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역사와 문화2013. 9. 14. 18:08

 

살수대첩의 영웅 을지문덕

이름만 들어도 우와 소리가 나올만큼 우리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이름

그 중 오늘은 살수대첩의 영웅 을지문덕에 대해 살펴볼까 합니다

을지문덕하면 떠오르는 단어 살수대첩 입니다.

살수대첩은 을지문덕이 고구려의 영웅으로 만든 엄청난 전투였죠

수나라 군대가 우리 고구려 영토를 침략합니다

우문술은 부여도로 우중문은 낙랑도로 나와 제9군과 합류해 압록강에 이를때쯤

살수대첩의 영웅 을지문덕은 왕명을 받고 수나라에게 가서 항복을 하였습니다

이는 고구려의 작전 수나라 진영을 살펴보려고 한 살수대첩의 영웅 을지문덕의 작전이었다

살수대첩의 영웅 을지문덕은 억류 당하였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상서우승 유사룡이 굳이 풀어주라는 것이었다

결국 을지문덕은 풀려났고 작전은 성공했다

원정군의 큰 부담은 항상 보급이다 그것도 수나라대군을 지휘하려면 그 부담은 수배에 달한다

우문술과 우중문은 을지문덕을 데려오려 사람을 보냈지만 살수대첩의 영웅 을지문덕은 그들을 등뒤로 한 채

본국으로 돌아왔다

우문술은 보급이란 현실적인 고민을 하고있었다

우문술은 을지문덕의 작전에 완벽하게 놀아났다 수나라 병영에서 자중지란이 일어난 것 살수대첩의 영웅 을지문덕이 노린거짓 항복의 효과는 훨씬 컷다

마침내 화를 참지 못한 우중문은 10만의 병력을 가지고 이기지 못한다면 황제를 무슨 낯으로 보겠냐고 병사들을 꾸짖었다

우문술은 마지못해 압록강을 건너 쫒아갔다 여기서 살수대첩의 영웅 을지문덕의 두 번째 작전이 펼쳐졌다

수나라 군대가 굶주린 기색이 있음을눈치채고 더욱 피곤함에 지치게 하기위해 싸우는 척 패하는 척하며 후퇴를 반복하며 달아났다.

작전인지 상상도 못한 수나라 군대는 평양성 30리 밖까지 달려온 것 여름에 시작된 전쟁은 어느덧 가을을 지나고 수나라군의 힘은 다 빠져있었다

살수대첩의 영웅 을지문덕은 군사를 출병시켜 사면으로 공격을 개시하였다

수나라 군사들은 살수에 이르고 그곳은 수나라 군사들의 무덤이 되었다

 

 

 

 

 

7세기 동아시아 최대의 전쟁을 고구려의 승리로 이끈 위대한 군사전략가
우리 민족의 역사에서 외침(外侵)을 막아내고 국난(國難)을 극복한 대표적인 전쟁영웅(戰爭英雄) 세 명을 거론한다면 고구려(高句麗) 왕국의 을지문덕(乙支文德), 고려(高麗)의 강감찬(姜邯贊), 조선왕조(朝鮮王朝)의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을 이야기할 것이다. 이들 가운데서도 가장 위대한 전공(戰功)을 세운 최고의 영웅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한국인들은 대부분 이순신이라고 대답한다.

하지만 이순신이 활약했던 16세기 임진왜란(壬辰倭亂)보다 6세기 후반에 중원대륙을 통일한 수(隨) 제국이 모든 국력을 걸고 고구려를 침략했던 7세기 초반의 여수전쟁(麗隨戰爭)이 가장 규모가 크고 사상자가 매우 많았던 전란이라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612년 살수대첩(薩水大捷)으로 수조(隨朝)의 침략군을 격퇴한 을지문덕의 전공이야말로 우리 대외항쟁사(對外抗爭史)에서 가장 중요하고 의미가 컸다는 점을 깨달을 수 있다.

그러나 을지문덕은 우리에게 너무 암흑 같은 존재다. 역사 인물이 분명하지만 우리는 그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다. 그가 언제 태어나 어느 시기에 출장입상(出將入相)을 했으며 무슨 벼슬을 지냈는지, 심지어 언제 죽었는지도 모른다. 그의 아버지는 누구이며 그의 가문은 어떤 집안이었는지조차 알려져 있지 않다. 삼국사기(三國史記) 열전(列傳)에서도 을지문덕의 업적인 살수대첩에 대해서만 기술(記述)했을 뿐, 그의 개인 사료는 현재 남아있지 않는다. 야사(野史)로 분류되는 조대기(朝代記)·규원사화(揆園史話)·태백일사(太白逸史) 등과 해동명장전(海東名將傳)·고려을지공막리지제축문(高麗乙支公莫離支祭祝文) 등 조선왕조 시대의 문헌,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 선생이 1908년에 출간한 을지문덕전(乙支文德傳) 등만이 그와 관련된 설화(說話)를 전해주고 있을 뿐이다.

중국 정부는 2002년부터 2007년까지 동북공정(東北工程)을 진행하여 고조선·부여·옥저·고구려·발해를 우리 민족의 역사에서 분리시키고 심지어 신라나 고려마저 중국 변방의 소수민족이 세운 위성국가였다는 주장을 펼치며, 만주 지역에 대한 통치력을 강화하고 북한에 대한 영향력을 공고히 하기 위한 정치적 목적의 역사왜곡(歷史歪曲)을 추진하여 왔다. 동북공정은 공식적으로 완료되었지만 중국의 집권 공산당이 아직도 남한 측에 의해 주도되는 한반도 평화통일을 반대하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는 한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런데도 한국의 교육정책 책임자들은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더욱 우리 민족의 역사를 교육하는 일에 전력을 쏟아붓기는커녕, 대학입시에 별 도움이 안 되고 경제실용적인 학문이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역사 교육을 축소하여 선택과목으로 전락시켰다.

나관중(羅貫中)의 삼국지(三國志:三國志演義)는 중국 후한(後漢) 말기부터 위(魏)·촉(蜀)·오(吳) 삼국시대까지 중원대륙에서 일어났던 다양한 정치적·군사적 분쟁을 표현한 명대(明代) 초기의 장편소설로 오늘날까지 동양 사람들에게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고 있는 문학작품이다. 나관중의 삼국지에 가장 크게 열광하는 나라는 바로 대한민국이다. 한국인들이 중국인들보다 삼국지를 더 많이 사랑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서기 184년에서부터 280년까지 이르는 이 시기에 중원대륙에서 무수히 많은 영웅호걸들이 각자 독특한 캐릭터를 뽐내며 등장했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삼국지연의에는 사내들의 호승심(好昇心)을 자극하는 마력이 숨어 있다. 그래서일까? 이문열(李文烈)·정비석(鄭飛石)·김홍신(金洪信)·황석영(黃晳映) 등 국내 문학의 거두들은 마치 연례행사를 치르듯이 삼국지연의를 옮겨서 각색하는 글쓰기를 반복하였다.

이렇게 되니 나관중의 삼국지는 국내 대학 입시 논술고사의 단골 메뉴로 등장하게 되었고 “삼국지를 세 번 이상 읽지 않은 사람과는 친구로 사귀지 말라”는 괴상한 소리까지 나오게 되었다. 삼국지연의의 배경, 즉 1백여년간의 시기에 활동했던 제갈량(諸葛亮)·관우(關羽)·장비(張飛)·조운(曺雲)·곽가(郭嘉)·허저(許楮)·하후돈(夏侯惇)·서황(徐晃)·여포(呂布)·주유(周瑜)·감택(鑒澤)·황개(黃蓋)·주태(周泰)·여몽(呂蒙) 등은 잘 알지만 고구려사(高句麗史)에 불꽃을 피운 온달(溫達)·강이식(姜以式)·을지문덕(乙支文德)·연개소문(淵蓋蘇文)·양만춘(楊萬春) 등은 모른다. 적벽(赤壁)·허창(許昌)·건업(建業)은 줄줄 외우지만 비류수(沸流水)·건안성(建安城)·오골성(烏骨城) 등은 어느 나라 영토인지도 모른다. 삼국지연의는 모두 60년도 못 간 보잘것없는 나라였던 위·촉·오 중국 삼국시대의 역사는 알아도 7백년에서 1천년까지 사직(社稷)을 유지했었던 고구려·백제·신라 우리 민족의 삼국시대를 모르고, 심지어 우리 역사에서 가장 강력한 국력을 자랑했던 고구려의 역사마저 망각해가는 정신없는 백성만을 양산했던 것이다.

중국 정부는 고구려가 한국인들의 조상에 의해 건국된 나라였다는 사실을 부정하면서 만주는 물론이거니와 북한의 영토마저 한국인들의 문화적 종속권에서 제외시키기 위한 교활하고 치밀한 계획을 성공적으로 추진하고 있는데, 정작 한국에서는 자국 역사의 교육을 소흘히 하면서 중국의 삼국지연의를 소중하게 여기고 있으니 장래 우리 민족의 생존권을 과연 누가 무슨 방법으로 보장받을 수 있단 말인가?

중국은 세계에서 두번째로 광활한 영토를 가진 나라이며 지구촌에서 가장 많은 인구를 지닌 강대국이다. 지금의 티베트 지역과 신강유오이자치구(新疆維吾爾自治區)에서 벌어지고 있는 독립운동을 무력(武力)으로 탄압하며 조심스럽게 한반도 북부 지역에 대한 야욕을 드러내고 있는 중국은 연변조선족자치주(延邊朝鮮族自治州)를 완전히 중국의 세력권에 귀속시키기 위해 한반도에서 평화통일이 이루어지는 일을 방해하려고 갖은 공작을 꾸몄으며, 동북공정(東北工程)은 그러한 공작 가운데 하나였을 뿐이다. 일본 정부는 독도(獨刀)를 다케시마[竹島]라는 명칭으로 부르며, 1945년 태평양전쟁(太平洋戰爭)의 종전(終戰) 당시 미국에 의해 자국의 영토로 인정받았으나 한국에서 70년 동안 불법적으로 점거중이라면서 국제사법재판(國際司法裁判)을 통해 시비(是非)를 가리자고 주장하고 있다. 이에 대해 중국인들이 이 같은 일본 측의 입장을 적극적으로 지지함과 동시에 백두산(白頭山)이나 이어도(離於島)에 대한 영유권을 내세우는 이유는 무엇인가? 국제적으로 명분과 지지를 얻고 장차 정세가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전개된다면 한반도를 점령하겠다는 의도임에 틀림없다. 즉, 침략이다.

일본의 역사 교과서 왜곡 파문에 이어 중국의 동북공정까지 한국인들의 대외적 이미지가 크게 손상되고 우리 민족의 자주권 유지에 대한 명분이 심각하게 훼손당하고 있는 오늘날, 외침(外侵)으로부터 나라를 지키고 민족의 생존권에 대한 위협을 막아낸 구국간성(救國干城)의 영웅을 우리 민족의 역사에서 찾아내어 탐구하고 부각시키는 작업을 경기회복(景氣回復)에 직접적인 연관이 없다고 하여 하찮은 일로 치부해도 되는 것인가?

한반도를 강점하고 36년간 식민지 지배를 했던 일본 제국주의 세력은 1910년 8월에 경술병탄늑약(庚戌倂呑勒約)을 체결하기 전부터 한국침략의 정당성을 완성하기 위해 한사군 한반도 북부 위치설(漢四郡韓半島北部位置說)·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附設) 등을 만들어 역사를 날조하였다. 이 시기에 우리 민족의 고대사를 복원하여 일본인들의 역사왜곡(歷史歪曲)에 대응하고, 중원 세력과 대등하게 경쟁했던 자랑스러운 역사를 민중에게 가르쳐서 민족해방운동(民族解放運動)의 정신적 토대를 구축한 천재사학자(天才史學者)가 등장했으니 그가 바로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 선생이었다.

선생이 가장 중요시하게 여기고 연구했던 것은 우리 민족의 역사에서 가장 무력(武力)과 재력(財力)이 막강했던 시기인 고구려사(高句麗史)였으며, 그 가운데서도 선생이 매우 자랑스러운 영웅으로 숭상했던 역사인물이 바로 을지문덕(乙支文德)이었다. 그러나 선생께서 ‘우리 역사상 최고의 위인’이라며 극찬과 존경을 바친 을지문덕에 관련된 사료가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에 아무리 연구와 문장에 천부적인 자질을 갖추었던 선생이라고 해도 그의 전기를 쓰는 데 애를 먹을 수 밖에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선생은 을지문덕전(乙支文德傳)의 서론에서 “다행이구나, 을지문덕이여! 오히려 이 몇 줄의 역사가 전해 오고 있도다. 불행하구나, 을지문덕이여! 겨우 이 몇 줄의 역사만 전해 오고 있도다”라고 한탄했던 것이다.

우리는 학교에서 서양사(西洋史) 과목을 수업받을 때에 약소민족이 강대국의 침략을 물리쳐 승리한 대표적인 전쟁을 기원전 5세기의 그리스·페르시아 전쟁[Greco·Persian Wars]이라고 배웠다. 페르시아의 국왕 크세르크세스 1세[Khshayarsha]가 기원전 480년 50만 대군을 이끌고 그리스를 침공했을 때, 그리스 해군의 총사령관으로서 살라미스 해전[Battle of Salamis]에서 승리를 거두었던 테미스토클래스(Themistocles)는 고대의 역사인물 가운데 세계 최고의 영웅으로 평가받고 있다. 하지만 서기 7세기의 여수전쟁(麗隨戰爭)을 고구려의 승리로 이끌었던 을지문덕이야말로 아테네의 테미스토클래스보다 더 위대한 전공(戰功)을 세운 탁월한 군사전략가였음을 누구에게도 내세울 수 있고 또 자부할 수 있다.

우리 민족의 역사에서 자랑스러운 승리를 들추어내는 것은 조상들의 위대한 업적을 기림으로써 국민들에게 영웅을 숭배하는 마음을 고취시키고, 열성적이며 모험적이었던 고구려인들의 옛 발자취를 묘사하여 다시 영웅을 불러 일으켜 나라의 어지러움과 어려움을 극복하고자 함이니 을지문덕에 대한 이 현대판 전기가 비열한 자들의 마음을 경계·각성시키고 민족의 자존감을 되살릴 수 있기를 기대한다.

 

Posted by 원주유
고구려 역사와 문화2013. 9. 14. 17:26

 

 

아차산 고구려 마을,고구려 대장간이 고구려의 핵심적인 곳이였다.

우리 나라에는 고구려 유적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고구려가 북한과 만주 벌판을 기반으로 했던 탓에 백제와 신라에 비해서 고구려 유적이 적고,

고구려의 흔적을 만나기도 쉽지 않지요.

그런데 우리나라에 거의 유일하게 있는 고구려 유적이 있으니 바로 아차산입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광개토대왕이 중국 대륙에 생겨나는 나라들을 상대로 북진을 했던 것과 달리

광개토대왕의 아들인 장수왕은 한반도 내에 있는 나라들을 정복하고자 하는 남진 정책을 펼쳤습니다.

장수왕은 고구려의 수도를 국내성에서 평양으로 천도했는데,

어떤 시각에서는 이를 중국과의 대결에서 고구려가 밀려 평양 천도를 했다는 시각도 있지만

한편에서는 광개토대왕 때 북쪽의 넓은 영토를 차지했고, 장수왕은 남진 정책을 폈기에,

남진에 유리한 평양으로 천도를 했다는 의견도 있더라구요.

아무래도 남진 정책에 물적 인적 자원이 풍부하고, 연락 체계가 원활히 진행 될 수 있는 수도가 가까이있다는 것은

남진 정책에 이어서 유리한 점일 테지요.

아이와 함께 둘러 본 고구려 대장간 마을은 고구려 유적이 아니라

고구려의 대장간 마을을 재현한 곳이며, 드라마 촬영장으로도 쓰였던 곳이었지만,

실제로 고구려의 유물과 보루 등이 발굴되고 있는 아차산에, 고구려의 벽화를 근거로 하여 재현한 마을이이었습니다.

 

비록 재현한 마을이지만, 이 기회에 고구려에 대해서 좀 더 알 수 있는 기회로 만든다면 더 좋겠지요?

그런 의미에서 두 권의 책을 소개합니다.

왼쪽의 웅진 주니어에서 출판 된 어린이 박물관 고구려는 유물 중심으로 고구려에 대해서 소개하고 있습니다.

여러 유물을 통해서 고구려 사람들의 생활 모습을 살펴 볼 수있으며.

유치원에서 초등 저학년의 아이들이 보기에도 참 좋은 책 같습니다.

오른쪽의 주니어 김영사에서 출판한 고구려사 이야기는 역사적 사실을 중심으로 고구려에 접근한 책입니다.

동명성왕에서 출발해 왕을 중심으로 하는 역사적 사실을 살펴 볼수 있는데,

초등 고학년 아이들까지 쉽게 읽을수 있을 것 같아요.

우리나라의삼국 시대의 유물을 전시하는 곳에서는 고구려 유물이 복제품의 형태로라도 전시 되어있습니다.

민혁이와 저는 지난 겨울 국립 중앙 박물관 꼼꼼 나들이란 주제로

국립 중앙 박물관의 유물을 세세히 둘러 본 적이 있었습니다.

이곳 대장간 마을에 고구려의 유물이 조금 전시 되어있기는 한데, 상당히 빈약합니다.

대장간 마을을 둘러보면서 고구려 유물이 함께 전시되어있는 박물관 나들이를 하셔도 참 좋을 것 같네요.

 

고구려가 남진 정책을 진행하면서 당시 한강의 주인이던 백제와 대치했던 곳이 바로 아차산이었습니다.

한강을 건너 아차산의 맞은편이 바로 백제가 한강 유역을 고구려에게 내어 주기 이전에 끝까지 저항했던

한성 백제의 성... 풍납토성과 몽촌 토성이 있던 곳입니다.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은 비교적 평평한 지형에 위치한 성으로,

아차산에 주둔했던 고구려 병사들은 높은지형을 이용해 백제의 도읍을 한눈에 내려다 보며 정세를 살폈다고도 해요.

큰 세력을 떨치던 고구려가 코 앞에서 먹잇감을 노리 듯 백제를 들여다 보았을테니,

백제는 또 얼마나 두려웠을지 짐작됩니다.

 

이곳 아차산과 마주한 곳에 백제의 수도 위례성이 있었으니,

고구려와 대치했던 백제에 대해서도 아차산을 둘러보며함께 살피면 좋지 않을까요?

위의 사진은 지난 해 여름 석촌동 고분군에서 찍은 사진입니다.

몽촌 토성과 풍납 토성을 둘러보는 것도 백제에 대해 알아 보기 위한 좋은 방법이지만

저는 지난해 새롭게 개관한 '한성 백제 박물관'과 가까이 위치한 '석촌동 고분군'을 꼭 둘러보시라고 추천하고 싶습니다.

한강 유역의 발전과정과 더불어, 한성에 수도를 정했던 백제의 문화 및 생활 모습을 잘 소개하고 있는 박물관으로,

국립 중앙 박물관이야 워낙 방대한 자료를 가진 곳이니 제외하고, 개인적으로는 가장 좋았던 박물관이었습니다.

특히 백제는 두 번에 걸쳐 수도를 천도했는데, 우리는 공주와 부여를 백제의 수도로 큰 의미를 두지만,

백제 700여년의 역사 중 이곳 한강 유역을 수도로 삼고 번영 했던 기간이 500년 가까이 된다고 하니

공주나 부여보다 오히려 더백제의 역사에서 중요하게 살펴 보아야 할 부분이 이곳 한성 백제 시기인 듯합 니다.

또한 가까이 위치한 석촌동 고분군 역시 백제의 왕릉으로 추정되는 거대한 기단식 돌무지 무덤으로

그 규모나 독특한 양식, 그리고 고구려와의 연관성을 찾아보시면새로운 사실들을 많이 알게 될거예요.

한성 백제 박물관과 석촌동 고분군은 꼭 함께 둘러보시기를 추천합니다.

( 한성 백제 박물관과 석촌동 고분군,국립중앙 박물관 꼼꼼 나들이 - 백제

 

대장간 마을을 둘러보기 전에

아차산에서 발굴된 유물들이 전시되어있는 '아차산 고구려 유적 전시관이 있습니다.

아차산은 고구려 남진 정책의 전초기지를 했던 곳입니다.

아이에게 전초기지의 의미를 아는지 물었더니, 산을 정복하기 전의 베이스캠프 같은 곳 아니냐고 되묻더라구요. 맞습니다. 백제 정복을 위한 베이스 캠프...

아차산 일대에는 능선을 따라서 20여개의 보루가 있었는데, 이 일대에서 발굴된 유물들이 이곳에 전시되어있다고 합니다.

 

한번도 우리나라의 지도를 거꾸로 본다는 개념이 없었는데,

이곳에서는 고구려 영토의 광활함을 보여주기 위해서인지, 한반도를 거꾸로 그려 두었습니다.

파란 색으로 칠해진 저 넓은 땅... 그걸 다 제대로 지켜 낼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싶네요.

 

유적 전시관에서는 아차산 자락에서 발견된 고구려의 흔적들을 전시하고 있습니다.

이곳이 제대로 자리를 잡은 거주지가 아닌 보루라서 그런지 정교한 토기라기 보다는 다소 조악한 느낌입니다.

 

이곳에서 발견된 활을 재현한 화살 촉들인데, 뻔하디 뻔한 화살 촉만 생각하다가, 다양한 모양의 화살촉을 보니 파괴력을 높이기 위한 무기 연구는 고대에도 있었구나... 싶었습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고구려 대장간 마을을 둘러볼까요? 앞서 말했듯이 이곳은 재현된 마을입니다.

설명에서는 고구려 벽화 속에 나타나는 집 구조를 바탕으로 상상하여 나타낸 곳이라고 해요.

이곳에서 몇 편의 드라마 촬영도 있었다고 하는데,

그래서 그런지 진짜 고구려 대장간 마을의 모습이라기 보다는 좀 더 환상적인 모습으로 꾸며져 있습니다.

 

마을 입구에서부터 '삼족오'가 그려진 깃발이 나부끼네요.

고구려 사람들은 태양 속에 세발 달린 까마귀 삼족오가 살고 있다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그러고 보면 중국의 유물이나 중국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측되는 우리나라의 유물 중

3이라는 숫자가 신성시 되고 있는 것을 종종 볼수있는데, 예를 들면 '세 발 달린 솥' 등이 그렇습니다.

아마도 3이라는 숫자는 완벽한 합일을 이루는 신성한 숫자인가봐요.

아! 그러고보니 서양의 기독교 사상에서도 3이라는 숫자가 신성한 숫자로 여겨지는 것 같네요.

기독교 속 '성 삼위일체'만 봐도 그렇지 않나 싶어요.

동양과 서양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이런 의미들을 볼때면 저는참 신비롭더라구요.

 

대장간 마을로 들어가는 입구에 목책도 늘어서 있습니다.

나무를 뾰족하게 깎아 벽을 둘러 방어용으로 사용하는 목책은 백제의 유적지인 몽촌토성...

지금의 올림픽 공원에서도 그 흔적을 확인 할 수 있다고 합니다.

 

크지는 않으나 올망 졸망한 집들이 기록과 상상력의 옷을 입고 마을을 이루고 있네요.

사진 찍기에도 참 좋은 곳 같았어요. 건물들이 참 예쁘거든요.

 

이 공간은 고구려 대장간 마을의 회의 장소를 염두에 두고 상상하여 만든 공간이라고 합니다.

이곳에서는 거믈촌이라고 부르는데, 드라마 태왕사신기의 촬영 장소로 이용되기도 했다고 하네요.

 

실제 고구려 사람들이 이렇게 멋진 의자에 앉아서 정말로 회의를 했을까요?

그보다는 상상력이 더 많이 가미된 공간 같기는 하네요.

나무의 구불구불함이 고스란히 보이는 의자에 앉아 회의하는 광개토대왕을 상상해 봅니다.

 

흙을 구워 만든 기와는 아무래도 고급 물품에 해당하니 중요한 건물의 지붕에만 덮였던가 봐요.

평범한 집들에는 나무를 쪼개어 지붕을 덮은 나무 기와가 눈에 띄더라구요.

 

뭔가 신비로운 공간을 묘사 해 둔 곳인데, 드라마 속에서도 점술을 행하거나... 신비로운 장면을 찍는 곳이었다 하더군요.

벽면에는 고구려 고분 '강서대묘' 속의 사신도가 그려져 있습니다.

뒷 쪽 벽면에 그려진 그림은 사신도 속 현무의 모습이네요.

현무는 거북의 몸에 뱀의 머리를 가진 상상 속의 동물로, 사방 중 북쪽을 상징합니다.

 

디딜방아는 이미 고구려 시대에 사용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고 해요.

고구려는 고분 벽화를 통해서 당시의 생활 모습을 소상히 살펴 볼 수 있는데, '안악3호분'의 벽화에서는 특히 디딜방아를 사용하는 모습이 잘 표현되어있다고 합니다.

또한 아차산 3보루에서도 6세기 전반 고구려 시대의 디딜방아 유적으로 추정되는 유물들이 발굴되었다고 하네요,

아차산 보루에서 발굴된 디딜방아의 흔적은 이 지역에 주둔했던 병사들의 식량지원 기능을 하였으리라 추측된다고 합니다.

 

왠지 아일랜드 숲 속의 요정 엘프들이 나타날 것 같은 참 멋진 공간이네요.

이곳을 담덕채라고 부르는데, 평범한 고구려의 가옥을 재현해 놓은 곳이라고 합니다.

 

담덕채 안으로 뛰어 들어가 창문을 활짝 열어 고구려 마을의 전경을 둘러 보니, 마을이 한 눈에 다 내려다 보이더라구요.

 

고구려 사람들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온돌을 사용했습니다.

하지만 방 전체를 데우는 형식이 아니라 방 안에서 불을 지펴 일부분만을 데우는 쪽구들 형식이었다고 해요.

고구려 사람들은 쪽구들 위에서 추운 겨울을 보내고 잠을 자며, 여름이나 평상시에는 의자에 앉아서 생활했다고 하네요.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온돌에 불을 지피는 아궁이는 건물의 외부에 있기 마련인데, 고구려 가옥에서는 아궁이를 건물 한 가운데에서 확인 할 수 있어요.

이렇게 아궁이가 집 안에 있으면 어떤 문제점이 생길까...아이에게 물어보니 나무를 태우면서 생기는 연기와 그을음으로 집 안이 무척 답답할 것 같다는 문제점을 이야기 하던데...

그래서 그런지 고구려 가옥의 천장에는 신석기시대 움집에서 보았던 것과 비슷한 환기 시설도 확인 할 수 있었습니다.

 

종이가 없던삼국 시대에는 나무...주로 대나무를 얇게 쪼개어 엮은 후 글을 써서 기록 햇는데, 이를 목간이라고 합니다.

목간이나 '목간'과 비슷한 '목책'은삼국의 유물에서 고루 발견되더라구요.

 

담덕채를 나와 이 마을의 가장 중요한 부분인 대장간으로 가 볼까요?

고구려는 잘 알려져 있다시피 정복국가입니다.

그들의 척박한 땅과 농사 짓기에 적절치 않은 기후 등이 고구려를 정복 국가로 만들었을 거예요.

원래 고대 시대의 전쟁이라는 것이 부족한 국가가, 필요한 자원을 얻기 위해 주변 국가를 침략하는 것에서 시작되었으니,

고구려 역시 자신들의 부족한 것을 채우기 위해 정복 국가가 되었으리라 생각됩니다.

정복 국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뭐니뭐니해도 무기겠죠.

고구려는 일찍부터 청동제 무기를 철제 무기로 대체하여 사용하면서

전쟁을 통해 지역 통합을 이룩하고, 지배권을 강화하여 고대 국가로 발전했습니다.

당시 철을 다루는 기술자들은 최첨단 기술을 가진 사람으로 나라의 발전에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합니다.

일례로 백제의 왕 석탈해에 관한 이야기를 읽어보면

석탈해가 쇠를 다룰 줄 아는 최첨단 기술자이고, 이전까지 청동기에 머물던 신라에 철기를 들여온 인물이며,

그 기술을 바탕으로 왕의 자리에까지 오른 인물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듯 고대 국가에서 철기는 강한 무기로서의 의미가 컸습니다.

또한 철기는 이전의 원시적인 농기구들을 강철이라는 단단한 농기구로 대체 할 수 있었고,철기 농기구를 통해서 땅을 더 깊게 경작할 수 있어 생산량이 급격하게 늘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고대 국가들의 인구도 급속도로 증가했다고 하니...

우리에게 흔하고 큰 의미 없게 느껴지는 철이 이 당시에는 아마도 지금의 핵에 버금가는 파괴력과 생산력을 가진 물질이었으리라 추측됩니다.

그러니 비록 꾸며진 공간이지만, 대장간은 아주 아주 중요한 공간입니다.

 

고구려의 대장간에 대한 구체적 기록은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곳은 아차산 4보루에서 발견된 간이 대장간터와 고구려 벽화의 대장장이신을 근거로하여 제작된 상상의 공간이라고 하네요.

 

재현된 공간이지만 대장장이처럼 풀무질도 해 보고, 철제 무기들과 농기구들도 살펴 볼 수 있네요.

민혁이가 열심히 풀무질을 하고 있는데, 풀무질은 불길을 더 세게하기 위해 공기를 공급하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물의 위치에너지를 이용해 물레방아가 돌면, 축이 그 에너지를 수평 에너지로 바꿔 기계를 돌린다네요. 물건을 쉽게 이동 시킬 수 있는 수평 도르래도 설치되어있는데 과연 고구려 시절에 저런 과학적 도르래가 있었을까... 살짝 의심도 들었어요.

 

나무를 얼기설기 엮어서 만든 망루 위에서는 병사들이 마을 가까이 다가오는 사람들을 일일이 감시했겠죠?

한번 올라가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보기에 엉성해 보이는 만큼 위험한지... 올라가는 것은 금지였습니다.

 

연호개체라는 공간입니다.

쪽구들을 놓아 편히 쉴 수 있는 공간과, 의자를 놓아 접대할 수 있는 공간, 평상이 놓인 공간 등으로 구성해 귀족들의 생활 공간을 상상해 재현하고 있습니다.

 

구석구석 대장간 마을을 둘러보고 고구려 건국 신화를 그림으로 전시 해 놓은 공간이 있어서 야외 극장 쪽으로 발길을 옮겨보니 재활용 타이어로 만든 말에, 조잡스러운 광개토대왕비, 배용준씨의 드라마 태왕사신기 속 모습을 전시하고 있네요.

 

이곳에는 일본 관광객들도 많이 찾아오시는 것 같았는데, 그분들을 위한 전시물 같았습니다.

 

대장간 마을을 둘러보기 전에 유물 전시관에서 고구려는 '산성의 나라'라는 말이 있더라구요.

정작 고구려를 '산성의 나라'라 칭하면서 이에 대한 설명은 다소 부족한 기분이 있었습니다.

고구려는 산성의 나라가 맞습니다.

물론 기마병을 기반으로 고구려의 전투력도 뛰어났을테지만, 고구려가 중국 땅에서 일어선 수나라나 당나라의 대규모 침략에도 굳건히 버틸 수 있었던것은 고구려의 성을 이용한 전술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고구려는 평성과 산성의 '이성 체제'의 나라였습니다.

평상시에는 평지에 위치한 평성에서 생활을 하다가 침략이 있을시에는 모두 산성으로 옮겨갔다고 해요.

위의 사진은 고구려의 산성인 '오녀산성'입니다.

사진에서 보이다시피 산성은 아주 험준한 지형으로 침략이 쉽지 않습니다.

고구려 사람들이 산성으로 옮겨 갈 때에는 평성의 우물을 모두 메우고, 식량을 모두 불태워 적들이 평성을 점령해도 식량을 확보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그러면 고구려 병사들은 매복해 있다가 적의 보급로를 차단하였다고 하죠.

반면 산성에는 적당한 먹을 거리와 우물이 있어서 적의 침임에도 꽤 오래 보틸 수 있었다고 합니다.

보급로도 차단되도, 마을에서도 식량을 구할 수없었던 적들은 결국 물러날 수 밖에 없었다고 하니,

큰 희생 없이도 현명하게 적들을 물리 칠 수 있는 고구려의 지혜가 엿보이네요.

 

시원한 바람 솔솔 부는 가을에 고구려 대장간 마을과

강을 하나 사이에 두고 고구려와 첨예한 대립을 했던 백제 박물관 나들이는 어떨까요?

알면 알 수록 신비한 고대의 이야기들이 쏟아지는 즐거운 나들이가 될 거예요.

 

Posted by 원주유
고구려 역사와 문화2013. 9. 14. 17:18

 

가야 4세기 모용계 선비족들의 가야 이동설의 뒷바침 유물?

김해 대성동 고분군에 대한 올해 제7차 발굴조사 결과

4세기 무렵 왕릉급으로 판단되는 대형 목곽묘 2기가 모습을 드러냈다.

목곽묘 유물 출토 모습. 통형동기와 철기류가 보인다.

대성동고분 9호분 선비족의 유물 정체

신라문무왕비문에 나타난 신라 김씨족의 정체가 흉노족이다.

김수로와 김알지 김씨들은 같은 흉노족 김일제의 후손들이다. 기원전후로 한반도로 내려왔었다. 대성동고분 91호분에 발견된 4세기 삼연 선비족의 동분,동원,마구와 말방울 소유자의 정체성에 주목이 간다. 즉 2차북방민족 선비족의가야 이동의 강력한 증거가 될 수 있다.

당시의중국 대륙은 어떠한정치적 상황인가를 알아야한다.

삼국시대(삼국지로 유명한 시대,조조(선비족),를 이은 서진시대를 마감하고 흉노.선비,갈,저.강족 등의 5호가 세운 16국 시대는 흉노의 맹주 유연이 산서성에 자립하고(304년) 그 아래 하북지방을 통일한 북위(439년)시대의 기간을 가리킨다.

 

 

이러한 16국 시대를 마감한 북위는 선비족의 탁발부였다. 선비족은 흉노왕국이 후한 초 남북으로 분열되어 쇠퇴한 뒤 나타난 북아시아의 패자가된 부족이다.

오환족과 함께 몽고의 시라무렌강 유역에서 일어난 몽골계의 유목민족으로 [사기]나 [한서]에 등장하는 동호족(東胡族)에 속한 민족이다.

이러한 선비족을 통일한 인물이 2세기 전반에 나타났는데 바로 단석괴(檀石槐)라는 영웅이다. 단석괴 사후 다시 분열한 선비족은 이후 모용부, 우문부, 단부, 탁발부 등이두각을 나타내고 있었다.

 

이 가운데 요녕성에 근거한 모용부가 화북에 침입하여 전연, 후연,서연, 남연 등을 세우고, 내몽고 성도인 호화토특호화호특(呼和浩特) 남쪽의 화림격이(和林格爾) 방면에 유목하고 있던 탁발부가 북위(北魏) 왕조를 수립하게 된다. 395년후연(선비족모용수)과 북위(선비족탁발규)는 전쟁에 돌입했다. 후연 모용수는 태자 모용보를 총사령관으로 보내 북위를 멸망시키려 들었다. 그러나 모용보는 오늘날 산시 다퉁 부근의 참합파에서 대패하여 수만명이 죽었고, 수만명이 투항했으며 태자 모용보는 몇천의 군대와 함께 달아났다. 이때 탁발규는 그가 투항한 후연군들을 한명도 남김없이 죽여버렸다.

 

다시 모용수가 직접 군대를 정비해 이듬해인 396년 3월 출정했다. 모용수가 평성으로 가던 도중에 참합파를 지나게 되었는데, 후연 병사들이 죽어 시체가 산을 이룬 참혹한 광경을 목격해야만 했다.

이미 70세의 나이가 있고 중병에 걸린 모용수는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그의 병이 위중해지자 병사들은 평성으로 향하지 못하고 중산으로 말머리를 돌렸다. 도중에 모용수는 그만 세상을 떠나고, 태자 모용보가 제위를 물려받았으니, 그가 혜민제이다.

모용수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탁발규는 두려워 않고 40만 대군을 풀어 전진하여 396년 후연의 수도 하북성의 중산에 입성하였다.

398년, 탁발규는 황제에 즉위하고 수도를 평성으로 정함으로써 북위를 연 개국황제가 되었다. 중국북방의 질서가 완성되었다.

 

후연 선비족의 중국에서의 몰락이 한반도 이동에 무게를 두고 싶다.가야 대성동고분과 부산 복천동고분군, 함안 아라가야 고분에서의 북위계통의 말(馬)찰갑출토, 신라 황남대총에 나타난 삼연의 말갖춤문화에 직접 영향을 끼친 것 같다.동호족(선비족)은 단군시대엔 한민족 연합 부족의 일원이었다.

 

부여족의 한반도와 왜의 이동설에 무게

 대성동고분 91호분의 선비족 계통의 유물들이다. 그들의 정체성에 대한 문제를 다루고 있었다. 탐색자들은 발해만 요양시 '라마동고분군'에서 출토된 묘제와 마구(말안장, 말에 관련된 장식물),및 동복이 선비족 (삼연)보다, 부여족에 가까웠다. 라마동고분군을 발굴한 텐리쿤교수(중국)는 '라마동고분군' 묘지는 부여족들의 무덤이라는 것이다.

 

박물관에서 살펴본 유물도 선비계통보다는 부여계통이 문양까지 대성동91호와 동일함을 화면에서 보여주었다.

라마동 묘제의 경우, 목곽묘로서 직사각형 형태로 관을 사용하지 않은 점도 선비족과는 다르며, 대성동 91호 묘제와 동일한 점이다.

말안장의 경우 사각형은 선비족인데 반해, 대성동고분군,라마동고분군은 타원형태로 동일하였다.

 

형질인류학분석법인 인골분석도 부여족(라마동고분군)과 대성동고분군은 동일인이었다.

선비족은 삼국지 조조와 같은 족속들이며 내몽고가 중심지였고, 이후 세력이 강하여 중원으로 이동하여 북위를 열었다. 삼연도 선비족계통이다.

 

전연이 부여를 공격(346년경), 부여인들이 한반도와 도왜(일본의로 이동)하였을 가능에 무게를 둔 학자도 있다.

대성동고분88호분 무덤에서 발견된 파형동기가 한무덤에서 12점 수습되었다. 일본에서는 여러무덤에서 총 10개에 해당되었다.

파형동기는 일본천황(왕)급 무덤에서 발견되는 귀한 물건이다. 대성동고분88호분은 일본천황급 묘지이다. 심지어 일본 측에선 일본 숭신천황의 무덤이라고 까지 말하는 학자도 있다(에가미-기마민족의 왜열도 이동설 주장)

발굴전에, 가야인의 정체에 대해서 부산항도일보(부산매일신문의 전신)에 연재 중, 파형동기 발견이 반드시 가야지역에서 나올 것을 예견한 적이 있었다.

 

북방기마민족의 이동 유물로 파악한 것이다. 지금은 일본학계와 한국 가야사 전공자들은 파형동기를 일본 교류의 유물로 파악하고 있는 점이 안타깝다. 오끼나와(류큐國)는 고대엔 일본과는 전혀 다른 나라였다.

 

3세기~4세기 왜와는 관련없는 점이다. 오히려 중국 남방과의 관련성이 있는 고대 국가였다. 류큐국은 에도막부 말기에 사스마번(큐슈)에 정복되어 일본으로 병합된다. 고려시대 삼별초들이 류큐국에 이동하여,상류층 역할을 맡았던 고고학적 유물이 발견되었다.

 

필자가 쓴 '신들의 이름/2009년/오늘/" 일본 응신천황은 부여국의 의라왕이었나? 에 기록한 [진서(晋書)]四夷傳.부여국과 [통전(通典)]邊防門.동이부여가 말해주는 다음과 같은 구절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역설하고 있다.

 

부여는 그 나라가 殷盛하고 부유하여, 先世 이래 일찍이 깨뜨려짐을 당한 적이 없었다.......태강(太康)6년(285년)에 이르러, 모용외(慕容외:선비족/晋의 장수)에게 공파(功破)되어, 그 나라의 왕인 의려(依慮)는 자살하고, 자제들은 옥저로 도망하여 생명을 보존하였다...... 다음 해에 부여 후왕 의라(依羅)가 감구솔견인(龕求率見人)을 보내어,옛 나라를 회복하려고 구원을 청하였다.......의라는 나라를 되찾았다........그 뒤에도 매양 모용외가 그 나라 사람들을 잡아다가 중국에 팔았기다. ......의라는 그 후 소식이 없어졌다.

 

이처럼 [진서]는 부여의 마지막 왕인 의려가 자살한 후 그 자제들이 옥저로 도주하여 생명을 보존했다는 비참한 종말을 이야기하고 있고, [통전]에서는 부여후왕 의라가 그 후 소식이 묘연(杳然)하다고 하였다. 부여가 이와 같이 하여 처음 망한 것은 서기285년이었다. 기록에서와 같이, 일단 나라를 회복했던 부여후왕 의라는 다시 모용외의 약탈로 더 이상 지탱하지 못하고 결국 유리한 것 같으며, 한반도를 거쳐 이후 도왜(왜국으로 건너감)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한편 왜국에서는 의라라는 성씨가 여러 갈래로 생겨나게 된다.

 

姓氏錄에서의 의라씨들은 개화천황의 후손이라거나, 혹은 饒速日(니기하야히)의 후손이라거나, 혹은 백제인의 후손이라한 것 등, 여러 갈래로 되어 있다. 위서(魏書)의 부여전에 보면, "부여에서는 소를 잘 길렀고, 명마가 나왔으며, 그 사람들은 거칠고 신체는 장대하고 성질이 강하고 용맹하면서도 근후했음을 알 수 있다. 말하자면, 북방의 대표적인 기마민족이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이러한 부여 후왕 의라와 그 세력은,비록 그 나라가 패망하여 일시 남의 땅에 피신했다 하더라도 식객노릇이나 하고 있지는 않았을 것이나, 그들이 한동안 한반도(김해 대성동고분지역) 땅에 머물렀을 것이라는고고학적인 유물이 대성동91호 발견되었기 때문에 이미 '신들의 이름'에서 편 학설이 강력한 설득력이 생긴 셈이다.

 

어쨌든, 결국 그들이 낙착한 곳은 왜지(倭地)였다고 보며, 부여씨인 백제왕은 차후 그들을 위하여 모든 지원을 제공했던 것임은 일본서기의 응신기가 잘 보여주고 있다.

 

천황재위 14년째(283년)에, 궁월군(弓月君:유츠키노키미)이 백제로부터 120현(縣)의 인민을 거느리고 응신조에 내귀(來歸)하는 [일본서기] 기록이 있다. 이 백제 120현은 한반도 백제가 아닌 요서지방의 백제계, 부여족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부여 후왕 의라의 도왜(渡倭)와 이보다 150년 뒤에 고구려의 광개토 호태왕이 동부여를 공벌(攻伐)한 사건, 그 7년 후에 연왕(燕王) 황(皇光)이 토벌한 부여, 또 문자왕 3년(494년)에 고구려에 [以國來降]한 부여 등의 사건등이 만주지역 부여에서 이뤄졌다.

진서를 검색하다, 선비족 모용황(燕王)이 조선공(朝鮮公:조선왕)에 봉해졌다는 기록(337년)이 머리에 남았다.(진서 권109)조선공(왕)이란 의문은 다음기회에넘긴다.

 

위의 랴오닝성 '라마동' 수백기의 고분군은 유물과 대성동 유물은 동일 족(부여족)의 유물이다. 선비족인 전연에게 침공당한 부여족 지역의 고분군이다. 부여족의 한반도 가야지역을 통한 도왜한 부여족이다. 그 세력들이 큐슈로 부터 정복한 응신천황이었다.(재야사학자 문정창 주장) 큐슈로 부터 기내지방으로 이동하여 세운 기마민족 세력들이었다. 대성동 88호분 무덤의 파형동기는 도왜의 이동 흔적이다.(신들의 이름/2009년/오늘/김인배,김문배 공저)

 

결정적인 증거로는 대성동고분91호에서 발견된 순장흔적, 선비족 청동분(대야),마구와 말방울은 정확하게 말하면, 선비족이 아닌 부여족의 유물임을 KBS 역스팀들이 밝혔다. 91호분에서 발견된 '사슴뿔로 만든 관의 장식'이다.

 

사슴뿔로 만든 관 장식-부여족이란 기록

응신천황의 난파조정(오사카조정)에 도래한 부여국인(夫餘國人)들과 髮長媛(발장원:고구려의 제12대 중천황의 부인)이 바다를 통해서 난파(오사카의 옛 이름)에 들어온다.

 

응신천황이 담로도에 사냥하려 가 있었다. 천황이 서쪽을 바라보니, 수십마리 사슴이 바다에 떠서 오고 있었다. 천황은 좌우에 이르기를, [저게 무슨 사슴인가? 넓은 바다에 떠서 많이도 오는구나]라고 말했다.

 

이것은 응신천황이 난파(나니와/오사카) 조정을 건설한 지 13년 만에 사슴,여우,너구리,담비 등의 가족옷을 입은 부여국의 구신(舊臣)들이 발장원(황후)를 데리고 부여의 후왕(後王:의라왕)인 응신천황을 찾아 난파조정에 이르렀음을 보여준 대목이다.

 

일본서기 기사와 동일한 기사가 [삼국사기]권 제 17(고구려본기 제 5)에 나온다.

이상과 같은 점으로 대성동고분군 91호분에서 발견된 부여동분,말장식,그리고 사슴뿔관장식은 부여족의 한반도 김해 이동과 도왜하여 그 곳에 응신천황이 된 부여집단 세력의 흔적을 잘 말해주고 있다.

 

오늘날 일본의 성곽들은 평지에 있다. 고구려 성은 산록을 이용한 성곽임에 반해, 부여는 평지에 해자를 둘러 목책등으로 수성하였다. 이 근원이 부여족들의 평지성곽 건설풍이다. 일본 하찌만궁(신사)는 대마도를 비롯해서 북큐슈 곳곳에 존재하고 있다. 그리고 기내지방으로 이동되어 있다. 그 주신이 응신천황이다. 부여족이 세운 하찌만궁, 그 세력들이 한반도에도 강력한 기마와 철갑을 앞세워 기존 가야세력과 혼재하며 존재하게 된다. 복천동고분 세력도 부여족이 남겨놓은 흔적들이 고분군에 남아 있을 것이다. 고분군 속에 여러 묘제들이 혼재한 까닭은 강력한 북방 세력들이 밀려와서 남겨놓은 역사적 유물인 셈이다.

 

 

Posted by 원주유
신라 역사와 문화2013. 9. 14. 15:23

 

 

전세계 왕들 중에서 가장 현면한 왕은 신라왕들이다?..과연 그러진 보실까요..

제41대 헌덕왕
혜충태자(제38대 원성왕의 장남)
성목태후 김씨 ․ 김씨, 언승, 생년미상 ~ 826년 
재위기간 : 809년 7월 ~ 826년 10월. 총 17년 3개월 
부인 : 1명 
자녀 : 2남
황아왕후 - 헌상, 장렴

헌덕왕은 원성왕의 태자 인겸의 아들이며, 성목태후 김씨 소생으로 소성왕의 동복아우이다. 이름은 언승이며, 소성왕이 죽은 뒤에 어린 애장왕이 왕위에 오르자 섭정이 되었다가, 애장왕 10년(809년)에 조카인 애장왕을 죽이고 왕위에 올랐다. 790년에 대아찬으로 임명되어 중국 당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으며, 다음해에는 제공의 난을 진압하는 데 가담하여 공을 세움으로써 잡찬이 되었다. 원성왕 10년(794년)에 시중에 임명되고, 그 다음해에 이찬으로서 재상이 되었으며, 796년에는 병부령의 자리를 맡게 되어 원성왕 말년부터 정치적인 기반을 갖추게 된다. 이러한 세력기반을 바탕으로 애장왕의 즉위와 함께 각간에 올라 섭정도 맡게 된다. 801년에 어룡성의 장관인 사신이 되었고 이어 상대등에 올랐다. 아우 수종이 시중의 위치에 있었던 809년에는 제옹과 더불어 난을 일으켰으며, 난중에 애장왕이 살해되고 언승이 왕위에 올라 헌덕왕이 되었다.

헌덕왕대의 정치는 함께 반정에 가담한 그의 아우 수종(흥덕왕)을 비롯하여 조카 제륭, 양종, 균정, 영공, 헌정 등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헌덕왕은 그들을 차례로 시중에 기용하며 조정을 장악하였다. 그 덕분에 헌덕왕 재위 10년까지는 조정이 비교적 안정된 편이었으나, 인사의 편중이 심한 탓에 불만 세력이 늘어났다. 특히 지방으로 방출당한 관리들의 불만이 팽배해져 지방 행정이 급격히 악화되었다. 그 때문에 재위 11년부터 지방 곳곳에 초적들이 일어났다. 헌덕왕은 모든 주와 군의 도독 및 태수에게 명하여 초적들과 전면전을 벌여 그들을 토벌하도록 했다. 이러한 어려운 상황 속에서 마침 당나라에서는 절도사이사도의 반란을 당하여 신라에 출병을 요청하였다. 헌덕왕은 816년에 김웅원으로 갑병 3만을 이끌고 반란의 진압을 돕도록 하였다.

국내외적 혼란이 계속되던 822년에는 집사시랑인 녹진이 충공을 찾아가 인재의 쓰임을 목재의 쓰임에 비유하여 인사 처리에 적절한 대책을 제언하였는데, 이때 녹진이 제시한 인사원칙은 왕당파에게 유리한 것으로 왕권에 반대하는 귀족에게는 불리한 것으로 이해된다. 이렇게 헌덕왕이 주도한 개혁정치에 반대하여 오던 귀족의 불만이 누적되어 822년 3월에 김헌창의 난이 일어난다. 선덕왕을 이어 아버지 김주원이 왕위에 올랐다면 헌창은 아마 왕좌에 앉아 있거나 왕위 계승자가 되어 있어야 했으나, 수년 동안 외직을 전전하게 되었고 그는 그런 현실을 비통해하며 일으켰다. 그동안 외직에서의 기반을 바탕으로 반군의 깃발을 들자 순식간에 무진, 완산, 청주, 사벌 등 네 주가 그의 수중에 떨어졌다. 그는 국호를 장안이라 하고 연호를 경운 원년이라 하여 스스로 왕을 청하며 반군을 이끌었다. 정부군의 진압 작전이 조직적으로 이뤄지면서 헌창의 부대는 곳곳에서 무너졌으며 헌창은 패배를 만회할 수 없음을 알고 자결하였다. 헌창이 죽자, 그의 부하가 그의 머리와 몸을 베어 각각 따로 묻어 두었다.

한편, 웅진성을 무너뜨린 정부군은 헌창의 무덤을 찾아내 그의 시신을 다시 칼로 베고, 그의 친족과 도당 239명을 죽였다. 하지만 헌창의 아들 범문이 겨우 목숨을 건져 825년 정월에 다시 부하들을 이끌고 북한산주를 공격했다. 그는 그곳에 도읍을 세우고 나라를 개국할 생각이었지만, 패배하여 처형되고 말았다. 헌덕왕도 그 이듬해 10월에 생을 마감했는데, 장지는 천림사 북쪽이다.

제42대 흥덕왕
혜충태자(제38대 원성왕의 장남)
성목태후 김씨 ․ 김씨, 초명은 수종, 개명은 경휘, 생년미상 ~ 836년 
재위기간 : 826년 10월 ~ 836년 12월. 총 10년 2개월 
부인 : 2명 
자녀 : 1남
정목왕후 김씨 - 능유

후비박씨

흥덕왕은 원성왕의 태자 인겸의 셋째 아들이며, 성목태후 김씨 소생으로 소성왕과 헌덕왕의 동복아우이다. 초명은 수종이었다가 왕위에 오른 뒤에 경휘로 고쳤다. 그는 형 헌덕왕과 함께 조카인 애장왕을 죽이는 데 가담하여 이찬이 되었고, 헌덕왕 11년(819년)에 상대등이 되었다. 그리고 822년에는 부군에 책봉되어 왕위 계승권을 확보한 뒤, 826년 10월에 헌덕왕이 죽자 왕위에 올랐다. 당시 헌덕왕은 왕자가 여럿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조정을 장악하고 있던 동생인 그를 부군으로 책봉하여 왕위를 계승토록 했다. 즉위하면서 흥덕왕은 정치개혁을 시도했는데, 827년에 명활전을 설치하였다(914년에 설치되었다는 설도 있다). 829년에는 원곡양전을 설치하였으며, 집사부를 집사성으로 고쳤다. 이때의 개혁은 김헌창의 난으로 어지러워진 왕실을 정리하고, 신라 왕실의 귀족세력을 억제시켜 왕권강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834년에 모든 관등에 따른 복색, 거기, 기용, 옥사 등의 규정을 반포하였다. 이 규정은 왕이 당시 사치풍조를 금지시키기 위하여 발표한 것이라 하지만, 그 내면에는 골품간의 계층구별을 더 엄격히 하고자 하는 귀족들의 요구가 바탕이 된 것이었다. 이 규정에서는 진골과 육두품을 비롯한 여하의 귀족이나 평민과의 차별을 더 뚜렷이 하고 있다는 점에서, 진골세력에 대한 배려를 깊이 깔고 있음을 짐작해 볼 수 있다. 그 밖의 치적으로 변방에 진을 설치한 것과 불교에 대한 관심을 들 수 있다. 우선 828년에 궁복(장보고)이 중국 당나라의 서주에서 소장으로 활약하다가 귀국하였으므로 1만 명의 병졸로써 지금의 완도에 청해진을 설치하게 하였다. 다음해에는 당은군에 당성진을 설치하였다. 그리고 827년에는 중 구덕이 당나라로부터 경전을 가지고 들어왔으며, 830년에는 도승 150명을 허가해주었다. 한편, 828년에는 사신으로 당나라에 갔다 돌아온 김대렴이 차 종자를 가지고 돌아오니 흥덕왕이 지리산에 심게 하여 성하게 되었다. 재위기간 중 사랑하는 아내와 자식을 잃고 병마에 시달리던 흥덕왕은 끝내 병마를 이겨내지 못하고, 재위 11년(836년) 12월에 죽었다. 능은 안강 북쪽 비화양에 마련되었으니, 그의 유언에 따라 정목왕후의 능에 합장된 것이다.

제43대 희강왕
포도부인 박씨 ․ 김씨, 제륭 또는 제옹, 생년미상 ~ 838년 
재위기간 : 836년 12월 ~ 838년 정월. 총 1년 1개월 
부인 : 1명 
자녀 : 2남
문목왕후 김씨 - 의종, 계명(제48대 경문왕의 아버지)

희강왕은 원성왕의 손자인 이찬 김헌정의 아들이고, 어머니는 포도부인 박씨이다. 이름은 제륭또는 제옹이라고 하며, 헌덕왕과 함께 애장을 제거하는 데 가담하여 권좌에 올랐다.
836년 12월에 흥덕왕이 후계자를 정하지 못하고 죽자, 신라 조정은 왕위 계승권 다툼에 휘말렸다. 흥덕왕의 종제 균정과 조카 제륭이 서로 파벌을 형성하여 왕위를 차지하려고 했던 것이다. 이에 시중인 김명과 아찬 이홍, 배훤백 등은 제륭을 받들고, 아찬 김우징과 조카인 예징 및 김양은 균정을 받들었다. 그들은 흥덕왕의 죽음이 임박하자, 각기 군대를 이끌고 대궐로 들어가 전쟁을 벌였는데, 그 와중에 김양이 화살에 맞아 부상을 입었다. 그 바람에 제륭파가 승세를 굳혔고, 균정은 살해되었으며 김양과 우징은 달아났다.

제륭은 왕위에 올라 우선 사형수 이외의 죄수를 모두 사면하여 자기의 왕위 계승을 전국에 알렸다. 또 아버지 김헌정을 익성대왕에, 어머니 박씨를 순성태후에 추봉했다. 또 자기가 즉위하는 데 큰 도움을 준 김명을 상대등에 임명하고, 아찬 이홍을 시주에 임명하여 조정을 장악했다. 그와 싸우다 패배하여 달아나 장보고에게 의탁하고 있던 우징이 아버지 균정이 살해된 사실을 백성들에게 알련 반역을 선동하고 있어, 왕정은 쉽게 안정되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 김명과 이홍은 서로 짜고 군대를 일으켜 희강왕의 측근들을 대거 죽여 버렸다. 이에 겁을 먹은 희강왕은 자기도 살해당할 것을 염려하여 궁중에서 목매어 자살하니, 이때가 재위 3년째인 838년 정월이었다. 능은 소산에 마련되었다.

제44대 민애왕
김충공(제38대 원성왕의 손자)
귀보부인 박씨 ․ 김씨, 명, 생년미상 ~ 839년 
재위기간 : 838년 정월 ~ 839년 윤 정월. 총 1년 1개월 
부인 : 1명 
자녀 : 기록 없음
윤영왕후

민애왕은 원성왕의 손자 대아찬 충공의 아들이며, 귀보부인 박씨 소생이다. 이름은 명이며 헌덕왕 대로부터 여러 벼슬을 거쳐 희강왕을 보좌한 덕으로 상대등에 임명되었다가, 838년 정월에 시중 이흥과 함께 반란을 일으켜 왕위를 찬탈했다. 왕위에 오른 그는 아버지 충공을 선강대왕, 어머니 귀보부인을 선의태후로 추존하고 김귀를 상대등, 헌중을 시중으로 삼았다.

흥덕왕이 죽고 그 사촌동생인 균정과 5촌 조카인 제륭이 서로 왕위를 다투게 되었을 때, 시중인 김명과 아찬 이홍, 배훤백 등은 제륭을 받들고 아찬 우징과 조카 예징 및 김양은 균정을 받듦으로써, 한때 궁궐에서 서로 싸우게 되었다. 이 싸움에서 균정은 전사하고 김양이 화살을 맞아 우징 등과 더불어 청해진의 장보고에게 도망하여 의탁하였다. 싸움에 이긴 제륭이 즉위하였으나, 불만을 가진 김명이 이홍과 같이 다시 난을 일으키자, 희강왕은 자진하고 김명이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왕위에 오른 김명(민애왕)은 다시 균정계 세력의 도전을 받게 되었다. 838년 청해진에 의탁하고 있던 우징 등이 장보고의 군사 5,000을 이끌고 민애왕을 토벌하기 위하여 진격해왔다. 김양, 염장, 장변, 정년, 낙금, 장건영, 이순행 등이 우징을 받들고 있었다.

이해 12월 민애왕은 김민주 등을 파견하여 무주 철야현(지금의 나주 부근)에서 토벌군을 맞아 싸우게 하였으나 패배하고, 그 다음해 정월 달구벌(지금의 대구)에서의 싸움에서도 대패하였다. 민애왕은 청해진 군대가 밀려오자, 궁궐 서쪽 교외에 몸을 숨기고 있다가 병사들에게 살해되었다. 이때가 839년 정월 22일이니, 왕위에 오른 지 불과 13개월 만이었다. 장지는 알 수 없다.

제45대 신무왕
김균정(제38대 원성왕의 손자)
진교부인 박씨 ․ 김씨, 우징, 생년미상 ~ 839년 
재위기간 : 839년 윤 정월 ~7월. 총 6개월 
부인 : 1명 
자녀 : 1남
정종왕후 - 경웅(제46대 문성왕)

신무왕은 원성왕의 손자 균정의 아들이며 진교부인 박씨 소생으로 이름은 우징이다. 헌덕왕 14년인 822년에 김헌창의 난이 일어나자 대아찬의 벼슬을 받고 아버지 균정과 함께 토벌대를 이끌었으며, 흥덕왕 3년인 828년에 시중에 올랐다. 그리고 831년에 시중에서 물러났다가 3년 뒤인 834년에 다시 시중에 기용되었다. 835년에 아버지 균정이 상대등에 오르자, 부자가 함께 재상과 시중에 있을 수 없다는 이유로 물러났다. 836년에 헌덕왕이 죽자, 아버지 균정을 왕위에 앉히려 했으나, 재종 제륭(희강왕)에게 패배하여 청해진 장보고에게 의탁하였다. 838년에 희강왕의 김명(민애왕)에게 살해되고, 김명이 왕위에 오르자, 장보고 군대의 도움을 받아 김명을 제거하고 왕위에 올랐으나, 이때가 839년 윤 정월이었다.

신무왕의 즉위는 원성왕의 큰 아들인 인겸계와 균정계 세력의 대립에서 균정계가 승리하였음을 의미한다. 균정계가 승리한 데에는 청해진 세력과 이미 거세된 김주원계의 후손인 김양의 도움이 컸다. 즉위와 동시에 할아버지 예영을 혜강대왕, 아버지 김균정을 성덕대왕, 어머니 진교부인 박씨를 헌목태후에 추존하고, 아들 경웅을 태자로 삼았다.

신무왕은 즉위한 지 반년도 못 되어 죽었기 때문에 별다른 경륜을 펴지 못하였으나, 다만 그는 장보고나 김양에 대하여 배려하고 있었던 듯하다. 839년에 장보고를 감의군사로 삼아 식읍 2,000호에 봉하였다. 반면, 장보고도 이에 그치지 않고 딸을 왕비로 세우려 하였는데 이것은 청해진 세력이 강대해졌음을 알려준다. 신무왕은 장보고 등 왕권에 압력을 가하는 세력을 제압하여야 하는 과업을 앞두고 죽었다. 이때 죽위년 7월이었다. 능은 제형산 서북에 있다.

 

 

Posted by 원주유