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의 역사중 왕의 계보에 대해 알아보자.(제1대왕~제5대왕)
제1대 혁거세왕(거서간)
박씨, B.C.69년~A.D.4년
재위기간: B.C.57년 모월~A.D.4년 4월, 약 60년
부인: 1명
자녀: 4남
왕후 알영 - 장남, 제2대 남해왕, 일지 갈문왕, 허루왕
혁거세거서간은 진한 6부의 하나인 양산촌 출신이며, 서기전 69년에 태어났다. 열세살이 되던 서기전 57년에 왕위에 올랐으며, 서기전 53년에 알영을 비로 맞아들였다. 알의 크기가 박과 같다고 하여 성을 박이라 하였고, 그 광채로 인하여 이름을 혁거세 혹은 불구내라고 하였다. 이때 왕의 칭호는 거서간 또는 거슬한이라 하였고, 나라이름을 서나벌, 서라벌, 서벌 혹은 사라, 사로라 하였다. 29세가 되던 재위 17년에 알영과 함께 국내 6부를 순회하며 위무하였는데, 농사와 누에치기에 힘쓰도록 권장하였으며, 진한 전역으로 영토를 넓혀갔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진한 6부의 촌장의 뜻을 모아 혁거세를 왕으로 옹립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으나, 실제로 진한 6부를 복속한 때는 이 무렵인 것으로 보인다. 재위 19년, 변한이 나라를 바치고 항복해 오면서 신라국의 영역은 더욱 확대된다.
33세가 되던 재위 27년(서기전 37년)에 서울에 성을 쌓아 금성이라 하였고 서기전 32년에 궁실을 짓게 되는데, 아마도 이때가 실질적인 개국 시점일 것이다. 그러나 개국연대가 전한 효선제 오봉 원년 갑자라는 설은 문제가 있다. 첫째,『삼국사기』가 신라 중심의 관점에서 신라의 건국을 고구려나 백제보다 먼저 잡은 것으로 보여진다. 둘째, 갑자년이라는 간지가 참위설의 갑자혁명설에 입각한 듯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혁거세왕이 정식으로 왕위에 오르는 것은 39세가 되던 서기전 31년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진한 6부와 변한 일부 국가를 합쳐 한반도 동남쪽을 장악한 신라국은 이때부터 마한의 그늘을 벗어나 독자적인 길을 걸었다. 그간 마한에 바치던 조공도 중단하여 마한 왕실과 등을 지고, 북방으로도 세력을 확대하여 낙랑(동예)과 국경을 맞대게 됨으로써 국경 분쟁도 잦게 된다. 서기전 28년 낙랑이 침범해 왔으나 국경에 있는 백성들이 밤에 문을 잠그지 않으며 곡식더미가 들에 즐비한 것을 보고 '도덕의 나라'라 하고 스스로 물러갔다. 이렇듯 신라의 위세는 급속히 성장했고, 급기야 마한과 힘을 견 줄 정도의 상황이 되었다. 자신감을 가진 혁거세왕은 재위 38년(서기전 20년)에 신하 호공을 사신으로 보냈는데, 조공을 바치지 않는 것을 탓하는 마한 왕에게 호공이 그럴 필요가 없다하여 마한 왕이 분노해 죽이려 했으나 신라들이 만류하여 놓아주었다. 그리고 이듬해 마한 왕이 죽어 신하들이 마한을 정벌할 것을 권했으나, 혁거세는 "다른 사람의 불행을 요행으로 여기는 것은 어질지 못한 일이다."하여 사신을 보내 조문하였다. 이는 그 무렵, 신라의 정치체제가 바로잡혀 마한에 매여 있지 않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마한은 지방자치제 형태인 분국 국가 체제였는데, 신라국은 그와 달리 분국 10여 개를 하나로 묶은 새로운 개념의 중앙집권적 연합국가로 발돋움하고 있었다. 따라서 삼한의 국가들 중에서 가장 강력한 힘을 가진 세력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러한 통일국가의 탄생은 주변 분국들에게 영향을 미쳐 여기저기서 국가 연합을 모색하는 상황을 연출하기에 이르렀다. 서기전 18년에 마한 땅에서는 고구려에서 망명한 온조의 세력이 마한의 북방 변경 지역에 백제를 세웠는데, 백제의 건국은 세력을 팽창시켜 마한 땅 전체를 장악하려던 신라에는 대단히 위협적인 복병이 아닐 수 없었다. 마한 왕실의 위상은 떨어지고 마한 분국들의 결속력 또한 급격히 약화되고 있었다. 이런 상황속에서, 혁거세왕은 후반기 20년 동안 주로 평화 정착과 내실을 다지는 데 주력했다. 서기전 4년에는 동옥저에서 보낸 사신이 와서 말 20필을 바쳤다는 기록이 있으나 이는 당시 신라의 세력에 비추어 맞지 않다는 주장이 있다.
혁거세는 재위 62년 만에 하늘로 승천했다가 7일 만에 시신이 부위별로 나뉘어 흩어져서 지상으로 떨어졌다. 『삼국유사』의 기록을 살펴보면, "백성들이 그 나뉘어진 혁거세의 몸을 다시 하나로 모아 장사를 지내고자 했으나, 커다란 뱀 한 마리가 나타나 사람들을 쫓아내며 훼방을 놓았다. 하는 수 없이 양 다리, 양 팔, 그리고 몸통과 얼굴을 각각 따로 묻었는데, 이렇게 혁거세의 무덤은 다섯 개가 되었고, 그 무덤들을 오릉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이는 혁거세왕의 시신이 동강이 났다는 것을 보여주는 기록인데, 그의 재위 말년에 반란이 있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죽은 뒤 사릉에 장사지냈는데, 능은 담암사 북쪽에 있다.
제2대 남해왕(차차웅)
제1대 혁거세왕 - 알영
박씨, 생년 미상~서기 24년
재위기간: 4년 3월~24년 9월, 총 20년 6개월
부인: 1명
자녀: 3남 1녀
운제부인 - 장남, 제3대 유리왕, 아효부인 박씨(제4대 탈해왕의 왕비), 나로
남해차차웅은 혁거세왕과 알영부인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이름은 박유이다. 체격이 장대하고 성품이 깊고 두터웠으며 지략이 많았다고 전한다. 차차웅이라는 칭호에 대해 『삼국사기』에는 차차웅 혹은 자충은 무를 의미하는 신라 방언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남해왕 대에는 정치 수장적 성격보다는 제사장적 기능이 강하였음을 말해주고 있다.
남해차차웅의 치세에는 외침이 잦았는데, 즉위년 7월에 낙랑(동예)의 군대가 쳐들어와 금성이 포위되는데, 이에 왕권은 계속 불안한 상태를 지속하게 된다. 이 시기에(서기 8년) 석탈해라는 인물이 어질고 용맹이 뛰어나다는 소문을 듣고 맏딸 아효로 하여금 아내로 삼게 하여, 대보의 벼슬을 주고 군사와 정치에 관한 일을 전담시켰다. 석탈해가 대보의 직위에 오르자, 국정을 조금씩 안정되었고, 덕분에 혼란스런 상황에서도 왕권을 유지할 수 있었다. 남해왕대의 혼란은 천재지변으로 계속 이어지는데, 서기 11년에는 봄과 여름에 걸쳐 가뭄이 지속되어 극심한 흉년이 들었으며, 재위 11년(서기 14년)에는 왜인이 쳐들어와 해변의 민가를 약탈하여 6부의 정병을 보내 격퇴한다. 낙랑은 그 혼란을 틈타 또 쳐들어왔다. 낙랑군은 금성까지 밀고 들어와 알천가에 주둔하였는데, 낙랑 진영에 유성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 겁을 먹은 낙랑군은 퇴각하였다.
재위 15년에는 가뭄이 심하게 든 데다, 설상가상으로 메뚜기 떼가 창궐하여 백성들이 굶주림에 허덕였다. 또 재위 19년에는 전염병이 크게 돌아 숱한 사람이 죽었으며, 음력 11월에도 물이 얼지 않는 기상이변까지 겹쳤다.
재위 21년 9월에 메뚜기 떼가 극성을 부려 농사를 망쳐 놓았다. 남해왕은 재위 내내 정치적 혼란과 재난, 그리고 전쟁에 시달려야만 했으며, 재위 21년에 생을 마감했다. 혁거세왕이 묻힌 사릉원에 장사를 지냈다.
제3대 유리왕(이사금)
제2대 남해왕 - 운제부인
박씨, 생년 미상~57년
재위기간: 24년 9월~57년 10월, 총 33년 1개월
부인: 3명
자녀: 2남
왕비 박씨(일지갈문왕의 딸)
후비 - 제7대 일성왕
후비 - 제5대 파사왕
유리이사금은 남해왕의 태자이며 운제부인 소생이다. 서기 24년 9월에 남해왕이 죽자 왕위에 올랐으며, 『삼국유사』는 그를 노례왕 또는 유례왕으로 기록하고 있다. 비의 이름은 알 수 없고, 일지갈문왕의 딸 박씨, 허루갈문왕의 딸 또는 사용왕의 딸이라는 세 가지 설이 있으나, 일지갈문왕의 딸일 가능성이 가장 크다. 유리왕 때부터 쓰인 이사금이라는 왕호는 이질금, 치질금이라고도 쓰는데, '잇금'을 의미하는 신라 방언이라는 전통적 해석이 있으나 정확한 뜻은 알 수 없다. 사회적으로 이사금시대 왕의 성격은 부족연맹장이라는 설이 있으나, 어떻든 종래의 거서간시대보다는 문물 제도면에서 향상된 시대였음은 인정할 수 있다.
삼국사기는 왕호에 대해 김대문의 말을 인용하기를 "남해가 바야흐로 죽으려 할 즈음 아들 유리와 사위 탈해에게 일러 말하기를 '내가 죽은 뒤 너희 박 석 두 성씨 가운데 나이가 많은 사람이 왕위를 이을 일이다'라고 하였다." 이 때 탈해는 38세였고, 유리의 나이는 기록되어 않아 알 수 없다. 지혜가 많은 자는 잇금이 많다고 하니, 그것으로 왕위 계승자를 결정하자는 탈해의 제안으로 떡을 깨물어 보니, 유리의 이자국이 더 많아 유리가 왕이 되었다.
즉위 이듬해인 25년 친히 시조 묘에 제사를 지내고 죄수를 사면했다. 재위 9년에는 6부의 이름을 고치고 성씨(이, 최, 손, 정, 배, 설)를 하사하였으며, 관직도 17등급으로 나눠 정부 조직을 정비하였는데, 관등제는 신분에 따라 오를 수 있는 등급의 상한선이 결정된 것인데, 이것이 법흥왕 대에 이르면 골품제도로 정착되어 신라말기까지 이어지게 된다. 6부를 정한 뒤에는 이를 두 편으로 나눠서, 두 왕녀로 하여금 각각 부 내의 여자를 거느리게 하였다. 이들 두 편으로 하여금 7월 16일부터 8월 15일까지 매일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길쌈 시합을 하도록 하여 그 많고 적음을 보아 승부를 결정짓는 놀이를 하였는데, 이 행사를 가배라고 하였다. 이는 한가위, 즉 추석의 기원이 되었다.
재위 무렵, 보습같은 농기구나 수레 등이 대대적으로 보급되었고, 얼음을 저장하는 빙고도 만들어졌다. 유리왕 재위 10년 동안은 비교적 안정과 평화가 지속되어 여러 문화적인 발전이 이뤄졌지만, 재위 11년(서기 34년)부터 전쟁과 재해에 시달리게 된다. 재위 13년 8월에는 낙랑(동예)이 북쪽 변경을 침입하여 타산성을 점령함으로써 전쟁 분위기에 휩싸였다. 이듬해인 37년에는 고구려가 낙랑을 습격하여 멸망시키자, 낙랑민 5천 명이 와서 투항하였고, 이에 유리왕은 그들을 6부에 나누어 살게 하였다.
재위 17년 9월에는 낙랑의 화려현과 불내현 사람들이 공모하여 기병을 거느리고 북쪽 변경을 침범하였는데, 이에 맥국(동옥저) 우두머리가 곡하의 서쪽에서 군사로써 막아 이들을 물리쳤다. 유리왕은 맥국에 감사의 뜻으로 그들과 친교를 맺었고, 재위 19년 8월에는 맥국의 왕이 사냥을 하여 새와 짐승을 바쳤다.
재위 34년 되던 해에 병환이 들어 자리에 몸져눕게 되자, 신료들을 모아놓고 "탈해는 그 신분이 임금의 친척이고 지위가 재상의 자리에 있으며 여러 번 공명을 드러내었다. 짐의 두 아들은 재주가 그에 훨씬 미치지 못하니, 내가 죽은 후에 그로 하여금 왕위에 오르게 하라."고 유훈을 남기고 죽었으며, 사릉에 장사지냈다.
제4대 탈해왕(이사금)
용성국 왕비
석씨, B.C.19년~80년
재위기간: 43년 모월~80년 8월, 약 37년
부인: 2명
자녀: 1남
아효부인(남해왕의 장녀)
후비 - 구추(제9대 벌휴왕의 아버지)
탈해이사금은 용성국의 함달파왕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여국왕의 딸 또는 적녀국왕의 딸이라고 한다. 성은 석씨이며, 토해라고도 한다.
『삼국사기』는 탈해의 출생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탈해는 본래 다파나국에서 태어났는데, 이 나라는 왜국의 동북쪽 천 리 밖에 있다. 처음 그 나라 왕이 여국 왕의 딸을 아내로 삼았는데, 임신한 지 7년 만에 큰 알을 낳았다. 왕은 "사람이 알을 낳았으니, 상서롭지 않다. 버리는 것이 마땅하다."라고 말하였다. 그 여인이 차마 알을 버리지 못하고 비단으로 알과 보물을 함께 싸 가지고 상자에 넣어 바다에 띄워 보냈다. 그것이 처음에는 금관국 해변에 닿았으나 금관 사람이 이를 괴이하게 여겨 거두지 않았다. 상자는 다시 진한 아진포 어구에 닿았는데, 이때가 시조 혁거세 39년(서기전 19년)이었다. 그때 해변에 사는 할머니가 상자를 줄로 끌러 올려 해안에 매어 놓고 열어 보니, 한 어린아이가 있었다. 그때 해파가 이 아이를 데려다 길렀다.」양모였던 노파는 탈해가 보통 사람이 아님을 알고 공부를 시켜, 학문과 지리에 두루 통달하게 되었다. 당시 이름난 신하인 호공의 집터가 좋음을 보고 몰래 숫돌과 숯을 그 집에 묻어놓고는 자기의 집이라 우기니 관가에서는 주장하는 근거를 요구하자, 자신이 본래 대장장이였으니 땅을 파서 조사하자고 하여, 과연 숫돌과 숯이 나오자 탈해가 승소하여 그 집을 차지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 같은 내용의 설화에서, 첫째 탈해 집단이 경주 동해변에 살았다는 것을 알 수 있고, 그것은 그가 죽은 뒤 동악신으로 봉사되었음에서도 확인된다. 둘째는 석씨부족이 어로를 주요생활수단으로 하였지만, 이미 철기문화를 가지고 있었으며, 적어도 철을 다루는 능력이 왕위계승에까지 연결되는 강점이 하나였다고 보고 있다. 탈해는 서기 8년에 왕의 사위가 되고, 서기 10년에는 대보의 자리에 올랐으며, 유리이사금의 즉위 시에 왕위계승의 물망에 올랐지만, 유리이사금이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먼저 왕이 되었다는 설화가 있으며, 유리이사금이 탈해에게 왕위를 넘겨주었다. 탈해가 왕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남해차차웅의 사위이니 결국 박씨 집단의 일원이라는 동속개념으로 설명되기도 한다. 또 철을 이용한 군사력 및 거기에 따르는 실질적인 정치실력파의 등장으로 박씨족과 석씨족이 연맹하였으며, 이것은 왕실세력의 폭을 넓혔다고 본다. 서기 8년에는 남해차차웅의 사위가 되어 왕실의 일원이 되었으며, 2년 뒤인 10년에는 재상격인 대보에 임명되어 정사를 맡았다. 24년에 남해왕이 죽자, 유리왕이 탈해의 덕망이 높다는 이유로 그에게 왕위를 양보하려 했는데, 유리왕이 나이가 더 많다는 이유로 먼저 왕이 되었다는 설화가 있다. 43년에 왕위에 올랐으니, 이때 그의 나이는 환갑을 넘긴 62세였다.
즉위 이듬해인, 서기 58년 2월 몸소 시조묘에 제사를 지냈으며, 즉위 초부터 외교에 힘을 기울여 59년 왜와 수교하였다. 서기 65년(삼국유사에는 60년)에는 시림에서 닭 우는 소리를 듣고 확인시켜보니, 금궤가 나무에 걸려 있고 그 아래 흰 닭이 있어, 궤를 열어보자 용모가 단정한 아이를 얻었다는 기록이 보이는데, 이 아이가 김알지이다. 왕은 시림을 계림이라 고치고 이를 국호로 삼았다.
탈해이사금 대에 신라와 백제는 계속해서 전쟁이 이어지는 상황 속에 있었는데, 백제의 세력이 점점 강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탈해왕은 호공을 대보로 삼아 장사를 맡겼다. 61년에 마한 부흥군의 우두머리인 맹소와 복암성을 바치며 항복해 오자 그를 받아들였는데, 이 일로 백제와의 관계가 악화되었다. 백제의 다루왕은 63년에 낭자곡성을 장악한 뒤, 사신을 보내 만날 것을 제안했으나 이에 응하지 않자, 이때부터 백제는 줄기차게 신라를 공격해 왔다. 서기 64년에 백제군이 와산, 구양의 두 성을 비롯하여 이후 4, 5회 공격해왔다. 이에 탈해왕은 직접 기병 2천명을 동원하여 물리쳤다. 66년에 백제가 다시 와산성을 급습하여 함락시키고 병력 2백 병을 주둔시켰는데, 신라군의 반격을 받고 곧 퇴각했다. 그러자 백제는 가야를 압박하여 신라를 협공하기 시작했다. 70년에 백제가 또 한 차례 공격을 감행해 오더니, 73년에는 왜군이 목출도를 침범해 각간 우오를 보내 막았으니 이기지 못하고 우오는 전사한다. 74년에 백제가 변방에 다시 침입해 와 방어했는데, 10월에 다시 와산성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탈해왕은 76년 9월에 군대를 동원하여 와산성을 회복하고, 그곳을 수비하던 백제 병력 2백 명을 모두 죽였다. 77년 8월에는 가야가 신라를 공격해 왔는데, 탈해왕은 아찬 길문에게 군사 수천을 주어 가야군을 대적하게 했고, 양쪽 군대는 황산진(경남 양산 근처)에서 맞붙었다. 길문은 가야 병력 1천여 명을 물리치고 가야의 기세를 위축시켰다. 이상에서도 살펴볼 수 있듯이, 탈해왕 대의 전쟁은 대부분 백제의 침입에 의한 것이었다. 당시 백제는 마한의 영토를 장악하고, 과거 마한의 속국이던 신라와 가야에 조공 요구했는데, 가야는 이를 응했지만, 신라는 수용하지 않았다. 백제의 지속적인 침략은 그 같은 신라의 태도에 대한 응징의 성격이 짙었다고 볼 수 있다. 탈해왕의 재위 기간 내내 백재, 왜, 가야, 삼국의 침입을 막아 내야 했다. 하지만 잦은 외침에도 탈해왕은 오히려 국가 기강의 확립을 위해 중앙집권화를 강력하게 추진해냈다. 서기 67년에는 전국의 영토를 주와 군으로 구분하고, 각 주와 군에 왕족인 박씨들을 주주와 군주로 삼아 파견하였다. 같은 해 2월에는 '순정을 이벌찬으로 임명해 정사를 맡겼다'는 기록이 보이는데, 이는 유리왕 때 마련된 관등제가 본격적으로 실시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탈해왕은 서기 80년 8월에 99세를 일기로 죽었으며, 금성의 북쪽 양정 언덕에 묻혔다. 『삼국유사』에는 탈해왕이 건초 4년(서기 79년)에 죽어서 소천 언덕에 장사됐다고 적혀 있다. 또 뒤에 탈해의 유골에 대해 해골 둘레가 3자 2치, 몸뚱이 뼈 길이가 9자 7치였다고 언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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