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역사와 문화2013. 9. 14. 18:04

 

 

고구려 수나라 전쟁의 영웅 연개소문에 의해 쓰러지다.

고구려 27대 영류왕(營留王, 재위: 618?642)은 큰 전쟁 없이 25년간 나라를 다스렸지만, 연개소문에 의해 시해당한 임금이다. 그의 죽음 이후 고구려는 큰 전쟁을 치렀기 때문에, 그는 자신을 시해한 연개소문과 관련되어 지금도 역사적 평가가 엇갈리는 인물이다.

 

평원왕의 아들이자 영양왕의 이복동생

영류왕은 고구려 25대 평원왕(平原王, 재위: 559?590)의 아들로, 26대 영양왕의 이복동생이다. 그의 이름은 건무였다. 영양왕(?陽王, 재위: 590?618)이 559년 무렵에 태어난 것에 비해, 그는 평원왕이 뒤늦게 얻은 아들임을 고려했을 때 580년대 초반에 태어난 것으로 볼 수 있겠다. 그의 동생으로 대양왕(大陽王, 28대 보장왕의 아버지)이 있었으므로, 평원왕이 죽기 직전인 590년에 가까운 시기에 태어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는 618년 영양왕이 죽자, 왕위에 올라 642년까지 고구려를 다스리다가 60세 무렵에 죽었다.

수나라와의 전쟁에서 공을 세우다

그가 30세 무렵인 612년, 고구려와 수나라 사이에 전쟁이 발발했다. 이때 그는 고구려 수도를 방어하는 사령관으로, 바다 건너 직접 고구려 평양 부근에 도착한 수나라 좌익위대장군 래호아(來護兒)가 지휘하는 수만의 군대를 막아내는 임무를 맡았다. 래호아의 군대는 요동을 통과해 육로로 평양을 향해 공격하는 수나라 30만 별동대에게 군수품을 보급해주며, 함께 평양을 공격할 임무를 맡고 있었다. 따라서 고구려로서는 이들을 빨리 격파하여, 수나라 별동대와 만나지 못하게 해야 했다. 건무는 유인작전을 펼쳐 이들을 섬멸하고자 했다.

[북사(北史)] <래호아 열전에 따르면, 영양왕의 동생 건무가 날래고 용감(驍勇)하기가 매우 뛰어나(絶倫), 죽을 각오를 한 결사대 100명을 직접 이끌고 래호아의 진영으로 돌진했다고 한다. 그의 형인 영양왕처럼 그도 용감하게 적진을 향해 돌격해 군사들에게 모범을 보였던 것이다. 고건무의 작전은 적에게 일부러 패해 작은 승리를 안겨주어 교만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전쟁에서 공을 세우고자 하는 욕심이 컸던 래호아는 자주 승리를 거두어 고구려의 수도 평양 장안성 앞에 이르자, 자신의 군대만으로 고구려 수도를 함락시킬 야심을 갖게 되었다. 이때 부총관 주법상이 래호아에게 수나라 육군을 기다려야 한다고 말렸지만, 래호아는 직접 4만 대군을 이끌고 장안성으로 진군했다. 장안성은 외성, 내성, 중성, 북성으로 이루어진 도성(都城)이다. 고건무는 외성을 비워놓고 적을 유인했다. 외성 안에 들어온 수나라 군대는 기강을 잃고 마구 약탈에 나섰다. 이때 숨겨두었던 고구려 군대가 나타나 대오가 흩어진 수나라 군대를 섬멸시켰다. 간신히 도망간 수나라 군대는 해안가에 마련한 진지만을 겨우 지킨 채 수나라 육군과 만나 합동작전을 펼칠 능력을 완전히 상실하고 말았다.

고건무의 활약 덕택에 을지문덕은 보급품을 받지 못해 지쳐버린 30만 수나라 별동대를 살수에서 대파할 수 있었다. 이처럼 고건무는 뛰어난 지략과 용감함을 갖춘 612년 고-수 전쟁의 영웅이었다. 군대 내에서 위상이 높아지고 사람들의 지지를 얻음에 따라 그는 왕위 계승자로 부상하게 되었다. 영양왕에게 자손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만약 자손이 있었음에도 그가 왕위에 오르게 된 것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그가 전쟁에서 거둔 공적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다.

영류왕의 초기 대당(對唐) 정책

그가 왕위에 오른 618년은 마침 고구려의 숙적인 수나라가 멸망하고 당나라가 등장한 시기였다. 영류왕은 619년, 621년, 622년에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두 나라의 우호를 다졌다. 특히 622년에는 당나라의 제안을 받아들여 포로 교환을 하기도 했다. 고구려는 수나라와의 전쟁에서 획득한 포로 1만명을 돌려보냈다. 당나라에서 고구려로 돌려보낸 고구려인의 숫자는 확인할 수 없지만, 1만 보다는 적었을 것이다. 물론 고구려에는 여전히 수나라 출신 포로들이 많이 살고 있었다.

624년 영류왕은 당나라에서 보내온 도사(道士)와 도교서(道敎書)를 받아들였다. 또한 당나라의 책봉(冊封)도 표면적으로는 거부하지 않았다. 이때 당 고조(高祖, 재위: 618?626)가 신하들에게 고구려와의 관계는 명분과 실제가 다르다며, 굳이 신하의 예를 강요해 고구려와 갈등을 일으킬 필요가 없지 않느냐는 이야기를 한 것으로 볼 때, 책봉의 실질적인 의미는 거의 없었다고 볼 수 있다. 당나라는 수나라를 거듭 격파한 고구려의 실력을 잘 알고 있었기에, 겉으로는 우호적인 태도를 보였다. 하지만 안으로는 622년 고구려에서 이탈해 당나라에 귀부한 말갈의 추장 돌지계(突地稽)를 고구려와 가까운 연주(燕州) 총관에 임명하는 등, 고구려를 견제하고 있었다.

626년 신라와 백제는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고구려가 자신들이 당나라와 교류하는 것을 막을 뿐 아니라 국경을 자주 침략하니 이를 견제해 달라고 요청한 적이 있었다. 고구려도 당나라가 백제, 신라와 연합하는 것을 막는 등, 당을 견제했던 것이다. 하지만 당나라가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 삼국이 화해하라고 압력을 가하자, 고구려는 외교 갈등을 우려해 당의 요구를 들어주었다.

영류왕의 대외정책과 돌궐(突厥)

이처럼 영류왕이 당나라의 요구를 대체로 들어주고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하고자 했던 것은 그가 당나라와의 전쟁을 두려워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영류왕이 당나라와 화친을 원했던 것은, 유목제국인 동돌궐이 강성해졌기 때문이었다. 607년 고구려는 동돌궐에 사신을 보내기도 했지만, 551년과 580년대 초에 동서로 분리되기 전 강성했던 돌궐과 전쟁을 치른 경험을 갖고 있었다.

동아시아의 강자인 고구려와 수나라의 전쟁을 지켜보며 힘을 축적했던 동돌궐은 수-당 교체기 중원의 여러 군웅(群雄)들로부터 조공을 받을 정도로 국력이 강해져 있었다. 고-수 전쟁의 최대 수혜자가 된 동돌궐은 고구려의 핵심 이익이 걸린 요해(遼海 - 요서 북부 지역)의 거란족을 향해 세력을 확대해왔다. 전쟁 피해를 극복하는 일이 우선이던 고구려로서는 적극 대응하기가 어려웠다. 따라서 고구려로서는 거란족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는 동돌궐이 부담스러운 존재였다. 그러므로 당나라와 갈등을 야기하기보단 우호 정책을 시행한 것이었다.

그런데 630년 당나라가 동돌궐을 멸망시켰다. [삼국사기]는 628년의 사건으로 기록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630년이 옳다. 이때 영류왕이 즉시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승전을 축하한 것은 동돌궐을 견제하고 있던 고구려의 속내가 반영된 것이라고 하겠다.

 

변화하는 고구려-당의 관계

고구려는 당나라의 승전을 축하하면서 겸하여 봉역도(封域圖)를 주었다. 봉역도를 글자 그대로 풀이하자면 ‘제후가 책봉받은 영토에 관한 지도’ 라는 뜻인데, 이는 당나라의 입장이 반영된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봉역도가 만약 실제로 고구려의 지리 정보가 상세한 지도라면, 641년 지도에 관한 일을 담당하는 당의 직방낭중(職方郎中) 진대덕이 고구려 곳곳을 돌아다니며 지리정보를 획득하고자 노력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고구려가 보낸 것은 양국의 국경선을 확정한 국경지도로, 영토 분쟁을 하지 말고 사이좋게 지내자는 뜻을 밝힌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당나라의 생각은 달랐다. 626년 아버지 고조(이연)를 핍박하고, 형과 동생을 죽이고 왕위에 오른 태종(唐太宗 李世民, 재위: 626~649)은 언젠가는 고구려를 굴복시키려는 야심을 품고 있었다. 당 태종의 야심과 오만함은 631년 8월, 고구려에 보낸 사신 장손사가 고구려가 수나라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적의 시신을 모아 만든 기념물인 경관(京觀)을 헐어버린 것으로 표출되었다. 경관 파괴는 곧 고구려의 자부심을 건드리는 일이었다.

 

천리장성의 축조와 외교 정책

영류왕은 당나라가 여세를 몰아 고구려를 공격해 올 수도 있음을 감지하고, 백성을 동원해 부여성에서 서남쪽 바다에 이르는 천리에 달하는 지역에 장성을 쌓을 것을 명령했다. 천리장성 축조를 연개소문이 제안했다는 주장도 있지만, 이때는 아직 연개소문의 나이가 국내 정치에 간여할 정도가 아니었다. 천리장성 축조는 영류왕의 지시로 632년 2월부터 646년까지 15년간 지속된 거대한 사업이었다. 천리장성은 중국의 만리장성처럼 하나로 연결된 장벽이 아니라, 천리에 걸쳐 여러 곳에 성을 쌓고 보수하여 일종의 네트워크 방어망을 만든 것이라고 여겨진다. 이때 축성되고 보수된 성들은 고-당 전쟁에서 적을 막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삼국사기]와 중국의 사서(史書)들에는 631년부터 639년까지 고구려와 당나라 사이에 사신 왕래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고구려가 천리장성을 건설하며 당장 당나라와 적대적인 관계로 돌아선 것은 아니다. 634년 고구려 승려가 당나라에 입국하는 등 양국의 외교 관계는 지속되었다.

한편 당나라는 638년 토번과 싸워 승리하고, 서돌궐을 무력으로 압도하고, 서역의 여러 소국들을 제압하였으며, 640년에는 고창국까지 멸망시키는 등 서쪽 변경에서 그 세력을 크게 넓혔다. 당나라의 팽창을 예의주시하던 영류왕은 639년 태자 환권을 당에 사신으로 보내고, 당나라 국학(國學)에 청년들을 보내 입학시키는 등 당나라에게 우호적인 행동을 보였다. 그러자 640년 당나라에서 태자의 방문을 대한 답례로 사신 진대덕을 보내왔다. 고창국의 멸망 소식을 알고 있던 영류왕은 당나라의 강성함을 크게 경계하고 당과의 충돌을 피하기 위해 먼저 사신을 보냈을 뿐만 아니라, 당의 사신도 크게 우대해 주었다.

 

영류왕의 남방정책

영류왕은 고-수 전쟁 때 수나라를 지지했던 신라를 견제했다. 신라와는 한수 이북의 땅에 대한 소유권 문제로 6세기 말 이후로 갈등이 계속되고 있었다. 신라와의 작은 전투가 계속되는 가운데, 629년 8월 신라에게 낭비성을 빼앗기는 사태가 발생했다. 그러자 영류왕은 630년 왜국에 사신을 보냈다. 621년 사신을 보낸 이후 오랜만에 왜국에 사신을 보낸 것은 왜국을 이용해 신라를 견제하려는 목적 때문이었다.

영류왕은 군대를 보내 임진강 주변의 칠중성을 공격하게 하는 등 신라와 작은 전쟁을 하기도 했지만, 대군을 보내 정벌하기보다는 국경의 현상 유지와 외교를 통한 신라 견제에 치중하고 있었다. 백제와도 큰 갈등을 만들지는 않았다.

 

연개소문에 의해 시해되다

영류왕이 가장 공을 들인 것은 당나라와의 관계였다. 영류왕은 한편으로는 전쟁에 대비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전쟁을 피하고자 했다. 하지만 당나라는 고구려와의 전쟁을 각오하고 있었다. 641년 8월 당태종은 고구려를 방문하고 돌아온 진대덕의 보고를 받는 자리에서 “고구려를 육로와 해로로 나누어 공격하면 쉽게 멸망시킬 수 있으나, 지금은 산동지역이 아직 전쟁의 피해에서 벗어나지 못한 탓에 전쟁을 할 수 없다”고 말한 바 있다. 영류왕이 막고자 했던 당나라와의 전쟁은 그의 의지와 상관없이, 당태종의 야심과 당나라의 필요에 의해 발발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60세에 이른 영류왕은 자신의 재위기간 동안 당나라와 전쟁을 막으려고 노력했지만, 그 과정에서 소외된 연개소문(淵蓋蘇文, ?~665?)에 의해 642년 10월 시해되고 말았다. 연개소문은 자신을 죽이려고 했던 여러 대신들을 먼저 제거한 후, 곧장 궁중으로 달려가 영류왕을 시해하고 시신을 몇 토막으로 잘라서 구덩이에 버렸다고 기록되어 있다. 연개소문이 영류왕에 대해 상당한 적개심을 가졌던 것은 분명하지만, 왜 그가 영류왕을 시해했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한 이유를 알 수 없다. 단지 당나라와의 대외 정책을 놓고 젊은 연개소문과 노회한 정치가 영류왕 사이에 갈등이 빚어진 것으로 추정될 뿐이다.

영류왕에 대한 평가는 다양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다만 분명한 것은 그가 612년 고-수 전쟁의 영웅이었으며, 국제 정세의 변화에 따라 대외 정책을 변화시키며 큰 전쟁 없이 나라를 안정적으로 다스리고자 했던 임금이라는 점이다.


Posted by 원주유
고구려 역사와 문화2013. 9. 14. 17:50

 

지안(集安: 서기 3~427년 고구려 首都)

'고구려 박물관'의 역사 왜곡… 고구려史 뭉개고 발해史는 지워

동북공정 강화
"漢 무제가 현토군에 고구려현 설치, 中原에 융합" 옌볜 지역은 말갈족 영역으로

모순
지도에 남쪽 경계는 한강 유역, 옌볜은 고구려땅 아니라면서 고구려城 그려 넣기도

集安 고구려碑
8각 유리상자 안에 넣어놓고 1m 떨어져서만 볼 수 있게… 확대경 써도 碑文 판독 어려워 지린성

"고구려가 조선족(한민족)의 조상인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중국의 나라였네요."
1일 중국 지린(吉林)성 지안(集安)의 '지안 박물관'. 이날 고구려 전문 박물관으로 신축 재개관한 박물관 6개 전시실을 관람한 한 중국인은 이렇게 말했다.
개관 당일 박물관 전시실을 둘러본 결과 '고구려는 중국의 속국' 같은 노골적 표현은 없었다. 그러나 동행한 국내 전문가는 "'동북공정'이 무서운 건 고구려사(史)를 자연스럽게 중국사의 일부로 받아들이게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중국이 지안 박물관을 통해 더 교묘하고 세밀하게 '동북공정'을 펼치고 있다는 분석이다. 지안은 서기 3년부터 427년까지 425년간 고구려 수도였던 곳이다.
"고구려족은 中 소수민족"
지안시 인민정부 청사 앞에는 고구려 상징인 '삼족오(三足烏·태양에 산다는 세 발 까마귀)' 동상이 서 있다. 안내판엔 "태양조(太陽鳥·삼족오)는 중국 고대 전설에 등장한다. 고구려 벽화의 삼족오는 고구려 민족과 중원(中原·중국을 지칭) 민족이 동일하게 태양조를 숭배했다는 의미"라고 적혀 있다. 한 시민은 "2년 전까지는 '고구려족(族)은 중국의 소수민족'이라는 문구가 있었다"며 "한국과 북한의 반대가 심해 이를 삭제한 것"이라고 말했다. 중·일, 한·일 간 역사 갈등이 첨예한 상황에서 중국이 한국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신경 쓴 것으로 관측된다.
그러나 박물관 안에 있는 안내판과 지도에는 고구려가 한(漢)·당(唐)의 영향을 받아 중원에 '융합'됐다는 내용만 가득했다. 한 관람객이 "고구려와 조선(한반도)의 관계는 뭐냐"고 물었다. 전시관 안내원은 "고구려와 한반도는 아무 관계가 없다. 고구려족은 중국의 소수민족"이라고 답했다.
고구려와 발해 연결 고리 제거
고구려 영역도에는 지금의 옌볜(延邊) 일대를 고구려 영토에서 제외하고 해당 지역을 말갈족 영역으로 구분했다. 국내 전문가는 "고구려에서 말갈을 뺀 것은 고구려와 발해가 이어지는 연결 고리를 없애려는 의도"라고 말했다. 발해는 고구려 지배층과 말갈 피지배층으로 이뤄진 국가였다. 고구려에서 말갈이 없어지면 고구려와 발해의 연관성도 그만큼 약해진다는 설명이다.
실제로 지린성 창바이(長白)에 있는 발해 벽돌탑인 '영광탑'의 안내판에는 "당나라 발해 시기에 쌓았다. 모양과 구조가 시안(西安)의 당나라 때 현장탑과 비슷하다"고 써놨다. 그러나 박물관의 고구려 산성(山城) 지도에선 옌볜 지역에 고구려 산성이 두 곳 있는 것으로 표시했다. 옌볜 일대가 고구려 땅이 아니라고 하면서도 고구려성을 그려 넣은 오류를 저지른 셈이다. 고구려 영토의 남쪽 경계는 한강 유역이라고 했지만 지도상 압록강 이남에는 어떤 유적도 표시하지 않았다.
내부 사진촬영도 기록도 금지한 지안박물관 - 중국 지린(吉林)성 지안(集安)시의 인민정부청사 앞에 세워진 지안박물관 입구. 1일 고구려 전문 박물관으로 신축 재개관했으며, 고구려를 중국 역사에 편입하려는 시도가 엿보인다.

 

박물관 측은 내부 사진 촬영을 금지하고 전시물 내용을 기록하는 것까지 엄격하게 통제했다. /지안시 청사 앞에 고구려 상징 '三足烏' 동상 - 중국 지린(吉林)성 지안(集安)시인민정부청사 앞에 1일 고구려를 상징하는‘삼족오(三足烏·세발까마귀)’동상이 서 있다. 중국은 고구려를 중국사에 편입하려고 하고 있다. /발해 벽돌탑인 '영광탑' 안내판엔 "당나라 風格을 갖고 있다" - 탑 안내판에“모양과 구조는 당나라 때의 현장탑과 비슷하며 당나라의 풍격을 갖고 있다”고 적혀 있다. 중국 지린성 창바이(長白)에 있는 발해 시기 벽돌탑인 영광탑(靈光塔).

 

박물관 전시는 일관되게 중원과 고구려의 '결합'을 강조했다. 입구에서부터 "한 무제가 현토군에 고구려현을 설치했다"고 적었다. 관련 지도는 현토군이 고구려로 성장한 것처럼 묘사했다. 그러나 고구려는 현토군을 밀어내면서 성장한 국가라는 게 전공 학자 대부분의 일치된 견해다. 안내판처럼 '고구려족과 중원 각 민족의 융합'을 통해 성장하지 않았다. 수(隋)·당과 대전(大戰)을 벌여 이들을 물리친 사실은 박물관에 어떤 설명도 없었다.

 

박물관은 또 "고구려 왕과 귀족은 당나라 관리 복장을 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국내 전문가는 "고구려는 망할 때까지 독자적 관등 체계를 유지했다"면서 "이곳 박물관에도 소형(小兄)·대형(大兄) 등 고구려의 독특한 관직이 적힌 기와 조각이 전시돼 있다"고 말했다.


현존 최고(最古) 고구려 비석으로 추정되는 '지안 고구려비'는 박물관 1층 로비 가운데 있었다. 8각 유리 상자에 넣어 성인 허리 높이의 전시대에 올려놓았다. 1m 밖에서 관람하게 돼 있어 비문(碑文)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비석 실물을 처음 접한 국내 학자들이 확대경까지 동원해 글자를 판독하려고 했지만 어려움을 겪었다.

지안(集安) 박물관
425년간 고구려 수도였던 중국 지린(吉林)성 지안에 지어진 고구려 박물관. 중국은 2003년 이른바 ‘동북공정’이 진행되던 시기에 박물관 건립을 추진했다. 3년 전 완공됐으나 내부 보완을 거쳐 1일 재개관했다.

동북공정(東北工程)
중국이 고조선·고구려·발해의 역사를 중국사로 편입하기 위해 추진한 동북 지역 연구 프로젝트. 중국 사회과학원 산하 변강사지연구중심(邊疆史地硏究中心)이 2002년부터 5년간 진행했다. 지금은 ‘역사 왜곡’ 영역을 벗어나 일반 중국인의 상식을 바꾸는 단계까지 이르고 있다. 한반도 통일 등 동북아 정세 변화에 대비한 중국의 역사적 명분 쌓기라는 분석도 있다

 

 


중국 光明日報의 ‘고구려 역사 연구의 몇 가지 문제에 대한 試論’

“한민족은 고구려와 기자조선을 도용해 갔다”

 

중국의 역사자료만 ‘일방적’으로 인용해 “고구려는 중국의 일부”라고 주장했다. 전문을 읽어보면 이 시론이 얼마나 억지를 부리는가를 명확히 알 수 있다. 이 시론의 결론이 ‘고구려는 중국의 일부니 정치적으로 이의를 제기하지 말라’라고 돼 있는 것은 이 시론이 정치적 의도를 갖고 작성되었음을 보여주는 ‘명백한’ 방증이다. 일반인이 알기 힘든 용어는 그 뜻을 찾아 괄호 안에 주석을 달았다. “광개토대왕이 웃는다.” 중국 길림성 집안현 통구에 있는 5.34m 높이의 광개토대왕비. 최근 중국은 총력을 다해 고구려를 중국역사에 편입시키려는 일련의 작업에 착수했다.

‘고려’라고도 약칭하는 고구려는 서한(西漢)에서 수(隋)·당(唐) 시대까지 중국 동북(東北)지역에 출현했던 중요하고 영향력 있는 변방 민족 중의 하나였다(중국에서 동북지역은 대개 만주 일대를 일컫는데 길림성과 요녕성, 흑룡강성을 가리켜 ‘동북3성’이라고 한다).

中原 왕조와 종속 관계

고구려의 선조는 주나라와 진나라 시기 줄곧 중국의 동북지역에서 생활했다. 기원전 108년 한나라 무제는 요동과 한반도 북부에 4군을 설치했는데 그 중에서 현도군에 있던 고구려현이 바로 고구려인이 살았던 곳이다.

기원전 37년 부여 사람인 주몽은 현도군 고구려현 관할구역에 정권을 세우고 흘승골성(紇升骨城 : 지금의 요녕성 환인현성 부근. 그러나 한국 역사학계는 광개토대왕비문을 근거로 주몽이 졸본에 도읍을 정했다고 보고 있다)을 수도로 정하였다.

서기 3년(한나라 평제 원시 3년) 고구려는 국내성(지금의 길림성 집안시)으로 수도를 옮겼다가 서기 427년 평양성(지금의 평양시)으로 천도하였다. 전성기 때의 고구려는 길림성 동남부와 요하(遼河 : 중국 동북지방 남부를 가로질러 서해로 흐르는 1400㎞의 강) 동쪽, 그리고 한반도 북부까지 세력을 뻗쳤다. 이로부터 서기 668년 한반도 동남부에 위치한 신라와 연합한 당나라 왕조의 공격에 의해 멸망하기까지 고구려는 705년의 역사를 유지했다.

고구려가 존재한 700여 년의 시간을 살펴보면 고구려는 중국의 중원 왕조가 관할하는 지역에서 주로 활동하였으며 중원 왕조와 종속관계를 유지하였다. 고구려 정권은 중원 왕조의 제약을 받았고 중국 지방정권의 관할하에 있었으므로 고대 중국에 있었던 변방의 민족정권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고구려와 중원 왕조의 관계는 중원 왕조의 제압력이 강해지거나 약해짐에 따라 밀접해지기도 했고 소원해지기도 했을 것이다. 이 글에서는 최근에 이뤄진 고구려 역사연구에 대해 약술한다. 학계연구자들의 지도편달을 바란다.

[1.고구려는 중국 동북지역 역사에 출현했던 소수민족 정권이다]

주(周 : 殷나라 다음에 건국해 秦나라에 멸망당할 때까지 수백년간 이어온 중국 고대 왕조) 나라와 진(秦: 기원전 221~207년)나라 시절 고구려인의 선조는 주로 혼강(渾江: 중국 요녕성을 흐르는 강)과 압록강 유역에서 생활하였다. 이들이 살았던 중심구역은 지금 요녕성의 환인현과 신빈현, 길림성의 집안시와 통화시 일대였다.

우리는 고구려 민족이 중국 동북지역 역사에 등장한 한 민족이었고, 고구려 정권은 중국 동북지역 역사에 등장한 변경민족 정권이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고구려 민족의 기원을 살펴보자. 현재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대다수 중국학자들은 고구려 민족의 기원에 대하여 예맥(濊貊: 중국 漢나라 시절 압록강과 혼강 유역에 살았다는 한민족의 근간이 되는 부족)설과 부여(夫餘: 고조선이 무너진 후 북만주 일대에 웅거한 부족국가)설, 고이(高夷 : 만주에 있던 고대 종족)설, 상인(商人 : 商은 殷나라를 뜻한다. 은나라가 주나라에 패해 동쪽으로 가 고구려의 선조가 되었다는 것이 商人설이다)설, 염제(炎帝)설 등을 제기하고 있다(중국 ‘史記’에는 중국의 黃帝가 염제·치우 등과 싸워 천자가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후 중국에서는 치우를 ‘군신’으로, 염제는 ‘불의 신’ 혹은 ‘태양신’으로 받들었다).

이런 여러 학설에 공통점이 있다면 고구려 민족은 주나라와 진나라 때에 중국의 동북지역에서 활동했다는 점이다.

좌전(左傳: ‘춘추좌씨전’ 혹은 ‘좌씨춘추’의 다른 이름. 춘추 시대 노나라의 좌구명이 편찬했다. 기원전 722~481년의 춘추시대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의 소공(昭公) 9년 조를 보면 주나라 사람들은 내내 “숙신(肅愼: 고조선 시대에 있었던 고대 종족)과 연(燕 : 周나라 昭公 奭의 후예로 전국 시기에 왕으로 칭한 칠웅 중의 하나. 지금의 중국 하북성 지역에 있었다. 고구려 장수왕의 공격에 의해 멸망했다), 그리고 박(?: 은나라 탕왕이 도읍한 곳. 지금의 하남성 귀덕부 상구현)은 우리의 북방 영토였다”고 말하는 부분이 있다.

고구려는 漢나라 안에 있던 지방정권

여기서 우리는 주나라의 무왕이 상(商: 殷나라)을 점령한 후 주나라 사람들이 동북지역을 경영했음을 명확히 알 수 있다. 주나라 때의 세력 범위는 지금의 동북지역보다 훨씬 넓었다.

환인현의 태서구 유적과 요산 유적·봉명 유적, 집안시의 대주선구 유적과 이도외자 유적·동촌 유적, 통화시의 왕만 발발자 유적 등에 대해 오랫동안 고고학적 조사와 발굴이 이뤄졌는데 이 조사에서 이 유적들은 모두 고구려 정권이 출현하기 전의 문화 유물이라는 것이 분명히 밝혀졌다. 이 지역 유물의 지층을 조사해보면 하층은 신석기시대 말기부터 청동기시대의 문화이고, 그 위층은 한대 문화이며, 그보다 더 위층은 고구려 정권이 출현한 후의 문화임이 명확히 드러난다.

두 번째는 고구려 정권 건립 상황에 관한 것인데 중국 학자들과 외국 학자들은 대부분 고구려가 기원전 37년(서한 원제 건조 2년)에 흘승골을 수도로 해 세워졌다는 점에 일치된 견해를 보이고 있다.

요녕성 환인현성 부근(환인현성 서쪽으로 4㎞ 떨어진 혼강 맞은편 쪽)에는 평원성(平原城: 평야에 세워진 성. 산성의 반대 개념)인 ‘하고성자(下古城子)’가 있으며, (환인현성 동북으로 8.5㎞ 떨어진 혼강 맞은편의 오녀산 정상에는) ‘오녀산성(五女山城)’이 있다. 고고학적 조사와 발굴에 의하면 이곳은 한나라 현도군의 관할 범위 안에 있던 고구려의 초기 수도였다고 한다.

고구려 정권이 출현하기 전 중국의 서한(西漢) 왕조는 광대한 중국 동북지역을 상대로 행정을 펼치고 있었다. 한나라 무제 원봉 2년인 기원전 108년 이곳에는 잇따라 현도군·낙랑군·임둔군·진번군의 네 군이 세워졌는데, 네 군(세칭 漢四郡)이 관할한 범위는 동북 지역과 한반도 북부에 이르렀다. 그 후 한사군의 관할 지역에 변화가 있어, 현도군의 행정수도가 고구려현으로 이전하였다.

고구려현 부근에서 건립한 고구려 정권은 처음에는 현도군, 이어서는 요동군에 속하게 되었는데 고구려 정권은 끊임없이 표(表: 신하가 자기 생각을 서술해 황제에게 올리는 글)를 올려 신하를 칭하고 조공을 받쳤다. 그리고 현도군에 이어 요동군을 거치며 한나라 왕조가 하사한 관복 등을 받아갔다. 이 시기 많은 한(漢)나라 사람이 고구려 정권에 흘러들었다.

1975년부터 1976년까지 중국 집안시 국내성 지역에서는 고고학적 조사와 발굴이 있었는데, 이때 고구려의 석축(石築) 안에서 한나라 때 만들어진 흙으로 쌓은 벽(土築城垣)이 발견되었다. 여기서 한나라 시대의 철기와 도기 등 여러 유물이 출토된 바 있다.

705년간의 역사를 이어오며 고구려는 현도·요동·낙랑 등지로 영토를 확장시켰으며 여러 차례 수도를 옮겼다. 그러나 흘승골이든 국내성이든 평양성이든 고구려의 수도는 모두 한사군 지역 안에 있었다. 그러니 고구려는 중국 역사에 출현한 변방의 민족 정권인 것이다.

周대에 기자 봉하고, 漢대에 4군 설치

세 번째, 한나라에서부터 당나라 때까지 중국은 분열해 있었지만 중국의 역대 왕조들은 모두 고구려를 변방의 민족 정권으로 생각했다는 점이다.

상(商: 은나라) 말기에서 한나라 초까지 고구려인의 거주지는 기자조선(箕子朝鮮: 은나라 말기 기자가 조선에 와 단군조선에 이어 세웠다고 하는 나라)의 관할 구역 안에 있었는데, 기자는 주나라 시대 지방 제후 중 하나였다.

한나라 시대에는 위씨조선(衛氏朝鮮: 한국에서는 ‘위만조선’이라고 한다. 한나라 고조는 중국을 통일한 후 노관에게 연나라를 다스리게 했는데, 노관이 반란을 일으켜 나라가 혼란에 빠졌다. 이때 노관의 부관으로 있던 衛滿이 1000여 명을 이끌고 패수를 건너 고조선의 準王을 찾아가 몸을 의탁했다. 그 후 위만은 준왕을 쳐 왕위를 빼앗고 도읍을 왕검성으로 옮겼는데 이를 위만조선이라고 한다. 위만조선은 한나라로부터 지원을 받아 지역 안정을 도모하고 이웃한 진번군과 임둔군 등을 복속시켜 고조선 역사상 가장 융성했던 나라가 되었다)이 기자조선을 대신했는데, 위씨조선은 여전히 한(漢) 왕조의 종속국이었다.

기원전 108년(원봉 3년) 한나라는 위씨조선을 멸망시키고 낙랑 등 4군을 설치해 한반도 중부 이북을 포함한 동북지역을 중국의 중원(中原) 지역과 같은 방식으로 통치하였다(한나라의 무제는 기원전 108년 위만조선을 멸망시킨 후 바로 낙랑·임둔·진번 3군을 설치하였고 그 다음해 현도군을 추가해 4군을 만들었다). 한나라로부터 당나라 때까지 고구려에 대한 중국 각 왕조의 관리 방식은 각기 달랐지만 중국의 통치자들은 고구려의 활동지역을 중국의 전통적인 영토로 생각하였다.

수나라 때 만들어진 ‘배구전(裴矩傳)’이라는 책을 보면 “수나라의 통치자는 ‘고구려의 영토는 원래 고죽국(孤竹國 : 중원에서 멀리 떨어진 땅)이다. 주나라 때 이 땅을 기자에게 봉했다가 한나라 때는 3군으로 나눴다. 진(晉)나라 시절에도 여전히 요동(요하 동쪽으로 동북과 같은 말이다) 지역은 진나라의 관리를 받았다. 그런데 지금은 더 이상 신하로 칭하지 않고 별개의 외지가 되었다. 그래서 선제(先帝)께서는 이를 못마땅히 여겨 고구려를 계속 정복하고 싶어했다’고 말했다”는 대목이 있다.

또 ‘책부원귀(冊府元龜)’ 제왕부(帝王部) 친정이(親征二)에는 “당 태종 또한 ‘요동은 원래 중국의 토지인데 주나라 때부터 위나라 때까지 그다지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 수나라의 왕은 일찍이 네 번이나 군대를 파견해 공격한 적이 있으나 모두 패하고 돌아왔고 고구려인은 많은 중국 평민을 죽였다. 지금 고구려인은 국왕을 살해하고 굉장한 자만에 빠져 있다. 나는 밤새 이 일을 생각하느라 잠을 이루지 못했다. 나는 죽은 중국 사람들의 자녀를 위해 복수할 것이다. 고구려인들을 도와 왕을 죽인 자들을 토벌할 것이다. 지금 비록 중국 대부분의 토지는 평정되었지만 단 하나 이곳만 평정되지 않았다. 우리는 또 한번 남은 병사의 힘으로 그 땅을 소탕하여 평정할 것이다. 후대의 우리 자손 중에는 강한 군대가 나올 것이고 반드시 재능 있는 인재가 나올 것이다. 나는 그들을 설득하여 반드시 요동을 토벌하러 가게 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아직 늙지 않았으니 내가 직접 토벌하러 가고 싶다. 이렇게 하면 우리 후손들에게 그 일을 시키지 않아도 될 것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는 내용이 있다(‘책부원귀’는 서기 1005년 송나라 정종 때의 왕흠약과 양억 등이 왕명을 받들어 편찬한 유서이다).

“원래는 중국 것이다” “비록 중국 대부분의 토지가 평정되었지만 단지 이 한곳만 평정되지 않았다”는 말은 당 태종이 고구려 지역을 전통적인 중국의 영토로 간주하고 있었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고구려와의 통일을 실현하는 것은 곧 “중국의 영토를 평정한다”는 최후의 사명을 완성하는 것이었다. 수나라와 당나라의 왕조가 전력을 기울여 고구려와의 통일을 이룩하려고 한 이유도 바로 이것 때문이었다.

책봉받고 조공 바친 고구려

네 번째, 고구려 또한 중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원하지 않았다.

700여년 동안 고구려는 동북 변방지역에서 독립하려고 하지 않았다. 고구려가 자신에게 스스로 부여한 위치는 중국 중앙왕조의 변방정권이었으며, 고구려는 중국이 3국시대(蜀漢·魏·吳나라로 나뉘어 소설 ‘삼국지’의 배경이 된 시기)와 양진시대(兩晉: 魏나라의 신하로 있던 사마염이 조조의 후손인 조한으로부터 황제의 자리를 빼앗아 265년 지금의 낙양에 晉나라를 세웠다. 그러나 晉나라는 4대 만에 흉노 등 북방민족의 공격을 받아 326년 멸망하였다. 그 이듬해 사마예는 동쪽으로 옮겨가 지금의 남경에 다시 晉나라를 세웠는데, 이 진나라는 419년까지 존속하였다. 사마염이 세운 진은 西晉, 사마예가 건국한 진은 東晉이라고 하고 이를 합하여 ‘兩晉’이라고 한다), 그리고 남북조 시대(東晉 이후 지금의 남경에는 차례로 宋·南齊·梁·陳나라가 건국되었다. 반면 북쪽에서는 北魏-東魏·西魏-北齊·北周가 들어서 대립하게 된다. 이렇게 남북으로 갈린 상태에서 여러 나라가 멸망하고 대립한 때를 남북조 분열시대라고 한다. 남북조 분열시대를 통일한 것이 隋나라다)로 크게 분열돼 있을 때도 스스로 중국의 중앙왕조에 대해 종속관계를 유지하였다. 그뿐 아니라 고구려는 책봉을 받았고 조공을 바쳤으며 질자(質子: 인질)를 보냈다.

‘통전(通典)’ 변방(邊方) 고구려를 보면 고구려의 왕은 동진(東晉)과 송(宋)·제(齊)·양(梁)·후위(後魏)·후주(後周) 시대까지 중국 남북의 두 왕조로부터 작위를 책봉받았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 또한 같은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통전’은 당나라 때 두우가 黃帝부터 당나라 현종까지의 문물제도 전반에 대하여 기술한 책).

‘亡國의 恨’ 품지 않은 고구려인

당나라가 세워진 후 고구려는 당으로부터 책봉을 받았으니 이는 고구려의 왕조가 당의 승인을 분명히 받았다는 증거이고 중국으로부터 자주 독립을 하지 않으려 했다는 뜻이다. 이러한 인식이 있었기 때문에 당나라가 고구려를 통일하자, 많은 고구려인들은 당나라에 대해 ‘망국(亡國)’의 한을 품지 않았던 것이다.

오히려 고구려인들은 당나라에 통합된 후 당나라의 통일 대업을 지키기 위한 전쟁에서 공로를 세워 역사에 이름을 남기기까지 하였다. 신·구 ‘당서(唐書)’에 이름을 남긴 천남생(泉男生)·고선지(高仙芝)·왕모중(王毛仲)·왕사례(王思禮)·이정기(李正己) 등이 그들인데, 신·구 ‘당서’에는 이들의 전기가 기록돼 있다.

다섯 번째로 멸망 후 고구려인의 이동 방향을 살펴보자. 고구려는 당 고종 총장 원년인 서기 668년 멸망했는데 ‘신당서’고려전에는 고구려를 멸망시킨 당나라가 고구려 난민 ‘69만호’를 받아들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 숫자는 당시 고구려의 총 가구수였겠지만, 여기에는 비고구려인 가구도 적잖이 포함돼 있었다. 당시의 고구려족 가구는 15만호 정도였기 때문이다.

학자들은 고구려가 패망한 후 고구려인들은 네 방면으로 이동했다고 보고 있다. 중원 각지로 유입된 고구려인이 있었고, 신라로 간 고구려족이 있었으며, 말갈(발해)에 의탁한 고구려인이 있었고, 돌궐로 거주지를 옮긴 고구려인도 있었다.

중국 학자들의 최근 연구 성과에 의하면 멸망시 고구려인 숫자는 대략 70만명 정도였는데 이 가운데 30만명이 중원 각지로 유입되었다고 한다. 신라에 귀의한 사람은 10만 정도였고, 말갈(발해)에 의탁한 사람은 10만 이상, 돌궐로 옮겨간 고구려인은 1만여 명이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이렇게 하면 대략 50만명 정도가 네 방면으로 이주한 셈이 되는데, 나머지 20만명은 요동 각지로 흩어져 유민(遺民)이 되고, 전쟁 와중에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숫자를 더하면 대략 70만이라는 숫자가 나온다.

신라로 유입된 고구려인은 용흥강(함경남도를 흘러 동한만 쪽 동해로 흘러드는 강) 이남의 한반도로 유입돼 살던 10만여 명이었는데 이들은 신라로 유입돼 반도 민족에 융화되었다.

그러나 나머지 대다수의 고구려인은 한족(漢族)에 융화되었다. 이러한 점으로 볼 때 고구려 민족을 중국 동북지방에 등장했던 변방민족으로 보는 것이 역사적인 사실에 가장 부합된다고 할 수 있다.

[2. 왕씨(王氏) 고려는 결코 고구려의 계승자가 아니다]

서기 918년 한반도에서 ‘고려’라는 이름의 정권이 출현하였다. 그 통치자의 성(姓)이 왕씨였기 때문에 학계에서는 이를 ‘왕씨 고려’라고 부른다. 비록 왕씨 고려는 고구려의 칭호를 계승했지만, 고구려의 승계와는 직접적인 관련이없다.

고구려가 패망하고 고려가 세워지기까지는 큰 시간 차이(250년)가 있을 뿐 아니라 역사 발전과 연원도 크게 다르다. 기원전 37년에 세워진 ‘고씨 고려(고구려)’는 서한(西漢)의 현도군 고구려현 관할하에 있었다. 그후 점차 강성해졌지만 중국 중앙왕조와의 종속관계를 끊지 않았다. 수·당 시기로 접어들어 고구려는 영토 확장정책을 실시해 한반도에 있는 기타 정권(삼한과 신라·백제 등)이 중원의 왕조에 조공하는 통로를 가로막아, 수·당 두 왕조로부터의 토벌을 불러들였다.

서기 668년 당나라는 마침내 ‘고씨 고려’를 통일함으로써, 고씨 고려의 영토는 당나라 안동도호부(최초의 행정중심은 지금의 평양)에 의해 관할되었다. 그리고 몇십 년 후 고씨 고려가 관할하던 구역에 중국 역사에 등장하는 또 하나의 지방정권인 ‘발해’가 들어섰고, 고씨 고려가 관할한 다른 일부분 지역은 한반도 남부에서 일어난 신라 정권에 귀속되었다. 하지만 이를 제외한 부분은 여전히 안동도호부에 의해 관할되었다.

고려는 三韓을 이었다

대부분의 고구려족은 당나라에 의해 내지(內地: 중국)로 옮겨져 한족과 융합되었으며 나머지 고구려인은 주위의 각 민족에 융합되었다. 이로써 고구려 왕족은 후계자가 끊겼으니 고구려는 나라를 세운 지 700여 년 만에 드디어 중국 역사발전의 긴 강 속으로 사라지게 된 것이다.

왕씨 고려가 건국한 것은 고씨 고려가 멸망한 때로부터 250년 후인 서기 918년이었다. 왕씨 고려는 서기 935년 한반도에 있던 신라 정권을 대치하였고 그 이듬해에 후백제를 멸망시켜 반도 중남부의 대부분을 통일하였다.

그러다 서기 1392년에 왕씨 고려의 신하인 이성계(李成桂)가 왕을 폐위하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1393년 이성계가 ‘조선과 화녕(和寧) 중에서 어느 것을 국호로 해야 하는가’라는 주청을 올리자, 명나라 왕은 이성계에게 조선 왕을 하사하였다.

그리하여 왕씨 고려는 국호를 조선으로 바꾸게 되었는데 중국 학계에서는 이를 ‘이씨 조선’, 줄여서 ‘이조(李朝)’라고 부른다. 이것이 바로 명(明)·청(淸) 시기의 조선국이었다.

그 다음으로 살펴볼 것은 왕씨 고려와 고씨 고려는 관할 구역 내의 주민 구성이 다르다는 점이다. 고씨 고려 관할지역 내의 주민은 고구려족이 주력이었다.

고구려족의 연원은 중국 상고시대부터 있었던 민족인 예맥족이 동쪽으로 이동해 부여·고이·옥저·소수맥(小水貊: 압록강의 북쪽에 있는 혼강에 고구려를 세운 종족. 주몽을 따라 나라를 세운 종족을 맥족이라고 하는데 그중에서 大水인 압록강 유역의 맥족을 대수맥, 小水인 혼강 쪽의 맥족을 소수맥이라고 한다)·동예(東濊: 동해안 지역에 거주한 고구려족의 일파) 등이 되었는데 그후 위씨조선의 후예와 한족(漢族)·선비(鮮卑: 고대 남만주 몽골 등지에 살았던 유목 민족)족 등이 들어가 융합하였다.

많은 민족으로 구성됐지만 이들은 장기간 공동생활을 하면서 점차 융화돼 하나가 되었다. 역사서(史書)와 학계에서는 이들을 일반적으로 고구려족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왕씨 고려 관할지역 내의 주민은 신라인 위주였다. 왕씨 고려는 신라와 후백제를 병합하였으므로, 신라인과 백제인이 왕씨 고려의 주요 주민이 되었다.

대부분의 신라인은 한반도 남부지역에 있었던 진한과 변한인에 뿌리를 두고 있다. 고씨 고려 멸망 후 비록 일부 고구려인이 신라로 유입되기는 했으나 이들은 신라의 주력을 이루지는 못했다.

백제인은 대다수가 한반도 남부에 있었던 마한인에 뿌리를 두고 있다. 따라서 왕씨 고려는 한반도 남부에 있었던 ‘삼한인(三韓人)’이 중심이 된 나라라고 할 수 있다.

수많은 역사서들은 왕씨 고려인과 중국의 옛 사람들이, ‘왕씨 고려는 삼한의 후예다’라고 기록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수백년간 계속된 왕씨 고려 왕조의 역사 발전 속에서 구성원들은 점차 하나의 민족으로 융합되어가는데, 역사서와 학계에서는 이들을 ‘고려족’으로 부르고 있다. 왕씨 고려가 이씨 조선으로 이어졌으므로 조선은 민족 명칭이 되어 오늘날까지 사용되기에 이르렀다.

왕건은 낙랑군에 있던 漢族의 후예

마지막으로 왕씨 고려는 고씨 고려의 후예가 아니다. 왕씨 고려의 왕족은 고씨 고려의 후예가 아니었다. ‘고려사’를 쓴 사람은 왕건(王建)의 족속에 관해서 “고려의 선조는 역사에서 상세히 설명돼 있지 않다”라고 적었다. 그러나 중국학자가 고증한 바에 의하면 왕건은 서한(西漢) 시절 낙랑군에 있었던 한인(漢人)의 후예일 가능성이 아주 높다고 한다.

그 근거로 왕씨는 낙랑군의 명문 귀족이었고 가호가 많았던 점을 들 수 있다. 왕건은 임종시에 남긴 가르침인 ‘십훈요(서기 943년 고려 태조 왕건이 자손들에게 귀감으로 남긴 열 가지 유훈. ‘훈요십조’라고도 한다)’에서 자신은 고씨 고려의 후예라고 언급하지 않았다. 오히려 왕건은 자신은 평민 출신이며 ‘삼한 산천의 보호에 의지한다’라고 말했다. 그는 마한·진한·변한을 통일한 것이니 후계자들 또한 삼한을 소유하길 바랐던 것이다.

왕건이 고씨 고려의 후예였다면 그는 통치를 위해서라도 그 사실을 대대적으로 선전하였을 것이다. 이것은 아주 상식적인 이치인데 왕건은 그렇게 하지 않았으니 이는 왕씨 고려가 고씨 고려의 후예가 아니라는 좋은 반증이다.

왕씨 고려는 결코 고구려의 계승자가 아니었다. 한대(漢代) 한반도에서 일어난 마한·진한·변한은 신라와 백제로 발전해갔고, 백제는 당나라에 의해 멸망하였으며, 신라는 왕씨 고려가 대신하게 되었다.

그후 이조가 왕씨 고려를 대신해 최종적으로는 이씨 조선으로 발전하였다. 이러한 정권들의 강역(疆域: 영토) 범위는 한 번도 한반도를 벗어난 적이 없었다.

[3 . 고구려와 왕씨 고려의 역사가 혼돈된 원인]

사람들이 왕씨 고려를 고구려의 계승자로 잘못 보게 된 이유는 중국의 역사기록과 깊은 관계가 있다. 반고(班古: 후한 초기의 역사가. 서기 32~92년)가 쓴 ‘한서(漢書)’는 중국 정사(正史) 중의 하나로 고구려의 사적에 대해 제일 처음 기술했다. 진수(陣壽: 중국 西晉의 역사가. 서기 233~297년)가 편찬한 ‘삼국지’는 처음으로 고구려를 ‘전기(傳記)’에 넣은 역사서다. ‘구당서’와 ‘신당서’에 이르기까지 많은 역사서는 ‘동이전’ 혹은 ‘만이전(蠻夷傳)’ 속에 고구려의 전기를 기술하였다.

이 역사서들은 비록 구체적인 사건을 기록하는 데 있어 약간의 실수를 범하고 있지만, 고구려의 역사 위치를 명확히 정해놓고 있다. 그런데 후대에 이르러 사서의 기록이 혼란스러워지면서 명백한 실수가 나오기 시작했다.

왕씨 고려는 서기 918년에 나라를 세우고 1392년 이씨 조선으로 교체되었는데, 이 시기는 중국의 오대(五代) 중기에서 명나라 초기에 해당한다(五代는 五代十國의 약어로 당나라가 멸망한 907년부터 송나라가 통일한 960년 사이의 약 70년간 중국이 여러 나라로 분열되었던 시기다).

따라서 ‘구오대사(舊五代史)’와 ‘신오대사’ ‘송사(宋史)’ ‘요사(遼史)’ ‘금사(金史)’ ‘원사(元史)’ ‘명사(明史)’ 등의 역사서에는 모두 ‘고려전’이나 ‘조선전’이 등장한 반면 고씨 고려에 대한 기록은 그 이전의 역사서에 비해 약술하게 되었다.

‘舊五代史’로부터 시작된 오류

이러한 역사서의 기록을 종합해보면 ‘구오대사’와 ‘신오대사’는 가장 먼저 고씨 고려를 왕씨 고려전에 기록한 책이었다. 그리고 ‘송사’는 “왕건이 고씨의 자리를 계승하였다(王建承高氏之位)”라는 표현을 최초로 사용한 책이다. ‘구오대사’와 ‘신오대사’ 그리고 ‘송사’에 등장하는 이 기록은 그 후에 나온 여러 역사서의 기록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게 되었다.

‘구오대사’의 고려전은 약 240자로 되어 있는데, 여기에는 “당나라 말년 중국에서는 내란이 많았다. 그래서 고려인은 스스로 군장(君長: 왕이나 우두머리)을 세웠는데 이들의 이전 왕(前王)의 성은 고씨였다”라고 적었다. ‘구오대사’는 고려인이 군장을 세웠는데 전왕은 고씨였다고 묘사한 후 바로 왕씨 고려에 대한 기록을 이어갔으니, 왕씨 고려가 고씨 고려를 잇는 것으로 오해될 수 있는 소지를 만들어준 것이다.

‘신오대사’의 고려전은 약 280자로 돼 있는데 그 첫머리에는 “고려는 본래 부여인의 별종(別種)이다. 그 나라와 군주 등에 관한 기록은 ‘당서(唐書)’에 기재되어 있는데, 이들은 다른 이적(夷狄: 오랑캐)과 달리 성씨가 있었고 관직의 호칭을 대략적이나마 알 수 있었다. 당 나라 말년에 (이들은) 왕씨 고려가 되었다”라고 서술한 후 모두 왕씨 고려에 대한 기록을 남겼다(이러니 왕씨 고려는 고씨 고려를 잇는 것으로 오해될 소지가 있다는 의미임).

‘구오대사’는 북송(北宋) 사람인 설거정(薛居正)이 감수하여 북송 초기인 서기 973~974년에 걸쳐 편찬되었다. 이 시기 중국은 반세기 동안이나 분열 국면(5대10국)이 계속되고 있었으며 통일전쟁도 진행되고 있었다. 이런 이유 때문에 ‘구오대사’ 고려전의 기록은 간략해졌을 뿐만 아니라, 잘못 기재된 곳이 많았다. “당나라 말년 중국에서는 내란이 많았다. 그래서 고려인은 스스로 군장을 세웠는데 전왕의 성은 고씨였다”는 기록이 바로 그런 예에 해당한다.

‘구오대사’ 고려전에 나오는 이 기록을 오류로 단정하는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는 조선에서 나온 한문 역사서를 포함한 어떠한 역사서를 찾아봐도 고씨가 당나라 말년에 고려 정권을 세웠다는 기록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둘째로는 송나라 사람인 사마광(司馬光: 중국 북송 때의 정치가이자 사학자. 서기 1019∼1086년)이 ‘자치통감(資治通鑑)을’ 편찬할 때 위에 언급한 글들을 전혀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점이다.

사마광이 이러한 태도를 취했다는 것은 이 기록들이 잘못된 것임을 명백히 보여주는 것이다. ‘구오대사’를 감수한 설거정은 고씨 고려와 왕씨 고려 사이의 관계를 분명히 밝히지 못했는데 이러한 오류는 ‘신오대사’의 저자인 구양수(歐陽脩: 송나라의 정치가이자 문인. 서기 1007∼1072)에 의해 해결되었다.

구양수는 ‘신오대사’를 편찬할 때 많은 소설(小說)과 필기자료를 참고하여 사람과 사건에 대한 묘사를 생동감 있게 집어넣었다. ‘구오대사’ 고려전은 고씨 고려에 관해 간략히 기술하였으며 왕씨 고려의 건국 근원을 밝히고 있다. ‘구오대사’ 고려전에서 ‘당 나라 말년에 중국에서는 내란이 많았다. 그래서 고려인은 스스로 군장을 세웠다”는 단락이 ‘신오대사’ 고려전에서는 “조금 후에 스스로 나라를 세웠다”로 간소화되었다.

그후(‘신오대사’가 나온 이후) 편찬된 ‘신당서’ 고려전과 ‘구당서’ 고려전에는 이러한 기록이 없어지고 오히려 ‘고씨 왕족이 사라졌다’는 말이 들어갔는데, 이는 고려 왕족의 후계가 끊어졌음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宋史’가 잘못 기록

원나라 사람 탈탈(脫脫) 등이 편찬한 ‘송사’는 고려전을 따로 한 권의 책으로 기록해놓고 있다. 여기에는 “고려는 본래 고구려이고 땅은 구주(九州: 중국 전토. 夏의 시조인 禹가 중국을 아홉 개 주로 나누었다는 데서 유래)와 달라 기주(冀州: 중국의 동북지방)의 땅에 속한다. 주나라 때는 기자(箕子)의 국토였고, 한나라 때는 현도군이었다. 고구려인은 요동에서 생활하였는데 대개 부여인의 한 별종이었으며 평양성을 수도로 삼았다. 한나라 이래로 늘 중국에 공물을 바쳤다. 그러나 자주 변경에서 난을 일으켜 수 양제는 두 번 군사를 일으켰고 당 태종도 직접 토벌하러 갔으나 모두 실패하였다. 당 고종은 이적에게 고구려를 정복하도록 명령하니 이적이 드디어 성을 함락시키고 그 땅을 군현(郡縣)으로 나누었다. 당나라 말년 중국에 내란이 많아지자 고려인은 스스로 군장(君長)을 세웠다. 후당(後唐) 동광(同光) 천성(天成) 때 고려 국왕 고씨는 자주 후당 왕에게 공물을 바쳤다. 후당 장흥왕 때 권지국사(權知國事: 아직 왕호를 인정받지 못하는 동안 우선 임시로 국사를 맡아 다스린다는 뜻의 칭호) 왕건이 고려의 왕위를 계승하였고 사신을 중국으로 파견하여 조공을 바쳤다…”는 기록이 있다.

이 내용 다음에는 왕씨 고려가 송 왕조와 교류한 것에 대한 사실이 기록돼 있다.

이러한 내용으로 볼 때 ‘송사’ 고려전은 앞부분에서 ‘신·구오대사’의 기술을 종합하고 이러한 기초 위에 두 역사서의 작자가 명확히 밝히지 않았던 왕씨 고려와 고씨 고려 간의 관계를 “왕건이 고씨 고려왕의 자리를 계승하였다”고 함으로써, 고씨 고려와 왕씨 고려가 계승 관계에 있는 것처럼 기술했다.

‘요사’ ‘금사’도 원나라 사람 탈탈 등이 편찬한 것이기 때문에 이와 유사한 잘못이 발견된다.

그후에 나온 역사서들은 이렇게 잘못된 기술을 답습하였다. ‘명사(明史)’는 이전에 나온 잘못된 역사서보다 한 발 더 나갔다. ‘명사’는 명 왕조가 이성계를 조선의 국왕으로 책봉한 것에 대해 합리적인 해석을 하려다 보니 앞의 몇몇 역사서가 저지른 오류를 답습했을 뿐만 아니라, 이씨 조선 정권의 연혁에 대해서도 아주 잘못된 계통을 세워주었다(‘명사’는 청나라 때 장정옥 등이 칙령을 받아 1679년부터 1735년에 걸쳐 기전체로 편찬한 336권의 역사서).

기자조선~고구려 넘겨준 ‘明史’

즉 ‘명사’는 “기자조선-위씨조선(위만조선)-한사군-고구려-동사복국(東徙復國: 패망한 고구려의 후예들이 동쪽으로 옮겨가 세웠다는 나라. 대체로 발해로 이해되고 있다)-왕씨 고려-이성계가 국호를 바꾸기 전의 고려-이씨 조선”으로의 계통을 세워줌으로써, 중국 역사에 속하는 기자조선과 위씨조선·한사군·고구려를 모두 조선의 역사 속으로 들어가게 하였다.

이렇게 중국 역사서에서 기술에 오류가 발생한 이유는 다방면으로 생각해 볼 수 있는데, 전란으로 문헌이 유실된 데다 왕씨 고려에 대한 오도(誤導)가 가장 중요한 원인으로 볼 수 있겠다. ‘속자치통감장편(續資治通鑑長編)’의 권 323, 송 원풍 5년(서기 1082) 2월 기사(己巳)일에는 이런 내용이 실려 있다.

사관수찬인 증공은 “내가 사서를 고찰해 보니 주몽은 흘승골을 수도로 한 후 국호를 고구려로 정하였다. 고구려의 왕은 고씨를 성으로 삼았다. 당나라 고종 때 고구려 왕인 고장(高藏: 고구려의 마지막 왕으로 보장왕으로 불림. 재위 기간은 642∼668년)은 국가를 잃고 서쪽으로 천도했다. 당나라 성력(서기 698∼699년) 시기에 고장(보장왕)의 아들인 고덕무(高德武)가 스스로 국가를 세웠다(고덕무는 699년 당나라가 만든 안동도호부의 안동도독에 임명되었는데, 그가 小고구려를 세운 시조라는 주장도 있다). 고구려는 원화(元和) 말년까지 악사를 중국에 보내왔으나 그 이후로는 그러한 기록이 중국 역사서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 오대 동광(同光)·천성(天成) 시절 고씨 성을 가진 고려 왕이 와서 다시 조공을 하였으나 그 이름은 알지 못한다. 장흥 3년 권지국사(權知國事)인 왕건이 사신을 파견하여 조공을 하였고 이로 인해 왕건을 왕으로 삼았다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왕위를 왕건의 아들인 왕무(王武: 혜종)를 거쳐 왕무의 아들 왕소(王昭: 광종), 왕소의 아들 왕유(王由: 경종), 왕유의 동생 왕치(王治: 성종), 왕치의 동생 왕송(王誦: 목종), 왕송의 동생 왕순(王詢: 현종) 등으로 이어갔다. (이렇게 왕씨들이 왕위를 이어갔기 때문에) 고구려는 주몽에서 고장까지의 21대에 걸쳐 700년간 고씨 성을 이어간 후 멸망한 나라였음을 고증할 수 있다. 고구려는 국가를 잃은 후 또 하나의 국가(小고구려 등을 말하는 듯)를 세웠다. 하지만 왕의 이름과 순서, 흥망의 본말(本末)과 왕건이 나라를 세웠을 때의 일들은 알 방법이 없다”고 말했다.

그 후 왕씨 고려는 송 왕조에게 왕씨 고려와 고씨 고려를 연결해달라는 하나의 ‘고려세차(高麗世次: 고려 왕의 차례)’를 바친다. 여기서 송나라 사람들은 왕씨 고려와 고씨 고려에 대한 인식이 모호해졌음을 알 수 있게 된다. 왕씨 고려가 바친 고려세차는 한 걸음 나아가 사실을 오도하는 작용을 했다.

‘고려’와 ‘조선’이라는 명칭을 도용

중국 사서들이 명백한 오류를 범함으로써 중국의 고대 변방민족이 사용하던 ‘고려’라는 명칭을 삼한(三韓) 신라의 계승자인 왕씨 정권이 도용하게 되었고, 한 발 더 나아가 왕씨 정권의 계승자인 이조(李朝)는 기자조선이 쓰던 ‘조선(朝鮮)’이라는 이름을 또 도용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현대인들은 중국 고대 동북지역에 있었던 변방정권의 연혁을 이해하는 데 있어 많은 혼란과 잘못된 견해를 갖게 되었다.

연구를 진행하는 데 있어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은 자료이다. 양보륭(楊保隆)은 1987년 제1기 ‘민족연구(民族硏究)’에 게재한 ‘고구려전을 싣고 있는 여러 역사서에 대한 몇 가지 문제 판별 방법(원제 各史高句麗傳的幾個問題辨析)’이라는 제목의 논문에서 매우 유익한 연구를 시도했다. 그러나 앞으로 해나가야 할 연구과제는 많기만 하다.

고구려사에 대한 연구를 정상적인 학술연구 범주에 넣어야 한다는 것이 우리의 일관된 주장이다. 우리는 고구려사 연구에서 발견되는 역사 문제를 ‘현실화하는 것’과, 학술문제를 ‘정치화하려는’ 경향과 작태에 대해 반대한다(고구려를 중국 역사로 분류하려는 중국측의 고구려사 연구에 한국측이 반대한다는 뜻인 듯). 고구려사는 중국 역사는 물론이고 한반도 역사를 연구하는 데 있어 계속해서 깊은 연구를 요구하는 과제이다.

심도 있는 연구를 하는 것은 과학적인 연구결과를 학계에 제공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고구려사를 연구하고 이를 심화하는 것은 학자의 책임이다. 연구한 결과에 대한 차이로 인해 일시적으로는 통일된 결론을 도출할 수 없을지라도, 학술 규범에 부합하는 규칙으로 학술 성과를 교류하고, 상호 존중하는 가운데 학술상의 논쟁을 벌여 서로 다른 의견을 개진할 수 있어야 한다. 이렇게 할 수만 있다면 여러 나라의 학자가 고구려 역사에 대한 연구에 공동의 노력을 기울일 수 있게 될 것이고, 그에 따라 큰 진전이 있으리라 생각한다.

 

 

 

 

 

Posted by 원주유
고구려 역사와 문화2013. 9. 14. 17:26

 

 

아차산 고구려 마을,고구려 대장간이 고구려의 핵심적인 곳이였다.

우리 나라에는 고구려 유적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고구려가 북한과 만주 벌판을 기반으로 했던 탓에 백제와 신라에 비해서 고구려 유적이 적고,

고구려의 흔적을 만나기도 쉽지 않지요.

그런데 우리나라에 거의 유일하게 있는 고구려 유적이 있으니 바로 아차산입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광개토대왕이 중국 대륙에 생겨나는 나라들을 상대로 북진을 했던 것과 달리

광개토대왕의 아들인 장수왕은 한반도 내에 있는 나라들을 정복하고자 하는 남진 정책을 펼쳤습니다.

장수왕은 고구려의 수도를 국내성에서 평양으로 천도했는데,

어떤 시각에서는 이를 중국과의 대결에서 고구려가 밀려 평양 천도를 했다는 시각도 있지만

한편에서는 광개토대왕 때 북쪽의 넓은 영토를 차지했고, 장수왕은 남진 정책을 폈기에,

남진에 유리한 평양으로 천도를 했다는 의견도 있더라구요.

아무래도 남진 정책에 물적 인적 자원이 풍부하고, 연락 체계가 원활히 진행 될 수 있는 수도가 가까이있다는 것은

남진 정책에 이어서 유리한 점일 테지요.

아이와 함께 둘러 본 고구려 대장간 마을은 고구려 유적이 아니라

고구려의 대장간 마을을 재현한 곳이며, 드라마 촬영장으로도 쓰였던 곳이었지만,

실제로 고구려의 유물과 보루 등이 발굴되고 있는 아차산에, 고구려의 벽화를 근거로 하여 재현한 마을이이었습니다.

 

비록 재현한 마을이지만, 이 기회에 고구려에 대해서 좀 더 알 수 있는 기회로 만든다면 더 좋겠지요?

그런 의미에서 두 권의 책을 소개합니다.

왼쪽의 웅진 주니어에서 출판 된 어린이 박물관 고구려는 유물 중심으로 고구려에 대해서 소개하고 있습니다.

여러 유물을 통해서 고구려 사람들의 생활 모습을 살펴 볼 수있으며.

유치원에서 초등 저학년의 아이들이 보기에도 참 좋은 책 같습니다.

오른쪽의 주니어 김영사에서 출판한 고구려사 이야기는 역사적 사실을 중심으로 고구려에 접근한 책입니다.

동명성왕에서 출발해 왕을 중심으로 하는 역사적 사실을 살펴 볼수 있는데,

초등 고학년 아이들까지 쉽게 읽을수 있을 것 같아요.

우리나라의삼국 시대의 유물을 전시하는 곳에서는 고구려 유물이 복제품의 형태로라도 전시 되어있습니다.

민혁이와 저는 지난 겨울 국립 중앙 박물관 꼼꼼 나들이란 주제로

국립 중앙 박물관의 유물을 세세히 둘러 본 적이 있었습니다.

이곳 대장간 마을에 고구려의 유물이 조금 전시 되어있기는 한데, 상당히 빈약합니다.

대장간 마을을 둘러보면서 고구려 유물이 함께 전시되어있는 박물관 나들이를 하셔도 참 좋을 것 같네요.

 

고구려가 남진 정책을 진행하면서 당시 한강의 주인이던 백제와 대치했던 곳이 바로 아차산이었습니다.

한강을 건너 아차산의 맞은편이 바로 백제가 한강 유역을 고구려에게 내어 주기 이전에 끝까지 저항했던

한성 백제의 성... 풍납토성과 몽촌 토성이 있던 곳입니다.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은 비교적 평평한 지형에 위치한 성으로,

아차산에 주둔했던 고구려 병사들은 높은지형을 이용해 백제의 도읍을 한눈에 내려다 보며 정세를 살폈다고도 해요.

큰 세력을 떨치던 고구려가 코 앞에서 먹잇감을 노리 듯 백제를 들여다 보았을테니,

백제는 또 얼마나 두려웠을지 짐작됩니다.

 

이곳 아차산과 마주한 곳에 백제의 수도 위례성이 있었으니,

고구려와 대치했던 백제에 대해서도 아차산을 둘러보며함께 살피면 좋지 않을까요?

위의 사진은 지난 해 여름 석촌동 고분군에서 찍은 사진입니다.

몽촌 토성과 풍납 토성을 둘러보는 것도 백제에 대해 알아 보기 위한 좋은 방법이지만

저는 지난해 새롭게 개관한 '한성 백제 박물관'과 가까이 위치한 '석촌동 고분군'을 꼭 둘러보시라고 추천하고 싶습니다.

한강 유역의 발전과정과 더불어, 한성에 수도를 정했던 백제의 문화 및 생활 모습을 잘 소개하고 있는 박물관으로,

국립 중앙 박물관이야 워낙 방대한 자료를 가진 곳이니 제외하고, 개인적으로는 가장 좋았던 박물관이었습니다.

특히 백제는 두 번에 걸쳐 수도를 천도했는데, 우리는 공주와 부여를 백제의 수도로 큰 의미를 두지만,

백제 700여년의 역사 중 이곳 한강 유역을 수도로 삼고 번영 했던 기간이 500년 가까이 된다고 하니

공주나 부여보다 오히려 더백제의 역사에서 중요하게 살펴 보아야 할 부분이 이곳 한성 백제 시기인 듯합 니다.

또한 가까이 위치한 석촌동 고분군 역시 백제의 왕릉으로 추정되는 거대한 기단식 돌무지 무덤으로

그 규모나 독특한 양식, 그리고 고구려와의 연관성을 찾아보시면새로운 사실들을 많이 알게 될거예요.

한성 백제 박물관과 석촌동 고분군은 꼭 함께 둘러보시기를 추천합니다.

( 한성 백제 박물관과 석촌동 고분군,국립중앙 박물관 꼼꼼 나들이 - 백제

 

대장간 마을을 둘러보기 전에

아차산에서 발굴된 유물들이 전시되어있는 '아차산 고구려 유적 전시관이 있습니다.

아차산은 고구려 남진 정책의 전초기지를 했던 곳입니다.

아이에게 전초기지의 의미를 아는지 물었더니, 산을 정복하기 전의 베이스캠프 같은 곳 아니냐고 되묻더라구요. 맞습니다. 백제 정복을 위한 베이스 캠프...

아차산 일대에는 능선을 따라서 20여개의 보루가 있었는데, 이 일대에서 발굴된 유물들이 이곳에 전시되어있다고 합니다.

 

한번도 우리나라의 지도를 거꾸로 본다는 개념이 없었는데,

이곳에서는 고구려 영토의 광활함을 보여주기 위해서인지, 한반도를 거꾸로 그려 두었습니다.

파란 색으로 칠해진 저 넓은 땅... 그걸 다 제대로 지켜 낼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싶네요.

 

유적 전시관에서는 아차산 자락에서 발견된 고구려의 흔적들을 전시하고 있습니다.

이곳이 제대로 자리를 잡은 거주지가 아닌 보루라서 그런지 정교한 토기라기 보다는 다소 조악한 느낌입니다.

 

이곳에서 발견된 활을 재현한 화살 촉들인데, 뻔하디 뻔한 화살 촉만 생각하다가, 다양한 모양의 화살촉을 보니 파괴력을 높이기 위한 무기 연구는 고대에도 있었구나... 싶었습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고구려 대장간 마을을 둘러볼까요? 앞서 말했듯이 이곳은 재현된 마을입니다.

설명에서는 고구려 벽화 속에 나타나는 집 구조를 바탕으로 상상하여 나타낸 곳이라고 해요.

이곳에서 몇 편의 드라마 촬영도 있었다고 하는데,

그래서 그런지 진짜 고구려 대장간 마을의 모습이라기 보다는 좀 더 환상적인 모습으로 꾸며져 있습니다.

 

마을 입구에서부터 '삼족오'가 그려진 깃발이 나부끼네요.

고구려 사람들은 태양 속에 세발 달린 까마귀 삼족오가 살고 있다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그러고 보면 중국의 유물이나 중국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측되는 우리나라의 유물 중

3이라는 숫자가 신성시 되고 있는 것을 종종 볼수있는데, 예를 들면 '세 발 달린 솥' 등이 그렇습니다.

아마도 3이라는 숫자는 완벽한 합일을 이루는 신성한 숫자인가봐요.

아! 그러고보니 서양의 기독교 사상에서도 3이라는 숫자가 신성한 숫자로 여겨지는 것 같네요.

기독교 속 '성 삼위일체'만 봐도 그렇지 않나 싶어요.

동양과 서양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이런 의미들을 볼때면 저는참 신비롭더라구요.

 

대장간 마을로 들어가는 입구에 목책도 늘어서 있습니다.

나무를 뾰족하게 깎아 벽을 둘러 방어용으로 사용하는 목책은 백제의 유적지인 몽촌토성...

지금의 올림픽 공원에서도 그 흔적을 확인 할 수 있다고 합니다.

 

크지는 않으나 올망 졸망한 집들이 기록과 상상력의 옷을 입고 마을을 이루고 있네요.

사진 찍기에도 참 좋은 곳 같았어요. 건물들이 참 예쁘거든요.

 

이 공간은 고구려 대장간 마을의 회의 장소를 염두에 두고 상상하여 만든 공간이라고 합니다.

이곳에서는 거믈촌이라고 부르는데, 드라마 태왕사신기의 촬영 장소로 이용되기도 했다고 하네요.

 

실제 고구려 사람들이 이렇게 멋진 의자에 앉아서 정말로 회의를 했을까요?

그보다는 상상력이 더 많이 가미된 공간 같기는 하네요.

나무의 구불구불함이 고스란히 보이는 의자에 앉아 회의하는 광개토대왕을 상상해 봅니다.

 

흙을 구워 만든 기와는 아무래도 고급 물품에 해당하니 중요한 건물의 지붕에만 덮였던가 봐요.

평범한 집들에는 나무를 쪼개어 지붕을 덮은 나무 기와가 눈에 띄더라구요.

 

뭔가 신비로운 공간을 묘사 해 둔 곳인데, 드라마 속에서도 점술을 행하거나... 신비로운 장면을 찍는 곳이었다 하더군요.

벽면에는 고구려 고분 '강서대묘' 속의 사신도가 그려져 있습니다.

뒷 쪽 벽면에 그려진 그림은 사신도 속 현무의 모습이네요.

현무는 거북의 몸에 뱀의 머리를 가진 상상 속의 동물로, 사방 중 북쪽을 상징합니다.

 

디딜방아는 이미 고구려 시대에 사용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고 해요.

고구려는 고분 벽화를 통해서 당시의 생활 모습을 소상히 살펴 볼 수 있는데, '안악3호분'의 벽화에서는 특히 디딜방아를 사용하는 모습이 잘 표현되어있다고 합니다.

또한 아차산 3보루에서도 6세기 전반 고구려 시대의 디딜방아 유적으로 추정되는 유물들이 발굴되었다고 하네요,

아차산 보루에서 발굴된 디딜방아의 흔적은 이 지역에 주둔했던 병사들의 식량지원 기능을 하였으리라 추측된다고 합니다.

 

왠지 아일랜드 숲 속의 요정 엘프들이 나타날 것 같은 참 멋진 공간이네요.

이곳을 담덕채라고 부르는데, 평범한 고구려의 가옥을 재현해 놓은 곳이라고 합니다.

 

담덕채 안으로 뛰어 들어가 창문을 활짝 열어 고구려 마을의 전경을 둘러 보니, 마을이 한 눈에 다 내려다 보이더라구요.

 

고구려 사람들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온돌을 사용했습니다.

하지만 방 전체를 데우는 형식이 아니라 방 안에서 불을 지펴 일부분만을 데우는 쪽구들 형식이었다고 해요.

고구려 사람들은 쪽구들 위에서 추운 겨울을 보내고 잠을 자며, 여름이나 평상시에는 의자에 앉아서 생활했다고 하네요.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온돌에 불을 지피는 아궁이는 건물의 외부에 있기 마련인데, 고구려 가옥에서는 아궁이를 건물 한 가운데에서 확인 할 수 있어요.

이렇게 아궁이가 집 안에 있으면 어떤 문제점이 생길까...아이에게 물어보니 나무를 태우면서 생기는 연기와 그을음으로 집 안이 무척 답답할 것 같다는 문제점을 이야기 하던데...

그래서 그런지 고구려 가옥의 천장에는 신석기시대 움집에서 보았던 것과 비슷한 환기 시설도 확인 할 수 있었습니다.

 

종이가 없던삼국 시대에는 나무...주로 대나무를 얇게 쪼개어 엮은 후 글을 써서 기록 햇는데, 이를 목간이라고 합니다.

목간이나 '목간'과 비슷한 '목책'은삼국의 유물에서 고루 발견되더라구요.

 

담덕채를 나와 이 마을의 가장 중요한 부분인 대장간으로 가 볼까요?

고구려는 잘 알려져 있다시피 정복국가입니다.

그들의 척박한 땅과 농사 짓기에 적절치 않은 기후 등이 고구려를 정복 국가로 만들었을 거예요.

원래 고대 시대의 전쟁이라는 것이 부족한 국가가, 필요한 자원을 얻기 위해 주변 국가를 침략하는 것에서 시작되었으니,

고구려 역시 자신들의 부족한 것을 채우기 위해 정복 국가가 되었으리라 생각됩니다.

정복 국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뭐니뭐니해도 무기겠죠.

고구려는 일찍부터 청동제 무기를 철제 무기로 대체하여 사용하면서

전쟁을 통해 지역 통합을 이룩하고, 지배권을 강화하여 고대 국가로 발전했습니다.

당시 철을 다루는 기술자들은 최첨단 기술을 가진 사람으로 나라의 발전에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합니다.

일례로 백제의 왕 석탈해에 관한 이야기를 읽어보면

석탈해가 쇠를 다룰 줄 아는 최첨단 기술자이고, 이전까지 청동기에 머물던 신라에 철기를 들여온 인물이며,

그 기술을 바탕으로 왕의 자리에까지 오른 인물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듯 고대 국가에서 철기는 강한 무기로서의 의미가 컸습니다.

또한 철기는 이전의 원시적인 농기구들을 강철이라는 단단한 농기구로 대체 할 수 있었고,철기 농기구를 통해서 땅을 더 깊게 경작할 수 있어 생산량이 급격하게 늘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고대 국가들의 인구도 급속도로 증가했다고 하니...

우리에게 흔하고 큰 의미 없게 느껴지는 철이 이 당시에는 아마도 지금의 핵에 버금가는 파괴력과 생산력을 가진 물질이었으리라 추측됩니다.

그러니 비록 꾸며진 공간이지만, 대장간은 아주 아주 중요한 공간입니다.

 

고구려의 대장간에 대한 구체적 기록은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곳은 아차산 4보루에서 발견된 간이 대장간터와 고구려 벽화의 대장장이신을 근거로하여 제작된 상상의 공간이라고 하네요.

 

재현된 공간이지만 대장장이처럼 풀무질도 해 보고, 철제 무기들과 농기구들도 살펴 볼 수 있네요.

민혁이가 열심히 풀무질을 하고 있는데, 풀무질은 불길을 더 세게하기 위해 공기를 공급하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물의 위치에너지를 이용해 물레방아가 돌면, 축이 그 에너지를 수평 에너지로 바꿔 기계를 돌린다네요. 물건을 쉽게 이동 시킬 수 있는 수평 도르래도 설치되어있는데 과연 고구려 시절에 저런 과학적 도르래가 있었을까... 살짝 의심도 들었어요.

 

나무를 얼기설기 엮어서 만든 망루 위에서는 병사들이 마을 가까이 다가오는 사람들을 일일이 감시했겠죠?

한번 올라가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보기에 엉성해 보이는 만큼 위험한지... 올라가는 것은 금지였습니다.

 

연호개체라는 공간입니다.

쪽구들을 놓아 편히 쉴 수 있는 공간과, 의자를 놓아 접대할 수 있는 공간, 평상이 놓인 공간 등으로 구성해 귀족들의 생활 공간을 상상해 재현하고 있습니다.

 

구석구석 대장간 마을을 둘러보고 고구려 건국 신화를 그림으로 전시 해 놓은 공간이 있어서 야외 극장 쪽으로 발길을 옮겨보니 재활용 타이어로 만든 말에, 조잡스러운 광개토대왕비, 배용준씨의 드라마 태왕사신기 속 모습을 전시하고 있네요.

 

이곳에는 일본 관광객들도 많이 찾아오시는 것 같았는데, 그분들을 위한 전시물 같았습니다.

 

대장간 마을을 둘러보기 전에 유물 전시관에서 고구려는 '산성의 나라'라는 말이 있더라구요.

정작 고구려를 '산성의 나라'라 칭하면서 이에 대한 설명은 다소 부족한 기분이 있었습니다.

고구려는 산성의 나라가 맞습니다.

물론 기마병을 기반으로 고구려의 전투력도 뛰어났을테지만, 고구려가 중국 땅에서 일어선 수나라나 당나라의 대규모 침략에도 굳건히 버틸 수 있었던것은 고구려의 성을 이용한 전술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고구려는 평성과 산성의 '이성 체제'의 나라였습니다.

평상시에는 평지에 위치한 평성에서 생활을 하다가 침략이 있을시에는 모두 산성으로 옮겨갔다고 해요.

위의 사진은 고구려의 산성인 '오녀산성'입니다.

사진에서 보이다시피 산성은 아주 험준한 지형으로 침략이 쉽지 않습니다.

고구려 사람들이 산성으로 옮겨 갈 때에는 평성의 우물을 모두 메우고, 식량을 모두 불태워 적들이 평성을 점령해도 식량을 확보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그러면 고구려 병사들은 매복해 있다가 적의 보급로를 차단하였다고 하죠.

반면 산성에는 적당한 먹을 거리와 우물이 있어서 적의 침임에도 꽤 오래 보틸 수 있었다고 합니다.

보급로도 차단되도, 마을에서도 식량을 구할 수없었던 적들은 결국 물러날 수 밖에 없었다고 하니,

큰 희생 없이도 현명하게 적들을 물리 칠 수 있는 고구려의 지혜가 엿보이네요.

 

시원한 바람 솔솔 부는 가을에 고구려 대장간 마을과

강을 하나 사이에 두고 고구려와 첨예한 대립을 했던 백제 박물관 나들이는 어떨까요?

알면 알 수록 신비한 고대의 이야기들이 쏟아지는 즐거운 나들이가 될 거예요.

 

Posted by 원주유
고구려 역사와 문화2013. 9. 14. 17:18

 

가야 4세기 모용계 선비족들의 가야 이동설의 뒷바침 유물?

김해 대성동 고분군에 대한 올해 제7차 발굴조사 결과

4세기 무렵 왕릉급으로 판단되는 대형 목곽묘 2기가 모습을 드러냈다.

목곽묘 유물 출토 모습. 통형동기와 철기류가 보인다.

대성동고분 9호분 선비족의 유물 정체

신라문무왕비문에 나타난 신라 김씨족의 정체가 흉노족이다.

김수로와 김알지 김씨들은 같은 흉노족 김일제의 후손들이다. 기원전후로 한반도로 내려왔었다. 대성동고분 91호분에 발견된 4세기 삼연 선비족의 동분,동원,마구와 말방울 소유자의 정체성에 주목이 간다. 즉 2차북방민족 선비족의가야 이동의 강력한 증거가 될 수 있다.

당시의중국 대륙은 어떠한정치적 상황인가를 알아야한다.

삼국시대(삼국지로 유명한 시대,조조(선비족),를 이은 서진시대를 마감하고 흉노.선비,갈,저.강족 등의 5호가 세운 16국 시대는 흉노의 맹주 유연이 산서성에 자립하고(304년) 그 아래 하북지방을 통일한 북위(439년)시대의 기간을 가리킨다.

 

 

이러한 16국 시대를 마감한 북위는 선비족의 탁발부였다. 선비족은 흉노왕국이 후한 초 남북으로 분열되어 쇠퇴한 뒤 나타난 북아시아의 패자가된 부족이다.

오환족과 함께 몽고의 시라무렌강 유역에서 일어난 몽골계의 유목민족으로 [사기]나 [한서]에 등장하는 동호족(東胡族)에 속한 민족이다.

이러한 선비족을 통일한 인물이 2세기 전반에 나타났는데 바로 단석괴(檀石槐)라는 영웅이다. 단석괴 사후 다시 분열한 선비족은 이후 모용부, 우문부, 단부, 탁발부 등이두각을 나타내고 있었다.

 

이 가운데 요녕성에 근거한 모용부가 화북에 침입하여 전연, 후연,서연, 남연 등을 세우고, 내몽고 성도인 호화토특호화호특(呼和浩特) 남쪽의 화림격이(和林格爾) 방면에 유목하고 있던 탁발부가 북위(北魏) 왕조를 수립하게 된다. 395년후연(선비족모용수)과 북위(선비족탁발규)는 전쟁에 돌입했다. 후연 모용수는 태자 모용보를 총사령관으로 보내 북위를 멸망시키려 들었다. 그러나 모용보는 오늘날 산시 다퉁 부근의 참합파에서 대패하여 수만명이 죽었고, 수만명이 투항했으며 태자 모용보는 몇천의 군대와 함께 달아났다. 이때 탁발규는 그가 투항한 후연군들을 한명도 남김없이 죽여버렸다.

 

다시 모용수가 직접 군대를 정비해 이듬해인 396년 3월 출정했다. 모용수가 평성으로 가던 도중에 참합파를 지나게 되었는데, 후연 병사들이 죽어 시체가 산을 이룬 참혹한 광경을 목격해야만 했다.

이미 70세의 나이가 있고 중병에 걸린 모용수는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그의 병이 위중해지자 병사들은 평성으로 향하지 못하고 중산으로 말머리를 돌렸다. 도중에 모용수는 그만 세상을 떠나고, 태자 모용보가 제위를 물려받았으니, 그가 혜민제이다.

모용수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탁발규는 두려워 않고 40만 대군을 풀어 전진하여 396년 후연의 수도 하북성의 중산에 입성하였다.

398년, 탁발규는 황제에 즉위하고 수도를 평성으로 정함으로써 북위를 연 개국황제가 되었다. 중국북방의 질서가 완성되었다.

 

후연 선비족의 중국에서의 몰락이 한반도 이동에 무게를 두고 싶다.가야 대성동고분과 부산 복천동고분군, 함안 아라가야 고분에서의 북위계통의 말(馬)찰갑출토, 신라 황남대총에 나타난 삼연의 말갖춤문화에 직접 영향을 끼친 것 같다.동호족(선비족)은 단군시대엔 한민족 연합 부족의 일원이었다.

 

부여족의 한반도와 왜의 이동설에 무게

 대성동고분 91호분의 선비족 계통의 유물들이다. 그들의 정체성에 대한 문제를 다루고 있었다. 탐색자들은 발해만 요양시 '라마동고분군'에서 출토된 묘제와 마구(말안장, 말에 관련된 장식물),및 동복이 선비족 (삼연)보다, 부여족에 가까웠다. 라마동고분군을 발굴한 텐리쿤교수(중국)는 '라마동고분군' 묘지는 부여족들의 무덤이라는 것이다.

 

박물관에서 살펴본 유물도 선비계통보다는 부여계통이 문양까지 대성동91호와 동일함을 화면에서 보여주었다.

라마동 묘제의 경우, 목곽묘로서 직사각형 형태로 관을 사용하지 않은 점도 선비족과는 다르며, 대성동 91호 묘제와 동일한 점이다.

말안장의 경우 사각형은 선비족인데 반해, 대성동고분군,라마동고분군은 타원형태로 동일하였다.

 

형질인류학분석법인 인골분석도 부여족(라마동고분군)과 대성동고분군은 동일인이었다.

선비족은 삼국지 조조와 같은 족속들이며 내몽고가 중심지였고, 이후 세력이 강하여 중원으로 이동하여 북위를 열었다. 삼연도 선비족계통이다.

 

전연이 부여를 공격(346년경), 부여인들이 한반도와 도왜(일본의로 이동)하였을 가능에 무게를 둔 학자도 있다.

대성동고분88호분 무덤에서 발견된 파형동기가 한무덤에서 12점 수습되었다. 일본에서는 여러무덤에서 총 10개에 해당되었다.

파형동기는 일본천황(왕)급 무덤에서 발견되는 귀한 물건이다. 대성동고분88호분은 일본천황급 묘지이다. 심지어 일본 측에선 일본 숭신천황의 무덤이라고 까지 말하는 학자도 있다(에가미-기마민족의 왜열도 이동설 주장)

발굴전에, 가야인의 정체에 대해서 부산항도일보(부산매일신문의 전신)에 연재 중, 파형동기 발견이 반드시 가야지역에서 나올 것을 예견한 적이 있었다.

 

북방기마민족의 이동 유물로 파악한 것이다. 지금은 일본학계와 한국 가야사 전공자들은 파형동기를 일본 교류의 유물로 파악하고 있는 점이 안타깝다. 오끼나와(류큐國)는 고대엔 일본과는 전혀 다른 나라였다.

 

3세기~4세기 왜와는 관련없는 점이다. 오히려 중국 남방과의 관련성이 있는 고대 국가였다. 류큐국은 에도막부 말기에 사스마번(큐슈)에 정복되어 일본으로 병합된다. 고려시대 삼별초들이 류큐국에 이동하여,상류층 역할을 맡았던 고고학적 유물이 발견되었다.

 

필자가 쓴 '신들의 이름/2009년/오늘/" 일본 응신천황은 부여국의 의라왕이었나? 에 기록한 [진서(晋書)]四夷傳.부여국과 [통전(通典)]邊防門.동이부여가 말해주는 다음과 같은 구절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역설하고 있다.

 

부여는 그 나라가 殷盛하고 부유하여, 先世 이래 일찍이 깨뜨려짐을 당한 적이 없었다.......태강(太康)6년(285년)에 이르러, 모용외(慕容외:선비족/晋의 장수)에게 공파(功破)되어, 그 나라의 왕인 의려(依慮)는 자살하고, 자제들은 옥저로 도망하여 생명을 보존하였다...... 다음 해에 부여 후왕 의라(依羅)가 감구솔견인(龕求率見人)을 보내어,옛 나라를 회복하려고 구원을 청하였다.......의라는 나라를 되찾았다........그 뒤에도 매양 모용외가 그 나라 사람들을 잡아다가 중국에 팔았기다. ......의라는 그 후 소식이 없어졌다.

 

이처럼 [진서]는 부여의 마지막 왕인 의려가 자살한 후 그 자제들이 옥저로 도주하여 생명을 보존했다는 비참한 종말을 이야기하고 있고, [통전]에서는 부여후왕 의라가 그 후 소식이 묘연(杳然)하다고 하였다. 부여가 이와 같이 하여 처음 망한 것은 서기285년이었다. 기록에서와 같이, 일단 나라를 회복했던 부여후왕 의라는 다시 모용외의 약탈로 더 이상 지탱하지 못하고 결국 유리한 것 같으며, 한반도를 거쳐 이후 도왜(왜국으로 건너감)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한편 왜국에서는 의라라는 성씨가 여러 갈래로 생겨나게 된다.

 

姓氏錄에서의 의라씨들은 개화천황의 후손이라거나, 혹은 饒速日(니기하야히)의 후손이라거나, 혹은 백제인의 후손이라한 것 등, 여러 갈래로 되어 있다. 위서(魏書)의 부여전에 보면, "부여에서는 소를 잘 길렀고, 명마가 나왔으며, 그 사람들은 거칠고 신체는 장대하고 성질이 강하고 용맹하면서도 근후했음을 알 수 있다. 말하자면, 북방의 대표적인 기마민족이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이러한 부여 후왕 의라와 그 세력은,비록 그 나라가 패망하여 일시 남의 땅에 피신했다 하더라도 식객노릇이나 하고 있지는 않았을 것이나, 그들이 한동안 한반도(김해 대성동고분지역) 땅에 머물렀을 것이라는고고학적인 유물이 대성동91호 발견되었기 때문에 이미 '신들의 이름'에서 편 학설이 강력한 설득력이 생긴 셈이다.

 

어쨌든, 결국 그들이 낙착한 곳은 왜지(倭地)였다고 보며, 부여씨인 백제왕은 차후 그들을 위하여 모든 지원을 제공했던 것임은 일본서기의 응신기가 잘 보여주고 있다.

 

천황재위 14년째(283년)에, 궁월군(弓月君:유츠키노키미)이 백제로부터 120현(縣)의 인민을 거느리고 응신조에 내귀(來歸)하는 [일본서기] 기록이 있다. 이 백제 120현은 한반도 백제가 아닌 요서지방의 백제계, 부여족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부여 후왕 의라의 도왜(渡倭)와 이보다 150년 뒤에 고구려의 광개토 호태왕이 동부여를 공벌(攻伐)한 사건, 그 7년 후에 연왕(燕王) 황(皇光)이 토벌한 부여, 또 문자왕 3년(494년)에 고구려에 [以國來降]한 부여 등의 사건등이 만주지역 부여에서 이뤄졌다.

진서를 검색하다, 선비족 모용황(燕王)이 조선공(朝鮮公:조선왕)에 봉해졌다는 기록(337년)이 머리에 남았다.(진서 권109)조선공(왕)이란 의문은 다음기회에넘긴다.

 

위의 랴오닝성 '라마동' 수백기의 고분군은 유물과 대성동 유물은 동일 족(부여족)의 유물이다. 선비족인 전연에게 침공당한 부여족 지역의 고분군이다. 부여족의 한반도 가야지역을 통한 도왜한 부여족이다. 그 세력들이 큐슈로 부터 정복한 응신천황이었다.(재야사학자 문정창 주장) 큐슈로 부터 기내지방으로 이동하여 세운 기마민족 세력들이었다. 대성동 88호분 무덤의 파형동기는 도왜의 이동 흔적이다.(신들의 이름/2009년/오늘/김인배,김문배 공저)

 

결정적인 증거로는 대성동고분91호에서 발견된 순장흔적, 선비족 청동분(대야),마구와 말방울은 정확하게 말하면, 선비족이 아닌 부여족의 유물임을 KBS 역스팀들이 밝혔다. 91호분에서 발견된 '사슴뿔로 만든 관의 장식'이다.

 

사슴뿔로 만든 관 장식-부여족이란 기록

응신천황의 난파조정(오사카조정)에 도래한 부여국인(夫餘國人)들과 髮長媛(발장원:고구려의 제12대 중천황의 부인)이 바다를 통해서 난파(오사카의 옛 이름)에 들어온다.

 

응신천황이 담로도에 사냥하려 가 있었다. 천황이 서쪽을 바라보니, 수십마리 사슴이 바다에 떠서 오고 있었다. 천황은 좌우에 이르기를, [저게 무슨 사슴인가? 넓은 바다에 떠서 많이도 오는구나]라고 말했다.

 

이것은 응신천황이 난파(나니와/오사카) 조정을 건설한 지 13년 만에 사슴,여우,너구리,담비 등의 가족옷을 입은 부여국의 구신(舊臣)들이 발장원(황후)를 데리고 부여의 후왕(後王:의라왕)인 응신천황을 찾아 난파조정에 이르렀음을 보여준 대목이다.

 

일본서기 기사와 동일한 기사가 [삼국사기]권 제 17(고구려본기 제 5)에 나온다.

이상과 같은 점으로 대성동고분군 91호분에서 발견된 부여동분,말장식,그리고 사슴뿔관장식은 부여족의 한반도 김해 이동과 도왜하여 그 곳에 응신천황이 된 부여집단 세력의 흔적을 잘 말해주고 있다.

 

오늘날 일본의 성곽들은 평지에 있다. 고구려 성은 산록을 이용한 성곽임에 반해, 부여는 평지에 해자를 둘러 목책등으로 수성하였다. 이 근원이 부여족들의 평지성곽 건설풍이다. 일본 하찌만궁(신사)는 대마도를 비롯해서 북큐슈 곳곳에 존재하고 있다. 그리고 기내지방으로 이동되어 있다. 그 주신이 응신천황이다. 부여족이 세운 하찌만궁, 그 세력들이 한반도에도 강력한 기마와 철갑을 앞세워 기존 가야세력과 혼재하며 존재하게 된다. 복천동고분 세력도 부여족이 남겨놓은 흔적들이 고분군에 남아 있을 것이다. 고분군 속에 여러 묘제들이 혼재한 까닭은 강력한 북방 세력들이 밀려와서 남겨놓은 역사적 유물인 셈이다.

 

 

Posted by 원주유
고구려 역사와 문화2013. 9. 14. 17:09

 

고구려 15대 미천왕 = 호양왕, 을불, 을불리, 우불 (재위 300년~331년)

293년 아버지 돌고가 백부인 봉상왕에게 반역으로 몰려 죽임을 당하자 미천왕은 살아남기 위해 신분을 속이고

수실촌이라는 곳으로 가서 머슴살이를 했었다.

당시의 부호였던 주인 음모는 미천왕이 왕족인 것도 모르고 머슴들처럼 심하게 노동을 시켰다.

예를 들어 낮에는 나무를 베어오게 하고 밤에는 연못의 개구리 때문에 잠을 잘 수 없다 하여 개구리 소리가 들리지 않도록

밤새도록 돌과 기와 조각을 던지게 하여 편히 잠을 잘 수 없었다고 한다.

참다못한 미천왕은 음모의 집을 나와서 동촌으로 갔다.

그곳에서 재모란 사람을 만났는데 그는 소금장수였다.

재모는 미천왕이 착하고 신의가 있어 보였으므로 함께 소금장사를 하자고 하여 압록강에서 소금을 떼어와

여러 마을을 돌아다니며 팔았다.

어느 날 미천왕이 배를 타고 압록강 동쪽의 사수촌이란 마을로 가 어떤 노파의 집에 머물렀다.

노파가 숙식비로 소금을 달라고 하자 미천왕은 노파에게 소금 한말을 지불했다.

노파가 더 달라고 했지만 그는 한 말이 적당한 값이라며 더 주지 않았다.

주인 노파는 이것에 앙심을 품고 자신의 신발을 미천왕의 소금짐 속에 감춰 두었다.

다음날 미천왕이 소금짐을 지고 떠나는 데 노파가 쫓아와 신발을 찾아내고는 압록 태수에게 미천왕을 고발하였다.

압록 태수는 미천왕에게 절도죄를 적용해 태형을 가한 다음 소금을 압수하어 노파에게 주었다.

미천왕은 억울하기 짝이 없었지만 신분이 탄로날까봐 두려워 아무 말도 못하고 관가를 떠났다.

이렇게 고난의 나날을 보내던 미천왕은 얼굴이 여위고 옷이 다 헤져 그 누구도 그가 왕손임을 알아보지 못했다.

봉상왕이 폭정을 거듭하자 당시 국상이었던 창조리는 왕을 폐위시켜야겠다고 생각했다.

폐위시키고 난 다음의 왕을 옹립해야 하는 데 그것이 문제였다.

왜냐하면 봉상왕은 왕권을 도전할 만한 왕족은 모조리 죽였기 때문이다.

창조리는 미천왕이 어딘가에 살아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북부의 조불과 동부의 소우를 비밀리에 보내 미천왕을 찾도록 했다.

국상의 밀명을 받은 두 사람은 각 부락을 은밀히 돌아다니며 미천왕을 수소문했다.

그러던 어느 날 비류강가에서 미천왕을 만났다.

두 사람은 미천왕에게 "지금 국왕께서는 무도하여 국상이 여러 신하들과 몰래 왕을 폐하기로 모의하였습니다.

을불 왕손께서는 행실이 검소하고 성격이 인자하여 백성을 사랑하시므로 선왕의 유업을 이을 만 하옵기에 신 등을 보내어

받들어 모시게 하였습니다." 처음에는 자신의 신분을 부인하던 미천왕은 그 두 사람이 숙부가 보낸 암살자가 아니라

창조리가 보낸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다.

창조리는 미천왕을 만났고 300년 9월 봉상왕이 사냥을 나갈 때 동지를 규합하여 봉상왕을 사로잡아 별실에 감금하고

군사로 하여금 지키게 했다.

그리고 곧 을불을 불러 옥새를 올리고 왕위에 즉위하게 하였다.

이렇게 하여 소금장수 을불은 고구려 제15대 왕이 되었다.

미천왕은 즉위 3년(302년)부터 정복전쟁을 개시했다.

그해 9월 왕은 몸소 3만의군사를 이끌고 만주 지방의 현도군을 공격했다. 이 싸움에서 미천왕은 8,000명의 적을 사로잡았다.

이후로 내정에 치중하고 중국 정세를 살피다가 311년 8월 요동의 관문인 서안평을 공격해 빼앗았다.

서안평은 과거 동천왕이 공격하려다가 관구검의 역공을 받아 오히려 나라가 멸망할 지경에까지 빠지게 했던 중요한 지역이었다.

미천왕은 서안평을 점령함으로써 중국 대륙과 낙랑군, 대방군과의 연결고리를 끊었다.

미천왕은 그 여세를 몰아 313년 낙랑군을 공격하여 2,000여명을 포로로 잡았다. 그리고 다음 해에는 대방군을 공격해

중국 군현을 한반도에서 완전해 내몰았다. 이렇게 하여 고구려는 마침내 압록강에서 서해까지 진출하게 되었다.

이로써 400년동안 한반도를 지배했던 낙랑군과 대방군이라는 중국 식민지는 사라졌다.

미천왕은 그들이 지배했던 대동강 유역과 압록강 하류를 차지한 다음 다시 서북진해서 요동군과 현도군을 공격해 영토를 확장했다.

이 과정에서 당시 요동 지방에 세력을 떨치고 있던 선비족 모용씨의 연나라와 충돌했다.

미천왕은 연나라의 모용씨와 요동 지방을 놓고 일진일퇴를 거듭했다.

319년 진나라의 평주자사 최비의 권유에 따라 선비족의 일파인 단씨, 우문씨와 함께 모용외를 공격했다.

하지만 이 연합공격은 실패했고 모용외는 일단 요동을 수중에 넣어 유리한 고지에 섰다.

미천왕은 국경을 마주한 연나라를 견제하기 위해 그 배후에 있는 후조와 손을 잡았다.

미천왕은 결국 요동에서 연나라를 축출하지 못하고 즉위 32년만에 331년 2월에 갑자기 서거했다.

342년에 고구려로 쳐들어온 전연의 군대가 미천왕릉을 도굴하여 시신을 가져갔으며 고국원왕은 343년에 많은 공물을 바치고

시신을 돌려받았다.

* 큰아버지=봉상왕 * 아버지=고추가 돌고 * 어머니=?

* 왕후=왕후 주씨 * 아들=고사유(16.고국원왕) / 고무

창조리

창조리는 남부 출신으로, 봉상왕 3년인 294년 국상 상루가 죽었을 때 대사자의 직위에 있었다.

이때 상루의 뒤를 이어 국상이 되었고, 작위는 대주부가 되었다.

당시 고구려는 선비족 모용부의 수장 모용외의 침략에 시달리고 있었다.

봉상왕 5년인 296년에는 고국원까지 침입하여 서천왕의 무덤을 파내려고 시도하기까지 했다.

이에 봉상왕은 창조리를 불러 대책을 논의하였다. 이에 창조리는 "북부의 대형(大兄) 고노자가 어질고 용감하다"고 답했다.

이에 왕이 고노자를 동북부 변경의 신성의 태수로 삼자 모용외는 침략을 멈추었다.

모용외로부터 안전해진 다음부터 고구려에는 이상한 일들이 벌어졌다.

봉상왕 7년인 298년 가을에는 우박이 내려 농사를 망쳤으며, 이듬해 가을에는 귀신이 출몰하고 객성이 달을 가렸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봉상왕은 궁궐을 개축하고 자신의 조카 을불을 죽이려 하는 등의 행위로 신하들의 불만을 샀다.

봉상왕 9년인 300년에도 괴이한 일은 계속되었다. 정월부터 지진이 나고, 6개월 동안 비가 내리지 않았다.

8월이 되자 왕은 15세 이상의 남녀를 뽑아 궁실을 수리하였는데, 이로 인해 백성들의 생활이 더욱 더 궁핍해졌다.

이에 창조리는 백성이 도탄에 빠진 상황에서 토목 공사를 진행하는 것은 군왕의 도리에 어긋나는 행위라고 간하였다.

이에 왕은 "임금은 백성을 우러러 보는 자리인데, 궁궐이 화려하지 않으면 무엇으로 위엄을 보이겠는가?"라고 답했다.

그러고는 오히려 자신을 비판하여 백성들의 신망을 얻고자 함이냐고 되물었다.

이에 창조리는 다시금 "임금이 백성을 불쌍히 여기지 않으면 어진 임금이 아니요, 신하가 임금에게 간하지 않으면

충신이 아닙니다."라고 답했다.

이에 왕은 웃으며 "그대는 백성을 위해 죽고자 하는가?"라며 창조리의 말을 무시했다.

왕의 마음을 돌릴 수 없음을 안 창조리는 다른 대소신료들과 폐위를 논의하였다. 논의 끝에 을불을 새 왕으로 세우기로 하고

창조리는 북부의 조불과 동부의 소우를 파견하여 을불을 찾게 하였다.

을불은 처음에 거절하였으나 이들의 설득에 결국 창조리를 찾아 왔다.

창조리는 일단 그를 숨겨 두고 지지파를 모으기 시작하였다.

9월이 되자 봉상왕은 신하들과 함께 사냥을 떠났다.

이때 창조리가 "나와 뜻을 같이 하는 자는 나를 따라 하여라."라고 선언하며 갈대잎을 관에 꽂았다.

그러자 모두들 이를 따랐다.

자신의 지지 세력을 확인한 창조리는 봉상왕을 별실에 가두고 을불을 맞아 옥새를 바치고 왕위에 오르게 하였다.

고구려 16대 고국원왕 = 사유, 쇠, 국강상왕 (재위 331년~371년)

314년 왕태자에 책봉되었고, 331년 음력 2월에 미천왕의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334년에는 평양성을 증축했고, 335년에는 신성 축성, 342년에는 환도성과 국내성을 증축하는 등 변경의 방비를 갖추었다.

또한 전연을 견제하기 위해 336년, 343년에 걸쳐 동진에 사신을 파견하기도 하였다.

336년에는 전연에서 일어난 모용인의 반란에서 실패하고 망명해온 곽충과 동수를 맞아들었으며,

338년에는 후조와 전연의 전쟁 시 후조와 내통하였던 봉추, 송황 등의 망명도 받아들였다.

339년 전연이 쳐들어와 신성에 이르니 고국원왕이 동맹을 청하여 물러갔다.

이때 맺은 동맹 관계에 따라 340년에 전연에 조회하기도 하였다.

342년 겨울, 전연의 모용황은 용성으로 천도한 후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로 쳐들어왔다.

전연군은 평탄한 북쪽 길로 왕우가 이끄는 1만 5000명은 소수의 군대를 보내고 모용황과 한수는 험난한 남쪽 길로 5만 대군을

보내는 기만전술을 펼쳤으며, 이에 속은 고구려군은 북쪽으로 왕제 무가 이끄는 정병 5만을 파견하고 남쪽은 왕이

직접 소수의 군대로 지켰다.

이에 고구려군은 남쪽 길에서 크게 패해 장군 아불화도가가 전사하고 환도성은 함락되었으며 왕은 단신으로 단웅곡으로 피신하였다.

왕을 추격한 전연군은 모후 주씨와 왕비를 포로로 잡았으나 북쪽 길에서 무의 군대가 크게 승리하였기 때문에 전연군은 퇴각하였다.

전연군은 퇴각하는 길에 미천왕릉을 파헤쳐 미천왕의 시신을 가져갔고 5만 명의 백성을 잡아갔다.

343년, 고국원왕은 동생 무를 보내 전연에 신하의 예를 갖추고 미천왕의 시신을 돌려받았으며 평양의 동황성으로 거처를 옮겼다.

345년에는 전연이 모용각을 보내 남소를 함락시켰으며, 349년에는 전연의 망명자였던 송황을 전연으로 송환하였다.

355년에 이르러서 전연에 간청하여 모후 주씨를 돌려받는 데 성공하였으며 전연으로부터 책봉을 받아

‘정동대장군 영주자사 낙랑공 고구려왕’이 되었다.

이후 전연은 전진의 공격을 받아 쇠퇴하였으며, 370년에 전진에 의해 멸망하였다.

이때 고국원왕은 고구려로 도망쳐온 태부 모용평을 체포하여 전진에 송환함으로써 전진과의 우호관계를 수립했다.

고국원왕은 369년에 백제를 공격하였으나 치양에서 백제의 왕자 근구수에게 패하였다.

371년에 다시 백제를 공격한 고국원왕은 패하에서 복병을 만나 패하였다.

이해 겨울 10월에 백제 근초고왕이 평양으로 공격해오니 고국원왕이 이를 막다가 활에 맞아 전사하였고 고국의 들에 장사지냈다.

* 부왕=미천왕 * 모후=왕후 주씨

* 제1왕후=? * 아들=고구부(17대 소수림왕) / 고이련(18대 고국양왕)

고구려 17대 소수림왕 = 구부, 소해주류왕, 해미류왕 (재위 371~384)

355년에 태자가 되었고 371년에 고국원왕의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371년 고국원왕이 백제 군과 평양에서 싸우다가 전사하자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소수림왕이 즉위한 시대에는, 국왕이 전사한 상황에서 국가의 체제 정비의 필요성이 대두되고

넓은 영토와 주민들을 체계적으로 통치할 제도의 정비가 요구되던 시기였으므로, 고구려 사회의 체제 정비를 위한 정책을 취하였다.

372년 전진의 3대 황제 부견으로부터 승려 순도가 와서 불상과 경문을 전함으로써 최초로 고구려에 불교가 전래되었다.

374년에는 아도가 전진에서 건너와 불도를 고구려에 전하였다.

소수림왕은 375년에 초문사, 이불란사를 창건하여 불교의 수용 및 보급 정책을 취하여, 전진과 평화적 관계를 수립하고,

호국사상으로 삼았다.

태학을 설립하여 유교적 정치이념에 충실한 인재를 양성하여 중앙집권적 정치제도에 적합한 관리를 양성하였다.

373년에는 율령을 반포하여 국가통치와 사회질서 유지를 위한 규범들을 갖추었다.

율은 형법법전, 령은 비형벌적 민정법전으로 중국에서 성립된 성문법이다.

이와 같은 소수림왕의 체제 정비 시책들을 기반으로 고구려는 광개토대왕조 제위 시대 전성기를 누렸다.

대외 관계에 있어서는 백제와 충돌이 계속되었는데, 375년에는 백제의 수곡성을 빼앗았으며

377년에는 3만 대군의 백제군 침공을 물리치고 백제의 북변을 역습하였다.

378년에는 극심한 가뭄이 든 상태에서 거란의 침략을 받아 8개의 부락을 빼앗기기도 했다.

384년에 서거하여 소수림에 장사지냈다. 이어 동생 이련이 제위에 올랐다.

* 부왕=고국원왕 * 모후=?

* 동생=이련(18대 고국양왕)

순도

순도는 4세기 인물로 고구려 소수림왕 2년인 372년에 전진의 왕 부견의 사자를 따라 불교를 전했는데,

이것은 한국으로의 불교 전래에 대한 최초의 공식적인 기록이다.

고구려 소수림왕 2년을 전후하여 삼국은 모두 불교를 받아들이게 된다.

순도는 불상과 불경을 가지고 고구려로 왔는데 고구려의 왕과 신하들은 그를 귀인으로 맞이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순도는 고구려의 최초의 사찰인 초문사 혹은 성문사에 머물면서 불교를 포교하였다고 한다.

고구려에는 처음 순도가 들어오고 그 2년 후에 아도가 들어왔는데 이들은 모두 인도 또는 서역 승려일 가능성이 짙다.

그 이유는 순도의 경우 중국천하를 돌아다니면서 전도하다가 고구려로 온 것으로 표현하고 있고

아도는 일반적으로 인도 승려로 추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설에 따르면 순도는 동진에서 왔다고도 한다.

아도

아도는 아두라고도 한다. 아도에 대해서는 세 가지 다른 기록이 있다.

첫 번째는 순도가 고구려에 불교를 전한 때인 고구려 소수림왕 2년(372년)의 2년 후인 소수림왕 4년에 고구려에 입국하여

불교를 전한 승려로서의 기록이다. 이 아도는 일반적으로 인도 승려로 추정하고 있다.

두 번째는 국적 불명의 승려로, 삼국사기에 따르면 이 승려는 눌지왕(재위 417~458) 때 고구려에서 신라로 건너와 불법을 전했다.

소지 마립간(재위 479~500) 때 시자 3명을 데리고 일선군 모례의 집에 머무르다가 죽었다.

이 두 번째 인물과 첫 번째 인물이 동일인인지 아니면 동명이인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이 두 번째의 아도가 신라에 전한 불교는 이후 법흥왕(재위: 514-540) 때 이차돈이 순교하여 이적을 보임으로써 널리 퍼지게 된다.

세 번째 기록은 삼국유사에 나오는데, 이에 따르면 아도는 고구려의 승려로, 5세에 출가하여 16세 때 위에 가서 아버지

굴마를 찾아뵙고, 19세 때 다시 고구려에 돌아와 어머니 고도령의 명을 받들어 미추왕 2년(263년)에 신라 왕가에 불교를

전파하려다 실패했다.

그 후 3년 동안 일선현 모례의 집에 숨어 있었으나 미추왕의 딸 성국공주의 병을 고쳐준 공으로 그때부터 불교의 전도를 허가받고

흥륜사를 지었다. 미추왕이 죽은 후 사람들의 미움을 사 다시 모례의 집에서 땅굴을 파고 들어앉아 죽었다.

이 인물이 행적이 유사한 묵호자와 동일인물인지는 불명하다.

 

Posted by 원주유
고구려 역사와 문화2013. 9. 14. 16:03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차지했던 고구려 왕조의 계보

고구려는 BC 37년 동명성왕 때부터 AD 667년 제28대 보장왕을 끝으로 멸망할 때까지 약 700여 년간 한반도의 북부와 중국의 동북지방을 기반으로 발전하였다. 비옥한 농토보다는 산악지형이 많았던 탓으로 영토확장에 힘을 쏟았고, 활쏘기와 말타기 등 무예를 숭상하는 전통으로 인해 정복국가 체제로 쉽게 전환할 수 있었다. 그 결과 고구려는 한 군현을 차지하고, 요동지방으로 진출하는 등 활발한 정복 활동을 펼침과 동시에 수나라, 당나라의 침략에 맞서 동북아시아의 중심 세력으로 성장하였다.

 

 

무용총 오른쪽 벽에 그려진 수렵도. 활을 잘 쏘기로 유명한 주몽에 의해 건국된 나라답게 무예를 숭상했던 고구려는 활발한 정복전쟁으로 영토를 넓혔다. 이 그림이 그려진 무용총을 비롯한 12기의 고구려 고분들은 2004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록되었다

 

 

2대 유리왕은 도읍을 졸본에서 국내성으로 옮기고, 주변의 작은 나라들을 통합하여 5부족을 중심으로 한 연맹왕국을 이루었다.

대무신왕 시절에는 호동왕자가 낙랑의 일부 지역을 정복했으며, 미천왕 때에 이르러 낙랑군을 한반도에서 완전히 몰아내고

고조선의 옛 영토를 회복하였다. 제 6대 태조왕 때에는 옥저를 정복하고 만주지역으로 세를 확장하였으며 고국천왕에 이르러

부자상속제로 왕위 계승이 굳어졌다.

 

17대 소수림왕은 국가의 체제를 정비하고, 대내적으로 왕권을 강화하는 데에 힘을 쏟았다. 그는 불교를 받아들여 백성을

통합하였고 태학과 경당을 두어 교육에 힘썼다. 또한 율령을 반포하여 국가의 기본 법 체제를 정비하는 등 통치 질서 확립에도

앞장섰다. 19대 광개토대왕은 고구려의 영토를 가장 넓게 개척한 왕이다. 남으로는 백제와 겨루어 한강 이북까지 진출하였고,

요동지방을 완전히 차지하여 만주와 한반도 북부를 아우르는 거대한 영토를 차지한 것이다. 그 뒤를 이은 장수왕은 국내성에서

 평양성으로 도읍을 옮기고, 적극적으로 남하정책을 추진하면서 백제와 신라를 압박해 고구려 최전성기를 만들었다.

 

이후 고구려는 중국을 지배한 수나라와 당나라의 연속된 침입과 귀족들 사이의 내분으로 인해 나라의 힘이 많이 약해졌다.

668년 나당 연합군의 공격에 평양성이 함락되면서 고구려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된다. 한반도에서 가장 넓은 영토를 차지했던

나라, 중국의 침입에 맞서 한반도의 방파제 역할을 했던 나라, 대부분의 유적지가 북한과 중국에 있어 더욱 안타까운 한반도의

고대국가 고구려. 고구려의 역대 왕조 계보를 통해 그 역사를 가늠해보도록 하자.

 

 

고구려 왕중에 제11대 동천왕이 어떤 인물인지 알려드리겠습니다. 

조조, 손권 등이 활약한 중국의 삼국시대는 소설 [삼국지연의]로 잘 알려져 있다. 그런데 같은 시기 우리의 역사는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있다. 위나라, 오나라와 교류도 하고, 전쟁도 했던 고구려 동천왕(209~248)은 백성들이 사랑한 임금으로 그에게는

조자룡, 관우에 비견할 만한 충신들이 있었다. 과연 그는 누구일까?

 

 

돼지가 맺어준 인연으로 탄생한 임금


고구려 10대 산상왕은 아들이 없어 늘 고민이었다. 하지만 산상왕은 자신을 왕위에 오르게 만든 우씨왕후의 눈치를 보느라

다른 여인을 후궁으로 삼기도 어려웠다. 그러던 어느 날 하늘에 제사 지내기 위해 사용할 돼지가 우리를 탈출해 달아나는 일이

생겼다. 관리가 돼지를 쫓았지만, 잡지 못하고 있을 때 주통촌, 즉 술을 빚는 마을에서 20세쯤 된 곱고 어여쁜 여자가 돼지를

잡아 주었다. 관리가 돌아와 산상왕에게 이 사실을 아뢰었다. 산상왕은 주통촌 여인이 궁금하여 밤에 몰래 그녀의 집을 방문했다.

 

그녀는 이런 날이 오리라는 것을 예견하고 있었다. 그녀의 어머니가 임신했을 때 마을에 점을 치는 사람이 말하기를 반드시

왕후를 낳겠다고 했다. 그녀의 어머니는 딸을 낳자 후녀 즉 왕후가 될 여자라고 이름 지었다. . 그런데 4개월 후 우씨왕후가

산상왕이 후녀와 몰래 만난 것을 알게 되고 말았다. 우씨왕후는 질투에 눈이 멀어 군사들을 보내어 후녀를 죽이려고 하였다.

군사들이 후녀를 죽이려고 포위를 하자, 후녀가 당당히 말했다.

“너희가 지금 나를 죽이려는 것은 대왕의 명령이더냐, 아니면 왕후의 명령이더냐. 지금 내 뱃속에는 아이가 들어 있으니 이는

대왕께서 남기신 것이다. 내 몸을 죽이는 것은 허락하지만, 왕자까지 죽일 셈이냐.”

관리들도 못 잡았던 돼지를 잡을 만큼 씩씩한 그녀의 단호한 말에 군사들은 감히 그녀를 해칠 수가 없었다. 우씨왕후는 매우

화가 났지만, 아이까지 임신한 그녀를 죽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후녀가 임신한 사실을 안 산상왕은 우씨왕후에게 말하여,

그녀를 왕궁으로 불러들였다. 후녀는 마침내 사내아이를 낳았다. 왕은 제사에 쓸 돼지로 인해 후녀와 만나 아이를 얻게

되었으므로, 아이 이름을 제사에 쓸 돼지라는 뜻을 가진 교체(郊彘)라 하고, 교체가 5살이 되자 태자로 삼았다. 산상왕이 죽게 되자, 227년 교체가 왕이 되니 곧 동천왕이다.

 

 

어진 성품을 가진 임금

동천왕은 성격이 너그럽고 인자하여 좀처럼 화를 내는 법이 없었다. 그를 못마땅하게 여겼던 우씨태후(왕의 어머니를 태후

라고 함)가 동천왕이 타던 말의 말갈기를 잘라버리거나, 시녀를 시켜 식사를 할 때 국을 그의 옷에 엎지르게도 하는 등 심술을

부렸지만, 동천왕은 화를 내지 않았다. 그는 성품만 인자했던 것이 아니라, 힘이 세고 용감했으며, 사냥과 활쏘기도 잘했다.

그의 용맹함은 이웃 나라에게도 알려질 정도였다.

 

 

고구려와 오나라의 만남

동천왕이 재위하던 시기는 중원 땅에서 위, 촉, 오의 삼국이 서로 경쟁하고 있었다. 그런데 위나라와 고구려 사이 요동지역에

서기 190년경부터 238년까지 공손씨 세력이 반 독립적인 국가를 이루고 있었다. 위나라와 경쟁하던 오나라에서 공손씨에게

사신을 파견해 서로 협력하자고 제의를 했다. 공손씨가 이를 수락하자, 233년 오나라는 진기한 보물을 보냈다. 그런데 공손씨가

태도를 바꿔 오나라 사신의 목을 베어 국경을 접하고 있던 위나라에게 보냈다. 이때 간신히 살아남은 오나라 사신들이

도망치다가, 고구려에 도착했다.

 

동천왕은 처음 만난 그들을 환영하고, 잘 접대를 해주었다. 게다가 오나라 사신들을 호위할 조의 25명과 담비가죽 1,000장,

갈계피(鶡雞皮) 10벌 선물을 갖추어 고구려 배에 태워 황해를 건너 양자강 유역에 있는 오나라로 돌려보냈다. 동천왕이

오나라에게 우호적이었던 것은 적국인 공손씨를 견제하기 위함이었다.

 

그러자 오나라 손권은 정식으로 사신을 보내 동천왕에게 각종 진귀한 보물과 옷을 바치고자 했다. 그런데 고구려에 마침

위나라 사신이 왔다. 그러자 오나라 사신은 동천왕을 뵈러 가지 않고 압록강 하구에서 머물렀다. 동천왕이 급히 신하들을 보내

오나라 사신을 맞이하게 했다. 그러자 오나라 사신 일행은 동천왕이 보낸 30명을 인질로 잡고 위나라와 사신왕래를 한 것에

대해 따졌다. 동천왕이 미안하다며 말 수백 필을 선물로 보내 달래자, 그들도 인질을 풀고 이어서 진기한 보물을

동천왕에게 바쳤다.

 

동천왕은 오나라에게 화가 났다. 오나라의 경쟁자인 위나라와 사신왕래를 한 것이 오나라에게는 기분이 상하는 일이었겠지만,

고구려가 여러 나라와 사귀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이를 핑계로 고구려에서 보낸 신하들을 인질로 잡고 따진 오나라의 행동은

무례한 것이었다. 236년 오나라는 다시 사신을 보내어 고구려와 친하게 지내고자 했다. 그러자 동천왕은 오나라 사신들의 목을

베어 위나라에 선물로 보내주었다. 동천왕은 단호하게 오나라와 절교를 선언했다. 오나라는 감히 고구려에 항의할 수가 없었다.

동천왕이 오나라를 버리고 위나라와 친하게 지내려고 한 것은 단지 오나라 사신의 무례함 때문만은 아니었다. 동천왕은 바로

이웃한 공손씨를 무너뜨리고, 요동 땅을 차지하려는 야심이 있었다. 단순한 분노 때문이 아니라, 오나라보다 위나라와

협력하는 것이 더욱 이익을 클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에 이 같은 결정을 한 것이다.

 

 

위나라와 전쟁


238년 위나라는 4만 군대를 동원해 공손씨를 공격했다. 동천왕은 1천 군대를 보내 위나라를 도와 공손씨의 배후를 공격했다.

고구려군의 숫자는 적었지만, 공손씨를 멸망시키는데 공을 세웠다. 그런데 4년 후, 동천왕은 장수를 보내 위나라를 공격했다.

그것도 요충지인 서안평을 공격했다. 고구려가 공격한 원인은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위나라가 공손씨를 멸망시킨 후

고구려에게 어떤 보상을 해주기로 약속해놓고 그 약속을 지키지 않은 탓일 것이다. 동천왕은 당시 위나라가 , 오와 치열하게

대립하고 있었으므로, 반격해오지 못할 것이라고 판단하고 공격을 한 것이다.

 

하지만 위나라는 강국이었다. 촉, 오와의 경쟁에서 이미 압도적인 우세를 보이고 있던 만큼, 고구려를 공격할 병력을 모을 수

있었다. 게다가 선비족, 부여국의 도움도 받으면서 고구려로 쳐들어왔다. 244년 위나라 관구검이 이끈 대군을 상대로 동천왕은

직접 2만 군사를 이끌고 나가 맞섰다. 첫 전투에서 적 3천여 명의 목을 베는 승리를 거두고, 양맥 계곡까지 추격해 또 승리를

거두어 적 3천여 명을 목 베거나 포로로 잡았다.

 

 

교만이 낳은 불행


거듭 승리를 거두자, 동천왕은 너무도 자신만만해졌다.

“위나라가 큰 나라라고 자랑하더니, 그 많은 군대를 이끌고도 우리의 적은 군사보다 못하구나. 관구검이 명장이라고 하더니,

오늘 그의 목숨이 내 손바닥 안에 있구나!”

하지만 자만심으로 적을 얕보게 되면 그것은 늘 위험에 처하게 된다. 동천왕이 5천 철갑기병대를 직접 이끌고 적을 공격했다.

그런데 위나라가 갑자기 방진(方陣, 보병이 기병을 상대하는 진영)을 펼치며 반격해 오자 고구려군은 크게 패하여 1만 8천

명이나 죽임을 당했다. 동천왕은 1천 기병과 함께 도망을 쳐야 했다. 교만이 낳은 실수치고는 대가가 혹독했다.

 

위나라군은 고구려 수도인 환도성으로 쳐들어와 마음껏 약탈했다. 위나라 장수 관구검은 부하인 왕기를 시켜 동천왕을 추격했다.

동천왕이 죽령이란 곳에 이르렀을 때는 고구려 군사들이 다 흩어진 상태였다. 동천왕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때 신하인

밀우가 자신이 결사대로 적을 막을 터이니 피신하라고 청했다. 밀우가 결사대를 모집해 적군에게 달려가 힘써 싸우는 동안,

동천왕은 샛길로 도망쳤다. 위험에서 빠져나오자 동천왕은 밀우 생각이 났다. 왕은 신하들에게 밀우를 구해올 자가 있느냐고

물었다. 이때 유옥구란 자가 나서 전쟁터로 달려가 적을 물리치며 너무나 지쳐 땅에 쓰러진 밀우를 발견했다. 유옥구는 밀우를

업고 돌아왔다. 동천왕은 밀우를 자신의 무릎 위에 뉘었다. 얼마 후 밀우가 깨어났다. 옆에 있던 고구려 군사들은 왕이 신하를

아끼는 모습을 보고 힘을 냈다.

 

동천왕은 적군의 추격에서 벗어나고자 남옥저 땅까지 도망을 갔다. 하지만 적군은 여전히 동천왕을 추적했다. 동천왕은

이제 정말 앞이 깜깜했다. 이때 유유란 자가 나섰다. 유유는 음식을 가지고 위나라 진영에 가서, 고구려왕이 항복하려 한다고

알렸다. 위나라 장군은 자신이 고구려왕을 사로잡는 큰 공을 세우게 되었다고 흥분하는 바람에 아무런 의심 없이 유유가 준

음식을 받아먹으려고 했다. 이때 유유가 식기 속에 감추어 있던 칼을 빼어 위나라 장군의 마음을 찌르고 그와 함께 죽었다.

부대를 이끄는 장군이 죽자 위나라 군대는 크게 혼란에 빠졌다. 이를 놓치지 않고 동천왕은 그간 모은 군사로 급히 공격하니

위나라 군대는 크게 패하여 도망치고 말았다. 동천왕이 싸움에 이겼다는 소식이 들리자, 각지에서 고구려 사람들이 힘을

모았고, 위나라 군대는 서둘러 퇴각을 하게 되었다. 동천왕은 드디어 적군을 몰아내고 나라를 회복하게 되었다.

 

 

백성들이 사랑한 동천왕


동천왕은 위나라 군대를 격퇴시키는데 공을 세운 밀우, 유옥구, 유유에게 큰 상을 내렸다. 동천왕은 위나라와의 싸움에서

곤란을 겪었기에 요동 땅을 차지하지 못했다. 하지만 동천왕은 위나라를 물리친 후 245년에는 지금의 강원도 지역을 지나

신라를 공격했다. 신라에서는 병마사 석우로가 나가서 대항했지만, 고구려의 상대가 되지는 못했다. 2년 후 신라가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와 두 나라는 화친을 맺게 되었다. 동천왕 시기 고구려가 위축된 것만은 아니었다.

 

동천왕이 위기를 극복한 후 248년 죽자, 백성들은 그의 죽음을 크게 슬퍼했다. 그를 가까이 모신 신하들 가운데는 왕과 함께

죽는 순장을 하려는 사람들이 많았다. 동천왕의 아들인 중천왕이 산 사람이 죽는 것을 금지했지만, 장례일이 되자 동천왕의

무덤에는 자살을 하려는 사람이 아주 많았다. 고구려 사람들은 죽은 후의 세계가 현실세계의 연장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순장을 하게 되면 저승에서도 왕 곁에서 보좌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순장이 금지되었지만, 동천왕의 무덤에서

죽겠다는 자들을 모두 말릴 수가 없었다. 비록 한때 교만하여 나라의 위기를 초래하기도 했지만, 동천왕은 신하들과 백성들의

사랑을 받은 좋은 임금이었다.

 

 

Posted by 원주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