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통일의 기반을 다진 북한산성 전투
660년 황산벌에서 계백과 5천결사대의 거룩한 투쟁은 흔적 없이 사라지고 백제는 나당연합군에 항복하고 말았다. 하지만 만주를 누비던 부여족의 후예인 백제는 자신의 나라를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일본에 가있던 부여풍이 백제로 돌아와 부흥운동을 주도하면서 신라는 한강 위쪽의 고구려군을 대비하면서 백제의 부흥세력들과 새로운 전쟁을 치뤄야 했다.
이 시기 고구려는 새로운 구상을 하고 있었다. 고구려의 집권자인 연개소문은 신라와 당나라를 두려워하는 존재가 아니었다. 그는 이미 세계 최강의 제국인 당나라와 수많은 전투에서 패배를 알지 못했던 인물이었다. 645년 당 태종이 친히 대군을 이끌고 침입했을 때 직접 고구려군을 지휘해 개모성·요동성·백암성에서 적에게 큰 타격을 가하고 마침내 안시성 혈전에서 88일 동안의 공방전 끝에 당군을 격퇴했기 때문이다. 그는 이후에도 4차례나 당나라 침입을 받았으나 이를 모두 막아내며 당나라로 하여금 고구려의 두려움을 알게 해줬다.
하지만 고구려는 당나라와 15년 동안의 전투로 엄청난 국력의 손실이 있었고 더구나 나당연합군에 의해 백제가 멸망당하기에 이르렀으니 긴장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따라서 연개소문은 고구려를 삼키고자 다가오는 신라를 아예 선공하는 게 효과적이라고 판단했다. 더구나 백제 지역에서 왕자 부여풍과 흑지상지가 이끄는 백제부흥군이 신라를 괴롭히고 있어 한강 유역을 공격하기에는 최적의 기회였다. 연개소문은 당나라와의 처절한 투쟁을 승리로 이끈 주역의 한사람이자 말갈족으로부터 신임이 두터웠던 뇌음신을 사령관으로 임명하고 고구려군과 말갈군과의 연합군을 편성했다. 뇌음신은 연개소문이 정변을 일으킬 때 군사 500여명을 거느리고 그를 도왔으며 훗날 고구려와 당나라와의 전쟁이 시작됐을 때 현토성주로 당군을 패배시켰던 고구려의 영웅이었다. 한편 말갈족은 이미 연개소문 위용에 눌려 그 용맹스러움을 고구려군과 함께 하고 있었다. 훗날 말갈족이 고구려 후예 대조영과 함께 당나라와 투쟁, 진국(辰國:훗날 발해)을 건설한 건 이때부터 형제의 맹약이 있었기 때문이다.
661년 연개소문의 명을 받은 뇌음신은 말갈의 장군 생해(生偕)와 연합, 신라 술천성을 공격했다. 술천성은 지금의 경기도 여주땅으로 한강 일대에서 가장 중요한 거점이었다. 여주를 장악하면 한강을 타고 두물머리(양수리)로 올라가 북한강와 남한강을 모두 이용해 신라 영토 모두를 공격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남한강을 굽이 바라보고 있는 파사산성은 함락당할 곳이 아니었다. 지형상의 불리함을 극복하지 못한 뇌음신은 전략적 후퇴를 단행하고 신라군의 주력 부대가 있는 북한산성으로 말발굽을 돌렸다. 이것이 차라리 고구려다운 방식이었다. 아예 최강의 군사들끼리 맞붙어 멋지게 자웅을 가려보자는 것이었다.
당시 북한산성 성주는 동타천으로 대사(大舍) 지위에 있는 장군이었다. 동타천에 대한 상세한 기록이 ‘삼국사기’에 나타나진 않지만 신라 국경 최대 전략적 요충지인 북한산성을 지휘하고 있던 것으로 미뤄 뛰어난 무공과 지략을 지닌 인물이었을 것이다.
동타천은 성곽 바깥으로 철질려(마름쇠)를 깔아 사람과 말 등이 다니지 못하게 했다. 고구려군이 성곽 근처로 다가오는 것을 차단하기 위해서였다. 이 작전은 성공해 고구려군의 접근을 차단했다. 하지만 뇌음신은 새로운 공격기법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바로 포차(抛車)를 이용하는 것이었다. 영화에서 나오는 것처럼 성곽 바깥에 포차를 설치, 거대한 돌을 산성 안으로 쏘아 보냈다. 고구려군의 20여일 동안의 거친 공세로 드디어 신라군은 더 이상 버틸 힘이 없었다. 고구려군은 고구려군대로, 신라군은 신라군대로 자신의 조국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 우리 역사상 가장 멋진 전투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전쟁의 승패는 전혀 뜻하지 않은 곳에서 발생했다. 고구려군이 승리로 끝날듯한 전투였지만 승리의 여신은 끝내 고구려군을 외면했다. 전투 막바지 별안간 큰 별이 고구려군 진영에 떨어지고 번개와 벼락 등이 치며 큰 비를 퍼붓는 돌발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이 한순간 고구려군과 신라군의 사기는 뒤바뀌고 하늘의 뜻이 고구려에 있지 않고 신라에 있음을 깨달은 뇌음신은 철군을 결정했다. 만약 마지막 순간 벼락과 천둥 등이 치지 않았다면 어찌 됐을까? 만약 그렇게 됐다면 아마도 북한산성 전투는 고구려군의 승리로 끝나고 한강 유역을 다시 차지한 고구려군은 오히려 신라를 제압하고 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하늘은 신라를 택했고 실제 역사 역시 신라군의 승리로 끝나고 말았다. 661년 북한산성 전투는 바로 신라의 삼국통일을 하늘이 선택한 역사의 사변이었고 그것이 바로 가정이 아닌 역사의 현실이다.
고구려 명장 강이식장군
고구려 명장.세계 전쟁사에 유례없는 전승기록이 있다. 6세기 세계 최강대국 중국이 16년에 걸쳐 4차례나 침략전쟁을 일으켰으나 고구려는 이를 모두 물리치고 대승을 거두었다. 고구려 병마원수 강이식(姜以式) 장군. 그는 일명 임유관 대첩으로 불리는 수나라의 1차 침략전쟁에서 30만 대군을 5만 정예부대로서 궤멸, 서전을 장식하며 고구려인의 기개와 용맹을 만천하에 떨쳤다.
그동안 강이식 장군은 잘 알려지지 않았었다. 중국의 왜곡된 역사관과 고구려사를 다룬 삼국사기의 저자 김부식의 사대주의로 인해 역사에서 누락되었기 때문이다. 근세에 들어와 일부 문헌을 비롯하여 그를 시조로 모신 진주 강씨 문중 족보 기록과 중국 현지 유적 등을 토대로 강이식 장군에 대한 실증 작업이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다.
진주강씨(晉州姜氏)의 족보에 그 시조로 알려진 인물이지만『삼국사기』와『구당서』등 국내외 정사(正史)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 597년(영양왕 8) 수(隋)나라가 중국 대륙을 통일하고 고구려를 신속시키고자 무례한 국서(國書)를 보내오자 강이식은 “이러한 오만무례한 국서는 붓으로 답할 것이 아니라 칼로 대답해야 한다”면서 주전론을 제창하였다. 이후 고구려 조정 여론이 주전론 쪽으로 가닥을 잡자 수 문제가 고구려를 본격적으로 침공함에 따라 여·수전쟁(麗隋戰爭)이 발발하였다. 이때 강이식은 고구려의 최고 사령관인 병마원수(兵馬元帥)를 맡아 정병 5만을 이끌고 이 전투에 참가하였다.
이듬해(598) 대병력을 이끌고 요서(遼西)로 나아가 요서총관(遼西總管) 위충(韋沖)과 접전하다가 임유관(臨硝關: 현 산해관의 남서 지역)으로 거짓 후퇴하였다. 이에 수나라의 문제(文帝)는 30만 대군을 들어 한왕(漢王) 양량(楊諒)을 행군대총관(行軍大總管)으로 삼아 임유관으로 보내고, 주나후(周羅?)를 수군총관(水軍總管)으로 삼아 바다로 출행시키면서 평양으로 출전한다고 선언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계략은 양선(糧船)을 이끌고 요해(遼海)로 들어와 양량의 수나라 대군에게 군량을 공급해주려는 속임수 전략이었다. 병마원수인 강이식은 이를 간파하고 수군으로 바다에 나아가 주나후의 군량선을 격파하였다. 이어 군중(軍中)에 벽루(壁壘)를 지키라고 명하여 출행하지 않으니 수나라 군사들은 양식이 점차 떨어지고, 그때가 마침 6월 장마철이라 기아·질병으로 인하여 수군의 사기는 극도로 저하되었다. 이 때를 기회로 강이식은 총공격을 가하여 수나라 군사들을 거의 섬멸하고, 군자(軍資)·기기(器機) 등을 노획하는 큰 전과를 올렸다.
강이식이 진두지휘한 임유관전투의 대승리로 인하여 수나라 문제 정권은 몰락하였으며, 고구려가 요동 지방을 안전하게 확보한 채 대수전쟁을 준비할 수 있게 되었다.
강이식의 묘는 심양현(潘陽縣) 원수림(元帥林: 현 만주 봉길현 원림역 앞)에 있다. 경상남도 진주시 상봉서동 봉산사(鳳山祠)에서는 해마다 음력 3월 10일에 그를 제향하고 있다. 신채호(申采浩)의『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에 강이식 장군의 활동 모습이 실려 있는데, 지금은 전하지 않는『서곽잡록(西郭雜錄)』과『대동운해(大東韻海)』에 실린 것을 인용하였다.
생몰년 미상. 고구려시대의 명장. 보장왕 때의 안시성(安市城) 성주이다. 그의 이름은 역사서에는 보이지 않고 ‘안시성 성주’로만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송준길(宋浚吉)의 동춘당선생별집(同春堂先生別集)과 박지원(朴趾源)의 열하일기(熱河日記)에 의하면 양만춘(梁萬春) 또는 양만춘(楊萬春)으로 밝혀졌다.
그는 지금의 만주 요령성(遼寧省) 해성(海城)의 동남쪽에 위치한 영성자산성(英城子山城)으로 추정되는 안시성의 성주였다. 안시성은 지리적으로 험한 곳에 자리 잡은 전략적 요충지일 뿐 아니라 군사들 또한 정예한 것으로 정평이 나 있었다. 그는 연개소문(淵蓋蘇文)이 정변으로 정권을 장악했을 때, 집권자인 연개소문에게 복종하지 않았다. 이에 연개소문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안시성을 공격했으나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이에 따라 연개소문은 결국 안시성 성주의 직책을 그대로 맡겼다. 이는 그가 용기와 소신 있는 인물이었음을 시사해 준다.
645년(보장왕 4) 당나라 태종은 대군을 동원해 고구려를 침공하였다. 당나라 군대의 주력부대의 침공으로 요동지역에 있던 개모성(蓋牟城: 撫順 부근)과 비사성(卑沙城: 大連灣 北岸)이 함락되었다. 이어 당나라 태종의 지휘로 요동성(遼東城: 遼陽)과 백암성(白巖城: 遼陽 동남)도 당나라 군대에 함락되었다. 당나라 군대는 다음 공격목표를 놓고 수뇌부 사이에 이견이 있었으나, 이세적(李世勣)의 건의로 안시성 공격을 시도하였다. 이 때 고구려는 당나라 군대에 포위된 안시성을 지키기 위해 15만 병력을 출동시켰으나 안시성 근처 8리 지점에서 대패하고 말았다.
고립무원의 상황에 처한 안시성에서 그를 비롯한 병사와 주민들은 하나로 뭉쳐 완강히 저항하였다. 안시성 공격이 여의치 않자 당나라 군대는 공격목표를 그보다 훨씬 동남쪽에 있는 오골성(烏骨城: 만주 鳳凰 남쪽의 高麗山城)으로 변경하고자 논의하였다. 그러나 안시성을 계속 공격하기로 의견이 모아져 치열한 공방전이 전개되었다. 당나라 군대는 연인원 50만 명이 동원되어 60여 일 동안 높은 흙산을 쌓아, 이를 발판으로 성을 공격하였다. 당시 당나라군대는 하루에 6, 7회의 공격을 가하고 마지막 3일 동안은 전력을 다해 총 공세를 펼쳤으나 끝내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마침 9월에 접어들어 요동의 날씨가 추워지기 시작했고, 군량 또한 다하자 당나라 태종은 포위를 풀고 철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때 그는 성루에 올라 송별의 예(禮)를 표하고, 당나라 태종은 그의 용전을 높이 평가해 비단 100필을 주면서 왕에 대한 충성을 격려하였다.세계 최강이라고 알려진 당태종의 군사를 결정적으로 패배시킨 안시성 전투는 고구려인의 기상과 자존심을 보여준 생생한 사건이었다.
고려 후기의 학자인 이색(李穡)의 정관음(貞觀吟)이라는 시와 이곡(李穀)의 가정집(稼亭集)에 의하면 당나라 태종이 눈에 화살을 맞아 부상을 입고 회군했다고 한다. 고구려 멸망 뒤 당나라에 반대해 끝까지 저항한 11성(城) 가운데 안시성이 포함된 것으로 보아, 그의 생존여부는 알 수 없지만, 그의 기백과 용기가 고구려 부흥운동으로 계승되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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