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역사와 문화2013. 9. 14. 18:37

 

 

 

서울시 문화재를 찾아서 - 백제와 고구려의 싸움터, 몽

백제와 고구려의 싸움터, 몽촌토성

현재 송파구 방이동 지역에 위치한 몽촌토성은 전일에는 강동구 이동(二洞)으로 불리던 곳으로 1970년대까지만 해도 국립 경기장 지역으로 지정된 곳이었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라는 말이 있지만 이 곳은 올림픽경기장 시설이 들어서게 됨에 따라 크게 변모되었다. 이 지역은 1980년 초까지도 국립 경기장 지역으로 지정되었기 때문에 주택을 신축하거나 증축을 하지 못해 초가집이 남아있는 등 농촌모습을 그대로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이곳 주민들은 이동이란 동명보다 ‘몽촌(夢村)’으로 부르기를 좋아하였다. 따라서 이 곳의 토성을 몽촌토성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 마을의 이름을 붙인 것이다.

몽촌토성은 사적(史蹟)으로 뒤늦게 지정되기도 했으나 1983년과 1984년에 4개 대학에서 발굴조사를 하면서부터 널리 알려졌다. 이 토성은 타원형으로 연결된 야산을 이용하여 그 위에 진흙을 쌓아 성벽을 만든 것으로 남북의 길이가 750m, 동서의 길이가 500m가 되고, 본성(本城)과 이보다 작은 외성(外城)으로 되어 있다. 이 당시 발굴조사 결과를 보면 몽촌토성이 2,000년 전 백제의 서울 위례성(慰禮城)으로 추정하였으므로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촌토성

실제로 백제가 건국 초부터 500년간 위례성을 서울로 삼았던 것은 잘 알려진 일로서 이 곳을 지키기 위해 풍납토성, 아차산성, 이성산성을 쌓았을 것이다.

 

지금부터 1,600년 전, 고구려의 16대 고국원왕이 전사한 후 고구려와 백제는 서로 적대 관계에 있었다. 그러던 차에 고구려의 영주(英主)로 알려진 19대 광개토왕이 왕위에 오르자 백제의 진사왕과 국민들은 전쟁이 일어나지 않을까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진사왕 8년(392) 7월.

광개토왕은 친히 4만 명의 대군을 이끌고 공격해 옴으로써 전쟁의 막은 올랐다. 이때 백제는 10여 성을 빼앗기고 다시 4년 후 아신왕(阿莘王) 때도 수륙 양면으로 공격해 오는 고구려 군을 맞아 백제군은 용감히 싸웠으나 한강 이북의 땅은 모두 잃고 말았다.

광개토왕에 이어 왕위에 오른 장수왕은 남쪽의 기름진 땅과 따뜻한 기후를 차지해야겠다고 생각하였다. 장수왕은 이 계획에 따라 서울을 평양으로 옮기고 백제와 신라를 여러 번 공격하였으나 수비가 워낙 튼튼해 쉽사리 성공하지 못하였다. 이에 장수왕은 백제 내부의 허실을 살펴 공격을 해야겠다는 전략으로 바꿔, 중 도림(道琳)을 백제에 파견하였다.

이 당시 백제 개로왕(蓋鹵王)은 장기, 바둑을 즐겼다. 바둑의 고수(高手)인 도림은 개로왕에게 접근하기 위해서 어느 날 궁궐 앞에 나아가,

“소승이 일찍부터 바둑을 배워서 자못 묘수(妙手)가 있사온데 왕께 뵈옵기를 원합니다.”

하였다. 이에 왕이 그를 불러들여 대국해 보니 과연 국수(國手)가 아닌가. 개로왕은 크게 기뻐하여 도림을 귀한 손님으로 대하고, 날마다 밤이 깊도록 바둑을 두었다.

“내 일찍이 그대와 같은 사람을 만나지 못한 것이 한이 되오. 그대는 재주가 뛰어난데 비해 너무 겸손한 것 같소.”

“아니옵니다. 소승이 여태껏 한 가지 재주로만 은총에 보답해 왔을 뿐 털끝만큼의 이익을 끼치지 못했습니다. 이제 전하께 한 말씀 드리려고 하는데 전하의 뜻이 어떠하신 지 모르겠습니다.”

하니, 개로왕이,

“어서 말해 보시오. 국가에 이익이 되는 일이 있다면 이것은 내가 그대에게 바라는 바이오.”

하였다.

고구려의 중 도림(道琳)은 개로왕(蓋鹵王)의 신임을 어느 정도 얻은 것으로 판단하였다.

그는 이제 백제의 국력을 약화시키는 목적을 이룰 수 있는 기회가 왔다고 생각하고,

“백제는 높은 산과 큰 강으로 둘러싸여 있기 때문에 이웃나라들이 감히 엿보지 못하고 받들어 섬기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전하께서는 밖으로는 위세를 뽐내시고 부유함을 보여서 남의 눈과 귀를 놀라게 해야 할 것인데, 그렇지 못하고 있습니다.”

라고 아뢰었다. 이에 개로왕이,

“그렇다면 어떤 일을 해야 이웃나라들이 이 백제를 넘보지 않겠소.”

“우선 왕실의 위엄을 보이기 위해서 궁궐을 크게 짓고 왕릉을 다시 만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홍수 때 백성들의 가옥이 물에 잠기고 떠내려가니 한강변의 제방을 단단히 쌓아야 합니다.”

도림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던 개로왕은,

“대사의 말이 옳소. 이제라도 백성을 동원해 면모를 일신해야겠소.”

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백제의 온 백성들은 흙을 구워 성을 높이 쌓고, 궁궐을 아름답게 꾸미는 일과 한강에 제방을 쌓는 일 등에 동원되었다.

그러나 이 토목공사로 국고는 바닥나고 백성들은 지칠 대로 지쳐 버렸다. 한편, 도림은 개로왕으로 하여금 대 토목사업을 일으키게 한 뒤 도망쳐 고구려로 돌아왔다. 그리고 장수왕에게 백제의 형편을 세세히 보고하였다. 이를 들은 장수왕은,

“그 동안 수고가 많았소. 이번에야말로 100년 전 고국원왕께서 전사한 원수를 꼭 갚고 말겠소.”

하고 도림에게 치하한 뒤 군사 3만을 일으켰다.

개로왕 21년(475) 9월.

장수왕은 기습 공격으로 7일 만에 한성(漢城)을 함락시키고 지체없이 한강을 건너 서울 위례성을 포위하였다.

 

백제 문화의 특징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뛰어난 건축 기술을 갖고 있다.

온화함과 섬세함이 잘 나타나 있다.

일본 고대 문화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미륵사지5층석탑

전북 익산시 금마면. 국보 제11호. 백제시대.

한국 석탑의 시원양식으로서 목탑이 석탑으로 이행하는 과정의 구조를 보여주는 중요한 탑이다.

탑의 규모로 보더라도 한국 석탑 중 최대의 걸작이다.

 

정림사지5층석탑

충남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 379. 국보 제9호. 백제시대.

부여 정림사터에 세워져 있는 석탑으로, 좁고 낮은 1층 기단(基壇)위에 5층의 탑신(塔身)을 세운 모습이다. 기단은 각 면의 가운데와 모서리에 기둥돌을 끼워 놓았고, 탑신부의 각 층 몸돌에는 모서리마다 기둥을 세워놓았는데, 위아래가 좁고 가운데를 볼록하게 표현하는 목조건물의 배흘림기법을 이용하였다.
얇고 넓은 지붕돌은 처마의 네 귀퉁이에서 부드럽게 들려져 단아한 자태를 보여준다.

낙화암

충남 공주시 산성동. 공주기념물 제42호. 백제시대. 1982∼1983년까지 공주사범대학에서 발굴하여 유적지가 확인되었으며 이 연지는 백제시대부터 계속하여 이용되어 왔음을 시사하고 있다. 백제시대 축성된 산성으로 백제 때에는 웅진성으로 불렸다가 고려시대 이후공산성으로 불리게 되었다.

 

부여성흥산성

충남 부여군 임천면 군사리. 사적 제4호. 백제시대 수도였던 부여를 수호하기 위해 금강 하류 대안에 축조된 가장 중요한 산성의 하나이다.이 산성은 백제시대 수도였던 부여를 수호하기 위해 금강 하류 대안에 축조된 가장 중요한 산성의 하나이다. 이 성홍산성은 501년에 축조되었다고 하며, 성주는 약 600m, 성벽 높이는 3∼4m이고, 우물터가 3군데에 있고 건물터도 현존하고 있다.

 

익산연동리석불좌상

전북 익산시 삼기면 연동리 산220-2. 보물 제45호.

불상은 머리만 없어졌을 뿐 불신, 대좌, 광배까지 고스란히 남아 있는 백제의 작품이다.
지금의 머리는 요즘 새로 만든 것이며, 불상의 현 신체 높이는 156㎝이다.

 

백제 문화의 특징

백제 문화재는 공주와 부여에 많이 분포되어 있다. 공주에는 무령왕릉이 그 당시 그대로의 모습으로 발굴되었다.

부여의 중심부에는 절터가 있고, 그 중앙에 정림사지 5층석탑이 잘 보존되어 있다. 석탑의 지붕동의 끈이 살짝 들린 모습이 가지런하면서도 날렵하게 보인다. 백제의 뛰어난 건축 기술과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

백제 문화의 특징인 온화함과 섬세함이 이 석탑에 잘 나타나 있으며, 이 문화를 일본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백제 문화는 탑, 불상, 절과 같이 불교 중심의 문화재가 많고 무령왕릉, 공산성, 송산리 고분 등에서 나오 벽화나 정림사지5층석탑, 금동대향로 등을 볼때 섬세하고 우아한 멋을 발견할 수 있다. 

 

 

 

 

 
Posted by 원주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