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왕의 계보에 대해 알아보자.
제11대 조분왕(이사금)
제9대 벌휴왕 - 부인 - 장남 골정 - 옥모부인 김씨
석씨, 생년 미상~247년
재위기간: 230년 3월~247년 5월. 총 17년 2개월
부인: 3명
자녀: 2남 2녀
아이혜부인 석씨 - 명원부인, 광명부인(제13대 미추왕의 왕비)
후비 박씨 - 제14대 유례왕
후비 - 걸숙(제15대 기림왕의 아버지)
조분(혹은 제분)이사금은 벌휴왕의 태자였던 골정의 장남이며, 옥모부인 김씨 소생이다. 내해이사금이 죽을 때 사위인 조분에게 왕위를 잇도록 유언하였다고 하지만, 조분은 이미 벌휴의 대손이었고 개인의 능력이 뛰어났다는 것도 왕위계승의 충분한 이유가 될 것이며, 왕비계 김씨세력의 영향력도 있었을 것이다.
230년 즉위함과 함께 연충을 이찬에 임명하고, 영토 확장에 주력하여 내해왕의 태자였던 우로를 이찬에 임명하고 대장군으로 삼아 231년 7월에 감문국(경상북도 김천시 개령) 토벌을 명령한다. 감문국은 원래 가야에 속해 있다가 거등왕 때에 6가야 연맹 체제가 무너지면서 신라가 지배권을 획득한 땅으로 판단된다. 감문국은 신라의 국상을 틈타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려는 움직임을 보인 듯하다.
하지만 감문국은 우로가 이끄는 신라군에 의해 무너졌고, 이어 조분왕은 이 땅을 속군으로 만들어 신라 땅으로 확정했다. 231년 4월에 왜군 수천이 금성으로 쳐들어왔다.
금성을 급습한 왜군은 오히려 신라군의 반격에 밀려 병력 1천여 명을 잃고 퇴각하게 된다. 패퇴한 왜군은 232년 5월에 신라의 동해안 마을들을 약탈하였다. 조분왕은 우로를 앞세워 왜군을 대적하게 하였고 우로는 바람과 화공을 이용하여 왜인들의 배를 불태우고 적병을 수장시켰다. 이 싸움 이후 왜왕은 함부로 군대를 동원하지 못했다. 그러나 몇 년에 걸친 왜군의 약탈로 해안의 주민들은 큰 피해를 입고 있었다.
조분왕은 그런 민심을 달래기 위해 234년 정월부터 동쪽 순행길에 올라 난민들을 위로하고, 피해 상황을 조사하여 복구하도록 하였다.
236년 2월에는 골벌국(경상북도 영천)의 왕 아음부가 스스로 백성들을 이끌고 와서 신라에 항복하자, 병합하여 각각 군으로 삼았다. 북진정책에 따라 신라군은 남한강을 따라 북쪽으로 올라갔다. 245년에는 다시 북한강을 건너 칠중하(임진강) 근처까지 다다랐는데, 이와 같은 행동은 고구려를 크게 자극하여, 그해 10월 고구려의 동천왕은 북변을 쳐들어왔다. 우로가 군대를 지휘하며 고구려 군에 대항했지만, 고구려군에 패하고 마두책을 지켰다.
고구려 수도 평앙에 위나라가 관구검을 앞세워 평양으로 쳐들어올 것이라는 소식이 전해지자, 양국의 전쟁 양상은 자연스럽게 교착상태로 빠져들었다. 이는 신라본기에 기록된 신라에 대한 고구려의 첫 번째 침공이다. 이 같은 대외전쟁을 주도하였던 내해이사금의 태자인 우로는 244년에 이찬에서 서불한(이벌찬의 별칭)이 되었고 병마사도 맡아보았다.
조분왕은 그런 와중인 245년 5월에 생을 마감했다. 그의 치세 중엔 두 번의 재해 외에는 별다른 재해가 없었고 주변국과의 전쟁에서도 거의 승리로 이끌었다. 따라서 조분왕 치세는 비교적 평화롭고 안정된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 덕분에 석씨 왕조에 대한 백성들의 신뢰가 높아지는 계기가 되었다.
제12대 첨해왕(이사금)
제9대 벌휴왕 - 왕비 - 장남 골정 - 옥모부인 김씨
석씨, 생년 미상~261년
재위기간: 247년 5월~261년 12월. 총 14년 7개월
부인: 기록 없음
자녀: 기록 없음
첨해이사금은 석골정의 차남이며, 옥모부인 김씨 소생이다. 즉위년(247년)에 아버지 골정을 세신갈문왕에 봉함으로써, 자기가 벌휴왕의 적손임을 과시했던 것이다. 따라서 첨해이사금의 즉위를 형제상속으로 보기도 하고, 골정계의 독립이라는 점에서 가계내의 계승으로 보기도 한다.
248년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 화친을 맺었고, 왜와도 역시 화친 관계를 맺었다. 이런 일들은 그의 즉위와 동시에 추진되었고, 바로 이듬해에 매듭지어졌다. 주변국인 고구려와 왜에 대해 저자세의 외교로 대응하는 첨해왕의 정책에 불만을 품고 있던 재상 석우로는 주변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조만간에 너희 국왕(왜왕)을 염전의 노비로 만들고, 왕비는 찬부(식모)로 만들 것이다."라는 왜왕을 모독하는 욕설을 퍼부었다. 이 말이 왜국 사신을 통해 왜로 들어가게 되면서, 왜와 신라의 관계는 급격히 냉각되었고, 왜왕이 군대를 동원하여 신라를 공격하기에 이른다.
첨해는 이 사태의 원인 제공자인 우로를 몰아세웠고, 결국 우로는 스스로 왜군 장수 우도주군을 찾아가 사과를 해야만 했다. 하지만 왜장 우도는 분을 이기지 못하고 우로를 화형 시킨 뒤 본국으로 돌아가 버렸다. 『삼국사기』는 우로가 왜의 사신 앞에서 왜왕을 모독하는 발언을 한 것처럼 기술하고 있으나, 그간 우로의 행적을 볼 때, 이는 첨해의 친왜정책을 비판하던 우로를 제거하기 위한 첨해왕의 은밀한 책략이라 보는 견해도 있다.
비록 큰 실수를 하긴 했지만, 그는 한 나라의 왕족이요 재상이었던 사람이 왜장의 손에 화형 당했는데도 첨해왕은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고 이로 인해 첨해왕은 왕실과 백성들에게 큰 원망을 듣게 된다. 첨해왕 대에는 정치의 불안정과 기근, 그리고 전쟁이 끊이지 않았다.
255년 백제가 봉산성(지금의 영주)을 공격해왔고, 봉산성은 지켰지만 신라군의 사기는 크게 떨어졌다. 259년에는 또 한 차례 가뭄이 닥쳐 메뚜기 떼가 창궐하여 큰 흉년이 들었고, 260년에는 큰비가 내려 40여 군데의 산이 무너졌고, 그 해 7월에는 혜성이 나타나 첨해왕의 불안을 가중시켰다. 그런 어수선한 상황에서 또다시 백제가 침입해 올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고, 첨해왕은 어떻게든 전쟁을 막기 위해 백제에 사신을 보내 화친을 요청했으나, 백제의 고이왕은 이를 거절했다. 첨해왕이 죽은 것은 그 해(261년) 12월이었다. 죽음의 원인은 기록되지 않았고, '갑자기 병이 들어 죽었다.'고만 쓰여 있다.
치세 중 영토의 확장에 노력하여, 달벌성(지금의 대구)을 쌓았으며 사벌국(지금의 상주)을 점령하였다. 그리하여 이때에는 사로국이 진한의 전 지역을 통일하였다. 재위 3년(249년) 7월에 대궐 남쪽에 남당을 지었는데, 이는 왕이 대신들과 함께 정사를 논의하고 결정하는 곳이었다. 도당으로 불린 남당은 왕과 신하들이 토론을 벌였던 일종의 정치토론장으로, 이때 시작된 남당의 전통은 신라 말기까지 이어졌다.
제13대 미추왕(이사금)
김구도(김알지의 5대손) - 박씨(갈문왕 이칠의 딸)
김씨, 생년 미상~284년
재위기간: 261년 12월~284년 10월. 총 22년 10개월
부인: 1명
자녀: 없음
광명부인 석씨(제11대 조분왕의 차녀)
미추이사금은 미조 또는 미고, 미소라고도 불렸으며, 김알지의 5대손 김구도의 아들이고, 갈문왕 이칠의 딸 박씨 소생이다. 미추의 계보는 알지에서부터 비롯하여, 알지→세한→아도→수류→욱보→구도→미추로 이어진다. 그러나 문무왕릉비문을 비롯한 금석문 자료에는 김씨 왕실의 시조를 성한이라 하여, 이를 세한으로 보는 설과 반대의 설이 있어 아직 결론이 나지 않았다.
미추의 조상으로 역사에 나타나는 인물은 아버지인 구도로서 그는 8대 아달라이사금에서부터 9대 벌휴이사금 때까지 활약한 인물이며, 263년에 갈문왕으로 추봉되었다. 구도는 이칠 갈문왕의 딸인 술례부인 박씨와 혼인하였고, 그의 딸인 옥모부인은 골정 갈문왕과 혼인하였다. 따라서 미추왕은 신라 왕실을 이끌고 있던 박씨나 석씨가 아닌 김씨로서 최초로 왕위에 오른 인물이다. 『삼국사기』는 미추의 왕
위 계승에 대해 '첨해가 아들이 없었으므로 백성들이 미추를 왕으로 세웠다.'고 쓰고 있다.
첨해왕은 조분왕의 큰사위인 석우로에게 돌아갈 왕위를 탈취하여 왕자에 오른 인물이었다. 재상 석우로가 왜왕에게 화형을 당한 뒤, 첨해왕은 석씨와 박씨 왕실로부터 심한 반발을 사게 된다. 첨해왕과 그 정적들의 다툼은 그 후로 8년 동안 지속되었으며, 그가 죽은 뒤 신하들의 추대로 왕위에 오른 사람이 미추왕이다. 미추이사금의 비는 조분이사금의 딸인 광명부인으로, 결국 그는 조분이사금의 사위라는 자격으로 왕위에 올랐다.
첨해왕을 제거하긴 했으나, 미추왕의 왕위 계승은 그리 쉽지 않았다. 첨해왕의 추종세력들은 미추의 즉위를 받아들이지 않고, 미추왕이 즉위하자, 곳곳에서 난을 일으켰다. 미추왕 재위 2년(263년) 정월에 이찬 양부를 서불한에 임명하고 내외병마사를 겸하게 했는데, 미추왕파가 반대파를 제거하고 조정의 안정을 되찾고 있음을 알 수 있다. 263년 2월에 시조묘에 제사를 올리고 정식으로 왕위를 승계했음을 천명했다. 264년 2월엔 직접 동쪽 지방을 순행하며 백성들과 함께 바다에 제사를 지냈으며, 3월에는 황산에 행차하여 험악해진 민심을 달래기도 했다. 미추왕이 이렇듯 내정의 안정에 전념을 쏟고 있던 266년 8월에 백제가 봉산성(경북 영주 근방)을 근습해 왔다. 하지만, 그곳 성주 직선이 장사 2백 명을 거느리고 맞서 싸워 백제군을 패퇴시켰다. 미추왕은 국정을 안정시키는데 주력하였는데, 신하들과 정책을 토론하고, 그 토론장에서 도출된 결정을 직접 정책에 적용하는 형태를 띠었다.
268년에 신하들을 남당에 모아 놓고 자신이 직접 정사와 형벌의 잘잘못을 물었는데, 이는 조선 시대의 경연과 비슷한 모습이었다. 또한 각 지방에 사신들을 파견하여 전국을 순회토록 하고 백성들의 고통과 근심을 조사해 오도록 함으로써 민심과 민생의 안정에 각별한 노력을 기울였다.
272년에는 농사에 방해가 되는 일은 모두 금하라는 칙령을 내렸다. 276년, 신하들이 궁궐을 다시 짓기를 청하였으나 미추왕은 백성들에게 노동을 시키는 것은 중대사라 하여 거부하였다. 이렇게 철저히 백성의 입장에 서서 국가안정책을 수립해 나가자, 임금에 대한 백성들의 믿음이 강해져 민심은 물론이고, 정치, 경제, 군사 전반에 걸쳐 매우 안정되었다.
274년에 백제가 신라 변경을 침입해 왔으나, 신라군의 방어벽을 뚫지 못하고 패퇴하였다. 278년에는 신라의 전초 기지인 괴곡성(충북 괴성)을 포위하였으나 정복하지 못하고 그냥 돌아가게 된다. 백제의 침입이 계속되자, 미추왕은 281년 9월에 양산에서 대대적인 군대사열을 실시하여 신라 군대의 위용을 과시했다. 백제의 고이왕은 283년 9월에 다시 변경을 침입하여 노략질하고, 10월에는 괴곡성을 포위하였다. 미추왕은 일길찬 양질을 보내 백제군을 패퇴시켰다. 백제의 계속되는 침입으로 변경의 군대와 백성들이 고통을 당하자, 미추왕은 284년 2월 변경 지방 순행길에 오른다. 이때 미추왕은 이미 늙은 몸이었지만, 노구를 이끌고 험한 변경을 둘러보며 그곳을 지키는 군졸과 백성들을 위로했다. 그는 그해 10월, 재위 23년에 죽으니 대릉에 장사지냈다고 한다.
14대 유례이사금 14년 이서고국이 금성을 쳐들어 왔을 때 귀에 대나무 잎을 꽂은 죽엽군이 갑자기 신라군을 도와 이들을 물리친 일이 있는데, 이들 병사들이 돌아간 곳을 찾아보니 죽장릉 위에 대나무 잎이 쌓여 있어 선왕의 음덕이라는 것을 알았다는 설화가 있다. 능은 흥륜사 동쪽에 마련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제14대 유례왕(이사금)
제11대 조분왕 - 후비 박씨(갈문왕 나음의 딸)
석씨, 생년 미상~298년
재위기간: 284년 10월~298년 12월. 총 14년 2개월
부인: 기록 없음
자녀: 기록 없음
유례(또는 유리)이사금은 제11대 조분왕의 장남이며, 갈문왕 나음의 딸 박씨 소생이다. 『삼국사기』의 주에는 『고기』를 인용하여 3대와 14대의 두 임금의 이름이 유리 혹은 유례로 똑같다고 하였다. 이른바 신라 상고왕위계승의 허구론에 의하면, 눌지와 위의 두 왕이 같은 왕명으로서 '늙'의 의미를 가진 역사시대의 눌지가 상대로 투사되어 만들어졌다고도 하고, 이들 셋은 '누리'의 뜻을 지녔고 박, 석, 김의 3성에 각각 이러한 이름을 가진 왕이 병립하여 있던 것을 하나의 계보로 만들어 버린 결과라고 보기도 한다. 그러나 최근에는 신라 상고의 기사를 그대로 믿는 경향으로 기울어져서, 유례이사금은 제11대 조분이사금의 맏아들이고, 어머니 박씨의 입 속으로 별빛이 들어와 잉태하였다는 전설이 있다. 조분이사금은 유례이사금의 할아버지일지도 모른다는 설도 있다. 선왕 미추가 네 명의 석씨 왕에 이어 조분이사금의 사위 자격으로 왕위에 올랐으므로 왕위는 다시 석씨인 유례에게로 돌아온 것이다.
유례왕이 왕위에 올랐을 때, 국제 관계는 여전히 복잡했다. 최대의 경쟁자인 백제와는 첨예한 대립을 지속하고 있었고, 왜와도 갈등을 겪고 있었다. 왜와의 갈등은 곧 왜와 긴밀한 관계를 형성하고 있던 가야와의 관계 악화를 의미했다. 이 시기 신라는 백제, 왜, 가야 삼국과 싸워야 하는 상황에 놓여 있었던 것이다. 왜의 관계가 악화된 것은 미추왕 말기에 일어난 석우로의 부인 명원부인 사건 때문이다.
우로는 첨해왕 3년(249년)에는 첨해왕의 계략으로 왜장 우도주군에 의해 화형 되었는데, 명원부인은 이 일로 왜국에 원한을 품고 있다가 왜에서 사신을 보내오자 왜국 사신을 개인적으로 대접하던 왜국 사신에게 술을 취하게 한 다음, 휘하의 장사들을 시켜 남편이 당했던 것과 똑같은 방법으로 그를 태워 죽였다. 이 사건으로 신라와 왜국 관계는 급격히 냉각되었다. 왜국 왕은 분을 이기지 못하고 대병을 동원하여 신라를 공격할 움직임을 보였는데, 그 와중에 미추왕이 죽고 유례왕이 즉위했던 것이다. 왜의 침입이 예상되는 가운데, 유례왕은 즉위와 동시에 전쟁을 대비해야 했다.
우선, 백제와 화해를 추진했다. 때마침 내정이 불안정했던 백제는 유례왕 재위 3년(286년)에 금성에 사신을 보내와 화친을 제의하고 화친이 성립된다. 이 화친으로 백제와는 당분간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하게 된다.
287년 4월, 왜병이 일례군을 공격해 마을을 불태우고 주민 1천여 명을 사로잡아갔다. 하지만 왜군의 공략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292년 왜군이 다시 쳐들어왔다. 그해 6월에 왜군이 사도성(경북 영일만 일대)을 공격하여 점령하자, 유례왕은 일길찬 대곡에게 군사를 안겨 사도성을 탈환했다. 왜군은 물러가면서 성을 불태우고 많은 주민을 잡아갔다. 그 무렵 가야는 왜를 지원하고 있었는데, 유례왕은 그런 가야에 대해 몹시 분개하고 있었다. 그래서 왜가 물러가자, 군대를 동원하여 가야를 공격하였다. 신라의 느닷없는 침략으로 가야는 졸지에 전쟁에 휘말렸다. 그러자 왜는 가야를 구원하기 위해 다시 군대를 동원해 294년에 사도성 근처에 있는 장봉성을 공격해 왔다.
293년 사도성을 개축하고 사벌주(지금의 상주)의 호민 80여가를 옮겨 살도록 조치함으로써 사도성 일대를 안정시켰던 덕분에 사도성의 민심이 안정되어 왜군의 장봉성 공략을 가까스로 막아 낼 수 있었다. 왕은 백제군과 연합하여 왜에 원정할 것을 꾀하였으나, 서불한 홍권의 만류로 그만두었다고 한다. 유례왕은 계속 왜와 가야에 강경한 태도를 취했는데, 297년 정월, 가야는 신라와의 경계인 이서고국(지금의 청도)에 병력을 집결하고 금성을 공략해 왔다. 거센 가야 병력의 공격으로 수세를 면치 못한 채 당황하고 있던 신라군은 뜻밖의 원군을 만났다. 어디서 온 병력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귀에 댓잎을 꽂은 병사들이 나타나 가야군을 패퇴시켰다.
가야군이 물러간 뒤, 수만 개의 댓잎이 죽장릉에서 발견되어, 백성들은 미추왕이 하늘의 군대를 보내 전쟁을 도왔다고 믿었다(그러나 아마도 댓잎군사는 백제의 책계왕이 보낸 군사였을 가능성이 높다. 당시 가야와 왜 등과의 관계를 생각하여 드러내어 도와주지 못하고 변장하여 나타나 도와준 것으로 추측된다).
재위 15년째인 298년 2월에는 경도 서라벌에 닷새 동안이나 사람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짙은 안개가 끼었다는 기사가 보이고, 그해 12월에 유례왕의 사망기사가 보인다. 능과 가족에 대한 기록은 전혀 남아 있지 않다.
제15대 기림왕(이사금)
제11대 조분왕 - 후비 - 차남 걸숙 - 부인
석씨, 생년 미상~310년
재위기간: 298년 12월~310년 6월. 총 11년 6개월
부인: 기록 없음
자녀: 기록 없음
기림이사금은 기립이라고도 불리었으며, 조분이사금의 아들, 손자, 증손이라는 등 여러 설이 있으나, 나이 차이로 보아서 아들일 가능성은 희박하다. 기림이사금이 조분이사금의 손자나 증손일 경우, 아버지는 걸숙이고, 어머니는 아이혜부인다. 그러면 기림은 유례왕의 동생인 걸숙의 아들인데, 유례왕을 이어 조카인 기림이 왕위를 이은 것이다. 여기에는 기림이 유례의 사위의 자격으로 왕위에 올랐을 것이라 보는 견해도 있다.
재위 3년(300년) 정월에 왜국과 외교관계를 맺었으며, 이는 왜와의 전쟁 때문에 불안한 전쟁에 휘말려야 헸던 신라인들에게는 의미 있는 일이었다.
또, 비열홀(지금의 함경도 안변)을 사찰하였다는 기사와 3월에 낙랑과 대방 두 나라가 항복해 왔다는 기사가 보이는데, 이는 학자들 사이에서 논란이 되는 부분이다. 당시 비열홀은 고구려의 지배 아래 놓여 있었지만, 고구려는 내정의 불안과 중원의 급격한 변화에 대응하느라 한반도 쪽을 돌아볼 이유가 없었다. 이때, 동예(한반도 낙랑) 왕실의 후예들을 끌어오는데, 기림왕이 직접 동예의 도성인 안변으로 찾아가 설득하여 신라로 데려오게 된다.
기림왕 재위 3년에 낙랑이 항복해 왔다는 이 기사는 동예의 왕실 후예들이 대거 망명해 온 사실을 기록한 것으로 추측된다. 이로써 소백산맥 이북으로 영토를 확장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게 되었다. 대방(지금의 중국 산동 지역)은 247년에 그 곳의 태수 궁준이 백제의 고이왕과 싸우다 패배하여 전사하자 백제와 결혼 동맹을 맺어야했고, 책계왕 대에 이르러 백제는 완전히 대방을 병합하여 대륙백제 건설했는데, 이에 백제의 행정은 대륙과 한반도로 분리되어 대륙은 왕이 직접 다스렸고 한반도는 외척이 다스리는 형태를 유지하게 된다.
한성을 다스리던 외척 진씨 세력의 학정이 반발하여 비류가 구수왕의 아들임을 자처하며 반란을 일으켰는데, 한성을 장악했다. 이때, 대방의 왕족들이 신라 땅으로 달아났는데, 기림왕 3년에 대방이 항복해 왔다는 기사는 한성에 머물고 있던 대방의 볼모가 신라로 달아나 망명한 것을 기록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재위 10년(307년)에는 '덕업일신 망라사방'라는 내용이 기사에 나오는데, 이는 탈해왕 이후 계림국으로 쓰던 것을 신라로 복구했다는 뚯이다. 원래 신라는 서라, 사로, 신라, 계림 등으로 불렀는데, 탈해왕 대에 계림으로 부르다가 기림왕 대에 다시 계림을 폐하고 종전의 명칭으로 되돌렸다는 것이다. 그리고 지증왕 대에 가서 '신라'를 국호로 확정하게 된다. 이외에 몇 가지 재해에 관한 기사도 보인다. 재위 5년에 봄과 여름에 걸쳐 심한 가뭄이 들었고, 7년에는 8월과 9월에는 지진이 발생하여 금성의 민가가 무너지고 사망자가 발생했다.
재위 13년에 생을 마감했으며, 능과 가족에 관한 기사는 알려지지 않는다.
'신라 역사와 문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삼국시대 신라는 백제,고구려와 어떤 관계로 유지해 왔는지..신라왕들의 세계에서 확인하시겠습니다. (0) | 2013.09.14 |
---|---|
삼국시대 신라왕중에서 제21대 소지왕부터 제25대 진지왕까지에 대해 알아볼까 합니다. (0) | 2013.09.14 |
신라왕들의 계보는 어떻게 될까요...제16대왕~제20대왕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0) | 2013.09.14 |
신라의 역사를 보면 미래가 보인다?..신라왕 계보입니다.(제6대왕부터 10대왕까지) (0) | 2013.09.14 |
우리의 역사를 아는가? 그 첫번째로 알아야 할 신라왕의 계보에 대해 알아보자.(제1대왕~제5대왕계보) (0) | 2013.09.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