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역사와 문화2013. 9. 14. 18:20

 

광개토대왕과 인연을 맺은 사람들

 

고국양왕 광개토대왕의 아버지. 광개토대왕이 능력을 발휘할 수있도록 터전을 닦아 주었다.
장수왕 광개토대왕의 아들. 아버지를 이어 고구려를 동아시아의 최강국으로 발전시켰다.
내물마립간 신라의 왕. 광개토대왕의 도움을 받아 신라 땅에 쳐들어온 가야와 왜의 연합 세력을 물리쳤다.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

고구려의 두 번째 수도인 국내성이 있는 중국의 집안시에 가면, 하늘높이 우뚝 솟은 비석이 하나 있어요. 높이가 6.39미터, 무게가 37톤이니 엄청나게 큰 비석이지요. 이 비석의 주인공은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이에요. 무슨 이름이 이리도 기냐고요? 고구려 사람들이 이 분을 존경하여 붙여 준 이름이니, 길다고 너무 불평하지는 마세요. 좀 짧은 이름은 없냐고요? 물론 있지요. 광개토대왕이에요.

처음부터 광개토대왕이라고 하지, 왜 읽기도 힘든 긴 이름을 말해 줬냐고요? 광개토대왕이 죽은 이후에 고구려 사람들이 붙여 준 정식 이름이니, 알고는 있어야죠. 이 이름을 우리말로 풀이해 보면, ‘나라 언덕 위의 무덤 안에 계신 넓은 영토를 개척하시고 나라를 평안하게 만드셨던 우리가 좋아했던 위대한 임금님’이라고 할 수 있어요. 그러고 보니, 이름 속에 광개토대왕의 업적이 다 들어 있네요.

서로 북으로 영토를 넓히는 광개토대왕

광개토대왕의 어릴 적 이름은 담덕이었어요. 그는 어릴 때부터 체격이 크고 위엄이 있었대요. 그래서 아버지인 고국양왕은 아들을 무척 총애하였으며

, 담덕이 열세 살이 되었을 때 태자로 삼아 일찍부터 제왕의 길을 걷게 했어요. 그런 그가 왕위에 오른 것은 18세 때로, 아버지의 뒤를 이어 고구려의 19대 임금으로 등극하였어요.

광개토대왕이 임금으로 재위할 때, 고구려는 요동 지역 전체를 장악하며 동아시아 최강국이 되었어요. 그는 왕위에 오른 다음해인 392년에 4만의 군사를 이끌고 백제의 북쪽 지역을 공격하여 한강 유역까지 영토를 확장했어요. 이때 백제의 왕은 진사왕이었는데, 그는 광개토대왕이 병법에 능하다는 소문을 듣고 오금이 저려 미처 싸울 생각도 못 하고 멍하니 앉아 있다가 10여개 성을 고스란히 빼앗기고 말았대요.

광개토대왕은 395년에는 북방에 있는 거란을, 398년에는 숙신을 복속시켰으며,

402년에는 후연을, 410년에는 동부여를 공격하여 요동 지역 전체를 고구려 땅으로 만들었어요.

이처럼 광개토대왕은 남북 어디든 가는 곳마다 승리를 거두어, 일생 동안 64개 성, 1,400여 마을을 차지하여 막강 고구려 제국을 건설했어요.

한편, 400년에는 신라의 도움 요청으로 신라 땅에 쳐들어온 가야와 왜의 연합군을 물리쳐 줬어요.

신라 왕인 내물마립간은 가야와 왜의 연합군이 쳐들어오자 광개토대왕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이를 받아들인 광개토대왕은 보병과 기병 5만을 보내 왜와 가야 군사들을 물리쳐 줬어요. 경주에 있는 신라의 왕릉급 무덤인 호우총에서 제사에 사용된 그릇이 하나 출토되었는데, 그릇 밑면에 광개토대왕의 이름이 새겨져 있어서 고구려와 신라가 광개토대왕 집권 시절에 친밀했다는 것을 증명해 주고 있어요.

백성들을 편히 살게 해 준 광개토대왕

광개토대왕이 싸움만 잘한 임금은 아니에요. 광개토대왕릉비에 다음과 같은 글이 적혀 있어요.

“대왕의 은혜와 혜택이 하늘에까지 이르고, 위력은 바다에까지 미쳤다. 또한 적들을 쓸어 없애셨으니 백성들은 평안히 자기 직업에 종사했고, 나라가 부강하니 백성이 편안했으며 오곡마저도 풍성하게 익었다.”

대왕을 흠모했던 고구려 사람들의 인물평이고, 본인의 무덤 앞에 세워진 비석 글이니, 어느 정도 과장은 되었을 거예요. 하지만 자신들의 삶이 아주 편했다고 쓸 정도로 광개토대왕은 나라 안 살림살이도 상당히 잘했어요. 한편, 광개토대왕 시절에는 고구려 사람들이 자기 나라를 천하의 중심으로 여길 정도로 자부심이 강했어요. 광개토대왕의 강력한 리더십과 용병술 덕분에 고구려인 전체가 강한 주체 의식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지요.

그러나 안타깝게도 광개토대왕은 412년에 39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뜨고 말았어요. 역사에 ‘만약’이라는 단어를 붙일 수는 없지만, 만약 그가 60세까지만 살았더라도, 당시 동아시아 전체는 고구려 땅이 되었을지도 몰라요. 한번 상상해 보세요. 말까지 철갑으로 무장한 개마무사들이 보부도 당당하게 산천을 헤집고 다니며, 고구려의 영광을 외치는 모습을. 그리고 그들을 인솔하여 영토를 확장해 가는 광개토대왕의 늠름한 모습을. 어때요? 상상만으로도 스릴이 넘치지요?

 

교과서 속의 광개토대왕 시대

삼국 간의 세력다툼은 광개토대왕이 즉위한 4세기 말부터 시작되었는데, 이것은 삼국의 발전을 촉진하는 자극제가 되었다. 삼국 간의 세력다툼에서 주도권을 잡은 것은 중국 세력과 싸움을 통해 성장한 고구려였다. 광개토대왕은 강화된 국력으로 신라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영토를 크게 넓혀 고구려의 전성시대를 열었다. 그의 업적은 만주 집안에 남아 있는 광개토대왕릉비에 기록되어 있다. 그가 죽은 뒤, 고구려 사람들은 그를 영토를 크게 넓혔다는 뜻으로 ‘광개토왕’이라 하여 그의 위업을 그렸다. 

알쏭이와 장콩샘의 미주알 고주알

광개토대왕 이야기는 어디에 전해지고 있나요?
광개토대왕의 업적을 기록해 놓은 역사책은 거의 없어요. 『삼국사기』에 간략하게 소개되어 있을 뿐, 광개토대왕의 부인이 누구인지, 자식은 몇 명인지, 왜 죽었는지에 대한 세세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아요. 그래도 다행인 것은 아들인 장수왕 때에 세워 놓은 광개토대왕릉비에 그의 업적이 자세히 나와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그가 어떤 일을 언제 했는지 면밀하게 파악할 수 있어요.

광개토대왕 시절에 고구려 사람들은 ‘천하의 중심은 고구려’라고 했다던데, 그게 사실인가요?
광개토대왕 시절에 지방 관리를 지냈던 모두루라는 사람의 무덤에 이런 글이 쓰여 있어요. “하백의 손자이며 해와 달의 아들인 추모성왕이 북부여에서 태어나셨으니, 천하 사방은 이 나라 이 고을이 가장 성스러움을 알지니.” 고구려가 천하에서 가장 성스러운 곳이란 이야기지요. 또한 광개토대왕릉비에는 고구려 사람들을 가리켜 ‘천손(天孫)의 후예’라 하고, 주변 국가나 부족들은 전부 오랑캐라 해 놨어요. 이러한 사실로 보았을 때에 광개토대왕 시절의 고구려 사람들은 고구려를 천하의 중심으로 생각했던 것이 분명해요.

 

광개토대왕! 대단한 영웅인 것은 분명해. 하지만 말이야,현대 사회가 추구하는 평화의 관점에서 보아도, 그는 과연 영웅일까? 알렉산더, 나폴레옹, 칭기즈칸, 광개토대왕. 이들은 땅따먹기 전쟁에서 승리한 정복군주들이야. 그렇다면 그로 인해서고통을 받거나 죽어 간 사람들 또한 무척 많았을 거 아니야? 고통받은사람들에게도 이들은 과연 영웅일까? 우리 한번쯤 곰곰이 생각해 볼 문제인 것 같아.


세기의 전쟁 을지문덕의 살수대첩

수나라군은 쫓기고 있었다. 고구려군이 마지막 일격을 가한다. 북경을 떠날 때만 해도 수양제는 고구려 원정이 이렇게 비참한 패배로 끝날 줄은 몰랐을 것이다. 수나라군은 살수에서 전멸했다.

 

612년 수나라가 고구려을 침략할 때 동원한 병사는 113만명에 달했습니다. 비슷한 시기에 서양 전쟁에서 십만명 이상의 병력이 동원된 경우가 많지 않다는 것을 볼 때 가히 고대사 최대의 전쟁이라 하겠습니다. 고구려의 을지문덕은 바로 이 수나라 군대의 별동대 30만을 살수 오늘의 청천강에서 몰살시킵니다. 살아 돌아간 자는 불과 2700명 이것은 세계 전쟁사에 기록될 승전보입니다. 수나라는 삼백 여년 만에 중원을 통일한 나라입니다. 인구, 국토, 병력의 규모에 있어서 고구려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초강대국이었습니다. 헌데 그런 수나라가 고구려 땅에서 치욕스러운 패배를 당했다는 것입니다.

중국 강소성 양주에 있는 한 무덤. 수양제의 무덤이다. 300년 만에 중국을 통일한 제국 수나라 황제 무덤 치곤 너무 작고 초라하다. 묘지석에 벼락이 쳐서 한 부분이 깨졌지만1) 수리하지 않은 상태다. 수양제는 618년 양주에서 신하의 손에 죽었다. 그는 스스로 약을 먹고 자결하게다고 했지만 신하 우문화급은 스스로 죽을 권리조차 주지 않았다. 무덤 앞엔 그의 업적과 과오가 새겨져 있다. 요동에서 일을 버리다 천하를 잃었다. 고구려을 정벌하려다 모든 것을 잃고 말았다는 것이다. 612년 중원을 통일한 수양제는 백만대군을 동원해 고구려를 공격한다.

고구려로 가는 첫관문 요동성. 견고한 성에 의지한 고구려의 저항은 완강했다. 수나라 백만대군은 몇 달이 지나도 요동성 하나를 깨뜨리지 못했다. 중원을 통일한 초강대국이 요동의 작은 성에 막혀 진군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요동성에서 기록에 따르면 한 두달 정도의 공성전과 수성전이 진행이 됐는데 벌써부터 많은 병참의 어려움에 처했을 것입니다."

마음이 급해진 수양제는 별동대 30만을 평양으로 보낸다. 대동강으로 진입하는 수군과 합류해 평양을 공격할 의도였다. 산둥반도 봉래를 출발한 수나라 수군은 대동강에 상륙했다. 평양성 60리 앞까지 진출한 수군을 저지하기 위해 고구려군이 전투를 벌였지만 패배한다. 고구려군은 평양성 안으로 도주하고 만다. 수군사령관 내호아는 여세를 몰아 4만 병력을 이끌고 평양성을 향해 진군한다. 마침내 수나라 수군은 평양성 안으로 들이닥쳤다. 수도에 적군이 진입한 것이다. 국가의 존망이 걸린 순간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함정이었다. 평양성 안에 매복해 있던 고구려 군이 급습하자 수군은 대패한다. 살아돌아 간자는 불과 수천명. 수나라 수군은 전투력을 상실한다.

임용한 박사 (사)한국미래문제연구원, 전쟁과 역사 저자.

"수군이 군량을 보급하고 육군이 압록강을 건너와서 신속하게 평양을 함락시키는 작전이라는 것입니다. 수군대장 내호아는 고구려 군의 유인작전에 걸려서 단독으로 평양성을 공격하다가 패배해 버립니다. 그 결과 수군이 철수하게 돼버리니까 압록강을 건너서 평양까지 왔던 수나라 육군은 식량이 떨어져 버리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한편 수나라 육군 30만은 평양성 30리 앞까지 진출했다. 이 누란의 위기를 역전시킨 사람이 고구려군의 지휘관 을지문덕이었다. 조선상고사에 따르면 을지문덕은 성밖 들과 집을 비워 수나라 군이 현지에서 식량을 조달하는 것을 막았다. 보급이 끊긴 수나라군이 성급하게 공격해오자 고구려군은 사방에서 화살과 돌멩이를 비오듯 쏟아부었다. 이미 식량이 바닥난 수나라 별동대는 평양성을 칠 수 있는 전력이 아니었다.

 

"42년간 쌓았던 평양성은 당시 고구려 최대의 성이였고 높이도 굉장한 철옹성에 가깝죠. 수나라 군대가 평양성 근처 북쪽 30리까지 왔음에도 불구하고 물론 그들이 지치기도 했지만 평양성을 함락 시킬 수 있는 어떤 장비라든가 능력이 부족했던 겁니다."

수나라군은 평양성 30리 앞에서 철수한다. 그 뒤를 고구려군이 쫓으며 공격했다. 쫓는 고구려군과 쫓기는 수나라 군사. 전세는 완전히 역전된다. 후퇴하던 수나라 군은 살수 지금의 청천강에 도착한다. 청천강은 평안남북도 사이를 흘러 서해로 흐르는 200km의 강이다. 수나라 군대는 강을 건너기 시작했다. 을지문덕이 지휘하는 고구려 군대는 원하는 시간, 원하는 장소에서 수나라 군을 쳤다. 고구려 군은 도하하는 수나라 군의 후방을 공격했다. 강과 강변으로 병력이 나눠진 수나라 군사는 속수무책으로 당한다. 지휘관 신세웅도 전사하고 만다.

 

"살수대첩이 이루어졌을 때 수나라 군의 어떤 진이나 대영이 제대로 갖춰져 다기 보다는 강을 도하하거나 혹은 이동 중에 고구려 군의 기습작전이나 유격전과 같은 어떤 정상적이지 않은 시간과 장소 정상적이지 않는 방법을 통해서 고구려 군이 공격을 했다."

다급한 수나라 군은 하루에 450리를 달아났다. 살수에서 압록강까지 고구려 군은 패주하는 수나라 군대를 추격하며 생멸했다. 화살이 비오듯 쏟아졌다. 수나라 별동대의 99%가 사망했다. 30만 5천명 가운데 살아 돌아간 사람은 2700명이라고 중국측 사서는 기록하고 있다.2)

 

"유명한 삼국지의 적벽대전에서 조조가 백만을 동원했다고 하지만 실제 조조가 끌고 내려온 군대는 오만 밖에 안됩니다. 현지에서 조달을 해서 나중에 15만명을 만들었다고 돼 있습니다. 그런데 수양제 군대는 사실 백만이 아니라 2백만입니다. 중간에 보급부대나 노역으로 해서 동원했던 총동원 인력은 2백만명이었다고 중국 측 기록에 정확하게 나와 있습니다. 이것으로 보면 중국 역사상 최대의 규모의 전쟁이었다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동시에 최대 규모의 참혹한 패배였습니다. 삼국시대가 지난 후에 나중에 명나라 청나라 때 까지도 중국 황제들이 조선에 대해서 기억하고 있는 중요한 것이 저나라는 수나라의 백만대군을 물리친 나라다라고 이것을 중국황제들이 다 알고 있습니다. 그 정도로 중국 역사에 기록될 만한 참혹한 패배였고 우리측에서 보면 위대한 승리였죠."

살수대첩은 우리나라 역사를 통털어서 그 유래를 찾을 수 없는 대승이었습니다. 전쟁에 패배한 수나라는 결국 멸망의 길로 접어들고 말았습니다. 고대세계 최강의 슈퍼파워였던 수나라를 완파한 고구려 군. 그들은 과연 어떤 무기와 전략으로 싸웠던 걸까요. 고구려의 유적에서는 많은 화살촉들이 발견되고 있는데요. 활과 화살은 고구려 군의 주력 무기였습니다. 이것은 아차산에서 발견된 고구려 군의 화살을 복원한 것인데 화살촉의 평균 탄소량은 0.51%로 오늘날의 특수강의 맘 먹는 순도 높은 강철입니다. 이 철갑옷은 고구려 중장비병이 입었던 찰갑옷을 복원한 것인데 이 상위 하나를 만들기 위해서는 철을 단조해서 만든 천여 개가 넘는 작은 조각들을 일일이 이렇게 가죽 끈으로 연결해서 만들게 됩니다. 제철기술을 가진 전문가 집단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작업이었을 텐데요. 그렇다면 이렇게 철갑으로 중무장한 고구려 군들은 어떻게 전투를 했었을까요.

한강이 한 눈에 내려다 보이는 아차산. 고구려의 군사 요새 보루가 발견된 지역이다. 아차산에서만 20여 개가 넘는 보루가 나왔다. 1600여 년 전 이곳은 고구려 군이 집단으로 거주하던 중요한 군사 거점이었다.

 

"각 봉우리마다 이러한 성들이 크기는 약간씩 달리하면서 위치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각 성들이 한 눈에 다 보이기 때문에 서로 필요한 경우에 군사를 좀 더 동원해 줄 수 있는 것이고요. 또 한강에서 북쪽으로 올라오는 군사들을 다 볼 수 있는 곳에 위치한 곳이기 때문에 각각의 소규모지만 유기적으로 연결돼서 큰성처럼 그렇게 역할을 했던 것으로 생각합니다."

아차산에서는 고구려의 주력 무기가 대량으로 나왔다. 철재 칼, 도끼, 창 그리고 수천 개의 화살촉이 나왔다. 이런 무기들이 안악 3호분 벽화에 상세히 그려져 있다. 철갑옷을 입고 장창을 든 중장기병, 갑옷을 입지 않은 경기병, 철갑옷과 방패로 무장한 중장보병, 경보병, 도끼를 든 부월수, 그리고 화를 든 궁수가 보인다.

최종택 교수 고구려 고고미술학과

"현재 저희가 발굴된 고구려 철기를 분석해 보면 현재 우리가 쓰고 있는 조광이라는 기술도 알고 있었고 고대의 중국계의 기술과 유럽계의 철기제작 기술을 이미 고구려는 다 알고 있었다고 분석하고 있기 때문에 이미 제철수준이 상당히 높았고 높은 제철 수준을 통해서 무기와 농번구, 각종 생활용기를 제작하므로 국가적인 부를 창출할 수 있었습니다."

 

아차산에서 나온 자료를 가지고 고구려 화살을 제작하기로 했다. 고구려는 철을 단조해 살촉을 만들었을 것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화살촉은 특수강 수준의 강철이다. 만들어진 화살촉에 화살대와 깃을 붙여 화살을 복원했다. 고구려 군은 어떤 활로 화살을 쐈을까. 고구려의 활은 몰소의 뿔을 넣어 만든 각궁이었다. 각궁은 평소에 둥글게 휘어서 보관한다. 활을 쏠때 거꾸로 펴서 활 모양을 만든다. 완성된 각궁은 고구려 벽화 속 모습과 같다. 각궁과 고구려 화살의 파괴력을 어떨까. 초고속 카메라를 동원해 화살이 철판을 뚫는 순간을 정밀하게 촬영해 보기로 했다. 세계민족궁대회 입상자가 활을 쐈다. 화살은 함석판 5장을 그대로 관통했다.

김용만 우리역사문화연구소장

"고구려 벽화에 보면 말을 타고 활을 쏘는 그런 경기병들이 많이 보이는데 고구려 최대의 강점은 역시 활이었습니다. 기록상으로 볼 수 있는 것은 백석산 전투가 있습니다. 수나라 군대를 사면에서 완전히 포위해서 활을 비오듯이 쏴서 수나라 군대를 거의 전멸시킵니다."

 

지금도 발굴이 한창인 경주 쪽샘지구. 신라 귀족의 무덤 수십기가 발굴된 지역이다. 지난 6월 이곳에서는 중장기병이 입었던 철갑옷과 각종 무기류가 공개됐다. 발굴된 철갑옷은 작고 얇은 수많은 철편들을 엮어 만든 찰갑옷이었다. 말들 덮었던 철갑 위의 사람이 입는 찰갑옷이 최초로 원형 그대로 발굴됐다. 전문가들은 이 갑옷이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남진 때 영향을 받아 제작된 찰갑이라고 주장한다.

지병목 소장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고구려 고분 벽화의 4C~5C경에 나타나는 그 인물풍속도라든지 여러가지 풍속도에 나타나는 고분들에서 이러한 말을 탄 개마무사라고 얘기하는 갑옷을 착용한 장수와 말들이 많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여기 보시는 이 그림(삼실총벽화)에서 볼 수 있는 모든 형태의 갑옷과 부속구들이 한세트가 발견된 것에 가장 큰 의의가 있을 것 같습니다."

 

직접 철판을 잘라 찰갑옷을 만들어 보기로 했다. 철편에 부식을 막기 위해 옻 칠을 두 번하고 옻에 철분을 섞은 흑칠을 세 번 했다. 흑칠을 한 철편은 검은색이 된다. 작은 철편 조각을 일일이 가죽 끈으로 엮어야 한다. 찰갑옷 제작엔 오랜 시간이 걸린다. 상위 하나에만 1300여개의 철편이 필요하다. 이렇게 만든 찰갑옷을 사람이 입고 편하게 전투할 수 있을까. 찰갑옷은 기대 이상의 활동성을 지니고 있었다.

 

찰갑이 철편을 엮어서 만들었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 구부러져서 몸쓰기가 훨씬 자유롭고 유연합니다. 이런 식으로 접혀가지고 훨씬 더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기 때문에 훨씬 더 과학적이라고 볼 수 있죠.

철갑옷의 강도를 실험해 보기로 했다. 먼저 철판을 통째로 이어 부친 판갑옷. 큰 철판 조각들을 리벳으로 이었다. 화살은 그대로 판갑옷을 뚫었다. 발사한 모든 화살이 판갑옷을 관통했다. 화살은 갑옷을 뚫고 깊이 박히어 빼내기가 어렵다. 사람이 입었으면 치명상을 입었을 것이다. 이번엔 고구려의 찰갑옷을 실험해 보기로 했다. 찰갑옷에도 그대로 화살이 박혔다. 그런데 반복해 발사하자 화살이 튕겨 나오는 경우가 생겼다. 박힌 줄 알았던 화살을 찰갑이 튕겨내는 것이다. 철편은 뚫리지 않고 휘어져 있었다. 가죽 끈으로 연결된 작은 철조각들은 유연하게 안으로 밀리면서 화살의 힘을 흡수한 뒤 튕겨냈다.

찰갑옷으로 말과 자신을 감싼 고구려 중장기병은 어떻게 싸웠을까. 고대 전투는 진과 진의 싸움이었다. 럭비경기처럼 두 개의 진이 서로 충돌한다. 진이 유지되는 한 전투는 팽팽하게 진행된다. 진을 깨뜨리는 자가 승리한다. 팽팽하게 진행되는 싸움. 진이 붕괴되는 순간 승자와 패자가 결정되고 대량 사상자가 발생한다. 전투에서 고구려 중장기병은 진의 앞에 위치했을 것이다. 궁수가 원거리 사격을 가하고 기병이 돌진한다. 철갑과 장창으로 무장한 중장기병은 적의 진을 돌파해 후방에서 공격한다. 이때 보병이 돌진해서 앞을 공격한다. 진이 깨쳐 찰갑기병과 보병에 둘러싸인 적은 전멸한다.

고대 가야지역에서 발굴된 철갑옷을 복원한 것입니다. 큰 철판조각을 그대로 이어 붙인 것입니다. 이는 창, 칼, 화살과 같은 공격용 무기에 대한 방어력을 높이기 위해서 입니다. 그러나 철갑옷은 화살을 정통으로 맞을 경우 이렇게 탄력이 없기 때문에 그냥 뚫리고 맙니다. 반면 고구려군의 찰갑옷은 화살을 막아 냈습니다. 화살을 맞을 경우 이 가죽 끈으로 연결된 철편들이 안으로 밀려 들어가면서 화살의 힘을 충격을 흡수하고 다시 튕겨내게 됩니다. 화살을 정통으로 맞을 경우에도 이렇게 철편들이 부러지지 않고 그냥 이렇게 휘어질 뿐입니다. 그리고 찰갑옷의 장점은 한 가지가 더 있습니다. 전투 중에 갑옷이 손상되더라도 이렇게 다른 철편으로 손쉽게 수선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고구려와의 전쟁을 지휘했던 수양제는 무모한 전쟁을 해서 나라를 망친 군주로 역사에 기록됩니다. 헌데 여기서 한 가지 의문점이 생깁니다. 혼란기의 중국을 300여 년 만에 통일한 고대 세계의 슈퍼파워 수나라. 이 나라의 황제가 수양제입니다. 헌데 그런 그를 고구려 침략의 모든 것을 건 무모한 폭군으로만 기억한다는 것은 뭔가 이상하지 않습니까? 수양제 그는 과연 어떤 인물이었을까요. 또 그는 왜 고구려를 침략해야만 했던 걸까요.

고질적인 중국대륙의 물 부족을 해결하기 위해 많은 중국왕조가 장강의 물줄기를 북으로 이었다. 경향대운하는 북경과 항주를 이어주는 운하를 말한다. 수양제는 통제거, 산양독, 강남하 세 개의 운하를 건설해 황하, 장강, 휘수를 연결했다. 풍부한 강남지방의 물산을 북쪽으로 빠르게 운송해 교역을 활성화하기 위해 운하를 건설한 것이다.

가장 큰 트럭으로는 30톤, 열차로는 60톤이지만, 이 배는 500톤이나 실을 수 있지요.

운하 건설엔 또 다른 목적이 있다. 양주 고운하에는 동관고도가 있다. 동문 밖의 선착장이라는 뜻이다. 동관고도 문 아래엔 수양제가 운하를 건설한 후의 모습들이 새겨져 있다. 수양제는 미인들을 거느리고 자신이 건설한 운하를 자주 유람했다. 사치스런 연회도 자주 열었다. 벽화엔 다른 한쪽엔 수의 깃발아래 모인 병사들이 보인다. 이들은 왜 여기 있을까.

 

군사적인 목적입니다. 주로 고구려에 대처하기 위해서 입니다. 수양제는 고구려를 세 번이나 공격했는데 모두 운하를 이용해 군사들을 수송했습니다.

중국을 통일한 수양제는 남으로 방향을 돌려 베트남의 임읍국, 오키나와의 유구국 그리고 말레이 반도의 마자가국까지 정벌했다. 서기 610년 정월. 지금의 낙양인 동도에서 각국이 수나라에 조배를 올리는데 채색기를 든 자만 18000명이었다고 한다. 수나라는 주변국가를 복속시키고 대제국의 위용을 자랑한 당대 초강대국이었다. 그러나 고구려는 수나라를 중심으로 한 국제질서를 정면으로 거부했다. 영양왕은 수의 입조요구를 거절했다. 수나라는 고구려를 용납할 수 없었다.

 

그가 고구려 출정을 준비하는 데는 5년이 걸렸다. 아주 철저하게 준비를 했던 것이다. 그가 가장 먼저 한 일은 대운하의 확장명령이었다. 이 대운하는 양자강에서 북경지역으로 연결되어 있었고 곡물과 다른 군수품을 운송하는데 사용되었다. 612년에야 그 일을 마칠 수 있었고 대운하의 완공을 위해 수백만 명이 강제 노역에 동원되었다.

산동성 래주 해변에서 대규모 전함건조가 시작됐다. 배 건조의 책임자는 유주총관 원홍사(元弘嗣). 그는 가혹하게 일군들을 다루었다. 물속에서 주야로 일을 하게 해서 사람들이 일을 피하기 위해 손발을 자르고 복스러운 손, 복스러운 발로 불렀다고 전한다.3) 그리고 300척의 배가 완성됐다. 고구려를 놔두면 다른 민족들의 이반이 이어질 것을 두려워 한 수양제는 전쟁을 선포한다. 우문술이 지휘하는 좌군 12군, 우중문이 지휘하는 우군 12군, 수양제의 친위군 6군. 모두 합쳐 113만 3800명이 국경에서 고구려로 출발했다. 행렬의 길이만 960리에 달했다. 수군도 산동반도를 출발 대동강으로 향했다. 사상 유례가 없는 대출정이었다.

 

수나라가 동원한 약 110만 명에 달하는 병력은 20세기에 이르기까지 1차세계대전과 2차세계대전를 제외한다면 거의 없었던 것으로 판단됩니다. 고대 당시 고대 서양의 전투규모가 고작해야 5만에서 10만 명 그리고 한국전쟁 때 중공군이 약 40만 명에서 60만 명 정도 참전했다는 것으로 판단한다면 수나라가 고구려에 약110만 명 정도를 동원해서 공격한 것은 거의 어마어마한 규모였다고 판단됩니다.

당시 수나라는 890만 가구 인구는 4600만명 정도였습니다. 고구려의 당시 가구수는 69만호 정도였는데 한 가구당 가족을 5명으로 계산한다면 인구는 400만명 정도였을 겁니다. 수나라의 10분의 1도 안 되는 숫자입니다. 참전한 수나라의 군인은 113만명 지원병까지 합친다면 200만 명이 넘는 대군이 고구려를 공격합니다. 당시 수나라의 군사 수는 고구려 남성 전체의 절반이 넘는 숫자였습니다. 전투에 동원 가능한 성인남자의 수를 계산한다면 수나라의 병력규모는 고구려를 압도합니다.4)

수나라 100만 대군은 요하로 몰려들었다. 요하는 요동을 차지한 고구려로 가는 첫 관문. 요하 건너편에 고구려 군이 있었다. 수나라군은 요하를 건너기 시작했다. 선봉대는 강을 건너기 위해 부교를 설치했다. 그러나 부교가 짧아 강 건너 편에 닿지 못했다. 수나라 군은 강으로 뛰어들어 건너편 언덕으로 오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고구려의 공격으로 수나라 1군 사령관인 맥철장(麥鐵杖)이 전사하고 말았다. 수나라군은 첫전투에서 예상치 못한 엄청난 피해를 입고 말았다.5)

 

선봉군 대장 맥철장이 요하에 제일 먼저 도착을 했는데 고구려 군이 약 한달 동안 선봉부대가 넘어오지 못하게 합니다. 그리고 맥철장을 비롯해서 많은 지휘관을 살해합니다. 고구려가 요하 전투에서 한달 정도의 시간을 수의 진격을 막았던 것은 뒤의 수나라 작전들을 잘 수행하지 못하도록 만듭니다. 수나라는 속전속결로 해서 진격을 해야 되고 맥철장의 부대가 처음에 거점을 만들어야 하는데 수나라 본진이 올 때까지 붙잡아 둡니다. 그 후의 전쟁을 유리하게 이끄는 첫번째 승전보라 할 수 있습니다.

본진이 합류하자 수나라는 한달 만에 겨우 요하를 건널 수 있게 됐다. 수나라가 강을 건너 공격하자 고구려는 만 명의 희생자를 내고 요동성으로 후퇴했다. 그러자 수나라 대군이 요동성으로 몰려 들었다. 수양제가 단번에 고구려를 제압하기 위해 데려온 백만 대군이 요동성을 포위했다. 그리고 본격적인 전쟁이 시작됐다. 전투는 치열했다. 하지만 성과는 없었다. 고구려의 성벽은 너무 높고 튼튼했고 고구려의 저항도 완강했다. 2월에 수양제가 요동성에 도착했지만 넉 달이 되고 6월이 돼도 요동성은 함락되지 않았다. 수나라 군은 300년 만에 중국을 통일한 강한 군대였다. 지휘관과 병사들은 전쟁터에서 단련된 사람들이었다. 강남에서 북쪽의 돌궐까지 온갖 종류의 군대와 싸운 경험이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백만 대군이 요동성 하나를 깨지 못한다.

진노한 수양제는 장수들을 질책했다. 그대들은 스스로 지휘가 높고 좋은 가문임을 믿고 나를 어리석은 자로 대우하려 하느냐! 그대들이 내가 오는 것을 좋아하지 아니한 것은 아마 이 낭패를 볼까 염려한 까닭이었을 것이다. 내가 지금 여기 온 것은 바로 그대들의 수행을 보아 목을 베려 함이다. 그대들이 지금 죽음을 두려워하여 전력치 아니하니 내가 그대들을 능히 죽이지 못할 줄로 여기느냐!

 

요동성 구조는 이 그림에 따르면은 크게 외곽이 하나 있고 그 안에 내곽이 하나 있는 이중구조의 성곽입니다. 그리고 외곽에 보면 성문이 표현되어 있는데 성문 주변으로는 옹성으로는 보기 어렵지만 치가 나와서 성문을 보호할 수 있는 그런 시설로 되어 있습니다. 문의 주변에 치가 있고 성벽주변에 치가 5개 정도가 배치돼 있습니다.

치는 앞으로 튀어나온 방어용 성벽이다. 적이 공격하면 성벽 위에서 포위해 집중공격하기 위한 것이다. 옹성 역시 적을 포위해 공격하기 위한 것이다. 어긋문은 엇갈린 두 개의 성벽 사이에 만든 문이다. 문으로 들어오는 적은 고립된다. 당시 고구려의 축성술은 매우 뛰어났다. 흔적은 남아 있지 않지만 요동성도 치와 같은 방어시설을 갖춘 난공불락의 성이었을 것이다.

 

요동성은 기록에 따르면 대략 높이가 30m를 넘는 굉장히 큰 성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를 수나라 본진이 수백겹을 에워쌓다는 표현이 나오는데 수나라 군대는 이 요동성에서 약 4월 중순부터 철수하게 되는 7월 말까지 3개월 동안 이 성 하나를 점령하지 못합니다.

병서 무경총요엔 고대 중국에서 사용된 공성용 무기가 상세히 적혀 있다. 성을 공격하는 기본 장비인 사다리차 운제(雲梯), 성의 높이만큼 올라가서 성을 내려다보며 공격하는 소차(巢車, 상하이동식 공성무기)가 보인다. 성벽에 돌을 던지던 투석기를 복원해 보기로 했다. 당시 투석기는 사람의 힘을 이용해 돌을 던질 수 있게 한 구조다. 밧줄이 많이 연결될수록 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투석기를 당길 수가 있다. 작은 투석기는 40명, 큰 것은 120명의 병사가 밧줄을 동시에 잡아 당겨 돌을 날려 보낸다. 그러나 요동성은 요지부동이었다. 고구려 군은 수나라와의 전면전을 피해 요동성 안에서 수성전을 완강하게 펼쳤다. 이때부터 수나라 백만 대군의 보급에 문제가 생기기 시작한다.

데이비드 그래프(David Graff)교수, 캔자스 주립대 중국전쟁사

고구려는 수나라에게 큰 전투를 치를 기회를 주지 않았다. 고구려 군은 요새 안으로 들어가고 수나라 군은 요새 밖에서 식량이 바닥난 상태로 지내게 되었다. 왜냐하면 요새밖에 있는 모든 곡물을 안으로 거두어 들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수나라 군은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당시 고구려 군의 전술은 육군사관학교 수업에서도 인용된다. 청야입보(淸野入保). 청야는 들을 비운다는 말. 입보는 성안으로 철수해 수성전을 벌이며 적을 고갈시킨다는 말이다. 고구려 군이 사용한 청야입보 전술은 19세기 초까지 서양에서도 유효한 전술이었다.

 

청야는 들을 비운다는 말인데 한마디로 말하면 평상시에는 농업이나 목축업 같은 일반적인 생활을 하다가 적이 공격해 왔을 때 들을 완전히 깨끗하게 비우고 성으로 다 들어가서 군, 관민이 다 적에게 대항하는 그런 개념입니다. 당시의 동아시아에서 일반적으로 보급을 현지조달을 많이 했었습니다. 그래서 적에게 현지 조달을 허용하지 않기 위해서 고구려는 자기들의 생활터전을 전부 다 불태우고 완전히 비우고 나서 성으로 들어가서 결연하기 방어준비에 임했던 것입니다.

프랑스의 나폴레옹이 러시아를 침략했을 때 러시아 군도 청야전술을 구사합니다. 들판을 불태우고 러시아 내륙 깊숙이 프랑스 군을 끌어드리는데 추운 겨울 보급선이 끊어진 나폴레옹 군은 배가 주리자 도망치듯 철군하다 러시아군의 기습에 밀려 엄청난 수에 사상자를 내고 맙니다. 이렇게 전쟁에서 진 나폴레옹은 황제자리에서도 쫓겨나게 됩니다. 을지문덕도 수나라 군을 고구려 땅 깊숙이 유인해 살수에서 마지막 일격을 가합니다.

끝내 요동성을 함락시키지 못한 수나라 군은 요동성을 우회한다. 수양제는 30만 별동대를 고구려의 수도 평양으로 직접 내려 보낸다. 병력 수에서 열쇠였던 고구려 군은 이동로를 장악하고 게릴라 전을 벌었다. 평양성으로 가는 수나라 군의 보급부대가 주요 목표였다. 남하하던 수나라 군은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고구려 군과 대치하게 된다. 이때 고구려 수나라 전쟁을 통틀어 가장 극적인 상황이 벌어진다. 한 고구려 장수가 홀연히 수나라 진영을 찾아 온 것이다.

놀랍게도 그는 고구려 군의 지휘관 을지문덕이었다. 그는 고구려와 수나라의 항복 협상을 시작하기 위해 온 것이다. 을지문덕은 수나라 군의 지휘관 우중문, 우문술과 거짓으로 항복 협상을 벌이면서 수나라 진영을 염탐했다. 왜 고구려 군의 최고 지휘관이 이런 위험한 임무를 직접 수행했을까.

 

을지문덕 같이 중요한 인물이 수나라 군에 가서 포로가 된다면 고구려 군 자체가 위험에 빠지게 됩니다. 그래서 을지문덕이 수나라 군대진영까지 찾아 간 것은 적정을 관찰하는 것보다는 수나라 군대의 진격을 지연시키는 것에 목적이 있지 않았나 생각을 합니다.

협상을 마치고 돌아가는 을지문덕을 우중문은 사람을 보내 돌려 세웠다. 할 말이 있으니 다시 수군 진영으로 돌아가자는 것이었다. 고구려 군 지휘관 을지문덕을 잡으려는 수나라의 술책이었다. 하지만 을지문덕은 돌아보지도 않고 압록강을 건너 돌아갔다. 수나라 군은 적의 사령관을 눈 앞에 두고 놓친 것이다. 이후 고구려 군은 일곱 번 싸워 일곱 번 패하면서 수나라 군을 고구려 평양성 가까이 끌어 들었다. 시간을 지연시키면서 수나라 군의 식량을 고갈시키려는 을지문덕의 작전이었다. 수나라 병사들은 100일치 식량을 가지고 요동성을 출발했다. 하지만 많은 지친 병사들이 무거운 식량을 이미 모두 몰래 버린 상태였다.

꿔샤오린 교수(낙양사법대 역사학부)

군사물자 운송, 특히 양식운송이 매우 어려웠다. 보병들이 많은 식량과 무기를 메고 전쟁을 하기가 너무 힘들었다. 어떤 병사는 식량을 땅에 몰래 묻고 가지도 했다. 그래야 자신이 지고 갈 물건의 무게가 줄기 때문이었는데 그러다보니 나중에 먹을 식량이 부족했다.

을지문덕의 전략은 적중했다. 을지문덕의 청야전술은 수나라 군이 고구려 현지에서 식량을 구할 수 없게 만들었다. 들엔 곡식 한 톨 남아 있지 않았을 것이다. 수나라 군이 평양성 30리 앞에 오자 을지문덕은 역사에 남을 시 한 수를 우중문에게 보내 조롱한다.

神策究天文 신기한 책략은 하늘의 이치에 달했고, 妙算窮地理 묘한 전술은 지리를 통달했구나.
戰勝功旣高 싸움마다 이겨 공이 이미 높았으니 족한 줄 알고 그만 둠이 어떠하리.

 

마지막 구절에공은 이미 하늘에 다했으니 돌아가시게라는 말은 사실은 너희들의 식량은 이미 떨어진 사정을 다 알고 있다. 너희들이 돌아가지 않으면 어떡하겠느냐는 이미 알고 있는 상황에서 너가 이미 다 공을 이루었으니 돌아가라. 다시 말하면 너희들이 더 이상 할 것이 없지 않느냐! 점잔이 말했지만 우리가 너희들이 철수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철수를 종용하는 시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미 먹을 것이 바닥나 전투를 할 수 없었던 수나라 군사는 평양성 30리 앞에서 철수할 수 밖에 없었다. 이때 고구려의 반격이 시작됐다. 후퇴하는 수나라 군의 배후를 치기 시작했다. 쫓기던 30만 별동대는 살수 지금의 청천강을 건너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역사적인 살수 대첩이 벌어진다. 단재 신채호는 고구려 군이 미리 막아둔 상류의 둑을 터놓아 수군을 공격했다고 기록했다.6)

그런데 과연 그 당시 청천강에 둑을 쌓는 것이 가능한 일 일까. 매번 봄 청천강에서는 나무로 간단히 쌓은 둑을 터놓는다. 상류지역에서 벌목한 나무를 물살의 힘을 이용해 하류로 수송하기 위해서다. 목재는 물길을 따라 서해까지 내려가 중국으로 수출된다. 을지문덕도 이런 방법으로 둑을 쌓아 수공을 했을지는 의문이다. 과연 전쟁 기간에 엄청난 량의 물이 채워질 둑을 건설할 수 있었을까.

 

청천강 같이 큰 강을 옛날 기술로 막았다가 터뜨린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강을 막는데만 해도 오늘날에도 몇 년의 공사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군대라는 것은 보통 주변의 40km 이상의 정찰대를 운영하면서 행군하게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상류의 둑을 그 이전 시기에 막았다고 한다면 수나라 군대가 그날 그 시점에 도하하는 것을 알고 한 2, 3년 전부터 공사를 했어야 가능하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3만 여명이 참가한 국제 마라톤 대회(인천대교개통기념). 살수를 건너던 30만 수나라 별동대 병력의 10분의 1정도의 인원이 참가했다. 인천대교 주탑 간의 거리는 약 1km. 육안으로 보기에도 대열은 삽시간에 수킬로미터로 늘어졌다. 만약 30만이 달리기 시작하면 그 길이는 더욱 늘어날 것이다. 이것으로 볼 때 살수를 수나라 군 30만이 동시에 건너는 건 불가능해 보인다. 사서엔 수공에 관한 기록이 없다. 강을 건너는 수군의 후방을 공격했다는 기록만이 있다. 고구려 군의 공격에 수나라 군의 진영이 깨졌다.

 

어떤 군대가 후퇴하면서 진영을 유지하기란 굉장히 힘들다고 판단이 됩니다. 그 이유는 철수 작전 중에 후미에 남겨진 부대의 경우에는 심리적으로 굉장히 압박을 받게 되고 자신들의 생명에 위협도 받게 되는 것이고 후방에서 직접 적과 교전해야 하는 상황입니다. 모든 것이 어려운 상황에서 특히 후미부대라도 남아서 적과 교전을 하는 상황에서는 전투력을 제대로 발휘하기는 힘들다고 판단이 됩니다.

별동대 일부는 강 건너에 일부는 강 가운데 후진은 강을 건너지 못한 상황. 병력이 분리된 수나라 군은 속수무책이었다. 고구려 군의 기습은 수나라 군을 공황상태에 빠뜨려 붕괴시켰을 것이다. 을지문덕의 고구려 군은 진이 깨진 상태로 패주하는 수나라 군을 추격하며 전멸시켰다. 백만 대군으로 북경을 출발할 때 수양제는 이런 비참한 결과를 꿈에도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게 전쟁이 끝났다. 7세기 세계 최대의 전쟁의 결과는 아무도 믿을 수 없는 것이었다. 그 한가운데 을지문덕의 살수대첩이 있었다.

 

을지문덕은 사실 수세에 방어전략을 구사했지만 모든 상황을 고려해서 그 주도권을 가지고 있었고 자기가 원하는 시간과 장소에서 적을 끌어 들었고 그리고 적이 약했을 때 공격을 하므로 적의 전투력을 제압하는 아주 뛰어난 전략가였다고 생각합니다.

고구려는 요동성, 평양성, 살수 이렇게 전쟁의 운명을 가른 세 곳의 전투에서 모두 승리했습니다. 수나라는 고구려의 전략에 말려서 제대로 전투 한 번 해보지 못하고 치욕적인 패배를 당합니다. 과연 무엇이 고구려를 승리를 이끌었던 걸까요. 고구려 군의 청야전술과 수성전이 승리의 한 요인으로 꼽힐 수 있을 것입니다. 또 삼국사기를 쓴 김부식은 을지문덕의 공을 이야기 합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힘과 전략을 믿은 고구려 군의 필사 항전의 의지가 아니었을까요.

 

 

Posted by 원주유
고구려 역사와 문화2013. 9. 14. 17:55

 

우리 역사의 인물들중 고구려를 빛낸 담징

부두는 떠나는 사람, 보내는 사람으로 붐비고 있었습니다. 담징은 여러 승려들에게 옹위되어 묵묵히 부두에 들어섰습니다. 옆에서 들썩하는 소란에도 아랑곳없이 바다 먼 곳을 바라보며 발을 옮기는 그의 걸음은 어쩐지 가볍지를 않았습니다. 그들의 일행이란 몇이 안 되며 봇짐도 단출했습니다.

 

“대사님, 부디 옥체 보존하시옵소서. 예서는 날마다 기다리겠소이다. 아무쪼록 무사하시옵기만 바라나이다.” 따라 나온 중들이 짐을 넘겨주며 서운함을 표시하나 그는 별로 기색을 달리하지 않았습니다. 담징은 드디어 배전에 올랐습니다.

 

순풍에 돛을 달고 물 위로 미끄러져 가는 배의 갑판에 서서 바람에 펄럭이는 가사(중의 겉옷)자락을 부여안은 채 멀어져가는 고구려 땅을 바라보며 기약 없는 길을 떠나는 담징의 마음은 심란했습니다.

 

‘아, 나는 과연 언제면 다시 이 길을 돌아올 것인가! 외적의 준동이 심하고 나라안팎은 소란하기 그지없는데…’

 

오래전부터 호시탐탐 침략의 기회를 노리던 당나라의 준동이 근간에 와서는 더욱 잦은데 이 땅, 이 집을 뒤에다 두고 원수의 목에 칼 한번 대여보지 못한 채 장삼을 입고 기약 못할 길을 떠나려니 더욱 발등이 밟혔습니다. 그러나 아니 갈 수 없는 길이었습니다.

 

일본의 초청은 이미 수락되고 자신은 왕의 어명을 받은 신하의 몸이니 달리 할 수 없는 일이 아닌가!

담징은 579년 평원왕이 집권하고 있던 시기에 태어났습니다.

어려서부터 남달리 그림에 호기심을 가지고 있었던 담징은 무엇을 하나 보아도 그저 스치지 않았으며 반드시 다시 한 번 재현해보고야 말았습니다. 그가 일찍이 중이 된 것도 그림에 뜻을 두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른 나이에 승려가 된 담징은 벌써 젊은 시절에 불교만이 아니라 유교교리까지 꿰뚫었고 기술 분야에도 조예가 깊은 인물로 명성이 났습니다.

 

이런 담징이 국왕의 어명을 받고 일본의 문화건설을 도와주기 위해 사랑하는 고구려 땅을 떠난 것은 610년 3월이었습니다. 그때 그는 30대의 장정이었습니다.

 

유구한 역사와 문화를 자랑하는 우리 민족은 오랜 옛날부터 인류문화의 공동적 보고에 크게 기여한 창조와 발명의 전통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이전시기에도 그러했지만 삼국시기에만 해도 동방에서 가장 앞섰던 우리 민족은 이웃나라들의 기술과 예술발전에 커다란 영향을 주면서 성심성의로 도와준 사실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중국과 일본의 역사기록에도 수다히 남아있습니다.

 

백제의 학자 왕인은 일본에 건너가 글 모르던 그곳 사람들에게 처음으로 천자문을 가르쳤고 고구려의 중이며 의사인 혜자는 야마토 왕권의 집권자 성덕태자의 스승으로 활동했다고 합니다.

 

담징 역시 일본의 거듭되는 초청으로 그곳에 건너가 대고구려를 빛낸 화공이었습니다.

 

당시 일본으로 말하면 그들이 자랑하는 이른바 아스카문화가 고조기에 이른 때였습니다. 이 아스카문화 역시 백제로부터 불교가 처음으로 들어가고 삼국과의 문물이 교환되면서 우리의 학자, 기술자, 예술가들에 의해 시작되고 이룩되었습니다.

 

특히 고구려회화문화는 일본의 고대, 중세미술발전의 밑천으로 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다카마즈무덤벽화, 법륭사 금당벽화, 친수국 바탕그림들만 놓고 보아도 잘 알 수 있습니다. 무덤벽화들에 그려진 인물형상은 아래바지, 허리에 띠를 맨 겉옷, 머리에 쓴 두건 같은 것은 고구려 사람들과 꼭 같습니다.

 

더욱이 힘이 넘쳐 나고 그런가 하면 매우 섬세하면서도 우아한 필치의 형상수법들은 고구려의 회화예술이 일본에 건너간 것임을 설명 없이 그대로 보여 주는 산 실물입니다.

 

담징이 일본으로 건너 갈 당시는 추고천왕(여천왕) 스미코의 사위인 성덕태자가 나라를 다스리고 있던 시기였습니다. 나라의 문화건설에 큰 관심을 돌리고 고구려의 발전된 문화를 받아들이기에 힘쓰던 성덕태자는 백제의 사원건축가들을 초빙하여 근 8년간에 걸쳐 가장 큰 법당인 법륭사를 지어놓았습니다. 담징은 바로 이 법륭사의 벽면 벽화장식을 위해 일본으로 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법륭사는 금당(황금으로 장식됨) 중심 불전과 5층탑, 중문, 회랑으로 꾸려지고 그 옆에는 동. 서, 북으로 실들과 강당이 배치되었으며 또 고루와 종루를 비롯하여 훌륭히 건설된 절간입니다. 그래서 이 건물벽화를 아무에게나 맡길 수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불교경전에 능통하고 그림과 채색에 뛰어났으며 또한 종이와 색감제작에서 기술자로 이름이 났던 담징이 바로 사원벽화를 담당하게 되었습니다.

 

담징이 일본에 도착하자 성덕태자는 자기의 거처인 왕궁으로 이들 일행을 반갑게 맞아들였고 저들의 스승으로 높이 모셨으며 법륭사에 자리를 잡도록 했습니다.

 

“고구려스님에게 불편이 없도록 하라!”

성덕태자는 고행과 수도에 그들이 마음대로 드나들도록 허가했고 일본의 이름난 중이었던 호오죠오와 기거를 같이 하도록 했습니다.

 

장대한 체구에 꾹 다문 입, 시원스런 걸음걸이, 늘어진 가사 자락을 한손으로 올려붙인 채 법륭사를 한 바퀴 돌아 본 담징은 머리를 끄덕이며 깊은 사색에 잠겼습니다.

담징은 먼저 벽화창작을 위한 준비부터 했습니다.

그는 종이, 먹, 물감제조기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물론 일본에도 일부 문방구들과 기재들이 준비되어 있었지만 그 모든 것이 그의 눈에 들지 않았습니다.

 

담징은 모든 것을 처음부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을 시켜 먼저 질 높은 먹을 갖추도록 기술적인 지도를 주었고 손수 색감들을 하나하나씩 제조했습니다. 그리고 또한 일본에서는 그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희한한 종이도 만들어 냈습니다.

 

그뿐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연애’라고 이름 지은 훌륭한 물차를 만들었습니다. 이 물차가 만들어짐으로써 사람의 힘이 아니라 흐르는 물의 힘을 이용하여 불상조각과 금속공예품을 만들어내는 데서 하나의 개변이 일어났습니다. 특히는 농민들이 곡식을 제분하고 수공업자들이 광석을 분쇄하는데서 혁신이 일어났습니다. 이 희귀한 사실에 일본원주민들은 담징을 ‘고구려스님’이라고 존대했습니다.

 

“정말 신묘하지요.”

“글세, 말이외다. 우린 생각도 못했는데 고구려스님이 이런 것을 다…”

이 고구려스님이 바로 힘겨웠던 저들의 노동을 수월하게 만들어준 것이었습니다. 하기에 다시없는 은인으로, 위인으로 우러렀습니다.

 

담징이 일본 땅에 건너 간지도 근 2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습니다. 이제는 어지간히 준비도 갖추어졌습니다. 법륭사의 주지를 비롯한 그곳 승녀들은 이제나저제나 하면서 그가 빨리 붓을 들기만을 초조하게 기다렸습니다.

 

하지만 담징은 선뜻 일에 달라붙지 않았습니다. 어쩐지 생각은 두고 온 대동강기슭의 금잔디 밭으로만 달려갔고 고국에 있을 때의 아름다운 추억들이 꼬리를 이어 떠올랐습니다.

 

‘아, 벌써 이태가 되었구나. 모든 것이 무고한지. 그 무슨 변고라도 없는지.’

 

이즈음 일본의 중들 속에서는 담징이 저희들의 땅에 온지도 퍽이나 지났는데 그림은 그리지 않는다고, 아무래도 수상하다는 말들이 나는가하면 승적에도 없는 건달 승이어서 다른 재간은 있어도 그림만은 그릴 줄 모른다고까지 수군 수군댔습니다. 이 흉흉한 분위기에 어느 날 고구려에서 함께 떠난 법정이 이젠 붓을 들어야 하지 않겠는가고 조용히 권고했습니다.

 

담징은 근엄한 표정으로 천천히 대답하는 것이었습니다.

 

“건달 승이란 말은 열백 번 듣겠소만 나라를 모르는 중이라는 말은 죽어도 듣지 못하겠소. 내 나라 대고구려를 위해서라면 어떤 일도 주저하지 않을 담징임을 대사도 부디 알아주오.”

 

그는 시름겨운 눈으로 먼 서쪽하늘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순간 법정대사의 머리에는 언제인가 담징과 함께 길을 걸을 때 하던 그의 말이 불시에 떠올랐습니다.

 

“우리는 고구려 사람이다. 그러니 부처를 믿어도 고구려를 위해 믿어야 한다. 부처만 알고 제 나라를 모른다면 부처의 종일뿐 고구려 사람은 아니다.”

 

과연 옳은 말입니다. 담징은 이런 사람이었습니다.

 

나서 자란 고향과 그 땅에 대한 그리움으로 하여 잠을 이루지 못하던 어느 날 밤 담징은 이미 정제해놓은 채색감들을 하나하나 검열해 보고 벽면에 마주 섰으나 어쩐지 마음만은 개이지 않았습니다. 몸은 비록 타국에 있어도 언제나 마음만은 바다건너 고구려에 가 있었습니다.

 

요즈음 들리는 소문이 외적들이 쳐들어와 고구려는 시련을 겪고 있다고 했습니다. 물론 대고구려는 적을 지경 밖으로 반드시 내몰고 승리의 큰 북을 울릴 것이지만 아무튼 힘겨운 싸움을 하리라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습니다.

 

마침 법륭사 주지가 숨 가쁘게 달려오더니 그를 얼싸 안으며 염치없이 고구려에 쳐들어갔던 외적들이 가랑잎 같이 흩어지고 몰살되었다는 기적 같은 소식을 전해 주었습니다.

 

주지는 두 손을 모으고 손목의 염주를 매만지며 아뢰는 것이었습니다.

 

“대사님, 군사들이 전장에서 대고구려의 명예를 떨쳤으니 담징대사님은 화필로써 명성을 떨쳐야 하나이다. 법륭사에 영광을 베풀어 주소이다.”

주지는 진심으로 기뻐하며 인사를 드렸습니다.

승전의 소식은 쓸쓸하던 담징의 마음을 높뛰게 했습니다.

‘아, 대고구려는 이겼구나. 끝끝내 동방강대국의 이름을 떨치고야 말았구나. 이제 내 무엇을 아끼고 주저하랴. 대고구려의 빛발로 해외만방을 밝히는 이 성업에 한 몸을 바치리라.’

 

드디어 담징은 큰 붓을 들었습니다. 법정대사가 숭엄한 자세로 금당 출입문을 지키고 서 있을 뿐 주변은 쥐 죽은 듯 고요했다. 이렇듯 온몸이 그대로 고구려의 넋이 되어 낮과 밤이 따로 없이 담징은 벽화를 그려나갔다.

 

힘 있게 긋고 또 찍고 채색을 먹이고… 마지막 붓을 놓았을 때 담징은 금당바닥에 뿌리를 내린 듯 그 장대한 체구가 움직일 줄 몰랐습니다.

벽화의 완성을 보려고 발 벗고 달려온 주지와 승려들도, 함께 동행 했던 고구려의 중들도

‘아!’ 하는 탄성을 지를 뿐 다른 말을 잇지 못했습니다. 과연 명화에 또 명화였습니다.

 

금당 벽의 열두 폭 불교관계의 크고 작은 그림들과 천정 밑의 20여개 작은 벽면에 두 개씩 그려놓은 비천(하늘을 나는 선녀) 그림들은 그야말로 대황홀경이었습니다.

 

반듯한 흙벽 위에 모래와 수사(풀)를 바르고 또다시 아마와 둘을 섞어 매질한 후 그 위에 백토를 칠하여 티 없이 매끈한 면을 마련하고 그려나간 불교교리를 내용으로 하는 6편의 ‘아미타여래상’은 구도가 대칭적이면서 성격이 특색 있게 살아난 것으로 하여 더욱 이채로웠습니다. 특히 장방 안 연꽃방석 위에 위엄 있게 틀고 앉은 주인공의 모습은 예술적 처리에서 매우 정확한 것으로서 승려들과 화공들의 경탄을 자아내도록 했습니다.

 

또한 가는 선으로 연두색, 연한 붉은색, 곤청색, 재빛색을 조화롭게 먹여나감으로써 그 화려함이란 이를 데가 없었습니다.

 

단숨에 그어 내린 굵고 진한 선, 가늘고도 연한 선으로 성격을 살리고 운동감을 드러낸 인물들의 각이한 형상, 형태를 사실적으로 똑똑히 하면서도 미묘한 움직임마저도 하나같이 놓치지 않은 선묘운필의 묘미, 어디까지나 격조 높은 벽화예술의 높은 경지를 이룬 이 조화는 그 앞에 선 사람들의 마음을 금시 숭엄하게 만들었습니다.

 

완전히 넋을 잃은 주지는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바닥에 합장한 채 엎드려 ‘관세음보살’을 속으로 외우고 또 외우며 손을 비벼댈 뿐이었습니다.

 

담징 역시 외적을 보기 좋게 물리친 조국 고구려에 대한 생각으로 벽면을 향해 ‘남무관세음보살’하고 조용히 되뇌며 마음에 손을 얹습니다.

 

고구려의 이긴 싸움이 그에게 힘을 주고 붓을 들게 했던 것입니다. 만약 그 폭풍 같은 희소식이 전해지지 않았던들 담징은 아직도 시작을 못한 채 망설이고만 있었을 것이 아닌가!

 

“이 벽화는 세상에서 더는 찾아 볼 수 없는 그림이요. 담징대사의 그림솜씨는 참으로 신비롭소이다.”

주지를 비롯하여 모든 승려들이 입을 모아 연해연방 추어 올렸습니다. 하지만 담징은 조용히 뇌이었습니다.

 

“이 벽화가 잘되었다면 그것은 나의 화법이 신비로워서가 아니라 바로 고구려의 얼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요. 그 어떤 대적도 감히 굽힐 수 없는 슬기롭고 지혜로우며 용감하고 강의한 고구려 사람들의 얼이 있어 이 벽화가 완성되었음을 알아야 할 것이요.”

과연 이 벽화야말로 담징의 숭고한 애국의 산물이었습니다.

벌써 가사를 걸친 주지가 목탁을 두드리고 수많은 승려들이 합장배례를 하고 또 한다. 은은한 향불의 유연한 연기 속에 담징은 대고구려의 아들임을 온몸으로 느꼈습니다.

이와 같이 법륭사의 벽화는 담징에 의하여 훌륭히 마련되었습니다.

법륭사의 금당벽화는 신라의 경주 석굴암, 중국의 운강석굴과 함께 동양3대걸작중의 하나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법륭사의 벽화는 동방미술사는 말할 것도 없고 세계미술사에서도 특이한 자리를 차지하며, 더구나 이는 일본의 회화미술의 첫 장을 이루는 명화로 꼽히고 있습니다.

 

이 벽화는 창작된 때로부터 천 수백여 년이 지났으나 색 하나, 선 하나 변함없이 그대로 보존되어 세계적인 보물로 미술가들의 찬탄의 대상으로 되어왔습니다.

 

그러던 중 1949년 1월 법륭사가 불타면서 금당의 벽화를 잃게 되었습니다.

그 후 1968년 수많은 일류급 화가들이 최상의 자재로 다시 복원해놓았다고 하지만 원화를 살리지 못했다고 그들 자신이 말하고 있습니다. 고구려의 담징이 그린 벽화는 그만큼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Posted by 원주유
고구려 역사와 문화2013. 9. 14. 17:26

 

 

아차산 고구려 마을,고구려 대장간이 고구려의 핵심적인 곳이였다.

우리 나라에는 고구려 유적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고구려가 북한과 만주 벌판을 기반으로 했던 탓에 백제와 신라에 비해서 고구려 유적이 적고,

고구려의 흔적을 만나기도 쉽지 않지요.

그런데 우리나라에 거의 유일하게 있는 고구려 유적이 있으니 바로 아차산입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광개토대왕이 중국 대륙에 생겨나는 나라들을 상대로 북진을 했던 것과 달리

광개토대왕의 아들인 장수왕은 한반도 내에 있는 나라들을 정복하고자 하는 남진 정책을 펼쳤습니다.

장수왕은 고구려의 수도를 국내성에서 평양으로 천도했는데,

어떤 시각에서는 이를 중국과의 대결에서 고구려가 밀려 평양 천도를 했다는 시각도 있지만

한편에서는 광개토대왕 때 북쪽의 넓은 영토를 차지했고, 장수왕은 남진 정책을 폈기에,

남진에 유리한 평양으로 천도를 했다는 의견도 있더라구요.

아무래도 남진 정책에 물적 인적 자원이 풍부하고, 연락 체계가 원활히 진행 될 수 있는 수도가 가까이있다는 것은

남진 정책에 이어서 유리한 점일 테지요.

아이와 함께 둘러 본 고구려 대장간 마을은 고구려 유적이 아니라

고구려의 대장간 마을을 재현한 곳이며, 드라마 촬영장으로도 쓰였던 곳이었지만,

실제로 고구려의 유물과 보루 등이 발굴되고 있는 아차산에, 고구려의 벽화를 근거로 하여 재현한 마을이이었습니다.

 

비록 재현한 마을이지만, 이 기회에 고구려에 대해서 좀 더 알 수 있는 기회로 만든다면 더 좋겠지요?

그런 의미에서 두 권의 책을 소개합니다.

왼쪽의 웅진 주니어에서 출판 된 어린이 박물관 고구려는 유물 중심으로 고구려에 대해서 소개하고 있습니다.

여러 유물을 통해서 고구려 사람들의 생활 모습을 살펴 볼 수있으며.

유치원에서 초등 저학년의 아이들이 보기에도 참 좋은 책 같습니다.

오른쪽의 주니어 김영사에서 출판한 고구려사 이야기는 역사적 사실을 중심으로 고구려에 접근한 책입니다.

동명성왕에서 출발해 왕을 중심으로 하는 역사적 사실을 살펴 볼수 있는데,

초등 고학년 아이들까지 쉽게 읽을수 있을 것 같아요.

우리나라의삼국 시대의 유물을 전시하는 곳에서는 고구려 유물이 복제품의 형태로라도 전시 되어있습니다.

민혁이와 저는 지난 겨울 국립 중앙 박물관 꼼꼼 나들이란 주제로

국립 중앙 박물관의 유물을 세세히 둘러 본 적이 있었습니다.

이곳 대장간 마을에 고구려의 유물이 조금 전시 되어있기는 한데, 상당히 빈약합니다.

대장간 마을을 둘러보면서 고구려 유물이 함께 전시되어있는 박물관 나들이를 하셔도 참 좋을 것 같네요.

 

고구려가 남진 정책을 진행하면서 당시 한강의 주인이던 백제와 대치했던 곳이 바로 아차산이었습니다.

한강을 건너 아차산의 맞은편이 바로 백제가 한강 유역을 고구려에게 내어 주기 이전에 끝까지 저항했던

한성 백제의 성... 풍납토성과 몽촌 토성이 있던 곳입니다.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은 비교적 평평한 지형에 위치한 성으로,

아차산에 주둔했던 고구려 병사들은 높은지형을 이용해 백제의 도읍을 한눈에 내려다 보며 정세를 살폈다고도 해요.

큰 세력을 떨치던 고구려가 코 앞에서 먹잇감을 노리 듯 백제를 들여다 보았을테니,

백제는 또 얼마나 두려웠을지 짐작됩니다.

 

이곳 아차산과 마주한 곳에 백제의 수도 위례성이 있었으니,

고구려와 대치했던 백제에 대해서도 아차산을 둘러보며함께 살피면 좋지 않을까요?

위의 사진은 지난 해 여름 석촌동 고분군에서 찍은 사진입니다.

몽촌 토성과 풍납 토성을 둘러보는 것도 백제에 대해 알아 보기 위한 좋은 방법이지만

저는 지난해 새롭게 개관한 '한성 백제 박물관'과 가까이 위치한 '석촌동 고분군'을 꼭 둘러보시라고 추천하고 싶습니다.

한강 유역의 발전과정과 더불어, 한성에 수도를 정했던 백제의 문화 및 생활 모습을 잘 소개하고 있는 박물관으로,

국립 중앙 박물관이야 워낙 방대한 자료를 가진 곳이니 제외하고, 개인적으로는 가장 좋았던 박물관이었습니다.

특히 백제는 두 번에 걸쳐 수도를 천도했는데, 우리는 공주와 부여를 백제의 수도로 큰 의미를 두지만,

백제 700여년의 역사 중 이곳 한강 유역을 수도로 삼고 번영 했던 기간이 500년 가까이 된다고 하니

공주나 부여보다 오히려 더백제의 역사에서 중요하게 살펴 보아야 할 부분이 이곳 한성 백제 시기인 듯합 니다.

또한 가까이 위치한 석촌동 고분군 역시 백제의 왕릉으로 추정되는 거대한 기단식 돌무지 무덤으로

그 규모나 독특한 양식, 그리고 고구려와의 연관성을 찾아보시면새로운 사실들을 많이 알게 될거예요.

한성 백제 박물관과 석촌동 고분군은 꼭 함께 둘러보시기를 추천합니다.

( 한성 백제 박물관과 석촌동 고분군,국립중앙 박물관 꼼꼼 나들이 - 백제

 

대장간 마을을 둘러보기 전에

아차산에서 발굴된 유물들이 전시되어있는 '아차산 고구려 유적 전시관이 있습니다.

아차산은 고구려 남진 정책의 전초기지를 했던 곳입니다.

아이에게 전초기지의 의미를 아는지 물었더니, 산을 정복하기 전의 베이스캠프 같은 곳 아니냐고 되묻더라구요. 맞습니다. 백제 정복을 위한 베이스 캠프...

아차산 일대에는 능선을 따라서 20여개의 보루가 있었는데, 이 일대에서 발굴된 유물들이 이곳에 전시되어있다고 합니다.

 

한번도 우리나라의 지도를 거꾸로 본다는 개념이 없었는데,

이곳에서는 고구려 영토의 광활함을 보여주기 위해서인지, 한반도를 거꾸로 그려 두었습니다.

파란 색으로 칠해진 저 넓은 땅... 그걸 다 제대로 지켜 낼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싶네요.

 

유적 전시관에서는 아차산 자락에서 발견된 고구려의 흔적들을 전시하고 있습니다.

이곳이 제대로 자리를 잡은 거주지가 아닌 보루라서 그런지 정교한 토기라기 보다는 다소 조악한 느낌입니다.

 

이곳에서 발견된 활을 재현한 화살 촉들인데, 뻔하디 뻔한 화살 촉만 생각하다가, 다양한 모양의 화살촉을 보니 파괴력을 높이기 위한 무기 연구는 고대에도 있었구나... 싶었습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고구려 대장간 마을을 둘러볼까요? 앞서 말했듯이 이곳은 재현된 마을입니다.

설명에서는 고구려 벽화 속에 나타나는 집 구조를 바탕으로 상상하여 나타낸 곳이라고 해요.

이곳에서 몇 편의 드라마 촬영도 있었다고 하는데,

그래서 그런지 진짜 고구려 대장간 마을의 모습이라기 보다는 좀 더 환상적인 모습으로 꾸며져 있습니다.

 

마을 입구에서부터 '삼족오'가 그려진 깃발이 나부끼네요.

고구려 사람들은 태양 속에 세발 달린 까마귀 삼족오가 살고 있다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그러고 보면 중국의 유물이나 중국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측되는 우리나라의 유물 중

3이라는 숫자가 신성시 되고 있는 것을 종종 볼수있는데, 예를 들면 '세 발 달린 솥' 등이 그렇습니다.

아마도 3이라는 숫자는 완벽한 합일을 이루는 신성한 숫자인가봐요.

아! 그러고보니 서양의 기독교 사상에서도 3이라는 숫자가 신성한 숫자로 여겨지는 것 같네요.

기독교 속 '성 삼위일체'만 봐도 그렇지 않나 싶어요.

동양과 서양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이런 의미들을 볼때면 저는참 신비롭더라구요.

 

대장간 마을로 들어가는 입구에 목책도 늘어서 있습니다.

나무를 뾰족하게 깎아 벽을 둘러 방어용으로 사용하는 목책은 백제의 유적지인 몽촌토성...

지금의 올림픽 공원에서도 그 흔적을 확인 할 수 있다고 합니다.

 

크지는 않으나 올망 졸망한 집들이 기록과 상상력의 옷을 입고 마을을 이루고 있네요.

사진 찍기에도 참 좋은 곳 같았어요. 건물들이 참 예쁘거든요.

 

이 공간은 고구려 대장간 마을의 회의 장소를 염두에 두고 상상하여 만든 공간이라고 합니다.

이곳에서는 거믈촌이라고 부르는데, 드라마 태왕사신기의 촬영 장소로 이용되기도 했다고 하네요.

 

실제 고구려 사람들이 이렇게 멋진 의자에 앉아서 정말로 회의를 했을까요?

그보다는 상상력이 더 많이 가미된 공간 같기는 하네요.

나무의 구불구불함이 고스란히 보이는 의자에 앉아 회의하는 광개토대왕을 상상해 봅니다.

 

흙을 구워 만든 기와는 아무래도 고급 물품에 해당하니 중요한 건물의 지붕에만 덮였던가 봐요.

평범한 집들에는 나무를 쪼개어 지붕을 덮은 나무 기와가 눈에 띄더라구요.

 

뭔가 신비로운 공간을 묘사 해 둔 곳인데, 드라마 속에서도 점술을 행하거나... 신비로운 장면을 찍는 곳이었다 하더군요.

벽면에는 고구려 고분 '강서대묘' 속의 사신도가 그려져 있습니다.

뒷 쪽 벽면에 그려진 그림은 사신도 속 현무의 모습이네요.

현무는 거북의 몸에 뱀의 머리를 가진 상상 속의 동물로, 사방 중 북쪽을 상징합니다.

 

디딜방아는 이미 고구려 시대에 사용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고 해요.

고구려는 고분 벽화를 통해서 당시의 생활 모습을 소상히 살펴 볼 수 있는데, '안악3호분'의 벽화에서는 특히 디딜방아를 사용하는 모습이 잘 표현되어있다고 합니다.

또한 아차산 3보루에서도 6세기 전반 고구려 시대의 디딜방아 유적으로 추정되는 유물들이 발굴되었다고 하네요,

아차산 보루에서 발굴된 디딜방아의 흔적은 이 지역에 주둔했던 병사들의 식량지원 기능을 하였으리라 추측된다고 합니다.

 

왠지 아일랜드 숲 속의 요정 엘프들이 나타날 것 같은 참 멋진 공간이네요.

이곳을 담덕채라고 부르는데, 평범한 고구려의 가옥을 재현해 놓은 곳이라고 합니다.

 

담덕채 안으로 뛰어 들어가 창문을 활짝 열어 고구려 마을의 전경을 둘러 보니, 마을이 한 눈에 다 내려다 보이더라구요.

 

고구려 사람들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온돌을 사용했습니다.

하지만 방 전체를 데우는 형식이 아니라 방 안에서 불을 지펴 일부분만을 데우는 쪽구들 형식이었다고 해요.

고구려 사람들은 쪽구들 위에서 추운 겨울을 보내고 잠을 자며, 여름이나 평상시에는 의자에 앉아서 생활했다고 하네요.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온돌에 불을 지피는 아궁이는 건물의 외부에 있기 마련인데, 고구려 가옥에서는 아궁이를 건물 한 가운데에서 확인 할 수 있어요.

이렇게 아궁이가 집 안에 있으면 어떤 문제점이 생길까...아이에게 물어보니 나무를 태우면서 생기는 연기와 그을음으로 집 안이 무척 답답할 것 같다는 문제점을 이야기 하던데...

그래서 그런지 고구려 가옥의 천장에는 신석기시대 움집에서 보았던 것과 비슷한 환기 시설도 확인 할 수 있었습니다.

 

종이가 없던삼국 시대에는 나무...주로 대나무를 얇게 쪼개어 엮은 후 글을 써서 기록 햇는데, 이를 목간이라고 합니다.

목간이나 '목간'과 비슷한 '목책'은삼국의 유물에서 고루 발견되더라구요.

 

담덕채를 나와 이 마을의 가장 중요한 부분인 대장간으로 가 볼까요?

고구려는 잘 알려져 있다시피 정복국가입니다.

그들의 척박한 땅과 농사 짓기에 적절치 않은 기후 등이 고구려를 정복 국가로 만들었을 거예요.

원래 고대 시대의 전쟁이라는 것이 부족한 국가가, 필요한 자원을 얻기 위해 주변 국가를 침략하는 것에서 시작되었으니,

고구려 역시 자신들의 부족한 것을 채우기 위해 정복 국가가 되었으리라 생각됩니다.

정복 국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뭐니뭐니해도 무기겠죠.

고구려는 일찍부터 청동제 무기를 철제 무기로 대체하여 사용하면서

전쟁을 통해 지역 통합을 이룩하고, 지배권을 강화하여 고대 국가로 발전했습니다.

당시 철을 다루는 기술자들은 최첨단 기술을 가진 사람으로 나라의 발전에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합니다.

일례로 백제의 왕 석탈해에 관한 이야기를 읽어보면

석탈해가 쇠를 다룰 줄 아는 최첨단 기술자이고, 이전까지 청동기에 머물던 신라에 철기를 들여온 인물이며,

그 기술을 바탕으로 왕의 자리에까지 오른 인물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듯 고대 국가에서 철기는 강한 무기로서의 의미가 컸습니다.

또한 철기는 이전의 원시적인 농기구들을 강철이라는 단단한 농기구로 대체 할 수 있었고,철기 농기구를 통해서 땅을 더 깊게 경작할 수 있어 생산량이 급격하게 늘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고대 국가들의 인구도 급속도로 증가했다고 하니...

우리에게 흔하고 큰 의미 없게 느껴지는 철이 이 당시에는 아마도 지금의 핵에 버금가는 파괴력과 생산력을 가진 물질이었으리라 추측됩니다.

그러니 비록 꾸며진 공간이지만, 대장간은 아주 아주 중요한 공간입니다.

 

고구려의 대장간에 대한 구체적 기록은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곳은 아차산 4보루에서 발견된 간이 대장간터와 고구려 벽화의 대장장이신을 근거로하여 제작된 상상의 공간이라고 하네요.

 

재현된 공간이지만 대장장이처럼 풀무질도 해 보고, 철제 무기들과 농기구들도 살펴 볼 수 있네요.

민혁이가 열심히 풀무질을 하고 있는데, 풀무질은 불길을 더 세게하기 위해 공기를 공급하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물의 위치에너지를 이용해 물레방아가 돌면, 축이 그 에너지를 수평 에너지로 바꿔 기계를 돌린다네요. 물건을 쉽게 이동 시킬 수 있는 수평 도르래도 설치되어있는데 과연 고구려 시절에 저런 과학적 도르래가 있었을까... 살짝 의심도 들었어요.

 

나무를 얼기설기 엮어서 만든 망루 위에서는 병사들이 마을 가까이 다가오는 사람들을 일일이 감시했겠죠?

한번 올라가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보기에 엉성해 보이는 만큼 위험한지... 올라가는 것은 금지였습니다.

 

연호개체라는 공간입니다.

쪽구들을 놓아 편히 쉴 수 있는 공간과, 의자를 놓아 접대할 수 있는 공간, 평상이 놓인 공간 등으로 구성해 귀족들의 생활 공간을 상상해 재현하고 있습니다.

 

구석구석 대장간 마을을 둘러보고 고구려 건국 신화를 그림으로 전시 해 놓은 공간이 있어서 야외 극장 쪽으로 발길을 옮겨보니 재활용 타이어로 만든 말에, 조잡스러운 광개토대왕비, 배용준씨의 드라마 태왕사신기 속 모습을 전시하고 있네요.

 

이곳에는 일본 관광객들도 많이 찾아오시는 것 같았는데, 그분들을 위한 전시물 같았습니다.

 

대장간 마을을 둘러보기 전에 유물 전시관에서 고구려는 '산성의 나라'라는 말이 있더라구요.

정작 고구려를 '산성의 나라'라 칭하면서 이에 대한 설명은 다소 부족한 기분이 있었습니다.

고구려는 산성의 나라가 맞습니다.

물론 기마병을 기반으로 고구려의 전투력도 뛰어났을테지만, 고구려가 중국 땅에서 일어선 수나라나 당나라의 대규모 침략에도 굳건히 버틸 수 있었던것은 고구려의 성을 이용한 전술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고구려는 평성과 산성의 '이성 체제'의 나라였습니다.

평상시에는 평지에 위치한 평성에서 생활을 하다가 침략이 있을시에는 모두 산성으로 옮겨갔다고 해요.

위의 사진은 고구려의 산성인 '오녀산성'입니다.

사진에서 보이다시피 산성은 아주 험준한 지형으로 침략이 쉽지 않습니다.

고구려 사람들이 산성으로 옮겨 갈 때에는 평성의 우물을 모두 메우고, 식량을 모두 불태워 적들이 평성을 점령해도 식량을 확보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그러면 고구려 병사들은 매복해 있다가 적의 보급로를 차단하였다고 하죠.

반면 산성에는 적당한 먹을 거리와 우물이 있어서 적의 침임에도 꽤 오래 보틸 수 있었다고 합니다.

보급로도 차단되도, 마을에서도 식량을 구할 수없었던 적들은 결국 물러날 수 밖에 없었다고 하니,

큰 희생 없이도 현명하게 적들을 물리 칠 수 있는 고구려의 지혜가 엿보이네요.

 

시원한 바람 솔솔 부는 가을에 고구려 대장간 마을과

강을 하나 사이에 두고 고구려와 첨예한 대립을 했던 백제 박물관 나들이는 어떨까요?

알면 알 수록 신비한 고대의 이야기들이 쏟아지는 즐거운 나들이가 될 거예요.

 

Posted by 원주유
고구려 역사와 문화2013. 9. 14. 17:18

 

가야 4세기 모용계 선비족들의 가야 이동설의 뒷바침 유물?

김해 대성동 고분군에 대한 올해 제7차 발굴조사 결과

4세기 무렵 왕릉급으로 판단되는 대형 목곽묘 2기가 모습을 드러냈다.

목곽묘 유물 출토 모습. 통형동기와 철기류가 보인다.

대성동고분 9호분 선비족의 유물 정체

신라문무왕비문에 나타난 신라 김씨족의 정체가 흉노족이다.

김수로와 김알지 김씨들은 같은 흉노족 김일제의 후손들이다. 기원전후로 한반도로 내려왔었다. 대성동고분 91호분에 발견된 4세기 삼연 선비족의 동분,동원,마구와 말방울 소유자의 정체성에 주목이 간다. 즉 2차북방민족 선비족의가야 이동의 강력한 증거가 될 수 있다.

당시의중국 대륙은 어떠한정치적 상황인가를 알아야한다.

삼국시대(삼국지로 유명한 시대,조조(선비족),를 이은 서진시대를 마감하고 흉노.선비,갈,저.강족 등의 5호가 세운 16국 시대는 흉노의 맹주 유연이 산서성에 자립하고(304년) 그 아래 하북지방을 통일한 북위(439년)시대의 기간을 가리킨다.

 

 

이러한 16국 시대를 마감한 북위는 선비족의 탁발부였다. 선비족은 흉노왕국이 후한 초 남북으로 분열되어 쇠퇴한 뒤 나타난 북아시아의 패자가된 부족이다.

오환족과 함께 몽고의 시라무렌강 유역에서 일어난 몽골계의 유목민족으로 [사기]나 [한서]에 등장하는 동호족(東胡族)에 속한 민족이다.

이러한 선비족을 통일한 인물이 2세기 전반에 나타났는데 바로 단석괴(檀石槐)라는 영웅이다. 단석괴 사후 다시 분열한 선비족은 이후 모용부, 우문부, 단부, 탁발부 등이두각을 나타내고 있었다.

 

이 가운데 요녕성에 근거한 모용부가 화북에 침입하여 전연, 후연,서연, 남연 등을 세우고, 내몽고 성도인 호화토특호화호특(呼和浩特) 남쪽의 화림격이(和林格爾) 방면에 유목하고 있던 탁발부가 북위(北魏) 왕조를 수립하게 된다. 395년후연(선비족모용수)과 북위(선비족탁발규)는 전쟁에 돌입했다. 후연 모용수는 태자 모용보를 총사령관으로 보내 북위를 멸망시키려 들었다. 그러나 모용보는 오늘날 산시 다퉁 부근의 참합파에서 대패하여 수만명이 죽었고, 수만명이 투항했으며 태자 모용보는 몇천의 군대와 함께 달아났다. 이때 탁발규는 그가 투항한 후연군들을 한명도 남김없이 죽여버렸다.

 

다시 모용수가 직접 군대를 정비해 이듬해인 396년 3월 출정했다. 모용수가 평성으로 가던 도중에 참합파를 지나게 되었는데, 후연 병사들이 죽어 시체가 산을 이룬 참혹한 광경을 목격해야만 했다.

이미 70세의 나이가 있고 중병에 걸린 모용수는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그의 병이 위중해지자 병사들은 평성으로 향하지 못하고 중산으로 말머리를 돌렸다. 도중에 모용수는 그만 세상을 떠나고, 태자 모용보가 제위를 물려받았으니, 그가 혜민제이다.

모용수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탁발규는 두려워 않고 40만 대군을 풀어 전진하여 396년 후연의 수도 하북성의 중산에 입성하였다.

398년, 탁발규는 황제에 즉위하고 수도를 평성으로 정함으로써 북위를 연 개국황제가 되었다. 중국북방의 질서가 완성되었다.

 

후연 선비족의 중국에서의 몰락이 한반도 이동에 무게를 두고 싶다.가야 대성동고분과 부산 복천동고분군, 함안 아라가야 고분에서의 북위계통의 말(馬)찰갑출토, 신라 황남대총에 나타난 삼연의 말갖춤문화에 직접 영향을 끼친 것 같다.동호족(선비족)은 단군시대엔 한민족 연합 부족의 일원이었다.

 

부여족의 한반도와 왜의 이동설에 무게

 대성동고분 91호분의 선비족 계통의 유물들이다. 그들의 정체성에 대한 문제를 다루고 있었다. 탐색자들은 발해만 요양시 '라마동고분군'에서 출토된 묘제와 마구(말안장, 말에 관련된 장식물),및 동복이 선비족 (삼연)보다, 부여족에 가까웠다. 라마동고분군을 발굴한 텐리쿤교수(중국)는 '라마동고분군' 묘지는 부여족들의 무덤이라는 것이다.

 

박물관에서 살펴본 유물도 선비계통보다는 부여계통이 문양까지 대성동91호와 동일함을 화면에서 보여주었다.

라마동 묘제의 경우, 목곽묘로서 직사각형 형태로 관을 사용하지 않은 점도 선비족과는 다르며, 대성동 91호 묘제와 동일한 점이다.

말안장의 경우 사각형은 선비족인데 반해, 대성동고분군,라마동고분군은 타원형태로 동일하였다.

 

형질인류학분석법인 인골분석도 부여족(라마동고분군)과 대성동고분군은 동일인이었다.

선비족은 삼국지 조조와 같은 족속들이며 내몽고가 중심지였고, 이후 세력이 강하여 중원으로 이동하여 북위를 열었다. 삼연도 선비족계통이다.

 

전연이 부여를 공격(346년경), 부여인들이 한반도와 도왜(일본의로 이동)하였을 가능에 무게를 둔 학자도 있다.

대성동고분88호분 무덤에서 발견된 파형동기가 한무덤에서 12점 수습되었다. 일본에서는 여러무덤에서 총 10개에 해당되었다.

파형동기는 일본천황(왕)급 무덤에서 발견되는 귀한 물건이다. 대성동고분88호분은 일본천황급 묘지이다. 심지어 일본 측에선 일본 숭신천황의 무덤이라고 까지 말하는 학자도 있다(에가미-기마민족의 왜열도 이동설 주장)

발굴전에, 가야인의 정체에 대해서 부산항도일보(부산매일신문의 전신)에 연재 중, 파형동기 발견이 반드시 가야지역에서 나올 것을 예견한 적이 있었다.

 

북방기마민족의 이동 유물로 파악한 것이다. 지금은 일본학계와 한국 가야사 전공자들은 파형동기를 일본 교류의 유물로 파악하고 있는 점이 안타깝다. 오끼나와(류큐國)는 고대엔 일본과는 전혀 다른 나라였다.

 

3세기~4세기 왜와는 관련없는 점이다. 오히려 중국 남방과의 관련성이 있는 고대 국가였다. 류큐국은 에도막부 말기에 사스마번(큐슈)에 정복되어 일본으로 병합된다. 고려시대 삼별초들이 류큐국에 이동하여,상류층 역할을 맡았던 고고학적 유물이 발견되었다.

 

필자가 쓴 '신들의 이름/2009년/오늘/" 일본 응신천황은 부여국의 의라왕이었나? 에 기록한 [진서(晋書)]四夷傳.부여국과 [통전(通典)]邊防門.동이부여가 말해주는 다음과 같은 구절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역설하고 있다.

 

부여는 그 나라가 殷盛하고 부유하여, 先世 이래 일찍이 깨뜨려짐을 당한 적이 없었다.......태강(太康)6년(285년)에 이르러, 모용외(慕容외:선비족/晋의 장수)에게 공파(功破)되어, 그 나라의 왕인 의려(依慮)는 자살하고, 자제들은 옥저로 도망하여 생명을 보존하였다...... 다음 해에 부여 후왕 의라(依羅)가 감구솔견인(龕求率見人)을 보내어,옛 나라를 회복하려고 구원을 청하였다.......의라는 나라를 되찾았다........그 뒤에도 매양 모용외가 그 나라 사람들을 잡아다가 중국에 팔았기다. ......의라는 그 후 소식이 없어졌다.

 

이처럼 [진서]는 부여의 마지막 왕인 의려가 자살한 후 그 자제들이 옥저로 도주하여 생명을 보존했다는 비참한 종말을 이야기하고 있고, [통전]에서는 부여후왕 의라가 그 후 소식이 묘연(杳然)하다고 하였다. 부여가 이와 같이 하여 처음 망한 것은 서기285년이었다. 기록에서와 같이, 일단 나라를 회복했던 부여후왕 의라는 다시 모용외의 약탈로 더 이상 지탱하지 못하고 결국 유리한 것 같으며, 한반도를 거쳐 이후 도왜(왜국으로 건너감)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한편 왜국에서는 의라라는 성씨가 여러 갈래로 생겨나게 된다.

 

姓氏錄에서의 의라씨들은 개화천황의 후손이라거나, 혹은 饒速日(니기하야히)의 후손이라거나, 혹은 백제인의 후손이라한 것 등, 여러 갈래로 되어 있다. 위서(魏書)의 부여전에 보면, "부여에서는 소를 잘 길렀고, 명마가 나왔으며, 그 사람들은 거칠고 신체는 장대하고 성질이 강하고 용맹하면서도 근후했음을 알 수 있다. 말하자면, 북방의 대표적인 기마민족이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이러한 부여 후왕 의라와 그 세력은,비록 그 나라가 패망하여 일시 남의 땅에 피신했다 하더라도 식객노릇이나 하고 있지는 않았을 것이나, 그들이 한동안 한반도(김해 대성동고분지역) 땅에 머물렀을 것이라는고고학적인 유물이 대성동91호 발견되었기 때문에 이미 '신들의 이름'에서 편 학설이 강력한 설득력이 생긴 셈이다.

 

어쨌든, 결국 그들이 낙착한 곳은 왜지(倭地)였다고 보며, 부여씨인 백제왕은 차후 그들을 위하여 모든 지원을 제공했던 것임은 일본서기의 응신기가 잘 보여주고 있다.

 

천황재위 14년째(283년)에, 궁월군(弓月君:유츠키노키미)이 백제로부터 120현(縣)의 인민을 거느리고 응신조에 내귀(來歸)하는 [일본서기] 기록이 있다. 이 백제 120현은 한반도 백제가 아닌 요서지방의 백제계, 부여족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부여 후왕 의라의 도왜(渡倭)와 이보다 150년 뒤에 고구려의 광개토 호태왕이 동부여를 공벌(攻伐)한 사건, 그 7년 후에 연왕(燕王) 황(皇光)이 토벌한 부여, 또 문자왕 3년(494년)에 고구려에 [以國來降]한 부여 등의 사건등이 만주지역 부여에서 이뤄졌다.

진서를 검색하다, 선비족 모용황(燕王)이 조선공(朝鮮公:조선왕)에 봉해졌다는 기록(337년)이 머리에 남았다.(진서 권109)조선공(왕)이란 의문은 다음기회에넘긴다.

 

위의 랴오닝성 '라마동' 수백기의 고분군은 유물과 대성동 유물은 동일 족(부여족)의 유물이다. 선비족인 전연에게 침공당한 부여족 지역의 고분군이다. 부여족의 한반도 가야지역을 통한 도왜한 부여족이다. 그 세력들이 큐슈로 부터 정복한 응신천황이었다.(재야사학자 문정창 주장) 큐슈로 부터 기내지방으로 이동하여 세운 기마민족 세력들이었다. 대성동 88호분 무덤의 파형동기는 도왜의 이동 흔적이다.(신들의 이름/2009년/오늘/김인배,김문배 공저)

 

결정적인 증거로는 대성동고분91호에서 발견된 순장흔적, 선비족 청동분(대야),마구와 말방울은 정확하게 말하면, 선비족이 아닌 부여족의 유물임을 KBS 역스팀들이 밝혔다. 91호분에서 발견된 '사슴뿔로 만든 관의 장식'이다.

 

사슴뿔로 만든 관 장식-부여족이란 기록

응신천황의 난파조정(오사카조정)에 도래한 부여국인(夫餘國人)들과 髮長媛(발장원:고구려의 제12대 중천황의 부인)이 바다를 통해서 난파(오사카의 옛 이름)에 들어온다.

 

응신천황이 담로도에 사냥하려 가 있었다. 천황이 서쪽을 바라보니, 수십마리 사슴이 바다에 떠서 오고 있었다. 천황은 좌우에 이르기를, [저게 무슨 사슴인가? 넓은 바다에 떠서 많이도 오는구나]라고 말했다.

 

이것은 응신천황이 난파(나니와/오사카) 조정을 건설한 지 13년 만에 사슴,여우,너구리,담비 등의 가족옷을 입은 부여국의 구신(舊臣)들이 발장원(황후)를 데리고 부여의 후왕(後王:의라왕)인 응신천황을 찾아 난파조정에 이르렀음을 보여준 대목이다.

 

일본서기 기사와 동일한 기사가 [삼국사기]권 제 17(고구려본기 제 5)에 나온다.

이상과 같은 점으로 대성동고분군 91호분에서 발견된 부여동분,말장식,그리고 사슴뿔관장식은 부여족의 한반도 김해 이동과 도왜하여 그 곳에 응신천황이 된 부여집단 세력의 흔적을 잘 말해주고 있다.

 

오늘날 일본의 성곽들은 평지에 있다. 고구려 성은 산록을 이용한 성곽임에 반해, 부여는 평지에 해자를 둘러 목책등으로 수성하였다. 이 근원이 부여족들의 평지성곽 건설풍이다. 일본 하찌만궁(신사)는 대마도를 비롯해서 북큐슈 곳곳에 존재하고 있다. 그리고 기내지방으로 이동되어 있다. 그 주신이 응신천황이다. 부여족이 세운 하찌만궁, 그 세력들이 한반도에도 강력한 기마와 철갑을 앞세워 기존 가야세력과 혼재하며 존재하게 된다. 복천동고분 세력도 부여족이 남겨놓은 흔적들이 고분군에 남아 있을 것이다. 고분군 속에 여러 묘제들이 혼재한 까닭은 강력한 북방 세력들이 밀려와서 남겨놓은 역사적 유물인 셈이다.

 

 

Posted by 원주유
고구려 역사와 문화2013. 9. 14. 17:09

 

고구려 15대 미천왕 = 호양왕, 을불, 을불리, 우불 (재위 300년~331년)

293년 아버지 돌고가 백부인 봉상왕에게 반역으로 몰려 죽임을 당하자 미천왕은 살아남기 위해 신분을 속이고

수실촌이라는 곳으로 가서 머슴살이를 했었다.

당시의 부호였던 주인 음모는 미천왕이 왕족인 것도 모르고 머슴들처럼 심하게 노동을 시켰다.

예를 들어 낮에는 나무를 베어오게 하고 밤에는 연못의 개구리 때문에 잠을 잘 수 없다 하여 개구리 소리가 들리지 않도록

밤새도록 돌과 기와 조각을 던지게 하여 편히 잠을 잘 수 없었다고 한다.

참다못한 미천왕은 음모의 집을 나와서 동촌으로 갔다.

그곳에서 재모란 사람을 만났는데 그는 소금장수였다.

재모는 미천왕이 착하고 신의가 있어 보였으므로 함께 소금장사를 하자고 하여 압록강에서 소금을 떼어와

여러 마을을 돌아다니며 팔았다.

어느 날 미천왕이 배를 타고 압록강 동쪽의 사수촌이란 마을로 가 어떤 노파의 집에 머물렀다.

노파가 숙식비로 소금을 달라고 하자 미천왕은 노파에게 소금 한말을 지불했다.

노파가 더 달라고 했지만 그는 한 말이 적당한 값이라며 더 주지 않았다.

주인 노파는 이것에 앙심을 품고 자신의 신발을 미천왕의 소금짐 속에 감춰 두었다.

다음날 미천왕이 소금짐을 지고 떠나는 데 노파가 쫓아와 신발을 찾아내고는 압록 태수에게 미천왕을 고발하였다.

압록 태수는 미천왕에게 절도죄를 적용해 태형을 가한 다음 소금을 압수하어 노파에게 주었다.

미천왕은 억울하기 짝이 없었지만 신분이 탄로날까봐 두려워 아무 말도 못하고 관가를 떠났다.

이렇게 고난의 나날을 보내던 미천왕은 얼굴이 여위고 옷이 다 헤져 그 누구도 그가 왕손임을 알아보지 못했다.

봉상왕이 폭정을 거듭하자 당시 국상이었던 창조리는 왕을 폐위시켜야겠다고 생각했다.

폐위시키고 난 다음의 왕을 옹립해야 하는 데 그것이 문제였다.

왜냐하면 봉상왕은 왕권을 도전할 만한 왕족은 모조리 죽였기 때문이다.

창조리는 미천왕이 어딘가에 살아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북부의 조불과 동부의 소우를 비밀리에 보내 미천왕을 찾도록 했다.

국상의 밀명을 받은 두 사람은 각 부락을 은밀히 돌아다니며 미천왕을 수소문했다.

그러던 어느 날 비류강가에서 미천왕을 만났다.

두 사람은 미천왕에게 "지금 국왕께서는 무도하여 국상이 여러 신하들과 몰래 왕을 폐하기로 모의하였습니다.

을불 왕손께서는 행실이 검소하고 성격이 인자하여 백성을 사랑하시므로 선왕의 유업을 이을 만 하옵기에 신 등을 보내어

받들어 모시게 하였습니다." 처음에는 자신의 신분을 부인하던 미천왕은 그 두 사람이 숙부가 보낸 암살자가 아니라

창조리가 보낸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다.

창조리는 미천왕을 만났고 300년 9월 봉상왕이 사냥을 나갈 때 동지를 규합하여 봉상왕을 사로잡아 별실에 감금하고

군사로 하여금 지키게 했다.

그리고 곧 을불을 불러 옥새를 올리고 왕위에 즉위하게 하였다.

이렇게 하여 소금장수 을불은 고구려 제15대 왕이 되었다.

미천왕은 즉위 3년(302년)부터 정복전쟁을 개시했다.

그해 9월 왕은 몸소 3만의군사를 이끌고 만주 지방의 현도군을 공격했다. 이 싸움에서 미천왕은 8,000명의 적을 사로잡았다.

이후로 내정에 치중하고 중국 정세를 살피다가 311년 8월 요동의 관문인 서안평을 공격해 빼앗았다.

서안평은 과거 동천왕이 공격하려다가 관구검의 역공을 받아 오히려 나라가 멸망할 지경에까지 빠지게 했던 중요한 지역이었다.

미천왕은 서안평을 점령함으로써 중국 대륙과 낙랑군, 대방군과의 연결고리를 끊었다.

미천왕은 그 여세를 몰아 313년 낙랑군을 공격하여 2,000여명을 포로로 잡았다. 그리고 다음 해에는 대방군을 공격해

중국 군현을 한반도에서 완전해 내몰았다. 이렇게 하여 고구려는 마침내 압록강에서 서해까지 진출하게 되었다.

이로써 400년동안 한반도를 지배했던 낙랑군과 대방군이라는 중국 식민지는 사라졌다.

미천왕은 그들이 지배했던 대동강 유역과 압록강 하류를 차지한 다음 다시 서북진해서 요동군과 현도군을 공격해 영토를 확장했다.

이 과정에서 당시 요동 지방에 세력을 떨치고 있던 선비족 모용씨의 연나라와 충돌했다.

미천왕은 연나라의 모용씨와 요동 지방을 놓고 일진일퇴를 거듭했다.

319년 진나라의 평주자사 최비의 권유에 따라 선비족의 일파인 단씨, 우문씨와 함께 모용외를 공격했다.

하지만 이 연합공격은 실패했고 모용외는 일단 요동을 수중에 넣어 유리한 고지에 섰다.

미천왕은 국경을 마주한 연나라를 견제하기 위해 그 배후에 있는 후조와 손을 잡았다.

미천왕은 결국 요동에서 연나라를 축출하지 못하고 즉위 32년만에 331년 2월에 갑자기 서거했다.

342년에 고구려로 쳐들어온 전연의 군대가 미천왕릉을 도굴하여 시신을 가져갔으며 고국원왕은 343년에 많은 공물을 바치고

시신을 돌려받았다.

* 큰아버지=봉상왕 * 아버지=고추가 돌고 * 어머니=?

* 왕후=왕후 주씨 * 아들=고사유(16.고국원왕) / 고무

창조리

창조리는 남부 출신으로, 봉상왕 3년인 294년 국상 상루가 죽었을 때 대사자의 직위에 있었다.

이때 상루의 뒤를 이어 국상이 되었고, 작위는 대주부가 되었다.

당시 고구려는 선비족 모용부의 수장 모용외의 침략에 시달리고 있었다.

봉상왕 5년인 296년에는 고국원까지 침입하여 서천왕의 무덤을 파내려고 시도하기까지 했다.

이에 봉상왕은 창조리를 불러 대책을 논의하였다. 이에 창조리는 "북부의 대형(大兄) 고노자가 어질고 용감하다"고 답했다.

이에 왕이 고노자를 동북부 변경의 신성의 태수로 삼자 모용외는 침략을 멈추었다.

모용외로부터 안전해진 다음부터 고구려에는 이상한 일들이 벌어졌다.

봉상왕 7년인 298년 가을에는 우박이 내려 농사를 망쳤으며, 이듬해 가을에는 귀신이 출몰하고 객성이 달을 가렸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봉상왕은 궁궐을 개축하고 자신의 조카 을불을 죽이려 하는 등의 행위로 신하들의 불만을 샀다.

봉상왕 9년인 300년에도 괴이한 일은 계속되었다. 정월부터 지진이 나고, 6개월 동안 비가 내리지 않았다.

8월이 되자 왕은 15세 이상의 남녀를 뽑아 궁실을 수리하였는데, 이로 인해 백성들의 생활이 더욱 더 궁핍해졌다.

이에 창조리는 백성이 도탄에 빠진 상황에서 토목 공사를 진행하는 것은 군왕의 도리에 어긋나는 행위라고 간하였다.

이에 왕은 "임금은 백성을 우러러 보는 자리인데, 궁궐이 화려하지 않으면 무엇으로 위엄을 보이겠는가?"라고 답했다.

그러고는 오히려 자신을 비판하여 백성들의 신망을 얻고자 함이냐고 되물었다.

이에 창조리는 다시금 "임금이 백성을 불쌍히 여기지 않으면 어진 임금이 아니요, 신하가 임금에게 간하지 않으면

충신이 아닙니다."라고 답했다.

이에 왕은 웃으며 "그대는 백성을 위해 죽고자 하는가?"라며 창조리의 말을 무시했다.

왕의 마음을 돌릴 수 없음을 안 창조리는 다른 대소신료들과 폐위를 논의하였다. 논의 끝에 을불을 새 왕으로 세우기로 하고

창조리는 북부의 조불과 동부의 소우를 파견하여 을불을 찾게 하였다.

을불은 처음에 거절하였으나 이들의 설득에 결국 창조리를 찾아 왔다.

창조리는 일단 그를 숨겨 두고 지지파를 모으기 시작하였다.

9월이 되자 봉상왕은 신하들과 함께 사냥을 떠났다.

이때 창조리가 "나와 뜻을 같이 하는 자는 나를 따라 하여라."라고 선언하며 갈대잎을 관에 꽂았다.

그러자 모두들 이를 따랐다.

자신의 지지 세력을 확인한 창조리는 봉상왕을 별실에 가두고 을불을 맞아 옥새를 바치고 왕위에 오르게 하였다.

고구려 16대 고국원왕 = 사유, 쇠, 국강상왕 (재위 331년~371년)

314년 왕태자에 책봉되었고, 331년 음력 2월에 미천왕의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334년에는 평양성을 증축했고, 335년에는 신성 축성, 342년에는 환도성과 국내성을 증축하는 등 변경의 방비를 갖추었다.

또한 전연을 견제하기 위해 336년, 343년에 걸쳐 동진에 사신을 파견하기도 하였다.

336년에는 전연에서 일어난 모용인의 반란에서 실패하고 망명해온 곽충과 동수를 맞아들었으며,

338년에는 후조와 전연의 전쟁 시 후조와 내통하였던 봉추, 송황 등의 망명도 받아들였다.

339년 전연이 쳐들어와 신성에 이르니 고국원왕이 동맹을 청하여 물러갔다.

이때 맺은 동맹 관계에 따라 340년에 전연에 조회하기도 하였다.

342년 겨울, 전연의 모용황은 용성으로 천도한 후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로 쳐들어왔다.

전연군은 평탄한 북쪽 길로 왕우가 이끄는 1만 5000명은 소수의 군대를 보내고 모용황과 한수는 험난한 남쪽 길로 5만 대군을

보내는 기만전술을 펼쳤으며, 이에 속은 고구려군은 북쪽으로 왕제 무가 이끄는 정병 5만을 파견하고 남쪽은 왕이

직접 소수의 군대로 지켰다.

이에 고구려군은 남쪽 길에서 크게 패해 장군 아불화도가가 전사하고 환도성은 함락되었으며 왕은 단신으로 단웅곡으로 피신하였다.

왕을 추격한 전연군은 모후 주씨와 왕비를 포로로 잡았으나 북쪽 길에서 무의 군대가 크게 승리하였기 때문에 전연군은 퇴각하였다.

전연군은 퇴각하는 길에 미천왕릉을 파헤쳐 미천왕의 시신을 가져갔고 5만 명의 백성을 잡아갔다.

343년, 고국원왕은 동생 무를 보내 전연에 신하의 예를 갖추고 미천왕의 시신을 돌려받았으며 평양의 동황성으로 거처를 옮겼다.

345년에는 전연이 모용각을 보내 남소를 함락시켰으며, 349년에는 전연의 망명자였던 송황을 전연으로 송환하였다.

355년에 이르러서 전연에 간청하여 모후 주씨를 돌려받는 데 성공하였으며 전연으로부터 책봉을 받아

‘정동대장군 영주자사 낙랑공 고구려왕’이 되었다.

이후 전연은 전진의 공격을 받아 쇠퇴하였으며, 370년에 전진에 의해 멸망하였다.

이때 고국원왕은 고구려로 도망쳐온 태부 모용평을 체포하여 전진에 송환함으로써 전진과의 우호관계를 수립했다.

고국원왕은 369년에 백제를 공격하였으나 치양에서 백제의 왕자 근구수에게 패하였다.

371년에 다시 백제를 공격한 고국원왕은 패하에서 복병을 만나 패하였다.

이해 겨울 10월에 백제 근초고왕이 평양으로 공격해오니 고국원왕이 이를 막다가 활에 맞아 전사하였고 고국의 들에 장사지냈다.

* 부왕=미천왕 * 모후=왕후 주씨

* 제1왕후=? * 아들=고구부(17대 소수림왕) / 고이련(18대 고국양왕)

고구려 17대 소수림왕 = 구부, 소해주류왕, 해미류왕 (재위 371~384)

355년에 태자가 되었고 371년에 고국원왕의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371년 고국원왕이 백제 군과 평양에서 싸우다가 전사하자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소수림왕이 즉위한 시대에는, 국왕이 전사한 상황에서 국가의 체제 정비의 필요성이 대두되고

넓은 영토와 주민들을 체계적으로 통치할 제도의 정비가 요구되던 시기였으므로, 고구려 사회의 체제 정비를 위한 정책을 취하였다.

372년 전진의 3대 황제 부견으로부터 승려 순도가 와서 불상과 경문을 전함으로써 최초로 고구려에 불교가 전래되었다.

374년에는 아도가 전진에서 건너와 불도를 고구려에 전하였다.

소수림왕은 375년에 초문사, 이불란사를 창건하여 불교의 수용 및 보급 정책을 취하여, 전진과 평화적 관계를 수립하고,

호국사상으로 삼았다.

태학을 설립하여 유교적 정치이념에 충실한 인재를 양성하여 중앙집권적 정치제도에 적합한 관리를 양성하였다.

373년에는 율령을 반포하여 국가통치와 사회질서 유지를 위한 규범들을 갖추었다.

율은 형법법전, 령은 비형벌적 민정법전으로 중국에서 성립된 성문법이다.

이와 같은 소수림왕의 체제 정비 시책들을 기반으로 고구려는 광개토대왕조 제위 시대 전성기를 누렸다.

대외 관계에 있어서는 백제와 충돌이 계속되었는데, 375년에는 백제의 수곡성을 빼앗았으며

377년에는 3만 대군의 백제군 침공을 물리치고 백제의 북변을 역습하였다.

378년에는 극심한 가뭄이 든 상태에서 거란의 침략을 받아 8개의 부락을 빼앗기기도 했다.

384년에 서거하여 소수림에 장사지냈다. 이어 동생 이련이 제위에 올랐다.

* 부왕=고국원왕 * 모후=?

* 동생=이련(18대 고국양왕)

순도

순도는 4세기 인물로 고구려 소수림왕 2년인 372년에 전진의 왕 부견의 사자를 따라 불교를 전했는데,

이것은 한국으로의 불교 전래에 대한 최초의 공식적인 기록이다.

고구려 소수림왕 2년을 전후하여 삼국은 모두 불교를 받아들이게 된다.

순도는 불상과 불경을 가지고 고구려로 왔는데 고구려의 왕과 신하들은 그를 귀인으로 맞이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순도는 고구려의 최초의 사찰인 초문사 혹은 성문사에 머물면서 불교를 포교하였다고 한다.

고구려에는 처음 순도가 들어오고 그 2년 후에 아도가 들어왔는데 이들은 모두 인도 또는 서역 승려일 가능성이 짙다.

그 이유는 순도의 경우 중국천하를 돌아다니면서 전도하다가 고구려로 온 것으로 표현하고 있고

아도는 일반적으로 인도 승려로 추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설에 따르면 순도는 동진에서 왔다고도 한다.

아도

아도는 아두라고도 한다. 아도에 대해서는 세 가지 다른 기록이 있다.

첫 번째는 순도가 고구려에 불교를 전한 때인 고구려 소수림왕 2년(372년)의 2년 후인 소수림왕 4년에 고구려에 입국하여

불교를 전한 승려로서의 기록이다. 이 아도는 일반적으로 인도 승려로 추정하고 있다.

두 번째는 국적 불명의 승려로, 삼국사기에 따르면 이 승려는 눌지왕(재위 417~458) 때 고구려에서 신라로 건너와 불법을 전했다.

소지 마립간(재위 479~500) 때 시자 3명을 데리고 일선군 모례의 집에 머무르다가 죽었다.

이 두 번째 인물과 첫 번째 인물이 동일인인지 아니면 동명이인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이 두 번째의 아도가 신라에 전한 불교는 이후 법흥왕(재위: 514-540) 때 이차돈이 순교하여 이적을 보임으로써 널리 퍼지게 된다.

세 번째 기록은 삼국유사에 나오는데, 이에 따르면 아도는 고구려의 승려로, 5세에 출가하여 16세 때 위에 가서 아버지

굴마를 찾아뵙고, 19세 때 다시 고구려에 돌아와 어머니 고도령의 명을 받들어 미추왕 2년(263년)에 신라 왕가에 불교를

전파하려다 실패했다.

그 후 3년 동안 일선현 모례의 집에 숨어 있었으나 미추왕의 딸 성국공주의 병을 고쳐준 공으로 그때부터 불교의 전도를 허가받고

흥륜사를 지었다. 미추왕이 죽은 후 사람들의 미움을 사 다시 모례의 집에서 땅굴을 파고 들어앉아 죽었다.

이 인물이 행적이 유사한 묵호자와 동일인물인지는 불명하다.

 

Posted by 원주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