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역사와 문화2013. 9. 14. 15:19

 

 

신라왕들은 어떻게 살았으며, 어떤 업적을 남겼는지 보실까요.

 

제36대 혜공왕
경순왕후 ․ 김씨, 건운, 758~780년 
재위기간 : 765년 6월 ~ 780년 4월. 총 14년 10개월
부인 : 2명
자녀 : 기록 없음
신보왕후
창장부인

혜공왕은 경덕왕의 장남이며, 경수왕후 소생으로 이름은 건운이다. 758년에 태어났으며, 세 살 때인 760년에 태자 책봉되었고, 765년 경덕왕이 죽자 여덟 살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혜공왕은 태종무열왕의 직계손으로 계승된 신라 중대왕실의 마지막 왕이다. 즉위 했던 때의 나이가 8세였으므로 무후 경수태후의 섭정을 받아야 했다.

혜공왕 대에는 집사부 중시를 중심으로 강력한 전제왕권 체제를 구축했던 신라 중대 사회의 모순이 본격적으로 노정되었다. 즉 전제왕권의 견제 하에 있던 귀족세력들이 정치일선에 등장하여 정권쟁탈전을 전개함으로써 정치적으로 불안정하였다. 따라서, 혜공왕의 재위 16년 동안에는 많은 정치적 반란사건이 있었다. 먼저 일길찬 대공과 그의 동생 아찬 대렴이 768년에 반란을 일으켰으나 왕의 측근인물인 이찬 김은거를 비롯한 왕군에 의해서 토멸되었다. 이 반란은 경덕왕에 이어서 중대의 전제왕권 체제를 유지하려는 혜공왕 초년의 정치적 성격을 부인하려는 최초의 정치적 움직임이었다. 김은거는 이 반란의 진압에 대한 공로로 그해에 시중에 임명되었으며, 이찬 신유는 상대등에 임명되었다.

그리고 769년에 왕은 임해전에서 조신들에게 연회를 베풀고, 인재를 천건하게 하여 새로운 인재들을 모아 전제왕권 체제를 강화하려 하였다. 그러나 770년에는 대아찬 김융이 반란을 일으켰다. 이 반란도 대공의 반란과 마찬가지로 반 혜공왕적 성격의 것이었다. 김융의 난으로 김은거가 시중에서 물러나고 이찬 정문이 시중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혜공왕대의 정치적 사건 중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774년 감양상이 상대등에 임명된 사실이다. 즉, 김양상은 경덕왕 대에 시중을 역임하였으나 778년에 있었던 대공의 난에 연루되어 시중직에서 물러나고 왕의 측근인 김은거에게 시중직을 물려주었다. 이로써 보면 김양상은 적어도 친 혜공왕적인 인물은 아니었다. 그런데 김양상이 다시 귀족세력을 대표하는 상대등에 임명되었다는 사실은 반 혜공왕적인 귀족세력이 정권을 장악하였음을 의미하며, 이것은 전제왕권 중심의 중대 사회에서 귀족중심의 사회로의 전환이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 775년에는 김은거 및 이찬 염상과 정문의 모반이 두 차례에 걸쳐 있었다. 이들은 모두 전제왕권 유지를 지지하는 세력으로서 귀족세력인 김양상의 대두에 반대하여 반란을 일으켰으나 모두 진압됨으로써 김양상 중심의 정치세력은 더욱 공고해질 수 있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혜공왕일파는 실질적인 정치권력은 상실하고 명목상의 왕위만을 보전하고 있는 상태가 되었다.

이런 어지러운 내정을 타개해보고자, 혜공왕은 재위 16년 동안 11회의 조공, 하정 그리고 사은의 사절을 중국 당나라에 파견하여 외교정책을 펼쳤으나 혜공왕일파의 외교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777년 상대등 감양상의 상소에 의하여 신랄한 비판을 받게 되었다. 상소를 통한 김양상의 혜공왕일파에 대한 정치적 경고는 친 혜공왕파를 자극하게 되어 780년에 김양상일파를 제거하려는 이찬 김지정의 반란이 있었으나 오히려 김양상과 이찬 경신에 의하여 진압되고 말았다. 이 반란의 와중에서 혜공왕과 왕비는 살해되었다. 그리고 경신의 추대에 의하여 김양상 자신이 제37대 선덕왕으로 즉위하였다. 이때 혜공왕의 나이는 스물셋이었다.

제37대 선덕왕
개성대왕 김효방(내물왕의 9대손)
사소부인 김씨 ․ 김씨, 양상, 생년미상 ~ 785년
(성덕왕의 딸) .․ 재위기간 : 780년 4월 ~ 785년 정월. 총 4년 9개월 
부인 : 1명 
자녀 : 없음
구족왕후

선덕왕은 내물왕의 10대손으로 성은 김씨이며, 이름은 양상이다. 아버지는 개성대왕 효방이고, 어머니는 성덕왕의 딸 사소부인 정의태후이다. 선덕왕은 왕족으로 태어났으나, 왕위를 승계할 신분은 아니었다. 764년 정월에 이찬인 만종이 상대등에, 아찬인 양상이 시중에 임명되었다. 그의 시중 임명은 전제왕권을 재강화하려던 경덕왕의 한화정책이 귀족의 반발로 실패하고 왕당파인 상대등 신충이 물러난 4개월 뒤에 이루어진 점으로 보아, 그의 정치적 성격은 경덕왕의 왕권전제화와는 반대되는 것으로 이해된다.

김양상의 활동은 혜공왕 대에 접어들어 두드러졌다. 771년에 완성된 성덕대왕신종의 명문에 의하면 그는 대각간 김옹과 함께 검교사숙정대령겸 수성부령검교 감은사사각간으로서 종 제작의 책임을 맡고 있었다. 여기에서 주목되는 것은 감찰기관인 숙정대의 장관이었다는 점에서 그의 정치적 위치를 엿볼 수 있다. 그는 혜공왕 10년에 이찬으로서 상대등에 임명되었고, 혜공왕 재위 12년에는 한화된 관제의 복고작업을 주관하였다. 그리고 동왕 13년에는 당시의 정치를 비판하는 상소를 올려 전제주의적인 왕권의 복구를 꾀하는 일련의 움직임을 견제하였다.

혜공왕 16년 2월에 왕당파이었던 이찬 김지정이 반란을 일으켜 궁궐을 침범하자, 상대등이었던 양상은 4월에 김경신과 함께 병사를 일으켜 지정을 죽이고 혜공왕과 왕비를 죽인 뒤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그의 즉위는 무열왕계인 김주원을 경계하고 그들의 반발을 억제하려던 김경신의 강력한 뒷받침에 의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는 784년에 왕위를 물려주려는 결심을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으므로, 병석에서 내린 조서에서도 항상 선양하기를 바랐다고 한 것은 이를 뒷받침하고 있는 것이다.

즉위년(780년)에는 750년에 어룡성에 둔 봉어를 경으로 고치고 다시 감으로 바꾸어 어룡성을 개편했으며, 781년에는 패강의 남쪽 주현을 안무하였고, 782년 한주(지금의 서울지역)에 순행하여 민호를 패강진으로 이주시켰다. 이듬해 1월에는 김체신을 대곡진 군주, 즉 패강진 장관에 임명함으로써 개척 사업을 일단 완료하였다. 이러한 패강진의 개척은 왕실에 반발하는 귀족세력의 배제와 왕권을 옹호해 줄 배후세력의 양성하려는 성격을 띠는 것으로 보인다. 재위 6년만에 죽으니, 불교의식에 따라 화장하고 그 뼈를 동해에 뿌렸다.

제38대 원성왕
김효양(내물왕 11대손)
계오부인 박씨 ․ 김씨, 경신, 생년미상 ~ 798년 

재위기간 : 785년 정월 ~ 798년 12월. 총 12년 11개월
부인 : 1명
자녀 : 3남 2녀
숙정왕후 김씨 - 인겸(혜충 태자), 헌평태자, 예영, 대룡, 소룡

원성왕은 내물왕의 12대손으로 김효양과 계오부인 박씨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이름은 경신이다. 혜공왕 말기에 이찬 지정이 친위혁명을 일으키자, 상대등 김양상이 반혁명을 일으켜 지정과 싸웠다. 경신은 이때 양상을 도와 지정을 무너뜨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고, 그 덕분에 그는 김양상(선덕왕)이 왕위에 오른 뒤에 혜공왕 말기의 혼란을 평정한 공으로 상대등에 임명되고, 선덕왕이 죽자 태종무열왕의 6대손인 김주원과의 왕위다툼에서 승리하여 왕위에 올랐다.

『삼국사기』와『삼국유사』는 김주원과의 왕위계승다툼에 대한 설화를 기록하고 있다. 당시 김경신보다 서열이 높았던 김주원이 왕위에 추대되었는데, 김경신이 복두를 벗고 소립을 쓰고 12현금을 들고 천관사 우물로 들어가는 꿈을 꾸자, 여삼의 해몽을 듣고 비밀히 북천의 신에게 제사를 지냈더니 비가 와서 알천이 불어 김주원이 건너오지 못하였으므로 신하들이 경신을 추대하였다는 것이다. 이에 훗날 김주원의 아들 김헌창이 아버지가 왕위에 오르지 못한 것을 이유로 반란을 일으킨 것을 보아, 단순한 설화가 아님을 짐작케 한다.

원성왕대는 하대권력구조의 특징을 이루는 왕실친족집단원에 의한 권력 장악의 전형이 확립되기 시작하였다. 즉, 원성왕은 즉위와 동시에 자신의 적자를 태자로 책봉하고 다른 왕자들, 준옹(뒤의 소성왕)뿐 아니라 그의 동생인 언승(뒤의 헌덕왕)도 정치의 중심부에서 활약하였는데, 이처럼 왕과 태자를 중심으로 근친왕족들이 상대등, 병부령, 재상 등의 요직을 독점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근친왕족들로 이루어진 왕위계승은 왕족들이 신라하대 왕들의 주류를 이루는 특징을 보여준다. 또, 786년에는 대사 무오가 병법 15권과 화령도 2권을 바쳤는가 하면, 왕 자신도 「신공사뇌가」를 지었는데, 그것은 인생 궁원의 변화에 대한 이치를 담은 것이라 한다. 이 책들은 모두 전하지 않는다. 791년에 제공이 반란을 일으켰으나 진압하였다. 제공은 785년에 시중이 된 인물로 그가 일으킨 반란의 성격은 명확하게 밝혀져 있지 않다. 같은 해에 인겸 태자가 죽으니 시호를 혜충이라 하였다. 그리고 제공의 반란이 진압되자 다시 혜충 태자의 아들 준옹이 시중에 임명되었다.

785년에 원성왕은 총관을 도독으로 바꾸었으며, 재위 4년(788년)에는 독서삼품과를 설치하였다. 이 정책이 실시되기 전에는 궁술과 인물만 가지고 관리를 뽑았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독서삼품과에서 관리를 뽑은 것은 과거제의 시초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개혁은 국학을 설치한 지 이미 1세기가 지난 당시 신라사회에 있어서 무예를 중심으로 한 종래의 관리등용법의 개혁이 요청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원성왕은 불교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 785년에 승관을 두어 정법전이라 하고, 795년에는 봉은사(혹은 보은사)를 창건하였으며 망덕루를 세웠다.

왕의 치적으로 790년 벽골제의 증축과 발해와의 통교를 들 수 있다. 이와 더불어 795년에 당나라의 사신이 하서국 사람 둘을 데리고 와 신라의 호국룡을 물고기로 변하게 하여 잡아가려는 것을 막았다는 설화는 그가 상당한 독자외교를 펴고 있었음을 알려준다. 재위 14년인 798년 12월 29일에 죽으니, 유명으로 봉덕사 남쪽 토함악 서쪽동굴에 화장하였고, 능을 추복하기 위한 승복사가 세워졌다.

제39대 소성왕
혜충태자
숙정왕후 김씨
성목태후 김씨 ․ 김씨, 준옹, 생년미상 ~ 800년 
재위기간 : 799년 정월 ~ 800년 6월. 총 1년 5개월
부인 : 1명
자녀 : 2남 1녀
계화왕후 김씨 - 청명(제40대 애장왕)
체명, 장화(제42대 흥덕왕의 왕비)

소성왕은 원성왕의 태자 인겸의 아들이며, 성목태후 김씨 소생으로 이름은 준옹이다. 원성왕이 아들 인겸을 태자에 책봉했으나 791년에 사망하였고, 다시 아들 헌평을 태자에 책봉했으나 그 역시 794년에 사망했다. 두 아들이 죽고 셋째와 넷째 아들이 남아 있었으나, 원성왕은 장손인 준옹을 태자로 책봉했다. 준옹은 원래 태자의 아들로서 궁중에서 자랐고, 789년에는 당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대아찬 직위를 받았으며, 790년에는 파진찬에 제수되었다. 그리고 791년에 전 시중 이찬 제공이 반란을 일으키자, 이를 제압하여 공을 세우고 시중에 임명되었다. 하지만 병으로 1년 6개월 만에 시중에서 물러났다가 792년에 병부령이 되고, 795년에 태자에 책봉되었다. 그리고 798년 12월 말에 원성왕이 죽자, 이듬해인 799년 정월에 왕위에 올랐다.

소성왕의 치적으로 즉위년 3월에 청주(지금의 진주)의 노거현을 국학생의 녹읍으로 설정한 것을 들 수 있다. 이는 당시 국학에 입학한 학생들에게 장학금 형태로 녹읍을 지급했다는 뜻이다. 799년(소성왕 1) 7월에는 “길이가 9척이나 되는 인삼을 발견하여 하도 신기하여서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진상을 하였더니 덕종이 보고 인삼이 아니라며 받지 않았다.”라는 기록이 있다.

왕위에 오르던 당시, 이미 지병을 앓고 있던 소성왕은 왕위에 오른 지 불과 재위 2년 만인 800년 6월에 생을 마감했다.

제40대 애장왕
계화왕후 김씨 ․ 김씨, 초명은 청명, 개명은 중희. 788년 ~ 809년 
재위기간 : 800년 6월 ~ 809년 7월. 총 9년 1개월 
부인 : 2명 
자녀 : 기록 없음
왕비박씨
후궁김씨

애장왕은 소성왕의 장남이며, 계화부인 김씨 소생으로 초명은 청명이고, 왕위에 오른 뒤에 중희로 고쳤다. 788년에 태어났으며, 800년 6월에 소성왕이 죽음을 앞두고 태자로 책봉했다. 소성왕이 죽자, 열세 살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여 즉위 초부터 작은아버지인 병부령 김언승(뒤의 헌덕왕)의 섭정을 받았다. 애장왕이 친정을 요구한 때는 재위 6년인 805년인데, 이때 애장왕의 나이는 18세였다. 친정을 시작한 애장왕은 우선 자신의 모후 김씨를 태왕후로, 부인 박씨를 왕후로 봉하여 자신의 위엄을 세웠다.

애장왕은 중앙과 지방제도에 대한 개혁조치의 일환으로 805년 공식 20여조를 반포하였으며, 808년 12도에 사신을 파견하여 모든 군, 읍의 경계를 정하였다. 공식 20여조를 반포하기 1년 전 동궁의 만수방을 새로 만들었으니, 이는 곧 태자의 위치를 굳건히 하여 왕권을 신속하게 회복하기 위한 조치였다.

이와 같은 정책의 일환으로 805년 위화부의 금하신을 고쳐 영이라 하고, 예작부에 성 두 사람을 두는 등의 관제개혁 조치를 취한다. 애장왕은 다른 역대왕들과는 달리 불교에 대해서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 불교의 사치스런 행사를 막기 위해 교지를 내려 불교사원의 새로운 창건을 금하고, 금수로써 불사하는 것과 금은으로 기물 만드는 것을 금하였는데, 이는 귀족들은 막대한 토지와 재력을 지니고 지방의 연고지를 가지면서 원당과 같은 절을 세워 자신들의 막대한 토지와 재력을 유지하는 것을 막고, 왕권에 그들을 복속시키려는 의도로 보인다. 그러나 이미 중대에 세워졌던 전제왕권주의가 무너지고 귀족세력이 난립하는 신라하대의 상황 때문에 이러한 일련의 정책들은 성공할 수 없었고, 결국 그는 왕위에서 쫓겨났다.

애장왕은 국내정치의 개혁과 병행하여 대당외교 외에 일본과의 국교를 트고 있다. 802년 12월 균정에게 대아찬을 제수하고 가 왕자로 삼아 왜국에 사신으로 보내고자 하였으며, 애장왕 4년(803년)에는 일본국과 사신을 교환하고 우호 관계를 맺었다. 이로써 성덕왕 30년(731년)에 일본의 침입 사건으로 단절되었던 두 나라의 외교 관계는 72년 만에 회복하였다.

이와는 별도로 802년 순웅, 이정에 의하여 가야산에 해인사가 세워졌는데, 해인사는 당시 왕실에서 경영하는 절이었다. 이렇듯 애장왕이 내외의 정사를 직접 챙기기 시작하자 왕권은 빠르게 회복되었고, 상대적으로 언승 일파의 힘은 약화되었다. 이에 위기감을 느껴, 809년 7월 언승이 조카 제륭과 함께 군사를 이끌고 궁궐에 들어와 왕을 죽였다. 이때가 애장왕 10년인 809년 7월이었다.

 

Posted by 원주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