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수대첩의 영웅 을지문덕
이름만 들어도 우와 소리가 나올만큼 우리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이름
그 중 오늘은 살수대첩의 영웅 을지문덕에 대해 살펴볼까 합니다
을지문덕하면 떠오르는 단어 살수대첩 입니다.
살수대첩은 을지문덕이 고구려의 영웅으로 만든 엄청난 전투였죠
수나라 군대가 우리 고구려 영토를 침략합니다
우문술은 부여도로 우중문은 낙랑도로 나와 제9군과 합류해 압록강에 이를때쯤
살수대첩의 영웅 을지문덕은 왕명을 받고 수나라에게 가서 항복을 하였습니다
이는 고구려의 작전 수나라 진영을 살펴보려고 한 살수대첩의 영웅 을지문덕의 작전이었다
살수대첩의 영웅 을지문덕은 억류 당하였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상서우승 유사룡이 굳이 풀어주라는 것이었다
결국 을지문덕은 풀려났고 작전은 성공했다
원정군의 큰 부담은 항상 보급이다 그것도 수나라대군을 지휘하려면 그 부담은 수배에 달한다
우문술과 우중문은 을지문덕을 데려오려 사람을 보냈지만 살수대첩의 영웅 을지문덕은 그들을 등뒤로 한 채
본국으로 돌아왔다
우문술은 보급이란 현실적인 고민을 하고있었다
우문술은 을지문덕의 작전에 완벽하게 놀아났다 수나라 병영에서 자중지란이 일어난 것 살수대첩의 영웅 을지문덕이 노린거짓 항복의 효과는 훨씬 컷다
마침내 화를 참지 못한 우중문은 10만의 병력을 가지고 이기지 못한다면 황제를 무슨 낯으로 보겠냐고 병사들을 꾸짖었다
우문술은 마지못해 압록강을 건너 쫒아갔다 여기서 살수대첩의 영웅 을지문덕의 두 번째 작전이 펼쳐졌다
수나라 군대가 굶주린 기색이 있음을눈치채고 더욱 피곤함에 지치게 하기위해 싸우는 척 패하는 척하며 후퇴를 반복하며 달아났다.
작전인지 상상도 못한 수나라 군대는 평양성 30리 밖까지 달려온 것 여름에 시작된 전쟁은 어느덧 가을을 지나고 수나라군의 힘은 다 빠져있었다
살수대첩의 영웅 을지문덕은 군사를 출병시켜 사면으로 공격을 개시하였다
수나라 군사들은 살수에 이르고 그곳은 수나라 군사들의 무덤이 되었다
7세기 동아시아 최대의 전쟁을 고구려의 승리로 이끈 위대한 군사전략가
우리 민족의 역사에서 외침(外侵)을 막아내고 국난(國難)을 극복한 대표적인 전쟁영웅(戰爭英雄) 세 명을 거론한다면 고구려(高句麗) 왕국의 을지문덕(乙支文德), 고려(高麗)의 강감찬(姜邯贊), 조선왕조(朝鮮王朝)의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을 이야기할 것이다. 이들 가운데서도 가장 위대한 전공(戰功)을 세운 최고의 영웅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한국인들은 대부분 이순신이라고 대답한다.
하지만 이순신이 활약했던 16세기 임진왜란(壬辰倭亂)보다 6세기 후반에 중원대륙을 통일한 수(隨) 제국이 모든 국력을 걸고 고구려를 침략했던 7세기 초반의 여수전쟁(麗隨戰爭)이 가장 규모가 크고 사상자가 매우 많았던 전란이라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612년 살수대첩(薩水大捷)으로 수조(隨朝)의 침략군을 격퇴한 을지문덕의 전공이야말로 우리 대외항쟁사(對外抗爭史)에서 가장 중요하고 의미가 컸다는 점을 깨달을 수 있다.
그러나 을지문덕은 우리에게 너무 암흑 같은 존재다. 역사 인물이 분명하지만 우리는 그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다. 그가 언제 태어나 어느 시기에 출장입상(出將入相)을 했으며 무슨 벼슬을 지냈는지, 심지어 언제 죽었는지도 모른다. 그의 아버지는 누구이며 그의 가문은 어떤 집안이었는지조차 알려져 있지 않다. 삼국사기(三國史記) 열전(列傳)에서도 을지문덕의 업적인 살수대첩에 대해서만 기술(記述)했을 뿐, 그의 개인 사료는 현재 남아있지 않는다. 야사(野史)로 분류되는 조대기(朝代記)·규원사화(揆園史話)·태백일사(太白逸史) 등과 해동명장전(海東名將傳)·고려을지공막리지제축문(高麗乙支公莫離支祭祝文) 등 조선왕조 시대의 문헌,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 선생이 1908년에 출간한 을지문덕전(乙支文德傳) 등만이 그와 관련된 설화(說話)를 전해주고 있을 뿐이다.
중국 정부는 2002년부터 2007년까지 동북공정(東北工程)을 진행하여 고조선·부여·옥저·고구려·발해를 우리 민족의 역사에서 분리시키고 심지어 신라나 고려마저 중국 변방의 소수민족이 세운 위성국가였다는 주장을 펼치며, 만주 지역에 대한 통치력을 강화하고 북한에 대한 영향력을 공고히 하기 위한 정치적 목적의 역사왜곡(歷史歪曲)을 추진하여 왔다. 동북공정은 공식적으로 완료되었지만 중국의 집권 공산당이 아직도 남한 측에 의해 주도되는 한반도 평화통일을 반대하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는 한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런데도 한국의 교육정책 책임자들은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더욱 우리 민족의 역사를 교육하는 일에 전력을 쏟아붓기는커녕, 대학입시에 별 도움이 안 되고 경제실용적인 학문이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역사 교육을 축소하여 선택과목으로 전락시켰다.
나관중(羅貫中)의 삼국지(三國志:三國志演義)는 중국 후한(後漢) 말기부터 위(魏)·촉(蜀)·오(吳) 삼국시대까지 중원대륙에서 일어났던 다양한 정치적·군사적 분쟁을 표현한 명대(明代) 초기의 장편소설로 오늘날까지 동양 사람들에게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고 있는 문학작품이다. 나관중의 삼국지에 가장 크게 열광하는 나라는 바로 대한민국이다. 한국인들이 중국인들보다 삼국지를 더 많이 사랑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서기 184년에서부터 280년까지 이르는 이 시기에 중원대륙에서 무수히 많은 영웅호걸들이 각자 독특한 캐릭터를 뽐내며 등장했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삼국지연의에는 사내들의 호승심(好昇心)을 자극하는 마력이 숨어 있다. 그래서일까? 이문열(李文烈)·정비석(鄭飛石)·김홍신(金洪信)·황석영(黃晳映) 등 국내 문학의 거두들은 마치 연례행사를 치르듯이 삼국지연의를 옮겨서 각색하는 글쓰기를 반복하였다.
이렇게 되니 나관중의 삼국지는 국내 대학 입시 논술고사의 단골 메뉴로 등장하게 되었고 “삼국지를 세 번 이상 읽지 않은 사람과는 친구로 사귀지 말라”는 괴상한 소리까지 나오게 되었다. 삼국지연의의 배경, 즉 1백여년간의 시기에 활동했던 제갈량(諸葛亮)·관우(關羽)·장비(張飛)·조운(曺雲)·곽가(郭嘉)·허저(許楮)·하후돈(夏侯惇)·서황(徐晃)·여포(呂布)·주유(周瑜)·감택(鑒澤)·황개(黃蓋)·주태(周泰)·여몽(呂蒙) 등은 잘 알지만 고구려사(高句麗史)에 불꽃을 피운 온달(溫達)·강이식(姜以式)·을지문덕(乙支文德)·연개소문(淵蓋蘇文)·양만춘(楊萬春) 등은 모른다. 적벽(赤壁)·허창(許昌)·건업(建業)은 줄줄 외우지만 비류수(沸流水)·건안성(建安城)·오골성(烏骨城) 등은 어느 나라 영토인지도 모른다. 삼국지연의는 모두 60년도 못 간 보잘것없는 나라였던 위·촉·오 중국 삼국시대의 역사는 알아도 7백년에서 1천년까지 사직(社稷)을 유지했었던 고구려·백제·신라 우리 민족의 삼국시대를 모르고, 심지어 우리 역사에서 가장 강력한 국력을 자랑했던 고구려의 역사마저 망각해가는 정신없는 백성만을 양산했던 것이다.
중국 정부는 고구려가 한국인들의 조상에 의해 건국된 나라였다는 사실을 부정하면서 만주는 물론이거니와 북한의 영토마저 한국인들의 문화적 종속권에서 제외시키기 위한 교활하고 치밀한 계획을 성공적으로 추진하고 있는데, 정작 한국에서는 자국 역사의 교육을 소흘히 하면서 중국의 삼국지연의를 소중하게 여기고 있으니 장래 우리 민족의 생존권을 과연 누가 무슨 방법으로 보장받을 수 있단 말인가?
중국은 세계에서 두번째로 광활한 영토를 가진 나라이며 지구촌에서 가장 많은 인구를 지닌 강대국이다. 지금의 티베트 지역과 신강유오이자치구(新疆維吾爾自治區)에서 벌어지고 있는 독립운동을 무력(武力)으로 탄압하며 조심스럽게 한반도 북부 지역에 대한 야욕을 드러내고 있는 중국은 연변조선족자치주(延邊朝鮮族自治州)를 완전히 중국의 세력권에 귀속시키기 위해 한반도에서 평화통일이 이루어지는 일을 방해하려고 갖은 공작을 꾸몄으며, 동북공정(東北工程)은 그러한 공작 가운데 하나였을 뿐이다. 일본 정부는 독도(獨刀)를 다케시마[竹島]라는 명칭으로 부르며, 1945년 태평양전쟁(太平洋戰爭)의 종전(終戰) 당시 미국에 의해 자국의 영토로 인정받았으나 한국에서 70년 동안 불법적으로 점거중이라면서 국제사법재판(國際司法裁判)을 통해 시비(是非)를 가리자고 주장하고 있다. 이에 대해 중국인들이 이 같은 일본 측의 입장을 적극적으로 지지함과 동시에 백두산(白頭山)이나 이어도(離於島)에 대한 영유권을 내세우는 이유는 무엇인가? 국제적으로 명분과 지지를 얻고 장차 정세가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전개된다면 한반도를 점령하겠다는 의도임에 틀림없다. 즉, 침략이다.
일본의 역사 교과서 왜곡 파문에 이어 중국의 동북공정까지 한국인들의 대외적 이미지가 크게 손상되고 우리 민족의 자주권 유지에 대한 명분이 심각하게 훼손당하고 있는 오늘날, 외침(外侵)으로부터 나라를 지키고 민족의 생존권에 대한 위협을 막아낸 구국간성(救國干城)의 영웅을 우리 민족의 역사에서 찾아내어 탐구하고 부각시키는 작업을 경기회복(景氣回復)에 직접적인 연관이 없다고 하여 하찮은 일로 치부해도 되는 것인가?
한반도를 강점하고 36년간 식민지 지배를 했던 일본 제국주의 세력은 1910년 8월에 경술병탄늑약(庚戌倂呑勒約)을 체결하기 전부터 한국침략의 정당성을 완성하기 위해 한사군 한반도 북부 위치설(漢四郡韓半島北部位置說)·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附設) 등을 만들어 역사를 날조하였다. 이 시기에 우리 민족의 고대사를 복원하여 일본인들의 역사왜곡(歷史歪曲)에 대응하고, 중원 세력과 대등하게 경쟁했던 자랑스러운 역사를 민중에게 가르쳐서 민족해방운동(民族解放運動)의 정신적 토대를 구축한 천재사학자(天才史學者)가 등장했으니 그가 바로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 선생이었다.
선생이 가장 중요시하게 여기고 연구했던 것은 우리 민족의 역사에서 가장 무력(武力)과 재력(財力)이 막강했던 시기인 고구려사(高句麗史)였으며, 그 가운데서도 선생이 매우 자랑스러운 영웅으로 숭상했던 역사인물이 바로 을지문덕(乙支文德)이었다. 그러나 선생께서 ‘우리 역사상 최고의 위인’이라며 극찬과 존경을 바친 을지문덕에 관련된 사료가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에 아무리 연구와 문장에 천부적인 자질을 갖추었던 선생이라고 해도 그의 전기를 쓰는 데 애를 먹을 수 밖에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선생은 을지문덕전(乙支文德傳)의 서론에서 “다행이구나, 을지문덕이여! 오히려 이 몇 줄의 역사가 전해 오고 있도다. 불행하구나, 을지문덕이여! 겨우 이 몇 줄의 역사만 전해 오고 있도다”라고 한탄했던 것이다.
우리는 학교에서 서양사(西洋史) 과목을 수업받을 때에 약소민족이 강대국의 침략을 물리쳐 승리한 대표적인 전쟁을 기원전 5세기의 그리스·페르시아 전쟁[Greco·Persian Wars]이라고 배웠다. 페르시아의 국왕 크세르크세스 1세[Khshayarsha]가 기원전 480년 50만 대군을 이끌고 그리스를 침공했을 때, 그리스 해군의 총사령관으로서 살라미스 해전[Battle of Salamis]에서 승리를 거두었던 테미스토클래스(Themistocles)는 고대의 역사인물 가운데 세계 최고의 영웅으로 평가받고 있다. 하지만 서기 7세기의 여수전쟁(麗隨戰爭)을 고구려의 승리로 이끌었던 을지문덕이야말로 아테네의 테미스토클래스보다 더 위대한 전공(戰功)을 세운 탁월한 군사전략가였음을 누구에게도 내세울 수 있고 또 자부할 수 있다.
우리 민족의 역사에서 자랑스러운 승리를 들추어내는 것은 조상들의 위대한 업적을 기림으로써 국민들에게 영웅을 숭배하는 마음을 고취시키고, 열성적이며 모험적이었던 고구려인들의 옛 발자취를 묘사하여 다시 영웅을 불러 일으켜 나라의 어지러움과 어려움을 극복하고자 함이니 을지문덕에 대한 이 현대판 전기가 비열한 자들의 마음을 경계·각성시키고 민족의 자존감을 되살릴 수 있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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