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왕의 계보 (제16대왕~제20대왕)
제16대 흘해왕(이사금)
제10대 내해왕 - 왕비 무씨 - 장남 우로 - 명원부인 석씨(조분왕의 장녀) - 후손
석씨, 생년 미상~356년
재위기간: 310년 6월~356년 4월. 총 45년 10개월
부인: 1명
자녀: 1명
왕비 - 공주
흘해이사금은 내해이사금의 아들이라고도 하고, 각간 수로의 아들이라고도 한다. 따라서 내해-우로-흘해로 계보가 이어지는데, 생존연대 상으로 미루어 보아 우로와 흘해 사이에 2,3세대가 더 있을 것이라는 설도 있다. 기림이사금이 아들이 없이 죽자 왕으로 추대되었다.
왕위에 오른 흘해는 311변 급리를 아찬으로 삼아 정사를 맡기고 내외병마사를 겸하게 했다. 재위 3년(312년)에 왜왕이 사신을 보내어 아들의 혼인을 청하자, 아찬 급리의 딸을 시집보내어 화친을 맺었다. 그러나 재위 35년(344년) 2월에 왜는 다시 한 번 흘해왕의 딸과의 결혼동맹을 요구했다. 하지만 흘해왕의 딸이 이미 출가했기 때문에 이를 거절하자, 이로써 신라와 왜의 화친은 끝이 나게 된다. 절교를 선언한 왜왕은 이듬해에 대군을 동원하여 신라를 공격해 풍도(포항 앞바다의 목출도)와 변방 민가를 약탈하고, 금성까지 포위하였으나 성문을 닫고 수성전을 펼쳐 격퇴시켰다. 이렇게 왜와는 화친과 전쟁을 반복하는 관계였지만, 백제와는 여전히 화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흘해왕은 337년에 백제의 비류왕에게 사신을 보내 양국의 화친 관계를 확인하기도 하였다.
46년간의 흘해왕 치세는 이러한 외교 관계에 관한 기록 외에는 천재지변에 관한 것들이 많다. 재위 4년 7월에 가뭄이 들고 메뚜기 떼가 나타나자, 흘해왕은 지방에 특사를 내보내 굶주린 백성들을 구제하였고, 5년 2월에는 궁궐을 중수하다가 비가 오지 않으므로 이를 중단했다. 8년 봄과 여름에는 가뭄이 들었는데, 왕이 직접 죄수를 재심사하여 많은 사람을 석방하여 민심을 달랬다. 『삼국사기』에는 재위 21년(330년)에 벽골제(전라북도 김제)를 개착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이는 백제의 기록이 잘못 들어 왔다고 보는 견해가 많다. 그러나 당시 신라에는 김제의 벽골제와 견줄 만한 크기의 제천의 의림지, 상주의 공검지, 밀양의 수산제, 세 저수지가 그것이다. 흘해왕 당시의 벽골제 길이가 1천 8백 보나 된다는 기록을 존중한다면, 남한에서 가장 큰 저수지로 알려진 공검지를 지칭했을 가능성이 높다. 상주사록에 따르면 공검지는 제방 길이가 860보였고, 너비가 800보였으며, 둘레는 22리(약 9킬로미터)였다고 한다.
재위 47년 (256년)에 아들 없이 죽었다. 능과 가족에 대한 기록은 거의 없다.
제17대 내물왕(이사금 또는 마립간)
김구도(김알지의 5대손) - 박씨(갈문왕 이칠의 딸) - 김말구(제13대 미추왕의 아우) - 휴례부인 김씨
김씨, 생년 미상~402년
재위기간: 356년 4월~402년 2월. 총 45년 10개월
부인: 1명
자녀: 3남
보반부인 김씨 - 제19대 눌지왕, 복호, 미사흔
내물(또는 나밀)마립간은 구도 갈문왕의 아들 말구(또는 미구)와 휴례부인 김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미추왕의 아우였던 말구는, 유례왕 8년(291년)에 이벌찬에 임명되어 정사를 도왔던 인물이다. 흘해왕이 죽고 후계자가 없자, 신라 왕실에서 왕위 다툼이 벌어지고, 그 와중에 내물과 그 지지 세력이 무력을 동원하여 왕위를 차지했다(내물왕 이후로 석씨 왕실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으로 봐서, 내물왕에 의해 김씨 중심의 왕실이 세워지면서 석씨가 왕족에서 완전히 밀려난 것으로 보아진다). 내물왕 대의 왕호에 대해서는 『삼국사기』에는 눌지왕부터 마립간을 사용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고, 『삼국유사』에는 내물왕부터 '마립간'으로 표기되어 있다. 아마도 마립간이라는 용어는 내물왕 대부터 사용되긴 했으나, 정식 칭호로 채택된 것은 눌지왕 대부터인 것으로 보인다. 일반적으로 『삼국유사』의 설을 따라 내물왕 때에 '마립간'의 왕호를 처음 사용한 것으로 보고 있는데, 마립간은 수석장 또는 후세의 군장에 대한 존칭어인 상감에 해당하는 와호로 짐작되고 있다. 왕호가 마립간이었다는 사실은 국가체제가 정비되고 왕권이 보다 강회되어 더욱 존엄성이 있는 왕호가 필요해진 현실을 반영한 것으로 보여 진다. 이로써 내물왕은 신라의 귀족들인 대등으로 구성되는 귀족회의가 중앙정청으로서의 성격을 가지는, '남당'에서 주재하는 최고 통치자로서 군림하게 되었다. 또한 이런 강력한 중앙집권을 바탕으로, 내물 마립간 이후부터는 박, 석, 김의 삼성이 왕위를 교대로 계승하는 현상이 없어지고 김씨에 의한 왕위의 독점적 세습이 가능해졌다. 내물왕 대에 와서 신라가 대내적으로 고대국가 체제를 완성하게 된 것은 백제 근초고왕이 마한을 정복하고 낙동강 유역으로 진출하자 이에 자극을 받았기 때문으로 보여 진다.
신라가 고대국가로 발전해가는 과정에서 내물 마립간의 이러한 체제내적인 정비는 중국과의 국제관계에도 관심을 가지게 하여, 377년과 382년의 두 차례에 걸쳐서 고구려 사신의 안내를 받아 부견의 전진과 외교관계를 수립할 수 있게 되었다. 382년에 전진에 사신으로 파견된 위두와 전진의 왕 부견 사이의 대화에서는 당시 신라의 사정이 잘 드러나는데, 『태평어람』에 인용되어 있는 『진서』의 기사에 의하면 "그대가 말하는 해동의 일이 예와 같지 않으니 어찌된 일인가."라는 부견의 질문에 대하여 위두는 "중국에서 시대가 달라지고 명호가 바뀌는 것과 같으니 지금 어찌 같을 수 있으리오."라고 대답하고 있다. 이것은 중국사회에 변화가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신라사회의 변화도 당연하다는 것으로서 신라가 고대국가체제의 정비를 구축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자료가 된다. 이와 같은 신라와 전진과의 외교관계는 곧바로 중국문물 수입의 계기가 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내물왕은 재위 2년(357년)에 각 지역에 특사를 내보내 백성들을 위로하고, 효성이 깊고 유애가 돈독한 관리들을 천거토록 하여 그들의 직급을 올려 주었다. 재위 3년에는 시조묘에 직접 제사를 지내 왕위계승을 정식적으로 공포하였다. 재위 9년(364년) 4월에 왜는 군사를 이끌고 신라 땅에 상륙하여 금성을 공략하였으나, 신라의 복병에 걸려 크게 패하고 돌아갔다. 내물왕 초기에 백제와 화친으로 평화를 유지하던 중, 373년에 백제의 독산 성주가 백성 3백 명을 이끌고 신라에 투항하자 이를 받아주어 백제와의 외교마찰을 일으키게 되었다. 당시 중국 북방에서는 모용 선비가 쇠락하고 있었는데, 고구려와 백제는 그 기회를 이용하여 영토 확장을 꾀하여 서로 세력을 다투는 양상을 띄게 된다. 371년에는 백제의 근초고왕이 3만의 군대를 이끌고 평양성을 습격했는데 이때, 고국원왕이 전사하게 되고 이로써 고구려와 백제는 더 악화되게 된다. 백제는 가야를 통해 왜와 동맹을 맺고, 고구려도 신라와 관계를 강화하면서 이에 따라 백제, 가야, 왜 삼국 연합군과 고구려가 대결하게 되는 국제 관계를 이루게 된다. 391년에는 고구려의 광개토왕이 즉위했고, 과감한 팽창정책을 추진하였다. 말갈군을 동원하여 내정이 불안하던 백제의 적현성을 급습하여 무너뜨렸다. 그 무렵, 백제는 왜병을 끌어들여 여려 차례에 걸쳐 침범하였고, 신라는 우호적 관계에 있던 고구려의 군사적 지원을 받게 되었다.
광개토대왕은 392년 7월에 병력 4만을 이끌고 백제의 대륙기지를 공격하였고, 순식간에 열 개 성을 함락시키고, 백제의 북방 요새인 관미성을 공격하여 20일 만에 함락시켜 버렸다. 그동안의 불안했던 내정이 정리되자, 백제는 또 왜병과 연합하여 신라를 공격하기 시작했는데, 395년 8월 말갈군까지 북쪽 변경을 노략질하자, 계속되는 전쟁과 천재지변으로 고통 받던 신라는 399년에 고구려에 군사적 지원을 요청하게 된다. 고구려의 광개토왕은 그 이듬해 5만 명의 보병, 기병 군사를 신라의 국경지대로 파견하여 백제군과 연합한 왜군을 크게 격파하였다. 이러한 고구려의 신라에 대한 군사적 지원은 결과적으로 신라의 자주적 발전을 저해하는 요인이 되었는데, 신라는 고구려와의 우호적인 외교관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392년 이찬 대서지의 아들 실성을 고구려에 볼모로 보내기도 하였다.
401년 7월에 고구려에 인질로 갔던 실성이 돌아왔는데, 이는 내물왕의 건강이 극도로 악화되었음을 의미한다. 당시 내물왕의 장남 눌지가 어린 소년이었기 때문에 실성이 왕위를 이을 적임자로 지목되고 있었다. 내물왕은 실성이 돌아온 지 7개월 만인 402년 5월에 생을 마감했다. 능은 첨성대 서남쪽에 마련되었다.
제18대 실성왕(이사금 또는 마립간)
김대서지(미추왕의 아우) - 이리부인 석씨
김씨, 생년 미상~417년
재위기간: 402년 2월~417년 5월. 총 15년 3개월
부인: 1명
자녀: 기록 없음
아류부인 김씨
실성왕은 김대서지의 아들이며, 아간 석등보의 딸인 이리부인 소생이다. 대서지는 미추왕의 아우이므로 내물왕의 숙부가 되며, 실성왕은 내물왕의 사촌 아우이다. 실성은 392년에 그를 고구려에 인질로 보냈는데, 9년 뒤인 401년 신라로 돌아오고, 402년 2월 내물왕이 죽자, 태자 눌지가 너무 어려 그가 왕위를 이었다. 그는 키가 7척 5촌의 거구이고, 미래를 예견하는 식견이 있었다고 전한다.
403년에 미사품을 서불한(이벌손)으로 삼고 군국의 일들을 위임하여 통치하였다. 외교적인 측면에서는 왜와의 화호를 위해서 402년에는 내물왕의 왕자이자 복호의 형인 미사흔을 볼모로 보내고, 412년에는 유일하게 원군을 청할 수 있는 고구려와의 우호적 관계 유지를 위해서 내물왕의 왕자인 복호를 고구려에 볼모로 보내기도 하였다. 왜와는 관계개선을 위한 외교적 노력 이외에 405년에는 왜가 침입해 명활성을 공격하자, 왕이 친히 기병을 이끌고 300여명을 참획하기도 했다. 408년 2월 왜가 대마도에 군영을 설치한다는 말을 듣고 선공할 계획을 세웠으나, 서불한 미사품이 말하기를 "'무기란 흉하며, 싸움이란 위험하다' 하였습니다. 하물며 큰 바다를 건너 타국을 치다가 실패한다면 후회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그보다 험한 곳에 의지해 관문을 설치해 그들이 오면 막아 우리를 어지럽히지 못하게 하고, 유리할 때 나가 사로잡는 것만 못합니다. 이것이 곧 남을 이용하여 이용당하지 않는 계략으로, 대책 가운데 으뜸일 것입니다."라 하여 실성왕이 그 의견에 따랐다. 이가 곧 신라의 대왜 방위전력이 되었다. 413년에는 평양주(지금의 양주)에 큰 다리를 준공했으며, 415년 여름에 실성왕은 왜가 대군을 이끌고 침입해 올 것이라는 첩보를 접하고 그해 7월에 혈성벌에서 대대적인 군대사열을 실시하고 전쟁에 대비하였다. 얼마 뒤인 8월, 왜군은 포항 앞바다의 풍도로 쳐들어오자 왜군과 한바탕 격전을 벌여 격퇴시켰다. 왜군의 잦은 침입으로 신라사회는 흔들리고 있었던 실성왕 말년, 내물왕의 태자인 눌지가 덕망이 있어서 자기의 왕권을 위협하자, 실성완은 눌지를 고구려에 인질로 보내어 고구려의 힘을 이용해 그를 살해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오히려 고구려는 눌지를 지원하여 금성으로 잠입해 정변을 일으켜서 실성왕을 살해했다(417년). 이 정변으로 실성왕의 모계인 석씨세력은 김씨계에 의하여 소멸하게 되었다. 능에 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제19대 눌지왕(마립간)
재17대 내물왕 - 보반부인 김씨
김씨, 생년 미상~458년
재위기간: 417년 5월~458년 8월. 총 41년 3개월
부인: 1명
자녀: 1남 1녀
아로부인 김씨(실성왕의 딸) - 제20대 자비왕, 조생부인(지증왕의 어머니)
눌지마립간은 내물왕의 장남이며, 보반(또는 내례회)부인 김씨 소생이다. 내물왕이 죽을 당시 그는 너무 어렸으므로 실성이 왕위를 이었다. 실성이사금은 즉위 후에 자신이 외국에 볼모로 갔던 것을 원망하여 고구려를 이용, 내물마립간의 아들 눌지를 해침으로써 원수를 갚으려고 하였으나 오히려 고구려의 지원을 받아 정변을 일으킨 눌지에 의하여 살해되고, 눌지는 실성이사금에 이어서 즉위하게 되었다. 그 때가 417년 5월이었다. 이처럼 그의 왕위계승에 고구려의 힘이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왕위에 오른 눌지는 삽라군 태수 박제상으로 하여금 고구려와 왜에 인질로 가 있는 복호와 미사흔을 데려오도록 했다. 박제상은 뛰어난 화술로 고구려의 장수왕을 설득하여 418년 정월에 고구려에 있던 복호를 귀환시켰고, 그해 가을에는 왜에 붙잡혀 있던 미사흔을 탈출시켰다. 하지만 제상은 미사흔의 안전을 위해 함께 도주하지 않아 왜인의 칼날에 목숨을 잃었다.
눌지왕은 고구려의 영향력에서 벗어남으로써 양국 간 소원해진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424년에 사신을 보내어 정상적인 외교관계를 재개했다. 하지만, 당시 장수왕이 지배하던 고구려와의 관계는 예전 같지 않았다. 왜군의 노략질은 여전히 계속되었는데, 413년에 대군을 동원하여 서라벌로 진주해 왔으나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물러갔다. 그해 7월에는 서리와 우박이 내려, 기근이 발생하고 눌지왕은 정치, 외교, 경제, 군사, 사회 등 모든 분야에서 악재가 계속 나타나 어려운 상황에서 백제 비유왕이 화친을 청했다. 이에 눌지는 433년 고구려의 평양천도 이후의 남진정책에 대항하기 위하여 종래 적대적 관계에 있던 백제와 동맹을 체결하였다. 신라에 대한 왜의 노략질은 계속되었다.
440년에 두 차례에 걸쳐 남쪽과 동쪽 변경을 침입, 백성들을 납치했다.
444년 4월, 왜는 또 한 번 대군을 동원하여 금성으로 밀려들었고, 신라는 수성전을 펼쳐 왜병을 퇴각시켰다. 450년 7월에는 신라의 하슬라 성주 삼직이 고구려의 변장을 살해한 일로 고구려가 공격해 왔고, 454년 7월에 신라의 북쪽 변경을 침입한다. 별과를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물러난 장수왕은 이듬해 10월 다시 군대를 동원해서 백제를 공격하자 나제동맹에 입각하여 군사를 파견, 백제를 지원한다. 이로써 신라와 백제의 동맹관계는 굳어지고, 고구려는 적대 관계로 굳어지게 된다. 이와 같이, 불안한 대외적인 위기상황 속에서 왕실 내부의 분쟁을 미리 막기 위하여 왕위계승의 부자상속제를 확립시켜 직계인 자비마립간과 소지마립간은 혼란 없이 왕위를 계승할 수 있었다.
이 밖에도 중앙정청인 남당에서 왕이 친히 노인뜰을 봉양함으로써 민심을 수습하였고, 저수지인 시제(위치 미상)를 축조하여 농업생산력의 증대를 도모하였으며, 또한 백성들에게는 우차의 사용법을 가르쳐서 화물유통을 쉽게 하였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눌지왕 때, 최초로 마립간이라는 왕호를 사용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삼국유사』에 보이는 마립간이 실제로는 내물왕 때 이미 사용됐음에도 불구하고 이때에 처음 사용되었다고 한 것은 종래의 왕호인 이사금이 마립간과 더불어 내물과 실성의 양 대에 걸쳐 혼용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눌지왕은 각종 천재지변으로 신라가 혼란하던 458년 8월에 생을 마감했다.
제20대 자비왕(마립간)
제19대 눌지왕 - 아로부인 김씨
김씨, 생년 미상~479년
재위기간: 458년 8월~479년 2월. 총 20년 6개월
부인: 3년
자녀: 3남
제1왕비 김씨(파호갈문왕의 딸) - 왕자
제2왕비 김씨(미즐희 각간의 딸) - 왕자
제3왕비 김씨(미사흔의 딸) - 제21대 소지왕
자비마립간은 눌지마립간의 장남으로 실성왕의 딸 아로부인 김씨 소생이며, 458년 8월에 부왕 눌지왕이 죽자, 신라 제20대 왕에 올랐다. 눌지마립간 대에 마련된 왕위의 부자상속제에 따라 즉위함으로써 보다 강화된 왕권을 보여주었다. 당시 중앙집권적 통치체제를 이룩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종래의 족제적 성격이 강하게 남아 있는 6부를 개편하는 일이 시급했는데, 469년에는 왕경인 경주를 지역적으로 구분하여 방리명을 확정함으로써 왕경의 족제적 성격에서 벗어나 행정적 성격을 강하게 하였다.
국내의 지배체제를 강황하는 한편 고구려의 남진정책에 대비하여 눌지마립간 때에 체결되었던 백제와의 공수동맹을 보다 강화하였다. 이 공수도맹에 입각하여 474년에 고구려 장수왕의 공격으로 위기에 처한 백제의 개로왕이 아들 문주를 신라에 보내어 구원을 요청하자 이에 군사를 파견하여 백제를 구원하였으나, 신라의 구원병이 이르기도 전에 백제의 한산성은 함락되고 개로왕은 전사하였다. 이와 같이 고구려의 군사적 압력이 증대되고 있던 상황에서, 468년 2월 고구려와 말갈이 군사를 몰고 내려와 실직성(삼척)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이에 자비마립간은 백성을 징발하여 니하(강릉)백성을 대거 동원하여 니하에 성을 쌓고 고구려 군을 공격하였다.
469년 4월 수해복구를 위해 7월에 신라 전역을 순행하였으며, 고구려의 남하정책에 대비하기 위해 470년 삼년산성(지금의 보은), 471년 2월에는 모로성, 473년에는 명활산성을 보수했다. 475년에는 일모성, 사시성, 광석성, 답달성, 구례성, 좌라성 등 일선지대의 요새지에 새로이 산성을 축조하여 이미 확보한 점령지의 효과적인 통치도 꾀하였다.
459년 4월 왜인들이 병선 백여 척으로 습격하고 월성을 에워싸자, 자비마립간의 지휘 하에 성에서 지키다가 적이 퇴각하는 것을 기다려 추격하여 몰아냈다. 462년 5월에 다시 왜가 쳐들어와 활개성을 점령하고 백성들을 생포해 갔다. 463년에는 삽랑성(경남 양산)을 침범하고 물러가는 왜병을 급습하여 크게 격파하였다. 연해지방의 두 곳에 성을 쌓아 왜인의 침입에 대비하였으며, 또 7월에는 군대를 사열하여 병사들의 사기를 돋우었다. 467년에는 전함을 수리하여 왜의 침입에 대비하기도 하였다.
477년 6월에 함대를 끌고 와 동쪽 해안 지역으로 상륙하였는데, 이에 자비왕은 장군 덕지를 시켜 왜군에 맞서 싸우게 했는데, 덕지의 공략에 말린 왜군은 병력 2백을 잃고 도주했다. 이렇듯 자비왕 시대는 왜의 계속된 침략으로 신라의 국방력을 강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와 이 시기 신라는 개국 이래 최대의 군사력을 갖추게 되었다. 자비왕은 479년 2월 3일에 생을 마감했다. 능에 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신라 역사와 문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삼국시대 신라는 백제,고구려와 어떤 관계로 유지해 왔는지..신라왕들의 세계에서 확인하시겠습니다. (0) | 2013.09.14 |
---|---|
삼국시대 신라왕중에서 제21대 소지왕부터 제25대 진지왕까지에 대해 알아볼까 합니다. (0) | 2013.09.14 |
한국역사의 시작은 신라부터일까요?.한번 알아보겠습니다.(제11대 조분왕부터 제15대기림왕) (0) | 2013.09.14 |
신라의 역사를 보면 미래가 보인다?..신라왕 계보입니다.(제6대왕부터 10대왕까지) (0) | 2013.09.14 |
우리의 역사를 아는가? 그 첫번째로 알아야 할 신라왕의 계보에 대해 알아보자.(제1대왕~제5대왕계보) (0) | 2013.09.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