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역사와 문화2013. 9. 14. 17:26

 

 

아차산 고구려 마을,고구려 대장간이 고구려의 핵심적인 곳이였다.

우리 나라에는 고구려 유적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고구려가 북한과 만주 벌판을 기반으로 했던 탓에 백제와 신라에 비해서 고구려 유적이 적고,

고구려의 흔적을 만나기도 쉽지 않지요.

그런데 우리나라에 거의 유일하게 있는 고구려 유적이 있으니 바로 아차산입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광개토대왕이 중국 대륙에 생겨나는 나라들을 상대로 북진을 했던 것과 달리

광개토대왕의 아들인 장수왕은 한반도 내에 있는 나라들을 정복하고자 하는 남진 정책을 펼쳤습니다.

장수왕은 고구려의 수도를 국내성에서 평양으로 천도했는데,

어떤 시각에서는 이를 중국과의 대결에서 고구려가 밀려 평양 천도를 했다는 시각도 있지만

한편에서는 광개토대왕 때 북쪽의 넓은 영토를 차지했고, 장수왕은 남진 정책을 폈기에,

남진에 유리한 평양으로 천도를 했다는 의견도 있더라구요.

아무래도 남진 정책에 물적 인적 자원이 풍부하고, 연락 체계가 원활히 진행 될 수 있는 수도가 가까이있다는 것은

남진 정책에 이어서 유리한 점일 테지요.

아이와 함께 둘러 본 고구려 대장간 마을은 고구려 유적이 아니라

고구려의 대장간 마을을 재현한 곳이며, 드라마 촬영장으로도 쓰였던 곳이었지만,

실제로 고구려의 유물과 보루 등이 발굴되고 있는 아차산에, 고구려의 벽화를 근거로 하여 재현한 마을이이었습니다.

 

비록 재현한 마을이지만, 이 기회에 고구려에 대해서 좀 더 알 수 있는 기회로 만든다면 더 좋겠지요?

그런 의미에서 두 권의 책을 소개합니다.

왼쪽의 웅진 주니어에서 출판 된 어린이 박물관 고구려는 유물 중심으로 고구려에 대해서 소개하고 있습니다.

여러 유물을 통해서 고구려 사람들의 생활 모습을 살펴 볼 수있으며.

유치원에서 초등 저학년의 아이들이 보기에도 참 좋은 책 같습니다.

오른쪽의 주니어 김영사에서 출판한 고구려사 이야기는 역사적 사실을 중심으로 고구려에 접근한 책입니다.

동명성왕에서 출발해 왕을 중심으로 하는 역사적 사실을 살펴 볼수 있는데,

초등 고학년 아이들까지 쉽게 읽을수 있을 것 같아요.

우리나라의삼국 시대의 유물을 전시하는 곳에서는 고구려 유물이 복제품의 형태로라도 전시 되어있습니다.

민혁이와 저는 지난 겨울 국립 중앙 박물관 꼼꼼 나들이란 주제로

국립 중앙 박물관의 유물을 세세히 둘러 본 적이 있었습니다.

이곳 대장간 마을에 고구려의 유물이 조금 전시 되어있기는 한데, 상당히 빈약합니다.

대장간 마을을 둘러보면서 고구려 유물이 함께 전시되어있는 박물관 나들이를 하셔도 참 좋을 것 같네요.

 

고구려가 남진 정책을 진행하면서 당시 한강의 주인이던 백제와 대치했던 곳이 바로 아차산이었습니다.

한강을 건너 아차산의 맞은편이 바로 백제가 한강 유역을 고구려에게 내어 주기 이전에 끝까지 저항했던

한성 백제의 성... 풍납토성과 몽촌 토성이 있던 곳입니다.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은 비교적 평평한 지형에 위치한 성으로,

아차산에 주둔했던 고구려 병사들은 높은지형을 이용해 백제의 도읍을 한눈에 내려다 보며 정세를 살폈다고도 해요.

큰 세력을 떨치던 고구려가 코 앞에서 먹잇감을 노리 듯 백제를 들여다 보았을테니,

백제는 또 얼마나 두려웠을지 짐작됩니다.

 

이곳 아차산과 마주한 곳에 백제의 수도 위례성이 있었으니,

고구려와 대치했던 백제에 대해서도 아차산을 둘러보며함께 살피면 좋지 않을까요?

위의 사진은 지난 해 여름 석촌동 고분군에서 찍은 사진입니다.

몽촌 토성과 풍납 토성을 둘러보는 것도 백제에 대해 알아 보기 위한 좋은 방법이지만

저는 지난해 새롭게 개관한 '한성 백제 박물관'과 가까이 위치한 '석촌동 고분군'을 꼭 둘러보시라고 추천하고 싶습니다.

한강 유역의 발전과정과 더불어, 한성에 수도를 정했던 백제의 문화 및 생활 모습을 잘 소개하고 있는 박물관으로,

국립 중앙 박물관이야 워낙 방대한 자료를 가진 곳이니 제외하고, 개인적으로는 가장 좋았던 박물관이었습니다.

특히 백제는 두 번에 걸쳐 수도를 천도했는데, 우리는 공주와 부여를 백제의 수도로 큰 의미를 두지만,

백제 700여년의 역사 중 이곳 한강 유역을 수도로 삼고 번영 했던 기간이 500년 가까이 된다고 하니

공주나 부여보다 오히려 더백제의 역사에서 중요하게 살펴 보아야 할 부분이 이곳 한성 백제 시기인 듯합 니다.

또한 가까이 위치한 석촌동 고분군 역시 백제의 왕릉으로 추정되는 거대한 기단식 돌무지 무덤으로

그 규모나 독특한 양식, 그리고 고구려와의 연관성을 찾아보시면새로운 사실들을 많이 알게 될거예요.

한성 백제 박물관과 석촌동 고분군은 꼭 함께 둘러보시기를 추천합니다.

( 한성 백제 박물관과 석촌동 고분군,국립중앙 박물관 꼼꼼 나들이 - 백제

 

대장간 마을을 둘러보기 전에

아차산에서 발굴된 유물들이 전시되어있는 '아차산 고구려 유적 전시관이 있습니다.

아차산은 고구려 남진 정책의 전초기지를 했던 곳입니다.

아이에게 전초기지의 의미를 아는지 물었더니, 산을 정복하기 전의 베이스캠프 같은 곳 아니냐고 되묻더라구요. 맞습니다. 백제 정복을 위한 베이스 캠프...

아차산 일대에는 능선을 따라서 20여개의 보루가 있었는데, 이 일대에서 발굴된 유물들이 이곳에 전시되어있다고 합니다.

 

한번도 우리나라의 지도를 거꾸로 본다는 개념이 없었는데,

이곳에서는 고구려 영토의 광활함을 보여주기 위해서인지, 한반도를 거꾸로 그려 두었습니다.

파란 색으로 칠해진 저 넓은 땅... 그걸 다 제대로 지켜 낼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싶네요.

 

유적 전시관에서는 아차산 자락에서 발견된 고구려의 흔적들을 전시하고 있습니다.

이곳이 제대로 자리를 잡은 거주지가 아닌 보루라서 그런지 정교한 토기라기 보다는 다소 조악한 느낌입니다.

 

이곳에서 발견된 활을 재현한 화살 촉들인데, 뻔하디 뻔한 화살 촉만 생각하다가, 다양한 모양의 화살촉을 보니 파괴력을 높이기 위한 무기 연구는 고대에도 있었구나... 싶었습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고구려 대장간 마을을 둘러볼까요? 앞서 말했듯이 이곳은 재현된 마을입니다.

설명에서는 고구려 벽화 속에 나타나는 집 구조를 바탕으로 상상하여 나타낸 곳이라고 해요.

이곳에서 몇 편의 드라마 촬영도 있었다고 하는데,

그래서 그런지 진짜 고구려 대장간 마을의 모습이라기 보다는 좀 더 환상적인 모습으로 꾸며져 있습니다.

 

마을 입구에서부터 '삼족오'가 그려진 깃발이 나부끼네요.

고구려 사람들은 태양 속에 세발 달린 까마귀 삼족오가 살고 있다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그러고 보면 중국의 유물이나 중국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측되는 우리나라의 유물 중

3이라는 숫자가 신성시 되고 있는 것을 종종 볼수있는데, 예를 들면 '세 발 달린 솥' 등이 그렇습니다.

아마도 3이라는 숫자는 완벽한 합일을 이루는 신성한 숫자인가봐요.

아! 그러고보니 서양의 기독교 사상에서도 3이라는 숫자가 신성한 숫자로 여겨지는 것 같네요.

기독교 속 '성 삼위일체'만 봐도 그렇지 않나 싶어요.

동양과 서양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이런 의미들을 볼때면 저는참 신비롭더라구요.

 

대장간 마을로 들어가는 입구에 목책도 늘어서 있습니다.

나무를 뾰족하게 깎아 벽을 둘러 방어용으로 사용하는 목책은 백제의 유적지인 몽촌토성...

지금의 올림픽 공원에서도 그 흔적을 확인 할 수 있다고 합니다.

 

크지는 않으나 올망 졸망한 집들이 기록과 상상력의 옷을 입고 마을을 이루고 있네요.

사진 찍기에도 참 좋은 곳 같았어요. 건물들이 참 예쁘거든요.

 

이 공간은 고구려 대장간 마을의 회의 장소를 염두에 두고 상상하여 만든 공간이라고 합니다.

이곳에서는 거믈촌이라고 부르는데, 드라마 태왕사신기의 촬영 장소로 이용되기도 했다고 하네요.

 

실제 고구려 사람들이 이렇게 멋진 의자에 앉아서 정말로 회의를 했을까요?

그보다는 상상력이 더 많이 가미된 공간 같기는 하네요.

나무의 구불구불함이 고스란히 보이는 의자에 앉아 회의하는 광개토대왕을 상상해 봅니다.

 

흙을 구워 만든 기와는 아무래도 고급 물품에 해당하니 중요한 건물의 지붕에만 덮였던가 봐요.

평범한 집들에는 나무를 쪼개어 지붕을 덮은 나무 기와가 눈에 띄더라구요.

 

뭔가 신비로운 공간을 묘사 해 둔 곳인데, 드라마 속에서도 점술을 행하거나... 신비로운 장면을 찍는 곳이었다 하더군요.

벽면에는 고구려 고분 '강서대묘' 속의 사신도가 그려져 있습니다.

뒷 쪽 벽면에 그려진 그림은 사신도 속 현무의 모습이네요.

현무는 거북의 몸에 뱀의 머리를 가진 상상 속의 동물로, 사방 중 북쪽을 상징합니다.

 

디딜방아는 이미 고구려 시대에 사용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고 해요.

고구려는 고분 벽화를 통해서 당시의 생활 모습을 소상히 살펴 볼 수 있는데, '안악3호분'의 벽화에서는 특히 디딜방아를 사용하는 모습이 잘 표현되어있다고 합니다.

또한 아차산 3보루에서도 6세기 전반 고구려 시대의 디딜방아 유적으로 추정되는 유물들이 발굴되었다고 하네요,

아차산 보루에서 발굴된 디딜방아의 흔적은 이 지역에 주둔했던 병사들의 식량지원 기능을 하였으리라 추측된다고 합니다.

 

왠지 아일랜드 숲 속의 요정 엘프들이 나타날 것 같은 참 멋진 공간이네요.

이곳을 담덕채라고 부르는데, 평범한 고구려의 가옥을 재현해 놓은 곳이라고 합니다.

 

담덕채 안으로 뛰어 들어가 창문을 활짝 열어 고구려 마을의 전경을 둘러 보니, 마을이 한 눈에 다 내려다 보이더라구요.

 

고구려 사람들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온돌을 사용했습니다.

하지만 방 전체를 데우는 형식이 아니라 방 안에서 불을 지펴 일부분만을 데우는 쪽구들 형식이었다고 해요.

고구려 사람들은 쪽구들 위에서 추운 겨울을 보내고 잠을 자며, 여름이나 평상시에는 의자에 앉아서 생활했다고 하네요.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온돌에 불을 지피는 아궁이는 건물의 외부에 있기 마련인데, 고구려 가옥에서는 아궁이를 건물 한 가운데에서 확인 할 수 있어요.

이렇게 아궁이가 집 안에 있으면 어떤 문제점이 생길까...아이에게 물어보니 나무를 태우면서 생기는 연기와 그을음으로 집 안이 무척 답답할 것 같다는 문제점을 이야기 하던데...

그래서 그런지 고구려 가옥의 천장에는 신석기시대 움집에서 보았던 것과 비슷한 환기 시설도 확인 할 수 있었습니다.

 

종이가 없던삼국 시대에는 나무...주로 대나무를 얇게 쪼개어 엮은 후 글을 써서 기록 햇는데, 이를 목간이라고 합니다.

목간이나 '목간'과 비슷한 '목책'은삼국의 유물에서 고루 발견되더라구요.

 

담덕채를 나와 이 마을의 가장 중요한 부분인 대장간으로 가 볼까요?

고구려는 잘 알려져 있다시피 정복국가입니다.

그들의 척박한 땅과 농사 짓기에 적절치 않은 기후 등이 고구려를 정복 국가로 만들었을 거예요.

원래 고대 시대의 전쟁이라는 것이 부족한 국가가, 필요한 자원을 얻기 위해 주변 국가를 침략하는 것에서 시작되었으니,

고구려 역시 자신들의 부족한 것을 채우기 위해 정복 국가가 되었으리라 생각됩니다.

정복 국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뭐니뭐니해도 무기겠죠.

고구려는 일찍부터 청동제 무기를 철제 무기로 대체하여 사용하면서

전쟁을 통해 지역 통합을 이룩하고, 지배권을 강화하여 고대 국가로 발전했습니다.

당시 철을 다루는 기술자들은 최첨단 기술을 가진 사람으로 나라의 발전에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합니다.

일례로 백제의 왕 석탈해에 관한 이야기를 읽어보면

석탈해가 쇠를 다룰 줄 아는 최첨단 기술자이고, 이전까지 청동기에 머물던 신라에 철기를 들여온 인물이며,

그 기술을 바탕으로 왕의 자리에까지 오른 인물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듯 고대 국가에서 철기는 강한 무기로서의 의미가 컸습니다.

또한 철기는 이전의 원시적인 농기구들을 강철이라는 단단한 농기구로 대체 할 수 있었고,철기 농기구를 통해서 땅을 더 깊게 경작할 수 있어 생산량이 급격하게 늘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고대 국가들의 인구도 급속도로 증가했다고 하니...

우리에게 흔하고 큰 의미 없게 느껴지는 철이 이 당시에는 아마도 지금의 핵에 버금가는 파괴력과 생산력을 가진 물질이었으리라 추측됩니다.

그러니 비록 꾸며진 공간이지만, 대장간은 아주 아주 중요한 공간입니다.

 

고구려의 대장간에 대한 구체적 기록은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곳은 아차산 4보루에서 발견된 간이 대장간터와 고구려 벽화의 대장장이신을 근거로하여 제작된 상상의 공간이라고 하네요.

 

재현된 공간이지만 대장장이처럼 풀무질도 해 보고, 철제 무기들과 농기구들도 살펴 볼 수 있네요.

민혁이가 열심히 풀무질을 하고 있는데, 풀무질은 불길을 더 세게하기 위해 공기를 공급하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물의 위치에너지를 이용해 물레방아가 돌면, 축이 그 에너지를 수평 에너지로 바꿔 기계를 돌린다네요. 물건을 쉽게 이동 시킬 수 있는 수평 도르래도 설치되어있는데 과연 고구려 시절에 저런 과학적 도르래가 있었을까... 살짝 의심도 들었어요.

 

나무를 얼기설기 엮어서 만든 망루 위에서는 병사들이 마을 가까이 다가오는 사람들을 일일이 감시했겠죠?

한번 올라가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보기에 엉성해 보이는 만큼 위험한지... 올라가는 것은 금지였습니다.

 

연호개체라는 공간입니다.

쪽구들을 놓아 편히 쉴 수 있는 공간과, 의자를 놓아 접대할 수 있는 공간, 평상이 놓인 공간 등으로 구성해 귀족들의 생활 공간을 상상해 재현하고 있습니다.

 

구석구석 대장간 마을을 둘러보고 고구려 건국 신화를 그림으로 전시 해 놓은 공간이 있어서 야외 극장 쪽으로 발길을 옮겨보니 재활용 타이어로 만든 말에, 조잡스러운 광개토대왕비, 배용준씨의 드라마 태왕사신기 속 모습을 전시하고 있네요.

 

이곳에는 일본 관광객들도 많이 찾아오시는 것 같았는데, 그분들을 위한 전시물 같았습니다.

 

대장간 마을을 둘러보기 전에 유물 전시관에서 고구려는 '산성의 나라'라는 말이 있더라구요.

정작 고구려를 '산성의 나라'라 칭하면서 이에 대한 설명은 다소 부족한 기분이 있었습니다.

고구려는 산성의 나라가 맞습니다.

물론 기마병을 기반으로 고구려의 전투력도 뛰어났을테지만, 고구려가 중국 땅에서 일어선 수나라나 당나라의 대규모 침략에도 굳건히 버틸 수 있었던것은 고구려의 성을 이용한 전술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고구려는 평성과 산성의 '이성 체제'의 나라였습니다.

평상시에는 평지에 위치한 평성에서 생활을 하다가 침략이 있을시에는 모두 산성으로 옮겨갔다고 해요.

위의 사진은 고구려의 산성인 '오녀산성'입니다.

사진에서 보이다시피 산성은 아주 험준한 지형으로 침략이 쉽지 않습니다.

고구려 사람들이 산성으로 옮겨 갈 때에는 평성의 우물을 모두 메우고, 식량을 모두 불태워 적들이 평성을 점령해도 식량을 확보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그러면 고구려 병사들은 매복해 있다가 적의 보급로를 차단하였다고 하죠.

반면 산성에는 적당한 먹을 거리와 우물이 있어서 적의 침임에도 꽤 오래 보틸 수 있었다고 합니다.

보급로도 차단되도, 마을에서도 식량을 구할 수없었던 적들은 결국 물러날 수 밖에 없었다고 하니,

큰 희생 없이도 현명하게 적들을 물리 칠 수 있는 고구려의 지혜가 엿보이네요.

 

시원한 바람 솔솔 부는 가을에 고구려 대장간 마을과

강을 하나 사이에 두고 고구려와 첨예한 대립을 했던 백제 박물관 나들이는 어떨까요?

알면 알 수록 신비한 고대의 이야기들이 쏟아지는 즐거운 나들이가 될 거예요.

 

Posted by 원주유
고구려 역사와 문화2013. 9. 14. 17:18

 

가야 4세기 모용계 선비족들의 가야 이동설의 뒷바침 유물?

김해 대성동 고분군에 대한 올해 제7차 발굴조사 결과

4세기 무렵 왕릉급으로 판단되는 대형 목곽묘 2기가 모습을 드러냈다.

목곽묘 유물 출토 모습. 통형동기와 철기류가 보인다.

대성동고분 9호분 선비족의 유물 정체

신라문무왕비문에 나타난 신라 김씨족의 정체가 흉노족이다.

김수로와 김알지 김씨들은 같은 흉노족 김일제의 후손들이다. 기원전후로 한반도로 내려왔었다. 대성동고분 91호분에 발견된 4세기 삼연 선비족의 동분,동원,마구와 말방울 소유자의 정체성에 주목이 간다. 즉 2차북방민족 선비족의가야 이동의 강력한 증거가 될 수 있다.

당시의중국 대륙은 어떠한정치적 상황인가를 알아야한다.

삼국시대(삼국지로 유명한 시대,조조(선비족),를 이은 서진시대를 마감하고 흉노.선비,갈,저.강족 등의 5호가 세운 16국 시대는 흉노의 맹주 유연이 산서성에 자립하고(304년) 그 아래 하북지방을 통일한 북위(439년)시대의 기간을 가리킨다.

 

 

이러한 16국 시대를 마감한 북위는 선비족의 탁발부였다. 선비족은 흉노왕국이 후한 초 남북으로 분열되어 쇠퇴한 뒤 나타난 북아시아의 패자가된 부족이다.

오환족과 함께 몽고의 시라무렌강 유역에서 일어난 몽골계의 유목민족으로 [사기]나 [한서]에 등장하는 동호족(東胡族)에 속한 민족이다.

이러한 선비족을 통일한 인물이 2세기 전반에 나타났는데 바로 단석괴(檀石槐)라는 영웅이다. 단석괴 사후 다시 분열한 선비족은 이후 모용부, 우문부, 단부, 탁발부 등이두각을 나타내고 있었다.

 

이 가운데 요녕성에 근거한 모용부가 화북에 침입하여 전연, 후연,서연, 남연 등을 세우고, 내몽고 성도인 호화토특호화호특(呼和浩特) 남쪽의 화림격이(和林格爾) 방면에 유목하고 있던 탁발부가 북위(北魏) 왕조를 수립하게 된다. 395년후연(선비족모용수)과 북위(선비족탁발규)는 전쟁에 돌입했다. 후연 모용수는 태자 모용보를 총사령관으로 보내 북위를 멸망시키려 들었다. 그러나 모용보는 오늘날 산시 다퉁 부근의 참합파에서 대패하여 수만명이 죽었고, 수만명이 투항했으며 태자 모용보는 몇천의 군대와 함께 달아났다. 이때 탁발규는 그가 투항한 후연군들을 한명도 남김없이 죽여버렸다.

 

다시 모용수가 직접 군대를 정비해 이듬해인 396년 3월 출정했다. 모용수가 평성으로 가던 도중에 참합파를 지나게 되었는데, 후연 병사들이 죽어 시체가 산을 이룬 참혹한 광경을 목격해야만 했다.

이미 70세의 나이가 있고 중병에 걸린 모용수는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그의 병이 위중해지자 병사들은 평성으로 향하지 못하고 중산으로 말머리를 돌렸다. 도중에 모용수는 그만 세상을 떠나고, 태자 모용보가 제위를 물려받았으니, 그가 혜민제이다.

모용수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탁발규는 두려워 않고 40만 대군을 풀어 전진하여 396년 후연의 수도 하북성의 중산에 입성하였다.

398년, 탁발규는 황제에 즉위하고 수도를 평성으로 정함으로써 북위를 연 개국황제가 되었다. 중국북방의 질서가 완성되었다.

 

후연 선비족의 중국에서의 몰락이 한반도 이동에 무게를 두고 싶다.가야 대성동고분과 부산 복천동고분군, 함안 아라가야 고분에서의 북위계통의 말(馬)찰갑출토, 신라 황남대총에 나타난 삼연의 말갖춤문화에 직접 영향을 끼친 것 같다.동호족(선비족)은 단군시대엔 한민족 연합 부족의 일원이었다.

 

부여족의 한반도와 왜의 이동설에 무게

 대성동고분 91호분의 선비족 계통의 유물들이다. 그들의 정체성에 대한 문제를 다루고 있었다. 탐색자들은 발해만 요양시 '라마동고분군'에서 출토된 묘제와 마구(말안장, 말에 관련된 장식물),및 동복이 선비족 (삼연)보다, 부여족에 가까웠다. 라마동고분군을 발굴한 텐리쿤교수(중국)는 '라마동고분군' 묘지는 부여족들의 무덤이라는 것이다.

 

박물관에서 살펴본 유물도 선비계통보다는 부여계통이 문양까지 대성동91호와 동일함을 화면에서 보여주었다.

라마동 묘제의 경우, 목곽묘로서 직사각형 형태로 관을 사용하지 않은 점도 선비족과는 다르며, 대성동 91호 묘제와 동일한 점이다.

말안장의 경우 사각형은 선비족인데 반해, 대성동고분군,라마동고분군은 타원형태로 동일하였다.

 

형질인류학분석법인 인골분석도 부여족(라마동고분군)과 대성동고분군은 동일인이었다.

선비족은 삼국지 조조와 같은 족속들이며 내몽고가 중심지였고, 이후 세력이 강하여 중원으로 이동하여 북위를 열었다. 삼연도 선비족계통이다.

 

전연이 부여를 공격(346년경), 부여인들이 한반도와 도왜(일본의로 이동)하였을 가능에 무게를 둔 학자도 있다.

대성동고분88호분 무덤에서 발견된 파형동기가 한무덤에서 12점 수습되었다. 일본에서는 여러무덤에서 총 10개에 해당되었다.

파형동기는 일본천황(왕)급 무덤에서 발견되는 귀한 물건이다. 대성동고분88호분은 일본천황급 묘지이다. 심지어 일본 측에선 일본 숭신천황의 무덤이라고 까지 말하는 학자도 있다(에가미-기마민족의 왜열도 이동설 주장)

발굴전에, 가야인의 정체에 대해서 부산항도일보(부산매일신문의 전신)에 연재 중, 파형동기 발견이 반드시 가야지역에서 나올 것을 예견한 적이 있었다.

 

북방기마민족의 이동 유물로 파악한 것이다. 지금은 일본학계와 한국 가야사 전공자들은 파형동기를 일본 교류의 유물로 파악하고 있는 점이 안타깝다. 오끼나와(류큐國)는 고대엔 일본과는 전혀 다른 나라였다.

 

3세기~4세기 왜와는 관련없는 점이다. 오히려 중국 남방과의 관련성이 있는 고대 국가였다. 류큐국은 에도막부 말기에 사스마번(큐슈)에 정복되어 일본으로 병합된다. 고려시대 삼별초들이 류큐국에 이동하여,상류층 역할을 맡았던 고고학적 유물이 발견되었다.

 

필자가 쓴 '신들의 이름/2009년/오늘/" 일본 응신천황은 부여국의 의라왕이었나? 에 기록한 [진서(晋書)]四夷傳.부여국과 [통전(通典)]邊防門.동이부여가 말해주는 다음과 같은 구절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역설하고 있다.

 

부여는 그 나라가 殷盛하고 부유하여, 先世 이래 일찍이 깨뜨려짐을 당한 적이 없었다.......태강(太康)6년(285년)에 이르러, 모용외(慕容외:선비족/晋의 장수)에게 공파(功破)되어, 그 나라의 왕인 의려(依慮)는 자살하고, 자제들은 옥저로 도망하여 생명을 보존하였다...... 다음 해에 부여 후왕 의라(依羅)가 감구솔견인(龕求率見人)을 보내어,옛 나라를 회복하려고 구원을 청하였다.......의라는 나라를 되찾았다........그 뒤에도 매양 모용외가 그 나라 사람들을 잡아다가 중국에 팔았기다. ......의라는 그 후 소식이 없어졌다.

 

이처럼 [진서]는 부여의 마지막 왕인 의려가 자살한 후 그 자제들이 옥저로 도주하여 생명을 보존했다는 비참한 종말을 이야기하고 있고, [통전]에서는 부여후왕 의라가 그 후 소식이 묘연(杳然)하다고 하였다. 부여가 이와 같이 하여 처음 망한 것은 서기285년이었다. 기록에서와 같이, 일단 나라를 회복했던 부여후왕 의라는 다시 모용외의 약탈로 더 이상 지탱하지 못하고 결국 유리한 것 같으며, 한반도를 거쳐 이후 도왜(왜국으로 건너감)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한편 왜국에서는 의라라는 성씨가 여러 갈래로 생겨나게 된다.

 

姓氏錄에서의 의라씨들은 개화천황의 후손이라거나, 혹은 饒速日(니기하야히)의 후손이라거나, 혹은 백제인의 후손이라한 것 등, 여러 갈래로 되어 있다. 위서(魏書)의 부여전에 보면, "부여에서는 소를 잘 길렀고, 명마가 나왔으며, 그 사람들은 거칠고 신체는 장대하고 성질이 강하고 용맹하면서도 근후했음을 알 수 있다. 말하자면, 북방의 대표적인 기마민족이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이러한 부여 후왕 의라와 그 세력은,비록 그 나라가 패망하여 일시 남의 땅에 피신했다 하더라도 식객노릇이나 하고 있지는 않았을 것이나, 그들이 한동안 한반도(김해 대성동고분지역) 땅에 머물렀을 것이라는고고학적인 유물이 대성동91호 발견되었기 때문에 이미 '신들의 이름'에서 편 학설이 강력한 설득력이 생긴 셈이다.

 

어쨌든, 결국 그들이 낙착한 곳은 왜지(倭地)였다고 보며, 부여씨인 백제왕은 차후 그들을 위하여 모든 지원을 제공했던 것임은 일본서기의 응신기가 잘 보여주고 있다.

 

천황재위 14년째(283년)에, 궁월군(弓月君:유츠키노키미)이 백제로부터 120현(縣)의 인민을 거느리고 응신조에 내귀(來歸)하는 [일본서기] 기록이 있다. 이 백제 120현은 한반도 백제가 아닌 요서지방의 백제계, 부여족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부여 후왕 의라의 도왜(渡倭)와 이보다 150년 뒤에 고구려의 광개토 호태왕이 동부여를 공벌(攻伐)한 사건, 그 7년 후에 연왕(燕王) 황(皇光)이 토벌한 부여, 또 문자왕 3년(494년)에 고구려에 [以國來降]한 부여 등의 사건등이 만주지역 부여에서 이뤄졌다.

진서를 검색하다, 선비족 모용황(燕王)이 조선공(朝鮮公:조선왕)에 봉해졌다는 기록(337년)이 머리에 남았다.(진서 권109)조선공(왕)이란 의문은 다음기회에넘긴다.

 

위의 랴오닝성 '라마동' 수백기의 고분군은 유물과 대성동 유물은 동일 족(부여족)의 유물이다. 선비족인 전연에게 침공당한 부여족 지역의 고분군이다. 부여족의 한반도 가야지역을 통한 도왜한 부여족이다. 그 세력들이 큐슈로 부터 정복한 응신천황이었다.(재야사학자 문정창 주장) 큐슈로 부터 기내지방으로 이동하여 세운 기마민족 세력들이었다. 대성동 88호분 무덤의 파형동기는 도왜의 이동 흔적이다.(신들의 이름/2009년/오늘/김인배,김문배 공저)

 

결정적인 증거로는 대성동고분91호에서 발견된 순장흔적, 선비족 청동분(대야),마구와 말방울은 정확하게 말하면, 선비족이 아닌 부여족의 유물임을 KBS 역스팀들이 밝혔다. 91호분에서 발견된 '사슴뿔로 만든 관의 장식'이다.

 

사슴뿔로 만든 관 장식-부여족이란 기록

응신천황의 난파조정(오사카조정)에 도래한 부여국인(夫餘國人)들과 髮長媛(발장원:고구려의 제12대 중천황의 부인)이 바다를 통해서 난파(오사카의 옛 이름)에 들어온다.

 

응신천황이 담로도에 사냥하려 가 있었다. 천황이 서쪽을 바라보니, 수십마리 사슴이 바다에 떠서 오고 있었다. 천황은 좌우에 이르기를, [저게 무슨 사슴인가? 넓은 바다에 떠서 많이도 오는구나]라고 말했다.

 

이것은 응신천황이 난파(나니와/오사카) 조정을 건설한 지 13년 만에 사슴,여우,너구리,담비 등의 가족옷을 입은 부여국의 구신(舊臣)들이 발장원(황후)를 데리고 부여의 후왕(後王:의라왕)인 응신천황을 찾아 난파조정에 이르렀음을 보여준 대목이다.

 

일본서기 기사와 동일한 기사가 [삼국사기]권 제 17(고구려본기 제 5)에 나온다.

이상과 같은 점으로 대성동고분군 91호분에서 발견된 부여동분,말장식,그리고 사슴뿔관장식은 부여족의 한반도 김해 이동과 도왜하여 그 곳에 응신천황이 된 부여집단 세력의 흔적을 잘 말해주고 있다.

 

오늘날 일본의 성곽들은 평지에 있다. 고구려 성은 산록을 이용한 성곽임에 반해, 부여는 평지에 해자를 둘러 목책등으로 수성하였다. 이 근원이 부여족들의 평지성곽 건설풍이다. 일본 하찌만궁(신사)는 대마도를 비롯해서 북큐슈 곳곳에 존재하고 있다. 그리고 기내지방으로 이동되어 있다. 그 주신이 응신천황이다. 부여족이 세운 하찌만궁, 그 세력들이 한반도에도 강력한 기마와 철갑을 앞세워 기존 가야세력과 혼재하며 존재하게 된다. 복천동고분 세력도 부여족이 남겨놓은 흔적들이 고분군에 남아 있을 것이다. 고분군 속에 여러 묘제들이 혼재한 까닭은 강력한 북방 세력들이 밀려와서 남겨놓은 역사적 유물인 셈이다.

 

 

Posted by 원주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