왕릉으로 추정되는 거대한 기단식 돌무지 무덤으로

그 규모나 독특한 양식, 그리고 고구려와의 연관성을 찾아보시면새로운 사실들을 많이 알게 될거예요.

한성 백제 박물관과 석촌동 고분군은 꼭 함께 둘러보시기를 추천합니다.

( 한성 백제 박물관과 석촌동 고분군,국립중앙 박물관 꼼꼼 나들이 - 백제

 

대장간 마을을 둘러보기 전에

아차산에서 발굴된 유물들이 전시되어있는 '아차산 고구려 유적 전시관이 있습니다.

아차산은 고구려 남진 정책의 전초기지를 했던 곳입니다.

아이에게 전초기지의 의미를 아는지 물었더니, 산을 정복하기 전의 베이스캠프 같은 곳 아니냐고 되묻더라구요. 맞습니다. 백제 정복을 위한 베이스 캠프...

아차산 일대에는 능선을 따라서 20여개의 보루가 있었는데, 이 일대에서 발굴된 유물들이 이곳에 전시되어있다고 합니다.

 

한번도 우리나라의 지도를 거꾸로 본다는 개념이 없었는데,

이곳에서는 고구려 영토의 광활함을 보여주기 위해서인지, 한반도를 거꾸로 그려 두었습니다.

파란 색으로 칠해진 저 넓은 땅... 그걸 다 제대로 지켜 낼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싶네요.

 

유적 전시관에서는 아차산 자락에서 발견된 고구려의 흔적들을 전시하고 있습니다.

이곳이 제대로 자리를 잡은 거주지가 아닌 보루라서 그런지 정교한 토기라기 보다는 다소 조악한 느낌입니다.

 

이곳에서 발견된 활을 재현한 화살 촉들인데, 뻔하디 뻔한 화살 촉만 생각하다가, 다양한 모양의 화살촉을 보니 파괴력을 높이기 위한 무기 연구는 고대에도 있었구나... 싶었습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고구려 대장간 마을을 둘러볼까요? 앞서 말했듯이 이곳은 재현된 마을입니다.

설명에서는 고구려 벽화 속에 나타나는 집 구조를 바탕으로 상상하여 나타낸 곳이라고 해요.

이곳에서 몇 편의 드라마 촬영도 있었다고 하는데,

그래서 그런지 진짜 고구려 대장간 마을의 모습이라기 보다는 좀 더 환상적인 모습으로 꾸며져 있습니다.

 

마을 입구에서부터 '삼족오'가 그려진 깃발이 나부끼네요.

고구려 사람들은 태양 속에 세발 달린 까마귀 삼족오가 살고 있다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그러고 보면 중국의 유물이나 중국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측되는 우리나라의 유물 중

3이라는 숫자가 신성시 되고 있는 것을 종종 볼수있는데, 예를 들면 '세 발 달린 솥' 등이 그렇습니다.

아마도 3이라는 숫자는 완벽한 합일을 이루는 신성한 숫자인가봐요.

아! 그러고보니 서양의 기독교 사상에서도 3이라는 숫자가 신성한 숫자로 여겨지는 것 같네요.

기독교 속 '성 삼위일체'만 봐도 그렇지 않나 싶어요.

동양과 서양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이런 의미들을 볼때면 저는참 신비롭더라구요.

 

대장간 마을로 들어가는 입구에 목책도 늘어서 있습니다.

나무를 뾰족하게 깎아 벽을 둘러 방어용으로 사용하는 목책은 백제의 유적지인 몽촌토성...

지금의 올림픽 공원에서도 그 흔적을 확인 할 수 있다고 합니다.

 

크지는 않으나 올망 졸망한 집들이 기록과 상상력의 옷을 입고 마을을 이루고 있네요.

사진 찍기에도 참 좋은 곳 같았어요. 건물들이 참 예쁘거든요.

 

이 공간은 고구려 대장간 마을의 회의 장소를 염두에 두고 상상하여 만든 공간이라고 합니다.

이곳에서는 거믈촌이라고 부르는데, 드라마 태왕사신기의 촬영 장소로 이용되기도 했다고 하네요.

 

실제 고구려 사람들이 이렇게 멋진 의자에 앉아서 정말로 회의를 했을까요?

그보다는 상상력이 더 많이 가미된 공간 같기는 하네요.

나무의 구불구불함이 고스란히 보이는 의자에 앉아 회의하는 광개토대왕을 상상해 봅니다.

 

흙을 구워 만든 기와는 아무래도 고급 물품에 해당하니 중요한 건물의 지붕에만 덮였던가 봐요.

평범한 집들에는 나무를 쪼개어 지붕을 덮은 나무 기와가 눈에 띄더라구요.

 

뭔가 신비로운 공간을 묘사 해 둔 곳인데, 드라마 속에서도 점술을 행하거나... 신비로운 장면을 찍는 곳이었다 하더군요.

벽면에는 고구려 고분 '강서대묘' 속의 사신도가 그려져 있습니다.

뒷 쪽 벽면에 그려진 그림은 사신도 속 현무의 모습이네요.

현무는 거북의 몸에 뱀의 머리를 가진 상상 속의 동물로, 사방 중 북쪽을 상징합니다.

 

디딜방아는 이미 고구려 시대에 사용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고 해요.

고구려는 고분 벽화를 통해서 당시의 생활 모습을 소상히 살펴 볼 수 있는데, '안악3호분'의 벽화에서는 특히 디딜방아를 사용하는 모습이 잘 표현되어있다고 합니다.

또한 아차산 3보루에서도 6세기 전반 고구려 시대의 디딜방아 유적으로 추정되는 유물들이 발굴되었다고 하네요,

아차산 보루에서 발굴된 디딜방아의 흔적은 이 지역에 주둔했던 병사들의 식량지원 기능을 하였으리라 추측된다고 합니다.

 

왠지 아일랜드 숲 속의 요정 엘프들이 나타날 것 같은 참 멋진 공간이네요.

이곳을 담덕채라고 부르는데, 평범한 고구려의 가옥을 재현해 놓은 곳이라고 합니다.

 

담덕채 안으로 뛰어 들어가 창문을 활짝 열어 고구려 마을의 전경을 둘러 보니, 마을이 한 눈에 다 내려다 보이더라구요.

 

고구려 사람들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온돌을 사용했습니다.

하지만 방 전체를 데우는 형식이 아니라 방 안에서 불을 지펴 일부분만을 데우는 쪽구들 형식이었다고 해요.

고구려 사람들은 쪽구들 위에서 추운 겨울을 보내고 잠을 자며, 여름이나 평상시에는 의자에 앉아서 생활했다고 하네요.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온돌에 불을 지피는 아궁이는 건물의 외부에 있기 마련인데, 고구려 가옥에서는 아궁이를 건물 한 가운데에서 확인 할 수 있어요.

이렇게 아궁이가 집 안에 있으면 어떤 문제점이 생길까...아이에게 물어보니 나무를 태우면서 생기는 연기와 그을음으로 집 안이 무척 답답할 것 같다는 문제점을 이야기 하던데...

그래서 그런지 고구려 가옥의 천장에는 신석기시대 움집에서 보았던 것과 비슷한 환기 시설도 확인 할 수 있었습니다.

 

종이가 없던삼국 시대에는 나무...주로 대나무를 얇게 쪼개어 엮은 후 글을 써서 기록 햇는데, 이를 목간이라고 합니다.

목간이나 '목간'과 비슷한 '목책'은삼국의 유물에서 고루 발견되더라구요.

 

담덕채를 나와 이 마을의 가장 중요한 부분인 대장간으로 가 볼까요?

고구려는 잘 알려져 있다시피 정복국가입니다.

그들의 척박한 땅과 농사 짓기에 적절치 않은 기후 등이 고구려를 정복 국가로 만들었을 거예요.

원래 고대 시대의 전쟁이라는 것이 부족한 국가가, 필요한 자원을 얻기 위해 주변 국가를 침략하는 것에서 시작되었으니,

고구려 역시 자신들의 부족한 것을 채우기 위해 정복 국가가 되었으리라 생각됩니다.

정복 국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뭐니뭐니해도 무기겠죠.

고구려는 일찍부터 청동제 무기를 철제 무기로 대체하여 사용하면서

전쟁을 통해 지역 통합을 이룩하고, 지배권을 강화하여 고대 국가로 발전했습니다.

당시 철을 다루는 기술자들은 최첨단 기술을 가진 사람으로 나라의 발전에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합니다.

일례로 백제의 왕 석탈해에 관한 이야기를 읽어보면

석탈해가 쇠를 다룰 줄 아는 최첨단 기술자이고, 이전까지 청동기에 머물던 신라에 철기를 들여온 인물이며,

그 기술을 바탕으로 왕의 자리에까지 오른 인물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듯 고대 국가에서 철기는 강한 무기로서의 의미가 컸습니다.

또한 철기는 이전의 원시적인 농기구들을 강철이라는 단단한 농기구로 대체 할 수 있었고,철기 농기구를 통해서 땅을 더 깊게 경작할 수 있어 생산량이 급격하게 늘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고대 국가들의 인구도 급속도로 증가했다고 하니...

우리에게 흔하고 큰 의미 없게 느껴지는 철이 이 당시에는 아마도 지금의 핵에 버금가는 파괴력과 생산력을 가진 물질이었으리라 추측됩니다.

그러니 비록 꾸며진 공간이지만, 대장간은 아주 아주 중요한 공간입니다.

 

고구려의 대장간에 대한 구체적 기록은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곳은 아차산 4보루에서 발견된 간이 대장간터와 고구려 벽화의 대장장이신을 근거로하여 제작된 상상의 공간이라고 하네요.

 

재현된 공간이지만 대장장이처럼 풀무질도 해 보고, 철제 무기들과 농기구들도 살펴 볼 수 있네요.

민혁이가 열심히 풀무질을 하고 있는데, 풀무질은 불길을 더 세게하기 위해 공기를 공급하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물의 위치에너지를 이용해 물레방아가 돌면, 축이 그 에너지를 수평 에너지로 바꿔 기계를 돌린다네요. 물건을 쉽게 이동 시킬 수 있는 수평 도르래도 설치되어있는데 과연 고구려 시절에 저런 과학적 도르래가 있었을까... 살짝 의심도 들었어요.

 

나무를 얼기설기 엮어서 만든 망루 위에서는 병사들이 마을 가까이 다가오는 사람들을 일일이 감시했겠죠?

한번 올라가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보기에 엉성해 보이는 만큼 위험한지... 올라가는 것은 금지였습니다.

 

연호개체라는 공간입니다.

쪽구들을 놓아 편히 쉴 수 있는 공간과, 의자를 놓아 접대할 수 있는 공간, 평상이 놓인 공간 등으로 구성해 귀족들의 생활 공간을 상상해 재현하고 있습니다.

 

구석구석 대장간 마을을 둘러보고 고구려 건국 신화를 그림으로 전시 해 놓은 공간이 있어서 야외 극장 쪽으로 발길을 옮겨보니 재활용 타이어로 만든 말에, 조잡스러운 광개토대왕비, 배용준씨의 드라마 태왕사신기 속 모습을 전시하고 있네요.

 

이곳에는 일본 관광객들도 많이 찾아오시는 것 같았는데, 그분들을 위한 전시물 같았습니다.

 

대장간 마을을 둘러보기 전에 유물 전시관에서 고구려는 '산성의 나라'라는 말이 있더라구요.

정작 고구려를 '산성의 나라'라 칭하면서 이에 대한 설명은 다소 부족한 기분이 있었습니다.

고구려는 산성의 나라가 맞습니다.

물론 기마병을 기반으로 고구려의 전투력도 뛰어났을테지만, 고구려가 중국 땅에서 일어선 수나라나 당나라의 대규모 침략에도 굳건히 버틸 수 있었던것은 고구려의 성을 이용한 전술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고구려는 평성과 산성의 '이성 체제'의 나라였습니다.

평상시에는 평지에 위치한 평성에서 생활을 하다가 침략이 있을시에는 모두 산성으로 옮겨갔다고 해요.

위의 사진은 고구려의 산성인 '오녀산성'입니다.

사진에서 보이다시피 산성은 아주 험준한 지형으로 침략이 쉽지 않습니다.

고구려 사람들이 산성으로 옮겨 갈 때에는 평성의 우물을 모두 메우고, 식량을 모두 불태워 적들이 평성을 점령해도 식량을 확보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그러면 고구려 병사들은 매복해 있다가 적의 보급로를 차단하였다고 하죠.

반면 산성에는 적당한 먹을 거리와 우물이 있어서 적의 침임에도 꽤 오래 보틸 수 있었다고 합니다.

보급로도 차단되도, 마을에서도 식량을 구할 수없었던 적들은 결국 물러날 수 밖에 없었다고 하니,

큰 희생 없이도 현명하게 적들을 물리 칠 수 있는 고구려의 지혜가 엿보이네요.

 

시원한 바람 솔솔 부는 가을에 고구려 대장간 마을과

강을 하나 사이에 두고 고구려와 첨예한 대립을 했던 백제 박물관 나들이는 어떨까요?

알면 알 수록 신비한 고대의 이야기들이 쏟아지는 즐거운 나들이가 될 거예요.

 

Posted by 원주유
고구려 역사와 문화2013. 9. 14. 17:09

 

고구려 15대 미천왕 = 호양왕, 을불, 을불리, 우불 (재위 300년~331년)

293년 아버지 돌고가 백부인 봉상왕에게 반역으로 몰려 죽임을 당하자 미천왕은 살아남기 위해 신분을 속이고

수실촌이라는 곳으로 가서 머슴살이를 했었다.

당시의 부호였던 주인 음모는 미천왕이 왕족인 것도 모르고 머슴들처럼 심하게 노동을 시켰다.

예를 들어 낮에는 나무를 베어오게 하고 밤에는 연못의 개구리 때문에 잠을 잘 수 없다 하여 개구리 소리가 들리지 않도록

밤새도록 돌과 기와 조각을 던지게 하여 편히 잠을 잘 수 없었다고 한다.

참다못한 미천왕은 음모의 집을 나와서 동촌으로 갔다.

그곳에서 재모란 사람을 만났는데 그는 소금장수였다.

재모는 미천왕이 착하고 신의가 있어 보였으므로 함께 소금장사를 하자고 하여 압록강에서 소금을 떼어와

여러 마을을 돌아다니며 팔았다.

어느 날 미천왕이 배를 타고 압록강 동쪽의 사수촌이란 마을로 가 어떤 노파의 집에 머물렀다.

노파가 숙식비로 소금을 달라고 하자 미천왕은 노파에게 소금 한말을 지불했다.

노파가 더 달라고 했지만 그는 한 말이 적당한 값이라며 더 주지 않았다.

주인 노파는 이것에 앙심을 품고 자신의 신발을 미천왕의 소금짐 속에 감춰 두었다.

다음날 미천왕이 소금짐을 지고 떠나는 데 노파가 쫓아와 신발을 찾아내고는 압록 태수에게 미천왕을 고발하였다.

압록 태수는 미천왕에게 절도죄를 적용해 태형을 가한 다음 소금을 압수하어 노파에게 주었다.

미천왕은 억울하기 짝이 없었지만 신분이 탄로날까봐 두려워 아무 말도 못하고 관가를 떠났다.

이렇게 고난의 나날을 보내던 미천왕은 얼굴이 여위고 옷이 다 헤져 그 누구도 그가 왕손임을 알아보지 못했다.

봉상왕이 폭정을 거듭하자 당시 국상이었던 창조리는 왕을 폐위시켜야겠다고 생각했다.

폐위시키고 난 다음의 왕을 옹립해야 하는 데 그것이 문제였다.

왜냐하면 봉상왕은 왕권을 도전할 만한 왕족은 모조리 죽였기 때문이다.

창조리는 미천왕이 어딘가에 살아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북부의 조불과 동부의 소우를 비밀리에 보내 미천왕을 찾도록 했다.

국상의 밀명을 받은 두 사람은 각 부락을 은밀히 돌아다니며 미천왕을 수소문했다.

그러던 어느 날 비류강가에서 미천왕을 만났다.

두 사람은 미천왕에게 "지금 국왕께서는 무도하여 국상이 여러 신하들과 몰래 왕을 폐하기로 모의하였습니다.

을불 왕손께서는 행실이 검소하고 성격이 인자하여 백성을 사랑하시므로 선왕의 유업을 이을 만 하옵기에 신 등을 보내어

받들어 모시게 하였습니다." 처음에는 자신의 신분을 부인하던 미천왕은 그 두 사람이 숙부가 보낸 암살자가 아니라

창조리가 보낸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다.

창조리는 미천왕을 만났고 300년 9월 봉상왕이 사냥을 나갈 때 동지를 규합하여 봉상왕을 사로잡아 별실에 감금하고

군사로 하여금 지키게 했다.

그리고 곧 을불을 불러 옥새를 올리고 왕위에 즉위하게 하였다.

이렇게 하여 소금장수 을불은 고구려 제15대 왕이 되었다.

미천왕은 즉위 3년(302년)부터 정복전쟁을 개시했다.

그해 9월 왕은 몸소 3만의군사를 이끌고 만주 지방의 현도군을 공격했다. 이 싸움에서 미천왕은 8,000명의 적을 사로잡았다.

이후로 내정에 치중하고 중국 정세를 살피다가 311년 8월 요동의 관문인 서안평을 공격해 빼앗았다.

서안평은 과거 동천왕이 공격하려다가 관구검의 역공을 받아 오히려 나라가 멸망할 지경에까지 빠지게 했던 중요한 지역이었다.

미천왕은 서안평을 점령함으로써 중국 대륙과 낙랑군, 대방군과의 연결고리를 끊었다.

미천왕은 그 여세를 몰아 313년 낙랑군을 공격하여 2,000여명을 포로로 잡았다. 그리고 다음 해에는 대방군을 공격해

중국 군현을 한반도에서 완전해 내몰았다. 이렇게 하여 고구려는 마침내 압록강에서 서해까지 진출하게 되었다.

이로써 400년동안 한반도를 지배했던 낙랑군과 대방군이라는 중국 식민지는 사라졌다.

미천왕은 그들이 지배했던 대동강 유역과 압록강 하류를 차지한 다음 다시 서북진해서 요동군과 현도군을 공격해 영토를 확장했다.

이 과정에서 당시 요동 지방에 세력을 떨치고 있던 선비족 모용씨의 연나라와 충돌했다.

미천왕은 연나라의 모용씨와 요동 지방을 놓고 일진일퇴를 거듭했다.

319년 진나라의 평주자사 최비의 권유에 따라 선비족의 일파인 단씨, 우문씨와 함께 모용외를 공격했다.

하지만 이 연합공격은 실패했고 모용외는 일단 요동을 수중에 넣어 유리한 고지에 섰다.

미천왕은 국경을 마주한 연나라를 견제하기 위해 그 배후에 있는 후조와 손을 잡았다.

미천왕은 결국 요동에서 연나라를 축출하지 못하고 즉위 32년만에 331년 2월에 갑자기 서거했다.

342년에 고구려로 쳐들어온 전연의 군대가 미천왕릉을 도굴하여 시신을 가져갔으며 고국원왕은 343년에 많은 공물을 바치고

시신을 돌려받았다.

* 큰아버지=봉상왕 * 아버지=고추가 돌고 * 어머니=?

* 왕후=왕후 주씨 * 아들=고사유(16.고국원왕) / 고무

창조리

창조리는 남부 출신으로, 봉상왕 3년인 294년 국상 상루가 죽었을 때 대사자의 직위에 있었다.

이때 상루의 뒤를 이어 국상이 되었고, 작위는 대주부가 되었다.

당시 고구려는 선비족 모용부의 수장 모용외의 침략에 시달리고 있었다.

봉상왕 5년인 296년에는 고국원까지 침입하여 서천왕의 무덤을 파내려고 시도하기까지 했다.

이에 봉상왕은 창조리를 불러 대책을 논의하였다. 이에 창조리는 "북부의 대형(大兄) 고노자가 어질고 용감하다"고 답했다.

이에 왕이 고노자를 동북부 변경의 신성의 태수로 삼자 모용외는 침략을 멈추었다.

모용외로부터 안전해진 다음부터 고구려에는 이상한 일들이 벌어졌다.

봉상왕 7년인 298년 가을에는 우박이 내려 농사를 망쳤으며, 이듬해 가을에는 귀신이 출몰하고 객성이 달을 가렸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봉상왕은 궁궐을 개축하고 자신의 조카 을불을 죽이려 하는 등의 행위로 신하들의 불만을 샀다.

봉상왕 9년인 300년에도 괴이한 일은 계속되었다. 정월부터 지진이 나고, 6개월 동안 비가 내리지 않았다.

8월이 되자 왕은 15세 이상의 남녀를 뽑아 궁실을 수리하였는데, 이로 인해 백성들의 생활이 더욱 더 궁핍해졌다.

이에 창조리는 백성이 도탄에 빠진 상황에서 토목 공사를 진행하는 것은 군왕의 도리에 어긋나는 행위라고 간하였다.

이에 왕은 "임금은 백성을 우러러 보는 자리인데, 궁궐이 화려하지 않으면 무엇으로 위엄을 보이겠는가?"라고 답했다.

그러고는 오히려 자신을 비판하여 백성들의 신망을 얻고자 함이냐고 되물었다.

이에 창조리는 다시금 "임금이 백성을 불쌍히 여기지 않으면 어진 임금이 아니요, 신하가 임금에게 간하지 않으면

충신이 아닙니다."라고 답했다.

이에 왕은 웃으며 "그대는 백성을 위해 죽고자 하는가?"라며 창조리의 말을 무시했다.

왕의 마음을 돌릴 수 없음을 안 창조리는 다른 대소신료들과 폐위를 논의하였다. 논의 끝에 을불을 새 왕으로 세우기로 하고

창조리는 북부의 조불과 동부의 소우를 파견하여 을불을 찾게 하였다.

을불은 처음에 거절하였으나 이들의 설득에 결국 창조리를 찾아 왔다.

창조리는 일단 그를 숨겨 두고 지지파를 모으기 시작하였다.

9월이 되자 봉상왕은 신하들과 함께 사냥을 떠났다.

이때 창조리가 "나와 뜻을 같이 하는 자는 나를 따라 하여라."라고 선언하며 갈대잎을 관에 꽂았다.

그러자 모두들 이를 따랐다.

자신의 지지 세력을 확인한 창조리는 봉상왕을 별실에 가두고 을불을 맞아 옥새를 바치고 왕위에 오르게 하였다.

고구려 16대 고국원왕 = 사유, 쇠, 국강상왕 (재위 331년~371년)

314년 왕태자에 책봉되었고, 331년 음력 2월에 미천왕의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334년에는 평양성을 증축했고, 335년에는 신성 축성, 342년에는 환도성과 국내성을 증축하는 등 변경의 방비를 갖추었다.

또한 전연을 견제하기 위해 336년, 343년에 걸쳐 동진에 사신을 파견하기도 하였다.

336년에는 전연에서 일어난 모용인의 반란에서 실패하고 망명해온 곽충과 동수를 맞아들었으며,

338년에는 후조와 전연의 전쟁 시 후조와 내통하였던 봉추, 송황 등의 망명도 받아들였다.

339년 전연이 쳐들어와 신성에 이르니 고국원왕이 동맹을 청하여 물러갔다.

이때 맺은 동맹 관계에 따라 340년에 전연에 조회하기도 하였다.

342년 겨울, 전연의 모용황은 용성으로 천도한 후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로 쳐들어왔다.

전연군은 평탄한 북쪽 길로 왕우가 이끄는 1만 5000명은 소수의 군대를 보내고 모용황과 한수는 험난한 남쪽 길로 5만 대군을

보내는 기만전술을 펼쳤으며, 이에 속은 고구려군은 북쪽으로 왕제 무가 이끄는 정병 5만을 파견하고 남쪽은 왕이

직접 소수의 군대로 지켰다.

이에 고구려군은 남쪽 길에서 크게 패해 장군 아불화도가가 전사하고 환도성은 함락되었으며 왕은 단신으로 단웅곡으로 피신하였다.

왕을 추격한 전연군은 모후 주씨와 왕비를 포로로 잡았으나 북쪽 길에서 무의 군대가 크게 승리하였기 때문에 전연군은 퇴각하였다.

전연군은 퇴각하는 길에 미천왕릉을 파헤쳐 미천왕의 시신을 가져갔고 5만 명의 백성을 잡아갔다.

343년, 고국원왕은 동생 무를 보내 전연에 신하의 예를 갖추고 미천왕의 시신을 돌려받았으며 평양의 동황성으로 거처를 옮겼다.

345년에는 전연이 모용각을 보내 남소를 함락시켰으며, 349년에는 전연의 망명자였던 송황을 전연으로 송환하였다.

355년에 이르러서 전연에 간청하여 모후 주씨를 돌려받는 데 성공하였으며 전연으로부터 책봉을 받아

‘정동대장군 영주자사 낙랑공 고구려왕’이 되었다.

이후 전연은 전진의 공격을 받아 쇠퇴하였으며, 370년에 전진에 의해 멸망하였다.

이때 고국원왕은 고구려로 도망쳐온 태부 모용평을 체포하여 전진에 송환함으로써 전진과의 우호관계를 수립했다.

고국원왕은 369년에 백제를 공격하였으나 치양에서 백제의 왕자 근구수에게 패하였다.

371년에 다시 백제를 공격한 고국원왕은 패하에서 복병을 만나 패하였다.

이해 겨울 10월에 백제 근초고왕이 평양으로 공격해오니 고국원왕이 이를 막다가 활에 맞아 전사하였고 고국의 들에 장사지냈다.

* 부왕=미천왕 * 모후=왕후 주씨

* 제1왕후=? * 아들=고구부(17대 소수림왕) / 고이련(18대 고국양왕)

고구려 17대 소수림왕 = 구부, 소해주류왕, 해미류왕 (재위 371~384)

355년에 태자가 되었고 371년에 고국원왕의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371년 고국원왕이 백제 군과 평양에서 싸우다가 전사하자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소수림왕이 즉위한 시대에는, 국왕이 전사한 상황에서 국가의 체제 정비의 필요성이 대두되고

넓은 영토와 주민들을 체계적으로 통치할 제도의 정비가 요구되던 시기였으므로, 고구려 사회의 체제 정비를 위한 정책을 취하였다.

372년 전진의 3대 황제 부견으로부터 승려 순도가 와서 불상과 경문을 전함으로써 최초로 고구려에 불교가 전래되었다.

374년에는 아도가 전진에서 건너와 불도를 고구려에 전하였다.

소수림왕은 375년에 초문사, 이불란사를 창건하여 불교의 수용 및 보급 정책을 취하여, 전진과 평화적 관계를 수립하고,

호국사상으로 삼았다.

태학을 설립하여 유교적 정치이념에 충실한 인재를 양성하여 중앙집권적 정치제도에 적합한 관리를 양성하였다.

373년에는 율령을 반포하여 국가통치와 사회질서 유지를 위한 규범들을 갖추었다.

율은 형법법전, 령은 비형벌적 민정법전으로 중국에서 성립된 성문법이다.

이와 같은 소수림왕의 체제 정비 시책들을 기반으로 고구려는 광개토대왕조 제위 시대 전성기를 누렸다.

대외 관계에 있어서는 백제와 충돌이 계속되었는데, 375년에는 백제의 수곡성을 빼앗았으며

377년에는 3만 대군의 백제군 침공을 물리치고 백제의 북변을 역습하였다.

378년에는 극심한 가뭄이 든 상태에서 거란의 침략을 받아 8개의 부락을 빼앗기기도 했다.

384년에 서거하여 소수림에 장사지냈다. 이어 동생 이련이 제위에 올랐다.

* 부왕=고국원왕 * 모후=?

* 동생=이련(18대 고국양왕)

순도

순도는 4세기 인물로 고구려 소수림왕 2년인 372년에 전진의 왕 부견의 사자를 따라 불교를 전했는데,

이것은 한국으로의 불교 전래에 대한 최초의 공식적인 기록이다.

고구려 소수림왕 2년을 전후하여 삼국은 모두 불교를 받아들이게 된다.

순도는 불상과 불경을 가지고 고구려로 왔는데 고구려의 왕과 신하들은 그를 귀인으로 맞이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순도는 고구려의 최초의 사찰인 초문사 혹은 성문사에 머물면서 불교를 포교하였다고 한다.

고구려에는 처음 순도가 들어오고 그 2년 후에 아도가 들어왔는데 이들은 모두 인도 또는 서역 승려일 가능성이 짙다.

그 이유는 순도의 경우 중국천하를 돌아다니면서 전도하다가 고구려로 온 것으로 표현하고 있고

아도는 일반적으로 인도 승려로 추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설에 따르면 순도는 동진에서 왔다고도 한다.

아도

아도는 아두라고도 한다. 아도에 대해서는 세 가지 다른 기록이 있다.

첫 번째는 순도가 고구려에 불교를 전한 때인 고구려 소수림왕 2년(372년)의 2년 후인 소수림왕 4년에 고구려에 입국하여

불교를 전한 승려로서의 기록이다. 이 아도는 일반적으로 인도 승려로 추정하고 있다.

두 번째는 국적 불명의 승려로, 삼국사기에 따르면 이 승려는 눌지왕(재위 417~458) 때 고구려에서 신라로 건너와 불법을 전했다.

소지 마립간(재위 479~500) 때 시자 3명을 데리고 일선군 모례의 집에 머무르다가 죽었다.

이 두 번째 인물과 첫 번째 인물이 동일인인지 아니면 동명이인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이 두 번째의 아도가 신라에 전한 불교는 이후 법흥왕(재위: 514-540) 때 이차돈이 순교하여 이적을 보임으로써 널리 퍼지게 된다.

세 번째 기록은 삼국유사에 나오는데, 이에 따르면 아도는 고구려의 승려로, 5세에 출가하여 16세 때 위에 가서 아버지

굴마를 찾아뵙고, 19세 때 다시 고구려에 돌아와 어머니 고도령의 명을 받들어 미추왕 2년(263년)에 신라 왕가에 불교를

전파하려다 실패했다.

그 후 3년 동안 일선현 모례의 집에 숨어 있었으나 미추왕의 딸 성국공주의 병을 고쳐준 공으로 그때부터 불교의 전도를 허가받고

흥륜사를 지었다. 미추왕이 죽은 후 사람들의 미움을 사 다시 모례의 집에서 땅굴을 파고 들어앉아 죽었다.

이 인물이 행적이 유사한 묵호자와 동일인물인지는 불명하다.

 

Posted by 원주유
고구려 역사와 문화2013. 9. 14. 16:03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차지했던 고구려 왕조의 계보

고구려는 BC 37년 동명성왕 때부터 AD 667년 제28대 보장왕을 끝으로 멸망할 때까지 약 700여 년간 한반도의 북부와 중국의 동북지방을 기반으로 발전하였다. 비옥한 농토보다는 산악지형이 많았던 탓으로 영토확장에 힘을 쏟았고, 활쏘기와 말타기 등 무예를 숭상하는 전통으로 인해 정복국가 체제로 쉽게 전환할 수 있었다. 그 결과 고구려는 한 군현을 차지하고, 요동지방으로 진출하는 등 활발한 정복 활동을 펼침과 동시에 수나라, 당나라의 침략에 맞서 동북아시아의 중심 세력으로 성장하였다.

 

 

무용총 오른쪽 벽에 그려진 수렵도. 활을 잘 쏘기로 유명한 주몽에 의해 건국된 나라답게 무예를 숭상했던 고구려는 활발한 정복전쟁으로 영토를 넓혔다. 이 그림이 그려진 무용총을 비롯한 12기의 고구려 고분들은 2004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록되었다

 

 

2대 유리왕은 도읍을 졸본에서 국내성으로 옮기고, 주변의 작은 나라들을 통합하여 5부족을 중심으로 한 연맹왕국을 이루었다.

대무신왕 시절에는 호동왕자가 낙랑의 일부 지역을 정복했으며, 미천왕 때에 이르러 낙랑군을 한반도에서 완전히 몰아내고

고조선의 옛 영토를 회복하였다. 제 6대 태조왕 때에는 옥저를 정복하고 만주지역으로 세를 확장하였으며 고국천왕에 이르러

부자상속제로 왕위 계승이 굳어졌다.

 

17대 소수림왕은 국가의 체제를 정비하고, 대내적으로 왕권을 강화하는 데에 힘을 쏟았다. 그는 불교를 받아들여 백성을

통합하였고 태학과 경당을 두어 교육에 힘썼다. 또한 율령을 반포하여 국가의 기본 법 체제를 정비하는 등 통치 질서 확립에도

앞장섰다. 19대 광개토대왕은 고구려의 영토를 가장 넓게 개척한 왕이다. 남으로는 백제와 겨루어 한강 이북까지 진출하였고,

요동지방을 완전히 차지하여 만주와 한반도 북부를 아우르는 거대한 영토를 차지한 것이다. 그 뒤를 이은 장수왕은 국내성에서

 평양성으로 도읍을 옮기고, 적극적으로 남하정책을 추진하면서 백제와 신라를 압박해 고구려 최전성기를 만들었다.

 

이후 고구려는 중국을 지배한 수나라와 당나라의 연속된 침입과 귀족들 사이의 내분으로 인해 나라의 힘이 많이 약해졌다.

668년 나당 연합군의 공격에 평양성이 함락되면서 고구려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된다. 한반도에서 가장 넓은 영토를 차지했던

나라, 중국의 침입에 맞서 한반도의 방파제 역할을 했던 나라, 대부분의 유적지가 북한과 중국에 있어 더욱 안타까운 한반도의

고대국가 고구려. 고구려의 역대 왕조 계보를 통해 그 역사를 가늠해보도록 하자.

 

 

고구려 왕중에 제11대 동천왕이 어떤 인물인지 알려드리겠습니다. 

조조, 손권 등이 활약한 중국의 삼국시대는 소설 [삼국지연의]로 잘 알려져 있다. 그런데 같은 시기 우리의 역사는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있다. 위나라, 오나라와 교류도 하고, 전쟁도 했던 고구려 동천왕(209~248)은 백성들이 사랑한 임금으로 그에게는

조자룡, 관우에 비견할 만한 충신들이 있었다. 과연 그는 누구일까?

 

 

돼지가 맺어준 인연으로 탄생한 임금


고구려 10대 산상왕은 아들이 없어 늘 고민이었다. 하지만 산상왕은 자신을 왕위에 오르게 만든 우씨왕후의 눈치를 보느라

다른 여인을 후궁으로 삼기도 어려웠다. 그러던 어느 날 하늘에 제사 지내기 위해 사용할 돼지가 우리를 탈출해 달아나는 일이

생겼다. 관리가 돼지를 쫓았지만, 잡지 못하고 있을 때 주통촌, 즉 술을 빚는 마을에서 20세쯤 된 곱고 어여쁜 여자가 돼지를

잡아 주었다. 관리가 돌아와 산상왕에게 이 사실을 아뢰었다. 산상왕은 주통촌 여인이 궁금하여 밤에 몰래 그녀의 집을 방문했다.

 

그녀는 이런 날이 오리라는 것을 예견하고 있었다. 그녀의 어머니가 임신했을 때 마을에 점을 치는 사람이 말하기를 반드시

왕후를 낳겠다고 했다. 그녀의 어머니는 딸을 낳자 후녀 즉 왕후가 될 여자라고 이름 지었다. . 그런데 4개월 후 우씨왕후가

산상왕이 후녀와 몰래 만난 것을 알게 되고 말았다. 우씨왕후는 질투에 눈이 멀어 군사들을 보내어 후녀를 죽이려고 하였다.

군사들이 후녀를 죽이려고 포위를 하자, 후녀가 당당히 말했다.

“너희가 지금 나를 죽이려는 것은 대왕의 명령이더냐, 아니면 왕후의 명령이더냐. 지금 내 뱃속에는 아이가 들어 있으니 이는

대왕께서 남기신 것이다. 내 몸을 죽이는 것은 허락하지만, 왕자까지 죽일 셈이냐.”

관리들도 못 잡았던 돼지를 잡을 만큼 씩씩한 그녀의 단호한 말에 군사들은 감히 그녀를 해칠 수가 없었다. 우씨왕후는 매우

화가 났지만, 아이까지 임신한 그녀를 죽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후녀가 임신한 사실을 안 산상왕은 우씨왕후에게 말하여,

그녀를 왕궁으로 불러들였다. 후녀는 마침내 사내아이를 낳았다. 왕은 제사에 쓸 돼지로 인해 후녀와 만나 아이를 얻게

되었으므로, 아이 이름을 제사에 쓸 돼지라는 뜻을 가진 교체(郊彘)라 하고, 교체가 5살이 되자 태자로 삼았다. 산상왕이 죽게 되자, 227년 교체가 왕이 되니 곧 동천왕이다.

 

 

어진 성품을 가진 임금

동천왕은 성격이 너그럽고 인자하여 좀처럼 화를 내는 법이 없었다. 그를 못마땅하게 여겼던 우씨태후(왕의 어머니를 태후

라고 함)가 동천왕이 타던 말의 말갈기를 잘라버리거나, 시녀를 시켜 식사를 할 때 국을 그의 옷에 엎지르게도 하는 등 심술을

부렸지만, 동천왕은 화를 내지 않았다. 그는 성품만 인자했던 것이 아니라, 힘이 세고 용감했으며, 사냥과 활쏘기도 잘했다.

그의 용맹함은 이웃 나라에게도 알려질 정도였다.

 

 

고구려와 오나라의 만남

동천왕이 재위하던 시기는 중원 땅에서 위, 촉, 오의 삼국이 서로 경쟁하고 있었다. 그런데 위나라와 고구려 사이 요동지역에

서기 190년경부터 238년까지 공손씨 세력이 반 독립적인 국가를 이루고 있었다. 위나라와 경쟁하던 오나라에서 공손씨에게

사신을 파견해 서로 협력하자고 제의를 했다. 공손씨가 이를 수락하자, 233년 오나라는 진기한 보물을 보냈다. 그런데 공손씨가

태도를 바꿔 오나라 사신의 목을 베어 국경을 접하고 있던 위나라에게 보냈다. 이때 간신히 살아남은 오나라 사신들이

도망치다가, 고구려에 도착했다.

 

동천왕은 처음 만난 그들을 환영하고, 잘 접대를 해주었다. 게다가 오나라 사신들을 호위할 조의 25명과 담비가죽 1,000장,

갈계피(鶡雞皮) 10벌 선물을 갖추어 고구려 배에 태워 황해를 건너 양자강 유역에 있는 오나라로 돌려보냈다. 동천왕이

오나라에게 우호적이었던 것은 적국인 공손씨를 견제하기 위함이었다.

 

그러자 오나라 손권은 정식으로 사신을 보내 동천왕에게 각종 진귀한 보물과 옷을 바치고자 했다. 그런데 고구려에 마침

위나라 사신이 왔다. 그러자 오나라 사신은 동천왕을 뵈러 가지 않고 압록강 하구에서 머물렀다. 동천왕이 급히 신하들을 보내

오나라 사신을 맞이하게 했다. 그러자 오나라 사신 일행은 동천왕이 보낸 30명을 인질로 잡고 위나라와 사신왕래를 한 것에

대해 따졌다. 동천왕이 미안하다며 말 수백 필을 선물로 보내 달래자, 그들도 인질을 풀고 이어서 진기한 보물을

동천왕에게 바쳤다.

 

동천왕은 오나라에게 화가 났다. 오나라의 경쟁자인 위나라와 사신왕래를 한 것이 오나라에게는 기분이 상하는 일이었겠지만,

고구려가 여러 나라와 사귀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이를 핑계로 고구려에서 보낸 신하들을 인질로 잡고 따진 오나라의 행동은

무례한 것이었다. 236년 오나라는 다시 사신을 보내어 고구려와 친하게 지내고자 했다. 그러자 동천왕은 오나라 사신들의 목을

베어 위나라에 선물로 보내주었다. 동천왕은 단호하게 오나라와 절교를 선언했다. 오나라는 감히 고구려에 항의할 수가 없었다.

동천왕이 오나라를 버리고 위나라와 친하게 지내려고 한 것은 단지 오나라 사신의 무례함 때문만은 아니었다. 동천왕은 바로

이웃한 공손씨를 무너뜨리고, 요동 땅을 차지하려는 야심이 있었다. 단순한 분노 때문이 아니라, 오나라보다 위나라와

협력하는 것이 더욱 이익을 클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에 이 같은 결정을 한 것이다.

 

 

위나라와 전쟁


238년 위나라는 4만 군대를 동원해 공손씨를 공격했다. 동천왕은 1천 군대를 보내 위나라를 도와 공손씨의 배후를 공격했다.

고구려군의 숫자는 적었지만, 공손씨를 멸망시키는데 공을 세웠다. 그런데 4년 후, 동천왕은 장수를 보내 위나라를 공격했다.

그것도 요충지인 서안평을 공격했다. 고구려가 공격한 원인은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위나라가 공손씨를 멸망시킨 후

고구려에게 어떤 보상을 해주기로 약속해놓고 그 약속을 지키지 않은 탓일 것이다. 동천왕은 당시 위나라가 , 오와 치열하게

대립하고 있었으므로, 반격해오지 못할 것이라고 판단하고 공격을 한 것이다.

 

하지만 위나라는 강국이었다. 촉, 오와의 경쟁에서 이미 압도적인 우세를 보이고 있던 만큼, 고구려를 공격할 병력을 모을 수

있었다. 게다가 선비족, 부여국의 도움도 받으면서 고구려로 쳐들어왔다. 244년 위나라 관구검이 이끈 대군을 상대로 동천왕은

직접 2만 군사를 이끌고 나가 맞섰다. 첫 전투에서 적 3천여 명의 목을 베는 승리를 거두고, 양맥 계곡까지 추격해 또 승리를

거두어 적 3천여 명을 목 베거나 포로로 잡았다.

 

 

교만이 낳은 불행


거듭 승리를 거두자, 동천왕은 너무도 자신만만해졌다.

“위나라가 큰 나라라고 자랑하더니, 그 많은 군대를 이끌고도 우리의 적은 군사보다 못하구나. 관구검이 명장이라고 하더니,

오늘 그의 목숨이 내 손바닥 안에 있구나!”

하지만 자만심으로 적을 얕보게 되면 그것은 늘 위험에 처하게 된다. 동천왕이 5천 철갑기병대를 직접 이끌고 적을 공격했다.

그런데 위나라가 갑자기 방진(方陣, 보병이 기병을 상대하는 진영)을 펼치며 반격해 오자 고구려군은 크게 패하여 1만 8천

명이나 죽임을 당했다. 동천왕은 1천 기병과 함께 도망을 쳐야 했다. 교만이 낳은 실수치고는 대가가 혹독했다.

 

위나라군은 고구려 수도인 환도성으로 쳐들어와 마음껏 약탈했다. 위나라 장수 관구검은 부하인 왕기를 시켜 동천왕을 추격했다.

동천왕이 죽령이란 곳에 이르렀을 때는 고구려 군사들이 다 흩어진 상태였다. 동천왕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때 신하인

밀우가 자신이 결사대로 적을 막을 터이니 피신하라고 청했다. 밀우가 결사대를 모집해 적군에게 달려가 힘써 싸우는 동안,

동천왕은 샛길로 도망쳤다. 위험에서 빠져나오자 동천왕은 밀우 생각이 났다. 왕은 신하들에게 밀우를 구해올 자가 있느냐고

물었다. 이때 유옥구란 자가 나서 전쟁터로 달려가 적을 물리치며 너무나 지쳐 땅에 쓰러진 밀우를 발견했다. 유옥구는 밀우를

업고 돌아왔다. 동천왕은 밀우를 자신의 무릎 위에 뉘었다. 얼마 후 밀우가 깨어났다. 옆에 있던 고구려 군사들은 왕이 신하를

아끼는 모습을 보고 힘을 냈다.

 

동천왕은 적군의 추격에서 벗어나고자 남옥저 땅까지 도망을 갔다. 하지만 적군은 여전히 동천왕을 추적했다. 동천왕은

이제 정말 앞이 깜깜했다. 이때 유유란 자가 나섰다. 유유는 음식을 가지고 위나라 진영에 가서, 고구려왕이 항복하려 한다고

알렸다. 위나라 장군은 자신이 고구려왕을 사로잡는 큰 공을 세우게 되었다고 흥분하는 바람에 아무런 의심 없이 유유가 준

음식을 받아먹으려고 했다. 이때 유유가 식기 속에 감추어 있던 칼을 빼어 위나라 장군의 마음을 찌르고 그와 함께 죽었다.

부대를 이끄는 장군이 죽자 위나라 군대는 크게 혼란에 빠졌다. 이를 놓치지 않고 동천왕은 그간 모은 군사로 급히 공격하니

위나라 군대는 크게 패하여 도망치고 말았다. 동천왕이 싸움에 이겼다는 소식이 들리자, 각지에서 고구려 사람들이 힘을

모았고, 위나라 군대는 서둘러 퇴각을 하게 되었다. 동천왕은 드디어 적군을 몰아내고 나라를 회복하게 되었다.

 

 

백성들이 사랑한 동천왕


동천왕은 위나라 군대를 격퇴시키는데 공을 세운 밀우, 유옥구, 유유에게 큰 상을 내렸다. 동천왕은 위나라와의 싸움에서

곤란을 겪었기에 요동 땅을 차지하지 못했다. 하지만 동천왕은 위나라를 물리친 후 245년에는 지금의 강원도 지역을 지나

신라를 공격했다. 신라에서는 병마사 석우로가 나가서 대항했지만, 고구려의 상대가 되지는 못했다. 2년 후 신라가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와 두 나라는 화친을 맺게 되었다. 동천왕 시기 고구려가 위축된 것만은 아니었다.

 

동천왕이 위기를 극복한 후 248년 죽자, 백성들은 그의 죽음을 크게 슬퍼했다. 그를 가까이 모신 신하들 가운데는 왕과 함께

죽는 순장을 하려는 사람들이 많았다. 동천왕의 아들인 중천왕이 산 사람이 죽는 것을 금지했지만, 장례일이 되자 동천왕의

무덤에는 자살을 하려는 사람이 아주 많았다. 고구려 사람들은 죽은 후의 세계가 현실세계의 연장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순장을 하게 되면 저승에서도 왕 곁에서 보좌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순장이 금지되었지만, 동천왕의 무덤에서

죽겠다는 자들을 모두 말릴 수가 없었다. 비록 한때 교만하여 나라의 위기를 초래하기도 했지만, 동천왕은 신하들과 백성들의

사랑을 받은 좋은 임금이었다.

 

 

Posted by 원주유
신라 역사와 문화2013. 9. 14. 15:28

 

 

신라 제46대 문성왕과 후예들은 어떠한 방법으로  나라를 다스렸는지.

 

제46대 문성왕
정종왕후 ․ 김씨, 경응, 생년미상 ~ 857년 
재위기간 : 839년 7월 ~ 857년 9월. 총 18년 2개월 
부인 : 2명 
자녀 : 1남
제1왕비 박씨
제2왕비 김씨 - 태자

문성왕은 신무왕의 장남이며, 정종왕후소생으로 이름은 경응이다. 839년 윤 정월에 신무왕이 왕위에 오르면서 태자에 책봉되었다가, 7월에 신무왕이 죽자 왕위에 올랐다. 신무왕은 흥덕왕이 죽은 뒤 계속되어온 왕위쟁탈전에서 승리하여 즉위하였지만 6개월도 못 되어 죽어, 왕위쟁탈과정에서 쌓여온 많은 모순을 해경하지 못하였고, 아들 문성왕대로 고스란히 넘어오게 되었다. 흥덕왕이 죽자 왕위를 둘러싼 균정계와 원성왕의 장자 인겸의 아들인 충공계와의 대립이 노골화되었다. 이 싸움에서 일단 패한 균정계의 우징은 청해진대사 장보고와 김주원의 후손 김양의 도움을 받아 민애왕을 살해하고, 왕위에 올라 신무왕이 되었다. 그 결과 장보고와 김양 등 신무왕을 도운 귀족세력은 그에 상응한 정치권력을 가지게 되었다.

문성왕이 즉위하자 장보고를 진해장군으로 봉하고, 예징을 상대등에 임명하였고 김양에게 소판의 관등을 주면서 병부령으로 임명하였다. 반면, 이와 같은 귀족세력은 왕권을 제약하는 요소로 작용하였다.

이러한 모순의 양상은 841년 홍필의 모반과 846년에는 장보고의 반란으로 드러난다. 장보고는 딸을 왕의 차비로 세우려 하였는데, 조신들이 해도사람의 딸을 왕비로 맞을 수 없다고 반대하여 일이 성사되지 않았다. 사실, 문성왕이 장보고의 딸을 왕비로 맞이하려 한 것은 신무왕의 약속을 이행하기 위한 조치였다. 신무왕은 장보고의 군대를 빌리면서 자신이 왕이 되면, 그의 딸을 왕비로 맞아들이겠다고 약속했는데, 신무왕이 재위 7개월 만에 죽는 바람에 그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이에 장보고는 문성왕에게 약속 이행을 요구하였고, 문성왕 또한 장보고의 딸을 왕비로 받아들이는 것이 국정 안정에 도움이 될 것으로 판단했다. 하지만, 신라는 전통적으로 왕비를 왕족 내부에서 간택해 왔고, 서라벌 귀족출신으로 구성된 조정 대신들을 그런 전통을 앞세워 장보고의 딸을 왕비로 삼아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이에 장보고는 청해진을 중심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이 난은 문성왕 재위 8년(846년)에 염장에 의하여 장보고가 살해당하면서 진압되었다. 일설에는 장보고의 딸을 왕비로 맞아들이는 데 반대한 인물이 김양이라고 하는데, 842년 김양이 그의 딸을 왕비로 세우는 기사가 이러한 추측을 낳게 한다. 장보고의 난이 진압되자 851년 청해진을 혁파하였으며, 그곳 민호를 벽골군으로 이주시켰다. 이는 곧 해상무역의 혼란을 의미했다. 말하자면, 신라, 일본, 당을 오가는 해상 무역상들은 청해진이라는 귀중한 안전판을 상실했던 것이다. 이는 세 나라의 경제에 엄청난 피해를 초래했다. 또한 장보고의 힘으로 등장한 문성왕의 지지기반도 약해질 수밖에 없었다. 장보고의 난 이후에도 정치적인 불안은 계속되었다.

847년, 장보고의 인맥인 이찬 양순과 파진찬 흥종의 반란이 있었다. 문성왕은 그런 와중인 재위 9년(847년)에 아들을 태자로 책봉하여 왕실의 위엄을 다졌다. 그러나 849년 역시 청해진의 후광을 입어 등용된 인물이었던 이찬 김식, 대흔의 반란이 또 한 차례 반란을 일으켰다. 양순이나 대흔은 모두 신무왕을 도와 민애왕을 몰아내는 데 공을 세웟던 인물이다.

전래로부터 계속된 왕위 다툼은 그대로 계속되다가, 857년 문성왕은 숙부 의정에게 왕위를 계승 시킨다는 유조를 내리고 죽었다. 이때가 857년 9월이다. 능은 공작지에 마련되었다. 이것은 그 한 달 전에 문성왕을 도와오던 김양이 죽자, 상대등인 의정과 시중인 계명이 결합하고 왕을 핍박하여 왕위에서 물러나게 하였다는 추측이기도 하다.

제47대 헌안왕
김균정(제38대 원성왕의 손자)
조명부인 김씨 ․ 김씨, 의정, 생년미상 ~861년 
재위기간 : 857년 9월 ~ 861년 정월. 총 3년 4개월 
부인 : 2명 
자녀 : 1남 2녀
왕비 - 영화(경문왕의 왕비), 공주(경문왕의 후비)
후비 - 궁예(태봉의 건국자)

헌안왕은 신무왕의 아버지 균정의 아들이며, 조명부인 김씨 소생으로 이름은 의정이다. 왕위에 오르기 전의 행적은 잘 알 수 없으나, 아마 아버지인 상대등 균정과 처남인 시중 김명 사이에 왕위계승문제로 암투가 격심하던 흥덕왕 말년(836년)에 중국 당나라에 사행하였고 문성왕이 즉위한 직후에는 시중을, 그 뒤에는 병부령을 거쳤다가 다시 문성왕 11년(849년)에는 상대등에 임명되었다.

헌안왕의 어머니 조명부인은 왕위계승다툼에서 남매지간인 민애왕이 시아버지인 신무왕을 죽였고, 남편인 신무왕은 민애왕을 죽여 친정과 시가가 모두 원수였던 애매한 관계에 놓여있는 인물이었다. 이런 복잡한 관계속에서 태어난 헌안왕은 조카인 문성왕이 857년 죽자, 연로한 나이에 왕위를 계승받게 된다. 여기에는 당시 실세를 잡고 있던 경응파가 정파싸움에서 이뤄낸 결과로 보고 있다.

즉위 초에 비가 오지 않고 흉년이 들어 굶주리는 사람이 많아지자, 제방을 수리하게 하고 농사를 권장하였다. 재위 2년(858년)에 무주장사(지금의 광주와 장흥)의 부관이었던 김수종이 시주하여 비로자나불상을 만들게 하고 완성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재위 3년(859년)에는 도선국사에 의해 수도암을 지었다. 이듬해(860년)에는 체징이 터를 잡아 보림사를 창건하였다.

재위 5년째인 861년 1월, 병이 들어 자리에 누운 지 오래되었으므로 왕위를 사위인 응렴(경문왕)에게 선위하고 그달 29일에 죽었다. 공작지에 장사하였다.

제48대 경문왕
김계명(제43대 희강왕의 아들)
광화부인 ․ 김씨, 응렴, 846 ~ 875년
재위기간 : 861년 정월 ~ 875년 7월. 총 14년 6개월
부인 : 2명
자녀 : 3남 1녀
문의왕후 김씨 - 정(제49대 헌강왕), 황(제50대 정강왕),
윤, 만(제51대 진성여왕)
후비 김씨

경문왕은 희강왕의 아들인 이찬 계명의 아들이며, 광화부인 소생으로 이름은 응렴이다. 846년에 태어났으며, 헌안왕 4년인 860년에 15세의 나이로 헌안왕의 큰딸 영화와 결혼하여 부마가 되었다. 그리고 861년 정월에 헌안왕이 죽자 왕위를 계승하였다.

왕위에 오르기 전에 일찍이 국선이 되었는데, 헌안왕이 불러 나라 안을 돌아다니면서 본 일을 묻자 선행을 행한 세 사람을 말하였는데, 첫째는 남의 윗자리에 있을 만하나 겸손하여 남의 밑에 있는 사람이요, 둘째는 부호이면서 검소하게 옷을 입은 사람이요, 셋째는 고귀한 세력가이면서 그 위엄을 보이지 아니한 사람이라 하였다. 이 말을 들은 헌안왕이 어짐을 알고 사위로 삼고자 하여 왕의 두 딸 가운데 한 사람을 택하게 하였다. 이에 낭도인 범교사(삼국사기에는 흥륜사의 승려라고 함)의 조언을 받아들여 왕의 큰 딸과 결혼하여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경문왕은 불교에 비교적 관심이 많아 낭도 중에도 승려가 많았으며 864년에 감은사에 행차하였고, 866년에는 황룡사에 행차하여 연등을 구경하기도 했으며, 871년에는 황룡사구층탑을 개조하였다. 이는 그 규모가 엄청나서 이 공사를 명령하던 시점에 지진과 홍수로 시달리던 백성들의 삶을 더 어렵게 하여 민심을 극도로 악화시켰다. 황룡사 대탑 공사는 3년간 지속되어 873년 9월에 오나성해 낙성식을 거행하였다.

경문왕은 불교 뿐 아니라 국학에도 관심이 있어 864년에는 국학에 행차하여 박사로 하여금 경전의 뜻을 강론하게 하였다. 즉위한 직후 나라를 잘 다스려보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이때 왕의 정치를 도운 사람들 중에는 국선출신이 많았는데, 곧 요원랑, 예흔랑 등이다. 이들은 국토를 유람하면서 왕을 위하여 치국의 뜻을 노래로 짓고, 이를 다시 사지인 심필을 시켜 대구화상에게 보내어 「현금포곡」, 「대도곡」, 「문상곡」등 3수의 노래를 짓게 하였는데, 경문왕이 이를 보고 크게 기뻐하여 칭찬하였다고 하는데 가사는 현재 전하지 않는다.

즉위 초 861년에 대대적으로 죄수들을 사면하고, 862년 이찬 김정을 상대등으로, 아찬 위진을 시중에 임명하였으며 866년에는 아버지 계명을 의공대왕, 어머니 광화부인을 광의왕태후, 왕비를 문의왕비로 봉하고 왕자 정을 태자로 삼는 등, 열의를 가지고 정치를 했지만, 진골귀족간의 오랜 분쟁은 일시에 바로잡을 수 없었다. 그 결과 중기 이후에는 반란사건이 계속 일어났다.

866년 이찬 윤흥과 그 동생 숙흥, 계흥의 모역과, 868년 이찬 김예, 김현 등의 모반, 874년 근종 등의 모역이 있었다. 근종의 난으로 민심을 크게 악화되고, 정치 불안이 가속화되고 있었다.

경문왕은 사회의 혼란을 수습하지 못하고 875년 7월 8일 서른 살의 젊은 나이로 죽었다. 한편, 경문왕은 산 뱀을 마음에 덮고 자는 나쁜 습성이 있다고 알려져 있을 뿐 아니라, 당나귀 귀와 같은 큰 귀를 가졌다는 소문도 퍼져 있었다. 이러한 이야기는 역시 당시의 혼란한 사회상 속에서 만들어졌을 것으로 보인다.

제49대 헌강왕
문의왕후 김씨 ․ 김씨, 정, 생년미상 ~ 886년 
재위기간 : 875년 9월 ~ 886년 7월. 총 10년 10개월 
부인 : 2명 
자녀 : 1남 1녀
의명왕후 - 의성(선덕왕의 왕비)
후비 김씨 - 요(제52대 효공왕)

헌강왕은 경문왕의 맏아들이며, 문의왕후 소생으로 이름은 정이다. 경문왕 재위 6년인 866년 태자에 책봉되었고, 875년 9월에 경문왕이 죽자 왕위에 올랐다. 그는 명민하고 글 읽기를 좋아하여 눈으로 한 번 보면 입으로 모두 외웠다고 한다.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른 헌강왕은 이찬 위흥을 상대등으로, 대아찬 예겸을 시중으로 임명하여 조정의 기반을 잡았다. 헌강왕은 불교와 국학에 대한 관심을 아울러 가졌는데, 876년과 886년에 황룡사에서 백고좌강경을 설치하고 친히 가서 들었다. 이러한 왕의 사찰행은 불력에 의한 국가의 재건과 왕실의 안녕을 위한 출행이었다. 확실한 연대는 알 수 없으나 망해사가 세워진 것도 헌강왕 대이다.

879년에는 국학에 행차하여 박사로 하여금 강론하게 하였으며, 883년에는 삼랑사에 행차하여 문신들로 하여금 시 1수씩을 지어 바치게 하였다. 879년에 신홍 등이 반란을 일으켰으나 곧 진압하였다. 그 뒤 헌강왕대에는 신라가 태평성대를 누린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880년에 왕이 좌우를 거느리고 월상루에 올라 서울의 사방을 바라보면서, 백성들의 집이 볏짚이 아닌 기와로써 이어졌고 밥할 때 장작이 아니라 숯을 땐다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부유함은 신라 전체가 아닌 이른바 금입택과 같은 진골귀족의 부강함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지만 오히려 신홍 등의 반란은 하대사회의 모순을 드러내는 것으로 생각된다.

반면 헌강왕대에 신라 하대사회의 위기의식을 나타낸 기록이 보이고 있다. 879년에 왕이 나라 동쪽의 주군을 순행하였을 때 어디서 온지를 모르는 네 사람이 어가를 따르며 춤을 추었는데, 당시 사람들이 그들을 산과 바다의 정령이라 하였다. 이와 비슷한 이야기는 『삼국유사』에도 실려 있다.
헌강왕이 포석정에 갔을 때 남산신이 나타나서 춤을 추니, 이 춤을 전하여 「어무상심」이라 한다.

또 헌강왕이 동해안의 개운포에 놀러갔다가 동해 용왕의 아들이라고 하는 처용을 만나 데리고 왔다. 그리하여 <처용가>가 만들어졌는데, 처용을 지방 세력가의 자제로 보아 헌강왕대에 기인제도가 나타난 것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또한 886년 봄에는 적국인 보로국(지금의 안변군 서곡면)과 흑수국(여진족의 하나) 사람들이 신라와 통교를 청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헌강왕은 중국 당나라와 일본과의 교섭을 꾀하기도 하였다.

886년 6월에 갑작스럽게 병에 걸려, 끝내 그해 7월 5일에 사망하고 말았다. 이때 그의 나이는 20대 중반으로 추정되며, 능은 보리사 동남쪽에 마련되었다.

제50대 정강왕
문의왕후 김씨 ․ 김씨, 황, 생년미상 ~ 887년 
재위기간 : 886년 7월 ~ 887년 7월. 총 1년 
부인 : 기록 없음 
자녀 : 없음
왕비 - 기록 없음

정강왕은 경문왕의 차남이며, 문의왕후 소생으로 이름은 황이다. 할아버지는 희강왕의 아들로 의공대왕으로 추봉된 계명이고, 할머니는 광의왕태후로 추봉된 광화부인이다.

아버지는 경문왕이고, 어머니는 헌안왕의 맏딸로 문의왕후에 봉하여진 영화부인이다. 정(헌강왕), 만(진성여왕), 윤과 형제간이다. 그는 886년 7월에 형 헌강왕이 죽자, 왕위에 올랐다. 최치원의 글 <사추증표>에는 헌강왕의 죽음과 정강왕의 즉위가 887년으로 되어 있어 1년의 차이가 있다. 정강왕은 이찬 준흥을 시중으로 임명하고 조정을 꾸렸지만, 그의 치세는 오래 가지 못했다. 즉위년에 서쪽 지방에 심한 가뭄이 들어 흉년이 닥쳤고, 이듬해 정월에 한찬 김요가 한산주에서 병력을 일으켜 모반을 도모했다. 다행히 반란은 진압되었고, 김요는 붙잡혀 처형되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정강왕이 병상에 눕고 말았다.

5월에 병상에 누운 정강왕은 건강이 급격히 악화되자, 시중 준흥에게 유언을 남겼는데, 다음과 같다. “나의 병이 위급하니, 다시 회복되지 못할 것이다. 불행히 뒤를 이을 자식은 없으나, 누이동생 만은 천성이 명민하고 체격이 남자와 같으니, 그대들이 선덕왕과 진덕왕의 옛 일을 본받아 그녀를 왕위에 세우는 것이 좋을 것이다.” 유언을 남긴 정강왕은 그해 7월 5일에 죽었다.

재위기간 동안에 887년에 정월 황룡사에 백좌강경을 설치하였으며, 같은 해 고승 진감선사 혜소의 높은 도덕과 법력을 양모하여 대사가 도를 닦은 옥천사를 쌍계사로 개칭하고, 고운 최치원으로 하여금 진감선사 대공탑비의 비문을 짓게 하고, 승, 빈영이 이를 새겼다. 보라사 동남쪽에 묻혔다.

 

Posted by 원주유
신라 역사와 문화2013. 9. 14. 15:23

 

 

전세계 왕들 중에서 가장 현면한 왕은 신라왕들이다?..과연 그러진 보실까요..

제41대 헌덕왕
혜충태자(제38대 원성왕의 장남)
성목태후 김씨 ․ 김씨, 언승, 생년미상 ~ 826년 
재위기간 : 809년 7월 ~ 826년 10월. 총 17년 3개월 
부인 : 1명 
자녀 : 2남
황아왕후 - 헌상, 장렴

헌덕왕은 원성왕의 태자 인겸의 아들이며, 성목태후 김씨 소생으로 소성왕의 동복아우이다. 이름은 언승이며, 소성왕이 죽은 뒤에 어린 애장왕이 왕위에 오르자 섭정이 되었다가, 애장왕 10년(809년)에 조카인 애장왕을 죽이고 왕위에 올랐다. 790년에 대아찬으로 임명되어 중국 당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으며, 다음해에는 제공의 난을 진압하는 데 가담하여 공을 세움으로써 잡찬이 되었다. 원성왕 10년(794년)에 시중에 임명되고, 그 다음해에 이찬으로서 재상이 되었으며, 796년에는 병부령의 자리를 맡게 되어 원성왕 말년부터 정치적인 기반을 갖추게 된다. 이러한 세력기반을 바탕으로 애장왕의 즉위와 함께 각간에 올라 섭정도 맡게 된다. 801년에 어룡성의 장관인 사신이 되었고 이어 상대등에 올랐다. 아우 수종이 시중의 위치에 있었던 809년에는 제옹과 더불어 난을 일으켰으며, 난중에 애장왕이 살해되고 언승이 왕위에 올라 헌덕왕이 되었다.

헌덕왕대의 정치는 함께 반정에 가담한 그의 아우 수종(흥덕왕)을 비롯하여 조카 제륭, 양종, 균정, 영공, 헌정 등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헌덕왕은 그들을 차례로 시중에 기용하며 조정을 장악하였다. 그 덕분에 헌덕왕 재위 10년까지는 조정이 비교적 안정된 편이었으나, 인사의 편중이 심한 탓에 불만 세력이 늘어났다. 특히 지방으로 방출당한 관리들의 불만이 팽배해져 지방 행정이 급격히 악화되었다. 그 때문에 재위 11년부터 지방 곳곳에 초적들이 일어났다. 헌덕왕은 모든 주와 군의 도독 및 태수에게 명하여 초적들과 전면전을 벌여 그들을 토벌하도록 했다. 이러한 어려운 상황 속에서 마침 당나라에서는 절도사이사도의 반란을 당하여 신라에 출병을 요청하였다. 헌덕왕은 816년에 김웅원으로 갑병 3만을 이끌고 반란의 진압을 돕도록 하였다.

국내외적 혼란이 계속되던 822년에는 집사시랑인 녹진이 충공을 찾아가 인재의 쓰임을 목재의 쓰임에 비유하여 인사 처리에 적절한 대책을 제언하였는데, 이때 녹진이 제시한 인사원칙은 왕당파에게 유리한 것으로 왕권에 반대하는 귀족에게는 불리한 것으로 이해된다. 이렇게 헌덕왕이 주도한 개혁정치에 반대하여 오던 귀족의 불만이 누적되어 822년 3월에 김헌창의 난이 일어난다. 선덕왕을 이어 아버지 김주원이 왕위에 올랐다면 헌창은 아마 왕좌에 앉아 있거나 왕위 계승자가 되어 있어야 했으나, 수년 동안 외직을 전전하게 되었고 그는 그런 현실을 비통해하며 일으켰다. 그동안 외직에서의 기반을 바탕으로 반군의 깃발을 들자 순식간에 무진, 완산, 청주, 사벌 등 네 주가 그의 수중에 떨어졌다. 그는 국호를 장안이라 하고 연호를 경운 원년이라 하여 스스로 왕을 청하며 반군을 이끌었다. 정부군의 진압 작전이 조직적으로 이뤄지면서 헌창의 부대는 곳곳에서 무너졌으며 헌창은 패배를 만회할 수 없음을 알고 자결하였다. 헌창이 죽자, 그의 부하가 그의 머리와 몸을 베어 각각 따로 묻어 두었다.

한편, 웅진성을 무너뜨린 정부군은 헌창의 무덤을 찾아내 그의 시신을 다시 칼로 베고, 그의 친족과 도당 239명을 죽였다. 하지만 헌창의 아들 범문이 겨우 목숨을 건져 825년 정월에 다시 부하들을 이끌고 북한산주를 공격했다. 그는 그곳에 도읍을 세우고 나라를 개국할 생각이었지만, 패배하여 처형되고 말았다. 헌덕왕도 그 이듬해 10월에 생을 마감했는데, 장지는 천림사 북쪽이다.

제42대 흥덕왕
혜충태자(제38대 원성왕의 장남)
성목태후 김씨 ․ 김씨, 초명은 수종, 개명은 경휘, 생년미상 ~ 836년 
재위기간 : 826년 10월 ~ 836년 12월. 총 10년 2개월 
부인 : 2명 
자녀 : 1남
정목왕후 김씨 - 능유

후비박씨

흥덕왕은 원성왕의 태자 인겸의 셋째 아들이며, 성목태후 김씨 소생으로 소성왕과 헌덕왕의 동복아우이다. 초명은 수종이었다가 왕위에 오른 뒤에 경휘로 고쳤다. 그는 형 헌덕왕과 함께 조카인 애장왕을 죽이는 데 가담하여 이찬이 되었고, 헌덕왕 11년(819년)에 상대등이 되었다. 그리고 822년에는 부군에 책봉되어 왕위 계승권을 확보한 뒤, 826년 10월에 헌덕왕이 죽자 왕위에 올랐다. 당시 헌덕왕은 왕자가 여럿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조정을 장악하고 있던 동생인 그를 부군으로 책봉하여 왕위를 계승토록 했다. 즉위하면서 흥덕왕은 정치개혁을 시도했는데, 827년에 명활전을 설치하였다(914년에 설치되었다는 설도 있다). 829년에는 원곡양전을 설치하였으며, 집사부를 집사성으로 고쳤다. 이때의 개혁은 김헌창의 난으로 어지러워진 왕실을 정리하고, 신라 왕실의 귀족세력을 억제시켜 왕권강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834년에 모든 관등에 따른 복색, 거기, 기용, 옥사 등의 규정을 반포하였다. 이 규정은 왕이 당시 사치풍조를 금지시키기 위하여 발표한 것이라 하지만, 그 내면에는 골품간의 계층구별을 더 엄격히 하고자 하는 귀족들의 요구가 바탕이 된 것이었다. 이 규정에서는 진골과 육두품을 비롯한 여하의 귀족이나 평민과의 차별을 더 뚜렷이 하고 있다는 점에서, 진골세력에 대한 배려를 깊이 깔고 있음을 짐작해 볼 수 있다. 그 밖의 치적으로 변방에 진을 설치한 것과 불교에 대한 관심을 들 수 있다. 우선 828년에 궁복(장보고)이 중국 당나라의 서주에서 소장으로 활약하다가 귀국하였으므로 1만 명의 병졸로써 지금의 완도에 청해진을 설치하게 하였다. 다음해에는 당은군에 당성진을 설치하였다. 그리고 827년에는 중 구덕이 당나라로부터 경전을 가지고 들어왔으며, 830년에는 도승 150명을 허가해주었다. 한편, 828년에는 사신으로 당나라에 갔다 돌아온 김대렴이 차 종자를 가지고 돌아오니 흥덕왕이 지리산에 심게 하여 성하게 되었다. 재위기간 중 사랑하는 아내와 자식을 잃고 병마에 시달리던 흥덕왕은 끝내 병마를 이겨내지 못하고, 재위 11년(836년) 12월에 죽었다. 능은 안강 북쪽 비화양에 마련되었으니, 그의 유언에 따라 정목왕후의 능에 합장된 것이다.

제43대 희강왕
포도부인 박씨 ․ 김씨, 제륭 또는 제옹, 생년미상 ~ 838년 
재위기간 : 836년 12월 ~ 838년 정월. 총 1년 1개월 
부인 : 1명 
자녀 : 2남
문목왕후 김씨 - 의종, 계명(제48대 경문왕의 아버지)

희강왕은 원성왕의 손자인 이찬 김헌정의 아들이고, 어머니는 포도부인 박씨이다. 이름은 제륭또는 제옹이라고 하며, 헌덕왕과 함께 애장을 제거하는 데 가담하여 권좌에 올랐다.
836년 12월에 흥덕왕이 후계자를 정하지 못하고 죽자, 신라 조정은 왕위 계승권 다툼에 휘말렸다. 흥덕왕의 종제 균정과 조카 제륭이 서로 파벌을 형성하여 왕위를 차지하려고 했던 것이다. 이에 시중인 김명과 아찬 이홍, 배훤백 등은 제륭을 받들고, 아찬 김우징과 조카인 예징 및 김양은 균정을 받들었다. 그들은 흥덕왕의 죽음이 임박하자, 각기 군대를 이끌고 대궐로 들어가 전쟁을 벌였는데, 그 와중에 김양이 화살에 맞아 부상을 입었다. 그 바람에 제륭파가 승세를 굳혔고, 균정은 살해되었으며 김양과 우징은 달아났다.

제륭은 왕위에 올라 우선 사형수 이외의 죄수를 모두 사면하여 자기의 왕위 계승을 전국에 알렸다. 또 아버지 김헌정을 익성대왕에, 어머니 박씨를 순성태후에 추봉했다. 또 자기가 즉위하는 데 큰 도움을 준 김명을 상대등에 임명하고, 아찬 이홍을 시주에 임명하여 조정을 장악했다. 그와 싸우다 패배하여 달아나 장보고에게 의탁하고 있던 우징이 아버지 균정이 살해된 사실을 백성들에게 알련 반역을 선동하고 있어, 왕정은 쉽게 안정되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 김명과 이홍은 서로 짜고 군대를 일으켜 희강왕의 측근들을 대거 죽여 버렸다. 이에 겁을 먹은 희강왕은 자기도 살해당할 것을 염려하여 궁중에서 목매어 자살하니, 이때가 재위 3년째인 838년 정월이었다. 능은 소산에 마련되었다.

제44대 민애왕
김충공(제38대 원성왕의 손자)
귀보부인 박씨 ․ 김씨, 명, 생년미상 ~ 839년 
재위기간 : 838년 정월 ~ 839년 윤 정월. 총 1년 1개월 
부인 : 1명 
자녀 : 기록 없음
윤영왕후

민애왕은 원성왕의 손자 대아찬 충공의 아들이며, 귀보부인 박씨 소생이다. 이름은 명이며 헌덕왕 대로부터 여러 벼슬을 거쳐 희강왕을 보좌한 덕으로 상대등에 임명되었다가, 838년 정월에 시중 이흥과 함께 반란을 일으켜 왕위를 찬탈했다. 왕위에 오른 그는 아버지 충공을 선강대왕, 어머니 귀보부인을 선의태후로 추존하고 김귀를 상대등, 헌중을 시중으로 삼았다.

흥덕왕이 죽고 그 사촌동생인 균정과 5촌 조카인 제륭이 서로 왕위를 다투게 되었을 때, 시중인 김명과 아찬 이홍, 배훤백 등은 제륭을 받들고 아찬 우징과 조카 예징 및 김양은 균정을 받듦으로써, 한때 궁궐에서 서로 싸우게 되었다. 이 싸움에서 균정은 전사하고 김양이 화살을 맞아 우징 등과 더불어 청해진의 장보고에게 도망하여 의탁하였다. 싸움에 이긴 제륭이 즉위하였으나, 불만을 가진 김명이 이홍과 같이 다시 난을 일으키자, 희강왕은 자진하고 김명이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왕위에 오른 김명(민애왕)은 다시 균정계 세력의 도전을 받게 되었다. 838년 청해진에 의탁하고 있던 우징 등이 장보고의 군사 5,000을 이끌고 민애왕을 토벌하기 위하여 진격해왔다. 김양, 염장, 장변, 정년, 낙금, 장건영, 이순행 등이 우징을 받들고 있었다.

이해 12월 민애왕은 김민주 등을 파견하여 무주 철야현(지금의 나주 부근)에서 토벌군을 맞아 싸우게 하였으나 패배하고, 그 다음해 정월 달구벌(지금의 대구)에서의 싸움에서도 대패하였다. 민애왕은 청해진 군대가 밀려오자, 궁궐 서쪽 교외에 몸을 숨기고 있다가 병사들에게 살해되었다. 이때가 839년 정월 22일이니, 왕위에 오른 지 불과 13개월 만이었다. 장지는 알 수 없다.

제45대 신무왕
김균정(제38대 원성왕의 손자)
진교부인 박씨 ․ 김씨, 우징, 생년미상 ~ 839년 
재위기간 : 839년 윤 정월 ~7월. 총 6개월 
부인 : 1명 
자녀 : 1남
정종왕후 - 경웅(제46대 문성왕)

신무왕은 원성왕의 손자 균정의 아들이며 진교부인 박씨 소생으로 이름은 우징이다. 헌덕왕 14년인 822년에 김헌창의 난이 일어나자 대아찬의 벼슬을 받고 아버지 균정과 함께 토벌대를 이끌었으며, 흥덕왕 3년인 828년에 시중에 올랐다. 그리고 831년에 시중에서 물러났다가 3년 뒤인 834년에 다시 시중에 기용되었다. 835년에 아버지 균정이 상대등에 오르자, 부자가 함께 재상과 시중에 있을 수 없다는 이유로 물러났다. 836년에 헌덕왕이 죽자, 아버지 균정을 왕위에 앉히려 했으나, 재종 제륭(희강왕)에게 패배하여 청해진 장보고에게 의탁하였다. 838년에 희강왕의 김명(민애왕)에게 살해되고, 김명이 왕위에 오르자, 장보고 군대의 도움을 받아 김명을 제거하고 왕위에 올랐으나, 이때가 839년 윤 정월이었다.

신무왕의 즉위는 원성왕의 큰 아들인 인겸계와 균정계 세력의 대립에서 균정계가 승리하였음을 의미한다. 균정계가 승리한 데에는 청해진 세력과 이미 거세된 김주원계의 후손인 김양의 도움이 컸다. 즉위와 동시에 할아버지 예영을 혜강대왕, 아버지 김균정을 성덕대왕, 어머니 진교부인 박씨를 헌목태후에 추존하고, 아들 경웅을 태자로 삼았다.

신무왕은 즉위한 지 반년도 못 되어 죽었기 때문에 별다른 경륜을 펴지 못하였으나, 다만 그는 장보고나 김양에 대하여 배려하고 있었던 듯하다. 839년에 장보고를 감의군사로 삼아 식읍 2,000호에 봉하였다. 반면, 장보고도 이에 그치지 않고 딸을 왕비로 세우려 하였는데 이것은 청해진 세력이 강대해졌음을 알려준다. 신무왕은 장보고 등 왕권에 압력을 가하는 세력을 제압하여야 하는 과업을 앞두고 죽었다. 이때 죽위년 7월이었다. 능은 제형산 서북에 있다.

 

 

Posted by 원주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