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역사와 문화2013. 9. 14. 19:06

 

 

 

백제 14대 근구수왕 = 수, 귀수, 근귀수, 귀류, 구소 (재위 375년 ~ 384년)

근초고왕의 맏아들이다.

태자 때부터 부왕을 도와 정복사업에 적극적인 활동을 하여 369년의 치양성(황해도 배천) 전투에서는 고구려군을 격파하여 5천여명을 포로로 하였으며, 특히 371년의 평양성 전투에서는 죄를 짓고 고구려로 도망갔다가 다시 귀순해온 사기의 군사기밀 제보로 고구려군을 대파하였다.

즉, 사기의 제보에 따라 고구려군의 허실을 파악한 뒤 고구려군 제일의 정예부대인 적기부대를 공격하여 크게 격파하였다.

승세를 잡아, 패주하는 고구려군을 추격하여 수곡성(황해도 신계)까지 진군한 뒤, 돌을 쌓아 경계를 표시하고서 회군하였다.

이때 더 북진하려 하자 장군 막고해가 “만족할 줄 알면 욕되지 않고, 그칠 줄 알면 위태롭지 않다.”는 노자의 도덕경의 구절을 인용하면서 만류하였다.

즉위 후에는 왕명에서 보듯이 근초고왕대에 확립된 초고왕계의 왕위계승권을 확고히 하였으며,장인인 진고도를 내신좌평으로 삼아 정사를 위임하였다.

그리고 남하하여 내려오는 고구려에 대해서는 공격과 수비 양면에서 적극적으로 대처하여, 한반도에서의 힘의 균형을 유지하였다.

 

369년(근초고왕 24)에 고구려 고국원왕이 보기 2만을 이끌고 백제를 침략해오자, 근초고왕은 태자로 하여금 이를 막게 하여 반걸양에 이르러 싸우려 하였다.

사기는 본시 백제 사람으로서 잘못하여 나라에서 사용하는 말의 발굽을 상하게 하고 벌을 받을까 두려워서 고구려로 도망하였는데, 이때 다시 백제로 돌아와 태자에게 이르기를 “고구려 군사가 비록 많기는 하나, 모두 숫자만 채운 허수아비입니다.

날쌔고 용감한 자들은 적기뿐이니, 만일 먼저 이를 깨뜨리면 나머지는 치지 않더라도 저절로 무너질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백제태자는 이 말을 좇아 진격해서 크게 적군을 깨뜨리고, 도망치는 것을 뒤따라 북으로 수곡성 서북에까지 이르렀다.

이때 장군 막고해가 간하기를 “일찍이 도가의 말을 들으니 ‘만족할 줄 알면 욕되지 않고, 그칠 줄 알면 위태롭지 않다. ’고 하였습니다.

지금 얻은 바가 많으니 어찌 더 구할 것이 있겠습니까.”라고 권하였던바 태자가 이를 옳다고 여겨 추격하기를 중지하고 돌을 쌓아 표지를 삼았다.

이로 미루어보아 그는 용감한 장군이었을 뿐만 아니라 도학에도 통달하였던 장수로 판단된다.

 

진고도

376년(근구수왕 2) 수상격인 내신좌평에 임명되면서, 왕으로부터 정사를 위임받았다.

이것은 당시 진씨가 왕비족으로서, 백제 지배 세력내에서 최고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백제 15대 침류왕 = (재위 384년~385년)

근구수왕의 맏아들이며, 어머니는 진씨로 추정되는 아이부인이다. 아신왕은 맏아들이다.

백제에서 처음으로 불교를 공인한 왕으로, 384년(침류왕 1) 9월 호승 마라난타가 동진에서 오자,

그를 맞아 궁중에 두고 예로써 받드니 백제에서 불법이 이로부터 시작되었다.

왕은 그의 말에 따라 불사를 일으켜서 봉행하였고, 이듬해에 한산에 백제 최초의 절을 짓고 10인의 백제인을 출가시켜 득도하게 하였다.

이러한 불교공인과 신봉은 그 무렵 뿌리 깊은 토속신앙에 젖어 있던 백제사회에 적지 않은 파문을 일으켰을 것이다.

이를테면 법흥왕대의 신라의 경우처럼 전통적인 토속신앙의 처지에서 불교를 이단으로 비난하는 여론이 일어나거나,

그에 따른 지배층 내부의 반발도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한 추정은 침류왕의 신변의 변화와도 연결될지 모른다. 한산에 불교사원을 세운 지 9개월 후에 재위 2년으로 갑자기 사망한 것으로 되어 있고, 그 다음 왕위는 아들이 아니라 동생 진사왕에게로 넘어갔기 때문이다.

 

백제 16대 진사왕 = (재위 385년~392년)

근구수왕의 둘째 아들이며 침류왕의 동생이다.

용맹하고 총명하고 지략이 많았다고 한다. 형 침류왕이 죽자 태자가 어리기 때문에 숙부인 진사가 즉위하게 되었다.

즉위 후 남진하여 내려오는 고구려와 치열한 전쟁을 벌였다.

386년(진사왕 2) 15세 이상의 백성을 동원하여 청목령(개성)에서 북으로는 팔곤성에, 서쪽으로는 바다에 이르는 관방을 쌓았다.

390년 달솔 진가모로 하여금 고구려의 도곤성을 공격하게 하여 200여명을 포로로 하는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고구려 광개토왕의 뛰어난 용병술에는 당하지 못하여, 392년 석현성(개풍군 청석동?) 등 10여성과 한수(한강) 이북의 여러 부락이 고구려군에 의하여 함락되었다.

또 천연의 요새지인 관미성(경기도 교동도)도 함락되었다.

이렇듯 고구려의 남진에 따른 군사적 압박으로 시종 고전을 면하지 못하였고 많은 영토를 상실하였다.

구원의 행궁에서 사냥하다가 죽은 것으로 되어 있으나, ‘일본서기’에 따르면 침류왕의 태자 아신의 세력에 의하여 제거된 것으로 보인다.

 

백제 17대 아신왕 = 아방왕, 아화왕 (재위 392년~405년)

성씨는 부여, 침류왕의 맏아들이다.

‘일본서기’에서는 아신이 태어난 날 밤에 기이한 광채한 빛이 사방을 뒤덮었다고 한다.

침류왕이 죽었을 때, 나이가 어리므로 숙부인 진사왕이 대신 즉위하였으나 392년 진사왕이 죽자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즉위한 직후인 393년 아신왕은 고구려에게 빼앗긴 영토를 회복하기 위해 장군 진무를 좌장으로 삼고 군사를 맏겼다.

진무는 1만의 병력으로 고구려가 점령한 관미성을 공격하였으나 고구려군이 굳게 지키고 보급이 여의치 않아 퇴각하였다.

394년, 395년에도 수곡성과 패수 등의 국경지대에서 고구려군과 싸웠으나 번번히 패배하였으며 이후에도 군사를 정비하고 쌍현성을 쌓는 등 전시 체제를 계속 유지하였다.

398년에 고구려 정벌을 시도하였으나 천문이 불길하다는 이유로 중지하였고 이듬해에도 정벌을 위해 군사를 징발하였고

계속되는 군역에 백성들이 고단하여 신라로 도망하는 경우가 많아 인구가 감소하였다고 한다.

한편 397년에는 왜에 태자 전지를 볼모로 보내 우호관계를 맺었으며 402년에도 사신을 보내고 이듬해 답사를 받는 등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403년에는 신라를 공격하였다. 405년에 사망하였다.

 

백제 18대 전지왕 = 여영, 영, 직지, 진지, 부여전 (재위 405∼420년)

아신왕의 맏아들이며 왕비는 팔수부인으로서 해씨집안 출신이다.

태자로 있을 때 부왕인 아신왕에 의하여 397년(아신왕 6)에 왜에 인질로 보내졌다.

이는 아신왕이 고구려의 남진압력에 대항하기 위하여 왜와의 화호를 도모하고 그 화호관계를 보다 돈독히 하고자 하는 목적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가 인질로 있을 때인 405년에 아신왕이 죽었다.

이때 아신왕의 동생 훈해가 섭정을 하면서 그의 환국을 기다렸는데, 막내동생 설례가 훈해을 죽이고 스스로 왕이 되었다.

부왕의 부음을 듣고 왜에서 귀국하던 중 한성인 해충으로부터 국내정세 변화와 경솔한 입국을 하지 말라는 간청을 받아들여

해도에 머물렀다.

그뒤 백성들이 설례를 죽이고 왕으로 추대하였다.

전지왕의 즉위는 해씨세력의 지지에 힘입은 바가 컸다.

그리하여 즉위 후 해충을 달솔로 삼고 한성의 조 1,000석을 하사하였고, 해수를 내법좌평, 해구를 병관좌평에 각각 임명하였다.

그리고 부인을 해씨집안에서 맞아들이게 되었다. 이로써, 이전의 진씨 왕비족시대는 퇴조를 걷게 되었다.

이와 더불어 서제인 여신을 내신좌평으로 삼았다가 408년(전지왕 4)에 상좌평으로 임명하면서 군국정사를 위임하였다.

이는 백제에 있어서 상좌평제의 시초가 되었다.

417년(전지왕 13) 7월에는 동부와 북부 2부의 15세 이상 되는 사람들을 징발하여 사구성을 쌓게 하고

병관좌평인 해구를 시켜 이 일을 감독하게 하였다.

 

해충

405년(아신왕 14) 9월 아신왕이 죽자, 당시 일본에 가 있던 태자 전지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면서 아신왕의 동생 훈해가 임시로 섭정을 하였는데, 막내동생 설례가 훈해를 죽이고 스스로 왕이 된 일이 발생하였다.

이때 이를 모르고 귀국하여 국경에 이르던 태자를 찾아가서 “대왕이 죽자 왕의 동생 설례가 훈해을 죽이고 스스로 왕이 되었으니 바라건대 태자는 경솔히 들어가지 말라.”고 충고하였다.

뒤에 국인이 설례를 죽이고 전지가 즉위하게 되자, 406년(전지왕 2) 9월에 달솔에 임명되고 한성의 조 1,000석을 하사받았다.

 

해수

407년(전지왕 3) 내법좌평에 임명되었다. 그의 발탁은 왜에서 환국한 전지왕의 즉위에 해씨가문이 결정적인 구실을 수행한 데 따른 응분의 배려라고 볼 수 있다.

429년(비유왕 3) 10월 상좌평 여신이 죽자 상좌평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정변을 통하여 왕족중심의 친위체제를 구축한 개로왕의 집권력 강화작업의 결과, 다른 해씨출신 귀족들과 함께 권력의 핵심에서 제거되었으리라고 보인다.

 

여신왕

아버지는 아신왕이며, 전지왕의 이복동생이다.

407년(전지왕 3) 백제의 최고관등인 좌평 중에서도 수석좌평인 내신좌평에 임명되었고, 408년 수상으로서 좌평들을 통솔하는 상좌평이 신설되면서 이에 취임하여,죽을 때까지 상좌평으로 재직하면서 백제의 군사와 국정을 통괄하였다.

따라서 전지왕, 구이신왕대를 통하여 백제정계의 실력자였다고 할 수 있으며,이것은 전지왕의 즉위에 공이 많았던 때문으로 추측되고 있다.

 

 

비류왕의 일본 재건(재위306~343)

비류왕(比流王)은 구수왕의 둘째 아들이다.
구수왕은 166년부터 일본에서 활약하고 214년부터 백제왕으로 재위하여 234년에 죽었다. 따라서 상식적으로 비류왕이 그 둘째 아들이라고 할 수 없다. 비류왕이 166년에 태어났으면180년을산것이된다.따라서구이왕의아들이거나, 구수왕의 손자로본다.일본에진출한것으로보아서구수왕의손자로고려된다.

성품이 너그럽고 인자하여 남을 사랑하였고 또 힘이 세어 활을 잘 쏘았다.
오랫동안 백성들 사이民間에 있었지만 명성은 널리 퍼졌다.
분서왕이 죽자 비록 아들이 있었으나 모두 어려서 왕위에 오를 수 없었다.
이로써 비류가 신하와 백성들의 추대를 받아 왕위에 올랐다.

5년(308) 봄 정월 초하루 병자에 일식이 있었다.
나사(NASA) 추산에 의하면 양력으로 1월 31일인데 남반구 일식이라서 관측이 불가능하다.추산으로기록한일식으로보인다. 0306 Jan 31 02:46 T 84 -0.374 1.041 39.1S 147.9E 68 147 03m23s

9년(312) 봄 2월에 사신을 보내 순행하면서 백성의 질병과 고통을 위문하고, 홀아비, 홀어미, 부모없는 어린 아이, 자식없는 늙은 이鰥寡孤獨로서 스스로 생활할 수 없는 자에게 곡식을 한 사람당 세 섬을 주었다.
여름 4월에 동명묘(東明廟)에 배알하였다. 해구(解仇)를 병관좌평(兵官佐平)으로 삼았다.

10년(313) 봄 정월에 남쪽 교외南郊에서 천지에 제사지냈는 데 왕이 제물로 쓸 짐승을 친히 베었다.

13년(316) 봄에 가물었다. 큰 별이 서쪽으로 흘러갔다. 여름 4월에 서울王都의 우물물이 넘치더니 검은 용이 그 속에서 나타났다.
17년(320) 가을 8월에 궁궐 서쪽에 활쏘는 돈대射臺를 쌓고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활쏘기를 익혔다.

18년(321) 봄 정월에 왕의 서제(庶弟) 우복(優福)을 내신좌평(內臣佐平)으로 삼았다.
가을 7월에 금성太白이 낮에 나타났다. 나라 남쪽에 누리가 곡식을 해쳤다.

22년(325) 겨울 10월에 하늘에서 소리가 들렸는데 풍랑(風浪)이 서로 부딪치는 것과 같았다. 11월에 왕이 구원(狗原) 북쪽에서 사냥하여 손수 사슴을 쏘아 맞혔다.

24년(327) 가을 7월에 붉은 까마귀와 같은 구름이 해를 끼고 있었다. 9월에 내신좌평 우복이 북한성(北漢城)을 근거로 하여 반란을 일으키자 왕이 군사를 발동하여 토벌하였다.

내신좌평 우복이 근거한 북한성이 대동강 평양성이니 비류왕의 수도가 요양시 비사성이었을 것이다. 550년에 대동강 평양이 백제군에게 함락되어서 고구려 양강왕이 쫓겨간 곳이 비진류도(比津留都)라고 하였다. 바로 요양시 태자하 비사성을 의미한다.

28년(331) 봄과 여름에 크게 가물어서 풀과 나무가 마르고 강물이 말랐다. 7월에 이르러서야 비가 왔다. 이 해에 기근이 들어 사람들이 서로 잡아먹었다.

30년(333) 여름 5월에 별이 떨어졌다. 왕궁에 불이 나서 민가까지 연달아 태웠다. 가을 7월에 궁실을 수리하였다. 진의(眞義)를 내신좌평으로 삼았다. 겨울 12월에 우뢰가 쳤다.

32년(335) 겨울 10월 초하루 을미에 일식이 있었다. 나사(NASA) 추산에 의하면 양력으로 12월 31일인데 한반도는 밤중이라서 관측이 불가능하다.추산으로기록한일식으로보인다. 0335 Dec 31 21:28 P 95 1.143 0.715 64.7N 164.9W 0

33년(336) 봄 정월 신사에 살별彗星이 규(奎) 별자리에 나타났다.
34년(337) 봄 2월에 신라가 사신을 보내 와서 예방하였다.
41년(344) 겨울 10월에 왕이 죽었다.

비류대왕의 태자와 쌍동이 왕자 중의 형(근초고왕의 형)이 일본에서 전사하였다. 걸대왕과 함께 일본에 온 비류대왕의 아들들이 많았던 것이다.
따라써 《신찬성씨록》에는 비류대왕의 후손이 특히 많다.춘야련春野連 면씨面氏 문사씨汶斯氏 강옥공岡屋公 등이 비류왕의 후손이다. 비류왕 즉위초에 일본 재건을 위한 진출이 활발하였다.

 

선비족 전연국의 강성

313년 고구려가 백제 서쪽의 낙랑을 뺏어갔다. 314년에 대방, 315년에 현도를 뺏어갔다. 백제 분서왕을 죽인 백제 낙랑태수 장통이 빼앗긴 것이다.

그러나 318년고구려의전연수도 대극성공격은실패로돌아가고,대릉하의 양평과요하하구 서안의평곽성 등 요동군은 전연국이다시 가졌는데 그 선봉이 백제인 장통이었다.
333년 전연의 모용외가 죽고 모용황이 승계하였다. 이때작은아들모용인이반란을일으켜평곽성에서모용황과대치하였다.

336년모용황은창려로부터얼어있는 바다를도보로건너서평곽성으로진군하여모용인을토벌하였다.
336년
6월에 단료段遼의 동생 단란段蘭이 곡수정에 주둔하여 전연의 유성을 공격하다가 실패한다. 모용황이 출병하니 단란은 후퇴한 후에 다시 유성으로 돌아오는데 전연군은 이에 대비하여 유성 부근에 매복柳城左右設伏以待했다가치기로하는데매복한곳이마도산馬兜山이었다. 그리하여 전연군이 승리하였다.
전한시대 유성柳城에는 마수산이 서남쪽에 있었다.馬首山在西南.

이는 요동국의 요서군 유성이었던 조양시가 아니다. 전한시대 유성은 북쪽에서 삼류수가 흘러서 바다로 들어가기 때문에 해안이 가까운 곳이니參柳水北入海 이는 조양시가 될 수 없다.
마수산과 마도산이 같은 것으로 보인다. 마도산馬都山 전투는 734년 발해가 당나라와 전쟁을 한 곳이며이는신당서오승체전烏承?에나온다.

거란전에서 732년 거란이 당나라를 칠 때는 유관도산?關-都山전투라고하였으니바로 임유관앞이다. 한편 [대진국본기]에는 요서의 대산(帶山)이라고 하였다. 이는 수나라가유성(산해관)에설치한 요서군의 대방산과 같은 것이다.
遼西郡。有帶方山、禿黎山、?鳴山、松山。有?水、白狼水。

따라서 모용황과 단란이 싸운 유성은 요동국 요서군 유성이 아니라 한나라 요서군 유성이었고 뒤에 당나라 유성, 평로성이었다.
338년 4월 조왕(趙王) 석호(石虎)가 수십만 대군으로 전연국 대극성을 치러왔는데모용황은이를막아냈고석호에게항복했던연나라장수들은죽거나고구려로도망하였다. 이때 조군을 물리친 모용각이 341년에 평곽에 부임하여서 고구려, 백제를 막았다.
339년 모용황은 동진의 책명을 받아서 결호하였다.
342년 10월 모용황은 조양시 화룡성으로 천도하였다. 조나라가 바다로 침입해오기 때문이고333년에는모용인도바다로극성을 치려고했었다.
342년 11월에 모용황은 고구려 환도성을 함락시키고 5만명을 끌어왔다. 화룡성의 배후를 안정시킨 것이다.
345년 1월 연국왕 모용황은 용성에 끌어모은 타부족인 구려,
백제,우문부,단부인 들로 고민하여 이들을 서부로 옮긴다.

句麗、百濟及宇文、段部之人,皆兵勢所徙,非如中國慕義而至,咸有思歸之心.今戶垂十萬,狹湊都城,恐方將?國家深害,宜分其兄弟宗屬,徙于西境諸城,撫之以恩,檢之以法,
백제인들이 전연국 모용황에게 잡혀간 기록은 따로 없다. 그러나 313년에 고구려에 쫓겨서 모용외에게 투신한 낙랑태수 장통이 바로 백제인들이었던 것이다.

345년 10월 모용각은 고구려 남소성을 빼앗았다. 慕容恪攻高句麗南蘇,克之,置戍而還
346년 1월에는 모용준과 모용각이 부여를 쳐서 그 왕 여현(餘玄)을 사로잡고 5만여명을 끌어갔다.
본래부여는녹산에있었는데백제에게침략을받아서연나라근처에왔다고하였다.
夫餘居於鹿山,爲百

濟所侵,部落衰散,西徙近燕,而不設備。
부여를 遂拔夫餘,虜其王玄及部落五萬餘口而還。
녹산은 발해 녹군현이었던 요나라 건주로서 보면 의무려산 남단이다. 의라왕이 이곳에 있다가 일본에 가서 숭신천황이 되었고, 백제 분서왕의 낙랑서현 공략 때에 이 곳의 부여는 백제에 흡수되었다.
따라서모용황이친부여는곧백제다.

이때 끌려간 부여왕의이름도 백제 왕자 이름으로 고려되는 여현(餘玄)이다.여현은모용황의사위가되었고여현의아들은여울(餘蔚)인데부여왕자라고칭했으며,370년 부견이 전연국을멸망시킬 때에전연국 수도 업성 문을 열어 부견을 들어오게 하였고,384년모용수가 후연국을 세우니 후연국의재상까지 되었다.
후연은 요하 하구 평곽으로부터 요동반도 남단의 복주 부여성을 친 것으로 고려된다.
전연국으로 끌려간 여현은 비류왕의 아들이었을 것이다.

 

걸왕의 일본 진출(재위343-346)

걸왕(契王)은 분서왕의 맏아들이다. 타고난 자질이 강직하고 용감하였으며 말타고 활쏘기를 잘하였다. 처음 분서왕이 죽었을 때 계왕은 어려서 왕위에 오르지 못했다. 비류왕이 재위 41년에 죽자 즉위하였다.
3년(346) 가을 9월에 왕이 죽었다.

283년 왜여왕 일여(개화천황;244~283)의 사후에 사비왕의 아들이자 일여의 숙부인 효안천황(222~298)이 즉위하였다.
그러나 중국 요녕성
遼寧省
요서遼西에 있던 부여夫餘에서 285년 선비족의 침략을 받아 일본으로 새로 도래한 부여 의려왕依慮王이 백제일본을빼앗았다.의려왕은 효령천황孝靈天皇(261~316)이 되었다. 효안천황은 오오사카의 대화를 빼앗기고 미와산으로 피신하였다.
미와산
三輪山의 전설에 의하면 오호모노누시大物主神이라고 하였고, 이때 미와산의 이쿠타마요리히메活玉依媛(235~318)와 대물주신이 만나서 오호타타네코意富多多泥古가 태어났다.

일본에 제 12세 천황으로 기록된 경행천황景行天皇(273~358)은 백제 분서대왕汾西大王(재위300~304)의 아들 걸대왕契大王(재위343~346년)이다.
걸대왕은 분서대왕의 암살 당시에 32세나 되었으니, [삼국사기]기록과 같이 어려서 즉위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일본에 있어서 백제대왕으로 즉위하지 못했고, 대신에 요양시에 위치했던 비류대왕이 즉위하였다.

오호야마토타라시히코日本足彦國押人天皇인 효안천황(222~298; 백제 사비왕의 아들)이 298년에 서거하였고,
그의 뒤를 이어서 백제 걸대왕이 일본에 가서 오호타라시히코
大帶日子가 되었다. 타라시帶는대방에서온것을의미한다.

부여 의라왕의 침략에 의해 책계왕責稽王이 300년에 전사하고, 뒤이어 백제의 일본 땅을 부여 의라왕이 숭신천황이 되어서 침탈하였으니,
책계대왕의 손자인 걸대왕, 즉 경행천황은 복수하기 위하여 대규모 병력으로 도일하였다.따라서 경행천황의 자손이 80이나 된다고 하였다.

그 80명중에서 태자太子라고 불린 사람은 셋이었는데, 성무천황成務天皇이 된 와카타라시히코若帶日子命(326~370)와 야마토타케루 즉 일본무존日本武尊으로 일컬어지는 야마토오구나倭男具那(295~333) 그리고 이호키노이리히코五百木入日子命(273~318) 등이다.
이 중에서 성무천황이 된 와카타라시히코
若帶日子命(326~370)만이 경행천황의 아들이다.
두번째인 일본무존日本武尊(295~333)은 백제 비류대왕의 쌍둥이 아들중 동생인 근초고대왕近肖古大王이다.

세번째인 이호키노이리히코五百木入日子命(273~318)는 비류대왕의 태자였다. 그는 호무다노미와카 品陀眞若(305~361)을 낳았고 그의 세 딸이 응신천황(320~394)과 결혼하였다. 그의 세 딸은 타카기노이리히메高木入日賣命(318~366)와 나카쯔히메中日賣命, 오토히메弟日賣命(324~368)인데, 응신천황(320~394)과 결혼한 오토히메가 384년생일 가능성은 없으므로 324년출생이 확실하고, 그의 조부인 이호키노이리히코五百木入日子命(273~318)는 273년생이 되며 경행천황과 동갑이니 경행천황의 아들이 될 수 없다.
따라서 이호키노이리히코
五百木入日子命(273~318)는 비류대왕의 장왕자로서 백제 태자이며, 백제에서 숭신천황을 치기 위해 건너온 정벌군의 대장이었고, 그는 318년 6월에 숭신천황과 전투하다가 전사한 것으로 고려된다.

비류대왕의 태자와 쌍동이 왕자 중의 형이 일본에서 전사하였다. 걸대왕과 함께 일본에 온 비류대왕의 아들들이 많았던 것이다.
따라써 《신찬성씨록》에는 비류대왕의 후손이 특히 많다.춘야련春野連 면씨面氏 문사씨汶斯氏 강옥공岡屋公 등이 비류왕의 후손이다.

걸대왕이 이나비노오호이라쯔메伊那毘能若?女命(278~318)을 통하여 얻은 야마토네코倭根子命(302~348)와 카무쿠시神櫛王命(308~350)가 경행천황이 도일하여 초기에 얻은 아들들이다. 그보다 큰 아들로 기록된 쌍둥이 두 아들인 오호우스大?命(295~318)와 일본무존日本武尊(295~333)은 비류대왕比流大王(재위 306~343)의 아들들이다.

일본에서 전사한 근초고왕의 형인 오호우스大?命(295~318)묘와 그를 모시는 원투신사. 아이지현 도요다(豊田市)시에 있다.

구이대왕仇台大王(재위 234~238)의 아들 비류대왕이 343년에 죽고, 분서대왕의 아들 걸대왕契王이 343년에 백제로 돌아와 백제대왕이 되었다.
그러나 346년 초에 선비족 전연국의 모용황이 백제 부여부를 쳐서 부여왕 여현
餘玄과 5만명의 포로를 끌어갔다.
342년 고구려 고국원왕의 환도성을 함락하고 5만명을 끌어간 모용황에 의해서 백제도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백제 걸대왕은 선비족에 대한 패전의 책임을 져서, 재위 3년만에 강제 퇴위 당하고 일본으로 다시 떠나가서 경행천황
景行天皇이 되었는데, 전쟁에서 패전하면 왕이 죽거나 물러나는 것이 본래 부여인의 국법이다.

백제 걸왕인 경행천황은 일본 정벌에서 거울을 앞세운 것으로 고려되는데, 경행천황의 지시를 받고 정벌에 나선 일본무존은 배를 타고 갈 때에 배 위에 큰 거울을 걸었던 사실이 있고, 계, 걸과 경의 일본 발음이 “게이”로서 같고 “걸”은 우리말 거울 옛 발음일 수도 있다.

[일본서기]에서 경행천황의 이름은 오시로(於-斯呂, 忍-代)이며 그의 궁성 이름은 히시로日代 궁이었다. 시로는 흰색의 발음과도 같다.
시로
斯呂는 대로도 썼지만, 백제 걸왕의 걸, 를 일본에서는 《게이》로도 읽지만 《시루시》라고도 발음했다.

[일본서기/인덕천황기]의 원년 기록에서 후엽지계後葉之契는 “시루시(=증표證票)”로 읽었다.

따라서 위덕왕이 된 백제 창왕昌王과 같이 걸대왕의 본래 이름은 여설餘契, 혹은 여걸餘契이 되고일본에서는 시로왕, 후에는 게이고우천황景行天皇으로 부르게 되었다.
경행천황은 효안천황처럼 이름 앞에 타라시
를 경칭으로 썼는데, 경행천황은 키가 크고 특히 다리가 길었다고 《고사기》에 기록되었다. 그러나대는백제 대방 출신을의미하는것이다.
경행천황이 죽은 일본내 궁성 이름이 근기近畿의 시가국滋賀國성이다. 칠지도에 기록된 백자국百慈國의 위치로 고려된다.

경행천황의 높은 이름은 그의 일본 정벌에 의한 것인데, 규슈를 탈환한 것이다. 또한 비류대왕의 쌍둥이 둘째 아들, 일본무존日本武尊, 즉 근구수대왕近仇首大王(295~384)이 일본 본토를 정벌하였다.
또한 걸대왕의 마지막 영지는 오사카大阪의 대화大和가 아니라 시가국滋賀國
다카치호궁高穴穗宮이므로, 343년 백제 걸대왕이 되었다가 346년 근초고대왕에게 양위하고 백제에서 되돌아왔을 때에는 왜국의 대표자에서도 밀려난 것이다.

경행천황은 근초고왕자 형제들과 일본 정벌에 동참했다가 아이지현 풍전시에서 살았고, 근초고왕자가 333년에 백제로 돌아온 후에 일본 천황이 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343년에 백제대왕으로 왔었고 3년만에 실각하여 다시 일본으로 돌아간 후에는교토에살았던것이다.
이때 일본은 근초고왕의 직할로서 길비(吉備) 주재 대신인 주길대신이 오오사카를 다스렸다.




Posted by 원주유
백제 역사와 문화2013. 9. 14. 18:58

 

 

백제 8대 고이왕 = 구이, 고모 (재위 234년 ~ 286년) 성은 부여.

구수왕이 죽은 뒤 아들 사반왕이 왕위를 계승했으나 어려서 정치를 할 수 없기 때문에, 초고왕의 아우인 고이왕이 즉위했다고 전한다.

여기서 고이왕이 초고왕의 아우라 함은 연대상으로 모순된다.

고이왕은 온조왕계와는 계보를 달리하는 우태 - 비류계 출신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구수왕의 사망 뒤 고이왕의 즉위와 사반왕의 폐위는 곧 초고왕에서 구수왕으로 계승된 지파의 몰락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내정면에서는 여러 가지 정치 제도와 복식 제도를 제정했으며, 그것은 고이왕이 죽은 뒤에도 지속되어

그 뒤 백제가 멸망할 때까지 4백 년간이나 이어져 백제의 기본 제도로 유지되었다.

재위 27년(260년) 봄 정월, 기존의 좌우보 체제를 개혁하여 여섯 개의 좌평을 두고, 그들에게 왕명 출납과 창고 관리, 의례 제정, 형벌 제도, 군사 업무를 각각 분담시켜 맡아보게 했다.

또한 16품의 관등 체계를 정비했으며, 관직의 위계에 따라 자주색, 다홍색, 푸른색 옷을 입게 하는 등 품계에 따른 왕과 귀족의 공복에 관한 제도도 정했다.

재위 기간 중 괴곡(충북 괴산군), 봉산(경북 영주시)을 중심으로 자주 신라와 충돌했다.

고이왕은 낙랑과 신라 그리고 말갈과 군사적으로 충돌하며 세력을 키워 갔다.

또한 남옥저의 일부를 점령하고, 중국 대륙의 서진과 외교관계를 맺었다.

강원도 북부에 자리 잡은 말갈(동예)족이 자주 침범해 왔는데, 고이왕대에는 말갈과도 우호관계가 조성되었다.

한사군의 후신인 낙랑, 대방과도 혼인을 통한 동맹관계를 형성했다.

재위 13년(246년) 위나라가 낙랑군과 삭방과 합공해 고구려와 전쟁을 벌이는 틈을 타서 낙랑군의 변방을 공격하기도 했다.

또한, 한나라와 낙랑군, 대방군 사이에 분쟁이 일어났을 때 대방군을 선제공격하여 대방태수 궁준을 전사하게 한 사건의 배후에도 고이왕이 이끄는 백제의 힘이 작용하였을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

관리로서 재물을 받은 자와 남의 것을 도둑질한 자에게는 3배를 징출케 하는 동시에 종신 금고에 처한다는 법령을 내려 기강을 바로잡았고, 신라의 국경을 침범하여 영토를 확장하였다.

그는 한강 유역의 여러 부족 사회를 보다 큰 연맹체로 결속하는 데 중심 역할을 담당하여 백제를 고대 왕국으로 성장케 하였다.

 

백제 9대 책계왕 = 청계왕, 책찬왕 (재위 286년 ~ 298년)

고이왕의 맏아들이며, 왕비는 대방왕의 딸 보과이다. 체구가 장대하고 의지가 굳세었다고 한다.

286년(책계왕 1)에 고구려가 대방을 공격하였을 때, 대방왕이 사위인 그에게 구원을 요청하자 군사를 보내어 고구려군을 물리쳤다.

이 때문에 고구려와의 사이가 나빠져, 고구려의 침입에 대비하여 아차성(서울 광장동 아차산성)과 사성(서울 풍납동토성)을 수축하였다.

그러나 298년 한군(낙랑의 군대)과 맥인(동예로 추정)의 침입에 맞서 싸우다가 적병에게 살해되었다.

* 부왕=8.고이왕 * 모후=?

* 왕후=보과부인(대방군 태수의 딸) * 아들=10.분서왕 * 손자=12.계왕

백제 10대 분서왕 (재위 298년 ~ 304년)

책계왕의 장자로 어려서부터 외모가 준수하고 총명하여 부왕의 총애를 받았다.

한군현 세력의 침입을 막다가 부왕이 전사하자 왕위를 계승하였다.

분서왕도 부왕과 마찬가지로 낙랑 등 한군현 세력에 대하여 강경책을 폈던 것으로 보인다.

304년(분서왕 7)에는 낙랑군의 서쪽 현을 공격하여 차지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해에 분서왕은 낙랑이 보낸 자객에게 피살되었다.

고이왕의 손자인 분서왕이 피살된 뒤 고이왕계가 몰락하고 초고왕계가 다시 왕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제11대 비류왕 다음에 분서왕의 아들 제12대 계왕이 잠시 왕위에 있었던 것으로 전하나, 고이왕계의 몰락을 막지는 못하였다.

* 부왕=9.책계왕 * 모후=보과부인(대방군 태수의 딸)

* 왕후=? * 아들=12.계왕

백제 11대 비류왕 (재위 304년 ~ 344년)

구수왕의 둘째 아들이고, 사반왕의 동생이다. 분서왕이 죽자 그의 아들이 아직 어려서 비류가 신하들의 추대를 받아서 즉위하였다.

힘이 세고 활을 잘 쏘았으며 성품은 인자하고 너그러웠다고 한다

그러나 이 혈족관계는 비류왕의 재위시기와 모순되는 면이 있어 의문점이 있다. 구수왕은 234년까지 재위하였으며,

비류왕은 그보다 70년 뒤에 즉위하여 40년간 재위한 것으로 되어 있어 연대에 무리가 나타난다.

당시 백제 왕실은 개루왕에서 갈라진 고이왕계와 초고왕계의 두 지파가 세력을 다투고 있었다.

초고왕의 아들인 구수왕을 계승한 사반왕은 즉위하자 곧 폐위되었으며, 방계인 고이왕이 왕위를 차지하였다.

그뒤 왕위는 고이왕의 아들 책계왕과 손자 분서왕에게 계승되었다.

그러나 책계왕과 분서왕 모두가 한군현 세력과의 분쟁에서 연달아 피살되는 사태를 당하여,

고이왕계의 세력은 큰 타격을 입게 되었다. 초고왕계인 비류왕의 즉위는 바로 이때 이루어졌다.

비류왕의 즉위는 초고왕계의 재집권을 뜻한다.

312년 음력 2월 신하를 보내어 백성들의 질병과 고통을 살펴보고,

홀아비, 과부, 고아, 그리고 늙어서 자식 없이 외롭게 지내는 사람들을 도와주었다.

그 중에서도 스스로 생활할 수 없는 자에게는 곡식을 한 사람당 3섬씩 주었다. 또, 해구를 병관좌평으로 삼았다.

321년 봄 정월에 왕의 서제 우복을 내신좌평으로 삼았으나 우복은 327년 북한산성을 근거지로 반란을 일으켰고 왕은 이를 토벌하였다. 337년 봄 음력 2월에 신라에서 사신을 보내왔다.

비류왕 대에는 자연재해와 천문현상 기록이 다수 남아 있기도 하다.

344년 겨울 음력 10월에 왕이 죽었고 계왕이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비류왕 다음에 고이왕계인 분서왕의 아들 계왕이 즉위하였지만 그 재위는 2년 만에 끝나고, 다시 비류왕의 아들 근초고왕이 즉위하여 그뒤 초고왕계 내에서 왕위계승이 계속되었다.

‘근초고왕’이라는 왕명은 ‘초고왕’과의 연관성을 나타내는 왕명이라 할 것이다.

초고왕계인 비류왕은 고이왕계의 3대가 집권한 뒤에 즉위하였으므로 그는 구수왕의 아들이 아닌 손자, 또는 보다 먼 후손이 될 것이다.

 

백제 12대 계왕 (재위 344년 ~ 346년)

성은 부여, 분서왕의 장남이다. 분서왕이 죽었을 때 나이가 어렸으므로 비류왕이 왕위에 올랐으며, 초고왕의 후손인 비류왕과는 왕실 내에서 서로 다른 지파였다.

그리고 비류왕의 즉위는 분서왕이 낙랑의 자객에게 피살된 상태에서 이루어졌으며, 그 뒤에는 고이왕계가 몰락하고, 초고왕계가 집권하는 왕실지파간의 세력교체가 있었다. 그 사이에 재위한 계왕의 통치기간은 2년 정도에 불과하였다.

이러한 사실들은 경쟁세력들과의 관계에서 계왕의 즉위나 집권이 순탄하지 않았음을 암시해준다.

 

백제 13대 근초고왕 = 여구, 조고왕, 초고왕, 속고왕 (재위 346년 ~ 375년)

근초고왕은 백제가 차츰 국가로서의 면모를 갖출 무렵 비류왕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체격도 아주 크고 용감했기 때문에 둘째 아들이었지만, 차기 왕으로 지목되어 346년 계왕의 뒤를 이어 왕이 되었다.

고구려의 광개토왕에 비길 만한 정복군주로 평가받고 있으며, 남쪽으로는 마한을 정복하여 백제의 영토를 전라도 지역까지 확장하고 북쪽으로는 평양 근처까지 진격하여 고구려의 고국원왕을 전사시켰다.

즉위한 뒤 왕권의 강화와 확립에 주력하여 왕위계승에 있어서 초고왕계의 계승권을 확고히 하였다.

또, 진씨 가문에서 왕비를 맞아들여 왕실을 지지하는 배경세력으로 삼았다.

그리고 지방에 대한 통제를 보다 효율적으로 하기 위해 영역을 분정하여 지방통치조직을 만들고 지방관을 파견하였다.

이로써 왕은 중앙집권화를 보다 확고히 할 수 있었다.

한편, 근초고왕은 왕권확립을 바탕으로 하여 사방으로 정복활동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정복활동을 살펴보면, 남으로는 영산강유역을 중심으로 백제의 세력권에서 이탈해 있던 마한의 잔여세력을 경략, 복속시킴으로써 전라도지역 모두를 지배영역으로 확보하였다.

그리고 낙동강 서쪽에 위치한 가야세력에도 손을 뻗쳐 이들을 부용하게 함으로써 영향권내에 넣었다.

이렇게 남방지역의 평정이 일단락된 후 북방으로의 진출을 도모하였다.

이러한 북진은 당시 남진정책을 추구하고 있던 고구려와의 대립을 불가피하게 하였다.

양국의 군사적 충돌은 369년 치양성(황해도 배천)싸움에서부터 비롯되었으며, 그 절정은 371년에 벌어진 평양성싸움이었다.

이 싸움에서 태자와 더불어 정기 3만을 거느리고 평양성을 공격하여 마침내 고구려의 고국원왕을 전사시키고 대방고지까지 차지하는 개가를 올렸다.

이리하여 백제는 사상최대의 영역을 차지하게 되었다.

또 근초고왕은 정복활동과 더불어 대외활동도 활발히 전개하였다.

우선 고구려에 대항하기 위해 신라와 동맹관계를 강화함으로써 한반도에서의 힘의 균형을 이룩하였으며, 중국의 동진과도 외교관계를 수립하여 동진으로부터 ‘영동장군영낙랑태수’에 책봉되기도 하였다.

한편, 중국이 호족의 침입으로 분열된 시기를 이용, 요서지방으로 진출하여 백제군을 설치하였다.

백제의 요서지역 진출은 요동지역으로 진출하여오는 고구려세력을 견제함과 동시에 상업적인 측면에서의 무역기지의 확보라는 의미도 있었다.

이와 더불어 일본열도방면으로도 활발히 진출하여 백제계통의 세력들과 긴밀한 관계를 가졌다.

백제와 일본열도의 세력과의 관계에 대한 물적 증거로는 일본의 이소노가미신궁에 간직되어온 ‘칠지도’가 있다.

이 칠지도는 당대의 금석문자료로서 칼에 새겨진 명문)의 내용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설이 분분하지만

그 내용의 핵심은 이 칠지도가 근초고왕 때에 만들어졌고 백제의 후왕인 왜왕에게 하사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또, 한편으로는 백제가 위치한 지정학적인 유리한 조건을 이용하여 고대 상업 활동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한대 이래 중국 황해연안에서 한반도의 서남해안으로, 다시 일본열도로 이어지는 해상교통로는 한족의 동방침입과 동시에

고대 상업로로서도 중요한 길이었다. 그런데 낙랑군, 대방군이 멸망되고 북중국에는 수로에 익숙하지 못한 호족이 들어서게 되자 이 전통적인 해상교통로와 상업로는 백제가 계승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백제는 요서지역에 설치한 무역기지와 한반도와 일본지역에 자리한 백제계 세력들을 연결하여 고대 상업망을

형성함으로써 무역의 중심구실을 하게 되었다.

대방지역을 점령하면서 중국계 사람들을 포섭하여 백제문화의 질을 높였고 나아가 일본열도에 새로운 문물을 전수하여주었다.

그 좋은 예로서는 왕인아직기 등을 일본에 보내어 《천자문》과 《논어》를 전해줌으로써 일본에 유학사상을 일으킨 것을 들 수 있다. 이처럼 지배영역의 확대와 통치조직의 정비를 통하여 왕권이 확립되고

문화가 발전하게 되자, 이와 같은 신기운을 배경으로 박사 고흥으로 하여금 ‘서기’라는 국사책을 편찬하게 하였다.

‘서기’의 편찬은 왕실중심의 계보정리와 더불어 왕실전통의 유구성과 신성성을 과시하고 왕권의 위엄을 돋보이게 하려는 데서

취해진 조처였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하여 근초고왕대는 백제의 최대 전성기를 이룰 수 있었다.

 

아직기와 왕인

근초고왕 때는 백제가 융성하던 시대로 문화도 대단히 발달하였다.

이때 아직기가 근초고왕의 지시로 말 두필을 끌고 일본에 건너가서 왕에게 바친 뒤 말을 기르는 일을 맡아보다가,

그가 경서에 능통함을 안 일본 오진왕이 태자 토도치랑자의 스승으로 삼았다.

임기를 마치고 돌아올 때 왜왕이 그에게 “너의 나라에 너보다 나은 박사가 있느냐?”고 묻자,

그는 “왕인이라는 학자가 있는데 나보다 훌륭하다.”라고 왕인을 추천하니, 왕인은 ‘논어’ 10권, ‘천자문’ 1권을 가지고 일본에 건너가 일본왕의 태자 토도치랑자의 스승이 되었다.

그는 경서에 통달하였으므로 왕의 요청에 의해 군신들에게 경사(經史)를 가르쳤다.

그의 자손들은 대대로 가와치에 살면서 기록을 맡은 사가 되었으며, 일본조정에 봉사하여 일본고대문화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이후 백제로부터 일본으로 오경박사를 비롯하여 재봉녀, 직공, 야공, 양주자, 도공, 안공, 화원, 금공, 의사 등이 건너가서 백제문화를 일본에 전수해주어 일본의 고대문화 발달에 공헌하였다.

지금의 전라남도 영암군에는 왕인석상을 비롯하여 왕인이 독서하였다는 왕인책굴 등이 있으며, 무덤은 일본 대판과 경도의 중간지점인 히라카타에 있다.

고흥

백제의 박사로서 ‘서기’를 편찬하였는데, 고흥이 편찬한 ‘서기는 백제 최초의 역사서였다고 할 수 있다.

고흥이 ‘서기’를 편찬한 시기는 근초고왕 때였다. 이때 백제로서는 왕위계승이 초고왕계 중심으로 안정되고, 또 남북으로의 정복적인 팽창활동으로 영역의 확대와 왕권의 확립을 보아 중앙집권적 통치체제가 완비된 시기였다.

따라서, 이와 같은 시대적 상황과 분위기 속에서 고흥이 편찬한 ‘서기’는 왕권을 합리화하고 왕실의 계보를 문자로 기록하고

이를 신성화하며, 또 백제에 복속된 여러 부족의 신화와 전설을 왕실중심으로 통합, 정리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충청남도 논산에 가면 옛날에 '황산벌'이라고 불리던 곳이 있다.

지금은 벼가 무르익는 평화로운 들판이지만, 1340년 전 이곳 황산벌에는 신라와 백제가 최후의 결전을 벌였다. 신라군의 지휘관은 김유신, 백제군의 지휘관은 계백이었다. 둘 다 내로라하는 쟁쟁한 장수들이었다.

660년, 신라는 당나라와 손잡고 백제를 공격해 왔다.

당나라와 신라의 목표는 백제의 수도 사비성이었다. 사비성이 있던 곳이 지금의 부여이다. 당나라 군대는 바다를 건너 금강 기슭에 상륙했고, 신라군은 탄 헌을 지나 황산벌에 도착했다.

백제의 계백장군은 결사대 5천 명을 이끌고 신라군을 막으러 나갔다.

신라군은 백제군의 10배나 되는 5만 명이었다. 계백은 싸움터로 떠나기 전, 아내 와 자식을 불러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포로로 잡히면 적의 노비가 될 테니, 살아서 욕을 보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다."

계백은 칼을 들어 사랑하는 아내와 자식을 베었다. 자신이 살아 돌아올 수 없음은 물론이오, 백제가 승리할 수 없다는 것을 계백은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Posted by 원주유
조선 역사와 문화2013. 9. 14. 18:30
 

 

수나라와의 전쟁을 승리로 이끈 고구려의 26대 왕 '영양왕'

고구려 26대 영양왕(?陽王, 재위: 590?618)은 재위 기간 동안 수나라의 침략을 네 차례나 받았지만, 모두 물리친 임금이었다. 하지만 수나라 대군을 물리친 공은 모두 을지문덕(乙支文德, ?~?)에게로 돌아가, 정작 당시 임금이었던 영양왕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영양왕은 어떤 인물이었을까?

 

25년간의 태자 시절

 

영양왕은 고구려 25대 평원왕(平原王, 재위: 559?590)의 장남으로 이름은 원(元), 또는 대원(大元)이다. 훤칠한 외모를 가진 그는 세상을 구하고 백성을 편안히 할 임무가 자신에게 있다고 생각한 왕이었다. 그는 566년 태자로 책봉되어 25년 동안을 태자로 생활하다가, 590년 왕위에 올라 618년까지 29년간 재위하였다. 고구려인의 평균 수명을 고려해 보았을 때, 영양왕은 매우 어린 나이에 태자가 된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그는 평원왕이 즉위한 559년 무렵에 태어났을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평원왕 재위 기간 동안 고구려는 유목 제국인 돌궐(突厥), 북중국의 강자인 북주(北周) 등과 전쟁을 하였고, 안으로는 강력한 귀족 세력의 틈바구니에서 을지문덕, 온달, 연태조 등 신흥 무장 세력이 새롭게 부상하는 정치적 격변기를 치렀다. 또 586년 수도를 평양 장안성으로 옮기는 등 고구려에는 많은 변동이 있었다. 영양왕은 어린 시절부터 당시 고구려가 겪었던 다양한 사건들을 지켜보며 왕이 될 자질을 키워갔다.

 

요동치는 국제 정세와 그의 선택

 

590년 영양왕이 즉위하였을 때, 그에게 주어진 가장 큰 과제는 요동치는 국제 정세에 어떻게 대응하느냐는 문제였다. 5?6세기 동아시아의 국제 정세는 고구려를 포함하여 중원의 남조(南朝, 송, 제, 양, 진)와 북조(北朝, 북위, 동위와 서위, 북주와 북제), 그리고 북방의 유목 제국(유연, 돌궐) 등이 4강 내지는 5강을 이루며 서로를 견제하던 시대였다. 고구려는 이같이 다원화된 국제 질서 속에서 상대적인 평화를 누리며 경제, 문화 등에서 큰 발전을 이룰 수가 있었다. 하지만 589년 양자강 유역의 진나라를 멸망시키고 중원을 통일한 수나라의 등장은 고구려를 긴장시키기에 충분했다. 특히 수나라는 583년 이간정책을 펼쳐 북방의 강자인 돌궐을 동돌궐과 서돌궐로 분열시킨 뒤 585년에는 동돌궐을 굴복시키고, 서돌궐마저 약화시켰다. 수나라의 초대 황제 문제(文帝, 재위: 581?604)는 이른바 ‘개황의 치’라 불리는 뛰어난 정치를 펼쳐 수나라를 초강대국의 지위로 격상시켰다.

수나라가 동아시아의 패권질서를 재편하면서 고구려는 수나라와 대결하느냐, 아니면 굴복하느냐는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되었다. 영양왕은 이때 수나라와의 대결을 선택했다. 고구려는 당시 말갈, 거란 등 주변의 여러 세력들 위에 군림하던 강대국이었다. 신흥 강대국이 등장할 때 기존의 약소국은 신흥 강대국에게 붙어 기존 강대국을 견제해 줄 것을 요구하지만, 기존의 강대국은 신흥 강대국과 대결을 통해 힘의 우위를 확인해야만 한다. 싸우지도 않고 굴복할 경우에는 강대국의 지위를 순식간에 상실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영양왕은 진나라가 멸망한 직후부터 수나라와의 대결을 준비하며, 군사를 훈련시키고 군량미를 비축하는 등 국방을 강화하는 대비책을 세웠다.

 

영양왕, 선제공격에 나서다

 

수나라 문제는 고구려에게 성의와 예절을 다해 복종할 것을 요구하는 조서를 보내왔다. 영양왕은 수나라와 전쟁이 불가피하다고 판단했다. 이에 영양왕은 선제공격에 나서 적의 보급기지를 파괴하는 전략을 택했다. 성과 무기를 보수하는 방어 전략이 아니라, 선제공격으로 적과의 전쟁에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려는 공세 전략이었다. 당시 수나라는 4,600만의 인구를 가진 세계 최고의 대국이었으며, 군사력 또한 최강이었다. 하지만 영양왕은 이를 개의치 않았다.

598년 2월, 그는 궁성을 나와 요동으로 말을 달렸다. 그리고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던 말갈인으로 구성된 1만 기병과 만났다. 그들은 요하를 건너 요서 지역을 기습 공격했다. 수나라의 전진기지와 보급기지들을 파괴하기 위함이었다. 수나라 영주총관 위충이 나와서 막았지만, 영양왕은 기습에 성공한 후 서둘러 퇴각했다.

 

수 문제의 공격을 막아내다

 

영양왕의 선제공격은 수나라의 자존심을 크게 건드렸다. 수 문제는 즉시 자신의 4남 양량과 고경, 왕세적, 주라후 등을 앞세워 고구려를 공격할 것을 명했다. 양량의 군대는 북경을 출발해 요서 지방으로 진군했지만, 군량 수송이 원활하지 못해 군사들은 굶주렸고 역병에 걸려 요하에 이르지 못하였으며, 심지어 장마까지 만나 퇴각하고 말았다. 왕세적의 군대는 영주에서 퇴각했고, 주라후가 이끄는 해군은 폭풍을 만나 병선 대부분이 파괴되어 열의 여덟이나 아홉이 죽었다.

수나라의 패배는 질병과 홍수, 폭풍 등 자연재해가 주된 원인이었던 것처럼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수나라 측의 기록에 원정군 참모인 고경이 최선을 다하지 않았고 지략이 부족한 것을 전쟁 패배의 원인으로 돌렸다는 사실이 있는 것을 보면, 단순히 자연재해 때문에 수나라 원정군이 실패한 것은 아니었다. 영양왕의 선제공격으로 인해 군량 수송에 문제가 생겼고, 기록되지 않은 고구려군의 활약으로 패배한 것이 분명하다. 수 문제는 전쟁에서 패하자, 고구려를 굴복시키겠다는 전략을 완전히 포기한다. 영양왕의 과감한 선택이 고구려에 평화를 가져온 것이다.

 

신집 5권의 편찬

 

서기 600년 태학(太學) 박사 이문진(李文眞, ?~?)은 고구려 초기에 만들어진 역사서 [유기(遺記)] 100권을 다듬어 [신집(新集)] 5권을 완성했다. 고대국가에서 역사서는 개인이 함부로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국가가 자료를 독점하고 있어, 왕의 허락이 있지 않으면 함부로 만들 수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신집 5권 편찬은 이문진이 실무를 담당했지만, 이 책을 만들도록 명령한 영양왕의 업적으로 보는 것이 옳다. 완성된 연대로 볼 때 고-수(고구려-수나라) 전쟁의 승리로 인한 고구려인의 자부심을 드높이기 위해 이 작업이 진행된 것이라고 볼 수 있겠다.

 

신라에게 빼앗긴 영토를 회복하라

 

[삼국사기] 온달 열전에 따르면 온달(溫達, ?~590) 장군은 영양왕이 즉위한 후, 고구려가 지배했었던 한강 유역을 회복하기 위해 출전(出戰)했다가 아차성 아래에서 죽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온달이 신라의 영토를 공격한 것은 대체로 590년대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비록 온달은 실패하였지만, 영양왕은 한강 유역을 회복하겠다는 의지를 버리지 않았다. 603년 영양왕은 장군 고승(高勝)을 보내어 북한산성을 공격했다. 하지만 신라 진평왕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방어에 나섬에 따라 북한산성을 차지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영왕왕은 포기하지 않고 608년 다시금 신라의 북쪽을 공격해 우명산성을 빼앗고 8천 명을 포로로 사로잡는 전과를 올린다. 다급해진 신라는 608년과 611년 두 차례에 걸쳐 수나라에 사신을 보내 신라를 도와줄 것을 요청하기도 했다.

 

왜국과의 관계 개선

 

400년, 신라 내물왕의 요청으로 고구려군이 신라 영토를 공격해온 왜군을 격퇴한 이래로, 고구려와 왜국의 관계는 소원한 상태였다. 그런데 영양왕은 왜국과의 관계를 크게 개선했다. 595년 영양왕은 혜자(慧慈, ? ~ 622) 스님을 왜국에 파견했고, 혜자는 615년까지 20년간 왜국에 머물면서 왜국 쇼토쿠 태자의 스승이 되었다. 영양왕은 605년, 왜국에서 호류사(法隆寺)에 장육불상(丈六佛像)을 만든다고 하자 황금 300량을 보내고, 담징(曇徵, 579~ 631) 등의 승려와 기술자, 화가 등을 파견하기도 했다.

영양왕이 왜국에 대한 원조를 아끼지 않은 것은 한강 유역을 되찾기 위해 왜국으로 하여금 신라를 견제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고구려가 수나라와 대립하는 상황에서 신라가 고구려의 후방을 공격하지 않아야 수나라와의 전쟁에 모든 것을 쏟아 부을 수 있기 때문에, 왜국과 우호적 관계를 유지하는 일은 고구려에게 큰 실익이 될 수 있었다.

신라 또한 이러한 상황에서 591년 남산성 축성, 593년 명활산성 증축, 서형산성 축성 등 왕경 주변에 요새를 건설하기에 나섰다. 고구려와 왜국, 백제의 신라 견제가 심각한 위협으로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602년 왜국은 래목황자를 신라 정벌 장군으로 임명하고, 2만 5천의 군사를 준비시켰다. 602년 8월 백제군은 남원에 집결하여, 신라의 아막성을 공격했다. 왜국도 이에 맞춰 신라를 공격하고자 했으나, 왜국의 총사령관 래목황자가 병이 드는 바람에 출전하지 못했다. 왜국이 참전하지 못함에 따라 고구려군도 출격을 미루고 있었다. 이에 백제군이 홀로 왜군과 싸우다 아막성 전투에서 신라군에게 대패하고 말았다. 비록 고구려-왜-백제의 신라 공격은 성공하지 못했지만 왜를 끌어들임으로써, 고구려로서는 신라를 견제하는 것에 성공하고 있었다.

 

돌궐에 보낸 사신

 

604년 수나라에서는 정변이 일어났다. 고구려와 전쟁을 포기한 수 문제 대신, 그의 욕심 많은 둘째 아들 양광이 아버지 문제와 형인 양용을 죽이고 수 양제(隋煬帝, 재위: 604?618)가 된 것이었다. 수 양제는 토욕혼, 고창국, 돌궐 등을 정복한 후, 고구려마저 굴복시키려고 준비했다. 다시금 전쟁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영양왕은 수 양제의 위협에 대비하고자 사신을 돌궐에 보냈다. 당시 돌궐에는 수 양제가 직접 군사들을 거느리고 동돌궐의 왕 계민가한(啓民可汗, ??609)을 만나러 왔었다. 돌궐에서 고구려 사신을 만난 수양제는 고구려에 선전포고를 했다. 고구려가 돌궐과 연합하는 것은 수나라가 몹시 두려워하는 상황이기 때문이었다.

 

수 양제, 세 번에 걸쳐 고구려를 공격하다

 

영양왕은 왜국, 돌궐 등과의 외교 교섭, 말갈족에 대한 지배권 강화, 신라에 대한 견제 등 수나라와의 전쟁에 대비했다. 612년 수나라는 무려 113만 대군을 동원해 고구려를 공격해왔다. 이 전쟁은 요동성 방어 전투, 영양왕의 이복동생인 건무 장군의 평양성 전투, 그리고 을지문덕 장군의 살수대첩 등으로 인해 고구려군의 완승으로 끝났다. 전쟁 영웅은 을지문덕, 건무 등이지만, 여기에는 영양왕의 역할도 매우 중요했다. 그가 집중한 것은 외교와 내치였다. 을지문덕 장군이 살수대첩을 거두기 위해 청야전술(淸野戰術: 적이 이용할 식량과 물자를 없애 적을 지치게 만드는 전술)을 실시할 수 있었던 것은, 고구려인들이 한마음이 되어 식량을 적에게 주지 않기 위해 모두 들판을 비우고 성에 피신하는 단결력을 보여주었던 덕분이었다.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영양왕의 내치가 성공을 거두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613년 수나라가 30만 대군으로 다시 쳐들어오자, 고구려는 요동성에서 다시금 적을 물리쳤다. 하지만 영양왕은 수나라군을 상대로 승리하는 것만을 목적으로 삼지는 않았다. 614년 수나라가 또 다시 군사를 내어 쳐들어오자 이미 항복해온 수나라 병부시랑 곡사정(斛斯政)을 되돌려 보냄으로써 싸우지 않고 적을 퇴각시켰다. 수나라는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엄청난 국력을 쏟았음에도 별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결국 나라가 흔들려 618년 멸망하고 말았다.

반면 영양왕은 수나라의 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고구려의 국제적 위상을 한껏 드높였다. 하지만 요동 지역이 주요 전쟁터가 된 탓에 고구려의 패해도 컸다. 영양왕은 전쟁에서 잡은 수나라 포로들을 적극 수용해 이들을 고구려에서 정착하게 살도록 하여, 이들과 함께 전후 복구 사업을 전개했다.

 

후손들이 길이 기억한 영양왕

 

1456년 집현전 직제학 양성지(梁誠之, 1415~1482)는 세조에게 전대의 임금과 재상에게 제사를 지낼 것을 상소하였다. 이로 인해 단군을 비롯해 삼국과 고려의 시조 등 12명의 역대 임금과 을지문덕 등 16명의 역대 신하들이 사당에 배향(配享) 되었는데, 여기에는 영양왕도 포함되었다. 그가 수나라 대군을 대파하고 고구려를 지킨 공을 후손들도 인정한 것이었다.

당나라의 역사가 두우(杜佑)가 766년부터 30년에 걸쳐 편찬한 중국의 제도사 [통전(通典)]의 <고구려전에는 “고구려의 땅이 후한 시기(1~2세기)에는 사방 2천리였고, 위나라 시기(3세기)에는 남북이 점점 좁혀져 겨우 1천여 리였으나, 수나라 시기(581~618)에 이르러서는 점점 커져 동서 6천리에 이르렀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기록에 따르면 영양왕이 재위하던 시기에 고구려의 영토가 가장 커졌던 것이다. 즉, 영양왕은 고-수 전쟁을 승리로 이끌며 고구려의 전성기를 이룩한 임금이었다.

 

 

Posted by 원주유
신라 역사와 문화2013. 9. 14. 15:12

 

 

고구려와 백제의 왕들이 두려워 했다고?..누굴? 신라왕...


제31대 신문왕
자의왕후 ․ 김씨, 정명, 생년미상 ~ 692년
재위기간 : 681년 7월 ~ 692년 7월. 총 11년
부인 : 2명

자녀 : 4남
폐비 김씨
신목왕후 김씨 - 이흥(32대 효소왕)
흥광(33대 성덕왕)
근질, 사종 (4남)

신문왕은 문무와의 둘째 아들이며, 자의부인 소생이다. 이름은 정명이며 문무왕 5년에 태자로 책봉되어, 681년 7월에 문무왕이 죽자 왕위에 올랐다. 왕비는 김씨인데 소판 흠돌의 딸이다. 왕이 태자로 있을 때 비로 맞아들였으나 오래되어도 아들이 없었으며, 나중에 그 아버지의 반란에 연좌되어 왕궁에서 쫓겨났다. 683녀에 다시 일길찬 김흠운의 딸을 왕비로 삼았다.

신문왕대는 태종무열왕 대부터 시작된 신라의 중대왕실의 전제왕권이 확고하게 자리 잡힌 시기이다. 왕이 즉위하던 해에 왕의 장인인 김흠돌을 비롯한 파진찬 흥원, 대아찬 진공 등의 모반사건이 있었으나 모두 평정하였다. 김흠돌의 반란은 왕권전제화의 계기를 만들어주었던 이 사건에는 많은 귀족이 참여하고 있었는데 여기에 대해서는 신문왕은 주동자뿐만 아니라 말단 가담자까지도 철저한 숙청을 가하였다(이때 화랑도의 낭도들이 대거 가담한 죄를 물어 화랑도를 폐지하고, 그 낭도들의 명단을 작성하여 모두 병부에 예속시켰다. 당시 화랑도의 풍월주 자리를 흠돌의 조카 신공이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흠돌의 반란에 화랑도의 남동들이 대거 가담했던 것이다). 신문왕은 귀족세력을 철저하게 탄압하려는 의도에서 과감한 정치적 숙청을 단행함으로써 전제왕권의 확립을 꾀하였다.

같은 해에 유교적 정치이념에 입각한 인재의 교육과 양성을 목적으로 하는 국학을 설립하고 여기에 경 1인을 두었다. 이것은 진덕여왕 대에 이미 국학에 소속된 대사라는 관직을 설치했던 것을 신문왕대에 와서 완성한 것이다. 한편 불교에도 관심을 두어 685년에는 봉성사와 망덕사를 준공하기도 하였다.

신문왕대에는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뒤에 증대한 중앙관서의 업무와 확대된 영역의 지방통치를 위한 제도정비도 이루어졌다. 우선 중앙관부에서는 682년에 위화부령 2인을 두어 인재등용에 관한 업무를 관장하게 하고, 공장부감과 채전감 각각 1인을 두었으며 686년에는 예작부경 2인을 두었다. 그리고 687년에는 음성서장을 경으로 올리고 688년에는 선부경 1인을 더 두어 늘어난 중앙관부의 업무를 처리하게 하였다. 특히 685년에는 각 관부에 행정실무를 담당하는 사지가 설치됨으로써 문무왕대에 설치된 말단행정 담당자인 사와 아울러 영, 경, 대사, 사지 사의 5단계 관직제도가 완성되었다.

지방의 통치제도에 있어서는 689년에 왕경의 지리적 한계를 문제 삼아 지금의 대구인 달구벌로 옮기려 하였으나 서라벌에 터전을 둔 귀족들의 반발에 부딪혀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러한 왕경의 편재에서 오는 불편함을 극복하기 위하여 이미 685년에 서원소경(지금의 청주)과 남원소경(지금의 남원)을 설치하고 진흥왕대에 설치된 국원소경을 중원소경(지금의 충주)으로 고침으로써 5소경제를 정비하였다. 또한 신라가 영역을 확장하는 과정에서 수시로 설치하여온 군정적 성격이 강한 주도 685년에 완산주(지금의 전주)와 청주(지금의 진주)를 설치함으로써 삼국통일 후의 확대된 영역의 효과적 지배를 위한 9주제를 비로소 완성하였는데(9주 5소경제 완성). 686년과 687년에는 여기에 따른 주 ․ 군 ․ 현의 정비가 있었다.

마지막으로 중앙의 군사조직에 있어서는 신라인을 중심으로 고구려 ․ 백제 ․ 보덕국 및 말갈인을 편입시켜 9서당을 완성하였다. 내외의 관제정비와 짝하여 689년에는 관리의 늑봉으로 지급하던 녹읍을 폐지하고 해마다 세조를 차등 있게 지급하여 관리의 기존의 경제적 기반을 무너뜨리고 전제왕권의 강화를 더욱 확고히 하였다.

이와 같은 중앙과 지방에 걸친 제도의 체계적 정비를 통하여 전제왕권을 중심으로 한 통치 질서를 완비한 신문왕은 중국제후의 5묘제를 본 떠, 687년에 중대왕실의 정통성을 수립하는 5묘제를 확립하였다. 이 밖에도 일본과 당나라에 사신이 빈번하게 내왕하였고 문화가 발전되고, 설총과 강수와 같은 대학자가 배출되는 등 전성시대를 이루었다. 능은 경상북도 경주시 배반동 낭산의 동남에 있다.

제32대 효소왕

신목왕후 김씨 ․ 김씨, 이홍 또는 이공, 생년미상 702년
재위기간 : 692년 7월 ~ 702년 7월. 총 10년
부인 : 기록 없음
자녀 : 없음
왕비 (기록 없음)

효소왕은 신문왕의 장남이며, 신목왕후 김씨 소생으로 이름은 이홍 또는 이공이다. 신문왕11년(691년)에 태자에 책봉되어, 이듬해인 692년 7월 신문왕이 죽자 왕위에 올랐다. 그의 태자 책봉 시기가 691년인 것을 고려할 때, 효소왕은 10대의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른 것으로 판단된다. 신문왕 대에 잡아놓은 기반으로 효소왕 시대의 정치와 사회는 안정된 편이었다. 하지만 왕이 어린 탓에 정사는 신문왕 대의 공신들에 의해 좌우되었다.

692년에 즉위하여서는 좌우이방부의 ‘이(理)’자가 왕의 이름과 같으므로 피휘하여 좌우의방부로 관부의 명칭을 고치기도 하였다. 즉위하던 해 8월에 대아찬 원선을 집사부 중시에 임명하여 국정을 위임하였다(중시는 진덕여왕 대인 651년에 처음 실시되어 무열왕과 문무왕을 거치면서 입지가 강화되었고, 신문왕 대엔 정치권력의 핵심으로 대두되었다. 따라서 효소왕 대에 이르면 상대등은 그저 상징적인 존재로 전략하고, 중시가 조정을 장악하게 된다. 행정부를 대표하는 집사부의 장관인 중시는 이후로 경덕왕 대에 시중으로 호칭이 바뀌는데, 신라 후반기에 이르면 왕권을 제약하거나 때론 능가하는 존재로 변신하게 된다).

같은 해에는 고승 도중이 당나라에서 귀국하여 천문도를 왕에게 바쳤다. 천문도는 고구려에 전래된 진탁의 성도와 같은 것으로서 왕실권위의 상징으로 이용되었다. 또한, 이 무렵에 의학 교육기관인 의학을 설립하여 의학박사를 두고 『본초경』『침경』『맥경』등의 중국 의학서를 교수하게 되었다.

재위 4년(695년)에 서시전과 남시전을 두었는데 이것은 지증왕 대에 설치된 동시전과 더불어 왕경의 3대 시전으로서, 서라벌 도성 안의 내시까지 합쳐 큰 시장이 넷이나 형성되어 물화의 유통을 쉽게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 해에 자월(음력 11월)을 정월로 정하였다가 700여년에 다시 인월(음력 1월)을 정월로 바꾸었다. 698년 3월 기사에는 “일본국 사신이 왓으므로 왕이 숭례전에서 그를 만났다.”는 기록이 보인다. 이로써 이즈음에는 신라에서도 왜의 공식 국호를 ‘일본’으로 사용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왜는 문무왕 10년인 670년에 자국의 공식 명칭을 ‘일본’으로 개칭했다고 통보해왔는데, 신라에서도 그 점을 인정하여 그들을 왜라고 부르지 않고 일본으로 부르게 된다. 699년에는 당나라에 사신을 파견하여 조공함으로써 양국과의 우호적인 외교관계도 유지하였다.

당시 권력을 장악하고 잇던 신문왕 대의 공신들의 힘이 왕권을 능가하는 지경에 이르자, 효소왕은 왕권을 되찾기 위해 공신들과 대결을 벌인다. 700년에 이찬 경영의 반란이 있었으며 이 사건에 연좌되어 698년에 중시로 임명되었던 순원이 파면되었다. 이듬해엔 영암군 태수로 있던 일길찬 제일을 사익을 탐한 죄를 물어 장형에 처하고 귀양 보내 버렸다. 그러나 이는 오히려 공신 세력을 단결시키는 결과를 낳았고, 그것은 효소왕의 몰락으로 귀결되었다. 효소왕은 경영의 모반 사건이 발생한지 2년 만인 702년 7월에 죽었는데, 이때 그의 나이는 불과 20대 초반이었다. 그가 젊은 나이에 뚜렷한 이유도 없이 죽었다는 것은 권신들에 의해 제거되었을 가능성이 있음을 뜻한다.

702년 7월에 죽어 망덕사 동쪽에 장사지냈다. 자식은 한 명도 두지 못한 것으로 전한다. 또한 부인에 대한 언급도 없다. 이는 그가 권신들에 의해 제거될 때, 부인과 자식 또한 함께 살해되었기 때문에 그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고 있다. 능은 경주 낭산 동남쪽에 있다.

제33대 성덕왕
신목왕후 김씨 ․ 김씨, 초명은 융기, 개명은 흥광, 생년미상 ~ 737년
재위기간 : 702년 7월 ~ 737년 2월. 총 34년 7개월
부인 : 2명
자녀 : 4남 1녀
성정왕후 김씨 - 중경, 수충 (2남)
소덕왕후 김씨 - 승경 (제34대 효성왕)
헌영 (제35대 경덕왕), 사소부인 (2남 1녀)

성덕왕은 신문왕의 차남이며, 신목왕후 소생으로 효소왕의 동복아우이다. 본명은 융기였으나, 당나라 현종의 이름과 같았던 탓에 재위 11년 3월에 당의 칙명에 의해 흥광으로 고쳤다. 효소왕이 후계자 없이 죽자, 702년 7월에 왕위에 올랐다.

성덕왕대는 통일신라시대에 있어서의 정치적인 안정을 바탕으로 사회전반에 걸쳐서 전성기를 구가한 시기였다. 우선 정치적으로 국가의 행정을 담당하는 집사부의 중시가 일체의 정치적 책임을 지게 됨에 따라 전제왕권은 보다 강화될 수 있었다.

이찬 원훈이 성덕왕이 즉위하던 702년에 중시에 임명된 이래로 원문, 신정, 김문량, 김위문, 효정, 김사공, 문림, 선종, 윤충 등 10명의 인물이 성덕왕대에 중시로서 활동하였다. 재위 3년인 704년에 승부령 소판 김원태의 딸을 왕비로 받아들여 왕실의 기강을 다잡았고, 711년에는 왕이 백관잠을 지어 군신에게 제시하였다. 백관잠의 구체적인 내용은 전하지 않고 있으나, 아마도 전제왕권 하에서 신하가 지켜야 할 계명을 적은 것으로서 유교적인 충군사상이 주요내용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성덕왕대에는 이찬 개원을 비롯하여 인품, 배부, 사공 등 4명이 상대등으로 재직하였으나 정치적으로 힘이 없었던 것으로 보아, 귀족회의의 대표자였던 상대등의 활동이 위축된 것을 살펴 볼 수 있다.

국방시책으로는 721년에 하슬라도(지금의 강릉)의 정부 2,000명을 징발하여 북경지방에 장성을 축조하는가 하면, 재위 21년(722년)에는 모벌군성(지금의 경주시 외동면)을 축조하여 일본의 침입로를 차단하기도 하였다. 731년에 일본의 병선 300척이 동해변을 습격하자 이를 공격하여 대파시켰다.

733년에 발해가 바다를 건너 당나라 등주를 공격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그러자 당 현종은 신라에서 발해의 남부 지역을 공격해 줄 것을 요청했고, 성덕왕은 그 요청을 받아들여 출전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도중에 폭설을 만나 길이 막히고, 많은 동사자가 발생하는 바람에 돌아와야만 했다. 그러나 이런 노력 덕분에 당과의 관계는 더욱 돈독해졌고, 그 결과 734년에는 당나라와의 외교적 현안이었던 국경문제를 패강(지금의 대동강)으로 확정지었다. 이로써, 신라의 영토는 대동강에서 원산만에 이르는 이남지역으로 결정되었다. 성덕왕은 이 지역의 민심수습과 북방경영을 위하여 이찬 윤충, 사인, 영술 등을 파견하여 평양주와 우두주(지금의 춘천)의 지세를 조사하게 되었다.

성덕왕은 국내의 정치안정을 기반으로 활발한 외교활동을 추진하였다. 703년에 일본국의 사신을 접견하는 둥 일본과의 관계를 계속적으로 유지해 나갔으며, 당과의 관계도 더욱 밀착되어 갔다. 하지만, 새로 일어난 발해와는 당과의 관계 때문에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게 된다. 703년에 아찬 감사양이 당나라에 조공한 이래 36년 동안 당에 파견된 신라의 사절횟수는 43회로서 신라 중대왕실의 다른 어느 왕 때보다도 많았으며 사절의 내용은 주로 조공과 숙위, 그리고 하정이었다. 이러한 당과의 빈번한 외교적 교섭은 신라의 국제적 지위를 확고하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중국문물의 수입에도 적극적으로 기여하게 되었다. 704년에 입당사 김사양이 귀국하여 최승왕경을 바쳤고, 717년에는 숙위 김수충이 귀국하여 문선왕과 10철 및 72제자의 화상을 바치므로 국학에 봉안하였다. 이는 전제왕권 안정에 필요한 정치이념으로서의 유교의 적극적 수용의지를 반영한 것이며, 728년 에는 왕제인 김사종을 당나라에 파견하면서 신라 귀족자제들의 당나라 국학의 입학을 요청하였다. 717년에 의학박사와 산박사를 각각 1인씩 두었고, 718년에는 누각을 처음으로 제작하였다.

이러한 기술관계의 관직설치와 시설은 모두 유교적 이상정치인 위민 및 농본정책의 시행을 위한 바탕이 되었다. 705년과 706년에 기근이 들어 백성들이 고통 받자, 관리를 파견하고, 창고의 곡식을 나눠주어 구제하였으며, 백성들에게 오곡의 종자를 나누어 주었다.
그리고 722년에는 모든 백성들에게 비로소 정전을 지급하였는데, 정전은 정을 기준으로 하여 백성들에게 지급한 토지라는 뜻일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국가가 실제적으로 백성에게 토지를 지급하였다는 것이 아니라 자영농민이 본래 소유하고 있던 토지에 대한 국가적 인정을 뜻하는 것으로서 농업생산력의 증대를 가져왔으며, 그 결과 국가는 농민으로부터 많은 세를 거두어들일 수 있었고 재정적 기반을 견고히 할 수 있게 되었다.

성덕왕은 재위 36년째인 737년에 죽었다. 시호는 성덕이며, 이거사의 남쪽에 장사지냈다. 왕릉은 현재 경주시 조양동에 있다.

제34대 효성왕
소덕왕후 김씨 ․ 김씨, 승경, 생년미상 ~ 742년
재위기간 : 737년 2월 ~ 742년 5월. 총 5년 3개월 
부인 : 3명 
자녀 : 없음
왕비 박씨
혜명왕후 김씨
후비(영종의 딸)

효성왕은 성덕왕의 셋째 아들이고, 소덕왕후 소생이며 이름은 승경이다. 성덕왕 23년 724년에 태자에 책봉되었으며, 737년 2월에 성덕왕이 죽자 왕위에 올랐다.
효성왕은 즉위하면서 사정부의 승과 좌우의방부의 승을 모두 좌로 바꾸었는데 이것은 ‘승’자가 왕의 이름에 저촉되기 때문이다. 즉위하던 해(737년) 3월에 아찬 정종을 상대등에 임명하여 귀족회의를 관장하게 하고 아찬 의충을 집사부의 중시에 임명하여 행정을 담당하게 하였다. 739년 의충이 죽자 이찬 신충을 중시에 임명하고, 왕제인 헌영(뒤의 경덕왕)의 관등을 파진찬으로 하여 태자로 삼았다. 또, 전 왕인 성덕왕 때에 정상화된 당나라와의 외교적 관계를 한층 강화하는 한편, 외교적 통로를 이용하여 중국의 선진문물을 수입하였다. 특히 738년에 당나라 사신 형숙이 신라에 올 때 당나라 현종이 그에게 ‘신라는 군자의 나라’라고 일러준 것을 보아도 당시 신라의 문화수준을 가늠할 수 있다. 이때 형숙은 노자의 『도덕경』을 비롯한 서책을 왕에게 바쳤는데, 여기서 신라의 선진문물에 대한 수용 자세를 엿볼 수 있다.

740년에는 파진찬 영종의 모반사건이 있었으나 모두 평정되었다. 반란의 원인은 영종의 딸이 효성왕의 후궁이 되어 왕의 총애를 받았는데 왕비가 이를 시기하여 그의 족당과 더불어 후궁을 모살하였다. 이에 영종이 왕비의 족당을 원망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이를 보면 단순한 여인들의 투기가 정치적 반란을 유발한 것 같으나 실제는 성덕왕대에 전성을 구가하던 중대 왕실의 전제왕권이 점차 약화되면서부터 그간에 축적되었던 정치적 모순이 드러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즉, 귀족세력이 왕권의 약화를 틈타 다시 세력을 뻗치기 시작하였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특히, 이러한 현상은 741년에 귀족세력의 대표인 상대등 정종과 경덕왕 대에 상대등으로 활동하는 사인이 왕을 대신하여 열병한 사실에서도 확인된다. 재위 6년째 되던 742년 5월에 죽으매 시호를 효성이라 하였는데, 유명에 따라 법류사 남쪽에서 화장하여 유골을 동해에 뿌려진 까닭에 능은 조성되지 않았다.

제35대 경덕왕
소덕왕후 김씨 ․ 김씨, 헌영, 생년미상 ~ 765년
재위기간 : 742년 5월 ~ 765년 6월. 총 23년 1개월

부인 : 3명
자녀 : 1남
삼모부인
경수왕후 - 건운(제36대 혜공왕)
제3비(이찬 순정의 딸)

경덕왕은 성덕왕의 넷째 아들이며, 소덕왕후 소생으로 이름은 헌영이다. 효성왕의 동복아우인 그는 파진찬 벼슬에 있다가 효성왕 재위 3년인 739년에 태자로 책봉되었다. 그리고 742년 5월에 효성왕이 죽자 왕위에 올랐다. 경덕왕 때에 이르러 새로운 귀족들이 세력을 확장하여 왕권이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이에 경덕왕과 행정 책임자였던 중시는 왕권강화를 위해 관제정비와 개혁조치를 실시했다.

744년에 이찬 유정이 중시에 임명된 이후, 대정, 조량, 김기, 염상, 김옹, 김양상 등 7인이 경덕왕 때에 중시를 지냈다. 경덕왕은 즉위 초부터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관제를 정비하고, 과감한 제도 개혁을 실시했다. 747년에 중시의 명칭을 시중으로 바꾸었으며, 748년에는 정찰 한 명을 임명하고 백관을 규찰하도록 했다. 이는 성덕왕 대부터 지속적으로 추진되던 전제왕권 체제를 가속화하기 위한 조치였다.

747년에 국학에 제업박사와 조교들을 두었고, 749년에는 천문박사 한 명과 누각박사 여섯 명을 두었다. 이런 전문 식견을 갖춘 학자 관료들을 육성하여 성덕왕 이래 추진되던 유교정치 구현의 토대를 형성한 것이다. 경덕왕은 근본적으로 유학 사상에 입각한 전제왕권 정치를 꿈꾸고 있었고, 중국의 한, 당의 정치를 그 모델로 삼고 있었다(중국의 것을 모방하는 정책). 따라서 이러한 일련의 제도적 장치는 당나라 태종이 그랬듯이 왕권을 강화하면서 동시에 귀족들의 세력을 약화시키는 데 목적이 있었다. 이에 한화정책은 귀족세력으로부터 비판을 받았다. 그는 756년 상대등 김사인은 상소에서, 최근의 빈번한 천재지변을 들어 현실정치의 모순에 대하여 신랄하게 비판하고, 시중에 대해서 정치적 책임을 물었다. 이때의 비판내용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아마도 경덕왕이 추진한 한화적 개혁정치가 비판의 대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비판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757년부터 김기가 적극적으로 한화정책을 추진하였다. 전국 주의 이름을 대대적으로 바꾸고, 그 휘하의 현과 군을 대폭 정비하였다. 사벌주를 상주로 고치고 1주 10군 10현을 예속시켰고, 상량주를 양주로 고치고 1주 1소경 12군 34현을 예속시켰으며, 청주를 강주로 고치고 1주 11군 27현을 예속시켰다. 또 한산주를 한주로 고치고 1주 1소경 27군 46현을, 수약주를 삭주로 고치고 1주 1소경 11군 27현을, 웅천주를 웅주로 고치고 1주 1소경 13현 29현을 예속시켰다. 하서주는 명주로 고치고 1주 9군 26현을 예속시켰으며, 완산주를 전주로 고치고 1주 1소경 10군 31현을, 무진주를 무주로 고치고 1주 1소경 14군 44현을 예속시켰다. 전국 9주의 이름을 모두 바꾸거나 간소화하고, 소속된 소경과 군현을 명시했다. 이로써 통일 이래 제대로 정비되지 못한 행정 구역을 확실하게 규정하였다.

758년 2월에는 내외의 관원을 막론하고 만 60일 이상 휴가를 얻은 자는 해직으로 간주하라는 교시를 내려 관료들의 기강을 다잡았다. 4월에는 의술을 깊이 연구한 사람들을 관료로 등용해 내공봉에 근무하게 하는 조치를 내렸다. 또 율령박사 두 명을 임명했는데, 이는 유학적 가치관에 바탕을 둔 법치주의를 강화하려는 의도에서였다. 759년에는 지방 행정 조직 정비에 이어 중앙 관명을 중국식으로 개정함으로써 제도 개혁에 박차를 가했다. 병부와 창부의 경과 감을 시랑으로, 대사를 낭중으로, 집사부의 사지를 집사원외랑으로, 집사사를 집사랑으로 개칭하였다. 각 부서의 대사는 모두 주부나 주서로 개칭하고, 예부의 사지를 사례로, 조부의 사지를 사고로, 영객부의 사지를 개칭하고, 승부의 사지를 사목으로, 선부의 사지를 사주로, 예작부의 사지를 사례로, 병부의 노사지를 사병으로, 창부의 조사지를 사창으로 개칭했다. 이러한 경덕왕과 집사부가 추진한 한화적 개혁정치는 혜공왕 대에 가서 귀족세력이 다시 왕권을 압박해 오면서 모두 옛 명칭으로 환원되고 만다.
경덕왕은 당나라왕의 외교관계에 있어서는, 전통적 방법인 조공과 하정의 사신을 11회나 당나라에 파견함으로써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였다. 한편, 일본과의 관계는 그리 원만하지 못하여 일본과는 거의 국교 단절 상태가 되고 말았다.

757년에 내외관리의 월봉을 혁파하고 다시 녹읍을 부활시켰다. 이것은 새로이 성장하는 귀족세력의 경제적인 욕구가 지금까지 세조만 받던 월봉을 혁파하게 하고, 녹읍의 부활을 제도화시킨 것이라 하겠다. 그해 8월에 조부에 사를 두 명 더 두어서 세수 업무를 한층 강화시켰다. 경덕왕 말기에 정치적으로 성장한 귀족세력은 763년에 경덕왕의 측근세력이었던 상대등 신충과 시중 김옹을 면직시켰다. 왕당파인 이들의 면직에 관한 구체적인 내용은 기록상에 나타나지 않으나, 왕권에 대한 귀족세력의 반발의 결과로 보인다. 이러한 추측은 김옹이 물러난 뒤 약 4개월의 공백기를 거쳐, 764년 만종과 양상이 각각 상대등과 시중에 임명되었기 때문에 가능하다. 여기서, 양상은 나중에 상대등으로서 혜공왕을 사해하고 신라 하대의 첫 왕인 선덕왕으로 즉위하는 인물로서, 경덕왕 때에 이미 귀족세력을 대표하고 전제왕권에 도전하는 존재였다. 따라서, 경덕왕 말년의 정치는 왕권과 귀족세력의 정치적 타협 위에서 존립할 수 있었던 것이다. 경덕왕은 재위 24년 만인 765 6월에 생을 마감했다. 능은 처음에 경지사 서쪽 언덕에 장사지냈으나, 후에 성덕왕의 능이 있는 양장곡으로 옮겨졌다.

 

Posted by 원주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