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역사와 문화2013. 9. 14. 18:04

 

 

고구려 수나라 전쟁의 영웅 연개소문에 의해 쓰러지다.

고구려 27대 영류왕(營留王, 재위: 618?642)은 큰 전쟁 없이 25년간 나라를 다스렸지만, 연개소문에 의해 시해당한 임금이다. 그의 죽음 이후 고구려는 큰 전쟁을 치렀기 때문에, 그는 자신을 시해한 연개소문과 관련되어 지금도 역사적 평가가 엇갈리는 인물이다.

 

평원왕의 아들이자 영양왕의 이복동생

영류왕은 고구려 25대 평원왕(平原王, 재위: 559?590)의 아들로, 26대 영양왕의 이복동생이다. 그의 이름은 건무였다. 영양왕(?陽王, 재위: 590?618)이 559년 무렵에 태어난 것에 비해, 그는 평원왕이 뒤늦게 얻은 아들임을 고려했을 때 580년대 초반에 태어난 것으로 볼 수 있겠다. 그의 동생으로 대양왕(大陽王, 28대 보장왕의 아버지)이 있었으므로, 평원왕이 죽기 직전인 590년에 가까운 시기에 태어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는 618년 영양왕이 죽자, 왕위에 올라 642년까지 고구려를 다스리다가 60세 무렵에 죽었다.

수나라와의 전쟁에서 공을 세우다

그가 30세 무렵인 612년, 고구려와 수나라 사이에 전쟁이 발발했다. 이때 그는 고구려 수도를 방어하는 사령관으로, 바다 건너 직접 고구려 평양 부근에 도착한 수나라 좌익위대장군 래호아(來護兒)가 지휘하는 수만의 군대를 막아내는 임무를 맡았다. 래호아의 군대는 요동을 통과해 육로로 평양을 향해 공격하는 수나라 30만 별동대에게 군수품을 보급해주며, 함께 평양을 공격할 임무를 맡고 있었다. 따라서 고구려로서는 이들을 빨리 격파하여, 수나라 별동대와 만나지 못하게 해야 했다. 건무는 유인작전을 펼쳐 이들을 섬멸하고자 했다.

[북사(北史)] <래호아 열전에 따르면, 영양왕의 동생 건무가 날래고 용감(驍勇)하기가 매우 뛰어나(絶倫), 죽을 각오를 한 결사대 100명을 직접 이끌고 래호아의 진영으로 돌진했다고 한다. 그의 형인 영양왕처럼 그도 용감하게 적진을 향해 돌격해 군사들에게 모범을 보였던 것이다. 고건무의 작전은 적에게 일부러 패해 작은 승리를 안겨주어 교만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전쟁에서 공을 세우고자 하는 욕심이 컸던 래호아는 자주 승리를 거두어 고구려의 수도 평양 장안성 앞에 이르자, 자신의 군대만으로 고구려 수도를 함락시킬 야심을 갖게 되었다. 이때 부총관 주법상이 래호아에게 수나라 육군을 기다려야 한다고 말렸지만, 래호아는 직접 4만 대군을 이끌고 장안성으로 진군했다. 장안성은 외성, 내성, 중성, 북성으로 이루어진 도성(都城)이다. 고건무는 외성을 비워놓고 적을 유인했다. 외성 안에 들어온 수나라 군대는 기강을 잃고 마구 약탈에 나섰다. 이때 숨겨두었던 고구려 군대가 나타나 대오가 흩어진 수나라 군대를 섬멸시켰다. 간신히 도망간 수나라 군대는 해안가에 마련한 진지만을 겨우 지킨 채 수나라 육군과 만나 합동작전을 펼칠 능력을 완전히 상실하고 말았다.

고건무의 활약 덕택에 을지문덕은 보급품을 받지 못해 지쳐버린 30만 수나라 별동대를 살수에서 대파할 수 있었다. 이처럼 고건무는 뛰어난 지략과 용감함을 갖춘 612년 고-수 전쟁의 영웅이었다. 군대 내에서 위상이 높아지고 사람들의 지지를 얻음에 따라 그는 왕위 계승자로 부상하게 되었다. 영양왕에게 자손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만약 자손이 있었음에도 그가 왕위에 오르게 된 것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그가 전쟁에서 거둔 공적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다.

영류왕의 초기 대당(對唐) 정책

그가 왕위에 오른 618년은 마침 고구려의 숙적인 수나라가 멸망하고 당나라가 등장한 시기였다. 영류왕은 619년, 621년, 622년에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두 나라의 우호를 다졌다. 특히 622년에는 당나라의 제안을 받아들여 포로 교환을 하기도 했다. 고구려는 수나라와의 전쟁에서 획득한 포로 1만명을 돌려보냈다. 당나라에서 고구려로 돌려보낸 고구려인의 숫자는 확인할 수 없지만, 1만 보다는 적었을 것이다. 물론 고구려에는 여전히 수나라 출신 포로들이 많이 살고 있었다.

624년 영류왕은 당나라에서 보내온 도사(道士)와 도교서(道敎書)를 받아들였다. 또한 당나라의 책봉(冊封)도 표면적으로는 거부하지 않았다. 이때 당 고조(高祖, 재위: 618?626)가 신하들에게 고구려와의 관계는 명분과 실제가 다르다며, 굳이 신하의 예를 강요해 고구려와 갈등을 일으킬 필요가 없지 않느냐는 이야기를 한 것으로 볼 때, 책봉의 실질적인 의미는 거의 없었다고 볼 수 있다. 당나라는 수나라를 거듭 격파한 고구려의 실력을 잘 알고 있었기에, 겉으로는 우호적인 태도를 보였다. 하지만 안으로는 622년 고구려에서 이탈해 당나라에 귀부한 말갈의 추장 돌지계(突地稽)를 고구려와 가까운 연주(燕州) 총관에 임명하는 등, 고구려를 견제하고 있었다.

626년 신라와 백제는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고구려가 자신들이 당나라와 교류하는 것을 막을 뿐 아니라 국경을 자주 침략하니 이를 견제해 달라고 요청한 적이 있었다. 고구려도 당나라가 백제, 신라와 연합하는 것을 막는 등, 당을 견제했던 것이다. 하지만 당나라가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 삼국이 화해하라고 압력을 가하자, 고구려는 외교 갈등을 우려해 당의 요구를 들어주었다.

영류왕의 대외정책과 돌궐(突厥)

이처럼 영류왕이 당나라의 요구를 대체로 들어주고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하고자 했던 것은 그가 당나라와의 전쟁을 두려워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영류왕이 당나라와 화친을 원했던 것은, 유목제국인 동돌궐이 강성해졌기 때문이었다. 607년 고구려는 동돌궐에 사신을 보내기도 했지만, 551년과 580년대 초에 동서로 분리되기 전 강성했던 돌궐과 전쟁을 치른 경험을 갖고 있었다.

동아시아의 강자인 고구려와 수나라의 전쟁을 지켜보며 힘을 축적했던 동돌궐은 수-당 교체기 중원의 여러 군웅(群雄)들로부터 조공을 받을 정도로 국력이 강해져 있었다. 고-수 전쟁의 최대 수혜자가 된 동돌궐은 고구려의 핵심 이익이 걸린 요해(遼海 - 요서 북부 지역)의 거란족을 향해 세력을 확대해왔다. 전쟁 피해를 극복하는 일이 우선이던 고구려로서는 적극 대응하기가 어려웠다. 따라서 고구려로서는 거란족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는 동돌궐이 부담스러운 존재였다. 그러므로 당나라와 갈등을 야기하기보단 우호 정책을 시행한 것이었다.

그런데 630년 당나라가 동돌궐을 멸망시켰다. [삼국사기]는 628년의 사건으로 기록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630년이 옳다. 이때 영류왕이 즉시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승전을 축하한 것은 동돌궐을 견제하고 있던 고구려의 속내가 반영된 것이라고 하겠다.

 

변화하는 고구려-당의 관계

고구려는 당나라의 승전을 축하하면서 겸하여 봉역도(封域圖)를 주었다. 봉역도를 글자 그대로 풀이하자면 ‘제후가 책봉받은 영토에 관한 지도’ 라는 뜻인데, 이는 당나라의 입장이 반영된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봉역도가 만약 실제로 고구려의 지리 정보가 상세한 지도라면, 641년 지도에 관한 일을 담당하는 당의 직방낭중(職方郎中) 진대덕이 고구려 곳곳을 돌아다니며 지리정보를 획득하고자 노력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고구려가 보낸 것은 양국의 국경선을 확정한 국경지도로, 영토 분쟁을 하지 말고 사이좋게 지내자는 뜻을 밝힌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당나라의 생각은 달랐다. 626년 아버지 고조(이연)를 핍박하고, 형과 동생을 죽이고 왕위에 오른 태종(唐太宗 李世民, 재위: 626~649)은 언젠가는 고구려를 굴복시키려는 야심을 품고 있었다. 당 태종의 야심과 오만함은 631년 8월, 고구려에 보낸 사신 장손사가 고구려가 수나라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적의 시신을 모아 만든 기념물인 경관(京觀)을 헐어버린 것으로 표출되었다. 경관 파괴는 곧 고구려의 자부심을 건드리는 일이었다.

 

천리장성의 축조와 외교 정책

영류왕은 당나라가 여세를 몰아 고구려를 공격해 올 수도 있음을 감지하고, 백성을 동원해 부여성에서 서남쪽 바다에 이르는 천리에 달하는 지역에 장성을 쌓을 것을 명령했다. 천리장성 축조를 연개소문이 제안했다는 주장도 있지만, 이때는 아직 연개소문의 나이가 국내 정치에 간여할 정도가 아니었다. 천리장성 축조는 영류왕의 지시로 632년 2월부터 646년까지 15년간 지속된 거대한 사업이었다. 천리장성은 중국의 만리장성처럼 하나로 연결된 장벽이 아니라, 천리에 걸쳐 여러 곳에 성을 쌓고 보수하여 일종의 네트워크 방어망을 만든 것이라고 여겨진다. 이때 축성되고 보수된 성들은 고-당 전쟁에서 적을 막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삼국사기]와 중국의 사서(史書)들에는 631년부터 639년까지 고구려와 당나라 사이에 사신 왕래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고구려가 천리장성을 건설하며 당장 당나라와 적대적인 관계로 돌아선 것은 아니다. 634년 고구려 승려가 당나라에 입국하는 등 양국의 외교 관계는 지속되었다.

한편 당나라는 638년 토번과 싸워 승리하고, 서돌궐을 무력으로 압도하고, 서역의 여러 소국들을 제압하였으며, 640년에는 고창국까지 멸망시키는 등 서쪽 변경에서 그 세력을 크게 넓혔다. 당나라의 팽창을 예의주시하던 영류왕은 639년 태자 환권을 당에 사신으로 보내고, 당나라 국학(國學)에 청년들을 보내 입학시키는 등 당나라에게 우호적인 행동을 보였다. 그러자 640년 당나라에서 태자의 방문을 대한 답례로 사신 진대덕을 보내왔다. 고창국의 멸망 소식을 알고 있던 영류왕은 당나라의 강성함을 크게 경계하고 당과의 충돌을 피하기 위해 먼저 사신을 보냈을 뿐만 아니라, 당의 사신도 크게 우대해 주었다.

 

영류왕의 남방정책

영류왕은 고-수 전쟁 때 수나라를 지지했던 신라를 견제했다. 신라와는 한수 이북의 땅에 대한 소유권 문제로 6세기 말 이후로 갈등이 계속되고 있었다. 신라와의 작은 전투가 계속되는 가운데, 629년 8월 신라에게 낭비성을 빼앗기는 사태가 발생했다. 그러자 영류왕은 630년 왜국에 사신을 보냈다. 621년 사신을 보낸 이후 오랜만에 왜국에 사신을 보낸 것은 왜국을 이용해 신라를 견제하려는 목적 때문이었다.

영류왕은 군대를 보내 임진강 주변의 칠중성을 공격하게 하는 등 신라와 작은 전쟁을 하기도 했지만, 대군을 보내 정벌하기보다는 국경의 현상 유지와 외교를 통한 신라 견제에 치중하고 있었다. 백제와도 큰 갈등을 만들지는 않았다.

 

연개소문에 의해 시해되다

영류왕이 가장 공을 들인 것은 당나라와의 관계였다. 영류왕은 한편으로는 전쟁에 대비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전쟁을 피하고자 했다. 하지만 당나라는 고구려와의 전쟁을 각오하고 있었다. 641년 8월 당태종은 고구려를 방문하고 돌아온 진대덕의 보고를 받는 자리에서 “고구려를 육로와 해로로 나누어 공격하면 쉽게 멸망시킬 수 있으나, 지금은 산동지역이 아직 전쟁의 피해에서 벗어나지 못한 탓에 전쟁을 할 수 없다”고 말한 바 있다. 영류왕이 막고자 했던 당나라와의 전쟁은 그의 의지와 상관없이, 당태종의 야심과 당나라의 필요에 의해 발발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60세에 이른 영류왕은 자신의 재위기간 동안 당나라와 전쟁을 막으려고 노력했지만, 그 과정에서 소외된 연개소문(淵蓋蘇文, ?~665?)에 의해 642년 10월 시해되고 말았다. 연개소문은 자신을 죽이려고 했던 여러 대신들을 먼저 제거한 후, 곧장 궁중으로 달려가 영류왕을 시해하고 시신을 몇 토막으로 잘라서 구덩이에 버렸다고 기록되어 있다. 연개소문이 영류왕에 대해 상당한 적개심을 가졌던 것은 분명하지만, 왜 그가 영류왕을 시해했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한 이유를 알 수 없다. 단지 당나라와의 대외 정책을 놓고 젊은 연개소문과 노회한 정치가 영류왕 사이에 갈등이 빚어진 것으로 추정될 뿐이다.

영류왕에 대한 평가는 다양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다만 분명한 것은 그가 612년 고-수 전쟁의 영웅이었으며, 국제 정세의 변화에 따라 대외 정책을 변화시키며 큰 전쟁 없이 나라를 안정적으로 다스리고자 했던 임금이라는 점이다.


Posted by 원주유
신라 역사와 문화2013. 9. 14. 15:33

 

 

 

신라 진성여왕은 어떻게 나라를 다스렸는지, 그리고 그 후대 왕들은 진성여왕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아시나요..

제51대 진성여왕
문의왕후 김씨 ․ 김씨, 만, 생년미상 ~ 897년
재위기간 : 887년 7월 ~ 897년 6월. 총 9년 11개월
남편 : 1명 이상
자녀 : 1명 이상
혜성대왕 김위홍 - 막내아들 양패

진성여왕은 경문왕의 딸이며, 문의왕후 소생으로 이름은 만이다. 헌강왕이 후계자 없이 죽자 정강왕이 왕위를 이었으나, 그 또한 재위 1년 만에 죽었다. 정강왕의 유언에 따라 887년 7월에 그녀가 왕위에 올랐으니, 선덕과 진덕에 이어 세 번째 여왕이다.
진성여왕이 즉위할 무렵, 신라 사회는 국가 기강이 무너지고, 체제가 와해되고 있는 형국이었다. 이미 지방 호족 세력이 너무 성장하여 조정의 힘은 미약해지고, 왕실의 권위는 땅에 떨어진 상황이었다. 822년 김헌창의 난 이후, 신라 왕실은 계속해서 왕위 다툼이 일어나 왕실의 권위가 무너졌다. 조정의 통제력은 급격하게 약화되었으며, 헌강왕이 후계자를 제대로 정하지도 못한 상태에서 죽고, 이어 즉위한 정강왕마저 병상에 누워 정사를 챙기지 못하는 바람에 지방에 대한 신라 조정의 통제력은 점차 마비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진성여왕이 등극하였다. 여왕의 즉위는 백성들의 불안을 가중시키고, 지방 세력의 힘을 강화시키는 원인으로 작용하였다.

진성여왕은 즉위 직후 주 ․ 군에 1년간 조세를 면제하는 등 민심수습에 노력하였으나 재위 2년인(887년) 2월 숙부이자 남편이었던 상대등 위홍이 죽자 정치기강이 갑자기 문란해지기 시작하였다. 이와 함께 대야주에 은거하던 왕거인의 국왕 비판 등이 있었으며, 888년부터는 주 ․ 군으로부터 세금이 들어오지 않게 되어 국고가 비게 되었다. 이에 관리를 각지에 보내어 세금을 독촉하였고, 이를 계기로 민심이 흉흉해져 사방에서 도적이 봉기하게 되었다.
급기야 889년에 사벌에서 민란이 일어났다. 사벌주(지금의 상주)의 농민 봉기를 주도한 인물은 원종과 애노, 아자개 등이었다. 그들은 사벌의 군주 우연을 죽이고, 사벌성을 장악하였다. 진성여왕은 나마 영기에게 군대를 안겨 농민군을 진압하게 했으나, 영기는 농민군의 기세에 눌려 진군하지 못했다. 그 소식을 접한 진성여왕은 영기를 참수하고, 사벌 군주의 아들을 군주로 삼아 농민군을 진압하도록 했으나 농민군을 무너뜨리지 못했다. 신라 조정이 사벌의 반란군 진압에 실패하자, 그것이 도화선이 되어 전국 각처에서 크고 작은 반란 사건이 잇따랐다.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지방 호족들이 힘을 형성하여 연이어 군대를 일으켰다.
사벌의 아자개, 죽주(안성)의 기훤, 청주의 청길, 북원(원주)의 양길, 중원(충주)의 원회 등이 그 대표적인 세력이었다. 이들은 대개 지방의 호족들로 농민들을 선동하여 난을 일으키고, 그 지역의 관아를 장악하는 과정을 통해 군벌로 성장했다.

지방 군벌들은 한층 세력을 확충하며 서로 간에 힘겨루기 양상을 보였는데, 자기들끼리의 힘 싸움 끝에 가장 큰 세력으로 남은 것은 죽주의 기훤과 북원의 양길, 사벌의 아자개 등이었다. 청길, 원회, 신훤 같은 중부 세력은 거의 기훤에게 흡수되었고, 서라벌 주변 세력은 아자개에게 흡수되었다. 또 양길은 서라벌 북동부(지금의 강원도 일대)를 장악하였다. 이들 중 서라벌의 토벌군과 군사적 요충지였던 사벌의 아자개 군대가 가장 많은 전쟁을 치렀다.
아자개의 장남 견훤은 서라벌 서쪽과 남쪽을 휩쓸고 다니며 몇 달 만에 5천 군대를 형성하였고, 백성들에게도 열렬한 호응을 받았다. 이에 힘입어 견훤은 아버지 아자개를 떠나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였다. 견훤은 마침내 혁명 의지를 굳히고 군대를 남쪽으로 몰아 무진주(광주)를 장악한 뒤, 스스로 왕을 칭하기에 이르렀다. 900년 견훤은 완산주(전주)를 도읍으로 삼아 나라를 세우고, 국호를 백제(후백제)라고 칭함으로써 후삼국 시대의 서막을 올렸다.

한편, 기훤의 휘하 장수 궁예가 청길, 원회, 신훤과 결탁하여 양길에게 투항함으로써 기훤은 유명무실한 존재로 전략했다. 반면에 양길은 궁예를 앞세워 경북 북부 일대와 충청도, 강원도 동부 지역으로 세력을 확대하여 견훤 못지않은 무시 못 할 세력으로 성장했다. 견훤의 창업에 자극받은 궁예는 894년에 명주(강릉)를 장악, 병력 3천 5백을 형성하고 양길로부터 독립했다. 이후, 궁예는 강원도 북부 일대를 장악하고 서쪽으로 진출하여 경기도 및 황해도 지역을 손안에 넣었다. 896년에는 송악의 호족 왕융을 받아들여 철원의 태수로 봉하고, 주면 세력을 흡수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신라 국가의 실질적인 통치영역은 경주를 중심한 그 주변지역에 그치고, 전 국토는 대부분 적당이나 지방호족세력의 휘하에 들어갔다. 또, 896년에는 이른바 적고적이 경주의 서부 모량리까지 진출하여 민가를 약탈하는 등 수도의 안위조차 불안해졌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중국 당나라에 유학하고 돌아온 최치원은 894년에 사무 10조를 제시하였다. 이 제의는 받아들여진 것으로 기록 되어 있으나 실제로는 진골귀족의 반대로 시행되지 않았다. 최치원의 개혁안은 육두품 중심의 유교적 정치이념을 강조함으로써 왕권을 강화하는 것이어서 진골귀족의 이익과는 배치될 수 있었다. 이 개혁은 결국 시대적 한계성 때문에 시행되는 못하였다. 897년 6월 조카 헌강왕의 아들 요(뒤의 효공왕)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그해 12월에 죽었다. 능은 황산에 마련되었다.

제52대 효공왕
후비 김씨 ․ 김씨, 요, 886 ~ 912년
재위기간 : 897년 6월 ~ 912년 4월. 총 14년 10개월
부인 : 2명 이상
자녀 : 기록 없음
왕비 박씨

효공왕은 헌강왕의 서자이며, 후비 김씨 소생으로 이름은 요이다. 헌강왕이 죽을 당시 그는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강보에 싸인 상태였다. 그의 나이 열 살 되던 해인 895년에 진성여왕이 그를 궁중으로 데려와 태자로 삼았다. 그리고 897년 6월에 진성여왕이 중병에 걸려 왕위를 넘기자, 열두 살의 어린 나이로 즉위했다. 효공왕은 헌강왕이 사냥을 나갔다가 길에서 자색이 뛰어난 한 여자를 만났는데, 뒤에 헌강왕이 궁궐을 빠져나가 그 여자와 야합하여 태어난 아들이다. 뒤에 이 사실을 안 진성여왕에 의하여 헌강왕의 혈육이라 하여 895년에 태자로 봉하여지고, 뒤이어 왕위를 물려받았다.

왕위에 오른 효공왕은 헌강왕의 왕후이자 자기 양어머니인 김씨를 의명왕태후로 추존하고, 서불한 중흥을 상대등, 아찬 계강을 시중으로 삼아 조정을 개편했다. 그리고 재위 2년인 899년 3월에 이찬 예겸의 딸을 왕비로 맞아들였다.

효공왕 재위 시 신라는 왕실의 권위가 떨어져서 지방에서 일어난 궁예와 견훤이 신라영토의 패권을 놓고 서로 다투고 있었는데, 지금의 청주나 충주 이북지역은 완전히 궁예의 세력권에 속하게 되었다. 898년에 북쪽 지역에서 패권을 형성하고 있던 궁예는 패서도와 한산주 관내의 30여 성을 빼앗고, 마침내 송악에 도읍함으로써 후고구려의 기치를 내걸었고, 899년 7월에는 북원의 양길을 무너뜨리고 패권을 장악했다. 그러자 900년에 충주, 청주, 괴산의 세력가인 원회, 청길, 신훤 등이 궁예에게 성을 바치고 항복함으로써 궁예의 세력은 충청도와 경상 북부 일원까지 확대되었고, 마침내 901년에 궁예가 스스로 왕이라 칭하며, 후고구려가 건국되었다.

북쪽에서 궁예가 패권을 형성하고 있는 사이 남쪽의 견훤도 세력을 팽창해오고 있었다. 견훤은 901년 8월에 낙동강 서쪽 지대 장악을 위해 대야성(합천)을 공격해 왔는데, 다행히 신라 장수들의 활약으로 대야성을 무너뜨리지 못했다. 견훤은 이내 병력을 금성(나주)로 옮겨 그곳을 공격하였다. 나주는 독특한 지형 덕택에 견훤의 다각적인 공격을 막아 내며 어렵게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는데, 견훤은 나주를 손안에 넣기 위해 여러 차례 군대를 동원했지만, 쉽게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에 궁예는 해군대장군 왕건에게 나주를 장악할 것을 명하여 왕건은 그곳 호족들을 포섭, 나주로 군대를 잠입시켰고, 마침내 나주를 손안에 넣었다.

그리고 궁예는 904년에 국호를 마진, 연호를 무태라 하고, 백관의 제도를 확립함으로써 국가의 면모를 일신하였다. 그러자 신라 왕실을 섬기며 버티고 있던 패서도의 10여 주현이 궁예에게 투항해 버렸다. 궁예는 905년에 철원으로 도읍을 옮기고, 죽령까지 세력을 확대하여 빠르게 신라 땅을 잠식하였다.

907년에는 견훤이 일선(경북 선산)까지 진출하여 주변의 10여성을 장악하였고, 궁예는 남진을 계속하여 상주와 안동 일대를 장악하였다. 이렇게 되자, 신라 도성이 있는 서라벌 주변이 온통 견훤군과 궁예군의 전장이 되고 말았다.

나주 점령에 실패한 뒤, 계속해서 나주를 공격해오던 견훤은 909년에 해군장수 왕건과의 해전에서 크게 패해 진도와 고이도를 뺏기는 바람에 해상권을 잃고 나주에서 후퇴해야만 했다. 910년에 견훤은 다시 총력전을 펼쳐 나주를 공격하였고, 열흘 동안 포위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왕건이 이끄는 수군의 습격을 받아 퇴각하고 말았다.

이런 상황에서 신라의 효공왕이 이미 쇠할 대로 쇠한 국력을 회복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런 절망감에 사로잡힌 그는 정사는 제쳐 두고 총애하는 첩과 음사를 즐기며 방탕한 생활을 일삼았다. 대신 은영이 그런 모습을 보다 못해 효공왕에게 정사를 돌볼 것을 충언으로 간했지만 그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고, 효공왕의 첩을 죽여 왕정을 경계하게 한다.

이 사건 이후 효공왕은 왕권을 빼앗기고 허수아비 왕으로 전략하였고, 급기야 912년 4월에 죽음을 맞이했다. 효공은 왕비를 비롯한 박씨 일파에 의해 살해된 것으로 추측되는데 그를 이어 왕위에 오르는 박경휘(신덕왕)가 왕비 박씨의 오빠이고, 은영의 백부라는 사실이 그런 추축을 가능케 한다. 그의 죽음으로 내물왕 이후 지속되던 김씨 왕실은 몰락하게 된다. 죽은 뒤 사자사 북쪽에 장사지냈다고도 하고, 혹은 사자사 북쪽에서 화장하여 뼈는 구지제 동산 기슭에 묻었다고도 한다.

제53대 신덕왕
박예겸(제8대 아달라왕의 후손)
정화부인 ․ 박씨, 경휘, 생년미상 ~ 917년 
재위기간 : 912년 4월 ~ 917년 7월. 총 5년 3개월 
부인 : 1명
자녀 : 2남
의성왕후 김씨 - 승영(재54대 경명왕), 위응(제55대 경애왕

신덕왕은 제8대 아달라왕의 먼 후손이고, 박예겸의 아들이며 정화부인 소생이다. 이름은 경휘이며, 일찍이 헌강왕의 사위가 되었다. 타락한 효공왕이 박씨 세력에 의해 제거되자, 912년 4월에 왕위에 올랐다. 신덕왕의 아버지 예겸은 헌강왕 원년인 875년에 시중에 임명된 사람으로 신라 조정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신덕왕의 즉위는 제8대 아달라왕을 끝으로 제왕의 자리에서 물러났던 박씨 왕조의 부활을 의미한다.

왕위에 오른 신덕왕은 즉위년 5월에 선친 예겸을 신성대왕으로 추존하고, 어머니를 정화태후로, 왕비를 의성왕후로 하고, 아들 승영을 태자로 책봉하였다. 그리고 이찬 계강을 상대등으로 삼아 조정을 수습하였다.

신덕왕대의 신라는 국토의 대부분을 궁예와 견훤의 세력권에 빼앗겨 실제로 경주지역을 다스리는 데 그쳤다. 궁예의 부하인 왕건이 나주를 정벌한 이후 그들의 패권다툼이 더욱 치열해가는 동안 신라의 명맥은 겨우 유지되는 형편이었다. 이때의 신라 왕실은 스스로 후백제나 태봉의 공격을 막아낼 만한 힘이 없었다.

그의 치세 중에 중요한 사건이 있다면, 914년에 궁예가 연호를 ‘수덕만세’에서 ‘정개’로 고친 것과 916년 8월에 견훤이 또다시 대야성을 공격해 온 일이었다. 916년에 이르러서는 견훤이 대야성(지금의 경상남도 합천)을 공격하여 비록 이를 함락시키지 못하였으나, 그것은 곧 신라의 심장부에 비수를 겨누는 격이 되었다. 신덕왕은 917년 7월에 죽었으며, 육신은 화장되었고, 능은 죽성에 마련되었다. 혹은, 화장하여 잠현에 묻었다고 한다

제54대 경명왕
의성왕후 김씨 ․ 박씨, 승영, 생년미상 ~ 924년 
재위기간 : 917년 7월 ~ 924년 8월. 총 7년 1개월 
부인 : 1명 
자녀 : 없음
장사왕후

경명왕은 신덕왕의 장남이며, 의성왕후 김씨 소생으로 이름은 승영이다. 912년 아버지 신덕왕이 즉위하자, 그해 5월에 태자에 책봉되었다. 917년 7월에 신덕왕이 죽자 왕위에 올랐다.

경명왕은 아우인 이찬 위응을 상대등에 임명하고, 대아찬 유렴을 시중으로 삼아 정사를 꾸렸다. 하지만, 경명왕 때에는 이미 신라의 국운이 기울어가고 있었다. 실제 신라 왕실은 왕경인 경주를 중심으로 한 그 주변지역을 다스리는데 불과하였고, 나머지는 궁예와 견훤 등 지방 세력들에게 빼앗겼다. 특히, 918년(경명왕 2)에 일어난 현승의 반란으로 신라는 그 운명을 더욱 재촉하게 되었다. 또, 경명왕 때에는 여러 가지 변괴가 있었다고 하는데, 919년 사천왕사 벽화의 개가 울었고, 927년에 황룡사탑의 그림자가 사지 금모의 집 뜰에 열흘이나 머물렀으며, 사천왕사 오방신의 활줄이 모두 끊어지고 벽화의 개가 뜰로 쫓아 나왔다는 기록들이 그것이다. 당시 신라의 국운이 기울어져가는 불안한 사회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기사들이다.

928년 6월에 궁예가 911년 세웠던 태봉 왕조는 민심이 불안해지면서 왕건을 추대하는 신하들로 인해 무너지고 만다. 왕건은 왕위에 올라 국호를 고려라 하고, 연호를 천수라 하였다. 얼마 뒤, 후백제가 아자개가 지배하던 상주 일대를 장악하는 과정에서 그의 심사를 불편하게 하자 아자개가 아들인 견훤을 버리고 왕건에게 투항하게 된다. 이 사건으로 견훤의 명예는 크게 훼손되었다.

고려 개국 이후 신라의 지방 세력들은 왕건에게 호의를 가지기 시작했고, 경명왕도 고려와 타협하여 후백제를 함께 견제하려는 경향을 보였다. 왕건이 919년에 도읍을 철원에서 송악으로 옮겨 정치적 기반을 강화하자, 920년 정월 상대등 김성과 시중 언옹 등은 왕건과 사신을 교환하고 고려와 수호 관계를 맺었다. 그러자 견훤에게 위협을 받고 있던 지방 세력들이 전략적 제휴의 형태로 대거 고려에 귀순했다.

920년 2월에 강주(진주) 장군 융웅이 견훤의 대야성을 공격해 위협을 느끼고 고려에 귀순했는데, 예상대로 견훤은 그해 10월에 기병 1만을 거느리고 대야성을 공격해 왔고, 결국 대야성은 함락되고 말았다. 다급해진 경명왕은 급히 아찬 김율을 왕건에게 보내 도움을 요청했지만, 견훤의 군대는 다시 진례로 진군했고, 이를 왕건의 도움으로 막아낼 수 있었다. 912년 2월에는 말갈의 일족인 달고 무리가 신라의 북쪽 변경을 침략해 왔다. 그러나 그들은 고려 장수 견권에게 대파되어 전멸하였다. 경명왕은 왕건에게 사신을 파견하고, 감사하는 편지를 함께 보냈다.

이렇게 고려의 도움으로 계속되는 수난들을 극복하게 되자, 경명왕의 외교정책도 친고려의 성향으로 바뀌고 만다. 이렇게 상황이 돌아가, 922년 정월에 하지성 장군 원봉이, 923년 7월에는 지성장군 성단, 경산부 장군 양문 등이 왕건에게 귀순하게 된다.

왕건에게 등을 돌렸던 태봉의 신하들도 고려에 투항하기 시작했다. 922년 정월에 명주의 호족 김순식이 항복하여 왕씨 성을 하사받고 충성을 맹세하였고, 또 진보성 장군 홍술도 같은 달에 항복하였다. 명주의 호족으로 지금의 강운도 동해안 일대를 장악하고 있던 순식과 경북 의성 일대의 호족인 홍술의 귀순으로 왕건의 세력은 더 확고해지게 된다.

고려에 의존하던 덕분에 정치적 안정을 되찾은 경명왕은 923년에 창부시랑 김낙과 녹사 참군 김유경과 924년 조산대부 창부시랑 김악을 후당에 입조시키고 토산물을 바치는 조공 외교도 펼치게 된다. 후당의 장종은 그에게 의대부시위위경의 관직을 내렸다. 경명왕은 고려와 후당에 생존을 위한 외교전을 펼치며 신라의 명맥을 겨우 유지해나가고 있었다. 그러던 중 924년 8월에 지병으로 생을 마감하니, 황복사 북쪽에서 화장되어 뼈는 성등 잉산 서쪽에 뿌렸다. 고려 태조 왕건은 사신을 보내 조문하고, 제사에 참여토록 하여 양국의 화친 관계를 확인하는 조치를 내렸다.

제55대 경애왕
의성왕후 김씨 ․ 박씨, 위응, 생년미상 ~ 927년
재위기간 : 924년 8월 ~ 927년 11월. 총 3년 3개월
부인 : 1명
자녀 : 여러 명(자세한 기록 없음)
왕비

경애왕은 신덕왕의 아들이며, 경명왕의 동복아우이고 의성왕후 김씨 소생으로 이름은 위응이다. 경명왕 원년인 917년에 상대등에 임명되어 조정을 이끌다가 919년에 물러났다. 924년 8월에 경명왕이 후사 없이 죽자, 왕위에 올랐다.

경애왕 때 후삼국의 패권다툼은 이미 왕건 쪽에 유리하게 전개되었다. 925년 고울부장군 능문이 항복하였고, 927년 강주(지금의 진주)의 왕봉규가 관할하는 돌산 등이 왕건에게 항복하였다. 이렇듯 신라 장수들이 계속 고려 조정에 투항하고 있을 무렵, 고려 도성으로 발해의 귀족과 백성들도 대거 귀순하고 있었다. 당시 발해는 거란의 거센 공격에 밀려 도성이 함락될 지경에 놓여 있었다. 그 여파로 925년 9월엔 장군 신덕 등 5백 명이 귀순했고, 또 같은 달에 발해의 예부경 대화균을 비롯해 대씨 왕족들이 대거 귀순해 왔다. 고려는 신라 호족들과 발해의 유민을 받아들여 국력을 키웠고, 이러한 상황 속에서 왕건과 견훤은 잠시 싸움을 그치고 강화하였는데, 견훤이 보낸 질자인 진호가 고려에서 죽자 견훤은 926년 다시 출병하여 고려를 공격하였다.

신라는 경명왕 4년에 고려와 수교하여 친 고려정책을 펼쳤다. 이 시기에 견훤은 1만 명이라는 대규모 군대를 동원하여 그의 오랜 숙원인 대야성을 함락시켰으며, 다음 진례에 대한 공격을 감행하게 되는데, 이때 고려군의 파병으로 위기를 모면하게 된다. 이후 후백제와 고려의 관계는 4,5년간 소강상태를 유지하였으나 경애왕이 등장하면서 대규모의 전쟁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고려는 용주성을 공격한 것을 계기로 후백제에 대한 적극적인 공세를 취하였으며, 드디어 왕건이 친히 강주를 순행하며 민심을 돌보자, 불안을 느낀 견훤은 지금의 상주를 공격하고, 이어 경주 근처의 고울부를 습격한다. 견훤이 침입했다는 소식을 듣고, 경애왕은 고려의 왕건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왕건에게 구원군을 요청한 경애왕은 다급한 심정으로 왕비와 궁녀, 종실들과 함께 포석사에 나가 제를 올리고, 국가의 안녕을 기원했다. 신라의 요청을 받은 왕건이 곧 군사 1만 명을 파견하여 구원하게 하였으나 고려군이 도착했을 때, 이미 서라벌은 백제군에게 유린당한 뒤였다. 이 사건을 『고려사』, 『삼국사기』에는 경애왕이 포석정에 나가 연회를 베풀며 놀고 있었다고 하나, 이는 고려의 역사가들이 신라 멸망의 당위성을 역설하고 고려건국의 정당성을 높이기 위해 그렇게 기록한 것이라 보아진다.

경애왕은 견훤이 포석정까지 들이닥치자, 당황하여 왕비와 함께 달아나 도성 남쪽 별궁에 몸을 숨겼으나 백제군의 수색망에 자살로 생을 마감했으니, 이때가 927년 11월이었다. 견훤은 경애왕의 외종제 김부(경순왕)를 왕으로 세우고, 왕족 효렴을 비롯해 재상 영경과 그 외에 종실의 자녀들과 각종 기술자들, 병기, 보배 등을 빼앗고 돌아갔다. 이 소식을 들은 왕건은 신라를 돕는다는 명분으로 급히 군사를 일으켰고 바로 이것이 공산성전투가 된다.

한편, 경애왕 때 황룡사에 백좌경설을 설치하고 선승 300여명에게 음식을 대접하였는데, 이것을 백좌통설선교라 부르며, 대규모 선승 모임의 시초가 되었다. 세 왕 김부는 경애왕의 시체를 수습하여 서쪽 대청에 안치하고, 장례를 치른 뒤, 남산 해목령에 능을 마련했다.

 

제56대 경순왕
김효종
계아태후 ․ 김씨, 부, 생년미상 ~ 978년
재위기간 : 927년 11월 ~ 935년 11월. 총 7년
부인 : 3명
자녀 : 1남 이상
죽방부인 - 마의태자
낙랑공주 왕씨
후실왕씨

경순왕은 제46대 문성왕의 후예로 성은 김씨이고, 이름은 부이며, 경애왕의 외종제이다. 아버지는 이찬 효종이며, 어머니는 계아태후이다. 경순왕의 아버지 효종은 효공왕 6년(902년)에 대아찬으로 시중에 임명되었다. 그 이후 이찬으로 품계가 올랐고, 오랫동안 신라 조정을 이끌었던 인물이다.

효종의 아들 부가 왕위에 오른 것은 견훤의 천거에 의해서였다. 927년 경애왕이 견훤의 습격을 받아 살해된 후 견훤에 의해 옹립되었다. 경명왕 즉위 이후 신라가 노골적으로 고려와 화친하며 백제를 적대시하던 박씨 왕조를 폐하고 김씨 왕조의 후예인 부를 왕으로 세웠던 것이다. 견훤은 김부를 왕으로 세우고 돌아가면서 신라의 도성을 지키던 병사들을 대거 포로로 잡아가, 경순왕은 군사권도 행사할 수 없는 이름뿐인 왕이었다. 왕위에 오른 경순왕은 우선 경애왕의 시체를 대청에 모시고, 여러 신하와 함께 장례를 준비했다. 고려 태조 왕건은 사신을 보내 조문한 뒤, 이내 자신이 직접 병력 5천을 이끌고 견훤의 퇴로를 차단하기 위해 달려왔다.

왕건은 공산(팔공산)에서 견훤을 급습하려했으나, 오히려 백제군이 숨겨놓은 복병에 당하고 만다. 백제군에 둘러쌓여 진퇴양난의 상황에 놓이자 신숭겸의 희생으로 겨우 목숨을 건져 탈출할 수 있었다. 공산의 패전 이후, 왕건은 백제와의 계속되는 전쟁에서 어려움을 겪게 된다. 928년 고려와 신라의 교통로였던 죽령과 강주를 백제군이 장악했으며, 11월에는 경상 북부 지역의 요충지인 부곡성이 함락당해 장군 양지와 명식이 백제에 항복하였다. 929년 7월에는 고려의 주요 거점인 의성부를 공격하여, 의성 성주 홍술이 전서하게 된다. 그러던 중 그해 10월에 견훤은 자신의 고향인 사벌의 가은현을 차지하려 노력했으나, 결국 실패하고 경상도 지역에 주둔한 고려군의 마지막 보루인 고창(경북 안동)을 공격했다. 그 소식을 듣고 군대를 이끌고 내려온 왕건은 고전 끝에 유금필을 앞세우고 죽령을 뚫는다. 이때, 재암성을 지키고 있던 신라 장수 선필 군대를 이끌고 귀순해 오게 되고, 유금필을 선봉에 두고 백제군을 잇따라 궤멸시켰다. 이에 고려군은 고창에, 견훤의 군대는 불고 5백 보 남짓 떨어진 석산에 주둔하며 대치했다. 이때, 김선평, 권행, 장길 등이 이끌던 주변의 신라 민병대가 고려군에 가세하게 되고 힘을 얻은 왕건은 신라 민병대와 함께 협공을 감행하여, 견훤의 군대를 낙동강 넘어 남쪽까지 퇴각시키게 된다. 상황이 이렇게 흘러가자, 신라 신하로 남아있던 동해 주변의 주와 군의 110여 성이 고려에 귀순했다.

931년에는 왕건이 경순왕을 알현하여 수십 일을 머물렀는데, 왕건은 부하들에게 질서와 규율을 지키도록 하니, 수도 아녀자들은 ‘전번 견훤이 왔을 때에는 늑대와 범을 만난 것 같았으나, 이번 왕건이 왔을 때에는 부모를 만난 것 같다’고 하였다고 한다.

왕건이 기세를 세우며 백제 성곽에 대한 공격을 가속화하고 있던 시기에 견훤은 수군을 움직여 그해 9월 백제의 해군장수 상귀로 하여금 고려의 예성강을 공격하게 했다. 그리고 염주, 백주, 정주 세 개의 포구를 장악하고, 전함 1백 척을 불살랐다. 도성주변을 공격당한 왕건은, 934년 9월에 직접 군대를 이끌고 운주 정벌을 감행했다. 유금필을 필두로 선제공격에 나선 고려군은 백제군 3천 명을 죽이는 승리를 거두게 되고, 이에 공주 이북의 30여 성이 스스로 항복해 왔으며, 929년부터 백제의 지배 아래 들어간 나주까지 탈환하게 된다. 운주에서 대패하고, 다시 나주까지 뺏긴 백제 조정은 935년부터 심한 내분을 겪게 된다. 견훤은 여러 명의 아내에게 십여 명의 아들을 뒀는데, 그들 중에 넷째 아들 금강을 가장 총애했다. 운주 전투에서 물러난 후, 금강에게 왕위를 양위하자 이에 당시 가장 유력한 왕위 계승자였던 신검과 반대파 세력은 935년 3월에 반란을 일으켜 금강을 죽이고, 견훤을 금산사에 유폐시켜 버렸다. 금산사에 갇혀 있던 견훤은 유폐된 지 3개월 만인 그해 6월에 나주로 탈출하여 고려에 귀순했다.

935년 그는 고려에 신라를 넘겨 줄 것을 신하들과 논의하고 김봉휴로 하여금 왕건에게 항복하는 국선을 전하게 하였다. 이때 마의태자는 고려에 항복하는 것을 반대하였으나 경순왕이 끝내 투항을 천명하자, 부왕에게 하직 인사를 하고 속세를 등졌다.

그해 11월 고려 태조가 신라의 항복을 받아들이고, 이로써 신라 천년사직은 무너졌다. 경순왕이 신하를 거느리고 고려에 귀의할 때 향거와 보마가 30여리에 뻗쳤다. 왕건은 그를 정승공으로 봉하고 태자보다 높은 지위에 두었다. 또, 왕건은 그에게 녹 1000석을 주고 그의 시종과 원장을 모두 등용하였으며, 신라를 고쳐 경주라 하고 그의 식읍으로 주었으며, 그를 경주의 사심관으로 삼았다. 936년 2월에는 견훤의 사위이자, 신검의 매형인 박영규가 고려에 귀순했다. 이렇게 한반도의 패권과 민심은 왕건에게 옮겨가고 있었다. 왕건은 그해 9월에 8만 7천 명의 군사를 이끌고 견훤과 함께 신검을 응징하기 위해 나섰고, 일선(선산), 완산주 등지에서 전쟁을 벌여, 완산주에서 신검의 항복을 받아냈다. 후백제가 멸망하게 되면서, 이로써 약50년에 걸친 후삼국 시대는 막을 내리게 된다.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한 뒤에도 경순왕의 삶은 이어졌다. 그는 녹읍으로 받은 경주 지역을 다스리며 살다가 978년(고려 경종 3년)에 생을 마감했다. 무덤은 경기도 연천군 백학면 고량포리에 있다. 그의 능이 어떤 이유로 이곳에 조성됐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Posted by 원주유
신라 역사와 문화2013. 9. 14. 15:19

 

 

신라왕들은 어떻게 살았으며, 어떤 업적을 남겼는지 보실까요.

 

제36대 혜공왕
경순왕후 ․ 김씨, 건운, 758~780년 
재위기간 : 765년 6월 ~ 780년 4월. 총 14년 10개월
부인 : 2명
자녀 : 기록 없음
신보왕후
창장부인

혜공왕은 경덕왕의 장남이며, 경수왕후 소생으로 이름은 건운이다. 758년에 태어났으며, 세 살 때인 760년에 태자 책봉되었고, 765년 경덕왕이 죽자 여덟 살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혜공왕은 태종무열왕의 직계손으로 계승된 신라 중대왕실의 마지막 왕이다. 즉위 했던 때의 나이가 8세였으므로 무후 경수태후의 섭정을 받아야 했다.

혜공왕 대에는 집사부 중시를 중심으로 강력한 전제왕권 체제를 구축했던 신라 중대 사회의 모순이 본격적으로 노정되었다. 즉 전제왕권의 견제 하에 있던 귀족세력들이 정치일선에 등장하여 정권쟁탈전을 전개함으로써 정치적으로 불안정하였다. 따라서, 혜공왕의 재위 16년 동안에는 많은 정치적 반란사건이 있었다. 먼저 일길찬 대공과 그의 동생 아찬 대렴이 768년에 반란을 일으켰으나 왕의 측근인물인 이찬 김은거를 비롯한 왕군에 의해서 토멸되었다. 이 반란은 경덕왕에 이어서 중대의 전제왕권 체제를 유지하려는 혜공왕 초년의 정치적 성격을 부인하려는 최초의 정치적 움직임이었다. 김은거는 이 반란의 진압에 대한 공로로 그해에 시중에 임명되었으며, 이찬 신유는 상대등에 임명되었다.

그리고 769년에 왕은 임해전에서 조신들에게 연회를 베풀고, 인재를 천건하게 하여 새로운 인재들을 모아 전제왕권 체제를 강화하려 하였다. 그러나 770년에는 대아찬 김융이 반란을 일으켰다. 이 반란도 대공의 반란과 마찬가지로 반 혜공왕적 성격의 것이었다. 김융의 난으로 김은거가 시중에서 물러나고 이찬 정문이 시중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혜공왕대의 정치적 사건 중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774년 감양상이 상대등에 임명된 사실이다. 즉, 김양상은 경덕왕 대에 시중을 역임하였으나 778년에 있었던 대공의 난에 연루되어 시중직에서 물러나고 왕의 측근인 김은거에게 시중직을 물려주었다. 이로써 보면 김양상은 적어도 친 혜공왕적인 인물은 아니었다. 그런데 김양상이 다시 귀족세력을 대표하는 상대등에 임명되었다는 사실은 반 혜공왕적인 귀족세력이 정권을 장악하였음을 의미하며, 이것은 전제왕권 중심의 중대 사회에서 귀족중심의 사회로의 전환이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 775년에는 김은거 및 이찬 염상과 정문의 모반이 두 차례에 걸쳐 있었다. 이들은 모두 전제왕권 유지를 지지하는 세력으로서 귀족세력인 김양상의 대두에 반대하여 반란을 일으켰으나 모두 진압됨으로써 김양상 중심의 정치세력은 더욱 공고해질 수 있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혜공왕일파는 실질적인 정치권력은 상실하고 명목상의 왕위만을 보전하고 있는 상태가 되었다.

이런 어지러운 내정을 타개해보고자, 혜공왕은 재위 16년 동안 11회의 조공, 하정 그리고 사은의 사절을 중국 당나라에 파견하여 외교정책을 펼쳤으나 혜공왕일파의 외교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777년 상대등 감양상의 상소에 의하여 신랄한 비판을 받게 되었다. 상소를 통한 김양상의 혜공왕일파에 대한 정치적 경고는 친 혜공왕파를 자극하게 되어 780년에 김양상일파를 제거하려는 이찬 김지정의 반란이 있었으나 오히려 김양상과 이찬 경신에 의하여 진압되고 말았다. 이 반란의 와중에서 혜공왕과 왕비는 살해되었다. 그리고 경신의 추대에 의하여 김양상 자신이 제37대 선덕왕으로 즉위하였다. 이때 혜공왕의 나이는 스물셋이었다.

제37대 선덕왕
개성대왕 김효방(내물왕의 9대손)
사소부인 김씨 ․ 김씨, 양상, 생년미상 ~ 785년
(성덕왕의 딸) .․ 재위기간 : 780년 4월 ~ 785년 정월. 총 4년 9개월 
부인 : 1명 
자녀 : 없음
구족왕후

선덕왕은 내물왕의 10대손으로 성은 김씨이며, 이름은 양상이다. 아버지는 개성대왕 효방이고, 어머니는 성덕왕의 딸 사소부인 정의태후이다. 선덕왕은 왕족으로 태어났으나, 왕위를 승계할 신분은 아니었다. 764년 정월에 이찬인 만종이 상대등에, 아찬인 양상이 시중에 임명되었다. 그의 시중 임명은 전제왕권을 재강화하려던 경덕왕의 한화정책이 귀족의 반발로 실패하고 왕당파인 상대등 신충이 물러난 4개월 뒤에 이루어진 점으로 보아, 그의 정치적 성격은 경덕왕의 왕권전제화와는 반대되는 것으로 이해된다.

김양상의 활동은 혜공왕 대에 접어들어 두드러졌다. 771년에 완성된 성덕대왕신종의 명문에 의하면 그는 대각간 김옹과 함께 검교사숙정대령겸 수성부령검교 감은사사각간으로서 종 제작의 책임을 맡고 있었다. 여기에서 주목되는 것은 감찰기관인 숙정대의 장관이었다는 점에서 그의 정치적 위치를 엿볼 수 있다. 그는 혜공왕 10년에 이찬으로서 상대등에 임명되었고, 혜공왕 재위 12년에는 한화된 관제의 복고작업을 주관하였다. 그리고 동왕 13년에는 당시의 정치를 비판하는 상소를 올려 전제주의적인 왕권의 복구를 꾀하는 일련의 움직임을 견제하였다.

혜공왕 16년 2월에 왕당파이었던 이찬 김지정이 반란을 일으켜 궁궐을 침범하자, 상대등이었던 양상은 4월에 김경신과 함께 병사를 일으켜 지정을 죽이고 혜공왕과 왕비를 죽인 뒤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그의 즉위는 무열왕계인 김주원을 경계하고 그들의 반발을 억제하려던 김경신의 강력한 뒷받침에 의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는 784년에 왕위를 물려주려는 결심을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으므로, 병석에서 내린 조서에서도 항상 선양하기를 바랐다고 한 것은 이를 뒷받침하고 있는 것이다.

즉위년(780년)에는 750년에 어룡성에 둔 봉어를 경으로 고치고 다시 감으로 바꾸어 어룡성을 개편했으며, 781년에는 패강의 남쪽 주현을 안무하였고, 782년 한주(지금의 서울지역)에 순행하여 민호를 패강진으로 이주시켰다. 이듬해 1월에는 김체신을 대곡진 군주, 즉 패강진 장관에 임명함으로써 개척 사업을 일단 완료하였다. 이러한 패강진의 개척은 왕실에 반발하는 귀족세력의 배제와 왕권을 옹호해 줄 배후세력의 양성하려는 성격을 띠는 것으로 보인다. 재위 6년만에 죽으니, 불교의식에 따라 화장하고 그 뼈를 동해에 뿌렸다.

제38대 원성왕
김효양(내물왕 11대손)
계오부인 박씨 ․ 김씨, 경신, 생년미상 ~ 798년 

재위기간 : 785년 정월 ~ 798년 12월. 총 12년 11개월
부인 : 1명
자녀 : 3남 2녀
숙정왕후 김씨 - 인겸(혜충 태자), 헌평태자, 예영, 대룡, 소룡

원성왕은 내물왕의 12대손으로 김효양과 계오부인 박씨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이름은 경신이다. 혜공왕 말기에 이찬 지정이 친위혁명을 일으키자, 상대등 김양상이 반혁명을 일으켜 지정과 싸웠다. 경신은 이때 양상을 도와 지정을 무너뜨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고, 그 덕분에 그는 김양상(선덕왕)이 왕위에 오른 뒤에 혜공왕 말기의 혼란을 평정한 공으로 상대등에 임명되고, 선덕왕이 죽자 태종무열왕의 6대손인 김주원과의 왕위다툼에서 승리하여 왕위에 올랐다.

『삼국사기』와『삼국유사』는 김주원과의 왕위계승다툼에 대한 설화를 기록하고 있다. 당시 김경신보다 서열이 높았던 김주원이 왕위에 추대되었는데, 김경신이 복두를 벗고 소립을 쓰고 12현금을 들고 천관사 우물로 들어가는 꿈을 꾸자, 여삼의 해몽을 듣고 비밀히 북천의 신에게 제사를 지냈더니 비가 와서 알천이 불어 김주원이 건너오지 못하였으므로 신하들이 경신을 추대하였다는 것이다. 이에 훗날 김주원의 아들 김헌창이 아버지가 왕위에 오르지 못한 것을 이유로 반란을 일으킨 것을 보아, 단순한 설화가 아님을 짐작케 한다.

원성왕대는 하대권력구조의 특징을 이루는 왕실친족집단원에 의한 권력 장악의 전형이 확립되기 시작하였다. 즉, 원성왕은 즉위와 동시에 자신의 적자를 태자로 책봉하고 다른 왕자들, 준옹(뒤의 소성왕)뿐 아니라 그의 동생인 언승(뒤의 헌덕왕)도 정치의 중심부에서 활약하였는데, 이처럼 왕과 태자를 중심으로 근친왕족들이 상대등, 병부령, 재상 등의 요직을 독점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근친왕족들로 이루어진 왕위계승은 왕족들이 신라하대 왕들의 주류를 이루는 특징을 보여준다. 또, 786년에는 대사 무오가 병법 15권과 화령도 2권을 바쳤는가 하면, 왕 자신도 「신공사뇌가」를 지었는데, 그것은 인생 궁원의 변화에 대한 이치를 담은 것이라 한다. 이 책들은 모두 전하지 않는다. 791년에 제공이 반란을 일으켰으나 진압하였다. 제공은 785년에 시중이 된 인물로 그가 일으킨 반란의 성격은 명확하게 밝혀져 있지 않다. 같은 해에 인겸 태자가 죽으니 시호를 혜충이라 하였다. 그리고 제공의 반란이 진압되자 다시 혜충 태자의 아들 준옹이 시중에 임명되었다.

785년에 원성왕은 총관을 도독으로 바꾸었으며, 재위 4년(788년)에는 독서삼품과를 설치하였다. 이 정책이 실시되기 전에는 궁술과 인물만 가지고 관리를 뽑았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독서삼품과에서 관리를 뽑은 것은 과거제의 시초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개혁은 국학을 설치한 지 이미 1세기가 지난 당시 신라사회에 있어서 무예를 중심으로 한 종래의 관리등용법의 개혁이 요청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원성왕은 불교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 785년에 승관을 두어 정법전이라 하고, 795년에는 봉은사(혹은 보은사)를 창건하였으며 망덕루를 세웠다.

왕의 치적으로 790년 벽골제의 증축과 발해와의 통교를 들 수 있다. 이와 더불어 795년에 당나라의 사신이 하서국 사람 둘을 데리고 와 신라의 호국룡을 물고기로 변하게 하여 잡아가려는 것을 막았다는 설화는 그가 상당한 독자외교를 펴고 있었음을 알려준다. 재위 14년인 798년 12월 29일에 죽으니, 유명으로 봉덕사 남쪽 토함악 서쪽동굴에 화장하였고, 능을 추복하기 위한 승복사가 세워졌다.

제39대 소성왕
혜충태자
숙정왕후 김씨
성목태후 김씨 ․ 김씨, 준옹, 생년미상 ~ 800년 
재위기간 : 799년 정월 ~ 800년 6월. 총 1년 5개월
부인 : 1명
자녀 : 2남 1녀
계화왕후 김씨 - 청명(제40대 애장왕)
체명, 장화(제42대 흥덕왕의 왕비)

소성왕은 원성왕의 태자 인겸의 아들이며, 성목태후 김씨 소생으로 이름은 준옹이다. 원성왕이 아들 인겸을 태자에 책봉했으나 791년에 사망하였고, 다시 아들 헌평을 태자에 책봉했으나 그 역시 794년에 사망했다. 두 아들이 죽고 셋째와 넷째 아들이 남아 있었으나, 원성왕은 장손인 준옹을 태자로 책봉했다. 준옹은 원래 태자의 아들로서 궁중에서 자랐고, 789년에는 당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대아찬 직위를 받았으며, 790년에는 파진찬에 제수되었다. 그리고 791년에 전 시중 이찬 제공이 반란을 일으키자, 이를 제압하여 공을 세우고 시중에 임명되었다. 하지만 병으로 1년 6개월 만에 시중에서 물러났다가 792년에 병부령이 되고, 795년에 태자에 책봉되었다. 그리고 798년 12월 말에 원성왕이 죽자, 이듬해인 799년 정월에 왕위에 올랐다.

소성왕의 치적으로 즉위년 3월에 청주(지금의 진주)의 노거현을 국학생의 녹읍으로 설정한 것을 들 수 있다. 이는 당시 국학에 입학한 학생들에게 장학금 형태로 녹읍을 지급했다는 뜻이다. 799년(소성왕 1) 7월에는 “길이가 9척이나 되는 인삼을 발견하여 하도 신기하여서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진상을 하였더니 덕종이 보고 인삼이 아니라며 받지 않았다.”라는 기록이 있다.

왕위에 오르던 당시, 이미 지병을 앓고 있던 소성왕은 왕위에 오른 지 불과 재위 2년 만인 800년 6월에 생을 마감했다.

제40대 애장왕
계화왕후 김씨 ․ 김씨, 초명은 청명, 개명은 중희. 788년 ~ 809년 
재위기간 : 800년 6월 ~ 809년 7월. 총 9년 1개월 
부인 : 2명 
자녀 : 기록 없음
왕비박씨
후궁김씨

애장왕은 소성왕의 장남이며, 계화부인 김씨 소생으로 초명은 청명이고, 왕위에 오른 뒤에 중희로 고쳤다. 788년에 태어났으며, 800년 6월에 소성왕이 죽음을 앞두고 태자로 책봉했다. 소성왕이 죽자, 열세 살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여 즉위 초부터 작은아버지인 병부령 김언승(뒤의 헌덕왕)의 섭정을 받았다. 애장왕이 친정을 요구한 때는 재위 6년인 805년인데, 이때 애장왕의 나이는 18세였다. 친정을 시작한 애장왕은 우선 자신의 모후 김씨를 태왕후로, 부인 박씨를 왕후로 봉하여 자신의 위엄을 세웠다.

애장왕은 중앙과 지방제도에 대한 개혁조치의 일환으로 805년 공식 20여조를 반포하였으며, 808년 12도에 사신을 파견하여 모든 군, 읍의 경계를 정하였다. 공식 20여조를 반포하기 1년 전 동궁의 만수방을 새로 만들었으니, 이는 곧 태자의 위치를 굳건히 하여 왕권을 신속하게 회복하기 위한 조치였다.

이와 같은 정책의 일환으로 805년 위화부의 금하신을 고쳐 영이라 하고, 예작부에 성 두 사람을 두는 등의 관제개혁 조치를 취한다. 애장왕은 다른 역대왕들과는 달리 불교에 대해서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 불교의 사치스런 행사를 막기 위해 교지를 내려 불교사원의 새로운 창건을 금하고, 금수로써 불사하는 것과 금은으로 기물 만드는 것을 금하였는데, 이는 귀족들은 막대한 토지와 재력을 지니고 지방의 연고지를 가지면서 원당과 같은 절을 세워 자신들의 막대한 토지와 재력을 유지하는 것을 막고, 왕권에 그들을 복속시키려는 의도로 보인다. 그러나 이미 중대에 세워졌던 전제왕권주의가 무너지고 귀족세력이 난립하는 신라하대의 상황 때문에 이러한 일련의 정책들은 성공할 수 없었고, 결국 그는 왕위에서 쫓겨났다.

애장왕은 국내정치의 개혁과 병행하여 대당외교 외에 일본과의 국교를 트고 있다. 802년 12월 균정에게 대아찬을 제수하고 가 왕자로 삼아 왜국에 사신으로 보내고자 하였으며, 애장왕 4년(803년)에는 일본국과 사신을 교환하고 우호 관계를 맺었다. 이로써 성덕왕 30년(731년)에 일본의 침입 사건으로 단절되었던 두 나라의 외교 관계는 72년 만에 회복하였다.

이와는 별도로 802년 순웅, 이정에 의하여 가야산에 해인사가 세워졌는데, 해인사는 당시 왕실에서 경영하는 절이었다. 이렇듯 애장왕이 내외의 정사를 직접 챙기기 시작하자 왕권은 빠르게 회복되었고, 상대적으로 언승 일파의 힘은 약화되었다. 이에 위기감을 느껴, 809년 7월 언승이 조카 제륭과 함께 군사를 이끌고 궁궐에 들어와 왕을 죽였다. 이때가 애장왕 10년인 809년 7월이었다.

 

Posted by 원주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