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진성여왕은 어떻게 나라를 다스렸는지, 그리고 그 후대 왕들은 진성여왕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아시나요..
제51대 진성여왕
문의왕후 김씨 ․ 김씨, 만, 생년미상 ~ 897년
재위기간 : 887년 7월 ~ 897년 6월. 총 9년 11개월
남편 : 1명 이상
자녀 : 1명 이상
혜성대왕 김위홍 - 막내아들 양패
진성여왕은 경문왕의 딸이며, 문의왕후 소생으로 이름은 만이다. 헌강왕이 후계자 없이 죽자 정강왕이 왕위를 이었으나, 그 또한 재위 1년 만에 죽었다. 정강왕의 유언에 따라 887년 7월에 그녀가 왕위에 올랐으니, 선덕과 진덕에 이어 세 번째 여왕이다.
진성여왕이 즉위할 무렵, 신라 사회는 국가 기강이 무너지고, 체제가 와해되고 있는 형국이었다. 이미 지방 호족 세력이 너무 성장하여 조정의 힘은 미약해지고, 왕실의 권위는 땅에 떨어진 상황이었다. 822년 김헌창의 난 이후, 신라 왕실은 계속해서 왕위 다툼이 일어나 왕실의 권위가 무너졌다. 조정의 통제력은 급격하게 약화되었으며, 헌강왕이 후계자를 제대로 정하지도 못한 상태에서 죽고, 이어 즉위한 정강왕마저 병상에 누워 정사를 챙기지 못하는 바람에 지방에 대한 신라 조정의 통제력은 점차 마비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진성여왕이 등극하였다. 여왕의 즉위는 백성들의 불안을 가중시키고, 지방 세력의 힘을 강화시키는 원인으로 작용하였다.
진성여왕은 즉위 직후 주 ․ 군에 1년간 조세를 면제하는 등 민심수습에 노력하였으나 재위 2년인(887년) 2월 숙부이자 남편이었던 상대등 위홍이 죽자 정치기강이 갑자기 문란해지기 시작하였다. 이와 함께 대야주에 은거하던 왕거인의 국왕 비판 등이 있었으며, 888년부터는 주 ․ 군으로부터 세금이 들어오지 않게 되어 국고가 비게 되었다. 이에 관리를 각지에 보내어 세금을 독촉하였고, 이를 계기로 민심이 흉흉해져 사방에서 도적이 봉기하게 되었다.
급기야 889년에 사벌에서 민란이 일어났다. 사벌주(지금의 상주)의 농민 봉기를 주도한 인물은 원종과 애노, 아자개 등이었다. 그들은 사벌의 군주 우연을 죽이고, 사벌성을 장악하였다. 진성여왕은 나마 영기에게 군대를 안겨 농민군을 진압하게 했으나, 영기는 농민군의 기세에 눌려 진군하지 못했다. 그 소식을 접한 진성여왕은 영기를 참수하고, 사벌 군주의 아들을 군주로 삼아 농민군을 진압하도록 했으나 농민군을 무너뜨리지 못했다. 신라 조정이 사벌의 반란군 진압에 실패하자, 그것이 도화선이 되어 전국 각처에서 크고 작은 반란 사건이 잇따랐다.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지방 호족들이 힘을 형성하여 연이어 군대를 일으켰다.
사벌의 아자개, 죽주(안성)의 기훤, 청주의 청길, 북원(원주)의 양길, 중원(충주)의 원회 등이 그 대표적인 세력이었다. 이들은 대개 지방의 호족들로 농민들을 선동하여 난을 일으키고, 그 지역의 관아를 장악하는 과정을 통해 군벌로 성장했다.
지방 군벌들은 한층 세력을 확충하며 서로 간에 힘겨루기 양상을 보였는데, 자기들끼리의 힘 싸움 끝에 가장 큰 세력으로 남은 것은 죽주의 기훤과 북원의 양길, 사벌의 아자개 등이었다. 청길, 원회, 신훤 같은 중부 세력은 거의 기훤에게 흡수되었고, 서라벌 주변 세력은 아자개에게 흡수되었다. 또 양길은 서라벌 북동부(지금의 강원도 일대)를 장악하였다. 이들 중 서라벌의 토벌군과 군사적 요충지였던 사벌의 아자개 군대가 가장 많은 전쟁을 치렀다.
아자개의 장남 견훤은 서라벌 서쪽과 남쪽을 휩쓸고 다니며 몇 달 만에 5천 군대를 형성하였고, 백성들에게도 열렬한 호응을 받았다. 이에 힘입어 견훤은 아버지 아자개를 떠나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였다. 견훤은 마침내 혁명 의지를 굳히고 군대를 남쪽으로 몰아 무진주(광주)를 장악한 뒤, 스스로 왕을 칭하기에 이르렀다. 900년 견훤은 완산주(전주)를 도읍으로 삼아 나라를 세우고, 국호를 백제(후백제)라고 칭함으로써 후삼국 시대의 서막을 올렸다.
한편, 기훤의 휘하 장수 궁예가 청길, 원회, 신훤과 결탁하여 양길에게 투항함으로써 기훤은 유명무실한 존재로 전략했다. 반면에 양길은 궁예를 앞세워 경북 북부 일대와 충청도, 강원도 동부 지역으로 세력을 확대하여 견훤 못지않은 무시 못 할 세력으로 성장했다. 견훤의 창업에 자극받은 궁예는 894년에 명주(강릉)를 장악, 병력 3천 5백을 형성하고 양길로부터 독립했다. 이후, 궁예는 강원도 북부 일대를 장악하고 서쪽으로 진출하여 경기도 및 황해도 지역을 손안에 넣었다. 896년에는 송악의 호족 왕융을 받아들여 철원의 태수로 봉하고, 주면 세력을 흡수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신라 국가의 실질적인 통치영역은 경주를 중심한 그 주변지역에 그치고, 전 국토는 대부분 적당이나 지방호족세력의 휘하에 들어갔다. 또, 896년에는 이른바 적고적이 경주의 서부 모량리까지 진출하여 민가를 약탈하는 등 수도의 안위조차 불안해졌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중국 당나라에 유학하고 돌아온 최치원은 894년에 사무 10조를 제시하였다. 이 제의는 받아들여진 것으로 기록 되어 있으나 실제로는 진골귀족의 반대로 시행되지 않았다. 최치원의 개혁안은 육두품 중심의 유교적 정치이념을 강조함으로써 왕권을 강화하는 것이어서 진골귀족의 이익과는 배치될 수 있었다. 이 개혁은 결국 시대적 한계성 때문에 시행되는 못하였다. 897년 6월 조카 헌강왕의 아들 요(뒤의 효공왕)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그해 12월에 죽었다. 능은 황산에 마련되었다.
제52대 효공왕
후비 김씨 ․ 김씨, 요, 886 ~ 912년
재위기간 : 897년 6월 ~ 912년 4월. 총 14년 10개월
부인 : 2명 이상
자녀 : 기록 없음
왕비 박씨
효공왕은 헌강왕의 서자이며, 후비 김씨 소생으로 이름은 요이다. 헌강왕이 죽을 당시 그는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강보에 싸인 상태였다. 그의 나이 열 살 되던 해인 895년에 진성여왕이 그를 궁중으로 데려와 태자로 삼았다. 그리고 897년 6월에 진성여왕이 중병에 걸려 왕위를 넘기자, 열두 살의 어린 나이로 즉위했다. 효공왕은 헌강왕이 사냥을 나갔다가 길에서 자색이 뛰어난 한 여자를 만났는데, 뒤에 헌강왕이 궁궐을 빠져나가 그 여자와 야합하여 태어난 아들이다. 뒤에 이 사실을 안 진성여왕에 의하여 헌강왕의 혈육이라 하여 895년에 태자로 봉하여지고, 뒤이어 왕위를 물려받았다.
왕위에 오른 효공왕은 헌강왕의 왕후이자 자기 양어머니인 김씨를 의명왕태후로 추존하고, 서불한 중흥을 상대등, 아찬 계강을 시중으로 삼아 조정을 개편했다. 그리고 재위 2년인 899년 3월에 이찬 예겸의 딸을 왕비로 맞아들였다.
효공왕 재위 시 신라는 왕실의 권위가 떨어져서 지방에서 일어난 궁예와 견훤이 신라영토의 패권을 놓고 서로 다투고 있었는데, 지금의 청주나 충주 이북지역은 완전히 궁예의 세력권에 속하게 되었다. 898년에 북쪽 지역에서 패권을 형성하고 있던 궁예는 패서도와 한산주 관내의 30여 성을 빼앗고, 마침내 송악에 도읍함으로써 후고구려의 기치를 내걸었고, 899년 7월에는 북원의 양길을 무너뜨리고 패권을 장악했다. 그러자 900년에 충주, 청주, 괴산의 세력가인 원회, 청길, 신훤 등이 궁예에게 성을 바치고 항복함으로써 궁예의 세력은 충청도와 경상 북부 일원까지 확대되었고, 마침내 901년에 궁예가 스스로 왕이라 칭하며, 후고구려가 건국되었다.
북쪽에서 궁예가 패권을 형성하고 있는 사이 남쪽의 견훤도 세력을 팽창해오고 있었다. 견훤은 901년 8월에 낙동강 서쪽 지대 장악을 위해 대야성(합천)을 공격해 왔는데, 다행히 신라 장수들의 활약으로 대야성을 무너뜨리지 못했다. 견훤은 이내 병력을 금성(나주)로 옮겨 그곳을 공격하였다. 나주는 독특한 지형 덕택에 견훤의 다각적인 공격을 막아 내며 어렵게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는데, 견훤은 나주를 손안에 넣기 위해 여러 차례 군대를 동원했지만, 쉽게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에 궁예는 해군대장군 왕건에게 나주를 장악할 것을 명하여 왕건은 그곳 호족들을 포섭, 나주로 군대를 잠입시켰고, 마침내 나주를 손안에 넣었다.
그리고 궁예는 904년에 국호를 마진, 연호를 무태라 하고, 백관의 제도를 확립함으로써 국가의 면모를 일신하였다. 그러자 신라 왕실을 섬기며 버티고 있던 패서도의 10여 주현이 궁예에게 투항해 버렸다. 궁예는 905년에 철원으로 도읍을 옮기고, 죽령까지 세력을 확대하여 빠르게 신라 땅을 잠식하였다.
907년에는 견훤이 일선(경북 선산)까지 진출하여 주변의 10여성을 장악하였고, 궁예는 남진을 계속하여 상주와 안동 일대를 장악하였다. 이렇게 되자, 신라 도성이 있는 서라벌 주변이 온통 견훤군과 궁예군의 전장이 되고 말았다.
나주 점령에 실패한 뒤, 계속해서 나주를 공격해오던 견훤은 909년에 해군장수 왕건과의 해전에서 크게 패해 진도와 고이도를 뺏기는 바람에 해상권을 잃고 나주에서 후퇴해야만 했다. 910년에 견훤은 다시 총력전을 펼쳐 나주를 공격하였고, 열흘 동안 포위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왕건이 이끄는 수군의 습격을 받아 퇴각하고 말았다.
이런 상황에서 신라의 효공왕이 이미 쇠할 대로 쇠한 국력을 회복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런 절망감에 사로잡힌 그는 정사는 제쳐 두고 총애하는 첩과 음사를 즐기며 방탕한 생활을 일삼았다. 대신 은영이 그런 모습을 보다 못해 효공왕에게 정사를 돌볼 것을 충언으로 간했지만 그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고, 효공왕의 첩을 죽여 왕정을 경계하게 한다.
이 사건 이후 효공왕은 왕권을 빼앗기고 허수아비 왕으로 전략하였고, 급기야 912년 4월에 죽음을 맞이했다. 효공은 왕비를 비롯한 박씨 일파에 의해 살해된 것으로 추측되는데 그를 이어 왕위에 오르는 박경휘(신덕왕)가 왕비 박씨의 오빠이고, 은영의 백부라는 사실이 그런 추축을 가능케 한다. 그의 죽음으로 내물왕 이후 지속되던 김씨 왕실은 몰락하게 된다. 죽은 뒤 사자사 북쪽에 장사지냈다고도 하고, 혹은 사자사 북쪽에서 화장하여 뼈는 구지제 동산 기슭에 묻었다고도 한다.
제53대 신덕왕
박예겸(제8대 아달라왕의 후손)
정화부인 ․ 박씨, 경휘, 생년미상 ~ 917년
재위기간 : 912년 4월 ~ 917년 7월. 총 5년 3개월
부인 : 1명
자녀 : 2남
의성왕후 김씨 - 승영(재54대 경명왕), 위응(제55대 경애왕
신덕왕은 제8대 아달라왕의 먼 후손이고, 박예겸의 아들이며 정화부인 소생이다. 이름은 경휘이며, 일찍이 헌강왕의 사위가 되었다. 타락한 효공왕이 박씨 세력에 의해 제거되자, 912년 4월에 왕위에 올랐다. 신덕왕의 아버지 예겸은 헌강왕 원년인 875년에 시중에 임명된 사람으로 신라 조정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신덕왕의 즉위는 제8대 아달라왕을 끝으로 제왕의 자리에서 물러났던 박씨 왕조의 부활을 의미한다.
왕위에 오른 신덕왕은 즉위년 5월에 선친 예겸을 신성대왕으로 추존하고, 어머니를 정화태후로, 왕비를 의성왕후로 하고, 아들 승영을 태자로 책봉하였다. 그리고 이찬 계강을 상대등으로 삼아 조정을 수습하였다.
신덕왕대의 신라는 국토의 대부분을 궁예와 견훤의 세력권에 빼앗겨 실제로 경주지역을 다스리는 데 그쳤다. 궁예의 부하인 왕건이 나주를 정벌한 이후 그들의 패권다툼이 더욱 치열해가는 동안 신라의 명맥은 겨우 유지되는 형편이었다. 이때의 신라 왕실은 스스로 후백제나 태봉의 공격을 막아낼 만한 힘이 없었다.
그의 치세 중에 중요한 사건이 있다면, 914년에 궁예가 연호를 ‘수덕만세’에서 ‘정개’로 고친 것과 916년 8월에 견훤이 또다시 대야성을 공격해 온 일이었다. 916년에 이르러서는 견훤이 대야성(지금의 경상남도 합천)을 공격하여 비록 이를 함락시키지 못하였으나, 그것은 곧 신라의 심장부에 비수를 겨누는 격이 되었다. 신덕왕은 917년 7월에 죽었으며, 육신은 화장되었고, 능은 죽성에 마련되었다. 혹은, 화장하여 잠현에 묻었다고 한다
제54대 경명왕
의성왕후 김씨 ․ 박씨, 승영, 생년미상 ~ 924년
재위기간 : 917년 7월 ~ 924년 8월. 총 7년 1개월
부인 : 1명
자녀 : 없음
장사왕후
경명왕은 신덕왕의 장남이며, 의성왕후 김씨 소생으로 이름은 승영이다. 912년 아버지 신덕왕이 즉위하자, 그해 5월에 태자에 책봉되었다. 917년 7월에 신덕왕이 죽자 왕위에 올랐다.
경명왕은 아우인 이찬 위응을 상대등에 임명하고, 대아찬 유렴을 시중으로 삼아 정사를 꾸렸다. 하지만, 경명왕 때에는 이미 신라의 국운이 기울어가고 있었다. 실제 신라 왕실은 왕경인 경주를 중심으로 한 그 주변지역을 다스리는데 불과하였고, 나머지는 궁예와 견훤 등 지방 세력들에게 빼앗겼다. 특히, 918년(경명왕 2)에 일어난 현승의 반란으로 신라는 그 운명을 더욱 재촉하게 되었다. 또, 경명왕 때에는 여러 가지 변괴가 있었다고 하는데, 919년 사천왕사 벽화의 개가 울었고, 927년에 황룡사탑의 그림자가 사지 금모의 집 뜰에 열흘이나 머물렀으며, 사천왕사 오방신의 활줄이 모두 끊어지고 벽화의 개가 뜰로 쫓아 나왔다는 기록들이 그것이다. 당시 신라의 국운이 기울어져가는 불안한 사회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기사들이다.
928년 6월에 궁예가 911년 세웠던 태봉 왕조는 민심이 불안해지면서 왕건을 추대하는 신하들로 인해 무너지고 만다. 왕건은 왕위에 올라 국호를 고려라 하고, 연호를 천수라 하였다. 얼마 뒤, 후백제가 아자개가 지배하던 상주 일대를 장악하는 과정에서 그의 심사를 불편하게 하자 아자개가 아들인 견훤을 버리고 왕건에게 투항하게 된다. 이 사건으로 견훤의 명예는 크게 훼손되었다.
고려 개국 이후 신라의 지방 세력들은 왕건에게 호의를 가지기 시작했고, 경명왕도 고려와 타협하여 후백제를 함께 견제하려는 경향을 보였다. 왕건이 919년에 도읍을 철원에서 송악으로 옮겨 정치적 기반을 강화하자, 920년 정월 상대등 김성과 시중 언옹 등은 왕건과 사신을 교환하고 고려와 수호 관계를 맺었다. 그러자 견훤에게 위협을 받고 있던 지방 세력들이 전략적 제휴의 형태로 대거 고려에 귀순했다.
920년 2월에 강주(진주) 장군 융웅이 견훤의 대야성을 공격해 위협을 느끼고 고려에 귀순했는데, 예상대로 견훤은 그해 10월에 기병 1만을 거느리고 대야성을 공격해 왔고, 결국 대야성은 함락되고 말았다. 다급해진 경명왕은 급히 아찬 김율을 왕건에게 보내 도움을 요청했지만, 견훤의 군대는 다시 진례로 진군했고, 이를 왕건의 도움으로 막아낼 수 있었다. 912년 2월에는 말갈의 일족인 달고 무리가 신라의 북쪽 변경을 침략해 왔다. 그러나 그들은 고려 장수 견권에게 대파되어 전멸하였다. 경명왕은 왕건에게 사신을 파견하고, 감사하는 편지를 함께 보냈다.
이렇게 고려의 도움으로 계속되는 수난들을 극복하게 되자, 경명왕의 외교정책도 친고려의 성향으로 바뀌고 만다. 이렇게 상황이 돌아가, 922년 정월에 하지성 장군 원봉이, 923년 7월에는 지성장군 성단, 경산부 장군 양문 등이 왕건에게 귀순하게 된다.
왕건에게 등을 돌렸던 태봉의 신하들도 고려에 투항하기 시작했다. 922년 정월에 명주의 호족 김순식이 항복하여 왕씨 성을 하사받고 충성을 맹세하였고, 또 진보성 장군 홍술도 같은 달에 항복하였다. 명주의 호족으로 지금의 강운도 동해안 일대를 장악하고 있던 순식과 경북 의성 일대의 호족인 홍술의 귀순으로 왕건의 세력은 더 확고해지게 된다.
고려에 의존하던 덕분에 정치적 안정을 되찾은 경명왕은 923년에 창부시랑 김낙과 녹사 참군 김유경과 924년 조산대부 창부시랑 김악을 후당에 입조시키고 토산물을 바치는 조공 외교도 펼치게 된다. 후당의 장종은 그에게 의대부시위위경의 관직을 내렸다. 경명왕은 고려와 후당에 생존을 위한 외교전을 펼치며 신라의 명맥을 겨우 유지해나가고 있었다. 그러던 중 924년 8월에 지병으로 생을 마감하니, 황복사 북쪽에서 화장되어 뼈는 성등 잉산 서쪽에 뿌렸다. 고려 태조 왕건은 사신을 보내 조문하고, 제사에 참여토록 하여 양국의 화친 관계를 확인하는 조치를 내렸다.
제55대 경애왕
의성왕후 김씨 ․ 박씨, 위응, 생년미상 ~ 927년
재위기간 : 924년 8월 ~ 927년 11월. 총 3년 3개월
부인 : 1명
자녀 : 여러 명(자세한 기록 없음)
왕비
경애왕은 신덕왕의 아들이며, 경명왕의 동복아우이고 의성왕후 김씨 소생으로 이름은 위응이다. 경명왕 원년인 917년에 상대등에 임명되어 조정을 이끌다가 919년에 물러났다. 924년 8월에 경명왕이 후사 없이 죽자, 왕위에 올랐다.
경애왕 때 후삼국의 패권다툼은 이미 왕건 쪽에 유리하게 전개되었다. 925년 고울부장군 능문이 항복하였고, 927년 강주(지금의 진주)의 왕봉규가 관할하는 돌산 등이 왕건에게 항복하였다. 이렇듯 신라 장수들이 계속 고려 조정에 투항하고 있을 무렵, 고려 도성으로 발해의 귀족과 백성들도 대거 귀순하고 있었다. 당시 발해는 거란의 거센 공격에 밀려 도성이 함락될 지경에 놓여 있었다. 그 여파로 925년 9월엔 장군 신덕 등 5백 명이 귀순했고, 또 같은 달에 발해의 예부경 대화균을 비롯해 대씨 왕족들이 대거 귀순해 왔다. 고려는 신라 호족들과 발해의 유민을 받아들여 국력을 키웠고, 이러한 상황 속에서 왕건과 견훤은 잠시 싸움을 그치고 강화하였는데, 견훤이 보낸 질자인 진호가 고려에서 죽자 견훤은 926년 다시 출병하여 고려를 공격하였다.
신라는 경명왕 4년에 고려와 수교하여 친 고려정책을 펼쳤다. 이 시기에 견훤은 1만 명이라는 대규모 군대를 동원하여 그의 오랜 숙원인 대야성을 함락시켰으며, 다음 진례에 대한 공격을 감행하게 되는데, 이때 고려군의 파병으로 위기를 모면하게 된다. 이후 후백제와 고려의 관계는 4,5년간 소강상태를 유지하였으나 경애왕이 등장하면서 대규모의 전쟁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고려는 용주성을 공격한 것을 계기로 후백제에 대한 적극적인 공세를 취하였으며, 드디어 왕건이 친히 강주를 순행하며 민심을 돌보자, 불안을 느낀 견훤은 지금의 상주를 공격하고, 이어 경주 근처의 고울부를 습격한다. 견훤이 침입했다는 소식을 듣고, 경애왕은 고려의 왕건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왕건에게 구원군을 요청한 경애왕은 다급한 심정으로 왕비와 궁녀, 종실들과 함께 포석사에 나가 제를 올리고, 국가의 안녕을 기원했다. 신라의 요청을 받은 왕건이 곧 군사 1만 명을 파견하여 구원하게 하였으나 고려군이 도착했을 때, 이미 서라벌은 백제군에게 유린당한 뒤였다. 이 사건을 『고려사』, 『삼국사기』에는 경애왕이 포석정에 나가 연회를 베풀며 놀고 있었다고 하나, 이는 고려의 역사가들이 신라 멸망의 당위성을 역설하고 고려건국의 정당성을 높이기 위해 그렇게 기록한 것이라 보아진다.
경애왕은 견훤이 포석정까지 들이닥치자, 당황하여 왕비와 함께 달아나 도성 남쪽 별궁에 몸을 숨겼으나 백제군의 수색망에 자살로 생을 마감했으니, 이때가 927년 11월이었다. 견훤은 경애왕의 외종제 김부(경순왕)를 왕으로 세우고, 왕족 효렴을 비롯해 재상 영경과 그 외에 종실의 자녀들과 각종 기술자들, 병기, 보배 등을 빼앗고 돌아갔다. 이 소식을 들은 왕건은 신라를 돕는다는 명분으로 급히 군사를 일으켰고 바로 이것이 공산성전투가 된다.
한편, 경애왕 때 황룡사에 백좌경설을 설치하고 선승 300여명에게 음식을 대접하였는데, 이것을 백좌통설선교라 부르며, 대규모 선승 모임의 시초가 되었다. 세 왕 김부는 경애왕의 시체를 수습하여 서쪽 대청에 안치하고, 장례를 치른 뒤, 남산 해목령에 능을 마련했다.
제56대 경순왕
김효종
계아태후 ․ 김씨, 부, 생년미상 ~ 978년
재위기간 : 927년 11월 ~ 935년 11월. 총 7년
부인 : 3명
자녀 : 1남 이상
죽방부인 - 마의태자
낙랑공주 왕씨
후실왕씨
경순왕은 제46대 문성왕의 후예로 성은 김씨이고, 이름은 부이며, 경애왕의 외종제이다. 아버지는 이찬 효종이며, 어머니는 계아태후이다. 경순왕의 아버지 효종은 효공왕 6년(902년)에 대아찬으로 시중에 임명되었다. 그 이후 이찬으로 품계가 올랐고, 오랫동안 신라 조정을 이끌었던 인물이다.
효종의 아들 부가 왕위에 오른 것은 견훤의 천거에 의해서였다. 927년 경애왕이 견훤의 습격을 받아 살해된 후 견훤에 의해 옹립되었다. 경명왕 즉위 이후 신라가 노골적으로 고려와 화친하며 백제를 적대시하던 박씨 왕조를 폐하고 김씨 왕조의 후예인 부를 왕으로 세웠던 것이다. 견훤은 김부를 왕으로 세우고 돌아가면서 신라의 도성을 지키던 병사들을 대거 포로로 잡아가, 경순왕은 군사권도 행사할 수 없는 이름뿐인 왕이었다. 왕위에 오른 경순왕은 우선 경애왕의 시체를 대청에 모시고, 여러 신하와 함께 장례를 준비했다. 고려 태조 왕건은 사신을 보내 조문한 뒤, 이내 자신이 직접 병력 5천을 이끌고 견훤의 퇴로를 차단하기 위해 달려왔다.
왕건은 공산(팔공산)에서 견훤을 급습하려했으나, 오히려 백제군이 숨겨놓은 복병에 당하고 만다. 백제군에 둘러쌓여 진퇴양난의 상황에 놓이자 신숭겸의 희생으로 겨우 목숨을 건져 탈출할 수 있었다. 공산의 패전 이후, 왕건은 백제와의 계속되는 전쟁에서 어려움을 겪게 된다. 928년 고려와 신라의 교통로였던 죽령과 강주를 백제군이 장악했으며, 11월에는 경상 북부 지역의 요충지인 부곡성이 함락당해 장군 양지와 명식이 백제에 항복하였다. 929년 7월에는 고려의 주요 거점인 의성부를 공격하여, 의성 성주 홍술이 전서하게 된다. 그러던 중 그해 10월에 견훤은 자신의 고향인 사벌의 가은현을 차지하려 노력했으나, 결국 실패하고 경상도 지역에 주둔한 고려군의 마지막 보루인 고창(경북 안동)을 공격했다. 그 소식을 듣고 군대를 이끌고 내려온 왕건은 고전 끝에 유금필을 앞세우고 죽령을 뚫는다. 이때, 재암성을 지키고 있던 신라 장수 선필 군대를 이끌고 귀순해 오게 되고, 유금필을 선봉에 두고 백제군을 잇따라 궤멸시켰다. 이에 고려군은 고창에, 견훤의 군대는 불고 5백 보 남짓 떨어진 석산에 주둔하며 대치했다. 이때, 김선평, 권행, 장길 등이 이끌던 주변의 신라 민병대가 고려군에 가세하게 되고 힘을 얻은 왕건은 신라 민병대와 함께 협공을 감행하여, 견훤의 군대를 낙동강 넘어 남쪽까지 퇴각시키게 된다. 상황이 이렇게 흘러가자, 신라 신하로 남아있던 동해 주변의 주와 군의 110여 성이 고려에 귀순했다.
931년에는 왕건이 경순왕을 알현하여 수십 일을 머물렀는데, 왕건은 부하들에게 질서와 규율을 지키도록 하니, 수도 아녀자들은 ‘전번 견훤이 왔을 때에는 늑대와 범을 만난 것 같았으나, 이번 왕건이 왔을 때에는 부모를 만난 것 같다’고 하였다고 한다.
왕건이 기세를 세우며 백제 성곽에 대한 공격을 가속화하고 있던 시기에 견훤은 수군을 움직여 그해 9월 백제의 해군장수 상귀로 하여금 고려의 예성강을 공격하게 했다. 그리고 염주, 백주, 정주 세 개의 포구를 장악하고, 전함 1백 척을 불살랐다. 도성주변을 공격당한 왕건은, 934년 9월에 직접 군대를 이끌고 운주 정벌을 감행했다. 유금필을 필두로 선제공격에 나선 고려군은 백제군 3천 명을 죽이는 승리를 거두게 되고, 이에 공주 이북의 30여 성이 스스로 항복해 왔으며, 929년부터 백제의 지배 아래 들어간 나주까지 탈환하게 된다. 운주에서 대패하고, 다시 나주까지 뺏긴 백제 조정은 935년부터 심한 내분을 겪게 된다. 견훤은 여러 명의 아내에게 십여 명의 아들을 뒀는데, 그들 중에 넷째 아들 금강을 가장 총애했다. 운주 전투에서 물러난 후, 금강에게 왕위를 양위하자 이에 당시 가장 유력한 왕위 계승자였던 신검과 반대파 세력은 935년 3월에 반란을 일으켜 금강을 죽이고, 견훤을 금산사에 유폐시켜 버렸다. 금산사에 갇혀 있던 견훤은 유폐된 지 3개월 만인 그해 6월에 나주로 탈출하여 고려에 귀순했다.
935년 그는 고려에 신라를 넘겨 줄 것을 신하들과 논의하고 김봉휴로 하여금 왕건에게 항복하는 국선을 전하게 하였다. 이때 마의태자는 고려에 항복하는 것을 반대하였으나 경순왕이 끝내 투항을 천명하자, 부왕에게 하직 인사를 하고 속세를 등졌다.
그해 11월 고려 태조가 신라의 항복을 받아들이고, 이로써 신라 천년사직은 무너졌다. 경순왕이 신하를 거느리고 고려에 귀의할 때 향거와 보마가 30여리에 뻗쳤다. 왕건은 그를 정승공으로 봉하고 태자보다 높은 지위에 두었다. 또, 왕건은 그에게 녹 1000석을 주고 그의 시종과 원장을 모두 등용하였으며, 신라를 고쳐 경주라 하고 그의 식읍으로 주었으며, 그를 경주의 사심관으로 삼았다. 936년 2월에는 견훤의 사위이자, 신검의 매형인 박영규가 고려에 귀순했다. 이렇게 한반도의 패권과 민심은 왕건에게 옮겨가고 있었다. 왕건은 그해 9월에 8만 7천 명의 군사를 이끌고 견훤과 함께 신검을 응징하기 위해 나섰고, 일선(선산), 완산주 등지에서 전쟁을 벌여, 완산주에서 신검의 항복을 받아냈다. 후백제가 멸망하게 되면서, 이로써 약50년에 걸친 후삼국 시대는 막을 내리게 된다.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한 뒤에도 경순왕의 삶은 이어졌다. 그는 녹읍으로 받은 경주 지역을 다스리며 살다가 978년(고려 경종 3년)에 생을 마감했다. 무덤은 경기도 연천군 백학면 고량포리에 있다. 그의 능이 어떤 이유로 이곳에 조성됐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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