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역사와 문화2013. 9. 14. 18:37

 

 

 

서울시 문화재를 찾아서 - 백제와 고구려의 싸움터, 몽

백제와 고구려의 싸움터, 몽촌토성

현재 송파구 방이동 지역에 위치한 몽촌토성은 전일에는 강동구 이동(二洞)으로 불리던 곳으로 1970년대까지만 해도 국립 경기장 지역으로 지정된 곳이었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라는 말이 있지만 이 곳은 올림픽경기장 시설이 들어서게 됨에 따라 크게 변모되었다. 이 지역은 1980년 초까지도 국립 경기장 지역으로 지정되었기 때문에 주택을 신축하거나 증축을 하지 못해 초가집이 남아있는 등 농촌모습을 그대로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이곳 주민들은 이동이란 동명보다 ‘몽촌(夢村)’으로 부르기를 좋아하였다. 따라서 이 곳의 토성을 몽촌토성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 마을의 이름을 붙인 것이다.

몽촌토성은 사적(史蹟)으로 뒤늦게 지정되기도 했으나 1983년과 1984년에 4개 대학에서 발굴조사를 하면서부터 널리 알려졌다. 이 토성은 타원형으로 연결된 야산을 이용하여 그 위에 진흙을 쌓아 성벽을 만든 것으로 남북의 길이가 750m, 동서의 길이가 500m가 되고, 본성(本城)과 이보다 작은 외성(外城)으로 되어 있다. 이 당시 발굴조사 결과를 보면 몽촌토성이 2,000년 전 백제의 서울 위례성(慰禮城)으로 추정하였으므로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촌토성

실제로 백제가 건국 초부터 500년간 위례성을 서울로 삼았던 것은 잘 알려진 일로서 이 곳을 지키기 위해 풍납토성, 아차산성, 이성산성을 쌓았을 것이다.

 

지금부터 1,600년 전, 고구려의 16대 고국원왕이 전사한 후 고구려와 백제는 서로 적대 관계에 있었다. 그러던 차에 고구려의 영주(英主)로 알려진 19대 광개토왕이 왕위에 오르자 백제의 진사왕과 국민들은 전쟁이 일어나지 않을까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진사왕 8년(392) 7월.

광개토왕은 친히 4만 명의 대군을 이끌고 공격해 옴으로써 전쟁의 막은 올랐다. 이때 백제는 10여 성을 빼앗기고 다시 4년 후 아신왕(阿莘王) 때도 수륙 양면으로 공격해 오는 고구려 군을 맞아 백제군은 용감히 싸웠으나 한강 이북의 땅은 모두 잃고 말았다.

광개토왕에 이어 왕위에 오른 장수왕은 남쪽의 기름진 땅과 따뜻한 기후를 차지해야겠다고 생각하였다. 장수왕은 이 계획에 따라 서울을 평양으로 옮기고 백제와 신라를 여러 번 공격하였으나 수비가 워낙 튼튼해 쉽사리 성공하지 못하였다. 이에 장수왕은 백제 내부의 허실을 살펴 공격을 해야겠다는 전략으로 바꿔, 중 도림(道琳)을 백제에 파견하였다.

이 당시 백제 개로왕(蓋鹵王)은 장기, 바둑을 즐겼다. 바둑의 고수(高手)인 도림은 개로왕에게 접근하기 위해서 어느 날 궁궐 앞에 나아가,

“소승이 일찍부터 바둑을 배워서 자못 묘수(妙手)가 있사온데 왕께 뵈옵기를 원합니다.”

하였다. 이에 왕이 그를 불러들여 대국해 보니 과연 국수(國手)가 아닌가. 개로왕은 크게 기뻐하여 도림을 귀한 손님으로 대하고, 날마다 밤이 깊도록 바둑을 두었다.

“내 일찍이 그대와 같은 사람을 만나지 못한 것이 한이 되오. 그대는 재주가 뛰어난데 비해 너무 겸손한 것 같소.”

“아니옵니다. 소승이 여태껏 한 가지 재주로만 은총에 보답해 왔을 뿐 털끝만큼의 이익을 끼치지 못했습니다. 이제 전하께 한 말씀 드리려고 하는데 전하의 뜻이 어떠하신 지 모르겠습니다.”

하니, 개로왕이,

“어서 말해 보시오. 국가에 이익이 되는 일이 있다면 이것은 내가 그대에게 바라는 바이오.”

하였다.

고구려의 중 도림(道琳)은 개로왕(蓋鹵王)의 신임을 어느 정도 얻은 것으로 판단하였다.

그는 이제 백제의 국력을 약화시키는 목적을 이룰 수 있는 기회가 왔다고 생각하고,

“백제는 높은 산과 큰 강으로 둘러싸여 있기 때문에 이웃나라들이 감히 엿보지 못하고 받들어 섬기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전하께서는 밖으로는 위세를 뽐내시고 부유함을 보여서 남의 눈과 귀를 놀라게 해야 할 것인데, 그렇지 못하고 있습니다.”

라고 아뢰었다. 이에 개로왕이,

“그렇다면 어떤 일을 해야 이웃나라들이 이 백제를 넘보지 않겠소.”

“우선 왕실의 위엄을 보이기 위해서 궁궐을 크게 짓고 왕릉을 다시 만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홍수 때 백성들의 가옥이 물에 잠기고 떠내려가니 한강변의 제방을 단단히 쌓아야 합니다.”

도림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던 개로왕은,

“대사의 말이 옳소. 이제라도 백성을 동원해 면모를 일신해야겠소.”

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백제의 온 백성들은 흙을 구워 성을 높이 쌓고, 궁궐을 아름답게 꾸미는 일과 한강에 제방을 쌓는 일 등에 동원되었다.

그러나 이 토목공사로 국고는 바닥나고 백성들은 지칠 대로 지쳐 버렸다. 한편, 도림은 개로왕으로 하여금 대 토목사업을 일으키게 한 뒤 도망쳐 고구려로 돌아왔다. 그리고 장수왕에게 백제의 형편을 세세히 보고하였다. 이를 들은 장수왕은,

“그 동안 수고가 많았소. 이번에야말로 100년 전 고국원왕께서 전사한 원수를 꼭 갚고 말겠소.”

하고 도림에게 치하한 뒤 군사 3만을 일으켰다.

개로왕 21년(475) 9월.

장수왕은 기습 공격으로 7일 만에 한성(漢城)을 함락시키고 지체없이 한강을 건너 서울 위례성을 포위하였다.

 

백제 문화의 특징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뛰어난 건축 기술을 갖고 있다.

온화함과 섬세함이 잘 나타나 있다.

일본 고대 문화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미륵사지5층석탑

전북 익산시 금마면. 국보 제11호. 백제시대.

한국 석탑의 시원양식으로서 목탑이 석탑으로 이행하는 과정의 구조를 보여주는 중요한 탑이다.

탑의 규모로 보더라도 한국 석탑 중 최대의 걸작이다.

 

정림사지5층석탑

충남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 379. 국보 제9호. 백제시대.

부여 정림사터에 세워져 있는 석탑으로, 좁고 낮은 1층 기단(基壇)위에 5층의 탑신(塔身)을 세운 모습이다. 기단은 각 면의 가운데와 모서리에 기둥돌을 끼워 놓았고, 탑신부의 각 층 몸돌에는 모서리마다 기둥을 세워놓았는데, 위아래가 좁고 가운데를 볼록하게 표현하는 목조건물의 배흘림기법을 이용하였다.
얇고 넓은 지붕돌은 처마의 네 귀퉁이에서 부드럽게 들려져 단아한 자태를 보여준다.

낙화암

충남 공주시 산성동. 공주기념물 제42호. 백제시대. 1982∼1983년까지 공주사범대학에서 발굴하여 유적지가 확인되었으며 이 연지는 백제시대부터 계속하여 이용되어 왔음을 시사하고 있다. 백제시대 축성된 산성으로 백제 때에는 웅진성으로 불렸다가 고려시대 이후공산성으로 불리게 되었다.

 

부여성흥산성

충남 부여군 임천면 군사리. 사적 제4호. 백제시대 수도였던 부여를 수호하기 위해 금강 하류 대안에 축조된 가장 중요한 산성의 하나이다.이 산성은 백제시대 수도였던 부여를 수호하기 위해 금강 하류 대안에 축조된 가장 중요한 산성의 하나이다. 이 성홍산성은 501년에 축조되었다고 하며, 성주는 약 600m, 성벽 높이는 3∼4m이고, 우물터가 3군데에 있고 건물터도 현존하고 있다.

 

익산연동리석불좌상

전북 익산시 삼기면 연동리 산220-2. 보물 제45호.

불상은 머리만 없어졌을 뿐 불신, 대좌, 광배까지 고스란히 남아 있는 백제의 작품이다.
지금의 머리는 요즘 새로 만든 것이며, 불상의 현 신체 높이는 156㎝이다.

 

백제 문화의 특징

백제 문화재는 공주와 부여에 많이 분포되어 있다. 공주에는 무령왕릉이 그 당시 그대로의 모습으로 발굴되었다.

부여의 중심부에는 절터가 있고, 그 중앙에 정림사지 5층석탑이 잘 보존되어 있다. 석탑의 지붕동의 끈이 살짝 들린 모습이 가지런하면서도 날렵하게 보인다. 백제의 뛰어난 건축 기술과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

백제 문화의 특징인 온화함과 섬세함이 이 석탑에 잘 나타나 있으며, 이 문화를 일본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백제 문화는 탑, 불상, 절과 같이 불교 중심의 문화재가 많고 무령왕릉, 공산성, 송산리 고분 등에서 나오 벽화나 정림사지5층석탑, 금동대향로 등을 볼때 섬세하고 우아한 멋을 발견할 수 있다. 

 

 

 

 

 
Posted by 원주유
신라 역사와 문화2013. 9. 14. 15:12

 

 

고구려와 백제의 왕들이 두려워 했다고?..누굴? 신라왕...


제31대 신문왕
자의왕후 ․ 김씨, 정명, 생년미상 ~ 692년
재위기간 : 681년 7월 ~ 692년 7월. 총 11년
부인 : 2명

자녀 : 4남
폐비 김씨
신목왕후 김씨 - 이흥(32대 효소왕)
흥광(33대 성덕왕)
근질, 사종 (4남)

신문왕은 문무와의 둘째 아들이며, 자의부인 소생이다. 이름은 정명이며 문무왕 5년에 태자로 책봉되어, 681년 7월에 문무왕이 죽자 왕위에 올랐다. 왕비는 김씨인데 소판 흠돌의 딸이다. 왕이 태자로 있을 때 비로 맞아들였으나 오래되어도 아들이 없었으며, 나중에 그 아버지의 반란에 연좌되어 왕궁에서 쫓겨났다. 683녀에 다시 일길찬 김흠운의 딸을 왕비로 삼았다.

신문왕대는 태종무열왕 대부터 시작된 신라의 중대왕실의 전제왕권이 확고하게 자리 잡힌 시기이다. 왕이 즉위하던 해에 왕의 장인인 김흠돌을 비롯한 파진찬 흥원, 대아찬 진공 등의 모반사건이 있었으나 모두 평정하였다. 김흠돌의 반란은 왕권전제화의 계기를 만들어주었던 이 사건에는 많은 귀족이 참여하고 있었는데 여기에 대해서는 신문왕은 주동자뿐만 아니라 말단 가담자까지도 철저한 숙청을 가하였다(이때 화랑도의 낭도들이 대거 가담한 죄를 물어 화랑도를 폐지하고, 그 낭도들의 명단을 작성하여 모두 병부에 예속시켰다. 당시 화랑도의 풍월주 자리를 흠돌의 조카 신공이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흠돌의 반란에 화랑도의 남동들이 대거 가담했던 것이다). 신문왕은 귀족세력을 철저하게 탄압하려는 의도에서 과감한 정치적 숙청을 단행함으로써 전제왕권의 확립을 꾀하였다.

같은 해에 유교적 정치이념에 입각한 인재의 교육과 양성을 목적으로 하는 국학을 설립하고 여기에 경 1인을 두었다. 이것은 진덕여왕 대에 이미 국학에 소속된 대사라는 관직을 설치했던 것을 신문왕대에 와서 완성한 것이다. 한편 불교에도 관심을 두어 685년에는 봉성사와 망덕사를 준공하기도 하였다.

신문왕대에는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뒤에 증대한 중앙관서의 업무와 확대된 영역의 지방통치를 위한 제도정비도 이루어졌다. 우선 중앙관부에서는 682년에 위화부령 2인을 두어 인재등용에 관한 업무를 관장하게 하고, 공장부감과 채전감 각각 1인을 두었으며 686년에는 예작부경 2인을 두었다. 그리고 687년에는 음성서장을 경으로 올리고 688년에는 선부경 1인을 더 두어 늘어난 중앙관부의 업무를 처리하게 하였다. 특히 685년에는 각 관부에 행정실무를 담당하는 사지가 설치됨으로써 문무왕대에 설치된 말단행정 담당자인 사와 아울러 영, 경, 대사, 사지 사의 5단계 관직제도가 완성되었다.

지방의 통치제도에 있어서는 689년에 왕경의 지리적 한계를 문제 삼아 지금의 대구인 달구벌로 옮기려 하였으나 서라벌에 터전을 둔 귀족들의 반발에 부딪혀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러한 왕경의 편재에서 오는 불편함을 극복하기 위하여 이미 685년에 서원소경(지금의 청주)과 남원소경(지금의 남원)을 설치하고 진흥왕대에 설치된 국원소경을 중원소경(지금의 충주)으로 고침으로써 5소경제를 정비하였다. 또한 신라가 영역을 확장하는 과정에서 수시로 설치하여온 군정적 성격이 강한 주도 685년에 완산주(지금의 전주)와 청주(지금의 진주)를 설치함으로써 삼국통일 후의 확대된 영역의 효과적 지배를 위한 9주제를 비로소 완성하였는데(9주 5소경제 완성). 686년과 687년에는 여기에 따른 주 ․ 군 ․ 현의 정비가 있었다.

마지막으로 중앙의 군사조직에 있어서는 신라인을 중심으로 고구려 ․ 백제 ․ 보덕국 및 말갈인을 편입시켜 9서당을 완성하였다. 내외의 관제정비와 짝하여 689년에는 관리의 늑봉으로 지급하던 녹읍을 폐지하고 해마다 세조를 차등 있게 지급하여 관리의 기존의 경제적 기반을 무너뜨리고 전제왕권의 강화를 더욱 확고히 하였다.

이와 같은 중앙과 지방에 걸친 제도의 체계적 정비를 통하여 전제왕권을 중심으로 한 통치 질서를 완비한 신문왕은 중국제후의 5묘제를 본 떠, 687년에 중대왕실의 정통성을 수립하는 5묘제를 확립하였다. 이 밖에도 일본과 당나라에 사신이 빈번하게 내왕하였고 문화가 발전되고, 설총과 강수와 같은 대학자가 배출되는 등 전성시대를 이루었다. 능은 경상북도 경주시 배반동 낭산의 동남에 있다.

제32대 효소왕

신목왕후 김씨 ․ 김씨, 이홍 또는 이공, 생년미상 702년
재위기간 : 692년 7월 ~ 702년 7월. 총 10년
부인 : 기록 없음
자녀 : 없음
왕비 (기록 없음)

효소왕은 신문왕의 장남이며, 신목왕후 김씨 소생으로 이름은 이홍 또는 이공이다. 신문왕11년(691년)에 태자에 책봉되어, 이듬해인 692년 7월 신문왕이 죽자 왕위에 올랐다. 그의 태자 책봉 시기가 691년인 것을 고려할 때, 효소왕은 10대의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른 것으로 판단된다. 신문왕 대에 잡아놓은 기반으로 효소왕 시대의 정치와 사회는 안정된 편이었다. 하지만 왕이 어린 탓에 정사는 신문왕 대의 공신들에 의해 좌우되었다.

692년에 즉위하여서는 좌우이방부의 ‘이(理)’자가 왕의 이름과 같으므로 피휘하여 좌우의방부로 관부의 명칭을 고치기도 하였다. 즉위하던 해 8월에 대아찬 원선을 집사부 중시에 임명하여 국정을 위임하였다(중시는 진덕여왕 대인 651년에 처음 실시되어 무열왕과 문무왕을 거치면서 입지가 강화되었고, 신문왕 대엔 정치권력의 핵심으로 대두되었다. 따라서 효소왕 대에 이르면 상대등은 그저 상징적인 존재로 전략하고, 중시가 조정을 장악하게 된다. 행정부를 대표하는 집사부의 장관인 중시는 이후로 경덕왕 대에 시중으로 호칭이 바뀌는데, 신라 후반기에 이르면 왕권을 제약하거나 때론 능가하는 존재로 변신하게 된다).

같은 해에는 고승 도중이 당나라에서 귀국하여 천문도를 왕에게 바쳤다. 천문도는 고구려에 전래된 진탁의 성도와 같은 것으로서 왕실권위의 상징으로 이용되었다. 또한, 이 무렵에 의학 교육기관인 의학을 설립하여 의학박사를 두고 『본초경』『침경』『맥경』등의 중국 의학서를 교수하게 되었다.

재위 4년(695년)에 서시전과 남시전을 두었는데 이것은 지증왕 대에 설치된 동시전과 더불어 왕경의 3대 시전으로서, 서라벌 도성 안의 내시까지 합쳐 큰 시장이 넷이나 형성되어 물화의 유통을 쉽게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 해에 자월(음력 11월)을 정월로 정하였다가 700여년에 다시 인월(음력 1월)을 정월로 바꾸었다. 698년 3월 기사에는 “일본국 사신이 왓으므로 왕이 숭례전에서 그를 만났다.”는 기록이 보인다. 이로써 이즈음에는 신라에서도 왜의 공식 국호를 ‘일본’으로 사용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왜는 문무왕 10년인 670년에 자국의 공식 명칭을 ‘일본’으로 개칭했다고 통보해왔는데, 신라에서도 그 점을 인정하여 그들을 왜라고 부르지 않고 일본으로 부르게 된다. 699년에는 당나라에 사신을 파견하여 조공함으로써 양국과의 우호적인 외교관계도 유지하였다.

당시 권력을 장악하고 잇던 신문왕 대의 공신들의 힘이 왕권을 능가하는 지경에 이르자, 효소왕은 왕권을 되찾기 위해 공신들과 대결을 벌인다. 700년에 이찬 경영의 반란이 있었으며 이 사건에 연좌되어 698년에 중시로 임명되었던 순원이 파면되었다. 이듬해엔 영암군 태수로 있던 일길찬 제일을 사익을 탐한 죄를 물어 장형에 처하고 귀양 보내 버렸다. 그러나 이는 오히려 공신 세력을 단결시키는 결과를 낳았고, 그것은 효소왕의 몰락으로 귀결되었다. 효소왕은 경영의 모반 사건이 발생한지 2년 만인 702년 7월에 죽었는데, 이때 그의 나이는 불과 20대 초반이었다. 그가 젊은 나이에 뚜렷한 이유도 없이 죽었다는 것은 권신들에 의해 제거되었을 가능성이 있음을 뜻한다.

702년 7월에 죽어 망덕사 동쪽에 장사지냈다. 자식은 한 명도 두지 못한 것으로 전한다. 또한 부인에 대한 언급도 없다. 이는 그가 권신들에 의해 제거될 때, 부인과 자식 또한 함께 살해되었기 때문에 그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고 있다. 능은 경주 낭산 동남쪽에 있다.

제33대 성덕왕
신목왕후 김씨 ․ 김씨, 초명은 융기, 개명은 흥광, 생년미상 ~ 737년
재위기간 : 702년 7월 ~ 737년 2월. 총 34년 7개월
부인 : 2명
자녀 : 4남 1녀
성정왕후 김씨 - 중경, 수충 (2남)
소덕왕후 김씨 - 승경 (제34대 효성왕)
헌영 (제35대 경덕왕), 사소부인 (2남 1녀)

성덕왕은 신문왕의 차남이며, 신목왕후 소생으로 효소왕의 동복아우이다. 본명은 융기였으나, 당나라 현종의 이름과 같았던 탓에 재위 11년 3월에 당의 칙명에 의해 흥광으로 고쳤다. 효소왕이 후계자 없이 죽자, 702년 7월에 왕위에 올랐다.

성덕왕대는 통일신라시대에 있어서의 정치적인 안정을 바탕으로 사회전반에 걸쳐서 전성기를 구가한 시기였다. 우선 정치적으로 국가의 행정을 담당하는 집사부의 중시가 일체의 정치적 책임을 지게 됨에 따라 전제왕권은 보다 강화될 수 있었다.

이찬 원훈이 성덕왕이 즉위하던 702년에 중시에 임명된 이래로 원문, 신정, 김문량, 김위문, 효정, 김사공, 문림, 선종, 윤충 등 10명의 인물이 성덕왕대에 중시로서 활동하였다. 재위 3년인 704년에 승부령 소판 김원태의 딸을 왕비로 받아들여 왕실의 기강을 다잡았고, 711년에는 왕이 백관잠을 지어 군신에게 제시하였다. 백관잠의 구체적인 내용은 전하지 않고 있으나, 아마도 전제왕권 하에서 신하가 지켜야 할 계명을 적은 것으로서 유교적인 충군사상이 주요내용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성덕왕대에는 이찬 개원을 비롯하여 인품, 배부, 사공 등 4명이 상대등으로 재직하였으나 정치적으로 힘이 없었던 것으로 보아, 귀족회의의 대표자였던 상대등의 활동이 위축된 것을 살펴 볼 수 있다.

국방시책으로는 721년에 하슬라도(지금의 강릉)의 정부 2,000명을 징발하여 북경지방에 장성을 축조하는가 하면, 재위 21년(722년)에는 모벌군성(지금의 경주시 외동면)을 축조하여 일본의 침입로를 차단하기도 하였다. 731년에 일본의 병선 300척이 동해변을 습격하자 이를 공격하여 대파시켰다.

733년에 발해가 바다를 건너 당나라 등주를 공격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그러자 당 현종은 신라에서 발해의 남부 지역을 공격해 줄 것을 요청했고, 성덕왕은 그 요청을 받아들여 출전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도중에 폭설을 만나 길이 막히고, 많은 동사자가 발생하는 바람에 돌아와야만 했다. 그러나 이런 노력 덕분에 당과의 관계는 더욱 돈독해졌고, 그 결과 734년에는 당나라와의 외교적 현안이었던 국경문제를 패강(지금의 대동강)으로 확정지었다. 이로써, 신라의 영토는 대동강에서 원산만에 이르는 이남지역으로 결정되었다. 성덕왕은 이 지역의 민심수습과 북방경영을 위하여 이찬 윤충, 사인, 영술 등을 파견하여 평양주와 우두주(지금의 춘천)의 지세를 조사하게 되었다.

성덕왕은 국내의 정치안정을 기반으로 활발한 외교활동을 추진하였다. 703년에 일본국의 사신을 접견하는 둥 일본과의 관계를 계속적으로 유지해 나갔으며, 당과의 관계도 더욱 밀착되어 갔다. 하지만, 새로 일어난 발해와는 당과의 관계 때문에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게 된다. 703년에 아찬 감사양이 당나라에 조공한 이래 36년 동안 당에 파견된 신라의 사절횟수는 43회로서 신라 중대왕실의 다른 어느 왕 때보다도 많았으며 사절의 내용은 주로 조공과 숙위, 그리고 하정이었다. 이러한 당과의 빈번한 외교적 교섭은 신라의 국제적 지위를 확고하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중국문물의 수입에도 적극적으로 기여하게 되었다. 704년에 입당사 김사양이 귀국하여 최승왕경을 바쳤고, 717년에는 숙위 김수충이 귀국하여 문선왕과 10철 및 72제자의 화상을 바치므로 국학에 봉안하였다. 이는 전제왕권 안정에 필요한 정치이념으로서의 유교의 적극적 수용의지를 반영한 것이며, 728년 에는 왕제인 김사종을 당나라에 파견하면서 신라 귀족자제들의 당나라 국학의 입학을 요청하였다. 717년에 의학박사와 산박사를 각각 1인씩 두었고, 718년에는 누각을 처음으로 제작하였다.

이러한 기술관계의 관직설치와 시설은 모두 유교적 이상정치인 위민 및 농본정책의 시행을 위한 바탕이 되었다. 705년과 706년에 기근이 들어 백성들이 고통 받자, 관리를 파견하고, 창고의 곡식을 나눠주어 구제하였으며, 백성들에게 오곡의 종자를 나누어 주었다.
그리고 722년에는 모든 백성들에게 비로소 정전을 지급하였는데, 정전은 정을 기준으로 하여 백성들에게 지급한 토지라는 뜻일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국가가 실제적으로 백성에게 토지를 지급하였다는 것이 아니라 자영농민이 본래 소유하고 있던 토지에 대한 국가적 인정을 뜻하는 것으로서 농업생산력의 증대를 가져왔으며, 그 결과 국가는 농민으로부터 많은 세를 거두어들일 수 있었고 재정적 기반을 견고히 할 수 있게 되었다.

성덕왕은 재위 36년째인 737년에 죽었다. 시호는 성덕이며, 이거사의 남쪽에 장사지냈다. 왕릉은 현재 경주시 조양동에 있다.

제34대 효성왕
소덕왕후 김씨 ․ 김씨, 승경, 생년미상 ~ 742년
재위기간 : 737년 2월 ~ 742년 5월. 총 5년 3개월 
부인 : 3명 
자녀 : 없음
왕비 박씨
혜명왕후 김씨
후비(영종의 딸)

효성왕은 성덕왕의 셋째 아들이고, 소덕왕후 소생이며 이름은 승경이다. 성덕왕 23년 724년에 태자에 책봉되었으며, 737년 2월에 성덕왕이 죽자 왕위에 올랐다.
효성왕은 즉위하면서 사정부의 승과 좌우의방부의 승을 모두 좌로 바꾸었는데 이것은 ‘승’자가 왕의 이름에 저촉되기 때문이다. 즉위하던 해(737년) 3월에 아찬 정종을 상대등에 임명하여 귀족회의를 관장하게 하고 아찬 의충을 집사부의 중시에 임명하여 행정을 담당하게 하였다. 739년 의충이 죽자 이찬 신충을 중시에 임명하고, 왕제인 헌영(뒤의 경덕왕)의 관등을 파진찬으로 하여 태자로 삼았다. 또, 전 왕인 성덕왕 때에 정상화된 당나라와의 외교적 관계를 한층 강화하는 한편, 외교적 통로를 이용하여 중국의 선진문물을 수입하였다. 특히 738년에 당나라 사신 형숙이 신라에 올 때 당나라 현종이 그에게 ‘신라는 군자의 나라’라고 일러준 것을 보아도 당시 신라의 문화수준을 가늠할 수 있다. 이때 형숙은 노자의 『도덕경』을 비롯한 서책을 왕에게 바쳤는데, 여기서 신라의 선진문물에 대한 수용 자세를 엿볼 수 있다.

740년에는 파진찬 영종의 모반사건이 있었으나 모두 평정되었다. 반란의 원인은 영종의 딸이 효성왕의 후궁이 되어 왕의 총애를 받았는데 왕비가 이를 시기하여 그의 족당과 더불어 후궁을 모살하였다. 이에 영종이 왕비의 족당을 원망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이를 보면 단순한 여인들의 투기가 정치적 반란을 유발한 것 같으나 실제는 성덕왕대에 전성을 구가하던 중대 왕실의 전제왕권이 점차 약화되면서부터 그간에 축적되었던 정치적 모순이 드러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즉, 귀족세력이 왕권의 약화를 틈타 다시 세력을 뻗치기 시작하였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특히, 이러한 현상은 741년에 귀족세력의 대표인 상대등 정종과 경덕왕 대에 상대등으로 활동하는 사인이 왕을 대신하여 열병한 사실에서도 확인된다. 재위 6년째 되던 742년 5월에 죽으매 시호를 효성이라 하였는데, 유명에 따라 법류사 남쪽에서 화장하여 유골을 동해에 뿌려진 까닭에 능은 조성되지 않았다.

제35대 경덕왕
소덕왕후 김씨 ․ 김씨, 헌영, 생년미상 ~ 765년
재위기간 : 742년 5월 ~ 765년 6월. 총 23년 1개월

부인 : 3명
자녀 : 1남
삼모부인
경수왕후 - 건운(제36대 혜공왕)
제3비(이찬 순정의 딸)

경덕왕은 성덕왕의 넷째 아들이며, 소덕왕후 소생으로 이름은 헌영이다. 효성왕의 동복아우인 그는 파진찬 벼슬에 있다가 효성왕 재위 3년인 739년에 태자로 책봉되었다. 그리고 742년 5월에 효성왕이 죽자 왕위에 올랐다. 경덕왕 때에 이르러 새로운 귀족들이 세력을 확장하여 왕권이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이에 경덕왕과 행정 책임자였던 중시는 왕권강화를 위해 관제정비와 개혁조치를 실시했다.

744년에 이찬 유정이 중시에 임명된 이후, 대정, 조량, 김기, 염상, 김옹, 김양상 등 7인이 경덕왕 때에 중시를 지냈다. 경덕왕은 즉위 초부터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관제를 정비하고, 과감한 제도 개혁을 실시했다. 747년에 중시의 명칭을 시중으로 바꾸었으며, 748년에는 정찰 한 명을 임명하고 백관을 규찰하도록 했다. 이는 성덕왕 대부터 지속적으로 추진되던 전제왕권 체제를 가속화하기 위한 조치였다.

747년에 국학에 제업박사와 조교들을 두었고, 749년에는 천문박사 한 명과 누각박사 여섯 명을 두었다. 이런 전문 식견을 갖춘 학자 관료들을 육성하여 성덕왕 이래 추진되던 유교정치 구현의 토대를 형성한 것이다. 경덕왕은 근본적으로 유학 사상에 입각한 전제왕권 정치를 꿈꾸고 있었고, 중국의 한, 당의 정치를 그 모델로 삼고 있었다(중국의 것을 모방하는 정책). 따라서 이러한 일련의 제도적 장치는 당나라 태종이 그랬듯이 왕권을 강화하면서 동시에 귀족들의 세력을 약화시키는 데 목적이 있었다. 이에 한화정책은 귀족세력으로부터 비판을 받았다. 그는 756년 상대등 김사인은 상소에서, 최근의 빈번한 천재지변을 들어 현실정치의 모순에 대하여 신랄하게 비판하고, 시중에 대해서 정치적 책임을 물었다. 이때의 비판내용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아마도 경덕왕이 추진한 한화적 개혁정치가 비판의 대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비판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757년부터 김기가 적극적으로 한화정책을 추진하였다. 전국 주의 이름을 대대적으로 바꾸고, 그 휘하의 현과 군을 대폭 정비하였다. 사벌주를 상주로 고치고 1주 10군 10현을 예속시켰고, 상량주를 양주로 고치고 1주 1소경 12군 34현을 예속시켰으며, 청주를 강주로 고치고 1주 11군 27현을 예속시켰다. 또 한산주를 한주로 고치고 1주 1소경 27군 46현을, 수약주를 삭주로 고치고 1주 1소경 11군 27현을, 웅천주를 웅주로 고치고 1주 1소경 13현 29현을 예속시켰다. 하서주는 명주로 고치고 1주 9군 26현을 예속시켰으며, 완산주를 전주로 고치고 1주 1소경 10군 31현을, 무진주를 무주로 고치고 1주 1소경 14군 44현을 예속시켰다. 전국 9주의 이름을 모두 바꾸거나 간소화하고, 소속된 소경과 군현을 명시했다. 이로써 통일 이래 제대로 정비되지 못한 행정 구역을 확실하게 규정하였다.

758년 2월에는 내외의 관원을 막론하고 만 60일 이상 휴가를 얻은 자는 해직으로 간주하라는 교시를 내려 관료들의 기강을 다잡았다. 4월에는 의술을 깊이 연구한 사람들을 관료로 등용해 내공봉에 근무하게 하는 조치를 내렸다. 또 율령박사 두 명을 임명했는데, 이는 유학적 가치관에 바탕을 둔 법치주의를 강화하려는 의도에서였다. 759년에는 지방 행정 조직 정비에 이어 중앙 관명을 중국식으로 개정함으로써 제도 개혁에 박차를 가했다. 병부와 창부의 경과 감을 시랑으로, 대사를 낭중으로, 집사부의 사지를 집사원외랑으로, 집사사를 집사랑으로 개칭하였다. 각 부서의 대사는 모두 주부나 주서로 개칭하고, 예부의 사지를 사례로, 조부의 사지를 사고로, 영객부의 사지를 개칭하고, 승부의 사지를 사목으로, 선부의 사지를 사주로, 예작부의 사지를 사례로, 병부의 노사지를 사병으로, 창부의 조사지를 사창으로 개칭했다. 이러한 경덕왕과 집사부가 추진한 한화적 개혁정치는 혜공왕 대에 가서 귀족세력이 다시 왕권을 압박해 오면서 모두 옛 명칭으로 환원되고 만다.
경덕왕은 당나라왕의 외교관계에 있어서는, 전통적 방법인 조공과 하정의 사신을 11회나 당나라에 파견함으로써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였다. 한편, 일본과의 관계는 그리 원만하지 못하여 일본과는 거의 국교 단절 상태가 되고 말았다.

757년에 내외관리의 월봉을 혁파하고 다시 녹읍을 부활시켰다. 이것은 새로이 성장하는 귀족세력의 경제적인 욕구가 지금까지 세조만 받던 월봉을 혁파하게 하고, 녹읍의 부활을 제도화시킨 것이라 하겠다. 그해 8월에 조부에 사를 두 명 더 두어서 세수 업무를 한층 강화시켰다. 경덕왕 말기에 정치적으로 성장한 귀족세력은 763년에 경덕왕의 측근세력이었던 상대등 신충과 시중 김옹을 면직시켰다. 왕당파인 이들의 면직에 관한 구체적인 내용은 기록상에 나타나지 않으나, 왕권에 대한 귀족세력의 반발의 결과로 보인다. 이러한 추측은 김옹이 물러난 뒤 약 4개월의 공백기를 거쳐, 764년 만종과 양상이 각각 상대등과 시중에 임명되었기 때문에 가능하다. 여기서, 양상은 나중에 상대등으로서 혜공왕을 사해하고 신라 하대의 첫 왕인 선덕왕으로 즉위하는 인물로서, 경덕왕 때에 이미 귀족세력을 대표하고 전제왕권에 도전하는 존재였다. 따라서, 경덕왕 말년의 정치는 왕권과 귀족세력의 정치적 타협 위에서 존립할 수 있었던 것이다. 경덕왕은 재위 24년 만인 765 6월에 생을 마감했다. 능은 처음에 경지사 서쪽 언덕에 장사지냈으나, 후에 성덕왕의 능이 있는 양장곡으로 옮겨졌다.

 

Posted by 원주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