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역사와 문화2013. 9. 14. 13:02

 

 

신라왕의 계보에 대해 알아보자. 제6대왕부터 10대왕까지 입니다.

제6대 지마왕(이사금)

제5대 파사왕 - 사성부인 김씨
박씨, 생년 미상~134년
재위기간: 112년 10월~134년 8월, 총 21년 10개월
부인: 1명
자녀: 1녀
애례부인 김씨(마제갈문왕의 딸) - 내례부인(제8대 아달라왕의 왕비)

지마(혹은 지미)이사금은 파사왕의 적자로 사성부인 김씨 소생이다. 일찍이 태자에 책봉되었으며, 112년 10월에 부왕 파사왕이 죽자 왕위에 올랐다. 왕위에 오른 지마왕은 즉위 이듬해인 113년 2월에 대대적으로 조정을 개편했다. 창영을 이찬으로 임명하여 정사를 맡기고, 옥권을 파진찬으로, 신권은 일길찬으로, 순선을 급찬으로 삼았다.

즉위 4년인 115년 3월에 쏟아진 우박과 4월의 홍수로 신라사회가 혼란을 겪자, 115년 2월에 군대를 동원하여 신라 남쪽을 약탈하고 돌아갔다. 지마왕은 그해 7월에 자신이 친히 군대를 이끌고 황산하(낙동강 하류)를 건너 가야를 공격했는데, 가야의 복병에 걸려 패하고 간신히 퇴각했다. 이에 이듬해인 116년 8월에 다시 정예병력 1만을 직접 이끌고 정벌에 나서 공성전을 벌였지만, 결국 다시 물러났다. 이후 지마왕은 가야정벌을 포기했고, 가야 역시 신라의 대군을 의식하여 함부로 신라 땅을 넘보지 않았다. 재위 9년(120년) 3월에 서라벌에 전염병이 돌고, 민심이 흔들리자, 지마왕은 121년 정월에 익종을 이찬으로 삼고 혼련을 파진찬, 임권을 아찬으로 삼아 조정을 개편하는 한편, 2월에는 대증산성을 쌓아 왜군의 침입에 대비했다. 재위 12년(123년) 3월 지마왕은 왜와 강화를 맺었다. 고구려의 번성으로 흑룡강, 송화강 유역의 말갈은 모두 고구려에 예속되고 남쪽으로 밀려오면서 재위 14년(125년) 말갈군이 대령책(대관령)으로 쳐들어 왔다. 그해, 7월에 대령책을 습격하고 니하를 건너 또 침략해 왔다. 이에 지마이사금이 백제의 기루왕에게 원군을 청해 백제가 다섯 장수를 보내 격퇴하였다. 백제와 신라의 관계는 파사왕 26년(105년) 화친한 이후 지마, 일성 이사금 2대 동안 평화적이었다.

『삼국유사』에는 음질국(안강)과 압독국(지금의 경산)을 멸망시켰다고 하나 『삼국사기』에는 파사이사금 때의 기록으로 되어 있다. 지마왕의 말기에는 천재지변이나 화재가 계속 이어졌고 봄과 여름에 걸쳐 심한 가뭄이 지속되었다. 지마왕은 재위 23년(134년) 8월, 생을 마감했다. 능에 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제7대 일성왕(이사금)

제3대 유리왕 - 후비
박씨, 천일창. 생년 미상~154년
재위기간: 134년 8월~154년 2월. 총 19년 6개월
부인: 2명 이상
자녀: 2남 이상
왕비 박씨(지소례왕의 딸) - 제8대 아달라왕
마다오(왜의 단마국 출도 출신 태이의 딸) - 제조

일성이사금은 유리왕이 죽은 후 77년이나 지난 뒤에 왕위에 올랐는데, 이 때문에 그는 유리왕이 아들이 아니라 손자이거나 그 후대의 자손일 것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일성왕이 유리왕이 만년에 낳은 장자가 확실하다면 그는 여든이 다 된 나이에 왕위에 올랐다고 볼 수 있다.

40여년의 긴 망명생활 끝에 조카 지마왕이 후계자도 하나 얻지 못한 채 죽음을 앞두자, 서기 134년 8월 신라로 돌아와 제7대 왕으로 등극하였다.
왕위에 오른 일성은 즉위하자 죄인들을 사면하고, 시조묘에 제사를 올려 스스로의 위상을 세상에 알렸다. 조정을 새롭게 개편하기위해 웅선을 이찬에 임명하고 그로 하여금 내외병마사를 겸하게 하였으며, 근종을 일길찬에 임명하였다. 재위 4년(서기 137년)에 말갈이 국경을 침입하여 장령 지방의 방책 다섯 곳을 불태우고 돌아갔다. 이에 일성왕은 이듬해 7월에 알천 서쪽에서 대대적으로 군사를 사열하고 말갈의 재침에 대비하였다. 140년에는 장령에 목책을 세워 방비를 세우기도 했다. 일성왕은 138년 금성에 국가중대사를 회의하는 장소인 정사당을 설치하였으며, 144년에는 모든 주군이 제방을 수축하고 전야를 넓게 개간하도록 명하고 민간에서는 금은주옥의 사용을 금하였다. 146년 압독(지금의 경상북도 경산)이 모반하자 군사를 보내어 평정하였다. 148년에는 박아도를 봉하여 갈문왕을 삼았다. 하지만, 149년 11월에 금성에 전염병이 크게 돌아 많은 사람이 죽어 나가고, 이듬해엔 가뭄에 시달렸다. 설상가상으로 151년 2월에는 이찬 웅선이 죽었고, 3월에는 우박이 내려 농사를 완전히 망쳤다. 153년 10월에는 궁궐에 불이 나 대문이 불탔고, 혜성이 연이어 나타나 민심이 흉흉해졌다. 일성완은 154년 2월에 백 살에 가까운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제8대 아달라왕(이사금)

제7대 일성왕 - 왕비 박씨
박씨, 생년 미상~184년
재위기간: 154년 2월~184년 3월. 총 30년 1개월
부인: 1명
자녀: 없음
내례부인(제6대 지마왕의 딸)

아달라이사금은 일성왕의 적자이며, 지소례왕의 딸 박씨 소생이다. 그는 키가 7척이었으며, 풍채가 뛰어나고 얼굴이 기이하게 생겼다고 전한다. 즉위 초기엔 비교적 정치와 사회가 안정되어 재위 3년(156년) 4월에는 계립령(지금의 문경새재 동쪽고개)에 길을 뚫고, 재위 5년(158년) 3월에는 죽령(풍기 북쪽고개)을 개통하였다. 재위 4년(157년) 2월에는 감물(충북 괴산 감물면)과 마산(충남 보령의 남포면)에 처음으로 현을 두었고, 그해 3월에는 장령진을 순행했다.

재위 7년(160년) 4월에 폭우, 이듬해 7월 흉년으로 민심은 흉흉해지게 된다. 결국, 165년 10월에 아찬 길선이 모반했다가 발각되어 백제로 달아나는데, 아달라왕은 길선을 넘겨 달라고 요구했으나 백제 개루왕은 이를 거절한다. 분노한 아달라왕은 군대를 보내 백제의 성을 공격했으나 공성전을 벌이던 중 식량이 떨어,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하고 돌아오게 된다. 166년 백제 개루왕이 죽고 초고왕이 즉위하는데, 그는 167년 7월 신라 서쪽 변경의 두 성을 역습해 격파하고, 주민 천여 명을 잡아갔다. 갑작스런 백제의 급습으로 두 성을 격파 당하자, 아달라왕은 군사 2만 명과 8,000명의 기병을 동원하여 백제를 공격했다. 백제의 초고왕은 잡아갔던 주민을 돌려주며 강화를 청했다. 이때, 서북쪽으로의 영토개척을 이루는데, 이를 석씨세력의 남하로 간주하기도 한다. 이는 미추이사금의 아버지인 구도가 파진찬이 된 사실을 친석씨계의 부상으로 보는 견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 후, 재위 21년부터 31년 사망할 때까지 기록의 공백이 있어 왕실세력의 교체와 관련하여 주목을 요한다. 이 10여 동안 신라 사회엔 엄청난 동요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전염병이 돌고 가뭄이 시작되고 곳곳에서 반란이 일어나고, 굶주린 백성들은 유랑민으로 전락하게 된다. 왕족들 간에도 치열한 정권 다툼이 진행되어 아달라왕의 살해가능성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삼국사기』는 이 해로부터 10년간 아무 기록도 남기지 않다가 184년 3월에 아달라왕이 죽었다는 기록만 남기고 있다. 결국 아달라이사금은 아들이 없이 죽고, 석씨왕계가 즉위하게 되었다.

제9대 벌휴왕(이사금)

각간 구추(제4대 탈해왕의 아들) - 지진내례부인 김씨
석씨, 생년 미상~196년
재위기간: 184년 3월~196년 4월. 총 12년 1개월
부인: 1명
자녀: 2남
왕비(제6대 지마왕의 딸) - 골정(제12대 침해왕의 아버지), 이매(제10대 내해왕의 아버지)

벌휴(또는 발휘)이사금은 탈해왕이 만년에 낳은 아들인 각간 구추의 아들이며, 지마왕의 딸 내례부인 김씨 소생이다. 구추의 아들로 되어있으나, 연대상으로 탈해가 죽은 지 104년 만에 즉위한 것이므로 세대 간의 차이가 너무 심하다. 따라서 이것은 탈해 이후 석씨세력이 쇠퇴하여 그 기록이 제대로 남아 있지 않은 때문이거나, 벌휴계가 탈해의 후손이라고 억지로 끌어다 붙였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그것은 벌휴가 홍수-가뭄 및 그해의 풍흉을 미리 알았고 사람의 사정을 알아맞혀 성인이라 불린 데에서 시조적 성격이 농후하며, 『삼국사기』벌휴이사금 즉위 초 이외에 구추에 관한 기록이 없음에서도 짐작이 간다.

벌휴가 즉위한 것은 아달라이사금이 죽고 아들이 없으므로 나라사람들이 임금으로 세웠다고 한다. 이는 전투능력을 비롯한 문화수준에 있어서 우위를 가진 새로운 세력집단이 경주로 진출하여 종래의 지배층을 압도한 것으로 보아진다. 따라서 석씨왕계의 성립 이후 신라는 보다 급격한 영역확대를 실현시켰다.

185년 정월에 시조묘에 직접 제사를 지내고 죄수들을 사면함으로써 왕으로서 위엄을 갖추었다. 2월에는 파진찬 구도와 일길찬 구수혜가 좌우 군주가 되어 소문국(경북 의성)을 정벌하였는데, 군주라는 명칭을 사용한 것은 처음이다. 188년 백제가 모산성(전북 남원의 운봉)을 공격해 오자, 이에 벌휴왕은 파진찬 구도에게 군대를 안겨 방어하게 하였다. 구도에게 밀린 백제군은 189년 구양성(충북 옥천)을 공격해 와서 접전을 벌였다. 이 전투에서 백제군은 구도에게 병력 5백을 잃고 돌아가게 된다. 하지만, 190년 다시 원산향(지금의 예천군 용궁)을 함락하고 진격하여, 부곡성(경북 군위군 부계)을 포위하였다. 구도는 자신이 직접 기병 5백을 이끌고 나가 백제군을 급습하여 패퇴시켰으나, 백제군을 와산(충북 보은)까지 추격하던 중, 백제군의 계략에 말려들게 되어 패배하게 된다.

벌휴왕은 구도의 죄를 물어 부곡 성주로 강등시키고, 설지를 좌군주로 임명하여 파견하였다. 192년엔 3월에 석 자가 넘게 폭설이 내려 쌓였고, 5월에는 홍수가 나서 10여 군데의 산이 무너지는 천재가 있었다. 196년 3월에는 큰 가뭄이 들어 백성들을 괴롭혔고, 4월에는 대궐 남쪽의 거목이 벼락을 맞아 탔고, 금성 동문도 벼락을 맞는 등 불길한 자연재해들이 일어나게 된다.

196년, 벌휴왕은 생을 마감하게 되는데, 왕비가 누군인지는 알 수 없으나 어머니가 김씨인 점으로 보아, 이제 박씨계는 고립되고 석씨와 김씨와의 제휴시대를 맞게 된 것으로 보인다. 벌휴의 재위는 신라 왕조사이에 석씨 왕조 시대를 연 계기였다.

벌휴는 내례부인이 이끌고 있던 박씨 종실과 부인 김씨 집안의 후원을 받아 왕위에 올랐지만, 결과적으로 석씨 집안의 이름을 걸고 왕위에 올라, 자신의 후손에게 왕위를 물려줄 기반을 만들어 주게 되었다.

벌휴 이후에 내해(제10대), 조분(제11대), 첨해(제12대), 유례(제14대), 기림(제15대), 흘해(제16대)등이 모두 그의 후손이라는 점이 그를 증명해 준다. 석씨 왕실의 집권은 184년부터 356년까지 172년간 지속된다.

제10대 내해왕(이사금)

제9대 벌휴왕 - 왕비 - 차남 이매 - 내례부인(제8대 아달라왕의 왕비)
석씨, 생년 미상~230년
재위기간: 196년 4월~230년 3월. 총 33년 11개월
부인: 1명
자녀: 2남 1녀
왕비 석씨(제6대 지마왕의 딸) - 우로, 이음, 아이혜부인(제11대 조분왕의 왕비)

내해이사금은 벌휴왕의 차남 석이매의 아들이고 아달라왕의 왕비 내례부인 소생이다. 벌휴이사금의 태자인 골정과 둘째아들 이매가 일찍 죽고 골정의 아들 조분도 아직 어리므로, 이매의 아들인 내해가 왕이 되었다. 비는 조분왕의 누이 석씨로서, 사촌 간에 근친결혼을 하였다.

내해왕은 뛰어난 정치 감각으로 박씨 왕실을 다독이는 한편, 석씨 왕실의 기반을 착실히 다져 신라 사회의 안정에도 크게 기여하게 된다. 비록 출발은 평탄하였으나, 내해왕의 치세는 난관이 지속되었다. 즉위 초부터 천재와 전쟁이 끊임없이 이어졌던 것이다.

재위 3년(198년) 5월에 서라벌 서쪽 지방에 큰 홍수가 나자 내해왕은 그들 백성들에게 1년 치의 세금을 면제해 주었다. 201년에는 봄, 가을 일어난 가뭄을 시작으로 이른 서리와 우박, 심한 가뭄, 홍수, 지진, 폭설까지 나라 전체를 뒤흔드는 천재지변이 거의 3년에 한 번씩 닥쳤는데, 설상가상으로 전쟁마저 이어졌다. 내해왕 대에는 백제, 말갈, 왜의 침입이 이어졌는데, 재위 4년인 199년 7월에 백제가 국경을 침입한 이래, 203년 10월에는 말갈의 침입이 있었다.

208년 4월에는 왜인들이 침입해 왔다. 내해왕은 차남 이음을 이벌찬에 임명하고 내외병마사를 겸하게 한 뒤 왜군을 대적하도록 했다. 이음의 활약으로 왜군은 물러갔다. 199년에 본가야(금관가야)가 무너지고 난 뒤, 본가야의 지배력이 약해지고, 나머지 다섯 가야가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여 본가야의 수도인 김해를 공격하게 되자 이 내란을 진압하기 위해 신라가 개입하게 된다. 이 전쟁으로 가야는 신라에 의존하게 되었고, 212년에는 신라에 왕자를 볼모로 보내야 했다.

214년 7월에 기습을 감행해 서쪽 전략기지인 요거성(충북 보은)을 함락하고 성주 설부를 죽였다. 그러자 내해왕은 이음에게 병력 6천을 안겨 백제의 사현성을 격파하였다.

222년 10월에 백제군이 우두주(경북 예천)을 공격해 왔다. 병마사 충훤이 대적했지만, 크게 패해 군대를 모두 잃고 단신으로 쫓겨왔다. 분노한 내해왕은 충훤을 우두진 진주로 강등시키고 연진을 이벌찬에 임명하여 병마사를 겸하게 하였다. 연진은 224년 7월에 대군을 이끌고 백제군을 급습하여 봉산(구례)에서 1천여 명의 백제군을 대파함으로써 병마사로써의 위상을 높였다. 또한 8월에 봉산성을 쌓아 전초기지를 형성함으로써 백제가 함부로 신라 땅을 넘보지 못하게 하였다.

내해왕 치세동안 재해와 전쟁이 계속 되었지만, 조정은 안정된 편이었다. 특히 가야내란에 개입하여 국제적 위상을 한껏 높임으로써 내해왕의 입지는 더욱 굳어졌다. 덕분에 강력한 정치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내해왕은 재위 35년 3월에 죽었으며, 그의 왕위를 태자 우로에게 물려주지 않고 자신의 사위이자 조카이고 벌휴왕의 장손이었던 조분에게 물려주라는 유언을 남겼다.

Posted by 원주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