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역사와 문화2013. 9. 14. 16:07

 

 

고구려왕 계보

 

해모수       유화부인

소서노      동명성왕    예씨부인

 

               유리명왕

비류 온조

1.동명성왕(재위BC37년~BC19년) : 고구려의 개국 시조이자 초대 군주이다.

휘는 주몽, 추모, 상해, 추몽, 중모, 도모 등이 있으며 동명왕, 동명제, 동명성제라고도 한다.

BC 37년, 나라를 세워 국호를 고구려라 하고, 성을 고라 하였다. (원래 성은 해이다.)

BC 36년, 비류국의 왕 송양의 항복을 받았고, BC 34년에는 성곽과 궁실을 건립하였으며, BC 33년 행인국을 정복하고, BC 28년 북옥저를 멸망시켰다.

2.유리왕(재위BC19~AD18) : 휘는 유리, 유류, 주류이고 유리명왕이라고도 하며 동명왕의 맏아들이다.

BC 19년, 부여로부터 아버지 동명왕을 찾아 고구려에 입국, 태자로 책립되고 동명왕에 이어 즉위하였다.

(동명성왕이 남긴 징표 부러진 칼 조각을 주춧돌에서 찾아냈다는 설화가 있다.)

BC 17년, 계비인 치희를 그리는 황조가를 지었다.

BC 9년, 고구려를 위협하던 선비족을 토벌하였다.

BC 6년, 부여의 대소왕이 고구려에 볼모를 요청하였고 유리왕은 부여의 강력한 국력 때문에 태자 도절을 인질로 보내려 하였으나, 도절이 두려워 가지 않았다. 이에 대소는 군사 5만여 명을 이끌고 고구려를 침공하였으나 폭설로 많은 군사를 잃고 퇴각하였다.

3년, 도읍을 홀본(졸본)에서 국내성으로 옮기고 위나암성을 쌓았다.

9년, 부여왕 대소가 고구려를 침략하겠다고 위협하자 왕자 무휼은 부여의 사신에게 부여의 내부 사정부터 잘 다스리라 충고하여 돌려보냈다.

13년, 부여가 침공해 오자 무휼은 매복작전을 펼쳐 부여군을 크게 격파하였고 그 후 군사 2만으로 서쪽의 양맥을 쳤으며 한나라 고구려현을 빼앗았다.

유리명왕은 6명의 아들이 있었으나, 첫째인 도절은 요절하였고, 둘째 해명은 황룡국왕이 선물한 활을 부러뜨린 일로 자살하였다. 그리하여 셋째인 무휼이 왕위를 이어받게 된다.

유리명왕 ??? 송양왕의 딸

도절 해명 갈사국왕녀?대무신왕?원비 여진 민중왕 재사?부여태후

호동 모본왕 태조왕 차대왕 신대왕

3.대무신왕(재위18년~44년) : 유리왕의 셋째 아들로 휘는 무휼이고 대해주류왕이라고도 불린다.

14년, 태자로 책봉되어 군국정사를 맡아보다가 유리왕이 죽은 뒤 즉위한다.

20년, 부여의 대소왕은 대무신왕에게 몸은 둘인데 머리는 하나인 붉은 까마귀를 보내어 "까마귀는 검은 법인데 이제 빛이 변하여 붉게 되었고, 또한 머리는 하나인데 몸이 둘이니, 이는 두 나라가 병합될 징조이다."라고 선전포고를 하였다. 이에 대무신왕은 "검은색은 북방의 색인데, 이제 변하여 남방의 색이 되었다. 또한 붉은 까마귀는 상서로운 것으로 그대가 이것을 얻었으나 가지지 못하고 내게 보냈으니 양국의 존망은 알 길이 없도다."라며 까마귀에 대한 해석을 달리하여 대소왕에게 전하였다.

22년, 부여 정벌을 감행, 동부여를 공격하여 대소왕을 죽이고, 고구려에 병합하였다.

26년, 개마국을 쳐서 복속시켰고 그 후 구다국의 항복을 받아내어 국토를 살수 이북까지 확대하였다.

한편 을두지, 송옥구 등의 인재를 등용하여 국사를 맡겨 내치를 다졌다.

28년, 한나라 요동 태수가 군사를 이끌고 침략하였는데 고구려군은 을두지의 진언을 따라 위나암성에서 수십 일 동안 농성하였다. 한군이 포위를 풀지 않자 을두지가 계책을 내기를 저들이 물이 고갈되기를 기다리고 있는 모양이니 연못에서 잉어를 잡아 적장에게 보내도록 하였다. 그러자 적장은 성 안에 물이 있으니 단시일에 점령하는 것이 어렵다고 판단하여 퇴각하였다

32년, 왕자 호동을 시켜 낙랑군을 정벌하게 하였으며, 37년 재차 공략하였다.

(삼국사기-호동왕자설화 : 어느 날 옥저로 사냥을 나갔다가 낙랑 태수 최리의 딸인 낙랑공주와 사랑하게 되었다. 이때 낙랑에는 적병의 침입을 저절로 알리는 자명고가 있어서 정벌하기가 어려웠는데 호동이 낙랑공주를 꾀어 자명고를 찢게 하고 군사를 이끌어 정벌하였다. 태수는 이 사실을 알고 딸을 죽인 후 항복하였으나, 낙랑을 정벌한 호동은 원비의 참소와 공주에 대한 사랑의 번민으로 자살한다.

일설에는 대무신왕이 낙랑을 멸하기 위해 호동을 최리의 딸과 정략혼인시키고, 그녀를 본국으로 돌려보내 북과 뿔피리를 파괴하게 하였다고도 한다.)

4.민중왕(재위44~48) : 이름은 해색주, 대무신왕의 동생으로 대무신왕이 죽자 태자 해우(모본왕)가 어리므로 대신 즉위하였다.

44년, 대사면령을 내렸으며, 45년에는 신하들에게 큰 연회를 베풀었다.

47년, 사냥을 나갔다가 민중원에 이르러 석굴을 발견하고 그곳에 자신을 장사지낼 것을 명하였다.

48년, 왕이 죽자 유언에 따라 석굴에 장사지내고 지명을 따서 왕명을 민중왕이라 하였다.

5.모본왕(재위48~53) : 대무신왕의 차남으로 이름은 해우, 해애루이다.

49년, 한나라의 북평, 어양, 상곡, 태원등을 공격하였으나, 요동태수의 제의로 화친을 맺었다.

이 해에는 폭풍이 불고 서리와 우박이 내리는 등 악천후가 있어 사신을 보내 굶주린 백성들을 진휼하였다.

모본왕은 원래 성품이 포악하고 정사를 돌보지 않아, 백성들의 원성을 들었다.

51년, 기록하기를 "왕이 날로 포악해져 앉을 때는 사람을 깔고 앉고 누울 때는 사람을 베개로 베어 사람이 혹시 움직이면 용서없이 죽였으며, 신하 중에서 간하는 자가 있으면 활을 쏘았다."고 하였다.

53년, 결국 신하에게 피살되었다.

6.태조왕(재위53년~146년) : 유리왕의 손자, 고추가 재사의 아들로 휘는 궁이고 국조왕이라고도 불린다.

모본왕이 죽은 후 추대를 받은 재사가 연로함을 이유로 왕위를 거절하여 아들인 궁이 7살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였고 태후가 수렴청정 하였다.

기록에 따르면 태조왕은 태어나면서부터 눈을 떠서 볼 수 있었고 어려서도 총명하였다고 한다.

55년, 후한의 침공에 대비하여 요서 지역에 10개 성을 쌓았다.

56년, 동옥저를 병합하여 동으로는 창해, 남으로는 살수에 이르게 하였으며, 68년에는 갈사국을 병합하였다.

70년, 관나부 패자 달가를 파견하여 조나를 병합하였고, 72년에는 환나부 패자 설유를 보내 주나를 병합한다.

이러한 주변 소국 정벌 활동은 중앙집권화의 흔적으로 보고 있다.

태조왕은 정치체제 확립에 힘써 고구려를 종래의 부족 국가적 형태에서 강력한 중앙집권국가로 끌어 올렸다.

또한 태조왕 때부터 계루부가 왕위를 계승하였으며, 이후 고구려 왕 세차의 확실한 연대가 시작됨으로 실질적인 국가로서의 면목을 갖추게 된다.

98년에는 책성을 순수, 102년에는 책성을 안무, 114년에는 남해를 순수하는 등 확장된 영역에 대한 중앙의 통제력을 강화하는 작업을 진행하였다.

105년, 요동군을 공격하여 약탈했으나, 109년과 111년에는 평화적인 외교를 펼쳤다.

118년, 예맥과 더불어 현도와 화려성을 공격하였다.

121년, 후한이 예맥을 공격하자 태조왕은 동생인 수성을 보내 막도록 하였는데 수성은 항복을 가장하여 적군을 속인 후 요지를 장악하였으며 몰래 요동과 현도를 공격하여 큰 전과를 올렸다.

또한 요동의 선비족과 더불어 요수현을 공격하여 요동태수를 살해하였다.

그 후 마한, 예맥과 함께 현도성을 공격하여 포위하였으나 부여와 한나라가 협공을 펼쳐 크게 패하였고, 122년에도 마한, 예맥과 함께 현도성을 쳤으나 부여의 방해로 패배하였다.

121년부터 태조왕은 수성에게 국정을 돌보도록 하였다.

122년, 후한과 화친하였으나 146년에 다시 전쟁이 벌어져 요동의 신안과 거향을 약탈하고 서안평을 공격하여 대방현령을 죽이고 낙랑태수의 처자를 생포하였다.

146년, 동생인 수성(차대왕)이 왕위를 탐내자 그에게 양위하고 별궁으로 은퇴하여 남은 여생을 보냈다.

태조왕은 119세 나이로 서거하여 한국 군주 중 가장 장수하였고, 또한 가장 오래 군림한(93년) 왕이다.

7.차대왕(재위146∼165) : 태조왕의 동생으로 휘는 수성이다.

태조왕 치세 후반부터 장군으로 활약하였고 태조왕을 대신하여 국정과 군사를 통괄하였다.

146년, 측근들의 부추김을 받아 쿠데타를 모의하였으나 태조왕이 먼저 선위하고 물러남으로 차대왕은 그해 76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차대왕은 사람됨이 용장하여 위엄이 있었으나 인자하지 못하였고 횡포와 학정을 일삼아 백성들의 원성을 들었다.

147년, 왕위 계승을 반대하던 우보 고복장을 죽이고, 국가의 주요 요직에 자신의 측근을 임명하였다.

148년, 태조왕의 태자 고막근을 죽인 후 왕권을 확립하였으나, 결국 폭정으로 인해 명림답부에게 살해되었다

8.신대왕(재위165년~179년) : 재사의 아들, 태조왕과 차대왕의 동생으로 휘는 백고, 백구이다.

둘째 형인 차대왕의 폭정을 피해 산골에 숨어 살다가 차대왕이 시해된 뒤 왕으로 추대받아 77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166년, 좌, 우보를 폐지하고 국상제를 도입하여 명림답부를 이에 임명, 패자의 벼슬을 더하여 내외병마를 맡기고 나라를 다스렸으며, 차대왕의 태자 추안을 양국군에 봉하는 등 정치적 안정을 꾀하였다.

168년, 한나라 현도군태수가 대군을 이끌고 침입해오자 스스로 항복하였으며, 이듬해에는 현도태수를 도와 부산의 도적을 토벌하였다.

172년, 한나라가 쳐들어오자 청야전술로 대응하여 한군이 굶주림에 지쳐 퇴각하자 신대왕은 명림답부를 보내 좌원에서 한군을 크게 격파하였다.

신대왕

?? 고국천왕?우씨왕후 발기 산상왕 계수

 

9.고국천왕(재위179~197) : 신대왕의 차남으로 이름은 남무, 국양왕이라고도 한다.

176년에 태자로 책봉되었고, 179년 신대왕이 죽은 뒤 대신들의 추대를 받아 즉위하였다.

고국천왕은 키가 9척이고 겉모습이 크고 위엄 있었다고 한다.

184년, 한나라 요동태수가 쳐들어와 동생 계수를 보내 막았으나 패배하자 왕이 직접 출병하여 대승하였다.

191년, 을파소를 국상으로 등용하여 현정을 베풀고 을파소를 천거한 안류를 대사자로 삼았다.

194년, 빈농이 늘어나고 귀족의 노예가 되는 자유민이 증가하자 진대법(3~7월에 곡식을 대여하여 10월에 환납하는 것)을 실시하였는데 이로써 빈농을 구제하고 귀족세력의 확대를 막아 왕권을 강화시켰다.

왕권이 강화되면서 왕위계승 방법이 형제상속에서 부자상속으로 바뀌게 된다.

10.산상왕(재위197년~227년) : 신대왕의 아들이자 고국천왕의 동생으로 휘는 연우, 이이모이다.

고국천왕이 아들이 없이 죽자 왕후 우씨의 지지를 받아 즉위하였는데 이후 우왕후는 산상왕의 아내가 되었다.

이것은 고구려의 형사취수 풍습이 남아있는 것으로 우씨의 권력 유지를 위한 것이기도 했다.

산상왕의 형이었던 발기는 자신이 왕위에 오르지 못한 것에 불만을 품고 군사를 동원하여 왕궁을 포위하였으나 3일 동안 산상왕이 농성하는 가운데 고구려 국내에서도 발기를 따르는 자가 없자 요동으로 망명하였다. 그 후 발기가 요동 태수에게 군사 3만명을 얻어 고구려에 쳐들어왔고 왕은 동생 계수로 하여금 이를 막게 했는데 이 싸움에서 발기는 패하자 자살하였다.

198년, 환도성을 쌓았고 207년 서울을 환도로 옮겼다.

208년, 제사에 쓸 돼지가 달아나자 제사 담당자는 돼지의 뒤를 쫓아 주통촌에 이르렀는데, 거기서 후녀라는 여인의 도움으로 돼지를 잡았다. 이 소식을 들은 산상왕은 후녀를 몰래 찾아가 하룻밤을 보냈고 왕후는 이를 알고 분노하여 그 후녀를 죽이려 하였으나 후녀가 산상왕의 아들을 잉태하여 죽이지 못하였다.

이후 후녀는 아들 교체를 낳아 소후로 봉해졌고 213년에는 후녀의 아들 교체가 태자에 책봉되었다.

217년, 한나라 평주의 하요가 백성 1000여 호를 거느리고 와서 항복하였는데 왕은 그들을 받아들여 지금의 중국 훈춘 지방인 책성에서 살도록 하였다.

우씨왕후 ?? 산상왕 ??? 후녀(소후)

동천왕

관나부인 ? 중천왕 ? 연씨왕후 예물 사구

서천왕 달가 일우 소발 공주

11.동천왕(재위227∼248) : 아명은 교체(교제에 쓸 돼지와 관련된 사건으로 태어났다는 의미), 휘는 우위거, 위궁(태어나면서부터 사물을 본 것이 태조왕 궁과 닮아서 붙여짐)이며 동양왕이라고도 한다.

성품이 너그럽고 어질어서 화를 내지 않았다고 한다.

213년, 태자로 책봉되어 227년에 왕위에 올랐는데 때는 중국의 위, 오, 촉 3국의 대립시기로 동천왕은 위와 우호관계를 유지하였다.

236년, 오나라 손권이 사신을 파견하여 화친을 청해왔으나 사신을 죽여 그 목을 보냈다.

238년, 위나라가 오나라 공손 연을 토벌할 때 동천왕은 군사 1000여명을 보내어 위를 도왔다.

그러나 공손연 세력이 멸망하고 위나라와 국경을 접하게 되자 고구려는 위나라로부터 압력을 받기 시작했다.

242년, 서안평, 구련성 지방을 선제 공격하였으나 유주자사 관구검의 반격으로 환도성이 함락되고, 북옥저로 피란하는 등 정복활동이 일시적으로 위축되었다.

247년, 환도성이 복구할 수 없을 만큼 파괴되어 평양성으로 일시 천도했다.

248년, 신라에 사신을 파견하여 화친을 맺었다.

(245년 신라와의 전쟁, 248년 신라와의 화친의 사실 여부는 의심받고 있다)

248년, 동천왕이 서거하였는데 나라 사람들이 슬퍼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는 자가 많았다고 한다.

12.중천왕(재위248년~270년) : 동천왕의 맏아들로 휘는 연불, 중양왕이라고도 한다.

243년, 태자가 되었고, 248년에 왕위에 올랐는데 동생 예물과 사구 등이 모반하였다가 처형되었다.

250년, 국상의 권한을 확대하여 수도와 지방의 군권까지 겸하게 하였다.

251년, 측실 관나부인이 왕후 연씨를 시기하여 모함을 하자 왕이 분노하여 관나부인을 가죽 주머니에 넣어 바다에 수장하는 처벌을 하였다.

254년, 음우를 국상으로 삼았으며, 255년에 왕자 약로를 태자로 삼았다.

259년, 위나라가 쳐들어 오자 왕이 기병 5천 명을 이끌고 양맥에서 싸워서 이들을 무찌르고 8천여 명을 목베었다.

13.서천왕(재위270년~292년) : 중천왕의 차남으로 이름은 약로, 약우이고 서양왕이라고도 한다

255년, 태자가 되었고 270년에 즉위하였다.

280년, 숙신이 쳐들어오자 동생 달가를 보내 이를 격퇴하게 했는데 달가는 단로성을 빼앗아 추장을 죽이고, 6백여 가구를 부여 남쪽으로 이주시켰으며 부락 예닐곱 곳을 복속시켰다. 서천왕은 달가를 안국군으로 삼아 군대를 지휘하게 하였고, 양맥과 숙신의 여러 부락을 통솔하게 하였다.

286년, 동생 일우와 소발이 반란을 획책하여 거짓으로 병을 칭하고 입조하지 않자 서천왕은 이들을 재상으로 삼는다고 속여 입조한 두 사람을 처형하였다.

서천왕은 276년, 288년 두 차례에 걸쳐 신성으로 순행하였는데 이는 신성이 서쪽 변경의 중요한 거점이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특히 288년의 순행은 3월에서 11월에 걸친 장기간의 순행이었다.

서천왕 ??? 우씨왕후(우수의 딸)

봉상왕 돌고

 

미천왕

14.봉상왕(재위292년~300년) : 이름은 상부, 삽시루이고 치갈왕이라고도 한다.

어려서부터 교만하고 방탕하며 의심과 시기심이 많았다.

292년, 왕위에 올랐는데 숙부인 달가가 백성들의 추앙을 받음을 미워하여 음모하여 살해하였다.

293년, 동생 돌고에게 역모죄를 씌워 자살하게 하였다.

명신 창조리를 국상에 등용하여 연나라 모용외의 침입을 격퇴하기도 하였으나, 차츰 사치와 방탕을 일삼게 되었다.

298년, 흉년이 들었으나 궁궐을 증축하는 공사를 강행하여 백성들의 원성이 높았다.

이때 봉상왕은 신하들의 간언을 듣지도 않고, 백성들을 살피지 않았다.

300년, 또 흉년이 들었으나 다시 궁궐을 증축하여 백성들이 흩어졌고 이에 국상 창조리가 왕에게 백성을 돌볼 것을 간언하였으나 봉상왕은 오히려 왕권의 지엄함을 역설하며 창조리를 위협하였다. 이에 창조리는 여러 신하들과 모의하여 봉상왕을 폐위하고 을불을 맞이하여 왕으로 삼았다.

봉상왕은 화를 면하지 못할 것을 알고 두 아들과 함께 목을 매 자결하였다.

15.미천왕(재위300년~331년) : 서천왕의 손자, 고추가 돌고의 아들이고 이름은 을불, 을불리, 우불로 호양왕이라고도 한다.

293년, 아버지 돌고가 큰아버지 봉상왕에게 반역으로 몰려 죽음을 당하자 도망쳐 신분을 숨기고 고용살이와 소금장수 등을 전전하였다.

300년, 국상 창조리가 을불을 찾아 모셨으며 봉상왕을 폐위한 뒤 왕으로 옹립되었다.

미천왕은 즉위초부터 중국 군현세력과 치열하게 대립하며 국토확장에 전력하였다.

302년, 군사 3만으로 현도군을 공격하여 적군 8000명을 사로잡았다.

311년, 요동 서안평을 점령하였으며 낙랑군, 대방군의 보급로를 끊는데 성공하였다.

313년, 낙랑군을 공략하여 적군 1000명을 사로잡았고 이로써 낙랑군은 멸망하였다.

위와같이 미천왕때에는 서안평을 확보, 낙랑군과 대방군 등을 정복하여 고조선의 옛 땅을 회복하였으며 대동강 유역을 차지하여 경제적인 자원도 풍부히 얻게 되었다. 또한 백제 등과 국경을 맞대게 되어 남쪽으로 진출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였다.

314년, 대방군을 정벌하여 영토로 삼고 중국 군현 세력을 축출하였으며 317년 다시 현도성을 공격하였다.

당시 요동지역을 지배해 오던 진의 통제력이 약해지면서 선비족의 일파인 모용부가 세력을 확대함에 따라 고구려는 영토 확장을 도모하는 과정에서 이들과 자주 충돌했다.

318년, 진의 평주 자사 최비등과 연합하여 모용부를 공격하고자 하였으나 실패하였으며 이후 모용부가 요동을 장악하면서 본격적인 대립이 시작되었다.

319년, 최비가 요동을 잃고 고구려로 도망쳐 왔으며 이에 미천왕은 군사를 일으켜 요동을 공격하였는데 모용외 역시 두 아들을 보내 침략해 왔다. 이에 미천왕이 휴전을 청하여 잠시 휴전이 성립되었다.

320년, 다시 요동을 침략하였으며 이후 일진일퇴를 거듭하였다.

미천왕

고국원왕 무

 

소수림왕 고국양왕

광개토대왕

장수왕

16.고국원양(재위 331년~371년) : 이름은 사유, 쇠이고 국강상왕이라고도 한다.

314년, 태자로 책봉되어 331년에 즉위한 뒤 평양성을 증축하였으며 국내성을 수리, 신성을 축성하는 등 변경의 방비를 갖추었다. 또한 전연을 견제하기 위해 336년, 343년에 걸쳐 동진에 사신을 파견하기도 하였다.

342년, 4만 대군을 이끈 모용 황이 고구려로 쳐들어왔는데 고구려군은 남쪽길에서 크게 패하여 환도성이 함락되고 왕은 피신하였으며 모후 주씨와 왕비는 포로로 납치되었다.

(전연군은 평탄한 북쪽길로 소수의 군대를 보내고 험난한 남쪽길로 대군을 보내는 기만전술을 폈는데 이에 속은 고구려군은 북쪽으로 무가 이끄는 정병 5만을 파견하고 남쪽은 왕이 직접 소수의 군대로 지켰었다. )

전연군은 퇴각하는 길에 미천왕릉을 파헤쳐 미천왕의 시신과 함께 5만명의 백성을 잡아갔다.

343년, 고국원왕은 동생 무를 연나라에 파견하여 많은 조공을 바쳐 미천왕의 시체와 왕비를 찾아왔으며 평양의 동황성으로 거처를 옮겼다.

355년, 다시 조공하여 왕모 주씨를 돌려받는데 성공하였다.

이후 전연은 전진의 공격을 받아 쇠퇴하였으며, 370년에 전진에 의해 멸망하였다.

이때 고국원왕은 고구려로 도망쳐온 태부 모용평을 체포하여 전진에 송환함으로써 전진과의 우호관계를 수립했다.

369년, 고국원왕은 2만 군대로 백제를 공격하였으나 패하였다,

371년, 다시 백제를 공격하였으나 패하였고 그후 백제 근초고왕이 평양으로 공격해왔는데 고국원양은 이를 막다가 유시에 맞아 사망하였다.

17.소수림왕(재위371년~384년) : 이름은 구부이고 소해주류왕, 해미류왕이라고도 한다.

355년에 태자가 되었고 371년 고국원양이 전사하자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당시 국왕이 전사한 상황에서 국가의 체제 정비의 필요성이 대두되고 넓은 영토와 주민들을 체계적으로 통치할 제도의 정비가 요구되던 시기였으므로 소수림왕은 새로운 체제로 국가를 정비해 나갔다.

372년, 전진 왕이 보낸 승려 순도가 와서 불상과 경문을 전함으로써 최초로 고구려에 불교가 전래되었으며 곧 불교는 호국불교, 현세구복적인 불교로 신앙되고 발전되었다.

(불교를 도입한 이유는 전진과 평화적 관계를 수립하고자 한 것과 호국사상의 필요성 때문이다)

또한 유교교육기관인 태학을 세워 유교적 정치이념에 충실하고 중앙집권적 정치제도에 적합한 관리를 양성하였으며 민간에서는 각처에 경당을 세워 미혼의 자제들에게 독서와 궁술을 익히게 하였다. 그리하여 유교의 경전이나, 사기, 한서 등의 사서가 읽혀졌고 옥편, 자통과 같은 사전류가 유포되었으며, 특히 지식인 사이에는 중국의 문선 같은 문학서가 많이 읽혔다.

373년, 처음으로 율령을 반포하여 유학적 통치 이념 아래 고대 율령국가 체제를 구축하여 중앙집권적 고대국가로 발돋음 할수 있었고 이러한 소수림왕의 체제정비 시책들을 기반으로 고구려는 5세기에 전성기를 누렸다.

374년, 아도가 전진에서 건너와 불도를 전하였다. 이에 소수림왕은 초문사와 이불란사를 창건하여 순도와 아도를 기거하게 하는 등 불교의 수용 및 보급에 노력하였다.

375~377년에 걸쳐서는 백제의 수곡성을 빼앗고 3만대군의 백제군 침공을 물리치고 백제의 북변을 역습하는 등 백제와의 충돌이 계속되었다.

378년, 극심한 가뭄이 든 상태에서 거란의 침략을 받아 8개의 부락을 빼앗겼다.

18.고국양왕(재위384년~392년) : 고국원왕의 차남으로 이름은 이련, 어지지이고 국양왕이라고도 불린다.

385년, 군사 4만 명으로 후연의 요동을 공격하여 요동 및 현도를 점령하였다가 다시 빼앗겼다.

백제와도 치열하게 전쟁을 벌였는데 고국양왕은 백제를 정벌하여 국토를 넓히는데 힘썼다.

386년, 백제를 공격하였으며, 389년과 390년에는 백제의 침입을 받기도 하였다.

392년, 백제를 견제하기 위해 신라와 우호관계를 맺었다.

또한 불교를 장려하여 문화를 발전시켰으며 나라의 사직을 세우고 종묘를 수리하여 국가체제 확립에도 이바지하였다.

19.광개토대왕(재위392년~413년) : 이름은 담덕, 안이고 시호는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 국강상광개토지호태왕, 국강상광개토지호태성왕 등이 전해지며, 이를 줄여서 광개토대왕, 광개토태왕이라 부르기도 한다.

생존시 칭호는 영락대왕이였는데 영락이란 연호는 한국에서 사용된 최초의 연호였으며, 중국과 일본 등지에는 호태왕으로 알려져 있다.

386년, 태자로 책봉되었고 392년 즉위한 직후부터 백제와의 전쟁에 주력하였다.

그 해에 백제를 공격하여 석현성 등 10개 성을 함락하였고, 백제 북방의 중요한 요충지였던 관미성을 점령하였다.

또한 거란을 공격하여 500여 명을 노획하고 거란에 노획되었던 고구려인 1만여 명을 되찾아왔다.

백제는 빼앗긴 성을 회복하기 위해 계속해서 고구려를 공격하였다.

광개토왕은 백제의 공격을 393년에는 관미성, 394년에는 수곡성, 395년에는 패수에서 격퇴하였으며, 394년에 백제를 방비하기 위해 남쪽 변경에 7개 성을 쌓았다.

또한 평양을 크게 중시하여 393년에 9개의 절을 평양에 창건하고 399년에는 왕이 직접 평양에 행차하기도 하였다.

395년, 비려(거란일파)를 공격하여 염수 일대의 3개 부락과 600~700개 영을 격파하고 많은 가축을 노획하였다.

396년, 친히 수군을 거느리고 백제를 정벌하여 아리수 이북의 58개 성, 700여 개 촌락을 공략하고 위례성을 포위하자 이에 백제 아신왕이 항복하여 아신왕의 동생과 백제의 대신 10명을 인질로 받아 개선하였다.

이리하여 고구려는 한강 이북과 예성강 이동의 땅을 차지하게 된다.

398년, 숙신을 정벌하여 복속시켰다.

400년, 백제, 왜의 연합군이 신라에 침입하자 고구려와 동맹관계에 있던 신라 내물왕은 평양으로 사신을 보내 구원을 청하였다. 이에 광개토왕은 5만의 원군을 보내어 왜군을 물리치고 신라를 속국으로 삼았다.

같은해, 고구려와 우호관계를 유지하던 후연이 신성과 남소성을 함락시키고 700여 리의 땅을 탈취하였다.

402년, 광개토왕은 숙군성을 공격하였고 404년에도 후연을 공격하여 보복전을 펼쳤다. 이 과정에서 고구려는 요동성을 비롯한 요동 지역을 장악하였으며 이를 회복하기 위해 쳐들어온 후연군을 405년 요동성, 406년 목저성에서 격파하여 요동 장악을 확고히 하였다. 또한 후연을 견제하기 위하여 남연과 우호관계를 맺기도 하였다.

407년, 백제를 대대적으로 공격하여 6개 성을 점령하고 막대한 전리품을 노획하였다.

408년, 후연이 멸망하고 고구려계인 고운이 북연을 건국하자 우호관계를 맺어 서쪽 국경을 안정시켰다.

409년, 나라 동쪽에 독산성 등 6개 성을 쌓고 평양의 민호를 옮겨 살게 하였다.

410년, 동부여를 정벌하여 64성을 공파함으로써 동부여가 고구려의 판도 안에 들게 되었다.

위의 광개토왕의 정복활동을 다시 요약하자면, 서쪽으로 후연을 공격하여 요동을 모두 차지하고 요서의 일부 또한 확보하였으며, 북연과 친선관계를 수립하였고 북쪽으로는 부여와 숙신, 비려를 복속시켰으며, 남쪽으로는 백제를 쳐서 한강 이북을 빼앗아 위축시키고, 왜와 가야의 침공을 계기로 신라를 보호국화하는 한편 바다를 건너 침공해 온 왜를 섬멸하였다. 또한 가야를 공격하여 전기 가야 연맹을 해체시키기에 이르렀으며 동으로는 읍루를 정벌하였고, 동예를 완전히 병합하는 등 소수림왕의 정치적 안정을 기반으로 최대의 영토를 확장한 정복 군주이다.

광개토왕은 역대 왕릉의 정비에 힘써 수묘인 제도를 정비하고 실시할 것을 장수왕에게 유언하였다.

이러한 내치로 광개토왕릉비에는 "나라가 부강하고 백성이 편안하였으며 오곡이 풍성하게 익었다"라 칭송하는 기록이 남겨졌다.

20.장수왕(재위413년~491년) : 휘는 거련이고 100년 가까이 살았었다고 해서 장수왕이라는 시호가 바쳐졌다.

모습이 괴걸하고 지기가 호매한 대장부로 79년 동안 재위하였고 99세의 나이로 서거하였다.

409년, 왕태자에 책봉, 413년에 광개토대왕이 죽자 20살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으며 그해 동진과 국교를 맺었다.

427년, 내부적으로 왕권을 위상을 높여 귀족세력을 약화시키고 외부적으로 남진정책을 효율적으로 운영하기 위하여 수도를 평양으로 옮겼다.

고구려가 내부를 안정시키며 국제 정세를 관망하고 있는 동안 중국 대륙은 세력 다툼을 벌이며 새로운 형국으로 치달았다. 이들 나라의 패권 다툼 중에서 북위와 북연의 싸움이 고구려에 직접 영향을 끼쳤다. 장수왕은 외교관계를 안정시키기 위해 중국의 진, 송, 위 등과 사신을 교환하여 국교를 맺었으며 북연을 견제하였다.

430년, 북연왕 풍발이 병사하자 왕위다툼이 일어났고 결국 풍발의 아우 풍홍이 조카들을 제거하고 왕으로 등극하였다. 그러나 왕위 다툼은 조정을 동요케 해 국가 전체의 위기로 이어졌고, 북위의 침략을 용이하게 하였다.

435년, 북위의 기세로 북연은 몰락을 눈앞에 두고 있었고 이에 풍홍은 고구려에 밀사를 보내 후에 자신이 의탁할 수 있도록 요청했다.

436년, 북위는 대군을 동원하여 북연을 공격하였고, 풍홍은 급히 고구려에 밀사를 보내 도움을 청했다.

이에 장수왕은 갈로와 맹광에게 수만의 군사를 내주어 풍홍을 맞이해오도록 하였으며 후에 북위는 풍홍을 자신들에게 압송할 것을 요청했으나 장수왕은 이를 거절하였다. 하지만 환영연에서 풍홍이 고구려를 업신여기는 행동을 보여 장수왕은 분노하였고 풍홍도 장수왕에게 신하 대우를 받자 이에 분노하였다.

438년, 장수왕은 풍홍을 평곽으로 가게 했다가 다시 북풍에 머물도록 하였다. 또한 풍홍의 시종을 빼앗고, 태자를 볼모로 잡았는데 이에 풍홍은 분개하여 송나라에 사신을 보내 자신을 받아달라고 요청했다. 송의 유유는 고구려에 풍홍을 넘겨줄 것을 요청했으나 장수왕은 손수와 고구로 하여금 풍홍과 그의 가족들을 죽이라고 명했다. 결국 북풍에서 풍홍과 그의 가족 10여 명은 참살당하였으나 송의 사신 왕백구가 풍홍의 군사 7천여 명을 이끌고 손수와 고구가 이끄는 고구려군을 습격하는 바람에 고구는 죽고 손수는 생포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장수왕은 즉시 대군을 동원하여 왕백구를 사로잡아 송으로 압송시켰다. 이에 송은 고구려의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왕백구를 감옥에 가뒀다가 고구려의 눈을 피해 석방하였다.

440년, 신라가 고구려의 변경을 공격하여 변방 장수를 죽이는 사건이 발생했는데 이에 고구려가 군사적 대응을 검토하자 다급해진 신라는 사신을 보내 고구려에 사죄하였다. 이후 고구려와 신라는 한동안 평화를 유지하였다.

한편 백제와 신라는 고구려의 침공에 대비하여 이미 나제동맹을 맺고 있었는데 시간이 갈수록 이들 동맹관계가 더욱 강화되었다.

454년, 장수왕은 군사를 동원하여 신라의 북쪽 변경을 공격하고, 이듬해는 백제를 공격했다. 이에 신라와 백제가 동맹약조에 따라 연합군을 형성했고, 고구려는 나제연합군에 밀려 한동안 양국에 대한 공격을 중지하였다.

468년, 장수왕은 말갈 군사 1만을 동원하여 신라의 실직주 성을 빼앗았는데 이때부터 고구려와 나제연합군의 치열한 전쟁이 이어졌다.

469년, 백제가 군사를 동원하여 고구려의 남쪽 변경을 공격했고, 또한 북위에 사신을 보내 고구려 공격에 대한 군사 원조를 요청하였으나 북위는 이 사실을 고구려에 알려주었다.

장수왕은 승려 도림을 백제에 잠입시켰다. 도림은 백제의 국고와 민력을 소모시키기 위해 개로왕을 충돌질하여 대대적인 토목공사를 벌이도록 했고 백제의 경제적 혼란을 일으켰다.

475년, 장수왕은 대군을 거느리고 백제를 침입하여 수도 한성을 무너뜨리고 개로왕을 죽여 소수림왕 이래 국가의 숙원 사업이던 고국원왕에 대한 원수를 갚았다.

480년, 말갈과 함께 신라의 북변을 쳐 고명성 등 7성을 점령하였고 미질부까지 진군하였다.

이로써 고구려의 영토는 점점 확장되어 남쪽은 아산만에서 죽령에 이르고, 서북쪽은 요하에서 만주의 대부분을 포함한 큰 나라를 건설하여 전성기를 이루었다.

또한 종전의 부족연맹제도를 지방행정제도로 고쳐 5부를 신설하는 등 민정에도 개혁을 단행하였다.

장수왕

조다 승천

문자왕

안장왕 안원왕

양원왕

평원왕

21.문자왕(재위492년~519년) : 장수왕의 손자, 고추대가 조다의 아들이며 휘는 나운이고 문자명왕, 명치호왕이라고도 한다. 문자명왕 때 고구려 역사상 가장 큰 영토를 보유하였다고 한다

492년, 아버지가 일찍 죽었으므로 그가 장수왕의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당시 고구려는 백제와 신라의 연합작전으로 일진일퇴를 거듭 하였다.

494년, 부여가 항복하여 고구려에 완전 복속되었고, 신라군과 살수에서 전투가 벌어졌는데 신라가 패하여 견아성으로 들어가 농성하자 이를 포위하였으나, 백제가 3천 명의 구원군을 보내 공격해서 후퇴하였다.

495년, 백제의 치양성을 포위하였으나, 신라가 장군 덕지를 보내서 백제를 구원하므로 물러났다.

496년, 신라의 우산성을 공격하여 패하였으나 이듬해 다시 우산성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507년, 장수 고노를 시켜서 말갈군과 함께 백제의 한성을 공격하려 하였으나, 횡악과 싸우다가 물러났다.

512년, 백제를 침략하여 가불, 원산 두 성을 함락시키고, 포로 1천여 명을 사로잡았다.

전체적으로 보면, 광개토왕 이래 세력이 강해지기 시작하여 장수왕을 거쳐 문자왕에 이르는 동안 판도가 넓어지고, 세력은 더욱 강성해져 대국으로 발전하였다

22.안장왕(재위519년~531년) : 휘는 흥안이고, 문자왕의 맏아들이다.

498년, 태자가 되었고 519년에 문자명왕이 죽자 즉위하였다.

523년, 군사를 보내 백제를 침공하였다.

529년, 오곡에서 백제와 싸워서 이기고 2천여 명을 포로로 잡았다.

23.안원왕(재위531년~545년) : 휘는 보연이고 곡향강상왕, 향강상왕, 안강상왕이라고도 부른다.

안장왕의 동생으로 형의 사랑을 받았는데 후사 없이 죽은 형의 뒤를 이어 왕이 되었다.

그는 키가 7척 5촌이며 도량이 넓었다고 한다.

534년, 북위가 동위와 서위로 분열되자 동위와 양과의 양면외교를 적극 전개하여 안정을 유지하였다.

536년, 봄과 여름에 크게 가물었으므로 사신들을 보내 굶주린 백성들을 위무하고 구제하였다.

540년, 백제가 우산성을 포위하였으나 기병 5천 명을 보내 물리쳤다.

당시 홍수와 지진, 전염병, 가뭄, 황충, 기근, 태풍 등의 재난이 계속되어 어려웠다

542년, 음력 3월에는 바람이 크게 불어 나무가 뽑히고 기왓장이 날아갔고 음력 4월에는 우박이 내렸다고 한다.

왕의 후사를 둘러싼 세력다툼으로 사회가 동요되는 가운데 추군과 세군의 무력충돌 속에서 죽음을 맞았다.

24.양원왕(재위545년~559년) : 휘는 평성으로 안원왕의 태자이지만 안원왕 사후에 바로 즉위하지 못했다.

안원왕에게는 두 명의 아내가 있었는데, 서로 자신의 자식을 왕위에 올리고자 다툼이 있었고 무력 충돌로 번져서 평성 태자 쪽이 승리하여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당시 국상이였던 왕산악은 진의 칠현금을 개량하여 거문고를 만들었으며 100여 곡의 악곡을 지었다.

547년, 백암성을 고쳐 쌓고, 신성을 수리하여 전쟁을 대비하였다.

548년, 군사 6천 명으로 백제의 독산성을 공격하였으나, 신라의 장군 주진이 구원군을 이끌고 와서 실패하였다.

550년, 백제가 쳐들와 도살성이 함락되었다. 이에 백제 금현성을 공격하였으나, 이 틈을 노린 신라군에게 고구려 두 성을 함락되었다.

551년, 돌궐군이 쳐들어와서 신성을 포위하였으나 승리하지 못하자 백암성으로 옮겨 공격하였다. 이에 양원왕은 장군 고흘에게 군사 1만 명을 주어 싸우게 하여 1천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또한 신라가 다시 쳐들어와서 10개의 성이 함락되었다.

552년, 장안성을 쌓았다.

554년, 백제 웅천성을 공격하였으나 실패했다.

25.평원왕(재위559년~590년) : 휘는 양성이고 평강상호왕이라고도 한다.

557년, 태자로 책봉되었고 559년에 즉위하였다.

당시 수나라가 점차 고구려를 압박해왔고, 백제와 신라의 나제동맹이 깨져서 삼국이 서로 대립하던 시기였다.

평원왕은 중국의 진, 수, 북제, 후주 등 여러 나라와 친교를 맺었으며 장안성으로 천도하였다.

589년, 평원왕은 수나라가 쳐들어올 것에 대비하여 군사력을 강화시켰다.

평원왕

영양왕 영류왕 태양 평강공주

보장왕

26.영양왕(재위590년~618년) : 휘는 원, 대원이고 평양왕이라고도 한다.

565년, 태자로 책봉되었고, 590년 왕위에 올랐다.

당시 수나라가 중국 대륙을 통일하여 돌궐과 고구려에 압력을 가하고 있었다.

수나라는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 고구려의 영토를 염탐하였고, 그 후에도 몇 차례에 걸쳐 사신을 보내 지형을 알아보게 하였다. 마찬가지로 영양왕 역시 수나라에 사신을 보내 동태를 살폈다.

590년, 수나라는 고구려에게 조공을 바치라고 으름장을 놓았으나 수나라에 대해 경계를 게을리하지 않았던 고구려는 중국인 무기 기술자를 매수하여 병기들을 만들고 군량미를 저축하는 등 돌궐과도 동맹을 맺어 수나라와의 전쟁에 대비하였다.

598년, 수나라가 고구려를 공격하기 위해 비밀리에 군대를 양성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자 고구려는 말갈병 1만 명을 동원하여 요서 지역의 임유관을 선제 공격하였으나 점령하지는 못했다.

이에 자극을 받은 수나라 문제가 30만 대군을 동원하여 요동성을 공격하게 하였으나 고구려군은 미리 알아낸 보급선을 격파하여 군량 보급을 끊었고 때마침 장마가 닥쳐 수의 30만 대군은 결국 대패하여 병력을 대부분 잃고 퇴각하고 만다.

600년, 영양왕은 태학박사 이문진에게 명하여 유기 100권을 재편수, 신집 5권을 만들게 하였다.

또한 수나라에 사신을 보내 화친을 제의했고 수는 그 제의를 받아 들였다.

그 무렵 백제가 자신들이 길잡이 노릇을 하겠다며 다시금 수나라에게 고구려를 공격할 것을 요청했으나 수나라는 이를 거부하였고 이 소식을 접한 영양왕은 진노하여 곧바로 백제를 침공했다.

603년, 고구려는 신라의 북한산성을 공격하였고 이때 신라에서는 진평왕이 몸소 군사를 이끌고 대항하였는데 고구려군은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퇴각하였다.

607년, 백제의 송산성을 공격하였으나 함락시키지 못했고, 석두성을 공격하여 포로 3천 명을 사로잡아 끌고갔다.

608년, 신라의 변경을 습격하여 군사 8천명을 포로로 잡았고 우명산성을 함락시켜 신라의 북진을 차단하였다. 그리고 다시 여러 차례에 걸쳐 신라와 백제를 공격하여 양원왕 때 잃었던 아리수 이북의 영토를 거의 회복하였다.

610년, 일본에 승려 담징, 법정을 보내 종이, 먹의 기술을 전하였고 담징은 일본 호류사 금당내부의 벽화를 그렸다.

그 무렵 수나라의 황제로 등극한 양제는 돌궐에 압박을 가하여 돌궐 왕이 장안으로 입조토록 하였다.

이렇게 되자 수나라에 조공하지 않는 나라는 오로지 고구려밖에 남지 않았다. 수 양제는 여러 차례에 걸쳐 고구려에 조공을 바치라고 요구하였으나, 고구려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612년, 살수대첩 : 수나라 양제가 직접 113만 3800명 군사를 이끌고 고구려를 침공하였다.

군사는 하루 1군씩 보내 40일이 걸려 겨우 출발이 끝났으며 깃발은 960여리에 뻗쳤는데 수나라의 육군은 요동성으로, 수군은 대동강을 거슬러 평양성으로 향하였으나 두달이 지나도 함락시키지 못했다.

이에 양제는 30만 5천명의 별동부대를 조직하여 요동성을 포위 공격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자 압록강 서쪽에 집결시켜 단숨에 평양성을 공격하려 하였다. 이때 고구려 장수 을지문덕은 적의 허실을 보기 위해 거짓항복을 하여 적진에 들어갔고 그런 을지문덕을 적장 우중문은 사로잡고자 하였으나 유사룡의 말을 듣고 돌려보냈다.

돌아온 을지문덕은 청야 작전으로 대응하였고 적장 우중문은 그의 유도 작전에 속아 살수를 건너 평양성 북쪽 30여리 지점에까지 밀려왔다. 이에 을지문덕은 적장에게 5언시를 지어 보내 그의 어리석음을 비꼬았다.

神策究天文(신책구천문) 그대의 귀신같은 계략은 하늘의 이치를 다했고,

妙算窮地理(묘산궁지리) 그대의 기묘한 계락은 땅의 이치를 다하였네.

戰勝功旣高(전승공지고) 전쟁에 이겨서 그 공이 높으니,

知足願云止(지족원운지) 이제 만족할 줄 알고 그만 두기를 바라노라.

수나라군은 비로소 고구려에게 속은 줄 알고 황급히 퇴각하기 시작하였는데 을지문덕이 미리 살수에 둑을 쌓아 물을 얕게 하였고 이를 눈치채지 못한 수군이 살수를 반쯤 건넜을때 둑을 무너뜨렸다. 이에 수나라군은 물에 휩쓸리고 뒤이어 공격해 온 고구려 기병에 당해 수많은 사상자를 냈으며 생존자는 2700명에 불과했다고 전한다.

613년, 수 양제는 고구려를 재차 침공하였으나 요동성과 신성이 좀처럼 함락되지 않았고, 설상가상으로 본국에서 반란을 벌어져서 급히 퇴각하였다.

614년, 수 양제는 전국의 군사를 소집하여 다시 고구려 침공을 하려했으나 수나라 군대는 이미 전의를 상실한 상태였다. 이 사실을 간파한 영양왕은 화친을 제의했고, 수 양제는 화친 제의를 받아들였다.

이후로도 수 양제는 고구려 침략을 몇 번이나 계획했으나 중신들의 반대로 모두 실행되지 못했으며 무리한 잦은 대외 원정으로 경제가 피폐해지고 곳곳에서 반란이 끊이지 않는 등 수나라는 점차 몰락의 길을 걷고 있었다.

27.영류왕(재위618년~642년) : 평원왕의 차남, 영양왕의 이복동생이고, 휘는 건무, 성이다.

618년, 영양왕이 후사 없이 서거하자 왕위에 올랐다.

당시 중국 대륙에서는 수나라가 몰락하고 당나라가 건국되었다. 당나라는 각지에서 할거하는 군벌을 제거하는 등 통일 작업에 몰두하면서 외적으로는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 화친을 제의했다. 영류왕의 온건주의적 성향은 자연스럽게 친당 정책으로 이어졌고 두 나라는 우호적인 외교관계를 가졌는데 전쟁 당시 잡혀갔던 양국의 포로들을 교환하고 도교를 수입하는 등 여러 방면에서 교류하였다.

626년, 당 태종은 제위에 오르자마자 영토 확장 작업을 가속하였는데 고구려를 비롯한 백제, 신라 등 주변 나라들이 모두 당나라에 대한 경계를 강화하는 한편 당나라와 화친하였다.

631년, 영류왕은 당나라의 침략에 대비하기위해 부여성에서 발해에 이르는 천리장성을 축조하였다. 이 작업을 지휘하던 연태조가 축성 과정에서 지병으로 사망하자 아들 연개소문이 아버지 뒤를 이어 감독하면서 세력을 키웠다.

638년, 영류왕은 군사를 동원하여 신라의 북쪽 변경의 요지인 칠중성을 공격하였으나 패배하였다.

고구려가 신라와의 싸움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을 때 당나라는 동돌궐을 멸망시키고,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 왕태자를 장안에 입조시킬 것을 요구했다. 이 때문에 조정은 강경파와 온건파로 갈라져 치열한 논쟁을 벌였다.

(강경파는 왕태자를 장안에 보내지 말 것을 주장, 온건파는 왕태자를 보내 당과 관계를 더욱 돈독히 할것을 주장)

640년, 영류왕은 결국 온건파의 주장을 따라 왕태자를 장안에 보냈고 당 태종에게 서신을 보내 왕태자를 당나라의 국학에 입학시켜 줄 것을 청원하였다.

641년, 당 태종은 왕태자의 예방에 답하기 위해 직방낭중 진대덕을 고구려에 보내겠다는 서신을 보냈다. 진대덕은 고구려에 들어와 고구려의 지리를 자세히 관찰하는 것은 물론, 각 성에 배치된 군사력까지 면밀하게 조사하였다. 그후 당나라에 귀국한 진대덕은 태종에게 고구려를 칠 것을 간언하였다.

한편, 영류왕의 친당 정책으로 강경파의 불만은 점점 커져가고 있었는데 영류왕을 비롯한 온건파에서는 그러한 강경파의 불만을 무시했다. 급기야는 천리장성 축성 작업을 중단하자는 주장이 나왔고 천리장성을 쌓는 일을 감독하던 연개소문이 이에 강하게 반발하였다. 이에 영류왕과 온건파 대신들은 연개소문을 제거하려고 하였으나 영류왕이 자신을 죽이려고 한다는 것을 눈치챈 연개소문은 영류왕을 비롯한 온건파를 척결하려는 계획을 세운다.

642년, 연개소문은 천리장성으로 떠나는 열병식에 조정 신하들을 대거 초청한 뒤 모두 참살하였고 군사를 이끌고 왕궁으로 들이닥쳐 영류왕을 시해하였다. 태종은 영류왕이 죽었다는 전갈을 받고 곧바로 애도 의식을 거행하고 지절사를 고구려에 보내 조문하였다

28.보장왕(재위642년~668년) : 평원왕의 셋째 아들이자 영류왕의 동생인 태양의 맏아들로 휘는 장, 보장이다.

642년,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연개소문이 그를 새 왕으로 추대함에 따라 고구려의 마지막 왕이 되었다.

연개소문은 스스로 대막리지에 오른 후에 정권을 장악하였고, 보장왕은 그저 허수아비에 불과했다.

이에 따라 고구려에는 연개소문의 일인독재 체제가 성립되고, 이는 고구려의 멸망의 원인 가운데 하나가 된다.

643년,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도교를 구하여, 숙달 등 도사 8명과 함께 노자도덕경을 받아들였다.

한편, 신라에서는 백제의 공격으로 요지인 대야성(합천)을 빼앗기는 등 백제와의 공방전에서 점차 불리해져갔다.

신라의 선덕여왕은 고구려에 구원병을 요청하였으나 연개소문은 그 요청을 거절하였고 이에 신라는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백제와 고구려의 침략으로부터 도와 달라며 원군을 보내줄 것을 요청하였다.

당시 고구려 침략을 계획하고 있었던 당 태종은 흔쾌히 신라와 손을 잡게 된다.

고구려는 그들의 침략에 대비하기 위해 전국에서 군사를 모집하고, 변방의 성곽을 수리하며 군사 훈련을 하는 한편 당나라의 군대가 바다를 건너 평양성을 공격할 것을 염려하여 요동과 서해안 일대의 수군 경비를 강화하였다.

또한 백제와 손을 잡고 신라를 협공하였는데 당나라는 신라에 대한 공격을 멈추지 않으면 군사를 일으키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하지만 고구려는 과거에 신라에 빼앗긴 지역을 되찾기 전에는 전쟁을 멈추지 않겠다며 당나라의 요구를 거절하였다.

645년, 당 태종의 30만 군대가 고구려의 성 10여 개를 함락시키고 안시성으로 진격하였는데 연개소문은 고연수와 고혜진에게 15만의 군사를 주어 안시성을 지원하도록 하였다. 당 태종은 고연수에게 사람을 보내 신하의 예만 갖춘다면 빼앗은 영토를 모두 돌려주고 돌아가겠다고 회유했고 이에 고연수는 당 태종이 공격할 의사가 없다고 판단하고 싸움에 적극적이지 않았다. 태종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2만6천명의 기습병을 조직하여 고구려군을 급습하였고 그 과정에서 3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고연수와 고혜진은 직할부대 3만 6천 명과 함께 당나라에 투항하였고, 나머지 병력은 신성과 건안성으로 퇴각하였기때문에 안시성은 완전히 고립되었다.

그래서 당나라군이 안시성을 일제히 공격하였지만 성주 양만춘의 뛰어난 용병술에 힘입어 시간이 지날수록 안시성의 사기는 점차 올라가는 반면 당나라군은 사기가 저하되기 시작했다. 당 태종은 안시성보다 더 높은 토산을 쌓아 공격도 해보았으나 이 역시 실패로 돌아갔고 오히려 이 작전으로 많은 물량과 병력을 잃고 말았다.

당의 패배가 거듭되는 가운데 겨울이 다가와 당나라군은 추위와 배고픔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퇴각하였는데 퇴로에서 많은 동사자가 발생했으며, 이에 따라 군사들이 대거 몰살하는 상황에 처하기도 하였다.

당 태종은 패배를 설욕하기 위해 이후 몇 차례에 걸쳐 공방전을 벌였으나 싸우는 족족 퇴각하였다.

649년, 당태종은 고구려 정벌을 중지하라는 유시를 남기고 죽었고 이에 따라 두나라는 휴전 상태에 들어갔다.

그러나 고구려와 신라의 전쟁은 지속되었으며, 무열왕이 당나라에 사신을 급파하여 원군을 요청하자, 당나라는 군사를 내주어 고구려를 다시 공격하게 하였으나 패배하였다.

658년, 당 고종은 정명진과 중랑장 설인귀에게 군사를 내주어 다시 고구려를 침략하였으나 패하고 퇴각하였다.

661년, 백제를 멸망시킨 나당연합군은 그 여세를 몰아 고구려로 진격하였고 당 고종은 4만4천명의 병력을 징발하여 고구려의 변방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백제부흥군이 나당연합군의 후미를 치는 바람에 신라군이 다시 남진하여 백제 부흥군과 싸워야 했으며, 그 상황을 이용하여 고구려는 변방에 병력을 집결시켜 당나라군을 격퇴하였다.

이에 당나라군은 다시금 대군을 거느리고 평양성을 향해 진군하였으나 패하였고 당나라 조정에서는 고구려와 휴전해야 한다는 여론이 일어났으며, 당 고종은 일시적으로 고구려 공략을 중지하였다.

그해 당나라는 다시 고구려 정벌에 나섰는데 10만 대군의 당나라 함대가 대동강을 타고 평양성을 포위하여 치열한 공방전을 펼쳤고 서쪽에서는 당나라 육군이 압록강 일대를 향해 밀려왔다. 이에 연개소문은 맏아들 연남생에게 군사를 내주고 압록강 일대를 지키도록 하였으나 패퇴했다.

662년, 당나라군은 연개소문이 이끈 고구려군과의 사수 전투에서 패배하여 몰살되었으며 평양성을 공략하고 있던 당군대는 폭설이 내리는 바람에 황급히 퇴각하였다.

고구려는 당나라와 전투에서 많은 승리를 거두었지만 당이 신흥 대제국으로서 융성한 것과는 반대로 60여년에 걸친 수, 당과의 전쟁으로 국력은 쇠퇴해 가고 있었다. 백성의 생활은 파탄에 직면했고, 국가 재정은 탕진되었으며 동맹국 백제의 멸망과 고구려 지배층의 내분은 더욱 그 국력을 약화시키고 있었다.

666년, 연개소문이 죽자 그의 아들 연남생, 연남건, 연남산 사이에 막리지의 자리를 둘러싼 권력투쟁이 벌어졌다.

맏아들 연남생이 대막리지 직위를 이어받았지만, 연남건과 연남산은 형의 권력 독식에 불만을 품었다. 그래서 연남생이 변방을 순행하는 사이 왕명을 빙자하여 연남생의 측근을 없애고 연남생을 소환하려 하였고 이에 연남생은 아우들에게 쫓겨 국내성에 가서 당 고종에게 항복하였다.

그 후 보장왕은 연남건을 대막리지로 삼고 조정을 재편으나 이미 많은 신하가 제거되어 어수선하였고, 민심도 연남건 형제에게서 등을 돌렸다. 당 고종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연남생을 앞장세워 고구려를 재침략하도록 하였다.이렇게 되자 연개소문의 동생 연정토는 한반도 쪽의 12개 성을 가지고 신라에 투항해 버렸다.

668년, 당나라군의 대대적인 공격을 받아 여러 성과 마을이 함락되었고, 보장왕이 머무르던 평양성까지 함락되고 말았다. 보장왕은 항복을 선언하며 당나라로 끌려갔고 결국 고구려는 멸망하고 말았다.

고구려 멸망 이후 검모잠, 안승등의 고구려 부흥 운동이 지속되었으며, 안시성과 요동성 및 일부 요동의 성들은 671년까지 당나라에 항전하였다.

보장왕은 당 고종으로부터 벼슬을 하사받고, 그들이 평양에 설치한 안동도호부에 머물렀는데 고구려 유민의 부흥운동이 지속되자 당은 677년에 보장왕을 요동도독 조선군왕에 봉하고 요동에 머무르게 하여 고구려 유민을 무마하고자 하였다. 이때 그는 고구려의 재건을 노려 말갈족과 함께 군사를 일으키려다가 발각되어 681년에 양주에 유배되어 그곳에서 사망하였다.

 

 

 

 

Posted by 원주유
고구려 역사와 문화2013. 9. 14. 16:03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차지했던 고구려 왕조의 계보

고구려는 BC 37년 동명성왕 때부터 AD 667년 제28대 보장왕을 끝으로 멸망할 때까지 약 700여 년간 한반도의 북부와 중국의 동북지방을 기반으로 발전하였다. 비옥한 농토보다는 산악지형이 많았던 탓으로 영토확장에 힘을 쏟았고, 활쏘기와 말타기 등 무예를 숭상하는 전통으로 인해 정복국가 체제로 쉽게 전환할 수 있었다. 그 결과 고구려는 한 군현을 차지하고, 요동지방으로 진출하는 등 활발한 정복 활동을 펼침과 동시에 수나라, 당나라의 침략에 맞서 동북아시아의 중심 세력으로 성장하였다.

 

 

무용총 오른쪽 벽에 그려진 수렵도. 활을 잘 쏘기로 유명한 주몽에 의해 건국된 나라답게 무예를 숭상했던 고구려는 활발한 정복전쟁으로 영토를 넓혔다. 이 그림이 그려진 무용총을 비롯한 12기의 고구려 고분들은 2004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록되었다

 

 

2대 유리왕은 도읍을 졸본에서 국내성으로 옮기고, 주변의 작은 나라들을 통합하여 5부족을 중심으로 한 연맹왕국을 이루었다.

대무신왕 시절에는 호동왕자가 낙랑의 일부 지역을 정복했으며, 미천왕 때에 이르러 낙랑군을 한반도에서 완전히 몰아내고

고조선의 옛 영토를 회복하였다. 제 6대 태조왕 때에는 옥저를 정복하고 만주지역으로 세를 확장하였으며 고국천왕에 이르러

부자상속제로 왕위 계승이 굳어졌다.

 

17대 소수림왕은 국가의 체제를 정비하고, 대내적으로 왕권을 강화하는 데에 힘을 쏟았다. 그는 불교를 받아들여 백성을

통합하였고 태학과 경당을 두어 교육에 힘썼다. 또한 율령을 반포하여 국가의 기본 법 체제를 정비하는 등 통치 질서 확립에도

앞장섰다. 19대 광개토대왕은 고구려의 영토를 가장 넓게 개척한 왕이다. 남으로는 백제와 겨루어 한강 이북까지 진출하였고,

요동지방을 완전히 차지하여 만주와 한반도 북부를 아우르는 거대한 영토를 차지한 것이다. 그 뒤를 이은 장수왕은 국내성에서

 평양성으로 도읍을 옮기고, 적극적으로 남하정책을 추진하면서 백제와 신라를 압박해 고구려 최전성기를 만들었다.

 

이후 고구려는 중국을 지배한 수나라와 당나라의 연속된 침입과 귀족들 사이의 내분으로 인해 나라의 힘이 많이 약해졌다.

668년 나당 연합군의 공격에 평양성이 함락되면서 고구려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된다. 한반도에서 가장 넓은 영토를 차지했던

나라, 중국의 침입에 맞서 한반도의 방파제 역할을 했던 나라, 대부분의 유적지가 북한과 중국에 있어 더욱 안타까운 한반도의

고대국가 고구려. 고구려의 역대 왕조 계보를 통해 그 역사를 가늠해보도록 하자.

 

 

고구려 왕중에 제11대 동천왕이 어떤 인물인지 알려드리겠습니다. 

조조, 손권 등이 활약한 중국의 삼국시대는 소설 [삼국지연의]로 잘 알려져 있다. 그런데 같은 시기 우리의 역사는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있다. 위나라, 오나라와 교류도 하고, 전쟁도 했던 고구려 동천왕(209~248)은 백성들이 사랑한 임금으로 그에게는

조자룡, 관우에 비견할 만한 충신들이 있었다. 과연 그는 누구일까?

 

 

돼지가 맺어준 인연으로 탄생한 임금


고구려 10대 산상왕은 아들이 없어 늘 고민이었다. 하지만 산상왕은 자신을 왕위에 오르게 만든 우씨왕후의 눈치를 보느라

다른 여인을 후궁으로 삼기도 어려웠다. 그러던 어느 날 하늘에 제사 지내기 위해 사용할 돼지가 우리를 탈출해 달아나는 일이

생겼다. 관리가 돼지를 쫓았지만, 잡지 못하고 있을 때 주통촌, 즉 술을 빚는 마을에서 20세쯤 된 곱고 어여쁜 여자가 돼지를

잡아 주었다. 관리가 돌아와 산상왕에게 이 사실을 아뢰었다. 산상왕은 주통촌 여인이 궁금하여 밤에 몰래 그녀의 집을 방문했다.

 

그녀는 이런 날이 오리라는 것을 예견하고 있었다. 그녀의 어머니가 임신했을 때 마을에 점을 치는 사람이 말하기를 반드시

왕후를 낳겠다고 했다. 그녀의 어머니는 딸을 낳자 후녀 즉 왕후가 될 여자라고 이름 지었다. . 그런데 4개월 후 우씨왕후가

산상왕이 후녀와 몰래 만난 것을 알게 되고 말았다. 우씨왕후는 질투에 눈이 멀어 군사들을 보내어 후녀를 죽이려고 하였다.

군사들이 후녀를 죽이려고 포위를 하자, 후녀가 당당히 말했다.

“너희가 지금 나를 죽이려는 것은 대왕의 명령이더냐, 아니면 왕후의 명령이더냐. 지금 내 뱃속에는 아이가 들어 있으니 이는

대왕께서 남기신 것이다. 내 몸을 죽이는 것은 허락하지만, 왕자까지 죽일 셈이냐.”

관리들도 못 잡았던 돼지를 잡을 만큼 씩씩한 그녀의 단호한 말에 군사들은 감히 그녀를 해칠 수가 없었다. 우씨왕후는 매우

화가 났지만, 아이까지 임신한 그녀를 죽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후녀가 임신한 사실을 안 산상왕은 우씨왕후에게 말하여,

그녀를 왕궁으로 불러들였다. 후녀는 마침내 사내아이를 낳았다. 왕은 제사에 쓸 돼지로 인해 후녀와 만나 아이를 얻게

되었으므로, 아이 이름을 제사에 쓸 돼지라는 뜻을 가진 교체(郊彘)라 하고, 교체가 5살이 되자 태자로 삼았다. 산상왕이 죽게 되자, 227년 교체가 왕이 되니 곧 동천왕이다.

 

 

어진 성품을 가진 임금

동천왕은 성격이 너그럽고 인자하여 좀처럼 화를 내는 법이 없었다. 그를 못마땅하게 여겼던 우씨태후(왕의 어머니를 태후

라고 함)가 동천왕이 타던 말의 말갈기를 잘라버리거나, 시녀를 시켜 식사를 할 때 국을 그의 옷에 엎지르게도 하는 등 심술을

부렸지만, 동천왕은 화를 내지 않았다. 그는 성품만 인자했던 것이 아니라, 힘이 세고 용감했으며, 사냥과 활쏘기도 잘했다.

그의 용맹함은 이웃 나라에게도 알려질 정도였다.

 

 

고구려와 오나라의 만남

동천왕이 재위하던 시기는 중원 땅에서 위, 촉, 오의 삼국이 서로 경쟁하고 있었다. 그런데 위나라와 고구려 사이 요동지역에

서기 190년경부터 238년까지 공손씨 세력이 반 독립적인 국가를 이루고 있었다. 위나라와 경쟁하던 오나라에서 공손씨에게

사신을 파견해 서로 협력하자고 제의를 했다. 공손씨가 이를 수락하자, 233년 오나라는 진기한 보물을 보냈다. 그런데 공손씨가

태도를 바꿔 오나라 사신의 목을 베어 국경을 접하고 있던 위나라에게 보냈다. 이때 간신히 살아남은 오나라 사신들이

도망치다가, 고구려에 도착했다.

 

동천왕은 처음 만난 그들을 환영하고, 잘 접대를 해주었다. 게다가 오나라 사신들을 호위할 조의 25명과 담비가죽 1,000장,

갈계피(鶡雞皮) 10벌 선물을 갖추어 고구려 배에 태워 황해를 건너 양자강 유역에 있는 오나라로 돌려보냈다. 동천왕이

오나라에게 우호적이었던 것은 적국인 공손씨를 견제하기 위함이었다.

 

그러자 오나라 손권은 정식으로 사신을 보내 동천왕에게 각종 진귀한 보물과 옷을 바치고자 했다. 그런데 고구려에 마침

위나라 사신이 왔다. 그러자 오나라 사신은 동천왕을 뵈러 가지 않고 압록강 하구에서 머물렀다. 동천왕이 급히 신하들을 보내

오나라 사신을 맞이하게 했다. 그러자 오나라 사신 일행은 동천왕이 보낸 30명을 인질로 잡고 위나라와 사신왕래를 한 것에

대해 따졌다. 동천왕이 미안하다며 말 수백 필을 선물로 보내 달래자, 그들도 인질을 풀고 이어서 진기한 보물을

동천왕에게 바쳤다.

 

동천왕은 오나라에게 화가 났다. 오나라의 경쟁자인 위나라와 사신왕래를 한 것이 오나라에게는 기분이 상하는 일이었겠지만,

고구려가 여러 나라와 사귀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이를 핑계로 고구려에서 보낸 신하들을 인질로 잡고 따진 오나라의 행동은

무례한 것이었다. 236년 오나라는 다시 사신을 보내어 고구려와 친하게 지내고자 했다. 그러자 동천왕은 오나라 사신들의 목을

베어 위나라에 선물로 보내주었다. 동천왕은 단호하게 오나라와 절교를 선언했다. 오나라는 감히 고구려에 항의할 수가 없었다.

동천왕이 오나라를 버리고 위나라와 친하게 지내려고 한 것은 단지 오나라 사신의 무례함 때문만은 아니었다. 동천왕은 바로

이웃한 공손씨를 무너뜨리고, 요동 땅을 차지하려는 야심이 있었다. 단순한 분노 때문이 아니라, 오나라보다 위나라와

협력하는 것이 더욱 이익을 클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에 이 같은 결정을 한 것이다.

 

 

위나라와 전쟁


238년 위나라는 4만 군대를 동원해 공손씨를 공격했다. 동천왕은 1천 군대를 보내 위나라를 도와 공손씨의 배후를 공격했다.

고구려군의 숫자는 적었지만, 공손씨를 멸망시키는데 공을 세웠다. 그런데 4년 후, 동천왕은 장수를 보내 위나라를 공격했다.

그것도 요충지인 서안평을 공격했다. 고구려가 공격한 원인은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위나라가 공손씨를 멸망시킨 후

고구려에게 어떤 보상을 해주기로 약속해놓고 그 약속을 지키지 않은 탓일 것이다. 동천왕은 당시 위나라가 , 오와 치열하게

대립하고 있었으므로, 반격해오지 못할 것이라고 판단하고 공격을 한 것이다.

 

하지만 위나라는 강국이었다. 촉, 오와의 경쟁에서 이미 압도적인 우세를 보이고 있던 만큼, 고구려를 공격할 병력을 모을 수

있었다. 게다가 선비족, 부여국의 도움도 받으면서 고구려로 쳐들어왔다. 244년 위나라 관구검이 이끈 대군을 상대로 동천왕은

직접 2만 군사를 이끌고 나가 맞섰다. 첫 전투에서 적 3천여 명의 목을 베는 승리를 거두고, 양맥 계곡까지 추격해 또 승리를

거두어 적 3천여 명을 목 베거나 포로로 잡았다.

 

 

교만이 낳은 불행


거듭 승리를 거두자, 동천왕은 너무도 자신만만해졌다.

“위나라가 큰 나라라고 자랑하더니, 그 많은 군대를 이끌고도 우리의 적은 군사보다 못하구나. 관구검이 명장이라고 하더니,

오늘 그의 목숨이 내 손바닥 안에 있구나!”

하지만 자만심으로 적을 얕보게 되면 그것은 늘 위험에 처하게 된다. 동천왕이 5천 철갑기병대를 직접 이끌고 적을 공격했다.

그런데 위나라가 갑자기 방진(方陣, 보병이 기병을 상대하는 진영)을 펼치며 반격해 오자 고구려군은 크게 패하여 1만 8천

명이나 죽임을 당했다. 동천왕은 1천 기병과 함께 도망을 쳐야 했다. 교만이 낳은 실수치고는 대가가 혹독했다.

 

위나라군은 고구려 수도인 환도성으로 쳐들어와 마음껏 약탈했다. 위나라 장수 관구검은 부하인 왕기를 시켜 동천왕을 추격했다.

동천왕이 죽령이란 곳에 이르렀을 때는 고구려 군사들이 다 흩어진 상태였다. 동천왕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때 신하인

밀우가 자신이 결사대로 적을 막을 터이니 피신하라고 청했다. 밀우가 결사대를 모집해 적군에게 달려가 힘써 싸우는 동안,

동천왕은 샛길로 도망쳤다. 위험에서 빠져나오자 동천왕은 밀우 생각이 났다. 왕은 신하들에게 밀우를 구해올 자가 있느냐고

물었다. 이때 유옥구란 자가 나서 전쟁터로 달려가 적을 물리치며 너무나 지쳐 땅에 쓰러진 밀우를 발견했다. 유옥구는 밀우를

업고 돌아왔다. 동천왕은 밀우를 자신의 무릎 위에 뉘었다. 얼마 후 밀우가 깨어났다. 옆에 있던 고구려 군사들은 왕이 신하를

아끼는 모습을 보고 힘을 냈다.

 

동천왕은 적군의 추격에서 벗어나고자 남옥저 땅까지 도망을 갔다. 하지만 적군은 여전히 동천왕을 추적했다. 동천왕은

이제 정말 앞이 깜깜했다. 이때 유유란 자가 나섰다. 유유는 음식을 가지고 위나라 진영에 가서, 고구려왕이 항복하려 한다고

알렸다. 위나라 장군은 자신이 고구려왕을 사로잡는 큰 공을 세우게 되었다고 흥분하는 바람에 아무런 의심 없이 유유가 준

음식을 받아먹으려고 했다. 이때 유유가 식기 속에 감추어 있던 칼을 빼어 위나라 장군의 마음을 찌르고 그와 함께 죽었다.

부대를 이끄는 장군이 죽자 위나라 군대는 크게 혼란에 빠졌다. 이를 놓치지 않고 동천왕은 그간 모은 군사로 급히 공격하니

위나라 군대는 크게 패하여 도망치고 말았다. 동천왕이 싸움에 이겼다는 소식이 들리자, 각지에서 고구려 사람들이 힘을

모았고, 위나라 군대는 서둘러 퇴각을 하게 되었다. 동천왕은 드디어 적군을 몰아내고 나라를 회복하게 되었다.

 

 

백성들이 사랑한 동천왕


동천왕은 위나라 군대를 격퇴시키는데 공을 세운 밀우, 유옥구, 유유에게 큰 상을 내렸다. 동천왕은 위나라와의 싸움에서

곤란을 겪었기에 요동 땅을 차지하지 못했다. 하지만 동천왕은 위나라를 물리친 후 245년에는 지금의 강원도 지역을 지나

신라를 공격했다. 신라에서는 병마사 석우로가 나가서 대항했지만, 고구려의 상대가 되지는 못했다. 2년 후 신라가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와 두 나라는 화친을 맺게 되었다. 동천왕 시기 고구려가 위축된 것만은 아니었다.

 

동천왕이 위기를 극복한 후 248년 죽자, 백성들은 그의 죽음을 크게 슬퍼했다. 그를 가까이 모신 신하들 가운데는 왕과 함께

죽는 순장을 하려는 사람들이 많았다. 동천왕의 아들인 중천왕이 산 사람이 죽는 것을 금지했지만, 장례일이 되자 동천왕의

무덤에는 자살을 하려는 사람이 아주 많았다. 고구려 사람들은 죽은 후의 세계가 현실세계의 연장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순장을 하게 되면 저승에서도 왕 곁에서 보좌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순장이 금지되었지만, 동천왕의 무덤에서

죽겠다는 자들을 모두 말릴 수가 없었다. 비록 한때 교만하여 나라의 위기를 초래하기도 했지만, 동천왕은 신하들과 백성들의

사랑을 받은 좋은 임금이었다.

 

 

Posted by 원주유
신라 역사와 문화2013. 9. 14. 15:19

 

 

신라왕들은 어떻게 살았으며, 어떤 업적을 남겼는지 보실까요.

 

제36대 혜공왕
경순왕후 ․ 김씨, 건운, 758~780년 
재위기간 : 765년 6월 ~ 780년 4월. 총 14년 10개월
부인 : 2명
자녀 : 기록 없음
신보왕후
창장부인

혜공왕은 경덕왕의 장남이며, 경수왕후 소생으로 이름은 건운이다. 758년에 태어났으며, 세 살 때인 760년에 태자 책봉되었고, 765년 경덕왕이 죽자 여덟 살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혜공왕은 태종무열왕의 직계손으로 계승된 신라 중대왕실의 마지막 왕이다. 즉위 했던 때의 나이가 8세였으므로 무후 경수태후의 섭정을 받아야 했다.

혜공왕 대에는 집사부 중시를 중심으로 강력한 전제왕권 체제를 구축했던 신라 중대 사회의 모순이 본격적으로 노정되었다. 즉 전제왕권의 견제 하에 있던 귀족세력들이 정치일선에 등장하여 정권쟁탈전을 전개함으로써 정치적으로 불안정하였다. 따라서, 혜공왕의 재위 16년 동안에는 많은 정치적 반란사건이 있었다. 먼저 일길찬 대공과 그의 동생 아찬 대렴이 768년에 반란을 일으켰으나 왕의 측근인물인 이찬 김은거를 비롯한 왕군에 의해서 토멸되었다. 이 반란은 경덕왕에 이어서 중대의 전제왕권 체제를 유지하려는 혜공왕 초년의 정치적 성격을 부인하려는 최초의 정치적 움직임이었다. 김은거는 이 반란의 진압에 대한 공로로 그해에 시중에 임명되었으며, 이찬 신유는 상대등에 임명되었다.

그리고 769년에 왕은 임해전에서 조신들에게 연회를 베풀고, 인재를 천건하게 하여 새로운 인재들을 모아 전제왕권 체제를 강화하려 하였다. 그러나 770년에는 대아찬 김융이 반란을 일으켰다. 이 반란도 대공의 반란과 마찬가지로 반 혜공왕적 성격의 것이었다. 김융의 난으로 김은거가 시중에서 물러나고 이찬 정문이 시중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혜공왕대의 정치적 사건 중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774년 감양상이 상대등에 임명된 사실이다. 즉, 김양상은 경덕왕 대에 시중을 역임하였으나 778년에 있었던 대공의 난에 연루되어 시중직에서 물러나고 왕의 측근인 김은거에게 시중직을 물려주었다. 이로써 보면 김양상은 적어도 친 혜공왕적인 인물은 아니었다. 그런데 김양상이 다시 귀족세력을 대표하는 상대등에 임명되었다는 사실은 반 혜공왕적인 귀족세력이 정권을 장악하였음을 의미하며, 이것은 전제왕권 중심의 중대 사회에서 귀족중심의 사회로의 전환이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 775년에는 김은거 및 이찬 염상과 정문의 모반이 두 차례에 걸쳐 있었다. 이들은 모두 전제왕권 유지를 지지하는 세력으로서 귀족세력인 김양상의 대두에 반대하여 반란을 일으켰으나 모두 진압됨으로써 김양상 중심의 정치세력은 더욱 공고해질 수 있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혜공왕일파는 실질적인 정치권력은 상실하고 명목상의 왕위만을 보전하고 있는 상태가 되었다.

이런 어지러운 내정을 타개해보고자, 혜공왕은 재위 16년 동안 11회의 조공, 하정 그리고 사은의 사절을 중국 당나라에 파견하여 외교정책을 펼쳤으나 혜공왕일파의 외교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777년 상대등 감양상의 상소에 의하여 신랄한 비판을 받게 되었다. 상소를 통한 김양상의 혜공왕일파에 대한 정치적 경고는 친 혜공왕파를 자극하게 되어 780년에 김양상일파를 제거하려는 이찬 김지정의 반란이 있었으나 오히려 김양상과 이찬 경신에 의하여 진압되고 말았다. 이 반란의 와중에서 혜공왕과 왕비는 살해되었다. 그리고 경신의 추대에 의하여 김양상 자신이 제37대 선덕왕으로 즉위하였다. 이때 혜공왕의 나이는 스물셋이었다.

제37대 선덕왕
개성대왕 김효방(내물왕의 9대손)
사소부인 김씨 ․ 김씨, 양상, 생년미상 ~ 785년
(성덕왕의 딸) .․ 재위기간 : 780년 4월 ~ 785년 정월. 총 4년 9개월 
부인 : 1명 
자녀 : 없음
구족왕후

선덕왕은 내물왕의 10대손으로 성은 김씨이며, 이름은 양상이다. 아버지는 개성대왕 효방이고, 어머니는 성덕왕의 딸 사소부인 정의태후이다. 선덕왕은 왕족으로 태어났으나, 왕위를 승계할 신분은 아니었다. 764년 정월에 이찬인 만종이 상대등에, 아찬인 양상이 시중에 임명되었다. 그의 시중 임명은 전제왕권을 재강화하려던 경덕왕의 한화정책이 귀족의 반발로 실패하고 왕당파인 상대등 신충이 물러난 4개월 뒤에 이루어진 점으로 보아, 그의 정치적 성격은 경덕왕의 왕권전제화와는 반대되는 것으로 이해된다.

김양상의 활동은 혜공왕 대에 접어들어 두드러졌다. 771년에 완성된 성덕대왕신종의 명문에 의하면 그는 대각간 김옹과 함께 검교사숙정대령겸 수성부령검교 감은사사각간으로서 종 제작의 책임을 맡고 있었다. 여기에서 주목되는 것은 감찰기관인 숙정대의 장관이었다는 점에서 그의 정치적 위치를 엿볼 수 있다. 그는 혜공왕 10년에 이찬으로서 상대등에 임명되었고, 혜공왕 재위 12년에는 한화된 관제의 복고작업을 주관하였다. 그리고 동왕 13년에는 당시의 정치를 비판하는 상소를 올려 전제주의적인 왕권의 복구를 꾀하는 일련의 움직임을 견제하였다.

혜공왕 16년 2월에 왕당파이었던 이찬 김지정이 반란을 일으켜 궁궐을 침범하자, 상대등이었던 양상은 4월에 김경신과 함께 병사를 일으켜 지정을 죽이고 혜공왕과 왕비를 죽인 뒤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그의 즉위는 무열왕계인 김주원을 경계하고 그들의 반발을 억제하려던 김경신의 강력한 뒷받침에 의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는 784년에 왕위를 물려주려는 결심을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으므로, 병석에서 내린 조서에서도 항상 선양하기를 바랐다고 한 것은 이를 뒷받침하고 있는 것이다.

즉위년(780년)에는 750년에 어룡성에 둔 봉어를 경으로 고치고 다시 감으로 바꾸어 어룡성을 개편했으며, 781년에는 패강의 남쪽 주현을 안무하였고, 782년 한주(지금의 서울지역)에 순행하여 민호를 패강진으로 이주시켰다. 이듬해 1월에는 김체신을 대곡진 군주, 즉 패강진 장관에 임명함으로써 개척 사업을 일단 완료하였다. 이러한 패강진의 개척은 왕실에 반발하는 귀족세력의 배제와 왕권을 옹호해 줄 배후세력의 양성하려는 성격을 띠는 것으로 보인다. 재위 6년만에 죽으니, 불교의식에 따라 화장하고 그 뼈를 동해에 뿌렸다.

제38대 원성왕
김효양(내물왕 11대손)
계오부인 박씨 ․ 김씨, 경신, 생년미상 ~ 798년 

재위기간 : 785년 정월 ~ 798년 12월. 총 12년 11개월
부인 : 1명
자녀 : 3남 2녀
숙정왕후 김씨 - 인겸(혜충 태자), 헌평태자, 예영, 대룡, 소룡

원성왕은 내물왕의 12대손으로 김효양과 계오부인 박씨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이름은 경신이다. 혜공왕 말기에 이찬 지정이 친위혁명을 일으키자, 상대등 김양상이 반혁명을 일으켜 지정과 싸웠다. 경신은 이때 양상을 도와 지정을 무너뜨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고, 그 덕분에 그는 김양상(선덕왕)이 왕위에 오른 뒤에 혜공왕 말기의 혼란을 평정한 공으로 상대등에 임명되고, 선덕왕이 죽자 태종무열왕의 6대손인 김주원과의 왕위다툼에서 승리하여 왕위에 올랐다.

『삼국사기』와『삼국유사』는 김주원과의 왕위계승다툼에 대한 설화를 기록하고 있다. 당시 김경신보다 서열이 높았던 김주원이 왕위에 추대되었는데, 김경신이 복두를 벗고 소립을 쓰고 12현금을 들고 천관사 우물로 들어가는 꿈을 꾸자, 여삼의 해몽을 듣고 비밀히 북천의 신에게 제사를 지냈더니 비가 와서 알천이 불어 김주원이 건너오지 못하였으므로 신하들이 경신을 추대하였다는 것이다. 이에 훗날 김주원의 아들 김헌창이 아버지가 왕위에 오르지 못한 것을 이유로 반란을 일으킨 것을 보아, 단순한 설화가 아님을 짐작케 한다.

원성왕대는 하대권력구조의 특징을 이루는 왕실친족집단원에 의한 권력 장악의 전형이 확립되기 시작하였다. 즉, 원성왕은 즉위와 동시에 자신의 적자를 태자로 책봉하고 다른 왕자들, 준옹(뒤의 소성왕)뿐 아니라 그의 동생인 언승(뒤의 헌덕왕)도 정치의 중심부에서 활약하였는데, 이처럼 왕과 태자를 중심으로 근친왕족들이 상대등, 병부령, 재상 등의 요직을 독점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근친왕족들로 이루어진 왕위계승은 왕족들이 신라하대 왕들의 주류를 이루는 특징을 보여준다. 또, 786년에는 대사 무오가 병법 15권과 화령도 2권을 바쳤는가 하면, 왕 자신도 「신공사뇌가」를 지었는데, 그것은 인생 궁원의 변화에 대한 이치를 담은 것이라 한다. 이 책들은 모두 전하지 않는다. 791년에 제공이 반란을 일으켰으나 진압하였다. 제공은 785년에 시중이 된 인물로 그가 일으킨 반란의 성격은 명확하게 밝혀져 있지 않다. 같은 해에 인겸 태자가 죽으니 시호를 혜충이라 하였다. 그리고 제공의 반란이 진압되자 다시 혜충 태자의 아들 준옹이 시중에 임명되었다.

785년에 원성왕은 총관을 도독으로 바꾸었으며, 재위 4년(788년)에는 독서삼품과를 설치하였다. 이 정책이 실시되기 전에는 궁술과 인물만 가지고 관리를 뽑았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독서삼품과에서 관리를 뽑은 것은 과거제의 시초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개혁은 국학을 설치한 지 이미 1세기가 지난 당시 신라사회에 있어서 무예를 중심으로 한 종래의 관리등용법의 개혁이 요청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원성왕은 불교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 785년에 승관을 두어 정법전이라 하고, 795년에는 봉은사(혹은 보은사)를 창건하였으며 망덕루를 세웠다.

왕의 치적으로 790년 벽골제의 증축과 발해와의 통교를 들 수 있다. 이와 더불어 795년에 당나라의 사신이 하서국 사람 둘을 데리고 와 신라의 호국룡을 물고기로 변하게 하여 잡아가려는 것을 막았다는 설화는 그가 상당한 독자외교를 펴고 있었음을 알려준다. 재위 14년인 798년 12월 29일에 죽으니, 유명으로 봉덕사 남쪽 토함악 서쪽동굴에 화장하였고, 능을 추복하기 위한 승복사가 세워졌다.

제39대 소성왕
혜충태자
숙정왕후 김씨
성목태후 김씨 ․ 김씨, 준옹, 생년미상 ~ 800년 
재위기간 : 799년 정월 ~ 800년 6월. 총 1년 5개월
부인 : 1명
자녀 : 2남 1녀
계화왕후 김씨 - 청명(제40대 애장왕)
체명, 장화(제42대 흥덕왕의 왕비)

소성왕은 원성왕의 태자 인겸의 아들이며, 성목태후 김씨 소생으로 이름은 준옹이다. 원성왕이 아들 인겸을 태자에 책봉했으나 791년에 사망하였고, 다시 아들 헌평을 태자에 책봉했으나 그 역시 794년에 사망했다. 두 아들이 죽고 셋째와 넷째 아들이 남아 있었으나, 원성왕은 장손인 준옹을 태자로 책봉했다. 준옹은 원래 태자의 아들로서 궁중에서 자랐고, 789년에는 당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대아찬 직위를 받았으며, 790년에는 파진찬에 제수되었다. 그리고 791년에 전 시중 이찬 제공이 반란을 일으키자, 이를 제압하여 공을 세우고 시중에 임명되었다. 하지만 병으로 1년 6개월 만에 시중에서 물러났다가 792년에 병부령이 되고, 795년에 태자에 책봉되었다. 그리고 798년 12월 말에 원성왕이 죽자, 이듬해인 799년 정월에 왕위에 올랐다.

소성왕의 치적으로 즉위년 3월에 청주(지금의 진주)의 노거현을 국학생의 녹읍으로 설정한 것을 들 수 있다. 이는 당시 국학에 입학한 학생들에게 장학금 형태로 녹읍을 지급했다는 뜻이다. 799년(소성왕 1) 7월에는 “길이가 9척이나 되는 인삼을 발견하여 하도 신기하여서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진상을 하였더니 덕종이 보고 인삼이 아니라며 받지 않았다.”라는 기록이 있다.

왕위에 오르던 당시, 이미 지병을 앓고 있던 소성왕은 왕위에 오른 지 불과 재위 2년 만인 800년 6월에 생을 마감했다.

제40대 애장왕
계화왕후 김씨 ․ 김씨, 초명은 청명, 개명은 중희. 788년 ~ 809년 
재위기간 : 800년 6월 ~ 809년 7월. 총 9년 1개월 
부인 : 2명 
자녀 : 기록 없음
왕비박씨
후궁김씨

애장왕은 소성왕의 장남이며, 계화부인 김씨 소생으로 초명은 청명이고, 왕위에 오른 뒤에 중희로 고쳤다. 788년에 태어났으며, 800년 6월에 소성왕이 죽음을 앞두고 태자로 책봉했다. 소성왕이 죽자, 열세 살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여 즉위 초부터 작은아버지인 병부령 김언승(뒤의 헌덕왕)의 섭정을 받았다. 애장왕이 친정을 요구한 때는 재위 6년인 805년인데, 이때 애장왕의 나이는 18세였다. 친정을 시작한 애장왕은 우선 자신의 모후 김씨를 태왕후로, 부인 박씨를 왕후로 봉하여 자신의 위엄을 세웠다.

애장왕은 중앙과 지방제도에 대한 개혁조치의 일환으로 805년 공식 20여조를 반포하였으며, 808년 12도에 사신을 파견하여 모든 군, 읍의 경계를 정하였다. 공식 20여조를 반포하기 1년 전 동궁의 만수방을 새로 만들었으니, 이는 곧 태자의 위치를 굳건히 하여 왕권을 신속하게 회복하기 위한 조치였다.

이와 같은 정책의 일환으로 805년 위화부의 금하신을 고쳐 영이라 하고, 예작부에 성 두 사람을 두는 등의 관제개혁 조치를 취한다. 애장왕은 다른 역대왕들과는 달리 불교에 대해서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 불교의 사치스런 행사를 막기 위해 교지를 내려 불교사원의 새로운 창건을 금하고, 금수로써 불사하는 것과 금은으로 기물 만드는 것을 금하였는데, 이는 귀족들은 막대한 토지와 재력을 지니고 지방의 연고지를 가지면서 원당과 같은 절을 세워 자신들의 막대한 토지와 재력을 유지하는 것을 막고, 왕권에 그들을 복속시키려는 의도로 보인다. 그러나 이미 중대에 세워졌던 전제왕권주의가 무너지고 귀족세력이 난립하는 신라하대의 상황 때문에 이러한 일련의 정책들은 성공할 수 없었고, 결국 그는 왕위에서 쫓겨났다.

애장왕은 국내정치의 개혁과 병행하여 대당외교 외에 일본과의 국교를 트고 있다. 802년 12월 균정에게 대아찬을 제수하고 가 왕자로 삼아 왜국에 사신으로 보내고자 하였으며, 애장왕 4년(803년)에는 일본국과 사신을 교환하고 우호 관계를 맺었다. 이로써 성덕왕 30년(731년)에 일본의 침입 사건으로 단절되었던 두 나라의 외교 관계는 72년 만에 회복하였다.

이와는 별도로 802년 순웅, 이정에 의하여 가야산에 해인사가 세워졌는데, 해인사는 당시 왕실에서 경영하는 절이었다. 이렇듯 애장왕이 내외의 정사를 직접 챙기기 시작하자 왕권은 빠르게 회복되었고, 상대적으로 언승 일파의 힘은 약화되었다. 이에 위기감을 느껴, 809년 7월 언승이 조카 제륭과 함께 군사를 이끌고 궁궐에 들어와 왕을 죽였다. 이때가 애장왕 10년인 809년 7월이었다.

 

Posted by 원주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