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역사와 문화2013. 9. 14. 15:12

 

 

고구려와 백제의 왕들이 두려워 했다고?..누굴? 신라왕...


제31대 신문왕
자의왕후 ․ 김씨, 정명, 생년미상 ~ 692년
재위기간 : 681년 7월 ~ 692년 7월. 총 11년
부인 : 2명

자녀 : 4남
폐비 김씨
신목왕후 김씨 - 이흥(32대 효소왕)
흥광(33대 성덕왕)
근질, 사종 (4남)

신문왕은 문무와의 둘째 아들이며, 자의부인 소생이다. 이름은 정명이며 문무왕 5년에 태자로 책봉되어, 681년 7월에 문무왕이 죽자 왕위에 올랐다. 왕비는 김씨인데 소판 흠돌의 딸이다. 왕이 태자로 있을 때 비로 맞아들였으나 오래되어도 아들이 없었으며, 나중에 그 아버지의 반란에 연좌되어 왕궁에서 쫓겨났다. 683녀에 다시 일길찬 김흠운의 딸을 왕비로 삼았다.

신문왕대는 태종무열왕 대부터 시작된 신라의 중대왕실의 전제왕권이 확고하게 자리 잡힌 시기이다. 왕이 즉위하던 해에 왕의 장인인 김흠돌을 비롯한 파진찬 흥원, 대아찬 진공 등의 모반사건이 있었으나 모두 평정하였다. 김흠돌의 반란은 왕권전제화의 계기를 만들어주었던 이 사건에는 많은 귀족이 참여하고 있었는데 여기에 대해서는 신문왕은 주동자뿐만 아니라 말단 가담자까지도 철저한 숙청을 가하였다(이때 화랑도의 낭도들이 대거 가담한 죄를 물어 화랑도를 폐지하고, 그 낭도들의 명단을 작성하여 모두 병부에 예속시켰다. 당시 화랑도의 풍월주 자리를 흠돌의 조카 신공이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흠돌의 반란에 화랑도의 남동들이 대거 가담했던 것이다). 신문왕은 귀족세력을 철저하게 탄압하려는 의도에서 과감한 정치적 숙청을 단행함으로써 전제왕권의 확립을 꾀하였다.

같은 해에 유교적 정치이념에 입각한 인재의 교육과 양성을 목적으로 하는 국학을 설립하고 여기에 경 1인을 두었다. 이것은 진덕여왕 대에 이미 국학에 소속된 대사라는 관직을 설치했던 것을 신문왕대에 와서 완성한 것이다. 한편 불교에도 관심을 두어 685년에는 봉성사와 망덕사를 준공하기도 하였다.

신문왕대에는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뒤에 증대한 중앙관서의 업무와 확대된 영역의 지방통치를 위한 제도정비도 이루어졌다. 우선 중앙관부에서는 682년에 위화부령 2인을 두어 인재등용에 관한 업무를 관장하게 하고, 공장부감과 채전감 각각 1인을 두었으며 686년에는 예작부경 2인을 두었다. 그리고 687년에는 음성서장을 경으로 올리고 688년에는 선부경 1인을 더 두어 늘어난 중앙관부의 업무를 처리하게 하였다. 특히 685년에는 각 관부에 행정실무를 담당하는 사지가 설치됨으로써 문무왕대에 설치된 말단행정 담당자인 사와 아울러 영, 경, 대사, 사지 사의 5단계 관직제도가 완성되었다.

지방의 통치제도에 있어서는 689년에 왕경의 지리적 한계를 문제 삼아 지금의 대구인 달구벌로 옮기려 하였으나 서라벌에 터전을 둔 귀족들의 반발에 부딪혀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러한 왕경의 편재에서 오는 불편함을 극복하기 위하여 이미 685년에 서원소경(지금의 청주)과 남원소경(지금의 남원)을 설치하고 진흥왕대에 설치된 국원소경을 중원소경(지금의 충주)으로 고침으로써 5소경제를 정비하였다. 또한 신라가 영역을 확장하는 과정에서 수시로 설치하여온 군정적 성격이 강한 주도 685년에 완산주(지금의 전주)와 청주(지금의 진주)를 설치함으로써 삼국통일 후의 확대된 영역의 효과적 지배를 위한 9주제를 비로소 완성하였는데(9주 5소경제 완성). 686년과 687년에는 여기에 따른 주 ․ 군 ․ 현의 정비가 있었다.

마지막으로 중앙의 군사조직에 있어서는 신라인을 중심으로 고구려 ․ 백제 ․ 보덕국 및 말갈인을 편입시켜 9서당을 완성하였다. 내외의 관제정비와 짝하여 689년에는 관리의 늑봉으로 지급하던 녹읍을 폐지하고 해마다 세조를 차등 있게 지급하여 관리의 기존의 경제적 기반을 무너뜨리고 전제왕권의 강화를 더욱 확고히 하였다.

이와 같은 중앙과 지방에 걸친 제도의 체계적 정비를 통하여 전제왕권을 중심으로 한 통치 질서를 완비한 신문왕은 중국제후의 5묘제를 본 떠, 687년에 중대왕실의 정통성을 수립하는 5묘제를 확립하였다. 이 밖에도 일본과 당나라에 사신이 빈번하게 내왕하였고 문화가 발전되고, 설총과 강수와 같은 대학자가 배출되는 등 전성시대를 이루었다. 능은 경상북도 경주시 배반동 낭산의 동남에 있다.

제32대 효소왕

신목왕후 김씨 ․ 김씨, 이홍 또는 이공, 생년미상 702년
재위기간 : 692년 7월 ~ 702년 7월. 총 10년
부인 : 기록 없음
자녀 : 없음
왕비 (기록 없음)

효소왕은 신문왕의 장남이며, 신목왕후 김씨 소생으로 이름은 이홍 또는 이공이다. 신문왕11년(691년)에 태자에 책봉되어, 이듬해인 692년 7월 신문왕이 죽자 왕위에 올랐다. 그의 태자 책봉 시기가 691년인 것을 고려할 때, 효소왕은 10대의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른 것으로 판단된다. 신문왕 대에 잡아놓은 기반으로 효소왕 시대의 정치와 사회는 안정된 편이었다. 하지만 왕이 어린 탓에 정사는 신문왕 대의 공신들에 의해 좌우되었다.

692년에 즉위하여서는 좌우이방부의 ‘이(理)’자가 왕의 이름과 같으므로 피휘하여 좌우의방부로 관부의 명칭을 고치기도 하였다. 즉위하던 해 8월에 대아찬 원선을 집사부 중시에 임명하여 국정을 위임하였다(중시는 진덕여왕 대인 651년에 처음 실시되어 무열왕과 문무왕을 거치면서 입지가 강화되었고, 신문왕 대엔 정치권력의 핵심으로 대두되었다. 따라서 효소왕 대에 이르면 상대등은 그저 상징적인 존재로 전략하고, 중시가 조정을 장악하게 된다. 행정부를 대표하는 집사부의 장관인 중시는 이후로 경덕왕 대에 시중으로 호칭이 바뀌는데, 신라 후반기에 이르면 왕권을 제약하거나 때론 능가하는 존재로 변신하게 된다).

같은 해에는 고승 도중이 당나라에서 귀국하여 천문도를 왕에게 바쳤다. 천문도는 고구려에 전래된 진탁의 성도와 같은 것으로서 왕실권위의 상징으로 이용되었다. 또한, 이 무렵에 의학 교육기관인 의학을 설립하여 의학박사를 두고 『본초경』『침경』『맥경』등의 중국 의학서를 교수하게 되었다.

재위 4년(695년)에 서시전과 남시전을 두었는데 이것은 지증왕 대에 설치된 동시전과 더불어 왕경의 3대 시전으로서, 서라벌 도성 안의 내시까지 합쳐 큰 시장이 넷이나 형성되어 물화의 유통을 쉽게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 해에 자월(음력 11월)을 정월로 정하였다가 700여년에 다시 인월(음력 1월)을 정월로 바꾸었다. 698년 3월 기사에는 “일본국 사신이 왓으므로 왕이 숭례전에서 그를 만났다.”는 기록이 보인다. 이로써 이즈음에는 신라에서도 왜의 공식 국호를 ‘일본’으로 사용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왜는 문무왕 10년인 670년에 자국의 공식 명칭을 ‘일본’으로 개칭했다고 통보해왔는데, 신라에서도 그 점을 인정하여 그들을 왜라고 부르지 않고 일본으로 부르게 된다. 699년에는 당나라에 사신을 파견하여 조공함으로써 양국과의 우호적인 외교관계도 유지하였다.

당시 권력을 장악하고 잇던 신문왕 대의 공신들의 힘이 왕권을 능가하는 지경에 이르자, 효소왕은 왕권을 되찾기 위해 공신들과 대결을 벌인다. 700년에 이찬 경영의 반란이 있었으며 이 사건에 연좌되어 698년에 중시로 임명되었던 순원이 파면되었다. 이듬해엔 영암군 태수로 있던 일길찬 제일을 사익을 탐한 죄를 물어 장형에 처하고 귀양 보내 버렸다. 그러나 이는 오히려 공신 세력을 단결시키는 결과를 낳았고, 그것은 효소왕의 몰락으로 귀결되었다. 효소왕은 경영의 모반 사건이 발생한지 2년 만인 702년 7월에 죽었는데, 이때 그의 나이는 불과 20대 초반이었다. 그가 젊은 나이에 뚜렷한 이유도 없이 죽었다는 것은 권신들에 의해 제거되었을 가능성이 있음을 뜻한다.

702년 7월에 죽어 망덕사 동쪽에 장사지냈다. 자식은 한 명도 두지 못한 것으로 전한다. 또한 부인에 대한 언급도 없다. 이는 그가 권신들에 의해 제거될 때, 부인과 자식 또한 함께 살해되었기 때문에 그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고 있다. 능은 경주 낭산 동남쪽에 있다.

제33대 성덕왕
신목왕후 김씨 ․ 김씨, 초명은 융기, 개명은 흥광, 생년미상 ~ 737년
재위기간 : 702년 7월 ~ 737년 2월. 총 34년 7개월
부인 : 2명
자녀 : 4남 1녀
성정왕후 김씨 - 중경, 수충 (2남)
소덕왕후 김씨 - 승경 (제34대 효성왕)
헌영 (제35대 경덕왕), 사소부인 (2남 1녀)

성덕왕은 신문왕의 차남이며, 신목왕후 소생으로 효소왕의 동복아우이다. 본명은 융기였으나, 당나라 현종의 이름과 같았던 탓에 재위 11년 3월에 당의 칙명에 의해 흥광으로 고쳤다. 효소왕이 후계자 없이 죽자, 702년 7월에 왕위에 올랐다.

성덕왕대는 통일신라시대에 있어서의 정치적인 안정을 바탕으로 사회전반에 걸쳐서 전성기를 구가한 시기였다. 우선 정치적으로 국가의 행정을 담당하는 집사부의 중시가 일체의 정치적 책임을 지게 됨에 따라 전제왕권은 보다 강화될 수 있었다.

이찬 원훈이 성덕왕이 즉위하던 702년에 중시에 임명된 이래로 원문, 신정, 김문량, 김위문, 효정, 김사공, 문림, 선종, 윤충 등 10명의 인물이 성덕왕대에 중시로서 활동하였다. 재위 3년인 704년에 승부령 소판 김원태의 딸을 왕비로 받아들여 왕실의 기강을 다잡았고, 711년에는 왕이 백관잠을 지어 군신에게 제시하였다. 백관잠의 구체적인 내용은 전하지 않고 있으나, 아마도 전제왕권 하에서 신하가 지켜야 할 계명을 적은 것으로서 유교적인 충군사상이 주요내용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성덕왕대에는 이찬 개원을 비롯하여 인품, 배부, 사공 등 4명이 상대등으로 재직하였으나 정치적으로 힘이 없었던 것으로 보아, 귀족회의의 대표자였던 상대등의 활동이 위축된 것을 살펴 볼 수 있다.

국방시책으로는 721년에 하슬라도(지금의 강릉)의 정부 2,000명을 징발하여 북경지방에 장성을 축조하는가 하면, 재위 21년(722년)에는 모벌군성(지금의 경주시 외동면)을 축조하여 일본의 침입로를 차단하기도 하였다. 731년에 일본의 병선 300척이 동해변을 습격하자 이를 공격하여 대파시켰다.

733년에 발해가 바다를 건너 당나라 등주를 공격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그러자 당 현종은 신라에서 발해의 남부 지역을 공격해 줄 것을 요청했고, 성덕왕은 그 요청을 받아들여 출전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도중에 폭설을 만나 길이 막히고, 많은 동사자가 발생하는 바람에 돌아와야만 했다. 그러나 이런 노력 덕분에 당과의 관계는 더욱 돈독해졌고, 그 결과 734년에는 당나라와의 외교적 현안이었던 국경문제를 패강(지금의 대동강)으로 확정지었다. 이로써, 신라의 영토는 대동강에서 원산만에 이르는 이남지역으로 결정되었다. 성덕왕은 이 지역의 민심수습과 북방경영을 위하여 이찬 윤충, 사인, 영술 등을 파견하여 평양주와 우두주(지금의 춘천)의 지세를 조사하게 되었다.

성덕왕은 국내의 정치안정을 기반으로 활발한 외교활동을 추진하였다. 703년에 일본국의 사신을 접견하는 둥 일본과의 관계를 계속적으로 유지해 나갔으며, 당과의 관계도 더욱 밀착되어 갔다. 하지만, 새로 일어난 발해와는 당과의 관계 때문에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게 된다. 703년에 아찬 감사양이 당나라에 조공한 이래 36년 동안 당에 파견된 신라의 사절횟수는 43회로서 신라 중대왕실의 다른 어느 왕 때보다도 많았으며 사절의 내용은 주로 조공과 숙위, 그리고 하정이었다. 이러한 당과의 빈번한 외교적 교섭은 신라의 국제적 지위를 확고하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중국문물의 수입에도 적극적으로 기여하게 되었다. 704년에 입당사 김사양이 귀국하여 최승왕경을 바쳤고, 717년에는 숙위 김수충이 귀국하여 문선왕과 10철 및 72제자의 화상을 바치므로 국학에 봉안하였다. 이는 전제왕권 안정에 필요한 정치이념으로서의 유교의 적극적 수용의지를 반영한 것이며, 728년 에는 왕제인 김사종을 당나라에 파견하면서 신라 귀족자제들의 당나라 국학의 입학을 요청하였다. 717년에 의학박사와 산박사를 각각 1인씩 두었고, 718년에는 누각을 처음으로 제작하였다.

이러한 기술관계의 관직설치와 시설은 모두 유교적 이상정치인 위민 및 농본정책의 시행을 위한 바탕이 되었다. 705년과 706년에 기근이 들어 백성들이 고통 받자, 관리를 파견하고, 창고의 곡식을 나눠주어 구제하였으며, 백성들에게 오곡의 종자를 나누어 주었다.
그리고 722년에는 모든 백성들에게 비로소 정전을 지급하였는데, 정전은 정을 기준으로 하여 백성들에게 지급한 토지라는 뜻일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국가가 실제적으로 백성에게 토지를 지급하였다는 것이 아니라 자영농민이 본래 소유하고 있던 토지에 대한 국가적 인정을 뜻하는 것으로서 농업생산력의 증대를 가져왔으며, 그 결과 국가는 농민으로부터 많은 세를 거두어들일 수 있었고 재정적 기반을 견고히 할 수 있게 되었다.

성덕왕은 재위 36년째인 737년에 죽었다. 시호는 성덕이며, 이거사의 남쪽에 장사지냈다. 왕릉은 현재 경주시 조양동에 있다.

제34대 효성왕
소덕왕후 김씨 ․ 김씨, 승경, 생년미상 ~ 742년
재위기간 : 737년 2월 ~ 742년 5월. 총 5년 3개월 
부인 : 3명 
자녀 : 없음
왕비 박씨
혜명왕후 김씨
후비(영종의 딸)

효성왕은 성덕왕의 셋째 아들이고, 소덕왕후 소생이며 이름은 승경이다. 성덕왕 23년 724년에 태자에 책봉되었으며, 737년 2월에 성덕왕이 죽자 왕위에 올랐다.
효성왕은 즉위하면서 사정부의 승과 좌우의방부의 승을 모두 좌로 바꾸었는데 이것은 ‘승’자가 왕의 이름에 저촉되기 때문이다. 즉위하던 해(737년) 3월에 아찬 정종을 상대등에 임명하여 귀족회의를 관장하게 하고 아찬 의충을 집사부의 중시에 임명하여 행정을 담당하게 하였다. 739년 의충이 죽자 이찬 신충을 중시에 임명하고, 왕제인 헌영(뒤의 경덕왕)의 관등을 파진찬으로 하여 태자로 삼았다. 또, 전 왕인 성덕왕 때에 정상화된 당나라와의 외교적 관계를 한층 강화하는 한편, 외교적 통로를 이용하여 중국의 선진문물을 수입하였다. 특히 738년에 당나라 사신 형숙이 신라에 올 때 당나라 현종이 그에게 ‘신라는 군자의 나라’라고 일러준 것을 보아도 당시 신라의 문화수준을 가늠할 수 있다. 이때 형숙은 노자의 『도덕경』을 비롯한 서책을 왕에게 바쳤는데, 여기서 신라의 선진문물에 대한 수용 자세를 엿볼 수 있다.

740년에는 파진찬 영종의 모반사건이 있었으나 모두 평정되었다. 반란의 원인은 영종의 딸이 효성왕의 후궁이 되어 왕의 총애를 받았는데 왕비가 이를 시기하여 그의 족당과 더불어 후궁을 모살하였다. 이에 영종이 왕비의 족당을 원망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이를 보면 단순한 여인들의 투기가 정치적 반란을 유발한 것 같으나 실제는 성덕왕대에 전성을 구가하던 중대 왕실의 전제왕권이 점차 약화되면서부터 그간에 축적되었던 정치적 모순이 드러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즉, 귀족세력이 왕권의 약화를 틈타 다시 세력을 뻗치기 시작하였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특히, 이러한 현상은 741년에 귀족세력의 대표인 상대등 정종과 경덕왕 대에 상대등으로 활동하는 사인이 왕을 대신하여 열병한 사실에서도 확인된다. 재위 6년째 되던 742년 5월에 죽으매 시호를 효성이라 하였는데, 유명에 따라 법류사 남쪽에서 화장하여 유골을 동해에 뿌려진 까닭에 능은 조성되지 않았다.

제35대 경덕왕
소덕왕후 김씨 ․ 김씨, 헌영, 생년미상 ~ 765년
재위기간 : 742년 5월 ~ 765년 6월. 총 23년 1개월

부인 : 3명
자녀 : 1남
삼모부인
경수왕후 - 건운(제36대 혜공왕)
제3비(이찬 순정의 딸)

경덕왕은 성덕왕의 넷째 아들이며, 소덕왕후 소생으로 이름은 헌영이다. 효성왕의 동복아우인 그는 파진찬 벼슬에 있다가 효성왕 재위 3년인 739년에 태자로 책봉되었다. 그리고 742년 5월에 효성왕이 죽자 왕위에 올랐다. 경덕왕 때에 이르러 새로운 귀족들이 세력을 확장하여 왕권이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이에 경덕왕과 행정 책임자였던 중시는 왕권강화를 위해 관제정비와 개혁조치를 실시했다.

744년에 이찬 유정이 중시에 임명된 이후, 대정, 조량, 김기, 염상, 김옹, 김양상 등 7인이 경덕왕 때에 중시를 지냈다. 경덕왕은 즉위 초부터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관제를 정비하고, 과감한 제도 개혁을 실시했다. 747년에 중시의 명칭을 시중으로 바꾸었으며, 748년에는 정찰 한 명을 임명하고 백관을 규찰하도록 했다. 이는 성덕왕 대부터 지속적으로 추진되던 전제왕권 체제를 가속화하기 위한 조치였다.

747년에 국학에 제업박사와 조교들을 두었고, 749년에는 천문박사 한 명과 누각박사 여섯 명을 두었다. 이런 전문 식견을 갖춘 학자 관료들을 육성하여 성덕왕 이래 추진되던 유교정치 구현의 토대를 형성한 것이다. 경덕왕은 근본적으로 유학 사상에 입각한 전제왕권 정치를 꿈꾸고 있었고, 중국의 한, 당의 정치를 그 모델로 삼고 있었다(중국의 것을 모방하는 정책). 따라서 이러한 일련의 제도적 장치는 당나라 태종이 그랬듯이 왕권을 강화하면서 동시에 귀족들의 세력을 약화시키는 데 목적이 있었다. 이에 한화정책은 귀족세력으로부터 비판을 받았다. 그는 756년 상대등 김사인은 상소에서, 최근의 빈번한 천재지변을 들어 현실정치의 모순에 대하여 신랄하게 비판하고, 시중에 대해서 정치적 책임을 물었다. 이때의 비판내용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아마도 경덕왕이 추진한 한화적 개혁정치가 비판의 대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비판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757년부터 김기가 적극적으로 한화정책을 추진하였다. 전국 주의 이름을 대대적으로 바꾸고, 그 휘하의 현과 군을 대폭 정비하였다. 사벌주를 상주로 고치고 1주 10군 10현을 예속시켰고, 상량주를 양주로 고치고 1주 1소경 12군 34현을 예속시켰으며, 청주를 강주로 고치고 1주 11군 27현을 예속시켰다. 또 한산주를 한주로 고치고 1주 1소경 27군 46현을, 수약주를 삭주로 고치고 1주 1소경 11군 27현을, 웅천주를 웅주로 고치고 1주 1소경 13현 29현을 예속시켰다. 하서주는 명주로 고치고 1주 9군 26현을 예속시켰으며, 완산주를 전주로 고치고 1주 1소경 10군 31현을, 무진주를 무주로 고치고 1주 1소경 14군 44현을 예속시켰다. 전국 9주의 이름을 모두 바꾸거나 간소화하고, 소속된 소경과 군현을 명시했다. 이로써 통일 이래 제대로 정비되지 못한 행정 구역을 확실하게 규정하였다.

758년 2월에는 내외의 관원을 막론하고 만 60일 이상 휴가를 얻은 자는 해직으로 간주하라는 교시를 내려 관료들의 기강을 다잡았다. 4월에는 의술을 깊이 연구한 사람들을 관료로 등용해 내공봉에 근무하게 하는 조치를 내렸다. 또 율령박사 두 명을 임명했는데, 이는 유학적 가치관에 바탕을 둔 법치주의를 강화하려는 의도에서였다. 759년에는 지방 행정 조직 정비에 이어 중앙 관명을 중국식으로 개정함으로써 제도 개혁에 박차를 가했다. 병부와 창부의 경과 감을 시랑으로, 대사를 낭중으로, 집사부의 사지를 집사원외랑으로, 집사사를 집사랑으로 개칭하였다. 각 부서의 대사는 모두 주부나 주서로 개칭하고, 예부의 사지를 사례로, 조부의 사지를 사고로, 영객부의 사지를 개칭하고, 승부의 사지를 사목으로, 선부의 사지를 사주로, 예작부의 사지를 사례로, 병부의 노사지를 사병으로, 창부의 조사지를 사창으로 개칭했다. 이러한 경덕왕과 집사부가 추진한 한화적 개혁정치는 혜공왕 대에 가서 귀족세력이 다시 왕권을 압박해 오면서 모두 옛 명칭으로 환원되고 만다.
경덕왕은 당나라왕의 외교관계에 있어서는, 전통적 방법인 조공과 하정의 사신을 11회나 당나라에 파견함으로써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였다. 한편, 일본과의 관계는 그리 원만하지 못하여 일본과는 거의 국교 단절 상태가 되고 말았다.

757년에 내외관리의 월봉을 혁파하고 다시 녹읍을 부활시켰다. 이것은 새로이 성장하는 귀족세력의 경제적인 욕구가 지금까지 세조만 받던 월봉을 혁파하게 하고, 녹읍의 부활을 제도화시킨 것이라 하겠다. 그해 8월에 조부에 사를 두 명 더 두어서 세수 업무를 한층 강화시켰다. 경덕왕 말기에 정치적으로 성장한 귀족세력은 763년에 경덕왕의 측근세력이었던 상대등 신충과 시중 김옹을 면직시켰다. 왕당파인 이들의 면직에 관한 구체적인 내용은 기록상에 나타나지 않으나, 왕권에 대한 귀족세력의 반발의 결과로 보인다. 이러한 추측은 김옹이 물러난 뒤 약 4개월의 공백기를 거쳐, 764년 만종과 양상이 각각 상대등과 시중에 임명되었기 때문에 가능하다. 여기서, 양상은 나중에 상대등으로서 혜공왕을 사해하고 신라 하대의 첫 왕인 선덕왕으로 즉위하는 인물로서, 경덕왕 때에 이미 귀족세력을 대표하고 전제왕권에 도전하는 존재였다. 따라서, 경덕왕 말년의 정치는 왕권과 귀족세력의 정치적 타협 위에서 존립할 수 있었던 것이다. 경덕왕은 재위 24년 만인 765 6월에 생을 마감했다. 능은 처음에 경지사 서쪽 언덕에 장사지냈으나, 후에 성덕왕의 능이 있는 양장곡으로 옮겨졌다.

 

Posted by 원주유
신라 역사와 문화2013. 9. 14. 14:56

 

신라왕의 시대 제21대 신라왕에서부터 제25대 신라왕에 대해 알아보자.

제21대 소지왕(마립간)

제20대 자비왕 - 제3왕비 김씨
김씨, 생년 미상~500년
재위기간: 479년 2월~500년 11월. 총 21년 9개월
부인: 2명
자녀: 1남 1녀
선혜부인 - 보도부인(제23대 법흥왕의 왕비)
벽화부인 김씨 - 왕자

소지마립간은 비처왕이라고도 불리었으며, 자비왕의 셋째 아들로 미사흔의 딸 김씨 소생이다. 그는 어릴 때부터 효행이 지극하고 겸손하여 타인을 공경하는 자세를 잃지 않았기 때문 사람들이 모두 감복하여 성인이라 불렀다고 전한다. 479년 2월 부왕 자비가 죽고 왕위에 오르자 우선 사면령을 내려 죄수를 방면시키고, 관리들의 벼슬을 한 급씩 올려 주었다. 그의 치세기간에는 잦은 천재지변과 고구려와 왜, 말갈 등의 외침으로 혼란스러웠다.

즉위 이듬해인 480년 5월 가뭄을 시작으로, 동년 10월의 기아, 482년 2월의 폭풍 및 금성의 화재, 4월의 폭우, 483년 4월과 7월에 홍수, 11월에 우레와 전염병 등이 계속되었다. 자연재해가 계속된 직후 오함이라는 자를 새로 이벌찬으로 삼는 등 인사개편에 나섰다. 480년 11월에 말갈이 변경을 공격하게 되자, 481년 2월에 자신이 직접 비열성(함경남도 안변)까지 행차하여 군복을 하사함으로써 변방의 군사를 위로하였다. 신라군은 패전을 거듭했고, 신라의 북방 변경을 휘젓고 다니던 고구려군과 말갈군은 순식간에 호명성(강원도 철원) 등 일곱 성을 함락시켰다. 그리고 다시 동쪽 해안선을 따라 남진하여 미질부(경북 영일만 일대)까지 밀고 내려왔다. 이에 소지왕은 백제의 동성왕과 가야에 구원을 요청했고, 백제와 가야의 군대의 도움으로 고구려군을 몰아낼 수 있었다. 각종 재해와 주변국의 침입으로 마립간에게 그 화살이 돌아오자, 소지왕은 자비왕 대에 강화된 왕권을 스스로 약화시키는 고육지책으로 난국을 타개하고자 했다.

484년 7월 고구려에 공격당한 백제를 위해 연합으로 모산성 아래에서 고구려군을 대파하고, 실추되었던 국가 위상을 되찾고, 군대의 사기도 크게 높였다. 이에 힘입어 소지왕은 여러 성을 쌓아 국방을 강화했다.

485년 2월에는 구벌성을 쌓고, 486년 정월에는 일선 지방의 장정 3천 명을 동원하여 삼년성과 굴산성을 개축하였다. 488년 7월에는 도나성을 쌓았고, 490년 2월에는 비라성을 중수했다. 493년 7월에는 임해와 장령 두 곳에 진을 설치하여 왜적의 침입에 체계적으로 대응할 교두보를 마련했다. 계속된 외침과 자연재해의 수습을 끝낸 소지마립간은 시조 박혁거세가 처음 태어났다고 알려지는 나을에 신궁의 건설을 시작하여 497년 2월에 끝냈다.

487년 7월에는 월성을 수리하여 그곳에 대궁을 설치하고 이듬해인 재위 10년 정월에 월성으로 옳겨갔다. 이때부터 월성엔 주로 왕과 왕비 등이 기거하고, 금성에 왕실의 혈족들이 기거하게 되어, 왕의 위상을 높였다. 그해, 사방에 우역을 설치하고 국내의 기간 도로인 관도를 수리하였으며, 490년에는 수도인 경주에 처음으로 시사를 열어 사방의 물화를 유통시켰다. 이러한 정책은 자비왕대의 경주의 방리명확정과 아울러 족제적 성격이 강하게 남아 있는 육부체제를 개편하여 중앙집권적인 통치체제를 수립하려는 노력으로 이해된다.

또한, 소지왕은 비열성(지금의 안변), 일선군(지금의 선산), 날이군(지금은 영주)등지를 순행하여 병사를 위문하고 재해지나 전쟁지역의 주민들을 위로하여 민심을 수습하는 한편, 유식하는 백성들을 귀농시키기도 하였는데, 이러한 왕의 치적은 신라의 대내적 결속력의 강화와 농업생산력 증대에 기여했을 것으로 보여진다.

재위 14년 492년 백제의 동성왕의 결혼요청을 받아들여 잉찬 비지의 딸을 시집보냄으로서 결혼동맹을 맺었다. 그 뒤, 고구려의 남하에 대비하는 신라와 백제 양국의 동맹관계는 더욱 공고해져 494년의 고구려의 신라침입 때에는 백제가, 495년 고구려의 백제공격 때에는 신라가 각각 구원병을 파견하여 고구려의 남하를 강력하게 저지하였다. 496년 7월 고구려군이 다시 신라의 우산성을 쳤는데, 장군실죽이 나가 싸웠다. 497년 4월 왜, 8월에 고구려가 다시 잇따라 침공, 고구려군이 결국 우산성을 점령했다. 고구려와의 전쟁과정에서 변경지방의 요충지에는 삼년산성 등을 개축, 증축하여 침입에 대비하였다. 재위 21년(500년) 생을 마감했으며, 능에 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제22대 지증왕(마립간)

갈문왕 습보(내물왕의 손자) - 조생부인 김씨(제19대 눌지왕의 딸)
김씨, 437~514년
재위기간: 500년 11월~514년 7월. 총 13년 8개월
부인: 1명
자녀: 2남
연제부인 박씨 - 제23대 법흥왕, 입종(제24대 진흥왕의 아버지)

지증왕은 내물왕의 증손이며, 습보갈문왕의 아들로서 조생부인 김씨 소생이다. 성은 김씨이고, 지대로 혹은 지도로 또는 지철로 라고 하였다. 갈문왕 습보는 눌지왕의 아우 미사흔의 아들이다. 또한 조생부인이 눌지왕의 딸이므로 지증왕은 소지왕의 6촌 아우가 되는 셈이다. 왕은 몸이 건장하였으며 담력이 있었다고 한다. 재종형인 소지마립간이 후계자가 없이 죽자 64세의 나이로 왕위를 계승하였다.

재위 3년(502년)에 순장을 금지하는 법령을 내렸다. 신분의 위상을 드러내는 중요한 전통적 장례 절차였던 순장을 자신들의 신분을 구분하려는 의지가 강했던 왕실과 귀족사회의 강한 반발에도 불구하고 과감하게 금지시킨다. 이는 불교적인 의미도 없지 않겠으나 농업노동력의 확보라는 측면과도 연관이 있을 것으로 주목된다. 또, 주군에 명하여 농업을 권장하도록 하였으며, 비로소 우경을 시행하도록 하는 개혁조처를 단행함으로써 농업생산력증대의 계기를 마련하였다. 또한, 이 무렵에는 벼농사가 확대, 보급되면서 수리사업도 활발히 진행되었는데 이러한 사회적 생산력의 발달에 기반을 두고 정치적 개혁들을 실행해 나갔다.

우선 재위 4년(503년)에는 이제까지 사라, 사로, 신라 등 다양하게 사용되고 있던 국명을 신라로 확정하였으며, 왕호를 방언인 마립간에서 중국식인 왕으로 바꾸었다. 이로써 지증왕은 비로소 고대국가로 정비된 신라국의 왕이 되었다.

이때에 제정된 국명인 신라의 의미는 왕의 덕업이 나날이 새로워지고, 사방의 영역을 두루 망라한다. 는 뜻에서 취한 것이라고 한다. 이러한 국명 및 왕호의 한화정책은 단순한 명칭상의 변경만이 아니라 신라가 고대국가체제를 정비하고, 왕권과 지배조직을 강화함에 따라 이루어진 결과였으며, 중국의 고도한 정치조직과 문물에 대한 인식과 그것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려는 노력의 일환이기도 했다.

또한, 재위 6년(505년)에는 친히 국내의 주, 군, 현을 정하였는데, 지방제도로서의 주군제도의 실시는 고구려, 백제, 가야 등의 삼국과의 전쟁에서 얻어진 점령지의 통치와 영토 확장의 수단이었다. 즉, 중앙집권적인 통치체제의 수립을 위하여 새로이 신라의 영역내로 편입된 점령지를 행정적 차원에서 일원적으로 파악함으로써 효과적인 지방통치를 행할 수 있었던 것이다. 같은 해에 실직주(지금의 강원도 삼척)를 설치하고, 이사부를 신라 최초의 군주를 삼은 것도 이러 정책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 신라의 군주제는 군사적 필요에 따라 수시로 이동할 수 있는 군정적 성격을 띠었으며, 중앙과 지방을 연결하는 실질적인 중간기구로서 기능하는 외직이었다. 그해 11월에는 석빙고를 관리하는 소관부서를 설치하고 얼음을 저장하게 하였다.

한편, 군사적으로는 504년 동북 방면에 파리성, 미실성, 진덕성, 골화성 등 12개성을 축조하였고, 512년에는 하슬라(강릉)주 군주인 이사부로 하여금 우산국(지금의 울릉도)을 복속시키게 하였다. 남쪽 방면으로는 아시촌(지금의 함안)에 소경을 설치하여 그곳 주민을 행정적으로 회유함으로써 신라의 직할영토로 편입시키기 위한 조처를 취하기도 했다.

이 밖에도 504년 상복법의 제정, 서울에 동시의 설치, 선박 이익의 권장 들 일련의 의례와 민생에 관한 시책을 실시하기도 하였다. 이렇듯 지증왕의 정책은 구체적이고 섬세했다. 그는 제반 문제를 법의 테두리 안으로 끌어들여 제도화함으로써 국가 기강 확립에 크게 기여했다. 이런 여러 업적을 남긴 그는 왕위에 오른 지 15년 만인 514년 78세의 나이로 죽었다. 시호를 지증이라 하였는데, 신라에서 시법을 사용하기로는 지증왕이 처음이었다. 지증왕 대에는 칭호를 왕으로 사용하기로 확정하긴 했으나, 여전히 마립간이라는 칭호가 널리 사용되었다.

제23대 법흥왕

제22대 지증왕 - 연제부인 박씨
김씨, 원종, 생년 미상~540년
재위기간: 514년 7월~540년 7월. 총 26년
부인: 4명
자녀: 2남 3녀
보도부인 김씨(소지왕의 딸) - 지소태후(제24대 진흥왕의 어머니)
옥진궁주 김씨 - 비대
벽화부인 김씨 - 삼엽
보과부인 김씨(백제 동성왕의 딸) - 모량, 남모

법흥왕은 지증왕의 장남이며, 연제부인 박씨 소생으로 이름은 원종이다. 그는 키가 7척이고 도량이 넓으며 사람을 좋아했다고 한다. 소지왕이 죽고 부군이었던 지증이 왕위를 잇자, 원종은 곧바로 태자에 책봉 되었다.

514년 7월에 왕위에 오른 법흥왕은 지증왕 때 일련의 개혁정치를 계승하여 중앙집권적인 고대국가로서의 통치체제를 완비하였다. 재위 4년(517년)에 신라에서 중앙관부로서는 병부가 제일 먼저 설치되었는데, 이것은 중앙집권적 고대국가체제를 수립하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군사권을 왕이 직접 장악함으로써 왕권을 강화할 수 있었던 것으로 이해된다. 병부는 눌지왕 이후에 등장하여 왕의 직속으로 군사권을 장악하고 있던 장군과 같은 직책을 중앙관부로 흡수하여 재편성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재위 7년(520년)에는 율령을 반포하고 백관공복을 제정하였는데, 이때에 반포된 율령에는 17관등제와 골품제도 등에 관한 규정이 포함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율령에 의하여 신라내로 통합된 이질적 요소들을 법 아래에서 강제적으로 해소할 수 있었기 때문에 왕을 중심으로 하는 국가권력의 강화를 이룩할 수 있었다. 관복은 붉은빛과 자줏빛 두 가지색으로 구분하여 등급을 표시하도록 했다.

이러한 국가권력, 즉 왕권의 강화를 단적으로 나타낸 제도가 바로 법흥왕 대에 설치된 상대등이다. 상대등은 수상과 같은 존재로서 531년에 이찬 철부가 최초로 상대등에 임명하여 국사를 총괄하게 하였다. 상대등은 신라의 최고관직으로서 대등으로 구성되는 귀족회의의 주재자였다. 왕권이 점차 강화되어 왕이 귀족회의 주재자로서의 성격을 탈피하게 되자 왕 밑에서 귀족들을 장악할 새로운 관직의 필요성이 대두되자 상대등을 설치하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법흥왕은 이와 같이 대내적으로 체제를 정비하여 왕권을 강화하는 한편, 대외적으로는 영역확장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522년에 백제의 적극적인 진출에 반발한 대가야가 법흥왕에게 사신을 보내어 결혼을 요청하다 이찬 비조부의 누이동생을 보내어 동맹을 맺었다. 그 뒤, 법흥와은 적극적인 남진 정책을 추진하여 524년에는 남쪽의 국경지방을 순수하고 영토를 개척하였다.

532년에 본가야의 금관국주 김구해가 세 아들과 함께 신라에 항복해옴으로써 정식으로 합병되었다. 법흥왕은 구형의 귀순을 대대적으로 환영하고, 금관국을 그의 식읍으로 내줬으며, 셋째 아들 무력을 대신으로 등용하였다. 이로써 약 500년 동안 유지되어 오던 가야 왕조를 폐하고 신라에 병합하였다. 본가야의 투항은 신라로 하여금 낙동강과 남해안의 교통상의 요지인 김해를 발판으로 가야의 여러 나라를 정복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주었다. 서북방면의 점령지는 대아찬 이등을 사벌주군주로 임명하여 관리하게 하였다. 왕권강화와 영역확장 등에 힘입어서 국력이 신장된 신라는 재위 23년(536년)에 비로소 독자적 연호인 건원을 사용하였다. 이로써 법흥왕 이래 신라 중고왕실의 거의 모든 왕들은 자기의 독자적인 연호를 가지게 되었다. 동아시아의 전통사회에서 중국의 주변국가가 중국 연호를 사용하지 않고 자기연호를 사용하였다는 것은 일단 중국과 대등한 입장에서의 자주적 국가임을 표현했다는데 그 의미가 있다.

또한 521년에는 기존의 외교노선에서 벗어나 위진남북조시대의 북조 대신에 남조인 양에 사신을 파견하였다. 이때 신라에 사신으로 온 양나라의 승려 원표가 불교를 신라왕실에 전해준 것이 불교수용의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불교가 신라에 처음 들어온 것은 5세기 초 아마도 눌지왕 때이거나 혹은 그보다 조금 이른 시기에 고구려를 통해 들어왔다. 신라불교 개척자는 아도였다. 전설적 인물인 묵호자와 동인 인물로 추정하고 있는데, 신라의 민가에 들어와 불교를 전차했다 전해진다. 신라와 중국과의 외교적 교섭이 열림에 따라 신라왕실에 법흥왕은 불교를 크게 일으키려 하였으나 귀족들의 반대를 받아 고민하던 중 527년에 이차돈의 순교를 계기로 불교의 국가적 공인이 이루어졌다.

법흥왕에 의하여 국가종교로 수용된 불교는 왕권을 중심으로 하는 중앙집권적 고대국가 형성에 있어서 이념적 기초를 제공하여 왕실과 매우 밀접한 관계에 놓이게 되었다. 이러한 관계는 법흥왕이 말년에 승려가 되어 법호를 법공이라 한데서 잘 나타나고 있다. 재위 27년 만에 죽자 시호를 법흥이라 하고 능은 애공사 북쪽 봉우리에 마련되었다.

제24대 진흥왕

갈문왕 김입종(제23대 법흥왕의 아우) - 지소태후 김씨(법흥왕의 딸)
김씨, 삼맥종, 534~576년
재위기간: 540년 7월~576년 8월. 총 36년 1개월
부인: 4명
자녀: 4남 1녀
사도부인 박씨 - 동륜, 구륜
숙명궁주 박씨 - 제25대 진지왕
소비 부여씨
월화궁주 김씨 - 천주
금진 - 난성공주

진흥왕은 법흥왕의 아우 김입종의 아들이며, 법흥왕의 딸 지소태후 김씨 소생으로 이름은 삼맥종, 혹은 삼맥부이다. 534년에 태어났으며, 일곱 살이 되던 540년 7월에 법흥왕이 죽자 왕태후 지소의 섭정을 받으며 왕위에 올랐다. 신라의 대외적 발전을 비약적으로 추진시킨 왕이다.

551년에 개국이라고 연호를 바꾸고 친정을 시작하면서부터 적극적인 대외정복사업을 전개하게 된다. 550년에 백제와 고구려가 도살성(지금의 천안 혹은 증평)과 금현성에서 공방전을 벌이고 있는 틈을 타 이듬해 병부령 이사부를 임명하고, 두 성을 공격하여 빼앗고 한강하류유역을 차지했다. 그 기반으로 그 해에 백제의 성왕과 연합하여 고구려가 점유하고 있던 한강유역을 공격하여 백제가 고구려부터 한강지역을 탈환하자, 진흥왕은 거칠부를 비롯하여 구진, 비태, 탐지, 비서, 노부, 서력부, 비차부, 미진부 등 여덟 장군에게 명하여 한강 상류유역인 죽령 이북 고현(지금의 철령) 이남의 10개군을 고구려부터 빼앗게 하였다. 그리고 553년에는 백제가 고구려부터 탈환한 한강하류유역의 전략적인 필요성을 절감하고, 동맹관계에 있던 백제를 기습 공격하여 이 지역을 점령하였다. 이로써, 신라는 한강유역의 전부를 차지할 수 있게 되었으며, 신주를 설치하여 아찬 김무력을 초대 군주로 임명하여 다스리게 했다.

신라가 백제로부터 한강하류유역을 탈취한 사건은 백제와의 사이에 맺어졌던 결혼동맹을 파기하는 것을 의미했다. 이에 백제 성왕은 554년 대가야와 연합하여 신라를 공격하다가 관산성(지금의 옥천) 전투에서 신주군주 김무력에게 붙잡혀 죽음을 당하였으며, 백제군은 거의 전멸되었다. 신라의 한강유역 점령은 인적 ․ 물적 자원의 획득 이외에도 황해를 통한 중국과의 교통로를 확보하였다는 데 중요한 의미가 있다. 이에 신라는 564년 이래 거의 매년 중국 남조의 진과 북조의 북제에 사신을 파견하고 외교관계를 유지했다. 또한, 법흥와의 가야에 대한 정복사업을 계승하여 낙동강유역에까지 정복의 손을 뻗쳤다. 555년에는 비사벌(지금의 창녕)에 완산주가 설치하고, 557년에는 국원(충북 청주)을 소경으로 만들었으며, 사벌주를 없애고 감문주를 설치하고 사찬 기종을 군주로 임명하였다. 562년 백제는 신라의 변경을 침략하였고, 그 틈을 이용하여 가야왕 도설지가 군대를 일으켰다. 신라 변경을 노략질하던 백제군은 신라군에게 역공을 당해 1천여 명의 사상자를 내고 퇴각했으며, 가야의 반란 세력은 신라 장군 이사부와 사다함이 군사 5천을 이끌고 가서 패퇴시켰다. 이리하여 신라는 가야의 여러 나라를 완전히 정복하였으며, 낙동강유역 전부를 차지할 수 있게 되었다.

565년에 원래 대야주(지금의 합천)를 설치하여 가야지역 통치의 본거지로 삼는 동시에 백제에 대한 방어의 전초기지로 삼았다. 이 밖에도 동북방면으로 북상하여 556년 비열홀주(지금의 안변)를 설차하고 사찬 성종을 군주로 임명하였으며, 신주로 삼았던 한강 이북에 북한산주를 설치하였다. 이와 같은 고구려, 백제, 가야에 대한 활발한 정복사업의 결과로 신라 역사상 최대의 영토를 차지하게 되었다. 진흥왕의 영토 확장은 창녕. 북한산. 황초령. 마운령에 있는 네 개의 순수관경비와 최근 발견된 단양의 적성비를 통해 볼 수 있는데, 네 개의 순수비 중 경상남도 창녕군에 있는 창녕비는 561년에, 함경남도 함흥군에 있는 황초령비와 이원군에 있는 마운령비는 568년에 각기 건립된 것을 알 수 있다. 진흥왕의 순수관경비는 새로이 신라 영역내로 편입된 지역주민들의 민심을 수습하고, 확장된 영역을 확인하기 위하여 세워진 기념비라고 할 수 있다.

진흥왕은 이 같은 정복활동뿐만 아니라 대내적인 정치에 있어서도 많은 치적을 남겼다. 중대왕실의 정통성을 천명하고 유교적인 정치이념에 입각하여 그 위엄을 드러내고자, 545년 이사부의 건의를 받아들여 거칠부로 하여금 『국사』를 편찬하였다.

또한 법흥왕 대에 공인된 불교를 적극적으로 보호하였는데, 544년 흥륜사의 완성을 시작으로 경주에 많은 사찰을 지었으며, 사람들이 출가하여 봉불하는 것을 허락하여 주었다. 또한 중국 남조에 부처님의 사리를 요청하였는데, 549년에는 양나라에 유학하였던 승려 각덕이 불사리를 가지고 귀국하자, 백관으로 하여금 흥륜사 앞에서 영접하게 하였다. 그리고 553년에는 월성 동쪽에 왕궁을 짓다가 그곳에서 황룡이 나타나자 왕궁을 고쳐서 불사로 삼고 황룡사라 이름 하였는데, 이는 566년에 완공되었다. 황룡사는 신라 최대의 사찰로서 이곳에는 574년에 신라 최대의 불상인 장륙상을 주조하여 모셨다. 이 장륙상에 소요된 구리의 중량이 무려 3만 5천근이고, 도금한 중량이 1만 1백 98푼이나 되었다. 황룡사가 완공되던 해에는 지원사와 실제사도 준공되었다. 이렇게, 신라왕실의 보호를 받는 불교는 경주를 중심으로 발전함으로써 도성불교적 성격을 띠게 되었다. 이러한 외형적인 사찰건축 외에도 565년에는 승려 명관이 불경 1,700여권을 진나라에서, 576년에는 안홍법사가 「능가승만경」및 불사리를 수나라에서 각각 가져옴으로써 교리적인 발전의 기틀도 마련하였다. 또한 572년에는 7일 동안 팔관연회를 외사에서 열어 정복전쟁기간에 전사한 장병의 영혼을 위로하였는데, 이것은 신라 불교가 국가의 현실적 필요에 부응할 수 있는 호국불교임을 나타낸 의식이었다. 이와 같이 진흥왕은 불교의 현실적 필요성을 절감하고 적극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한편, 그 자신도 불교에 매료되어 만년에는 머리를 깎고 승의를 입고 법운이라 하여 여생을 마쳤으며, 왕비도 이를 본받아 비구니가 되어 영흥사에 거처하다가 614년에 죽었다.

또, 진흥왕은 576년에 종래부터 있어오던 여성 중심의 원화를 폐지하고 남성 중심의 화랑도를 창설하였다. 무리들은 '풍월도'라 불리었고, 그 우두머리를 일러 풍월주라고 하였는데, 초대 풍월주는 위화랑이었다. 『화랑세기』는 그는 얼굴이 백옥과 같고, 입술은 마치 붉은 연지와 같고, 맑은 눈동자와 하얀 이를 가졌다고 했다. 또 그는 성격이 곧고 대의를 알며 공평무사했다. 진흥왕이 그를 총애하여 위화랑 이후 풍월주를 화랑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게 하여 화랑이란 명칭을 탄생시킨다. 화랑도의 전승기는 위화랑이 제1세 풍월주가 된 540년부터 681년에 김흠돌의 난에 대한 여파로 풍월주가 폐지될 때까지의 241년 동안이다. 그 이후로 화랑도는 조직이 약화되고 사병화되어, 신라 말에 이르러서는 일개 수련 단쳬로 전락하게 된다.

이렇게 많은 업적을 남긴 진흥왕은 대내적으로는 국가의식과 대외적으로 자주의식의 상징적 표현이었던 독자적 연호를 세 개나 사용할 수 있었다. 551년의 개국, 568년의 대창, 그리고 572년의 홍제가 그것이다. 재위 37년 만인 576년, 43세로 죽었다. 애공사 북봉에 장사지냈다.

제25대 진지왕

제24대 진흥왕 - 숙명궁주 박씨
김씨, 금륜, 생년 미상~579년
재위기간: 576년 8월~579년 7월. 총 2년 11개월
부인: 1명
자녀: 3남
지도부인 박씨 - 용수, 용춘
도화랑 - 비형

진지왕은 진흥왕의 차남이며, 이름은 사륜 혹은 금륜이고 지소태후의 사녀 숙명궁주 소생이다. 진흥왕의 태자 동륜이 572년에 죽었기 때문에 진흥왕에 이어서 즉위하여 무열왕계의 시조가 되었다. 당시의 왕위계승에 있어서는 이미 부자상속제가 확립되어 있었으므로, 진흥왕의 둘째 아들인 진지왕은 진흥왕의 적손, 동륜태자의 아들인 백정(뒤의 진평왕)이 있었기 때문에 실제로는 왕위 계승자가 될 수 없었다. 진지왕이 즉위하던 해(576년)에 거칠부를 상대등에 임명하여 국정을 맡긴 사실과, 재위 4년 만에 정란황음을 이유로 화백회의의 결정에 따라 폐위되었다는 점, 또한 독자적인 연호를 가지지 못하였다는 사실로 미루어 볼 때 진흥왕대의 대표적 인물이었던 거칠부의 지원을 받아 백정의 왕위를 찬탈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577년에 이찬 세종이 서쪽 변경의 주군으로 침입하여온 백제군을 일선군(지금의 선산) 북쪽에서 격파하여 3,700여명을 참획하는 전과를 올리고, 또 이듬해 7월에는 백제의 알야산성을 점령했다. 내리서성을 축조하여 백제의 공격에 대비하기도 하였으나, 2년 뒤에 백제가 웅현성(지금의 보은근처)과 송술성을 쌓음으로써 막히고 말았다. 578년에는 중국 남조의 진나라에 사신을 파견, 진흥왕 이래의 외교관계를 유지하였으나, 재위 4년 만에 폐위되었다. 진지왕이 왕위에 오르던 때부터 실질적 왕권은 사도태후와 진흥왕의 애첩 미실이 장악하고 있었고, 왕권을 상실한 진지왕은 정사는 안중에도 없고 매일 잉첩들과 어울려 색사를 즐겼다. 이렇듯 진지왕이 황음을 일삼으면서 사도태후와 미실의 말을 듣지 않자, 그들은 진지왕을 폐위시키고 동륜의 아들 백정(진평왕)을 왕으로 세웠다. 그 후 진지왕은 별궁에 유폐된 채 지내다가 579년 7월 17일 생을 마감했다. 시호를 진지라 하고 능은 경주 영경사 북쪽에 있다.

 

Posted by 원주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