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역사와 문화2013. 9. 14. 18:58

 

 

백제 8대 고이왕 = 구이, 고모 (재위 234년 ~ 286년) 성은 부여.

구수왕이 죽은 뒤 아들 사반왕이 왕위를 계승했으나 어려서 정치를 할 수 없기 때문에, 초고왕의 아우인 고이왕이 즉위했다고 전한다.

여기서 고이왕이 초고왕의 아우라 함은 연대상으로 모순된다.

고이왕은 온조왕계와는 계보를 달리하는 우태 - 비류계 출신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구수왕의 사망 뒤 고이왕의 즉위와 사반왕의 폐위는 곧 초고왕에서 구수왕으로 계승된 지파의 몰락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내정면에서는 여러 가지 정치 제도와 복식 제도를 제정했으며, 그것은 고이왕이 죽은 뒤에도 지속되어

그 뒤 백제가 멸망할 때까지 4백 년간이나 이어져 백제의 기본 제도로 유지되었다.

재위 27년(260년) 봄 정월, 기존의 좌우보 체제를 개혁하여 여섯 개의 좌평을 두고, 그들에게 왕명 출납과 창고 관리, 의례 제정, 형벌 제도, 군사 업무를 각각 분담시켜 맡아보게 했다.

또한 16품의 관등 체계를 정비했으며, 관직의 위계에 따라 자주색, 다홍색, 푸른색 옷을 입게 하는 등 품계에 따른 왕과 귀족의 공복에 관한 제도도 정했다.

재위 기간 중 괴곡(충북 괴산군), 봉산(경북 영주시)을 중심으로 자주 신라와 충돌했다.

고이왕은 낙랑과 신라 그리고 말갈과 군사적으로 충돌하며 세력을 키워 갔다.

또한 남옥저의 일부를 점령하고, 중국 대륙의 서진과 외교관계를 맺었다.

강원도 북부에 자리 잡은 말갈(동예)족이 자주 침범해 왔는데, 고이왕대에는 말갈과도 우호관계가 조성되었다.

한사군의 후신인 낙랑, 대방과도 혼인을 통한 동맹관계를 형성했다.

재위 13년(246년) 위나라가 낙랑군과 삭방과 합공해 고구려와 전쟁을 벌이는 틈을 타서 낙랑군의 변방을 공격하기도 했다.

또한, 한나라와 낙랑군, 대방군 사이에 분쟁이 일어났을 때 대방군을 선제공격하여 대방태수 궁준을 전사하게 한 사건의 배후에도 고이왕이 이끄는 백제의 힘이 작용하였을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

관리로서 재물을 받은 자와 남의 것을 도둑질한 자에게는 3배를 징출케 하는 동시에 종신 금고에 처한다는 법령을 내려 기강을 바로잡았고, 신라의 국경을 침범하여 영토를 확장하였다.

그는 한강 유역의 여러 부족 사회를 보다 큰 연맹체로 결속하는 데 중심 역할을 담당하여 백제를 고대 왕국으로 성장케 하였다.

 

백제 9대 책계왕 = 청계왕, 책찬왕 (재위 286년 ~ 298년)

고이왕의 맏아들이며, 왕비는 대방왕의 딸 보과이다. 체구가 장대하고 의지가 굳세었다고 한다.

286년(책계왕 1)에 고구려가 대방을 공격하였을 때, 대방왕이 사위인 그에게 구원을 요청하자 군사를 보내어 고구려군을 물리쳤다.

이 때문에 고구려와의 사이가 나빠져, 고구려의 침입에 대비하여 아차성(서울 광장동 아차산성)과 사성(서울 풍납동토성)을 수축하였다.

그러나 298년 한군(낙랑의 군대)과 맥인(동예로 추정)의 침입에 맞서 싸우다가 적병에게 살해되었다.

* 부왕=8.고이왕 * 모후=?

* 왕후=보과부인(대방군 태수의 딸) * 아들=10.분서왕 * 손자=12.계왕

백제 10대 분서왕 (재위 298년 ~ 304년)

책계왕의 장자로 어려서부터 외모가 준수하고 총명하여 부왕의 총애를 받았다.

한군현 세력의 침입을 막다가 부왕이 전사하자 왕위를 계승하였다.

분서왕도 부왕과 마찬가지로 낙랑 등 한군현 세력에 대하여 강경책을 폈던 것으로 보인다.

304년(분서왕 7)에는 낙랑군의 서쪽 현을 공격하여 차지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해에 분서왕은 낙랑이 보낸 자객에게 피살되었다.

고이왕의 손자인 분서왕이 피살된 뒤 고이왕계가 몰락하고 초고왕계가 다시 왕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제11대 비류왕 다음에 분서왕의 아들 제12대 계왕이 잠시 왕위에 있었던 것으로 전하나, 고이왕계의 몰락을 막지는 못하였다.

* 부왕=9.책계왕 * 모후=보과부인(대방군 태수의 딸)

* 왕후=? * 아들=12.계왕

백제 11대 비류왕 (재위 304년 ~ 344년)

구수왕의 둘째 아들이고, 사반왕의 동생이다. 분서왕이 죽자 그의 아들이 아직 어려서 비류가 신하들의 추대를 받아서 즉위하였다.

힘이 세고 활을 잘 쏘았으며 성품은 인자하고 너그러웠다고 한다

그러나 이 혈족관계는 비류왕의 재위시기와 모순되는 면이 있어 의문점이 있다. 구수왕은 234년까지 재위하였으며,

비류왕은 그보다 70년 뒤에 즉위하여 40년간 재위한 것으로 되어 있어 연대에 무리가 나타난다.

당시 백제 왕실은 개루왕에서 갈라진 고이왕계와 초고왕계의 두 지파가 세력을 다투고 있었다.

초고왕의 아들인 구수왕을 계승한 사반왕은 즉위하자 곧 폐위되었으며, 방계인 고이왕이 왕위를 차지하였다.

그뒤 왕위는 고이왕의 아들 책계왕과 손자 분서왕에게 계승되었다.

그러나 책계왕과 분서왕 모두가 한군현 세력과의 분쟁에서 연달아 피살되는 사태를 당하여,

고이왕계의 세력은 큰 타격을 입게 되었다. 초고왕계인 비류왕의 즉위는 바로 이때 이루어졌다.

비류왕의 즉위는 초고왕계의 재집권을 뜻한다.

312년 음력 2월 신하를 보내어 백성들의 질병과 고통을 살펴보고,

홀아비, 과부, 고아, 그리고 늙어서 자식 없이 외롭게 지내는 사람들을 도와주었다.

그 중에서도 스스로 생활할 수 없는 자에게는 곡식을 한 사람당 3섬씩 주었다. 또, 해구를 병관좌평으로 삼았다.

321년 봄 정월에 왕의 서제 우복을 내신좌평으로 삼았으나 우복은 327년 북한산성을 근거지로 반란을 일으켰고 왕은 이를 토벌하였다. 337년 봄 음력 2월에 신라에서 사신을 보내왔다.

비류왕 대에는 자연재해와 천문현상 기록이 다수 남아 있기도 하다.

344년 겨울 음력 10월에 왕이 죽었고 계왕이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비류왕 다음에 고이왕계인 분서왕의 아들 계왕이 즉위하였지만 그 재위는 2년 만에 끝나고, 다시 비류왕의 아들 근초고왕이 즉위하여 그뒤 초고왕계 내에서 왕위계승이 계속되었다.

‘근초고왕’이라는 왕명은 ‘초고왕’과의 연관성을 나타내는 왕명이라 할 것이다.

초고왕계인 비류왕은 고이왕계의 3대가 집권한 뒤에 즉위하였으므로 그는 구수왕의 아들이 아닌 손자, 또는 보다 먼 후손이 될 것이다.

 

백제 12대 계왕 (재위 344년 ~ 346년)

성은 부여, 분서왕의 장남이다. 분서왕이 죽었을 때 나이가 어렸으므로 비류왕이 왕위에 올랐으며, 초고왕의 후손인 비류왕과는 왕실 내에서 서로 다른 지파였다.

그리고 비류왕의 즉위는 분서왕이 낙랑의 자객에게 피살된 상태에서 이루어졌으며, 그 뒤에는 고이왕계가 몰락하고, 초고왕계가 집권하는 왕실지파간의 세력교체가 있었다. 그 사이에 재위한 계왕의 통치기간은 2년 정도에 불과하였다.

이러한 사실들은 경쟁세력들과의 관계에서 계왕의 즉위나 집권이 순탄하지 않았음을 암시해준다.

 

백제 13대 근초고왕 = 여구, 조고왕, 초고왕, 속고왕 (재위 346년 ~ 375년)

근초고왕은 백제가 차츰 국가로서의 면모를 갖출 무렵 비류왕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체격도 아주 크고 용감했기 때문에 둘째 아들이었지만, 차기 왕으로 지목되어 346년 계왕의 뒤를 이어 왕이 되었다.

고구려의 광개토왕에 비길 만한 정복군주로 평가받고 있으며, 남쪽으로는 마한을 정복하여 백제의 영토를 전라도 지역까지 확장하고 북쪽으로는 평양 근처까지 진격하여 고구려의 고국원왕을 전사시켰다.

즉위한 뒤 왕권의 강화와 확립에 주력하여 왕위계승에 있어서 초고왕계의 계승권을 확고히 하였다.

또, 진씨 가문에서 왕비를 맞아들여 왕실을 지지하는 배경세력으로 삼았다.

그리고 지방에 대한 통제를 보다 효율적으로 하기 위해 영역을 분정하여 지방통치조직을 만들고 지방관을 파견하였다.

이로써 왕은 중앙집권화를 보다 확고히 할 수 있었다.

한편, 근초고왕은 왕권확립을 바탕으로 하여 사방으로 정복활동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정복활동을 살펴보면, 남으로는 영산강유역을 중심으로 백제의 세력권에서 이탈해 있던 마한의 잔여세력을 경략, 복속시킴으로써 전라도지역 모두를 지배영역으로 확보하였다.

그리고 낙동강 서쪽에 위치한 가야세력에도 손을 뻗쳐 이들을 부용하게 함으로써 영향권내에 넣었다.

이렇게 남방지역의 평정이 일단락된 후 북방으로의 진출을 도모하였다.

이러한 북진은 당시 남진정책을 추구하고 있던 고구려와의 대립을 불가피하게 하였다.

양국의 군사적 충돌은 369년 치양성(황해도 배천)싸움에서부터 비롯되었으며, 그 절정은 371년에 벌어진 평양성싸움이었다.

이 싸움에서 태자와 더불어 정기 3만을 거느리고 평양성을 공격하여 마침내 고구려의 고국원왕을 전사시키고 대방고지까지 차지하는 개가를 올렸다.

이리하여 백제는 사상최대의 영역을 차지하게 되었다.

또 근초고왕은 정복활동과 더불어 대외활동도 활발히 전개하였다.

우선 고구려에 대항하기 위해 신라와 동맹관계를 강화함으로써 한반도에서의 힘의 균형을 이룩하였으며, 중국의 동진과도 외교관계를 수립하여 동진으로부터 ‘영동장군영낙랑태수’에 책봉되기도 하였다.

한편, 중국이 호족의 침입으로 분열된 시기를 이용, 요서지방으로 진출하여 백제군을 설치하였다.

백제의 요서지역 진출은 요동지역으로 진출하여오는 고구려세력을 견제함과 동시에 상업적인 측면에서의 무역기지의 확보라는 의미도 있었다.

이와 더불어 일본열도방면으로도 활발히 진출하여 백제계통의 세력들과 긴밀한 관계를 가졌다.

백제와 일본열도의 세력과의 관계에 대한 물적 증거로는 일본의 이소노가미신궁에 간직되어온 ‘칠지도’가 있다.

이 칠지도는 당대의 금석문자료로서 칼에 새겨진 명문)의 내용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설이 분분하지만

그 내용의 핵심은 이 칠지도가 근초고왕 때에 만들어졌고 백제의 후왕인 왜왕에게 하사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또, 한편으로는 백제가 위치한 지정학적인 유리한 조건을 이용하여 고대 상업 활동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한대 이래 중국 황해연안에서 한반도의 서남해안으로, 다시 일본열도로 이어지는 해상교통로는 한족의 동방침입과 동시에

고대 상업로로서도 중요한 길이었다. 그런데 낙랑군, 대방군이 멸망되고 북중국에는 수로에 익숙하지 못한 호족이 들어서게 되자 이 전통적인 해상교통로와 상업로는 백제가 계승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백제는 요서지역에 설치한 무역기지와 한반도와 일본지역에 자리한 백제계 세력들을 연결하여 고대 상업망을

형성함으로써 무역의 중심구실을 하게 되었다.

대방지역을 점령하면서 중국계 사람들을 포섭하여 백제문화의 질을 높였고 나아가 일본열도에 새로운 문물을 전수하여주었다.

그 좋은 예로서는 왕인아직기 등을 일본에 보내어 《천자문》과 《논어》를 전해줌으로써 일본에 유학사상을 일으킨 것을 들 수 있다. 이처럼 지배영역의 확대와 통치조직의 정비를 통하여 왕권이 확립되고

문화가 발전하게 되자, 이와 같은 신기운을 배경으로 박사 고흥으로 하여금 ‘서기’라는 국사책을 편찬하게 하였다.

‘서기’의 편찬은 왕실중심의 계보정리와 더불어 왕실전통의 유구성과 신성성을 과시하고 왕권의 위엄을 돋보이게 하려는 데서

취해진 조처였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하여 근초고왕대는 백제의 최대 전성기를 이룰 수 있었다.

 

아직기와 왕인

근초고왕 때는 백제가 융성하던 시대로 문화도 대단히 발달하였다.

이때 아직기가 근초고왕의 지시로 말 두필을 끌고 일본에 건너가서 왕에게 바친 뒤 말을 기르는 일을 맡아보다가,

그가 경서에 능통함을 안 일본 오진왕이 태자 토도치랑자의 스승으로 삼았다.

임기를 마치고 돌아올 때 왜왕이 그에게 “너의 나라에 너보다 나은 박사가 있느냐?”고 묻자,

그는 “왕인이라는 학자가 있는데 나보다 훌륭하다.”라고 왕인을 추천하니, 왕인은 ‘논어’ 10권, ‘천자문’ 1권을 가지고 일본에 건너가 일본왕의 태자 토도치랑자의 스승이 되었다.

그는 경서에 통달하였으므로 왕의 요청에 의해 군신들에게 경사(經史)를 가르쳤다.

그의 자손들은 대대로 가와치에 살면서 기록을 맡은 사가 되었으며, 일본조정에 봉사하여 일본고대문화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이후 백제로부터 일본으로 오경박사를 비롯하여 재봉녀, 직공, 야공, 양주자, 도공, 안공, 화원, 금공, 의사 등이 건너가서 백제문화를 일본에 전수해주어 일본의 고대문화 발달에 공헌하였다.

지금의 전라남도 영암군에는 왕인석상을 비롯하여 왕인이 독서하였다는 왕인책굴 등이 있으며, 무덤은 일본 대판과 경도의 중간지점인 히라카타에 있다.

고흥

백제의 박사로서 ‘서기’를 편찬하였는데, 고흥이 편찬한 ‘서기는 백제 최초의 역사서였다고 할 수 있다.

고흥이 ‘서기’를 편찬한 시기는 근초고왕 때였다. 이때 백제로서는 왕위계승이 초고왕계 중심으로 안정되고, 또 남북으로의 정복적인 팽창활동으로 영역의 확대와 왕권의 확립을 보아 중앙집권적 통치체제가 완비된 시기였다.

따라서, 이와 같은 시대적 상황과 분위기 속에서 고흥이 편찬한 ‘서기’는 왕권을 합리화하고 왕실의 계보를 문자로 기록하고

이를 신성화하며, 또 백제에 복속된 여러 부족의 신화와 전설을 왕실중심으로 통합, 정리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충청남도 논산에 가면 옛날에 '황산벌'이라고 불리던 곳이 있다.

지금은 벼가 무르익는 평화로운 들판이지만, 1340년 전 이곳 황산벌에는 신라와 백제가 최후의 결전을 벌였다. 신라군의 지휘관은 김유신, 백제군의 지휘관은 계백이었다. 둘 다 내로라하는 쟁쟁한 장수들이었다.

660년, 신라는 당나라와 손잡고 백제를 공격해 왔다.

당나라와 신라의 목표는 백제의 수도 사비성이었다. 사비성이 있던 곳이 지금의 부여이다. 당나라 군대는 바다를 건너 금강 기슭에 상륙했고, 신라군은 탄 헌을 지나 황산벌에 도착했다.

백제의 계백장군은 결사대 5천 명을 이끌고 신라군을 막으러 나갔다.

신라군은 백제군의 10배나 되는 5만 명이었다. 계백은 싸움터로 떠나기 전, 아내 와 자식을 불러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포로로 잡히면 적의 노비가 될 테니, 살아서 욕을 보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다."

계백은 칼을 들어 사랑하는 아내와 자식을 베었다. 자신이 살아 돌아올 수 없음은 물론이오, 백제가 승리할 수 없다는 것을 계백은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Posted by 원주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