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역사와 문화2013. 9. 14. 17:18

 

가야 4세기 모용계 선비족들의 가야 이동설의 뒷바침 유물?

김해 대성동 고분군에 대한 올해 제7차 발굴조사 결과

4세기 무렵 왕릉급으로 판단되는 대형 목곽묘 2기가 모습을 드러냈다.

목곽묘 유물 출토 모습. 통형동기와 철기류가 보인다.

대성동고분 9호분 선비족의 유물 정체

신라문무왕비문에 나타난 신라 김씨족의 정체가 흉노족이다.

김수로와 김알지 김씨들은 같은 흉노족 김일제의 후손들이다. 기원전후로 한반도로 내려왔었다. 대성동고분 91호분에 발견된 4세기 삼연 선비족의 동분,동원,마구와 말방울 소유자의 정체성에 주목이 간다. 즉 2차북방민족 선비족의가야 이동의 강력한 증거가 될 수 있다.

당시의중국 대륙은 어떠한정치적 상황인가를 알아야한다.

삼국시대(삼국지로 유명한 시대,조조(선비족),를 이은 서진시대를 마감하고 흉노.선비,갈,저.강족 등의 5호가 세운 16국 시대는 흉노의 맹주 유연이 산서성에 자립하고(304년) 그 아래 하북지방을 통일한 북위(439년)시대의 기간을 가리킨다.

 

 

이러한 16국 시대를 마감한 북위는 선비족의 탁발부였다. 선비족은 흉노왕국이 후한 초 남북으로 분열되어 쇠퇴한 뒤 나타난 북아시아의 패자가된 부족이다.

오환족과 함께 몽고의 시라무렌강 유역에서 일어난 몽골계의 유목민족으로 [사기]나 [한서]에 등장하는 동호족(東胡族)에 속한 민족이다.

이러한 선비족을 통일한 인물이 2세기 전반에 나타났는데 바로 단석괴(檀石槐)라는 영웅이다. 단석괴 사후 다시 분열한 선비족은 이후 모용부, 우문부, 단부, 탁발부 등이두각을 나타내고 있었다.

 

이 가운데 요녕성에 근거한 모용부가 화북에 침입하여 전연, 후연,서연, 남연 등을 세우고, 내몽고 성도인 호화토특호화호특(呼和浩特) 남쪽의 화림격이(和林格爾) 방면에 유목하고 있던 탁발부가 북위(北魏) 왕조를 수립하게 된다. 395년후연(선비족모용수)과 북위(선비족탁발규)는 전쟁에 돌입했다. 후연 모용수는 태자 모용보를 총사령관으로 보내 북위를 멸망시키려 들었다. 그러나 모용보는 오늘날 산시 다퉁 부근의 참합파에서 대패하여 수만명이 죽었고, 수만명이 투항했으며 태자 모용보는 몇천의 군대와 함께 달아났다. 이때 탁발규는 그가 투항한 후연군들을 한명도 남김없이 죽여버렸다.

 

다시 모용수가 직접 군대를 정비해 이듬해인 396년 3월 출정했다. 모용수가 평성으로 가던 도중에 참합파를 지나게 되었는데, 후연 병사들이 죽어 시체가 산을 이룬 참혹한 광경을 목격해야만 했다.

이미 70세의 나이가 있고 중병에 걸린 모용수는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그의 병이 위중해지자 병사들은 평성으로 향하지 못하고 중산으로 말머리를 돌렸다. 도중에 모용수는 그만 세상을 떠나고, 태자 모용보가 제위를 물려받았으니, 그가 혜민제이다.

모용수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탁발규는 두려워 않고 40만 대군을 풀어 전진하여 396년 후연의 수도 하북성의 중산에 입성하였다.

398년, 탁발규는 황제에 즉위하고 수도를 평성으로 정함으로써 북위를 연 개국황제가 되었다. 중국북방의 질서가 완성되었다.

 

후연 선비족의 중국에서의 몰락이 한반도 이동에 무게를 두고 싶다.가야 대성동고분과 부산 복천동고분군, 함안 아라가야 고분에서의 북위계통의 말(馬)찰갑출토, 신라 황남대총에 나타난 삼연의 말갖춤문화에 직접 영향을 끼친 것 같다.동호족(선비족)은 단군시대엔 한민족 연합 부족의 일원이었다.

 

부여족의 한반도와 왜의 이동설에 무게

 대성동고분 91호분의 선비족 계통의 유물들이다. 그들의 정체성에 대한 문제를 다루고 있었다. 탐색자들은 발해만 요양시 '라마동고분군'에서 출토된 묘제와 마구(말안장, 말에 관련된 장식물),및 동복이 선비족 (삼연)보다, 부여족에 가까웠다. 라마동고분군을 발굴한 텐리쿤교수(중국)는 '라마동고분군' 묘지는 부여족들의 무덤이라는 것이다.

 

박물관에서 살펴본 유물도 선비계통보다는 부여계통이 문양까지 대성동91호와 동일함을 화면에서 보여주었다.

라마동 묘제의 경우, 목곽묘로서 직사각형 형태로 관을 사용하지 않은 점도 선비족과는 다르며, 대성동 91호 묘제와 동일한 점이다.

말안장의 경우 사각형은 선비족인데 반해, 대성동고분군,라마동고분군은 타원형태로 동일하였다.

 

형질인류학분석법인 인골분석도 부여족(라마동고분군)과 대성동고분군은 동일인이었다.

선비족은 삼국지 조조와 같은 족속들이며 내몽고가 중심지였고, 이후 세력이 강하여 중원으로 이동하여 북위를 열었다. 삼연도 선비족계통이다.

 

전연이 부여를 공격(346년경), 부여인들이 한반도와 도왜(일본의로 이동)하였을 가능에 무게를 둔 학자도 있다.

대성동고분88호분 무덤에서 발견된 파형동기가 한무덤에서 12점 수습되었다. 일본에서는 여러무덤에서 총 10개에 해당되었다.

파형동기는 일본천황(왕)급 무덤에서 발견되는 귀한 물건이다. 대성동고분88호분은 일본천황급 묘지이다. 심지어 일본 측에선 일본 숭신천황의 무덤이라고 까지 말하는 학자도 있다(에가미-기마민족의 왜열도 이동설 주장)

발굴전에, 가야인의 정체에 대해서 부산항도일보(부산매일신문의 전신)에 연재 중, 파형동기 발견이 반드시 가야지역에서 나올 것을 예견한 적이 있었다.

 

북방기마민족의 이동 유물로 파악한 것이다. 지금은 일본학계와 한국 가야사 전공자들은 파형동기를 일본 교류의 유물로 파악하고 있는 점이 안타깝다. 오끼나와(류큐國)는 고대엔 일본과는 전혀 다른 나라였다.

 

3세기~4세기 왜와는 관련없는 점이다. 오히려 중국 남방과의 관련성이 있는 고대 국가였다. 류큐국은 에도막부 말기에 사스마번(큐슈)에 정복되어 일본으로 병합된다. 고려시대 삼별초들이 류큐국에 이동하여,상류층 역할을 맡았던 고고학적 유물이 발견되었다.

 

필자가 쓴 '신들의 이름/2009년/오늘/" 일본 응신천황은 부여국의 의라왕이었나? 에 기록한 [진서(晋書)]四夷傳.부여국과 [통전(通典)]邊防門.동이부여가 말해주는 다음과 같은 구절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역설하고 있다.

 

부여는 그 나라가 殷盛하고 부유하여, 先世 이래 일찍이 깨뜨려짐을 당한 적이 없었다.......태강(太康)6년(285년)에 이르러, 모용외(慕容외:선비족/晋의 장수)에게 공파(功破)되어, 그 나라의 왕인 의려(依慮)는 자살하고, 자제들은 옥저로 도망하여 생명을 보존하였다...... 다음 해에 부여 후왕 의라(依羅)가 감구솔견인(龕求率見人)을 보내어,옛 나라를 회복하려고 구원을 청하였다.......의라는 나라를 되찾았다........그 뒤에도 매양 모용외가 그 나라 사람들을 잡아다가 중국에 팔았기다. ......의라는 그 후 소식이 없어졌다.

 

이처럼 [진서]는 부여의 마지막 왕인 의려가 자살한 후 그 자제들이 옥저로 도주하여 생명을 보존했다는 비참한 종말을 이야기하고 있고, [통전]에서는 부여후왕 의라가 그 후 소식이 묘연(杳然)하다고 하였다. 부여가 이와 같이 하여 처음 망한 것은 서기285년이었다. 기록에서와 같이, 일단 나라를 회복했던 부여후왕 의라는 다시 모용외의 약탈로 더 이상 지탱하지 못하고 결국 유리한 것 같으며, 한반도를 거쳐 이후 도왜(왜국으로 건너감)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한편 왜국에서는 의라라는 성씨가 여러 갈래로 생겨나게 된다.

 

姓氏錄에서의 의라씨들은 개화천황의 후손이라거나, 혹은 饒速日(니기하야히)의 후손이라거나, 혹은 백제인의 후손이라한 것 등, 여러 갈래로 되어 있다. 위서(魏書)의 부여전에 보면, "부여에서는 소를 잘 길렀고, 명마가 나왔으며, 그 사람들은 거칠고 신체는 장대하고 성질이 강하고 용맹하면서도 근후했음을 알 수 있다. 말하자면, 북방의 대표적인 기마민족이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이러한 부여 후왕 의라와 그 세력은,비록 그 나라가 패망하여 일시 남의 땅에 피신했다 하더라도 식객노릇이나 하고 있지는 않았을 것이나, 그들이 한동안 한반도(김해 대성동고분지역) 땅에 머물렀을 것이라는고고학적인 유물이 대성동91호 발견되었기 때문에 이미 '신들의 이름'에서 편 학설이 강력한 설득력이 생긴 셈이다.

 

어쨌든, 결국 그들이 낙착한 곳은 왜지(倭地)였다고 보며, 부여씨인 백제왕은 차후 그들을 위하여 모든 지원을 제공했던 것임은 일본서기의 응신기가 잘 보여주고 있다.

 

천황재위 14년째(283년)에, 궁월군(弓月君:유츠키노키미)이 백제로부터 120현(縣)의 인민을 거느리고 응신조에 내귀(來歸)하는 [일본서기] 기록이 있다. 이 백제 120현은 한반도 백제가 아닌 요서지방의 백제계, 부여족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부여 후왕 의라의 도왜(渡倭)와 이보다 150년 뒤에 고구려의 광개토 호태왕이 동부여를 공벌(攻伐)한 사건, 그 7년 후에 연왕(燕王) 황(皇光)이 토벌한 부여, 또 문자왕 3년(494년)에 고구려에 [以國來降]한 부여 등의 사건등이 만주지역 부여에서 이뤄졌다.

진서를 검색하다, 선비족 모용황(燕王)이 조선공(朝鮮公:조선왕)에 봉해졌다는 기록(337년)이 머리에 남았다.(진서 권109)조선공(왕)이란 의문은 다음기회에넘긴다.

 

위의 랴오닝성 '라마동' 수백기의 고분군은 유물과 대성동 유물은 동일 족(부여족)의 유물이다. 선비족인 전연에게 침공당한 부여족 지역의 고분군이다. 부여족의 한반도 가야지역을 통한 도왜한 부여족이다. 그 세력들이 큐슈로 부터 정복한 응신천황이었다.(재야사학자 문정창 주장) 큐슈로 부터 기내지방으로 이동하여 세운 기마민족 세력들이었다. 대성동 88호분 무덤의 파형동기는 도왜의 이동 흔적이다.(신들의 이름/2009년/오늘/김인배,김문배 공저)

 

결정적인 증거로는 대성동고분91호에서 발견된 순장흔적, 선비족 청동분(대야),마구와 말방울은 정확하게 말하면, 선비족이 아닌 부여족의 유물임을 KBS 역스팀들이 밝혔다. 91호분에서 발견된 '사슴뿔로 만든 관의 장식'이다.

 

사슴뿔로 만든 관 장식-부여족이란 기록

응신천황의 난파조정(오사카조정)에 도래한 부여국인(夫餘國人)들과 髮長媛(발장원:고구려의 제12대 중천황의 부인)이 바다를 통해서 난파(오사카의 옛 이름)에 들어온다.

 

응신천황이 담로도에 사냥하려 가 있었다. 천황이 서쪽을 바라보니, 수십마리 사슴이 바다에 떠서 오고 있었다. 천황은 좌우에 이르기를, [저게 무슨 사슴인가? 넓은 바다에 떠서 많이도 오는구나]라고 말했다.

 

이것은 응신천황이 난파(나니와/오사카) 조정을 건설한 지 13년 만에 사슴,여우,너구리,담비 등의 가족옷을 입은 부여국의 구신(舊臣)들이 발장원(황후)를 데리고 부여의 후왕(後王:의라왕)인 응신천황을 찾아 난파조정에 이르렀음을 보여준 대목이다.

 

일본서기 기사와 동일한 기사가 [삼국사기]권 제 17(고구려본기 제 5)에 나온다.

이상과 같은 점으로 대성동고분군 91호분에서 발견된 부여동분,말장식,그리고 사슴뿔관장식은 부여족의 한반도 김해 이동과 도왜하여 그 곳에 응신천황이 된 부여집단 세력의 흔적을 잘 말해주고 있다.

 

오늘날 일본의 성곽들은 평지에 있다. 고구려 성은 산록을 이용한 성곽임에 반해, 부여는 평지에 해자를 둘러 목책등으로 수성하였다. 이 근원이 부여족들의 평지성곽 건설풍이다. 일본 하찌만궁(신사)는 대마도를 비롯해서 북큐슈 곳곳에 존재하고 있다. 그리고 기내지방으로 이동되어 있다. 그 주신이 응신천황이다. 부여족이 세운 하찌만궁, 그 세력들이 한반도에도 강력한 기마와 철갑을 앞세워 기존 가야세력과 혼재하며 존재하게 된다. 복천동고분 세력도 부여족이 남겨놓은 흔적들이 고분군에 남아 있을 것이다. 고분군 속에 여러 묘제들이 혼재한 까닭은 강력한 북방 세력들이 밀려와서 남겨놓은 역사적 유물인 셈이다.

 

 

Posted by 원주유
고구려 역사와 문화2013. 9. 14. 16:07

 

 

고구려왕 계보

 

해모수       유화부인

소서노      동명성왕    예씨부인

 

               유리명왕

비류 온조

1.동명성왕(재위BC37년~BC19년) : 고구려의 개국 시조이자 초대 군주이다.

휘는 주몽, 추모, 상해, 추몽, 중모, 도모 등이 있으며 동명왕, 동명제, 동명성제라고도 한다.

BC 37년, 나라를 세워 국호를 고구려라 하고, 성을 고라 하였다. (원래 성은 해이다.)

BC 36년, 비류국의 왕 송양의 항복을 받았고, BC 34년에는 성곽과 궁실을 건립하였으며, BC 33년 행인국을 정복하고, BC 28년 북옥저를 멸망시켰다.

2.유리왕(재위BC19~AD18) : 휘는 유리, 유류, 주류이고 유리명왕이라고도 하며 동명왕의 맏아들이다.

BC 19년, 부여로부터 아버지 동명왕을 찾아 고구려에 입국, 태자로 책립되고 동명왕에 이어 즉위하였다.

(동명성왕이 남긴 징표 부러진 칼 조각을 주춧돌에서 찾아냈다는 설화가 있다.)

BC 17년, 계비인 치희를 그리는 황조가를 지었다.

BC 9년, 고구려를 위협하던 선비족을 토벌하였다.

BC 6년, 부여의 대소왕이 고구려에 볼모를 요청하였고 유리왕은 부여의 강력한 국력 때문에 태자 도절을 인질로 보내려 하였으나, 도절이 두려워 가지 않았다. 이에 대소는 군사 5만여 명을 이끌고 고구려를 침공하였으나 폭설로 많은 군사를 잃고 퇴각하였다.

3년, 도읍을 홀본(졸본)에서 국내성으로 옮기고 위나암성을 쌓았다.

9년, 부여왕 대소가 고구려를 침략하겠다고 위협하자 왕자 무휼은 부여의 사신에게 부여의 내부 사정부터 잘 다스리라 충고하여 돌려보냈다.

13년, 부여가 침공해 오자 무휼은 매복작전을 펼쳐 부여군을 크게 격파하였고 그 후 군사 2만으로 서쪽의 양맥을 쳤으며 한나라 고구려현을 빼앗았다.

유리명왕은 6명의 아들이 있었으나, 첫째인 도절은 요절하였고, 둘째 해명은 황룡국왕이 선물한 활을 부러뜨린 일로 자살하였다. 그리하여 셋째인 무휼이 왕위를 이어받게 된다.

유리명왕 ??? 송양왕의 딸

도절 해명 갈사국왕녀?대무신왕?원비 여진 민중왕 재사?부여태후

호동 모본왕 태조왕 차대왕 신대왕

3.대무신왕(재위18년~44년) : 유리왕의 셋째 아들로 휘는 무휼이고 대해주류왕이라고도 불린다.

14년, 태자로 책봉되어 군국정사를 맡아보다가 유리왕이 죽은 뒤 즉위한다.

20년, 부여의 대소왕은 대무신왕에게 몸은 둘인데 머리는 하나인 붉은 까마귀를 보내어 "까마귀는 검은 법인데 이제 빛이 변하여 붉게 되었고, 또한 머리는 하나인데 몸이 둘이니, 이는 두 나라가 병합될 징조이다."라고 선전포고를 하였다. 이에 대무신왕은 "검은색은 북방의 색인데, 이제 변하여 남방의 색이 되었다. 또한 붉은 까마귀는 상서로운 것으로 그대가 이것을 얻었으나 가지지 못하고 내게 보냈으니 양국의 존망은 알 길이 없도다."라며 까마귀에 대한 해석을 달리하여 대소왕에게 전하였다.

22년, 부여 정벌을 감행, 동부여를 공격하여 대소왕을 죽이고, 고구려에 병합하였다.

26년, 개마국을 쳐서 복속시켰고 그 후 구다국의 항복을 받아내어 국토를 살수 이북까지 확대하였다.

한편 을두지, 송옥구 등의 인재를 등용하여 국사를 맡겨 내치를 다졌다.

28년, 한나라 요동 태수가 군사를 이끌고 침략하였는데 고구려군은 을두지의 진언을 따라 위나암성에서 수십 일 동안 농성하였다. 한군이 포위를 풀지 않자 을두지가 계책을 내기를 저들이 물이 고갈되기를 기다리고 있는 모양이니 연못에서 잉어를 잡아 적장에게 보내도록 하였다. 그러자 적장은 성 안에 물이 있으니 단시일에 점령하는 것이 어렵다고 판단하여 퇴각하였다

32년, 왕자 호동을 시켜 낙랑군을 정벌하게 하였으며, 37년 재차 공략하였다.

(삼국사기-호동왕자설화 : 어느 날 옥저로 사냥을 나갔다가 낙랑 태수 최리의 딸인 낙랑공주와 사랑하게 되었다. 이때 낙랑에는 적병의 침입을 저절로 알리는 자명고가 있어서 정벌하기가 어려웠는데 호동이 낙랑공주를 꾀어 자명고를 찢게 하고 군사를 이끌어 정벌하였다. 태수는 이 사실을 알고 딸을 죽인 후 항복하였으나, 낙랑을 정벌한 호동은 원비의 참소와 공주에 대한 사랑의 번민으로 자살한다.

일설에는 대무신왕이 낙랑을 멸하기 위해 호동을 최리의 딸과 정략혼인시키고, 그녀를 본국으로 돌려보내 북과 뿔피리를 파괴하게 하였다고도 한다.)

4.민중왕(재위44~48) : 이름은 해색주, 대무신왕의 동생으로 대무신왕이 죽자 태자 해우(모본왕)가 어리므로 대신 즉위하였다.

44년, 대사면령을 내렸으며, 45년에는 신하들에게 큰 연회를 베풀었다.

47년, 사냥을 나갔다가 민중원에 이르러 석굴을 발견하고 그곳에 자신을 장사지낼 것을 명하였다.

48년, 왕이 죽자 유언에 따라 석굴에 장사지내고 지명을 따서 왕명을 민중왕이라 하였다.

5.모본왕(재위48~53) : 대무신왕의 차남으로 이름은 해우, 해애루이다.

49년, 한나라의 북평, 어양, 상곡, 태원등을 공격하였으나, 요동태수의 제의로 화친을 맺었다.

이 해에는 폭풍이 불고 서리와 우박이 내리는 등 악천후가 있어 사신을 보내 굶주린 백성들을 진휼하였다.

모본왕은 원래 성품이 포악하고 정사를 돌보지 않아, 백성들의 원성을 들었다.

51년, 기록하기를 "왕이 날로 포악해져 앉을 때는 사람을 깔고 앉고 누울 때는 사람을 베개로 베어 사람이 혹시 움직이면 용서없이 죽였으며, 신하 중에서 간하는 자가 있으면 활을 쏘았다."고 하였다.

53년, 결국 신하에게 피살되었다.

6.태조왕(재위53년~146년) : 유리왕의 손자, 고추가 재사의 아들로 휘는 궁이고 국조왕이라고도 불린다.

모본왕이 죽은 후 추대를 받은 재사가 연로함을 이유로 왕위를 거절하여 아들인 궁이 7살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였고 태후가 수렴청정 하였다.

기록에 따르면 태조왕은 태어나면서부터 눈을 떠서 볼 수 있었고 어려서도 총명하였다고 한다.

55년, 후한의 침공에 대비하여 요서 지역에 10개 성을 쌓았다.

56년, 동옥저를 병합하여 동으로는 창해, 남으로는 살수에 이르게 하였으며, 68년에는 갈사국을 병합하였다.

70년, 관나부 패자 달가를 파견하여 조나를 병합하였고, 72년에는 환나부 패자 설유를 보내 주나를 병합한다.

이러한 주변 소국 정벌 활동은 중앙집권화의 흔적으로 보고 있다.

태조왕은 정치체제 확립에 힘써 고구려를 종래의 부족 국가적 형태에서 강력한 중앙집권국가로 끌어 올렸다.

또한 태조왕 때부터 계루부가 왕위를 계승하였으며, 이후 고구려 왕 세차의 확실한 연대가 시작됨으로 실질적인 국가로서의 면목을 갖추게 된다.

98년에는 책성을 순수, 102년에는 책성을 안무, 114년에는 남해를 순수하는 등 확장된 영역에 대한 중앙의 통제력을 강화하는 작업을 진행하였다.

105년, 요동군을 공격하여 약탈했으나, 109년과 111년에는 평화적인 외교를 펼쳤다.

118년, 예맥과 더불어 현도와 화려성을 공격하였다.

121년, 후한이 예맥을 공격하자 태조왕은 동생인 수성을 보내 막도록 하였는데 수성은 항복을 가장하여 적군을 속인 후 요지를 장악하였으며 몰래 요동과 현도를 공격하여 큰 전과를 올렸다.

또한 요동의 선비족과 더불어 요수현을 공격하여 요동태수를 살해하였다.

그 후 마한, 예맥과 함께 현도성을 공격하여 포위하였으나 부여와 한나라가 협공을 펼쳐 크게 패하였고, 122년에도 마한, 예맥과 함께 현도성을 쳤으나 부여의 방해로 패배하였다.

121년부터 태조왕은 수성에게 국정을 돌보도록 하였다.

122년, 후한과 화친하였으나 146년에 다시 전쟁이 벌어져 요동의 신안과 거향을 약탈하고 서안평을 공격하여 대방현령을 죽이고 낙랑태수의 처자를 생포하였다.

146년, 동생인 수성(차대왕)이 왕위를 탐내자 그에게 양위하고 별궁으로 은퇴하여 남은 여생을 보냈다.

태조왕은 119세 나이로 서거하여 한국 군주 중 가장 장수하였고, 또한 가장 오래 군림한(93년) 왕이다.

7.차대왕(재위146∼165) : 태조왕의 동생으로 휘는 수성이다.

태조왕 치세 후반부터 장군으로 활약하였고 태조왕을 대신하여 국정과 군사를 통괄하였다.

146년, 측근들의 부추김을 받아 쿠데타를 모의하였으나 태조왕이 먼저 선위하고 물러남으로 차대왕은 그해 76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차대왕은 사람됨이 용장하여 위엄이 있었으나 인자하지 못하였고 횡포와 학정을 일삼아 백성들의 원성을 들었다.

147년, 왕위 계승을 반대하던 우보 고복장을 죽이고, 국가의 주요 요직에 자신의 측근을 임명하였다.

148년, 태조왕의 태자 고막근을 죽인 후 왕권을 확립하였으나, 결국 폭정으로 인해 명림답부에게 살해되었다

8.신대왕(재위165년~179년) : 재사의 아들, 태조왕과 차대왕의 동생으로 휘는 백고, 백구이다.

둘째 형인 차대왕의 폭정을 피해 산골에 숨어 살다가 차대왕이 시해된 뒤 왕으로 추대받아 77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166년, 좌, 우보를 폐지하고 국상제를 도입하여 명림답부를 이에 임명, 패자의 벼슬을 더하여 내외병마를 맡기고 나라를 다스렸으며, 차대왕의 태자 추안을 양국군에 봉하는 등 정치적 안정을 꾀하였다.

168년, 한나라 현도군태수가 대군을 이끌고 침입해오자 스스로 항복하였으며, 이듬해에는 현도태수를 도와 부산의 도적을 토벌하였다.

172년, 한나라가 쳐들어오자 청야전술로 대응하여 한군이 굶주림에 지쳐 퇴각하자 신대왕은 명림답부를 보내 좌원에서 한군을 크게 격파하였다.

신대왕

?? 고국천왕?우씨왕후 발기 산상왕 계수

 

9.고국천왕(재위179~197) : 신대왕의 차남으로 이름은 남무, 국양왕이라고도 한다.

176년에 태자로 책봉되었고, 179년 신대왕이 죽은 뒤 대신들의 추대를 받아 즉위하였다.

고국천왕은 키가 9척이고 겉모습이 크고 위엄 있었다고 한다.

184년, 한나라 요동태수가 쳐들어와 동생 계수를 보내 막았으나 패배하자 왕이 직접 출병하여 대승하였다.

191년, 을파소를 국상으로 등용하여 현정을 베풀고 을파소를 천거한 안류를 대사자로 삼았다.

194년, 빈농이 늘어나고 귀족의 노예가 되는 자유민이 증가하자 진대법(3~7월에 곡식을 대여하여 10월에 환납하는 것)을 실시하였는데 이로써 빈농을 구제하고 귀족세력의 확대를 막아 왕권을 강화시켰다.

왕권이 강화되면서 왕위계승 방법이 형제상속에서 부자상속으로 바뀌게 된다.

10.산상왕(재위197년~227년) : 신대왕의 아들이자 고국천왕의 동생으로 휘는 연우, 이이모이다.

고국천왕이 아들이 없이 죽자 왕후 우씨의 지지를 받아 즉위하였는데 이후 우왕후는 산상왕의 아내가 되었다.

이것은 고구려의 형사취수 풍습이 남아있는 것으로 우씨의 권력 유지를 위한 것이기도 했다.

산상왕의 형이었던 발기는 자신이 왕위에 오르지 못한 것에 불만을 품고 군사를 동원하여 왕궁을 포위하였으나 3일 동안 산상왕이 농성하는 가운데 고구려 국내에서도 발기를 따르는 자가 없자 요동으로 망명하였다. 그 후 발기가 요동 태수에게 군사 3만명을 얻어 고구려에 쳐들어왔고 왕은 동생 계수로 하여금 이를 막게 했는데 이 싸움에서 발기는 패하자 자살하였다.

198년, 환도성을 쌓았고 207년 서울을 환도로 옮겼다.

208년, 제사에 쓸 돼지가 달아나자 제사 담당자는 돼지의 뒤를 쫓아 주통촌에 이르렀는데, 거기서 후녀라는 여인의 도움으로 돼지를 잡았다. 이 소식을 들은 산상왕은 후녀를 몰래 찾아가 하룻밤을 보냈고 왕후는 이를 알고 분노하여 그 후녀를 죽이려 하였으나 후녀가 산상왕의 아들을 잉태하여 죽이지 못하였다.

이후 후녀는 아들 교체를 낳아 소후로 봉해졌고 213년에는 후녀의 아들 교체가 태자에 책봉되었다.

217년, 한나라 평주의 하요가 백성 1000여 호를 거느리고 와서 항복하였는데 왕은 그들을 받아들여 지금의 중국 훈춘 지방인 책성에서 살도록 하였다.

우씨왕후 ?? 산상왕 ??? 후녀(소후)

동천왕

관나부인 ? 중천왕 ? 연씨왕후 예물 사구

서천왕 달가 일우 소발 공주

11.동천왕(재위227∼248) : 아명은 교체(교제에 쓸 돼지와 관련된 사건으로 태어났다는 의미), 휘는 우위거, 위궁(태어나면서부터 사물을 본 것이 태조왕 궁과 닮아서 붙여짐)이며 동양왕이라고도 한다.

성품이 너그럽고 어질어서 화를 내지 않았다고 한다.

213년, 태자로 책봉되어 227년에 왕위에 올랐는데 때는 중국의 위, 오, 촉 3국의 대립시기로 동천왕은 위와 우호관계를 유지하였다.

236년, 오나라 손권이 사신을 파견하여 화친을 청해왔으나 사신을 죽여 그 목을 보냈다.

238년, 위나라가 오나라 공손 연을 토벌할 때 동천왕은 군사 1000여명을 보내어 위를 도왔다.

그러나 공손연 세력이 멸망하고 위나라와 국경을 접하게 되자 고구려는 위나라로부터 압력을 받기 시작했다.

242년, 서안평, 구련성 지방을 선제 공격하였으나 유주자사 관구검의 반격으로 환도성이 함락되고, 북옥저로 피란하는 등 정복활동이 일시적으로 위축되었다.

247년, 환도성이 복구할 수 없을 만큼 파괴되어 평양성으로 일시 천도했다.

248년, 신라에 사신을 파견하여 화친을 맺었다.

(245년 신라와의 전쟁, 248년 신라와의 화친의 사실 여부는 의심받고 있다)

248년, 동천왕이 서거하였는데 나라 사람들이 슬퍼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는 자가 많았다고 한다.

12.중천왕(재위248년~270년) : 동천왕의 맏아들로 휘는 연불, 중양왕이라고도 한다.

243년, 태자가 되었고, 248년에 왕위에 올랐는데 동생 예물과 사구 등이 모반하였다가 처형되었다.

250년, 국상의 권한을 확대하여 수도와 지방의 군권까지 겸하게 하였다.

251년, 측실 관나부인이 왕후 연씨를 시기하여 모함을 하자 왕이 분노하여 관나부인을 가죽 주머니에 넣어 바다에 수장하는 처벌을 하였다.

254년, 음우를 국상으로 삼았으며, 255년에 왕자 약로를 태자로 삼았다.

259년, 위나라가 쳐들어 오자 왕이 기병 5천 명을 이끌고 양맥에서 싸워서 이들을 무찌르고 8천여 명을 목베었다.

13.서천왕(재위270년~292년) : 중천왕의 차남으로 이름은 약로, 약우이고 서양왕이라고도 한다

255년, 태자가 되었고 270년에 즉위하였다.

280년, 숙신이 쳐들어오자 동생 달가를 보내 이를 격퇴하게 했는데 달가는 단로성을 빼앗아 추장을 죽이고, 6백여 가구를 부여 남쪽으로 이주시켰으며 부락 예닐곱 곳을 복속시켰다. 서천왕은 달가를 안국군으로 삼아 군대를 지휘하게 하였고, 양맥과 숙신의 여러 부락을 통솔하게 하였다.

286년, 동생 일우와 소발이 반란을 획책하여 거짓으로 병을 칭하고 입조하지 않자 서천왕은 이들을 재상으로 삼는다고 속여 입조한 두 사람을 처형하였다.

서천왕은 276년, 288년 두 차례에 걸쳐 신성으로 순행하였는데 이는 신성이 서쪽 변경의 중요한 거점이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특히 288년의 순행은 3월에서 11월에 걸친 장기간의 순행이었다.

서천왕 ??? 우씨왕후(우수의 딸)

봉상왕 돌고

 

미천왕

14.봉상왕(재위292년~300년) : 이름은 상부, 삽시루이고 치갈왕이라고도 한다.

어려서부터 교만하고 방탕하며 의심과 시기심이 많았다.

292년, 왕위에 올랐는데 숙부인 달가가 백성들의 추앙을 받음을 미워하여 음모하여 살해하였다.

293년, 동생 돌고에게 역모죄를 씌워 자살하게 하였다.

명신 창조리를 국상에 등용하여 연나라 모용외의 침입을 격퇴하기도 하였으나, 차츰 사치와 방탕을 일삼게 되었다.

298년, 흉년이 들었으나 궁궐을 증축하는 공사를 강행하여 백성들의 원성이 높았다.

이때 봉상왕은 신하들의 간언을 듣지도 않고, 백성들을 살피지 않았다.

300년, 또 흉년이 들었으나 다시 궁궐을 증축하여 백성들이 흩어졌고 이에 국상 창조리가 왕에게 백성을 돌볼 것을 간언하였으나 봉상왕은 오히려 왕권의 지엄함을 역설하며 창조리를 위협하였다. 이에 창조리는 여러 신하들과 모의하여 봉상왕을 폐위하고 을불을 맞이하여 왕으로 삼았다.

봉상왕은 화를 면하지 못할 것을 알고 두 아들과 함께 목을 매 자결하였다.

15.미천왕(재위300년~331년) : 서천왕의 손자, 고추가 돌고의 아들이고 이름은 을불, 을불리, 우불로 호양왕이라고도 한다.

293년, 아버지 돌고가 큰아버지 봉상왕에게 반역으로 몰려 죽음을 당하자 도망쳐 신분을 숨기고 고용살이와 소금장수 등을 전전하였다.

300년, 국상 창조리가 을불을 찾아 모셨으며 봉상왕을 폐위한 뒤 왕으로 옹립되었다.

미천왕은 즉위초부터 중국 군현세력과 치열하게 대립하며 국토확장에 전력하였다.

302년, 군사 3만으로 현도군을 공격하여 적군 8000명을 사로잡았다.

311년, 요동 서안평을 점령하였으며 낙랑군, 대방군의 보급로를 끊는데 성공하였다.

313년, 낙랑군을 공략하여 적군 1000명을 사로잡았고 이로써 낙랑군은 멸망하였다.

위와같이 미천왕때에는 서안평을 확보, 낙랑군과 대방군 등을 정복하여 고조선의 옛 땅을 회복하였으며 대동강 유역을 차지하여 경제적인 자원도 풍부히 얻게 되었다. 또한 백제 등과 국경을 맞대게 되어 남쪽으로 진출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였다.

314년, 대방군을 정벌하여 영토로 삼고 중국 군현 세력을 축출하였으며 317년 다시 현도성을 공격하였다.

당시 요동지역을 지배해 오던 진의 통제력이 약해지면서 선비족의 일파인 모용부가 세력을 확대함에 따라 고구려는 영토 확장을 도모하는 과정에서 이들과 자주 충돌했다.

318년, 진의 평주 자사 최비등과 연합하여 모용부를 공격하고자 하였으나 실패하였으며 이후 모용부가 요동을 장악하면서 본격적인 대립이 시작되었다.

319년, 최비가 요동을 잃고 고구려로 도망쳐 왔으며 이에 미천왕은 군사를 일으켜 요동을 공격하였는데 모용외 역시 두 아들을 보내 침략해 왔다. 이에 미천왕이 휴전을 청하여 잠시 휴전이 성립되었다.

320년, 다시 요동을 침략하였으며 이후 일진일퇴를 거듭하였다.

미천왕

고국원왕 무

 

소수림왕 고국양왕

광개토대왕

장수왕

16.고국원양(재위 331년~371년) : 이름은 사유, 쇠이고 국강상왕이라고도 한다.

314년, 태자로 책봉되어 331년에 즉위한 뒤 평양성을 증축하였으며 국내성을 수리, 신성을 축성하는 등 변경의 방비를 갖추었다. 또한 전연을 견제하기 위해 336년, 343년에 걸쳐 동진에 사신을 파견하기도 하였다.

342년, 4만 대군을 이끈 모용 황이 고구려로 쳐들어왔는데 고구려군은 남쪽길에서 크게 패하여 환도성이 함락되고 왕은 피신하였으며 모후 주씨와 왕비는 포로로 납치되었다.

(전연군은 평탄한 북쪽길로 소수의 군대를 보내고 험난한 남쪽길로 대군을 보내는 기만전술을 폈는데 이에 속은 고구려군은 북쪽으로 무가 이끄는 정병 5만을 파견하고 남쪽은 왕이 직접 소수의 군대로 지켰었다. )

전연군은 퇴각하는 길에 미천왕릉을 파헤쳐 미천왕의 시신과 함께 5만명의 백성을 잡아갔다.

343년, 고국원왕은 동생 무를 연나라에 파견하여 많은 조공을 바쳐 미천왕의 시체와 왕비를 찾아왔으며 평양의 동황성으로 거처를 옮겼다.

355년, 다시 조공하여 왕모 주씨를 돌려받는데 성공하였다.

이후 전연은 전진의 공격을 받아 쇠퇴하였으며, 370년에 전진에 의해 멸망하였다.

이때 고국원왕은 고구려로 도망쳐온 태부 모용평을 체포하여 전진에 송환함으로써 전진과의 우호관계를 수립했다.

369년, 고국원왕은 2만 군대로 백제를 공격하였으나 패하였다,

371년, 다시 백제를 공격하였으나 패하였고 그후 백제 근초고왕이 평양으로 공격해왔는데 고국원양은 이를 막다가 유시에 맞아 사망하였다.

17.소수림왕(재위371년~384년) : 이름은 구부이고 소해주류왕, 해미류왕이라고도 한다.

355년에 태자가 되었고 371년 고국원양이 전사하자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당시 국왕이 전사한 상황에서 국가의 체제 정비의 필요성이 대두되고 넓은 영토와 주민들을 체계적으로 통치할 제도의 정비가 요구되던 시기였으므로 소수림왕은 새로운 체제로 국가를 정비해 나갔다.

372년, 전진 왕이 보낸 승려 순도가 와서 불상과 경문을 전함으로써 최초로 고구려에 불교가 전래되었으며 곧 불교는 호국불교, 현세구복적인 불교로 신앙되고 발전되었다.

(불교를 도입한 이유는 전진과 평화적 관계를 수립하고자 한 것과 호국사상의 필요성 때문이다)

또한 유교교육기관인 태학을 세워 유교적 정치이념에 충실하고 중앙집권적 정치제도에 적합한 관리를 양성하였으며 민간에서는 각처에 경당을 세워 미혼의 자제들에게 독서와 궁술을 익히게 하였다. 그리하여 유교의 경전이나, 사기, 한서 등의 사서가 읽혀졌고 옥편, 자통과 같은 사전류가 유포되었으며, 특히 지식인 사이에는 중국의 문선 같은 문학서가 많이 읽혔다.

373년, 처음으로 율령을 반포하여 유학적 통치 이념 아래 고대 율령국가 체제를 구축하여 중앙집권적 고대국가로 발돋음 할수 있었고 이러한 소수림왕의 체제정비 시책들을 기반으로 고구려는 5세기에 전성기를 누렸다.

374년, 아도가 전진에서 건너와 불도를 전하였다. 이에 소수림왕은 초문사와 이불란사를 창건하여 순도와 아도를 기거하게 하는 등 불교의 수용 및 보급에 노력하였다.

375~377년에 걸쳐서는 백제의 수곡성을 빼앗고 3만대군의 백제군 침공을 물리치고 백제의 북변을 역습하는 등 백제와의 충돌이 계속되었다.

378년, 극심한 가뭄이 든 상태에서 거란의 침략을 받아 8개의 부락을 빼앗겼다.

18.고국양왕(재위384년~392년) : 고국원왕의 차남으로 이름은 이련, 어지지이고 국양왕이라고도 불린다.

385년, 군사 4만 명으로 후연의 요동을 공격하여 요동 및 현도를 점령하였다가 다시 빼앗겼다.

백제와도 치열하게 전쟁을 벌였는데 고국양왕은 백제를 정벌하여 국토를 넓히는데 힘썼다.

386년, 백제를 공격하였으며, 389년과 390년에는 백제의 침입을 받기도 하였다.

392년, 백제를 견제하기 위해 신라와 우호관계를 맺었다.

또한 불교를 장려하여 문화를 발전시켰으며 나라의 사직을 세우고 종묘를 수리하여 국가체제 확립에도 이바지하였다.

19.광개토대왕(재위392년~413년) : 이름은 담덕, 안이고 시호는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 국강상광개토지호태왕, 국강상광개토지호태성왕 등이 전해지며, 이를 줄여서 광개토대왕, 광개토태왕이라 부르기도 한다.

생존시 칭호는 영락대왕이였는데 영락이란 연호는 한국에서 사용된 최초의 연호였으며, 중국과 일본 등지에는 호태왕으로 알려져 있다.

386년, 태자로 책봉되었고 392년 즉위한 직후부터 백제와의 전쟁에 주력하였다.

그 해에 백제를 공격하여 석현성 등 10개 성을 함락하였고, 백제 북방의 중요한 요충지였던 관미성을 점령하였다.

또한 거란을 공격하여 500여 명을 노획하고 거란에 노획되었던 고구려인 1만여 명을 되찾아왔다.

백제는 빼앗긴 성을 회복하기 위해 계속해서 고구려를 공격하였다.

광개토왕은 백제의 공격을 393년에는 관미성, 394년에는 수곡성, 395년에는 패수에서 격퇴하였으며, 394년에 백제를 방비하기 위해 남쪽 변경에 7개 성을 쌓았다.

또한 평양을 크게 중시하여 393년에 9개의 절을 평양에 창건하고 399년에는 왕이 직접 평양에 행차하기도 하였다.

395년, 비려(거란일파)를 공격하여 염수 일대의 3개 부락과 600~700개 영을 격파하고 많은 가축을 노획하였다.

396년, 친히 수군을 거느리고 백제를 정벌하여 아리수 이북의 58개 성, 700여 개 촌락을 공략하고 위례성을 포위하자 이에 백제 아신왕이 항복하여 아신왕의 동생과 백제의 대신 10명을 인질로 받아 개선하였다.

이리하여 고구려는 한강 이북과 예성강 이동의 땅을 차지하게 된다.

398년, 숙신을 정벌하여 복속시켰다.

400년, 백제, 왜의 연합군이 신라에 침입하자 고구려와 동맹관계에 있던 신라 내물왕은 평양으로 사신을 보내 구원을 청하였다. 이에 광개토왕은 5만의 원군을 보내어 왜군을 물리치고 신라를 속국으로 삼았다.

같은해, 고구려와 우호관계를 유지하던 후연이 신성과 남소성을 함락시키고 700여 리의 땅을 탈취하였다.

402년, 광개토왕은 숙군성을 공격하였고 404년에도 후연을 공격하여 보복전을 펼쳤다. 이 과정에서 고구려는 요동성을 비롯한 요동 지역을 장악하였으며 이를 회복하기 위해 쳐들어온 후연군을 405년 요동성, 406년 목저성에서 격파하여 요동 장악을 확고히 하였다. 또한 후연을 견제하기 위하여 남연과 우호관계를 맺기도 하였다.

407년, 백제를 대대적으로 공격하여 6개 성을 점령하고 막대한 전리품을 노획하였다.

408년, 후연이 멸망하고 고구려계인 고운이 북연을 건국하자 우호관계를 맺어 서쪽 국경을 안정시켰다.

409년, 나라 동쪽에 독산성 등 6개 성을 쌓고 평양의 민호를 옮겨 살게 하였다.

410년, 동부여를 정벌하여 64성을 공파함으로써 동부여가 고구려의 판도 안에 들게 되었다.

위의 광개토왕의 정복활동을 다시 요약하자면, 서쪽으로 후연을 공격하여 요동을 모두 차지하고 요서의 일부 또한 확보하였으며, 북연과 친선관계를 수립하였고 북쪽으로는 부여와 숙신, 비려를 복속시켰으며, 남쪽으로는 백제를 쳐서 한강 이북을 빼앗아 위축시키고, 왜와 가야의 침공을 계기로 신라를 보호국화하는 한편 바다를 건너 침공해 온 왜를 섬멸하였다. 또한 가야를 공격하여 전기 가야 연맹을 해체시키기에 이르렀으며 동으로는 읍루를 정벌하였고, 동예를 완전히 병합하는 등 소수림왕의 정치적 안정을 기반으로 최대의 영토를 확장한 정복 군주이다.

광개토왕은 역대 왕릉의 정비에 힘써 수묘인 제도를 정비하고 실시할 것을 장수왕에게 유언하였다.

이러한 내치로 광개토왕릉비에는 "나라가 부강하고 백성이 편안하였으며 오곡이 풍성하게 익었다"라 칭송하는 기록이 남겨졌다.

20.장수왕(재위413년~491년) : 휘는 거련이고 100년 가까이 살았었다고 해서 장수왕이라는 시호가 바쳐졌다.

모습이 괴걸하고 지기가 호매한 대장부로 79년 동안 재위하였고 99세의 나이로 서거하였다.

409년, 왕태자에 책봉, 413년에 광개토대왕이 죽자 20살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으며 그해 동진과 국교를 맺었다.

427년, 내부적으로 왕권을 위상을 높여 귀족세력을 약화시키고 외부적으로 남진정책을 효율적으로 운영하기 위하여 수도를 평양으로 옮겼다.

고구려가 내부를 안정시키며 국제 정세를 관망하고 있는 동안 중국 대륙은 세력 다툼을 벌이며 새로운 형국으로 치달았다. 이들 나라의 패권 다툼 중에서 북위와 북연의 싸움이 고구려에 직접 영향을 끼쳤다. 장수왕은 외교관계를 안정시키기 위해 중국의 진, 송, 위 등과 사신을 교환하여 국교를 맺었으며 북연을 견제하였다.

430년, 북연왕 풍발이 병사하자 왕위다툼이 일어났고 결국 풍발의 아우 풍홍이 조카들을 제거하고 왕으로 등극하였다. 그러나 왕위 다툼은 조정을 동요케 해 국가 전체의 위기로 이어졌고, 북위의 침략을 용이하게 하였다.

435년, 북위의 기세로 북연은 몰락을 눈앞에 두고 있었고 이에 풍홍은 고구려에 밀사를 보내 후에 자신이 의탁할 수 있도록 요청했다.

436년, 북위는 대군을 동원하여 북연을 공격하였고, 풍홍은 급히 고구려에 밀사를 보내 도움을 청했다.

이에 장수왕은 갈로와 맹광에게 수만의 군사를 내주어 풍홍을 맞이해오도록 하였으며 후에 북위는 풍홍을 자신들에게 압송할 것을 요청했으나 장수왕은 이를 거절하였다. 하지만 환영연에서 풍홍이 고구려를 업신여기는 행동을 보여 장수왕은 분노하였고 풍홍도 장수왕에게 신하 대우를 받자 이에 분노하였다.

438년, 장수왕은 풍홍을 평곽으로 가게 했다가 다시 북풍에 머물도록 하였다. 또한 풍홍의 시종을 빼앗고, 태자를 볼모로 잡았는데 이에 풍홍은 분개하여 송나라에 사신을 보내 자신을 받아달라고 요청했다. 송의 유유는 고구려에 풍홍을 넘겨줄 것을 요청했으나 장수왕은 손수와 고구로 하여금 풍홍과 그의 가족들을 죽이라고 명했다. 결국 북풍에서 풍홍과 그의 가족 10여 명은 참살당하였으나 송의 사신 왕백구가 풍홍의 군사 7천여 명을 이끌고 손수와 고구가 이끄는 고구려군을 습격하는 바람에 고구는 죽고 손수는 생포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장수왕은 즉시 대군을 동원하여 왕백구를 사로잡아 송으로 압송시켰다. 이에 송은 고구려의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왕백구를 감옥에 가뒀다가 고구려의 눈을 피해 석방하였다.

440년, 신라가 고구려의 변경을 공격하여 변방 장수를 죽이는 사건이 발생했는데 이에 고구려가 군사적 대응을 검토하자 다급해진 신라는 사신을 보내 고구려에 사죄하였다. 이후 고구려와 신라는 한동안 평화를 유지하였다.

한편 백제와 신라는 고구려의 침공에 대비하여 이미 나제동맹을 맺고 있었는데 시간이 갈수록 이들 동맹관계가 더욱 강화되었다.

454년, 장수왕은 군사를 동원하여 신라의 북쪽 변경을 공격하고, 이듬해는 백제를 공격했다. 이에 신라와 백제가 동맹약조에 따라 연합군을 형성했고, 고구려는 나제연합군에 밀려 한동안 양국에 대한 공격을 중지하였다.

468년, 장수왕은 말갈 군사 1만을 동원하여 신라의 실직주 성을 빼앗았는데 이때부터 고구려와 나제연합군의 치열한 전쟁이 이어졌다.

469년, 백제가 군사를 동원하여 고구려의 남쪽 변경을 공격했고, 또한 북위에 사신을 보내 고구려 공격에 대한 군사 원조를 요청하였으나 북위는 이 사실을 고구려에 알려주었다.

장수왕은 승려 도림을 백제에 잠입시켰다. 도림은 백제의 국고와 민력을 소모시키기 위해 개로왕을 충돌질하여 대대적인 토목공사를 벌이도록 했고 백제의 경제적 혼란을 일으켰다.

475년, 장수왕은 대군을 거느리고 백제를 침입하여 수도 한성을 무너뜨리고 개로왕을 죽여 소수림왕 이래 국가의 숙원 사업이던 고국원왕에 대한 원수를 갚았다.

480년, 말갈과 함께 신라의 북변을 쳐 고명성 등 7성을 점령하였고 미질부까지 진군하였다.

이로써 고구려의 영토는 점점 확장되어 남쪽은 아산만에서 죽령에 이르고, 서북쪽은 요하에서 만주의 대부분을 포함한 큰 나라를 건설하여 전성기를 이루었다.

또한 종전의 부족연맹제도를 지방행정제도로 고쳐 5부를 신설하는 등 민정에도 개혁을 단행하였다.

장수왕

조다 승천

문자왕

안장왕 안원왕

양원왕

평원왕

21.문자왕(재위492년~519년) : 장수왕의 손자, 고추대가 조다의 아들이며 휘는 나운이고 문자명왕, 명치호왕이라고도 한다. 문자명왕 때 고구려 역사상 가장 큰 영토를 보유하였다고 한다

492년, 아버지가 일찍 죽었으므로 그가 장수왕의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당시 고구려는 백제와 신라의 연합작전으로 일진일퇴를 거듭 하였다.

494년, 부여가 항복하여 고구려에 완전 복속되었고, 신라군과 살수에서 전투가 벌어졌는데 신라가 패하여 견아성으로 들어가 농성하자 이를 포위하였으나, 백제가 3천 명의 구원군을 보내 공격해서 후퇴하였다.

495년, 백제의 치양성을 포위하였으나, 신라가 장군 덕지를 보내서 백제를 구원하므로 물러났다.

496년, 신라의 우산성을 공격하여 패하였으나 이듬해 다시 우산성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507년, 장수 고노를 시켜서 말갈군과 함께 백제의 한성을 공격하려 하였으나, 횡악과 싸우다가 물러났다.

512년, 백제를 침략하여 가불, 원산 두 성을 함락시키고, 포로 1천여 명을 사로잡았다.

전체적으로 보면, 광개토왕 이래 세력이 강해지기 시작하여 장수왕을 거쳐 문자왕에 이르는 동안 판도가 넓어지고, 세력은 더욱 강성해져 대국으로 발전하였다

22.안장왕(재위519년~531년) : 휘는 흥안이고, 문자왕의 맏아들이다.

498년, 태자가 되었고 519년에 문자명왕이 죽자 즉위하였다.

523년, 군사를 보내 백제를 침공하였다.

529년, 오곡에서 백제와 싸워서 이기고 2천여 명을 포로로 잡았다.

23.안원왕(재위531년~545년) : 휘는 보연이고 곡향강상왕, 향강상왕, 안강상왕이라고도 부른다.

안장왕의 동생으로 형의 사랑을 받았는데 후사 없이 죽은 형의 뒤를 이어 왕이 되었다.

그는 키가 7척 5촌이며 도량이 넓었다고 한다.

534년, 북위가 동위와 서위로 분열되자 동위와 양과의 양면외교를 적극 전개하여 안정을 유지하였다.

536년, 봄과 여름에 크게 가물었으므로 사신들을 보내 굶주린 백성들을 위무하고 구제하였다.

540년, 백제가 우산성을 포위하였으나 기병 5천 명을 보내 물리쳤다.

당시 홍수와 지진, 전염병, 가뭄, 황충, 기근, 태풍 등의 재난이 계속되어 어려웠다

542년, 음력 3월에는 바람이 크게 불어 나무가 뽑히고 기왓장이 날아갔고 음력 4월에는 우박이 내렸다고 한다.

왕의 후사를 둘러싼 세력다툼으로 사회가 동요되는 가운데 추군과 세군의 무력충돌 속에서 죽음을 맞았다.

24.양원왕(재위545년~559년) : 휘는 평성으로 안원왕의 태자이지만 안원왕 사후에 바로 즉위하지 못했다.

안원왕에게는 두 명의 아내가 있었는데, 서로 자신의 자식을 왕위에 올리고자 다툼이 있었고 무력 충돌로 번져서 평성 태자 쪽이 승리하여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당시 국상이였던 왕산악은 진의 칠현금을 개량하여 거문고를 만들었으며 100여 곡의 악곡을 지었다.

547년, 백암성을 고쳐 쌓고, 신성을 수리하여 전쟁을 대비하였다.

548년, 군사 6천 명으로 백제의 독산성을 공격하였으나, 신라의 장군 주진이 구원군을 이끌고 와서 실패하였다.

550년, 백제가 쳐들와 도살성이 함락되었다. 이에 백제 금현성을 공격하였으나, 이 틈을 노린 신라군에게 고구려 두 성을 함락되었다.

551년, 돌궐군이 쳐들어와서 신성을 포위하였으나 승리하지 못하자 백암성으로 옮겨 공격하였다. 이에 양원왕은 장군 고흘에게 군사 1만 명을 주어 싸우게 하여 1천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또한 신라가 다시 쳐들어와서 10개의 성이 함락되었다.

552년, 장안성을 쌓았다.

554년, 백제 웅천성을 공격하였으나 실패했다.

25.평원왕(재위559년~590년) : 휘는 양성이고 평강상호왕이라고도 한다.

557년, 태자로 책봉되었고 559년에 즉위하였다.

당시 수나라가 점차 고구려를 압박해왔고, 백제와 신라의 나제동맹이 깨져서 삼국이 서로 대립하던 시기였다.

평원왕은 중국의 진, 수, 북제, 후주 등 여러 나라와 친교를 맺었으며 장안성으로 천도하였다.

589년, 평원왕은 수나라가 쳐들어올 것에 대비하여 군사력을 강화시켰다.

평원왕

영양왕 영류왕 태양 평강공주

보장왕

26.영양왕(재위590년~618년) : 휘는 원, 대원이고 평양왕이라고도 한다.

565년, 태자로 책봉되었고, 590년 왕위에 올랐다.

당시 수나라가 중국 대륙을 통일하여 돌궐과 고구려에 압력을 가하고 있었다.

수나라는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 고구려의 영토를 염탐하였고, 그 후에도 몇 차례에 걸쳐 사신을 보내 지형을 알아보게 하였다. 마찬가지로 영양왕 역시 수나라에 사신을 보내 동태를 살폈다.

590년, 수나라는 고구려에게 조공을 바치라고 으름장을 놓았으나 수나라에 대해 경계를 게을리하지 않았던 고구려는 중국인 무기 기술자를 매수하여 병기들을 만들고 군량미를 저축하는 등 돌궐과도 동맹을 맺어 수나라와의 전쟁에 대비하였다.

598년, 수나라가 고구려를 공격하기 위해 비밀리에 군대를 양성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자 고구려는 말갈병 1만 명을 동원하여 요서 지역의 임유관을 선제 공격하였으나 점령하지는 못했다.

이에 자극을 받은 수나라 문제가 30만 대군을 동원하여 요동성을 공격하게 하였으나 고구려군은 미리 알아낸 보급선을 격파하여 군량 보급을 끊었고 때마침 장마가 닥쳐 수의 30만 대군은 결국 대패하여 병력을 대부분 잃고 퇴각하고 만다.

600년, 영양왕은 태학박사 이문진에게 명하여 유기 100권을 재편수, 신집 5권을 만들게 하였다.

또한 수나라에 사신을 보내 화친을 제의했고 수는 그 제의를 받아 들였다.

그 무렵 백제가 자신들이 길잡이 노릇을 하겠다며 다시금 수나라에게 고구려를 공격할 것을 요청했으나 수나라는 이를 거부하였고 이 소식을 접한 영양왕은 진노하여 곧바로 백제를 침공했다.

603년, 고구려는 신라의 북한산성을 공격하였고 이때 신라에서는 진평왕이 몸소 군사를 이끌고 대항하였는데 고구려군은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퇴각하였다.

607년, 백제의 송산성을 공격하였으나 함락시키지 못했고, 석두성을 공격하여 포로 3천 명을 사로잡아 끌고갔다.

608년, 신라의 변경을 습격하여 군사 8천명을 포로로 잡았고 우명산성을 함락시켜 신라의 북진을 차단하였다. 그리고 다시 여러 차례에 걸쳐 신라와 백제를 공격하여 양원왕 때 잃었던 아리수 이북의 영토를 거의 회복하였다.

610년, 일본에 승려 담징, 법정을 보내 종이, 먹의 기술을 전하였고 담징은 일본 호류사 금당내부의 벽화를 그렸다.

그 무렵 수나라의 황제로 등극한 양제는 돌궐에 압박을 가하여 돌궐 왕이 장안으로 입조토록 하였다.

이렇게 되자 수나라에 조공하지 않는 나라는 오로지 고구려밖에 남지 않았다. 수 양제는 여러 차례에 걸쳐 고구려에 조공을 바치라고 요구하였으나, 고구려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612년, 살수대첩 : 수나라 양제가 직접 113만 3800명 군사를 이끌고 고구려를 침공하였다.

군사는 하루 1군씩 보내 40일이 걸려 겨우 출발이 끝났으며 깃발은 960여리에 뻗쳤는데 수나라의 육군은 요동성으로, 수군은 대동강을 거슬러 평양성으로 향하였으나 두달이 지나도 함락시키지 못했다.

이에 양제는 30만 5천명의 별동부대를 조직하여 요동성을 포위 공격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자 압록강 서쪽에 집결시켜 단숨에 평양성을 공격하려 하였다. 이때 고구려 장수 을지문덕은 적의 허실을 보기 위해 거짓항복을 하여 적진에 들어갔고 그런 을지문덕을 적장 우중문은 사로잡고자 하였으나 유사룡의 말을 듣고 돌려보냈다.

돌아온 을지문덕은 청야 작전으로 대응하였고 적장 우중문은 그의 유도 작전에 속아 살수를 건너 평양성 북쪽 30여리 지점에까지 밀려왔다. 이에 을지문덕은 적장에게 5언시를 지어 보내 그의 어리석음을 비꼬았다.

神策究天文(신책구천문) 그대의 귀신같은 계략은 하늘의 이치를 다했고,

妙算窮地理(묘산궁지리) 그대의 기묘한 계락은 땅의 이치를 다하였네.

戰勝功旣高(전승공지고) 전쟁에 이겨서 그 공이 높으니,

知足願云止(지족원운지) 이제 만족할 줄 알고 그만 두기를 바라노라.

수나라군은 비로소 고구려에게 속은 줄 알고 황급히 퇴각하기 시작하였는데 을지문덕이 미리 살수에 둑을 쌓아 물을 얕게 하였고 이를 눈치채지 못한 수군이 살수를 반쯤 건넜을때 둑을 무너뜨렸다. 이에 수나라군은 물에 휩쓸리고 뒤이어 공격해 온 고구려 기병에 당해 수많은 사상자를 냈으며 생존자는 2700명에 불과했다고 전한다.

613년, 수 양제는 고구려를 재차 침공하였으나 요동성과 신성이 좀처럼 함락되지 않았고, 설상가상으로 본국에서 반란을 벌어져서 급히 퇴각하였다.

614년, 수 양제는 전국의 군사를 소집하여 다시 고구려 침공을 하려했으나 수나라 군대는 이미 전의를 상실한 상태였다. 이 사실을 간파한 영양왕은 화친을 제의했고, 수 양제는 화친 제의를 받아들였다.

이후로도 수 양제는 고구려 침략을 몇 번이나 계획했으나 중신들의 반대로 모두 실행되지 못했으며 무리한 잦은 대외 원정으로 경제가 피폐해지고 곳곳에서 반란이 끊이지 않는 등 수나라는 점차 몰락의 길을 걷고 있었다.

27.영류왕(재위618년~642년) : 평원왕의 차남, 영양왕의 이복동생이고, 휘는 건무, 성이다.

618년, 영양왕이 후사 없이 서거하자 왕위에 올랐다.

당시 중국 대륙에서는 수나라가 몰락하고 당나라가 건국되었다. 당나라는 각지에서 할거하는 군벌을 제거하는 등 통일 작업에 몰두하면서 외적으로는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 화친을 제의했다. 영류왕의 온건주의적 성향은 자연스럽게 친당 정책으로 이어졌고 두 나라는 우호적인 외교관계를 가졌는데 전쟁 당시 잡혀갔던 양국의 포로들을 교환하고 도교를 수입하는 등 여러 방면에서 교류하였다.

626년, 당 태종은 제위에 오르자마자 영토 확장 작업을 가속하였는데 고구려를 비롯한 백제, 신라 등 주변 나라들이 모두 당나라에 대한 경계를 강화하는 한편 당나라와 화친하였다.

631년, 영류왕은 당나라의 침략에 대비하기위해 부여성에서 발해에 이르는 천리장성을 축조하였다. 이 작업을 지휘하던 연태조가 축성 과정에서 지병으로 사망하자 아들 연개소문이 아버지 뒤를 이어 감독하면서 세력을 키웠다.

638년, 영류왕은 군사를 동원하여 신라의 북쪽 변경의 요지인 칠중성을 공격하였으나 패배하였다.

고구려가 신라와의 싸움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을 때 당나라는 동돌궐을 멸망시키고,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 왕태자를 장안에 입조시킬 것을 요구했다. 이 때문에 조정은 강경파와 온건파로 갈라져 치열한 논쟁을 벌였다.

(강경파는 왕태자를 장안에 보내지 말 것을 주장, 온건파는 왕태자를 보내 당과 관계를 더욱 돈독히 할것을 주장)

640년, 영류왕은 결국 온건파의 주장을 따라 왕태자를 장안에 보냈고 당 태종에게 서신을 보내 왕태자를 당나라의 국학에 입학시켜 줄 것을 청원하였다.

641년, 당 태종은 왕태자의 예방에 답하기 위해 직방낭중 진대덕을 고구려에 보내겠다는 서신을 보냈다. 진대덕은 고구려에 들어와 고구려의 지리를 자세히 관찰하는 것은 물론, 각 성에 배치된 군사력까지 면밀하게 조사하였다. 그후 당나라에 귀국한 진대덕은 태종에게 고구려를 칠 것을 간언하였다.

한편, 영류왕의 친당 정책으로 강경파의 불만은 점점 커져가고 있었는데 영류왕을 비롯한 온건파에서는 그러한 강경파의 불만을 무시했다. 급기야는 천리장성 축성 작업을 중단하자는 주장이 나왔고 천리장성을 쌓는 일을 감독하던 연개소문이 이에 강하게 반발하였다. 이에 영류왕과 온건파 대신들은 연개소문을 제거하려고 하였으나 영류왕이 자신을 죽이려고 한다는 것을 눈치챈 연개소문은 영류왕을 비롯한 온건파를 척결하려는 계획을 세운다.

642년, 연개소문은 천리장성으로 떠나는 열병식에 조정 신하들을 대거 초청한 뒤 모두 참살하였고 군사를 이끌고 왕궁으로 들이닥쳐 영류왕을 시해하였다. 태종은 영류왕이 죽었다는 전갈을 받고 곧바로 애도 의식을 거행하고 지절사를 고구려에 보내 조문하였다

28.보장왕(재위642년~668년) : 평원왕의 셋째 아들이자 영류왕의 동생인 태양의 맏아들로 휘는 장, 보장이다.

642년,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연개소문이 그를 새 왕으로 추대함에 따라 고구려의 마지막 왕이 되었다.

연개소문은 스스로 대막리지에 오른 후에 정권을 장악하였고, 보장왕은 그저 허수아비에 불과했다.

이에 따라 고구려에는 연개소문의 일인독재 체제가 성립되고, 이는 고구려의 멸망의 원인 가운데 하나가 된다.

643년,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도교를 구하여, 숙달 등 도사 8명과 함께 노자도덕경을 받아들였다.

한편, 신라에서는 백제의 공격으로 요지인 대야성(합천)을 빼앗기는 등 백제와의 공방전에서 점차 불리해져갔다.

신라의 선덕여왕은 고구려에 구원병을 요청하였으나 연개소문은 그 요청을 거절하였고 이에 신라는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백제와 고구려의 침략으로부터 도와 달라며 원군을 보내줄 것을 요청하였다.

당시 고구려 침략을 계획하고 있었던 당 태종은 흔쾌히 신라와 손을 잡게 된다.

고구려는 그들의 침략에 대비하기 위해 전국에서 군사를 모집하고, 변방의 성곽을 수리하며 군사 훈련을 하는 한편 당나라의 군대가 바다를 건너 평양성을 공격할 것을 염려하여 요동과 서해안 일대의 수군 경비를 강화하였다.

또한 백제와 손을 잡고 신라를 협공하였는데 당나라는 신라에 대한 공격을 멈추지 않으면 군사를 일으키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하지만 고구려는 과거에 신라에 빼앗긴 지역을 되찾기 전에는 전쟁을 멈추지 않겠다며 당나라의 요구를 거절하였다.

645년, 당 태종의 30만 군대가 고구려의 성 10여 개를 함락시키고 안시성으로 진격하였는데 연개소문은 고연수와 고혜진에게 15만의 군사를 주어 안시성을 지원하도록 하였다. 당 태종은 고연수에게 사람을 보내 신하의 예만 갖춘다면 빼앗은 영토를 모두 돌려주고 돌아가겠다고 회유했고 이에 고연수는 당 태종이 공격할 의사가 없다고 판단하고 싸움에 적극적이지 않았다. 태종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2만6천명의 기습병을 조직하여 고구려군을 급습하였고 그 과정에서 3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고연수와 고혜진은 직할부대 3만 6천 명과 함께 당나라에 투항하였고, 나머지 병력은 신성과 건안성으로 퇴각하였기때문에 안시성은 완전히 고립되었다.

그래서 당나라군이 안시성을 일제히 공격하였지만 성주 양만춘의 뛰어난 용병술에 힘입어 시간이 지날수록 안시성의 사기는 점차 올라가는 반면 당나라군은 사기가 저하되기 시작했다. 당 태종은 안시성보다 더 높은 토산을 쌓아 공격도 해보았으나 이 역시 실패로 돌아갔고 오히려 이 작전으로 많은 물량과 병력을 잃고 말았다.

당의 패배가 거듭되는 가운데 겨울이 다가와 당나라군은 추위와 배고픔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퇴각하였는데 퇴로에서 많은 동사자가 발생했으며, 이에 따라 군사들이 대거 몰살하는 상황에 처하기도 하였다.

당 태종은 패배를 설욕하기 위해 이후 몇 차례에 걸쳐 공방전을 벌였으나 싸우는 족족 퇴각하였다.

649년, 당태종은 고구려 정벌을 중지하라는 유시를 남기고 죽었고 이에 따라 두나라는 휴전 상태에 들어갔다.

그러나 고구려와 신라의 전쟁은 지속되었으며, 무열왕이 당나라에 사신을 급파하여 원군을 요청하자, 당나라는 군사를 내주어 고구려를 다시 공격하게 하였으나 패배하였다.

658년, 당 고종은 정명진과 중랑장 설인귀에게 군사를 내주어 다시 고구려를 침략하였으나 패하고 퇴각하였다.

661년, 백제를 멸망시킨 나당연합군은 그 여세를 몰아 고구려로 진격하였고 당 고종은 4만4천명의 병력을 징발하여 고구려의 변방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백제부흥군이 나당연합군의 후미를 치는 바람에 신라군이 다시 남진하여 백제 부흥군과 싸워야 했으며, 그 상황을 이용하여 고구려는 변방에 병력을 집결시켜 당나라군을 격퇴하였다.

이에 당나라군은 다시금 대군을 거느리고 평양성을 향해 진군하였으나 패하였고 당나라 조정에서는 고구려와 휴전해야 한다는 여론이 일어났으며, 당 고종은 일시적으로 고구려 공략을 중지하였다.

그해 당나라는 다시 고구려 정벌에 나섰는데 10만 대군의 당나라 함대가 대동강을 타고 평양성을 포위하여 치열한 공방전을 펼쳤고 서쪽에서는 당나라 육군이 압록강 일대를 향해 밀려왔다. 이에 연개소문은 맏아들 연남생에게 군사를 내주고 압록강 일대를 지키도록 하였으나 패퇴했다.

662년, 당나라군은 연개소문이 이끈 고구려군과의 사수 전투에서 패배하여 몰살되었으며 평양성을 공략하고 있던 당군대는 폭설이 내리는 바람에 황급히 퇴각하였다.

고구려는 당나라와 전투에서 많은 승리를 거두었지만 당이 신흥 대제국으로서 융성한 것과는 반대로 60여년에 걸친 수, 당과의 전쟁으로 국력은 쇠퇴해 가고 있었다. 백성의 생활은 파탄에 직면했고, 국가 재정은 탕진되었으며 동맹국 백제의 멸망과 고구려 지배층의 내분은 더욱 그 국력을 약화시키고 있었다.

666년, 연개소문이 죽자 그의 아들 연남생, 연남건, 연남산 사이에 막리지의 자리를 둘러싼 권력투쟁이 벌어졌다.

맏아들 연남생이 대막리지 직위를 이어받았지만, 연남건과 연남산은 형의 권력 독식에 불만을 품었다. 그래서 연남생이 변방을 순행하는 사이 왕명을 빙자하여 연남생의 측근을 없애고 연남생을 소환하려 하였고 이에 연남생은 아우들에게 쫓겨 국내성에 가서 당 고종에게 항복하였다.

그 후 보장왕은 연남건을 대막리지로 삼고 조정을 재편으나 이미 많은 신하가 제거되어 어수선하였고, 민심도 연남건 형제에게서 등을 돌렸다. 당 고종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연남생을 앞장세워 고구려를 재침략하도록 하였다.이렇게 되자 연개소문의 동생 연정토는 한반도 쪽의 12개 성을 가지고 신라에 투항해 버렸다.

668년, 당나라군의 대대적인 공격을 받아 여러 성과 마을이 함락되었고, 보장왕이 머무르던 평양성까지 함락되고 말았다. 보장왕은 항복을 선언하며 당나라로 끌려갔고 결국 고구려는 멸망하고 말았다.

고구려 멸망 이후 검모잠, 안승등의 고구려 부흥 운동이 지속되었으며, 안시성과 요동성 및 일부 요동의 성들은 671년까지 당나라에 항전하였다.

보장왕은 당 고종으로부터 벼슬을 하사받고, 그들이 평양에 설치한 안동도호부에 머물렀는데 고구려 유민의 부흥운동이 지속되자 당은 677년에 보장왕을 요동도독 조선군왕에 봉하고 요동에 머무르게 하여 고구려 유민을 무마하고자 하였다. 이때 그는 고구려의 재건을 노려 말갈족과 함께 군사를 일으키려다가 발각되어 681년에 양주에 유배되어 그곳에서 사망하였다.

 

 

 

 

Posted by 원주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