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15대 미천왕 = 호양왕, 을불, 을불리, 우불 (재위 300년~331년)
293년 아버지 돌고가 백부인 봉상왕에게 반역으로 몰려 죽임을 당하자 미천왕은 살아남기 위해 신분을 속이고
수실촌이라는 곳으로 가서 머슴살이를 했었다.
당시의 부호였던 주인 음모는 미천왕이 왕족인 것도 모르고 머슴들처럼 심하게 노동을 시켰다.
예를 들어 낮에는 나무를 베어오게 하고 밤에는 연못의 개구리 때문에 잠을 잘 수 없다 하여 개구리 소리가 들리지 않도록
밤새도록 돌과 기와 조각을 던지게 하여 편히 잠을 잘 수 없었다고 한다.
참다못한 미천왕은 음모의 집을 나와서 동촌으로 갔다.
그곳에서 재모란 사람을 만났는데 그는 소금장수였다.
재모는 미천왕이 착하고 신의가 있어 보였으므로 함께 소금장사를 하자고 하여 압록강에서 소금을 떼어와
여러 마을을 돌아다니며 팔았다.
어느 날 미천왕이 배를 타고 압록강 동쪽의 사수촌이란 마을로 가 어떤 노파의 집에 머물렀다.
노파가 숙식비로 소금을 달라고 하자 미천왕은 노파에게 소금 한말을 지불했다.
노파가 더 달라고 했지만 그는 한 말이 적당한 값이라며 더 주지 않았다.
주인 노파는 이것에 앙심을 품고 자신의 신발을 미천왕의 소금짐 속에 감춰 두었다.
다음날 미천왕이 소금짐을 지고 떠나는 데 노파가 쫓아와 신발을 찾아내고는 압록 태수에게 미천왕을 고발하였다.
압록 태수는 미천왕에게 절도죄를 적용해 태형을 가한 다음 소금을 압수하어 노파에게 주었다.
미천왕은 억울하기 짝이 없었지만 신분이 탄로날까봐 두려워 아무 말도 못하고 관가를 떠났다.
이렇게 고난의 나날을 보내던 미천왕은 얼굴이 여위고 옷이 다 헤져 그 누구도 그가 왕손임을 알아보지 못했다.
봉상왕이 폭정을 거듭하자 당시 국상이었던 창조리는 왕을 폐위시켜야겠다고 생각했다.
폐위시키고 난 다음의 왕을 옹립해야 하는 데 그것이 문제였다.
왜냐하면 봉상왕은 왕권을 도전할 만한 왕족은 모조리 죽였기 때문이다.
창조리는 미천왕이 어딘가에 살아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북부의 조불과 동부의 소우를 비밀리에 보내 미천왕을 찾도록 했다.
국상의 밀명을 받은 두 사람은 각 부락을 은밀히 돌아다니며 미천왕을 수소문했다.
그러던 어느 날 비류강가에서 미천왕을 만났다.
두 사람은 미천왕에게 "지금 국왕께서는 무도하여 국상이 여러 신하들과 몰래 왕을 폐하기로 모의하였습니다.
을불 왕손께서는 행실이 검소하고 성격이 인자하여 백성을 사랑하시므로 선왕의 유업을 이을 만 하옵기에 신 등을 보내어
받들어 모시게 하였습니다." 처음에는 자신의 신분을 부인하던 미천왕은 그 두 사람이 숙부가 보낸 암살자가 아니라
창조리가 보낸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다.
창조리는 미천왕을 만났고 300년 9월 봉상왕이 사냥을 나갈 때 동지를 규합하여 봉상왕을 사로잡아 별실에 감금하고
군사로 하여금 지키게 했다.
그리고 곧 을불을 불러 옥새를 올리고 왕위에 즉위하게 하였다.
이렇게 하여 소금장수 을불은 고구려 제15대 왕이 되었다.
미천왕은 즉위 3년(302년)부터 정복전쟁을 개시했다.
그해 9월 왕은 몸소 3만의군사를 이끌고 만주 지방의 현도군을 공격했다. 이 싸움에서 미천왕은 8,000명의 적을 사로잡았다.
이후로 내정에 치중하고 중국 정세를 살피다가 311년 8월 요동의 관문인 서안평을 공격해 빼앗았다.
서안평은 과거 동천왕이 공격하려다가 관구검의 역공을 받아 오히려 나라가 멸망할 지경에까지 빠지게 했던 중요한 지역이었다.
미천왕은 서안평을 점령함으로써 중국 대륙과 낙랑군, 대방군과의 연결고리를 끊었다.
미천왕은 그 여세를 몰아 313년 낙랑군을 공격하여 2,000여명을 포로로 잡았다. 그리고 다음 해에는 대방군을 공격해
중국 군현을 한반도에서 완전해 내몰았다. 이렇게 하여 고구려는 마침내 압록강에서 서해까지 진출하게 되었다.
이로써 400년동안 한반도를 지배했던 낙랑군과 대방군이라는 중국 식민지는 사라졌다.
미천왕은 그들이 지배했던 대동강 유역과 압록강 하류를 차지한 다음 다시 서북진해서 요동군과 현도군을 공격해 영토를 확장했다.
이 과정에서 당시 요동 지방에 세력을 떨치고 있던 선비족 모용씨의 연나라와 충돌했다.
미천왕은 연나라의 모용씨와 요동 지방을 놓고 일진일퇴를 거듭했다.
319년 진나라의 평주자사 최비의 권유에 따라 선비족의 일파인 단씨, 우문씨와 함께 모용외를 공격했다.
하지만 이 연합공격은 실패했고 모용외는 일단 요동을 수중에 넣어 유리한 고지에 섰다.
미천왕은 국경을 마주한 연나라를 견제하기 위해 그 배후에 있는 후조와 손을 잡았다.
미천왕은 결국 요동에서 연나라를 축출하지 못하고 즉위 32년만에 331년 2월에 갑자기 서거했다.
342년에 고구려로 쳐들어온 전연의 군대가 미천왕릉을 도굴하여 시신을 가져갔으며 고국원왕은 343년에 많은 공물을 바치고
시신을 돌려받았다.
* 큰아버지=봉상왕 * 아버지=고추가 돌고 * 어머니=?
* 왕후=왕후 주씨 * 아들=고사유(16.고국원왕) / 고무
창조리
창조리는 남부 출신으로, 봉상왕 3년인 294년 국상 상루가 죽었을 때 대사자의 직위에 있었다.
이때 상루의 뒤를 이어 국상이 되었고, 작위는 대주부가 되었다.
당시 고구려는 선비족 모용부의 수장 모용외의 침략에 시달리고 있었다.
봉상왕 5년인 296년에는 고국원까지 침입하여 서천왕의 무덤을 파내려고 시도하기까지 했다.
이에 봉상왕은 창조리를 불러 대책을 논의하였다. 이에 창조리는 "북부의 대형(大兄) 고노자가 어질고 용감하다"고 답했다.
이에 왕이 고노자를 동북부 변경의 신성의 태수로 삼자 모용외는 침략을 멈추었다.
모용외로부터 안전해진 다음부터 고구려에는 이상한 일들이 벌어졌다.
봉상왕 7년인 298년 가을에는 우박이 내려 농사를 망쳤으며, 이듬해 가을에는 귀신이 출몰하고 객성이 달을 가렸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봉상왕은 궁궐을 개축하고 자신의 조카 을불을 죽이려 하는 등의 행위로 신하들의 불만을 샀다.
봉상왕 9년인 300년에도 괴이한 일은 계속되었다. 정월부터 지진이 나고, 6개월 동안 비가 내리지 않았다.
8월이 되자 왕은 15세 이상의 남녀를 뽑아 궁실을 수리하였는데, 이로 인해 백성들의 생활이 더욱 더 궁핍해졌다.
이에 창조리는 백성이 도탄에 빠진 상황에서 토목 공사를 진행하는 것은 군왕의 도리에 어긋나는 행위라고 간하였다.
이에 왕은 "임금은 백성을 우러러 보는 자리인데, 궁궐이 화려하지 않으면 무엇으로 위엄을 보이겠는가?"라고 답했다.
그러고는 오히려 자신을 비판하여 백성들의 신망을 얻고자 함이냐고 되물었다.
이에 창조리는 다시금 "임금이 백성을 불쌍히 여기지 않으면 어진 임금이 아니요, 신하가 임금에게 간하지 않으면
충신이 아닙니다."라고 답했다.
이에 왕은 웃으며 "그대는 백성을 위해 죽고자 하는가?"라며 창조리의 말을 무시했다.
왕의 마음을 돌릴 수 없음을 안 창조리는 다른 대소신료들과 폐위를 논의하였다. 논의 끝에 을불을 새 왕으로 세우기로 하고
창조리는 북부의 조불과 동부의 소우를 파견하여 을불을 찾게 하였다.
을불은 처음에 거절하였으나 이들의 설득에 결국 창조리를 찾아 왔다.
창조리는 일단 그를 숨겨 두고 지지파를 모으기 시작하였다.
9월이 되자 봉상왕은 신하들과 함께 사냥을 떠났다.
이때 창조리가 "나와 뜻을 같이 하는 자는 나를 따라 하여라."라고 선언하며 갈대잎을 관에 꽂았다.
그러자 모두들 이를 따랐다.
자신의 지지 세력을 확인한 창조리는 봉상왕을 별실에 가두고 을불을 맞아 옥새를 바치고 왕위에 오르게 하였다.
고구려 16대 고국원왕 = 사유, 쇠, 국강상왕 (재위 331년~371년)
314년 왕태자에 책봉되었고, 331년 음력 2월에 미천왕의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334년에는 평양성을 증축했고, 335년에는 신성 축성, 342년에는 환도성과 국내성을 증축하는 등 변경의 방비를 갖추었다.
또한 전연을 견제하기 위해 336년, 343년에 걸쳐 동진에 사신을 파견하기도 하였다.
336년에는 전연에서 일어난 모용인의 반란에서 실패하고 망명해온 곽충과 동수를 맞아들었으며,
338년에는 후조와 전연의 전쟁 시 후조와 내통하였던 봉추, 송황 등의 망명도 받아들였다.
339년 전연이 쳐들어와 신성에 이르니 고국원왕이 동맹을 청하여 물러갔다.
이때 맺은 동맹 관계에 따라 340년에 전연에 조회하기도 하였다.
342년 겨울, 전연의 모용황은 용성으로 천도한 후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로 쳐들어왔다.
전연군은 평탄한 북쪽 길로 왕우가 이끄는 1만 5000명은 소수의 군대를 보내고 모용황과 한수는 험난한 남쪽 길로 5만 대군을
보내는 기만전술을 펼쳤으며, 이에 속은 고구려군은 북쪽으로 왕제 무가 이끄는 정병 5만을 파견하고 남쪽은 왕이
직접 소수의 군대로 지켰다.
이에 고구려군은 남쪽 길에서 크게 패해 장군 아불화도가가 전사하고 환도성은 함락되었으며 왕은 단신으로 단웅곡으로 피신하였다.
왕을 추격한 전연군은 모후 주씨와 왕비를 포로로 잡았으나 북쪽 길에서 무의 군대가 크게 승리하였기 때문에 전연군은 퇴각하였다.
전연군은 퇴각하는 길에 미천왕릉을 파헤쳐 미천왕의 시신을 가져갔고 5만 명의 백성을 잡아갔다.
343년, 고국원왕은 동생 무를 보내 전연에 신하의 예를 갖추고 미천왕의 시신을 돌려받았으며 평양의 동황성으로 거처를 옮겼다.
345년에는 전연이 모용각을 보내 남소를 함락시켰으며, 349년에는 전연의 망명자였던 송황을 전연으로 송환하였다.
355년에 이르러서 전연에 간청하여 모후 주씨를 돌려받는 데 성공하였으며 전연으로부터 책봉을 받아
‘정동대장군 영주자사 낙랑공 고구려왕’이 되었다.
이후 전연은 전진의 공격을 받아 쇠퇴하였으며, 370년에 전진에 의해 멸망하였다.
이때 고국원왕은 고구려로 도망쳐온 태부 모용평을 체포하여 전진에 송환함으로써 전진과의 우호관계를 수립했다.
고국원왕은 369년에 백제를 공격하였으나 치양에서 백제의 왕자 근구수에게 패하였다.
371년에 다시 백제를 공격한 고국원왕은 패하에서 복병을 만나 패하였다.
이해 겨울 10월에 백제 근초고왕이 평양으로 공격해오니 고국원왕이 이를 막다가 활에 맞아 전사하였고 고국의 들에 장사지냈다.
* 부왕=미천왕 * 모후=왕후 주씨
* 제1왕후=? * 아들=고구부(17대 소수림왕) / 고이련(18대 고국양왕)
고구려 17대 소수림왕 = 구부, 소해주류왕, 해미류왕 (재위 371~384)
355년에 태자가 되었고 371년에 고국원왕의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371년 고국원왕이 백제 군과 평양에서 싸우다가 전사하자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소수림왕이 즉위한 시대에는, 국왕이 전사한 상황에서 국가의 체제 정비의 필요성이 대두되고
넓은 영토와 주민들을 체계적으로 통치할 제도의 정비가 요구되던 시기였으므로, 고구려 사회의 체제 정비를 위한 정책을 취하였다.
372년 전진의 3대 황제 부견으로부터 승려 순도가 와서 불상과 경문을 전함으로써 최초로 고구려에 불교가 전래되었다.
374년에는 아도가 전진에서 건너와 불도를 고구려에 전하였다.
소수림왕은 375년에 초문사, 이불란사를 창건하여 불교의 수용 및 보급 정책을 취하여, 전진과 평화적 관계를 수립하고,
호국사상으로 삼았다.
태학을 설립하여 유교적 정치이념에 충실한 인재를 양성하여 중앙집권적 정치제도에 적합한 관리를 양성하였다.
373년에는 율령을 반포하여 국가통치와 사회질서 유지를 위한 규범들을 갖추었다.
율은 형법법전, 령은 비형벌적 민정법전으로 중국에서 성립된 성문법이다.
이와 같은 소수림왕의 체제 정비 시책들을 기반으로 고구려는 광개토대왕조 제위 시대 전성기를 누렸다.
대외 관계에 있어서는 백제와 충돌이 계속되었는데, 375년에는 백제의 수곡성을 빼앗았으며
377년에는 3만 대군의 백제군 침공을 물리치고 백제의 북변을 역습하였다.
378년에는 극심한 가뭄이 든 상태에서 거란의 침략을 받아 8개의 부락을 빼앗기기도 했다.
384년에 서거하여 소수림에 장사지냈다. 이어 동생 이련이 제위에 올랐다.
* 부왕=고국원왕 * 모후=?
* 동생=이련(18대 고국양왕)
순도
순도는 4세기 인물로 고구려 소수림왕 2년인 372년에 전진의 왕 부견의 사자를 따라 불교를 전했는데,
이것은 한국으로의 불교 전래에 대한 최초의 공식적인 기록이다.
고구려 소수림왕 2년을 전후하여 삼국은 모두 불교를 받아들이게 된다.
순도는 불상과 불경을 가지고 고구려로 왔는데 고구려의 왕과 신하들은 그를 귀인으로 맞이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순도는 고구려의 최초의 사찰인 초문사 혹은 성문사에 머물면서 불교를 포교하였다고 한다.
고구려에는 처음 순도가 들어오고 그 2년 후에 아도가 들어왔는데 이들은 모두 인도 또는 서역 승려일 가능성이 짙다.
그 이유는 순도의 경우 중국천하를 돌아다니면서 전도하다가 고구려로 온 것으로 표현하고 있고
아도는 일반적으로 인도 승려로 추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설에 따르면 순도는 동진에서 왔다고도 한다.
아도
아도는 아두라고도 한다. 아도에 대해서는 세 가지 다른 기록이 있다.
첫 번째는 순도가 고구려에 불교를 전한 때인 고구려 소수림왕 2년(372년)의 2년 후인 소수림왕 4년에 고구려에 입국하여
불교를 전한 승려로서의 기록이다. 이 아도는 일반적으로 인도 승려로 추정하고 있다.
두 번째는 국적 불명의 승려로, 삼국사기에 따르면 이 승려는 눌지왕(재위 417~458) 때 고구려에서 신라로 건너와 불법을 전했다.
소지 마립간(재위 479~500) 때 시자 3명을 데리고 일선군 모례의 집에 머무르다가 죽었다.
이 두 번째 인물과 첫 번째 인물이 동일인인지 아니면 동명이인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이 두 번째의 아도가 신라에 전한 불교는 이후 법흥왕(재위: 514-540) 때 이차돈이 순교하여 이적을 보임으로써 널리 퍼지게 된다.
세 번째 기록은 삼국유사에 나오는데, 이에 따르면 아도는 고구려의 승려로, 5세에 출가하여 16세 때 위에 가서 아버지
굴마를 찾아뵙고, 19세 때 다시 고구려에 돌아와 어머니 고도령의 명을 받들어 미추왕 2년(263년)에 신라 왕가에 불교를
전파하려다 실패했다.
그 후 3년 동안 일선현 모례의 집에 숨어 있었으나 미추왕의 딸 성국공주의 병을 고쳐준 공으로 그때부터 불교의 전도를 허가받고
흥륜사를 지었다. 미추왕이 죽은 후 사람들의 미움을 사 다시 모례의 집에서 땅굴을 파고 들어앉아 죽었다.
이 인물이 행적이 유사한 묵호자와 동일인물인지는 불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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