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역사와 문화2013. 9. 14. 18:30
 

 

수나라와의 전쟁을 승리로 이끈 고구려의 26대 왕 '영양왕'

고구려 26대 영양왕(?陽王, 재위: 590?618)은 재위 기간 동안 수나라의 침략을 네 차례나 받았지만, 모두 물리친 임금이었다. 하지만 수나라 대군을 물리친 공은 모두 을지문덕(乙支文德, ?~?)에게로 돌아가, 정작 당시 임금이었던 영양왕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영양왕은 어떤 인물이었을까?

 

25년간의 태자 시절

 

영양왕은 고구려 25대 평원왕(平原王, 재위: 559?590)의 장남으로 이름은 원(元), 또는 대원(大元)이다. 훤칠한 외모를 가진 그는 세상을 구하고 백성을 편안히 할 임무가 자신에게 있다고 생각한 왕이었다. 그는 566년 태자로 책봉되어 25년 동안을 태자로 생활하다가, 590년 왕위에 올라 618년까지 29년간 재위하였다. 고구려인의 평균 수명을 고려해 보았을 때, 영양왕은 매우 어린 나이에 태자가 된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그는 평원왕이 즉위한 559년 무렵에 태어났을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평원왕 재위 기간 동안 고구려는 유목 제국인 돌궐(突厥), 북중국의 강자인 북주(北周) 등과 전쟁을 하였고, 안으로는 강력한 귀족 세력의 틈바구니에서 을지문덕, 온달, 연태조 등 신흥 무장 세력이 새롭게 부상하는 정치적 격변기를 치렀다. 또 586년 수도를 평양 장안성으로 옮기는 등 고구려에는 많은 변동이 있었다. 영양왕은 어린 시절부터 당시 고구려가 겪었던 다양한 사건들을 지켜보며 왕이 될 자질을 키워갔다.

 

요동치는 국제 정세와 그의 선택

 

590년 영양왕이 즉위하였을 때, 그에게 주어진 가장 큰 과제는 요동치는 국제 정세에 어떻게 대응하느냐는 문제였다. 5?6세기 동아시아의 국제 정세는 고구려를 포함하여 중원의 남조(南朝, 송, 제, 양, 진)와 북조(北朝, 북위, 동위와 서위, 북주와 북제), 그리고 북방의 유목 제국(유연, 돌궐) 등이 4강 내지는 5강을 이루며 서로를 견제하던 시대였다. 고구려는 이같이 다원화된 국제 질서 속에서 상대적인 평화를 누리며 경제, 문화 등에서 큰 발전을 이룰 수가 있었다. 하지만 589년 양자강 유역의 진나라를 멸망시키고 중원을 통일한 수나라의 등장은 고구려를 긴장시키기에 충분했다. 특히 수나라는 583년 이간정책을 펼쳐 북방의 강자인 돌궐을 동돌궐과 서돌궐로 분열시킨 뒤 585년에는 동돌궐을 굴복시키고, 서돌궐마저 약화시켰다. 수나라의 초대 황제 문제(文帝, 재위: 581?604)는 이른바 ‘개황의 치’라 불리는 뛰어난 정치를 펼쳐 수나라를 초강대국의 지위로 격상시켰다.

수나라가 동아시아의 패권질서를 재편하면서 고구려는 수나라와 대결하느냐, 아니면 굴복하느냐는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되었다. 영양왕은 이때 수나라와의 대결을 선택했다. 고구려는 당시 말갈, 거란 등 주변의 여러 세력들 위에 군림하던 강대국이었다. 신흥 강대국이 등장할 때 기존의 약소국은 신흥 강대국에게 붙어 기존 강대국을 견제해 줄 것을 요구하지만, 기존의 강대국은 신흥 강대국과 대결을 통해 힘의 우위를 확인해야만 한다. 싸우지도 않고 굴복할 경우에는 강대국의 지위를 순식간에 상실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영양왕은 진나라가 멸망한 직후부터 수나라와의 대결을 준비하며, 군사를 훈련시키고 군량미를 비축하는 등 국방을 강화하는 대비책을 세웠다.

 

영양왕, 선제공격에 나서다

 

수나라 문제는 고구려에게 성의와 예절을 다해 복종할 것을 요구하는 조서를 보내왔다. 영양왕은 수나라와 전쟁이 불가피하다고 판단했다. 이에 영양왕은 선제공격에 나서 적의 보급기지를 파괴하는 전략을 택했다. 성과 무기를 보수하는 방어 전략이 아니라, 선제공격으로 적과의 전쟁에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려는 공세 전략이었다. 당시 수나라는 4,600만의 인구를 가진 세계 최고의 대국이었으며, 군사력 또한 최강이었다. 하지만 영양왕은 이를 개의치 않았다.

598년 2월, 그는 궁성을 나와 요동으로 말을 달렸다. 그리고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던 말갈인으로 구성된 1만 기병과 만났다. 그들은 요하를 건너 요서 지역을 기습 공격했다. 수나라의 전진기지와 보급기지들을 파괴하기 위함이었다. 수나라 영주총관 위충이 나와서 막았지만, 영양왕은 기습에 성공한 후 서둘러 퇴각했다.

 

수 문제의 공격을 막아내다

 

영양왕의 선제공격은 수나라의 자존심을 크게 건드렸다. 수 문제는 즉시 자신의 4남 양량과 고경, 왕세적, 주라후 등을 앞세워 고구려를 공격할 것을 명했다. 양량의 군대는 북경을 출발해 요서 지방으로 진군했지만, 군량 수송이 원활하지 못해 군사들은 굶주렸고 역병에 걸려 요하에 이르지 못하였으며, 심지어 장마까지 만나 퇴각하고 말았다. 왕세적의 군대는 영주에서 퇴각했고, 주라후가 이끄는 해군은 폭풍을 만나 병선 대부분이 파괴되어 열의 여덟이나 아홉이 죽었다.

수나라의 패배는 질병과 홍수, 폭풍 등 자연재해가 주된 원인이었던 것처럼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수나라 측의 기록에 원정군 참모인 고경이 최선을 다하지 않았고 지략이 부족한 것을 전쟁 패배의 원인으로 돌렸다는 사실이 있는 것을 보면, 단순히 자연재해 때문에 수나라 원정군이 실패한 것은 아니었다. 영양왕의 선제공격으로 인해 군량 수송에 문제가 생겼고, 기록되지 않은 고구려군의 활약으로 패배한 것이 분명하다. 수 문제는 전쟁에서 패하자, 고구려를 굴복시키겠다는 전략을 완전히 포기한다. 영양왕의 과감한 선택이 고구려에 평화를 가져온 것이다.

 

신집 5권의 편찬

 

서기 600년 태학(太學) 박사 이문진(李文眞, ?~?)은 고구려 초기에 만들어진 역사서 [유기(遺記)] 100권을 다듬어 [신집(新集)] 5권을 완성했다. 고대국가에서 역사서는 개인이 함부로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국가가 자료를 독점하고 있어, 왕의 허락이 있지 않으면 함부로 만들 수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신집 5권 편찬은 이문진이 실무를 담당했지만, 이 책을 만들도록 명령한 영양왕의 업적으로 보는 것이 옳다. 완성된 연대로 볼 때 고-수(고구려-수나라) 전쟁의 승리로 인한 고구려인의 자부심을 드높이기 위해 이 작업이 진행된 것이라고 볼 수 있겠다.

 

신라에게 빼앗긴 영토를 회복하라

 

[삼국사기] 온달 열전에 따르면 온달(溫達, ?~590) 장군은 영양왕이 즉위한 후, 고구려가 지배했었던 한강 유역을 회복하기 위해 출전(出戰)했다가 아차성 아래에서 죽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온달이 신라의 영토를 공격한 것은 대체로 590년대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비록 온달은 실패하였지만, 영양왕은 한강 유역을 회복하겠다는 의지를 버리지 않았다. 603년 영양왕은 장군 고승(高勝)을 보내어 북한산성을 공격했다. 하지만 신라 진평왕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방어에 나섬에 따라 북한산성을 차지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영왕왕은 포기하지 않고 608년 다시금 신라의 북쪽을 공격해 우명산성을 빼앗고 8천 명을 포로로 사로잡는 전과를 올린다. 다급해진 신라는 608년과 611년 두 차례에 걸쳐 수나라에 사신을 보내 신라를 도와줄 것을 요청하기도 했다.

 

왜국과의 관계 개선

 

400년, 신라 내물왕의 요청으로 고구려군이 신라 영토를 공격해온 왜군을 격퇴한 이래로, 고구려와 왜국의 관계는 소원한 상태였다. 그런데 영양왕은 왜국과의 관계를 크게 개선했다. 595년 영양왕은 혜자(慧慈, ? ~ 622) 스님을 왜국에 파견했고, 혜자는 615년까지 20년간 왜국에 머물면서 왜국 쇼토쿠 태자의 스승이 되었다. 영양왕은 605년, 왜국에서 호류사(法隆寺)에 장육불상(丈六佛像)을 만든다고 하자 황금 300량을 보내고, 담징(曇徵, 579~ 631) 등의 승려와 기술자, 화가 등을 파견하기도 했다.

영양왕이 왜국에 대한 원조를 아끼지 않은 것은 한강 유역을 되찾기 위해 왜국으로 하여금 신라를 견제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고구려가 수나라와 대립하는 상황에서 신라가 고구려의 후방을 공격하지 않아야 수나라와의 전쟁에 모든 것을 쏟아 부을 수 있기 때문에, 왜국과 우호적 관계를 유지하는 일은 고구려에게 큰 실익이 될 수 있었다.

신라 또한 이러한 상황에서 591년 남산성 축성, 593년 명활산성 증축, 서형산성 축성 등 왕경 주변에 요새를 건설하기에 나섰다. 고구려와 왜국, 백제의 신라 견제가 심각한 위협으로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602년 왜국은 래목황자를 신라 정벌 장군으로 임명하고, 2만 5천의 군사를 준비시켰다. 602년 8월 백제군은 남원에 집결하여, 신라의 아막성을 공격했다. 왜국도 이에 맞춰 신라를 공격하고자 했으나, 왜국의 총사령관 래목황자가 병이 드는 바람에 출전하지 못했다. 왜국이 참전하지 못함에 따라 고구려군도 출격을 미루고 있었다. 이에 백제군이 홀로 왜군과 싸우다 아막성 전투에서 신라군에게 대패하고 말았다. 비록 고구려-왜-백제의 신라 공격은 성공하지 못했지만 왜를 끌어들임으로써, 고구려로서는 신라를 견제하는 것에 성공하고 있었다.

 

돌궐에 보낸 사신

 

604년 수나라에서는 정변이 일어났다. 고구려와 전쟁을 포기한 수 문제 대신, 그의 욕심 많은 둘째 아들 양광이 아버지 문제와 형인 양용을 죽이고 수 양제(隋煬帝, 재위: 604?618)가 된 것이었다. 수 양제는 토욕혼, 고창국, 돌궐 등을 정복한 후, 고구려마저 굴복시키려고 준비했다. 다시금 전쟁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영양왕은 수 양제의 위협에 대비하고자 사신을 돌궐에 보냈다. 당시 돌궐에는 수 양제가 직접 군사들을 거느리고 동돌궐의 왕 계민가한(啓民可汗, ??609)을 만나러 왔었다. 돌궐에서 고구려 사신을 만난 수양제는 고구려에 선전포고를 했다. 고구려가 돌궐과 연합하는 것은 수나라가 몹시 두려워하는 상황이기 때문이었다.

 

수 양제, 세 번에 걸쳐 고구려를 공격하다

 

영양왕은 왜국, 돌궐 등과의 외교 교섭, 말갈족에 대한 지배권 강화, 신라에 대한 견제 등 수나라와의 전쟁에 대비했다. 612년 수나라는 무려 113만 대군을 동원해 고구려를 공격해왔다. 이 전쟁은 요동성 방어 전투, 영양왕의 이복동생인 건무 장군의 평양성 전투, 그리고 을지문덕 장군의 살수대첩 등으로 인해 고구려군의 완승으로 끝났다. 전쟁 영웅은 을지문덕, 건무 등이지만, 여기에는 영양왕의 역할도 매우 중요했다. 그가 집중한 것은 외교와 내치였다. 을지문덕 장군이 살수대첩을 거두기 위해 청야전술(淸野戰術: 적이 이용할 식량과 물자를 없애 적을 지치게 만드는 전술)을 실시할 수 있었던 것은, 고구려인들이 한마음이 되어 식량을 적에게 주지 않기 위해 모두 들판을 비우고 성에 피신하는 단결력을 보여주었던 덕분이었다.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영양왕의 내치가 성공을 거두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613년 수나라가 30만 대군으로 다시 쳐들어오자, 고구려는 요동성에서 다시금 적을 물리쳤다. 하지만 영양왕은 수나라군을 상대로 승리하는 것만을 목적으로 삼지는 않았다. 614년 수나라가 또 다시 군사를 내어 쳐들어오자 이미 항복해온 수나라 병부시랑 곡사정(斛斯政)을 되돌려 보냄으로써 싸우지 않고 적을 퇴각시켰다. 수나라는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엄청난 국력을 쏟았음에도 별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결국 나라가 흔들려 618년 멸망하고 말았다.

반면 영양왕은 수나라의 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고구려의 국제적 위상을 한껏 드높였다. 하지만 요동 지역이 주요 전쟁터가 된 탓에 고구려의 패해도 컸다. 영양왕은 전쟁에서 잡은 수나라 포로들을 적극 수용해 이들을 고구려에서 정착하게 살도록 하여, 이들과 함께 전후 복구 사업을 전개했다.

 

후손들이 길이 기억한 영양왕

 

1456년 집현전 직제학 양성지(梁誠之, 1415~1482)는 세조에게 전대의 임금과 재상에게 제사를 지낼 것을 상소하였다. 이로 인해 단군을 비롯해 삼국과 고려의 시조 등 12명의 역대 임금과 을지문덕 등 16명의 역대 신하들이 사당에 배향(配享) 되었는데, 여기에는 영양왕도 포함되었다. 그가 수나라 대군을 대파하고 고구려를 지킨 공을 후손들도 인정한 것이었다.

당나라의 역사가 두우(杜佑)가 766년부터 30년에 걸쳐 편찬한 중국의 제도사 [통전(通典)]의 <고구려전에는 “고구려의 땅이 후한 시기(1~2세기)에는 사방 2천리였고, 위나라 시기(3세기)에는 남북이 점점 좁혀져 겨우 1천여 리였으나, 수나라 시기(581~618)에 이르러서는 점점 커져 동서 6천리에 이르렀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기록에 따르면 영양왕이 재위하던 시기에 고구려의 영토가 가장 커졌던 것이다. 즉, 영양왕은 고-수 전쟁을 승리로 이끌며 고구려의 전성기를 이룩한 임금이었다.

 

 

Posted by 원주유
고구려 역사와 문화2013. 9. 14. 18:04

 

 

고구려 수나라 전쟁의 영웅 연개소문에 의해 쓰러지다.

고구려 27대 영류왕(營留王, 재위: 618?642)은 큰 전쟁 없이 25년간 나라를 다스렸지만, 연개소문에 의해 시해당한 임금이다. 그의 죽음 이후 고구려는 큰 전쟁을 치렀기 때문에, 그는 자신을 시해한 연개소문과 관련되어 지금도 역사적 평가가 엇갈리는 인물이다.

 

평원왕의 아들이자 영양왕의 이복동생

영류왕은 고구려 25대 평원왕(平原王, 재위: 559?590)의 아들로, 26대 영양왕의 이복동생이다. 그의 이름은 건무였다. 영양왕(?陽王, 재위: 590?618)이 559년 무렵에 태어난 것에 비해, 그는 평원왕이 뒤늦게 얻은 아들임을 고려했을 때 580년대 초반에 태어난 것으로 볼 수 있겠다. 그의 동생으로 대양왕(大陽王, 28대 보장왕의 아버지)이 있었으므로, 평원왕이 죽기 직전인 590년에 가까운 시기에 태어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는 618년 영양왕이 죽자, 왕위에 올라 642년까지 고구려를 다스리다가 60세 무렵에 죽었다.

수나라와의 전쟁에서 공을 세우다

그가 30세 무렵인 612년, 고구려와 수나라 사이에 전쟁이 발발했다. 이때 그는 고구려 수도를 방어하는 사령관으로, 바다 건너 직접 고구려 평양 부근에 도착한 수나라 좌익위대장군 래호아(來護兒)가 지휘하는 수만의 군대를 막아내는 임무를 맡았다. 래호아의 군대는 요동을 통과해 육로로 평양을 향해 공격하는 수나라 30만 별동대에게 군수품을 보급해주며, 함께 평양을 공격할 임무를 맡고 있었다. 따라서 고구려로서는 이들을 빨리 격파하여, 수나라 별동대와 만나지 못하게 해야 했다. 건무는 유인작전을 펼쳐 이들을 섬멸하고자 했다.

[북사(北史)] <래호아 열전에 따르면, 영양왕의 동생 건무가 날래고 용감(驍勇)하기가 매우 뛰어나(絶倫), 죽을 각오를 한 결사대 100명을 직접 이끌고 래호아의 진영으로 돌진했다고 한다. 그의 형인 영양왕처럼 그도 용감하게 적진을 향해 돌격해 군사들에게 모범을 보였던 것이다. 고건무의 작전은 적에게 일부러 패해 작은 승리를 안겨주어 교만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전쟁에서 공을 세우고자 하는 욕심이 컸던 래호아는 자주 승리를 거두어 고구려의 수도 평양 장안성 앞에 이르자, 자신의 군대만으로 고구려 수도를 함락시킬 야심을 갖게 되었다. 이때 부총관 주법상이 래호아에게 수나라 육군을 기다려야 한다고 말렸지만, 래호아는 직접 4만 대군을 이끌고 장안성으로 진군했다. 장안성은 외성, 내성, 중성, 북성으로 이루어진 도성(都城)이다. 고건무는 외성을 비워놓고 적을 유인했다. 외성 안에 들어온 수나라 군대는 기강을 잃고 마구 약탈에 나섰다. 이때 숨겨두었던 고구려 군대가 나타나 대오가 흩어진 수나라 군대를 섬멸시켰다. 간신히 도망간 수나라 군대는 해안가에 마련한 진지만을 겨우 지킨 채 수나라 육군과 만나 합동작전을 펼칠 능력을 완전히 상실하고 말았다.

고건무의 활약 덕택에 을지문덕은 보급품을 받지 못해 지쳐버린 30만 수나라 별동대를 살수에서 대파할 수 있었다. 이처럼 고건무는 뛰어난 지략과 용감함을 갖춘 612년 고-수 전쟁의 영웅이었다. 군대 내에서 위상이 높아지고 사람들의 지지를 얻음에 따라 그는 왕위 계승자로 부상하게 되었다. 영양왕에게 자손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만약 자손이 있었음에도 그가 왕위에 오르게 된 것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그가 전쟁에서 거둔 공적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다.

영류왕의 초기 대당(對唐) 정책

그가 왕위에 오른 618년은 마침 고구려의 숙적인 수나라가 멸망하고 당나라가 등장한 시기였다. 영류왕은 619년, 621년, 622년에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두 나라의 우호를 다졌다. 특히 622년에는 당나라의 제안을 받아들여 포로 교환을 하기도 했다. 고구려는 수나라와의 전쟁에서 획득한 포로 1만명을 돌려보냈다. 당나라에서 고구려로 돌려보낸 고구려인의 숫자는 확인할 수 없지만, 1만 보다는 적었을 것이다. 물론 고구려에는 여전히 수나라 출신 포로들이 많이 살고 있었다.

624년 영류왕은 당나라에서 보내온 도사(道士)와 도교서(道敎書)를 받아들였다. 또한 당나라의 책봉(冊封)도 표면적으로는 거부하지 않았다. 이때 당 고조(高祖, 재위: 618?626)가 신하들에게 고구려와의 관계는 명분과 실제가 다르다며, 굳이 신하의 예를 강요해 고구려와 갈등을 일으킬 필요가 없지 않느냐는 이야기를 한 것으로 볼 때, 책봉의 실질적인 의미는 거의 없었다고 볼 수 있다. 당나라는 수나라를 거듭 격파한 고구려의 실력을 잘 알고 있었기에, 겉으로는 우호적인 태도를 보였다. 하지만 안으로는 622년 고구려에서 이탈해 당나라에 귀부한 말갈의 추장 돌지계(突地稽)를 고구려와 가까운 연주(燕州) 총관에 임명하는 등, 고구려를 견제하고 있었다.

626년 신라와 백제는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고구려가 자신들이 당나라와 교류하는 것을 막을 뿐 아니라 국경을 자주 침략하니 이를 견제해 달라고 요청한 적이 있었다. 고구려도 당나라가 백제, 신라와 연합하는 것을 막는 등, 당을 견제했던 것이다. 하지만 당나라가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 삼국이 화해하라고 압력을 가하자, 고구려는 외교 갈등을 우려해 당의 요구를 들어주었다.

영류왕의 대외정책과 돌궐(突厥)

이처럼 영류왕이 당나라의 요구를 대체로 들어주고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하고자 했던 것은 그가 당나라와의 전쟁을 두려워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영류왕이 당나라와 화친을 원했던 것은, 유목제국인 동돌궐이 강성해졌기 때문이었다. 607년 고구려는 동돌궐에 사신을 보내기도 했지만, 551년과 580년대 초에 동서로 분리되기 전 강성했던 돌궐과 전쟁을 치른 경험을 갖고 있었다.

동아시아의 강자인 고구려와 수나라의 전쟁을 지켜보며 힘을 축적했던 동돌궐은 수-당 교체기 중원의 여러 군웅(群雄)들로부터 조공을 받을 정도로 국력이 강해져 있었다. 고-수 전쟁의 최대 수혜자가 된 동돌궐은 고구려의 핵심 이익이 걸린 요해(遼海 - 요서 북부 지역)의 거란족을 향해 세력을 확대해왔다. 전쟁 피해를 극복하는 일이 우선이던 고구려로서는 적극 대응하기가 어려웠다. 따라서 고구려로서는 거란족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는 동돌궐이 부담스러운 존재였다. 그러므로 당나라와 갈등을 야기하기보단 우호 정책을 시행한 것이었다.

그런데 630년 당나라가 동돌궐을 멸망시켰다. [삼국사기]는 628년의 사건으로 기록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630년이 옳다. 이때 영류왕이 즉시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승전을 축하한 것은 동돌궐을 견제하고 있던 고구려의 속내가 반영된 것이라고 하겠다.

 

변화하는 고구려-당의 관계

고구려는 당나라의 승전을 축하하면서 겸하여 봉역도(封域圖)를 주었다. 봉역도를 글자 그대로 풀이하자면 ‘제후가 책봉받은 영토에 관한 지도’ 라는 뜻인데, 이는 당나라의 입장이 반영된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봉역도가 만약 실제로 고구려의 지리 정보가 상세한 지도라면, 641년 지도에 관한 일을 담당하는 당의 직방낭중(職方郎中) 진대덕이 고구려 곳곳을 돌아다니며 지리정보를 획득하고자 노력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고구려가 보낸 것은 양국의 국경선을 확정한 국경지도로, 영토 분쟁을 하지 말고 사이좋게 지내자는 뜻을 밝힌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당나라의 생각은 달랐다. 626년 아버지 고조(이연)를 핍박하고, 형과 동생을 죽이고 왕위에 오른 태종(唐太宗 李世民, 재위: 626~649)은 언젠가는 고구려를 굴복시키려는 야심을 품고 있었다. 당 태종의 야심과 오만함은 631년 8월, 고구려에 보낸 사신 장손사가 고구려가 수나라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적의 시신을 모아 만든 기념물인 경관(京觀)을 헐어버린 것으로 표출되었다. 경관 파괴는 곧 고구려의 자부심을 건드리는 일이었다.

 

천리장성의 축조와 외교 정책

영류왕은 당나라가 여세를 몰아 고구려를 공격해 올 수도 있음을 감지하고, 백성을 동원해 부여성에서 서남쪽 바다에 이르는 천리에 달하는 지역에 장성을 쌓을 것을 명령했다. 천리장성 축조를 연개소문이 제안했다는 주장도 있지만, 이때는 아직 연개소문의 나이가 국내 정치에 간여할 정도가 아니었다. 천리장성 축조는 영류왕의 지시로 632년 2월부터 646년까지 15년간 지속된 거대한 사업이었다. 천리장성은 중국의 만리장성처럼 하나로 연결된 장벽이 아니라, 천리에 걸쳐 여러 곳에 성을 쌓고 보수하여 일종의 네트워크 방어망을 만든 것이라고 여겨진다. 이때 축성되고 보수된 성들은 고-당 전쟁에서 적을 막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삼국사기]와 중국의 사서(史書)들에는 631년부터 639년까지 고구려와 당나라 사이에 사신 왕래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고구려가 천리장성을 건설하며 당장 당나라와 적대적인 관계로 돌아선 것은 아니다. 634년 고구려 승려가 당나라에 입국하는 등 양국의 외교 관계는 지속되었다.

한편 당나라는 638년 토번과 싸워 승리하고, 서돌궐을 무력으로 압도하고, 서역의 여러 소국들을 제압하였으며, 640년에는 고창국까지 멸망시키는 등 서쪽 변경에서 그 세력을 크게 넓혔다. 당나라의 팽창을 예의주시하던 영류왕은 639년 태자 환권을 당에 사신으로 보내고, 당나라 국학(國學)에 청년들을 보내 입학시키는 등 당나라에게 우호적인 행동을 보였다. 그러자 640년 당나라에서 태자의 방문을 대한 답례로 사신 진대덕을 보내왔다. 고창국의 멸망 소식을 알고 있던 영류왕은 당나라의 강성함을 크게 경계하고 당과의 충돌을 피하기 위해 먼저 사신을 보냈을 뿐만 아니라, 당의 사신도 크게 우대해 주었다.

 

영류왕의 남방정책

영류왕은 고-수 전쟁 때 수나라를 지지했던 신라를 견제했다. 신라와는 한수 이북의 땅에 대한 소유권 문제로 6세기 말 이후로 갈등이 계속되고 있었다. 신라와의 작은 전투가 계속되는 가운데, 629년 8월 신라에게 낭비성을 빼앗기는 사태가 발생했다. 그러자 영류왕은 630년 왜국에 사신을 보냈다. 621년 사신을 보낸 이후 오랜만에 왜국에 사신을 보낸 것은 왜국을 이용해 신라를 견제하려는 목적 때문이었다.

영류왕은 군대를 보내 임진강 주변의 칠중성을 공격하게 하는 등 신라와 작은 전쟁을 하기도 했지만, 대군을 보내 정벌하기보다는 국경의 현상 유지와 외교를 통한 신라 견제에 치중하고 있었다. 백제와도 큰 갈등을 만들지는 않았다.

 

연개소문에 의해 시해되다

영류왕이 가장 공을 들인 것은 당나라와의 관계였다. 영류왕은 한편으로는 전쟁에 대비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전쟁을 피하고자 했다. 하지만 당나라는 고구려와의 전쟁을 각오하고 있었다. 641년 8월 당태종은 고구려를 방문하고 돌아온 진대덕의 보고를 받는 자리에서 “고구려를 육로와 해로로 나누어 공격하면 쉽게 멸망시킬 수 있으나, 지금은 산동지역이 아직 전쟁의 피해에서 벗어나지 못한 탓에 전쟁을 할 수 없다”고 말한 바 있다. 영류왕이 막고자 했던 당나라와의 전쟁은 그의 의지와 상관없이, 당태종의 야심과 당나라의 필요에 의해 발발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60세에 이른 영류왕은 자신의 재위기간 동안 당나라와 전쟁을 막으려고 노력했지만, 그 과정에서 소외된 연개소문(淵蓋蘇文, ?~665?)에 의해 642년 10월 시해되고 말았다. 연개소문은 자신을 죽이려고 했던 여러 대신들을 먼저 제거한 후, 곧장 궁중으로 달려가 영류왕을 시해하고 시신을 몇 토막으로 잘라서 구덩이에 버렸다고 기록되어 있다. 연개소문이 영류왕에 대해 상당한 적개심을 가졌던 것은 분명하지만, 왜 그가 영류왕을 시해했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한 이유를 알 수 없다. 단지 당나라와의 대외 정책을 놓고 젊은 연개소문과 노회한 정치가 영류왕 사이에 갈등이 빚어진 것으로 추정될 뿐이다.

영류왕에 대한 평가는 다양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다만 분명한 것은 그가 612년 고-수 전쟁의 영웅이었으며, 국제 정세의 변화에 따라 대외 정책을 변화시키며 큰 전쟁 없이 나라를 안정적으로 다스리고자 했던 임금이라는 점이다.


Posted by 원주유
고구려 역사와 문화2013. 9. 14. 17:55

 

우리 역사의 인물들중 고구려를 빛낸 담징

부두는 떠나는 사람, 보내는 사람으로 붐비고 있었습니다. 담징은 여러 승려들에게 옹위되어 묵묵히 부두에 들어섰습니다. 옆에서 들썩하는 소란에도 아랑곳없이 바다 먼 곳을 바라보며 발을 옮기는 그의 걸음은 어쩐지 가볍지를 않았습니다. 그들의 일행이란 몇이 안 되며 봇짐도 단출했습니다.

 

“대사님, 부디 옥체 보존하시옵소서. 예서는 날마다 기다리겠소이다. 아무쪼록 무사하시옵기만 바라나이다.” 따라 나온 중들이 짐을 넘겨주며 서운함을 표시하나 그는 별로 기색을 달리하지 않았습니다. 담징은 드디어 배전에 올랐습니다.

 

순풍에 돛을 달고 물 위로 미끄러져 가는 배의 갑판에 서서 바람에 펄럭이는 가사(중의 겉옷)자락을 부여안은 채 멀어져가는 고구려 땅을 바라보며 기약 없는 길을 떠나는 담징의 마음은 심란했습니다.

 

‘아, 나는 과연 언제면 다시 이 길을 돌아올 것인가! 외적의 준동이 심하고 나라안팎은 소란하기 그지없는데…’

 

오래전부터 호시탐탐 침략의 기회를 노리던 당나라의 준동이 근간에 와서는 더욱 잦은데 이 땅, 이 집을 뒤에다 두고 원수의 목에 칼 한번 대여보지 못한 채 장삼을 입고 기약 못할 길을 떠나려니 더욱 발등이 밟혔습니다. 그러나 아니 갈 수 없는 길이었습니다.

 

일본의 초청은 이미 수락되고 자신은 왕의 어명을 받은 신하의 몸이니 달리 할 수 없는 일이 아닌가!

담징은 579년 평원왕이 집권하고 있던 시기에 태어났습니다.

어려서부터 남달리 그림에 호기심을 가지고 있었던 담징은 무엇을 하나 보아도 그저 스치지 않았으며 반드시 다시 한 번 재현해보고야 말았습니다. 그가 일찍이 중이 된 것도 그림에 뜻을 두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른 나이에 승려가 된 담징은 벌써 젊은 시절에 불교만이 아니라 유교교리까지 꿰뚫었고 기술 분야에도 조예가 깊은 인물로 명성이 났습니다.

 

이런 담징이 국왕의 어명을 받고 일본의 문화건설을 도와주기 위해 사랑하는 고구려 땅을 떠난 것은 610년 3월이었습니다. 그때 그는 30대의 장정이었습니다.

 

유구한 역사와 문화를 자랑하는 우리 민족은 오랜 옛날부터 인류문화의 공동적 보고에 크게 기여한 창조와 발명의 전통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이전시기에도 그러했지만 삼국시기에만 해도 동방에서 가장 앞섰던 우리 민족은 이웃나라들의 기술과 예술발전에 커다란 영향을 주면서 성심성의로 도와준 사실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중국과 일본의 역사기록에도 수다히 남아있습니다.

 

백제의 학자 왕인은 일본에 건너가 글 모르던 그곳 사람들에게 처음으로 천자문을 가르쳤고 고구려의 중이며 의사인 혜자는 야마토 왕권의 집권자 성덕태자의 스승으로 활동했다고 합니다.

 

담징 역시 일본의 거듭되는 초청으로 그곳에 건너가 대고구려를 빛낸 화공이었습니다.

 

당시 일본으로 말하면 그들이 자랑하는 이른바 아스카문화가 고조기에 이른 때였습니다. 이 아스카문화 역시 백제로부터 불교가 처음으로 들어가고 삼국과의 문물이 교환되면서 우리의 학자, 기술자, 예술가들에 의해 시작되고 이룩되었습니다.

 

특히 고구려회화문화는 일본의 고대, 중세미술발전의 밑천으로 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다카마즈무덤벽화, 법륭사 금당벽화, 친수국 바탕그림들만 놓고 보아도 잘 알 수 있습니다. 무덤벽화들에 그려진 인물형상은 아래바지, 허리에 띠를 맨 겉옷, 머리에 쓴 두건 같은 것은 고구려 사람들과 꼭 같습니다.

 

더욱이 힘이 넘쳐 나고 그런가 하면 매우 섬세하면서도 우아한 필치의 형상수법들은 고구려의 회화예술이 일본에 건너간 것임을 설명 없이 그대로 보여 주는 산 실물입니다.

 

담징이 일본으로 건너 갈 당시는 추고천왕(여천왕) 스미코의 사위인 성덕태자가 나라를 다스리고 있던 시기였습니다. 나라의 문화건설에 큰 관심을 돌리고 고구려의 발전된 문화를 받아들이기에 힘쓰던 성덕태자는 백제의 사원건축가들을 초빙하여 근 8년간에 걸쳐 가장 큰 법당인 법륭사를 지어놓았습니다. 담징은 바로 이 법륭사의 벽면 벽화장식을 위해 일본으로 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법륭사는 금당(황금으로 장식됨) 중심 불전과 5층탑, 중문, 회랑으로 꾸려지고 그 옆에는 동. 서, 북으로 실들과 강당이 배치되었으며 또 고루와 종루를 비롯하여 훌륭히 건설된 절간입니다. 그래서 이 건물벽화를 아무에게나 맡길 수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불교경전에 능통하고 그림과 채색에 뛰어났으며 또한 종이와 색감제작에서 기술자로 이름이 났던 담징이 바로 사원벽화를 담당하게 되었습니다.

 

담징이 일본에 도착하자 성덕태자는 자기의 거처인 왕궁으로 이들 일행을 반갑게 맞아들였고 저들의 스승으로 높이 모셨으며 법륭사에 자리를 잡도록 했습니다.

 

“고구려스님에게 불편이 없도록 하라!”

성덕태자는 고행과 수도에 그들이 마음대로 드나들도록 허가했고 일본의 이름난 중이었던 호오죠오와 기거를 같이 하도록 했습니다.

 

장대한 체구에 꾹 다문 입, 시원스런 걸음걸이, 늘어진 가사 자락을 한손으로 올려붙인 채 법륭사를 한 바퀴 돌아 본 담징은 머리를 끄덕이며 깊은 사색에 잠겼습니다.

담징은 먼저 벽화창작을 위한 준비부터 했습니다.

그는 종이, 먹, 물감제조기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물론 일본에도 일부 문방구들과 기재들이 준비되어 있었지만 그 모든 것이 그의 눈에 들지 않았습니다.

 

담징은 모든 것을 처음부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을 시켜 먼저 질 높은 먹을 갖추도록 기술적인 지도를 주었고 손수 색감들을 하나하나씩 제조했습니다. 그리고 또한 일본에서는 그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희한한 종이도 만들어 냈습니다.

 

그뿐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연애’라고 이름 지은 훌륭한 물차를 만들었습니다. 이 물차가 만들어짐으로써 사람의 힘이 아니라 흐르는 물의 힘을 이용하여 불상조각과 금속공예품을 만들어내는 데서 하나의 개변이 일어났습니다. 특히는 농민들이 곡식을 제분하고 수공업자들이 광석을 분쇄하는데서 혁신이 일어났습니다. 이 희귀한 사실에 일본원주민들은 담징을 ‘고구려스님’이라고 존대했습니다.

 

“정말 신묘하지요.”

“글세, 말이외다. 우린 생각도 못했는데 고구려스님이 이런 것을 다…”

이 고구려스님이 바로 힘겨웠던 저들의 노동을 수월하게 만들어준 것이었습니다. 하기에 다시없는 은인으로, 위인으로 우러렀습니다.

 

담징이 일본 땅에 건너 간지도 근 2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습니다. 이제는 어지간히 준비도 갖추어졌습니다. 법륭사의 주지를 비롯한 그곳 승녀들은 이제나저제나 하면서 그가 빨리 붓을 들기만을 초조하게 기다렸습니다.

 

하지만 담징은 선뜻 일에 달라붙지 않았습니다. 어쩐지 생각은 두고 온 대동강기슭의 금잔디 밭으로만 달려갔고 고국에 있을 때의 아름다운 추억들이 꼬리를 이어 떠올랐습니다.

 

‘아, 벌써 이태가 되었구나. 모든 것이 무고한지. 그 무슨 변고라도 없는지.’

 

이즈음 일본의 중들 속에서는 담징이 저희들의 땅에 온지도 퍽이나 지났는데 그림은 그리지 않는다고, 아무래도 수상하다는 말들이 나는가하면 승적에도 없는 건달 승이어서 다른 재간은 있어도 그림만은 그릴 줄 모른다고까지 수군 수군댔습니다. 이 흉흉한 분위기에 어느 날 고구려에서 함께 떠난 법정이 이젠 붓을 들어야 하지 않겠는가고 조용히 권고했습니다.

 

담징은 근엄한 표정으로 천천히 대답하는 것이었습니다.

 

“건달 승이란 말은 열백 번 듣겠소만 나라를 모르는 중이라는 말은 죽어도 듣지 못하겠소. 내 나라 대고구려를 위해서라면 어떤 일도 주저하지 않을 담징임을 대사도 부디 알아주오.”

 

그는 시름겨운 눈으로 먼 서쪽하늘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순간 법정대사의 머리에는 언제인가 담징과 함께 길을 걸을 때 하던 그의 말이 불시에 떠올랐습니다.

 

“우리는 고구려 사람이다. 그러니 부처를 믿어도 고구려를 위해 믿어야 한다. 부처만 알고 제 나라를 모른다면 부처의 종일뿐 고구려 사람은 아니다.”

 

과연 옳은 말입니다. 담징은 이런 사람이었습니다.

 

나서 자란 고향과 그 땅에 대한 그리움으로 하여 잠을 이루지 못하던 어느 날 밤 담징은 이미 정제해놓은 채색감들을 하나하나 검열해 보고 벽면에 마주 섰으나 어쩐지 마음만은 개이지 않았습니다. 몸은 비록 타국에 있어도 언제나 마음만은 바다건너 고구려에 가 있었습니다.

 

요즈음 들리는 소문이 외적들이 쳐들어와 고구려는 시련을 겪고 있다고 했습니다. 물론 대고구려는 적을 지경 밖으로 반드시 내몰고 승리의 큰 북을 울릴 것이지만 아무튼 힘겨운 싸움을 하리라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습니다.

 

마침 법륭사 주지가 숨 가쁘게 달려오더니 그를 얼싸 안으며 염치없이 고구려에 쳐들어갔던 외적들이 가랑잎 같이 흩어지고 몰살되었다는 기적 같은 소식을 전해 주었습니다.

 

주지는 두 손을 모으고 손목의 염주를 매만지며 아뢰는 것이었습니다.

 

“대사님, 군사들이 전장에서 대고구려의 명예를 떨쳤으니 담징대사님은 화필로써 명성을 떨쳐야 하나이다. 법륭사에 영광을 베풀어 주소이다.”

주지는 진심으로 기뻐하며 인사를 드렸습니다.

승전의 소식은 쓸쓸하던 담징의 마음을 높뛰게 했습니다.

‘아, 대고구려는 이겼구나. 끝끝내 동방강대국의 이름을 떨치고야 말았구나. 이제 내 무엇을 아끼고 주저하랴. 대고구려의 빛발로 해외만방을 밝히는 이 성업에 한 몸을 바치리라.’

 

드디어 담징은 큰 붓을 들었습니다. 법정대사가 숭엄한 자세로 금당 출입문을 지키고 서 있을 뿐 주변은 쥐 죽은 듯 고요했다. 이렇듯 온몸이 그대로 고구려의 넋이 되어 낮과 밤이 따로 없이 담징은 벽화를 그려나갔다.

 

힘 있게 긋고 또 찍고 채색을 먹이고… 마지막 붓을 놓았을 때 담징은 금당바닥에 뿌리를 내린 듯 그 장대한 체구가 움직일 줄 몰랐습니다.

벽화의 완성을 보려고 발 벗고 달려온 주지와 승려들도, 함께 동행 했던 고구려의 중들도

‘아!’ 하는 탄성을 지를 뿐 다른 말을 잇지 못했습니다. 과연 명화에 또 명화였습니다.

 

금당 벽의 열두 폭 불교관계의 크고 작은 그림들과 천정 밑의 20여개 작은 벽면에 두 개씩 그려놓은 비천(하늘을 나는 선녀) 그림들은 그야말로 대황홀경이었습니다.

 

반듯한 흙벽 위에 모래와 수사(풀)를 바르고 또다시 아마와 둘을 섞어 매질한 후 그 위에 백토를 칠하여 티 없이 매끈한 면을 마련하고 그려나간 불교교리를 내용으로 하는 6편의 ‘아미타여래상’은 구도가 대칭적이면서 성격이 특색 있게 살아난 것으로 하여 더욱 이채로웠습니다. 특히 장방 안 연꽃방석 위에 위엄 있게 틀고 앉은 주인공의 모습은 예술적 처리에서 매우 정확한 것으로서 승려들과 화공들의 경탄을 자아내도록 했습니다.

 

또한 가는 선으로 연두색, 연한 붉은색, 곤청색, 재빛색을 조화롭게 먹여나감으로써 그 화려함이란 이를 데가 없었습니다.

 

단숨에 그어 내린 굵고 진한 선, 가늘고도 연한 선으로 성격을 살리고 운동감을 드러낸 인물들의 각이한 형상, 형태를 사실적으로 똑똑히 하면서도 미묘한 움직임마저도 하나같이 놓치지 않은 선묘운필의 묘미, 어디까지나 격조 높은 벽화예술의 높은 경지를 이룬 이 조화는 그 앞에 선 사람들의 마음을 금시 숭엄하게 만들었습니다.

 

완전히 넋을 잃은 주지는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바닥에 합장한 채 엎드려 ‘관세음보살’을 속으로 외우고 또 외우며 손을 비벼댈 뿐이었습니다.

 

담징 역시 외적을 보기 좋게 물리친 조국 고구려에 대한 생각으로 벽면을 향해 ‘남무관세음보살’하고 조용히 되뇌며 마음에 손을 얹습니다.

 

고구려의 이긴 싸움이 그에게 힘을 주고 붓을 들게 했던 것입니다. 만약 그 폭풍 같은 희소식이 전해지지 않았던들 담징은 아직도 시작을 못한 채 망설이고만 있었을 것이 아닌가!

 

“이 벽화는 세상에서 더는 찾아 볼 수 없는 그림이요. 담징대사의 그림솜씨는 참으로 신비롭소이다.”

주지를 비롯하여 모든 승려들이 입을 모아 연해연방 추어 올렸습니다. 하지만 담징은 조용히 뇌이었습니다.

 

“이 벽화가 잘되었다면 그것은 나의 화법이 신비로워서가 아니라 바로 고구려의 얼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요. 그 어떤 대적도 감히 굽힐 수 없는 슬기롭고 지혜로우며 용감하고 강의한 고구려 사람들의 얼이 있어 이 벽화가 완성되었음을 알아야 할 것이요.”

과연 이 벽화야말로 담징의 숭고한 애국의 산물이었습니다.

벌써 가사를 걸친 주지가 목탁을 두드리고 수많은 승려들이 합장배례를 하고 또 한다. 은은한 향불의 유연한 연기 속에 담징은 대고구려의 아들임을 온몸으로 느꼈습니다.

이와 같이 법륭사의 벽화는 담징에 의하여 훌륭히 마련되었습니다.

법륭사의 금당벽화는 신라의 경주 석굴암, 중국의 운강석굴과 함께 동양3대걸작중의 하나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법륭사의 벽화는 동방미술사는 말할 것도 없고 세계미술사에서도 특이한 자리를 차지하며, 더구나 이는 일본의 회화미술의 첫 장을 이루는 명화로 꼽히고 있습니다.

 

이 벽화는 창작된 때로부터 천 수백여 년이 지났으나 색 하나, 선 하나 변함없이 그대로 보존되어 세계적인 보물로 미술가들의 찬탄의 대상으로 되어왔습니다.

 

그러던 중 1949년 1월 법륭사가 불타면서 금당의 벽화를 잃게 되었습니다.

그 후 1968년 수많은 일류급 화가들이 최상의 자재로 다시 복원해놓았다고 하지만 원화를 살리지 못했다고 그들 자신이 말하고 있습니다. 고구려의 담징이 그린 벽화는 그만큼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Posted by 원주유
고구려 역사와 문화2013. 9. 14. 17:50

 

지안(集安: 서기 3~427년 고구려 首都)

'고구려 박물관'의 역사 왜곡… 고구려史 뭉개고 발해史는 지워

동북공정 강화
"漢 무제가 현토군에 고구려현 설치, 中原에 융합" 옌볜 지역은 말갈족 영역으로

모순
지도에 남쪽 경계는 한강 유역, 옌볜은 고구려땅 아니라면서 고구려城 그려 넣기도

集安 고구려碑
8각 유리상자 안에 넣어놓고 1m 떨어져서만 볼 수 있게… 확대경 써도 碑文 판독 어려워 지린성

"고구려가 조선족(한민족)의 조상인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중국의 나라였네요."
1일 중국 지린(吉林)성 지안(集安)의 '지안 박물관'. 이날 고구려 전문 박물관으로 신축 재개관한 박물관 6개 전시실을 관람한 한 중국인은 이렇게 말했다.
개관 당일 박물관 전시실을 둘러본 결과 '고구려는 중국의 속국' 같은 노골적 표현은 없었다. 그러나 동행한 국내 전문가는 "'동북공정'이 무서운 건 고구려사(史)를 자연스럽게 중국사의 일부로 받아들이게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중국이 지안 박물관을 통해 더 교묘하고 세밀하게 '동북공정'을 펼치고 있다는 분석이다. 지안은 서기 3년부터 427년까지 425년간 고구려 수도였던 곳이다.
"고구려족은 中 소수민족"
지안시 인민정부 청사 앞에는 고구려 상징인 '삼족오(三足烏·태양에 산다는 세 발 까마귀)' 동상이 서 있다. 안내판엔 "태양조(太陽鳥·삼족오)는 중국 고대 전설에 등장한다. 고구려 벽화의 삼족오는 고구려 민족과 중원(中原·중국을 지칭) 민족이 동일하게 태양조를 숭배했다는 의미"라고 적혀 있다. 한 시민은 "2년 전까지는 '고구려족(族)은 중국의 소수민족'이라는 문구가 있었다"며 "한국과 북한의 반대가 심해 이를 삭제한 것"이라고 말했다. 중·일, 한·일 간 역사 갈등이 첨예한 상황에서 중국이 한국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신경 쓴 것으로 관측된다.
그러나 박물관 안에 있는 안내판과 지도에는 고구려가 한(漢)·당(唐)의 영향을 받아 중원에 '융합'됐다는 내용만 가득했다. 한 관람객이 "고구려와 조선(한반도)의 관계는 뭐냐"고 물었다. 전시관 안내원은 "고구려와 한반도는 아무 관계가 없다. 고구려족은 중국의 소수민족"이라고 답했다.
고구려와 발해 연결 고리 제거
고구려 영역도에는 지금의 옌볜(延邊) 일대를 고구려 영토에서 제외하고 해당 지역을 말갈족 영역으로 구분했다. 국내 전문가는 "고구려에서 말갈을 뺀 것은 고구려와 발해가 이어지는 연결 고리를 없애려는 의도"라고 말했다. 발해는 고구려 지배층과 말갈 피지배층으로 이뤄진 국가였다. 고구려에서 말갈이 없어지면 고구려와 발해의 연관성도 그만큼 약해진다는 설명이다.
실제로 지린성 창바이(長白)에 있는 발해 벽돌탑인 '영광탑'의 안내판에는 "당나라 발해 시기에 쌓았다. 모양과 구조가 시안(西安)의 당나라 때 현장탑과 비슷하다"고 써놨다. 그러나 박물관의 고구려 산성(山城) 지도에선 옌볜 지역에 고구려 산성이 두 곳 있는 것으로 표시했다. 옌볜 일대가 고구려 땅이 아니라고 하면서도 고구려성을 그려 넣은 오류를 저지른 셈이다. 고구려 영토의 남쪽 경계는 한강 유역이라고 했지만 지도상 압록강 이남에는 어떤 유적도 표시하지 않았다.
내부 사진촬영도 기록도 금지한 지안박물관 - 중국 지린(吉林)성 지안(集安)시의 인민정부청사 앞에 세워진 지안박물관 입구. 1일 고구려 전문 박물관으로 신축 재개관했으며, 고구려를 중국 역사에 편입하려는 시도가 엿보인다.

 

박물관 측은 내부 사진 촬영을 금지하고 전시물 내용을 기록하는 것까지 엄격하게 통제했다. /지안시 청사 앞에 고구려 상징 '三足烏' 동상 - 중국 지린(吉林)성 지안(集安)시인민정부청사 앞에 1일 고구려를 상징하는‘삼족오(三足烏·세발까마귀)’동상이 서 있다. 중국은 고구려를 중국사에 편입하려고 하고 있다. /발해 벽돌탑인 '영광탑' 안내판엔 "당나라 風格을 갖고 있다" - 탑 안내판에“모양과 구조는 당나라 때의 현장탑과 비슷하며 당나라의 풍격을 갖고 있다”고 적혀 있다. 중국 지린성 창바이(長白)에 있는 발해 시기 벽돌탑인 영광탑(靈光塔).

 

박물관 전시는 일관되게 중원과 고구려의 '결합'을 강조했다. 입구에서부터 "한 무제가 현토군에 고구려현을 설치했다"고 적었다. 관련 지도는 현토군이 고구려로 성장한 것처럼 묘사했다. 그러나 고구려는 현토군을 밀어내면서 성장한 국가라는 게 전공 학자 대부분의 일치된 견해다. 안내판처럼 '고구려족과 중원 각 민족의 융합'을 통해 성장하지 않았다. 수(隋)·당과 대전(大戰)을 벌여 이들을 물리친 사실은 박물관에 어떤 설명도 없었다.

 

박물관은 또 "고구려 왕과 귀족은 당나라 관리 복장을 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국내 전문가는 "고구려는 망할 때까지 독자적 관등 체계를 유지했다"면서 "이곳 박물관에도 소형(小兄)·대형(大兄) 등 고구려의 독특한 관직이 적힌 기와 조각이 전시돼 있다"고 말했다.


현존 최고(最古) 고구려 비석으로 추정되는 '지안 고구려비'는 박물관 1층 로비 가운데 있었다. 8각 유리 상자에 넣어 성인 허리 높이의 전시대에 올려놓았다. 1m 밖에서 관람하게 돼 있어 비문(碑文)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비석 실물을 처음 접한 국내 학자들이 확대경까지 동원해 글자를 판독하려고 했지만 어려움을 겪었다.

지안(集安) 박물관
425년간 고구려 수도였던 중국 지린(吉林)성 지안에 지어진 고구려 박물관. 중국은 2003년 이른바 ‘동북공정’이 진행되던 시기에 박물관 건립을 추진했다. 3년 전 완공됐으나 내부 보완을 거쳐 1일 재개관했다.

동북공정(東北工程)
중국이 고조선·고구려·발해의 역사를 중국사로 편입하기 위해 추진한 동북 지역 연구 프로젝트. 중국 사회과학원 산하 변강사지연구중심(邊疆史地硏究中心)이 2002년부터 5년간 진행했다. 지금은 ‘역사 왜곡’ 영역을 벗어나 일반 중국인의 상식을 바꾸는 단계까지 이르고 있다. 한반도 통일 등 동북아 정세 변화에 대비한 중국의 역사적 명분 쌓기라는 분석도 있다

 

 


중국 光明日報의 ‘고구려 역사 연구의 몇 가지 문제에 대한 試論’

“한민족은 고구려와 기자조선을 도용해 갔다”

 

중국의 역사자료만 ‘일방적’으로 인용해 “고구려는 중국의 일부”라고 주장했다. 전문을 읽어보면 이 시론이 얼마나 억지를 부리는가를 명확히 알 수 있다. 이 시론의 결론이 ‘고구려는 중국의 일부니 정치적으로 이의를 제기하지 말라’라고 돼 있는 것은 이 시론이 정치적 의도를 갖고 작성되었음을 보여주는 ‘명백한’ 방증이다. 일반인이 알기 힘든 용어는 그 뜻을 찾아 괄호 안에 주석을 달았다. “광개토대왕이 웃는다.” 중국 길림성 집안현 통구에 있는 5.34m 높이의 광개토대왕비. 최근 중국은 총력을 다해 고구려를 중국역사에 편입시키려는 일련의 작업에 착수했다.

‘고려’라고도 약칭하는 고구려는 서한(西漢)에서 수(隋)·당(唐) 시대까지 중국 동북(東北)지역에 출현했던 중요하고 영향력 있는 변방 민족 중의 하나였다(중국에서 동북지역은 대개 만주 일대를 일컫는데 길림성과 요녕성, 흑룡강성을 가리켜 ‘동북3성’이라고 한다).

中原 왕조와 종속 관계

고구려의 선조는 주나라와 진나라 시기 줄곧 중국의 동북지역에서 생활했다. 기원전 108년 한나라 무제는 요동과 한반도 북부에 4군을 설치했는데 그 중에서 현도군에 있던 고구려현이 바로 고구려인이 살았던 곳이다.

기원전 37년 부여 사람인 주몽은 현도군 고구려현 관할구역에 정권을 세우고 흘승골성(紇升骨城 : 지금의 요녕성 환인현성 부근. 그러나 한국 역사학계는 광개토대왕비문을 근거로 주몽이 졸본에 도읍을 정했다고 보고 있다)을 수도로 정하였다.

서기 3년(한나라 평제 원시 3년) 고구려는 국내성(지금의 길림성 집안시)으로 수도를 옮겼다가 서기 427년 평양성(지금의 평양시)으로 천도하였다. 전성기 때의 고구려는 길림성 동남부와 요하(遼河 : 중국 동북지방 남부를 가로질러 서해로 흐르는 1400㎞의 강) 동쪽, 그리고 한반도 북부까지 세력을 뻗쳤다. 이로부터 서기 668년 한반도 동남부에 위치한 신라와 연합한 당나라 왕조의 공격에 의해 멸망하기까지 고구려는 705년의 역사를 유지했다.

고구려가 존재한 700여 년의 시간을 살펴보면 고구려는 중국의 중원 왕조가 관할하는 지역에서 주로 활동하였으며 중원 왕조와 종속관계를 유지하였다. 고구려 정권은 중원 왕조의 제약을 받았고 중국 지방정권의 관할하에 있었으므로 고대 중국에 있었던 변방의 민족정권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고구려와 중원 왕조의 관계는 중원 왕조의 제압력이 강해지거나 약해짐에 따라 밀접해지기도 했고 소원해지기도 했을 것이다. 이 글에서는 최근에 이뤄진 고구려 역사연구에 대해 약술한다. 학계연구자들의 지도편달을 바란다.

[1.고구려는 중국 동북지역 역사에 출현했던 소수민족 정권이다]

주(周 : 殷나라 다음에 건국해 秦나라에 멸망당할 때까지 수백년간 이어온 중국 고대 왕조) 나라와 진(秦: 기원전 221~207년)나라 시절 고구려인의 선조는 주로 혼강(渾江: 중국 요녕성을 흐르는 강)과 압록강 유역에서 생활하였다. 이들이 살았던 중심구역은 지금 요녕성의 환인현과 신빈현, 길림성의 집안시와 통화시 일대였다.

우리는 고구려 민족이 중국 동북지역 역사에 등장한 한 민족이었고, 고구려 정권은 중국 동북지역 역사에 등장한 변경민족 정권이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고구려 민족의 기원을 살펴보자. 현재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대다수 중국학자들은 고구려 민족의 기원에 대하여 예맥(濊貊: 중국 漢나라 시절 압록강과 혼강 유역에 살았다는 한민족의 근간이 되는 부족)설과 부여(夫餘: 고조선이 무너진 후 북만주 일대에 웅거한 부족국가)설, 고이(高夷 : 만주에 있던 고대 종족)설, 상인(商人 : 商은 殷나라를 뜻한다. 은나라가 주나라에 패해 동쪽으로 가 고구려의 선조가 되었다는 것이 商人설이다)설, 염제(炎帝)설 등을 제기하고 있다(중국 ‘史記’에는 중국의 黃帝가 염제·치우 등과 싸워 천자가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후 중국에서는 치우를 ‘군신’으로, 염제는 ‘불의 신’ 혹은 ‘태양신’으로 받들었다).

이런 여러 학설에 공통점이 있다면 고구려 민족은 주나라와 진나라 때에 중국의 동북지역에서 활동했다는 점이다.

좌전(左傳: ‘춘추좌씨전’ 혹은 ‘좌씨춘추’의 다른 이름. 춘추 시대 노나라의 좌구명이 편찬했다. 기원전 722~481년의 춘추시대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의 소공(昭公) 9년 조를 보면 주나라 사람들은 내내 “숙신(肅愼: 고조선 시대에 있었던 고대 종족)과 연(燕 : 周나라 昭公 奭의 후예로 전국 시기에 왕으로 칭한 칠웅 중의 하나. 지금의 중국 하북성 지역에 있었다. 고구려 장수왕의 공격에 의해 멸망했다), 그리고 박(?: 은나라 탕왕이 도읍한 곳. 지금의 하남성 귀덕부 상구현)은 우리의 북방 영토였다”고 말하는 부분이 있다.

고구려는 漢나라 안에 있던 지방정권

여기서 우리는 주나라의 무왕이 상(商: 殷나라)을 점령한 후 주나라 사람들이 동북지역을 경영했음을 명확히 알 수 있다. 주나라 때의 세력 범위는 지금의 동북지역보다 훨씬 넓었다.

환인현의 태서구 유적과 요산 유적·봉명 유적, 집안시의 대주선구 유적과 이도외자 유적·동촌 유적, 통화시의 왕만 발발자 유적 등에 대해 오랫동안 고고학적 조사와 발굴이 이뤄졌는데 이 조사에서 이 유적들은 모두 고구려 정권이 출현하기 전의 문화 유물이라는 것이 분명히 밝혀졌다. 이 지역 유물의 지층을 조사해보면 하층은 신석기시대 말기부터 청동기시대의 문화이고, 그 위층은 한대 문화이며, 그보다 더 위층은 고구려 정권이 출현한 후의 문화임이 명확히 드러난다.

두 번째는 고구려 정권 건립 상황에 관한 것인데 중국 학자들과 외국 학자들은 대부분 고구려가 기원전 37년(서한 원제 건조 2년)에 흘승골을 수도로 해 세워졌다는 점에 일치된 견해를 보이고 있다.

요녕성 환인현성 부근(환인현성 서쪽으로 4㎞ 떨어진 혼강 맞은편 쪽)에는 평원성(平原城: 평야에 세워진 성. 산성의 반대 개념)인 ‘하고성자(下古城子)’가 있으며, (환인현성 동북으로 8.5㎞ 떨어진 혼강 맞은편의 오녀산 정상에는) ‘오녀산성(五女山城)’이 있다. 고고학적 조사와 발굴에 의하면 이곳은 한나라 현도군의 관할 범위 안에 있던 고구려의 초기 수도였다고 한다.

고구려 정권이 출현하기 전 중국의 서한(西漢) 왕조는 광대한 중국 동북지역을 상대로 행정을 펼치고 있었다. 한나라 무제 원봉 2년인 기원전 108년 이곳에는 잇따라 현도군·낙랑군·임둔군·진번군의 네 군이 세워졌는데, 네 군(세칭 漢四郡)이 관할한 범위는 동북 지역과 한반도 북부에 이르렀다. 그 후 한사군의 관할 지역에 변화가 있어, 현도군의 행정수도가 고구려현으로 이전하였다.

고구려현 부근에서 건립한 고구려 정권은 처음에는 현도군, 이어서는 요동군에 속하게 되었는데 고구려 정권은 끊임없이 표(表: 신하가 자기 생각을 서술해 황제에게 올리는 글)를 올려 신하를 칭하고 조공을 받쳤다. 그리고 현도군에 이어 요동군을 거치며 한나라 왕조가 하사한 관복 등을 받아갔다. 이 시기 많은 한(漢)나라 사람이 고구려 정권에 흘러들었다.

1975년부터 1976년까지 중국 집안시 국내성 지역에서는 고고학적 조사와 발굴이 있었는데, 이때 고구려의 석축(石築) 안에서 한나라 때 만들어진 흙으로 쌓은 벽(土築城垣)이 발견되었다. 여기서 한나라 시대의 철기와 도기 등 여러 유물이 출토된 바 있다.

705년간의 역사를 이어오며 고구려는 현도·요동·낙랑 등지로 영토를 확장시켰으며 여러 차례 수도를 옮겼다. 그러나 흘승골이든 국내성이든 평양성이든 고구려의 수도는 모두 한사군 지역 안에 있었다. 그러니 고구려는 중국 역사에 출현한 변방의 민족 정권인 것이다.

周대에 기자 봉하고, 漢대에 4군 설치

세 번째, 한나라에서부터 당나라 때까지 중국은 분열해 있었지만 중국의 역대 왕조들은 모두 고구려를 변방의 민족 정권으로 생각했다는 점이다.

상(商: 은나라) 말기에서 한나라 초까지 고구려인의 거주지는 기자조선(箕子朝鮮: 은나라 말기 기자가 조선에 와 단군조선에 이어 세웠다고 하는 나라)의 관할 구역 안에 있었는데, 기자는 주나라 시대 지방 제후 중 하나였다.

한나라 시대에는 위씨조선(衛氏朝鮮: 한국에서는 ‘위만조선’이라고 한다. 한나라 고조는 중국을 통일한 후 노관에게 연나라를 다스리게 했는데, 노관이 반란을 일으켜 나라가 혼란에 빠졌다. 이때 노관의 부관으로 있던 衛滿이 1000여 명을 이끌고 패수를 건너 고조선의 準王을 찾아가 몸을 의탁했다. 그 후 위만은 준왕을 쳐 왕위를 빼앗고 도읍을 왕검성으로 옮겼는데 이를 위만조선이라고 한다. 위만조선은 한나라로부터 지원을 받아 지역 안정을 도모하고 이웃한 진번군과 임둔군 등을 복속시켜 고조선 역사상 가장 융성했던 나라가 되었다)이 기자조선을 대신했는데, 위씨조선은 여전히 한(漢) 왕조의 종속국이었다.

기원전 108년(원봉 3년) 한나라는 위씨조선을 멸망시키고 낙랑 등 4군을 설치해 한반도 중부 이북을 포함한 동북지역을 중국의 중원(中原) 지역과 같은 방식으로 통치하였다(한나라의 무제는 기원전 108년 위만조선을 멸망시킨 후 바로 낙랑·임둔·진번 3군을 설치하였고 그 다음해 현도군을 추가해 4군을 만들었다). 한나라로부터 당나라 때까지 고구려에 대한 중국 각 왕조의 관리 방식은 각기 달랐지만 중국의 통치자들은 고구려의 활동지역을 중국의 전통적인 영토로 생각하였다.

수나라 때 만들어진 ‘배구전(裴矩傳)’이라는 책을 보면 “수나라의 통치자는 ‘고구려의 영토는 원래 고죽국(孤竹國 : 중원에서 멀리 떨어진 땅)이다. 주나라 때 이 땅을 기자에게 봉했다가 한나라 때는 3군으로 나눴다. 진(晉)나라 시절에도 여전히 요동(요하 동쪽으로 동북과 같은 말이다) 지역은 진나라의 관리를 받았다. 그런데 지금은 더 이상 신하로 칭하지 않고 별개의 외지가 되었다. 그래서 선제(先帝)께서는 이를 못마땅히 여겨 고구려를 계속 정복하고 싶어했다’고 말했다”는 대목이 있다.

또 ‘책부원귀(冊府元龜)’ 제왕부(帝王部) 친정이(親征二)에는 “당 태종 또한 ‘요동은 원래 중국의 토지인데 주나라 때부터 위나라 때까지 그다지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 수나라의 왕은 일찍이 네 번이나 군대를 파견해 공격한 적이 있으나 모두 패하고 돌아왔고 고구려인은 많은 중국 평민을 죽였다. 지금 고구려인은 국왕을 살해하고 굉장한 자만에 빠져 있다. 나는 밤새 이 일을 생각하느라 잠을 이루지 못했다. 나는 죽은 중국 사람들의 자녀를 위해 복수할 것이다. 고구려인들을 도와 왕을 죽인 자들을 토벌할 것이다. 지금 비록 중국 대부분의 토지는 평정되었지만 단 하나 이곳만 평정되지 않았다. 우리는 또 한번 남은 병사의 힘으로 그 땅을 소탕하여 평정할 것이다. 후대의 우리 자손 중에는 강한 군대가 나올 것이고 반드시 재능 있는 인재가 나올 것이다. 나는 그들을 설득하여 반드시 요동을 토벌하러 가게 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아직 늙지 않았으니 내가 직접 토벌하러 가고 싶다. 이렇게 하면 우리 후손들에게 그 일을 시키지 않아도 될 것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는 내용이 있다(‘책부원귀’는 서기 1005년 송나라 정종 때의 왕흠약과 양억 등이 왕명을 받들어 편찬한 유서이다).

“원래는 중국 것이다” “비록 중국 대부분의 토지가 평정되었지만 단지 이 한곳만 평정되지 않았다”는 말은 당 태종이 고구려 지역을 전통적인 중국의 영토로 간주하고 있었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고구려와의 통일을 실현하는 것은 곧 “중국의 영토를 평정한다”는 최후의 사명을 완성하는 것이었다. 수나라와 당나라의 왕조가 전력을 기울여 고구려와의 통일을 이룩하려고 한 이유도 바로 이것 때문이었다.

책봉받고 조공 바친 고구려

네 번째, 고구려 또한 중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원하지 않았다.

700여년 동안 고구려는 동북 변방지역에서 독립하려고 하지 않았다. 고구려가 자신에게 스스로 부여한 위치는 중국 중앙왕조의 변방정권이었으며, 고구려는 중국이 3국시대(蜀漢·魏·吳나라로 나뉘어 소설 ‘삼국지’의 배경이 된 시기)와 양진시대(兩晉: 魏나라의 신하로 있던 사마염이 조조의 후손인 조한으로부터 황제의 자리를 빼앗아 265년 지금의 낙양에 晉나라를 세웠다. 그러나 晉나라는 4대 만에 흉노 등 북방민족의 공격을 받아 326년 멸망하였다. 그 이듬해 사마예는 동쪽으로 옮겨가 지금의 남경에 다시 晉나라를 세웠는데, 이 진나라는 419년까지 존속하였다. 사마염이 세운 진은 西晉, 사마예가 건국한 진은 東晉이라고 하고 이를 합하여 ‘兩晉’이라고 한다), 그리고 남북조 시대(東晉 이후 지금의 남경에는 차례로 宋·南齊·梁·陳나라가 건국되었다. 반면 북쪽에서는 北魏-東魏·西魏-北齊·北周가 들어서 대립하게 된다. 이렇게 남북으로 갈린 상태에서 여러 나라가 멸망하고 대립한 때를 남북조 분열시대라고 한다. 남북조 분열시대를 통일한 것이 隋나라다)로 크게 분열돼 있을 때도 스스로 중국의 중앙왕조에 대해 종속관계를 유지하였다. 그뿐 아니라 고구려는 책봉을 받았고 조공을 바쳤으며 질자(質子: 인질)를 보냈다.

‘통전(通典)’ 변방(邊方) 고구려를 보면 고구려의 왕은 동진(東晉)과 송(宋)·제(齊)·양(梁)·후위(後魏)·후주(後周) 시대까지 중국 남북의 두 왕조로부터 작위를 책봉받았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 또한 같은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통전’은 당나라 때 두우가 黃帝부터 당나라 현종까지의 문물제도 전반에 대하여 기술한 책).

‘亡國의 恨’ 품지 않은 고구려인

당나라가 세워진 후 고구려는 당으로부터 책봉을 받았으니 이는 고구려의 왕조가 당의 승인을 분명히 받았다는 증거이고 중국으로부터 자주 독립을 하지 않으려 했다는 뜻이다. 이러한 인식이 있었기 때문에 당나라가 고구려를 통일하자, 많은 고구려인들은 당나라에 대해 ‘망국(亡國)’의 한을 품지 않았던 것이다.

오히려 고구려인들은 당나라에 통합된 후 당나라의 통일 대업을 지키기 위한 전쟁에서 공로를 세워 역사에 이름을 남기기까지 하였다. 신·구 ‘당서(唐書)’에 이름을 남긴 천남생(泉男生)·고선지(高仙芝)·왕모중(王毛仲)·왕사례(王思禮)·이정기(李正己) 등이 그들인데, 신·구 ‘당서’에는 이들의 전기가 기록돼 있다.

다섯 번째로 멸망 후 고구려인의 이동 방향을 살펴보자. 고구려는 당 고종 총장 원년인 서기 668년 멸망했는데 ‘신당서’고려전에는 고구려를 멸망시킨 당나라가 고구려 난민 ‘69만호’를 받아들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 숫자는 당시 고구려의 총 가구수였겠지만, 여기에는 비고구려인 가구도 적잖이 포함돼 있었다. 당시의 고구려족 가구는 15만호 정도였기 때문이다.

학자들은 고구려가 패망한 후 고구려인들은 네 방면으로 이동했다고 보고 있다. 중원 각지로 유입된 고구려인이 있었고, 신라로 간 고구려족이 있었으며, 말갈(발해)에 의탁한 고구려인이 있었고, 돌궐로 거주지를 옮긴 고구려인도 있었다.

중국 학자들의 최근 연구 성과에 의하면 멸망시 고구려인 숫자는 대략 70만명 정도였는데 이 가운데 30만명이 중원 각지로 유입되었다고 한다. 신라에 귀의한 사람은 10만 정도였고, 말갈(발해)에 의탁한 사람은 10만 이상, 돌궐로 옮겨간 고구려인은 1만여 명이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이렇게 하면 대략 50만명 정도가 네 방면으로 이주한 셈이 되는데, 나머지 20만명은 요동 각지로 흩어져 유민(遺民)이 되고, 전쟁 와중에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숫자를 더하면 대략 70만이라는 숫자가 나온다.

신라로 유입된 고구려인은 용흥강(함경남도를 흘러 동한만 쪽 동해로 흘러드는 강) 이남의 한반도로 유입돼 살던 10만여 명이었는데 이들은 신라로 유입돼 반도 민족에 융화되었다.

그러나 나머지 대다수의 고구려인은 한족(漢族)에 융화되었다. 이러한 점으로 볼 때 고구려 민족을 중국 동북지방에 등장했던 변방민족으로 보는 것이 역사적인 사실에 가장 부합된다고 할 수 있다.

[2. 왕씨(王氏) 고려는 결코 고구려의 계승자가 아니다]

서기 918년 한반도에서 ‘고려’라는 이름의 정권이 출현하였다. 그 통치자의 성(姓)이 왕씨였기 때문에 학계에서는 이를 ‘왕씨 고려’라고 부른다. 비록 왕씨 고려는 고구려의 칭호를 계승했지만, 고구려의 승계와는 직접적인 관련이없다.

고구려가 패망하고 고려가 세워지기까지는 큰 시간 차이(250년)가 있을 뿐 아니라 역사 발전과 연원도 크게 다르다. 기원전 37년에 세워진 ‘고씨 고려(고구려)’는 서한(西漢)의 현도군 고구려현 관할하에 있었다. 그후 점차 강성해졌지만 중국 중앙왕조와의 종속관계를 끊지 않았다. 수·당 시기로 접어들어 고구려는 영토 확장정책을 실시해 한반도에 있는 기타 정권(삼한과 신라·백제 등)이 중원의 왕조에 조공하는 통로를 가로막아, 수·당 두 왕조로부터의 토벌을 불러들였다.

서기 668년 당나라는 마침내 ‘고씨 고려’를 통일함으로써, 고씨 고려의 영토는 당나라 안동도호부(최초의 행정중심은 지금의 평양)에 의해 관할되었다. 그리고 몇십 년 후 고씨 고려가 관할하던 구역에 중국 역사에 등장하는 또 하나의 지방정권인 ‘발해’가 들어섰고, 고씨 고려가 관할한 다른 일부분 지역은 한반도 남부에서 일어난 신라 정권에 귀속되었다. 하지만 이를 제외한 부분은 여전히 안동도호부에 의해 관할되었다.

고려는 三韓을 이었다

대부분의 고구려족은 당나라에 의해 내지(內地: 중국)로 옮겨져 한족과 융합되었으며 나머지 고구려인은 주위의 각 민족에 융합되었다. 이로써 고구려 왕족은 후계자가 끊겼으니 고구려는 나라를 세운 지 700여 년 만에 드디어 중국 역사발전의 긴 강 속으로 사라지게 된 것이다.

왕씨 고려가 건국한 것은 고씨 고려가 멸망한 때로부터 250년 후인 서기 918년이었다. 왕씨 고려는 서기 935년 한반도에 있던 신라 정권을 대치하였고 그 이듬해에 후백제를 멸망시켜 반도 중남부의 대부분을 통일하였다.

그러다 서기 1392년에 왕씨 고려의 신하인 이성계(李成桂)가 왕을 폐위하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1393년 이성계가 ‘조선과 화녕(和寧) 중에서 어느 것을 국호로 해야 하는가’라는 주청을 올리자, 명나라 왕은 이성계에게 조선 왕을 하사하였다.

그리하여 왕씨 고려는 국호를 조선으로 바꾸게 되었는데 중국 학계에서는 이를 ‘이씨 조선’, 줄여서 ‘이조(李朝)’라고 부른다. 이것이 바로 명(明)·청(淸) 시기의 조선국이었다.

그 다음으로 살펴볼 것은 왕씨 고려와 고씨 고려는 관할 구역 내의 주민 구성이 다르다는 점이다. 고씨 고려 관할지역 내의 주민은 고구려족이 주력이었다.

고구려족의 연원은 중국 상고시대부터 있었던 민족인 예맥족이 동쪽으로 이동해 부여·고이·옥저·소수맥(小水貊: 압록강의 북쪽에 있는 혼강에 고구려를 세운 종족. 주몽을 따라 나라를 세운 종족을 맥족이라고 하는데 그중에서 大水인 압록강 유역의 맥족을 대수맥, 小水인 혼강 쪽의 맥족을 소수맥이라고 한다)·동예(東濊: 동해안 지역에 거주한 고구려족의 일파) 등이 되었는데 그후 위씨조선의 후예와 한족(漢族)·선비(鮮卑: 고대 남만주 몽골 등지에 살았던 유목 민족)족 등이 들어가 융합하였다.

많은 민족으로 구성됐지만 이들은 장기간 공동생활을 하면서 점차 융화돼 하나가 되었다. 역사서(史書)와 학계에서는 이들을 일반적으로 고구려족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왕씨 고려 관할지역 내의 주민은 신라인 위주였다. 왕씨 고려는 신라와 후백제를 병합하였으므로, 신라인과 백제인이 왕씨 고려의 주요 주민이 되었다.

대부분의 신라인은 한반도 남부지역에 있었던 진한과 변한인에 뿌리를 두고 있다. 고씨 고려 멸망 후 비록 일부 고구려인이 신라로 유입되기는 했으나 이들은 신라의 주력을 이루지는 못했다.

백제인은 대다수가 한반도 남부에 있었던 마한인에 뿌리를 두고 있다. 따라서 왕씨 고려는 한반도 남부에 있었던 ‘삼한인(三韓人)’이 중심이 된 나라라고 할 수 있다.

수많은 역사서들은 왕씨 고려인과 중국의 옛 사람들이, ‘왕씨 고려는 삼한의 후예다’라고 기록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수백년간 계속된 왕씨 고려 왕조의 역사 발전 속에서 구성원들은 점차 하나의 민족으로 융합되어가는데, 역사서와 학계에서는 이들을 ‘고려족’으로 부르고 있다. 왕씨 고려가 이씨 조선으로 이어졌으므로 조선은 민족 명칭이 되어 오늘날까지 사용되기에 이르렀다.

왕건은 낙랑군에 있던 漢族의 후예

마지막으로 왕씨 고려는 고씨 고려의 후예가 아니다. 왕씨 고려의 왕족은 고씨 고려의 후예가 아니었다. ‘고려사’를 쓴 사람은 왕건(王建)의 족속에 관해서 “고려의 선조는 역사에서 상세히 설명돼 있지 않다”라고 적었다. 그러나 중국학자가 고증한 바에 의하면 왕건은 서한(西漢) 시절 낙랑군에 있었던 한인(漢人)의 후예일 가능성이 아주 높다고 한다.

그 근거로 왕씨는 낙랑군의 명문 귀족이었고 가호가 많았던 점을 들 수 있다. 왕건은 임종시에 남긴 가르침인 ‘십훈요(서기 943년 고려 태조 왕건이 자손들에게 귀감으로 남긴 열 가지 유훈. ‘훈요십조’라고도 한다)’에서 자신은 고씨 고려의 후예라고 언급하지 않았다. 오히려 왕건은 자신은 평민 출신이며 ‘삼한 산천의 보호에 의지한다’라고 말했다. 그는 마한·진한·변한을 통일한 것이니 후계자들 또한 삼한을 소유하길 바랐던 것이다.

왕건이 고씨 고려의 후예였다면 그는 통치를 위해서라도 그 사실을 대대적으로 선전하였을 것이다. 이것은 아주 상식적인 이치인데 왕건은 그렇게 하지 않았으니 이는 왕씨 고려가 고씨 고려의 후예가 아니라는 좋은 반증이다.

왕씨 고려는 결코 고구려의 계승자가 아니었다. 한대(漢代) 한반도에서 일어난 마한·진한·변한은 신라와 백제로 발전해갔고, 백제는 당나라에 의해 멸망하였으며, 신라는 왕씨 고려가 대신하게 되었다.

그후 이조가 왕씨 고려를 대신해 최종적으로는 이씨 조선으로 발전하였다. 이러한 정권들의 강역(疆域: 영토) 범위는 한 번도 한반도를 벗어난 적이 없었다.

[3 . 고구려와 왕씨 고려의 역사가 혼돈된 원인]

사람들이 왕씨 고려를 고구려의 계승자로 잘못 보게 된 이유는 중국의 역사기록과 깊은 관계가 있다. 반고(班古: 후한 초기의 역사가. 서기 32~92년)가 쓴 ‘한서(漢書)’는 중국 정사(正史) 중의 하나로 고구려의 사적에 대해 제일 처음 기술했다. 진수(陣壽: 중국 西晉의 역사가. 서기 233~297년)가 편찬한 ‘삼국지’는 처음으로 고구려를 ‘전기(傳記)’에 넣은 역사서다. ‘구당서’와 ‘신당서’에 이르기까지 많은 역사서는 ‘동이전’ 혹은 ‘만이전(蠻夷傳)’ 속에 고구려의 전기를 기술하였다.

이 역사서들은 비록 구체적인 사건을 기록하는 데 있어 약간의 실수를 범하고 있지만, 고구려의 역사 위치를 명확히 정해놓고 있다. 그런데 후대에 이르러 사서의 기록이 혼란스러워지면서 명백한 실수가 나오기 시작했다.

왕씨 고려는 서기 918년에 나라를 세우고 1392년 이씨 조선으로 교체되었는데, 이 시기는 중국의 오대(五代) 중기에서 명나라 초기에 해당한다(五代는 五代十國의 약어로 당나라가 멸망한 907년부터 송나라가 통일한 960년 사이의 약 70년간 중국이 여러 나라로 분열되었던 시기다).

따라서 ‘구오대사(舊五代史)’와 ‘신오대사’ ‘송사(宋史)’ ‘요사(遼史)’ ‘금사(金史)’ ‘원사(元史)’ ‘명사(明史)’ 등의 역사서에는 모두 ‘고려전’이나 ‘조선전’이 등장한 반면 고씨 고려에 대한 기록은 그 이전의 역사서에 비해 약술하게 되었다.

‘舊五代史’로부터 시작된 오류

이러한 역사서의 기록을 종합해보면 ‘구오대사’와 ‘신오대사’는 가장 먼저 고씨 고려를 왕씨 고려전에 기록한 책이었다. 그리고 ‘송사’는 “왕건이 고씨의 자리를 계승하였다(王建承高氏之位)”라는 표현을 최초로 사용한 책이다. ‘구오대사’와 ‘신오대사’ 그리고 ‘송사’에 등장하는 이 기록은 그 후에 나온 여러 역사서의 기록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게 되었다.

‘구오대사’의 고려전은 약 240자로 되어 있는데, 여기에는 “당나라 말년 중국에서는 내란이 많았다. 그래서 고려인은 스스로 군장(君長: 왕이나 우두머리)을 세웠는데 이들의 이전 왕(前王)의 성은 고씨였다”라고 적었다. ‘구오대사’는 고려인이 군장을 세웠는데 전왕은 고씨였다고 묘사한 후 바로 왕씨 고려에 대한 기록을 이어갔으니, 왕씨 고려가 고씨 고려를 잇는 것으로 오해될 수 있는 소지를 만들어준 것이다.

‘신오대사’의 고려전은 약 280자로 돼 있는데 그 첫머리에는 “고려는 본래 부여인의 별종(別種)이다. 그 나라와 군주 등에 관한 기록은 ‘당서(唐書)’에 기재되어 있는데, 이들은 다른 이적(夷狄: 오랑캐)과 달리 성씨가 있었고 관직의 호칭을 대략적이나마 알 수 있었다. 당 나라 말년에 (이들은) 왕씨 고려가 되었다”라고 서술한 후 모두 왕씨 고려에 대한 기록을 남겼다(이러니 왕씨 고려는 고씨 고려를 잇는 것으로 오해될 소지가 있다는 의미임).

‘구오대사’는 북송(北宋) 사람인 설거정(薛居正)이 감수하여 북송 초기인 서기 973~974년에 걸쳐 편찬되었다. 이 시기 중국은 반세기 동안이나 분열 국면(5대10국)이 계속되고 있었으며 통일전쟁도 진행되고 있었다. 이런 이유 때문에 ‘구오대사’ 고려전의 기록은 간략해졌을 뿐만 아니라, 잘못 기재된 곳이 많았다. “당나라 말년 중국에서는 내란이 많았다. 그래서 고려인은 스스로 군장을 세웠는데 전왕의 성은 고씨였다”는 기록이 바로 그런 예에 해당한다.

‘구오대사’ 고려전에 나오는 이 기록을 오류로 단정하는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는 조선에서 나온 한문 역사서를 포함한 어떠한 역사서를 찾아봐도 고씨가 당나라 말년에 고려 정권을 세웠다는 기록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둘째로는 송나라 사람인 사마광(司馬光: 중국 북송 때의 정치가이자 사학자. 서기 1019∼1086년)이 ‘자치통감(資治通鑑)을’ 편찬할 때 위에 언급한 글들을 전혀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점이다.

사마광이 이러한 태도를 취했다는 것은 이 기록들이 잘못된 것임을 명백히 보여주는 것이다. ‘구오대사’를 감수한 설거정은 고씨 고려와 왕씨 고려 사이의 관계를 분명히 밝히지 못했는데 이러한 오류는 ‘신오대사’의 저자인 구양수(歐陽脩: 송나라의 정치가이자 문인. 서기 1007∼1072)에 의해 해결되었다.

구양수는 ‘신오대사’를 편찬할 때 많은 소설(小說)과 필기자료를 참고하여 사람과 사건에 대한 묘사를 생동감 있게 집어넣었다. ‘구오대사’ 고려전은 고씨 고려에 관해 간략히 기술하였으며 왕씨 고려의 건국 근원을 밝히고 있다. ‘구오대사’ 고려전에서 ‘당 나라 말년에 중국에서는 내란이 많았다. 그래서 고려인은 스스로 군장을 세웠다”는 단락이 ‘신오대사’ 고려전에서는 “조금 후에 스스로 나라를 세웠다”로 간소화되었다.

그후(‘신오대사’가 나온 이후) 편찬된 ‘신당서’ 고려전과 ‘구당서’ 고려전에는 이러한 기록이 없어지고 오히려 ‘고씨 왕족이 사라졌다’는 말이 들어갔는데, 이는 고려 왕족의 후계가 끊어졌음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宋史’가 잘못 기록

원나라 사람 탈탈(脫脫) 등이 편찬한 ‘송사’는 고려전을 따로 한 권의 책으로 기록해놓고 있다. 여기에는 “고려는 본래 고구려이고 땅은 구주(九州: 중국 전토. 夏의 시조인 禹가 중국을 아홉 개 주로 나누었다는 데서 유래)와 달라 기주(冀州: 중국의 동북지방)의 땅에 속한다. 주나라 때는 기자(箕子)의 국토였고, 한나라 때는 현도군이었다. 고구려인은 요동에서 생활하였는데 대개 부여인의 한 별종이었으며 평양성을 수도로 삼았다. 한나라 이래로 늘 중국에 공물을 바쳤다. 그러나 자주 변경에서 난을 일으켜 수 양제는 두 번 군사를 일으켰고 당 태종도 직접 토벌하러 갔으나 모두 실패하였다. 당 고종은 이적에게 고구려를 정복하도록 명령하니 이적이 드디어 성을 함락시키고 그 땅을 군현(郡縣)으로 나누었다. 당나라 말년 중국에 내란이 많아지자 고려인은 스스로 군장(君長)을 세웠다. 후당(後唐) 동광(同光) 천성(天成) 때 고려 국왕 고씨는 자주 후당 왕에게 공물을 바쳤다. 후당 장흥왕 때 권지국사(權知國事: 아직 왕호를 인정받지 못하는 동안 우선 임시로 국사를 맡아 다스린다는 뜻의 칭호) 왕건이 고려의 왕위를 계승하였고 사신을 중국으로 파견하여 조공을 바쳤다…”는 기록이 있다.

이 내용 다음에는 왕씨 고려가 송 왕조와 교류한 것에 대한 사실이 기록돼 있다.

이러한 내용으로 볼 때 ‘송사’ 고려전은 앞부분에서 ‘신·구오대사’의 기술을 종합하고 이러한 기초 위에 두 역사서의 작자가 명확히 밝히지 않았던 왕씨 고려와 고씨 고려 간의 관계를 “왕건이 고씨 고려왕의 자리를 계승하였다”고 함으로써, 고씨 고려와 왕씨 고려가 계승 관계에 있는 것처럼 기술했다.

‘요사’ ‘금사’도 원나라 사람 탈탈 등이 편찬한 것이기 때문에 이와 유사한 잘못이 발견된다.

그후에 나온 역사서들은 이렇게 잘못된 기술을 답습하였다. ‘명사(明史)’는 이전에 나온 잘못된 역사서보다 한 발 더 나갔다. ‘명사’는 명 왕조가 이성계를 조선의 국왕으로 책봉한 것에 대해 합리적인 해석을 하려다 보니 앞의 몇몇 역사서가 저지른 오류를 답습했을 뿐만 아니라, 이씨 조선 정권의 연혁에 대해서도 아주 잘못된 계통을 세워주었다(‘명사’는 청나라 때 장정옥 등이 칙령을 받아 1679년부터 1735년에 걸쳐 기전체로 편찬한 336권의 역사서).

기자조선~고구려 넘겨준 ‘明史’

즉 ‘명사’는 “기자조선-위씨조선(위만조선)-한사군-고구려-동사복국(東徙復國: 패망한 고구려의 후예들이 동쪽으로 옮겨가 세웠다는 나라. 대체로 발해로 이해되고 있다)-왕씨 고려-이성계가 국호를 바꾸기 전의 고려-이씨 조선”으로의 계통을 세워줌으로써, 중국 역사에 속하는 기자조선과 위씨조선·한사군·고구려를 모두 조선의 역사 속으로 들어가게 하였다.

이렇게 중국 역사서에서 기술에 오류가 발생한 이유는 다방면으로 생각해 볼 수 있는데, 전란으로 문헌이 유실된 데다 왕씨 고려에 대한 오도(誤導)가 가장 중요한 원인으로 볼 수 있겠다. ‘속자치통감장편(續資治通鑑長編)’의 권 323, 송 원풍 5년(서기 1082) 2월 기사(己巳)일에는 이런 내용이 실려 있다.

사관수찬인 증공은 “내가 사서를 고찰해 보니 주몽은 흘승골을 수도로 한 후 국호를 고구려로 정하였다. 고구려의 왕은 고씨를 성으로 삼았다. 당나라 고종 때 고구려 왕인 고장(高藏: 고구려의 마지막 왕으로 보장왕으로 불림. 재위 기간은 642∼668년)은 국가를 잃고 서쪽으로 천도했다. 당나라 성력(서기 698∼699년) 시기에 고장(보장왕)의 아들인 고덕무(高德武)가 스스로 국가를 세웠다(고덕무는 699년 당나라가 만든 안동도호부의 안동도독에 임명되었는데, 그가 小고구려를 세운 시조라는 주장도 있다). 고구려는 원화(元和) 말년까지 악사를 중국에 보내왔으나 그 이후로는 그러한 기록이 중국 역사서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 오대 동광(同光)·천성(天成) 시절 고씨 성을 가진 고려 왕이 와서 다시 조공을 하였으나 그 이름은 알지 못한다. 장흥 3년 권지국사(權知國事)인 왕건이 사신을 파견하여 조공을 하였고 이로 인해 왕건을 왕으로 삼았다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왕위를 왕건의 아들인 왕무(王武: 혜종)를 거쳐 왕무의 아들 왕소(王昭: 광종), 왕소의 아들 왕유(王由: 경종), 왕유의 동생 왕치(王治: 성종), 왕치의 동생 왕송(王誦: 목종), 왕송의 동생 왕순(王詢: 현종) 등으로 이어갔다. (이렇게 왕씨들이 왕위를 이어갔기 때문에) 고구려는 주몽에서 고장까지의 21대에 걸쳐 700년간 고씨 성을 이어간 후 멸망한 나라였음을 고증할 수 있다. 고구려는 국가를 잃은 후 또 하나의 국가(小고구려 등을 말하는 듯)를 세웠다. 하지만 왕의 이름과 순서, 흥망의 본말(本末)과 왕건이 나라를 세웠을 때의 일들은 알 방법이 없다”고 말했다.

그 후 왕씨 고려는 송 왕조에게 왕씨 고려와 고씨 고려를 연결해달라는 하나의 ‘고려세차(高麗世次: 고려 왕의 차례)’를 바친다. 여기서 송나라 사람들은 왕씨 고려와 고씨 고려에 대한 인식이 모호해졌음을 알 수 있게 된다. 왕씨 고려가 바친 고려세차는 한 걸음 나아가 사실을 오도하는 작용을 했다.

‘고려’와 ‘조선’이라는 명칭을 도용

중국 사서들이 명백한 오류를 범함으로써 중국의 고대 변방민족이 사용하던 ‘고려’라는 명칭을 삼한(三韓) 신라의 계승자인 왕씨 정권이 도용하게 되었고, 한 발 더 나아가 왕씨 정권의 계승자인 이조(李朝)는 기자조선이 쓰던 ‘조선(朝鮮)’이라는 이름을 또 도용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현대인들은 중국 고대 동북지역에 있었던 변방정권의 연혁을 이해하는 데 있어 많은 혼란과 잘못된 견해를 갖게 되었다.

연구를 진행하는 데 있어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은 자료이다. 양보륭(楊保隆)은 1987년 제1기 ‘민족연구(民族硏究)’에 게재한 ‘고구려전을 싣고 있는 여러 역사서에 대한 몇 가지 문제 판별 방법(원제 各史高句麗傳的幾個問題辨析)’이라는 제목의 논문에서 매우 유익한 연구를 시도했다. 그러나 앞으로 해나가야 할 연구과제는 많기만 하다.

고구려사에 대한 연구를 정상적인 학술연구 범주에 넣어야 한다는 것이 우리의 일관된 주장이다. 우리는 고구려사 연구에서 발견되는 역사 문제를 ‘현실화하는 것’과, 학술문제를 ‘정치화하려는’ 경향과 작태에 대해 반대한다(고구려를 중국 역사로 분류하려는 중국측의 고구려사 연구에 한국측이 반대한다는 뜻인 듯). 고구려사는 중국 역사는 물론이고 한반도 역사를 연구하는 데 있어 계속해서 깊은 연구를 요구하는 과제이다.

심도 있는 연구를 하는 것은 과학적인 연구결과를 학계에 제공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고구려사를 연구하고 이를 심화하는 것은 학자의 책임이다. 연구한 결과에 대한 차이로 인해 일시적으로는 통일된 결론을 도출할 수 없을지라도, 학술 규범에 부합하는 규칙으로 학술 성과를 교류하고, 상호 존중하는 가운데 학술상의 논쟁을 벌여 서로 다른 의견을 개진할 수 있어야 한다. 이렇게 할 수만 있다면 여러 나라의 학자가 고구려 역사에 대한 연구에 공동의 노력을 기울일 수 있게 될 것이고, 그에 따라 큰 진전이 있으리라 생각한다.

 

 

 

 

 

Posted by 원주유
고구려 역사와 문화2013. 9. 14. 16:22

 

 

삼국통일의 기반을 다진 북한산성 전투 

역사는 가정이 없다. 역사적 사실만이 있을 뿐이다. 그런데도 대다수 국민들이 원하는 역사의 가정이 있다. 그것은 바로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지 않고 고구려가 삼국을 통일했으면 하는 것이다. 고구려가 삼국을 통일했으면 저 드넓은 만주가 우리의 영토일뿐만 아니라 강력한 국력을 갖춘 고구려로 인해 우리의 역사는 강대한 역사로 자리매김했을 것이란 것이다. 하지만 역사는 정말 가정이 없다. 그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661년 고구려의 뇌음신(惱音信) 장군이 신라의 영토였던 북한산성을 함락시켰다면 우리 역사는 어떻게 바뀌었을까? 한번 역사의 현장으로 들어가 보자.

 

660년 황산벌에서 계백과 5천결사대의 거룩한 투쟁은 흔적 없이 사라지고 백제는 나당연합군에 항복하고 말았다. 하지만 만주를 누비던 부여족의 후예인 백제는 자신의 나라를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일본에 가있던 부여풍이 백제로 돌아와 부흥운동을 주도하면서 신라는 한강 위쪽의 고구려군을 대비하면서 백제의 부흥세력들과 새로운 전쟁을 치뤄야 했다.
이 시기 고구려는 새로운 구상을 하고 있었다. 고구려의 집권자인 연개소문은 신라와 당나라를 두려워하는 존재가 아니었다. 그는 이미 세계 최강의 제국인 당나라와 수많은 전투에서 패배를 알지 못했던 인물이었다. 645년 당 태종이 친히 대군을 이끌고 침입했을 때 직접 고구려군을 지휘해 개모성·요동성·백암성에서 적에게 큰 타격을 가하고 마침내 안시성 혈전에서 88일 동안의 공방전 끝에 당군을 격퇴했기 때문이다. 그는 이후에도 4차례나 당나라 침입을 받았으나 이를 모두 막아내며 당나라로 하여금 고구려의 두려움을 알게 해줬다.

 

하지만 고구려는 당나라와 15년 동안의 전투로 엄청난 국력의 손실이 있었고 더구나 나당연합군에 의해 백제가 멸망당하기에 이르렀으니 긴장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따라서 연개소문은 고구려를 삼키고자 다가오는 신라를 아예 선공하는 게 효과적이라고 판단했다. 더구나 백제 지역에서 왕자 부여풍과 흑지상지가 이끄는 백제부흥군이 신라를 괴롭히고 있어 한강 유역을 공격하기에는 최적의 기회였다. 연개소문은 당나라와의 처절한 투쟁을 승리로 이끈 주역의 한사람이자 말갈족으로부터 신임이 두터웠던 뇌음신을 사령관으로 임명하고 고구려군과 말갈군과의 연합군을 편성했다. 뇌음신은 연개소문이 정변을 일으킬 때 군사 500여명을 거느리고 그를 도왔으며 훗날 고구려와 당나라와의 전쟁이 시작됐을 때 현토성주로 당군을 패배시켰던 고구려의 영웅이었다. 한편 말갈족은 이미 연개소문 위용에 눌려 그 용맹스러움을 고구려군과 함께 하고 있었다. 훗날 말갈족이 고구려 후예 대조영과 함께 당나라와 투쟁, 진국(辰國:훗날 발해)을 건설한 건 이때부터 형제의 맹약이 있었기 때문이다.
661년 연개소문의 명을 받은 뇌음신은 말갈의 장군 생해(生偕)와 연합, 신라 술천성을 공격했다. 술천성은 지금의 경기도 여주땅으로 한강 일대에서 가장 중요한 거점이었다. 여주를 장악하면 한강을 타고 두물머리(양수리)로 올라가 북한강와 남한강을 모두 이용해 신라 영토 모두를 공격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남한강을 굽이 바라보고 있는 파사산성은 함락당할 곳이 아니었다. 지형상의 불리함을 극복하지 못한 뇌음신은 전략적 후퇴를 단행하고 신라군의 주력 부대가 있는 북한산성으로 말발굽을 돌렸다. 이것이 차라리 고구려다운 방식이었다. 아예 최강의 군사들끼리 맞붙어 멋지게 자웅을 가려보자는 것이었다.
당시 북한산성 성주는 동타천으로 대사(大舍) 지위에 있는 장군이었다. 동타천에 대한 상세한 기록이 ‘삼국사기’에 나타나진 않지만 신라 국경 최대 전략적 요충지인 북한산성을 지휘하고 있던 것으로 미뤄 뛰어난 무공과 지략을 지닌 인물이었을 것이다.

 

동타천은 성곽 바깥으로 철질려(마름쇠)를 깔아 사람과 말 등이 다니지 못하게 했다. 고구려군이 성곽 근처로 다가오는 것을 차단하기 위해서였다. 이 작전은 성공해 고구려군의 접근을 차단했다. 하지만 뇌음신은 새로운 공격기법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바로 포차(抛車)를 이용하는 것이었다. 영화에서 나오는 것처럼 성곽 바깥에 포차를 설치, 거대한 돌을 산성 안으로 쏘아 보냈다. 고구려군의 20여일 동안의 거친 공세로 드디어 신라군은 더 이상 버틸 힘이 없었다. 고구려군은 고구려군대로, 신라군은 신라군대로 자신의 조국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 우리 역사상 가장 멋진 전투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전쟁의 승패는 전혀 뜻하지 않은 곳에서 발생했다. 고구려군이 승리로 끝날듯한 전투였지만 승리의 여신은 끝내 고구려군을 외면했다. 전투 막바지 별안간 큰 별이 고구려군 진영에 떨어지고 번개와 벼락 등이 치며 큰 비를 퍼붓는 돌발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이 한순간 고구려군과 신라군의 사기는 뒤바뀌고 하늘의 뜻이 고구려에 있지 않고 신라에 있음을 깨달은 뇌음신은 철군을 결정했다. 만약 마지막 순간 벼락과 천둥 등이 치지 않았다면 어찌 됐을까? 만약 그렇게 됐다면 아마도 북한산성 전투는 고구려군의 승리로 끝나고 한강 유역을 다시 차지한 고구려군은 오히려 신라를 제압하고 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하늘은 신라를 택했고 실제 역사 역시 신라군의 승리로 끝나고 말았다. 661년 북한산성 전투는 바로 신라의 삼국통일을 하늘이 선택한 역사의 사변이었고 그것이 바로 가정이 아닌 역사의 현실이다.

 

고구려 명장 강이식장군

고구려 명장.세계 전쟁사에 유례없는 전승기록이 있다. 6세기 세계 최강대국 중국이 16년에 걸쳐 4차례나 침략전쟁을 일으켰으나 고구려는 이를 모두 물리치고 대승을 거두었다. 고구려 병마원수 강이식(姜以式) 장군. 그는 일명 임유관 대첩으로 불리는 수나라의 1차 침략전쟁에서 30만 대군을 5만 정예부대로서 궤멸, 서전을 장식하며 고구려인의 기개와 용맹을 만천하에 떨쳤다.

그동안 강이식 장군은 잘 알려지지 않았었다. 중국의 왜곡된 역사관과 고구려사를 다룬 삼국사기의 저자 김부식의 사대주의로 인해 역사에서 누락되었기 때문이다. 근세에 들어와 일부 문헌을 비롯하여 그를 시조로 모신 진주 강씨 문중 족보 기록과 중국 현지 유적 등을 토대로 강이식 장군에 대한 실증 작업이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다.

진주강씨(晉州姜氏)의 족보에 그 시조로 알려진 인물이지만『삼국사기』와『구당서』등 국내외 정사(正史)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 597년(영양왕 8) 수(隋)나라가 중국 대륙을 통일하고 고구려를 신속시키고자 무례한 국서(國書)를 보내오자 강이식은 “이러한 오만무례한 국서는 붓으로 답할 것이 아니라 칼로 대답해야 한다”면서 주전론을 제창하였다. 이후 고구려 조정 여론이 주전론 쪽으로 가닥을 잡자 수 문제가 고구려를 본격적으로 침공함에 따라 여·수전쟁(麗隋戰爭)이 발발하였다. 이때 강이식은 고구려의 최고 사령관인 병마원수(兵馬元帥)를 맡아 정병 5만을 이끌고 이 전투에 참가하였다.

 

이듬해(598) 대병력을 이끌고 요서(遼西)로 나아가 요서총관(遼西總管) 위충(韋沖)과 접전하다가 임유관(臨硝關: 현 산해관의 남서 지역)으로 거짓 후퇴하였다. 이에 수나라의 문제(文帝)는 30만 대군을 들어 한왕(漢王) 양량(楊諒)을 행군대총관(行軍大總管)으로 삼아 임유관으로 보내고, 주나후(周羅?)를 수군총관(水軍總管)으로 삼아 바다로 출행시키면서 평양으로 출전한다고 선언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계략은 양선(糧船)을 이끌고 요해(遼海)로 들어와 양량의 수나라 대군에게 군량을 공급해주려는 속임수 전략이었다. 병마원수인 강이식은 이를 간파하고 수군으로 바다에 나아가 주나후의 군량선을 격파하였다. 이어 군중(軍中)에 벽루(壁壘)를 지키라고 명하여 출행하지 않으니 수나라 군사들은 양식이 점차 떨어지고, 그때가 마침 6월 장마철이라 기아·질병으로 인하여 수군의 사기는 극도로 저하되었다. 이 때를 기회로 강이식은 총공격을 가하여 수나라 군사들을 거의 섬멸하고, 군자(軍資)·기기(器機) 등을 노획하는 큰 전과를 올렸다.

강이식이 진두지휘한 임유관전투의 대승리로 인하여 수나라 문제 정권은 몰락하였으며, 고구려가 요동 지방을 안전하게 확보한 채 대수전쟁을 준비할 수 있게 되었다.

강이식의 묘는 심양현(潘陽縣) 원수림(元帥林: 현 만주 봉길현 원림역 앞)에 있다. 경상남도 진주시 상봉서동 봉산사(鳳山祠)에서는 해마다 음력 3월 10일에 그를 제향하고 있다. 신채호(申采浩)의『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에 강이식 장군의 활동 모습이 실려 있는데, 지금은 전하지 않는『서곽잡록(西郭雜錄)』과『대동운해(大東韻海)』에 실린 것을 인용하였다.

 

세계 최강 당나라를 패배시킨 고구려 장군 양만춘(楊萬春.?∼?)

생몰년 미상. 고구려시대의 명장. 보장왕 때의 안시성(安市城) 성주이다. 그의 이름은 역사서에는 보이지 않고 ‘안시성 성주’로만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송준길(宋浚吉)의 동춘당선생별집(同春堂先生別集)과 박지원(朴趾源)의 열하일기(熱河日記)에 의하면 양만춘(梁萬春) 또는 양만춘(楊萬春)으로 밝혀졌다.

그는 지금의 만주 요령성(遼寧省) 해성(海城)의 동남쪽에 위치한 영성자산성(英城子山城)으로 추정되는 안시성의 성주였다. 안시성은 지리적으로 험한 곳에 자리 잡은 전략적 요충지일 뿐 아니라 군사들 또한 정예한 것으로 정평이 나 있었다. 그는 연개소문(淵蓋蘇文)이 정변으로 정권을 장악했을 때, 집권자인 연개소문에게 복종하지 않았다. 이에 연개소문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안시성을 공격했으나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이에 따라 연개소문은 결국 안시성 성주의 직책을 그대로 맡겼다. 이는 그가 용기와 소신 있는 인물이었음을 시사해 준다.

645년(보장왕 4) 당나라 태종은 대군을 동원해 고구려를 침공하였다. 당나라 군대의 주력부대의 침공으로 요동지역에 있던 개모성(蓋牟城: 撫順 부근)과 비사성(卑沙城: 大連灣 北岸)이 함락되었다. 이어 당나라 태종의 지휘로 요동성(遼東城: 遼陽)과 백암성(白巖城: 遼陽 동남)도 당나라 군대에 함락되었다. 당나라 군대는 다음 공격목표를 놓고 수뇌부 사이에 이견이 있었으나, 이세적(李世勣)의 건의로 안시성 공격을 시도하였다. 이 때 고구려는 당나라 군대에 포위된 안시성을 지키기 위해 15만 병력을 출동시켰으나 안시성 근처 8리 지점에서 대패하고 말았다.

 

고립무원의 상황에 처한 안시성에서 그를 비롯한 병사와 주민들은 하나로 뭉쳐 완강히 저항하였다. 안시성 공격이 여의치 않자 당나라 군대는 공격목표를 그보다 훨씬 동남쪽에 있는 오골성(烏骨城: 만주 鳳凰 남쪽의 高麗山城)으로 변경하고자 논의하였다. 그러나 안시성을 계속 공격하기로 의견이 모아져 치열한 공방전이 전개되었다. 당나라 군대는 연인원 50만 명이 동원되어 60여 일 동안 높은 흙산을 쌓아, 이를 발판으로 성을 공격하였다. 당시 당나라군대는 하루에 6, 7회의 공격을 가하고 마지막 3일 동안은 전력을 다해 총 공세를 펼쳤으나 끝내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마침 9월에 접어들어 요동의 날씨가 추워지기 시작했고, 군량 또한 다하자 당나라 태종은 포위를 풀고 철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때 그는 성루에 올라 송별의 예(禮)를 표하고, 당나라 태종은 그의 용전을 높이 평가해 비단 100필을 주면서 왕에 대한 충성을 격려하였다.세계 최강이라고 알려진 당태종의 군사를 결정적으로 패배시킨 안시성 전투는 고구려인의 기상과 자존심을 보여준 생생한 사건이었다.

고려 후기의 학자인 이색(李穡)의 정관음(貞觀吟)이라는 시와 이곡(李穀)의 가정집(稼亭集)에 의하면 당나라 태종이 눈에 화살을 맞아 부상을 입고 회군했다고 한다. 고구려 멸망 뒤 당나라에 반대해 끝까지 저항한 11성(城) 가운데 안시성이 포함된 것으로 보아, 그의 생존여부는 알 수 없지만, 그의 기백과 용기가 고구려 부흥운동으로 계승되었음을 알 수 있다.

 

 

 

 

 

 

 

 

 

 

 

 

 

 

 

 

 

 

 

 

 

 

 

Posted by 원주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