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왕의 시대 제21대 신라왕에서부터 제25대 신라왕에 대해 알아보자.
제21대 소지왕(마립간)
제20대 자비왕 - 제3왕비 김씨
김씨, 생년 미상~500년
재위기간: 479년 2월~500년 11월. 총 21년 9개월
부인: 2명
자녀: 1남 1녀
선혜부인 - 보도부인(제23대 법흥왕의 왕비)
벽화부인 김씨 - 왕자
소지마립간은 비처왕이라고도 불리었으며, 자비왕의 셋째 아들로 미사흔의 딸 김씨 소생이다. 그는 어릴 때부터 효행이 지극하고 겸손하여 타인을 공경하는 자세를 잃지 않았기 때문 사람들이 모두 감복하여 성인이라 불렀다고 전한다. 479년 2월 부왕 자비가 죽고 왕위에 오르자 우선 사면령을 내려 죄수를 방면시키고, 관리들의 벼슬을 한 급씩 올려 주었다. 그의 치세기간에는 잦은 천재지변과 고구려와 왜, 말갈 등의 외침으로 혼란스러웠다.
즉위 이듬해인 480년 5월 가뭄을 시작으로, 동년 10월의 기아, 482년 2월의 폭풍 및 금성의 화재, 4월의 폭우, 483년 4월과 7월에 홍수, 11월에 우레와 전염병 등이 계속되었다. 자연재해가 계속된 직후 오함이라는 자를 새로 이벌찬으로 삼는 등 인사개편에 나섰다. 480년 11월에 말갈이 변경을 공격하게 되자, 481년 2월에 자신이 직접 비열성(함경남도 안변)까지 행차하여 군복을 하사함으로써 변방의 군사를 위로하였다. 신라군은 패전을 거듭했고, 신라의 북방 변경을 휘젓고 다니던 고구려군과 말갈군은 순식간에 호명성(강원도 철원) 등 일곱 성을 함락시켰다. 그리고 다시 동쪽 해안선을 따라 남진하여 미질부(경북 영일만 일대)까지 밀고 내려왔다. 이에 소지왕은 백제의 동성왕과 가야에 구원을 요청했고, 백제와 가야의 군대의 도움으로 고구려군을 몰아낼 수 있었다. 각종 재해와 주변국의 침입으로 마립간에게 그 화살이 돌아오자, 소지왕은 자비왕 대에 강화된 왕권을 스스로 약화시키는 고육지책으로 난국을 타개하고자 했다.
484년 7월 고구려에 공격당한 백제를 위해 연합으로 모산성 아래에서 고구려군을 대파하고, 실추되었던 국가 위상을 되찾고, 군대의 사기도 크게 높였다. 이에 힘입어 소지왕은 여러 성을 쌓아 국방을 강화했다.
485년 2월에는 구벌성을 쌓고, 486년 정월에는 일선 지방의 장정 3천 명을 동원하여 삼년성과 굴산성을 개축하였다. 488년 7월에는 도나성을 쌓았고, 490년 2월에는 비라성을 중수했다. 493년 7월에는 임해와 장령 두 곳에 진을 설치하여 왜적의 침입에 체계적으로 대응할 교두보를 마련했다. 계속된 외침과 자연재해의 수습을 끝낸 소지마립간은 시조 박혁거세가 처음 태어났다고 알려지는 나을에 신궁의 건설을 시작하여 497년 2월에 끝냈다.
487년 7월에는 월성을 수리하여 그곳에 대궁을 설치하고 이듬해인 재위 10년 정월에 월성으로 옳겨갔다. 이때부터 월성엔 주로 왕과 왕비 등이 기거하고, 금성에 왕실의 혈족들이 기거하게 되어, 왕의 위상을 높였다. 그해, 사방에 우역을 설치하고 국내의 기간 도로인 관도를 수리하였으며, 490년에는 수도인 경주에 처음으로 시사를 열어 사방의 물화를 유통시켰다. 이러한 정책은 자비왕대의 경주의 방리명확정과 아울러 족제적 성격이 강하게 남아 있는 육부체제를 개편하여 중앙집권적인 통치체제를 수립하려는 노력으로 이해된다.
또한, 소지왕은 비열성(지금의 안변), 일선군(지금의 선산), 날이군(지금은 영주)등지를 순행하여 병사를 위문하고 재해지나 전쟁지역의 주민들을 위로하여 민심을 수습하는 한편, 유식하는 백성들을 귀농시키기도 하였는데, 이러한 왕의 치적은 신라의 대내적 결속력의 강화와 농업생산력 증대에 기여했을 것으로 보여진다.
재위 14년 492년 백제의 동성왕의 결혼요청을 받아들여 잉찬 비지의 딸을 시집보냄으로서 결혼동맹을 맺었다. 그 뒤, 고구려의 남하에 대비하는 신라와 백제 양국의 동맹관계는 더욱 공고해져 494년의 고구려의 신라침입 때에는 백제가, 495년 고구려의 백제공격 때에는 신라가 각각 구원병을 파견하여 고구려의 남하를 강력하게 저지하였다. 496년 7월 고구려군이 다시 신라의 우산성을 쳤는데, 장군실죽이 나가 싸웠다. 497년 4월 왜, 8월에 고구려가 다시 잇따라 침공, 고구려군이 결국 우산성을 점령했다. 고구려와의 전쟁과정에서 변경지방의 요충지에는 삼년산성 등을 개축, 증축하여 침입에 대비하였다. 재위 21년(500년) 생을 마감했으며, 능에 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제22대 지증왕(마립간)
갈문왕 습보(내물왕의 손자) - 조생부인 김씨(제19대 눌지왕의 딸)
김씨, 437~514년
재위기간: 500년 11월~514년 7월. 총 13년 8개월
부인: 1명
자녀: 2남
연제부인 박씨 - 제23대 법흥왕, 입종(제24대 진흥왕의 아버지)
지증왕은 내물왕의 증손이며, 습보갈문왕의 아들로서 조생부인 김씨 소생이다. 성은 김씨이고, 지대로 혹은 지도로 또는 지철로 라고 하였다. 갈문왕 습보는 눌지왕의 아우 미사흔의 아들이다. 또한 조생부인이 눌지왕의 딸이므로 지증왕은 소지왕의 6촌 아우가 되는 셈이다. 왕은 몸이 건장하였으며 담력이 있었다고 한다. 재종형인 소지마립간이 후계자가 없이 죽자 64세의 나이로 왕위를 계승하였다.
재위 3년(502년)에 순장을 금지하는 법령을 내렸다. 신분의 위상을 드러내는 중요한 전통적 장례 절차였던 순장을 자신들의 신분을 구분하려는 의지가 강했던 왕실과 귀족사회의 강한 반발에도 불구하고 과감하게 금지시킨다. 이는 불교적인 의미도 없지 않겠으나 농업노동력의 확보라는 측면과도 연관이 있을 것으로 주목된다. 또, 주군에 명하여 농업을 권장하도록 하였으며, 비로소 우경을 시행하도록 하는 개혁조처를 단행함으로써 농업생산력증대의 계기를 마련하였다. 또한, 이 무렵에는 벼농사가 확대, 보급되면서 수리사업도 활발히 진행되었는데 이러한 사회적 생산력의 발달에 기반을 두고 정치적 개혁들을 실행해 나갔다.
우선 재위 4년(503년)에는 이제까지 사라, 사로, 신라 등 다양하게 사용되고 있던 국명을 신라로 확정하였으며, 왕호를 방언인 마립간에서 중국식인 왕으로 바꾸었다. 이로써 지증왕은 비로소 고대국가로 정비된 신라국의 왕이 되었다.
이때에 제정된 국명인 신라의 의미는 왕의 덕업이 나날이 새로워지고, 사방의 영역을 두루 망라한다. 는 뜻에서 취한 것이라고 한다. 이러한 국명 및 왕호의 한화정책은 단순한 명칭상의 변경만이 아니라 신라가 고대국가체제를 정비하고, 왕권과 지배조직을 강화함에 따라 이루어진 결과였으며, 중국의 고도한 정치조직과 문물에 대한 인식과 그것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려는 노력의 일환이기도 했다.
또한, 재위 6년(505년)에는 친히 국내의 주, 군, 현을 정하였는데, 지방제도로서의 주군제도의 실시는 고구려, 백제, 가야 등의 삼국과의 전쟁에서 얻어진 점령지의 통치와 영토 확장의 수단이었다. 즉, 중앙집권적인 통치체제의 수립을 위하여 새로이 신라의 영역내로 편입된 점령지를 행정적 차원에서 일원적으로 파악함으로써 효과적인 지방통치를 행할 수 있었던 것이다. 같은 해에 실직주(지금의 강원도 삼척)를 설치하고, 이사부를 신라 최초의 군주를 삼은 것도 이러 정책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 신라의 군주제는 군사적 필요에 따라 수시로 이동할 수 있는 군정적 성격을 띠었으며, 중앙과 지방을 연결하는 실질적인 중간기구로서 기능하는 외직이었다. 그해 11월에는 석빙고를 관리하는 소관부서를 설치하고 얼음을 저장하게 하였다.
한편, 군사적으로는 504년 동북 방면에 파리성, 미실성, 진덕성, 골화성 등 12개성을 축조하였고, 512년에는 하슬라(강릉)주 군주인 이사부로 하여금 우산국(지금의 울릉도)을 복속시키게 하였다. 남쪽 방면으로는 아시촌(지금의 함안)에 소경을 설치하여 그곳 주민을 행정적으로 회유함으로써 신라의 직할영토로 편입시키기 위한 조처를 취하기도 했다.
이 밖에도 504년 상복법의 제정, 서울에 동시의 설치, 선박 이익의 권장 들 일련의 의례와 민생에 관한 시책을 실시하기도 하였다. 이렇듯 지증왕의 정책은 구체적이고 섬세했다. 그는 제반 문제를 법의 테두리 안으로 끌어들여 제도화함으로써 국가 기강 확립에 크게 기여했다. 이런 여러 업적을 남긴 그는 왕위에 오른 지 15년 만인 514년 78세의 나이로 죽었다. 시호를 지증이라 하였는데, 신라에서 시법을 사용하기로는 지증왕이 처음이었다. 지증왕 대에는 칭호를 왕으로 사용하기로 확정하긴 했으나, 여전히 마립간이라는 칭호가 널리 사용되었다.
제23대 법흥왕
제22대 지증왕 - 연제부인 박씨
김씨, 원종, 생년 미상~540년
재위기간: 514년 7월~540년 7월. 총 26년
부인: 4명
자녀: 2남 3녀
보도부인 김씨(소지왕의 딸) - 지소태후(제24대 진흥왕의 어머니)
옥진궁주 김씨 - 비대
벽화부인 김씨 - 삼엽
보과부인 김씨(백제 동성왕의 딸) - 모량, 남모
법흥왕은 지증왕의 장남이며, 연제부인 박씨 소생으로 이름은 원종이다. 그는 키가 7척이고 도량이 넓으며 사람을 좋아했다고 한다. 소지왕이 죽고 부군이었던 지증이 왕위를 잇자, 원종은 곧바로 태자에 책봉 되었다.
514년 7월에 왕위에 오른 법흥왕은 지증왕 때 일련의 개혁정치를 계승하여 중앙집권적인 고대국가로서의 통치체제를 완비하였다. 재위 4년(517년)에 신라에서 중앙관부로서는 병부가 제일 먼저 설치되었는데, 이것은 중앙집권적 고대국가체제를 수립하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군사권을 왕이 직접 장악함으로써 왕권을 강화할 수 있었던 것으로 이해된다. 병부는 눌지왕 이후에 등장하여 왕의 직속으로 군사권을 장악하고 있던 장군과 같은 직책을 중앙관부로 흡수하여 재편성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재위 7년(520년)에는 율령을 반포하고 백관공복을 제정하였는데, 이때에 반포된 율령에는 17관등제와 골품제도 등에 관한 규정이 포함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율령에 의하여 신라내로 통합된 이질적 요소들을 법 아래에서 강제적으로 해소할 수 있었기 때문에 왕을 중심으로 하는 국가권력의 강화를 이룩할 수 있었다. 관복은 붉은빛과 자줏빛 두 가지색으로 구분하여 등급을 표시하도록 했다.
이러한 국가권력, 즉 왕권의 강화를 단적으로 나타낸 제도가 바로 법흥왕 대에 설치된 상대등이다. 상대등은 수상과 같은 존재로서 531년에 이찬 철부가 최초로 상대등에 임명하여 국사를 총괄하게 하였다. 상대등은 신라의 최고관직으로서 대등으로 구성되는 귀족회의의 주재자였다. 왕권이 점차 강화되어 왕이 귀족회의 주재자로서의 성격을 탈피하게 되자 왕 밑에서 귀족들을 장악할 새로운 관직의 필요성이 대두되자 상대등을 설치하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법흥왕은 이와 같이 대내적으로 체제를 정비하여 왕권을 강화하는 한편, 대외적으로는 영역확장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522년에 백제의 적극적인 진출에 반발한 대가야가 법흥왕에게 사신을 보내어 결혼을 요청하다 이찬 비조부의 누이동생을 보내어 동맹을 맺었다. 그 뒤, 법흥와은 적극적인 남진 정책을 추진하여 524년에는 남쪽의 국경지방을 순수하고 영토를 개척하였다.
532년에 본가야의 금관국주 김구해가 세 아들과 함께 신라에 항복해옴으로써 정식으로 합병되었다. 법흥왕은 구형의 귀순을 대대적으로 환영하고, 금관국을 그의 식읍으로 내줬으며, 셋째 아들 무력을 대신으로 등용하였다. 이로써 약 500년 동안 유지되어 오던 가야 왕조를 폐하고 신라에 병합하였다. 본가야의 투항은 신라로 하여금 낙동강과 남해안의 교통상의 요지인 김해를 발판으로 가야의 여러 나라를 정복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주었다. 서북방면의 점령지는 대아찬 이등을 사벌주군주로 임명하여 관리하게 하였다. 왕권강화와 영역확장 등에 힘입어서 국력이 신장된 신라는 재위 23년(536년)에 비로소 독자적 연호인 건원을 사용하였다. 이로써 법흥왕 이래 신라 중고왕실의 거의 모든 왕들은 자기의 독자적인 연호를 가지게 되었다. 동아시아의 전통사회에서 중국의 주변국가가 중국 연호를 사용하지 않고 자기연호를 사용하였다는 것은 일단 중국과 대등한 입장에서의 자주적 국가임을 표현했다는데 그 의미가 있다.
또한 521년에는 기존의 외교노선에서 벗어나 위진남북조시대의 북조 대신에 남조인 양에 사신을 파견하였다. 이때 신라에 사신으로 온 양나라의 승려 원표가 불교를 신라왕실에 전해준 것이 불교수용의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불교가 신라에 처음 들어온 것은 5세기 초 아마도 눌지왕 때이거나 혹은 그보다 조금 이른 시기에 고구려를 통해 들어왔다. 신라불교 개척자는 아도였다. 전설적 인물인 묵호자와 동인 인물로 추정하고 있는데, 신라의 민가에 들어와 불교를 전차했다 전해진다. 신라와 중국과의 외교적 교섭이 열림에 따라 신라왕실에 법흥왕은 불교를 크게 일으키려 하였으나 귀족들의 반대를 받아 고민하던 중 527년에 이차돈의 순교를 계기로 불교의 국가적 공인이 이루어졌다.
법흥왕에 의하여 국가종교로 수용된 불교는 왕권을 중심으로 하는 중앙집권적 고대국가 형성에 있어서 이념적 기초를 제공하여 왕실과 매우 밀접한 관계에 놓이게 되었다. 이러한 관계는 법흥왕이 말년에 승려가 되어 법호를 법공이라 한데서 잘 나타나고 있다. 재위 27년 만에 죽자 시호를 법흥이라 하고 능은 애공사 북쪽 봉우리에 마련되었다.
제24대 진흥왕
갈문왕 김입종(제23대 법흥왕의 아우) - 지소태후 김씨(법흥왕의 딸)
김씨, 삼맥종, 534~576년
재위기간: 540년 7월~576년 8월. 총 36년 1개월
부인: 4명
자녀: 4남 1녀
사도부인 박씨 - 동륜, 구륜
숙명궁주 박씨 - 제25대 진지왕
소비 부여씨
월화궁주 김씨 - 천주
금진 - 난성공주
진흥왕은 법흥왕의 아우 김입종의 아들이며, 법흥왕의 딸 지소태후 김씨 소생으로 이름은 삼맥종, 혹은 삼맥부이다. 534년에 태어났으며, 일곱 살이 되던 540년 7월에 법흥왕이 죽자 왕태후 지소의 섭정을 받으며 왕위에 올랐다. 신라의 대외적 발전을 비약적으로 추진시킨 왕이다.
551년에 개국이라고 연호를 바꾸고 친정을 시작하면서부터 적극적인 대외정복사업을 전개하게 된다. 550년에 백제와 고구려가 도살성(지금의 천안 혹은 증평)과 금현성에서 공방전을 벌이고 있는 틈을 타 이듬해 병부령 이사부를 임명하고, 두 성을 공격하여 빼앗고 한강하류유역을 차지했다. 그 기반으로 그 해에 백제의 성왕과 연합하여 고구려가 점유하고 있던 한강유역을 공격하여 백제가 고구려부터 한강지역을 탈환하자, 진흥왕은 거칠부를 비롯하여 구진, 비태, 탐지, 비서, 노부, 서력부, 비차부, 미진부 등 여덟 장군에게 명하여 한강 상류유역인 죽령 이북 고현(지금의 철령) 이남의 10개군을 고구려부터 빼앗게 하였다. 그리고 553년에는 백제가 고구려부터 탈환한 한강하류유역의 전략적인 필요성을 절감하고, 동맹관계에 있던 백제를 기습 공격하여 이 지역을 점령하였다. 이로써, 신라는 한강유역의 전부를 차지할 수 있게 되었으며, 신주를 설치하여 아찬 김무력을 초대 군주로 임명하여 다스리게 했다.
신라가 백제로부터 한강하류유역을 탈취한 사건은 백제와의 사이에 맺어졌던 결혼동맹을 파기하는 것을 의미했다. 이에 백제 성왕은 554년 대가야와 연합하여 신라를 공격하다가 관산성(지금의 옥천) 전투에서 신주군주 김무력에게 붙잡혀 죽음을 당하였으며, 백제군은 거의 전멸되었다. 신라의 한강유역 점령은 인적 ․ 물적 자원의 획득 이외에도 황해를 통한 중국과의 교통로를 확보하였다는 데 중요한 의미가 있다. 이에 신라는 564년 이래 거의 매년 중국 남조의 진과 북조의 북제에 사신을 파견하고 외교관계를 유지했다. 또한, 법흥와의 가야에 대한 정복사업을 계승하여 낙동강유역에까지 정복의 손을 뻗쳤다. 555년에는 비사벌(지금의 창녕)에 완산주가 설치하고, 557년에는 국원(충북 청주)을 소경으로 만들었으며, 사벌주를 없애고 감문주를 설치하고 사찬 기종을 군주로 임명하였다. 562년 백제는 신라의 변경을 침략하였고, 그 틈을 이용하여 가야왕 도설지가 군대를 일으켰다. 신라 변경을 노략질하던 백제군은 신라군에게 역공을 당해 1천여 명의 사상자를 내고 퇴각했으며, 가야의 반란 세력은 신라 장군 이사부와 사다함이 군사 5천을 이끌고 가서 패퇴시켰다. 이리하여 신라는 가야의 여러 나라를 완전히 정복하였으며, 낙동강유역 전부를 차지할 수 있게 되었다.
565년에 원래 대야주(지금의 합천)를 설치하여 가야지역 통치의 본거지로 삼는 동시에 백제에 대한 방어의 전초기지로 삼았다. 이 밖에도 동북방면으로 북상하여 556년 비열홀주(지금의 안변)를 설차하고 사찬 성종을 군주로 임명하였으며, 신주로 삼았던 한강 이북에 북한산주를 설치하였다. 이와 같은 고구려, 백제, 가야에 대한 활발한 정복사업의 결과로 신라 역사상 최대의 영토를 차지하게 되었다. 진흥왕의 영토 확장은 창녕. 북한산. 황초령. 마운령에 있는 네 개의 순수관경비와 최근 발견된 단양의 적성비를 통해 볼 수 있는데, 네 개의 순수비 중 경상남도 창녕군에 있는 창녕비는 561년에, 함경남도 함흥군에 있는 황초령비와 이원군에 있는 마운령비는 568년에 각기 건립된 것을 알 수 있다. 진흥왕의 순수관경비는 새로이 신라 영역내로 편입된 지역주민들의 민심을 수습하고, 확장된 영역을 확인하기 위하여 세워진 기념비라고 할 수 있다.
진흥왕은 이 같은 정복활동뿐만 아니라 대내적인 정치에 있어서도 많은 치적을 남겼다. 중대왕실의 정통성을 천명하고 유교적인 정치이념에 입각하여 그 위엄을 드러내고자, 545년 이사부의 건의를 받아들여 거칠부로 하여금 『국사』를 편찬하였다.
또한 법흥왕 대에 공인된 불교를 적극적으로 보호하였는데, 544년 흥륜사의 완성을 시작으로 경주에 많은 사찰을 지었으며, 사람들이 출가하여 봉불하는 것을 허락하여 주었다. 또한 중국 남조에 부처님의 사리를 요청하였는데, 549년에는 양나라에 유학하였던 승려 각덕이 불사리를 가지고 귀국하자, 백관으로 하여금 흥륜사 앞에서 영접하게 하였다. 그리고 553년에는 월성 동쪽에 왕궁을 짓다가 그곳에서 황룡이 나타나자 왕궁을 고쳐서 불사로 삼고 황룡사라 이름 하였는데, 이는 566년에 완공되었다. 황룡사는 신라 최대의 사찰로서 이곳에는 574년에 신라 최대의 불상인 장륙상을 주조하여 모셨다. 이 장륙상에 소요된 구리의 중량이 무려 3만 5천근이고, 도금한 중량이 1만 1백 98푼이나 되었다. 황룡사가 완공되던 해에는 지원사와 실제사도 준공되었다. 이렇게, 신라왕실의 보호를 받는 불교는 경주를 중심으로 발전함으로써 도성불교적 성격을 띠게 되었다. 이러한 외형적인 사찰건축 외에도 565년에는 승려 명관이 불경 1,700여권을 진나라에서, 576년에는 안홍법사가 「능가승만경」및 불사리를 수나라에서 각각 가져옴으로써 교리적인 발전의 기틀도 마련하였다. 또한 572년에는 7일 동안 팔관연회를 외사에서 열어 정복전쟁기간에 전사한 장병의 영혼을 위로하였는데, 이것은 신라 불교가 국가의 현실적 필요에 부응할 수 있는 호국불교임을 나타낸 의식이었다. 이와 같이 진흥왕은 불교의 현실적 필요성을 절감하고 적극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한편, 그 자신도 불교에 매료되어 만년에는 머리를 깎고 승의를 입고 법운이라 하여 여생을 마쳤으며, 왕비도 이를 본받아 비구니가 되어 영흥사에 거처하다가 614년에 죽었다.
또, 진흥왕은 576년에 종래부터 있어오던 여성 중심의 원화를 폐지하고 남성 중심의 화랑도를 창설하였다. 무리들은 '풍월도'라 불리었고, 그 우두머리를 일러 풍월주라고 하였는데, 초대 풍월주는 위화랑이었다. 『화랑세기』는 그는 얼굴이 백옥과 같고, 입술은 마치 붉은 연지와 같고, 맑은 눈동자와 하얀 이를 가졌다고 했다. 또 그는 성격이 곧고 대의를 알며 공평무사했다. 진흥왕이 그를 총애하여 위화랑 이후 풍월주를 화랑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게 하여 화랑이란 명칭을 탄생시킨다. 화랑도의 전승기는 위화랑이 제1세 풍월주가 된 540년부터 681년에 김흠돌의 난에 대한 여파로 풍월주가 폐지될 때까지의 241년 동안이다. 그 이후로 화랑도는 조직이 약화되고 사병화되어, 신라 말에 이르러서는 일개 수련 단쳬로 전락하게 된다.
이렇게 많은 업적을 남긴 진흥왕은 대내적으로는 국가의식과 대외적으로 자주의식의 상징적 표현이었던 독자적 연호를 세 개나 사용할 수 있었다. 551년의 개국, 568년의 대창, 그리고 572년의 홍제가 그것이다. 재위 37년 만인 576년, 43세로 죽었다. 애공사 북봉에 장사지냈다.
제25대 진지왕
제24대 진흥왕 - 숙명궁주 박씨
김씨, 금륜, 생년 미상~579년
재위기간: 576년 8월~579년 7월. 총 2년 11개월
부인: 1명
자녀: 3남
지도부인 박씨 - 용수, 용춘
도화랑 - 비형
진지왕은 진흥왕의 차남이며, 이름은 사륜 혹은 금륜이고 지소태후의 사녀 숙명궁주 소생이다. 진흥왕의 태자 동륜이 572년에 죽었기 때문에 진흥왕에 이어서 즉위하여 무열왕계의 시조가 되었다. 당시의 왕위계승에 있어서는 이미 부자상속제가 확립되어 있었으므로, 진흥왕의 둘째 아들인 진지왕은 진흥왕의 적손, 동륜태자의 아들인 백정(뒤의 진평왕)이 있었기 때문에 실제로는 왕위 계승자가 될 수 없었다. 진지왕이 즉위하던 해(576년)에 거칠부를 상대등에 임명하여 국정을 맡긴 사실과, 재위 4년 만에 정란황음을 이유로 화백회의의 결정에 따라 폐위되었다는 점, 또한 독자적인 연호를 가지지 못하였다는 사실로 미루어 볼 때 진흥왕대의 대표적 인물이었던 거칠부의 지원을 받아 백정의 왕위를 찬탈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577년에 이찬 세종이 서쪽 변경의 주군으로 침입하여온 백제군을 일선군(지금의 선산) 북쪽에서 격파하여 3,700여명을 참획하는 전과를 올리고, 또 이듬해 7월에는 백제의 알야산성을 점령했다. 내리서성을 축조하여 백제의 공격에 대비하기도 하였으나, 2년 뒤에 백제가 웅현성(지금의 보은근처)과 송술성을 쌓음으로써 막히고 말았다. 578년에는 중국 남조의 진나라에 사신을 파견, 진흥왕 이래의 외교관계를 유지하였으나, 재위 4년 만에 폐위되었다. 진지왕이 왕위에 오르던 때부터 실질적 왕권은 사도태후와 진흥왕의 애첩 미실이 장악하고 있었고, 왕권을 상실한 진지왕은 정사는 안중에도 없고 매일 잉첩들과 어울려 색사를 즐겼다. 이렇듯 진지왕이 황음을 일삼으면서 사도태후와 미실의 말을 듣지 않자, 그들은 진지왕을 폐위시키고 동륜의 아들 백정(진평왕)을 왕으로 세웠다. 그 후 진지왕은 별궁에 유폐된 채 지내다가 579년 7월 17일 생을 마감했다. 시호를 진지라 하고 능은 경주 영경사 북쪽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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