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역사와 문화2013. 9. 14. 17:55

 

우리 역사의 인물들중 고구려를 빛낸 담징

부두는 떠나는 사람, 보내는 사람으로 붐비고 있었습니다. 담징은 여러 승려들에게 옹위되어 묵묵히 부두에 들어섰습니다. 옆에서 들썩하는 소란에도 아랑곳없이 바다 먼 곳을 바라보며 발을 옮기는 그의 걸음은 어쩐지 가볍지를 않았습니다. 그들의 일행이란 몇이 안 되며 봇짐도 단출했습니다.

 

“대사님, 부디 옥체 보존하시옵소서. 예서는 날마다 기다리겠소이다. 아무쪼록 무사하시옵기만 바라나이다.” 따라 나온 중들이 짐을 넘겨주며 서운함을 표시하나 그는 별로 기색을 달리하지 않았습니다. 담징은 드디어 배전에 올랐습니다.

 

순풍에 돛을 달고 물 위로 미끄러져 가는 배의 갑판에 서서 바람에 펄럭이는 가사(중의 겉옷)자락을 부여안은 채 멀어져가는 고구려 땅을 바라보며 기약 없는 길을 떠나는 담징의 마음은 심란했습니다.

 

‘아, 나는 과연 언제면 다시 이 길을 돌아올 것인가! 외적의 준동이 심하고 나라안팎은 소란하기 그지없는데…’

 

오래전부터 호시탐탐 침략의 기회를 노리던 당나라의 준동이 근간에 와서는 더욱 잦은데 이 땅, 이 집을 뒤에다 두고 원수의 목에 칼 한번 대여보지 못한 채 장삼을 입고 기약 못할 길을 떠나려니 더욱 발등이 밟혔습니다. 그러나 아니 갈 수 없는 길이었습니다.

 

일본의 초청은 이미 수락되고 자신은 왕의 어명을 받은 신하의 몸이니 달리 할 수 없는 일이 아닌가!

담징은 579년 평원왕이 집권하고 있던 시기에 태어났습니다.

어려서부터 남달리 그림에 호기심을 가지고 있었던 담징은 무엇을 하나 보아도 그저 스치지 않았으며 반드시 다시 한 번 재현해보고야 말았습니다. 그가 일찍이 중이 된 것도 그림에 뜻을 두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른 나이에 승려가 된 담징은 벌써 젊은 시절에 불교만이 아니라 유교교리까지 꿰뚫었고 기술 분야에도 조예가 깊은 인물로 명성이 났습니다.

 

이런 담징이 국왕의 어명을 받고 일본의 문화건설을 도와주기 위해 사랑하는 고구려 땅을 떠난 것은 610년 3월이었습니다. 그때 그는 30대의 장정이었습니다.

 

유구한 역사와 문화를 자랑하는 우리 민족은 오랜 옛날부터 인류문화의 공동적 보고에 크게 기여한 창조와 발명의 전통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이전시기에도 그러했지만 삼국시기에만 해도 동방에서 가장 앞섰던 우리 민족은 이웃나라들의 기술과 예술발전에 커다란 영향을 주면서 성심성의로 도와준 사실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중국과 일본의 역사기록에도 수다히 남아있습니다.

 

백제의 학자 왕인은 일본에 건너가 글 모르던 그곳 사람들에게 처음으로 천자문을 가르쳤고 고구려의 중이며 의사인 혜자는 야마토 왕권의 집권자 성덕태자의 스승으로 활동했다고 합니다.

 

담징 역시 일본의 거듭되는 초청으로 그곳에 건너가 대고구려를 빛낸 화공이었습니다.

 

당시 일본으로 말하면 그들이 자랑하는 이른바 아스카문화가 고조기에 이른 때였습니다. 이 아스카문화 역시 백제로부터 불교가 처음으로 들어가고 삼국과의 문물이 교환되면서 우리의 학자, 기술자, 예술가들에 의해 시작되고 이룩되었습니다.

 

특히 고구려회화문화는 일본의 고대, 중세미술발전의 밑천으로 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다카마즈무덤벽화, 법륭사 금당벽화, 친수국 바탕그림들만 놓고 보아도 잘 알 수 있습니다. 무덤벽화들에 그려진 인물형상은 아래바지, 허리에 띠를 맨 겉옷, 머리에 쓴 두건 같은 것은 고구려 사람들과 꼭 같습니다.

 

더욱이 힘이 넘쳐 나고 그런가 하면 매우 섬세하면서도 우아한 필치의 형상수법들은 고구려의 회화예술이 일본에 건너간 것임을 설명 없이 그대로 보여 주는 산 실물입니다.

 

담징이 일본으로 건너 갈 당시는 추고천왕(여천왕) 스미코의 사위인 성덕태자가 나라를 다스리고 있던 시기였습니다. 나라의 문화건설에 큰 관심을 돌리고 고구려의 발전된 문화를 받아들이기에 힘쓰던 성덕태자는 백제의 사원건축가들을 초빙하여 근 8년간에 걸쳐 가장 큰 법당인 법륭사를 지어놓았습니다. 담징은 바로 이 법륭사의 벽면 벽화장식을 위해 일본으로 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법륭사는 금당(황금으로 장식됨) 중심 불전과 5층탑, 중문, 회랑으로 꾸려지고 그 옆에는 동. 서, 북으로 실들과 강당이 배치되었으며 또 고루와 종루를 비롯하여 훌륭히 건설된 절간입니다. 그래서 이 건물벽화를 아무에게나 맡길 수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불교경전에 능통하고 그림과 채색에 뛰어났으며 또한 종이와 색감제작에서 기술자로 이름이 났던 담징이 바로 사원벽화를 담당하게 되었습니다.

 

담징이 일본에 도착하자 성덕태자는 자기의 거처인 왕궁으로 이들 일행을 반갑게 맞아들였고 저들의 스승으로 높이 모셨으며 법륭사에 자리를 잡도록 했습니다.

 

“고구려스님에게 불편이 없도록 하라!”

성덕태자는 고행과 수도에 그들이 마음대로 드나들도록 허가했고 일본의 이름난 중이었던 호오죠오와 기거를 같이 하도록 했습니다.

 

장대한 체구에 꾹 다문 입, 시원스런 걸음걸이, 늘어진 가사 자락을 한손으로 올려붙인 채 법륭사를 한 바퀴 돌아 본 담징은 머리를 끄덕이며 깊은 사색에 잠겼습니다.

담징은 먼저 벽화창작을 위한 준비부터 했습니다.

그는 종이, 먹, 물감제조기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물론 일본에도 일부 문방구들과 기재들이 준비되어 있었지만 그 모든 것이 그의 눈에 들지 않았습니다.

 

담징은 모든 것을 처음부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을 시켜 먼저 질 높은 먹을 갖추도록 기술적인 지도를 주었고 손수 색감들을 하나하나씩 제조했습니다. 그리고 또한 일본에서는 그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희한한 종이도 만들어 냈습니다.

 

그뿐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연애’라고 이름 지은 훌륭한 물차를 만들었습니다. 이 물차가 만들어짐으로써 사람의 힘이 아니라 흐르는 물의 힘을 이용하여 불상조각과 금속공예품을 만들어내는 데서 하나의 개변이 일어났습니다. 특히는 농민들이 곡식을 제분하고 수공업자들이 광석을 분쇄하는데서 혁신이 일어났습니다. 이 희귀한 사실에 일본원주민들은 담징을 ‘고구려스님’이라고 존대했습니다.

 

“정말 신묘하지요.”

“글세, 말이외다. 우린 생각도 못했는데 고구려스님이 이런 것을 다…”

이 고구려스님이 바로 힘겨웠던 저들의 노동을 수월하게 만들어준 것이었습니다. 하기에 다시없는 은인으로, 위인으로 우러렀습니다.

 

담징이 일본 땅에 건너 간지도 근 2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습니다. 이제는 어지간히 준비도 갖추어졌습니다. 법륭사의 주지를 비롯한 그곳 승녀들은 이제나저제나 하면서 그가 빨리 붓을 들기만을 초조하게 기다렸습니다.

 

하지만 담징은 선뜻 일에 달라붙지 않았습니다. 어쩐지 생각은 두고 온 대동강기슭의 금잔디 밭으로만 달려갔고 고국에 있을 때의 아름다운 추억들이 꼬리를 이어 떠올랐습니다.

 

‘아, 벌써 이태가 되었구나. 모든 것이 무고한지. 그 무슨 변고라도 없는지.’

 

이즈음 일본의 중들 속에서는 담징이 저희들의 땅에 온지도 퍽이나 지났는데 그림은 그리지 않는다고, 아무래도 수상하다는 말들이 나는가하면 승적에도 없는 건달 승이어서 다른 재간은 있어도 그림만은 그릴 줄 모른다고까지 수군 수군댔습니다. 이 흉흉한 분위기에 어느 날 고구려에서 함께 떠난 법정이 이젠 붓을 들어야 하지 않겠는가고 조용히 권고했습니다.

 

담징은 근엄한 표정으로 천천히 대답하는 것이었습니다.

 

“건달 승이란 말은 열백 번 듣겠소만 나라를 모르는 중이라는 말은 죽어도 듣지 못하겠소. 내 나라 대고구려를 위해서라면 어떤 일도 주저하지 않을 담징임을 대사도 부디 알아주오.”

 

그는 시름겨운 눈으로 먼 서쪽하늘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순간 법정대사의 머리에는 언제인가 담징과 함께 길을 걸을 때 하던 그의 말이 불시에 떠올랐습니다.

 

“우리는 고구려 사람이다. 그러니 부처를 믿어도 고구려를 위해 믿어야 한다. 부처만 알고 제 나라를 모른다면 부처의 종일뿐 고구려 사람은 아니다.”

 

과연 옳은 말입니다. 담징은 이런 사람이었습니다.

 

나서 자란 고향과 그 땅에 대한 그리움으로 하여 잠을 이루지 못하던 어느 날 밤 담징은 이미 정제해놓은 채색감들을 하나하나 검열해 보고 벽면에 마주 섰으나 어쩐지 마음만은 개이지 않았습니다. 몸은 비록 타국에 있어도 언제나 마음만은 바다건너 고구려에 가 있었습니다.

 

요즈음 들리는 소문이 외적들이 쳐들어와 고구려는 시련을 겪고 있다고 했습니다. 물론 대고구려는 적을 지경 밖으로 반드시 내몰고 승리의 큰 북을 울릴 것이지만 아무튼 힘겨운 싸움을 하리라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습니다.

 

마침 법륭사 주지가 숨 가쁘게 달려오더니 그를 얼싸 안으며 염치없이 고구려에 쳐들어갔던 외적들이 가랑잎 같이 흩어지고 몰살되었다는 기적 같은 소식을 전해 주었습니다.

 

주지는 두 손을 모으고 손목의 염주를 매만지며 아뢰는 것이었습니다.

 

“대사님, 군사들이 전장에서 대고구려의 명예를 떨쳤으니 담징대사님은 화필로써 명성을 떨쳐야 하나이다. 법륭사에 영광을 베풀어 주소이다.”

주지는 진심으로 기뻐하며 인사를 드렸습니다.

승전의 소식은 쓸쓸하던 담징의 마음을 높뛰게 했습니다.

‘아, 대고구려는 이겼구나. 끝끝내 동방강대국의 이름을 떨치고야 말았구나. 이제 내 무엇을 아끼고 주저하랴. 대고구려의 빛발로 해외만방을 밝히는 이 성업에 한 몸을 바치리라.’

 

드디어 담징은 큰 붓을 들었습니다. 법정대사가 숭엄한 자세로 금당 출입문을 지키고 서 있을 뿐 주변은 쥐 죽은 듯 고요했다. 이렇듯 온몸이 그대로 고구려의 넋이 되어 낮과 밤이 따로 없이 담징은 벽화를 그려나갔다.

 

힘 있게 긋고 또 찍고 채색을 먹이고… 마지막 붓을 놓았을 때 담징은 금당바닥에 뿌리를 내린 듯 그 장대한 체구가 움직일 줄 몰랐습니다.

벽화의 완성을 보려고 발 벗고 달려온 주지와 승려들도, 함께 동행 했던 고구려의 중들도

‘아!’ 하는 탄성을 지를 뿐 다른 말을 잇지 못했습니다. 과연 명화에 또 명화였습니다.

 

금당 벽의 열두 폭 불교관계의 크고 작은 그림들과 천정 밑의 20여개 작은 벽면에 두 개씩 그려놓은 비천(하늘을 나는 선녀) 그림들은 그야말로 대황홀경이었습니다.

 

반듯한 흙벽 위에 모래와 수사(풀)를 바르고 또다시 아마와 둘을 섞어 매질한 후 그 위에 백토를 칠하여 티 없이 매끈한 면을 마련하고 그려나간 불교교리를 내용으로 하는 6편의 ‘아미타여래상’은 구도가 대칭적이면서 성격이 특색 있게 살아난 것으로 하여 더욱 이채로웠습니다. 특히 장방 안 연꽃방석 위에 위엄 있게 틀고 앉은 주인공의 모습은 예술적 처리에서 매우 정확한 것으로서 승려들과 화공들의 경탄을 자아내도록 했습니다.

 

또한 가는 선으로 연두색, 연한 붉은색, 곤청색, 재빛색을 조화롭게 먹여나감으로써 그 화려함이란 이를 데가 없었습니다.

 

단숨에 그어 내린 굵고 진한 선, 가늘고도 연한 선으로 성격을 살리고 운동감을 드러낸 인물들의 각이한 형상, 형태를 사실적으로 똑똑히 하면서도 미묘한 움직임마저도 하나같이 놓치지 않은 선묘운필의 묘미, 어디까지나 격조 높은 벽화예술의 높은 경지를 이룬 이 조화는 그 앞에 선 사람들의 마음을 금시 숭엄하게 만들었습니다.

 

완전히 넋을 잃은 주지는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바닥에 합장한 채 엎드려 ‘관세음보살’을 속으로 외우고 또 외우며 손을 비벼댈 뿐이었습니다.

 

담징 역시 외적을 보기 좋게 물리친 조국 고구려에 대한 생각으로 벽면을 향해 ‘남무관세음보살’하고 조용히 되뇌며 마음에 손을 얹습니다.

 

고구려의 이긴 싸움이 그에게 힘을 주고 붓을 들게 했던 것입니다. 만약 그 폭풍 같은 희소식이 전해지지 않았던들 담징은 아직도 시작을 못한 채 망설이고만 있었을 것이 아닌가!

 

“이 벽화는 세상에서 더는 찾아 볼 수 없는 그림이요. 담징대사의 그림솜씨는 참으로 신비롭소이다.”

주지를 비롯하여 모든 승려들이 입을 모아 연해연방 추어 올렸습니다. 하지만 담징은 조용히 뇌이었습니다.

 

“이 벽화가 잘되었다면 그것은 나의 화법이 신비로워서가 아니라 바로 고구려의 얼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요. 그 어떤 대적도 감히 굽힐 수 없는 슬기롭고 지혜로우며 용감하고 강의한 고구려 사람들의 얼이 있어 이 벽화가 완성되었음을 알아야 할 것이요.”

과연 이 벽화야말로 담징의 숭고한 애국의 산물이었습니다.

벌써 가사를 걸친 주지가 목탁을 두드리고 수많은 승려들이 합장배례를 하고 또 한다. 은은한 향불의 유연한 연기 속에 담징은 대고구려의 아들임을 온몸으로 느꼈습니다.

이와 같이 법륭사의 벽화는 담징에 의하여 훌륭히 마련되었습니다.

법륭사의 금당벽화는 신라의 경주 석굴암, 중국의 운강석굴과 함께 동양3대걸작중의 하나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법륭사의 벽화는 동방미술사는 말할 것도 없고 세계미술사에서도 특이한 자리를 차지하며, 더구나 이는 일본의 회화미술의 첫 장을 이루는 명화로 꼽히고 있습니다.

 

이 벽화는 창작된 때로부터 천 수백여 년이 지났으나 색 하나, 선 하나 변함없이 그대로 보존되어 세계적인 보물로 미술가들의 찬탄의 대상으로 되어왔습니다.

 

그러던 중 1949년 1월 법륭사가 불타면서 금당의 벽화를 잃게 되었습니다.

그 후 1968년 수많은 일류급 화가들이 최상의 자재로 다시 복원해놓았다고 하지만 원화를 살리지 못했다고 그들 자신이 말하고 있습니다. 고구려의 담징이 그린 벽화는 그만큼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Posted by 원주유
고구려 역사와 문화2013. 9. 14. 16:22

 

 

삼국통일의 기반을 다진 북한산성 전투 

역사는 가정이 없다. 역사적 사실만이 있을 뿐이다. 그런데도 대다수 국민들이 원하는 역사의 가정이 있다. 그것은 바로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지 않고 고구려가 삼국을 통일했으면 하는 것이다. 고구려가 삼국을 통일했으면 저 드넓은 만주가 우리의 영토일뿐만 아니라 강력한 국력을 갖춘 고구려로 인해 우리의 역사는 강대한 역사로 자리매김했을 것이란 것이다. 하지만 역사는 정말 가정이 없다. 그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661년 고구려의 뇌음신(惱音信) 장군이 신라의 영토였던 북한산성을 함락시켰다면 우리 역사는 어떻게 바뀌었을까? 한번 역사의 현장으로 들어가 보자.

 

660년 황산벌에서 계백과 5천결사대의 거룩한 투쟁은 흔적 없이 사라지고 백제는 나당연합군에 항복하고 말았다. 하지만 만주를 누비던 부여족의 후예인 백제는 자신의 나라를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일본에 가있던 부여풍이 백제로 돌아와 부흥운동을 주도하면서 신라는 한강 위쪽의 고구려군을 대비하면서 백제의 부흥세력들과 새로운 전쟁을 치뤄야 했다.
이 시기 고구려는 새로운 구상을 하고 있었다. 고구려의 집권자인 연개소문은 신라와 당나라를 두려워하는 존재가 아니었다. 그는 이미 세계 최강의 제국인 당나라와 수많은 전투에서 패배를 알지 못했던 인물이었다. 645년 당 태종이 친히 대군을 이끌고 침입했을 때 직접 고구려군을 지휘해 개모성·요동성·백암성에서 적에게 큰 타격을 가하고 마침내 안시성 혈전에서 88일 동안의 공방전 끝에 당군을 격퇴했기 때문이다. 그는 이후에도 4차례나 당나라 침입을 받았으나 이를 모두 막아내며 당나라로 하여금 고구려의 두려움을 알게 해줬다.

 

하지만 고구려는 당나라와 15년 동안의 전투로 엄청난 국력의 손실이 있었고 더구나 나당연합군에 의해 백제가 멸망당하기에 이르렀으니 긴장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따라서 연개소문은 고구려를 삼키고자 다가오는 신라를 아예 선공하는 게 효과적이라고 판단했다. 더구나 백제 지역에서 왕자 부여풍과 흑지상지가 이끄는 백제부흥군이 신라를 괴롭히고 있어 한강 유역을 공격하기에는 최적의 기회였다. 연개소문은 당나라와의 처절한 투쟁을 승리로 이끈 주역의 한사람이자 말갈족으로부터 신임이 두터웠던 뇌음신을 사령관으로 임명하고 고구려군과 말갈군과의 연합군을 편성했다. 뇌음신은 연개소문이 정변을 일으킬 때 군사 500여명을 거느리고 그를 도왔으며 훗날 고구려와 당나라와의 전쟁이 시작됐을 때 현토성주로 당군을 패배시켰던 고구려의 영웅이었다. 한편 말갈족은 이미 연개소문 위용에 눌려 그 용맹스러움을 고구려군과 함께 하고 있었다. 훗날 말갈족이 고구려 후예 대조영과 함께 당나라와 투쟁, 진국(辰國:훗날 발해)을 건설한 건 이때부터 형제의 맹약이 있었기 때문이다.
661년 연개소문의 명을 받은 뇌음신은 말갈의 장군 생해(生偕)와 연합, 신라 술천성을 공격했다. 술천성은 지금의 경기도 여주땅으로 한강 일대에서 가장 중요한 거점이었다. 여주를 장악하면 한강을 타고 두물머리(양수리)로 올라가 북한강와 남한강을 모두 이용해 신라 영토 모두를 공격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남한강을 굽이 바라보고 있는 파사산성은 함락당할 곳이 아니었다. 지형상의 불리함을 극복하지 못한 뇌음신은 전략적 후퇴를 단행하고 신라군의 주력 부대가 있는 북한산성으로 말발굽을 돌렸다. 이것이 차라리 고구려다운 방식이었다. 아예 최강의 군사들끼리 맞붙어 멋지게 자웅을 가려보자는 것이었다.
당시 북한산성 성주는 동타천으로 대사(大舍) 지위에 있는 장군이었다. 동타천에 대한 상세한 기록이 ‘삼국사기’에 나타나진 않지만 신라 국경 최대 전략적 요충지인 북한산성을 지휘하고 있던 것으로 미뤄 뛰어난 무공과 지략을 지닌 인물이었을 것이다.

 

동타천은 성곽 바깥으로 철질려(마름쇠)를 깔아 사람과 말 등이 다니지 못하게 했다. 고구려군이 성곽 근처로 다가오는 것을 차단하기 위해서였다. 이 작전은 성공해 고구려군의 접근을 차단했다. 하지만 뇌음신은 새로운 공격기법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바로 포차(抛車)를 이용하는 것이었다. 영화에서 나오는 것처럼 성곽 바깥에 포차를 설치, 거대한 돌을 산성 안으로 쏘아 보냈다. 고구려군의 20여일 동안의 거친 공세로 드디어 신라군은 더 이상 버틸 힘이 없었다. 고구려군은 고구려군대로, 신라군은 신라군대로 자신의 조국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 우리 역사상 가장 멋진 전투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전쟁의 승패는 전혀 뜻하지 않은 곳에서 발생했다. 고구려군이 승리로 끝날듯한 전투였지만 승리의 여신은 끝내 고구려군을 외면했다. 전투 막바지 별안간 큰 별이 고구려군 진영에 떨어지고 번개와 벼락 등이 치며 큰 비를 퍼붓는 돌발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이 한순간 고구려군과 신라군의 사기는 뒤바뀌고 하늘의 뜻이 고구려에 있지 않고 신라에 있음을 깨달은 뇌음신은 철군을 결정했다. 만약 마지막 순간 벼락과 천둥 등이 치지 않았다면 어찌 됐을까? 만약 그렇게 됐다면 아마도 북한산성 전투는 고구려군의 승리로 끝나고 한강 유역을 다시 차지한 고구려군은 오히려 신라를 제압하고 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하늘은 신라를 택했고 실제 역사 역시 신라군의 승리로 끝나고 말았다. 661년 북한산성 전투는 바로 신라의 삼국통일을 하늘이 선택한 역사의 사변이었고 그것이 바로 가정이 아닌 역사의 현실이다.

 

고구려 명장 강이식장군

고구려 명장.세계 전쟁사에 유례없는 전승기록이 있다. 6세기 세계 최강대국 중국이 16년에 걸쳐 4차례나 침략전쟁을 일으켰으나 고구려는 이를 모두 물리치고 대승을 거두었다. 고구려 병마원수 강이식(姜以式) 장군. 그는 일명 임유관 대첩으로 불리는 수나라의 1차 침략전쟁에서 30만 대군을 5만 정예부대로서 궤멸, 서전을 장식하며 고구려인의 기개와 용맹을 만천하에 떨쳤다.

그동안 강이식 장군은 잘 알려지지 않았었다. 중국의 왜곡된 역사관과 고구려사를 다룬 삼국사기의 저자 김부식의 사대주의로 인해 역사에서 누락되었기 때문이다. 근세에 들어와 일부 문헌을 비롯하여 그를 시조로 모신 진주 강씨 문중 족보 기록과 중국 현지 유적 등을 토대로 강이식 장군에 대한 실증 작업이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다.

진주강씨(晉州姜氏)의 족보에 그 시조로 알려진 인물이지만『삼국사기』와『구당서』등 국내외 정사(正史)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 597년(영양왕 8) 수(隋)나라가 중국 대륙을 통일하고 고구려를 신속시키고자 무례한 국서(國書)를 보내오자 강이식은 “이러한 오만무례한 국서는 붓으로 답할 것이 아니라 칼로 대답해야 한다”면서 주전론을 제창하였다. 이후 고구려 조정 여론이 주전론 쪽으로 가닥을 잡자 수 문제가 고구려를 본격적으로 침공함에 따라 여·수전쟁(麗隋戰爭)이 발발하였다. 이때 강이식은 고구려의 최고 사령관인 병마원수(兵馬元帥)를 맡아 정병 5만을 이끌고 이 전투에 참가하였다.

 

이듬해(598) 대병력을 이끌고 요서(遼西)로 나아가 요서총관(遼西總管) 위충(韋沖)과 접전하다가 임유관(臨硝關: 현 산해관의 남서 지역)으로 거짓 후퇴하였다. 이에 수나라의 문제(文帝)는 30만 대군을 들어 한왕(漢王) 양량(楊諒)을 행군대총관(行軍大總管)으로 삼아 임유관으로 보내고, 주나후(周羅?)를 수군총관(水軍總管)으로 삼아 바다로 출행시키면서 평양으로 출전한다고 선언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계략은 양선(糧船)을 이끌고 요해(遼海)로 들어와 양량의 수나라 대군에게 군량을 공급해주려는 속임수 전략이었다. 병마원수인 강이식은 이를 간파하고 수군으로 바다에 나아가 주나후의 군량선을 격파하였다. 이어 군중(軍中)에 벽루(壁壘)를 지키라고 명하여 출행하지 않으니 수나라 군사들은 양식이 점차 떨어지고, 그때가 마침 6월 장마철이라 기아·질병으로 인하여 수군의 사기는 극도로 저하되었다. 이 때를 기회로 강이식은 총공격을 가하여 수나라 군사들을 거의 섬멸하고, 군자(軍資)·기기(器機) 등을 노획하는 큰 전과를 올렸다.

강이식이 진두지휘한 임유관전투의 대승리로 인하여 수나라 문제 정권은 몰락하였으며, 고구려가 요동 지방을 안전하게 확보한 채 대수전쟁을 준비할 수 있게 되었다.

강이식의 묘는 심양현(潘陽縣) 원수림(元帥林: 현 만주 봉길현 원림역 앞)에 있다. 경상남도 진주시 상봉서동 봉산사(鳳山祠)에서는 해마다 음력 3월 10일에 그를 제향하고 있다. 신채호(申采浩)의『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에 강이식 장군의 활동 모습이 실려 있는데, 지금은 전하지 않는『서곽잡록(西郭雜錄)』과『대동운해(大東韻海)』에 실린 것을 인용하였다.

 

세계 최강 당나라를 패배시킨 고구려 장군 양만춘(楊萬春.?∼?)

생몰년 미상. 고구려시대의 명장. 보장왕 때의 안시성(安市城) 성주이다. 그의 이름은 역사서에는 보이지 않고 ‘안시성 성주’로만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송준길(宋浚吉)의 동춘당선생별집(同春堂先生別集)과 박지원(朴趾源)의 열하일기(熱河日記)에 의하면 양만춘(梁萬春) 또는 양만춘(楊萬春)으로 밝혀졌다.

그는 지금의 만주 요령성(遼寧省) 해성(海城)의 동남쪽에 위치한 영성자산성(英城子山城)으로 추정되는 안시성의 성주였다. 안시성은 지리적으로 험한 곳에 자리 잡은 전략적 요충지일 뿐 아니라 군사들 또한 정예한 것으로 정평이 나 있었다. 그는 연개소문(淵蓋蘇文)이 정변으로 정권을 장악했을 때, 집권자인 연개소문에게 복종하지 않았다. 이에 연개소문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안시성을 공격했으나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이에 따라 연개소문은 결국 안시성 성주의 직책을 그대로 맡겼다. 이는 그가 용기와 소신 있는 인물이었음을 시사해 준다.

645년(보장왕 4) 당나라 태종은 대군을 동원해 고구려를 침공하였다. 당나라 군대의 주력부대의 침공으로 요동지역에 있던 개모성(蓋牟城: 撫順 부근)과 비사성(卑沙城: 大連灣 北岸)이 함락되었다. 이어 당나라 태종의 지휘로 요동성(遼東城: 遼陽)과 백암성(白巖城: 遼陽 동남)도 당나라 군대에 함락되었다. 당나라 군대는 다음 공격목표를 놓고 수뇌부 사이에 이견이 있었으나, 이세적(李世勣)의 건의로 안시성 공격을 시도하였다. 이 때 고구려는 당나라 군대에 포위된 안시성을 지키기 위해 15만 병력을 출동시켰으나 안시성 근처 8리 지점에서 대패하고 말았다.

 

고립무원의 상황에 처한 안시성에서 그를 비롯한 병사와 주민들은 하나로 뭉쳐 완강히 저항하였다. 안시성 공격이 여의치 않자 당나라 군대는 공격목표를 그보다 훨씬 동남쪽에 있는 오골성(烏骨城: 만주 鳳凰 남쪽의 高麗山城)으로 변경하고자 논의하였다. 그러나 안시성을 계속 공격하기로 의견이 모아져 치열한 공방전이 전개되었다. 당나라 군대는 연인원 50만 명이 동원되어 60여 일 동안 높은 흙산을 쌓아, 이를 발판으로 성을 공격하였다. 당시 당나라군대는 하루에 6, 7회의 공격을 가하고 마지막 3일 동안은 전력을 다해 총 공세를 펼쳤으나 끝내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마침 9월에 접어들어 요동의 날씨가 추워지기 시작했고, 군량 또한 다하자 당나라 태종은 포위를 풀고 철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때 그는 성루에 올라 송별의 예(禮)를 표하고, 당나라 태종은 그의 용전을 높이 평가해 비단 100필을 주면서 왕에 대한 충성을 격려하였다.세계 최강이라고 알려진 당태종의 군사를 결정적으로 패배시킨 안시성 전투는 고구려인의 기상과 자존심을 보여준 생생한 사건이었다.

고려 후기의 학자인 이색(李穡)의 정관음(貞觀吟)이라는 시와 이곡(李穀)의 가정집(稼亭集)에 의하면 당나라 태종이 눈에 화살을 맞아 부상을 입고 회군했다고 한다. 고구려 멸망 뒤 당나라에 반대해 끝까지 저항한 11성(城) 가운데 안시성이 포함된 것으로 보아, 그의 생존여부는 알 수 없지만, 그의 기백과 용기가 고구려 부흥운동으로 계승되었음을 알 수 있다.

 

 

 

 

 

 

 

 

 

 

 

 

 

 

 

 

 

 

 

 

 

 

 

Posted by 원주유
신라 역사와 문화2013. 9. 14. 15:23

 

 

전세계 왕들 중에서 가장 현면한 왕은 신라왕들이다?..과연 그러진 보실까요..

제41대 헌덕왕
혜충태자(제38대 원성왕의 장남)
성목태후 김씨 ․ 김씨, 언승, 생년미상 ~ 826년 
재위기간 : 809년 7월 ~ 826년 10월. 총 17년 3개월 
부인 : 1명 
자녀 : 2남
황아왕후 - 헌상, 장렴

헌덕왕은 원성왕의 태자 인겸의 아들이며, 성목태후 김씨 소생으로 소성왕의 동복아우이다. 이름은 언승이며, 소성왕이 죽은 뒤에 어린 애장왕이 왕위에 오르자 섭정이 되었다가, 애장왕 10년(809년)에 조카인 애장왕을 죽이고 왕위에 올랐다. 790년에 대아찬으로 임명되어 중국 당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으며, 다음해에는 제공의 난을 진압하는 데 가담하여 공을 세움으로써 잡찬이 되었다. 원성왕 10년(794년)에 시중에 임명되고, 그 다음해에 이찬으로서 재상이 되었으며, 796년에는 병부령의 자리를 맡게 되어 원성왕 말년부터 정치적인 기반을 갖추게 된다. 이러한 세력기반을 바탕으로 애장왕의 즉위와 함께 각간에 올라 섭정도 맡게 된다. 801년에 어룡성의 장관인 사신이 되었고 이어 상대등에 올랐다. 아우 수종이 시중의 위치에 있었던 809년에는 제옹과 더불어 난을 일으켰으며, 난중에 애장왕이 살해되고 언승이 왕위에 올라 헌덕왕이 되었다.

헌덕왕대의 정치는 함께 반정에 가담한 그의 아우 수종(흥덕왕)을 비롯하여 조카 제륭, 양종, 균정, 영공, 헌정 등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헌덕왕은 그들을 차례로 시중에 기용하며 조정을 장악하였다. 그 덕분에 헌덕왕 재위 10년까지는 조정이 비교적 안정된 편이었으나, 인사의 편중이 심한 탓에 불만 세력이 늘어났다. 특히 지방으로 방출당한 관리들의 불만이 팽배해져 지방 행정이 급격히 악화되었다. 그 때문에 재위 11년부터 지방 곳곳에 초적들이 일어났다. 헌덕왕은 모든 주와 군의 도독 및 태수에게 명하여 초적들과 전면전을 벌여 그들을 토벌하도록 했다. 이러한 어려운 상황 속에서 마침 당나라에서는 절도사이사도의 반란을 당하여 신라에 출병을 요청하였다. 헌덕왕은 816년에 김웅원으로 갑병 3만을 이끌고 반란의 진압을 돕도록 하였다.

국내외적 혼란이 계속되던 822년에는 집사시랑인 녹진이 충공을 찾아가 인재의 쓰임을 목재의 쓰임에 비유하여 인사 처리에 적절한 대책을 제언하였는데, 이때 녹진이 제시한 인사원칙은 왕당파에게 유리한 것으로 왕권에 반대하는 귀족에게는 불리한 것으로 이해된다. 이렇게 헌덕왕이 주도한 개혁정치에 반대하여 오던 귀족의 불만이 누적되어 822년 3월에 김헌창의 난이 일어난다. 선덕왕을 이어 아버지 김주원이 왕위에 올랐다면 헌창은 아마 왕좌에 앉아 있거나 왕위 계승자가 되어 있어야 했으나, 수년 동안 외직을 전전하게 되었고 그는 그런 현실을 비통해하며 일으켰다. 그동안 외직에서의 기반을 바탕으로 반군의 깃발을 들자 순식간에 무진, 완산, 청주, 사벌 등 네 주가 그의 수중에 떨어졌다. 그는 국호를 장안이라 하고 연호를 경운 원년이라 하여 스스로 왕을 청하며 반군을 이끌었다. 정부군의 진압 작전이 조직적으로 이뤄지면서 헌창의 부대는 곳곳에서 무너졌으며 헌창은 패배를 만회할 수 없음을 알고 자결하였다. 헌창이 죽자, 그의 부하가 그의 머리와 몸을 베어 각각 따로 묻어 두었다.

한편, 웅진성을 무너뜨린 정부군은 헌창의 무덤을 찾아내 그의 시신을 다시 칼로 베고, 그의 친족과 도당 239명을 죽였다. 하지만 헌창의 아들 범문이 겨우 목숨을 건져 825년 정월에 다시 부하들을 이끌고 북한산주를 공격했다. 그는 그곳에 도읍을 세우고 나라를 개국할 생각이었지만, 패배하여 처형되고 말았다. 헌덕왕도 그 이듬해 10월에 생을 마감했는데, 장지는 천림사 북쪽이다.

제42대 흥덕왕
혜충태자(제38대 원성왕의 장남)
성목태후 김씨 ․ 김씨, 초명은 수종, 개명은 경휘, 생년미상 ~ 836년 
재위기간 : 826년 10월 ~ 836년 12월. 총 10년 2개월 
부인 : 2명 
자녀 : 1남
정목왕후 김씨 - 능유

후비박씨

흥덕왕은 원성왕의 태자 인겸의 셋째 아들이며, 성목태후 김씨 소생으로 소성왕과 헌덕왕의 동복아우이다. 초명은 수종이었다가 왕위에 오른 뒤에 경휘로 고쳤다. 그는 형 헌덕왕과 함께 조카인 애장왕을 죽이는 데 가담하여 이찬이 되었고, 헌덕왕 11년(819년)에 상대등이 되었다. 그리고 822년에는 부군에 책봉되어 왕위 계승권을 확보한 뒤, 826년 10월에 헌덕왕이 죽자 왕위에 올랐다. 당시 헌덕왕은 왕자가 여럿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조정을 장악하고 있던 동생인 그를 부군으로 책봉하여 왕위를 계승토록 했다. 즉위하면서 흥덕왕은 정치개혁을 시도했는데, 827년에 명활전을 설치하였다(914년에 설치되었다는 설도 있다). 829년에는 원곡양전을 설치하였으며, 집사부를 집사성으로 고쳤다. 이때의 개혁은 김헌창의 난으로 어지러워진 왕실을 정리하고, 신라 왕실의 귀족세력을 억제시켜 왕권강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834년에 모든 관등에 따른 복색, 거기, 기용, 옥사 등의 규정을 반포하였다. 이 규정은 왕이 당시 사치풍조를 금지시키기 위하여 발표한 것이라 하지만, 그 내면에는 골품간의 계층구별을 더 엄격히 하고자 하는 귀족들의 요구가 바탕이 된 것이었다. 이 규정에서는 진골과 육두품을 비롯한 여하의 귀족이나 평민과의 차별을 더 뚜렷이 하고 있다는 점에서, 진골세력에 대한 배려를 깊이 깔고 있음을 짐작해 볼 수 있다. 그 밖의 치적으로 변방에 진을 설치한 것과 불교에 대한 관심을 들 수 있다. 우선 828년에 궁복(장보고)이 중국 당나라의 서주에서 소장으로 활약하다가 귀국하였으므로 1만 명의 병졸로써 지금의 완도에 청해진을 설치하게 하였다. 다음해에는 당은군에 당성진을 설치하였다. 그리고 827년에는 중 구덕이 당나라로부터 경전을 가지고 들어왔으며, 830년에는 도승 150명을 허가해주었다. 한편, 828년에는 사신으로 당나라에 갔다 돌아온 김대렴이 차 종자를 가지고 돌아오니 흥덕왕이 지리산에 심게 하여 성하게 되었다. 재위기간 중 사랑하는 아내와 자식을 잃고 병마에 시달리던 흥덕왕은 끝내 병마를 이겨내지 못하고, 재위 11년(836년) 12월에 죽었다. 능은 안강 북쪽 비화양에 마련되었으니, 그의 유언에 따라 정목왕후의 능에 합장된 것이다.

제43대 희강왕
포도부인 박씨 ․ 김씨, 제륭 또는 제옹, 생년미상 ~ 838년 
재위기간 : 836년 12월 ~ 838년 정월. 총 1년 1개월 
부인 : 1명 
자녀 : 2남
문목왕후 김씨 - 의종, 계명(제48대 경문왕의 아버지)

희강왕은 원성왕의 손자인 이찬 김헌정의 아들이고, 어머니는 포도부인 박씨이다. 이름은 제륭또는 제옹이라고 하며, 헌덕왕과 함께 애장을 제거하는 데 가담하여 권좌에 올랐다.
836년 12월에 흥덕왕이 후계자를 정하지 못하고 죽자, 신라 조정은 왕위 계승권 다툼에 휘말렸다. 흥덕왕의 종제 균정과 조카 제륭이 서로 파벌을 형성하여 왕위를 차지하려고 했던 것이다. 이에 시중인 김명과 아찬 이홍, 배훤백 등은 제륭을 받들고, 아찬 김우징과 조카인 예징 및 김양은 균정을 받들었다. 그들은 흥덕왕의 죽음이 임박하자, 각기 군대를 이끌고 대궐로 들어가 전쟁을 벌였는데, 그 와중에 김양이 화살에 맞아 부상을 입었다. 그 바람에 제륭파가 승세를 굳혔고, 균정은 살해되었으며 김양과 우징은 달아났다.

제륭은 왕위에 올라 우선 사형수 이외의 죄수를 모두 사면하여 자기의 왕위 계승을 전국에 알렸다. 또 아버지 김헌정을 익성대왕에, 어머니 박씨를 순성태후에 추봉했다. 또 자기가 즉위하는 데 큰 도움을 준 김명을 상대등에 임명하고, 아찬 이홍을 시주에 임명하여 조정을 장악했다. 그와 싸우다 패배하여 달아나 장보고에게 의탁하고 있던 우징이 아버지 균정이 살해된 사실을 백성들에게 알련 반역을 선동하고 있어, 왕정은 쉽게 안정되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 김명과 이홍은 서로 짜고 군대를 일으켜 희강왕의 측근들을 대거 죽여 버렸다. 이에 겁을 먹은 희강왕은 자기도 살해당할 것을 염려하여 궁중에서 목매어 자살하니, 이때가 재위 3년째인 838년 정월이었다. 능은 소산에 마련되었다.

제44대 민애왕
김충공(제38대 원성왕의 손자)
귀보부인 박씨 ․ 김씨, 명, 생년미상 ~ 839년 
재위기간 : 838년 정월 ~ 839년 윤 정월. 총 1년 1개월 
부인 : 1명 
자녀 : 기록 없음
윤영왕후

민애왕은 원성왕의 손자 대아찬 충공의 아들이며, 귀보부인 박씨 소생이다. 이름은 명이며 헌덕왕 대로부터 여러 벼슬을 거쳐 희강왕을 보좌한 덕으로 상대등에 임명되었다가, 838년 정월에 시중 이흥과 함께 반란을 일으켜 왕위를 찬탈했다. 왕위에 오른 그는 아버지 충공을 선강대왕, 어머니 귀보부인을 선의태후로 추존하고 김귀를 상대등, 헌중을 시중으로 삼았다.

흥덕왕이 죽고 그 사촌동생인 균정과 5촌 조카인 제륭이 서로 왕위를 다투게 되었을 때, 시중인 김명과 아찬 이홍, 배훤백 등은 제륭을 받들고 아찬 우징과 조카 예징 및 김양은 균정을 받듦으로써, 한때 궁궐에서 서로 싸우게 되었다. 이 싸움에서 균정은 전사하고 김양이 화살을 맞아 우징 등과 더불어 청해진의 장보고에게 도망하여 의탁하였다. 싸움에 이긴 제륭이 즉위하였으나, 불만을 가진 김명이 이홍과 같이 다시 난을 일으키자, 희강왕은 자진하고 김명이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왕위에 오른 김명(민애왕)은 다시 균정계 세력의 도전을 받게 되었다. 838년 청해진에 의탁하고 있던 우징 등이 장보고의 군사 5,000을 이끌고 민애왕을 토벌하기 위하여 진격해왔다. 김양, 염장, 장변, 정년, 낙금, 장건영, 이순행 등이 우징을 받들고 있었다.

이해 12월 민애왕은 김민주 등을 파견하여 무주 철야현(지금의 나주 부근)에서 토벌군을 맞아 싸우게 하였으나 패배하고, 그 다음해 정월 달구벌(지금의 대구)에서의 싸움에서도 대패하였다. 민애왕은 청해진 군대가 밀려오자, 궁궐 서쪽 교외에 몸을 숨기고 있다가 병사들에게 살해되었다. 이때가 839년 정월 22일이니, 왕위에 오른 지 불과 13개월 만이었다. 장지는 알 수 없다.

제45대 신무왕
김균정(제38대 원성왕의 손자)
진교부인 박씨 ․ 김씨, 우징, 생년미상 ~ 839년 
재위기간 : 839년 윤 정월 ~7월. 총 6개월 
부인 : 1명 
자녀 : 1남
정종왕후 - 경웅(제46대 문성왕)

신무왕은 원성왕의 손자 균정의 아들이며 진교부인 박씨 소생으로 이름은 우징이다. 헌덕왕 14년인 822년에 김헌창의 난이 일어나자 대아찬의 벼슬을 받고 아버지 균정과 함께 토벌대를 이끌었으며, 흥덕왕 3년인 828년에 시중에 올랐다. 그리고 831년에 시중에서 물러났다가 3년 뒤인 834년에 다시 시중에 기용되었다. 835년에 아버지 균정이 상대등에 오르자, 부자가 함께 재상과 시중에 있을 수 없다는 이유로 물러났다. 836년에 헌덕왕이 죽자, 아버지 균정을 왕위에 앉히려 했으나, 재종 제륭(희강왕)에게 패배하여 청해진 장보고에게 의탁하였다. 838년에 희강왕의 김명(민애왕)에게 살해되고, 김명이 왕위에 오르자, 장보고 군대의 도움을 받아 김명을 제거하고 왕위에 올랐으나, 이때가 839년 윤 정월이었다.

신무왕의 즉위는 원성왕의 큰 아들인 인겸계와 균정계 세력의 대립에서 균정계가 승리하였음을 의미한다. 균정계가 승리한 데에는 청해진 세력과 이미 거세된 김주원계의 후손인 김양의 도움이 컸다. 즉위와 동시에 할아버지 예영을 혜강대왕, 아버지 김균정을 성덕대왕, 어머니 진교부인 박씨를 헌목태후에 추존하고, 아들 경웅을 태자로 삼았다.

신무왕은 즉위한 지 반년도 못 되어 죽었기 때문에 별다른 경륜을 펴지 못하였으나, 다만 그는 장보고나 김양에 대하여 배려하고 있었던 듯하다. 839년에 장보고를 감의군사로 삼아 식읍 2,000호에 봉하였다. 반면, 장보고도 이에 그치지 않고 딸을 왕비로 세우려 하였는데 이것은 청해진 세력이 강대해졌음을 알려준다. 신무왕은 장보고 등 왕권에 압력을 가하는 세력을 제압하여야 하는 과업을 앞두고 죽었다. 이때 죽위년 7월이었다. 능은 제형산 서북에 있다.

 

 

Posted by 원주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