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역사의 인물들중 고구려를 빛낸 담징
부두는 떠나는 사람, 보내는 사람으로 붐비고 있었습니다. 담징은 여러 승려들에게 옹위되어 묵묵히 부두에 들어섰습니다. 옆에서 들썩하는 소란에도 아랑곳없이 바다 먼 곳을 바라보며 발을 옮기는 그의 걸음은 어쩐지 가볍지를 않았습니다. 그들의 일행이란 몇이 안 되며 봇짐도 단출했습니다.
“대사님, 부디 옥체 보존하시옵소서. 예서는 날마다 기다리겠소이다. 아무쪼록 무사하시옵기만 바라나이다.” 따라 나온 중들이 짐을 넘겨주며 서운함을 표시하나 그는 별로 기색을 달리하지 않았습니다. 담징은 드디어 배전에 올랐습니다.
순풍에 돛을 달고 물 위로 미끄러져 가는 배의 갑판에 서서 바람에 펄럭이는 가사(중의 겉옷)자락을 부여안은 채 멀어져가는 고구려 땅을 바라보며 기약 없는 길을 떠나는 담징의 마음은 심란했습니다.
‘아, 나는 과연 언제면 다시 이 길을 돌아올 것인가! 외적의 준동이 심하고 나라안팎은 소란하기 그지없는데…’
오래전부터 호시탐탐 침략의 기회를 노리던 당나라의 준동이 근간에 와서는 더욱 잦은데 이 땅, 이 집을 뒤에다 두고 원수의 목에 칼 한번 대여보지 못한 채 장삼을 입고 기약 못할 길을 떠나려니 더욱 발등이 밟혔습니다. 그러나 아니 갈 수 없는 길이었습니다.
일본의 초청은 이미 수락되고 자신은 왕의 어명을 받은 신하의 몸이니 달리 할 수 없는 일이 아닌가!
담징은 579년 평원왕이 집권하고 있던 시기에 태어났습니다.
어려서부터 남달리 그림에 호기심을 가지고 있었던 담징은 무엇을 하나 보아도 그저 스치지 않았으며 반드시 다시 한 번 재현해보고야 말았습니다. 그가 일찍이 중이 된 것도 그림에 뜻을 두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이른 나이에 승려가 된 담징은 벌써 젊은 시절에 불교만이 아니라 유교교리까지 꿰뚫었고 기술 분야에도 조예가 깊은 인물로 명성이 났습니다.
이런 담징이 국왕의 어명을 받고 일본의 문화건설을 도와주기 위해 사랑하는 고구려 땅을 떠난 것은 610년 3월이었습니다. 그때 그는 30대의 장정이었습니다.
유구한 역사와 문화를 자랑하는 우리 민족은 오랜 옛날부터 인류문화의 공동적 보고에 크게 기여한 창조와 발명의 전통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이전시기에도 그러했지만 삼국시기에만 해도 동방에서 가장 앞섰던 우리 민족은 이웃나라들의 기술과 예술발전에 커다란 영향을 주면서 성심성의로 도와준 사실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중국과 일본의 역사기록에도 수다히 남아있습니다.
백제의 학자 왕인은 일본에 건너가 글 모르던 그곳 사람들에게 처음으로 천자문을 가르쳤고 고구려의 중이며 의사인 혜자는 야마토 왕권의 집권자 성덕태자의 스승으로 활동했다고 합니다.
담징 역시 일본의 거듭되는 초청으로 그곳에 건너가 대고구려를 빛낸 화공이었습니다.
당시 일본으로 말하면 그들이 자랑하는 이른바 아스카문화가 고조기에 이른 때였습니다. 이 아스카문화 역시 백제로부터 불교가 처음으로 들어가고 삼국과의 문물이 교환되면서 우리의 학자, 기술자, 예술가들에 의해 시작되고 이룩되었습니다.
특히 고구려회화문화는 일본의 고대, 중세미술발전의 밑천으로 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다카마즈무덤벽화, 법륭사 금당벽화, 친수국 바탕그림들만 놓고 보아도 잘 알 수 있습니다. 무덤벽화들에 그려진 인물형상은 아래바지, 허리에 띠를 맨 겉옷, 머리에 쓴 두건 같은 것은 고구려 사람들과 꼭 같습니다.
더욱이 힘이 넘쳐 나고 그런가 하면 매우 섬세하면서도 우아한 필치의 형상수법들은 고구려의 회화예술이 일본에 건너간 것임을 설명 없이 그대로 보여 주는 산 실물입니다.
담징이 일본으로 건너 갈 당시는 추고천왕(여천왕) 스미코의 사위인 성덕태자가 나라를 다스리고 있던 시기였습니다. 나라의 문화건설에 큰 관심을 돌리고 고구려의 발전된 문화를 받아들이기에 힘쓰던 성덕태자는 백제의 사원건축가들을 초빙하여 근 8년간에 걸쳐 가장 큰 법당인 법륭사를 지어놓았습니다. 담징은 바로 이 법륭사의 벽면 벽화장식을 위해 일본으로 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법륭사는 금당(황금으로 장식됨) 중심 불전과 5층탑, 중문, 회랑으로 꾸려지고 그 옆에는 동. 서, 북으로 실들과 강당이 배치되었으며 또 고루와 종루를 비롯하여 훌륭히 건설된 절간입니다. 그래서 이 건물벽화를 아무에게나 맡길 수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불교경전에 능통하고 그림과 채색에 뛰어났으며 또한 종이와 색감제작에서 기술자로 이름이 났던 담징이 바로 사원벽화를 담당하게 되었습니다.
담징이 일본에 도착하자 성덕태자는 자기의 거처인 왕궁으로 이들 일행을 반갑게 맞아들였고 저들의 스승으로 높이 모셨으며 법륭사에 자리를 잡도록 했습니다.
“고구려스님에게 불편이 없도록 하라!”
성덕태자는 고행과 수도에 그들이 마음대로 드나들도록 허가했고 일본의 이름난 중이었던 호오죠오와 기거를 같이 하도록 했습니다.
장대한 체구에 꾹 다문 입, 시원스런 걸음걸이, 늘어진 가사 자락을 한손으로 올려붙인 채 법륭사를 한 바퀴 돌아 본 담징은 머리를 끄덕이며 깊은 사색에 잠겼습니다.
담징은 먼저 벽화창작을 위한 준비부터 했습니다.
그는 종이, 먹, 물감제조기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물론 일본에도 일부 문방구들과 기재들이 준비되어 있었지만 그 모든 것이 그의 눈에 들지 않았습니다.
담징은 모든 것을 처음부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을 시켜 먼저 질 높은 먹을 갖추도록 기술적인 지도를 주었고 손수 색감들을 하나하나씩 제조했습니다. 그리고 또한 일본에서는 그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희한한 종이도 만들어 냈습니다.
그뿐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연애’라고 이름 지은 훌륭한 물차를 만들었습니다. 이 물차가 만들어짐으로써 사람의 힘이 아니라 흐르는 물의 힘을 이용하여 불상조각과 금속공예품을 만들어내는 데서 하나의 개변이 일어났습니다. 특히는 농민들이 곡식을 제분하고 수공업자들이 광석을 분쇄하는데서 혁신이 일어났습니다. 이 희귀한 사실에 일본원주민들은 담징을 ‘고구려스님’이라고 존대했습니다.
“정말 신묘하지요.”
“글세, 말이외다. 우린 생각도 못했는데 고구려스님이 이런 것을 다…”
이 고구려스님이 바로 힘겨웠던 저들의 노동을 수월하게 만들어준 것이었습니다. 하기에 다시없는 은인으로, 위인으로 우러렀습니다.
담징이 일본 땅에 건너 간지도 근 2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습니다. 이제는 어지간히 준비도 갖추어졌습니다. 법륭사의 주지를 비롯한 그곳 승녀들은 이제나저제나 하면서 그가 빨리 붓을 들기만을 초조하게 기다렸습니다.
하지만 담징은 선뜻 일에 달라붙지 않았습니다. 어쩐지 생각은 두고 온 대동강기슭의 금잔디 밭으로만 달려갔고 고국에 있을 때의 아름다운 추억들이 꼬리를 이어 떠올랐습니다.
‘아, 벌써 이태가 되었구나. 모든 것이 무고한지. 그 무슨 변고라도 없는지.’
이즈음 일본의 중들 속에서는 담징이 저희들의 땅에 온지도 퍽이나 지났는데 그림은 그리지 않는다고, 아무래도 수상하다는 말들이 나는가하면 승적에도 없는 건달 승이어서 다른 재간은 있어도 그림만은 그릴 줄 모른다고까지 수군 수군댔습니다. 이 흉흉한 분위기에 어느 날 고구려에서 함께 떠난 법정이 이젠 붓을 들어야 하지 않겠는가고 조용히 권고했습니다.
담징은 근엄한 표정으로 천천히 대답하는 것이었습니다.
“건달 승이란 말은 열백 번 듣겠소만 나라를 모르는 중이라는 말은 죽어도 듣지 못하겠소. 내 나라 대고구려를 위해서라면 어떤 일도 주저하지 않을 담징임을 대사도 부디 알아주오.”
그는 시름겨운 눈으로 먼 서쪽하늘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순간 법정대사의 머리에는 언제인가 담징과 함께 길을 걸을 때 하던 그의 말이 불시에 떠올랐습니다.
“우리는 고구려 사람이다. 그러니 부처를 믿어도 고구려를 위해 믿어야 한다. 부처만 알고 제 나라를 모른다면 부처의 종일뿐 고구려 사람은 아니다.”
과연 옳은 말입니다. 담징은 이런 사람이었습니다.
나서 자란 고향과 그 땅에 대한 그리움으로 하여 잠을 이루지 못하던 어느 날 밤 담징은 이미 정제해놓은 채색감들을 하나하나 검열해 보고 벽면에 마주 섰으나 어쩐지 마음만은 개이지 않았습니다. 몸은 비록 타국에 있어도 언제나 마음만은 바다건너 고구려에 가 있었습니다.
요즈음 들리는 소문이 외적들이 쳐들어와 고구려는 시련을 겪고 있다고 했습니다. 물론 대고구려는 적을 지경 밖으로 반드시 내몰고 승리의 큰 북을 울릴 것이지만 아무튼 힘겨운 싸움을 하리라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습니다.
마침 법륭사 주지가 숨 가쁘게 달려오더니 그를 얼싸 안으며 염치없이 고구려에 쳐들어갔던 외적들이 가랑잎 같이 흩어지고 몰살되었다는 기적 같은 소식을 전해 주었습니다.
주지는 두 손을 모으고 손목의 염주를 매만지며 아뢰는 것이었습니다.
“대사님, 군사들이 전장에서 대고구려의 명예를 떨쳤으니 담징대사님은 화필로써 명성을 떨쳐야 하나이다. 법륭사에 영광을 베풀어 주소이다.”
주지는 진심으로 기뻐하며 인사를 드렸습니다.
승전의 소식은 쓸쓸하던 담징의 마음을 높뛰게 했습니다.
‘아, 대고구려는 이겼구나. 끝끝내 동방강대국의 이름을 떨치고야 말았구나. 이제 내 무엇을 아끼고 주저하랴. 대고구려의 빛발로 해외만방을 밝히는 이 성업에 한 몸을 바치리라.’
드디어 담징은 큰 붓을 들었습니다. 법정대사가 숭엄한 자세로 금당 출입문을 지키고 서 있을 뿐 주변은 쥐 죽은 듯 고요했다. 이렇듯 온몸이 그대로 고구려의 넋이 되어 낮과 밤이 따로 없이 담징은 벽화를 그려나갔다.
힘 있게 긋고 또 찍고 채색을 먹이고… 마지막 붓을 놓았을 때 담징은 금당바닥에 뿌리를 내린 듯 그 장대한 체구가 움직일 줄 몰랐습니다.
벽화의 완성을 보려고 발 벗고 달려온 주지와 승려들도, 함께 동행 했던 고구려의 중들도
‘아!’ 하는 탄성을 지를 뿐 다른 말을 잇지 못했습니다. 과연 명화에 또 명화였습니다.
금당 벽의 열두 폭 불교관계의 크고 작은 그림들과 천정 밑의 20여개 작은 벽면에 두 개씩 그려놓은 비천(하늘을 나는 선녀) 그림들은 그야말로 대황홀경이었습니다.
반듯한 흙벽 위에 모래와 수사(풀)를 바르고 또다시 아마와 둘을 섞어 매질한 후 그 위에 백토를 칠하여 티 없이 매끈한 면을 마련하고 그려나간 불교교리를 내용으로 하는 6편의 ‘아미타여래상’은 구도가 대칭적이면서 성격이 특색 있게 살아난 것으로 하여 더욱 이채로웠습니다. 특히 장방 안 연꽃방석 위에 위엄 있게 틀고 앉은 주인공의 모습은 예술적 처리에서 매우 정확한 것으로서 승려들과 화공들의 경탄을 자아내도록 했습니다.
또한 가는 선으로 연두색, 연한 붉은색, 곤청색, 재빛색을 조화롭게 먹여나감으로써 그 화려함이란 이를 데가 없었습니다.
단숨에 그어 내린 굵고 진한 선, 가늘고도 연한 선으로 성격을 살리고 운동감을 드러낸 인물들의 각이한 형상, 형태를 사실적으로 똑똑히 하면서도 미묘한 움직임마저도 하나같이 놓치지 않은 선묘운필의 묘미, 어디까지나 격조 높은 벽화예술의 높은 경지를 이룬 이 조화는 그 앞에 선 사람들의 마음을 금시 숭엄하게 만들었습니다.
완전히 넋을 잃은 주지는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바닥에 합장한 채 엎드려 ‘관세음보살’을 속으로 외우고 또 외우며 손을 비벼댈 뿐이었습니다.
담징 역시 외적을 보기 좋게 물리친 조국 고구려에 대한 생각으로 벽면을 향해 ‘남무관세음보살’하고 조용히 되뇌며 마음에 손을 얹습니다.
고구려의 이긴 싸움이 그에게 힘을 주고 붓을 들게 했던 것입니다. 만약 그 폭풍 같은 희소식이 전해지지 않았던들 담징은 아직도 시작을 못한 채 망설이고만 있었을 것이 아닌가!
“이 벽화는 세상에서 더는 찾아 볼 수 없는 그림이요. 담징대사의 그림솜씨는 참으로 신비롭소이다.”
주지를 비롯하여 모든 승려들이 입을 모아 연해연방 추어 올렸습니다. 하지만 담징은 조용히 뇌이었습니다.
“이 벽화가 잘되었다면 그것은 나의 화법이 신비로워서가 아니라 바로 고구려의 얼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요. 그 어떤 대적도 감히 굽힐 수 없는 슬기롭고 지혜로우며 용감하고 강의한 고구려 사람들의 얼이 있어 이 벽화가 완성되었음을 알아야 할 것이요.”
과연 이 벽화야말로 담징의 숭고한 애국의 산물이었습니다.
벌써 가사를 걸친 주지가 목탁을 두드리고 수많은 승려들이 합장배례를 하고 또 한다. 은은한 향불의 유연한 연기 속에 담징은 대고구려의 아들임을 온몸으로 느꼈습니다.
이와 같이 법륭사의 벽화는 담징에 의하여 훌륭히 마련되었습니다.
법륭사의 금당벽화는 신라의 경주 석굴암, 중국의 운강석굴과 함께 동양3대걸작중의 하나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법륭사의 벽화는 동방미술사는 말할 것도 없고 세계미술사에서도 특이한 자리를 차지하며, 더구나 이는 일본의 회화미술의 첫 장을 이루는 명화로 꼽히고 있습니다.
이 벽화는 창작된 때로부터 천 수백여 년이 지났으나 색 하나, 선 하나 변함없이 그대로 보존되어 세계적인 보물로 미술가들의 찬탄의 대상으로 되어왔습니다.
그러던 중 1949년 1월 법륭사가 불타면서 금당의 벽화를 잃게 되었습니다.
그 후 1968년 수많은 일류급 화가들이 최상의 자재로 다시 복원해놓았다고 하지만 원화를 살리지 못했다고 그들 자신이 말하고 있습니다. 고구려의 담징이 그린 벽화는 그만큼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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